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Chapter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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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코드 제로 (6)
잠에서 깨야겠다고 강하게 생각하는 순간, 판게아 클로니클의 접속은 쉽게 종료되었다.
[음? 뭐야, 오늘은 일찍 돌아왔네?]
침상에서 눈을 뜨니 마왕 놈이 드물게 반기는 소리를 한다. 혼자 있는 동안 제법 심심했던 모양.
하지만 성진은 당장 놈을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곧바로 공방으로 향하는 은빛 디스크를 들어 올리자, 마왕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럼 그렇지. 넌 좋겠다. 맨날 혼자서만 재미있는 데 놀러 다니고…….]
아니, 노는 거 아니야. 어디까지나 해야 할 일을 하러 가는 거지.
거기다 내가 아까 어떤 징그러운 놈을 만났는지 알게 돼도, 네가 쉽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주방장에게 곰 고기가 좀 남아있는지 물어볼까?’
하지만 놈을 타박하는 대신, 성진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영혼을 바로 접해서일까, 놈의 쓸쓸한 기분이 여과 없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뭣? 정말? 좋아!]
다행히도 마왕의 기분은 급격한 상승곡선을 그린다.
[곰 고기~ 곰 고기~ 향이 강하고 불 맛이 살아있는 곰 고기~]
‘…….’
그렇게나 먹었는데, 질리지도 않냐? 이런 단순한 놈.
어쨌거나 내심 안도한 성진은, 서둘러 열쇠를 조작해 포탈을 열었다.
“여, 빨리 왔네.”
공방에 도착하니, 덱스터는 이미 다이브 캡슐에서 나와 노트북을 켜고 있었다.
“그래서 뭐야? 나와 긴히 의논해야 할 일이라는 게?”
성진은 대답 대신, 턱으로 까딱 그의 노트북을 가리켜 보였다.
“아아, 그래. 공략집과의 시간 오차. 나도 그걸 좀 자세히 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긴 했어.”
그렇게 말하는 덱스터의 표정은 제법 심각했다.
“보스룸이 그냥 열린 것도 문제지만, 그 외에도 자잘한 시간 오차들이 너무 많았지. 호문클루스 엔진의 기동 방식상, 유저가 한번 접속하면 절대 렉이 생길 수가 없단 말이야. 한데 오늘은 이상한 점들이 너무 많았어.”
“시간뿐만이 아니잖아?”
성진의 지적에, 난쟁이 공학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
“근거리 전사의 색적 범위가 늘어나고, 궁병의 사정거리에도 제법 큰 오차가 있었는데. 심지어 오크 마법사는 저렙 몬스터에게 불가능한 상위 마법을 캐스팅하려고까지 했어.”
캐스팅 전에 악령 헤이즈가 죄다 박살을 내서 그렇지.
“시간뿐만이 아니야, 덱스터. 물리적인 거리는 물론, 레벨이나 문의 개폐 조건까지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어.”
다행히 성진의 예감대로, 모두 대응 가능한 범위였기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을 뿐.
아마 그들이 아닌 다른 파티였다면 필시 전멸을 면치 못했을 거다.
“…그래, 맞아. 그것들도 있지.”
고개를 끄덕이던 덱스터가 조금 황당한 듯 물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네. 어떻게 그런 걸 일일이 다 캐치했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네가 처음에 전략을 자세히 얘기해 줬잖아?”
“아니, 그건 그런데…….”
그걸 모조리 외우고 있다고?
덱스터가 미심쩍은 얼굴로 바라봤지만, 성진은 그런 중요하지 않은 의혹은 가뿐하게 무시해 주었다.
“그래서 뭐야? 오크 왕이 말하던 그 ‘썬더스톰 본’이라는 건.”
“아아, 그래. 아까의 보스도 뭔가 이상하긴 했지. 그럼 거기부터 시작할까?”
덱스터는 떨떠름한 얼굴로, 판게아 클로니클 메인 화면을 띄웠다. 천으로 눈을 가리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여신, 유스티티아가 전면에 등장하는 화면이었다.
성진에게도 낯이 익은 금빛 창과, 긴 금발 머리가 돋보이는 일러스트.
“썬더스톰 본은 전에 설명했듯 ‘유저’를 지칭하는 말이야. 오랜 질서를 파괴하고 세계의 파멸을 가져오는 안티 히어로지. 뭐, 그게 결과적으로는 세상의 새로운 질서와 번영을 가져다준다는 설정이지만.”
“그다지 신선하지는 않네.”
성진의 솔직한 감상에, 덱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사실 판게아 클로니클은 내용만 보면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게임이야. 메인 스토리도 그저 그렇고, 세계관 역시도 어디서 한 번쯤 본 듯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양산형 게임이거든.”
단지 호문클루스 엔진으로 만들어진 유일한 온라인 게임이다 보니, 전에 없이 생생한 플레이 감각을 제공하는 것이 타 게임과의 차별점이었다.
실제 규상세계 하나를 창조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 보니, 유저에게 3D 멀미가 생길 여지도 없는 생생한 현실감을 주겠지.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 유스티티아 여신의 경우도 그래. 예전에 임펄스 소프트가 출시한 게임에서 몇 차례 우려먹은 적 있는 고리타분한 인물이거든.”
게임 디렉터가 동일하니 별수 없는 일이지, 라고 덱스터가 덧붙였다.
달칵달칵.
그가 몇 번 사이트를 클릭하자, 성진의 눈앞에 고전 RPG 게임을 소개하는 사이트 하나가 떠오른다. 한데 정말로 거기에는, 도트로 이루어진 어설픈 유스티티아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아스트리아 연대기?”
“유스티티아의 또 다른 이름이야. 1편 ‘여신의 부름’을 시작으로 8편 ‘암흑의 아스트리아’까지. 꽤나 긴 시리즈를 출시했던 인기 게임이지.”
“흐음.”
성진은 그중에서도 마지막 편인, ‘암흑의 아스트리아’의 타이틀을 잠시 눈에 담았다.
“유저를 지칭하는 ‘썬더스톰 본’ 역시 마찬가지. 비슷한 게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따지고 보면 몬스터나 던전은 물론이고, 세계 지도에 나오는 왕국이나 지명도 이전에 존재하는 게임들을 약간씩 수정한 것들에 지나지 않아.”
그 밖에도 NPC를 수집하여 부하로 기용하는 시스템이라든지, 주점에서 할 수 있는 미니 카드게임이라든지.
온갖 형태의 인기 게임들이, 약간의 수정을 거쳐 판게아 클로니클 시스템에 고스란히 안착되어 있었다.
개중에는 그 점을 여실히 비꼬는 사람들도 많았다.
덱스터가 지나가듯 보여주는 사이트들 중, 누군가가 장난처럼 올린 그림 하나가 눈에 띈다.
본 헬름을 쓴 전사가 불꽃에 휩싸인 채, ‘퍼스타드 로스!’라고 외치는 타 게임의 장면. 그리고 그 아래에는, 뇌우에 휩싸인 채 ‘머스타드 소스!’라고 소리치는 썬더스톰 본의 이미지가 마치 밈처럼 합성되어 있다.
“이 정도까지 비슷한 것들이 많다면…….”
성진이 썩 좋지 않은 예감에 말끝을 흐리자, 덱스터 역시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네 생각이 맞을지도 몰라. 어쩌면 이건 단순한 차용이 아니라, 진짜로 있는 게임을 가져다 쓴 걸지도 모르니까.”
그래. 왜 아니겠는가.
호문클루스 엔진은 다른 세상의 소스를 가져다 입맛에 맞게 변형시키는 데 특화된 시스템. 그렇다면 이미 존재하는 게임을 그대로 가져다 쓴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 세계는 채 준비되기도 전에 억지로 알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소. 하여 터무니없이 약해진 기조를 보완하기 위해 수많은 규칙이 무질서하게 덧대졌지. 그러한 거대한 혼돈 속에서 결국 세계의 뒤틀림이 생겨났다오.
문득 성진의 머리에, 유스티티아가 한탄처럼 내뱉던 말이 떠올랐다. 그게 말 그대로 날림 게임이라는 뜻이었어?
“내심 그렇지 않을까 짐작은 했어. 이건 정상적인 기획 단계를 거쳐 만든 게임은 아닐 거라고 말이야.”
덱스터의 설명에 따르면 그랬다.
호문클루스 엔진 이식이 완료된 후, 실제 판게아 클로니클이 정식으로 서비스되기까지의 시간 간격이 너무나 짧았다나.
“게임 하나를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인원과 작업들이 필요한지 짐작이 되냐? 그 시간을 줄일 방법은 단 하나뿐이지. 예전의 게임들을 소스로 이용해서, 호문클루스 엔진으로 모조리 합쳐 버리는 거야.”
음.
성진은 노트북 화면을 쏘아보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어디까지나 우리의 짐작일 뿐이지. 혹시 그걸 확실히 증명할 방법이 있어?”
“글쎄? 본래라면 임펄스 소프트 내부 관계자 외에는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렇게 중얼거린 덱스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방의 한쪽으로 다가갔다. 바로 일전에 한차례 대파된 적 있는 [호문클루스 엔진 편집기] 앞으로.
“하지만 우리한테는 게스트 ID 유저와 소스 편집기가 있지! 일단 네가 게임에서 빼돌린 아이템 몇 개를 편집기로 분석해 보면 되지 않을까? 만일 다른 게임에서 흘러들어 온 것이 있다면, 분명 그 흔적이 소스에 남아 있을 거야.”
“…그거 작동은 하냐?”
아직도 자리를 찾지 못하고 너덜거리는 수정 기판들을 보며 묻자, 덱스터가 기분이 상한 듯 미간을 팍 찌푸렸다.
이오니아 문명의 결정체라고도 할 수 있는 엔진 편집기. 그것이 파괴된 원인을 직접 제공한 장본인이 성진이다 보니, 그의 의심이 썩 기분 좋지는 않은 모양.
“내가 대충 손은 봐 놨어. 편집은 불가능해도, 소스를 읽어내는 정도는 가능하거든?”
“뭐, 그래. 좋아.”
그렇다면 마침 적절한 게 있지.
성진은 주머니를 뒤져, 판게아 클로니클에서 획득한 아이템 몇 개를 꺼내 들었다. 몇 종류의 귀속 포션과, 먹다 남은 작은 어묵이었다.
“…너 귀한 집 아들이라며? 근데 이런 정체불명의 음식을 잘도 입에 넣는다?”
덱스터는 황당한 표정으로 잇자국이 남은 어묵을 받아 들었다.
“내가 입맛은 까다로워도, 그다지 편식은 안 하는 편이거든.”
“아니, 편식이 문제가 아니라… 그나저나 먹다가 남기는 건 또 뭔데?”
“그나마 분석할 게 남은 걸 다행으로 여겨. 제법 맛있게 먹다가, 왠지 다 먹으면 안 될 거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겨우 남긴 거라고.”
“…….”
성진의 당당한 대답에 덱스터는 대단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성진의 예감이 맞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귀속 포션을 모조리 허탕 친 덱스터가, 마지못해 속는 셈 치고 분석한 어묵에서 기어이 뭔가를 찾아낸 것이다!
“역시! 이성진, 이리 와서 이걸 좀 봐봐!”
그가 분석한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텍스트가 떠올라 있었다.
〚상등급 2*8d# 어묵 #% 따끈따끈 분식점〛
〚아이템 등급 : B〛
〚가격 : 2 다이아몬드〛
〚*현재 서버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가격 2 다이아몬드?
“뭐야? 이건 아예 판게아 클로니클의 아이템 설명이 아닌데?”
성진의 의문에, 덱스터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호문클루스 엔진으로 변형된 아이템은, 소스의 본질이 뒤바뀌면서 오히려 이전의 정보가 가장 바깥으로 떠오르게 돼! 마치 탈피하고 남은 껍데기가 표면에 남는 것과 마찬가지지!”
즉 이 어묵은 정말로 다른 게임에서 온 소스라는 거다.
그리고 그들은 곧 인터넷 검색을 통해, ‘따끈따끈 분식점’이라는 음식점 경영 시뮬레이션이 같은 회사에서 발매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 대단한 발견이야, 이성진! 정말로 판게아 클로니클의 아이템 상당수가 다른 게임에서 온 걸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희귀 아이템 같은 것도, 원본 소스를 찾아내기만 하면…….”
그러다가 덱스터는, 갑자기 뒤통수를 맞기라도 한 듯 혀를 씹었다.
“음? 어라?”
“왜?”
“아니, 잠깐만…….”
그리고 덱스터는 뭔가에 홀린 듯 인터넷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찜찜해. 우리가 지금 뭔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뭘?”
그러다가 덱스터는 곧, 성진에게 한 유저 게시판을 보여주었다.
“너, 이걸 보고 뭔가 느끼는 거 없냐?”
마침 그곳에는 온갖 유저들이, 희귀한 전직 아이템을 찾아 울고 있는 게시글로 도배되어 있었다.
-3차 전직 아이템 어디서 구나하요? ㅠㅠ
-전직 필수템 얼음 심장 정보
-얼음 심장 경매장 가격
‘…얼음 심장?’
자연히 성진의 뇌리에, 예전에 덱스터와 만지작거리던 얼음 심장의 정보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글래쳐 트롤의 얼음 심장〛
〚제라듀벨리 던전 보스, 글래쳐 트롤 킹에게서 얻은 신물. 등록된 개체의 활동 조건을 설정하고, 간단한 문장으로 명령이 가능하다.〛
〚아이템 등급 : A〛
〚*현재 노스랜드 서버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아니, 하지만 그건 완전히 다른 게임의 소스였는데? 그러니까 노스랜드 서버 어쩌고 하는…….”
그리고 성진은 말을 잇던 도중에 깨달았다.
아! 다른 게임의 소스!
“예전에 이 회사 초창기에…….”
덱스터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료 미니 게임 하나를 출시한 적이 있어.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도 그때의 통합 서버가 ‘노스 랜드’였을 거야.”
그리고 화면에 떠오른 게임 타이틀.
거대한 유인원이 예티처럼 하얀 괴물과 싸우는 단순한 일러스트.
-콩: 쥐라기 아일랜드
“이성진…….”
난쟁이 공학자가 흔들리는 눈으로 성진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대체, 그 희귀한 전직 아이템으로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Chapter 2: Chapter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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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 코드 제로 (7)
“아아…….”
머리통을 감싸 쥐고 안절부절못하던 난쟁이 공학자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며 한탄했다.
“기능에 비해 이상하게 데이터가 무겁다고 생각했을 때 그만뒀어야 했어. 아니면 그때 제대로 더 분석해 봤어야 했는데…….”
내가 이정표에 눈이 멀어서 그만!
완전히 패닉에 빠진 덱스터를 멀뚱히 바라보던 성진이 물었다.
“근데 얼음 심장이 전직 아이템인 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우리가 전 세계에서 품귀현상을 일으키는 아이템을 모조리 못 쓰게 만들었단 말이야!”
그게 왜? 어차피 게임 아닌가.
성진이 신경 쓰이는 것은 오히려 다른 부분이었다.
‘나나 침묵 빌런들 외에도, 판게아 클로니클에서 아이템을 현실로 빼낼 수 있는 자가 더 있는 거야!’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자명했다.
판게아 클로니클에, 그들이 모르는 또 다른 게스트 ID 유저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게임 제작에 직접 관여한 자가 모종의 방법을 썼을지도 모르지.
-테마 던전 출입에 인원 제한을 둔 이유, 그리고 게스트 ID 유저가 여태껏 셋을 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유심히 생각해 본 적은 있소이까?
유스티티아의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가능성은 아무래도 후자 쪽으로 기운다. 문제는 그게 누구였던 간에, 지그스문트령을 습격했던 악마 놈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거다.
성진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덱스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넌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냐? 게임 운영의 위기는 둘째치고, 당장 우리가 입은 손실을 생각해 보라고! 되도 않은 장난질을 친다고, 돈으로 값어치를 매기지도 못할 물건을 망가뜨린 거란 말이다!”
지금 판게아 클로니클이 누리고 있는 전 세계적인 인기를 생각하면, 얼음 심장의 가격이 현금으로 얼마까지 치솟을지 알 수 없는 거다. 어쩌면 천문학적인 숫자에 이를지도 모르지.
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게임에 진심인 사람들이 많으니까.
“흠.”
성진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참연어 사업을 위한 냉장고와 시슬레의 곰인형. 그리고 엄청난 값으로 팔릴지도 모르는 얼음 심장.
“대체 뭐가 문제야? 제 값어치를 할 곳에 제대로 간 거 같은데? 만일 필요하다면, 난 돈을 주고 사서라도 그것들을 만들었을 거야.”
“크아악!”
답답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던 덱스터는, 결국 결연한 얼굴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안 되겠어! 예전에 알고 지내던 엔지니어에게 연락이라도 해 봐야지! 분명 전화번호가 여기 어디 있을 텐데…….”
“오.”
하긴, 인터넷이 되는 판국에 전화가 안 되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덱스터! 지난 몇 년 동안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야 연락하는 거냐! 아니, 그보다 너 지금이 몇 시인 줄은 알고 있는 거냐?
누군가와 한참 시끌시끌한 대화를 이어간 끝에, 덱스터는 잔뜩 낙담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망했어. 누구든 하나라도 전직을 완료하지 않는 한, 얼음 심장은 더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해.”
“왜? 그냥 게임사가 임의로 드랍율을 늘리면 되는 거 아니야?”
성진의 천진한 의문에, 덱스터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판게아 클로니클은 홀로 기능하는 하나의 독립된 차원이니까. 통화량이나 몬스터 아이템 드랍율같이 고려할 변수가 많은 것들은, 게임사도 전적으로 시스템에 일임하고 있단 말이야.”
1차와 2차 전직도 마찬가지. 시스템은 게임의 유동 인구와 전직 달성률을 면밀하게 검토한 후, 적절한 범위에서 전직 아이템의 개수를 늘여 나갔다고 한다.
과잉 공급을 막는 것이야말로, 게임의 수명을 늘려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 테니까.
“처음 서버에 풀리는 아이템은, ‘초기 소비 속도’를 파악하는 지표도 중요해. 어쩌면 지금 얼음 심장은 거기에 발이 걸려 있는지도 몰라.”
초기 소비 속도는 시스템이 아이템의 수요를 판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래서 만일 전직 사례가 나타나지 않으면, 얼음 심장의 수요가 아예 없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앞으로 누군가가 전직 아이템을 소비하지 않는 한, 새 아이템은 드랍되기 힘들 수도 있다는 거야.”
“흠…….”
성진은 천만다행으로 몰래 꿍쳐 둔 얼음 심장 하나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럼 지금 내가 가진 게 유일무이한 얼음 심장일 수도 있다는 건가.’
이런 상황이면 설사 무사히 전직을 하더라도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될 터. 아무래도 그걸 오웬에게 넘기려면, 조금은 신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어머니는 대체 뭘 하고 계신 거지? 중요한 아이템이 외부로 유출되는 사태를 정말 모르셨을까? 이대로 가다가는 게임 운영이 엉망이라는 비난을 피하지 못할 텐데…….”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리는 덱스터에게, 성진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그렇게 걱정되면, 그냥 연락해 보면 되잖아.”
“…응?”
“지금 어머니한테 전화해. 가능하지?”
“뭐? 아니, 그렇기는 한데…….”
화들짝 놀란 그는, 곧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머니잖아. 나 없이도 혼자서 잘 해결하실 텐데 뭐.”
글쎄, 어떨까.
이 세상에는 가진 능력을 떠나서, 혼자 두지 않겠다는 말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만 고개 숙인 덱스터가 무척이나 심란해 보였기 때문에, 성진은 그에게 더 이상의 권유는 하지 않았다.
“참, 동료에게서 다른 게임 소스 사용에 대한 단서도 얻었지. 회사에서 아이템 드랍율에 직접 손을 쓰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해.”
잠시 후, 기운을 차린 덱스터가 입을 열었다.
“대외비라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게임 개발 당시 윗선에서 갑자기 출시를 서두르라고 무지하게 재촉했다는 모양이더라.”
덕분에 게임 디렉터와 엔지니어들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소스를 이용해서 허겁지겁 게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대로 소스를 마구 구겨 넣다 보니, 완성된 판게아 클로니클은 일종의 거대한 스파게티 냄비나 다름없어진 것이다.
“코드가 꼬일 대로 꼬였다나? 이미 개발진이 손을 쓸 단계는 지나버렸고, 어떻게든 시스템이 자체 오류를 해결해 나가고 있다고는 하는데.”
덥수룩한 수염을 긁적이던 덱스터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적어도 엔진 개발에 조금이나마 관여한 내가 생각할 때, 이 상황을 해결할 기술적인 방법은 단 하나뿐이지.”
“그게 뭔데?”
“바로 시스템 제어 AI에 편법으로 ‘코드 제로’의 권한을 부여하는 거야.”
코드 제로? 그건 또 뭐야?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성진에게, 덱스터가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호문클루스 엔진에서도 가장 불가사의한 코드. 이른바 ‘신의 영역’이라 불리는 권한이지.”
* * *
넘버링 제로.
엔지니어들 사이에서는 ‘코드 제로’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기이한 코드.
아마도 이 코드 제로의 정확한 정체는, 처음 호문클루스 엔진을 구상한 오라클만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리라.
어쨌든 이오니아의 공학자들은,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이 코드를 다뤘다고 덱스터는 회상했다.
인간이 결코 통제할 수 없는 존재들, 혹은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불가사의한 것들. 공학자들은 이런 것들에 한해 한정적으로 고유 ID와 함께 제로 코드를 부여하곤 했다.
“게임 시스템과 GM의 넘버링이 고유 1번대야. 넘버링 제로는 그 권한을 넘어서는 최강의 코드라고. 바꿔 말하면 ‘코드 제로’는 이른바 ‘신의 코드’라고도 할 수 있지.”
신의 코드.
그 단어가 주는 울림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해. 저렇게 마구잡이로 꼬인 수많은 코드들을 무리 없이 굴리려면, 모든 것의 권한을 뛰어넘는 강력한 권한이 필요하지.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판게아 클로니클은 지금쯤 세상에서 가장 버그가 많은 게임으로 기록되었을걸?”
아니, 버그가 다 뭐야. 처음부터 제대로 굴러가지도 못했을 텐데.
그렇게 주억거리는 덱스터를 뒤로하고, 성진은 천천히 턱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이미 규정된 조건은 세계의 관리자인 나조차도 피해갈 수 없소.
유스티티아는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곧, 여신 자신이 바로 판게아 클로니클을 관리하는 시스템이라는 거겠지.
-그것은 거대한 혼돈 속에서 태어난 또 하나의 유스티티아. 그 자체로 이 세계의 법칙이 된 자라오.
또 그 기분 나쁜 익사체 같은 것 역시, 혼돈 속에서 태어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의 법칙이 되었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신의 코드.’
성진은 대번에 마음을 정했다.
“일단 이 건은 아버지한테 물어봐야겠다.”
“…뭐?”
그러자 덱스터가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네 아버지가 뭔데 그런 걸 물어?”
“뭐긴 뭐야.”
우리 아버지는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야. 무려 신의 대리자시라고!
성진이 자랑스럽게 대꾸하자, 덱스터는 마치 구제할 수 없는 미치광이 광신도를 바라보는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 왜? 뭐?
”…아니, 그냥. 신기해서. 아버지란 건 그렇게 의지되는 존재냐?”
“뭐든 잘 가르쳐주시고, 힘이 되어 주시지. 보통 부모들은 다 그렇지 않아?”
그러자 덱스터는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글쎄? 나는 편모 가정에서 자라서. 게다가 우리 어머니는 무척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뭔가를 물으면 항상 쉽게 대답해 주는 일이 없었지.”
덱스터의 어머니, 마틸다는 그가 뭔가를 물을 때마다 매번 이렇게 반문하곤 했단다.
덱스터. 내게 질문하기 전에 먼저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사는 마친 거니? 그 의문이 생긴 맥락을 먼저 짐작하고, 네가 세운 가정을 점검해 보았니? 책과 인터넷에서 충분한 자료를 찾아보기는 한 거니?
“…그거 대단히 엄격한 교육이었네.”
“물론 어머니의 교육 방침이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냐. 내가 인정받는 엔지니어로 성장한 데는, 분명 그녀의 가정교육이 미친 영향이 컸을 테지. 하지만 지금도 가끔은 이렇게 생각하곤 해.”
그리고 덱스터는 고개를 들어, 조금 아련한 눈으로 공방의 기계들을 응시했다.
“계속 쉬운 길만을 찾을 거라 걱정할 정도로, 내가 그렇게나 못 미더웠던 걸까?”
“…….”
“적어도 한 번쯤은, 상을 주듯 그냥 대답해 주실 수는 없었던 걸까?”
성진은 시무룩한 난쟁이 공학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경험한 적도 없고, 그래서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을 감정. 섣불리 위로의 말이 나올 리가 없다.
단지 의식하기도 전에, 성진의 입에서는 어설픈 제안 하나가 흘러나왔다.
“덱스터. 역시 델크로스에 놀러 오지 않을래? 적어도 우리 아버지라면, 너의 의문에 어떤 식으로든 쉬운 답을 주려 애쓰실 거야.”
그러자 덱스터가 황당한 얼굴로 성진을 돌아보았다.
“뭐? 내가 델크로스인에게 물을 게 뭐가 있다고?”
“글쎄, 어떨까?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게 되면, 너도 생각이 달라질걸?”
그리고 성진은 그의 귓가에 조심스럽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실은 우리 아버지가 바로 코른시임의 오라클이야. 네가 꿈에도 만나고 싶어 하는, 이정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람이지.
“……?”
난쟁이 공학자는 처음에는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잠시 후, 의미를 깨달은 덱스터의 얼굴에서 서서히 경악이 번져 나갔다.
* * *
콰앙!
갑자기 문이 열리며 모레스 황자가 튀어나오자,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하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하?”
이런 꼭두새벽에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하지만 그가 제대로 묻기도 전에-
“어, 하벤 경. 오늘 야간 당직인가? 그럼 수고해.”
모레스 황자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쏜살같이 복도를 달려 나가 버렸다.
“저, 저하?”
멍청히 서 있던 하벤은, 황자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사태를 파악하고는 새파랗게 질렸다.
“저하!? 호위 기사를 그냥 남겨두고 이 새벽에 혼자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아니지, 이제는 오러 은폐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분이 아닌가. 아예 대놓고 방문을 나선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다급해진 하벤은 허겁지겁 마사인 경의 방으로 달려갔다. 황자의 경호를 위해 대부분을 함께 생활하는 터라, 진주궁에 버젓이 자신의 방까지 가지고 있는 양반이었다.
“마사인 경! 마사인 경!”
하벤이 호들갑스럽게 문을 두드리자, 곧 인기척과 함께 방문이 열린다.
데카론 나이트를 앞두고 있는 상급 기사답게, 다가오는 하벤의 기척을 멀리서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벤 경?”
“마사인 경! 저하께서, 저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갑자기 방문을 열고 어딘가로 달려가셨는데, 너무나 빠르신 터라 미쳐 행방을 여쭙지도 못했습니다!”
“…….”
마사인 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그러나 익히 황자의 실력을 아는 그는, 다행히 하벤의 실책을 과하게 추궁하지는 않았다.
“어디로 향하셨나?”
“너무 순식간에 사라지신 터라 확실치는 않으나, 아마도 북동쪽을 향해…….”
그러자 방향을 가늠하던 기사의 눈에 미약한 안도의 빛이 어린다.
“하면 아마도 본궁으로 가셨겠군. 너무 걱정 말게. 만일 정말 위험한 곳으로 향하셨다면, 분명 자네에게 들키지 않고 몰래 나가셨겠지.”
네? 그게 그렇게 되는 겁니까?
하벤이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마사인 경은 이내 침착하게 무장을 차리기 시작했다.
“수고했네. 내가 저하를 연무장으로 모실 테니, 경은 상급자에게 보고하고 제시간에 교대하도록.”
철컥.
마지막으로 은은한 금빛이 도는 미스라를 찬 마사인 경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순식간에 하벤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허…….”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하벤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입을 뻐금거렸다.
‘저 양반도 참 많이 변했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황자님 일이라면 무조건 주책없이 굴었던 거 같은데. 어느새 사람이 저렇게 침착해졌단 말이지.’
어쨌거나 크게 경을 칠 줄 알았는데 다행한 일이다. 하벤은 그렇게 안심하며 기사 숙소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하필이면 그날의 경비 조장이, 깐깐하기로 소문난 마리아 경이었던 터라.
“이런 얼빠진 놈이! 그래서 지금 저하의 호위를 마사인 경에게 떠넘기고 그냥 왔단 말이야?! 너 이 자식,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응!?”
‘…그럼 그렇지. 그냥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졸지에 숙소에서 기합을 받게 된 하벤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Chapter 3: Chapter 303
Chapter Text
303. 마왕 2호 (1)
한편, 진주궁을 뛰쳐나간 성진은 순식간에 본궁 앞에 이르렀다. 오러를 마음껏 휘둘러가며 속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왜 그래?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성진?]
마왕 놈이 당황하며 수차례 물었지만, 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성진의 마음은 다급했다. 당장 성황과 의논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기 때문.
-아버지! 오웬이 뭔가 이상한 세계에 휘말린 것 같습니다! 두고 보자니 점점 위험 수위를 더해가는 게, 아무래도 ‘신의 코드’라는 것의 영향인 듯합니다. 어쩔까요? 오웬 녀석을 그냥 빼내는 쪽이 좋을까요?
-아! 그런데 아까는 정말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유스티티아라는 여신인지 시스템인지 모를 것에게 붙잡혔었는데, 갑자기 거기에 마왕 2호가 나타났거든요! 그곳은 분명 규상세계인데, 염상 역시 존재할 수 있었어요. 마치 예전의 그 [틈새]처럼 말입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참! 그나저나 아버지, 혹시 얼마 전 어르신의 공방에서 만난 난쟁이 공학자를 기억하십니까? 덱스터라는 친구인데, 그를 델크로스로 데려와도 괜찮을까요? 어째 솔깃한 눈치라서요. 만일 그가 이곳에 올수만 있다면 분명 앞으로 제국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여, 어둑어둑한 본궁의 전경을 바라보는 순간 깨달았다.
‘아차! 지금 새벽이지!’
너무 마음이 급한 나머지 방문 시간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던 거다.
“…모레스 저하?”
“이 시간에 호위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근위대 기사들이 화들짝 경계 태세를 취하더니, 이내 방문자의 정체를 깨닫고는 당황하여 묻는다.
“…….”
대답이 궁해진 성진은 잠시 돌아갈까 망설였다. 갑자기 시종 하나가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터였다.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레스 저하.”
처음 보는 훤칠한 시종이, 깍듯하게 예를 갖추며 성진은 맞이했다.
“자네는?”
“라파엘이라고 합니다, 저하. 이 시간에는 수석 시종장님을 대신해 성황 폐하를 보좌하고 있습니다.”
하긴, 연로한 루이스가 하루 종일 성황의 곁에 붙어 있지는 못할 테지.
“어서 드시지요.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라파엘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가니, 다행히도 집무실에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 그리고 성황은 평소와 같이 집무실에 앉아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모레스.”
“…….”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 단정한 모습에, 성진은 인사도 잊고 무심코 질문했다.
“아니, 이 시간에 안 주무시고 대체 뭐 하십니까?”
그러자 성황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더니, 조금 의아한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반문했다.
“네가 이 시간에 날 찾지 않았더냐?”
“…….”
순전히 자신이 올 것을 예상하여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인가.
성진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델크로스에는…….’
이 차원에는, 이렇듯 자신이 불시에 문을 두드려도 기꺼이 맞이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묘한 감동에 잠시 멍청히 서 있던 성진은, 성황이 휙휙 손짓을 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화아악.
쏟아지는 신성력과 함께, 온몸의 피로가 풀리고 노곤함이 찾아온다. 성진은 그제야 자신의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는 것을 인식했다.
잔뜩 흥분하여 잠시 잊고 있었지만, 오늘은 제법 힘들게 던전을 돈데다 웬 찰거머리 같은 놈에게 물어뜯기기도 했었지.
툭.
치료가 끝나자, 딱밤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충격이 이마에 전해졌다.
“……?”
어리둥절하여 성황을 바라보니, 툭, 다시 한번 가볍게 성진의 이마를 두드린 성황이 말했다.
“네 눈에는 조금 어리숙해 보일지도 모르나, 그래도 그 아이는 너의 손윗사람이니라, 모레스. 그렇게 함부로 손이 나가서야 쓰겠느냐.”
“……!”
“그 아이가 네 무례를 기꺼이 용서하는 아량을 보였으니, 너 역시 그 아이를 마땅히 존중해야 할 것이다.”
성진은 조금 맥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아, 그래. 아버지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 이렇게 서두를 필요도 없었던 거 아닐까?
“근데 저의 착각입니까? 아버지, 어쩐지 속이 시원해 보이십니다?”
그러자 단호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렇지 않다. 물론 당연히 너의 착각이니라.”
“하지만…….”
“아니다, 모레스.”
“아… 네.”
성진이 미심쩍은 눈초리를 했지만, 성황은 그를 못 본 척 점잖게 턱을 까딱해 보였다.
“앉거라.”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시종 라파엘이 따뜻한 차를 들고 나타났다.
달그락.
수석 시종장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의 멜보른 역시 대단히 훌륭한 맛이다.
향기로운 차를 두어 번 들이켠 성진은, 곧 아까의 흥분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것을 느꼈다.
“이런 시간에 휴식을 방해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버지.”
“아니, 괜찮다. 필시 내게 급히 묻고 싶은 것이 있었던 거겠지.”
“어, 네.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성진은 괜히 조금 감동했다.
-적어도 한 번쯤은, 상을 주듯 그냥 대답해 주실 수는 없었던 걸까?
덱스터는 그렇게 말했지만 말이지.
이것 봐, 덱스터. 우리 아버지는 이런 새벽에도 자식들의 질문을 기꺼이 받아주는 분이라고!
“오웬이 상태창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을 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셨군요?”
묘한 충족감 속에서 성진이 질문하자, 성황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리가 있느냐. 그 아이가 떠나기 전 내게 직접 이야기해 주었느니라.”
아, 그랬었지.
성진 역시 다샤로부터 오웬의 가출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아버님, 소자는 이 상태창의 힘으로 더욱 강해지려 하옵니다. 해서 아쉽게도 당분간 아버님과 형제‧자매들 곁을 떠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정말 아버지에게 대놓고 그렇게 말했다고? 오웬 이 자식, 생각보다 더 나사 빠진 놈 아니야?
그 생각이 그대로 표정에 드러난 모양. 성황이 조금 엄한 눈으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명심하거라, 모레스. 그 아이는 너의 손윗사람이니라.”
“아, 네.”
머쓱하게 대답한 성진이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하면 오웬이 가지고 있는 이정표, 그건 역시 조모님께서 남기신 것입니까?”
그러자 성황이 또다시 순순히 긍정했다.
“그래. 내가 그의 어미에게 이정표를 건네고, 막 태어난 오웬을 친히 축복했느니라.”
“하면 다른 자들은 어떻습니까? 판게아 클로니클, 그곳에 게스트 ID 유저라 불리는 또 다른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 각각 오라클의 이정표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아마도 다른 이의 이정표다. 모종의 이유로, 전대의 오라클들이 남긴 것이겠지.”
그렇게 대답한 성황은, 턱을 괴고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보통 한 사람의 오라클이 만들 수 있는 이정표는 그리 많지 않단다. 어마마마 역시 강한 오라클이셨으나, 일생 동안 고작 세 개의 이정표를 남기셨을 뿐이다. 그것이 각각 어디에 있는지는 모레스,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진과 아멜리아가 가진 부서진 이정표들. 그리고 유일하게 온전한 형태로 남은 오웬의 이정표. 도합 세 개였지.
“기회는 한정되어 있다. 하여 오라클들은 언제나 중대하고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이정표를 만든단다. 만일 그 이정표들이 사후에도 남아 있다면, 이를 만든 오라클이 내다보고 또 대비하고자 한 미래가 아직 다가오지 않았음이라.”
“…….”
하타수 티티, 그리고 구릅뺘랍구르릅 비뺘릅릅.
그들 모두 언제인지 모를 과거, 어느 코른시임의 오라클이 미리 안배한 자들이라는 의미리라.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을 굳이 지금 판게아 클로니클로 끌어들인 목적이 대체 무엇일까요?”
“글쎄다. 오랜 과거의 오라클이 과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지금으로써는 온전히 짐작하기 어렵구나. 하나…….”
거기까지 말한 성황은 천천히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가 제대로 된 오라클이었다면, 적어도 나의 뜻에 반하는 안배를 하려 들지는 않았을 터.”
“…….”
순간 어쩐지 오싹한 느낌을 받은 성진이, 부르르 몸을 떨며 생각했다.
이 양반, 가끔 엄청 무섭게 웃는단 말이지. 살면서 남들에게 살벌하게 웃는다는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걸까?
[…지금 네가 누구한테 그딴 소리를 하는 거야?]
그때 성진의 머릿속에서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성황과 함께 있을 때는 어지간해서 입을 여는 적이 없는 마왕 놈이었다.
‘…야, 마왕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
하지만 마왕은 다시 염상 결정 안으로 틀어박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성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거 별 싱거운 놈을 다 보겠네…….’
속으로 투덜거린 성진은, 성황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하면 조모님께서는 오웬을 위해 미래를 안배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어째서죠?”
오라클이 나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단 세 번의 기회. 한데 그녀는 왜 성황이나 다른 사람도 아닌, 엉뚱한 그의 대자를 위해 이정표를 남겼단 말인가.
그러자 성황이 잠시 물끄러미 성진을 바라보았다.
“어마마마의 깊은 뜻 역시 나는 온전히 짐작하지는 못한다. 하나 한 가지는 확실하구나.”
“그게 뭡니까?”
“만일 오웬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한다면, 모레스, 너는 무슨 수를 써서든 그 아이를 위하려 하지 않겠느냐?”
“아니, 뭐…….”
당황한 성진은 머쓱하게 입을 삐죽였다.
물론, 못마땅한 구석이 많고 볼수록 얼빠진 여우 자식이지만. 그래도 성황가 사람들을 생각해서 도울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지.
“그러니 그 아이를 위한 안배는, 결과적으로 너를 위한 안배이자, 나를 위한 안배이기도 한 것이니라.”
“흠.”
그렇군. 현명하신 조모님께서 바쁜 아버지를 대신해, 그 모자라는 녀석을 친히 돌봐주기로 하신 거구나.
성진은 산뜻하게 그런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판게아 클로니클, 그러니까 오웬이 휘말려 든 규상세계 말입니다. 그곳은 규상세계답지 않게, 무척이나 불안정하고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아버지.”
“그래. 그런 듯 보이는구나.”
담담하게 답하는 성황의 눈에서, 일순 희미한 은빛 광채가 머물다 사라진다.
어쩌면 지금 그의 눈에는, 성진과 오웬이 겪었던 여러 사건들이 정말로 보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묘한 확신을 가지고 성진이 질문을 이어갔다.
“하면 조모님께서 오웬을 그곳으로 끌어들이신 진짜 이유는 뭘까요? 그는 뭔가 중요한 물건을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정작 상태창은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
“그래서 이런 의심이 드는 겁니다. 어쩌면 상태창의 목적은 아이템 따위가 아니라, 단지 오웬을 판게아 클로니클에 되도록 오래 잡아두는 것은 아닌가 하고요. 그리고 아버지…….”
잠시 말을 멈춘 성진은, 성황을 똑바로 마주보며 처음부터 정말로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도 이미 그것을 알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오웬이 그런 위험한 곳을 멋대로 돌아다니고 있어도, 그저 가만히 내버려 두고 계시는 거겠죠?”
그러자 성황은 묘한 표정으로 성진을 바라보다, 곧 대답 없이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이에 성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이 양반의 침묵은 곧 긍정인 거지.
“…내가 그 불완전한 규상세계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이윽고 성황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첫 번째는, 델크로스의 안위를 크게 위협하지 않는 한, 내가 나서서 다른 차원을 먼저 간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협정이군요.”
성진은 대번에 그가 말하지 않은 부분을 짚어냈다.
설마, 말 그대로 정말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겠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새로운 차원도 만들어내는 양반 아닌가.
아마도 합당한 인과가 없는 한, 다른 차원에 함부로 손을 쓰지 말라는 ‘6인 회의’의 엄격한 제약일 터.
성진의 말이 정답인 듯, 성황은 별다른 부언 없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오웬, 그 아이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네?”
그 의외의 대답에 성진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 녀석이 바란다고요? 스스로 위험에 처하는 것을요?”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저 오웬은 그 규상세계에 정신을 팔고 싶은 것뿐일 게다.”
성황이 씁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절대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을 테니 말이다.”
Chapter 4: Chapter 304
Chapter Text
304. 마왕 2호 (2)
“언젠가 로한에 대단히 큰 화재가 있었다.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데다 오랜 가뭄까지 더해, 그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하더구나.”
성진도 다샤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귀족의 영지 하나가 통째로 불에 탔다던가.
당시 로한의 대사는, 오웬에게 방화 혐의를 물었다고 했었지.
“그때 우연히 영지 외곽에 나가 있던 오웬은 다행히도 화를 피했다. 그러나 양친 모두를 화재로 잃고 말았단다. 그래서인지 황궁에 들어와 안정이 된 후에도 좀처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더구나.”
오웬이 대놓고 친자가 아니라 말한 것이었으나, 성황은 물론 성진도 그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당시의 악몽을 꾸는군요.”
이유는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접속을 종료하기 전, 오웬이 분명 성진에게 그리 말하지 않았나.
-아, 싫은데. 이대로는 분명, 꿈자리가 사나울 거라고.
다 큰 놈이 왜 갑자기 답지 않게 징징거리나 했는데, 녀석 나름대로는 절박한 이유였던 모양이다.
“그래. 매일 밤 부모를 잃던 당시를 생생하게 경험하는 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아이가 내게 저런 선물을 보내온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말한 성황이 고개를 돌려 잠시 책상 위를 바라본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거기에는 하얀 토끼 안대 하나가 고이 놓여 있었다. 일전에 시슬레가 보여준 것과 같은, 정신공격 저항 S+의 한정판 안대다.
무려 상점가 3,999,000 P캐시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이었지.
“악몽을 쫓아 주는 물건이라고 시슬레가 말하더군요. 한데 왜 그걸 아버지한테…….”
의아해진 성진이 묻자, 성황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짐작 가는 이유라면 한 가지 있다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지나가듯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낯은 물론이고 밤에도 공사가 다망했던 성황은, 때때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오웬을 불러다 신성력을 쏟아주며 시간을 보내주곤 했다.
-폐… 아버님은 이 시간에도 주무시지 않으십니까?
아직은 낯설어하며 쭈뼛거리던 소년에게, 당시 성황은 대수롭지 않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신성력이 있으니 굳이 잠을 잘 필요가 없느니라. 어차피 꿈자리도 어지러울 것을, 그 시간에 업무를 하나라도 마치는 것이 나은 듯하구나.
듣고 있던 성진은 황당해졌다.
“…고작 그거 때문에요?”
“그래. 오웬은 제법 섬세한 면이 있는 아이란다.”
그러고 보니 전에 시슬레도 말했었지.
-오웬 오라버니는 아무 생각 없이 다니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무척 세심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내가 언젠가 악몽을 꾼다는 얘기를 한 적 있는데, 몇 년 동안 잊지 않고 있다가 이걸 보내줬으니까.
본인이 제일 힘들어하는 것이 악몽이다 보니, 다른 사람이 지나가듯 하는 말도 허투루 듣지 못한 모양.
그런데 찔끔찔끔 모은 캐시로 저런 고가의 물건을 두 개나 사서 보내놓고는, 정작 본인이 악몽을 두려워한다고? 아직도 자기가 쓸 물건은 구하지 못했다는 건가.
“왜 먼저 쓰지 않고…….”
하지만 성진은 말을 함과 동시에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판게아 클로니클에서 처음 만났던 날, 오웬이 그에게 진중한 얼굴로 이런 말을 했으니까.
-이제 이 세상에서 나한테 남은 건 그들밖에 없어. 소중한 사람들을 두 번이나 허망하게 잃을 수는 없지.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이제 난 뭐든 할 수 있어.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안위보다 성황가 사람들을 우위에 두고 있는 거였다.
‘게다가 모자라는 캐시를 또 덜떨어진 동물 스킨을 사주느라 소모했단 말이지.’
녀석은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얼빠진 짓만 골라하는 바보 여우 자식이었다.
* * *
그 이후로도 성진은 집무실에서 제법 오랜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성황과의 대화가 완전히 끝났을 때는, 이미 창밖에서 환하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구나.”
집무실을 나서던 성진은, 성황이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
잠시 의아했지만, 성진은 곧 그러려니 생각하고 말았다. 저 양반이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어야 말이지.
어쨌거나 모처럼의 홀가분한 아침이었다. 라파엘의 안내로 집무실을 나서며, 성진은 기분 좋게 생각했다.
‘아버지 덕분에 몸 상태도 최상이겠다, 오늘은 오랜만에 검술 수련에 매진해볼까?’
조만간 바나하스 8식을 완전히 뗄 수 있을 거라고 마사인 경이 그랬지. 처음에는 주먹질밖에 모르던 성진도, 이제 어엿한 오러 연공 숙련자의 대열에 들게 된 것이다.
그렇게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던 성진은, 본궁 입구에 도착해서야 익숙한 기척을 감지했다.
“…마사인 경?”
“저하.”
마침 비슷한 타이밍에 성진을 발견한 마사인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서며 예를 취한다.
‘아니, 지금쯤 진주궁 연무장에서 몸을 풀고 있어야 할 양반이, 난데없이 본궁에는 왜 나타난 거람?’
하지만 그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가던 성진은 이내 움찔 놀라며 발을 멈췄다. 그도 그럴 것이, 마사인의 손에는 그가 방에 두고 온 호두까기가 버젓이 들려 있었던 것.
이래서야, 마사인이 이른 아침부터 누구를 쫓아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음…….”
성진이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가온 기사가 정중하게 호두까기를 내민다.
“저하. 아무리 바쁘셔도 중요한 무장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어, 고맙네. 마사인 경.”
성진이 검을 받아 허리에 차자, 마사인은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허락 없이 저하의 검을 들고 와 송구합니다. 하나 바로 아침 수련을 가실 것 같아 미리 준비했습니다. 그럼 이대로 연무장으로 모실까요?”
“그, 그럴까?”
성진은 묘한 죄책감에 순순히 그의 뒤를 따르며 생각했다.
어째 이 양반은 내 돌발 행동에 점점 익숙해지는 거 같은데? 이거 괜찮은 건가?
[괜찮겠냐, 이 사고뭉치야? 전에 비해 부쩍 늙은 저 얼굴을 보라고!]
…아, 좀 닥쳐!
* * *
“오웬 황자님의 악몽 말씀입니까…….”
진주궁으로 돌아오는 길, 성진은 마사인으로부터 오웬에 관해 더욱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황자님께서는 처음 황궁에 오셨을 때부터 그러셨습니다. 도통 편히 주무시지를 못하셨죠.”
실제 황가의 피를 이었지만 지금은 일개 기사의 신분이 된 마사인 경이다. 오웬을 무시할 법도 할 텐데, 깍듯하게 경칭을 잊지 않는 것이 그답다고나 할까.
“거의 매일 밤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당시 다른 황자‧황녀님들의 걱정이 무척 컸습니다.”
성황가의 아이들은 오웬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잡다한 지식이 많았던 아멜리아는 매번 수면에 좋다는 약초며 향초를 구해오곤 했고, 함께 청장미궁에서 생활하던 로건은 저녁마다 그에게 자장 차를 타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오웬을 무척이나 잘 따랐다는 시슬레는, 매일 아침 그를 방문해 조막만 한 손으로 신성력을 흘려주기도 했다.
그러던 오웬이 안정을 찾기 시작한 것은, 그가 황궁에 온 지 거의 1년은 더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니, 안정을 찾았다기보다는 또 다른 정신 이상이 시작된 것에 가까웠지만.
-어제는 무척 신기한 꿈을 꿨지. 나는 어딘가 알 수 없는 장소에서 열심히 사냥을 하고 다녔어. 그런데 그곳은, 사냥감을 죽이면 허공에서 돈이 생겨나는 무척 이상한 곳이었거든.
모처럼 조용한 밤을 보낸 오웬이, 허공을 손가락질하며 말을 이었다.
-근데 꿈에서 본 글자들이 지금도 보이네? 너희들은 이 글자들이 보이지 않아?
악몽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결국 미쳐가고 있는 게 아닐까?
모두가 그를 걱정했지만, 놀랍게도 그때부터 오웬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악몽으로 인한 우울감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타고난 그의 쾌활한 성격이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간혹 모레스와 으르렁거리는 것을 제외하면, 한동안 평화로운 황궁의 일상이 이어졌다.
그렇게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여기고 있었는데-
“…강해지겠다며 갑자기 남부 전선으로 떠난 거군.”
성진의 말에 마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무척 강해지셨지요.”
그때부터 오웬은 마치 신들린 것처럼 혁혁한 활약을 이어나갔다.
해수들을 해치워 전선을 정비하고, 고립된 포교단원을 구출하는 등. 소소한 공을 세워나갔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전선의 가장 선두에서 적들을 썰어내고 있더라나?
그렇게 약관도 되지 않은 소년 하나가, 무려 기울어가던 남부 전선의 전황을 송두리째 바꾼 것이다!
“참으로 훌륭하게 ‘고귀한 자의 의무’를 이행하셨죠. 성황가의 일원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분입니다. 간혹 무도한 자들이 그분의 공적을 깎아내려 합니다만, 그것은 순전히…….”
마사인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웡웡!
저 멀리 연무장에서 성진을 알아본 막스가 신나게 꼬리를 치며 달려온다.
녀석은 한참 수련하는 기사들을 방해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아침마다 반복되는 일종의 놀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막스!”
성진은 힘껏 달려든 녀석을 겨우 넘어지지 않고 받아, 꽉 끌어안아 주었다.
“너 인마. 왜 기사들을 방해하고 있어? 단장님이 제대로 놀아주지 않았어?”
그러자 멀리서 브루노 단장이 억울한 표정으로 텅 빈 양손을 들어 보인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분명했다.
‘놀아주고 싶어도 이제는 남은 접시가 없습니다.’
그사이 새로 만든 접시를 모조리 물고 도망친 모양.
[다들 멍청한 잡종개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거 아냐?]
마왕이 빈정거렸다.
그러게? 이제는 ‘물어 오기’ 정도는 제대로 할 때도 되지 않았나? 아무래도 개치고는 좀 멍청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데.
“막스, 이 녀석! 너 접시들을 모두 어디 숨겼어? 응?”
성진이 꾸지람을 하자, 막스가 천진한 눈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끼잉?
‘…흠, 자기가 귀여운 줄 아는 거 보면 또 똑똑한 거 같고.’
결국 성진은 접시 되찾기를 포기하고는, 녀석의 귀를 부드럽게 긁어주었다.
“그래그래. 혹시라도 좀 멍청하면 어때? 이렇게 귀여운데.”
그러던 중, 연무장 한쪽에서 기합을 받고 있는 하벤 경의 모습이 얼핏 눈에 들어온다.
물론 성진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벤 경이니까, 또 뭔가 큰 실수를 한 거겠지.
[그 실수가 뭔지 알 거 같아. 너는 어때?]
‘그래? 난 도통 모르겠는데.’
[…이성진. 너 어째, 시치미 떼는 게 점점 능숙해지는데?]
‘닥쳐!’
시치미는 무슨! 아침부터 괜히 사람을 모함하지 마라, 이 마왕 놈아!
* * *
다그닥, 다그닥.
오웬의 악몽은 언제나 흔들리는 수레 위에서 시작되었다.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사냥꾼이었던 부모님과 함께 정기적으로 가죽을 팔기 위해 읍내로 나갔던 날은.
-어서 일어나라, 오웬! 오랜만에 읍내까지 와서 늦잠을 잘 생각이냐?
비몽사몽 짐수레에서 뒹굴던 자신을 깨우는 아버지의 목소리.
이미 몇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얼굴은 기억 속에서 흐릿해졌지만, 건장하던 팔과, 오웬과 똑같은 구리빛 머리카락만은 아직도 뇌리에 깊이 남아있다.
-오웬, 어서 일어나서 이걸 들고 근처 교회에 가보렴. 아무래도 사제님들께 축성을 부탁해야 할 것 같구나.
그러게 말하는 어머니의 얼굴도 역시 흐릿했다.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와, 그녀가 내미는 팬던트의 선홍색만은 이리도 생생한데.
-바트의 선물? 그건 왜?
-요즘 이 목걸이를 걸고 자는 날이면 매번 악몽을 꿔. 사방이 불길에 휩싸여 있는 무서운 꿈이야.
-그래? 지금까지는 그런 일 없었잖아?
-응. 그러니까 일단 오웬을 시켜서 사제님에게 보여 보려고. 뭔가 부정을 탔을지도 모르지.
부모님의 조용한 대화를 끝으로 장면은 빠르게 바뀌어, 어느새 오웬은 읍내 외곽에 있는 한 교회에 와 있었다. 한 손에는 어머니가 맡긴 선홍색의 팬던트를 쥔 채였다.
툭!
그런데 오웬은 교회의 입구에서 이상한 사람 하나와 부딪히게 되었다. 고급스러운 옷과, 그에 어울리지 않는 괴상한 반가면을 쓴 남자.
[…이건 또 뭐야?]
반가면 너머로 섬뜩한 안광이 노랗게 빛났다.
[왜 이런 게 여기에 있지? 죽었어야 할 놈이 왜 멀쩡히 걸어 다니는 거냐?]
그 시선을 마주한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지독한 공포가 오웬을 덮쳐왔다.
Chapter 5: Chapter 305
Chapter Text
305. 마왕 2호 (3)
오웬은 남자의 앞에서 얼어붙었다. 그것은 아마도, 절대적인 포식자를 앞에 둔 생물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공포였으리라.
반가면을 쓴 이 이상한 남자는, 오웬으로 하여금 언젠가 산에서 맞닥뜨렸던 거대한 해수를 떠올리게 했다.
-오웬. 자세를 낮추고 가만히 숨을 죽이렴. 저것이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입김을 내뱉을 때마다 위협적인 저주파를 울려대는 검치곰을 경계하며, 오웬의 머리를 바짝 내리누르던 아버지의 손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냥꾼이라 생각했던 아버지조차도, 그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무서운 포식자의 기억을.
-죽었어야 할 놈이 왜 멀쩡히 걸어다니는 거냐?
무엇보다도 남자가 한 말. 그것은 오웬에게는 다른 의미로 익숙한 것이었다. 그의 부모는 오웬이 잊을 만하면 버릇처럼 이렇게 되뇌곤 했던 것이다.
-그날 바트가 아니었다면, 엄마는 너를 무사히 낳지 못했을 거란다. 이 모든 것이 다 주신의 보살피심이 아니겠니. 그러니 오웬, 너는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고 살렴.
이자는 대체 뭐지? 어떻게 자신에 대해 알고 있지? 무엇보다도, 왜 이렇게 온몸의 떨림이 멈추질 않는 거지?
주춤. 오웬이 사색이 되어 뒤로 한걸음 물러서자, 남자는 가면 아래의 입꼬리를 죽 찢으며 웃어 보였다.
[제법 감이 좋은 아이다. 하지만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겠구나.]
다행히도 남자는 당장 오웬을 해칠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나는 너처럼 젊은 아이들이 품고 있는 작은 불씨들을 좋아한단다. 비록 타오를 가능성이 없는 미약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품고 있는 일말의 가능성만은 참으로 찬란하게 빛나니까 말이다.]
툭툭.
[물론 그것도 지금 한때겠지만 말이지.]
오웬의 어깨를 성의 없이 두드려 준 남자는, 그런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는 그대로 멀리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의 작은 손길에도 바짝 소름이 돋았던 오웬은, 그로부터 한동안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후 남자와 엇갈려 교회로 들어간 오웬은 사제를 만났지만, 그와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자세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다음으로 또렷하게 떠오른 장면은, 거대한 불길에 휩싸인 읍내.
노랗고도 붉은 화마가 온 마을을 집어삼키며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오랜 가뭄으로 물을 길어 나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망연자실하여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어머니…….
경전 속 지옥처럼 활활 타오르는 불바다와, 자욱하게 퍼져나가는 연기가 지극히도 비현실적이다.
오웬은 홀린 듯 불길을 향해 나아갔다.
-아, 아버지! 어머니!
어이, 저놈 뭐야?
잠깐, 들어가겠는데? 어서 잡아! 말려!
허둥지둥 불길을 향해 달려가던 오웬은, 웬 장한의 손에 붙잡혀 거세게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툭!
바로 그때였다. 오웬의 주머니에서 웬 부싯돌 하나가 튀어나온 것은. 오웬 스스로도 왜 거기 있는지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저게 뭐지?
그리고 동시에, 모두의 머릿속을 울리는 묘한 목소리가 있었다.
[저 거대한 불이 단지 사고로 일어난 것일까? 우연찮게도 화재의 현장에 부싯돌을 가진 녀석이 나타났구나. 무척이나 의심스러워.]
순간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변했다.
-저건 보통의 부싯돌이 아니야! 오르토나 일부 지역에서 나는 귀한 돌이다!
-어린애가 왜 저런 값비싼 걸 가지고 있지? 저놈 혹시 방화범인가?
-뭔지 몰라도 일단 잡아!
대번에 거칠어진 사람들의 손아귀 속에서, 오웬이 사력을 다해 발버둥 쳤다.
-이거 놔! 저 속에 우리 부모님이……!
하지만 동요한 사람들의 만류는, 어느새 소년을 향해 쏟아지는 무자비한 폭력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오웬이 무력하게 불길을 향해 손을 뻗고 있을 때였다.
화르륵!
갑자기 오웬의 눈앞에, 본래의 기억과는 조금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마을을 태우던 거센 불길과 그를 구타하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이, 이제는 온 세상이 화마로 뒤덮인 생경한 지옥의 광경이 있었다.
-…이건, 뭐야!
하늘과 땅, 모든 것이 그저 피처럼 검붉다.
오웬은 가쁜 숨을 들이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의 그는, 더 이상 그때의 어린 소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델크로스의 오웬. 남부 전선의 선봉에 서서 적을 도륙하는 무적의 전사.
그럼에도 이 완전한 지옥의 풍경 속에서, 오웬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분하고 절망스러웠다.
-……!
한데 오웬의 앞에, 언제부터인가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처음 보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나는 뒷모습. 소년이 쥔 검에서 검붉은 오러가 피어오르고, 그의 옅은 금발 역시 화마를 반사하며 불길한 검붉은 빛으로 빛났다.
저벅.
소년이 앞으로 걸음을 옮기자, 오웬이 그를 향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들어가지 마! 지금 거기가 어디라고……!
어느새 몸이 자유로워진 오웬은, 저도 모르게 그를 부르며 달리고 있었다.
-야! 거기 멈춰! 뉴비…….
“…비.”
“저하.”
“뉴비야.”
