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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 작업장 (4)
“네가 지금 어르신 앞에서 그렇게 거들먹거릴 처지냐? 세상 둘도 없는 호구 마스터야!”
“이것 봐, 또 멋대로 기어오르지! 윗사람이 걱정을 해 주면 동생답게 순순히 말을 들으라고!”
“윗사람 좋아하시네! 지금 누가 할 소리를! 넌 아직 640년은 이르다, 이 애송아!”
“어어, 이성진! 이거 당장 놓지 못해!?”
성진과 로건이 차례대로 서로에게 헤드록을 걸고, 그 와중에 약간의 거친 언쟁이 오가는 등 애로 사항이 있었다.
하지만 곧 상황은 정리되어, 두 사람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착실하게 작업장 조사에 착수했다.
“……!?”
오로지 그 과정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은 19호만이, 멍청한 얼굴로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을 뿐.
-내 황자님께서 이렇게 유치할 리가 없어!?
그의 창백한 얼굴에 드러난 적나라한 감정이었다.
19호는 방금, 지난 수년간 자부심을 갖고 모시던 점잖은 상전의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목도한 것이다. 어찌 충격받지 않을 수 있으리!
“음? 자네 어디 불편한가? 지금 치료해 줄 테니, 편하게 말해보게.”
“…아, 아닙니다. 저하…….”
불쌍한 19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주뼛거리며 헛간의 한구석으로 기어들어갔다.
“흠…….”
낡은 탁자와 텅 빈 바구니 몇 개. 부서진 잡동사니들과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말라비틀어진 풀잎 조금.
‘작업장’은 일견 특별한 구석은 없어 보였다.
“역시 모조리 철수한 것 같네. 하긴, 증거를 남겼을 리가 없나…….”
성진이 실망하여 중얼거리자, 로건이 멀쩡한 풀잎 몇 개를 주워들며 물었다.
“19호. 이건 무슨 식물일까? 농가에서 흔히 재배하는 건지 혹시 알아볼 수 있겠나?”
“네, 저하.”
19호가 풀을 건네받아 잠시 코에 가져다 댔지만, 이내 얼굴을 약하게 찌푸렸다. 헛간 전체가 벨린다의 피비린내로 진동하는 중이라, 후각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
“허브의 일종 같습니다만, 향이 무척이나 약한 편입니다. 적어도 델크로스에서 흔히 나는 종류는 아닌 듯합니다. 일단은 가져가서 따로 조사를 해 보겠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법 시간이 흘러, 어두운 하늘 한편에서 어슴푸레하게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좁은 헛간을 빠짐없이 조사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역시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저하. 이쯤에서 슬슬 황궁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떨지요?”
하지만 로건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그는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기감을 한계까지 한껏 곤두세웠다.
“그렇지 않다. 분명 이곳에서 [마물]과 관련된 뭔가가 일어났어. 마기와는 다른 그 독특한 느낌이, 아직 공기 중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래? 그냥 기분 탓 아닐까?”
성진은 그 의견에 회의적이었다.
누구보다도 마물의 정기에 민감하다 자부하는 자신조차도, 아직까지 그리 특별한 것을 느끼지 못하는 중이었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성진의 눈에 부서진 자기 조각 하나가 들어온 것은.
어쩐지 묘한 예감에 사로잡혀, 성진은 홀린 듯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순간-
“……!?”
성진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작은 조각에, 미약하게나마 마물의 정기가 남아 있는 것을.
“아, 거기였구나! 너무 희박해서 위치를 좀처럼 가늠하기 힘들었는데.”
로건이 반색하며 다가온다.
“이건 뭐지?”
“뭔가를 담고 있던 그릇인가 봐. 이 조각만으로는 정확한 걸 알 수 없지만.”
슬쩍 자기 면을 쓸어보니, 먼지 같은 가루가 조금 묻어 나온다. 성진의 짐작대로라면 이것이 마물, 아니 로페룸 알의 가루일 터.
작업장에 대해 증언했던 죄수가, 밀로 상단주로부터 건네받아 작업장으로 옮겼다는 물건이 바로 이것이리라.
“어쨌거나 여기가 밀로 상단의 ‘작업장’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듯하군.”
“그래, 로건. 날이 밝으면 절차상일 뿐이더라도, 일단 공식적인 조사를 진행하는 게 좋겠어.”
성진은 그렇게 대꾸하며 머릿속의 마왕을 불렀다.
