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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는 사소한 말 한 마디였다.
“거 반장님이 놔주셔야 그 놈이 장가를 가죠.”
태오가 팀원들과 잘 지내는지 궁금해 몇 마디 물었던 대화 끝에 저런 말이 나왔다. 왕윤은 당황해서 막 입에 대려던 자판기 커피를 치웠다.
“내, 내가 뭘?”
그가 되물었다.
“나 태오 안 잡고 있고 그런 관계도 아냐, 결혼을 일찍 했음 나 태오만한 아들이 있었을...”
“효자는 장가 못 간다잖아요.”
왕윤답지 않은 과잉반응을 부하는 웃어 넘겼다.
“효도보다 더하죠, 주말마다 반장님 댁에 가질 않나.”
임주임이 말했다.
“그 녀석 성격은 그래도 껍데기는 반반하니까, 소개팅 같은 것도 들어오고 그러거든요?”
“사람한테 껍데기가 뭐야.”
“네, 외모요, 외모. 암튼 얼마 전에도 다른 청 강력계 순경 하나가 파견 왔다가 홀딱 반한 것 같던데 소개팅 해볼 테냐고 떠보니까 주말엔 선배네 가봐야 한다고 거절해버리던데....”
“그랬어?”
왕윤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럼 안 되지, 안 그래도 바빠서 연애할 시간도 없는 동네인데.”
그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번엔 오지 말라고 태오한테 말해놓을 테니까 추진해봐, 그 소개팅.”
“네, 아버님 허락까지 받다니 이거 소개팅 아니고 선인가?”
“아버님 아냐.”
“아까는 아들이라면서요.”
알람이 울렸다. 넉살 좋게 웃던 임주임이 휴대폰을 보더니 고개 꾸벅 해보이고 가버렸다. 왕윤은 어쩐지 안도하며 커피를 마셨다.
“허 참, 그 꼬맹이가 벌써 소개팅 같은 걸 할 때가 되었나.”
법적으로 성인이고 경찰까지 되었지만 왕윤은 아직도 태오를 보면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곤 했다. 무서웠을 텐데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의연하게 있다가 밧줄 풀어주고 이젠 안전하다고 해주자 그제서야 울어버리던 고집쟁이 꼬맹이가.
실상 여전히 고집쟁이 꼬맹이이긴 했다. 그 힘든 공부 열심히 해서 수석으로 졸업하고, 선배들한테도 한 마디도 안 지고 따박따박 대들고. 태오가 옳은 경우가 실제로 많으니 무조건 그러지 말라고 할 수 만도 없어서 그때그때 싸우지 말라고 중재하고 있긴 하지만 왕윤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 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태오는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의견이 갈릴 때 그가 먼저 물러나는 건 상대가 왕윤일 때뿐이었다.
특별하게 취급받는 게 좀 기쁘면서도 이러다 태오가 엇나갈까봐 왕윤은 걱정하고 있었다. 태오가 항상 옳지 않듯이 왕윤 역시 언제나 옳을 수는 없었다. 그를 맹목적으로 뒤쫓다 태오가 어떻게 잘못되기라도 할까봐 왕윤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애를 하면 좀 여유가 생길까.’
자신은 그랬다. 꼭 연애를 하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이런 게 아니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사람은 조심을 하게 된다. 자신도 젊었을 땐 꽤나 날뛰었다. 세상 사는 요령을 터득하고 가정을 이루면서 다소 유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세상의 악을 모두 없앤다는 불가능한 꿈을 마음에 품고 있기도 했다.
‘이런 유치한 면은 태오가 닮으면 안 되는데 말이야.’
좀 까칠해도 똑똑하고 착한 녀석이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우선은 뭔가 큰 사건이 터져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기 전에 소개팅을 시켜야 한다.
‘소개팅이라....’