“저하!”
번쩍.
다급히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자, 오웬을 흔들어대던 알리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알리샤?”
“네, 저하. 접니다.”
“…….”
더없이 절박했던 심정은, 현실을 자각함과 동시에 썰물처럼 자취를 감춘다.
안정을 되찾은 오웬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알리샤가 재빨리 모포를 들어 식은땀으로 흥건한 그의 이마를 훔친다.
지난 수년간 곁에서 오웬을 보필해 온 호위기사는, 간혹 그가 시달리는 악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저하, 외람되오나 잠시 나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웬의 호흡이 가라앉는 것을 확인한 알리샤가 다급한 목소리로 고했다.
“아침부터 웬 바르샤인들이 저하를 찾고 있습니다.”
* * *
“나는 푸르마 부족의 전사, 바르토자! 델크로스의 오웬에게, 부족장의 목숨 값을 물으러 왔노라!”
목책 밖에는 한 무리의 바르샤 전사들이 모여 있었다. 장대한 장한 하나와, 그를 호위하는 다수의 전사들이었다.
도끼를 들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장한, 바르토자는, 델크로스 진영이 다 울리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러니 어서 밖으로 나오라! 나와서 나와 무기를 맞대라! 설마 정당한 피 값을 묻는 결투를 피하는 형편없는 겁쟁이는 아니겠지, 오웬이여!”
오웬이 목책으로 다가가자, 중년의 기사 하나가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친위대 제4기사단의 단장이자, 남부 전선의 책임자인 아비게일 경이다.
“저 무식한 이교도 놈이 아까부터 저런 개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저하. 돌아가라 경고를 해도 도통 들어먹지를 않으니, 참으로 막무가내가 아닙니까.”
“흠.”
오웬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나란히 서서 목책 밖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밖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한 장한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진다.
“당장 이리로 내려와라! 델크로스의 오웬!”
그러자 발끈한 알리샤가 제법 능숙한 바르샤 어로 소리쳤다.
“함부로 귀하신 분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너희의 부족장은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피 값을 이제 와 요구하는 것이 과연 정당하다고 보는가?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 돌아가라!”
하지만 장한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닥쳐라, 오웬의 개야! 그의 옆에서 손발이 되어 움직이더니, 이제는 그의 입까지도 대변하려 하느냐! 자진해서 개가 되길 자처하다니, 어엿한 전사로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푸하하하!
그의 뒤에서 다른 바르샤인들이 배꼽을 잡고 웃어댄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저들은 푸르마 부족이 아니야. 카라잔이군.”
그때 그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오웬이 말했다.
“확신하십니까, 저하?”
“그래. 도끼를 들고 소리 지르는 놈을 제외하면, 뒤에 있는 모두가 카라잔 부족의 전사들이다. 겉모습은 그럴싸하게 위장하고 있지만, 도끼를 쥔 운지법이 확연히 다르군. 저런 실수를 하는 걸 보면 아직은 애송이들인 모양이야.”
바르샤의 부족들은 대개가 비슷비슷했지만, 그래도 부족의 전통에 따라 간혹 독특한 차이점이 존재했다.
오랜 시간 볼란타 부족과 부대낀 오웬은, 제국인들이 쉬이 넘길 수 있는 그런 미세한 차이점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카라잔입니까…….”
그에 아비게일 경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졌다.
“저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주의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와카나 투사이, 그 늙은 여우가 또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말이니까요.”
간혹 발생하는 국지적인 충돌 외에, 최근 남부 전선은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일부 온화한 부족과는 정기적인 문물 교환도 이루어지는 상황. 최근 오웬이 자주 방문하는 볼란타 부족 역시, 이런 온건한 부족 중 하나였다.
반면 카라잔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바르샤에서도 가장 위세를 떨치는 대부족이자 호전적인 부족. 특히나 그들의 족장, 와카나 투사이는 한결같이 델크로스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자였다. 언제든 전장의 불씨가 다시 당겨지기를 조용히 숨죽여 기다리는 것이다.
“참으로 실망스럽구나, 오웬이여! 델크로스 부족장의 장자는, 여자의 뒤에 숨어 벌벌 떨기만 하는 겁쟁이인가!”
고래고래 소리치는 장한을 보며, 오웬이 허리춤의 도끼를 거머쥔다. 그러자 아비게일 경이 오웬을 만류했다.
“저하. 저들의 유치한 도발에 일일이 응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린 전사들만을 보냈다면, 아마도 와카나 투사이 역시 전멸을 각오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웬은 고개를 저었다.
“바르샤의 추수 감사절이 다가오네, 아비게일 경. 조만간 바르샤의 모든 부족장이 모이는 대회의가 열릴 테지.”
수년간 전장에서 지켜본 바, 와카나 투사이는 호전적인 만큼 머리도 굴릴 줄 아는 자였다.
오웬이 볼란타 부족과 제대로 교류하기까지, 그녀로부터 얼마나 많은 방해 공작을 받았는지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통이 터질 정도.
“카라잔의 입장은 언제까지나 확고하다. 응하지 않으면 응하지 않는 대로, 또 전멸하면 전멸하는 대로. 저들은 정당한 피 값을 빌미로 다시 한번 우리와 전쟁을 일으키자 주장할 거다.”
“그것은 억지 주장일 뿐입니다.”
“하지만 제국에 반감을 가진 다른 장로들에게는 효과적으로 먹혀들 테지. 이대로 저들을 무시하는 것은, 결국 와카나 투사이의 뜻대로 놀아나는 결과밖에 되지 않아.”
“…….”
아비게일 경의 눈이 황자가 쓰다듬는 도끼 자루에 잠시 가 닿는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상 황자의 뜻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오웬이 누군가.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바르샤의 정예 전사들을 단신으로 여유롭게 돌파하고 부족장의 목을 따오는 황자가 아닌가.
저런 조무래기 전사들을 상대로 일일이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음?”
그때 갑자기, 뭔가를 발견한 오웬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갑자기 무슨 소리지? 뭘 수집하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 오웬의 눈앞에는 새로운 퀘스트 창 하나가 반짝 떠올라 있었다.
[깜짝 퀘스트 - 신기한 독침 수집]
[퀘스트 등급 : A]
[카라잔의 한 기술자는 최근 새로운 무기를 개발했습니다. 방패 속에 몰래 숨겨 은밀히 암살을 꽤할 수 있는 혁신적인 무기지요. 바르샤의 모든 전사들이 이 무기를 보고 차마 수치스러움을 감출 수 없겠으나, 혹시 아나요? 카라잔의 늙은 여우에게는 제법 쓸모 있어 보일지도요. 독침의 견본을 수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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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Chapter 306
Chapter Text
306. 마왕 2호 (4)
푸르마의 바르토자.
그는 지금 델크로스 진영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소리치고 있었지만, 내심은 겉보기와 달리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 전쟁에서 두 차례 연이어 족장을 잃은 후 몰락해 가는 푸르마 부족.
부족장 쟁탈에서 밀려나고 말았지만, 바르토자는 제법 야심이 넘치는 사내였다. 이에 그는 과감히 자신의 부족을 버리고, 가장 강력한 부족 중 하나인 카라잔에 몸을 의탁하고자 했다.
-지금 우리 부족은 수치를 모르는 겁쟁이가 되어 쇄락해 가고 있소!
물론 어렵사리 와카나 투사이와 대면했을 때, 바르토자는 이 늙은 여우 앞에서 자신의 변절을 멋지게 포장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여 나는 부족장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부족을 버렸소! 복수를 위해 전사로서의 긍지까지도 버렸소이다!
-호오…….
-이 바르토자, 바르샤에서 가장 용맹한 카라잔의 형제들과 말을 달리며, 제국의 무리들을 선조의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려 하오! 그러니 내게 다시 한번 무기를 들 기회를 주시오!
한데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카라잔의 족장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훌륭하다. 바르토자여.
강퍅하다는 명성과 달리, 순수하게만 들리는 칭찬. 바르토자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늙은 부족장 와카나 투사이는 마치 이제 막 목을 따려는 양을 마지막으로 품평하듯,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위험하게 번들거리는 빛을 반사하는 맹수의 눈을 하고서.
-전사의 긍지를 버리고, 위대한 선조들의 영혼 앞에 설 기회마저 버렸는가. 그만큼 제국을 향한 복수심이 거대하다는 말일 터. 하면 내게 너를 도울 적절한 방법이 있다.
…이게 아닌데.
불길한 예감에 눈에 띄게 턱을 덜덜 떨기 시작하는데, 그런 그의 머리 위에서 늙은 여우가 선심 쓰듯 덧붙였다.
-마침 부족의 젊은이 하나가 대단히 재미있는 것을 만들었지. 이것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델크로스의 오웬을 죽일 수 있을 터. 내 너의 위업을 후대에 전할 수 있도록, 우리의 전사들도 붙여주마.
-그, 족장이시여…….
-무얼. 죽어서도 영원히 고독할 것을 각오한 굳은 전사에 대한 예우다. 바르샤의 형제로서 당연한 도움이니 부디 사양하지 말라.
-…….
그렇게 족장이 내린 술잔까지 받은 그는, 자신을 돕기 위한 건지, 감시하기 위한 건지 알 수 없는 한 무리의 전사들과 함께 억지로 여기까지 끌려온 것이다.
도중에 몇 번이고 도망칠 기회를 엿봤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보이는 순간, 오웬을 노리던 무기가 그대로 자신을 향해 쏘아질 테니.
“어서 나와라! 델크로스의 오웬!”
그래서 그는 목이 떠나가라 오웬을 부르면서도, 속으로는 연신 이리 되뇌고 있는 것이다.
‘나오지 마라, 오웬! 제발 밖으로 나오지 마!’
바르토자의 눈은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그들 주위에는 제국인들뿐 아니라, 이들과 교류하는 바르샤 부족의 사람도 몇몇 보였다. 와카나 투사이가 보낸 전사들이, 어설프게나마 푸르마의 전사로 위장한 것은 그 때문일 테지.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오늘 일은 결국 바르샤 전체에 퍼지겠구나!’
그로서는 오웬이 이 도발에 응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그’ 유명한 오웬을 겁먹게 만들었다는 명성을 가지고 카라잔에 의탁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오웬이 결투를 벌이겠다고 한다면-
‘혹여 성공한다고 해도, 부족장의 아들을 잃은 제국인들이 우리를 살려두려 하지 않겠지…….’
그리고 바르토자에게는 안타깝게도, 오웬은 그 명성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용맹한 전사였다.
삐그덕-
곧 목책의 문이 열리더니, 경갑을 입은 훤칠한 청년이 바르토자를 향해 다가온다. 한 손에 커다란 둔기를 든 채였다.
청년의 긴 머리채에는 짧은 기간의 전적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깃털들이 한들한들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가!’
바르토자는 그 순간, 죽음을 각오했다.
드드드드.
오웬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손에 들린 둔기가 바닥에 끌리며 매캐한 먼지구름을 일으킨다.
투박한 장식이 어지러이 붙어있는 묵직한 워 해머. 바르토자의 눈에도 제법 익숙한 물건이었다.
“그건……?”
“이걸 알아보는가? 당연히 그래야겠지.”
오웬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적어도 부족장의 핏값을 당당히 들먹인 네 녀석만은 카라잔이 아니어야 할 테니까.”
“……!”
이미 일행의 정체를 알고 있어?
바르토자가 도끼를 겨누며 식은땀을 흘리자, 오웬이 그것을 쿠웅! 바닥에 내던지며 어깨를 풀었다.
“이건 예전에 푸르마의 부족장을 치고 얻은 전리품이다. 만일 나를 죽이고 부족의 패배를 설욕할 수 있다면, 이걸 기꺼이 너에게 넘기지. 부족으로 가져가서 다 함께 족장의 영혼을 기려라.”
혹여 자신이 죽더라도, 결투에서 이긴 바르토자를 죽이지 않겠다는 간접적인 약속.
‘…정말일까?’
제국인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제 바르토자가 매달릴 것은, 오웬의 그 가벼운 한마디뿐인 것을.
“으아아아아!”
마지막으로 각오를 다진 바르토자가 필사적으로 오웬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퍼억!
바르토자의 도끼가 땅에 세워진 족장의 해머를 무의미하게 내리찍는다. 오웬이 그의 공격을 피해 허공으로 몸을 날렸기 때문이다.
빙글.
한 손으로 해머의 자루를 짚은 오웬은, 그대로 방향을 돌리며 바르토자의 머리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보기에는 가볍지만, 오러가 잔뜩 실린 묵직한 일격.
‘……!’
바르토자는 가까스로 몸을 낮춰 공격을 피했다. 물론 정수리의 머리카락과 함께, 장식되어 있던 깃털 한 뭉텅이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어쩔 수는 없었지만.
어차피 몸이 이미 자잘한 상처들로 뒤덮여 가는 중이었으니, 그딴 머리카락쯤이야.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고?’
바르토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오웬은 그를 쫓지 않고 멀뚱히 바라보기만 한다.
아까부터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차였다. 오웬은 그를 공격하는 데 그리 필사적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바닥에 박혀 있는 족장의 해머에서 도통 손을 떼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것.
자루를 방패로, 혹은 몸을 돌리는 지지대로 삼으며 주변을 경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바르토자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한 태도.
‘설마 독침을 눈치챈 것은 아닐 텐데…….’
세상 어느 누가 바르샤 전사가 암습을 하리라 예상하겠는가. 이것은 순전히 바르토자를 우습게 보는 것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더욱 열 받는 점은, 오웬이 아직 자신의 애병을 뽑아 들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크으…….”
분에 찬 신음을 흘리자, 오웬이 말을 걸어왔다.
“마지막으로 경고해 주지. 이 의미 없는 싸움을 계속하겠는가? 너와 저 어린 전사들은 순전히 와카나 투사이의 버린 패가 되었을 뿐이야.”
“…….”
“차라리 모두가 도망자가 되어 초원을 떠돌면, 적어도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을 터.”
바르토자를 향해 말하고 있지만, 오웬의 눈은 그들의 뒤에서 방패를 들고 서 있는 카라잔의 전사들을 향해 있었다. 이미 이 상황의 주도권을 쥔 자가 누구인지 파악하고 있는 모습.
“웃기지 마라, 제국인! 감히 전사의 명예를 함부로 모독하지 마라!”
카라잔 전사들의 분위기가 흉흉해지는 것을 느낀 바르토자가, 저려오는 손으로 도끼를 거머쥐며 소리쳤다.
차라리 그들 모두를 처참하게 죽였다면 이렇게까지 우스운 꼴이 되지는 않았을 터. 오웬은 전사들의 명예를 철저하게 실추시켜, 와카나 투사이의 음모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이대로는 여기서 살아남아도 죽는다! 와카나 투사이의 손에 죽고 말아!’
그렇게 배수진을 친 바르토자가 재차 오웬을 향해 달려들고-
오웬의 눈이 그의 도끼를 향해 돌아가는 찰나의 순간-
방패를 들고 선두에 있던 카라잔의 전사가 예고도 없이 한껏 볼을 부풀렸다.
슈욱!
미세한 바람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독침이 오웬을 향해 쏘아진다. 바르토자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이었다.
“……!”
한데 그때, 오웬이 쥐고 있던 해머 자루가 스르륵 앞으로 기울어진다.
탱! 탱! 탱!
마치 빨려들어가듯, 넓적한 자루에 부딪힌 암기가 모조리 바깥으로 튕겨나간다.
“어, 어떻게……!”
바르토자의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쉬익! 쉭!
곁에 있던 카라잔 전사 두 사람이 추가로 독침을 날렸다. 보통 사람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가늘고 작은 암기였지만-
탱탱탱!
오웬은 다시 예상했다는 듯 도끼자루로 독침을 모조리 튕겨내 버렸다.
“암기다! 저들이 암기를 쓴다!”
한발 늦게 사태를 깨달은 아비게일 경이, 목책 뒤에서 화살을 날렸다.
쐐액- 퍽!
뒤쪽에 있던 카라잔의 전사 하나가 정통으로 이마를 맞고 뒤로 넘어간다.
곧이어 가세한 궁수들과 알리샤가, 남은 전사들이 무기를 뺄 틈도 주지 않고 화살을 쏘았다.
퍼벅! 벅!
모여 있던 전사들이 뭔가를 해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
머리 위로 빗발치는 화살.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바르토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쩔쩔매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바닥에 쓰러졌던 전사 하나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독침을 입에 문다. 그들이 푸르마가 아닌 카라잔이라는 증거 자체를 완전히 인멸하려는 것이었다.
퍼걱!
그러나 놈의 시도는 날아온 한손도끼로 인해 무산되었다. 어느새 해머 자루를 놓은 오웬이, 자신의 도끼를 뽑아 놈의 머리통을 향해 던진 것.
“어떤가? 네 목숨을 살려준 걸로 핏값을 받은 셈 치는 건?”
바짝 얼어있는 바르토자를 일별하며 씨익 웃어 보인 오웬은, 곧 몸을 숙여 부지런히 독침과 무기를 수거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새로이 떠오른 퀘스트 완료 창을 확인한다.
[깜짝 퀘스트 - 신기한 독침 수집]
[퀘스트 등급 : A]
[총평 : 당신은 적이 숨기고 있는 독침을 간파하여 성공적으로 그것을 수거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조리 발사되기 전에 이를 저지할 수 있었다면, 분명 완전한 암기 수집이 가능했겠지요. 모자라는 순발력을 원망하며, 앞으로는 더욱 실력을 쌓기 위해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완료 등급 : C+]
[보상 : 60(-20) P캐시]
[*본 상품은 판게아 클로니클 상점 창에서 사용 가능합니다.]
‘상태창 씨의 경고가 진짜였군.’
오웬은 혀를 내둘렀다.
정정당당한 결투에서 독침을 사용하다니, 본래의 바르샤 전사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방심했다가 하마터면 결정적인 타이밍에 독침을 맞을 수도 있었겠지. 만일 상태창 씨의 퀘스트가 없었다면 말이다.
상태창 씨의 보상이 이렇게 대놓고 적은 경우는 단 하나. 바로 자신에게 선심 쓰듯 던져주는 경고 퀘스트일 때였다.
‘고마워, 상태창 씨.’
오웬이 고마움을 담아 사념을 전하자, 뾰롱 하고 또다시 창 하나가 떠오른다.
[입에 발린 소리를 해도 추가로 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당신의 지극히 모자라는 순발력을 원망하며, 앞으로는 더욱 실력을 쌓기 위해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완료 등급 : C+]
[보상 : 60(-20) P캐시]
[*본 상품은 판게아 클로니클 상점 창에서 사용 가능합니다.]
아아, 그래. 감사의 마음이 싹 가시는군.
“이제 이들의 무기는 정당한 내 것이 되었다. 이건 이대로 수거해서 볼란타의 장로들에게 보일 테니까.”
오웬은 아직도 뻣뻣하게 굳어있는 바르토자를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너는 가라. 가서 와카나 투사이에게 전해.”
순간 바르토자에게, 델크로스의 오웬은 카라잔의 늙은 여우 이상으로 위협적인 맹수로 보였다.
“바르샤 부족들 전체를 전란에 휘말리게 하고 싶다면 어디 뜻대로 해 보라고. 이 오웬의 이름을 걸고 맹세컨대, 그 전장에서 카라잔만은 누구 하나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 * *
한편, 같은 시각.
아멜리아의 부름으로 은장미궁에 도착한 성진은, 응접실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차를 마시다 눈이 휘둥그레진 이사벨라 스카르차피노였다.
“히익?”
성진이 흉흉한 눈으로 쏘아보자, 이사벨라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차를 퉤, 찻잔으로 뱉어낸다. 결코 사교계의 여왕이 보이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품위 없고 덜떨어진 행동.
쿨럭쿨럭!
뒤이어 미친 듯이 터져 나오는 기침 소리를 들으며, 성진이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또 무슨 반응이야?’
근데 그것보다, 저 자식이 대체 왜 은장미궁에 있는 거람?
Chapter 7: Chapter 307
Chapter Text
307. 마왕 2호 (5)
성진이 아멜리아의 방문 요청을 받은 것은 거의 정오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마침 마물 전담반 일을 보고 있던 성진은, 밀로 상단이 가진 몇 가지 소소한 독점 거래 건을 두고 고민하던 중이었다.
‘괜찮은 것들은 그냥 ‘베르트란 & 리’에서 가로챌까…….’
본래라면 이대로 행정부에 넘겨, 타 상단의 신청을 새로이 검토할 일이었지만, 그쪽에 위임해 봤자 어차피 고위 사제들의 인맥으로 떨어지거나 뇌물 수수의 빌미가 될 게 빤했다.
그럴 바에야.
‘…아니지.’
하지만 성진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변변찮은 중소 상단이다 보니 썩 마음에 차는 건도 없는데, 괜히 가로챘다가 별 이득을 보지 못하고 구설수에 오를 가능성도 농후했다.
‘이왕 한탕 할 거라면, 좀 괜찮은 건이 나왔을 때 제대로 가로채야지.’
거기다 지금은 빠듯한 자금을 모두 북부 사업에 쏟아 부어야 할 때. 바로 참연어 사업과 더불어, 북부의 유통망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대체 언제까지 그 시원찮은 사업에 목을 맬 거야?]
‘닥쳐! 어디까지나 베르트란 & 리의 첫 사업은 참연어 전문점이라고!’
마왕을 윽박지른 성진은, 차곡차곡 서류를 모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이번 건도 최종적으로는 아멜리아 누님의 결재를 받으려나?’
최근 정무에 두각을 보이는 아멜리아가, 성황의 잡다한 업무를 많이 넘겨받았다고 들었지. 그렇다면 차라리 행정부를 통하지 말고 본궁으로 바로 넘겨서, 누님이 처음부터 권한을 휘두르게 두는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요즘 누님이 델크로스 내의 영향력을 조금씩 넓혀가고 싶어하는 눈치니까 말이야.
“모레스 저하. 일정이 괜찮으시면, 아멜리아 황녀님께서 잠시 들러 주시기를 청하십니다.”
때마침 은장미궁의 시녀 하나가 성진을 찾는다. 그래서 그는 반가운 마음으로, 아멜리아에게 안길 서류를 챙겨들고 마물 전담반을 나섰다.
“…음?”
한데 막상 은장미궁에 도착한 성진은, 응접실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바로 시구르트 시구르슨의 인형이었던 이사벨라 스카르차피노였다.
“히익?”
성진을 마주한 이사벨라는, 막 들이켜던 차를 그대로 입에 머금은 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아니, 저 자식이 대체 왜 은장미궁에 있는 거람?’
성진이 흉흉한 눈으로 쏘아보자, 이사벨라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차를 퉤, 찻잔으로 도로 뱉어냈다. 사교계의 여왕이 보이리라고는 절대 상상 할 수 없는, 대단히 덜떨어진 행동이었다.
쿨럭쿨럭!
뒤이어 미친 듯이 터져 나오는 기침 소리를 들으며, 성진이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또 무슨 반응이야?’
성진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챈 이사벨라가, 입가에 묻은 차를 닦지도 않고 다급하게 외쳤다.
“오, 오해요!”
“오해? 무슨 오해?”
“그… 그게 무엇이든, 어떤 착각이든! 그대가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오해란 말이오!”
“뭐, 이 자식아?”
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아?
성진이 살벌하게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서자, 이사벨라는 파들파들 떨며 소파의 등받이로 바짝 달라붙었다.
“지, 지금 내가 아멜리아 황녀를 해, 해하려 한다 생각하고 있지 않소?!”
“…아니냐?”
“아니오!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고 하지 않소!”
“그럼 네가 왜 여기 있어?”
“이게 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소이다!”
턱을 덜덜 떨면서 필사적으로 소리치는 걸 보니, 뭔가 음모를 꾸밀 깜냥도 없어 보이긴 하는데.
그나저나 그 말투는 어떻게 돼먹은 거냐.
“너 인마, 정 안 되면 내가 이사벨라 스카르차피노인 척이라도 하라고 했어, 안 했어? 어? 지금 내 말이 우습냐?”
성진이 예전의 경고를 상기시키자, 그제야 이사벨라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울상이 되었다.
“…히끅!”
“…….”
“히끅! 흐끅! 히끅! 허끅!”
가히 폭발적인 딸꾹질이었다.
‘…이놈 대체 뭐 하는 거야?’
하도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보고 있는데, 이사벨라에게는 천만다행으로 때맞춰 아멜리아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아아, 불러놓고 잠시 자리를 비워 미안해, 모레스. 행정부 사제가 급한 결재 건을 들고 찾아와서…….”
“아, 누님.”
성진은 대반에 인상을 풀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괜찮습니다. 저도 방금 왔습니다.”
“일이 바쁜데 내가 괜히 부른 게 아니니?”
“아닙니다. 마침 누님께 의논드릴 일도 있고요.”
“그거 다행이구나. 그런데…….”
웃음 띤 얼굴로 다가오던 아멜리아는, 일순 묘한 응접실 분위기를 눈치채고 흠칫 발을 멈췄다.
“…두 사람, 무슨 일 있었니?”
“아멜리아 저하!”
후다닥!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사벨라가, 마치 유일한 동아줄을 발견한 양 잽싸게 아멜리아의 뒤로 몸을 숨긴다.
“이, 이것 좀 보세요. 모레스 황자님께서…….”
“응? 모레스가?”
“그…….”
이사벨라는 뭔가를 더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 이내 바짝 얼어붙고 말았다. 성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지그시 그녀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기 때문.
“으… 히끅! 히끅!”
“……?”
“…자, 잠시 못 뵌 사이에 흐끅! 너, 너무나도 헌앙해지셨, 지 않겠어요? 제가 그만 감복, 하여… 히끅!”
이사벨라는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열심히 변명을 주억거렸다. 차마 협박을 받았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었던 거겠지.
그래. 정신이 나간 게 아니고서야, 감히 황족 앞에서 증거도 없이 다른 황족을 비방할 수 있을 리가.
문제는 이 대충 둘러댄 변명이 똑똑한 누님에게 먹히느냐는 건데.
“후후.”
어디까지나 성진의 기우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둘을 살피던 황녀는, 이사벨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꽃이 피어나듯 화사한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역시 스카르차피노 영애군요! 듣던 대로 대단한 안목입니다. 역시 그대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 정답이었어요!”
“……?”
“우리 모레스가 좀 지나치게 경탄스러운 외모이기는 하죠. 후후.”
이번에는 성진과 이사벨라가 아멜리아의 눈치를 살필 차례였다.
저거 지금 진심인가?
[…팔불출은 결국 유전인가 보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마왕 놈이 염상 결정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 * *
“그래, 모레스. 내가 오늘 스카르차피노 영애를 특별히 초청했단다.”
어쨌거나 다과는 얼렁뚱땅 이어지고 있었다.
대단히 불편한 기세를 풍기는 성진과, 눈에 띄게 쭈뼛거리는 이사벨라. 그리고 그 사이에 앉아 홀로 즐거운 아멜리아.
“레이디 이사벨라에게는 최근 들어 여러모로 도움을 받고 있지. 살롱의 최신 동향이나, 주목해야 할 신예 예술가들에 대해 그녀보다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습니까?”
그러자 이사벨라가 성진을 향해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지 않았소!’
물론 성진이 인상을 쓰니, 얼른 시선을 피하며 다시 딸꾹질을 시작했지만.
딸꾹! 히끅! 헤끅!
지금 몸 개그를 하나 싶을 정도로 얼빠진 모습이다. 성진은 지끈지끈 두통이 이는 것을 느끼며 아멜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신예 예술가라면, 후원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까?”
“그건 아니란다. 그저 솜씨 좋은 화가를 찾고 있었어. 이왕이면 살롱에서 인정받는 화가에게 일을 맡기는 게 좋으니까.”
“화가요?”
“글쎄 들어보렴, 모레스. 황도에서 초상화로 가장 유명한 화가를, 마침 레이디 이사벨라가 후원하고 있다지 뭐니? 그래서 그녀를 화가와 함께 특별히 초대했단다. 개인 후원자가 있는 화가에게 일을 부탁하는 경우는, 가급적 후원가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 관례니까.”
초상화? 누구의?
성진이 눈을 깜박거리자, 아멜리아가 뿌듯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네가 왔으니 더는 시간 낭비할 필요 없겠지. 어서 함께 화가에게 가보지 않겠니?”
“…네?”
그리고 영문을 모른 채 아멜리아에게 끌려간 성진은, 곧 그 초상화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주신의 문양이 새겨진 휘장 앞에서, 검은 헤네시스 장검을 들고 한껏 멋진 포즈를 취해야 했으니까. 심지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검은 망토까지 걸치고서 말이다!
‘대체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어이가 없어 뚱하니 맞은편의 화가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성진에게 주문했다.
“표정을 조금만 풀어 주십시오, 저하. 멋진 신사분에게 걸맞은 자신 있는 미소를 지어 주실 수 있으실까요?”
“…….”
“그것보다 조금 역동적인 포즈로 바꾸는 건 어떨까? 모레스, 일전에 보여준 바나하스 5식을 한 번 더 펼쳐봐 주겠니?”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은 누님의 부탁이니까.
성진은 밀려오는 민망함을 참으며, 모두의 앞에서 그럴싸하게 헤네시스 장검을 휘둘러 보였다.
그러자 곧 사방에서 요란한 찬사가 쏟아진다.
“바로 그겁니다! 저하!”
“아아, 정말 근사한 초상화가 될 것 같구나, 모레스!”
“정말 그 말씀대로입니다, 아멜리아 저하!”
“꺄아! 멋지세요, 모레스 황자님!”
심지어 은장미궁의 시녀들까지 합세하여 요란을 떠는 통에 뒤통수가 다 후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나마 이 소란에서 한 발 물러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었으니, 역시나 짜게 식은 표정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는 이사벨라다.
설마 저 녀석과 이런 곳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다행히 민망한 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대략의 구도와 분위기만을 파악한 화가가, 도구를 주섬주섬 챙겨들고 사라졌기 때문.
본격적으로 작업실을 꾸리기 위해서는 그도 준비할 게 많다는 모양이었다.
“앞으로도 때때로 은장미궁에 들러 주겠니? 한가할 때 잠깐씩이면 돼. 초상화가 완성될 때까지, 화가가 황궁에서 지내기로 했으니까.”
아멜리아의 부탁에 성진이 내심 한숨을 쉬었다.
어, 그래.
하루 만에 모두 끝나는 게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황족이라면. 평생에 초상화 하나 정도는 남기는 게 맞는 거겠지…….’
언젠가 맞아야 할 매라면, 빨리 맞는 게 나을지도.
“그런데 그냥 호두까기를 들고 있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왜 하필 헤네시스 장검입니까? 이 검은 순전히 누님께 드린 선물인데요.”
성진이 검을 건네며 묻자, 아멜리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모레스. 내가 왜 이 검을 유난히 아끼는지 아니?”
…그야 누님 취향이니까요?
성진이 어리둥절해 있자니, 섬세한 손가락이 검은 헤네시스 장검을 받아 가볍게 움켜쥐었다.
“바로 이 검이, 내가 아는 누군가에게 무척이나 어울리는 검이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말한 아멜리아가 장검을 들고 천천히 기수식을 취해 보였다.
흰 드레스를 입은 천사 같은 소녀가, 마검이라 불리기 딱 좋을 흉흉한 요철을 가진 검을 우아하게 휘두르는 광경.
순간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그 누군가처럼 되고 싶었어. 그처럼 강해지리라고 결심했지. 그래서 언제나 기억 속의 그 모습을 쫓고, 계속해서 그를 흉내 내고 있는 거야.”
아름다운 소녀는 그 순간 마치 환한 광채에 감싸인 듯 보였다. 심지어는 빛을 거의 반사하지 않는 흉흉한 검조차, 검게 빛나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으니.
그 광경은 대단히 이질적인 한편, 화가가 고심하여 배치한 정물처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구석이 있었다.
모든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와, 누님. 대단하다!’
이미 그녀가 한 말은 안중에도 없이, 성진은 묘한 감동을 느끼며 생각했다.
‘사실 화가가 정말로 그림으로 남겨야 할 장면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그리고 성진은, 순간 자신이 그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한 줄 알았다. 바로 옆에서 이런 중얼거림이 들려왔던 것이다.
“…와, 씨. 너무 멋있어! 이건 꼭 초상화로 남겨야……!”
“……?”
성진이 물끄러미 이사벨라를 바라보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화악 얼굴을 붉혔다.
“왜, 왜 그렇게 보시오?”
“…….”
“아! 다, 다른 뜻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오! 오해 마시오! 본인은 그저 서사를 상상하게 만드는 극적인 미학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황녀님의 모습이 모든 예술가들에게 대단히 영감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어, 아니. 긴장하지 마. 그냥, 왠지 너 방금은 정말로 이사벨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쨌거나 이 자식에게 받을 건 받아야겠지.’
결심을 굳힌 성진이 나직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그만 순순히 나한테 내놔.”
성진이 갑자기 무게를 잡자, 이사벨라가 잔뜩 긴장하며 되물었다.
“뭐… 뭘 말이오?”
“저 화가. 일단 그의 신병을 내게 넘겨라.”
그러자 이사벨라가 사색이 되어 다급하게 소곤거렸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요? 저자는 시구르트 시구르슨과 아무런 상관없는 자요! 그저 재능 넘치는 화가일 뿐이란 말이오! 고문해봤자 나오는 건 없을 거요!”
아니, 이 자식은 대체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무슨 엉뚱한 소리야? 저 친구가 황도에서 초상화를 제일 잘 그린다며? 다음 초상화의 의뢰자는 바로 나라고. 누님을 그릴 거야.”
“…….”
그러자 이사벨라가 어이없는 얼굴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뭐? 왜? 뭐?
Chapter 8: Chapter 308
Chapter Text
308. 마왕 2호 (6)
얼마간의 실랑이 끝에, 성진은 이사벨라로부터 완전히 화가를 넘겨받는 데 성공했다. 그를 전적으로 후원해주는 대신, 우선적으로 그림을 의뢰하기로 한 것.
카메라가 없는 세상이다 보니, 솜씨 좋은 화가 하나 정도는 곁에 데리고 있어도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잘 됐구나, 모레스.”
잠정적인 다음 초상화의 모델로 결정된 것을 꿈에도 모르는 아멜리아는, 성진에게 마음에 드는 예술가가 하나 생겼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이제 너도 문화예술에 관심을 기울일 때가 되었어. 슬슬 유명한 살롱에도 나가고, 너만의 사교 모임을 만들기도 해야지.”
“굳이 저까지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내키지 않아 되묻자, 아멜리아가 짐짓 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이야, 모레스. 장차 황도의 주축이 될 젊은 인재들을 휘어잡고 그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으려면, 지금부터라도 그런 모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단다.”
“어, 네…….”
“우리 성황가 사람들은 다들 그런 성향들이 있어. 신민들을 살피고 위하려 하면서도, 정작 그 중간에서 손발이 되어 줄 귀족들과 고위 사제들의 생리에는 소홀하거든.”
그러니 너는 두루두루 살필 줄 아는 위정자가 되어야지. 아멜리아는 그렇게 덧붙였다.
“…….”
성진은 대답 없이 아멜리아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전부터 생각하는 거였지만, 이상하게도 이 누님은 내가 황태자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단 말이지.
대체 왜일까.
“물론 내가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도 최근에야 겨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니까. 아직은 여러모로 서투르지만, 그래도 스카르차피노 영애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단다.”
저 녀석에게?
성진이 의외라고 생각하며 돌아보자, 이사벨라가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 들었소이까? 이래 봬도 이 몸은 사교계의 여왕이라 불리는 이사벨라 스카르차피노란 말이오. 무려 황녀께서 도움을 청하시는 대단한 존재라오.’
그 자신만만하기까지 한 표정에 성진은 어이가 없었다. 아까까지 겁에 질려 덜덜 떨던 놈은 대체 어디로 간 거냐?
어쨌거나 초상화 건이 일단락된 후에도, 성진은 은장미궁에 계속 머물면서 얼마간 시간을 보냈다.
지금이야 허술하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이사벨라는 엄연히 시구르트 시구르슨과 거의 동일한 인격을 가진 자. 아멜리아와 단둘이 놔두기에는 너무나도 불안했던 것이다. 이사벨라의 얼굴이 시시각각 구겨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그런 사정을 모르는 아멜리아만은, 성진이 오래 머무는 것에 순수하게 기쁨을 표했지만.
“저하. 도리안 행정관이 저하를 뵙기를 청합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녀 하나가 아멜리아에게 조심스럽게 고해왔다.
“도리안 행정관이?”
“예. 키프로스의 최근 사안에 관한 일이라 전하면, 저하께서도 아실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아멜리아가 조금 심각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쉽지만 이만 가봐야겠구나, 모레스. 그가 직접 은장미궁까지 왔다면 필시 급히 의논할 사안이라는 이야기겠지.”
도리안 행정관이라면 성진도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다. 성황이 이따금 옥새를 맡기기도 할 정도로 신임하는 자였지.
최근 부지런히 아버지 일을 돕는다 싶더니, 아멜리아가 정무에 관여하는 부분이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었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가 보십시오, 누님.”
“그래.”
이어서 아멜리아의 애석한 시선이 당황한 이사벨라에게 닿았다.
“그나저나 자리를 일찍 파하게 되어 스카르차피노 영애에게는 참으로 미안하게 되었어요.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다 함께 살롱에 가려 했는데. 이를 어쩌면 좋을까요.”
뭐? 저녁까지 저 자식과 함께 있겠다고?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이사벨라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성진이 냉큼 아멜리아에게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누님. 제가 돌아가는 길에 레이디 이사벨라를 저택까지 데려다주겠습니다.”
“……!?”
이사벨라가 경악하는 가운데, 아멜리아가 반색을 했다.
“어머, 그래 주겠니?”
그렇게 해서 성진과 이사벨라는 함께 은장미궁을 나서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얼굴 보는 것도 무척 오랜만이지? 가는 길에 느긋하게 담소라도 나누렴.”
아무것도 모르는 황녀의 해맑은 배웅에, 이사벨라는 뻣뻣하게 굳은 채 마지못해 성진이 탄 마차에 올랐다. 아까까지의 자신만만하던 태도는 또다시 온데간데없지 않은가.
성진은 저도 모르게 실소가 흘렀다.
‘이런 단순한 놈…….’
절로 경계심이 풀어질 정도로 하찮은 모습이다.
만일 시구르트 시구르슨이 작정하고 연기하는 거라면,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다각다각.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사벨라가 쭈뼛거리며 성진의 눈치를 살핀다.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성진을 만나는 통에, 이사벨라인 척 가장할 기회를 놓친 것이 이제야 마음에 걸리는 모양.
뚱하니 창밖을 보고 있던 성진은, 그 신경 쓰이는 시선에 와락 미간을 구겼다.
“뭐야? 할 말 있으면 해.”
그러자 이사벨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저… 내가 평소에도 이렇지는 않소.”
“뭐?”
“오늘은 경황이 없다 보니 일어난 실수였다오. 아까 황녀님께도 들어서 잘 알겠지만, 본래의 나는 흠잡을 데 없는 이사벨라로서 지내고 있다는 말이오.”
그래. 그런 거 같기는 하더군.
성진은 창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알았어.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 주지. 일단은 아멜리아 누님께 네가 쓸모가 있는 모양이니까.”
“…….”
한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가만히 성진의 표정을 살피나 싶더니 재차 물었다.
“그대는 왜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성진이 고개를 돌려 이사벨라에게 시선을 맞추자, 그녀는 어쩐지 대단히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왜 내게서 달리 정보를 얻으려 하지 않는 거요? 시구르트 시구르슨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을 텐데.”
“…….”
“날 내버려 두는 성황의 태도는 이해가 가오. 그는 오라클이니, 차원의 이야기꾼에 대해 새삼 더 알아야 할 것도 없을 테지. 굳이 나를 살려 둔 것은, 그저 인형으로 이용당한 이사벨라를 동정하여 베푼 아량에 지나지 않소. 하나 그대는 그와 다르지 않소?”
“다르다?”
“그렇소. 그대는 예전의 기억이 아예 없지 않소?”
그 의문은 타당했다. 시구르트 시구르슨은 실체 없이 영혼만을 옮겨 다니는 기생충에 가까운 놈. 세상에 별다른 흔적을 남길 리가 없는 것이다.
현재 이사벨라는, 놈을 잡기 위한 유일한 단서가 될 터.
“그가 남긴 방대한 지식은 점점 잊혀지고, 기억 또한 시간이 갈수록 빛이 바래게 마련. 만일 그대가 내게 차원의 이야기꾼에 대해 물으려면 지금이 최적기일 것이오.”
그러자 성진은 뚱한 얼굴로 이사벨라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 말이 맞긴 한데. 어차피 알아야 할 것은 성황 아버지가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상관없지 않을까?
게다가 너한테서 뭔가를 알아내려 해봤자, 그다지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단 말이지.
성진이 궁금한 것은 오히려 다른 부분이었다.
“내게 일부러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뭐지?”
그러자 이사벨라가 어딘가 절실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대에게 협조하는 대가로 내 안전을 보장받고 싶소. 더 이상 언제 당신 손에 죽을지 몰라 불안에 떨고 싶지는 않단 말이오!”
그건 또 무슨 싱거운 소리야?
“누가 당장 죽인대? 전에도 말했잖아. 그냥 내 앞에서 제대로 이사벨라가 돼. 아니면 그녀인 척이라도 하라고. 그럼 모든 게 해결되는 거야.”
그러자 이사벨라가 질색하며 소리쳤다.
“그건 정말로 무리요. 다른 사람 앞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그대 앞에서는 불가능하단 말이오!”
“뭐? 대체 왜?”
“잘 생각해보시오. 내가 사실은 누구인지 그대도 알고, 나도 알지 않소? 한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당신의 약혼녀 행세를 하며 교태를 부리고 다니란 말이오? 서로에게 참으로 낯부끄러운 일이 아니냔 말이오!”
…교태라니? 본래 이사벨라도 나한테 그러지는 않았는데? 거기다 우리는 정식으로 약혼한 사이도 아니라고.
성진은 황당해졌지만, 어쨌든 상대가 대답할 마음이 있다는데 이 기회를 놓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 그렇다면 하나 묻지. 시구르트 시구르슨이 현재 몸을 숨기고 있는 인형이 누구인지 아나?”
그러자 이사벨라가 단호하게 대답한다.
“알지만 말할 수 없소. 그도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인형들에게 최소한의 보호 장치를 해 두었다오. 그것을 말하려 하는 순간, 이사벨라는 의식을 잃고 완전한 백치가 되어버릴 거요.”
“…그럼 놈의 다음 계획이 뭔지는 말해 줄 수 있어?”
그러자 이사벨라는 역시나 고개를 저었다.
“물론 짐작 가는 바는 있소. 하나 마찬가지로, 그의 행보를 직접적으로 방해하려 시도하는 순간 이사벨라는 백치가 되겠지. 그러니 말할 수 없다오.”
이런 쓸모없는 놈.
그 생각이 성진의 표정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모양이었다. 이사벨라는 발끈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제발 우회적 논법이나 은유를 사용해 줄 수는 없소? 사람이 기껏 협조할 마음을 먹었는데, 좀 더 고상한 방법으로 물어달란 말이요!”
어, 난 몰라. 그런 거.
성진은 사납게 눈을 치떴다.
“어차피 대답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뭘 협조하겠다는 거야?”
“아니면 당장 당면한 문제가 아닌, 좀 더 옛날에 있었던 일들은 어떻소? 그런 것이라면 아마도 별다른 제약 없이 답변이 가능할 거요.”
“그 ‘옛날 일’의 기준이 뭔데? 설마 놈의 호구 조사라도 하란 말인가? 가족 관계부터 차근차근 캐 보라고?”
“시구르트.”
“뭐?”
일순 성진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되묻자, 이사벨라는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했다.
“그의 가족 말이오. 유일한 가족이었던 그의 아비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팔며 생계를 유지하는 자였다오. 차원의 이야기꾼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시구르트라 불렸지.”
“…….”
“그의 아비도, 또 그 아비의 아비도. 모두가 시구르트였소. 시구르트 시구르슨은 비단 차원의 이야기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이름이었던 거요.”
언제부터 그의 조상이 이름을 물려주기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시구르트의 아들, 시구르트.
또 그의 아들 시구르트.
그렇게 오랜 세월 이어진 이름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서서히 이야기꾼의 대명사와 같은 것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래서 차원의 이야기꾼이 태어났을 무렵에는, 시구르트 시구르슨이란 이름 자체에 강력한 힘이 깃들기에 이른 것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속해 있기만 한다면, 능히 다른 차원의 경계까지도 넘나들 수 있는 힘이.
“모든 이야기에는 심상을 이끌어내는 강한 힘이 있소. 특히 강렬하게 일어나는 심상은 견고한 꿈이 되고, 또한 하나의 염상이 된다오.”
이야기를 듣는 자에게 자유자재로 원하는 심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었던 이야기꾼은, 그 힘을 가지고 여러 차원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이적들을 행했다.
세 치 혀로 나라를 쉽게 일으키기도 하고, 또 세상을 완전한 도탄 속에서 허우적거리게도 할 수 있는 힘.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이 힘은 아마도 한 차원의 왕에 견줄 수 있으리.
기고만장해진 시구르트는, 스스로를 ‘꿈의 마왕’이라고 칭하는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언제나처럼 염상세계를 거닐던 그는 발견하고 말았던 것이오. 이 세상에는 단순히 단발성의 염상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닌, 차원 그 자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위대한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규상세계 말이군.”
성진이 무심코 대답하자, 이사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짐작이 맞소. 시구르트가 이야기로 일으키는 꿈의 힘을 가지고 노느라 허송세월을 하는 동안, 어느새 이 세상에는 규상세계라는 아름다운 세계를 구성하는 법칙이 탄생해 있었소.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이사벨라는, 조금 깊어진 눈으로 말을 이었다.
“이를 만들어 낸 불가사의한 존재, 바로 오라클이 있었다오.”
Chapter 9: Chapter 309
Chapter Text
309. 마왕 2호 (7)
시구르트는 온갖 차원을 돌아다니며 기상천외한 이적들을 경험했다.
한 선지자가 숨 쉬듯 손쉽게 견고한 염상들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어느 고위 마왕이 내뱉은 여상한 한숨이, 강한 염상으로 변모하며 이윽고 하나의 완전한 차원이 되는 광경을 직접 목도한 적도 있다.
“그러나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차원을 형성하는 법칙 그 자체를 만들어 내는 자를 본 적은 없었소이다.”
규상세계의 법칙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빛이 있으라.
코드를 그리 지정하면, 세상에는 언제까지나 일정한 강도의 빛이 내리쬔다.
이곳에 생명이 있으라.
코드를 그리 조작하면, 발생과 진화의 과정을 까마득하게 건너뛴 괴상한 생명들이 살아 움직였다.
심지어 그 코드들에는 물리적인 한계도 없었다.
좌표를 지정하면 지정하는 대로, 시간을 가속하면 가속하는 대로. 그저 창조자가 원하기만 하면 어디까지고 뻗어나가는 무한한 세계들.
“그중에서도 가장 불가사의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그 아름다운 코드들을 만든 오라클이, 그저 일개 인간이라는 사실이었소.”
신도, 혹은 어딘가의 고위 마왕도 아니다.
코른시임의 오라클.
평범한 예언자 중 하나라 생각하여 지나쳤던, 어느 소수 일족의 영적 지도자.
“오라클. 그는 자신이 인간들 중 가장 특별한 존재라 믿어 의심치 않던 시구르트 시구르슨에게 있어, 정면에 내던져진 오연한 도전장이나 마찬가지였다오.”
불을 지정하는 코드는 불을, 물을 지정하는 코드는 물을. 동일한 코드는 언제나 동일한 염상을 만들어낸다.
그 정형화된 규칙들을 관찰하던 시구르트는, 문득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하던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희극을 노래하면 흥분과 유쾌함을, 비극을 노래하면 비탄과 좌절을…. 모두가 내가 원하는 심상을 고스란히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 시구르트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도 가능하지 않을까?’
같은 이야기를 듣는 자들이 일으키는 심상은 언제나 비슷하다.
하면, 나의 이야기 자체를 하나의 코드처럼 기능하도록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이야기를 모으고 또 모아서, 마침내 세상을 구성하는 거대한 규칙이 되도록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그 일말의 가능성은, 오랜 유희에 일종의 권태를 느끼고 있던 이야기꾼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을 만큼 강렬한 매혹이었다.
‘그래! 나는 단발성의 꿈을 좇는 유희자가 아니라, 영원토록 기억될 위대한 이야기가 되고 싶다! 세상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이야기, 단 하나의 규칙이 되고 싶다!’
그렇게 해서 천 개의 꿈을 거닐던 이야기꾼은, 이야기의 재료를 찾아 열정적으로 본상세계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까지 들은 성진은 혀를 찼다. 들을수록 어이가 없었으니까.
대체 그게 뭐 하자는 거야?
“고작 그런 게 시구르트 시구르슨이 바라는 궁극의 목표라고? 농담이지?”
“…원대하고도 아름답지 않소?”
이사벨라의 물음에, 성진은 인상을 쓰며 코웃음을 쳤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하등 쓸데없는 일에 목을 매는 거 같은데? 그 시간에 차라리 잠이라도 쳐잤으면, 적어도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지.”
그러자 이사벨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 반응만큼은 변하지 않았구려. 기억을 잃기 전의 그대 역시, 이 이야기만큼은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오.”
“…….”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단지 그대가 다음 대의 오라클이기 때문은 아닐지. 이미 한계를 넘어설 것을 약속받은 자이기에, 이 모든 것에 무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 말이오.”
글쎄, 어떨까.
성진은 뚱한 표정을 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야기를 하는 새에 제법 시간이 흘러, 마차는 어느새 타운하우스로 향하는 길목에 도달해 있었다.
“시구르트 시구르슨은 유구한 세월을 살아왔소. 그 어떤 선지자들보다 많은 지식을 쌓았고, 그 어떤 마왕들에게도 견줄 바 없는 예술적인 염상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지. 하나 다른 차원의 왕들이 볼 때, 그의 한계는 어디까지나 명확했다오.”
그저 특출한 인간.
스스로를 아무리 ‘꿈의 마왕’이라 부르짖고 다녀도, 누구 하나 그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자는 없더라.
“하여 그는 평생을 한낱 인간이 되길 거부하며 살아왔소. 그런데 오라클이라는 더욱 특출한 인간이 존재한다 하면, 우선은 그자를 넘어서야 진정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소?”
그때 성진은, 그녀의 목소리에 섞인 미미한 자조의 감정을 귀신처럼 감지해냈다.
“그런 너 역시, 그 자식의 꿈이 조금은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아닌가?”
“……!”
그러자 이사벨라는 입을 다물고 동그래진 눈으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시구르트 시구르슨은 구제할 수 없는 바보 자식이야. 되지도 않은 목표를 위해 너무나도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 하지만 적어도 그 짓을 멈춘 지금의 너는, 그놈보다는 훨씬 나은 입장이라고.”
“…….”
“그러니 그런 변변찮은 꿈 따위는 그만 잊어 버려! 대체 언제까지 그런 정신병자의 사고에 물들어 있을 참이야? 놈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그리 어리석다 생각지는 않소. 나 역시 한때는 그 이상에 강하게 매료되어 있었으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이사벨라는, 성진의 시선을 따라 창밖으로 스쳐가는 풍경들을 아스라이 바라보았다.
“거기다 가장 강렬한 열정은 대개 단순한 동기로부터 오는 법이라오. 오랜 세월을 무료하게 살아온 시구르트 시구르슨이, 그 꿈에 정신없이 매달리게 된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
“…….”
“그저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지금은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구려. 그대가 말했듯, 이야기꾼은 다시는 내게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니 말이오.”
그리고 두 사람은 그것으로 대화를 멈추고 각자 침묵에 잠겼다.
시구르트 시구르슨에 대한 것은, 성진에게도 또 이사벨라에게도 그리 유쾌한 주제는 아니었던 까닭이라.
덜커덕.
곧 타운하우스 저택에 도착한 마차가 멈춰 선다. 성진은 먼저 마차에서 내려, 뒤늦게 몸을 일으키는 이사벨라를 향해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에티켓. 그러나 그것이 이사벨라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 모앙이었다.
설마 진심으로 레이디로 대우받지는 못하리라 생각하고 있던 이사벨라는, 놀란 표정으로 주저하며 성진의 손을 맞잡아왔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가볍게 그녀를 바닥에 내려준 성진이 입을 열었다.
“일전에 황도에 퍼졌던 회색 역병, 그건 시구르트 시구르슨의 짓이었나?”
그러자 이사벨라는 잠시 묘한 눈빛으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궁금한 게 없는 척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질문은 놓치지 않는구려.”
“…….”
“뭐, 좋겠지.”
작게 한숨을 내쉰 이사벨라는, 잠시 뜸을 들이며 말을 골랐다.
“회색 역병에 관해 내가 아는 것들을 자세히 말해줄 수는 없소. 그것 역시 어디까지 시구르트 시구르슨의 향후 계획과 긴밀하게 맞닿아있기 때문이오. 그러나…….”
여름의 녹음을 연상케 하는, 선연한 청록의 눈동자가 성진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다.
“적어도 사람에게 직접 마물의 알을 심는 무식한 짓은 그의 소행이 아니었다오.”
그러자 그때까지 녀석의 말을 숨죽이고 듣고 있던 마왕 놈이, 성진이 묻기도 전에 답을 주었다.
[진실이야.]
‘…그래.’
성진은 방금 이사벨라의 대답이, 인형사가 정한 선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적어도 저 녀석이 성진에게 협조하겠다는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레이디 이사벨라.”
성진은 그녀의 손을 얼굴 가까이로 살짝 들었다 놓아주었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아멜리아 누님의 일에 많은 도움을 주리라 기대하겠어.”
그렇게 점잖은 인사를 건네며 한쪽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리는데, 이사벨라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하게 질리는 게 아닌가!
“히, 히끅! 히끅!”
“……?”
눈에 띄게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이사벨라를 보며,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당분간 살려준다는데. 아니, 저 녀석은 왜 잘해줘도 저렇게 쪼는 거야?
[너 제발, 남들에게 웃어 보이기 전에 먼저 거울을 한번 보지 그래?]
뭐라는 거냐. 어쨌든 대놓고 협박은 안 했잖아? 그럼 된 거 아닌가.
[…방금 그게, 누님의 노예가 되어 알아서 기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이 아니었다고?]
닥쳐라, 이 얻어먹은 곰고기 값도 못 하는 배은망덕한 마왕 놈아!
넌 대체 누구 편이냐? 어?
* * *
그날 밤.
독침 사건을 의논하느라 늦게까지 볼란타 부족에 머물렀던 오웬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판게아 클로니클에 접속했다.
일행과 만나는 접선 장소에 도착하니, 늘 보던 친구들과 최근 합류한 두더쥐 공학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웬, 오늘은 좀 늦었군요.]
[어서 옵니다! 기다리고 있는!]
[반가워, 친구!]
[여, 다들 기다려 줬구나!]
오웬은 쾌활하게 손을 흔들며 자리에 착석했다.
[근데 뉴비는?]
그러자 구릅이 대뜸 머리카락을 들어 식당 반대편 구석을 가리킨다.
오웬이 돌아보니 과연, 구석자리 창가에 오도카니 앉아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 작은 산양이 보였다.
[이성진은 아까부터 뭔가 생각할 것이 있다고 했다!]
[다 모이면 부르라고 했습니다만, 어쩐지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 건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
그들의 말대로, 아기 산양이 휘감고 있는 공기는 어딘가 진중하다 못해 무겁기까지 했다.
‘뉴비 주제에, 간혹 답지 않게 저렇게 무게를 잡는단 말이지…….’
삐걱.
오웬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산양을 향해 다가갔다. 조금은 녀석을 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뉴비 녀석. 혹시라도 무슨 걱정이 있나? 그렇다면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모두에게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면 좋을 텐데.’
한편. 모두의 걱정과는 달리, 성진은 그저 이런저런 것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떠올리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곧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다는 묘한 예감에 젖은 채로.
‘이사벨라가 그랬지. 동일한 코드는 언제나 동일한 염상을 만들어낸다고…….’
그녀의 말을 빌면 그랬다. 규상세계의 형상은 곧, 완벽하게 정형화된 염상이라는 것.
그 본질은 역시 견고한 염상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얼마 전 그런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어.’
아마도 성진이 새벽에 불쑥 찾아갔던 날일 거다.
성황은 오래전 베르트랑 거리에서 이름을 떨치던 한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단 논란에 휩싸여 자취를 감추기 전까지는, 황도의 명물로 인기를 얻었었다고.
-그자는 손에서 오색의 불을 뿜어내는 위력적인 마법을 선보이곤 했지. 꽤나 장관이었느니라.
-하지만 이 세상에 마법이란 건 없지 않습니까?”
당시 성진은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적어도 그는 델크로스 본상차원에서 ‘마법’이라 할 만한 현상을 본 적은 없었으니까.
심지어 마법의 물품이라 알려진 황궁 보고의 물건들도, 하나같이 이오니아에서 만든 규상세계의 물건들일 뿐.
아니나 다를까, 성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실제로 그자는 능숙한 오러 유저였다. 약물을 배합하여 만든 불꽃을, 외기와 동시에 일으켜 사람들을 현혹시켰을 뿐이니라.
-뭐야. 그건 그냥 사기 아닙니까?
성진이 어이없어 하는데, 성황이 희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언제나 이것을 잊지 말거라, 모레스. 모든 세계에는 이런 오러와 같이 근본적인 바탕이 되는 힘이 존재한다. 만일 네 눈에 발군의 힘처럼 보이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보인다면, 언제나 그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거라.
그래.
성진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세계에는 마치 게임과 같은 마법이 있고. 오러와 같은 특수 스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근본은 모두 염상일 뿐이야. 오직 그것이 전부이지.’
마치 예전 틈새에서 보았던 아버지의 참연어처럼.
검은 유스티티아를 불태웠던 나의 마왕 2호처럼.
화르륵.
어느 순간 성진의 눈앞에 선명한 불꽃이 솟아오른다. 마왕처럼 작고 보잘 것 없지만, 한번 불이 붙으면 절대 꺼지지 않는 검붉은 겁화.
바로 마왕 2호였다.
[헉? 뉴비야!]
다가오던 오웬이 기겁하며 달려오고-
[마법? 마법이다?]
[이성진! 누군가의 공격입니까? 하지만 여기는 그린 존인데?]
다른 침묵 빌런들 역시 화들짝 놀라 성진을 바라본다.
“하하하…….”
생각보다 수월하게 일어나는 현상에, 성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오라클에 의해, 정형화된 염상이 쉽게 실체화되도록 구성된 것이 규상세계라면…….’
내 의식 속에서 완전히 정형화 된 마왕 2호 또한, 쉽게 나타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Chapter 10: Chapter 310
Chapter Text
310. 물밑 (1)
“토벌대를 보내고, 겸사겸사 교회 정기 감사 일정을 당기라. 이것이 아멜리아의 생각이라고?”
“예, 폐하.”