‘어떠냐? 마왕아. 이 가루가 로페룸의 알이 맞아?’
그러자 마왕 놈이 잠시 고심하더니,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흠. 집중해서 보면 마물의 정기가 조금 느껴지긴 하는데? 하지만 이게 정말로 로페룸의 알인지, 아니면 다른 마물의 흔적인지는 잘 모르겠어. 워낙에 남아 있는 양이 적으니까.]
왜 아니겠는가. 티끌 같은 부스러기만 묻어나는 정도인데, 이걸로 어떻게 마물의 종류를 특정한다는 말이야?
여기서 마물의 기척을 찾을 바에야, 차라리 내…….
움찔!
순간 찜찜한 사실 하나를 떠올린 성진이,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로건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이성진?”
로건이 의아한 듯 눈을 끔벅인다.
“어… 로건. 혹시나 싶지만, 너 말이지…….”
“응?”
“이 정도 소량의 가루를 감지할 정도잖아? 그렇다면 만일, 근처에 조금 더 많은 [마물]의 흔적이 있다면, 아마도 더 쉽게 그걸 눈치챌 수도 있겠지?”
“음? 아아. 난 또 뭐라고.”
잔뜩 긴장한 성진을 향해, 로건이 피식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네가 늘 품에 소지하고 다니는 것 말이지? 그 약차에 관해서라면 이미 알고 있어. 마물의 삿된 기운이 잘 느껴지니까.”
“뭐……!”
헉, 진짜냐!
성진은 저도 모르게 움찔 뒤로 물러나며, 품속에 지니고 있던 물건을 더듬었다. 로건의 말대로, 약차 가루가 들어있는 작은 주머니였다.
지그스문트령에서 약차들을 대거 압수한 이후, 성진은 그 일부를 빼돌려 늘 품에 가지고 다니는 중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약차야말로, 유사시를 대비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버지도 일전에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모르겠느냐, 모레스? 채널을 활성화시킨 지금의 너는 완전한 오라클과 다름이 없다.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의문을 가지는 것만으로 모든 해답을 얻었겠지.
그래. 약차는 현재로서는 성진을 완전한 오라클로 만들어 주는 유일한 수단.
만일 평범한 방법으로는 결코 타개할 수 없는 일이 닥쳤을 때, 그리고 때마침 예기치 못하게 아버지에게도 의존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면.
‘이 약차는, 분명 내가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알려주는 마지막 수단이 될 터.’
그런 효용을 미루어 짐작하기에, 아버지도 그때, 앞으로는 절대 약차에 손대지 말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던 거다.
그저 되도록이면 함부로 마시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을 뿐이지.
“어, 로건. 그러니까 이건 말이지…….”
성진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고 있는데, 로건이 희미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뭘 새삼스럽게…….”
“응?”
“네가 ‘독특한 기척’을 흘리고 다닌 게 어디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
순간 성진은, 아까 작업장으로 올 당시 로건이 황급히 말을 바꾼 이유를 대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아무리 작은 마기라도…….
-로건?
-…응. 아무리 작은 기척이라도, 수상한 기척은 절대 놓치지 않으니까.
아아, 그렇군. 이 녀석은 늘 성진으로부터 일정량의 마기를 감지하고 있었던 거다!
예전에도 시슬레보다 먼저 성진에게 경고해 주지 않았던가. 주변에서 삿된 기운이 느껴지니, 고위 사제들을 만날 때는 각별히 주의하라고.
당시는 성진이 스스로를 악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때라,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었다. 그저 ‘마기를 가만히 두다니, 성황가의 아이들이 생각보다 독실한 종교인들은 아니구나,’ 하고 신기해했을 뿐.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입장이 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성진은 모레스였고, 신성제국 델크로스의 황자였으니까.
그러니 이 상황을 어떻게든 납득이 되도록 설명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이 성진의 뇌리를 지배했다.
“어, 로건. 그러니까 말이지. 음, 이 마기는 말이지…….”
…하지만 대체 어떻게? 뭐라고 설명해?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버린 성진이 말을 더듬고 있을 때였다.
“하하. 신경 쓰지 마. 너는 예전에도 늘 그랬으니까.”
…예전에도?
성진은 놀란 눈으로 로건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예전 언제?’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당황하고 있는데, 로건이 성진을 향해 눈매를 가늘게 휘며 웃어보였다.
“이성진, 너는 어릴 때부터 여러모로 특이했으니까.”
너무나도 말간 나머지, 마치 새벽 공기 속으로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미소였다.