태오가 여자를 사귀는 모습이 잘 상상이 안 되었다. 다정하지 못한 성미야 무뚝뚝한 남자가 취향인 여자도 있을 테니 괜찮겠지만 너무 목표 지향적인 인물이라 과정이 중요한 데이트를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데이트 나갈 태오에게 해줄 수 있는 충고를 이것저것 생각하다 왕윤은 문득 쓸쓸해졌다. 태오에게 애인이 생기고 결혼까지 하게 되면 아무래도 지금처럼 가깝게 지내기는 어려울 터였다. 시간만 나면 집에 와서 같이 대화하고 초선이와 놀아주는 것도 더는 그럴 수 없을 거고 술 한 잔 하자고 가볍게 불러내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하하, 이거 뭐야. 빈둥지 증후군인가?’
입안에 고인 커피가 어째 달지 않았다.
‘이제 40대 들어선지 얼마나 됐다고 갱년기 같은 기분이야. 정신차려라, 왕윤. 이러다 초선이 시집은 어떻게 보내려고 그래.’
초선이 시집보낼 생각을 하니 절로 입이 종이컵을 씹었다. 20년도 더 남은 일이라고 되뇌며 왕윤은 남은 커피를 단번에 마셔버리고 일로 복귀했다.
왕윤은 시계를 보았다.
내키지 않아하는 태오를 달래 소개팅에 가라고 약속을 잡아주었다. 설령 그 김순경인가 하는 사람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만나보는 자체가 경험이 된다고 설득해서 등 떠밀어 보냈다.
‘태오는 잘하고 있을까.’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대놓고 말해서는 안 되고 듣기 좋게 돌려 표현해야 하며 그런 것도 대민 봉사를 하는 경찰로서 필요한 덕목이라고까지 말해놨으니 여자를 울리거나 뺨을 맞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어째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 애 취급도 정도껏 해야 하는데.’
자신이 태오에게 유난히 무른 건 왕윤도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했으면 호통을 쳤을만한 일도 태오가 저지르면 엄한 얼굴로 타이르는 선에서 그치곤 했다. 그가 타이르면 심하게 말 안 해도 심하게 혼난 것 같은 표정으로 정말 반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시 너무 물렀다.
원래 경찰이 범죄 피해자와 이런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 안 된다. 경찰관도 사람이고 남의 인생을 책임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범죄를 해결하는 이상 피해자의 인생에 관여해선 부작용만 생겼다.
그런데도 왕윤은 태오를 그렇게 냉정하게 밀어내지 못했다. 언제나 집안에서 붕 뜬 듯 외로워 보이는 아이가 가엾어서이기도 했고 악과 싸우겠다는 의지에서 자기 옛날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애가 경찰대를 졸업해 자길 따라와 줬을 땐 기뻤다. 초선이와 사이좋은 것도 기특했다. 이제는 태오도 그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첫 소개팅 나간 게 잘 되어가나 걱정하는 것도 너무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왕윤이 다시 시계를 보았다.
‘슬슬 저녁을 먹어야 하나....’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왕윤이 놀라 현관으로 갔다.
‘누군지?’
왕윤의 집에 오는 사람이야 뻔했다. 하지만 오늘은 오지 말라고 했는데.
문을 열자 예상 그대로의 인물이 있었다.
“태오?”
“죄송합니다, 선배님. 일껏 자리를 마련해주셨는데.”
“아니 자리를 마련한 건 내가 아니고.... 들어와라.”
왕윤은 우선 태오를 집안으로 맞아들였다.
“왜, 소개팅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뇨, 꼭 그런 건....”
“상대는 어땠고?”
“그냥 좀 귀여운 타입이었어요. 잘 웃고.”
“그런데?”
태오가 눈을 피했다.
“그냥.... 전 좀 더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냐.”
왕윤은 내심 안도했다.
“그래 그런 것도 좋지. 아무래도 감정적으로 힘든 일이니까, 그런 위안 받을 데가 있으면.”
“네.”
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을 만나봐야 자기 취향도 알 수 있는 법이지. 수고했다.”
그가 태오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앞으로 더 만나다보면 잘 맞는 사람 찾을 수 있을 거야.”
“더요?”
“그래. 설마 한 명 만나고 끝날 거였어?”