성황은 집무실에 앉아 한 무더기의 서류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그 옆에는 언제나처럼 도리안 행정관이 그의 마지막 결재를 기다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최근 심심찮은 빈도로 장계를 보내며 징징거리고 있는 키프로스 연합에 관한 일이었다.
“그들이 해상 마수 토벌대를 요청하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거늘. 아직은 뚜렷한 피해 상황도 없지 않은가.”
“하나 아멜리아 황녀님께서는 이번 어업 중단 사태를 특히 주목하셨습니다. 물론 제국에서 토벌단을 보내는 것에는 득보다는 실이 많을 거라 하셨습니다만.”
“그래서 교회 감사를 병행한다는 건가.”
“예, 폐하. 일을 동시에 진행함으로써 비용을 상당히 절감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입니다. 거기다 저들의 무리한 요청을 들어주는 상황이니, 고강도의 감사가 들어가도 연합으로부터 큰 잡음이 나오지는 않을 거라 하셨습니다.”
성황은 턱을 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멜리아, 그 아이가 지금 키프로스 해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진상을 알고 움직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분명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왔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그 아이 나름대로 뭔가를 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레안드로스 경을 먼저 움직여보려 했건만, 이대로 아멜리아에게 장단을 맞춰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미처 대비할 틈을 주지 않고 교회 감사를 진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으로 느껴졌다. 최근 한통속으로 움직이려 드는 키프로스 연합과 교회 세력을 멀리 찢어두는 계기가 되리라.
성황의 생각이 긍정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도리안이 주저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거기다 로건 황자님의 일이…….”
“로건이?”
“예. 로건 황자님께서 이를 알게 되면, 어차피 가만히 두고 보지 않고 토벌대를 조직하리라 하였나이다.”
“…….”
그건 그렇지.
아무리 용돈을 올려준다 꼬드겨도, 올곧은 그 아이가 신민들의 어려움을 그대로 외면할 성미던가.
완전히 납득한 성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집행하게.”
“하오시면…….”
“아멜리아가 그리 판단했다면 그런 것이네. 굳이 행정부에서 재고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
쿵.
너무나도 수월하게 찍히는 옥새. 도리안은 잠시 할 말을 잃고 성황을 바라보았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황녀의 정무 능력에는 도리안 역시도 혀를 내두르곤 했다.
하지만 성황은 아무리 봐도 그 도가 지나치다 싶었다. 자식들의 판단에 간혹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신뢰를 보이는 것이다.
“하면, 바로 예산안을 만들어 함께 집행하겠습니다.”
“그러게.”
그렇게 도리안이 결재를 마친 서류를 막 넘겨받으려던 때였다.
흠칫.
성황이 갑자기 뭔가에 놀라며,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다.
“……?”
덕분에 손을 내밀던 도리안이, 엉거주춤한 상태로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예전에는 감히 신의 대리자를 정면에서 바라볼 엄두도 내지 못했으나, 업무상 오래 그와 부대끼다 보니 이제는 간혹 대담하게 성황의 표정을 살피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도리안도 익히 아는 묘한 눈동자가 있었다. 무기질적인 광채를 발하는, 어딘가 초점이 맞지 않는 눈.
그렇게 움직임을 멈춘 성황과 함께 집무실의 공기가 급격히 얼어붙는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먼지 한 올까지도, 허공에 그대로 박제된 것만 같은 기이한 정적.
‘뭔가 큰일이라도 생긴 건가…….’
무거운 압박감 속에서 도리안에 어쩔 줄 모르며 식은땀만 흘린다.
툭.
오직 뒤에 서있던 루이스 시종장만이, 침착한 얼굴로 성황의 손에서 미끄러지려는 옥새를 받아 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깜박.
이윽고 성황이 눈을 한 차례 깜박이자, 눈에 초점이 돌아오며 은빛 광채가 천천히 스러졌다. 동시에 얼어붙었던 집무실의 공기가 거짓말처럼 가벼워진다.
“휴우…….”
뭔진 몰라도 끝난 모양이다.
안도한 도리안이 억눌렀던 숨을 내쉬자, 성황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에게 서류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도리안, 자네 곧 결혼하던가?”
뜬금없는 그 질문에, 도리안이 황송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예. 그렇습니다, 폐하.”
아직은 당사자 사이의 언약일 뿐인데 어찌 벌써 아시는가. 그런 의문은 신의 대리자 앞에서는 하등 의미 없는 것이리라.
도리안이 미래를 약속한 상대는 행정부의 동료 직원으로, 유약한 자신과는 달리 대단히 당찬 아가씨였다. 그녀에게 이끌려 속도위반을 저지르고, 뒤늦게 허둥지둥 결혼 준비를 하는 중이었건만.
한데 도리안을 돌아보는 성황의 눈에, 잠깐이지만 묘한 애환이 감돌다 지나갔다.
“그래. 이제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게. 아이들이란 언제나 부모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존재들이니.”
“…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이 넘어가는 응용력으로 사고를 치는 것이 아이들이라네. 나뭇가지로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쳤더니, 그리라는 그림은 안 그리고 어느새 손에 쥔 나뭇가지로 불장난을 시도하고 있지 뭔가.”
“……?”
영문을 몰라 입을 뻐금거리는데-
푸욱, 깊이 한숨을 내쉰 성황이 나직하게 덧붙인다.
“그러니 자네 역시 건투를 비네.”
“…….”
도리안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마침 성황의 뒤에 서 있던 시종장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노인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도리안에게 고개를 천천히 저어 보이는 게 아닌가.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미소의 의미는 명확한 것이었다.
-아무 걱정 말게. 설마 이 세상에 성황가의 황자‧황녀님들 같은 분들이 또 있겠나.
아.
문득 지고하신 신의 대리자께서 대단히 딱하다 느껴졌지만-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도리안은 이내 황급하게 머리를 저으며, 그 불경한 생각을 멀리 떨쳐버렸다.
* * *
[뭐다? 마법이다?]
[이성진! 이 불이 어디서 날아왔습니까? 혹시 상대 마법사를 확인했습니까?]
[마법? 판게아 클로니클에 이런 마법이 있었나?]
허공에 이질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타오르는 작은 마왕 2호.
침묵 빌런들과 두더지 공학자가 당황하며 허둥지둥 다가온다. 성진은 그들을 바라보며 조금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어떠냐? 이 몸의 능력이. 대단히 놀랍지?
[뉴비. 위험하니까 일단 거기서 떨어져.]
그때, 오웬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성진을 밀치며 불꽃에 손을 가져다 대려 했다. 대충 흩어버리려는 시도였겠지만-
뾱!
그는 불꽃을 채 건드리기도 전에 뒤로 나동그라졌다. 아기 산양의 발굽이 오웬의 이마를 거세게 강타했기 때문이다.
“억!”
오웬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데구르르-
“아니, 또 왜 때려!”
몇 바퀴 굴러간 오웬이 벌떡 일어나 억울한 표정으로 소리친다. 하지만 오히려 성진이 더 목소리를 높이며 그에게 화를 냈다.
“인마! 지금 이게 뭔 줄 알고 함부로 만지려고 하는 거야! 어?”
“…응?”
아버지가 아무리 예의를 지키라 하셨다지만, 저놈 하는 짓이 이렇게 덜떨어진 것을 어쩌란 말인가! 잘못을 했으면 일단 맞아야지!
“너, 이게 한번 몸에 붙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어떻게 되는데?”
하지만 성진이 설명하지 않아도, 곧 모두가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화르르륵!
성진이 오웬을 향해 돌아서 있는 동안, 구릅이 머리카락으로 슬쩍 불꽃을 건드렸던 것이다.
미녀 레인저의 머리카락에 삽시간에 검붉은 불길이 번진다.
[으하악!?]
[이런? 구릅!]
모두가 기겁했지만 해결은 빨랐다. 다짜고짜 검을 뽑아 든 성진이 번개처럼 그를 향해 팔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슈캉!
초보자용 검이 긴 실선을 그리자, 레인저의 긴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댕강해졌다.
후드드득!
허공에 흩날리는 머리카락들이 불길에 휩싸여 빠르게 사그라진다.
이윽고 구릅의 머리카락을 완전히 연소시킨 마왕 2호는, 그러고도 얼마간을 홀로 허공에서 타오르다 마침내 흔적도 없이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태에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화염 방어가 높은 구릅에게 손상을 입혔습니다! 저게 보기보다 레벨이 높은 마법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파티원에게 내 다리가 잘렸다? 어떻게? 여기는 그린 존입니다만?]
[잠깐! 지금 그게 머리카락이 아니라 다리라고?]
어쩐지 머리카락에 구동 관절이 있다 했더니, 아무래도 구릅은 아바타의 머리카락에 놈의 남은 다리 하나를 끼워 맞춘 모양이었다.
“자, 봤냐? 네가 방금 뭘 건드릴 뻔했는지?”
성진이 오웬을 향해 인상을 썼다. 그런데 오웬은 어쩐 일인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마왕 2호가 사라진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녀석, 갑자기 왜 저래?
“…뉴비, 어디 다친 덴 없어?”
이윽고 정신을 차린 오웬에 성진을 향해 다가와 묻는다.
슬쩍 그를 훑어본 성진은, 이내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사고가 난 건 구릅뺘랍구르릅 비뺘릅릅인데, 왜 나한테 묻는 거야?]
[아아, 그렇지. 괜찮아, 구릅?]
그러자 한 손으로 휘적휘적 휑한 뒷머리를 더듬던 미녀 레인저가 히죽 웃어 보였다. 다행히도 구릅에게 별다른 손상은 없는 듯했다.
[걱정은 불필요한! 다리가 하나라도 남아있으면, 나는 언제까지나 건재합니다! 빠른 판단에 감사한다, 이성진!]
[다행이야, 친구. 근데 방금 그 불은 정말 뭐였지?]
한편, 그런 그들의 모습을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자가 있었다. 바로 하타수 티티였다.
[구릅. 당신이 이성진의 공격에 아예 반응하지 않다니, 참으로 이상합니다.]
물론 성진의 행동은 순전히 구릅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
가타부타 할 것 없이 일단 검부터 휘두르지 않았나. 역전의 용사인 구릅이 반사적으로라도 뭔가 반응을 보일 법했는데.
이건 마치, 이성진이 절대로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 것 같지 않은가.
[이성진을 향한 당신의 반응은, 아무리 봐도 전혀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하타수 티티는 침묵 빌런들 중에서도 가장 처음부터 성진의 말에 고분고분 따라온 자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를 따를 가치가 있다는 합리적인 판단에서 기인한 것. 놀랍게도 현재 침묵 빌런들 중에서는, 그가 가장 사심 없이 성진을 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성진은 어딘가 묘한 존재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네 번째 게스트 ID 유저.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진 이상한 불꽃.
이성진과 함께 할 때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을 하타수 티티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성진의 대응 역시 매번 납득할 만한 것이기에, 지금까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를 따라 왔다.
‘그런데 다들, 어딘가 이상한 반응이다.’
동향이라며 얼레벌레 이성진을 동네 동생 취급하는 오웬을 보라.
이전까지는 제법 강단 있는 자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기 산양에게 몇 번이고 머리를 얻어맞고도 또 귀엽다고 실실거리는 중이다.
허술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여간해서는 상대에게 마음을 주지 않던 구릅 역시 마찬가지. 어째서인지 이성진을 저렇게까지 진심으로 믿고 있는 거다.
‘이건 마치, 뭔가에 매혹당한 것 같지 않은가…….’
장로들에게 늘 주의를 듣던, 삿된 것들이 가진 무서운 능력. 아무래도 하타수 티티는 이성진의 정체를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미녀 레인저의 유리알처럼 맑은 눈이 하타수 티티를 응시했다.
[하티수 티티. 당신의 고민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구릅. 당신은 작금의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까?]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면에서 울리는 내장의 말을 믿는. 용사의 내장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습니까.]
하타수 티티는 순혈 마슈나무. 그 내장이 울리는 느낌 따위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단지 맹목적이기까지 한 구릅의 태도에, 덩달아 성진에 대한 경계심이 스르륵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을 뿐.
‘하긴. 지금까지 이성진의 판단은 지극히 믿을 만했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보상과 전적이 말해 주지 않는가? 괜한 불안으로 그에 대한 선입견을 가져서는 곤란하겠지.’
그러는 사이, 두더지 공학자가 고글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대체 언제까지 여기서들 시간을 보낼 거야? 이번에야말로 오차 없는 완벽한 전략을 가져왔다고! 빨리 다음 테마 던전을 공략하자니까?]
제법 많은 변수가 있었던 오크왕의 미로.
게다가 방금 있었던 이상한 사고까지.
[…괜찮을까?]
하티수 티티를 비롯한 침묵 빌런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기 산양을 향해 모인다.
[괜찮아.]
그리고 예상했다는 듯한 이성진의 여상한 대답.
그것으로 일행의 던전 행은 결정되었다.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본 하타수 티티의 눈이 깊어진다.
[…….]
역시 이상합니다. 정말 이상합니다.
하타수 티티는 잠시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역시 어느새 다른 침묵 빌런들을 따라 주섬주섬 장비들을 챙기고 있었다.
* * *
그래. 성진은 ‘괜찮다’고 판단했다.
테마 던전에 한 발을 들이는 순간, 안달 난 누군가가 당장 자신에게 접촉해 올 것을 알았음에.
[무슨 짓을 하는 거요! □□□ □□!]
갑자기 사위를 캄캄한 어둠이 감쌌지만, 성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곧 분기탱천한 여신이 눈앞에 나타나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으니까.
[여, 유스티티아.]
[지금까지 나의 경고를 어떻게 받아들인 것이오! 이 불안정한 세계에서 그대는 잘도! 잘도……!]
여신의 금빛 창과 핏물이 흐르는 안대는 일전의 모습과 같았다. 바뀐 것이라면, 전과 달리 하얗게 질린 안색 정도일까.
언제 돌발 상황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테마 던전을, 다시 돌아도 괜찮냐고?
어, 괜찮아. 어차피 그 근본이 되는 놈을 족칠 거거든.
크으으으…….
뒤쪽에서 바르작거리는 볼품없는 존재 역시 느껴진다.
어둠의 유스티티아.
일전에 마왕 2호의 쓴맛을 본 녀석은, 몸의 일부와 미역 같은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나마도 멀쩡한 부분은 검은 피에 젖어 있었다. 연소된 자국이 아닌, 물리적인 손상.
그래. 스스로 멀쩡한 부분을 잘라내지 않았다면, 아마도 게헤나의 겁화는 끝까지 타들어갔겠지.
[너 용케 살아남았구나?]
성진의 가벼운 안부 인사에 녀석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뻥 뜷린 눈구멍에서 증오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이 신기할 지경.
하지만 놈이 재차 성진에게 다가오려 하자-
화르륵!
성진의 앞에 다시 작은 마왕 2호가 나타난다.
키에엑!
어둠의 유스티티아는 차마 다시 들러붙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그래. 이제야 제대로 대화할 분위기가 된 거 같네. 뻣뻣하게 굳은 두 여신을 번갈아 바라보며, 성진이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할 말 있으면 어서 끝내지. 난 빨리 가서 던전을 돌아야 하니까.]
Chapter 11: Chapter 311
Chapter Text
311. 물밑 (2)
[더는 이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말아달라 하지 않았소?!]
캄캄한 어둠 속.
절규하듯 부르짖는 여신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사위를 울린다.
[혼돈을 불러들여 저것을 자극하지 말라 달라, 그리 말하였거늘! □□□ □□, 당신은 기어이 붕괴를 앞당기고 싶은 것이오? 정녕 이 세계의 끝을 보려 하냐는 말이오!]
그 목소리에 담긴 날 선 원망의 감정이, 마치 피부를 찌르는 비수라도 된 듯 생생하게 전해진다.
하지만 성진은 그에 대한 별다른 대답 없이 유스티티아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서로가 그닥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할 텐데?]
[뭣? 그게 무슨……?]
[괜히 남 탓을 하지 말라는 말이야. 자꾸 그런 억지를 부리면, 여기서 네 입장이 조금이라도 유리해진다고 생각해?]
[……!]
예상외의 강경한 반응에, 여신이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입을 벌린다.
화르륵!
그 틈에 성진은 작은 마왕 2호를 움직여, 뒤쪽에서 기어오는 거머리를 한차례 더 견제한 다음 말을 이었다.
[일단 긴말할 것 없이 눈앞의 결과만을 두고 보지. 바로 나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저것에게 해를 입힐 수 있어. 그렇지 않나?]
[…….]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그 증거로, 격하게 치솟았던 여신의 기세가 단번에 수그러들었으니까.
유스티티아는 입을 앙다물고는, 아마도 뻥 뚫려있을 눈구멍으로 매섭게 성진을 쏘아보았다.
‘역시…….’
짐작이 맞아떨어졌음을 확인한 성진은 속으로 실소했다.
-이 세계는 채 준비되기도 전에 억지로 알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소.
시간에 쫓겨, 기존의 게임 소스들을 마구잡이로 욱여넣어 만든 판게아 클로니클.
-하여 터무니없이 약해진 기조를 보완하기 위해, 수많은 규칙들이 무질서하게 덧대어졌지. 그러한 거대한 혼돈 속에서 결국 세계의 뒤틀림이 생겨났다오.
소스와 소스가 충돌하고, 코드와 코드가 어긋나는 거대한 스파게티 냄비.
아마도 암흑의 유스티티아는, 오류 속에서 태어나 오류들을 먹고 자라난 혼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임펄스 소프트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덱스터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이 상황을 해결할 기술적인 방법은 단 하나뿐이지.
-그게 뭔데?
-바로 시스템 제어 AI에 편법으로 ‘코드 제로’의 권한을 부여하는 거야.
코드 제로.
신의 영역이라고도 불리는, 규상세계에서는 가장 상위에 해당하는 불가사의한 권한.
-만약 관념, 혹은 개념만으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거라.
홀린 듯 본궁으로 달려갔던 그날 새벽.
성진은 성황과 제법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신의 코드’에 대한 일말의 단서를 얻을 수 있었지.
-그 세계의 모든 것은 반드시 지정된 관념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거기에, 절대 하나의 관념으로 정의할 수 없고, 한계를 파악할 수도 없는 무언가가 나타난다면, 너는 어찌하겠느냐?
지정된 관념이라? 대충 규상세계를 이루는 코드들을 말하나 보다.
그렇게 짐작한 성진이 적당히 대답했다.
-그냥 비슷한 개념으로 정의하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성황이 엄한 눈으로 성진을 나무랐다.
-참으로 위험한 소리를 하는구나. 벌써 잊었느냐, 모레스? 일전에 내가 잘못 정의한 책 하나가 끝내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지?
-어…….
책을 공중에서 터뜨리고, 직접 자해쇼까지 했던 그날의 일 말입니까?
성진이 짜게 식은 표정으로 성황을 바라보자, 그는 헛기침을 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테두리 안에 넣기에는 너무나 거대하며,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그 존재가 너무나도 명확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어떻게든 정의하지 않으면, 관념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기조는 덧없이 허물어지겠지.
아니, 그런데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정의한단 말입니까?
성진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성황은 더는 애태우지 않고 수월하게 답을 주었다.
-아예 ‘정의가 불가능한 것’이라는 개념을 따로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정의가 불가능한 것…….
-그래. 그렇게 관념의 테두리 밖으로 아예 밀어냄으로써, 테두리 내부의 세계는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도 완전한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니라.
정의가 불가능한 것.
신, 혹은 세계를 움직이는 알 수 없는 힘 그 자체.
‘코드 제로’는 당연하게도 엔지니어들에게 불가사의한 코드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 자체가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는 개념을 담고 있었으니!
-판게아 클로니클. 그 규상세계를 관리하는 시스템은 제로 코드를 부여받아 ‘신의 권한’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강한 권한을 가지고도, 자체적으로 오류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혼돈을 키워온 걸까요?
그러자 성황은 잠시 깊어진 눈으로 물끄러미 성진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하면 ‘혼돈’이라고 불리는 그것의 진짜 이름은 무엇이라 하더냐?
-……!
그 질문에 성진은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유스티티아. 혹은 암흑의 아스트리아. 고전 RPG 게임 ‘아스트리아 연대기’에서 차용된, 여신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혼돈의 여신.
임펄스 소프트는 아스트리아 연대기의 소스를 게임에 무차별적으로 때려 넣은 것으로도 모자라, 시스템 AI로 지정한 ‘유스티티아’와 함께 저 오류 덩어리에게도 ‘코드 제로’의 권한을 부여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크으으으…….
찰거머리, 아니, 암흑의 유스티티아가 채 반쪽도 남지 않은 몸으로 성진에게 다가오려 바르작거린다. 그러나 녀석은, 재차 휘둘러진 마왕 2호에 겁을 먹고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그 딱하기까지 한 모습을 별 감흥 없이 바라보던 성진은, 다시 정면의 유스티티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너는 처음부터 이런 결과를 예상했을 거야.]
유스티티아는 그날, 분명 성진에게 넌지시 이런 권유를 해 왔었다.
-아니면 이제라도 당신의 고유 ID를 행사하겠소? □□□ □□. 예전처럼 거슬리는 것을 모두 없애버리는 거요.
마치 ‘혼돈’과의 충돌을 바라는 것처럼.
[괜한 질책이라 생각하오? 하나 전에도 말했듯, 이 모든 것은 순전히 당신의 존재로 인해 발생한 혼돈이요. 그러니 당신이 잠재워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유스티티아가 처음과는 달리 차분한 어조로 항변했다.
[글쎄, 그건 어떨까?]
아마도 성진의 등장으로 ‘혼돈’의 성장이 조금이나마 가속화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저것은 어디까지나 판게아 클로니클과 함께 탄생한 오류의 집결체.
거기다 처음 저것과 조우한 날, 성진은 ‘혼돈’에게 절대 꺼지지 않는 불을 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저것의 힘은 급격히 약해졌겠지. 성진에게 더는 들러붙지도, 또 그의 시야를 방해하지도 못했으니까.
지금 성진은 더 이상 그래픽 문제를 겪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유아용 스킨을 고수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아직은 오웬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가 껄끄럽기 때문이었다.
[그래. 저 녀석은 이제 이전처럼 힘을 쓸 수 없어.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그 이후 던전의 오류는 점점 늘어나더란 말이지. 시스템이 제대로 오류를 정정하지 않는 거야. 마치 나와 저것의 충돌을 일부러 조장하는 것처럼.]
[…….]
[그러니 쓸데없이 빙빙 둘러대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똑바로 해, 유스티티아.]
성진은 이제,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여신을 향해 단호하게 내뱉었다.
[네게 역부족인 저것을, 부디 완전히 없애 달라고!]
[……!]
화르르륵!
성진의 기분을 반영하듯, 마왕 2호의 불꽃이 거칠게 점멸한다.
크에에……!
찰거머리가 기겁하며 몸을 옹송그리는 동안, 유스티티아 여신은 굳은 얼굴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작은 한숨과 함께, 이윽고 여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고 있소? 가장 보잘 것 없는 생명의 작은 호흡 하나조차도 코드로 정해져 있는 이곳에서, 새로운 염상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이례적인 일인지? 그것은 순전히 당신에게 부여된 그 코드 때문이요.]
[코드?]
[그렇소. 게스트 ID를 가지는 것과는 별개로, 당신에게는 처음부터 고유한 코드와 ID가 부여되어 있다오. 그것은 바로…….]
[그만! 사족은 이만하고, 슬슬 우리의 거래 이야기를 하자.]
두근-
거세게 박동하는 뭔가를 의식적으로 가라앉히며, 성진이 유스티티아의 말을 거칠게 잘랐다.
[내가 저것을 완전히 없애주겠다. 너도 어쩌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는 오류들을 단번에 일소해주지. 그러니 너도 그에 맞는 보상을 내놔!]
[…….]
유스티티아는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세계의 존폐가 달린 마당에 감히 그 제안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성진의 말에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은 오히려 찰거머리 쪽이었다.
[멋대로! 너희들 멋대로 그런 걸 정하지 마라! 왜 내가 순순히 죽어야 하지?]
어떻게 해도 마왕 2호에는 당할 재간이 없다고 여겼는지, 녀석은 무력하게 몸을 물리며 성진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나는 그저 태어났을 뿐이야! 누군가가 내게 힘을 부여했고, 그대로 이 세계의 규칙이 되어 내 본성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한데 그게 어째서 내 탓이야?!]
찰거머리의 주장도 일리는 있었다.
실수를 저지른 건 대책 없는 게임 회사지, 찰거머리라고 해서 처음부터 저런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성진은 그 처절한 절규에도 무표정하게 대꾸했을 뿐이었다.
[어차피 그대로 있어 봐야 넌 오래가지 못해. 이대로라면 너는 판게아 클로니클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너 역시 세계와 함께 허무한 최후를 맞을 뿐이다. 그게 너에게 무슨 의미가 있지?]
그 말과 동시에-
화르륵!
마왕 2호가 더욱 거세게 타오르며 찰거머리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자 성진을 향하고 있는 뻥 뚫린 눈구멍에서 검은 피눈물이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아아……!
피에 젖은 입술에서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온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멸망 전에 주어지는 그 잠깐의 시간은 온전한 나의 것이야……!]
[…….]
태생부터 그릇될 수밖에 없는 존재.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망치도록 운명 지워진 존재. 문득 성진은 녀석에게 깊은 공감과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하나 그렇기에, 오히려 성진은 녀석에게 더욱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장담하지. 뭐가 됐든, 그냥 여기에서 끝내는 것이 너에게 있어서도 좋은 일이야.]
[뭐……?]
그리고 그렇게 되물은 것이 놈의 마지막 말이었다.
화르르륵!
잽싸게 녀석에게 달려든 마왕 2호는, 순식간에 거대한 화염을 일으키며 암흑의 유스티티아를 집어삼켰다.
캬아아아아아!
무시무시한 비명이 어둠 속을 뚫고 울려 퍼진다. 녀석이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며 스스로의 몸을 헤집었지만, 불길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녀석의 몸을 차근차근 살라먹었다.
……!
그렇게 검붉은 불꽃에 뒤덮인 ‘혼돈’은, 곧 한 줌의 검은 잿더미만을 남기고 완전히 사그라졌다.
쌓여가던 막대한 오류들이 일시에 사라지고, 판게아 클로니클은 순간 완전한 안정을 되찾는다.
[…….]
잠시 남은 잿더미에 눈길을 주던 성진은, 몸을 돌려 침묵하고 있는 유스티티아를 바라보았다.
[이게 끝은 아닐 테지?]
[…이 세계가 유지되는 한, 그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다시 태어날 거요. 말했지 않소? 그것은 이미 이 세계를 구성하는 법칙, 이곳에 녹아든 대기라고.]
그렇게 말하는 유스티티아의 붉은 안대에서,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이 과연 안도의 눈물인지, 애도의 눈물인지는 본인만이 알 일이다.
[그리고 당신이 이 세계에 오래 관여하는 한, 저것은 또다시 급격하게 자라날 거요. 하니 지금이라도 이 세계에서 완전히 떠나주실 수는 없겠소?]
그러나 성진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 잘해야 할 거야, 유스티티아. 혼돈의 성장이 조금 가속화된다고 나를 이 세계에서 배척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주기적으로 저것을 정리하도록 정중히 부탁하는 것이 나을까?]
[…….]
[나 때문에 혼돈이 생겼다는 둥, 내가 세계를 무너뜨릴 거라는 둥, 압박을 주며 헛짓거리를 한 건 대단히 괘씸하지만. 그래도 그런 꼼수를 부리는 걸 보면 넌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야. 그러니 지금이라도 내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걸 제대로 된 보상으로 증명하는 게 어떨까?]
[…익히 알던 것보다 더 영악해지셨구려.]
유스티티아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괜히 쓸데없는 기 싸움을 하기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성진의 비위를 맞추는 쪽이 유리하다 판단한 것이다.
[그래, 좋소. 당신은 어떤 보상을 원하시오?]
그러자 성진은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가 원하는 건 말이지…….]
* * *
“…비!”
…응?
“…뉴비야! 정신 차려! 괜찮아?”
성진은 누군가가 거칠게 어깨를 흔드는 통에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오웬을 마주하고는 기함했다.
헉, 뭐야?
놀란 마음에 반사적으로 손이 나갔다.
뾱!
“억!”
무방비 상태로 딱밤을 얻어맞은 오웬이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곧이어 몸을 일으킨 오웬은 억울함이 가득한 얼굴로 성진에게 소리쳤다.
“아니, 뭐야! 또 왜 때려? 걱정해줘도 난리야!?”
“어, 미안.”
무심코 손이 나갔던 성진은 순순히 사과했다.
조금 미안하긴 하네. 어느새 네 녀석에게 딱밤을 놓는 게 관성이 되어 버린 거 같아.
Chapter 12: Chapter 312
Chapter Text
312. 물밑 (3)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또 정신을 놓고 있네. 뉴비야, 너 어디 아프냐?”
오웬이 성진을 졸졸 따라오며 집요하게 물었다.
“별거 아니라니까. 신경 쓰지 마.”
“하지만…….”
성진을 걱정하는 것은 비단 오웬뿐만이 아니었다. 침묵 빌런들과 덱스터 역시 우려가 가득한 얼굴로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으니까.
파티 리더라는 자가 던전에 들어오기만 하면 넋을 놓고 있으니, 그들의 걱정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어쩔래? 너, 이번에는 그냥 쉴래?”
쯧, 호들갑은.
성진은 오웬을 돌아보지도 않고 귀찮은 듯 손만 휘휘 저어 보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아까 덱스터한테 들었잖아? 이번 던전은 마법사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런데 나 없이 어떻게 여길 클리어한다는 거야?”
테마 던전 B랭크, 마녀들의 집회.
여러 클래스의 몹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던 ‘오크왕의 미로’와는 달리, 이곳은 정신계 마법이나 소환을 이용하는 마법사 계열의 몹이 주축이 되는 던전이었다.
자연히 ‘유스티티아의 조건’을 푸는 데 마법사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유형만을 놓고 본다면 아이스 밴시의 던전과 비슷하리라. 그 D랭크 던전에서, 성진과 침묵 빌런들은 하마터면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거기다 덱스터가 이번에 짜온 전략은, 아마도 내 능력치를 바탕으로 보완된 것일 테니까. 나 없이 클리어하는 건 절대 무리일걸?’
성진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
“잊지 마, 오웬. 우리는 아직 타임 챌린지 중이야.”
“그건 그렇지만. 괜히 무리했다가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아, 쓸데없는 걱정 말라니까? 괜찮아. 이번 던전은 오히려 오크왕의 미로보다 안전할 거라고.”
성진의 말은 진심이었다.
어떤 던전이든 단숨에 쓸어버릴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누가 뭐래도, 지금 그의 컨디션은 최상이었으니까.
암흑의 유스티티아.
이제까지 크고 작은 오차들을 만들고 거머리처럼 성진을 갉아먹던 그것이, 지금은 완전히 힘을 잃었다. 그러니 한동안은 돌발 상황도 일어나지 않을 테고, 성진의 피로도 역시 전보다 훨씬 덜할 예정이었다.
‘거기다 유스티티아로부터 이것저것 뜯어온 것도 있고 말이지.’
하지만 성진의 확답에도 오웬의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아까 검붉은 불꽃 옆에 서 있는 뉴비를 보는 순간, 불현듯 묘한 기시감이 일었던 것이다.
‘뭐지? 언젠가 이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던가?’
오웬이 골똘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자, 그만 집중해.]
계속 딴생각을 하고 있는 오웬을 향해, 성진이 주의를 주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드디어 첫 번째 몹들과 마주쳤다. 검은 망토를 두른 마녀들이었다.
크흐흐흐흐…….
불길한 웃음소리와 함께, 검은 기운을 뭉게뭉게 피워 올리는 여인들.
아마도 저들의 인식 범위에 들어서는 순간, 일행을 향해 사정없이 정신계 마법이 쏟아지리라.
[자, 부탁해. 이성진!]
덱스터가 긴장된 목소리로 주문하자, 성진이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섰다. 마법계 공격으로 조건 해제를 하기 위함이다.
뾱!
하지만 이번에 성진이 꺼내든 것은 헤이즈의 악령이 아니었다.
“발화.”
아기 산양의 입에서 처음 듣는 짧은 시동어가 읊어진다.
[……?]
모두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순간 그들의 눈앞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무리지어 있는 마녀들에게서 일제히 검붉은 화염이 일었던 것이다!
화르르륵!
캬아아아……!
불길은 짧고도 거세게 타올랐다. 마녀들은 그들의 단말마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대로 연소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조건이고 뭐고 없이, 즉사에 이르는 대미지가 들어간 것이다.
[……!?]
[음, 대미지가 너무 강한 것도 문제인데? 이래서는 파티 사냥의 의미가 없잖아?]
모두가 당황하여 입을 쩍 벌리고 있는데, 오직 성진만이 엉뚱한 걱정을 하며 스킬 창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방금 유스티티아로부터 얻은 새로운 스킬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new! 유니크 스킬 - 발화〛
〚시전자가 목표물을 지정하면, 대상의 방어력에 상관없이 순식간에 자연 발화가 일어나 HP를 0으로 만든다.〛
〚가능한 최대 목표물 수 : 5〛
〚습득 조건 - □□□ □□〛
〚소모 MP : 개체당 1〛
〚랭크 : SSS〛
〚숙련도 : SSS〛
클래스도, 레벨 조건도 없는, 오직 성진에게만 허락된 스킬.
적의 생명력이 얼마든, 방어력이 얼마든 전혀 상관없다. MP 소모도 거의 없었다.
심지어 정밀한 조준도 필요 없는, 그야말로 사기적인 즉사기였다.
[…방금 그, 그건 뭐야?]
겨우 정신을 차린 덱스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그러나 성진은 대충 대답하며 척척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 별거 아니야.]
[잠깐만! 별게 아니라니, 어이!]
성능이 지나치다 못해 조악하기까지 한 이 스킬은, 방금 유스티티아가 상당히 무리해가며 만든 것이었다. 성진이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안겨주었지.
-이런 거 필요 없어. 나한테는 마왕 2호가 있으니까. 그냥 내가 말한 요구 조건이나 제대로 이행해.
성진은 지금의 전력으로도 충분하다 여겼지만, 유스티티아의 입장은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이것은 당신의 요구와는 별개로 내가 선물하는 것이오, □□□ □□.
-선물? 조건 없이?
-그렇소. 조건 따위는 없다오. 그러니 제발 이 스킬들을 받고, 앞으로는 다시는 판게아 클로니클에서 그 위험한 화염을 꺼내지 말아 주시오!
제법 절실한 기색이 느껴지는 목소리. 유스티티아는 분명 마왕 2호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방금 자신과 동등한 이름과 신격을 가진 찰거머리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꼴을 목도하지 않았나.
쌓이고 쌓여 아예 법칙이 되어버린 오류들을 일소할 수 있다면, 제대로 된 법칙은 물론이거니와 이 세상 자체까지도 어려움 없이 불사를 수 있을진대.
“이봐, 이성진!”
그때,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두더지 공학자가 성진의 귓가에 다급하게 소곤거렸다.
“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전에는 이런 스킬 없었잖아?”
하지만 성진은 다음 마녀 무리와의 거리를 가늠하며 여상하게 대꾸했을 뿐이다.
“다른 것도 있으니까 아직 놀라긴 일러.”
“…뭐?”
그래. 심지어 유스티티아가 안긴 스킬은 [발화] 하나가 아니었다.
〚new! 유니크 스킬 – 용암지대〛
〚시전자가 지정하는 범위의 바닥을 용암지대로 만든다. 딱히 지면뿐만이 아니라, 빙판이나 수면 위에서도 발동이 가능하다. 한번 필드 안에 갇힌 대상은 벗어날 수 없으며, 화염 방어에 상관없이 발동과 동시에 HP 30%, 이후 초당 HP 10%의 추가 대미지를 받는다.〛
〚습득 조건 - □□□ □□〛
〚소모 MP : 5〛
〚랭크 : SSS〛
〚숙련도 : SSS〛
이 또한 게임의 밸런스를 완전히 무시하는 장판기.
발동시에 30%, 추가로 초당 10%가 깎인다고 하면, 어떠한 대상이든 7초 안에 잡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시험해볼까?’
지체할 필요는 없겠지.
성진은 마녀들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작게 읊조렸다.
“용암지대.”
그러자 저 멀리, 몹들이 모여 서 있는 바닥이 광범위한 용암 장판으로 변했다.
화르르륵!
키아……!
이번에도 마녀들은, 성진 일행을 채 발견하기 전에 비명도 내지르지도 못하고 전멸하고 말았다.
[……!?]
눈으로 보고도 쉽게 믿을 수 없는 광경.
덱스터와 침묵 빌런들은, 마녀의 무리가 단번에 빛으로 화하는 모습을 그저 멍청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제법 쓸 만한데?’
그래. 성진이 마왕 2호를 꺼내들지 않도록 만들려면, 그에 버금가는 사기 스킬을 주는 수밖에.
비록 밸런스가 엉망이 되더라도, 마왕 2호가 또다시 무분별하게 펼쳐지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여긴 모양이다.
〚new! 유니크 스킬 – 화염〛
〚시전자의 무기에 화염의 오러를 덧씌운다. 무기 고유의 속성에 마법 속성이 추가된다. 공격의 200% 대미지가 추가된다.〛
〚습득 조건 - □□□ □□〛
〚소모 MP : 초당 1〛
〚랭크 : SSS〛
〚숙련도 : SSS〛
캬아! 컥!
시뻘건 불꽃에 휩싸인 초보자용 검이 마녀들을 도륙한다.
[이성진! 근거리는 안 돼! ‘조건’을 풀려면 마법을 써야……!]
당황하며 말리려던 덱스터가, 이내 빛이 되어 사라지는 마녀들을 확인하고는 입을 다문다.
근거리로 때려도 마법 판정을 받게 만들어주는 버프 스킬. 물론 대미지 증가치가 버프의 범위를 아득하게 벗어나지만 말이지.
‘어쨌든 이것이 있으면, 굳이 마법사가 없어도 유스티티아의 [조건]들을 풀 수 있겠군.’
그야말로 테마 던전을 돌기에 부족함이 없는 스킬들이었다. 그 의도가 참으로 투명하게 보여서 실소가 나올 지경.
‘어떻게든 마왕 2호만은 꺼내들지 말라는 거지?’
그렇게 마지막 스킬까지 시험한 성진은 만족했다. 일단 시동어가 거창하지 않고 직관적인 것이 마음에 든다. 아마도 대충 급조했기 때문일 테지만.
[다들 미안. 아무래도 여유 있는 초반에 먼저 시험을 해 둬야 할 것 같아서.]
성진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에게 양해를 구했다. 작은 발굽을 습관처럼 앞으로 내민 채였다.
[이성진…….]
[자세한 설명은 좀 있다 해 줄 테니까, 일단 지금은 던전을 마저 돌자. 아직은 타임 챌린지 중이니까.]
그러자 경직되어 있던 일행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누그러졌다.
[그, 그렇다! 지금은 시간을 아껴야 하는!]
[알겠습니다, 이성진.]
허둥지둥 장비를 정비하는 일행을 바라보던 성진은, 문득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말한 건 나지만, 다들 왜 이렇게 아무런 의심 없이 순순히 믿는 거야?’
호구들의 정신 세계는 때때로 정말 이해하기 어렵단 말이지.
어쨌거나 성진은 처음의 계획대로 헤이즈의 악령을 불러들였다. 스킬 시험도 다 끝났겠다, 덱스터가 애써 계획한 공략을 제대로 따라볼 참이었다.
‘게다가 저 녀석이 너무 조용하단 말이야…….’
이상하게도 성진이 여기저기 화려한 화염계 스킬을 난사할 때마다, 오웬의 표정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 아까부터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내 영혼의 주인이시여어어어어!]
헤이즈의 악령이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검은 안개를 풀풀 흘리며 마녀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가자!]
이어진 아기 산양의 신호와 함께, 일행은 보스 룸을 향해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 * *
“일시적으로 게임 내 모든 오류가 사라졌다라…….”
“네, 그렇습니다.”
부하 직원의 보고를 받은 마틸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임펄스 소프트의 고위 임원이자, 호문클루스 엔진 개발부의 책임 엔지니어. 호문클루스 엔진이 적용된 최초의 게임, 판게아 클로니클에서 일어나는 이변을 실시간으로 보고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원인은?”
“아직은 파악 중에 있습니다.”
“그래…….”
마틸다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게임이 이미 꼬일 대로 꼬여, 로그를 조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
“이만 가보지. 특이 사항이 있으면 바로 보고 올리고.”
직원에게 손짓을 한 마틸다는, 갑자기 혈중 니코틴의 농도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곱게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새 담배를 꼬나문다.
“휴우…….”
연기를 몇 모금 빨아들이자, 두통이 조금 가라앉으며 몸이 이완된다. 강한 중독의 조짐이었다.
그간 위태롭게 굴러가는 판게아 클로니클에 신경 쓰느라, 최근 눈에 띄게 담배가 늘고 말았지.
“망할 놈의 디렉터 같으니…….”
거대한 오류 덩어리가 신격을 갖추게 된 것은, 순전히 나태한 게임 디렉터의 실수였다.
급히 만들어진 게임을 가다듬는 과정에서, 그 작자는 결국 자신의 초기작인 아스트리아 연대기의 설정을 놓지 못했으니까.
그는 자신의 작품과 세계관을 사랑했다. 특히 마지막 시리즈인 ‘암흑의 아스트리아’에 대한 애착이 강했는데, 선한 여신이 이중성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긴장감을 선사했다는 호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고리타분한 작자의 최고의 전성기였다.
“그치 때문에, 기껏 서둘러 만든 세상이 허무하게 끝날 뻔하지 않았나…….”
어쨌거나 오류가 해결되었다니, 유저들에게도 또 임펄스 소프트에도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게 잠시 머릿속을 환기시키던 마틸다는, 문득 부하 직원이 아직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돌렸다.
“뭔가 할 말이 더 있나?”
그러자 직원은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저… 다름이 아니라, 전직 아이템인 얼음 심장에 관한 일입니다만…….”
아아, 얼음 심장.
그건 또 그것대로 엄청난 골칫거리지.
“VIP께 조심스럽게 여쭸다고 합니다만, 아무래도 근시일 내에 다시 돌려주기 어려울 거라 하셨답니다.”
“이런…….”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바였지만, 막상 결과를 듣고 나니 더더욱 낭패였다. VIP라면 어지간해서는 문제를 만들지 않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는데 말이지.
하지만 그분만을 탓할 수는 없는 일. 다른 게임의 소스를 쏟아부어서라도 게임 완성을 서두른 것은 어디까지나 마틸다의 독단이었다.
“내가 대책을 강구해보지. 이만 나가봐.”
손을 저어 부하 직원을 물린 마틸다는, 말없이 담배를 피우며 모니터에 떠 있는 사진들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그것은 멀리서 관찰 드론이 찍은 게임의 스크린 샷이었다.
간혹 초점이 흐릿해 알아보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사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공은 고글을 쓴 작은 두더지였다.
“그래. 지구를 떠나고도 알아서 잘 지내는 듯 보이는구나.”
짤막한 마틸다의 손가락이 모니터를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일견 두려운 듯한 손짓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손끝에 담긴 것은 분명한 애정이었다.
“그런데 왜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몸을 가지고도, 너는 여전히 전처럼 작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거니, 덱스터…….”
Chapter 13: Chapter 313
Chapter Text
313. 물밑 (4)
성진 일행은 순식간에 보스 룸에 도착했다.
‘오크왕의 미로’처럼 갈림길이 있는 것도 아닌 터라, 이번만큼은 그들도 외길을 달리며 정석대로 던전을 공략할 수 있었다.
[순위권은 확실하고, 잘하면 이번에도 1위를 노릴 수 있겠어.]
덱스터가 창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한다.
지금까지의 타임 챌린지 성적은 대단히 준수했다. 덱스터의 공략이 주효했던 데다, 성진이 던전 초입에서 시간을 대폭 줄인 영향도 컸으리라.
[아까도 설명했듯, 이곳의 보스는 다양한 정신계 마법을 구사해. 그중에서도 유저를 한 방에 빈사로 만드는 궁극기가 세 개나 되지. 그러니까 모두들 마녀의 공격 범위 내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
덱스터는 설명을 하다 말고 문득 성진을 돌아보았다. 긴장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태평한 아기 산양을.
“왜?”
“음, 아무것도 아냐…….”
덱스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열쇠를 집어들었다.
‘굳이 자세한 브리핑이 필요할까? 저 녀석이라면 벌써 보스에 대해 전부 숙지하고 있을 텐데.’
게다가 사기적인 즉사기 역시 이쪽이 한 수 위지 않은가.
[…가자!]
보스 룸의 열쇠가 꽂히고 거대한 석문이 열린다.
드르르르-
내부 기관이 움직이는 둔탁한 소음과 함께, 문틈으로부터 스산한 바람이 새어 나왔다.
우우우우우…….
이어서 들려오는, 신음인지 울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음울한 소리.
풀풀 날리는 회색 먼지와 함께, 웅크리고 있던 거대한 던전 보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
이윽고 일행을 향해 똑바로 선 것은 미이라처럼 비쩍 마른 거대한 여인이었다. 희게 분칠한 얼굴과 시커먼 눈두덩이가, 마치 썩어 들어가는 시체인 양 기괴하기 짝이 없다.
[…B랭크 보스, 회한의 헥센자바트야.]
꿀꺽.
덱스터가 마른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후들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중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헥센자바트가 풍기는 불길함. 그것은 오크왕 라이가스가 뿜어내던 거센 박력과는 또 다르게, 슬금슬금 몸을 잠식해나가는 질식할 듯한 공포감을 불러일으켰으니.
-썬더스톰 본…….
삐그덕.
마치 고장난 인형처럼 휘청거리며, 헥센자바트가 일행을 향해 다가온다. 놈이 한걸음 한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낡은 레이스로 뒤덮인 모슬린 드레스에서 자욱한 먼지가 일었다.
-이 세상을 가차 없이 죽이고, 또한 죽음으로부터 잔인하게 소생시킬 자여. 대체 너는 무엇을 바라기에, 회한만이 가득한 이곳까지 찾아왔는가?
낡은 쇠를 긁어내듯 기분 나쁜 목소리.
아마도 메인스토리에 관한 이야기리라.
하지만 단지 주어진 대사를 읊조린다기에, 헥센자바트에게서는 어딘가 강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성진은 찬찬히 보스의 움직임을 살피다, 곧 그 위화감의 원인을 찾아냈다.
‘눈…….’
그래. 깊은 이지가 느껴지는 헥센자바트의 눈이 성진을 향해 똑바로 고정되어 있다. 라이가스와 마찬가지로, 이 역시 일반적인 보스 몹의 반응이 아닐 터.
그것을 깨달은 성진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내가 할게. 굳이 오래 때리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보스 몹들의 이상한 반응. 지금까지는 단순히 암흑의 유스티티아가 벌인 일이라 생각했었지.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힘을 잃은 지금에도 이러는 걸 보면, 이들의 기이한 반응에는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좋은.]
[그럼 부탁합니다, 이성진.]
일행은 대번에 성진의 말을 알아들었다. 지나치게 처절했던 오크왕 라이가스의 최후를 떠올린 것이리라.
모두가 보스 룸의 입구로 물러서자, 성진은 힐끔 오웬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성진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다.
‘설마 이제 와서 불을 무서워하는 건 아닐 텐데…….’
오크 마법사가 거대한 화염구를 날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달려들던 녀석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이곳에 오기 직전에는, 함께 모닥불을 피우고 공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가. 도무지 저러는 원인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더는 잃을 것이 없으나, 깊은 원한만은 가슴에 남아 있구나. 네 정녕 세상을 짊어지려 한다면, 이 세상의 원망과 회한, 그리고 분노마저 능히 감당해야 할 것을.
그사이에 꽤 가까워진 헥센자바트는 대단히 성의 없는 대사를 읊조리고 있다. 잠시 망설이던 성진은 곧 마음을 굳혔다.
‘그래. 고작해야 7초.’
오웬에 관해서는 천천히 알아보자.
일단은 빠르게, 그리고 곱게 보스부터 죽여주지.
“…용암지대.”
작은 시동어가 내뱉어짐과 동시에-
화르르륵!
입구 일부를 제외한 보스 룸 전체가 시뻘건 용암으로 둘러싸였다. 범위 제한이 딱히 없는 사기적인 장판기.
덜컥!
순식간에 헥센자바트의 HP 30%가 날아간다. 불길에 완전히 갇혀버린 늙은 마녀가, 그 대단하다는 마법을 펼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성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자비한 친절이로다…….
2초.
정해진 대사 읊기는 완전히 포기했는지, 헥센자바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성진에게 말을 걸어왔다. 희게 떠있는 얼굴 위로 휘어지는 검은 입매가 참으로 괴이하기 짝이 없다.
-그리 애석해 마오.
4초.
그럼에도 그녀의 모습은 성진으로 하여금 묘하게 서글픈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가는 얇은 드레스자락이, 마치 날개라도 된 양 하늘거린다.
-이 끝에 기다리는 것이 무언지, 이제 나는 알…….
7초.
HP가 곧장 0에 이른다.
화아악.
보스가 빛으로 화해 완전히 사라지고, 바닥에서 끓어오르던 용암 지대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보스 룸은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허무한 울림만을 남긴 채 텅 비고 말았다.
[…….]
성진과 일행은 헥센자바트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에 잠겼다.
조금의 위기도 없이 쉽게 던전을 클리어 한 셈이지만, 그들 중 기쁨의 기색을 내비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군요.]
이윽고 하타수 티티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저들은 단지 던전을 이루는 하나의 구성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저는 때때로 저들이 정말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 겁니다.]
그러자 구릅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이해를 가졌다. 나 역시 이상한! 보스의 죽음을 접하니, 내장의 깊은 곳이 먹먹하게 울려온다!]
이쯤 되니 성진은 대단히 궁금해졌다.
대체 구릅의 내장이란 건 뭐 하는 기관이지? 단순한 소화 기관이 아닌 걸까? 아니면 번역의 문제라든가?
[자, 다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뾰옥!
성진은 발굽을 맞부딪혀, 어쩐지 침울해진 일행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다들 인벤토리의 여유나 제대로 확인해. 이번에는 제법 보상이 좋을 테니까.]
유스티티아를 직접 닦달한 것도 있고, 순위도 상당히 높을 거거든.
이제부터는 그 결과를 직접 확인할 때였다.
* * *
[1등이야! 이번에도 1등이라고!]
덱스터가 창을 들어다보며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2위와의 시간차도 제법 큰데? 한동안 우리 기록이 깨질 것 같지는 않아!]
아마도 당연한 결과리라. 보스를 무려 7초 만에 잡았으니까.
덕분에 그들이 받은 보상 역시 화려했다.
[황금사자 방패! 붉은사자 시리즈를 능가하는, 현존하는 최고의 방어구가 나왔습니다!]
방패 전사 하타수 티티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황금사자 활! 최고의 활이 왔다! 사용하는 데도 문제없습니다. 이제 덱스터가 강화해 준다!]
레인저인 구릅 역시 팔다리를 구불텅거리며 춤을 췄다.
[오, 황금사자 도끼! 오랜만에 대단히 희귀한 무기가 나왔는데?]
도끼전사 오웬 역시, 좋은 무기를 받고는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음? 근데…….]
파티원들의 성과에 덩달아 함박웃음을 짓고 있던 덱스터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그는 인벤토리를 심각한 얼굴로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그곳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스태프 하나를 끄집어냈다.
[황금사자 스태프…….]
일행이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그때부터였다.
[뭐지? 이게 본래 이렇게 자주 나오나?]
[하루에 하나 드랍되기도 어렵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서 경매장에 올라오기 무섭게 팔려나간다고요.]
[게다가 획득한 유저의 클래스를 매번 얄밉게도 피해 간다고 하던데…….]
[뭐다? 어떻게 이렇게 딱딱 맞는? 이거 혹시 버그다?]
머리를 맞대고 웅성거리던 일행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아기 산양을 돌아본다.
때마침 성진은 인벤토리에서 막 금빛의 검을 꺼내드는 중이었다.
[오, 황금사자 검! 역시 좋은 무기는 다르구나! 무강화인데도 풀강 초보자용 검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데?]
희희낙락하던 성진이 문득 일행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뭐? 왜? 뭐?]
[…….]
[다들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우리 타임 챌린지 1등 했잖아? 이 정도는 나와 줘야지.]
그, 그런가?
뻔뻔한 성진의 태도에, 일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각자의 인벤토리에 정신이 팔렸다. 남은 보상들 역시 대단히 만족스럽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온통 희귀한 포션들뿐입니다. 쓸데없는 잡동사니들 대신 이렇게 많은 포션이 나오다니! 이 정도면 한동안 일족의 땅은 문제없습니다!]
[그거 신기하다? 나는 온통 귀속 무기들뿐인데? 일단 좋습니다! 모두 들고 돌아가서 동료들과 나눈다!]
[그래? 나는 아이템보다 캐시가 잔뜩 나왔어.]
오직 게임 상식이 있는 덱스터만이, 대단히 미심쩍은 눈으로 성진을 살필 뿐이다.
하지만 성진은 그를 제대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막 오웬에게 뭔가를 건네던 참이었으니까.
[자. 이거 받아. 이상한 게 나왔는데, 나한테는 필요 없으니까.]
[…응?]
정신없이 보상을 확인하던 오웬은 아기 산양의 말에 아무런 의심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차가운 얼음 덩어리가 만져지자, 그것을 손에 쥐고 멍하니 눈을 끔벅거렸다.
[이게 뭐… 으억?]
별생각 없이 아이템 정보를 확인하던 오웬이 화들짝 놀라며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뭐야? 그 시답잖은 반응은?
[이, 이건……!]
[왜 그러십니까, 오웬?]
[뭐다? 나도 본다.]
침묵 빌런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온다. 덩달아 오웬의 손으로 시선을 돌리던 덱스터가 으힉, 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잠깐, 이성진! 저걸 왜 저 친구에게… 끄학!”
당황해서 소리치던 덱스터는, 이내 성진에게 발을 세게 밟히고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끄아아아……!”
그러는 사이에 침묵 빌런들이 잔뜩 흥분하여 소리쳤다.
[이것 봐! 정말 얼음 심장이야!]
[설마 그 귀하다는 전직 아이템입니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다?]
모두가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아기 산양을 바라본다. 하지만 성진은 여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그러게. 그게 정말 나와 버렸네. 나는 필요 없지만, 오웬 너한테는 필요하지 않냐? 너, 여신을 만난다며?]
그러자 오웬이 떨리는 눈동자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저, 정말… 이런 귀중한 걸 나한테 줘도…….]
아, 뭐래? 나한테는 쓸모없다니까?
성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어 보이자, 침묵 빌런들이 오웬의 어깨를 두드리며 각자 축하의 말을 던졌다.
[잘됐습니다, 오웬. 드디어 여신을 만날 수 있게 되었군요!]
[축하를 전한다! 나는 오웬이 절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거라 믿은! 반성합니다!]
그럼에도 오웬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하타수 티티와 구릅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다들… 모두 함께 던전을 돌았는데, 정말 이걸 내가 가져도 괜찮을까?]
[이성진이 얻은 물건입니다. 그것을 처분할 권한은 당연하게도 이성진에게 있습니다.]
[옳은! 나는 전직하지 않는다. 여신, 만나지 않는다.]
그 사심 없는 대답에, 오웬이 잔뜩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모두… 고마워!]
그렇게 해서 오웬은 서둘러 여신을 만나기 위해 퀘스트 창을 조작했다. 그리고는 곧 흔적도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미리 받아놓은 전직 퀘스트를 완료하자 보상 존으로 자동 이동된 것이다.
아마도 여신을 만나고 나면 본래의 장소로 돌아오게 된다는 모양. 그래서 성진과 침묵 빌런들은 잠시 보스 룸에 앉아 오웬을 기다렸다.
[정말 잘된 일입니다.]
[솔직히 고백한다. 오웬은 영원이 이곳을 떠나지 못할 줄 알았다.]
[끄응… 아이고, 내 발!]
그런데 잠시 후, 다시 스르륵 보스 룸에 나타난 오웬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오웬! 여신을 만났다?]
[무슨 일입니까? 왜 그러십니까?]
“훌쩍…….”
오웬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의 모습에, 기함한 성진이 이를 갈았다.
‘뭐야? 유스티티아 이 자식! 제대로 조건을 들어달랬잖아! 대체 저 녀석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하지만 그것은 성진의 기우였다.
“드디어…….”
이윽고 입을 연 오웬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사념으로 말하는 것도 완전히 잊은 듯, 동요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드디어 갈 수 있어! 퀘스트가 완료되고, 새로운 퀘스트를 받았단 말이야!”
…뭐?
모두가 어리둥절해 있는데, 번쩍 고개를 든 오웬이 기쁨이 겨운 목소리로 외쳤다.
“무려 황도로 가는 퀘스트라고! 알아? 나,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라고!”
Chapter 14: Chapter 314
Chapter Text
314. 물밑 (5)
오웬이 진정한 것은 그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 이 지긋지긋한 퀘스트가 정말 완료되다니! 이번 테마 던전에서도 전직 아이템을 얻지 못하면, 아예 수도 쪽으로 거점을 옮겨 메인 스토리라도 따라가 볼까 생각했었거든.]
오웬이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허공을 바라본다. 아마도 그의 눈에는, 일행에게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퀘스트 창이 떠 있으리라.
[그거 아냐? 난, 난 그동안 정말로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고! 아버님과 성황가 사람들, 특히 귀여운 우리 꼬마 시슬레의 얼굴이 매일 눈앞에 아른거렸다니까?]
[…그런데 왜 그냥 돌아오지 않고?]
성진이 뚱한 얼굴로 물었다. 무심코 ‘왜 가지 않았냐’가 아닌, ‘왜 돌아오지 않았냐’라는 질문이 되었지만.
그게 또 워낙 자연스러웠기에, 그다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오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뉴비, 넌 모를 거야. 나한테는 매일 상태창 씨가 던져주는 잡다한 퀘스트들이 많이 있어. 이게 대부분 남부 전선에서 수행해야 하는 것들이지.]
전선 근처에 서식하는 해수를 해치워라. 바르샤의 부족들, 특히 볼란타 부족의 행사에 참석하라. 남부 전선에 복무하는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켜라.
죄다 이런 퀘스트들만 쏟아지는 통에, 오웬은 도무지 남부 전선을 떠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상태창이 보여준 향후의 메인 스트림.
[메인 스트림 3 – 성□을(를) 구하라!]
[메인 스트림 4 - 성□을(를) 구하라!]
[메인 스트림 5 - □□□ □□을(를) 무찌르자!]
왠지 앞으로 성황가 사람들의 안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리라 짐작되는 내용들이다. 오웬이 어찌 이것을 빤히 알고도 모른 척 무시할 수 있으랴!
덕분에 오웬은 상태창이 던져주는 잡다한 퀘스트들을 그저 꾸역꾸역 수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스트림의 달성 게이지가 차오르는 것만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으면서.
[어디 그뿐이겠어? 기한 내에 이것들을 수행하지 못하면 매번 엄청난 페널티가 생겼다고!]