* * *
황도의 외곽. 산 중턱에 있는 한 작은 오두막.
희미한 횃불 하나 없는 캄캄한 지하실에서, 여간해서는 모이지 않는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없어. 나한테는 안 왔는데?”
낡은 사제복을 입은 노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작은 금발의 소녀 역시 작게 고개를 내젓는다.
“내 영역에도 새로운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 로메인이여, 제대로 확인한 게 맞는가?”
이들의 정체는 모든 악마들의 경배를 받는 위대한 고위 마왕들. 바로 [파종]과 [탐욕]이었다.
물론 먼지 바닥에 쭈그려 앉은 볼품없는 모양새에서는, 티끌만 한 위엄 조각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 목표물의 생명이 끊어진 것을 확인했습니다만.”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반가면을 쓴 로메인이, 커다란 수정 구슬을 제대로 조작하기 위해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그거 제대로 작동하는 건 맞는 거지?”
“그렇습니다, 파종이시여. 예전에도 몇 차례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혹시 고장 난 것은 아닌가? 한번 두드려 봄이 어떠한지?”
“아닙니다, 탐욕이시여. 이것은 고장 난 것이 아니거니와, 두드린다고 해서 고쳐지지도 않습니다. 그저 규상 세계의 물건이라, 본상 세계에 적용하는데 조금 어려움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지금 옛 이오니아의 유산 중 하나인 ‘임시 포털 생성기’를 조종하기 위해 애를 먹고 있었다. 오래전 로메인이 인형사로부터 빼돌린 진귀한 물건이었다.
“굳이 황도 내에 있는 인간을 목표물로 시험할 이유가 있어? 성공했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게 번거롭잖아.”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십시오, 파종이시여. 이 기계로 움직여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지금 황궁에 있지 않습니까?”
로메인이 생각하는 최종 대상은 바로 황궁의 장미, 아멜리아 황녀였다.
어떻게든 그녀를 감쪽같이 빼낼 방법이 필요했다. 만일 황녀와 레오나드 왕자의 인연이 성사된다고 해도, 성황이 이를 그저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까.
“애초에 너무 멀리서 대상을 지정하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그냥 이것을 황도로 가져가서, 목표물 바로 옆에서 시험하면 좋을 것을.”
“아아, 탐욕이시여. 황도 내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당장이라도 델크로스의 수호자에게 발각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그자는 크게 분노하며, 단번에 이 소중한 기계를 박살 내겠지요.”
그렇게 대꾸한 로메인은, 고개를 숙여 다시 한번 기계를 찬찬히 점검했다.
포털이 처음 열렸던 지점을 훑어보고, 목표물이 이동한 기록을 살폈다. 그리고 그의 생명이 자연히 끊어졌음을 확인한다.
음, 아무 이상 없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왜 하필이면 이단재판부의 죄수를 고른 건데?”
좀처럼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파종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야, 갑자기 어딘가로 옮겨주겠다고 제안해본들, 그걸 아무 거리낌 없이 수락할 사람이 그들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일리 있는 말이었다.
현재 죽는 것만 못한 상황에 처해있는 이단재판부의 죄수들은, 그곳이 지옥이라고 해도 기꺼이 도망치려 들겠지.
“그리고 본상 세계에서는, 포털의 시작 지점은 알아도 도착 지점을 특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메인은 꽤나 번거로운 방법을 이용해야 했다.
목표물을 먼저 어딘가로 이동시킨 다음, 대상의 상태가 안정된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영혼만을 소환하여 자연스럽게 대상을 죽인다.
이 차원의 영혼은 죽는 순간 고위 마왕의 소유가 되니, 마왕들이 그 영혼을 가로채어 어디서 죽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 시험할 대상으로, 갑자기 죽어도 문제되지 않는 죄수들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부디 잘 살펴보십시오, 위대한 마왕들이시여. 기록에 따르면 분명 목표물은 이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연히 숨이 끊어졌습니다. 분명 어딘가에 그 영혼이 떠돌고 있을 겁니다.”
그러자 파종이 인상을 찡그리더니,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웃기지 마. 역시 새로 죽은 영혼은 우리 영역에 오지 않았어.”
“그렇습니까? 그거 정말 이상하군요…….”
로메인은 심각한 얼굴로 손아귀의 수정 구슬을 들여다보았다.
“만일 성황 몰래 황녀를 빼돌리려 한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무래도 결과가 시원찮군요. 어쩌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