“아...”
사람 만나는 게 어지간히 귀찮은지 미간을 모으면서도 자기에게 대놓고 싫다고는 못하는 태오가 어쩐지 귀여워서 왕윤은 무심코 태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차, 애 취급 덜 한다 해놓고...’
그러나 그가 그만두기 전에 태오의 표정이 풀렸다. 그가 안심한 듯 웃으며 왕윤의 손길에 고개를 기댔다.
‘아.’
왕윤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날 좋아하는구나, 이 애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머리 쓰다듬을 때 고개 좀 기울인 것 가지고 뭘 확대해석하냐고 왕윤은 스스로를 꾸짖었다. 나이차도 나이차지만 자기가 자라는 걸 지켜봤던 아이 상대로 이게 무슨...
“...선배?‘
“응, 아니. 저녁이나 먹자.”
왕윤이 멈춰있던 손을 거두었다. 돌아서서 부엌으로 가는 발걸음을 너무 서두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맙소사.’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끝에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가 왜....’
태오가 그를 좋아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쉽게 어른을 동경하니까. 둘의 첫 만남과 그 이후 왕윤이 태오 앞에서 본받을만한 어른으로 있기 위해 노력했던 걸 생각해보면 그건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왜 자기가 동요한단 말인가.
‘하하....’
지금 설거지 해야 할 것도 없는데도 왕윤은 싱크대에 물을 틀었다.
‘미쳤구나, 나.’
태오는 아이었다. 이제 나이는 성인이지만 왕윤에게는 아직 보호해주고 싶은 아이였다.
그런데 그가 자신에게 기댔을 때 기뻤다. 이대로 계속 자기에게 기대주길 바랐다.
태오를, 그가 주는 호의와 안정감을 욕심냈다.
‘이건 안돼. 동경은 동경이지, 그걸 빌미로 그 애에게 사랑을 요구해선.’
찬물에 손을 담그고 왕윤이 심호흡했다. 두어 번 반복하자 머리가 맑아졌다.
마음은 몰라도 행동은 통제할 수 있었다. 태오가 자기 삶을 살도록 천천히 물러나주면 되었다. 어른답게, 보호자의 역할에 충실해서.
왕윤은 막 깨달은 마음을 작게 접어 구석에 잘 쑤셔 넣었다. 버리지는 않고.
태오의 다음 소개팅 상대를 고르기도 전에 관할에 큰 사건이 터졌다. 감정 문제로 고민하는 것 보다는 강도 사건이 훨씬 마음이 편했으므로 왕윤은 기꺼이 그 일에 매달렸다.
곰돌이 가면을 쓴 강도단이라니 웃기는 놈들이지만 그 피해상황은 웃기지 않았다. 그놈들은 벌써 네 번의 범행을 간단히 성공시키고 포위망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고가의 보석을 노리는 점을 고려해 보석 암거래 쪽에서도 덫을 놓았지만 아직은 입질이 없었다.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CCTV에 강도단의 리더로 보이는 사람이 잡혔는데 곰돌이 가면이 아니라 괴상한 모자에 갑옷을 입고 기관총을 들고 있었다. 이상한 옷이야 컨셉이라지만 기관총을 난사해 매장을 부수는 장면이 찍혔음에도 현장에서 총알이 발견되지 않은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얼음으로 총알을 만들어 쏘고 나면 녹아버린다던가 하는 소설 같은 이야기도 아닐 텐데.’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는 것 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적어도 좀 상식적인 범행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투덜대며 왕윤은 이번 사건 보고서를 읽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그냥 부하 놈들일 망정 범인도 여럿 잡아넣었고 보스가 누군지도 확인했다. 결국 동탁은 놓치긴 했지만 이 정도 성과가 어디인가. 이번에도 태오의 단독 행동을 엄히 야단치기는 다 틀렸다고 생각하며 왕윤이 미소 지었다.
‘좀 못해야 혼도 내지, 혼자서 이 수를 다 때려잡고...’