쥐꼬리만 한 캐시를 뭉텅이로 깎겠다고 협박하는 건 그나마 양반이었다.
퀘스트에서 한 치라도 어긋나는 일이 생기면, 대번에 바르샤 부족들과의 관계에서 커다란 마찰이 빚어지거나, 기껏 쌓아둔 신뢰가 허탕이 되는 사건이 생겼다.
때로는 오웬에게 직접적인 생명의 위기가 닥친 적도 있었지.
[신기하다! 내 상태창은 아이템을 일정량 얻으라고만 말합니다. 자유롭게 해주는!]
[페널티가 존재하다니, 확실히 빡빡하긴 하군요. 하긴, 지금까지의 일들을 생각해 보면, 오웬을 이끄는 상태창은 유독 만만치 않은 성미인 것 같긴 했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성진이 슬그머니 인상을 썼다.
‘조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셨던 거지?’
그냥 오웬이 가족을 위해 뭔가를 하는구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었지만. 지금 보니, 생각 외로 오웬의 무단 가출에 조모님이 차지하는 지분이 높은 것 같지 않나.
아니, 애초에 상태창이 퀘스트를 내려주는 기준은 뭘까. 어떻게 저렇게 세세하게 게스트 ID 유저를 강제할 수 있는 거지?
[그나저나 여신은 어땠지? 정말로 설정집의 그림처럼 눈을 가리고, 황금 창을 들고 있었나?]
갑작스러운 덱스터의 물음에, 침묵 빌런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오웬을 바라보았다.
왜 아니겠는가. 다들 판게아 클로니클에 제법 오래 몸담고 있다 보니, 이 세계의 절대자라는 여신에 대해 기본적인 궁금증은 가지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고급 시설을 이용할 수 없는 게스트 ID 유저들이니, 앞으로도 여신을 직접 만나게 되는 일은 없을 테지.
[음…….]
한데, 오웬의 표정이 조금 미묘해졌다.
[그래. 바로 그대로야.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었는데, 어쩐지 앞이 잘 보이는 것 같긴 했지만. 게다가 대단히 강해 보이더라고. 분명 이 세계의 최강자라 불릴 만했지. 하지만…….]
[하지만?]
[정말 그걸 여신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잘 모르겠던데? 오히려 뭔가 장사치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거든.]
…장사치? 그것은 성진에게는 꽤 의외의 감상이었다.
유스티티아는 제법 점잔 빼는 성미가 아니던가. 게다가 조금 희미하긴 해도, ‘코드 제로’에 걸맞은 나름의 절대적인 ‘격’ 같은 것이 있었는데.
[전직 아이템을 줬더니, 여신이 서버 최초라며 과하게 치하하더라고. 그리고 특전이니 뭐니 들먹거리며 나한테 물건을 팔려고 시도하지 않겠어? 다시없을 기회이니 엄청 깎아준다고. 그래서 정중히 사양하고 돌아왔지.]
“…뭐, 인마?”
성진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하도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제국어를 내뱉은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야! 그 좋은 기회를 왜 놓쳐? 살 게 없으면 그냥 한번 보기라도 하지!”
“음?”
그러자 오웬이 성진을 바라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하지만 정가의 1/10 이라니, 너무 수상하잖아? 그게 말이 되냐? 자꾸 뭔가를 사라고 유도하는 것도 어쩐지 사기꾼 같고…….”
“뭐……!”
“그렇잖아?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장사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 자고로 뭔가를 팔려는 자는, 항상 손님으로부터 최대한 이득을 얻는 게 목적이라고. 그런 자식이 1/10 가격에 제대로 된 물건을 팔겠어?”
그 거침없는 대답에 성진은 말문이 막혔다.
‘아니, 이놈은 매번 허술한 모습만 보이다가, 왜 정작 중요한 곳에서 이상하게 깐깐한 거야?’
필요한 아이템을 순순히 넘기고, 한정판 안대나 그 외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헐값에 넘기라고 윽박질러 놨는데. 그럼 그런 내 수고가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진 거 아니냔 말이야!
성진이 절로 두통이 이는 머리를 감싸 쥐자, 오웬이 걱정스러운 듯 물어왔다.
“왜 그래? 어디 아프냐, 뉴비?”
“끄응…….”
어, 시끄럽다. 내 두통의 원인은 바로 너라고!
아, 이 바보 자식. 대체 이걸 어떻게 한다지?
잠시 고민하던 성진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오웬의 눈앞에 작은 발굽을 내밀며 말했다.
“앓으니 죽지. 다 필요 없고, 그냥 내가 사다줄 테니까 넌 얌전히 캐시나 내놔.”
“…….”
그러자 오웬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성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긴, 다짜고짜 돈 내놓으라고 강짜를 부리는데, 먹힐 리가 있나? 아무리 이 자식이 천하의 멍청이라도 말이지.
그런데-
“음? 너 캐시가 필요해? 그래, 얼마나 주면 될까?”
어이없게도 오웬 이놈이 또 순순히 대답하며 주섬주섬 거래창을 조작하는 게 아닌가! 결국 성진의 이마에서 빠직, 하고 핏대가 솟았다.
“야, 이런 얼빠진 녀석이!”
뾱!
“으악!”
갑자기 강타를 얻어맞은 오웬이, 이마에 진하게 남은 꽃잎 자국을 문지르며 소리쳤다.
“또 왜 때려?!”
“너 인마, 자꾸 그렇게 헛짓거리 할래?”
“아니, 왜 캐시를 줘도 화를 내냐?”
“세상에 누가 달란다고 캐시를 그냥 줘? 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니란 말이야!”
“뭐야, 그게 이유야? 도통 알 수가 없네! 그럼 아예 처음부터 달라고 하질 말든지!”
“너 인마,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잖아! 내가 달라고 한 게 문제가 아니라, 네가 막 퍼주는 게 문제라고! 그걸 아직 모르겠냐?”
이마를 맞대고 아웅다웅 소리치는 둘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모르는 침묵 빌런들이 흐뭇하게 웃었다.
[좋다. 점점 돈독해지는?]
[그렇군요. 젊은이들은 참 쉽게도 친해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제국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해서 벌어지는 오해였다. 단지 완전한 번역 서비스를 받는 덱스터만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 볼 뿐.
‘대체 뭣들 하는 거람? 왜 저런 쓸데없는 걸로 싸우는 거야?’
* * *
다행히 오웬의 허탕을 만회할 기회는 금방 돌아왔다.
일행이 던전을 나서는 그 찰나의 틈을 노려, 여신이 다시 자신의 공간으로 성진을 불러낸 것이다.
[…….]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어둠 속을 돌아보는데, 성진을 마주한 유스티티아가 다짜고짜 이렇게 내뱉었다.
[나는 노력했소!]
[뭐?]
[그 게스트 ID 유저에게 최대한 당신이 말한 물건을 팔아보려 했단 말이오!]
…어, 그래.
열심히 했다는 건 인정해 주지. 오죽했으면 오웬이 널 여신이 아니라 완전 사기꾼으로 생각하고 있겠어?
[괜찮아. 내가 살 테니까, 그냥 나한테 팔아.]
[…….]
성진의 대답에 여신은 대단히 허탈한 얼굴을 했다.
기껏 아이템 하나 팔아보겠다고 그 삽질을 했는데, 이제 와서 강한 회의감이 밀려드는 모양.
[그냥 당신이 처음부터 사가면 되었을 일이 아니오?]
[뜬금없이 내가 녀석에게 아이템을 사주는 것도 이상하잖아? 게다가 아까는 돈이 별로 없었어.]
지금은 있냐고? 물론이다.
결국 그렇게 쌈질을 했음에도, 성진은 기어이 오웬으로부터 적정량의 캐시를 뜯어낸 것이다. 녀석이 돈을 건네며 대단히 황당해 했었지.
-난 대체 왜 얻어맞은 거야?
어쨌거나 성진은 유스티티아가 제공한 상점 메뉴를 뒤져, 금방 원하던 아이템을 찾아냈다.
〚해당 아이템을 구입하시겠습니까?〛
〚*확인* / 취소〛
성진은 버튼을 누르면서도 내심 혀를 내둘렀다.
‘와, 이건 10%로 낮춘 가격인데도 여전히 사악하네.’
그렇게 척척 결제를 하고 물건을 인벤토리에 챙겨 넣자, 여신이 의아한 듯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런 게 왜 당신에게 필요한 거요? □□□ □□. 감히 당신의 정신에 간섭할 만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술렁.
문득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지만, 성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신의 말을 잘랐다.
[귀엽잖아? 한정판이고…….]
[…….]
[뭐? 왜? 뭐? 쓸데없는 참견 하지 마.]
어이없어하는 유스티티아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녀의 뒤에서 움직이는 무언가가 성진의 눈을 사로잡았다.
꿈틀.
[저건…….]
그것은 손가락 마디만 한 크기의 검은 덩어리였다. 방향을 바꿔가며 슬금슬금 움직이는 것이, 마치 바람에 굴러다니는 작은 먼짓덩어리 같기도 했고.
하지만 분명 제대로 의식이 있는 존재였으리라. 성진의 시선과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 주춤거리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뽀르르 사라져 버렸으니까.
성진의 시선을 눈치챈 여신이 입을 열었다.
[본래는 저것이 움직이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렸을 터. 하나 당신의 요청으로 무리하게 확률을 조작한 덕에 생각보다 빠르게 자라났소. 조만간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출 테지.]
그래. 암흑의 유스티티아.
이 게임이 돌아가는 한, 오류가 쌓여가는 한, 계속해서 태어나고 자라나는 존재.
화르륵!
반사적으로 마왕 2호가 성진의 코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성진은 곧장 불을 던지는 대신, 가만히 놈이 사라진 어둠을 쏘아보았다.
[…이번엔 없애지 않소?]
마왕 2호를 마주하고 조금 창백해진 유스티티아가 물었다.
[뭐, 네가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자라려면 아직은 시간적 여유가 있을 테지?]
그렇다면 짧은 시간 내에 연이어 죽음을 경험하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어? 맞이할 결과가 정해져 있는 놈인데, 생각하면 조금 딱하니까 말이지.
스르륵.
마치 성진의 의지를 반영하듯, 마왕 2호가 스르륵 허공에서 사라져 버린다.
[당신은…….]
성진은 뭔가 할 말이 많이 보이는 유스티티아를 향해 잘라 말했다.
[사족은 됐어. 어쨌거나 이제 볼일은 끝났어. 그러니 어서 날 내보내 줘.]
그렇게 해서 정신을 차렸을 때, 성진은 또다시 그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오웬을 마주하게 되었다.
녀석은 이번에는, 뉴비가 던전을 나와서도 넋을 놓고 있다며 한창 난리를 치는 중이었다.
‘……!’
와, 방금 위험했다.
습관적으로 이마로 손이 나갈 뻔했어!
그리고 오웬은, 딱밤 대신 갑자기 눈앞에 들이밀어진 아이템을 하나를 보고는 멍청히 입을 벌렸다.
“한정판 토끼 안대? 뉴비, 네가 이걸 어떻게…….”
“어, 다 방법이 있어.”
그랬다.
아기 산양은 뜬금없이 검은색 한정판 토끼 안대 하나를 우쭐한 표정으로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Chapter 15: Chapter 315
Chapter Text
315. 물밑 (6)
[자, 다들 상태창을 열어봐.]
성진은 파티원 모두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서버 최초로 전직 아이템을 얻은 특전이 또 있더라고. 여기 앞쪽을 보면 임시 할인 상점이 열릴 거야. 굳이 마을 상점까지 가지 않아도, 상태창을 통해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을 바로 구매할 수 있어.]
[뭐? 내가 꼼꼼하게 살펴봤지만, 아까는 그런 거 없었… 끄학!]
아기 산양에게 발을 세게 밟힌 두더지 공학자가 바닥을 구른다.
[그래서 난 거기서 제일 비싼 아이템을 골랐지. 기회는 한 번뿐인 거 같으니까, 다들 신중하게 골라봐.]
그러자 침묵 빌런들이 서둘러 상태창을 열었다.
[정말! 이성진의 말과 같은! 상점이 있습니다!]
[일반 상점에 팔지 않는 희귀 아이템들도 올라와 있군요! 경매장이 아니면 구경도 못 할 거라 생각했는데요!]
상점을 발견한 침묵 빌런들이 반색하며 외쳤다. 여간해서는 보기 힘든 아이템들이 한데 모여 있는 데다, 가격 또한 1/10이라니,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심지어는 덱스터조차 바닥에 누운 채로 열심히 상점을 뒤적거린다.
그 광경을 성진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염치 불문하고 유스티티아를 또 닦달한 보람이 있군.’
천금 같은 기회를 던져버린 오웬 덕분에, 이제는 파티원 전원이 같은 특전을 얻게 되었다.
덕분에 아까까지만 해도 콩알만 하던 암흑의 유스티티아가, 지금은 어른 주먹만 한 크기로 훌쩍 자라나긴 했지만.
“자, 너도 이거 받고, 어서 상태창을 열어봐.”
성진이 안대를 내밀며 오웬을 재촉했다.
다른 침묵 빌런들과는 달리, 오웬은 상태창을 열 생각도 하지 않고 어딘가 묘한 얼굴로 성진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왜 아니겠는가. 공교롭게도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아이템을 뉴비가 꺼내들다니, 우연이라면 참으로 희한한 우연이리라.
“뉴비, 네가 왜 이 안대를 사?”
하지만 오웬의 의구심에도 성진은 당당했다.
“이왕 할인하는 거, 제일 비싼 물건을 사는 게 가장 이득일 테니까?”
“…근데 이걸 왜 나한테?”
“막상 사고 보니 그다지 필요 없는 물건이라서. 이건 처음부터 너한테 받은 캐시로 산 거니까, 그냥 네가 가져.”
“뭐? 하지만…….”
“정신 저항이 높아서 악몽 같은 것도 막아준다더라. 그러니까 잔말 말고 앞으로는 이거 쓰고 자. 전처럼 괜히 꿈자리가 사납니 어쩌니, 징징거리지 말고. 같이 장단 맞춰 놀아주려니 나도 귀찮다고.”
“음…….”
그러자 오웬은 조심스럽게 안대를 받아 들고는, 고개를 숙여 토끼의 검은 귀를 만지작거렸다.
“…일단은 잘 받을게. 정말 고맙다. 마침 나한테 꼭 필요한 물건이었어.”
별말씀을.
성진은 조금 우쭐해하며 콧대를 높였다.
“역시 다시 봐도 귀여운 안대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검은색을 골랐어?”
“어? 그냥. 그게 제일 그럴싸해 보이던데?”
사실 성진은 안대 디자인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었다. 개중에 제일 눈에 띄는 것을 골랐을 뿐.
아무래도 그동안 알게 모르게 아멜리아 누님의 취향이 옮은 건지도 모르지.
“그리고 검은색이어야 때가 잘 안 탈 거 아냐? 자주 세탁을 못 할 때는 그만한 색이 또 없다고.”
“그건 맞아. 어쩌다 보니 마침 내가 세탁을 자주 할 수 없는 환경에 있긴 한데…….”
어색하게 말을 흐린 오웬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상진을 찬찬히 살폈다.
“모두 우연이겠지? 설마 뉴비 네가 날 알고 있을 리는 없고.”
“…….”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하단 말이야? 왜 널 보면 볼수록, 자꾸만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 들까?”
괜히 뜨끔해진 성진이 슬그머니 딴청을 피우는데, 오웬이 성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답지 않게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제야 이렇게 묻는 게 조금 이상하긴 한데. 뉴비야. 너 언젠가 델크로스에서 나와 만난 적이 있어?”
“…….”
성진은 잠시 고민했다.
굳이 정체를 숨기려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이제와 스스로를 모레스라고 밝히자니 뭔가 애매한 상황이긴 했다.
들어보니 예전에도 서로가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고.
괜히 모레스를 언급했다가, 오웬이 성진의 의도를 의심하며 안대를 받지 않겠다고 고집부릴 수도 있지 않을까?
“글쎄? 어쩌면 정말 만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어.”
그래서 성진은 은근슬쩍 이 자리를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판게아 클로니클에서 오래 볼 것도 아니고.
뭐, 이건 완전 거짓말도 아니라고.
“그래? 그렇구나…….”
오웬은 석연치 않는 얼굴이었지만, 대충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늦게 상태창을 열어 상점을 이리저리 구경하기 시작했다.
물론 막상 아이템 목록이 펼쳐지자, 대번에 표정이 바뀌며 휘파람을 불었지만.
[휘유! 이건 정말 대단하네? 좋은 게 너무 많아서 뭘 사야할지 선택하기 어려울 정돈데?]
[정말 그렇습니다, 오웬! 여기 있는 한정판 포션들은, 그 무엇을 고르던 일족의 땅을 수년간 지탱하기에 충분할 겁니다!]
[판매 종료된 한정판 무기도 있는! 마왕에 대적하는 전력이 막대해집니다! 용기가 마구 솟는다!]
왁자지껄!
사념으로 시끄럽게 떠드는 저 녀석들의 이명이 ‘침묵 빌런’이라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런 일행의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던 성진은, 문득 자신의 시야가 뒤로 훌쩍 밀려나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은 물론 일행들 역시, 자리에서 움직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는데.
‘이건…….’
동시에 몸에서 묘한 탈력감이 일었다. 한 손에 팽팽하게 감아쥐고 있던 고삐가, 일순 힘을 잃고 느슨해지는 기분.
성진은 곧바로 직감했다.
‘…일단은 여기까지인가.’
깨달음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자신이 오웬과 침묵 빌런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대부분 끝났다는 것을. 이제 한동안은 이들과 더 부대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성진의 반쪽짜리 이정표는, 이제 다시는 그를 이곳으로 인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뭐, 이제는 별 상관없나?’
생각해 보면 성진이 판게아 클로니클에 접속한 목적은 모두 이뤄진 셈이다. 오웬이 퀘스트를 끝내도록 도왔고, 결과적으로 황도로 오게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까.
‘저 녀석들의 바보짓을 보는 것도 꽤 재미있었지만…….’
조금은 섭섭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뭐든 때가 되었다고 느낄 때 끝내는 게 옳다는 걸 성진은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이 오래 이곳에 머물수록, 암흑의 유스티티아는 빠르게 자라나고 빠른 죽음을 맞겠지.
또 자신의 앞에만 서면 뭔가 이상해지는 보스몹들 역시 더는 마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뾱.
일행을 향해 한걸음 앞으로 내디딘 성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자, 다들 보상은 확실하게 챙겼지? 그럼 테마 던전 타임 챌린지는 이쯤에서 마치자. 이제부터는 전처럼 안전한 던전 위주로만 도는 거야. 알겠어?]
그 말에 내포되어 있는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것일까. 침묵 빌런들이 상점창에서 눈을 떼고는 심각한 얼굴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
[오늘은 도전하지 않는다? 아니면 앞으로도 계속 그런다?]
흐느적흐느적 허술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제법 예리한 구석이 있는 구릅이 진지한 얼굴로 물어왔다.
[이성진, 이제 오지 않는다?]
[……!]
그 질문에 일행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후다닥 성진에게로 달려왔다.
[뭐? 진짜야? 뉴비야, 왜 갑자기? 왜? 왜?]
[무슨 일입니까, 이성진? 뭔가 일신에 큰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아니면 혹시 당신의 상태창이 전혀 새로운 길로 당신을 인도하는 겁니까?]
[난데없이 무슨 소리야? 야! 사람을 게임에 끌어들여 놓고는, 정작 본인이 오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냐? 응?]
오웬이 성진의 목을 잡아 탈탈 흔들고, 구릅 역시 어느새 길어진 머리카락으로 성진의 팔을 칭칭 휘감는다. 심지어는 그 점잖은 하타수 티티마저 성진의 한쪽 발굽을 꼬옥 부여잡고 있었다.
[뉴비야!]
[이성진!]
[이성진! 이성진!]
특전 상점을 살펴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호들갑.
저 혼비백산한 면면들을 살펴보니, 새삼스럽게 이들 속에서 자신의 역할이 그리 작지 않았음이 느껴졌다.
성진은 어색한 기분을 감추려 되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잠깐만. 다들 왜 이리 호들갑이야? 앞으로 영영 끝이라는 말이 아니라고. 언제든지 또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냥, 당장은 급한 목표를 이뤘으니까. 이제는 나도, 그리고 너희들도 각자의 일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야. 걱정 마.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들어올게.]
빈말은 아니었다. 왠지 그런 기분이 강하게 들었으니까.
당장은 이들과 헤어지게 되겠지만, 그래도 한번 맺은 강한 인연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질 거라고.
[그러니까 내가 없을 때는 위험한 짓은 절대 하지 마. 알았어? 앞으로 던전 공략이 필요하면 종종 덱스터의 도움을 구하고.]
[이성진…….]
그러자 성진의 결심을 더는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일행이 잠시 침묵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옳다! 이것은 끝이 아니다!]
코를 킁킁 울리고 있던 미녀 레인저가 반짝 고개를 들며 외쳤다.
[이성진은 언제까지나 나의 친구! 그러니 믿는다! 용사의 내장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말간 구릅의 눈동자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바타의 모습이야 어떻든, 아마도 구릅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금 그의 내장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중인 거겠지.
[위기의 순간에 늘 빛났던 우리의 리더를 잊지 않습니다. 순혈 마슈나무, 이 하타수 티티가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억할 겁니다, 이성진.]
진중한 방패용사 역시 체념한 듯, 아기 산양의 발굽을 움켜쥐며 비장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뉴비야. 아니, 이성진.]
그리고 오웬.
녀석은 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연거푸 같은 소리를 되뇌었다.
[너, 황도에 산다고 했지? 기다리고 있어. 알겠어? 이번에 델크로스로 돌아가면, 내가 반드시 널 찾을 거다!]
어, 글쎄? 어떨까…….
성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생각했다.
‘굳이 힘들여 엉뚱한 곳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을 텐데. 난 어차피 황궁에 있을 거니까.’
물론 녀석을 만나더라도 순순히 정체를 밝힐 생각은 없지만.
아마도 오웬의 뉴비 수색은, 영원히 기약 없는 삽질이 되지 않을까.
[그럼 덱스터, 앞으로도 이 녀석들을 잘 부탁해. 이제 제대로 된 공략을 만들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네가 만든 공략이라면 늘 믿을 수 있으니까.]
[어, 으응…….]
고글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 두더지에게까지 인사를 건네자-
치직.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시야에 노이즈가 일며 삽시간에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접속을 종료할 때마다 매번 겪었던 현상. 하지만 이번만큼은 느낌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성진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오라클의 이정표는, 판게아 클로니클에서 성진을 완전히 내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리라.
[이성진……!]
덩달아 일행의 존재감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성진의 기감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 뿐, 실제로 흐려지고 있는 것은 성진 본인의 아바타 쪽이리라.
[명심해. 다들 나 없이는 절대로 A랭크나 S랭크에 도전할 생각 하지 말라고. 알겠어?]
마지막으로 재차 당부한 성진이, 일행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동안 즐거웠어. 나중에 또 보자!]
휘익.
동시에 의식이 확 밀려나며, 판게아 클로니클의 세계가 저만치 멀어진다.
[접속 종료. 게스트 ID의 말소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귓가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나직한 전자음.
[고유 ID의 존재를 확인하였습니다. ‘코드 제로’에 관한 긴급 프로토콜에 의거, ID를 임시 동결합니다…….]
* * *
〚게스트 ID !N;3$$ti0m@. 접속을 종료합니다.〛
구릅뺘랍구르릅 비뺘릅릅은 내장에서 흘러넘치는 눈물을 느끼며 현실에서 눈을 떴다.
‘…….’
데구르르-
후두부에 있는 가장 큰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려보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언제나처럼 황폐해진 고향.
마왕이 강림한 후 피처럼 붉어져버린 하늘, 그리고 혼탁한 진흙으로 뒤덮인 검은 대지다.
‘언젠가 이성진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용사의 내장은 절대 거짓을 고하지 않는다.’
잠시 감정의 동요를 갈무리하던 그는, 곧 모로 누워있던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쿠르르르르-
그러자 수백의 다리에 휘저어진 진흙이 요동치고, 습한 대기에 어지러운 소요가 일었다.
‘그러니 나는 우리의 앞에 놓인 운명을 믿으며, 용사의 사명을 묵묵히 이어갈 것이다.’
살아남은 이들 중 가장 많은 다리를 가진 자, 누구보다 뜨거운 내장을 가지고 모두를 이끄는 자의 사명이다.
구릅뺘랍구르릅 비뺘릅릅은 결연하게 인벤토리를 열었다. 이제 판게아 클로니클에서 가져온 무기들로, 자신과 동료들의 전력을 재정비할 때였다.
* * *
〚게스트 ID #A&**d#!#. 접속을 종료합니다.〛
하타수 티티는 눈을 뜨자마자, 심복이 곁에서 자신을 빤히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인가?”
삐그덕-
기다란 몸을 일으키자, 오래 움직이지 않고 있던 관절이 구겨지며 뻑뻑한 마찰음을 낸다.
“휴식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하타수 티티. 급하게 장로 회의가 열린다 하여 부득이하게 당신을 찾았습니다.”
“장로 회의? 이 시각에?”
“네. 바름 나무들의 수장, 야나라 탈레의 요청이라 합니다.”
야나라 탈레는 그의 오랜 정적. 최근에는 무슨 수를 썼는지, 일부 장로들을 등에 없고 나날이 기고만장해지는 추세다.
하타수 티티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 요청의 적절성을 심사하기도 전에 일단 회의를 열고 본다는 말인가? 이제 장로 회의의 권위도 땅에 떨어졌군.”
왜 아니겠는가.
한때 일족을 이끌던 ‘가장 오래된 나무’께서는 이제 예전의 현기를 모두 잃었다.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버석하게 흔들리는 잔가지들과, 때때로 바람소리인 양 새어나오는 가냘픈 사념뿐.
[돌이킬 수 없다면, 하다못해 그대의 마음만은 평온하기를…….]
더는 그를 의지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쩌겠는가. 번거롭긴 해도, 직접 자신이 몸을 움직일 밖에.
“가자. 이제 바름 나무들과의 정쟁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
“그 말씀은…….”
“그래. 내가 가져온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수레에 실어라. 이제 일족의 장로들은, 우리들 중 누가 일족을 위해 가장 크게 기여하고 있는지 소상히 알게 될 것이다.”
휘익.
찔레나무 관을 쓴 하타수 티티가, 금갈색의 망토를 휘감으며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일족의 [열쇠]를 물려받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하타수 티티가 되리라!”
* * *
그리고 대륙의 최남단, 남부 전선 델크로스 진영.
〚게스트 ID Qr#^^E&. 접속을 종료합니다.〛
또 하나의 게스트 ID 유저가 현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곧장 눈을 뜨는 대신, 오웬은 잠시 몸을 뒤척이더니 이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수년 만에 처음으로 경험하는 제대로 된 수면. 어찌 속절없이 끌려가지 않을 수 있으랴.
“저하. 기침하셨습니까?”
잠시 후, 천막을 걷어 올리며 알리샤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온다.
평소라면 일찌감치 일어나 막사 밖에서 몸을 풀고 있을 시간. 이상하게도 조용한 황자가 신경이 쓰여 살피러 온 것이다.
“……?”
그리고 알리샤가 발견한 것은, 침상 위에서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진 오웬 황자였다.
이마에 처음 보는 괴상한 검은 천을 삐뚜름하게 덮고는, 그녀가 바로 옆으로 다다가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숙련된 오러 유저인 황자가 이렇게 가까이 타인의 기척을 허용하다니, 본래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저하?”
처음에는 어딘가 편찮으신 것이 아닌지 슬그머니 걱정이 된 알리샤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니, 황자는 전에 없이 편안히 숙면을 취하는 중이었다. 자주 악몽에 시달리는 그에게는 무척이나 드문 모습.
‘이를 어쩐다? 오늘은 일찌감치 볼란타 부족에 볼일이 있다 하셨는데…….’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알리샤는, 이내 조금 더 황자를 쉬게 놔두기로 결심했다.
“…음냐. 뉴비…….”
황자가 잠시 알아들을 수 없는 잠꼬대를 중얼거리다 또다시 고른 숨을 내뱉는다.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던 알리샤는, 이내 발소리를 죽이며 천막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볕이 들세라, 조심스럽게 입구를 방풍막으로 뒤덮었다.
Chapter 16: Chapter 316
Chapter Text
316. 변화 (1)
어스름한 새벽.
가을로 접어들며 점점 황량해지는 황무지를, 네 대의 짐마차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덜컹덜컹.
노면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음에도, 마차들은 큰 흔들림 없이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차 바닥에 간단한 완충 장치가 구비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짐마차로 쓰기에는 과분할 정도의 고급 설비.
그런 마차들의 새하얀 포장 위로, 아직 도료가 마른 지 얼마 되지 않은 깨끗한 상단명이 보인다.
-베르트란 & 리
마차가 달리고 있는 곳은 옛 오르토나와 레지나를 잇는 낡은 교역로. 현재는 통행인이 거의 없는 버려진 길이었다.
그런 인적 없는 곳을, 상단의 짐마차가 호위대도 없이 다니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빈약한 수풀 아래에 바짝 엎드려 마차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한 무리의 도적들이 있었다.
“참말이구만! 진짜로 상단 마차가 이쪽으로 오고 있수!”
“그래. 다시아노 후작의 정보가 맞았군.”
“그렇긴 한데, 정말로 저걸 털어도 뒤탈이 없는 거요, 두목?”
그러자 이들의 우두머리인 털보가, 미덥지 못한 오합지졸 부하들을 안심시켰다.
“걱정들 마라. 이제 막 상행을 시작한 작은 상단이라고 들었다. 게다가 이런 외진 길로 다니는 상단 마차라니, 절대 떳떳한 물품들을 거래하는 게 아닐 거다.”
“그렇수?”
“그렇고말고. 자, 저기 보라고! 사람이라고는 고작 마차를 모는 마부 넷이 전부야. 얼마나 비밀을 유지하고 싶었으면 저러겠냐?”
확실히 그랬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상단에는 마부들을 제외한 사람의 기척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특히나 선두의 마차를 몰고 있는 마부는 다 죽어가는 꼬부랑 노인네가 아닌가! 도적들의 얼굴에서 긴장이 사라지며, 서서히 희망의 기색이 어리기 시작했다.
“아마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더라도, 어디 가서 억울하다고 호소하지도 못하겠지. 자, 괜한 걱정은 그만하고 어서 가자!”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간 털보를 선두로, 도적들은 잽싸게 통행로를 달려 마차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히히힝!
늙은 마부가 화들짝 놀라 고삐를 당기자, 갑자기 재갈이 세게 조이며 말들이 처량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마차들이 완전히 멈춰 서는 것을 확인한 털보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영감! 그 마차들을 두고 지금 당장 여길 떠나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지!”
한데 그 순간, 도적들의 눈앞에서 대단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투둑! 툭!
갑자기 포장을 거칠게 찢어발기며, 각각의 마차들에서 커다란 상자들이 하나씩 튀어나온 것이었다.
“……?!”
공중을 날아다니는 상자에 그들이 놀랄 새도 없이-
철컥! 철컥! 쿠웅!
한자리에 모인 마차들이 이리저리 뒤틀리며 합쳐지더니, 이윽고 거대한 거인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체고가 거의 10미터는 넘어 보이는 무시무시한 얼음 괴물!
우워어어어어!
허공을 향해 뿜어지는 놈의 격한 포효에 경악한 도적들이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며 괴물을 올려다보았다.
“어헉?”
“뭐, 뭐야! 저건?”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메에에에!
어느새 노인이 아닌 작은 염소의 모습으로 돌변한 마부가, 두둥실 공중으로 떠오르며 도적들을 매섭게 쏘아본다.
가로로 길게 찢어지는 동공과 머리 위로 삐죽 솟은 날카로운 뿔. 몸에서 풀풀 검은 마기를 풍기는 것이, 모로 봐도 영락없는 악마의 꼬락서니다.
“이게 대체 몇 번째임메에에! 왜 자꾸 ‘베르트란 & 리’의 마차를 공격하는 것임메에? 포장이 제대로 남아나질 않잖습메에에!”
염소는 악마의 하급 권속.
그의 주인은 중위 악마 글럼고스로, 현재 빌헬름 슈미트라는 신분으로 물류 중계소의 지부장을 맡고 있는 자다.
염소는 주인의 명령으로 오르토나 북부 바를레타로부터 저온 마차를 몰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귀한 참연어를 비롯하여, 상하기 쉬운 고가의 식품들이 잔뜩 실려 있는 마차였다.
“이게 한번 합체하면 되돌리기가 대단히 까다롭슴메에에! 이렇게 날 귀찮게 만들다니, 너희들 모두 각오해야 할 것임메에에에!”
“으어어…….”
“으으으…….”
도적들은 어눌한 신음을 흘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눈앞에 맞닥뜨린 악몽과도 같은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기 때문.
그런데 놀란 것은 비단 그들뿐이 아니었다.
“지… 지금 마차에서 뭐, 뭐가 나온 거야?”
“괴물! 괴물이다!”
“으허억! 악마다!”
뒤에 있던 마부 세 사람 역시 소스라치게 놀라며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게 아닌가. 그들의 상사가 악마인 것은 물론, 자신들이 옮기는 것이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던 모양.
그러자 염소가 대단히 낭패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또 마부들의 기억을 지워야 함메에? 한두 번도 아니고, 대체 언제까지 이 짓을 계속 해야 하는 것임메에에?”
염소의 기묘한 눈과 마주치자, 하얗게 질린 마부들은 어이없게도 자신들을 습격한 도적들을 향해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나마 기댈 곳이 그쪽이라 판단한 것이다.
“히익! 도, 도망쳐!”
“죽는다! 다 죽을 거라고!”
그렇게 해서 습격한 도적들과, 습격당한 마부들이 한데 뭉쳐 도망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어설픈 달리기로 열심히 뒤쫓는 얼음 괴물!
쿵쾅쿵쾅!
거인이 육중한 다리를 내디딜 때마다, 약한 지반이 움푹 패며 일대의 땅이 불안정하게 진동한다. 염소가 기겁하며 재빨리 얼음 괴물을 향해 날아올랐다.
“잠깐! 이제 그만 돌아옵메에에! 안에 있는 물건들이 모조리 흐트러짐메에에에!”
그 혼란한 와중에 다행히도 얼음 괴물이 사람들을 처참하게 짓밟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자동으로 적을 공격하게 조정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두 마리의 글래쳐 트롤이 하나로 합체된 터라 움직임이 이전처럼 원활하지는 못했던 것.
그러는 사이에 작은 염소는 허둥지둥 주인에게 받은 컨트롤러, 얼음 심장을 찾아냈다.
놈이 그것을 조작하자-
지잉-
철커덩! 철커덩! 쿵!
거대한 얼음 괴물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로 네 개의 상자로 해체되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제히 마차 안으로 고이 날아들었다.
휘익- 쿵! 쿵!
“……!?”
사위는 삽시간에 고요해진다.
이제 아까의 소동이 있었던 흔적이라고는 넝마가 된 마차의 포장과 엄청난 무게로 짓눌려 움푹 팬 바닥들뿐.
하지만 혼비백산한 사람들은 도주를 멈추지 않았다.
“아, 악마다!”
“글래쳐 트롤이다!”
“주신이시여어어어!”
메에에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염소는 울상이 되어 한숨을 쉬었다.
“이제 돌아가면 주인님께 꼭 말해야겠슴메에에. 차라리 제대로 호위대를 구성하는 쪽이 훨씬 좋지 않음메에에?”
낙심한 악마는 가볍게 몸을 날려, 허둥지둥 달아나는 사람들을 막아섰다.
“으헉!?”
“하긴, 그러면 뒤처리해야 할 사람이 많아져서 더 번거로울지도 모르기는 합메에에…….”
가로로 길게 찢어진 염소의 눈이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응시한다.
뒤이어 그들의 머릿속을 뒤흔드는 쨍한 목소리.
[자, 다들 내 눈을 바라봅메에에에. 너희들은 행복해집메에에에…….]
“……!?”
그렇게 염소와 마주한 도적들과 마부들의 눈이 몽롱하게 변해가는 동안, 황무지 저편으로는 평소와 같은 환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 * *
“저하, 오늘은 집중이 무척 좋으시군요! 어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이른 아침의 연무장.
성진의 수련을 봐주던 마사인이 놀란 얼굴로 물어왔다. 그만큼 성진은 전에 없이 집중해서 아침 수련에 임하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골치 아프던 판게아 클로니클의 문제가 일단락된 데다, 마침 진도는 바나하스 연공법의 8식 10형.
지난하던 오러 엮기의 끝이 보였다. 이제부터는 성진 스스로도 어엿한 검사임을 자처하기에 부족함이 없어진 것이다.
“휴우…….”
만족스럽게 수련을 끝낸 성진이 땀을 닦으며 물었다.
“그래서 마사인 경. 8식 10형 다음은 뭐지? 이제는 나도 옛 검술을 익히는 건가?”
옛 검술은 황실 기사단 표준 검술의 원형. 하지만 일천한 성진의 경험으로도, 두 검술은 오러를 엮는 법이 제법 다를 것이라 짐작되었다. 이참에 경험 삼아 한 번쯤 익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마사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옛 검법은 이미 천재 검사 바나하스가 완벽하게 정리를 끝냈습니다. 황실 기사단 표준 검술과 바나하스 연공법은, 그 자체로도 이미 완전한 검술이지요.”
“그래?”
“네. 저 역시 옛 검술을 깊이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특히나 저하처럼 하나에 쉽게 집중하시는 분은, 차라리 한 가지 우물을 끝까지 파는 쪽이 더 효율적일 겁니다.”
그리고 그 의견은 비공식 소드 마스터, 로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보기에도 황실 기사단 표준 검술의 묘리는 결코 옛 검술에 뒤지지 않는다고 봐. 다른 검을 익힐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나랑 같이 헤네시스 연공법을 새로 배우는 쪽이 나을 거야.”
“…너 정말로 포기를 모르는구나.”
어, 로건.
잘 알겠으니까 은근슬쩍 오르토나의 검술을 영업하지는 말라고.
“그나저나 네가 아침부터 여긴 웬일이야?”
성진은 진주궁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본래라면 이 녀석, 지금쯤 기사단 일로 한창 바쁠 때가 아닌가.
“마침 오늘은 마물 전담반에 출근하려 했지. 가는 김에 네 상태도 좀 봐 주고.”
“나?”
“그래. 요즘 아침마다 부쩍 피곤해했잖아? 시슬레가 네 걱정이 많아.”
그 말과 함께 하얀 신성력을 담은 손이 성진의 어깨를 짚어온다.
‘이제 더는 밤샘 게임할 일이 없을 텐데. 판게아 클로니클에서의 볼일은 대충 끝났으니까.’
성진은 잠시 사양할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시슬레를 들먹이긴 했지만, 로건의 표정에서도 역시나 옅은 걱정의 기색을 읽은 까닭이다.
게다가 아버지만큼은 아니어도, 로건의 신성력 역시 제법 시원하단 말이지. 격렬한 아침 수련으로 지친 근육이 빠르게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넌 요즘 뭐 하느라 마물 전담반에 올 시간도 없이 바빴어? 성 바스티안 기사단은 평소 황자한테 무슨 일을 시키는 거야?”
하지만 로건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마물 전담반 일의 연장이었지. 밀로 상단 압수 수색을 일일이 참관했거든.”
“참관? 네가 직접?”
“그래. 특히나 인퀴지터들이 고용인과 잡부들을 검거할 때, 내가 옆에서 마기가 감지되는지 일일이 감독해야 했어.”
여상하게 대꾸한 로건은,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는 성진을 향해 다시 한번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너도 알다시피 상단주 자코모 밀로가 악마 계약자라는 혐의를 받고 있지. 그러면 상단의 남은 자들의 처우가 어찌 되겠어?”
“……!”
어, 그러고 보니 그 생각을 미처 못 했군.
그냥 예전 지구의 사법기관만을 생각하며, 조사 과정에서 악마 숭배자들은 알아서 잘 걸러지리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압수되는 재산들과 독점권에만 집중하고 있었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야.’
델크로스는 신정일치사회. 악마라면 극도로 과한 반응을 보이는 곳이 아닌가. 아마도 밀로 상단에 연루된 자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이단재판부로 끌려가, 거짓 자백이라도 할 때까지 죽도록 고문받을 터. 그래서 로건이 자진해서 나섰다는 것이다.
제국의 2황자라는 직함 때문만은 아니리라. 로건은 최연소 소드마스터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도는 데다, 직접 릴리움 별동대를 이끌고 신민들을 살피는 이름 높은 성기사다.
그런 로건이 직접 무죄임을 보증하는데, 어느 누가 감히 무고한 자에게 악마 숭배의 혐의를 씌울 수 있으랴.
‘하지만…….’
그럼에도 성진은 로건이 과하게 수고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코모 밀로의 죄목은 전 대륙에 퍼져 있었고, 발 빠른 고용인들은 사건에 연루될까 무서워 이미 사방으로 도주한 상황.
그 검거 과정을 빈틈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과연 어지간한 노력으로 감당 가능한 일인가.
‘황도의 신민들이라고는 해도, 따지고 보면 이 녀석에게는 적국의 백성들일 뿐인데…….’
이 녀석은 대체 도덕성이 높은 것인가,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 없는 호구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진 성진이 멀뚱히 로건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묘한 시선을 눈치챈 로건이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렸다.
“…왜?”
어, 그냥.
대체 네가 어디까지 호구 잡힐 수 있는지 잠시 걱정돼서 말이지.
Chapter 17: Chapter 317
Chapter Text
317. 변화 (2)
자코모 밀로 사건의 공판일이 정해졌다.
죄인은 아직 검거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의 사형은 이미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고, 밀로 상단의 정리 또한 모조리 끝나가고 있었으니까.
재판이라기보다는, 놈의 처분에 대한 공표나 마찬가지일 뿐.
“로건 황자님 덕분에 현재 죄인들의 심문은 아주 순조롭습니다. 이대로라면 아마도 공판일 전에, 자코모 밀로의 추가 죄목과 증거들을 더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퀴지터 발레리의 보고를 듣고 있던 로건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발레리 경이 말하는 ‘순조로운 심문’이라는 것이, 피와 비명으로 점철된 끔찍한 과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현재 심문받고 있는 죄인들의 운명은, 실제로는 로건의 지목으로 인해 극명하게 갈린 것이나 마찬가지.
하지만 발레리 경은 눈치도 없이 싱글싱글 웃으며 덧붙였다.
“저하께서 혐의자 수를 대폭 줄여주지 않으셨습니까? 덕분에 한동안 바빠질 거라 긴장하고 있던 심문관들이 완전히 맥이 빠졌지 뭡니까.”
“…….”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약 오른 심문관들이 소수의 죄인들에게 더 시간과 정성을 할애하며 고문에 집중하고 있… 끄헉?”
기습적으로 세게 발을 밟힌 날라리 인퀴지터가 바닥을 구른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마물 전담반의 모두가 화들짝 놀라는 가운데, 성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발레리의 보고서를 낚아채며 타박했다.
“실없긴. 그게 일부러 보고할 만한 일인가? 발레리 경. 요점만 간단히 해. 애초에 자넨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다고.”
“아니, 저하…….”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확인할 테니, 자네는 이만 쉬어.”
한동안은 운신이 힘들 거야. 내가 오러를 실어서 좀 세게 밟았거든. 물론 자네에게 별다른 사감이 있는 것은 아니네.
칙칙-
지브릴 의원이 발레리 경의 발에 애꿎은 향수를 뿌려주는 동안, 성진은 보고서를 휙휙 넘기며 주요 사항을 확인했다.
은총의 기사를 날조하는데 집중했던 덕일까, 이제는 이 정도의 공식 서류는 막힘없이 읽을 수 있는 문해력이 생겼지.
그러던 중, 죄수들의 자백 기록에서 유난히 성진의 시선을 잡아끄는 대목이 있었다.
“어? 여기 작업장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작업장?”
“응. 한 달에 한 번 상단주로부터 원료 같은 걸 받았대. 그걸 작업장이라는 곳에 전달했지만, 정작 자신은 뭐에 쓰는 건지 몰랐다나?”
“상단에서 자체 제작‧유통한 물품이 있다는 말이군.”
성진은 지금까지 보고받은 내역들을 찬찬히 상기해 보았다. 밀로 상단이 취급하던 품목이나, 거래 내역은 전부 파악되어 있다. 오로지 입수 경로를 밝히지 못한 물품은 단 하나뿐.
그러자 로건은 성진이 하고 싶은 말을 빠르게 눈치챘다.
“…약차 건이구나.”
“어, 역시 그런 것 같지?”
이제까지 약차의 입수 경로는 신기하리만치 베일에 싸여 있었다. 지그스문트령에 한정해 소량 공급했던 데다, 상단 내에서도 차의 출처를 아는 자가 없었기 때문.
그나마 기대할 만한 곳은, 지그스문트와 밀로 상단의 독점 거래를 처음 주선한 스카르차피노 가문이었다.
‘오르덴이 처음 약차 건을 의뢰했을 때만 해도, 분명 유통 초기에 리카르도 스카르차피노로부터 직접 물건을 전달받은 정황이 있다고 했었지…….’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까지의 강도 높은 조사에도 불구하고, 밀로 상단과 스카르차피노를 연관 지을 증거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가 중간에서 흔적을 싹 지워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물론 시구르트 시구르슨이 그리 허술하게 일을 처리하지는 않았겠지만…….’
자코모 밀로의 수배령이 떨어진 것은, 놈이 예기치 않게 리카르도와 이사벨라를 버리고 도주한 이후의 일. 절대로 놈의 소행일 리가 없다.
짐작건대 스카르차피노의 입김이 닿아있으리라. 대륙 최고의 부호인 스카르차피노 가문이, 악마 계약자의 죄목에 연루될 가능성을 사전에 없애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겠지.
어쩌면 거기에는 또, 권세 높은 가문을 굳이 들쑤시고 싶지 않았던 이단 재판부 내부의 조력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누구냐? 스카르차피노의 누가 손을 쓴 거지?’
그때 문득 성진의 뇌리에, 탄신연 행사에서 마주쳤던 스카르차피노의 장자 도미니코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사벨라와 닮은 듯 닮지 않은, 냉정하기 짝이 없는 그 얼굴이.
‘일단은 그 자식 쪽을 건드려 볼까.’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성진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약차에 대한 단서라고는 이것뿐이니까. 공판일 전까지는 이 작업장이라는 곳을 좀 더 파 봐야겠어.”
그러자 로건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 건은 내가 조사해 보지.”
“어, 네가? 너 바쁘지 않냐? 기사단 일은 어쩌고?”
“그럭저럭 병행할 수 있어. 잠을 좀 덜 자고 틈틈이 처리하면 되니까. 릴리움의 기사들도 옆에서 많이 도와주고 있고.”
“…….”
어이가 없어진 성진이 멀뚱히 로건을 살폈다. 그렇지 않아도 신성력과 오러만 믿고 과로하는 놈이, 여기서 더 일거리를 늘린다고?
“게다가 이렇게 꼭꼭 숨겨져 있는 걸 보면, 아마 공개적으로 수사한다고 해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아닐 거야. 인퀴지터들을 동원하는 것보다 내가 혼자서 움직이는 쪽이 빠르겠지.”
물론 로건은 마기에 대단히 민감하고, 거짓말도 귀신같이 알아채긴 하지. 게다가 데카론 나이트니까, 그 어떤 베테랑 정보원들보다도 기척을 잘 지우며 숨어들 수 있을 터.
하지만 기분 탓일까? 어쩐지 이 녀석이 무리하게 조사를 서두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성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요즘 뭐가 그렇게 급해? 너, 무슨 일 있어? 혹시 또 황도 밖으로 토벌하러 가냐?”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로건이 움찔 놀라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뭐? 정말이야?
“아직 결정된 사항은 아니다. 하지만 요즘 키프로스 연합에서 해상 마수 퇴치 요청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어. 아무래도 당장 가볍게 움직일 만한 전력이라면 역시 릴리움 별동대니까, 내가 토벌대를 꾸리는 건 기정사실이 될 거야.”
“…….”
“조만간에 성회에서 정식 인가가 나면, 나도 그 준비로 지금보다 더 바빠지겠지.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마무리 지어 놓고 가야겠다 싶어서.”
“아니, 이 큰 제국에 인재가 너밖에 없어?”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
칠순이니 어쩌니 혼자 주장하긴 하지만, 로건은 누가 보더라도 아직은 새파랗게 어린 애라고! 집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그 멀리까지 토벌을 보내?
“다른 놈들더러 가라고 해! 탱탱 놀고 있는 기사단도 많잖아?”
그러자 로건이 당황한 표정으로 성진에게 주의를 주었다.
“이성진. 황자가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제국의 기사들은 모두가 각자 주어진 임무에 성심성의껏 임하고 있다. 그들의 노고를 모욕하지 마.”
“뭐? 네가 지금 다른 기사들 입장을 생각할 때야?”
“뿐만 아니라 제국의 입장도 걸려있다. 잘 생각해 봐. 키프로스 연합 정도 되는 거대 해상 세력이, 굳이 마수 토벌을 제국에 요청한다는 사실도 고려해야지.”
발끈한 성진을 다독이듯, 로건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들은 지금 어중간한 도움을 원하는 게 아니야. 실제 전력이야 어떻든, 대륙에서 가장 이름 높은 토벌대가 와주기를 바라는 거지.”
“토벌대의 명성이 더 중요하다고?”
“그래. 그래야만 도움을 청한 쪽에서도 체면이 서고, 제국도 그들로부터 정치적 우위를 손쉽게 고수할 수 있는 거야. 타국에서 릴리움 별동대의 명성은, 제국의 명성 그 자체나 다를 바가 없으니까.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던 로건이, 희미하다 못해 조금은 서글퍼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오르토나 난민들 중 많은 수가 키프로스에 유입되었다는 사실도 내게는 중요해. 그들은 어업의 최하층에 종사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해상마수를 토벌하여 어업을 안정시키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그들을 위한 일이기도 한 거야.”
“…….”
성진은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 로건의 설명을 납득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까보다 더더욱 어이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네가 뭔데? 대체 왜 너 혼자서 제국의 명성과 망국의 백성들을 모두 짊어지고 있어?’
그게 한 사람에게 가당키나 한 무게야? 너처럼 재능 넘치는 녀석이, 인생을 채 피워보지도 못하고 철저히 매몰되어버릴 정도의 가치냔 말이야!
기껏 새로운 삶을 얻었잖아! 아버지의 위세에 기대면서, 황자라는 신분을 즐기면서, 조금은 스스로의 안위를 위하며 살 생각은 없어?
성진은 도무지 로건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속에서 솟구치는 짜증스러운 심정만이, 그를 향한 여과 없는 비난으로 표출되었을 뿐.
“…미련하긴.”
“응?”
“너 말이야, 인마! 너 진짜 미련하다고!”
“…….”
그러자 로건이 눈을 깜박이며 성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성진의 말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 까닭이다.
하지만 생각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당신이 쓸데없이 미련하다는 말입니다.
오래전, 자신을 향해 날 선 목소리로 미련하다 비난하던 소년. 그때와 똑같은 회색의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바로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지 않은가.
“하하.”
로건은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 말은 정말이었나 보네. 예전에 누구한테서 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거든. 아직까지도 평가가 그대로인 걸 보면, 사람은 여간해서는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물론 그 태평한 반응에, 성진의 속이 더 뒤틀린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웃지 마, 이 자식아!
“샤론 경!”
성진의 갑작스러운 호명에, 한창 고개를 처박고 서류와 씨름하던 엑소시스트가 시선을 들었다. 언제나처럼 눈가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은 초췌한 모습.
“예에, 저하?”
“경은 자코모 밀로의 공판일이 지나면 한동안은 한가하지?”
“네에. 아마도 그렇습니다. 물론 저하께서 따로 일을 시키지 않으신다면 말입니다만…….”
“좋아. 그럼 경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지.”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경에게 키프로스 해상 마수들에 대한 조사를 명한다. 릴리움 별동대를 따라가라. 가서 해상에서 나타나는 마수들에 대해, 자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조사해 오도록!”
“…네에?”
마수 조사라니?
뜬금없는 성진의 지시에, 엑소시스트가 당황하며 눈을 끔벅거렸다.
“저기. 저하…….”
그때 구석에서 신성력으로 스스로의 발을 치료하고 있던 빨강머리 인퀴지터가 손을 들어올렸다.
“외람되오나, 마물 전담반은 엄연히 담당 분야가 정해져 있는 부서입니다. 바로 [마물] 전반에 대한 것이지, 마수들에 대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물론 저희들이야 저하의 명을 따르는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습니다만, 다른 기사단과의 협조는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해수 토벌에서 우리가 맡는 업무를 제대로 명시하고, 토벌대와의 공조 관계 역시 명확히 하지 않으면 차후에 큰 문제가 생길 겁니다.”
분명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자코모 밀로의 재판 문제만 해도 그렇지. 지금 이단 재판부 쪽에서는, 악마 계약자 사건에 마물 전담반이 은근슬쩍 끼어든 걸 두고 얼마나 못마땅해하고 있는가.
“무슨 헛소리야? 발레리 경. 나를 뭘로 보나? 내가 사사로운 목적으로 행정부 산하 부서를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럼 아니십니까?
차마 그렇게 되묻지 못한 발레리 경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성진은 당당했다.
“해상 마수의 조사는 마물 전담반 일의 연장이다. 당연하지 않나.”
“…네?”
“자, 잘 생각해 봐. 발레리 경. 지금까지 나타난 해상 마수들이 정말로 마수인지, 아니면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마물인지, 그걸 자네가 어떻게 장담하지?”
“네? 저하. 하지만 마수는 마수입니다. 해상 마수들은 예로부터…….”
“전부터 마수라 알려져 있으니 마수일 거라, 그건 대단히 편협한 시각이다. 일례로 글래쳐 트롤만 해도 그래. 오랜 세월 마경의 마수로 분류되었지만, 지금도 그것이 단순한 마수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말할 수 있나? 일단 놈들에게는 마기가 전혀 없는데?”
“…어?”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자신감이 사라진 인퀴지터에게, 성진이 냉랭한 어조로 쐐기를 박았다.
“발레리 경. 이계 묵시록의 열람이 허락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어. 이제야 겨우 성회가 경전 해석의 한계를 인정하고, 마수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삿된 것들에게 [마물]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거야.”
“…….”
“하면 마물 전담반의 궁극적인 임무는 무엇이겠나? 아직도 우리가, 단순히 마물 관련 사건의 뒤처리를 하는 부서에 그친다고 보나?”
어느샌가 발레리 경은 물론이거니와 로건과 샤론 경, 심지어는 지브릴 의원까지 압도된 표정으로 성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우리는 지금 아무도 걸어보지 않은 지평에 발을 디디는 선구자나 마찬가지네. 그러니 우리 부서의 진정한 임무는 바로, 마수와 마물의 모호한 경계를 명확히 하고, 다른 이들에게 그 기준을 제시하며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나?”
그때 머릿속에서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최근에 말수가 부쩍 줄어든 마왕 놈이었다.
[헛소리에 이 정도로 크게 공을 들이는 미친놈은 또 처음 보네…….]
닥쳐!
성진은 내심 찔렸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발레리 경에게 덧붙였다.
“어때? 자네도 샤론 경을 따라갈 텐가? 현재 [이계 묵시록]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건 발레리 경, 자네니까 말이야. 아무래도 마물과 마수를 비교 분석하는 데 가장 뛰어나지 않겠어?”
“어…….”
날라리 인퀴지터가 솔깃한 표정을 짓는다.
“……?”
그렇게 모두가 긴가민가하고 있는 동안, 성진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로건을 의기양양하게 바라보았다.
자, 로건. 그러니까 너도 이번에는 샤론 경과 아버지를 달고 가 봐라.
네가 쓸데없이 과로하거나 허튼짓할 때마다, 아마 아버지가 기꺼이 너에게 딱밤을 때려 주실걸?
Chapter 18: Chapter 318
Chapter Text
318. 변화 (3)
졸지에 마물 전담반 인력 절반을 장기 출장 보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성진은 어째 마음이 편치 않았다. 로건이 해수 토벌을 위해 매년 바깥을 나돌았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이번 토벌행은 유난히 찜찜하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너도 같이 가면 되잖아?]
답답한 황도를 벗어날 구실이 생겨서일까, 마왕 놈이 넌지시 물어왔다.
‘뭐, 마음 같아서는 나도 그러고 싶지만…….’
하지만 성진에게는 아직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자코모 밀로의 공판 전에, 놈을 잡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지그스문트 변경백의 꿍꿍이도 따로 조사를 해야 하고.
어디 그뿐인가. 다샤에게 맡겨 놓은 이적 단체 조사들도 슬슬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는 중이다.
‘게다가 로한의 레오나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역시 그놈이었다. 누님의 곁을 맴도는 기분 나쁜 양아치 자식.
지난 탄신연에 성진에게 과하게 친한 척을 한다 싶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황도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만남을 요청하는 서신을 하루가 멀다 하고 보내오고 있다.
아멜리아 누님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고, 성진이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주길 바라는 것이 눈에 빤히 보였다.
‘역시 지금은 내가 황도에 있어야 해. 조만간 오웬도 돌아올 테고 말이지.’
[오웬? 1황자 말이야? 걔가 돌아오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어, 그런 게 있어.’
대충 대꾸한 성진은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아, 정말 찜찜하다. 아무래도 불안해. 뭔가 방책을 더 강구해야 하는데 말이지.
* * *
그런데 의외로 그런 예감을 받은 것은 성진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짬이 나, 시슬레의 수련이나 들여다볼까 하고 찾은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의 연무장.
까앙!
입구에 채 도달하기도 전에, 굉음과 함께 힘차게 허공으로 날아가는 갑옷이 보인다. 아마도 시슬레가 한창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모양.
“우와! 정말 멋져요, 시슬레 님!”
연무장 한쪽에서는, 신이 나서 응원하고 있는 서이서가 보였다.
쟤는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명색이 성녀인데, 변변한 공식 일정도 없나?
“…아? 모레스 오라버니!”
그때, 멀리서 성진의 기척을 알아챈 시슬레가 플레일을 붕붕 휘두르며 살벌한 인사를 건네 왔다. 그새 꼬맹이의 기감이 부쩍 좋아졌단 걸 알 수 있었다.
“요즘 전담반 일로 바쁘지 않아? 여긴 어쩐 일이야?”
“음,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어.”
못 본 사이에 시슬레의 수련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듯 보였다.
일단 꼬맹이는 거추장스러운 성녀복을 벗어던지고, 제대로 된 기사단 복장을 하고 있다.
거기다 조막만 한 손에 쥐인, 스파이크가 이리저리 튀어나온 흉흉한 플레일.
이전보다 한층 무거워 보이는 무기를 들고도 제법 자세가 안정되어 있는 걸 보니, 그간 꼬맹이가 얼마나 치열하게 수련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갑옷의 비거리가 평소보다 1.5배는 늘었습니다. 엄청난 힘이군요.”