아빠의 마음으로 흐뭇하게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왕윤이 마지막 부분에서 멈칫했다. 그가 사무실을 나왔다. 태오가 보이지 않자 그가 현장에 있던 다른 형사를 불러 물었다.
“예, 반장님.”
“보고서가 좀 이상해서 그러는데... 그놈이 백화점 옥상으로 건너뛰어 도망쳤다고?”
“그, 그게....”
형사가 우물거렸다.
“저도 보고도 못 믿겠습니다만 그게 그러니까....”
“정말 그랬다고?”
“네.”
“6차선 도로 건너편인데? 직선 거리만 따져도 20미터 정도는 될 텐데?”
심지어 백화점은 현장 건물보다 높이가 높았다.
“그.... 태오 녀석이 그놈하고 싸웠으니 저보다 잘 알지 않을까요?”
결국 형사가 꽁무니를 빼었다. 왕윤은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태오에게 묻자니 안 그래도 동탁하고 싸우다 멍투성이가 된 애한테 보고서가 이상하다고 추궁하고 싶지 않아서 왕윤은 일단 그 백화점 CCTV부터 확인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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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물실로 통하는 복도를 걷다 왕윤은 휙 뒤로 돌아섰다. 발소리도 없이 뒤따라온 사람이 발을 멈추고 그를 마주했다.
왕윤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경찰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 이상했다. 빨간색 장식이 달린 하얀 코트에 머리카락에도 군데군데 붉은색 브릿지를 넣었고 심지어 붉은색 눈 화장까지 했다.
“감이 좋으시군요.”
막 ‘뭐야 이거?’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 상대가 입을 열었다.
“동탁의 정체가 궁금하시겠지요?”
다시 뭐 하는 놈이냐고 물으려다 왕윤이 입을 다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지?”
마침내 왕윤이 물었다.
“동탁과 아는 사이인가? 이.... 이상한 일들이...”
그가 고개를 저었다.
“넌 누구 편이냐.”
“왕윤님의 편입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이상한 사람은 얼굴 같은 게 그려진 육각형 패와 그게 끼워짐직한 슬롯이 있는 밴드 같은 것을 내밀었다.
“3백년에 한 번, 드림배틀이 열립니다.”
그가 뜬금없는 설명을 시작했다.
“전설 속 영웅의 이름을 지닌 사람들이 영웅패의 군주가 되어 자신의 꿈을 걸고 서로 싸우는 겁니다. 승리자의 꿈은 세계를 유지하는 에너지가 되고 그 사람은 소원을 이룹니다.”
왕윤은 눈만 굴려 주위를 다시 보았다. 익숙한 경찰서 내 복도였다. 다시 정면을 보자 여전히 그 이상한 사람이 서서 자기를 보고 있었다.
“그...게 나와... 아니 동탁과 무슨 상관이 있는데.”
“동탁 역시 군주이고 영웅패를 갖고 있습니다. 그 힘을 강도짓에 쓰는 겁니다.”
“꿈을 걸고, 강도짓을 한다고?”
그건 이 미친 소리 중에선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꿈이나 소원이라 하면 듣기엔 좋지만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해로운 꿈은 분명 있고 그런 꿈을 꾸는 자들이 흔히 범죄자가 된다. 동탁이 세상의 모든 보석을 훔치겠다거나 하는 꿈을 꾸는 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에 비하면.
“너... 너는 누구냐.”
“제 이름은 사마의. 드림배틀을 돕는 신선입니다.”
“배틀을 돕는다고? 진행 요원 같은 건가?”
말하고 왕윤은 사마의가 내민 물건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건...”
“레전드 체인저와 영웅패 여포. 영웅의 이름을 지닌 왕윤님이 드림배틀에 참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누가 그런데 참전한다고 그래!”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왕윤이 급히 입을 막으며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폈다.
“지금이 대화하기 적당치 않으시면, 후일 집으로 찾아갈까요?”
“그래.. 아니! 안 돼, 절대 집으로는 찾아오지 마.”
소리치고 왕윤이 심호흡을 했다.