“타격이 점점 정확해지시는 거지. 매일 늘고 있는데 뭘 새삼스럽게?”
“하지만 오늘은 유난히 힘이 들어간 느낌입니다. 성녀님께 무슨 고민이라도 생긴 걸까요?”
“그러고 보니 오러 운용에 전에 없던 조바심이 느껴지기는 하는군.”
가장 큰 변화라면 역시나 함께 수련하는 인퀴지터들일까. 그들도 어느새 이런 광경에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변변찮은 잡담을 할 정도로 여유가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성진은 시슬레로부터, 수련에 조바심을 내는 이유를 바로 들을 수 있었다.
“이번에 로건 오라버니를 따라가려고.”
“네가? 토벌대에 지원한다고?”
“응. 아직은 많이 부족한 경지지만, 토벌대 활동에 방해되지 않을 만큼은 된다고 생각해. 설령 기사 한사람분의 몫을 다 하진 못하더라도, 치유사로서 나름 토벌대에 기여하는 방법도 있고.”
“흠.”
“말릴 생각은 하지 마, 오라버니. 평소에 내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야. 다 이런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성진은 시슬레의 결연한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물론 꼬맹이는 이전에도 성녀로서 봉사 활동을 다니긴 했지. 하지만 이번 토벌행 결정은 아무래도 갑작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 뭔가 예지몽이라도 꿨어?”
그러자 시슬레가 움찔 놀라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아? 음,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연이은 재촉에, 시슬레는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이윽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지금 내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라버니밖에 없겠지.”
“델크로스 연대기에 관한 거구나?”
“응. 맞아.”
최근 시슬레는 예지몽을 빙자한 악몽을 꾸지 않았다. 성진이 그것을 믿지 말라 강하게 충고하기도 했고, 오웬이 준 토끼 안대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수년간 되풀이해서 곱씹었던 델크로스 연대기의 내용은, 아직도 시슬레의 뇌리 한편에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거 알아? 오라버니가 마물 전담반 일을 시작하면서, 연대기와는 정말 많은 것들이 바뀌었어.”
시슬레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읽은 내용 중 북부에서 라이칸슬로프들이 준동하는 사건은 없었다고 한다. 대신 같은 기간에, 다수의 해상 마수가 키프로스 해안을 어지럽히는 일이 발생했다고.
그래서 연대기 속 로건은 지그스문트령에 가는 대신, 언제나처럼 토벌대를 꾸려 키프로스로 향했었다는 모양이었다.
“그게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것들과 같은 마수들이야?”
“그건 알 수 없어. 연대기는 거의 황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됐기 때문에, 간단한 토벌 결과만이 서술되어 있었을 뿐이거든. 하지만 시기가 비슷한 만큼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
“토벌 결과는?”
“로건 오라버니가 하는 일이잖아? 물론 말끔히 정리하고 돌아왔어.”
그렇게 대꾸한 시슬레는, 조금 심각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토벌행에서, 오라버니를 열성적으로 따르던 릴리움 기사 두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고 해. 그래서 이후 로건 오라버니가 한동안 우울해했다고 되어 있지.”
“그래?”
열성적으로 따르는 기사들이라.
일단 떠오르는 건 극성맞은 오토, 엘리, 뒤상 삼총사 정도인가.
“어쨌거나 토벌대에서 사망자가 나오다니, 이례적인 일이군.”
릴리움 별동대의 명성이 그토록 높은 가장 큰 요인을 꼽자면, 단연 사상자의 수가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것일 터다. 매년 솔선수범하여 대규모 해수 토벌을 시행하면서도, 기적이다 싶을 만큼 피해가 적은 것이다.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주신의 축복이 릴리움에 함께하는 증거라 공공연히 떠들곤 하지. 물론 성진이야 로건의 진짜 무력을 잘 알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라 여겼지만.
‘그런데 소드 마스터인 로건이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있는데도, 릴리움의 기사들이 목숨을 잃었단 말인가?’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델크로스 연대기가 어느 정도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때, 이번 해상 마수들의 준동이 매번 발생하는 평범한 난동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그 규모가 보고된 것을 훨씬 웃돌고 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연대기에는 따로 서술되어 있지 않아도, 로건 오라버니 본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말일 수도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한 시슬레는, 맑은 회색 눈을 들어 먼 북동쪽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일까? 오라버니. 토벌대가 꾸려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자꾸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어. 저기 키프로스의 검은 해안에서, 기분 나쁜 뭔가가 로건 오라버니를 집어삼키려 몸을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
“물론 괜한 걱정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대로 있기보다는, 뭐든 할 수 있는 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성진은 시슬레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아까까지만 해도, 어딘지 불안한 예감에 초조해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방금 시슬레의 결정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뭔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고 있다는 것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뭐든, 네 눈으로 직접 보고, 또 막고 싶은 거구나.”
“응. 이럴 때를 위해 열심히 수련했어. 어디까지나 나를, 그리고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힘을 기르는 거니까.”
시슬레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아귀의 플레일을 꼬옥 움켜쥐었다.
강대한 신성력 덕에 여간해서는 상처가 생기지 않을 텐데도, 꼬맹이의 작은 손은 고된 수련으로 이미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거 알아? 처음에는 오라버니가 이 모든 변화들의 열쇠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어떻게든 옆에서 오라버니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에 들어오고, 매일을 수련에 매진하는 동안 점차 깨닫게 되었어.”
거기까지 말한 시슬레는, 고개를 돌려 성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저 누군가가 변화를 가져다주길 기다리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생각해보면, 델크로스 연대기를 바꾸기 위해 내가 가장 손쉽게 움직일 수 있는 말이 과연 누구겠어. 바로 나 자신이잖아?”
“…….”
“그러니 내가 먼저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감히 연대기의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겠어?”
성진은 제법 의젓한 소리를 하는 동생을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뭐랄까, 지금까지는 마냥 보살펴야 할 꼬맹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말이지. 이제 보니 생각보다 든든한 아군이 아닌가.
“…시슬레.”
가급적 델크로스 연대기의 내용을 떠올리게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잠시 고민하던 성진은 곧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사실 너한테는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어.”
“응? 뭔데?”
“혹시 말이야. 그 델크로스 연대기에 지그스문트 변경백도 등장해?”
“지그스문트 변경백?”
“그래. 현 변경백인 헨드릭 지그스문트 말이야. 주인공 오르덴의 아버지니까, 아마도 자주 나왔을 거 같은데.”
그러자 잠시 곰곰이 기억을 되짚던 시슬레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 간혹 대공자와 사소한 마찰이 있었던 정도일까? 그다지 그의 행보가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걸 보면, 아직까지는 크게 중요한 등장인물이 아니었던 거 같아.”
흠. 그렇단 말이지? 어쩌면 변경백의 꿍꿍이를 알아낼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자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짓도록 그저 방관하고 있다.
아버지는 그때, 분명 그런 사념을 흘렸었지.
-네가 그것을 안다면 분명 나를 막으려 들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먼저 변경백의 속셈이 뭔지를 알아야, 아버지가 계획한 것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한데 성진의 낙담하는 기색을 알아챈 시슬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중요한 일이야? 그럼 지금부터라도 한번 알아볼까?”
“음? 어떻게?”
“다시 예지몽을 꾸는 거야. 그 꿈속에 들어가서, 델크로스 연대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거지.”
…뭐?
성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시슬레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예정된 미래를 온전히 알아야 하잖아.”
“하지만 시슬레. 전에도 말했듯, 그건 제대로 된 미래가 아니야. 그저 너의 파멸을 노리는 나쁜 놈의 농간이라고.”
“만일 정말 예지몽이 아니라고 해도 그래. 오라버니의 말처럼 단지 누군가의 농간이라면, 내용을 모조리 숙지하는 것이야말로 그자의 노림수를 알아낼 단서가 되겠지.”
성진 역시 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걸 권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는데, 시슬레에게 있어 델크로스 연대기가 어떤 의미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진정 무자비한 죽음의 선고였으리라. 눈앞의 작은 꼬맹이는, 누군가에게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수년간 홀로 죽음의 공포를 견뎌왔을 테니까.
그런데 그걸 처음부터 다시 겪는다고?
“괜찮아, 오라버니.”
성진의 복잡한 표정을 헤아렸는지, 시슬레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연대기 속의 난 이미 죽었잖아? 가장 마음 졸이던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제부터는 조금 편안한 심정으로 세상이 멸망하는 과정을 읽어나가면 될 뿐이야.”
“…….”
“물론 성황가 사람들의 최후를 하나하나 마주하는 것은 여전히 무섭지만.”
그래도 사실이 아니라고, 미래를 막기 위한 일이라고 되뇌면 견딜 만한 것이 되리라.
시슬레는 그렇게 말하며 오히려 성진을 위로하려 들었다.
‘어…….’
성진은 새삼 깨달았다. 우리 꼬맹이는 외부의 압력에 여간해서는 굴하지 않는, 정말로 강한 정신을 가진 아이라는 사실을.
결국 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기로 결정한 성진은, 꼬맹이에게 이렇게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물론이야. 잠을 잘 자야 수련에 지장이 없으니까. 한 번씩 한가한 날에만 안대를 빼고 잘 거야.”
푸스스 웃음을 흘린 시슬레가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다? 폐하께서 대대적인 토벌을 하기 전, 그러니까 황도에 아직 암흑 교단의 세력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때 말이야. 그때 교단의 배교자들은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위해, 대대적으로 인신 공양의 희생자가 되길 자처했다고 들었어.”
분명 인신 공양은 허용할 수 없는 이단.
그래도 당시에 얼마나 삶이 힘들었으면,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바랐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시슬레가 덧붙였다.
“이건 오라버니니까 하는 말이지만, 때때로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안식’과도 의미가 상통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나만 해도 그래. 일단 연대기에서 한 번 죽음을 겪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
바로 그때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누군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방해했다.
[삿된 것의 현혹에 넘어가지 마라, 나의 후손아! 어찌 죽음과 같은 불길한 것이 ‘안식’이 된다는 말이더냐?]
언제 다가왔는지, 서이서가 매서운 눈으로 성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본래 다갈색이던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 틈엔가 환한 금빛으로 돌변해 번쩍이고 있다.
카드모스가 나타난 것이다.
[네 속셈은 뭐냐! 대체 네놈은 어디까지 내 후손들을 쥐고 흔들려는 것이더냐!?]
하지만 뒷방 노친네의 호통 따위는 성진의 귀에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중요한 깨달음이 순간 머리를 강타했던 것이다.
‘…오호라!’
성진이 씨익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움찔 놀란 카드모스가 또다시 버럭 화를 냈다.
[왜 날 그렇게 보는 거냐! 또 무슨 꿍꿍이냐, 이 삿된 것아!]
‘그래, 카드모스.’
이제야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시슬레가 가게 되면, 결국은 저 녀석도 토벌대에 딸려가는 거지? 이거 제법 든든한 인선이 되겠는데?
Chapter 19: Chapter 319
Chapter Text
319. 변화 (4)
카드모스.
한때 반신이라고까지 불렸던 위대한 초대 성황.
지금은 규상세계 인간의 몸에 갇혀있는 초라한 신세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힘을 함부로 과소평가할 수는 없었다.
‘처음 본궁에서 대치했을 때는, 거의 아버지의 기운과 맞먹는 듯 느껴졌지.’
그렇다고 아버지가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하지만 그게 카드모스의 전부는 아닐 거야.’
뭔가가 더 있다. 어째서인지 성진은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비록 수많은 제약에 뒤덮여 명료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분명 저 밑에서 요동치는 희미한 기척은, 야만적이리만치 거대한 힘의 폭풍.
‘만일 카드모스가 온전히 서이서의 몸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아니, 서이서뿐만이 아니라, 아예 성황의 관을 빠져나올 수 있다면. 그렇게 되면 저자는 과연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까.
그렇게 멀뚱히 카드모스를 바라보며 잠재된 무력을 가늠하고 있자니, 그가 또다시 성진을 향해 버럭 소리를 친다.
[이것아! 지금 내 말을 듣고는 있는 게냐!? 지금 감히 나를 무시하는 거냐!]
“어, 미안.”
뭔가 나한테 중요한 말이라도 했어?
하도 평소 언행이 같잖아서, 네가 지껄이는 말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지.
하지만 성진이 뭐라고 더 대꾸하기도 전에, 시슬레가 카드모스에게 발끈 화를 냈다.
“카드모스 님. 난데없이 나타나서는 왜 엉뚱한 사람에게 시비를 거시는 건가요?”
평소 수정 조각처럼 말갛기만 하던 시슬레의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드물게도 진심으로 분개하고 있는 것이다.
카드모스는 저도 모르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아니, 시비라니… 후손아! 나는 어디까지나 너의 안전을 위해…….]
“지금 이곳에서 저의 안전을 가장 위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카드모스 님, 바로 당신이 아닙니까?”
[그건…….]
“거기다 모레스 오라버니가 대체 무슨 말을 했다고 현혹이니 꿍꿍이니 하면서 모함하시는 겁니까? 오라버니는 그냥 제 상담을 들어주고 있었을 뿐입니다!”
카드모스는 멍청하게 입을 뻐금거렸다. 확실히 돌이켜 보면, 성진이 별말을 하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
결국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그는, 조금 힘이 빠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저것들의 힘을 우습게 봐서는 안 되느니라, 후손아. 삿된 것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인간을 현혹시키고, 끝내 판단을 흐리게 만드노라. 그러니…….]
하지만 그의 변명은 시슬레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적어도 여기서 가장 판단이 흐린 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해졌군요. 그렇게 신세를 지고도 고마워할 줄 모르다니,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저것에게 무슨 신세를 졌다고…….]
“그럼 카드모스 님이 매일 진주궁에서 축내고 있는 식비를 생각해 보세요. 그 엄청난 비용을 충당하는 진주궁의 예산이, 과연 누구 앞으로 내려오는 것이라 생각하시나요?”
[……!]
오. 성진은 조금 감탄했다.
밥 먹는 걸로 사람 구박하는 것만큼 서러운 게 없는데.
“훌륭하다, 시슬레. 너, 아픈 곳에 제대로 비수를 꽂을 줄 아는구나?”
“그런 속 편한 소리 할 때가 아니야, 오라버니.”
그렇게 말하며 시슬레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성녀에게는 조금 생소한, 어딘가 뚱해 보이기도 하는 얼굴이었다.
예전의 인형 같던 모습에서 벗어나 최근 여러 가지 표정을 짓게 된 건 좋은 일인데 말이지. 그런 괴상한 표정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오라버니가 전에 그랬잖아? 적이 나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권력을 쥐고 적을 끌어내리라고. 그런데 왜 정작 오라버니는, 저런 터무니없는 모함을 가만히 참고 넘기는 거야?”
“흠…….”
사실 참았다기보다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쪽에 가깝지만.
성진은 진지한 얼굴로 시슬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시슬레. 너에게 또 다른 중요한 가르침을 줄게.”
“그게 뭔데?”
“잘 알아 둬. 언행의 비수란 말이지, 공공연히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날이 무뎌지고 힘도 빠지는 법이야.”
그러자 작은 성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저 말일 뿐인데, 어째서 그렇게 돼?”
“그야 사용함과 동시에 너의 인품과 평판을 갉아먹는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지. 그러니 가장 적절한 때, 가장 가치 있는 표적을 향해 겨눠야 하는 거야.”
“가장 가치 있는 표적…….”
초롱초롱 빛나는 맑은 눈동자를 마주 보며, 성진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황가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되면, 쓸데없는 구설수에 휘말리는 일이 허다하게 생기겠지. 심지어 빈민가에서 구르는 생면부지의 걸인들에게도 이유 없이 욕을 먹을 수 있다고. 그런데 너는 그럴 때마다 일일이 그들에게 말로 대응할 거야?”
“그럼?”
“무시해야지. 그들이 아무리 날을 세우려 애써도, 기껏 들어오는 공격은 생채기조차 낼 수 없는 하찮은 것들이니까. 괜히 대응했다가는 네 평판만 깎일 뿐이야. 그러니 신경 쓸 가치조차 없어.”
이쯤 되니 카드모스도, 성진이 누구를 돌려 까고 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뭣이라? 네가 감히……!]
그의 얼굴은 지금 붉으락푸르락 가관도 아니었다. 그런 카드모스를 일별한 성진이,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쐐기를 박았다.
“알겠어, 시슬레? 그러니까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는, 불쌍하고 힘없는 자가 짖어대면, 너는 그저 연민의 시선으로 따뜻하게 바라봐 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컥!
카드모스가 깊은 내상을 입고 비틀거렸다.
“카드모스 님이 불쌍하고 힘이 없어? 무려 초대 성황인데?”
“왜 아니겠어? 이미 존재 자체가 서이서에게 종속되어 있는데. 우리 외에는 아무도 그의 존재를 모르고, 그렇다 보니 정치적 입지도 전무하다시피 하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후손들에게 큰소리치고 몽니 부리는 게 다야.”
“음…….”
“심지어 서이서에게 빌붙지 않으면, 혼자서는 끼니도 제대로 챙길 수 없는 반편이잖아? 저런 자에게 일일이 대응하는 건 시간 낭비야. 소리를 내기 위해 숨을 내뱉거나, 혀를 움직이는 것조차 수고로울 정도지.”
[……!]
그러자 시슬레는 충격으로 거멓게 안색이 죽은 카드모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조금 불쌍한 거 같기도 해.”
커… 컥!
또다시 심장을 강타하는 충격.
그렇게 한참을 휘청거리다 겨우 정신을 차린 카드모스는, 눈앞의 남매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다시 북받치는 울분을 느꼈다.
[크윽……!]
그도 그럴 것이, 마치 틀로 찍어낸 듯 똑같은 두 쌍의 회색 눈동자가, 깊은 연민의 빛을 담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딱하다.
-응. 그러네. 정말 딱해.
[저, 저 불손한 얼굴들을 보게! 저 삿된 것이 아주 제대로 내 후손들에게 나쁜 물을 들이는구나! 이런 고얀……!]
화난 뒷방 노인네가 제자리에서 펄펄 뛰는 걸 내버려 둔 채, 성진과 시슬레는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괜찮겠어? 두 사람의 성녀가 동시에 자리를 비우는 일인데, 성회가 순순히 인가를 내릴까?”
“물론이야. 키프로스를 돕는다는 명분도 확실한 데다, 성회에서도 지금쯤이면 슬슬 내가 가시적인 공을 세우길 바랄 테니까.”
[이봐라! 내 말 좀 들어봐라, 이것들아!]
“성회 쪽에서? 왜?”
“생각해 봐, 오라버니. 나를 ‘사도’로 인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그러니 성회는, 그들의 결정을 뒷받침할 보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할 거야. 내가 주신께서 내리신 특별한 자라는 증거가.”
[감히 이 몸을 무시하지 말란 말이다!]
“그렇군. 나는 아직도 정교회의 생리는 잘 모르겠어.”
“오라버니는 정교회 사람들과 마주한 적이 거의 없으니까 그렇지. 게다가 내 짐작이지만, 이번에는 아마 외교부도 나에게 힘을 실어 줄 거야.”
[크아아악! 크악!]
“외교부? 설마 체사레 추기경이?”
외교부의 수장, 체사레 추기경.
아마도 델크로스 연대기에서 꼬맹이를 모함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라 했지. 그런 자가 왜 갑자기?
성진이 의아해하며 묻자, 시슬레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눈엣가시 같은 정교회의 성녀들을 잠시나마 멀리 치워버리는 일이잖아? 아마 체사레 추기경은 내심 기뻐할걸?”
“하지만 정작 네가 공을 세우고 돌아오면, 결과적으로는 정교회와 웨스커 대주교에게 더욱 힘이 실리는 거 아니야?”
[이놈들아…….]
“설마 내가 제대로 활약할 거라 기대하겠어? 만일 변변찮은 공을 세우더라도, 릴리움 토벌대의 화려한 명성에 묻히기 십상일 텐데.”
“…….”
성진은 잠시 입을 다물고, 시슬레의 깊어진 눈매를 응시했다. 차분한 눈빛 아래 감춰진, 약간은 치기 어린 호승심을 놓치지 않으면서.
“…하지만 넌 제대로 전공을 세우고 돌아올 생각인 거지?”
그러자 시슬레가 푸스스, 가벼운 미소를 터뜨렸다.
“응. 두고 봐. 체사레 추기경과 정교회 영감님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어 줄 거야.”
[쳇! 그래. 힘없고 불쌍한 선조님은 이만 꺼져주마! 이 괘씸한 것들…….]
“그러다 괜히 그의 경계를 사면 어쩌려고?”
“어차피 내가 맞서야 할 상대잖아? 그렇다면 차라리 이쪽을 조심스럽게 탐색하면서, 한동안은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게 만드는 쪽이 유리하지 않겠어?”
숨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할 생각인가. 성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작은 성녀를 바라보았다.
“탄신연에서 사고 칠 때부터 생각했지만, 너, 은근히 저돌적이다?”
“응. 이게 다 오라버니 덕분이지.”
…그, 그래?
“그뿐만이 아니야. 오라버니에게는 늘 이것저것 열심히 배우고 있어. 언젠가는 나도 오라버니처럼, 숨 쉬듯 자연스럽게 선동과 날조를 행할 수 있을 때까지 정진할 거니까.”
“…어, 음. 뭐, 내가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다.”
성진은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순진한 꼬맹이에게 뭔가 강렬한 영향을 미친 것만은 사실인 듯하니까.
“그나저나 조심해. 공명심에 급급해서 괜히 설치다가는, 잘못하면 이마에 화끈하게 불이 나는 수가 있어.”
“으응?”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마를 문지르는 해맑은 얼굴.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이마에서 왜 불이 나?”
“어, 아냐. 아무것도.”
성진은 어느새 다갈색으로 되돌아온 서이서의 눈동자를 슬쩍 살피며 생각했다.
뭐, 카드모스도 동행하겠다, 결과적으로는 무난한 토벌행이 될 거 같으니, 굳이 샤론 경에 대해 미리 말해 둘 필요는 없겠지?
* * *
그날 밤, 판게아 클로니클의 그린 존.
언제나처럼 접선 장소에 모인 덱스터와 침묵 빌런들은, 못내 허전한 기분을 느끼며 잠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성진, 정말 오지 않는. 무척 쓸쓸하다.]
[옛말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격언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도 그런 격언이 있어? 지구랑 비슷하네. 알고 보면 격언이라고 내려오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지?]
그 말을 끝으로, 일행은 잠시 침묵했다.
그저 작기만 하던 아기 산양의 빈자리가 어찌 이리도 크단 말인가.
[…그런데 오웬은?]
[아까 잠시 접속했다 나갔습니다. 고향으로 떠나기 전에, 정리해야 할 일들이 무척 많다고 하더군요.]
[이제는 오웬도 뜸해진다? 내장이 쓸쓸함에 사무치는!]
그렇게 일행은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필드를 조금 돌다가 평소보다 일찍 헤어졌다.
“…….”
그리고 어르신의 공방.
풀 다이브 기계에서 눈을 뜬 덱스터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새삼 이성진의 말들을 회상했다.
-덱스터. 역시 델크로스에 놀러 오지 않을래?
그러게. 이렇게 갑작스럽게 헤어질 줄 알았다면, 방문 약속이라도 제대로 잡아둘 걸 그랬지.
-실은 우리 아버지가 바로 코른시임의 오라클이야. 네가 꿈에도 만나고 싶어 하는, 이정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람이지.
그 말의 진위에 대해서도 제대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최근 이성진이 보여준 남다른 능력들도 그렇거니와, 알면 알수록 보통 수상쩍은 녀석이 아니었지 않나.
‘본래라면 어르신께 당장 이성진에 대해 물어보려 했었는데…….’
공교롭게도, 최근 어르신은 좀처럼 이곳에 붙어있질 않았다. 뭔가 급한 일이라도 생긴 듯, 하루 종일 어딘가로 돌아다니느라 여념이 없었지.
덕분에 그를 마주하고 대화할 만한 틈이 없었더랬다.
‘하지만 더는 미룰 일이 아니야.’
손아귀에 있는 반쪽짜리 이정표를 만지작거리던 덱스터는, 곧 마음을 다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역시 어르신께 제대로 이성진에 대해 여쭤봐야겠다. 지금 당장 뵙지 못하면, 간단히 메모라도 남겨야겠어.’
그리고 델크로스를 방문할 수 있는지도 한 번 더 알아봐야지.
그렇게 결심한 덱스터는, 고글을 벗어들고는 종종걸음으로 공방을 빠져나왔다.
“…아, 어르신!”
한데 운이 좋았달까.
어르신의 방으로 향하던 덱스터는, 때마침 어딘가로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어르신을 만날 수 있었다.
[오, 그래. 덱스터. 그간 별일 없었나?]
“네, 모두 어르신이 살펴주신 덕분입니다.”
위엄 넘치는 고룡을 향해 공손이 고개를 조아려 보이자, 어르신은 흡족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덱스터에게 자신의 공방을 통째로 내어 줄 정도로, 그는 이 재주 많은 난쟁이 공학자를 아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무슨 일인가? 자네가 나를 먼저 찾다니, 별일이구만.]
“아, 큰일은 아닙니다. 그저 조금 여쭐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미소도 잠시, 덱스터의 용건을 전해 들은 어르신의 얼굴은 이내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 섬뜩한 것이 또 뭐라고 하며 자네를 꼬여냈단 말인가!]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흠흠.
금세 표정을 갈무리한 어르신이 점잖게 입을 열었다.
[덱스터. 일단 이것을 확실하게 해 두겠네. 그것을 가까이 하고 지내봐야 좋을 것이 없으니, 자네도 그만 잊어버리게. 나도 그것에 대해서는 그리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다네.]
“예?”
예상외의 강한 반응에 당황하고 있는데, 드래곤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네의 델크로스의 방문은 불가하네.]
“…어째서입니까?”
다짜고짜 안 된다고만 하니 오히려 호기심이 일었다.
“어르신, 그냥 멀리서 구경만 하고 오면 안 됩니까? 맹세컨대, 델크로스의 사람들이나 그들의 기술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차원의 인과를 조금도 해치지 않도록 말입니다.”
덱스터가 그렇게 덧붙이자, 어르신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오해하고 있군, 덱스터. 이건 다 자네의 안전을 위한 일이야.]
“제 안전이요?”
[그렇다네.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할까…….]
눈썹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던 어르신은, 이윽고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덱스터. 안타깝게도 델크로스의 영혼들은 이미 모두 고위 마왕들에게 종속되어 있다네. 그런데도 그 위험한 곳에 함부로 발을 들일 텐가?]
…고위 마왕에 종속돼? 그게 무슨 뜻이지?
영문 모를 소리에 덱스터가 눈을 끔벅거리자, 어르신은 그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겠나? 비록 지금은 꽤나 멀쩡히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그 아슬아슬한 세계는 이미 속에서부터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단 말이네!]
Chapter 20: Chapter 320
Chapter Text
320. 변화 (5)
신들과 마룡의 시대가 끝나고, 수천 년.
강대한 고룡들이 델크로스 차원을 지배하던 시기를 일컬어, 사람들은 ‘세 고룡의 시대’라 불렀다.
오랜 시간 이어졌던 그 무질서한 시대는, 어떻게 보면 델크로스 차원의 힘이 가장 강대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역사와 전설의 경계가 모호하고, 신화 속 생물들이 생생히 살아 숨 쉬던 때였으니까.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던 세 고룡의 시대 역시 결국은 끝을 고했다. 용들이 나이를 먹으며 점차 힘을 잃어가기 시작하자, 그때까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고위 마왕들의 차원 침략이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묵시록의 다섯 마왕 중 하나인 [참회]가 강림하고, 그 여파로 잠들었던 마룡이 부활했다. 대륙은 커다란 혼돈에 빠졌으며, 신화 속 생물들은 다급히 다른 차원으로 몸을 피하기에 이르렀다.
오로지 인간.
그때까지도 변변한 세력 하나 없이 드문드문 모여 살던 인간들만이, 고스란히 죽음으로 내몰려 마왕들의 손에 떨어질 참이었다.
-어찌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시 델크로스에 남아있던 마지막 신은, 인간들의 비참한 최후를 가만두고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고위 마왕들과 대립하자니, 승산을 장담할 수도 없을뿐더러 힘겨루기의 여파로 차원 전체가 박살이 나게 생겼다.
결국 고심하던 신은, 남은 네 명의 마왕들에게 이런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다.
-침략을 멈춰라. 그렇게만 해 준다면, 앞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모든 인간의 영혼을 너희에게 넘기겠다.
어차피 늦고 빠르고의 차이가 있을 뿐, 지금 당장이라도 마왕들이 모조리 갈취할 수 있는 영혼들이었다.
-너희에게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닐 것이라. 꾸준히 새로 태어나는 영혼들까지 포함하면, 너희가 얻을 수 있는 영혼의 총량은 지금보다 훨씬 많아질 터.
마왕들이 듣기에도 꽤 괜찮은 제안이었다. 신과의 다툼 없이 수월하게 영혼들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그들의 입장에서는 백 년이든 천 년이든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으니, 기다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천 년, 조금만 더 이 차원을 유지할 수 있게 해 다오. 적어도 인간들이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온전한 평온을 누릴 수 있도록.
그 필사의 계약 덕분에, 델크로스는 이후 마왕들이 강림하기까지 약간의 유예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태초의 [협약]일세. 델크로스의 주신은 그 계약을 대가로, 자신의 이름을 잃고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지. 이제 그가 존재했었다는 증거라고는, 드문드문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신성력 정도가 전부라네.]
“그렇습니까?”
[그래. 그 이후로 델크로스 차원에 있는 모든 인간의 영혼은 마왕들에게 종속되었다네. 만일 그들로부터 죽은 자의 영혼을 하나라도 빼돌리려 한다면, 그에 버금가는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만 하지.]
태초의 협약이 맺어졌던 시기에는, 델크로스 차원에도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오니아와 공명하는 새로운 결계가 만들어지고, 경계의 종족들이 그 관리를 맡았다.
코른시임 일족의 일부가 델크로스 차원으로 건너가기도 했지.
인간들의 영웅, 카드모스가 등장하여 마룡을 쓰러뜨리고 제국을 건국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으음. 그랬군요.”
그래봤자 어차피 다른 차원의 역사.
어르신은 점점 집중을 잃어가는 난쟁이 공학자를 향해 서둘러 설명을 이어갔다.
[협약이 적용되는 것은 비단 당시에 존재하던 영혼뿐만이 아닐세.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영혼들, 혹은 우연이라도 델크로스를 방문하는 영혼들까지. 영혼이란 영혼은 모두가 고위 마왕들의 소유란 말일세.]
“흠.”
덱스터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세나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으니까.
그가 영혼의 존재나마 믿게 된 것도, 이오니아의 공학자들을 만나 여러 가지 신지식을 접한 덕분이 아니었던가.
지금 그가 궁금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그렇다면 델크로스는, 어차피 천 년 후면 멸망할 차원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함께 공명하는 결계를 만들다니요. 이오니아에서 순순히 그것을 허락했습니까?”
[왜 아니겠는가? 두 차원의 공명은 대단히 강력한 힘이 된다네. 게다가 델크로스가 무너지고 나면, 다음 침략은 이오니아의 차례일 것이 빤하지 않나?]
또한, 당시 코른시임 일족의 오라클이 새로운 결계를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나섰다 한다.
-천 년의 유예라면, 어떻게든 침략을 타개할 가능성이 있다.
그는 이오니아에서도 가장 현명하다 평가받던 인물이었으니, 중론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어쨌거나,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당시에는 설마, 이오니아가 먼저 멸망하리라 여겼던 자는 아무도 없었다네.]
하물며 마왕들의 침략도 아닌, 스스로 일으킨 [재앙]에 삼켜질 줄이야. 어르신은 나직하게 탄식하더니, 곧 착잡한 얼굴로 마지막 설명을 덧붙였다.
[알겠나? 덱스터. 자네가 지금 델크로스로 향한다면, 필시 태초의 ‘협약’이 자네에게도 적용될 거란 말일세. 죽어서도 영영 마왕들의 손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단 말이야. 그러니 다시는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둥, 그런 소리는 하지 말게.]
하지만 어르신의 엄중한 경고에도, 덱스터는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델크로스 차원의 멸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고? 그렇다면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말 아닌가!’
지금이라도 빨리 델크로스로 가지 않으면, 그러지 않으면 이대로 영영 오라클을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이정표에 대해 더는 알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성진…….’
비록 꺼림칙한 사기꾼이지만, 그래도 이성진은 그리 나쁜 녀석으로 보이지만은 않았지. 아니, 사기꾼이라는 대목에서 이미 글러 먹은 건가.
어쨌든 델크로스 차원에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다면, 그곳에 사는 이성진에게도 뭔가 경고를 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이 들려준 이야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에게 전해주는 거다.
‘뭐, 내가 가지 못한다고 해도, 아직 이성진을 만날 방법은 있어.’
난쟁이 공학자는 손아귀에 있는 반쪽짜리 이정표를 세게 움켜쥐었다.
‘대여 기간이 정해져 있으니까. 이것만 가지고 있으면, 이성진은 언젠가 분명 공방을 다시 찾겠지.’
* * *
그날 밤, 성진은 오랜만에 느긋하게 명상을 했다.
그리고 꽤 늦은 시각 잠자리에 든 성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정표를 끌어안은 채 잠을 청해 보았다.
물론 판게아 클로니클에서 눈을 뜨는 대신, 다음과 같은 딱딱한 전자음을 들었을 뿐이지만.
[유저의 접속 기록을 확인합니다. ID의 완전한 말소를 확인하였습니다.]
역시, 이제는 게스트 ID를 쓸 수 없는 건가. 조금 실망하고 있는데, 연이어 귓가를 두드리는 희미한 전자음.
[유저의 고유 ID를 확인하였습니다. 동결되어 있는 ID를 활성화시키시겠습니까?]
아니? 고유 ID라니, 어쩐지 그건 내키지 않는다고.
성진은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기껏 사기적인 스킬들을 얻었는데 말이지. 지금까지 올린 레벨과 스킬들이 이대로 모조리 사라진 건가?’
아까운 마음이 없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아마 마음만 먹는다면, 판게아 클로니클의 랭커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희귀 아이템도 독식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그런 짓을 저지르면, 암흑의 유스티티아가 오류를 먹어가며 더욱 빠르게 자라나겠지만.
‘일단 공방에 가면 방법이 없지는 않을 텐데…….’
협탁에 고이 놓여있는 은빛 디스크를 발견한 성진이 생각했다.
어르신의 공방에는 풀 다이브 기계도 있겠다, 어쩌면 게스트 ID가 아닌, 정식 유저 아이디를 만들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진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째서일까. 이상하게도, 지금부터 한동안은 덱스터를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뭐, 오웬도 곧 돌아올 테고, 다들 알아서 잘 놀고 있겠지. 덱스터는 나중에 천천히 찾아가면 될 테고…….’
성진이 자세를 뒤척이며 편안하게 고쳐 눕자, 머릿속에 있던 마왕이 의아한 듯 물어왔다.
[음? 너 아직 안 갔어? 이 시각에 별일이네?]
‘어. 그냥.’
[그럼 얼른 가. 나도 슬슬 시작할 시간이 됐어.]
그러고 보니, 요즘 마왕 놈이 징징거리는 게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 그뿐인가, 최근 유난히 말수가 줄고 조용해진 느낌이란 말이야.
‘왜? 내가 가고 나면 뭐 하려고?’
성진의 물음에, 마왕 놈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모서리 돌기 놀이 하려고 했어.]
‘모서리 돌기 놀이? 그게 뭔데?’
[염상 결정의 모서리를 따라 빙빙 도는 거야. 경로를 최소한으로 겹치게 하면서 모서리 전체를 빠짐없이 도는 놀이지. 이게 오목 24면체다 보니, 생각보다 다양한 루트가 나오더라고. 하다 보면 밤새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던데?]
‘…….’
[그래서 네가 판게아 클로니클로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아무래도 깨어 있을 때 염상 결정을 뱅뱅 돌면, 너도 제법 정신 사나울 거 아냐?]
어쩐지 처량한 놀이였다. 성진이 최근 현실에 소홀한 동안, 무료함을 이기지 못한 마왕 놈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자구책을 만든 모양.
뭐라고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마왕 놈이 신이 나서 덧붙였다.
[내가 만든 창의적인 놀이는 그뿐만이 아니야. 뭐니 뭐니 해도 놀이의 마무리는, 염상 결정에 있는 일곱 개의 아치 돌기지.]
‘…그건 또 뭔데?’
[응, 점점 가속을 붙여가며 단번에 일곱 개의 고리를 빙글빙글 도는 놀이야. 각각의 곡률이 달라서 커브 돌 때 드리프트 감각도 죽여주고, 가속이 붙다 보면 꼭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 든다고!]
‘어…….’
…미안하다, 마왕아.
너 그동안 정말 심심했구나!
성진은 잠자리에 들려던 생각을 고쳐먹고,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글쎄. 염상 결정에서 노는 건 잠시 미뤄 둬. 난 오랜만에 황궁 산책이나 할 거야.’
[뭐? 오늘은 판게아 클로니클로 가지 않아?]
‘어. 오늘뿐만이 아니라, 한동안은 그럴 일 없을 거야.’
[그래…….]
마왕은 희미하게 대답했지만.
두근두근.
머릿속에서는 놈의 영혼이 기쁨으로 요동치는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흐흠! 이제 너 혼자 놀러 가지 않는 거야?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도 신나는 염상 결정 레이싱은 잠시 미뤄두는 수밖에.]
속내를 감추려 애쓰는 마왕 놈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성진은 천천히 테라스의 문을 열어젖혔다.
오랜만에 오러 은폐의 경지도 시험할 겸, 이번에는 청장미궁에나 놀러 가 볼까? 데카론 나이트인 로건에게 들키지 않고, 과연 어디까지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지 알아보는 거지.
‘그나저나 너 말이야. 드리프트니 롤러코스터니 하는 말은 또 어떻게 알아? 넌 게헤나의 마왕이잖아?’
[음? 글쎄?]
그러자 마왕 놈 역시 의아한 듯 영혼을 꼼지락거렸다.
[지금까지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러고 보면, 나는 침략하기 전부터 이미 시구르트 34지구에 대해 잘 알고 있긴 했어.]
어디 지구에 대한 것뿐일까. 생각해 보면 신기한 점은 또 있었다.
델크로스에 날아온 이후부터 쌓았다고 보기에는, 마왕 놈의 인간에 대한 이해도 역시 불가사의할 정도로 높지 않나.
[뭐, 그리 이상할 건 없지. 지식이란 곧 영혼의 격과도 깊은 연관이 있으니까. 내가 워낙 위대하신 마왕님이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니겠어?]
마왕의 여상한 대꾸에, 어이가 없어진 성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위대하긴 개뿔.
어쨌거나 한밤의 산책을 시작한 성진은, 꽤나 자유롭게 황궁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간 그의 오러 은폐 실력은 비약적으로 늘어 있었다. 야간 경계를 서는 기사들 곁을 유유히 지나쳐 다녔으니, 말 다 한 거지.
심지어는 상급 기사인 쿠르트 경조차 감쪽같이 속였을 정도다.
[와, 이거 정말 흥미진진하다!]
콩닥콩닥.
마왕은 마치 스릴 넘치는 게임이라도 하듯 집중하며 산책을 즐겼다.
[이 정도면 네 보모를 상대로도 성공 가능성이 높겠는데? 어디 한번 시험해 볼래?]
‘누가 보모야, 누가!’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랄까.
아무리 오러 은폐가 뛰어나더라도, 전직 소드 마스터이자 데카론 나이트의 감각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청장미궁으로 향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성진은 자신을 마중 나온 로건의 피로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너 지금까지 안 자고 뭐 하고 있어?”
심지어 로건은 기사단 정복도 벗지 않고, 허리춤에는 아르쥬나까지 찬 모습이었다.
설마 이 녀석, 지금까지 일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이성진, 이 늦은 밤에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뭐, 그냥. 잠도 안 오고 해서, 잠시 산책이나 할까 하고…….”
그러자 로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래?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어, 아닌데?”
“그럼 어서 돌아가서 자라. 한창 클 나이에는 잠을 잘 자야 하는 법이야.”
“뭐? 너랑 내가 나이 차가 얼마나 난다고 애 취급이야?”
빈정 상한 성진이 부루퉁하게 대꾸하자, 로건이 침착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널 위해 진주궁을 경호하고 있는 기사들의 입장도 생각해야지. 게다가 마사인 형님은 또 어떻고? 만약 네가 없어진 걸 알게 되면, 형님이 분명 많이 걱정하실 거다.”
“어, 음…….”
과연 그 지적에는 할 말이 없었기에, 성진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로건이 이어서 내뱉는 말이 가관도 아니었다.
“자자, 내말 들어, 응? 지금 데려다줄 테니 우리 어서 진주궁으로 돌아갈까? 정 잠이 오지 않으면, 내가 자장 차라도 타 줄게.”
“…뭐, 인마?”
살살 달래는 폼이, 누가 봐도 말 안 듣는 어린애를 상대하는 모습.
성진의 눈이 대번에 뾰족해졌다.
아, 이놈이 틈만 나면 은근슬쩍 손윗사람인 척하네? 그러니까 공공연히 어린애 취급 하지 말라니까!
Chapter 21: Chapter 321
Chapter Text
321. 작업장 (1)
“어서 진주궁으로 가자, 이성진. 지금도 많이 늦었어.”
“난 산책 좀 하고 들어간다니까? 그러니까 너나 어서 가서 쉬어.”
“내 말 들어. 네가 잠자리에 들어야, 나도 안심하고 청장미궁으로 돌아가서 쉴 것 아니야?”
성진의 고집에도 로건의 회유는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따뜻한 자장 차 한 잔 하고 어서 자. 내일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서 다시 수련에 매진해야지. 요즘 일이 바빠서 그런지, 네 오러층 쌓이는 속도가 전보다 많이 느려졌더라.”
하지만 로건이 그럴수록, 성진의 의구심은 점점 커져갔다.
‘이 녀석이 왜 이렇게 날 달래려고 애쓰는 거지? 평소에도 손윗사람인 척 점잔 빼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날 어린애 취급한 적은 없었는데?’
그리고 그즈음에 이르러, 성진은 낯선 사람의 기척 하나를 느꼈다. 청장미궁에서부터 그들을 따라오고 있는, 희미한 오러 은폐의 기척.
머리가 재빠르게 굴러간다.
‘나도 아는 저 기척을 로건이 모를 리가 없어.’
즉, 로건이 아는 자라는 말이었다.
‘오러 은폐에 제법 능숙하군. 상급 기사 수준을 염두에 두고, 내게 들키지 않게 거리를 두고 있어.’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다. 바로 말로만 듣던, 로건의 전속 정보원.
‘이 정도 거리면, 아마 마사인 경도 감지가 불가능 했겠지.’
성진의 오러층 수준을 생각하면 과하게 조심한다고 봐도 좋을 터.
문제는 성진의 예민한 기감에 있었다. 이미 그의 기감만큼은, 상급 기사는 물론 마사인 경도 훌쩍 넘어가는 상태였으니까.
‘설마 내가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를 테고…….’
어쨌거나 로건 이 녀석, 아직 일이 안 끝났군. 지금부터 정보원과 함께 뭔가를 하려는 거구나!
‘비밀 정보원과 단 둘이서 몰래 움직인다는 건, 황궁 내부가 아닌 바깥에 용건이 있다는 말이겠지. 물론 성 바스티안 기사단의 공식 업무도 아닐 테고.’
그렇다면 역시 오르토나와 관련된 일일까? 아니면 마물 전담반 업무거나.
그렇게 확신한 성진은, 일단 못 이기는 척 로건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로건은 눈에 띄게 안도하며 진주궁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딘다.
“로건.”
성진이 다시 입을 연 것은, 저 멀리 진주궁의 담장이 보일 때쯤이었다.
“너 또 어디 가려고?”
“응?”
“너 혼자 어딜 몰래 나가려고, 날 빨리 떼어 놓으려 안간힘이야?”
“……!”
그러자 로건이 멈칫 발걸음을 멈추더니,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성진을 돌아보았다.
“…그게 표시가 나?”
진짜군. 그런데 그렇게 쉽게 실토하기 있냐?
성진이 어이없어하고 있는데, 로건이 혼자서 뭔가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넌 어릴 때부터 쓸데없는 부분에서 감이 좋긴 하더라. 왜 한밤중에 난데없이 청장미궁으로 산책을 오나, 생각하긴 했어.”
뭐, 어디까지나 우연이지만.
성진은 딱히 반박하지 않고 로건이 사정을 설명해 주길 기다렸다.
“예전에도 그랬지. 시녀들이 꼭꼭 숨겨 놓은 태피스트리를, 어떻게 귀신같이 찾아내서 매번 두르고 다니는지 늘 신기했다니까.”
…모레스, 아니 예전의 나는 대체 뭐 하는 놈이었던 걸까.
어쨌거나 로건은 더 이상은 숨기는 것을 포기했는지 순순히 털어 놓았다.
“네 말이 맞다, 이성진. 난 아직 조사해야 할 것이 남아 있어.”
“역시 기사단 공식 업무가 아니구나? 그래서 이 늦은 밤, 극성스러운 릴리움 기사들이 완전히 떨어져 나갈 때까지 기다린 거야.”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모른 척해 주지 않겠어?”
그 무렵 성진은, 로건이 하려는 일이 뭔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단호하게 거절했다.
“싫어.”
그리고 당황한 녀석의 얼굴을 향해, 또박또박 읊어주었다.
“나도, 따라갈, 거야.”
“이성진.”
“그거 마물 전담반 일이지? 너 지금 ‘작업장’이라는 곳에 몰래 가 볼 생각인 거 아냐?”
“……!”
그러자 로건이 눈에 띄게 허둥거린다.
쯧. 대체 저 표정 관리 못 하는 순진한 얼굴로 지금 누굴 속이겠다는 거냐. 어?
“잘 들어, 로건. 작업장에 대한 조사는 어디까지나 마물 전담반의 업무야. 넌 그저 우리 일을 돕는 것뿐이지만, 나는 마물 전담반의 정식 고문이란 말이야. 그러니 당연히 날 데려가야지!”
“그건 그렇지만…….”
“아, 그리고 너. 혹시라도 오러를 사용해서 혼자 도주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내가 당장이라도 황궁에 비상경계 태세를 내리도록 만들어 줄 테니까.”
“…뭐?”
“2황자가 사라졌다고 동네방네 떠들어 줄 테다! 비번인 근위대 기사들이 졸지에 모조리 불려 나와야 할걸? 그거 불쌍해서 어쩐담?”
헹! 성진은 황당해하는 로건을 자신만만하게 바라보았다. 근위대 기사들을 인질로 삼다니, 뭔가 억지에 가까운 협박이지만. 그래도 난 안면몰수하고 저지를 자신이 있다고!
[…지금 낯 두꺼운 게 자랑이야?]
보다 못한 마왕 놈이 나직하게 주억거렸다.
그럼에도 로건이 망설이고 있는 듯 복잡한 표정을 하기에, 성진은 그의 결정을 돕기 위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물론 그게 다가 아니야, 로건. 나 지금 당장 본궁으로 달려가서 아버지한테 말한다?”
“……!”
“어떠냐? 야밤에 본궁에 불려가 딱밤 맞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날 데려가는 게 좋을걸?”
그러자 로건이 경악하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방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긴가민가 하는 모양.
그러나 성진은 어디까지나 당당했다.
“아버지한테 다 이를 거야. 왜, 내가 못 할 것 같아?”
“아, 알았다. 알았으니까, 제발 진정해! 같이 가면 되잖아!”
그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로건이 허둥지둥 성진을 달랬다. 평소 성진의 성격을 미루어 볼 때 제법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성진에게서 느껴지는 파동은 어디까지나 진심의 울림.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놈…….]
머릿속에서, 마왕 놈의 나직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닥쳐라!
사람 머릿속에서 레이싱이나 하는 이 아웃사이더 마왕 놈아!
* * *
“죄수가 실토한 작업장의 위치는 황도 근교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도, 아마 새벽녘이 다 되어야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로건은 빠른 속도로 걸으며 성진에게 설명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도보로만 움직여야 했다. 경비 몰래 말을 꺼내오더라도, 말의 기척까지 완전히 지우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너라면 더 빨리 달릴 수 있지 않아? 내 속도에 맞출 생각 하지 말고, 그냥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속도를 내. 로건.”
나, 제법 잘 달린다고.
성진은 그 말을 증명하기 위해 통통! 오러를 스프링처럼 사용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로건의 조사를 돕는 게 목적이지, 방해하기 위해 따라가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자 로건이 당황한 눈으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신기한 재주를 부리는구나. 발에 오러를 집중하는 원리인가? 그건 또 처음 보는 오러 운용 방법이네.”
“슈니슈헤라고 해. 이번에 지그스문트령에 가서 배워 왔어.”
“…내가 아는 슈니슈헤는 그런 게 아니었는데.”
물론 오르덴이나 울프 기사단이 들었다면 황당해하며 반박했을 터다. 이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슈니슈헤가 아니니까.
하지만 요령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오러를 이끄는 의념의 모양만, 설피에서 스프링으로 바꾸면 되니까. 무척 간단하다고!
[이성진.]
내심 우쭐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마왕 놈이 조심스레 소곤거렸다.
[지금 우리 뒤에 영혼 구슬 하나가 따라붙었어. 말은 통하지 않는, 작은 단말 구슬이야.]
‘아, 역시.’
아렌쟈가 왔구나. 황궁 밖으로 나가면 으레 따라오지 않을까 짐작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지금 우리의 움직임은 고스란히 아버지 귀에 실시간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뜻이겠지.
‘사실 아버지에게 이른다는 협박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는데 말이지…….’
어차피 다 알고 계실 테니까.
조금 딱한 눈으로 로건을 바라보고 있는데, 성진의 생각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녀석이 나직하게 신호했다.
“자, 그럼 갈까?”
로건은 성진을 의식하며 천천히 속도를 올렸다. 물론 성진은 별 어려움 없이 그의 뒤를 따라붙었고.
그렇게 얼마간 속도를 올렸을까. 그들은 어느새 말보다도 빠르게 황도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이따금 야간 순찰 중인 수도 경비대를 따돌리며, 그들은 눈 깜짝 할 새에 데스테 거리를 지나 황도 근교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섰다.
‘이 속도라면 조만간 황도 밖으로 나갈 수 있겠는데?’
물론 이것이 소드 마스터의 최선은 아니었으리라. 성진 역시도 아직은 제법 여유가 있었지만, 일부러 속도를 더 올리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로건의 정보원이 꽤 아슬아슬하게 그들을 따라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제법 괜찮은 실력이지만, 결국 여기까지인 모양.
‘우리 다샤였다면 더 빨리 따라왔을 텐데. 역시 다샤만 한 정보원이 없다니까? 나중에 꼭 말해 줘야지!’
[진심이냐? 그런 칭찬 해 줘도 걘 별로 기뻐하지 않을 거 같은데?]
마왕의 지적에 성진은 속이 뜨끔했다.
왜 아니겠는가.
-저하. 또 저에게 말도 없이 황궁 밖으로 나가셨다고요? 이러자고 오러 은폐를 가르쳐 드린 게 아니란 말입니다! 정말 기어이 제가 속 터져 죽는 꼴을 보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예?
어, 벌써부터 잔뜩 원망하는 다샤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끝까지 숨겨야겠다.’
[그래. 잘 생각 했어.]
그렇게 마왕과 속으로 잡담하고 있는 사이, 성진 일행은 어느새 황도의 서쪽 관문 근방에 도달해 있었다.
황도를 벗어남과 동시에 급격하게 건물들이 줄어들고, 너른 밭들과 드문드문 서 있는 농가의 전경이 펼쳐졌다.
그즈음에 이르러, 성진 일행을 따라오는 아렌쟈의 영혼 단말 역시 세 개까지 늘어 있었다.
“로건, 너 작업장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
밭과 밭 사이를 거침없이 달리는 로건을 향해, 성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낮에 본 진술서의 내용에 따르면, 그 ‘작업장’의 위치란 것이 대단히 두루뭉술하게 기술되어 있었으니까.
그것은 사실 죄수나 심문관의 잘못은 아니었다. 애초에 근교 농가의 가건물에까지 일일이 정확한 주소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로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이미 진술서의 내용과, 인근에 거주 신고 된 농가들의 대조를 완전히 끝낸 뒤야. 근방에 거주자 없이 비어있는 건물은 몇 개 없더라고. 지금 우리는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
호오. 조사를 맡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일 처리가 제법 효율적인데.
“하지만 이제껏 워낙 밀로 상단을 대대적으로 수사했어야 말이지. 지금쯤이면 다들 알아서 철수하지 않았을까? 증거가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지도 몰라.”
“설령 증거가 사라졌다 해도 괜찮다. 만일 그곳에서 뭔가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다면, 필시 희미하게나마 잔류 의념이 남아 있겠지.”
…잔류 의념?
성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남은 의념만으로 작업장을 특정할 수 있다고?”
“그래. 그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해. 왜냐하면 불온한 의념에는 반드시 조금이라도 마기가 섞여들게 마련이거든.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나는 아무리 작은 마기라도…….”
거기까지 말한 로건은, 뭔가 걸리는 것이 있는지 잠시 숨을 들이켜며 말을 멈추었다.
“로건?”
“…응. 아무리 작은 기척이라도, 수상한 기척은 절대 놓치지 않으니까.”
음.
뭔가 급하게 말을 바꾼 느낌이 들지만, 성진은 더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조금 풀이 죽은 로건이 조심스레 성진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일행이 이른 곳은, 외떨어진 어느 농가의 허름한 헛간이었다. 그리고 미처 그곳에 발을 멈추기도 전에, 성진과 로건 둘 모두 이상을 알아차렸다.
“…비어있다고 하지 않았어? 안에 사람이 하나 있는데?”
“너도 느꼈니? 게다가 어쩐지 낯이 익은 기척이다. 분명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사람 같아.”
설마 아직도 작업장이 운영되는 건 아닐 텐데.
성진과 로건은 잠시 시선을 교환하고는, 약속이나 한 듯 살금살금 건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작은 눈짓을 신호로-
벌컥!
기습적으로 헛간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으히이이익?!”
숨어있던 자가 마치 바람이 빠지는 듯한 비명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사지를 허우적거리며, 헛간 저편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
달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
오러로 시력을 돋운 성진은, 어둠 속에서도 그자의 얼굴을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벨린다?”
그랬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참회 교단의 잔당이, 잔뜩 겁에 질려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Chapter 22: Chapter 322
Chapter Text
322. 작업장 (2)
벨린다.
참회 교단의 지부장이자, 마계수를 소환해 밀로 상단을 전멸시킨 장본인.
지금쯤 한창 이단재판부에서 고문을 받고 있어야 할 그녀가, 왜 이런 꼴로 작업장에 숨어 있는가.
“…벨린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움찔 놀라더니 헛간 구석으로 더욱 움츠러들었다.
“네가 왜 여기에…….”
성진이 질문하며 한 걸음 다가서자, 벨린다는 허둥지둥 뒤틀린 사지를 휘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피딱지가 잔뜩 앉은 입술에서, 마치 짐승과도 같은 거친 신음이 튀어나온다.
으어어어어-
“워워! 진정해!”
성진이 멈춰 서서 양손을 내밀어 보이자, 그녀는 겨우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리며 성진을 살피는 꼴이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한때 인퀴지터 발레리의 고문에도 당당하게 호통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무척이나 처량하고도 볼썽사나운 모습이다.
“아는 자야?”
로건의 질문에, 성진은 벨린다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으며 나직하게 설명했다.
“어, 참회 교단의 잔당이야. 북부에서 마계수를 소환한 죄로, 이단재판부에 압송되어 조사를 받고 있었지.”
“아…….”
로건도 그제야 그녀가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지그스문트령에서 한 무리의 죄수들과 함께 내려왔었지. 인퀴지터 발레리가 관리했던가? 죄수들 중에서도 저자는 특히 강한 기척을 가지고 있었기에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성진과 로건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대단히 복잡해졌기 때문.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야 나올 수 있다는, 그 악명 높은 이단 재판부에서 탈옥을? 설마?’
당장 떠오른 생각 하나는, 이단 재판부가 파 놓은 함정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참회 교단에서 제법 높은 지위에 있는 벨린다를 도주하게 만들고, 그녀를 미행하여 지하 교단의 본거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아마도 자코모 밀로의 행방을 추격하기 위한 것이리라 짐작되었다.
“…정말 이상하군.”
로건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잠시 정신을 집중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부러 놓아준 거라면 분명 근처에 추적자가 있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근방에 인퀴지터는커녕 무력을 가진 이의 기척 자체가 느껴지지 않아.”
소드 마스터의 판단이니 정확하겠지. 성진 역시 로건의 정보원을 제외하면, 별다른 기척을 느끼지 못하던 터였다.
‘정말 자력으로 탈출했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일단 벨린다의 상태만 봐도 그렇지. 절대 제정신으로는 보이지 않는 데다, 일단 신체가 성한 구석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한데 대체 어떻게?
“일단은 치료가 우선으로 보이는군. 이곳에 온 경위를 물어보고, 이단 재판부로 다시 데려가는 건 그 이후의 일이야.”
로건이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벨린다를 향해 다가갔다. 뭔가를 질문하고 조사하기에는, 그녀의 상태가 심각할 정도로 나빴기 때문.
“겁내지 마라. 널 해치지 않는다.”
최대한 기척을 부드럽게 조절한 덕인지, 로건이 가까이 다가가도 벨린다는 처음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녀석이 휘감고 있는 온화한 오러에 감화된 듯, 아까보다 진정된 상태로 빤히 그를 바라보았을 뿐.
그런데 막상 로건이 치료하려던 순간,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그의 손에서 희게 빛나는 신성력을 확인하자, 벨린다가 창백하게 질리더니 이내 눈이 획하고 뒤집어진 것이다!
으아아아아악!
“벨린다!”
“아아아아! 그만둬! 제발 그만둬! 이 악마들아!”
“진정해라. 그저 치료하려는 것뿐이다.”
“끄아아아아! 저리 가!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던 벨린다는 곧이어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을 시작했다. 이대로는 당장이라도 죽어 넘어갈 것 같기에, 로건은 황급히 신성력을 거두며 뒤로 물러났다.
“대체 감옥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뭐, 빤한 거 아니겠어?
이단 재판부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에게 있어, 치유라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하면 이해 못 할 반응은 아니었다.
인퀴지터 발레리의 경우만 해도 그래. 정성스레 죄수들의 이를 하나하나 뽑은 다음, 그걸 또 신성력을 써 가며 차곡차곡 심어주지 않았던가. 다음에 재차 뽑을 수 있도록.
“…저 죄수는 분명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인이다. 하지만 이대로 이단 재판부에 넘겨 끝이 없는 고문을 받게 만드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차라리 여기서 목숨을 끊어주는 쪽이…….”
로건이 대단히 착잡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벨린다를 앞에 두고 보니, 일전에 자신이 지목해 이단 재판부로 넘긴 죄수들이 생각나는 모양.
누가 땅파기의 달인 아니랄까 봐, 저 녀석은 또다시 쓸데없는 죄책감에 빠지고 있는 거다.
‘글쎄, 어떨까…….’
성진은 벨린다의 딱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그저 뚱하니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인간의 적절한 죗값을 감히 누가 함부로 재단할 수 있겠어? 적어도 로건, 그걸 지금 네가 결정하고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그러고 보면 언젠가 아버지가 내게 말한 적이 있었지.
-아직은 네가 그런 선택에 내몰릴 필요가 없느니라. 가끔은 그 짐을 다른 이에게 맡겨도 괜찮지 않겠느냐.
아마도 모레스가, 내가 그의 가족이기에, 당신은 기꺼이 날 대신할 수 있다 말한 것이겠지.
잠시 고민하던 성진은, 이내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로건을 불렀다.
“로건.”
“응?”
“네가 지금 황궁에 다녀와 줄래?”
“…뭐?”
“너 혼자라면, 아까보다도 훨씬 빨리 갔다 올 수 있겠지?”
성진의 갑작스러운 말에, 로건은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하지만 성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상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인퀴지터 발레리를 이 자리에 불러오는 것이 순서라는 생각이 들어. 이단 재판부 내에서 벨린다에 대해 어떤 작전이나 논의가 있었는지를 먼저 확실히 해야지. 우리 선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
“만일 벨린다가 정말로 탈옥한 거라면, 그것 역시 제대로 조사를 해야 해. 감옥의 기능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뜻이니까.”
로건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도 성진의 말에는 조금의 허점도 없었다.
이유가 어찌됐든, 벨린다의 처우는 이단 재판부의 손에 넘기는 것이 옳았으니까.
“왜? 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아니다. 이성진, 그렇게 할게.”
성진이 다시 재촉하자, 로건은 힘없이 대답했다.
그러더니 잠시 밖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입을 달싹거린다. 아마도 정보원에게 뭔가를 은밀히 지시하는 눈치였다.
성진이 호기심에 귀를 기울였지만, 로건이 오러로 소리를 통제하고 있는 듯 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최대한 빨리 다녀오지.”
이윽고 지시를 끝냈는지, 로건이 성진을 돌아보며 진지하게 당부했다.
“아마도 별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이곳에 내 정보원을 두고 갈게.”
“뭐어?”
성진이 움찔 놀란 척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과하게 깜박거렸다.
“정보원이 왔어? 어디? 어디?”
“하하.”
그러자 로건이 겨우 우울한 기색에서 벗어나, 나직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모르는 척하지 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응?”
“지금은 제법 가까이 다가와 있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고 있잖아. 처음부터 정보원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는 말이지. 아까도 속도를 더 낼 수 있었는데, 일부러 그에게 보조를 맞춰 준 거지?”
“…….”
어, 마냥 호구인 줄 알았는데, 이 녀석 생각보다 예리한 구석이 있는데?
멀뚱히 로건을 바라보자, 그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지금 대단히 내게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군?”
“어? 아니? 전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야 지금 네가 하는 말들은 죄다 거짓이니까.
로건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단지 성진에게 주의를 주었을 뿐.
“발레리 경을 데려오지. 빨리 다녀올 테니까, 그동안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그 말을 끝으로-
휘익.
땅을 박찬 소드 마스터는 순식간에 근방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성진이 감지할 수 있는 기척을 벗어나는 걸 보면, 가히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서둘러야겠는데…….’
성진은 로건과의 거리를 대충 머릿속으로 가늠하며 천천히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스릉-
맑은 울림과 함께 검집에서 뽑힌 호두까기의 검날이, 희미한 별빛을 받아 어슴프레한 반사광을 흘린다.
“히, 히히…….”
긴 검날이 천천히 눈앞으로 다가오자, 벨린다는 자신의 운명을 짐작이라도 한 듯 기괴한 웃음소리를 냈다. 안도하는 것 같기도, 혹은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벨린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
그렇게 묻는 성진의 눈은 지독히도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성진의 오러에 동조하기라도 한 것일까, 벨린다의 눈에서 서서히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모레스 황자…….”
이제야 눈앞의 사람을 알아본 모양. 잠시 성진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고통의 너머에서 언젠가 주신께 다가갈 수 있다 여겼지. 온전한 피안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
“…….”
“예비된 자여. 너는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어떻게 그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났는지, 왜 내게 묻지 않는가?”
그래. 나는 묻지 않는다.
지금 내가 그것을 알 필요는 없는 데다, 이미 아버지는 모든 경위를 알고 계실 테니까.
분명 가장 적절한 대처를 하실 테지. 난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성진은 대답 없이 벨린다의 목을 향해 검날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주르륵, 한 줄기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히힛. 그걸 아는가? 예비된 자여! 나는 주신의 부르심을 받았다! 지극한 고통의 순간, 눈앞에 환한 빛이 어리고 이상한 글자들이 나타났어. 어디든 내가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겠다는 신의 글자였지!”
…신의 글자?
“수락했냐고? 물론 나는 당연히 수락했다! 마침내 나의 참회가 주신에게 닿아, 그분께로 가는 길이 열렸음을 알았으니까!”
수락?
어딘가 익숙한 말이었다.
[이성진. 이거 설마…….]
성진과 같은 것을 떠올렸는지, 머릿속에서 마왕 놈이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아니겠어? 아무래도 벨린다의 탈옥에는, 뭔가 규상 세계의 법칙이 깊이 작용한 것 같지 않은가.
‘예전에 미로에서 돌아올 때나, 내가 드래곤의 공방을 오갈 때. 분명 환한 빛과 함께 이동하겠냐는 확인 메시지가 떴었지.’
규상 세계의 [포털]을 이용했다면, 감쪽같이 감옥을 빠져나온 것도 납득이 된다.
‘역시 참회 교단에서 벨린다를 빼내기 위해 손을 쓴 걸까?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가…….’
잠시 생각을 이어가던 성진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게 누구든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지금 알아낼 방도는 없는데.
벨린다는 그것이 주신의 부르심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눈치니까, 거듭 캐물어 봤자 나오는 건 없을 거다.
‘이제 슬슬 끝내지 않으면, 곧 로건이 돌아올 거야.’
마음을 다잡은 성진은 마지막으로 벨린다를 향해 말했다.
“벨린다. 나는 네놈들이, 암흑 교단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희는 제국을, 그리고 이 대륙을 좀먹어가는 암적인 존재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고통만으로 점철된 삶을 지속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여기서 이만 모든 것을 끝내고, 네가 안식을 찾도록 도와줄 수는 있어.”
“모든 것을… 끝낸다고?”
서서히 치켜 올라가는 검날. 그것을 가만히 응시하는 벨린다의 눈동자가 기이한 열기로 번들거린다.
“마침내 나는 주신의 곁으로……!”
글쎄, 어떨까? 네가 죽어서 어디로 가든, 아마 그곳이 주신의 곁은 아닐 거야.
성진이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막 호두까기를 휘두르려던 때였다.
“저하!”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치며 성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부디 기다려 주십시오, 저하!”
성진의 앞에 부복한 것은 검은 잠행복을 입은 왜소한 남자였다. 계속 곁에서 기척을 흘리던 로건의 비밀 정보원이다.
“자네는?”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어린 황자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물어오자, 정보원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천천히 머리를 조아렸다.
“적절한 예를 갖추지 못해 송구합니다. 저는 로건 저하의 전속 정보원인, 19호라고 합니다.”
‘19호? 엄청 괴상한 이름인데?’
하지만 그것이 본명인지는 둘째 치고, 그의 행동은 대단히 의외라고 할 수 있었다.
정보원은 자신이 섬기는 사람 외에는 여간해서는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다샤가 일러 주었지.
아마도 황자가 직접 죄인을 향해 검을 뽑아 들자, 사안이 제법 시급하다 느낀 듯했다.
“탈옥한 죄수의 처우는, 이단 재판부의 손에 넘기는 게 순서라고 저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부디 진정하시고, 잠시 로건 황자님과 인퀴지터를 기다려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당장이라도 목을 치려는 황자의 앞을 가로막다니, 제법 황가에 충성스러운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지만.
저벅.
대답 없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자, 19호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 다시 성진의 앞으로 부복했다.
“저하! 저하를 막아 달라는 로건 황자님의 간곡한 당부이십니다.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
그 말에는 성진도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로건.
어쩐지 내 의도를 미심쩍어하면서도 순순히 물러난다 했어. 정보원에게 그런 부탁을 하고 가다니, 이상한 데서 예리한 녀석.
“신성 제국의 황자로서 암흑 교단의 잔당을 풀어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이단 재판부에 넘기는 것은 너무 잔인한 처사지. 그리 생각하지 않나?”
냉랭한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든 19호는, 황자의 눈이 예상외로 감흥 없어 보이는 것에 흠칫 놀랐다.
죄수를 동정하는 듯 말하는 주제에, 지나치게 메마른 시선이 아닌가.
‘어떻게든 이분을 막을 수 없겠구나…….’
19호는 그것을 깨닫고는, 마지막으로 절절한 목소리로 간청했다.
“하면 저하, 적어도 제 손을 더럽힐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
“황자‧황녀님들을 성심성의껏 보필하도록, 성황 폐하께 직접 명받았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의 임무를 다할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그래, 아버지도 있었군. 어쩐지, 내가 이 난리를 치고 있는데도 샤론 경이 나타나지 않는다 했어.
성진은 어쩐지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허락하지.”
“정말 감사드립니다.”
허락이 떨어지자 19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벨린다를 향해 몸을 돌림과 동시에-
촤악!
죄수의 목에서 뿜어진 뜨거운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Chapter 23: Chapter 323
Chapter Text
323. 작업장 (3)
로건이 인퀴지터 발레리와 함께 작업장에 도착한 것은 제법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단재판부 감옥이 정말로 비어있는지를 먼저 확인한 후, 마구간에서 제대로 말을 끌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벨린다……!”
헛간으로 달려 들어온 발레리는, 벨린다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눈앞에서 빤히 보고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구속하지 않고 그냥 감시만 하고 있었어. 건드리기만 해도 당장 죽을 거 같아서 말이야. 그런데 방심하는 사이,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지 않겠나?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내 호위가 급히 손을 쓸 수밖에 없었지.”
성진의 설명에 발레리가 멍청히 옆을 돌아보았다.
그 말대로 시체 옆에는 웬 낯선 남자 하나가 피 묻은 단검을 들고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누가 손을 썼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상황.
“저하의 안전이 걸린 문제라, 부득이하게 죄수의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단재판부에서 책임을 물으신다면, 기꺼이 그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새 잠행복을 벗어던지고 코에 그럴싸한 수염까지 붙이고 있던 19호가 고개를 숙이며 사죄한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저자세로 나오자, 발레리 역시 떨떠름하게 마주 대꾸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성황가 일원의 안전이 최우선이지요. 당신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일단 빨강머리 인퀴지터는 특별히 죄수의 처분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저 벨린다의 죽음에 무척이나 상심한 기색을 보였을 뿐.
오직 대략의 내막을 짐작한 로건만이, 조금 착잡한 얼굴로 성진을 빤히 바라본다.
“발레리 경과 함께, 죄수가 수감되어 있던 감옥을 확인하고 왔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로건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창 하나 없는 작은 독방에 수감되어 있었다고 해. 그런데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더군. 경비는 멀쩡히 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고, 감옥 내부는 흠 하나 없는 완전한 밀실이었다.”
간수들과 경비들에게 간단한 질문을 했지만, 모두들 죄수가 사라진 정황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 로건의 조사는 사실이리라. 사람의 거짓말은 귀신같이 잡아내는 녀석이니까.
‘역시 규상세계의 포털이 작용한 거군. 대체 누가 포털을 연 거지?’
그것이 누구였든, 성진은 도무지 그자의 의도가 짐작되지 않았다.
벨린다를 구하려 했든, 아니면 그녀를 해치워서 증거를 인멸하려 했든. 일부러 이런 외진 헛간으로 사람을 소환해 놓고, 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다니,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대체 뭘 어쩌려는 심산이었던 거지?
“…벨린다가 목숨을 잃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릅뜬 채 식어있는 죄수의 눈을 살포시 감겨주면서, 인퀴지터 발레리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이런 꼴이 되고도 아직 참회 교단의 본거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털어놓지 않았거든요. 그녀의 정신력이 얼마나 강한지 쉬이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뒤틀린 채 흐트러진 사지를 정돈해 주고, 구겨진 옷매무새 역시 바로잡아 준다. 그것이 일견 성인의 죽음을 추모하듯 경건해 보이기까지 하여, 의아해진 19호가 발레리를 향해 물었다.
“그저 암흑 교단의 잔당이 아닙니까? 하지만 경은 마치 그녀를 진심으로 애도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자 발레리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아니겠습니까? 벨란다는 여러모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사로잡아요?”
“그렇습니다. 저는 아직 그녀처럼 의연하게 고문을 견디는 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아, 물론 얼마 전 성녀가 되신 서이서 님이 계십니다만, 그분을 평범한 인간의 범주로 생각할 수는 없으니…….”
잠시 말끝을 흐린 발레리 경이, 어쩐지 슬픈 눈으로 피에 젖은 벨린다를 향해 성호를 그어 보였다.
“물론 벨린다는 의심할 여지없는 이단입니다. 죄인이지요. 하나 아무리 잘못된 신념이라 해도, 올곧기가 이쯤 되면 제법 고결하다 평가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
“그래서 적어도 죽음을 맞은 후에는, 진정으로 그녀가 갈구하던 곳으로 갔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겁니다. 물론 주신의 길 잃은 어린양이 악마의 손아귀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은 무척이나 불경스러운 생각입니다만.”
19호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다른 성기사였다면 혹여나 이단 재판에 회부될까 두려워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소리. 한데 이 날라리 인퀴지터는, 그런 무서운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주워섬기고 있다.
성진은 새삼스러운 심정으로 발레리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경이 지금 그런 말을 할 처진가? 지금까지 가장 그녀의 고문에 열을 올리던 장본인이면서.”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저하. 하지만 적어도 저는 그녀가 이런 식으로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를 지배하는 악마 대신, 고통을 주는 저에게 감화되기를 원했죠.”
조용한 어조로 대답한 발레리는, 고개를 들어 웃음기 가신 얼굴로 성진을 올려다보았다.
“벨린다에게는 분명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참회 교단의 고위직인 데다, 아직도 털어놓지 않은 비밀들이 많았다는 뜻이죠.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 누군가는 그녀의 죽음을 진심으로 원했을지도 모르겠군요.”
“…….”
“벨린다에게는 아마도 탈옥을 도운 조력자가 있었을 겁니다. 혹여 정말로 그녀가 아무런 도움 없이 스스로 탈옥한 거라면, 더욱더 그 경위를 자세히 조사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제 그녀의 죽음과 함께, 모든 진실이 미궁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평소의 관성적인 미소를 걷어치운 발레리는, 꽤나 차가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하. 이제 와서 여쭙기는 외람되오나, 저는 저하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발레리 경.”
그가 하려는 말을 짐작한 로건이 옆에서 만류하려 했지만, 발레리는 성진을 향한 의심의 시선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죄수가 갑자기 달려든다 하여, 생명의 위협을 느끼셨으리라 감히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기어이 그녀를 죽이셔야만 했습니까?”
적어도 이 날라리 인퀴지터가 벨린다의 죽음에 진심으로 상심한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능숙하게 숨기고 있던 송곳니를 이렇게나 무방비하게 드러낼 리가 없을 테니까.
성진은 고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할 말은 없어. 방심하고 있었다지만, 분명 그녀를 막을 더 좋은 방법도 있었을 테지.”
“…….”
“하지만 이걸 알아두게, 발레리 경. 나도 그녀의 죽음을 무척이나 애석하게 여긴다는 걸.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참 많았는데 말이야.”
“…물어보고 싶은 것이요?”
그래, 발레리 경.
나는 자네가 일전에 내 앞을 가로막고, 벨린다의 입을 무리해서 막았던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 그때, 벨린다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너에게 그런 질문을 들으니 어이가 없어서. 당신은 자신에 대한 [예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가?
또 죽기 직전에는 성진에게 이렇게 묻지 않았던가.
-예비된 자여, 너는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그 기억들을 조심스레 반추해 보면, 특정할 만한 키워드는 단 하나뿐이다. 그렇게 결론 내린 성진은, 아직도 미심쩍은 시선을 던지는 발레리를 향해 여상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니까? 마지막으로 벨린다가 나에게 달려들면서 이렇게 외쳤거든? 그러니까 분명, 나더러 [예비]된 자인가 뭔가라고 했지? 하지만 그걸 궁금해하기도 전에, 내 호위가 그녀의 목을…….”
흡!
순간 번쩍 정신을 차린 발레리가 황급히 성진의 말을 끊으며 수습을 시도했다.
“아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해이십니다, 저하! 제가 딱히 저하를 의심한다는 게 아닙니다. 그저 이단재판부의 누군가는 이런 의심을 할 수도 있다,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더는 암흑 교단의 잔당이 지껄인 말 따위, 신경 쓰지 마십시오!”
뭐, 성진도 그런 위험 정도는 일찌감치 염두에 두고 있었다.
혹시 저 황자가 암흑 교단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죄수를 죽여 증거를 인멸하려 한 것은 아닐까?
하필이면 사라진 죄수를 가장 먼저 찾아내다니, 수상하지 않은가. 혹시 탈주를 직접 도운 장본인인 것은 아닐까?
‘예상할 수 있는 의심이란 빤하지.’
하면 어찌하나? 어차피 알고 저지른 일.
예전에 시슬레에게도 말했듯, 광신은 더한 광신으로, 의심은 더한 의심으로 덮을 뿐인 것을.
“그래. 뭐든 걸리는 것이 있으면 원하는 대로 해. 나도 순순히 조사에 임할 테니까. 이왕이면 혐의를 제대로 벗고 싶군.”
“…네?”
“그러니 이 일은 제대로 공론화하는 것이 좋겠네, 발레리 경. 그러려면 우선 철통같은 이단재판부 감옥에서, 다 죽어가던 죄수가 탈옥에 성공했다는 것을 세상에 확실히 알려야겠군.”
“그건…….”
발레리의 표정이 오묘해진다.
왜 아니겠는가. 만일 정말로 그랬다간, 이단재판부의 드높은 위상에 심각한 손상이 갈 것이 우려될 테지.
뭔가 생각이 복잡해 보이는 그를 향해, 성진이 손뼉을 탁, 치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벨린다가 어떻게 탈옥을 했나 조금 의심스럽긴 했거든? 아마도 조력자가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이단재판부 내부가 가장 의심스럽지 않겠어?”
“엇!”
“그러니 이단재판부의 자체 조사는 아무래도 믿을 수 없네. 그냥 성회에 정식으로 제소해서, 대대적인 조사와 감사를 요청해 볼까?”
“아니, 저하. 잠깐…….”
빨강머리 인퀴지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황도에 마물 게이트가 열렸던 이후, 암흑 잔당을 색출한답시고 한동안 진통을 겪었던 이단재판부였다.
그런데 그 정신 나간 짓을 또 반복한다고?
“아직도 털어놓지 않은 비밀들이 많은 소중한 죄수였지 않나? 그러니 과연 누가 그녀를 일부러 빼돌려, 모든 것을 덮으려 했는지 심히 의심스러워. 어디까지나 진심이네.”
성진이 아까 들은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자, 발레리가 황당한 얼굴로 성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저하, 지금 대놓고 사람을 협박하십니까?
-그럼 아니라고 보나? 다 자업자득이야. 먼저 내 심기를 거스른 게 대체 누군데 그러지?
잠깐 동안 무언의 눈빛이 오간 후, 이윽고 날라리 인퀴지터는 힘없이 웃었다.
“저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개 인퀴지터에 불과합니다. 이런 큰 사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마할 권한이 없습니다.”
“글쎄, 어떨까…….”
물론 성진은 그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남들은 언급조차 두려워하는 금서들을 마음대로 꺼내 읽는 데다, 깐깐한 베니투스 추기경을 상대로 은총의 기사 문제도 큰 잡음이 나지 않도록 마무리했지.
어디 그뿐인가. 마수 글래쳐 트롤의 가슴에 멋대로 주신의 문양을 그러넣는 대담함까지. 어떻게 이런 자가 단순히 말단 인퀴지터란 말이지?
“자네, 생각보다 이단재판부에서 행사하는 권한이 큰 것 같은데, 순전히 내 착각인가?”
“…….”
“그러니 이단재판부를 위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해, 발레리 경.”
내일부터 당장, 이단재판부를 완전히 뒤집어엎을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지.
“자체적으로 조사할 거라면, 감옥을 재점검하고 탈옥을 예방하는 선에서 그쳐. 괜한 의심으로 피차 피곤해지지 말자고. 아니면 이쪽에서도 의심의 끝이 과연 어디까지인지 직접 보여줄 수 있으니까 말이지.”
파르르.
당혹감으로 진동하는 날라리 인퀴지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성진이 푸근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고 있나? 난 자네의 능력을 제법 믿고, 또 의지하고 있다고. 발레리 경.”
적어도 그 말만큼은 성진의 진심이었다.
* * *
기세가 한풀 꺾인 발레리 경은 벨린다의 시체를 가지고 조용히 돌아갔다.
성진은 로건과 함께 작업장 조사를 위해 뒤에 남았고.
일은 그렇게 평화롭게 마무리되는가 싶었다. 헛간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 성진을 향해, 로건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이성진. 그렇게 이 세상을 착하게만 살아서는 안 되는 거야.”
“…뭐?”
성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자신이 평생 들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던 터라.
한데 로건이 눈매를 서글프게 휘며, 다 이해한다는 듯 부드럽게 웃어 보이는 게 아닌가!
“네가 죄수의 처지를 동정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어떻게든 무리해서라도 그녀를 돕고 싶었겠지.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오히려 네가 처한 입장을 제대로 따져 보는 냉정한 태도가 중요한 거다.”
“어엉?”
“상냥한 것이 능사는 아니야. 매사에 이기적일 줄도 알아야지. 이래서야 너, 앞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가려고 그래?”
“……!?”
어찌나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저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졌다.
잠깐만. 이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울 호구 자식이, 지금 누구더러 뭐라는 거냐? 어?
Chapter 24: Chapter 324
Chapter Text
324. 작업장 (4)
“네가 지금 어르신 앞에서 그렇게 거들먹거릴 처지냐? 세상 둘도 없는 호구 마스터야!”
“이것 봐, 또 멋대로 기어오르지! 윗사람이 걱정을 해 주면 동생답게 순순히 말을 들으라고!”
“윗사람 좋아하시네! 지금 누가 할 소리를! 넌 아직 640년은 이르다, 이 애송아!”
“어어, 이성진! 이거 당장 놓지 못해!?”
성진과 로건이 차례대로 서로에게 헤드록을 걸고, 그 와중에 약간의 거친 언쟁이 오가는 등 애로 사항이 있었다.
하지만 곧 상황은 정리되어, 두 사람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착실하게 작업장 조사에 착수했다.
“……!?”
오로지 그 과정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은 19호만이, 멍청한 얼굴로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을 뿐.
-내 황자님께서 이렇게 유치할 리가 없어!?
그의 창백한 얼굴에 드러난 적나라한 감정이었다.
19호는 방금, 지난 수년간 자부심을 갖고 모시던 점잖은 상전의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목도한 것이다. 어찌 충격받지 않을 수 있으리!
“음? 자네 어디 불편한가? 지금 치료해 줄 테니, 편하게 말해보게.”
“…아, 아닙니다. 저하…….”
불쌍한 19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주뼛거리며 헛간의 한구석으로 기어들어갔다.
“흠…….”
낡은 탁자와 텅 빈 바구니 몇 개. 부서진 잡동사니들과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말라비틀어진 풀잎 조금.
‘작업장’은 일견 특별한 구석은 없어 보였다.
“역시 모조리 철수한 것 같네. 하긴, 증거를 남겼을 리가 없나…….”
성진이 실망하여 중얼거리자, 로건이 멀쩡한 풀잎 몇 개를 주워들며 물었다.
“19호. 이건 무슨 식물일까? 농가에서 흔히 재배하는 건지 혹시 알아볼 수 있겠나?”
“네, 저하.”
19호가 풀을 건네받아 잠시 코에 가져다 댔지만, 이내 얼굴을 약하게 찌푸렸다. 헛간 전체가 벨린다의 피비린내로 진동하는 중이라, 후각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
“허브의 일종 같습니다만, 향이 무척이나 약한 편입니다. 적어도 델크로스에서 흔히 나는 종류는 아닌 듯합니다. 일단은 가져가서 따로 조사를 해 보겠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법 시간이 흘러, 어두운 하늘 한편에서 어슴푸레하게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좁은 헛간을 빠짐없이 조사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역시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저하. 이쯤에서 슬슬 황궁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떨지요?”
하지만 로건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그는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기감을 한계까지 한껏 곤두세웠다.
“그렇지 않다. 분명 이곳에서 [마물]과 관련된 뭔가가 일어났어. 마기와는 다른 그 독특한 느낌이, 아직 공기 중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래? 그냥 기분 탓 아닐까?”
성진은 그 의견에 회의적이었다.
누구보다도 마물의 정기에 민감하다 자부하는 자신조차도, 아직까지 그리 특별한 것을 느끼지 못하는 중이었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성진의 눈에 부서진 자기 조각 하나가 들어온 것은.
어쩐지 묘한 예감에 사로잡혀, 성진은 홀린 듯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순간-
“……!?”
성진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작은 조각에, 미약하게나마 마물의 정기가 남아 있는 것을.
“아, 거기였구나! 너무 희박해서 위치를 좀처럼 가늠하기 힘들었는데.”
로건이 반색하며 다가온다.
“이건 뭐지?”
“뭔가를 담고 있던 그릇인가 봐. 이 조각만으로는 정확한 걸 알 수 없지만.”
슬쩍 자기 면을 쓸어보니, 먼지 같은 가루가 조금 묻어 나온다. 성진의 짐작대로라면 이것이 마물, 아니 로페룸 알의 가루일 터.
작업장에 대해 증언했던 죄수가, 밀로 상단주로부터 건네받아 작업장으로 옮겼다는 물건이 바로 이것이리라.
“어쨌거나 여기가 밀로 상단의 ‘작업장’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듯하군.”
“그래, 로건. 날이 밝으면 절차상일 뿐이더라도, 일단 공식적인 조사를 진행하는 게 좋겠어.”
성진은 그렇게 대꾸하며 머릿속의 마왕을 불렀다.
‘어떠냐? 마왕아. 이 가루가 로페룸의 알이 맞아?’
그러자 마왕 놈이 잠시 고심하더니,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흠. 집중해서 보면 마물의 정기가 조금 느껴지긴 하는데? 하지만 이게 정말로 로페룸의 알인지, 아니면 다른 마물의 흔적인지는 잘 모르겠어. 워낙에 남아 있는 양이 적으니까.]
왜 아니겠는가. 티끌 같은 부스러기만 묻어나는 정도인데, 이걸로 어떻게 마물의 종류를 특정한다는 말이야?
여기서 마물의 기척을 찾을 바에야, 차라리 내…….
움찔!
순간 찜찜한 사실 하나를 떠올린 성진이,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로건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이성진?”
로건이 의아한 듯 눈을 끔벅인다.
“어… 로건. 혹시나 싶지만, 너 말이지…….”
“응?”
“이 정도 소량의 가루를 감지할 정도잖아? 그렇다면 만일, 근처에 조금 더 많은 [마물]의 흔적이 있다면, 아마도 더 쉽게 그걸 눈치챌 수도 있겠지?”
“음? 아아. 난 또 뭐라고.”
잔뜩 긴장한 성진을 향해, 로건이 피식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네가 늘 품에 소지하고 다니는 것 말이지? 그 약차에 관해서라면 이미 알고 있어. 마물의 삿된 기운이 잘 느껴지니까.”
“뭐……!”
헉, 진짜냐!
성진은 저도 모르게 움찔 뒤로 물러나며, 품속에 지니고 있던 물건을 더듬었다. 로건의 말대로, 약차 가루가 들어있는 작은 주머니였다.
지그스문트령에서 약차들을 대거 압수한 이후, 성진은 그 일부를 빼돌려 늘 품에 가지고 다니는 중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약차야말로, 유사시를 대비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버지도 일전에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모르겠느냐, 모레스? 채널을 활성화시킨 지금의 너는 완전한 오라클과 다름이 없다.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의문을 가지는 것만으로 모든 해답을 얻었겠지.
그래. 약차는 현재로서는 성진을 완전한 오라클로 만들어 주는 유일한 수단.
만일 평범한 방법으로는 결코 타개할 수 없는 일이 닥쳤을 때, 그리고 때마침 예기치 못하게 아버지에게도 의존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면.
‘이 약차는, 분명 내가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알려주는 마지막 수단이 될 터.’
그런 효용을 미루어 짐작하기에, 아버지도 그때, 앞으로는 절대 약차에 손대지 말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던 거다.
그저 되도록이면 함부로 마시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을 뿐이지.
“어, 로건. 그러니까 이건 말이지…….”
성진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고 있는데, 로건이 희미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뭘 새삼스럽게…….”
“응?”
“네가 ‘독특한 기척’을 흘리고 다닌 게 어디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
순간 성진은, 아까 작업장으로 올 당시 로건이 황급히 말을 바꾼 이유를 대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아무리 작은 마기라도…….
-로건?
-…응. 아무리 작은 기척이라도, 수상한 기척은 절대 놓치지 않으니까.
아아, 그렇군. 이 녀석은 늘 성진으로부터 일정량의 마기를 감지하고 있었던 거다!
예전에도 시슬레보다 먼저 성진에게 경고해 주지 않았던가. 주변에서 삿된 기운이 느껴지니, 고위 사제들을 만날 때는 각별히 주의하라고.
당시는 성진이 스스로를 악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때라,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었다. 그저 ‘마기를 가만히 두다니, 성황가의 아이들이 생각보다 독실한 종교인들은 아니구나,’ 하고 신기해했을 뿐.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입장이 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성진은 모레스였고, 신성제국 델크로스의 황자였으니까.
그러니 이 상황을 어떻게든 납득이 되도록 설명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이 성진의 뇌리를 지배했다.
“어, 로건. 그러니까 말이지. 음, 이 마기는 말이지…….”
…하지만 대체 어떻게? 뭐라고 설명해?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버린 성진이 말을 더듬고 있을 때였다.
“하하. 신경 쓰지 마. 너는 예전에도 늘 그랬으니까.”
…예전에도?
성진은 놀란 눈으로 로건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예전 언제?’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당황하고 있는데, 로건이 성진을 향해 눈매를 가늘게 휘며 웃어보였다.
“이성진, 너는 어릴 때부터 여러모로 특이했으니까.”
너무나도 말간 나머지, 마치 새벽 공기 속으로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미소였다.
* * *
황도의 외곽. 산 중턱에 있는 한 작은 오두막.
희미한 횃불 하나 없는 캄캄한 지하실에서, 여간해서는 모이지 않는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없어. 나한테는 안 왔는데?”
낡은 사제복을 입은 노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작은 금발의 소녀 역시 작게 고개를 내젓는다.
“내 영역에도 새로운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 로메인이여, 제대로 확인한 게 맞는가?”
이들의 정체는 모든 악마들의 경배를 받는 위대한 고위 마왕들. 바로 [파종]과 [탐욕]이었다.
물론 먼지 바닥에 쭈그려 앉은 볼품없는 모양새에서는, 티끌만 한 위엄 조각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 목표물의 생명이 끊어진 것을 확인했습니다만.”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반가면을 쓴 로메인이, 커다란 수정 구슬을 제대로 조작하기 위해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그거 제대로 작동하는 건 맞는 거지?”
“그렇습니다, 파종이시여. 예전에도 몇 차례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혹시 고장 난 것은 아닌가? 한번 두드려 봄이 어떠한지?”
“아닙니다, 탐욕이시여. 이것은 고장 난 것이 아니거니와, 두드린다고 해서 고쳐지지도 않습니다. 그저 규상 세계의 물건이라, 본상 세계에 적용하는데 조금 어려움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지금 옛 이오니아의 유산 중 하나인 ‘임시 포털 생성기’를 조종하기 위해 애를 먹고 있었다. 오래전 로메인이 인형사로부터 빼돌린 진귀한 물건이었다.
“굳이 황도 내에 있는 인간을 목표물로 시험할 이유가 있어? 성공했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게 번거롭잖아.”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십시오, 파종이시여. 이 기계로 움직여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지금 황궁에 있지 않습니까?”
로메인이 생각하는 최종 대상은 바로 황궁의 장미, 아멜리아 황녀였다.
어떻게든 그녀를 감쪽같이 빼낼 방법이 필요했다. 만일 황녀와 레오나드 왕자의 인연이 성사된다고 해도, 성황이 이를 그저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까.
“애초에 너무 멀리서 대상을 지정하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그냥 이것을 황도로 가져가서, 목표물 바로 옆에서 시험하면 좋을 것을.”
“아아, 탐욕이시여. 황도 내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당장이라도 델크로스의 수호자에게 발각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그자는 크게 분노하며, 단번에 이 소중한 기계를 박살 내겠지요.”
그렇게 대꾸한 로메인은, 고개를 숙여 다시 한번 기계를 찬찬히 점검했다.
포털이 처음 열렸던 지점을 훑어보고, 목표물이 이동한 기록을 살폈다. 그리고 그의 생명이 자연히 끊어졌음을 확인한다.
음, 아무 이상 없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왜 하필이면 이단재판부의 죄수를 고른 건데?”
좀처럼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파종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야, 갑자기 어딘가로 옮겨주겠다고 제안해본들, 그걸 아무 거리낌 없이 수락할 사람이 그들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일리 있는 말이었다.
현재 죽는 것만 못한 상황에 처해있는 이단재판부의 죄수들은, 그곳이 지옥이라고 해도 기꺼이 도망치려 들겠지.
“그리고 본상 세계에서는, 포털의 시작 지점은 알아도 도착 지점을 특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메인은 꽤나 번거로운 방법을 이용해야 했다.
목표물을 먼저 어딘가로 이동시킨 다음, 대상의 상태가 안정된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영혼만을 소환하여 자연스럽게 대상을 죽인다.
이 차원의 영혼은 죽는 순간 고위 마왕의 소유가 되니, 마왕들이 그 영혼을 가로채어 어디서 죽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 시험할 대상으로, 갑자기 죽어도 문제되지 않는 죄수들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부디 잘 살펴보십시오, 위대한 마왕들이시여. 기록에 따르면 분명 목표물은 이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연히 숨이 끊어졌습니다. 분명 어딘가에 그 영혼이 떠돌고 있을 겁니다.”
그러자 파종이 인상을 찡그리더니,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웃기지 마. 역시 새로 죽은 영혼은 우리 영역에 오지 않았어.”
“그렇습니까? 그거 정말 이상하군요…….”
로메인은 심각한 얼굴로 손아귀의 수정 구슬을 들여다보았다.
“만일 성황 몰래 황녀를 빼돌리려 한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무래도 결과가 시원찮군요. 어쩌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Chapter 25: Chapter 325
Chapter Text
325. 21호의 나날 (1)
성진이 ‘작업장’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가 지그스문트령에서 라이칸슬로프 대군을 상대로 한창 고군분투하고 있을 무렵, 진작 그곳을 둘러보고 성황에게 보고한 정보원이 있었다.
엔리케, 또 다른 이름은 21호.
성황의 직속 정보원인 그는, 당시 성황의 명으로 황도 외곽에 비어있는 농가들을 둘러본 적이 있었다.
-수상한 낌새가 없는지 살펴보게.
-예? 폐하. 갑자기 빈 농가들은 왜…….
-살피기만 하고 바로 황궁으로 돌아오라. 알겠는가? 교전과 추격은 절대 금하겠다.
-……?
명령은 그것이 다였다. 별도의 지시가 없었기에, 목적조차 불명이다.
21호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궁에서 물러나왔다. 성황을 곁에서 보필한 지 벌써 수년이 되어 가지만, 21호는 때때로 지금처럼 자신이 뭘 수행하고 있는지 전혀 모를 때가 많았다.
‘대체 그 사람은 내게 뭘 시키고 싶은 거지? 뭐든 제대로 말을 좀 하란 말이야!’
예전에도 과묵한 편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최근 들어 극도로 말을 아끼는 성황의 의도를 홀로 짐작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상전이 하라면 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수밖에.
결국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21호는, 설렁설렁 외곽을 돌아다니며 농가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음?’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21호는 정말로 수상한 헛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캄캄한 밤중에 웬 장정들이 모여, 불도 밝히지 않고 부리나케 짐을 싸는 중이었다. 또 그중 몇몇은 옮길 수 없는 물건들을 모아, 땅속 깊이 파묻고 그 위에 정신없이 흙을 끼얹고 있다.
‘저것들은 또 뭐 하는 짓거리들이지?’
눈을 씻고 살펴봐도 수상한 야반도주의 현장!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은 21호는, 기척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헛간을 향해 나아가려 했다.
‘……!’
갑자기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섬뜩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다면 말이다.
대단히 능숙한 오러 은폐의 기척!
‘…암살자?!’
그랬다. 장정들 사이에, 야반도주를 총지휘하는 듯 보이는 강한 암살자가 하나 있었다.
동시에 상대측 암살자도 21호의 낌새를 눈치챘는지,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그를 쏘아본다.
휘익!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를 똑바로 마주한 동그란 눈동자가 살벌한 안광을 흘린다. 머릿수건처럼 둘러매고 있는 검은 두건 아래, 맨들맨들한 민짜 눈썹이 두드러지는 기괴한 여자였다.
‘보통 실력자가 아니다!’
그것을 채 인식하기도 전에, 21호의 몸은 빠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슈욱!
동시에 날카롭게 쏘아져온 상대의 스틸레토가 21호의 어깨를 스친다. 따끔한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21호는 몸을 앞으로 굴리며 무턱대고 단도를 날렸다. 제대로 겨냥할 겨를도 없이, 단순히 견제를 위한 공격이었다.
쉬익!
눈먼 단도는 당연하게도 암살자를 피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상대의 몸을 꿰뚫는 대신에, 무언가 그릇 같은 것이 부서지는 날카로운 소음이 들려왔다.
챙그랑!
“헉?”
“이런, 발각됐다!”
“어서 도망쳐!”
놀란 장정들이 짐을 짊어지고 허둥지둥 달리기 시작했다.
쯧.
21호는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는 두 눈을 빤히 뜨고 저들을 놓칠 것이 분명했다. 당장이라도 추격하고 싶지만, 상대 암살자가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지 않은가.
휘리릭- 휘리릭-
역시나 암살자는 홀로 뒤에 남아, 뾰족한 스틸레토를 빙글빙글 돌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가 양손으로 빙빙 돌리는 스틸레토가, 달빛을 반사하며 위압적인 금속광을 흘린다.
‘먼저 저 암살자부터 해치워야 한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바로 그때, 21호의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교전과 추격은 절대 금하겠다.
아아. 이런.
‘그 사람이 그런 명령을 내린 이유가 다 있었구나!’
21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현실을 직시했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아무래도 교전과 추격이 무리라는 것을.
저 암살자와 맞먹을 실력자라면, 아마도 그의 까마득한 선배인 13호 정도가 아닐까.
‘…….’
슬쩍.
21호가 상대를 경계한 상태로 슬그머니 몸을 물리자, 민짜 눈썹 여자의 눈에서 이채가 일었다.
“호? 주제 파악이 빠른 놈이구나.”
여자는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물론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기에, 기괴하던 인상이 한층 더 스산해졌을 뿐이지만.
“그 단도 던지기. 애송아, 너 [오베론의 손] 계파지?”
“…….”
“요즘 거기에 참 귀여운 애들이 많은 거 같단 말이지. 아, 너 말이야. 혹시 사브리나라는 애를 알아? 아마 네 몇 기 위의 선배쯤 될 거 같은데…….”
살벌하게 돌아가는 스틸레토는, 언제든 틈이 생기면 21호의 목을 꿰뚫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도 저 여자는 태평하게 사람 안부를 묻고 있는 거다.
21호가 잔뜩 긴장한 채로 천천히 뒷걸음질 치자,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찬찬히 살폈다.
“흠. 그냥 애송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름의 경지에는 올라 있다는 건가? 뭐, 좋아. 이쪽도 너에게 시간 낭비할 틈은 없으니까.”
“…….”
“놓아줄게. 그러니 우리 서로 알아서 갈 길 가자고. 자자, 긴장 풀어.”
그 말을 쉽게 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21호는 경계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그녀가 무기를 던져도 닿지 않으리라 판단되는 위치까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바로 그때.
번뜩!
살벌한 안광을 흘린 암살자가, 아무런 조짐도 없이 갑자기 스틸레토를 던져왔다.
강한 오러가 실린 덕에, 비거리가 월등히 늘어난 무기가 그의 다리를 노려온다!
탱강!
“……!”
하지만 21호는 예상한 듯 수월하게 그것을 쳐냈다. 수년 전부터 누군가에게 누누이 들어오던 가르침이, 이미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기 때문.
-같은 암살자와 조우했을 때, 가장 긴장해야 할 시기는 바로 상대의 사정거리를 막 벗어났다고 생각했을 때다. 특히 [카야의 숨결] 출신 암살자들은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먼 거리에서 상대의 발을 무력화시키는 데 특화되어 있단다.
“쳇! 재미없게……!”
여자가 짜증스럽게 혀를 차는 소리를 뒤로하고, 그때부터 21호는 상처를 지혈할 새도 없이 죽을힘을 다해 줄행랑을 쳤다.
“제대로 잘 깨뜨렸군. 수고했네, 엔리케.”
기진맥진한 채로 황궁에 돌아오자, 전혀 놀란 기색이 없는 성황이 얄미우리만치 태평한 얼굴로 21호를 맞이했다.
“…다 알고 계셨습니까?”
물론 그렇겠지. 당신이 하는 일이니까.
그러자 성황은 씁쓸함을 숨기지 못하는 21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의 상처에 손을 짚으며 친히 신성력을 흘려주었다.
어린 시절 늘 그랬던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일을 잘 끝내고 와서는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나?”
“…….”
“자, 이제 보고를 들어 볼까. 거기서 무엇을 보고 왔나, 엔리케?”
글쎄. 당신이 과연 시간 내서 내 보고를 들을 필요가 있는 걸까?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을 텐데.
“…21호입니다.”
퉁명스럽게 대꾸한 21호는, 울컥하고 솟구치는 알 수 없는 감정을 애써 갈무리했다.
* * *
“과연 내가 그분의 정보원으로서 쓸모가 있기는 한 걸까? 그분의 능력이라면, 나 없이도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텐데…….”
조금 우울한 기분으로 원숭이 망루에 돌아온 21호는,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한탄을 듣게 되었다. 바로 그의 선배인 19호가, 탁자에 머리를 박고 신음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이 선배가 자괴감에 빠져 있는 거야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싶지만.
“뭡니까? 또 로건 황자와 무슨 일이 있었어요?”
로건 황자의 정보원인 19호,
그는 21호와 나이 차가 제법 있는 베테랑이었지만, 최근 원숭이 망루에서 자주 얼굴을 부대낀 덕에 꽤나 막역하게 지내는 중이었다.
“불경스럽긴. 21호. 제대로 경어를 쓰지 못해?”
“네, 네. 로건 황, 자, 님. 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로건 황자를 향한 지나친 충성심만 아니라면, 꽤나 괜찮은 선배인데 말이지.
그러자 19호는 풀이 죽은 얼굴을 돌려 21호를 바라보았다.
“음.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로건 황자님 정도 되는 분께, 나 같은 부족한 정보원이 가당키나 한가 싶어서 말이지.”
“…….”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처음 로건 황자에게 배속 받은 후부터, 19호는 매번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분을 모시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좌절감에 빠져 있었으니까.
왜 아니겠는가. 정보원보다 기척을 잘 죽이고, 무력 또한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월등한 황자인데.
덕분에 로건 황자가 토벌대를 이끌고 어딘가로 떠날 때마다, 그는 홀로 황도에 남겨져 애꿎은 이적 단체 조사로 시간을 허비하곤 했다.
그쯤 되니 ‘내가 과연 그분에게 쓸모가 있기는 한가’,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으리라.
“13호 선배는 당당히 모레스 황자님을 따라 지그스문트령으로 갔는데 말이지.”
“쓸데없는 불평은 됐습니다.”
21호는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선배가 아무리 그런들, 어디 저만 하겠습니까? 저는 무려 성황 폐하의 직속 정보원이란 말입니다.”
그러자 19호가 새삼스럽게 딱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저런…. 힘내라고.”
‘젠장! 저 선배에게 동정받다니, 왠지 기분 나빠!’
하지면 더는 19호와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지금 당장 아세인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아마도 성황과 일정을 맞추기 어려울 테니까.
“…또 아세인 출장이야?”
서둘러 여장을 꾸리는 21호를 빤히 바라보던 19호가 물었다.
“네.”
“너도 참 부지런도 하다. 그냥 아세인 지부에 있는 요원들에게 일을 좀 맡기면 안 되냐? 굳이 네가 매번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21호의 태도는 완고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호문클루스에 임하실 때는, 그분의 신변이 가장 위태로울 때가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아무에게나 곁을 맡깁니까?”
“……?”
19호는 황당한 얼굴을 했다.
왜 아니겠는가. 평소 21호가 가진 성황에 대한 반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고 있던 19호는, 잠시 후 작은 목소리로 이런 평가를 했다.
“그거 아냐? 너도 정말 별난 녀석이야.”
시끄럽습니다. 그 말 그대로 선배에게 돌려드리죠.
* * *
21호라고 해서 아세인 출장이 썩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카이엔 클라노스. 성황의 숨겨진 사생아를 만날 때면, 매번 지독히도 불쾌한 경험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 점에는 예외가 없었다.
“폐하!”
쿨럭!
멀쩡히 식사를 하고 있던 성황이 갑자기 입에서 피를 쏟아내자, 21호가 기겁을 하고 달려갔다.
“……!”
-아니, 괜찮네.
성황은 망가진 성대를 사용하는 대신, 천천히 21호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그 와중에도 카이엔, 저 미친 자식이 하는 행동은 가관도 아니었다.
타악.
카이엔은 옆에 있던 모래시계를 뒤집더니, 피를 토하고 있는 성황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나, 둘, 셋…….”
무려 느긋하게 숫자까지 헤아리고 있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
21호는 이를 갈며 무력하게 소년을 노려보았다.
저 죽일 놈의 자식이 폐하의 아들만 아니었어도, 21호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저 어린 소년의 이마에 단도를 박아 넣었으리라.
‘다른 길드원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제대로 저 새끼를 감시하긴 한 건가?’
다행히도 부식된 식도와 기도가 모조리 회복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금세 멀쩡한 상태로 되돌아오는 성황을 바라보며, 카이엔이 작게 혀를 찼다.
“와, 호흡 몇 번 만에 회복하네? 이걸로 오늘도 탈출은 완전히 글렀네.”
“…용케도 음식에 독을 탔구나. 대체 무슨 재주를 부린 게냐?”
길드원이 빠짐없이 감시하고 있었을 텐데, 참으로 재주가 용한 아이다. 성황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카이엔이 그를 향해 해맑게 웃어 보인다.
“그건 비밀이야. 그냥 잘 섞었지.”
“이 독은 또 어떻게 구했느냐? 아세인의 흑시에서도 여간해서는 돌지 않는 물건일 터인데.”
“그것도 비밀이야, 아부지.”
그렇게 대꾸한 소년은, 식탁에서 일어나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나저나 요즘 무슨 일 있어? 어째 전보다 좀 자주 오는 편이네?”
카이엔이 아세인에 자리를 잡은 후, 성황은 적어도 한 달 정도는 1주일에 한 번을 꼬박 방문했다.
그러다가 탄신년 전후로 상당히 방문이 뜸해지더니, 최근에는 그것을 만회라도 하는 듯 주 2회 방문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21호만 황도를 오가느라 죽어나는 중이었지만.
“최근 정기 알현 시간에 조금 여유가 있구나. 왜, 자주 보는 게 싫으냐?”
“그런 건 아니야. 아부지랑 노는 건 꽤 재밌으니까.”
그렇게 대답한 카이엔이, 식탁보 위에 흥건한 핏자국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놀이’라는 것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쉬이 짐작할 수 있는 섬뜩한 미소다.
“그나저나 아부지. 오늘은 나랑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 거야? 또 체스 같은 걸 두는 건가?”
강한 호기심을 담고 물어오는 소년의 얼굴은, 답지 않게도 무척 천진해 보이기도 했다.
“체스에는 흥미가 없더냐?”
“응. 솔직히 말하면 별로 재밌지는 않지.”
“그런 것치고는 꽤나 집중하는 듯 보였다만.”
“게임이잖아. 뭐든 지는 건 싫으니까 말이지.”
새침하게 입을 삐죽거린 카이엔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성황을 향해 다가갔다.
“그것보다는 우리, 앞으로 일어날 중대한 일에 대해 좀 더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건 어때?”
그리고 소년은, 검은 삼백안을 가늘게 구부리며 제법 살가운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응? 말해봐, 아부지. 날 언제쯤 죽일 거야?”
“…….”
“결국은 죽일 생각이잖아. 그렇지? 그러니 어서 말해봐. 그래야 나도 마음의 준비란 걸 하고, 그 전에 이런저런 계획을 세울 수 있지 않겠어?”
아아.
21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했다.
‘저 부자의 대화는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아!’
Chapter 26: Chapter 326
Chapter Text
326. 21호의 나날 (2)
카이엔의 태도가 처음부터 이런 식이었던 것은 아니다.
번화한 대도시에서의 삶을 누리고 싶다는 의사에 따라 아세인 공국에 좋은 저택을 구해주었을 때만 해도, 소년은 성황의 원조를 내심 달갑게 여기는 듯 보였으니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번듯한 옷과 좋은 음식 그리고 기본적인 교육이 제공되자, 지저분하던 시골 소년이 귀티 나는 귀공자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 예쁘장한 외모와 비상한 머리를 보고, 과연 그 사람의 자식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던 때도 있었지.
물론 소년과 우연히 시선을 마주칠 때면, 간혹 그 끝도 없이 어두운 삼백안이 대단히 섬뜩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21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 또한, 그저 부모의 보살핌 없이 험하게 자란 탓이려니 여겼을 뿐.
오히려 이상한 것은 당시 성황의 태도였다. 소년을 돌보는 길드원들은 물론이거니와, 저택을 자주 오가는 21호에게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신신당부를 했던 것이다.
-가급적 아이를 사무적으로 대하도록. 쓸데없는 감정을 내비쳐 괜한 주의를 끌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도 절대로, 저 아이와 섣불리 신체 접촉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네. 알겠나?
그때만 해도 21호는 성황의 조바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카이엔은 그저 못 배워먹은 애새끼일 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버릇없이 굴고, 이따금 날 선 기세를 흘리기도 하는 거겠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약속 시간에 호문클루스의 몸으로 들어온 성황이, 일순 심각한 표정이 되더니 카이엔을 불러 호되게 야단치기 시작했다.
“카이엔. 기어이 내 당부를 어겼구나. 왜 그런 짓을 했느냐?”
모두가 의아해했다. 그들이 보기에 소년은 하루 종일 얌전히 일과를 따르는 듯했으니까.
그런데 성황은 이에 그치지 않고, 몸소 회초리를 들어 아이를 매섭게 다그치는 것이 아닌가!
“내 누누이 강조했느니라. 절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이를 어겼으니, 이제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갑작스러운 사태에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더욱 신기한 것은 카이엔의 태도였다. 그는 뭔가를 알고 있는 듯, 성황을 향해 이렇게 항변했던 것이다.
“그냥 좀 입이 심심했을 뿐이야. 난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고! 거기다가 봐봐. 난 그에게 별다른 해를 끼치지는 않았어. 아부지의 말을 어기지 않았단 말이야!”
“해를 끼치지 않았다니, 사람의 머리카락이 죄다 사라졌지 않느냐! 그런데도 내 눈을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느냐?”
“아니, 팔다리가 아니라 머리카락도 문제야? 그거 좀 없어지면 뭐 어때? 살아가는 데 무슨 대수라고?”
그때만 해도 21호는 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성황이 아이를 몇 대인가 체벌하고, 길드원 하나를 황급히 다른 업무로 돌렸을 때만 해도 그랬다.
‘……?’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21호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부서를 이동한 그 길드원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둘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이마가 눈에 띄게 시원해졌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그는 완전한 대머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아니, 팔다리가 아니라 머리카락도 문제야? 그거 좀 없어지면 뭐 어때?
문득 카이엔의 항변을 떠올린 21호는 조용히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가 되어서야, 그는 성황이 왜 그렇게나 사람들을 엄중히 단속했는지 알 수 있었다.
‘…뭔가가 있다! 카이엔에게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보이고, 또 그걸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어쨌거나 이후로도 그런 식의 자잘한 사고는 계속되었다. 아무래도 어린 사내아이다 보니, 아무리 주의를 준다 한들 매사 얌전하게만 지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카이엔은 때때로 또래 아이들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고, 혹은 눈치를 보며 길드원들의 보이지 않는 뭔가를 뜯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성황은 어김없이 매를 들었다. 당연히 그를 향한 카이엔의 반감도 점점 심해져 갔다.
“도대체 아부지가 낮에 있었던 일을 어떻게 모조리 아는 거야? 감시하는 놈들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혹시 그냥 막 넘겨짚는 거 아니야?”
“말했지 않느냐? 카이엔, 내 눈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런데 그 와중에 신기한 점은, 성황이 아이를 엄중히 단속함에도, 그에게 별다른 훈계나 설교를 시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저 아이의 행동에 따르는 피해만을 철저히 따지고,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한 만큼 똑같이 체벌하는 방법을 고수했을 뿐이다.
물론 카이엔의 성질머리가, 이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지만.
“이씨. 왜 때려!”
“지금까지 계속 말해왔지 않느냐. 네 모든 행동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고.”
“하지만 내가 뜯어먹은 건 다른 사람의 손가락이란 말이야! 근데 아부지가 대체 무슨 권리로 날 때리냐고!”
“나는 네 아비다, 카이엔. 너를 제대로 단속할 의무가 있단다. 그렇다고 내가 네 영혼을 똑같이 뜯어낼 수는 없지 않느냐. 진정 그것을 바라더냐?”
그러면 카이엔은 매서운 삼백안에 원망을 가득 담아 성황을 노려보곤 했다.
“우씨! 아부지 따위 평생 만나지 않는 쪽이 좋았어! 당신 정말 최악이라고!”
“글쎄, 어떨까. 내가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는 한, 평생 나를 피해 숨어 지낼 수는 없었을 것이니라. 그러니 이만 포기하고 순순히 말을 듣거라.”
“젠장!”
그런데 21호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아이가 저지르는 사소한 잘못들이, 정말로 그렇게나 고치기가 어려운 것들인가?
카이엔은 또래보다 머리도 비상하거니와, 굳이 타인과 부딪힐 필요 없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한데 왜 잊을 만하면 남에게 시비를 걸고, 괜한 문제를 일으켜서 성황이 매를 들도록 만드는가.
‘…혹여 일부러 폐하의 체벌을 유도하는 건… 설마, 그건 아니겠지?’
아마도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성황의 체벌 방침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그는 점점 카이엔에게 직접 매를 드는 대신, 잘못한 만큼 시간을 매겨 방에 가둬두거나, 아니면 아예 일정 시간 동안 외출 금지를 명하기 시작했다.
21호가 이를 의아해하자, 성황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더니 짧게 답해 주었다.
“카이엔이 스스로를 이용해 내게 복수를 하고 있기 때문이네.”
“…네?”
“아마도 자신이 받는 체벌보다, 내게 입히는 피해가 훨씬 크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 벌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게 벌을 주고 있다 여기는 거네. 그러니 이 방법으로는 절대로 말썽을 멈추려 들지 않을 거야.”
당시에 21호는 성황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참으로 신기하게도, 체벌 대신 방에 갇히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카이엔의 말썽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정말로 폐하에게 벌을 주려 했다고……?’
사실이야 어찌 됐건, 그로부터 한동안은 그들 사이에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다.
그렇다고 카이엔이 성황에 대한 반항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타인을 향한 말썽이 줄어드는 대신, 성황을 겨냥한 직접적인 비난과 반발이 도를 더해갔으니까.
그러다가 이 똑똑한 아이는, 점점 성황을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 감을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불공평해! 지금까지 날 찾지 않은 건 아부지라고! 근데 왜 이제 와서 날 간섭하지 못해 안달인 거야?”
“번번이 일렀느니라. 네 영혼은 이미 임계점에 달해 있다고. 이 이상 죄를 짓거나 포식을 시도하면, 네 영혼이 어찌 될지 나도 더 이상 장담할 수 없느니라.”
“그럼 그건 전부 아부지 탓이잖아!”
“……!”
“내가 영혼을 보는 것도 다 아부지를 닮아서 그런 거잖아! 내 영혼이 이 꼴이 난 것도 전부 아부지 때문이고! 그런데 왜 내가 당신 대신 그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그건 너무 불합리하잖아!”
“…….”
그날 처음으로, 성황은 카이엔을 향해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21호는, 그 순간 기민하게 번뜩이던 새까만 삼백안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카이엔은 서서히 자신의 공격성을 성황을 향해 직접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절대 다른 사람에게 먼저 해를 끼치지 말거라.
성황이 아이에게 제시한 단 하나의 규칙.
하지만 성황이 임하고 있는 호문클루스는 일단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 부자 사이에서 먼저 잘못을 저지른 것은 다름 아닌 성황이었다.
그의 규칙을 벗어나는 단 하나의 대상.
참으로 잔인하게도, 아이는 그 사실을 금세 알아차리고 만 것이다.
* * *
“휴우…….”
“21호 씨. 무슨 일 있습니까? 갑자기 웬 한숨이에요?”
길드의 아세인 지부.
오늘도 카이엔의 저택으로 향하기 전 잠시 그곳에 들렀던 21호는, 멀리서 다가오는 아슬란을 발견하고 반색을 했다.
“오랜만이다, 아슬란. 어떠냐? 요즘 검술 훈련은 잘하고 있고?”
“하하. 글쎄요.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열심히 하고는 있죠.”
아슬란이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곁으로 다가온다.
내년 황궁 기사 시험을 목표로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이 소년은, 알면 알수록 참 착하고 싹싹한 녀석이었다.
첫 만남이 대단히 각별했던 것도 있고 해서, 그다지 붙임성 없는 21호도 어느새 소년에게 조금씩 정을 붙여가는 중이었다.
“그새 키가 많이 자랐구나? 곧 나랑 비슷해지겠어.”
“길드에서 워낙 잘해주시는 덕분이죠. 매일 맛있는 밥을 먹고 있어요.”
“그래. 저스틴 지부장님이 검은 잘 가르쳐 주시고?”
“어, 음…….”
지부장의 이야기가 나오자. 아슬란은 난처한 듯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분은 요즘 지부에 통 붙어있질 않으세요. 아마 많이 바쁘신 모양이죠.”
“그래?”