“오늘 저녁, 퇴근하고 난 뒤.... 아, 그래.”
왕윤이 재빨리 마음을 정했다.
“오늘 낮에 동탁이 태... 경찰과 싸웠던 현장 알고 있나?”
사마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서 보지. 설명 들을게 아주 많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때 뵙지요.”
붉은 빛이 번쩍이고 사마의가 사라졌다. 왕윤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 옆 벽에 기댔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꿈을 꿨나 라고 생각하기엔 자기 무의식이 이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무튼 방금 그 사마의라는 신선...이 정말 동탁과 연관이 있다면 설명 정도는 들어둬야 했다. 그 드림배틀에는 참전하지 않더라도.
‘꿈을 걸고 싸운다고.’
이기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럼 진다면?
‘그런 게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일이라고? 대체 이 세상 어떻게 생겨먹은 거야?’
동탁은 정말로 부하 둘을 들고 백화점 옥상까지 뛰어넘었고, 태오와 싸운 현장에는 거대한 발톱 모양으로 콘크리트가 패어 있었다. 이런 힘은 경찰이 보통 방법으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왕윤은 영웅이 아니라 경찰이었다. 그러나 경찰로서는 동탁을 잡을 수 없었다. 만약 동탁이 자기 일을 방해하는 데 성공한 경찰 하나와 또 싸우고자 한다면 이번에는 왕윤이 태오를 구할 수 없었다.
왕윤은 체인저와 여포패를 받아들었다.
“내가 걸 꿈은.... 정의로운 세상. 악인들이 뉘우치고 갱생하여 더 이상 범죄가 없게 되는 것이다.”
허황된 꿈이었다. 절대로 이루어질 리 없는, 망상에 가까운 꿈.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그가 동탁을 무찌른 뒤 다른 누군가에게 패해서 탈락하게 되어도 조금 더 포기한 어른이 될지언정 왕윤은 왕윤으로 남을 수 있다. 초선이와 태오와 행복하게 사는 꿈은 안전할 수 있었다.
“군신일체.”
여포의 강력한 힘이 그를 감쌌다. 마지막까지 반신반의했지만 이제 더 이상은 의심할 수 없었다. 드림배틀도, 레전드 히어로도 진짜 있었다. 그리고 이 힘을 범죄에 이용하려는 악당들도.
“레전드 히어로라고. 그러나 나는 경찰이지, 영웅이 아니다. 드림배틀보다는 범죄자인 군주를 탈락시켜 체포하는 걸 우선한다.”
왕윤이 다짐했다. 그의 등 뒤에서, 사마의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경찰 모르게, 경찰보다 먼저 동탁과 싸워 그를 탈락시키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공원에서 괴상한 옷차림을 한 미친놈이 사람들에게 총을 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오자 왕윤은 위험한 상황이니 일반 형사가 아닌 기동대를 출동시키라고 지시하고 자기가 먼저 뛰쳐나갔다.
서둘러 변신을 하고 달려간 그 곳에 동탁이 있었다.
태오를 밟아 누른 채로.
분노로 눈 앞이 하얗게 변했다. 아니 그래도 어떻게 이런 흉악한 도끼창을 사람한테 휘두르지..라고 걱정했던 것도 무색하게 왕윤은 한달음에 달려가 동탁을 반동강 낼 기세로 붉게 달아오른 낫과 같은 창날을 휘둘렀다.
“으어어!”
행인지 불행인지 동탁은 반동강이 나는 대신 멀리 날아가 처박혔다. 그자가 왕윤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적의 공격이 실체가 없는 에너지탄인 걸 깨닫고 왕윤은 현장에 총알도 탄피도 남지 않았던 이유를 이해했다. 그리고 그 공격이 자신에겐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실도.
‘최강의 영웅패라더니, 진짜로 강하구나. 여포.’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영웅패의 기색이 좋아하는 게 느껴졌다. 칭찬 받고 좋아하다니 앤가 싶고 어째 태오가 연상되었다.
태오가 숨을 헐떡이며 몸을 추스르는 걸 확인하고 왕윤은 동탁에게 다가갔다.
뭔가 수작을 부리려던 동탁을 다시 한 번 쳐서 날려 보내고 도망치는 걸 쫓았다. 그러나 얼마 쫓지도 못해 경찰차 사이렌이 들렸다.
이 꼴로 부하들을 맞을 수는 없으므로 왕윤은 동탁 추격을 포기하고 변신을 해제했다. 도착한 기동대에는 동탁이 경찰들이 도착하자 도주했으면 도주 방향은 저쪽이라 알리고 그가 현장으로 돌아갔다.
“그런 힘이 있으면서, 남은커녕 자신도 지키지 못한다고?”
태오는 아까 그의 곁에 쓰러져 있던 청년과 같이 있었다. 태오에게 다가가 괜찮냐고 하려던 왕윤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내게 그런 힘이 있었으면 이런 일 일어나지 않았어!”
왕윤은 체인저와 여포패를 주머니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태오는 이 힘에 대해 알아선 안 된다. 왕윤이 참전했다는 건 더 알아선 안 된다.
안 그래도 왕윤 선배 같은 영웅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애였다. 그가 이렇게 된 걸 알면 자기도 참전하려 들 게 분명했다. 자기가 할 자격은 없는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왕윤은 태오가 힘을 탐해 이런 이상한 일에 뛰어들지는 않았으면 했다. 위험에선 최대한 멀리 떼어놓고 싶었다.
‘이번에야 말로 혼을 내야겠어. 동탁 관련 일에서도 빼버리자.’
태오가 낙담할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지만 이런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태오를 징계할 이유와 징계 수위를 이것저것 생각하다 왕윤은 자기 친구와 함께 떠나는 녹색 옷의 청년을 주목했다. 좀 멍청해 보이지만 저쪽도 군주일게 분명했다.
‘아, 그래. 저놈도 태오하고 떼어놔야지.’
너의 꿈은 뭐냐.
모두가... 행복한 세상.
기절한 청년을 앞에 두고 왕윤은 난감해했다. 일단 나쁜 놈이 아닌 건 확인했고 그건 다행인데 이제 이 사람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야아, 이 나쁜 놈 같으니! 주군에게 손대지 마라!”
눈앞으로 주황색 육각형이 폴짝 뛰어올랐다.
“응?”
“이 관우! 패배할지언정 주군을 버리진 않는다! 우릴 노려도 소용없으니 차라리 베어라!”
초록색 육각형도 쬐끄마한 은색 창을 휘둘렀다.
“.......말, 할 수 있네?”
자기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 그럼 우릴 말도 못하는 짐승 취급했냐!”
주황색이 삿대질했다.
크와아아아앙!
왕윤의 의사와 상관없이 여포가 표호 했다. 이거 곤란하겠다 싶어 왕윤은 일단 변신을 풀었다.
“쿠카!”
여포가 역시 쬐끄마한 은색 창을 들고 폴짝 뛰어내려 두 영웅패에게 덤볐다. 왕윤은 서둘러 여포를 집어 들었다.
“안 돼, 싸우지 마.”
“쿠카!”
“자, 착하지.”
손으로 꽉 쥐고 강제로 머리를 토닥였다. 몇 번 낑낑대다 여포가 축 쳐젔다.
“어....”
초록색과 주황색이 왕윤의 눈치를 살폈다. 왕윤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해치거나 하지 않아. 너희... 주군이라고 부르니? 이 청년이 나쁜 사람이 아닌 건 확인했고.”
“아, 그런 거요?”
주황색 패가 먼저 무기를 내렸다.
“난 장비요. 반갑수다.”
“이보게 장비! 적 군주에게 어찌 그리 쉽게 손을 내미나 그래. 우릴 빼앗으려는 수작이면 어쩌려고.”
“여포가 충분히 강해서 별로 너희를 빼앗을 필요는 없는데.”
“쿠카.”