“하지만 참으로 감사하게도, 저보고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고 해 주셨어요. 그래서 저한테는 스승의 가르침보다는, 혼자서 하는 훈련이 더 중요할 거라 하시더라고요. 천재는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거라나?”
“저런…….”
그래. 그놈의 놈팽이 지부장이 어쩐 일로 순순히 검술 선생을 자처하나 했다.
최근에는 황도의 의상실에도 통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같던데, 대체 그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거지?
“그런데, 저…….”
21호가 인상을 쓰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의 눈치를 살피던 아슬란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바트…….”
“응?”
“아니, 폐하께서는 요즘 어찌 지내시는지…….”
21호가 빤히 바라보자, 이내 말꼬리를 흐린 아슬란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인다.
“그분을 못 뵌 지도 제법 오래 된 거 같아서요.”
“…그래.”
그 사람이 그렇게나 좋은 걸까.’
얼굴을 마주한 건 고작 수일간에 불과할 텐데, 그 사람이 어지간히도 소년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모양이었다.
하긴. 세상 기댈 곳 하나 없는 아이에게 처음으로 생긴 보호자란 것이 어떤 의미가 되는지, 그 누구보다도 21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꼬박꼬박 네 안부를 물으시지. 네 성취에 대해서도 매번 폴라 씨로부터 보고를 받고 계신다 들었다.”
“그, 그래요? 그럼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원하던 대답이었는지, 소년의 얼굴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하게 빛난다. 성황의 사소한 관심에도 진심으로 기뻐하고, 또 이에 보답하고자 하는 모습.
21호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어디의 누군가와는 완전히 다르단 말이지…….’
카이엔이 아니라, 차라리 이 소년이 폐하의 아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래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Chapter 27: Chapter 327
Chapter Text
327. 21호의 나날 (3)
오래전 21호 또한, 안 지 얼마 되지 않는 누군가를 보호자로서 마음속 깊이 따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가 아직 엔리케가 아니라, 아명인 키케로 불리던 무렵. 당시 그는 애스트로스 용병단의 도움으로, 내전의 격전지로부터 대륙 이남으로 급히 몸을 피하던 중이었다.
황무지를 빠르게 가로지르는 여정은, 함께하는 용병들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일. 당연하게도 어린 키케는 매일매일을 죽을힘을 다해 버텨나가야 했다.
한데 설상가상으로 그 생활을 더욱 고달프게 만드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그의 아버지인 베니시오 왕자였다.
-이제는 아들인 너조차 날 그런 눈으로 보는구나! 그래, 내가 형제의 왕좌를 질투하고, 기어이 이 나라를 반으로 갈라놓았다! 그러니 너도 내 꼴이 우스워 보이느냐?
퍼억! 갑자기 날아온 술병을 얻어맞은 키케는, 순간 바닥에 넘어져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런 배은망덕한 자식! 꼴도 보기 싫다! 어서 저리 꺼지지 못해?
베니시오는 매일 술에 찌들어 애꿎은 키케에게 손찌검을 하려 들었다.
가장 믿고 있던 친우를 사지에 제물로 던져야 했고, 끝내 그의 전사 소식을 듣고 말았다. 그때부터 공화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베니시오는, 예전의 총명함을 찾을 수 없이 처절하게 무너져 버리고 만 것이다.
-아, 아버……!
-아니, 아니지. 그냥 여기서 끝을 내자. 더는 비참한 꼴을 보지 않도록, 나와 함께 예서 죽어버리는 게다! 자, 어떠냐?
비록 술에 취해있기는 했지만, 순간 아버지의 눈에 비치는 것은 선연한 살기. 잔뜩 겁을 먹은 키케는, 어지러운 머리를 가누려 애쓰며 휘청휘청 밖으로 도망쳤다.
-이쪽으로 오렴, 엔리케.
그런 키케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던 자가 바로 성황, 당시는 ‘바트’라고 불리던 소년이었다.
-형! 바트 형! 들어봐! 방금 아버지가 날 죽이려고 했어!
-그는 많이 취했을 뿐이다. 절대 진심이 아니야. 자, 상처를 치료해 줄 테니, 오늘부터는 용병단의 모닥불 옆에서 자도록 해라.
바트는 전선에서부터 알게 된 용병이었는데, 오르토나어에 능숙한 데다 치유력까지 가지고 있는 신기한 소년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키케를 전혀 귀찮아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버지 대신 살뜰하게 보살펴 주곤 했다.
매번 자신을 아명 대신 꼬박꼬박 ‘엔리케’라고 불러주는 것도 오직 바트뿐이었다.
‘차라리 바트가 내 진짜 아버지거나, 혹은 형이라면 좋았을 텐데…….’
키케는 매일 밤 그 든든한 보호자 옆에서 모포를 덮고는, 곧잘 그런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다 잠에 빠져들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동 중 잠시 휴식을 취하던 애스트로스 용병단원 하나가 뭔가 신기한 광경을 목격한 것은.
-오, 저 여우 좀 봐! 다 죽어가는데, 용케도 저 꼴을 하고 굴까지 기어 온 모양이야.
-저 상처는… 족제비에게 당한 건가?
용병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키케 역시 호기심을 가지고 작은 토굴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깊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여우가, 비틀거리며 굴속으로 천천히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가엾게도.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눈을 감고 싶었구나…….’
키케가 그렇게 측은한 감상에 젖어 있을 때였다.
켕! 키잉! 킹!
토굴 속에서 갑자기 가냘픈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작은 새끼 여우들의 단말마였다.
-어, 잠깐만! 저거, 저거… 새끼들을 모조리 물어 죽이는 건가?
-쯧. 족제비에게 당한 울분을 새끼에게 푸는 건가. 저래서 짐승들이란!
…뭐라고?
순간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들은 키케의 눈이 충격으로 커다래졌다.
‘다른 데서 다쳐 와서는, 아무 상관 없는 자기 새끼들을 죽인다고?’
울컥.
키케는 가슴 속에서 강한 분노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주변에서 가장 큰 돌을 하나 집어, 이를 악물고 토굴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어쩌면 빈사 상태로 새끼를 물어 죽인 여우가, 얼마 전 자신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술병을 집어 던지던 아버지, 베니시오를 떠오르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더러운 짐승아! 그냥 흙 속에 파묻혀서 그대로 죽어버려라!
퍼억! 후두둑-
충격을 받은 토굴 입구의 흙들이 부스스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화가 가라앉지 않은 키케가, 씩씩거리며 막 두 번째 돌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엔리케.
툭.
바트의 손이 가볍게 그의 어깨를 짚었다.
-나중에 후회할 일은 하지 말거라. 네가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저 어미 여우는 곧 죽을 거란다.
-그래서 뭐? 그게 어쨌다고?
곧 죽을 처지라고 해서, 불쌍하다고 해서 저런 짓이 용서받을 수 있는가?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고, 애꿎은 새끼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게 진정 허용된다는 말인가?
-바트 형! 저런 못된 짐승은 죽어 마땅해! 어미의 자격이 없다고! 절대 편히 죽게 둘 수 없어!
키케가 분개하며 소리쳤다.
한데 그런 그를 내려다보던 바트가, 대답 없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평소 키케가 틀린 대답을 할 때마다, 애석하다는 듯 보여주던 예의 미소.
순간 키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 또 내가 뭔가를 틀렸구나.
-생각해 보렴. 시기를 미루어 짐작하면, 저 여우의 새끼들은 이제 겨우 눈을 뗀 것이 고작일 게다. 당연히 젖을 떼지도 못했을 테지. 이 상황에서 저것들이 어미를 잃게 되면 어찌 될 것 같으냐.
-……!
-그래. 말라 죽을 때까지 어미의 시체 곁에서 울어야 하지 않겠느냐. 혹은 그 소리를 듣고 온 포식자들에게 잔인하게 잡아먹힐 게다. 어쩌면 어미를 공격한 그 족제비가 직접 찾아올지도 모르지.
조곤조곤 이어지는 목소리.
돌멩이를 쥔 손에서 절로 힘이 빠져나갔다.
-그러니 죽어가는 어미가 새끼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어…….
-결국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어미 여우의 처지가 참으로 가엾지 않으냐.
-그런…….
‘그런 생각은 해 보지 않았는데……!’
후두둑.
격해진 감정이 쌓이고 또 쌓여서일까, 갑자기 키케의 눈에서 예고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지금 돌이켜 회상해 보면, 21호는 그때 자신이 정확히 어떤 감정을 느꼈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했다.
그저 굴속의 어미 여우가 불쌍했고, 덩달아 아버지 베니시오의 처지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면 스스로의 고통 속에 깊이 매몰되어, 아들의 괴로움 따위는 조금도 헤아려주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서러움이 섞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던 중.
툭툭, 그저 달래듯 머리를 두드리던 담담한 손길만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늘 그런 식으로 돌아간단다. 그러니 네가 그리 슬퍼할 필요는 없느니라.
* * *
“여! 키케! 요즘 자주 보는구나?”
지부를 나서는데 익숙한 사람 하나가 그의 앞에서 살갑게 손을 흔들었다. 장대한 기골에 어울리지 않는, 한없이 가벼워 펄펄 날아갈 것 같은 행동거지였다.
“…키케가 아니라 21호입니다, 저스틴 지부장님.”
“그래그래, 키케.”
저스틴 애스트로스.
전 애스트로스 용병단의 단장이자, 용병단이 길드로 탈바꿈한 현재는 아세인 지부장을 역임하고 있는 자.
그 역시 성황과 마찬가지로, 21호에게는 제법 오래된 인연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썩 정이 가지는 않는 인간이었지만.
예전에 성황이 고집스럽게 그를 엔리케라고 불렀다면, 저 인간은 또 저 인간대로 장성한 21호에게 꿋꿋하게 아명을 고수하는 중이었다.
그것이 은근히 사람을 애송이 취급 하는 것 같아, 21호는 그를 마주할 때마다 내심 불쾌한 기분이 들곤 했다.
“자주 본다니 도통 영문을 모르겠군요. 저는 지부장님을 몇 달 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만. 듣기로는 요즘 지부에 잘 나오시지도 않는다고 하던데요.”
“뭐? 그건 다들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나는 늘 지부에 붙어 있었단 말이다!”
“하지만 아슬란도 그랬습니다. 지부장님을 뵌 지 제법 됐다고 했습니다만?”
“하하, 그것도 그 애가 몰라서 하는 소리지. 나는 매일 이곳을 오가며 아슬란을 제대로 살피고 있거든? 단지 걔가 날 눈치채지 못하거나, 만난 걸 아예 기억하지 못할 뿐이란 말이야.”
“……?”
만난 걸 기억하지 못해? 이 인간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21호는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렸다.
진지한가 싶으면 갑자기 헛소리를 하고, 또 농담인가 싶으면 대번에 정색을 한다. 어릴 때부터 생각했지만, 저스틴 애스트로스는 좀처럼 속내를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나저나 어떠냐? 요즘은 바트 녀석의 말썽쟁이 아들 때문에 다들 바쁘다며? 어때? 둘이 잘 지내는 듯 보이냐?”
“그랬으면 제가 왜 이 고생을 하겠습니까.”
21호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어찌나 말썽을 부리는지, 저택이 도무지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벌써 담당하는 길드원도 여럿 바뀌었고 말입니다.”
“힘들면 적당히 아세인 지부에 맡겨. 그렇게 옆에서 철통같이 경호할 필요가 있냐? 바트 녀석 성격에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닐 텐데, 왜 네가 자진해서 매번 번거롭게 황도를 오가며 고생하는 거야?”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맡길 수 있습니까? 직접 보고 있지 않으면 오히려 제가 더 불안해서 편히 쉴 수도 없습니다.”
“흠…….”
그러자 저스틴이 눈을 가늘게 뜨며 21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근데 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어째 넌 그 녀석이 ‘바트’가 되는 걸 꽤 좋아하는 것 같아.”
“네?”
“녀석의 호문클루스를 수행할 때마다, 네 얼굴에 유난히 화색이 돈다고. 너 스스로는 그걸 모르겠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21호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호문클루스를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신경 쓸 게 그렇게나 많은데 그 고생을 좋아하다니,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린가!
‘물론 그 사람을 하루빨리 암살해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이 조금 줄어드는 면은 없지 않아.’
어차피 호문클루스는 성황의 본체가 아니니, 애써 그의 목숨을 노려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냥 옆에서 전속 정보원의 본분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 그저 그뿐인 것이다.
“지부장님도 호문클루스의 신체가 얼마나 약한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폐하께서 그런 점을 딱히 신경 쓰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덕분에 옆에서 그분이 하는 꼴을 보고 있기만 해도 조마조마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뭐어?”
“위험하니 인형을 사용하는 것도 작작 하시라고, 지금까지 몇 번이나 주의를 드렸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매번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신단 말입니다.”
그러자 저스틴 애스트로스는 웃음기가 가신 얼굴을 하고는, 대단히 진지한 어조로 물어왔다.
“이봐, 키케야.”
“21호입니다. 지부장님.”
“그래, 키케야. 너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거 아냐?”
“…네?”
“너, 바트 그놈이 정말 약해진 것처럼 보이냐? 잘 망가지는 호문클루스의 몸에 들어와 있고, 또 오러를 제대로 못쓴다고 해서?”
“…….”
“세상에 걱정할 놈이 따로 있지. 야야, 설마 걔가 겉보기에 비실비실하는 것 같으니까, 이번에는 반대로 네가 걜 도와줘야 할 것 같아? 네가 바트의 보호자라도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냐는 말이야!”
21호는 선뜻 그에 대답하지 못했다.
‘보호자라…. 그래, 차라리 정말 그럴 수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21호는 고소를 지었다.
암살자의 길을 걷게 된 이래로, 이렇게까지 무력감을 느낀 적도 없는 까닭이었다.
Chapter 28: Chapter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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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21호의 나날 (4)
저스틴 지부장은 마지막까지도 21호를 끈질기게 잡고 늘어졌다.
-너 같은 놈 백 놈이 한꺼번에 덤벼봐라. 바트가 눈 하나 깜짝하는지! 그러니 이만 마음 푹 놓고, 녀석은 그냥 아세인 지부에 완전히 맡기라고!
물론 21호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설마 그럴 리가 있는가. 자신은 [오베론의 손]에서도 꽤 우수한 축이며, 같은 훈련 기수 중에서는 유일하게 ‘번호’를 받은 인재다.
물론 성황을 우습게 보는 것은 아니지만, 호문클루스의 신체가 가진 한계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하중도 지나치게 적고, 내구는 볼품없다 못해 안쓰러울 지경이다. 덕분에 누군가를 제대로 치려고 하면, 수차례 빙글빙글 회전을 주어야 겨우 쓸 만한 타격감이 생길 정도.
그마저도 상대방이 멍이 들면, 때린 쪽은 뼈에 금이 가는 사태가 벌어지는 거다. 이쯤 되면 아무리 신성력으로 돌려막는 데에도 한계가 있게 마련.
‘무엇보다 감각이 심각하게 둔해지지. 내가 작정하고 숨어들면, 가까이 다가가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할 때가 많아.’
그래서 21호는 확신하고 있었다. 호문클루스에 임한 성황에게는, 자신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의심할 여지 따윈 없다고.
그럼에도 최근 21호가 무력감을 느끼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금 호문클루스가 된 성황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자가, 하필이면 21호가 절대 건드릴 수 없는 그의 친아들이라는 점이었다.
* * *
처음에 카이엔은 성황을 향해 직접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성황 본인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가 아무런 책을 잡지 못한다는 것을 몇 차례 확인한 결과였다.
“아부지를 쓰러뜨리고 나면, 다른 녀석들의 영혼을 조종해서 이곳을 나갈 수 있어!”
카이엔이 휘두르는 무기는 다양했다.
누군가에게서 훔친 검일 때도 있었고, 마당에서 주운 큰 돌멩이일 때도 있었으며, 때로는 작은 식기용 나이프일 때도 있었다.
그렇게 길드원들 몰래 무기를 숨기고, 한창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성황을 공격한다. 그 타이밍이 어찌나 절묘하던지, 간혹 21호조차도 감탄하며 혀를 내두를 정도.
콰당! 챙강!
다행히도 21호나 길드원들이 나서기 전에, 성황은 매번 성공적으로 소년을 제압했다.
“쳇, 아깝다! 거의 다 됐는데!”
“그건 네 착각이니라, 카이엔. 앞으로도 절대 성공할 일은 없을 테니, 이제 그만 포기하는 것이 어떠냐.”
성황은 그때마다 점잖게 타이르곤 했지만, 어린 소년과 비등하게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대단히 미덥지가 못했다.
‘만일 시간이 더욱 경과한다면…….’
21호는 자연스럽게 그런 가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이엔이 훌쩍 자라나 언젠가 호문클루스의 신체 능력을 능가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때까지도 저들 부자의 관계가 조금도 개선되지 않는다면. 과연 그때도 지금처럼 성황을 시해하려는 시도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성황이 더는 아이를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카이엔과 접촉하기도 힘든 다른 이들이 과연 어떻게 그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하루하루 복잡한 상념 속에서 성황을 수행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즈음에 이르러, 성황과 카이엔 그리고 21호의 관계에 약간의 변화가 일었다.
언제부턴가 21호가 카이엔과 빈번하게 시선이 마주친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 계기였다.
‘…뭐지?’
처음에 21호는 긴가민가했다.
성황을 공격하기 전과 후, 유독 소년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지만, 기분 탓이려니 생각했던 것이다.
설마하니 카이엔이 그럴 이유가 조금도 없지 않은가. 자신과는 직접적으로 말을 섞어 본 적도 없는데.
그러나 그것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로건 황자가 릴리움 별동대를 이끌고 위기에 빠진 지그스문트령을 구하러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일 것이다.
어쩐 일인지 성황이 오전 정무회의까지 빠져가며 갑작스레 기도실에 드는 사태가 벌어졌다.
-늘 이곳에 오는 길드의 정보원을 보거든 이리 전하게. 내 한동안은 ‘그 아이’를 보러 가지 못할 것 같다고.
시종장 루이스로부터 그리 전언을 들은 21호는 내심 의아하게 생각했다.
성황의 성격상, 어지간히 급한 사태가 아니면 아이들에 관한 일을 뒤로 미룰 리가 없었다. 특히나 최근 그가 유독 마음을 쓰고 있는 카이엔과의 약속이 아닌가.
‘대체 뭐지? 그 사람의 주위에서는 대관절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심지어 성황은 그로부터 꼬박 하루가 지나도록 기도실에서 나오지 못했다.
초조한 심정으로 황궁을 살피던 21호의 머릿속에, 불현듯 길드장 그레타가 심각한 얼굴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키케. 지금 대륙의 저변에는 뭔가 큰 음모들이 일어나고 있다.
-큰 음모요?
-그래. 이 불합리한 제국의 형태나마 유지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를 거대한 일들이…….
과연 그녀의 걱정은 신빙성이 있는 것이었던가. 만일 그렇다면 그 음모란 것은 무엇이며, 성황은 그에 맞서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불시에 기도실에 드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있는데, 과연 이 모든 것들이 그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 가능한 일들인 것일까.
그리고-
‘이 상황에서 성황을, 그 사람을 암살하려는 것은 어쩌면…….’
실체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며, 21호는 그 한 주를 꼬박 성황의 주위를 맴돌며 보냈다.
자연스럽게도, 그 기간 동안은 21호 역시 카이엔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오롯이 아세인 지부 길드원들에게 소년의 관리를 맡겨둔 채로, 그렇게 어영부영 수일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짧다면 짧은 빈틈.
그러나 머리가 비상한 카이엔이 작은 계략을 꾸미기에는 아마도 충분한 시간이었으리라.
“오랜만이네, 아부지. 그동안 나 꽤 심심했다고.”
수일 만에 다시 호문클루스의 몸에 임한 성황을, 카이엔은 그날따라 유독 반갑게 맞이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구나. 뭐라고 한들 변명이 되겠다만, 그동안 중요한 일로 무척이나 바빴단다.”
“아니.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아부지는 무려 신성 제국의 폐하시잖아? 나 따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텐데, 뭐. 나는 다 이해한다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한 카이엔이, 살갑게 웃으며 성황에게 함께 식탁에 앉기를 권유했다.
“그나저나 아부지. 오랜만에 나와 식사를 하지 않을래? 생각해 보면 이곳에 온 첫날을 제외하고, 한 번도 당신과 같이 뭔가를 먹어본 적이 없는 거 같아.”
“…….”
“가족이잖아, 응? 그렇다고 전처럼 괜히 사람을 앞에 두고 먹는 시늉만 하지는 말고.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날 나 아부지한테 꽤 서운했단 말이야.”
성황은 잠시 카이엔을 빤히 바라보더니, 조금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 태도가 어쩐지 심상치 않아, 21호가 재빨리 길드원들에게 눈짓을 했다.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별일은 없었나?’
‘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저희가 물 샐 틈 없이 잘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21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대단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평소보다 유난히 핏기가 없어 보이는 성황의 얼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빙글빙글 입꼬리를 올리는 와중에도 웃음기가 전혀 없는 카이엔의 새까만 삼백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카이엔.”
눈앞에 놓인 음식들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멈추고 있던 성황이, 이윽고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더 뭐라고 하기도 전에, 카이엔이 재빠르게 그의 말을 잘랐다.
“잠깐만, 그 전에 먼저 내 얘기를 좀 들어 볼래, 아부지?”
“…….”
“아부지가 오지 않는 동안, 나도 혼자서 꽤 여러 가지 생각을 했어. 현재 내가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서. 그리고 이걸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서. 모자라는 지식으로 나름 열심히 궁리했지.”
잠시 말을 끊은 카이엔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꽤나 천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에 아부지가 그랬지? 나는 머릿속 어딘가가 크게 다쳐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당연한 감정들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그러니 보통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들이 보이는 반응을 반복해서 익히는 수밖에 없다고 말이야.”
21호 역시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왜 아이에게 체벌은 하되, 설교를 하지 않는지를 물었을 때였다.
그때 성황은 카이엔이 선천적으로 눈이 멀어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했었지. 그러니 아무리 사람의 감정과 선악에 대해 가르쳐 본들, 소경에게 색깔을 설명하고 구별해 보라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했던가.
“그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어. 내가 보기에 도시에 사는 ‘보통’ 사람들 역시, 행동거지가 조금 얌전할 뿐 근본은 산적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거든. 죄다 생각 없는 멍청이들뿐이었다고.”
“…….”
“그런데 내가 그런 놈들을 관찰하고 따라 해야 한다고? 그게 말이 돼? 그런 게 ‘보통’이고 ‘정상’이라면, 나는 그런 건 조금도 필요 없어! 전혀 의욕이 생길 리가 없잖아? 그래서 생각했지.”
그리고 카이엔은, 성황을 향해 바짝 몸을 당기며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가 누굴 닮아 이럴까? 그야 아부지 아니겠어? 그럼 과연 누구를 따라 하는 게 제일 좋을까? 당연히 아부지겠지!”
“…….”
“내가 보기에 아부지는 다른 멍청이들과는 꽤 다른 사람으로 보였어. 그래서 당신을 흉내 내 봐도 제법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어쨌거나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 난 아부지가 제일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언뜻 듣기에는 호감을 내비치는 듯 보였다. 그러나 21호는 카이엔의 말을 곧이곧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감정을 잘 모르는 소년이 ‘좋다’라고 하는 표현이, 과연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호감’이나 ‘애정’과 동일한 의미일까?
“근데 있잖아? 처음에는 분명 그럴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작정하고 당신을 오래 관찰하다 보니, 꽤나 재미있는 사실들이 눈에 보이는 게 아니겠어?”
차갑게 내려앉은 침묵 사이에서, 카이엔의 밝은 목소리만이 기이한 울림을 가지고 번져나간다.
“대체 아부지는 왜 불안해하면서 매번 날 보러 오는 걸까? 왜 내 행동을 그렇게 통제하지 못해 안달인 걸까? 왜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날 벌주는 일을 고수하려는 걸까? 대체 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서?”
“내 아부지니까? 나에 대한 책임이 있으니까? 날 아들로서 아끼니까? 그런 소리는 할 필요 없어. 어차피 해봤자 이해도 안 되고, 정말 그 말을 믿지도 않으니까.”
“대신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바탕으로, 나만이 할 수 있는 판단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거기까지 말한 카이엔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성황의 눈앞으로 활짝 펼쳐 보였다.
지금껏 험한 생활을 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해 보이는 손이다.
“자, 봐봐. 이 손에는 금이 하나 있어, 아부지. 제롬을 완전히 삼킨 후에 만들어져서, 더는 아물지 않는 커다란 금이지.”
…금?
21호는 카이엔이 하는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마도, 그곳에 분명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엔의 손을 응시하는 성황의 안색이 한층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당신을 계속 관찰하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되더라고. 당신이 무엇을 그렇게 걱정하며, 매번 불안하게 살피는지 말이야.”
성황은 그 손에서 시선을 돌려, 가라앉은 눈으로 카이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이엔.”
“그래 맞아! 난 이 금이 왜 생기는지 깨닫고 말았어! 단지 영혼을 포식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더라고! 내가 당신이 하지 말라는 짓을 하면, 그러니까 그 ‘죄’라는 것을 지으면. 그때도 이 금이 미세하기는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커지는 게 아니겠어?”
“……!”
“그리고 그 속에서 뭔가가 작게 꿈틀거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곤 하는 거야! 그래서 생각했지. 이대로 금이 벌어지게 가만히 내버려 두면, 언젠가 이 속에서 뭔가 엄청난 것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닐까?”
꽈악.
마치 보이지 않는 금을 움켜쥐듯 주먹을 쥐어 보인 카이엔이, 성황의 코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이를 드러냈다.
“어때? 아부지. 내 말이 맞지? 사람의 영혼이란 건, 그냥 겉으로 보이는 한 겹이 다가 아닌 거지?”
“그건…….”
“언젠가 내 영혼이 완전히 망가져서 찢어져 버리면, 그것으로 완전한 끝을 맞이하는 게 아닌 거지? 그 속에는 또 다른 뭔가가 숨을 죽이고 있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거지?”
21호는 지금이라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대화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분위기만으로도 썩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자, 솔직히 말해봐! 당신이 정말로 무서워하는 건 바로 그거잖아? 그것이 언제 튀어나올지 몰라서 불안하고, 그래서 날 자꾸 단속하려 하는 거잖아! 어때? 내 말이 틀려?”
무엇보다도 성황의 얼굴.
여전히 표정이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당장이라도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한 분위기를 휘감고 있는 얼굴.
“폐하……!”
21호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그를 부르려 했을 때였다.
달그락.
천천히 양손에 식기를 쥔 성황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빙빙 이야기를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하거라, 카이엔. 굳이 식사를 하자는 걸 보니, 필시 내게 제안할 것이 있는 게 아니냐?”
“……!”
카이엔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황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곧이어-
“푸하하하하하!”
박장대소하며 뒤로 넘어갔다. 어찌나 신나게 웃었던지, 종국에는 눈꼬리에 찔끔 눈물까지 비칠 정도였다.
“아하하! 볼수록 재미있단 말이야! 정작 나는 내 영혼이 어떻게 되든 별 상관이 없는데, 아부지는 내 영혼을 위해서는 정말로 뭐든 하려 드는구나?”
거기까지 말한 카이엔은, 차분하게 눈을 감으며 자신의 가슴에 한 손을 올렸다.
“그래. 아부지가 진작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했지. 이 금이 커질 때도 있으면, 간혹 조금이나마 줄어들 때도 있다는 걸 말이야.”
“…….”
“아부지가 전에 말한 대로, 나는 내 영혼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는 몰라.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거나 포식하면서 영혼이 엉망으로 망가지는 걸 방치하고 있었지. 하지만 이 금을 보고 있다 보면,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겠더라고.”
천천히 올라가는 눈꺼풀 사이로, 사람 같지 않은 새까만 눈동자가 스산하게 번뜩였다.
“내 영혼은 아마도, 아부지에게 이 모든 것들을 갚아주길 원하는 거겠지? 그러니까 당신에게 조금이나마 화풀이를 했다고 생각하면 이 금이 눈에 띄게 좁아지는 거야.”
달그락.
묘한 푸른빛이 감도는 디저트를 담은 접시 하나가, 카이엔의 손짓과 함께 성황의 앞으로 천천히 밀려왔다.
“그리고 아부지도 그걸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공격할 걸 알아도, 매번 모른 척 내버려 두고 있는 거겠지? 아부지에게 해를 끼치려 마음먹는 것만으로도, 내 영혼이 조금씩이나마 나아간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카이엔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성황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마치 성화 속의 천사처럼 보일 법도 한, 순수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 두 사람 모두를 위한 준비를 한 거야! 자, 아부지! 나와 함께 식사하지 않을래?”
그날, 카이엔은 처음으로 성황에게 독을 먹이는 데 성공했다.
그와 동시에 21호는, 때때로 자신이 느끼던 카이엔의 시선이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음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폐하!”
당황하며 성황을 향해 달려간 21호는, 그런 자신을 대놓고 비웃고 있는 카이엔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Chapter 29: Chapter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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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 21호의 나날 (5)
비록 어린 아들을 방치한 죄가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어떻게 자식이 부모에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는가.
성황은 또 왜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카이엔을 자신의 곁에 두려 하는가.
그리고 성황이 중독되어 피를 토할 때마다, 21호를 향한 카이엔의 비웃음은 왜 점점 더 짙어지고 있는가.
“…젠장!”
시간이 흐를수록 21호는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 되어갔다. 아무리 카이엔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길드원들을 호되게 다그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니까.
부자가 함께 식사를 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고, 그때마다 카이엔은 어김없이 성황의 음식에 독을 섞었다. 도대체 언제, 그리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하고 있는지 당최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마 보통의 방법으로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영혼을 속박하여 부리는 것은 사람의 인식 범위를 아득히 벗어나는 일이니. 알았으면 이제부터라도 불쌍한 길드원들을 괴롭히는 건 그만 두게나.”
방금 죽다 살아난 성황이 점잖게 충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자, 21호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당신이 가장 문제입니다, 당신이! 설령 길드원들은 모르더라도 당신은 빤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매번 독이 섞인 음식을 골라 먹고 식사를 빨리 끝내는 거겠죠. 어디, 제 말이 틀립니까?”
“아니…….”
“먼저 소인의 불경을 용서하십시오, 폐하! 그런데 당신, 지금 미치셨습니까?”
미치셨습니까.
성황이 조금 놀란 눈으로 21호를 바라보았다. 때때로 조심스레 살기를 내비칠지언정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대놓고 선을 넘은 적은 없는 자였던지라.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따끔하게 야단치고 단속하는 것도 모자랄 판에, 독을 타는 족족 고스란히 당해주고 있으면 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지금 저와 장난하십니까? 폐하의 그런 태도가, 카이엔의 방만함을 더 부추기고 있는 걸 왜 모르시는 겁니까?”
“엔리…….”
“그러면서 아무 소용없으니 막으려는 노력도 하지 말라고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요! 대체 폐하께서는 당신을 수행하는 자들을 뭘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진정 아랫것들이 속이 터져 죽는 꼴이 보고 싶으신 겁니까? 예?!”
씨익 씨익.
대륙의 가장 고귀하신 지존에게 생각나는 대로 막말을 쏟아낸 21호는, 그러고도 한동안 분이 풀리지 않아 씨근덕거렸다.
“…….”
성황은 내심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수일간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하느라 퀭해진 21호의 얼굴에 시선이 닿자, 그는 이내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그래. 내가 최근에 사람을 좀 험하게 부리기는 했구나.’
툭.
마치 달래기라도 하듯, 21호의 머리 위로 하얀 빛이 쏟아져 내렸다.
이제 와서 이게 다 뭔가 싶었지만, 우습게도 그의 사기적인 신성력은 제법 효과가 있었다. 몸의 피로가 스르르 풀려나가자, 마치 거짓말처럼 21호의 화가 가라앉기 시작했으니까.
“…이 불경죄들을 다 어찌할까.”
성황의 나직한 목소리를 듣자, 21호의 머릿속이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 맑아졌다. 다음으로 뇌리에서 휘몰아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괴감.
“…….”
다행히도 성황은 그의 무례 따위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 침착한 목소리로 재차 물어왔다.
“그래, 엔리케. 내 자네와 길드원들의 입장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점은 인정한다. 하면 내가 저 아이를 대체 어찌해야 하겠나?”
-차라리 지금 당장이라도 한칼에 베어 버리십시오. 더는 저 미친놈이 죄를 짓지 않도록. 서로를 위해서도 그것이 최선이 아니겠습니까?
21호는 진심으로 성황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화가 날지언정, 자식들에게 그토록 지극한 정성을 쏟는 사람을 향해 차마 그 말만은 할 수가 없었다.
“저는 그저…….”
“이제껏 겪어봤으니 자네도 카이엔의 능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 저 아이를 이대로 밖에 풀어둘 수 없는 내 입장을 이해하리라 생각하네.”
말 그대로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자랑하는 길드원들이다. 그런 이들의 눈을 피해 성황 폐하의 식탁에 버젓이 독을 올리는 것이다.
카이엔이 마음만 먹으면, 이 세상 어디를 가든 거센 평지풍파를 몰고 다니겠지.
“차라리 이곳에 얌전히 붙어 앉아, 개인적인 복수에나 몰두해 주는 것이 참으로 다행한 일 아닌가.”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21호가 다시 울컥 화를 내려는데, 성황이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나도 약간의 기대를 품고 있었네. 어쩌면 이 방법으로 아이의 영혼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야.”
21호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그러나 매번 부자가 이야기하곤 하는 그 ‘영혼의 금’을 말하는 거다.
“폐하.”
“카이엔을 이해해 달라고 하지는 않겠네. 하지만 지금 그 아이의 영혼이 받고 있는 형벌은, 보통 사람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고도 무거운 것이라네.”
그리고 그것은 모두가 나의 잘못임에 틀림이 없지. 그러니 그 아이가 복수하고자 하는 생각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네.
성황은 그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 것 같아. 붕괴가 늦춰지는 것은 확인했지만 겨우 그것이 다더군. 그래서 나도 슬슬 이 놀음을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긴 했다네.”
“…그럼 대체 언제까지 저 장단에 어울려 주실 생각이십니까?”
겨우 진정한 21호가 갈라진 목소리로 묻자, 성황은 슬쩍 시선을 돌리며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글쎄, 언제까지일까. 아마도 자네가 조금만 조바심을 줄이거나, 그 아이에게 화를 덜 내도 좋을 것을.”
“…네?”
* * *
언젠가 성황은 21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카이엔이 스스로를 이용해 내게 복수를 하고 있기 때문이네.
당시는 도통 알 수 없는 소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최근 원치 않게 카이엔과 계속 얼굴을 마주하게 되며, 21호도 서서히 그 미친놈의 독특한 방식을 이해해 가기 시작했다.
카이엔이 독을 준비하는 데 바빠 다른 말썽을 피우지 않자, 자연히 체벌을 줄이게 된 성황은 전보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 보였다. 단순히 성황만을 향한 반감이었다면, 아마도 카이엔은 독을 타는 대신 얼마든지 다른 효율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었겠지.
‘그렇다면 지금 그 미친놈은, 성황을 이용해서 대체 누구에게 복수를 하고 있는 거지?’
어디 그뿐인가.
매번 자신을 향해 강도를 더해가는 노골적인 비웃음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깨달음이 찾아들었다.
…설마, 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심한 비약이잖아? 그놈이 왜 나한테… 그래, 설마. 내가 생각해도 전혀 말이 안 되는데…….”
“혼자서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정신 나갔냐, 21호? 아세인 출장이 잦다 싶긴 했지만, 너 요새 많이 피곤한 모양이구나?”
21호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고 있는데, 서류들을 한아름 들고 들어오던 19호가 핀잔을 주었다.
“시끄럽습니다. 그나저나 그건 다 뭡니까? 요즘 좀 한가하신 것 같더니.”
“아아. 13호 선배의 부탁이야. 로건 황자님과 모레스 황자님이 곧 황도로 돌아오신다지 않나? 오시면 바로 음식점 사업을 하신다고, 번화가에 좋은 자리를 좀 봐 달래.”
“음식점 사업이요?”
21호는 눈을 끔벅거렸다.
갑자기 그건 또 뭔 뜬금없는 소리야?
“그래. 모레스 저하께서 조만간 참연어 전문점을 내신다는군.”
“…참연어 전문점? 그건 뭡니까?”
“나도 몰라. 북쪽에서 값비싼 참연어를 들여와서, 황도에서 헐값에 파는 사업이래.”
“그게 사업입니까? 자선이 아니라? 차라리 길에다 그냥 돈을 흩뿌리는 게 훨씬 실속이 있겠군요. 왜 그런 미친 짓을 벌인답니까?”
“글쎄, 낸들 알겠나? ‘그’ 모레스 황자님이 하는 일인데.”
아아, 그래. 그 모레스 황자.
21호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에야 카이엔이라는 엄청난 민폐덩어리가 굴러들어와 무색해지긴 했지만, 이전까지 성황의 가장 큰 고민거리를 꼽자면 당연 모레스 황자가 으뜸이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지위를 가진 자라도, 자식 농사가 망하는 순간 인생도 망한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되새길 수 있었지.
‘그러고 보면 그 사람도 꽤나 자식 복이 없단 말이야.’
늘 성황의 곁을 지키고 있다 보면 알 수 있었다. 그가 마음 쓰는 것에 비해, 자식들과의 관계는 얼마나 데면데면한지 말이다.
오웬 황자는 가출하여 수년간 돌아오질 않고, 아멜리아 황녀나 로건 황자 역시 깍듯한 태도를 보이긴 해도, 그 사람에게 그리 살갑게 굴지는 않지.
쌍둥이들은 매주 그가 좋아하지도 않는 체스를 두자며 아우성이고, 막내 황녀 역시 은근히 아버지를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그나마 최근에는 모레스 황자와 조금 돈독해 진 느낌이지만…….’
그러면 뭐 하나. 모레스 황자야말로 성황의 뒷골을 짚게 만드는, 사상 유래 없는 사고뭉치가 아니던가.
‘카이엔, 그 미친놈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반면, 그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은 어떠하던가.
성황의 작은 관심에도 상기된 얼굴을 하며 기뻐하던 아슬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그래요? 그럼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그래. 아무래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의 곁에 지금의 자식들이 아니라, 차라리 아슬란 같은 다른 이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비록 그 사람은 내 조국의 원수이자 오르토나의 동포들을 크게 배신한 사람이지만.’
만일 그렇지만 않았다면, 나는…….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던 21호는 이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현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이제 더 이상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며 마음의 위안을 삼던, 어린 시절의 키케가 아니었다.
* * *
21호는 언제까지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카이엔의 저택을 찾았던 날, 이번에는 식탁 가운데 대놓고 놓여있는 검은 병 하나를 발견하고는 마침내 한계에 달하고 말았다.
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이, 대놓고 저걸 마시라고 둔단 말인가?
“당장 저것을 치워!”
길드원들에게 명령한 21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카이엔을 노려보았다.
“카이엔 님,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겁니까?”
“뭐? 하하.”
그러자 카이엔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네놈은 왜 괜히 시비야? 어차피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아는데. 힘들여서 저걸 음식에 숨길 필요가 있어?”
“…뭐라고요?”
“아니, 우리 아부지가 괜찮다는데, 왜 일개 부하인 네놈이 큰소리야? 감히 분수도 모르고 내 것을 탐내고 기어오르더니, 너 드디어 정신이 완전히 나간 거냐?”
“……!”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이 미친 꼴을 계속해서 보고 있을 수는 없어! 지금 당장이라도 폐하와 담판을 짓지 않으면!
그렇게 결심한 21호는 황급히 호문클루스가 놓여있는 내실을 향해 달렸다. 때마침 그곳에서는 막 호문클루스에 임한 성황이, 부스럭부스럭 불편한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폐하! 드디어 독물이 대놓고 식탁에 오르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대체 언제까지 저 짓거리를 내버려 두실 겁니까?”
콰앙!
거세게 문을 열며 소리를 지르니, 성황이 조금 당황하며 21호를 올려다보았다.
“…또 무슨 일이 있었나?”
“네!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겠습니까? 당신의 아들이 이번에는 아예 숨기지도 않고, 독병을 통째로 식탁에 올려뒀습니다!”
“아, 그렇군. 난 또 뭐라고.”
…뭐요?
순간 21호는 머릿속에서 뭔가가 핑 하고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작작 좀 하십쇼! 이제 그만 좀 하시란 말입니다! 지금 이런다고 당신이 가진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덜어집니까?”
“알았네. 잘 알았으니 이제 진정하게.”
성황이 손을 휘휘 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향해 걸어간다. 기어이 그대로 독이 놓인 식탁에 앉을 생각인 거다.
이 작자가 진짜!
“제발 작작 좀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꽈악.
21호는 급한 마음에 막 문고리를 돌리려던 성황의 팔을 붙잡았다.
“……?”
그리고 그가 채 몸을 돌리기도 전에, 연이어 다른 팔을 그의 어깨 위로 돌려 감고는, 두 팔을 교차하여 손목을 뒤로 꺾어 걸었다. 급히 이동을 막으려다 보니 얼떨결에 튀어나온 관절기였다.
갑자기 행동을 제지당한 성황은 대단히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이 어설픈 기술은.”
그의 말대로 급하다 보니 조금 어중간하게 걸린 기술. 하지만 21호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상대는 호문클루스였다. 절대 완력으로 이 기술을 비틀어 빠져나갈 수 없다.
“기억하십니까? 이건 당신이 어릴 때 직접 가르쳐 준 기술입니다. 여기 한번 걸리면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
한데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뚜두둑.
뭔가 섬뜩한 파열음이 들려오고, 그것을 채 인식하기도 전에 팔이 지지대를 잃고 휘청 아래로 떨어진다.
상대의 어깨를 힘껏 내리누르던 힘이 고스란히 되돌아오며, 어느새 21호는 훌쩍 허공을 날고 있었다. 바닥과 천장이 순식간에 뒤바뀐다.
콰당!
“…컥!”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등에서 격통이 일었다.
통증을 참으며 겨우 눈을 뜨자, 거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한 성황이 한쪽 어깨를 툭툭 털고 있었다.
“그저 제 좋을 대로만 기억하는구나, 엔리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의 관절이 정상일 때라고, 내 누누이 이르지 않았더냐.”
“……!”
21호는 반대 방향으로 꺾여 너덜거리는 성황의 팔꿈치를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미친! 관절을 통째로?’
보통 사람의 관절이 힘을 준다고 저렇게 쉽게 꺾일 리가 없다. 말 그대로 내구가 약한 호문클루스이기에 가능한 재주인 거다!
‘잘 망가지는 신체조차 이용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되다니…….’
불현듯 자신의 향해 떽떽거리던 저스틴 지부장이 떠올랐다.
-너 같은 놈 백 놈이 한꺼번에 덤벼봐라. 바트가 눈 하나 깜짝하는지!
그때는 실없는 지부장의 헛소리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런 갑작스러운 자괴감이 21호의 머릿속을 사정없이 집어삼켰다.
자신은 결국 이 정도였단 말인가.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암살자가 되어, 강해지기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도?
그런데도 저 사람이 가장 약할 때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건가?
“너는 아직도 어설프구나, 엔리케.”
스르륵.
금세 제자리를 찾은 관절을 슬슬 돌리며 성황이 말하자, 21호는 얼얼한 등을 문지르며 그를 한껏 쏘아보았다.
“하지만 폐하. 만약 본신이셨다면 빠져나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자 성황의 얼굴에 옅게나마 한심하다는 빛이 어린다.
“만일 내 본신이었다면, 네가 기술을 걸 기회조차 있었을 성싶더냐? 어림없는 소리.”
“…….”
“그나저나 갈수록 가관이구나. 대체 이 많은 불경죄들을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
젠장, 전들 알겠습니까.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데, 성황이 21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엔리케.”
“21호입니다, 폐하.”
절대로 자신을 그렇게 부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 고집은 어느새 관성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성황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결국은 이리되는구나. 그러니 처음부터 그 아이를 사무적으로 대하라 주의를 주지 않았더냐? 네 적의가 그리도 고스란히 느껴지는데, 어찌 카이엔이 거기에 흥미를 가지지 않고 배길까.”
…흥미?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하고 있는데, 성황이 작게 한숨을 쉬며 21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강한 신성력이 흘러들어오며, 등의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져간다.
“알겠나? 저 아이는 지금 자신이 받은 것을 자네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주려 하는 걸세.”
“……!”
21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혹여 카이엔의 모든 행동들이 자신을 겨냥한 것은 아닐까. 그간 긴가민가하던, 그 불길한 예감이 기어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Chapter 30: Chapter 330
Chapter Text
330. 21호의 나날 (6)
“이건 자네의 탓은 아니네. 어디까지나 카이엔의 말썽을 경계하고 단속했을 뿐인 것을, 멋대로 자신을 향한 적의라 단정 지은 그 아이의 문제이지.”
성황이 위로하듯 덧붙였지만, 21호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자신의 존재가 필요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오히려 카이엔의 칼날을 성황을 향해 돌리는 구실이 되었다니.
“저는… 그럼 저는 어떻게…….”
“이곳의 일은 아세인 지부에 맡기고, 자네는 지금이라도 황도로 돌아가게.”
“……!”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저 미친 자식과 성황을 단둘이 남겨 둔다고?!
21호는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내심은,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결국 카이엔을 어찌할 수는 없으니, 그가 말썽을 피우는 원인이 사라지는 것이 옳으리라.
체벌이 줄어들자 말썽도 줄어들었듯, 그렇게 자신의 아버지에게 독을 먹이는 일이 자연히 줄어들기를 바라면서.
“폐하, 저는…….”
그럼에도 21호가 망설이자. 그런 그를 잠시 내려다보던 성황이 말투를 바꾸어 나직하게 명령했다.
“엔리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은 네 탓이 아니며 네가 걱정할 일도 아니다. 그러니 이만 황도로 돌아가거라.”
성황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21호가 정식으로 암살자 일을 시작한 후, 처음에는 그를 다른 길드원들과 마찬가지로 대하는 듯 보였지.
그러나 때때로 방심하거나 급한 일이 생길 때면, 대번에 어린 시절 키케를 어르고 타이르던 때의 말투가 튀어나왔다.
처음에는 워낙 함께 한 시간이 길어서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뼈저리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성황에게 있어 21호는 어엿한 정보원이 아닌, 여전히 돌봐줘야 할 애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21호는 완전히 체념했다.
“명을 따르죠. 황도로 돌아가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나 폐하, 이대로라면 당신은…….”
몸을 일으키고도 차마 발을 떼지 못하는 21호를 향해, 성황이 안심시키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카이엔의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너도 짐작하고 있지 않느냐? 결국 이 끝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
“내가 끝내 카이엔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면, 적어도 저 아이를 위해 아비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겠지. 그럴 각오는 되어 있느니라.”
21호의 눈이 잘게 떨렸다.
사실 이 저택에 올 때마다, 그는 매번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당신을 괴롭히는 저 미친놈을 당장이라도 베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카이엔이 느꼈다는 적의의 정체는 그것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막상 성황의 입에서 기다리던 말이 튀어나오자, 그 참담함의 무게에 짓눌려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았다.
“폐하. 그것은…….”
일그러진 얼굴로 말을 더듬는 21호를 향해, 성황이 미약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예전에 어린 키케가 틀린 답을 했을 때, 그가 늘 보여주던 위태로운 미소를 닮은 표정이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인 것을. 세상의 인과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흘러가곤 한단다. 그러니 네가 저 아이의 미래를 그리 슬퍼할 필요는 없느니라.”
* * *
21호가 그렇게 떠난 후.
어딘지 멍한 눈빛을 하고 있는 길드원들에게 둘러싸여, 부자는 조용히 식사 시간을 가졌다.
성황은 식기를 건드리지도 않고 그저 자리를 지켰을 뿐이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카이엔은 더는 그에게 식사를 종용하지 않았다.
“결국 그놈은 그렇게 가 버렸네? 생각보다 오래 버티지 못했잖아? 재미없게…….”
어딘가 후련한 표정으로 소년이 입을 열자, 성황이 엄하게 주의를 준다.
“카이엔. 음식을 입에 넣고 말하는 것은 큰 결례가 된다.”
“어, 음. 알았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카이엔이 열심히 음식물을 씹어 삼켰다.
우물우물, 꿀꺽.
“…그렇게까지 그를 몰아세울 필요가 있었더냐?”
이윽고 소년의 입이 완전히 비워지길 기다린 성황이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카이엔은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불쾌한 듯 성황을 쏘아보았다.
“당연하지! 그 자식은 정말 건방져. 왜 하필이면 나 같은 게 아부지의 아들인지 모르겠다고, 맨날 날 보며 투덜거렸단 말이야!”
“…….”
설마 엔리케가 대놓고 그런 욕을 했을 리는 없었다. 단지 카이엔은 타인의 영혼이 내는 목소리를 쉽게 잡아내기에, 자신도 모르는 속내를 들키고 말았을 뿐이겠지.
“어디 그뿐이야? 내가 아부지를 괴롭히기 시작하니까, 그때부터는 날 잡아먹지 못해 그렇게 안달이었다고! 정신 나간 거 아냐? 아부지는 내 꺼지, 그놈 것은 아니잖아?!”
“내 신변을 지키는 것이 그의 임무이기에 그런 것이다.”
“뭐어? 웃기지 마! 그 자식의 영혼이 아부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제대로 알기나 해?”
그렇게 소리친 카이엔은, 다시 생각해도 기분 나쁜지 대놓고 입을 삐죽거렸다.
“게다가 그 자식은 어쩐지 아슬란 놈을 닮았어! 예전 화전촌에서 사사건건 날 방해하던 그 성가신 놈 말이야.”
“…….”
“뻔질나게 들락거리면서 저택 여기저기를 휘저어 놓는다고! 거기다 실력은 또 쓸데없이 좋아서, 영혼을 건드리기도 쉽지 않고 말이지. 물론 내가 그럴 때마다 아부지가 나서서 막은 탓도 있지만…….”
거기까지 말하던 카이엔은, 새삼 뭔가를 깨달은 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아부지가 유난히 옆에 끼고 도는 것도 어쩐지 아슬란이랑 비슷한 것 같고…….”
“…….”
“역시 그 자식 맘에 안 들어! 그냥 곱게 돌려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성황은 별다른 대꾸 없이 식탁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바로 자신의 앞에 버젓이 놓인 검은 독약 병을.
엔리케가 당장 치우라고 명령했지만, 그가 사라지자마자 고스란히 식탁 위로 되돌아와 있었다. 이미 저택 내 길드원들 대부분이 카이엔의 명을 따르게 되었다는 증거다.
“그쯤 했으면 됐다. 아마도 큰 상처가 되었을 테니, 이제 그에 대해서는 그만 잊어버리는 것이 어떠냐.”
그러자, 피식-
입가심으로 음료를 들이켜던 카이엔이 비소를 흘렸다.
“잠깐만? 상처라니. 아부지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그놈 앞에서 순순히 내가 주는 독을 먹은 건 아부지잖아?”
“…….”
“아니, 아니지. 그 자식을 이곳에서 완전히 빼돌릴 구실이 필요했던 건가?”
그렇게 중얼거린 카이엔은, 가만히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어려워. 아부지는 참 알 것 같으면서도 어렵단 말이지. 뭔가를 할 때마다 목적이 한 가지가 아니라서, 나도 종종 헷갈린단 말이야.”
“아부지의 영혼은 분명 내게 속죄하고 싶다고 해. 그리고 내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영혼은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으니까, 단지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동시에 그 건방진 놈을 지키려고도 하는구나? 내가 빨리 흥미를 잃도록 일부러 놈을 괴롭히는데 기꺼이 동참한 거야. 그리고 적당한 시기가 됐다고 판단하자마자 놈을 저 멀리 빼돌려 버린 거지. 어때? 내 말이 틀려?”
성황은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피차 마찬가지였으니까.
카이엔 역시 뭔가를 할 때마다 여러 가지 목적을 단번에 관철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소년은 성황을 몹시도 괴롭히고 싶어 했고, 그가 식사를, 무엇보다도 독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동시에 엔리케를 못살게 굴어 저 멀리 내쫓아버리기를 바랐지.
엔리케가 싫은 것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길드원들을 제 입맛대로 굴리는 데 방해가 된 탓이 컸을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표현 방식만이 다를 뿐, 이들 부자의 사고방식은 결국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달그락.
성황은 한 손으로 검은 병을 집어 들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가 이 자리에 있고 없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이는구나. 우리에게 남아있는 ‘문제’는 여전하고, 그 ‘치료’ 역시 임시방편이기는 하나 효과가 있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지.”
“그럼 어쩌겠느냐? 오늘 먹어야 할 것은 이것이 다인 게냐?”
그러자 카이엔은 조금 뜸을 들이더니, 이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뭐, 오늘은 됐어. 어째 그 자식이 사라지고 나니 별로 내키지는 않네? 아부지도 전처럼 슬퍼하지는 않는 거 같아서 이제는 재미없어.”
“…….”
“어차피 내가 먹어달라고 하면, 아부지는 언제든 그렇게 해 줄 거잖아. 그렇지?”
그렇게 물어온 카이엔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사람 사이의 정을 모르는 아이의 웃음이 그리도 살가워 보이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래. 아부지는 나한테 그렇게 해 줘야지. 나에게서 하나뿐인 엄마, 마르타를 뺏어갔잖아?”
“그 여인의 영혼은 무사히 안식에 들었다. 내가 빼앗은 것이 아니란다. 이제는 누구도 그녀의 영혼을 가지거나, 휴식을 방해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다.”
“…뭐야, 그게?”
카이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식?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적어도 그녀의 영혼에게는 큰 의미가 있지.”
“말도 안 돼! 마르타는 내 엄마지, 아부지의 엄마가 아니야. 그녀는 죽어서 완전한 내 것이 되어야 했다고! 그런데 왜 아부지 멋대로 그녀의 영혼을 처분하는 거야? 아부지는 그럴 권리가 없어!”
누군가의 영혼을 소유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설교하는 대신, 성황은 씨근덕거리는 아이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그래. 오늘은 독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구나. 그럼 이제 내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카이엔은 새까만 삼백안으로 가만히 성황을 쏘아보더니, 못이기는 척 대답을 내뱉었다.
“오늘은 그냥 체스나 두다가 가든지.”
“체스라. 일전에는 그다지 재미없다고 하지 않았더냐?”
“음. 그건 그런데…….”
말끝을 흐린 카이엔이, 곧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성미 고약한 미소를 흘렸다.
“아부지의 영혼이 질색하는 모습을 보는 건 꽤 재미있어서 말이야. 게임의 승패를 떠나, 게임을 한다는 사실 자체로도 이미 내가 이긴 거나 다름없지 않겠어?”
“…….”
* * *
황궁의 집무실.
정오가 되어, 언제나처럼 다과를 준비하려던 수석 시종장은 갑작스러운 성황의 제지를 받았다.
“기다리게, 루이스.”
“예, 폐하.”
“…….”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며, 성황은 잠시 침묵했다.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는 자신을 위해, 매일같이 온 힘을 다해 최상의 멜보른을 올리는 자다. 그 정성이 갸륵하여 어지간해서는 외면하지 않으려 했으나.
‘역시 내키지 않는군.’
솔직히 말하면 최근에는 음료든 음식이든, 입에 들어가는 것은 그 무엇이 되었든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쳐다보기만 해도 코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그리 말하려 했다.
“루이스, 당분간 차는…….”
멀리서 쏜살같이 달려오는, 익숙한 기척을 느끼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아아, 그러고 보니, 저 아이는 멜보른을 꽤나 좋아했던가.
“아니, 잊어버리게. 오늘은 차를 한 잔 더 준비해 주겠나?”
“예.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그렇게 루이스가 집무실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다다다다!
아니나 다를까, 달리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누군가가 집무실을 향해 다가온다. 언제나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는 그의 철부지 아들이었다.
“아버지!”
벌컥!
자신만만하게 문을 열어젖힌 아이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상자 하나를 들이밀며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왔다.
“이것 좀 보십시오! 이게 뭔지 아십니까?”
힐긋 내려다보니, 고급스럽게 포장된 작은 식기가 눈에 들어온다.
“꼭 도시락처럼 보이는구나.”
“네, 맞습니다. 오늘 드디어 황도에 참연어 전문점이 개점했거든요! 무려 베르트란 & 리의 역사적인 첫 사업입니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런 기획안이 있었지.
아무래도 수익성이 없어 진행에 어려움이 크리라 예상했건만. 내키는 일에만 추진력이 뛰어난 이 아이가, 기어이 참연어 유통 경로를 뚫어낸 모양이었다.
“그래, 장하구나. 고생했다.”
“하하, 별말씀을요. 근데 그거 아십니까? 벌써부터 우리 식당이 황도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예약 손님이 줄에 줄을 선다고요! 물론 며칠 전부터 대대적으로 광고 현수막을 쫙 깔아 놓은 덕이지만요!”
이어진 아들의 설명은 대략 이러했다.
-최첨단 저온 마차가 주는 신선함을 만끽하세요. 오르토나 현지인도 인정한 싱싱한 참연어! 성황 폐하께서도 극찬하신 바로 그 맛! 요리가 친절하고, 종업원이 맛있어요!
아이가 주억거리는 광고 문구들을 듣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맛을 극찬했다는 그 ‘성황 폐하’께서는 아직 시식하기도 전이 아닌가.
그 점을 지적했더니, 아들은 태평하게 웃으며 손수 도시락의 포장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개점하자마자 제일 먼저 아버지 것을 포장해 왔습니다. 아직 식사 전이시죠?”
“…….”
“자, 어서 한번 드셔 보세요.”
이내 작은 상자 안에 정갈하게 놓인 참연어 스테이크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성황은 마음 편히 그것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뭔가를 먹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구역감이 밀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아들놈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저 천진한 기대감을, 자신의 변변찮은 사정으로 무참히 박살 낼 수는 없지 않은가.
아이가 조금의 구역감도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며, 성황은 천천히 참연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
그와 동시에 요리에 남은 온갖 잔류 상념들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제국에서 참연어를 사준다고? 키프로스 놈들처럼 가격을 후려치치도 않고?
-그래. 조국의 원수면 어떤가? 어쨌든 이것으로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다면, 참연어든 뭐든 팔지 않을 이유가 없지.
-메에에! 그만 돌아옵메에에! 어서 합체를 풀지 않으면 내용물이 죄다 흐트러진단 말입메메메!
한데 그 정신없는 상념들 어디에서도, 그가 이제껏 음식을 통해 받아왔던 진득한 살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가장 싱싱하고 좋은 부위로 줘! 지금 바로 황궁에 가져갈 거야!
-이걸 어떻게 요리할까요, 저하?
-자네가 제일 자신 있는 메뉴가 뭐지? 우선 기본적이면서도 맛있는 간판 메뉴부터 시작하자고!
놀랍게도 요리하는 과정에서 전해져오는 여러 상념들에서도, 지독한 피비린내를 연상시키는 것은 조금도 없었다.
-드디어 이날이 오는구나! 한때는 포기해야 하나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리고 아들이 이것을 집무실까지 들고 오며 느꼈던 감정은, 오로지 커다란 기쁨과 성취감, 그것뿐이었다.