왕윤의 말에 여포가 뻐겼고 관우 장비는 여포를 노려보았다. 왕윤은 그만 웃고 말했다.
“그래... 너희가 이렇게 나설 정도로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인가보구나.”
“물론이오. 세상 모두를 행복하게 하겠다는 큰 뜻을 품은 훌륭한 분이지.”
관우가 신나서 말했다.
“그래 그것 참 나만큼이나..... 좋은 꿈이구나.”
허황된, 이라고 말하려다 왕윤은 말을 고쳤다. 이 영웅패들은 마치 아이 같아서 이들 상대로 동심을 해칠만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댁의 꿈은 뭔데 그러슈?”
장비가 물었다.
“일단은 장소부터 옮기자.”
왕윤이 유비를 부축해 일어났다.
“너희 주군을 언제까지 맨땅바닥에 방치할 수도 없잖니.”
“진짜 좋은 분이셨구만!”
두 영웅패가 신이 나서 왕윤의 어깨에 올라앉았다. 일이 예상치 못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하며 왕윤은 유비를 집으로 데려갔다.
초인종이 울렸을 때 왕윤은 마음속 깊이 안도했다. 오지 않는 줄 알았다. 적어도 오늘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태오의 안전을 위해서였고 실제로 그가 큰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전에 없이 단호하게 정색을 하고 꾸짖었다. 실망했다고까지 했다. 임무에서도 제외해버렸다. 그런데도 이렇게 또 찾아오다니.
‘너는 왜 이렇게까지 나를 좋아하는 거니?’
묻고 싶었다. 도대체 내가 뭐가 그리 대단해서 네가 자존심마저 굽히고 이렇게 매달리느냐고.
왕윤은 묻지 못했다. 태오 입으로 좋아한단 소리를 정말로 들으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염치도 없이 태오를 끌어안고 팔 안에 가두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의 역할은 태오를 보호하는 것이지 그를 구속하는 게 아니었다.
‘역시 너한테는 이런 얘기 할 수 없어.’
그래서 왕윤은 유비와 둘이서만 동탁을 칠 준비를 했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어정쩡한 상태로 알면서 모르는 척 지낼 수는 없었다. 그러니 동탁을 배틀에서 탈락시키고 체포한 다음, 태오에 대한 위협이 사라진 다음에 차분한 마음으로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받아줄 수는 없더라도 외면만 하고 있어선 태오도 계속 제자리걸음일 테니까.
다행히 유비는 좋은 사람이었다. 어리고 순진하지만 꺾이지 않는 기세가 있었다. 그를 보며 왕윤은 자신이 언젠가 탈락하게 되면 꿈을 유비에게 의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라면 악한 자도 당연히 없을 것이다. 기왕 허황된 꿈이라면 보다 범위가 넓은 쪽이 실현되는 게 좋았다.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상이라니 잘 상상이 안 되긴 하지만 자기가 변신히어로가 되어 인외의 힘을 휘두르게 되리라고도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나중 일은 나중에. 지금은 동탁을 체포하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초선이 납치당했다.
왕윤은 두 가지 꿈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총에 맞고 쓰러지면서, 왕윤은 태오가 전설 속의 이름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태오의 슬픔을 덜어줄 만한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미안하단 말 한 마디가 그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태오가 유비를 의지하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약속도 못 지키고 죽는 자기 대신 유비와 같이 협력해서 정의를 수호하고, 유비가 꿈을 이루어 그도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자기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지만 또 다행이기도 했다. 두고 죽을 거라면 모르게 하는 편이 나았다.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사랑한다, 태오야.’
Notes:
쓰다보니 말인데 사마의가 처음부터 태오를 찍었을 리는 없잖아요. 실제론 사마의가 처음에 점찍은건 왕윤인데 순순히 타락할 인간이 아님을 깨닫고 장각을 시켜 초선을 납치해 위기로 몰아넣었다가.... 본편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면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Lady_Rue on Chapter 2 Fri 10 Nov 2017 01:06PM U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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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cstans on Chapter 2 Sat 11 Nov 2017 03:56AM U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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