그런 여러 가지 상념에서 겨우 헤어 나오자, 입안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저 바삭하게 구워진 겉면과 부드럽게 씹히는 고소한 속살 뿐.
구역감 따위는 없었다.
“…맛있구나.”
절로 흘러나온 그의 말에, 아들놈이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게 아버지 입맛에 딱 맞을 줄 알았다니까요!”
“그래.”
놀라울 정도로 입에 잘 맞았다. 아주 오래 전, 그가 자유롭게 대륙 각지를 떠돌며 맛보았던 음식들처럼.
그렇게 묘한 감동에 젖어 또 다른 한 점을 음미하고 있자니, 아들놈이 직접 소스를 덜어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내일은 더 대단한 걸 들고 올 테니까요! 무려 키프로스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참연어 요리 전문가를 초빙했거든요?”
곧이어 갖은 구이와 조림, 그리고 훈제 필렛으로 할 수 있는 온갖 요리들이 아들의 입에서 줄줄이 흘러나왔다. 한때 참연어 좀 먹어봤다 자부하는 성황조차도, 그 다양한 메뉴에 어질어질해질 정도.
한데 그렇게 한참을 조잘조잘 자랑하던 아들놈이, 잘난 척하며 엄청난 소리를 내뱉는 게 아닌가!
“하하, 어쨌거나 이제 아버지도 맛을 한번 보셨으니, 발레리 경도 더는 잔소리를 못하겠죠?”
“…발레리 경.”
“네. 마물 전담반의 그 날라리 인퀴지터 말입니다. 글쎄 신의 대리자이신 성황 폐하를 가지고, 사실이 아닌 광고를 하는 것도 ‘배교’이자 ‘신성모독’이라면서 어찌나 떽떽거렸는지 말입니다. 하루 종일 시끄러워서 죽는 줄 알았지 뭡니까?”
“……!”
“그놈의 입을 막느라 참연어 한 조각을 처넣어 주고 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재료가 아까워서요. 제대로 1인분 값은 받아야겠습니다.”
성황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발레리 경이라니, 당장 종교 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무려 ‘신의 대리자’의 말씀을 멋대로 날조한 것이다. 이단재판부의 숨은 실세 앞에서 잘도 그런 짓을 했구나, 아들아!
Chapter 31: Chapter 331
Chapter Text
331. 살롱 (1)
늦은 밤이었다.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아 하릴없이 책 하나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길드원 하나가 조심스레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카이엔 님, 말씀하신 야식을 가져왔습니다.”
“응.”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길드원은, 요깃거리가 담긴 쟁반을 슬그머니 옆에 놓고는 소년의 눈치를 보았다.
“…그럼 이곳에 두겠습니다, 카이엔 님.”
“알았어. 어서 가 봐.”
카이엔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길드원은 부리나케 방에서 도망쳐 나갔다. 영혼을 일부 간섭당한 후, 카이엔으로부터 본능적인 껄끄러움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달칵.
황급히 방문이 닫히자, 카이엔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길드원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너무 어중간한 상태가 됐어. 차라리 로드리고처럼 영혼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카이엔은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저택 전체를 장악했지만, 그럼에도 길드원들의 영혼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황이 저택을 오가는 모든 이들의 영혼에 뭔가 보호 장막 같은 것을 씌워놓은 까닭이다.
설령 장막의 방해를 피해 겨우 영혼을 뜯어내는 데 성공하더라도, 결손이 눈에 띄게 커지는 순간 대번에 인원이 교체됨과 동시에 외출 금지령이 떨어졌다.
그 탓에 카이엔은 영혼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소량씩 야금야금 뜯어먹느라 꽤나 진을 빼야 했다.
‘그래봤자 아부지도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 간섭은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걸 보면, 아마도 길드원들에게 크게 해가 가지는 않는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새로운 인원을 투입해 봐야, 카이엔에게 영혼을 뜯어 먹히는 것은 피차일반.
그러니 답답함을 느낀 소년이 본격적으로 영혼 지배를 시도하는 것보다는, 어설프게나마 숨통을 틔워주며 균형을 유지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 거겠지.
‘아니면 아부지가 일부러 그렇게 유도한 건가? 영혼들을 상하지 않게 간섭하려니, 완전히 지배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까다롭잖아…….’
어쨌거나 현재 카이엔의 한계는 명확했다. 길드원들의 인식을 잠시 저해시키거나, 간단한 명령을 수행한 후 잊어버리게 만드는 정도가 다였지.
성황의 식사에 몰래 독을 올리는 장난이야 가능하겠지만, 마음먹고 그들을 피해 멀리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풀어주는 척하면서 이런 식으로 날 옭아매다니, 참 방심할 수 없는 양반이라니까.’
현재 카이엔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영혼이라고는 단 하나. 바로 화전촌에서부터 조종하고 있던 로드리고였다.
그는 제법 복잡한 뒷사정을 가진 자였는데, 요약해보자면 ‘오르토나 난민 출신으로, 조국이 망한 뒤 카르타고 공국에 투신해, 수년간 특수 세작 훈련을 받고, 다시 몰래 화전촌으로 숨어들어, 플란도르 왕국 측 세작들과 내통하는 이중 스파이’ 정도가 될까.
물론 일찌감치 카이엔의 눈에 드는 바람에 그의 수족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어쨌든, 세작 출신의 하수인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아세인의 흑시에 잠입해서 희귀한 독물들을 구한 것도 바로 그였으니까.
그래서 여차하면 성황으로부터 벗어날 때 최후의 카드로 쓸 생각이었지만…….
‘일전에 아부지가 직접 흑시를 들먹인 걸 보면, 이미 로드리고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거야.’
하면, 왜 그를 그냥 내버려 두는 걸까.
카이엔은 성황의 생각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저 최근에는 카이엔이 ‘자유롭다’고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최소한의 사회규범을 준수하면, 행동을 크게 구속하지는 않겠다는 건가?’
카이엔이 생각하기에는, 참으로 번거롭고도 쓸데없는 짓들이었다.
‘아부지는 정말 볼수록 복잡한 인간이야. 도통 행동 원리를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어쨌거나 현재 상태에 대해 딱히 불만은 없었기에, 카이엔은 한동안 이 위태로운 균형 관계를 유지해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내일은 아부지가 오는 날이지. 그럼 오늘은 이만 잘까? 또 아부지랑 이것저것 하면서 놀아야 하니까.’
타악-
책을 덮고 침대에 드러눕자,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 하나가 데구루루 굴러 나왔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깨끗한 빛을 반사하는 보석. 얼마 전, 성황이 카이엔에게 직접 건넨 물건이었다.
-부디 잘 보관하거라. 이것은 내가 만들 수 있는 마지막 이정표이며, 네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될 것이다.
보통 범상한 물건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당부하던 성황의 영혼이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을 지은 걸 보면.
어쨌거나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이 제법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평소 장신구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는 카이엔도 꼬박꼬박 목에 걸고 다니는 중이었다.
냠냠.
카이엔은 눈을 감기 전에 습관처럼 보석을 입에 물었다.
처음 그것을 보자마자 대번에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그래서 받자마자 성황의 앞에서 보석을 씹었더니, 그가 대단히 충격받은 얼굴을 했었지.
-왜 그것까지 먹으려 드는 게냐? 내가 미처 보살피지 못한 탓에, 어린 시절을 그렇게 굶주리며 지낸 것이더냐?
그때 아부지의 반응이 정말 웃겼단 말이야.
‘그나저나 이 보석은 대체 뭘까? 그냥 돌은 아닌 거 같고. 물고 있다 보면 뭔가 향긋한 느낌이 들어서, 제법 씹는 맛이 있단 말이지…….’
그렇게 입을 우물거리다가, 스르륵 선잠이 들려는 차였다.
[…너 이 새끼, 앞으로 처신 똑바로 해라. 내가 두고 본다…….]
문득 귓가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싹.
화들짝 놀란 카이엔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누군가의 영혼이 접근해 말을 걸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막상 방 안을 둘러보니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열린 창으로부터 내리쬐는 밝은 달빛이, 침상 위로 하얗게 부서져 내릴 뿐.
‘…뭐지? 분명 영혼의 목소리였는데?’
절대 착각일 리가 없었다. 찰나의 순간이긴 했지만, 그 경고가 내포하는 위압감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설 정도였으니.
꿀꺽.
잔뜩 긴장한 카이엔은, 침구를 머리 위로 뒤집어쓰며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미지의 존재로부터 비롯된 공포.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쉽게 좌지우지하는 소년에게 조금은 생소한 감각이었다.
‘뭐야? 대체 누구야?’
덕분에 그날, 카이엔은 밤새 주변을 경계하느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짹짹. 짹짹.
늘 같은 시각에 우는 새소리를 들으며, 성진은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렸다.
그러고도 바로 잠이 깨지 않는 바람에, 그는 한참을 침상에 누워서 눈을 비비적거렸다. 평소 성진답지 않은 일이었다.
‘뭐지? 이상하게 몸이 피곤해…….’
요즘은 게임도 안 하고 푹 자고 있는데, 왜 이리 온몸이 찌뿌둥하지?
[뭔가 나쁜 꿈이라도 꿨냐? 어제는 유난히 잠꼬대가 험악하더라.]
그때 마왕의 영혼이 기지개를 켜며 물어왔다.
‘그래?’
[응. 최근에는 다른 규상 세계에 놀러가느라 그런 건지, 한동안 전혀 잠꼬대를 안 했거든? 근데 어제는 너 진짜 살벌했다고.]
어, 그렇군. 악몽을 꿨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전혀 기억에 없으니 크게 상관없지 않을까?
겨우 부스럭부스럭 몸을 일으킨 성진이 하품을 하며 생각했다.
‘그나저나 오늘도 연무장에 로건이 찾아오려나? 그 녀석이 오면 신성력이나 시원하게 한판 쏘라고 해야겠다.’
[얼씨구? 이제는 사람을 아예 자동 안마기 취급 하네?]
효용을 생각하면 크게 다를 것도 없지. 그런데 이놈의 마왕이 자동 안마기는 또 어떻게 안담?
그렇게 일어나서 슬슬 몸을 풀고 있자니, 붕붕붕- 마왕 놈이 머릿속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정신 사나워.’
[잠깐만 참아 봐. 나 지금 24면체 모서리 돌기 중이야.]
‘…아직도 그 놀이를 해?’
[이건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고! 몇 번 해 보니까, 영혼이 가뿐해지고 막막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더라니까?]
‘어, 그러냐?’
대충 대꾸하며 아침 수련을 준비하는데, 마왕 놈이 뿌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너도 매일 아침 수련을 하잖아? 그러니까 나도 이제부터는 너처럼 꾸준히 아침 운동 하려고.]
‘그게 너한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생활 습관으로 만들겠다는 거지. 운동은 시작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게 힘들다고들 하잖아? 그러니 나도 이걸 완전히 습관으로 만들어서 앞으로도 계속 영혼의 건강을 유지할 거야!]
성진은 혀를 찼다.
영혼이 근육도 아니고, 이게 뭔 개소리람.
그렇게 아침 수련이 끝날쯤, 정말로 로건이 연무장으로 찾아왔다.
성진은 당연한 듯 그와 마물 전담반으로 향했다. 물론 그 전에 신성력을 한차례 나눠 받는 것도 잊지 않았지.
“어, 시원하다.”
찌뿌둥하던 어깨를 돌리며 작게 앓는 소리를 냈더니, 로건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노인네 같은 소리야, 이성진?”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이라니까.”
너처럼 팔팔한 애송이는 모르는 여러 고충들이 있단다.
그렇게 전담반에 도착하니, 때마침 샤론 경이 보고서를 한 아름 들고서 그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일전에 성진과 로건이 찾아낸 작업장을 조사한 결과, 땅속에 뭔가를 파묻은 흔적을 확인했다고, 그래서 그 자리를 깊이 파고들어 갔더니, 여러 가지 작업 도구들과 함께 웬 시체 하나가 발견되었다나.
“죽은 지는 시일이 제법 지난 것 같았습니다.”
시신은 이미 부패를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몸에 뒤덮여있는 흉터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동안 서서히 쌓여갔을, 입은 시기가 각각 다른 상처들.
“…참회 교단의 잔당이군?”
“네, 저하. 분명 그치들의 고행 흔적이었습니다. 참회 교단의 메달을 걸고 있는 것도 확인했고요. 함께 발견된 소지품들을 봐서는 꽤 고위 관계자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흠.”
성진은 보고서를 찬찬히 넘겨보았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밀로 상단의 작업장이었다기보다는, 이미 참회 교단이 접선 장소로 이용하던 곳에서 약차 제조를 함께 수행했다고 보는 쪽이 좋을까.’
그러니 벨린다 역시 그곳을 찾았던 거겠지.
물론 이 시체가 벨린다를 구하기 위해 직접 포털을 열었을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그녀가 이단재판부를 탈출하기 훨씬 전에 죽어버린 것 같으니.
‘정작 벨린다도, 자신이 ‘포털’을 이용한 사실 자체는 모르는 것 같았고.’
그렇다면 대체 누굴까? 규상 세계의 물건을 이용하여, 이단재판부로부터 당당히 죄수를 빼돌린 자는?
성진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옆에서 생뚱맞은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이제와 시체를 조사해 본들 큰 진척이 있겠습니까? 이미 답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죽고 없는데.”
“…….”
벨린다가 그렇게 죽은 이후로, 유난히 부루퉁해 보이는 발레리 경이다.
게다가 며칠 전에는 또 참연어 전문점 광고를 빌미로 성진과 한차례 마찰을 빚지 않았던가.
“뭐야? 발레리 경. 아직도 화가 나 있나?”
성진의 물음에, 빨강머리 인퀴지터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 같은 말단 성기사가 어찌 감히 저하께 그런 불경을 저지르겠습니까?”
“그럼 뭔데?”
“그저 서운하다는 겁니다! 저는 혹여나 저하께서 다른 사제들에게 책잡히지나 않을까, 그런 걱정으로 충언을 드렸는데 말입니다. 그게 다 저하를 위한 일이었단 말입니다!”
“어, 그렇군.”
성진은 대충 대답하며 보고서를 넘겼다.
“한데 저하께서는 제게 어찌하셨습니까? 충신의 입에 한마디 말도 없이 참연어를 쑤셔 넣으셨습니다!”
뭐야, 화난 거 맞잖아.
“그래서 참연어가 맛이 없었어?”
“…물론 맛있었습니다만, 나중에 제게 돈을 받겠다고 하셨죠! 심지어 그건 제대로 된 1인분 요리도 아니었는데!”
“재료가 비싸잖아. 본래라면 같은 무게의 은과 맞먹는 값이라고.”
뚱하게 대꾸했더니, 발레리 경이 애꿎은 허공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쳇! 저하께서는 진정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제가 평소에 얼마나 큰 도움을 드리고 있는지 말입니다!”
“…….”
“짐작도 못 하시겠죠! 저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저하께서 얼마나 이단재판부의 등살에 시달리셨을지…….”
어, 알았어, 알았어.
돈 안 받을 테니까, 제발 그만 닥쳐!
Chapter 32: Chapter 332
Chapter Text
332. 살롱 (2)
그날 일찌감치 마물 전담반 일을 끝낸 성진은, 이른 점심시간이 되어 참연어 전문점에 들렀다. 직접 본궁에 가져갈 요리를 포장하기 위해서였다.
-베르트란 & 리 참연어 전문점
데스테 거리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에 개점한 이 요리점은,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음에도 벌써부터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예약 손님을 상대로 고급 요리를 내오는 2층은 점심부터 이미 만석이다.
“세상에! 스카르차피노가 분들이 오셨어! 인사라도 드리도록 어서 지배인님께 말씀드려!”
“지금 너무 바쁘셔요! 저쪽 테이블에는 추기경께서 두 분이나 앉아 계신다고요!”
작정하고 이윤을 남기려 만든 고급 섹션이었지만, 그럼에도 종전의 가격에 비해 대단히 저렴한 것만은 사실. 황도 인사들이 대거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1층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우리는 대체 언제까지 줄을 서야 하는 거요?”
품질이 조금 떨어지는 부위를 모아 가성비 좋은 요리를 판매하는 덕에, 손님들의 줄이 식당 밖으로 밀려나다 못해, 아예 거리 한 편을 빼곡하게 메우는 중이었으니까.
어디 그뿐인가.
-성황 폐하께서도 인정하신 바로 그 맛!
발레리 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내걸린 현수막 아래, 많은 황도 시민들이 몰려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참연어? 듣자 하니 그냥 생선 같은데, 1인분이 그렇게도 비싸단 말인가?
-이 사람, 모르는 소리! 저 요리점이 아니었다면, 어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참연어를 평생 구경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나? 본래라면 좋은 날 귀족님들이나 한 번씩 입에 넣을 수 있는 귀한 요리라고!
-아하! 그래서 사람들이 저렇게들 줄을 서고 있구먼.
-그렇다니까! 무려 은보다 비싼 참연어를, 우리 모레스 황자님께서 황도 신민들을 위해 싼값에 팔아주시는 거라네!
제법 넉넉하게 들여왔다 생각했지만, 이 속도면 조만간 참연어 물량이 동이 나는 게 아닌가 걱정해야 할 판이다.
‘무난하게 본전만 치자고 생각했는데, 이거 어쩌면 효자 사업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성진은 흐뭇하게 생각했다.
‘슈미트 지부장에게 언질을 줘야겠군. 한동안 저온 마차를 참연어로만 꽉꽉 채워 오라고 말이야.’
이 열기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물이 들어오고 있으니 제대로 노를 저어야 할 게 아닌가.
어서 투자금을 회수해서 조만간 다른 사업에도 투자를 해야 하고 말이지.
“저하께서 굳이 직접 가지러 오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원하시면 매일 종업원을 시켜 요리를 황궁으로 보내겠습니다.”
주방장이 손수 도시락을 준비하며 말했다. 이번에는 각종 야채와 향신료를 넣어 촉촉하게 찐 참연어찜 요리였다.
“아니면 레시피를 드릴 테니, 차라리 황궁 사람들이 직접 요리하는 것도 좋겠지요. 아무래도 가는 동안 식어버리면, 처음 내왔을 때보다는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성진 역시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지. 이번에 들여온 좋은 참연어들은, 최우선적으로 황궁 냉장고에 잔뜩 채워두기도 했고.
하지만 막상 그것들을 식탁에 올리라고 지시했을 때, 생각 외로 아버지는 거의 요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포장해서 들고 가면, 같은 요리라도 잘 드시잖아?’
어제 점심으로 가져간 참연어 그라브락스 샐러드는 또 말끔히 비우셨단 말이야.
어쩌면 이건 편식의 문제가 아닐지도 몰랐다. 혹시 아버지는 본궁에서 만드는 요리 자체가 싫으신 걸까?
‘다음에는 참연어가 아니라, 다른 요리들도 한 번씩 포장해 가 볼까?’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 사람이 매번 생선만 먹고 살 수 있나.
마음을 굳힌 성진이 주방장에게 말했다.
“일단 한동안은 이대로 포장해 주게. 어쩐지 내가 직접 들고 가면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것 같아.”
그러자 키프로스 출신의 주방장은 대단히 감동받은 얼굴을 했다.
“성황 폐하를 위하시는 황자님의 그 아름다운 마음씨에 어찌 감읍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오서도 분명 이를 잘 알고 계시기에, 저하의 도시락을 그리 기꺼워하시는 것이겠지요?”
소인, 미흡한 실력이나마 앞으로도 열과 성을 다해 요리를 만들겠습니다!
주방장은 그렇게 외치며 도시락 포장에 열을 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언제쯤 황도로 돌아오시려나?’
포장을 기다리며, 문득 성진은 아세인 공국으로 떠나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는 리자베스 황비를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성진이 처음 참연어를 먹었던 날이, 마침 그녀도 함께했던 황궁 정찬 자리가 아니었던가.
‘적어도 식당이 개점할 때쯤에는 돌아오실 줄 알았는데…….’
아세인 공국은 완전한 내륙에 위치해있으니, 황도보다 참연어가 더 귀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도시락을 여기서 아세인 공국까지 배달시킬 수도 없고 말이지.
‘물론 내가 가져다 드린다고 해서, 어머니가 기쁘게 받으실지도 의문이지만.’
성진이 짐작하지 못하는 모종의 이유로, 그녀와의 사이는 이미 완전히 틀어진 듯 보였다.
하지만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싶어도, 이전의 기억이 없는 그로서는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한 것이다.
-모레스! 아가! 엄마를 알아보겠니?
그럼에도 성진은 이곳에서 처음 눈을 떴던 순간, 눈물을 글썽이던 그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이렇게 건강히 일어나 준 것만으로도 어미는 기쁘기 그지없단다.
황비가 마주 잡아왔던 그 손의 온기 역시 아직은 기억에 생생했다.
그리고 이렇듯, 황궁 식구들과 뭔가를 나눌 일이 생기면, 때때로 ‘리자베스 황비 역시 함께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곤 하는 것이다.
* * *
다다다다다!
도시락을 들고 한달음에 집무실로 달려갔더니, 마침 카트리나 단장과 프란시스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모레스 황자님을 뵙습니다.”
카트리나는 대단히 절도 있는 동작으로 예를 갖춰 보였다.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의 단장인 그녀는, 성황의 오른팔로서 여러 가지 업무를 담당하느라 매일같이 공사가 다망했다.
덕분에 ‘성황의 방패’라는 이명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서 진득하게 자리 지키는 모습을 보기가 의외로 힘든 사람이다.
“저하를 뵙습니다.”
뒤에 서 있던 프란시스 역시 떨떠름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적당히 불경스러운 저 모습, 참으로 건방지기가 한결같은 부관이었다.
“아아, 그것이 소문에 자자한 참연어 요리군요.”
성진이 도시락을 성황의 책상 위에 올리자, 카트리나가 반색을 하며 물어왔다.
“맞아, 단장. 그대도 소문을 들었나?”
“예, 저하. 참으로 부끄럽습니다만, 휘하의 성기사들 대부분이 수련하는 것도 잊고, 그 새로 생긴 요리점 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군.
신정일치하의 꽉 막힌 성직자들이다보니, 저온 마차라는 생소한 문물에 다소 거부감을 일으킬 줄 알았는데.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아쉽군. 그대들이 있을 줄 알았으면, 도시락을 조금 더 가져올걸 그랬지.”
그러자 카트리나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런 당치도 않은 말씀을! 어찌 감히 저하께 그런 수고를 끼친다는 말씀이십니까?”
“수고는 무슨. 아, 그래. 말 나온 김에 프란시스 경과 식당에 한번 들르게. 지배인에게 잘 대접하라 말해놓을 테니.”
“후후. 아닙니다. 말씀만으로도 황송합니다.”
그렇게 대답한 카트리나는, 책상에 있던 서류들을 모아 부관에게 넘기고는 성황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면, 적금에 관한 일은 하명하신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러지. 수고했네, 카트리나.”
“예. 폐하.”
하지만 그렇게 막상 자리를 뜰 줄 알았던 카트리나는, 성황의 옆에 자리 잡고 서서는 대단히 기대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프란시스 역시 안경을 추슬러 올리며, 날카로운 눈으로 힐끔힐끔 성황을 살핀다.
어디 그뿐인가. 시종장 루이스가 성진을 위해 다과를 들여오더니, 역시나 그대로 성황의 뒤에 조용히 자리를 잡는 게 아닌가!
‘어라? 이 사람들, 어쩐지…….’
어째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잠시 성황의 눈치를 보던 성진은, 묘한 열기가 느껴지는 침묵 속에서 조용히 참연어 도시락을 풀어 책상에 펼쳐 놓았다.
“…….”
그렇게 성진을 포함한 네 사람이 말똥말똥 지켜보는 대단히 부담스러운 분위기.
성황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행히도 작게 한숨을 내쉬었을 뿐 크게 개의치는 않는 듯했다. 홀로 점잖게 식기를 움직이던 그는, 이내 조금 식은 찜 요리를 깨끗하게 비워냈다.
“요리사의 솜씨가 좋은 듯하구나.”
마침내 그의 입에서 맛에 대한 평가가 흘러나오자, 성황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아아, 주신이시여…….”
카트리나 단장은 대단히 감격한 듯 가슴에 손을 올렸다.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기도 하는군요. 폐하께서 아직 모레스 황자님보다 어리던 시절, 창고에서 몰래 호두를 가져다 드린 이후로 황궁에서 뭔가를 제대로 드시는 모습은 단연코 처음 봅니다.”
성진이 눈을 깜박거렸다.
“…호두?”
“예. 당시 폐하께서는 음식이라면 죄다 경계하셨지요. 그래서 뭐든 드시게 하려고 제가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모릅니다.”
오랜 추억을 회상하듯, 카트리나의 눈동자에 푸근한 온기가 어렸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부터 곁에서 쭉 보좌했다고 했던가.
“황도에서 구할 수 있는 먹거리란 먹거리는 죄다 찾아다녔습니다. 종국에는 호두까지 가져다드리며, 직접 까서 드시면 안전할 거라 말씀드렸더니, 겨우 손을 내미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날부터 간간이 황궁에 호두를 챙겨오는 것이 제 소소한 낙이 되었지요.”
“어…….”
잠깐만. 아버지가 젊은 날 애검으로 호두를 깨먹는 괴상한 버릇이 있었다더니, 이제 보니 그게 다 이 사람이 만든 습관인 건가!
“…카트리나.”
성황이 떨떠름하게 제지하자, 단장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자세를 바로했다.
“이런! 너무 기쁜 나머지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고 있었군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폐하. 모레스 황자님.”
척척척.
카트리나 단장은 대단히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뒷모습에서, 평소와 달리 묘하게 들떠있는 기색이 느껴졌기에 성진은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고개를 푹 숙이며 찢어지는 입꼬리를 애써 감춘 루이스까지 물러나자, 성진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성황을 바라보았다.
아니, 아버지. 대체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밥상머리 버릇이 대단했기에, 사람들이 다들 이런 반응입니까. 예?
“…모두 오해이니라, 모레스.”
“네?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
* * *
참연어가 가져온 풍요로움은 진주궁의 점심 식사에서도 이어졌다. 요리사가 귀한 재료로 오랜만에 유감없이 솜씨를 발휘한 덕이다.
“참연어 요리가 이렇게 싱거울 수도 있다니…….”
“강한 염장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란다, 시슬레. 이게 모두 모레스가 도입한 저온 마차 덕분이지.”
“그래? 저온 마차란 정말로 대단하구나!”
덕분에 최근 뜸해질 기미가 보이던 점심 모임이 활발하게 재개되었다.
아멜리아 누님과 시슬레는 물론, 최근 이런저런 업무로 바쁘던 로건도 함께였다. 심지어는 황궁에 자주 들어오지 않는 헤르나와 가데스 쌍둥이까지!
“너희들은 어때? 참연어가 입에 좀 맞는 거 같아?”
뿌듯한 마음에 물었더니, 쌍둥이는 어쩐지 불퉁한 얼굴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뭔가 대단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왜? 요리가 별로야?”
평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들뜬 상태를 유지하는 녀석들이 아닌가. 그런데 오늘은 말수도 적고, 유난히 기운들이 없어 보였다.
성진이 의아해하고 있는데, 쌍둥이가 묘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더니 이내 푹 한숨을 내쉰다.
“지금 요리가 문제라고 생각해?”
“그래.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그럼 뭐가 문젠데?
“모레스가 성질이 나쁜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말이지…….”
“화나면 눈에 뵈는 게 없이 날뛰는 것도 익히 알았지만…….”
…응?
“뭐든 물불 가리지 않고 일단 달려드는 성미는 제발 고쳐.”
“덕분에 주위 사람들이 말리느라고 얼마나 힘든 줄 알아?”
“평소에는 그렇게나 인과를 철저히 따지더니 말이야.”
“막상 화가 나니 인과고 뭐고 아무 소용없다는 거지?”
성진은 대단히 당황했다.
“뭐?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다니,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런데 쌍둥이는 그 항변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저들끼리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주억거리는 게 아닌가.
“하마터면 모레스 때문에 모조리 망칠 뻔 했잖아?”
“말리느라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뒷골이 쑤셔.”
“이제 다시는 그 애한테 가지 않을 거야. 절대로!”
“맞아.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어쩌란 말이야?”
“…….”
성진은 할 말을 잃었다.
영문을 알 수 없으니 뭔가 대단히 억울하긴 한데, 그래도 저 쌍둥이들이 아예 근거 없는 원망을 하는 것 같지는 않고.
‘대체 뭐지?’
기분 탓일까.
어쩐지 잔뜩 주사 부린 다음 날, 혼자 잊어버린 술주정뱅이가 된 기분이었다.
Chapter 33: Chapter 333
Chapter Text
333. 살롱 (3)
다행히도 마사인이 잔뜩 삐친 쌍둥이들의 기분을 금방 풀어주었다.
식사가 끝나고 오랜만에 돌아온 수예 시간, 그가 예쁜 무늬가 수놓인 주머니 두 개를 헤르나와 가데스에게 슬그머니 건네주었던 것이다.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만들었다나?
“이거 정말 우리 주는 거야?”
“형님 쓰려고 만든 거 아냐?”
“제 것은 있습니다. 이제껏 ‘영감님 주머니’가 없는 건 두 분뿐이니까 말입니다.”
…영감님 주머니라는 게 고유명사화 되고 있어.
어쨌든 쌍둥이는 그 선물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둘은 마치 찍어낸 것처럼 똑같은 동작으로 주머니에 새겨진 자수들을 쓸어보았다.
“꽃잎이 너무 예뻐! 이게 다 마사인 오라버니가 새긴 거야?”
“자수가 섬세한데? 마사인 형님은 이런 것도 잘하는구나?”
그랬다. 놀랍게도 마사인 경은 대단이 손재주가 좋았다.
어찌나 배우는 속도가 빨랐던지, 그에게 직접 자수를 가르친 미라벨이 다 놀랄 정도.
더욱 신기한 것은, 그가 취미로 자수를 시작하고부터 한층 마음의 여유가 생긴 듯하다는 점이다.
“한 땀 한 땀 열중하다 보면 어쩐지 정신 수양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절로 마음이 가라앉으며, 스스로를 차분히 관조하게 되더군요.”
평온한 마사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성진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지그스문트령에서 돌아온 직후만 해도, 그가 얼마나 조바심을 내며 수련에 박차를 가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한데 자수로나마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지.
[저놈이 왜 그렇게 조바심을 냈는지 이유는 생각해 봤어? 그게 다 네가 거하게 사고 치고 다녀서잖아.]
어허! 모함하지 마라, 마왕 놈아!
‘요즘은 사고를 쳐도 마사인 경이 전보다 화를 덜 낸단 말이야. 절대 그럴 리 없어!’
[그건 그냥 널 포기했으니까 그런 거고.]
‘…닥쳐!’
한창 나뭇잎 자수에 열중하고 있던 비공식 소드 마스터, 로건도 마사인의 의견에 동의했다.
“정교한 손놀림에 열중하며 서서히 피아를 잊어간다. 검사들이 벽을 넘기 위해 하는 수련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역시 그럴까요?”
“네, 자수는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좋은 수련입니다. 작은 잎사귀 두 개를 수놓는데, 벌써부터 해수 토벌을 마친 것 같은 고단함이 느껴지는군요. 아마 형님의 오러 연공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그거야 로건 네가 소드 마스터의 오감을 극대화해서, 서툰 솜씨를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이 아닐까.’
로건은 평소 이런저런 업무가 많은 터라 자수 놓을 시간이 없었지만, 그래도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수예 시간 만큼은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덕분에 그의 영감님 주머니에는 어느새 삐뚤빼뚤한 잎사귀들이 하나둘 늘어가는 중이다.
로건은 파랗게 피어나고 있는 나뭇가지를 매만지며 뿌듯하게 웃었다.
“정신 수양의 과정뿐만 아니라, 멋진 결과물을 보는 보람도 크군요. 이참에 릴리움 기사들에게도 자수를 적극적으로 권해봐야겠습니다.”
…이 사람들, 자수에 진심이구나.
이대로 간다면 마사인 경은 어쩌면, 자수를 통해 데카론 나이트의 벽을 넘는 최초의 상급기사가 될지도 모른다.
반면, 들이는 노력에 비해 실력이 하나도 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앗!”
아멜리아가 나직하게 비명을 지르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슬레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손가락에 신성력을 흘려준다.
“이게 대체 몇 번째야? 이러다가 손가락이 바늘꽂이가 되겠어. 아멜리아 언니. 그냥 미라벨에게 맡기는 게 어때?”
“아니야, 시슬레. 내가 재미있어서 하는 거란다.”
이런저런 수업과 업무에 시간을 할애하느라, 그 좋아하는 검술 수련도 마음껏 하지 못하는 아멜리아다. 한데도 굳이 늘지도 않는 자수에 매진하는 걸 보면, 재미있다는 그녀의 말은 진심인 듯했다.
문제는 지나치게 성과가 없다는 점이겠지.
“다들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는데, 왜 나만 매번 이런 걸까?”
조금 시무룩해진 아멜리아를 바라보며, 성진이 무심코 생각했다.
‘글쎄. 실력이 는다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지 않나?’
이 수예반 멤버 중에서 월등한 재능을 보이는 것은 오직 마사인 경뿐이었다. 로건도 초인적인 감각을 집중하는 것치고는 결과물이 영 시원찮지.
성진은 아예 흥미가 없어서 옆에서 구경이나 하는 중이고, 쌍둥이들도 수실을 잔뜩 어지럽히거나 천 조각들을 가지고 종이접기나 하고 있다.
‘형제자매들 중 평범하게나마 손재주가 있는 건 시슬레 정도일까.’
하면 마사인 경과 다른 이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결론은 빨랐다.
“다들 아버지를 닮은 거겠죠.”
꼼꼼하게 바느질을 하는 아버지라니, 전혀 상상도 가지 않거든.
한데 성진의 대답에 아멜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그렇지 않단다, 모레스. 내가 어릴 적에는 아버님 폐하께서 곧잘 벨의 새 옷을 만들어 주시곤 했…….”
그러다가 움찔 놀란 아멜리아가, 말을 멈추고 슬쩍 성진의 눈치를 본다.
성진은 대충 그녀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아멜리아가 이정표를 통해 곧잘 보곤 했다던 꿈. 아마도 그 꿈과 진짜 과거를 잠시 헷갈린 모양이지.
“이정표… 아니, 그 ‘꿈 목걸이’에 대해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눠보셨어요?”
그러자 아멜리아가 잠시 눈을 깜박거리더니, 이내 안도한 듯 사르륵 미소를 지었다.
“후후, 넌 말하지 않아도 뭐든 아는 것 같구나, 모레스.”
“…….”
“그래. 그때 네 권유를 듣고, 나는 곧바로 아버님 폐하를 찾으려 했었어. 그런데 집무실 앞에 거의 당도했을 때, 내게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단다.”
“이상한 일이요?”
“그래.”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듯, 아멜리아의 회색 눈이 깊게 침잠했다.
“모레스. 일전에 이 ‘꿈 목걸이’가 분명 조모님께서 남기신 물건이라고 했었지?”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조모님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내게 이것을 주셨다고 생각하니?”
글쎄.
성진도 그것이 의문이었다. 전대의 오라클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까지는, 아버지도 확실히는 알 수 없다고 했었지.
언뜻 보기에는, 마치 아름다운 꿈을 보여줌으로써 누님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지켜준 듯 했지만.
‘그게 다일 리가 없어.’
한 사람의 오라클이 만들 수 있는 이정표는 한정되어 있다. 조모님만 해도 일생 동안 고작 세 개를 남긴 것이 다였으니.
이정표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만드는 일종의 기회. 무려 게임 속 아이템을 멀쩡히 현실 세계에 구현할 정도로, 거의 신의 권능에 닿아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
그런 엄청난 물건을, 고작 누님에게 꿈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했다고?
-코른시임 일족이 누군가에게 하는 말은 모두가, 미래를 예측하고 그 결과를 바꾸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인 것이라. 따라서 그들이 하는 모든 말에는 명확한 의도가 담겨 있고, 하나도 남김없이 거짓인 것이다.
언젠가 아버지도 주의를 주지 않았던가.
설령 누군가가 그들의 의도를 미루어 짐작하고 움직인다 해도, 그 판단을 한 번 더 예측하고 이에 대비하는 것이 코른시임의 오라클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또 이런 말도 해 주었지.
-만일 그 이정표들이 사후에도 남아 있다면, 이를 만든 오라클이 내다보고 또 대비하고자 한 미래가 아직 다가오지 않았음이라.
아직까지도 조모님의 꿈 목걸이가 멀쩡히 남아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 그것은 그녀가 내다본 미래가 아직 다가오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이어진 아멜리아의 말이, 생각에 잠겨 있던 성진의 정신을 단숨에 현실로 끌어당겼다.
“모레스. 순전히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나는 그날 황궁에서 조모님을 본 것 같아.”
…네?
* * *
언제였던가.
오늘처럼 진주궁에서 화기애애한 점심 식사를 가졌던 날. 아멜리아는 모레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이 보석은 이정표라 불린다고 들었습니다, 누님.
-이정표?
-네. 조모님이 남기신 유품일 겁니다. 이것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아버지일 테니까, 시간 되시면 아버지와 조금 이야기를 나눠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당시에 아멜리아는 동생의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회귀한 사실까지도 성황에게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던 그녀가 아닌가.
그러니 어린 시절의 소소한 추억에 대해 말하는 게 무엇이 어려울까.
아멜리아는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서 본궁으로 향했다.
‘맞아. 그 아름다웠던 꿈속 세상은 오직 나와 아버님 폐하만을 위한 것. 그러니 당신께는 반드시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본궁의 계단을 오를 때만 해도, 아멜리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막 집무실이 있는 2층 복도에 도달했을 때였다. 갑자기 엄습해오는 강한 한기를 느끼며, 아멜리아는 순간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
바로 거기에 검은 여인이 서 있었다. 어린 시절, 아멜리아를 찾아왔던 때와 한 치도 변하지 않은 모습을 하고서.
‘누구? 본궁의 사용인 같지는 않은데, 왜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거지?’
예상치 못한 조우였던지라, 처음에는 바로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그 독특한 모습. 길고 검은 드레스와 검은 머리카락, 심지어 얼굴까지도 완전히 뒤덮는 시커먼 베일. 이른 가을의 온화한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그 기괴한 차림새를, 아멜리아가 대번에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 예전에 만났던 검은 베일의 언니?’
기분 탓일까. 베일에 가려진 형형한 시선이 어쩐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고 느끼며, 아멜리아는 조용히 식은땀을 흘렸다.
“왜 그러십니까, 저하?”
갑자기 황녀가 걸음을 멈추고 얼어붙어있자, 놀란 호위기사가 뒤에서 조심스레 물어왔다.
“저기…….”
아멜리아는 천천히 손을 들어 여인을 가리켰다.
“저 여인이 아버님 폐하의 집무실 앞을 가로막고 있구나. 필시 내게 무슨 볼일이 있는 모양인데, 도통 자리에서 움직이질 않아. 대체 무슨 일일까?”
한데 그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린 기사가, 곧 의아한 듯 이리 되묻는 것이 아닌가.
“예? 저하. 여인이라니요? 방금 스쳐 지나간 시종을 제외하면, 복도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습니다만.”
‘…뭐?’
하지만 놀람도 잠시, 아멜리아 역시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느껴져야 마땅한 오러. 그러나 저 검은 여인에게는 그런 오러 활성도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뭐지?’
그녀의 정체에 관한 섬뜩한 짐작이 고개를 들려는 차, 검은 여인이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한 손을 들어 입을 가리키며-
‘입?’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안 돼? 뭐가?’
하지만 아멜리아는 곧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바로 무엇이었던가.
-절대 말하지 마라.
등줄기로 차가운 전율이 흘렀다.
‘아버님 폐하께, 그 꿈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오직 아멜리아에게만 전해져 온 비밀스러운 메시지.
그런데 놀라운 일은 연이어 일어났다.
아멜리아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서 있는데, 잠시 눈을 깜박이는 사이 그 여인이 거짓말처럼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
그리고 잠시 후, 떨리는 발걸음으로 집무실로 향했을 때-
“아멜리아. 어찌 바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그리 서 있었더냐?”
“…….”
“왜 그리 떨고 있느냐? 혹여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신의 대리자. 대륙에서 가장 지고하시고 강하신 아버님 폐하.
‘당신께서도 집무실 바로 바깥에 있던 그녀의 존재를 전혀 모르셨다고?’
아멜리아는 마음 한편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스산한 예감을 느꼈다.
검은 베일의 여인은 대체 누구였을까. 단지 자신이 헛것을 본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돌아가신 조모님의 혼령인가.
어린 시절, 아멜리아가 훗날 많은 가족을 가지게 되리라던 그녀의 말은, 결국 현실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다시금 눈앞에 나타난 그녀의 경고를, 아멜리아는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날.
복잡한 상념에 잠겨있던 아멜리아는, 결국 성황에게 꿈에 대해 한마디도 뱉어낼 수 없었다.
* * *
“그 여인이 조모님이라고 생각하신다고요?”
“그래. 조모님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왠지 그럴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구나. 내게 꿈 목걸이를 맡긴 것도 그녀였으니까.”
“흠…….”
“얼굴을 가리는 검은 베일. 그 고풍스러운 드레스의 자태. 분명 어릴 때 본 여인이 분명하단다.”
성진은 잠시 턱을 괴고, 정말로 조모 베스세바 황비의 혼령이 나타났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미래를 위해 이정표를 남긴 조모님. 그것을 맡기러 찾아온, 오러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여인.
그리고, 영혼을 보는 아버지의 딸, 아멜리아 누님.
‘뭐야? 가능성이 그리 없지도 않은데?’
결론을 내린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대체 조모님의 목적은 뭘까요?”
“후후.”
그러자 아멜리아는 이에 대답하지 않고 성진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너는 정말로 조모님의 혼령이 나타났다고 믿어? 단지 내가 헛것을 봤다고 생각하지는 않니, 모레스?”
“네?”
성진은 아멜리아의 질문에 멀뚱히 그녀를 마주 보았다.
영혼을 믿느냐 묻는다면, 그야 당연히 믿는다 답할 것이다. 성진 스스로가 영혼만으로 돌아다닌 적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나는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검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광신도 악령을 소환할 수 있다고.
“누님은 분명히 보신 거잖아요? 전 믿습니다. 누님은 기억력이 대단히 좋으니까요.”
“모레스…….”
그러자 아멜리아는 대단히 감동한 얼굴을 했다.
물론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따끔!
또다시 손가락을 찔려 움찔하는 아멜리아를 보다 못한 성진이, 그녀에게서 바느질 도구를 빼앗았다.
“잠깐만 쉬세요, 마무리는 제가 해 보겠습니다. 누님.”
“모레스 네가? 바느질해 본 적은 있어?”
“대충은요.”
뭐, 자수 따위는 둔 적 없지만, 이래 봬도 계급장은 제법 달아봤습니다. 제가 군대 있을 때만 해도 벨크로 계급장이 없었거든요?
성진이 조심스럽게 노란 수실이 꿰인 바늘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멜리아는 양손으로 턱을 괴고는 잠자코 그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당분간 꿈에 대해서는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않으실 거군요?”
“그래. 그게 좋을 것 같아.”
아멜리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그저,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단다. 검은 베일의 여인이 정말로 돌아가신 조모님이라면, 그녀는 아마도 분명 아버님 폐하를 위하실 거라고 믿으니까.”
“…….”
“아버님 폐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조모님도 분명 당신을 마음 깊이 사랑하실 테니까.”
성진은 그 말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멜리아 누님은 아마도 조모님을 굳게 믿고 있겠지만, 정작 아버지는 아닐지도 몰랐으니까.
-이를 잘 기억해 두거라, 아들아. 코른시임 일족은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자들이다.
그렇게 당부하던 그의 굳은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그런데 모레스…….”
꾸물꾸물 완성되어 가는 나비를 바라보던 아멜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도 자수에 썩 재능이 있는 것 같지는 않구나. 역시 네 말대로 우리는 모두 아버님 폐하를 닮은 걸까?”
아니, 이 정도면 처음 치고 썩 훌륭하지 않나?
그런데 누님께서 저한테 그런 말씀 하시기 있습니까? 예?
Chapter 34: Chapter 334
Chapter Text
334. 살롱 (4)
워우우우우!
수예 시간이 끝나, 평소보다 조금 늦게 연무장으로 나선 성진은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맞이하는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왔기 때문.
막스, 이 귀여운 놈!
웡워우우우!
-왜 이렇게 늦었어? 나만 놔두고 매일 어디로 가는 거야?
성진은 부리나케 달려와 붕붕 꼬리를 흔드는 녀석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그래, 막스. 미안미안.”
웡웡웡!
-놀아줘! 놀아줘!
“그런데 난 이제 수련해야 해. 그러니까 잠시만 저기서 기다려.”
워우우우우!
-나와 놀아줘라아아!
“흠…….”
이쯤 되니 잠깐만 놀아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수련을 방해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진이었지만, 이렇게 귀여운 강아지가 작정하고 애교를 부리는데 넘어가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네? 강아지요?’
물론 다른 상주기사들의 눈에는, 거대한 늑대개가 어린 황자를 위협하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그래. 잠깐만 놀자. 그런데 내가 너랑 어떻게 놀아줘야 하니?”
너는 ‘물어와!’ 놀이도 못 하잖아? ‘물고 당기기’ 놀이를 하려고 해도, 날카로운 이빨로 모조리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말이지.
웡웡웡웡!
-나를 타라! 강하고 거대한 나를 타고 전처럼 멀리멀리 놀러 가자!
“아니, 그러니까 그건 무리래도…….”
끼잉-
성진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막스가, 졸라대기를 멈추곤 성진의 볼을 찹찹 핥았다.
[저리 가! 이 바보 잡종개야!]
덕분에 막스를 싫어하는 마왕의 심기가 대번에 불편해졌다.
“저저, 가증스러운… 황자님 앞에서만 얌전떠는 걸 보십쇼.”
“저도 총애받는 걸 안다, 이거지? 모레스 황자님만 아니었으면 저걸 아주 그냥!”
막스를 싫어하는 것은 비단 마왕뿐만이 아니었다. 멀리서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성진의 귀에 생생하게 들어온다. 평소에 유독 막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칼멘 경과 하벤 경이다.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하는데, 그래도 경들이 막스 기준에서 서열 최하위인 걸 어쩌란 말이야? 그러게 진작 수련 좀 할 것이지.
“황궁이 심심하고 재미없지? 대체 널 어쩌면 좋을까, 막스…….”
성진은 자리에 앉아, 막스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 녀석은 본래 야생 늑대처럼 지그스문트령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놈이었다. 그래서 황궁에 데리고 오는 게 과연 잘한 일이었는지, 성진은 아직도 의문이 들곤 했다.
‘함께 지내다 보면 점점 황궁에 익숙해지지 않을까?’
그래서 처음에는 궁 안에서도 데리고 다니며, 꼬박꼬박 방 안에서 재우곤 했지.
그러던 어느 날, 에디스가 울상을 지으며 말하더라. 도저히 저 녀석의 말썽이 감당이 안 된다고.
알고 보니 성진이 옆에 있을 때는 점잖은 척하다가, 자리를 뜨는 순간 값비싼 가구며 예술품을 모조리 물어뜯는다는 거였다.
그래서 한번은 넝마가 된 물건들을 보여주며 야단을 쳤더니, 천진한 눈망울로 성진을 올려다보며 낑낑거리는 게 아닌가.
-다른 애들은 다 가지고 놀잖아? 신기한 장난감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왜 나한테만 그래? 응?
막스에게는 궁의 사용인들이 부산스럽게 청소하는 모습이, 꼭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내보내, 지금은 임시로 연무장 한편에 개집을 마련해 둔 상태.
‘하지만 조만간 겨울이 오면, 녀석을 궁 안으로 들여야 하지 않을까? 슬슬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챱챱챱.
성진의 복잡한 속도 모르고, 막스가 철없이 그의 머리카락을 핥아댄다.
이 녀석은 때때로 성진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기를 즐겼다. 진주궁에서도 비싼 물건들만 골라서 망가뜨리는 걸 보면, 은근히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래그래. 그거라도 재밌다니 됐다.”
축축한 게 좀 기분 나쁘긴 한데, 네가 좋다면야 내 머리카락쯤이야.
그렇게 막스를 혼자 놀게 내버려 둔 성진은, 조용히 눈을 감곤 정신을 집중했다. 이참에 틈틈이 명상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수련을 일찍 끝내고, 나중에 막스랑 좀 더 놀아줄 수 있을 테니까.
“아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사인과 상주기사들은 대단히 희한한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어린 황자가 커다란 늑대개를 머리에 인 채로, 옅은 오러의 바람을 휘감으며 명상에 빠져 있는 모습을.
“…명상을 하신다고? 정말?”
“개가 잔뜩 침을 바르고 있는 이 상황에서? 저게 말이 되냐?”
가히 상식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오죽했으면 전 데카론 나이트인 브루노 단장이 크게 당황했을까.
“대체 저하께서는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도 집중을 유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한때 데카론 나이트로서 깨달음이 적지 않다 여겼지만, 정신력에서만큼은 도저히 저하를 따라갈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가 경악한 가운데, 오직 마사인만이 씁쓸하게 웃었을 뿐이다. 그는 일전에도 황자가 혼자 화단에 쪼그리고 앉아, 오러 5층을 완성하는 장면을 목도한 적이 있었으니까.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눈에 밟히던 동생이 훌쩍 성장하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부족한 제가, 언제까지 저하를 곁에서 보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흠칫!
마사인과 브루노 단장이 동시에 긴장하며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
챙! 채앵!
어느 순간 황자를 누르고 있던 늑대개의 덩치가 훌쩍 부풀어 오르는 듯 느껴졌던 것이다.
개의 오러가 폭발적으로 증폭되며 존재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나간다.
후욱-
갑작스러운 사태에, 연무장에 있던 모두가 당황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늑대개 쪽이 아닌, 마사인과 브루노 단장을 향하고 있었다.
“마사인 경?”
“…두 분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너무나도 찰나의 순간이었다.
두 사람이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살펴보니, 평소와 같은 모습의 늑대개가 태평하게 황자의 머리카락에 침을 바르고 있을 뿐.
‘뭐지? 기분 탓인가?’
‘아닙니다. 잠깐이지만 저도 분명 느꼈습니다, 마사인 경.’
‘브루노 단장. 저 개는 대체……?’
연무장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어수선해지자, 이를 느낀 성진이 명상을 마치고 눈을 떴다.
“왜 그래? 다들 무슨 일 있었어?”
어쩐지 새파랗게 질려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헥헥헥!
당황한 두 사람이 침묵하는 와중,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막스만이 성진에게 해맑게 꼬리를 흔들 뿐이었다.
* * *
“…루이스.”
집무실에서 사락사락 서류를 넘기고 있던 성황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시종장을 부른다.
“네, 폐하.”
“지금 당장 프란시스 부관을 불러 주겠나?”
그렇게 말하는 성황의 시선은 서류가 아닌, 벽으로 가로막힌 집무실 한쪽을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 감도는 예의 은빛 광채를 발견한 시종장은, 성황이 집무실이 아닌 저 먼 곳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예,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폐하.”
정중하게 대답한 루이스가, 서둘러 밖으로 걸어 나간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그곳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던 성황은, 이윽고 나직이 한숨이 쉬며 검토하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아들놈이 이오니아의 늑대를 기르겠다며 데려왔을 때부터,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슬슬 준비를 해야 한다 생각했다만, 내 예상보다 이르구나. 아들아, 대체 그 마경의 늑대를 정교회와 이단재판부에 뭐라 설명할 참이었더냐?’
그저 보통의 개처럼 길들일 생각이었던 걸까?
이오니아 늑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은 정말로 그럴 작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프란시스가 또 일거리가 늘었다며 잔뜩 불평하겠군.’
하지만 아이가 그러기를 원하지 않는가.
그럼 어쩌겠는가. 그저 마음 편히 기를 수 있는 개로 만들어 주는 수밖에.
* * *
“에디스. 혹시 내 앞으로 온 서신들은 잘 모아 두고 있어?”
늦은 저녁. 언제나처럼 브루노 단장이 타주는 멜보른을 음미하던 성진이 물었다.
“네, 저하. 잡다한 것들을 추려내고도 큰 자루 세 개 분량이 됩니다만?”
…그렇게나 많아?
“지금 가져올 수 있겠나?”
“네, 물론입니다, 저하.”
에디스는 씩씩한 걸음걸이로 방을 나섰다.
브루노 단장이 성진의 다과를 전담하게 된 후, 쓸개맛 차를 타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난 그녀는 최근 부쩍 마음이 편안해 보였다.
요즘은 어째 내 전담이 아니라, 막스 전담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특별히 찾으시는 서신이 있으십니까, 저하? 중요한 것들이 아니면, 아예 눈앞에 보이지 않도록 치우라 명하지 않으셨습니까?”
브루노 단장이 차를 더 따라주며 묻는다.
뭐, 그렇게 말해두긴 했지. 최근 꽃이나 선물은 물론, 진주궁으로 날아오는 쓸데없는 서신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일련의 마물 사건들과 지그스문트령 방어전 이후, 당연한 일이지만 황도 내에 모레스 황자의 위상이 대폭 높아져 있었다.
덕분에 연회니 사교 모임이니, 엄청난 양의 초청장이 들이쳤지.
귀찮아서 그냥 무시하고 있었는데, 그 여파가 결국은 아멜리아 누님에게까지 미치게 된 모양이었다.
-최근 너와 함께 모임에 참석해 줄 수 없는지 묻는 서신이 늘었단다.
-누님한테요? 왜요?
-네게 초청장을 보내도, 전혀 답장을 하지 않는다면서?
성진이 자수의 매듭을 지으며 혀를 찼다.
‘아니, 저들 멋대로 초대한 주제에, 감히 나한테 답신까지 받기를 바란다고?’
한데 귀찮아하는 성진과는 달리, 아멜리아는 동생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제법 기꺼운 모양이었다.
-모두가 너에 대해 궁금해한단다. 지그스문트령의 위기를 구한 데다, 어린 나이에 벌써 행정부의 한 부서를 어엿하게 이끌고 있잖니.
뭐. 그때 정말로 활약한 건 로건이고, 전 그냥 마물 전담반의 고문일 뿐입니다만.
-거기다 최근 네가 벌이는 사업들에 대해서도 관심들이 지대하지. 만일 성공한다면, 베르트란 & 리는 명실공히 북부를 아우르는 최대의 상단으로 성장할 테니까.
하지만 그들이 성진이나 아멜리아를 찾는 본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전까지 황도에서 가장 유명한 사교 모임은 단연코 리카르도 스카르차피노가 이끌던 모임이었다.
한데 그가 갑자기 정신병을 얻고 앓아누우면서, 주류 모임의 위상을 차지하려는 다른 사교 모임 주최자들이 앞다투어 성황가의 자녀들을 초청한다는 것.
-아나톨리아의 부호 머레이 가문과, 키프로스에 적을 둔 소르차 가문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중이지. 하지만 어느 쪽이 됐든, 일단 안면을 터놓으면 꽤나 많은 이점이 있을 거야.
-그렇군요. 그런데 누님도 딱히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사교 모임은 없잖아요? 그런 정보는 어떻게 알아 오시는 겁니까?
시시콜콜한 일을 도맡아줄 개인 정보원은 지금 그녀의 곁에 없었다.
얼마 전, 원숭이 망루에서 정보원을 배정받은 누님이 그를 아예 해외로 장기 출장 보냈다고 들었으니까.
어디라고 하더라?
그러니까 아마도, 로한이었던가?
-후후. 스카르차피노 영애가 내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단다. 발루아 영애 역시 마찬가지고. 어린 나이에도 어쩜 그리 똑 부러지는지.
아, 그렇구나.
‘그런데 어쩌다가 모레스의 약혼녀 후보들이 죄다 누님과 친하게 지내게 된 거지?’
어쨌거나 아멜리아 누님의 언질도 있었겠다, 이제 슬슬 쓸 만한 초청장들을 추려볼까 하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단지 성진에게도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게 또 말썽을 부리면 어쩐다지?’
[뭐가?]
‘나한테는 징크스가 있잖아?’
[징크스?]
그래.
모임에 나가기만 하면 거대한 사고에 휘말리는, 이른바 ‘사교모임의 저주’라는 징크스가…….
Chapter 35: Chapter 335
Chapter Text
335. 살롱 (5)
에디스가 가져온 초대장들은 생각보다 다양했다.
마치 황도의 모든 정기 모임에서 모레스 황자의 참석을 원하는 듯 보였다. 고작 세 개의 초대장을 두고, 마사인 경과 고민하던 때가 불과 몇 개월 전인데.
[너 정말로 사교 모임이란 델 나가려고?]
성진이 부스럭부스럭 초대장들을 살피기 시작하자, 마왕이 믿을 수 없는 듯 되물었다.
[자나 깨나 수련밖에 모르는 천하의 이성진이? 자진해서 그런 시간 낭비를 한다고?]
‘그럼, 참석하려고 보는 거지. 당연한 거 아냐?’
뭐랄까. 지금은 입장이 조금 다르지 않나.
예전에는 그저 덤으로 주어진 시간이라 여기며, 실컷 검술 수련이나 하다가 주인이 돌아오면 몸을 돌려주려 했지만.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제대로 살아야 해. 그렇다면 적어도 신성제국의 황자가 해야 할 일은 빠짐없이 해내야겠지.’
제왕학 수업 같은 거창한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적절한 사교 활동을 하고, 적당히 봉사도 하면서, 성황가의 일원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만 보이면 되는 거 아니겠나.
[그렇다면 이미 늦은 거 아닐까? 이성진 넌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닥쳐!’
아무튼 얼마 지나지 않아, 성진은 아멜리아로부터 언질 받은 초대장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머레이 가문과 소르차 가문이랬나…. 이왕 참석한다면 주류 모임이지!’
하지만 초대장들을 다 골라내고도, 어째 선뜻 손이 가는 것이 없었다.
“흠.”
둘 중 어디가 나을지 누님에게 물어볼까? 별 차이 없다면, 그냥 대충 먼저 열리는 데로 가는 거고.
“나머지는 어찌 처리할까요, 저하? 따로 답신을 하실 곳이 있으시면, 행정관에게 일러두겠습니다.”
에디스의 물음에, 성진은 수북이 쌓인 서신들에 시선을 주었다.
많은 황도 인사들이 쓸데없는 안부 서신들을 보내왔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두 사람이었다.
발루아 영애, 클로에.
아멜리아와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 이후로 빈도가 크게 줄긴 했지만, 그 꼬맹이는 아직도 성진에게 다양한 꽃다발과 함께 안부를 묻는 카드를 줄기차게 보내오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로한의 레오나드…….’
성진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래. 워낙 바쁘다 보니 그 자식 일을 잊고 있었네.
-벧엘라.
비밀스러운 인사를 건네 오던, 재수 없는 로한의 제비 자식. 분명 왕족으로서 부족함 없이 지냈을 터인데도, 어딘가 메마른 피비린내를 풍기던 놈이었지.
-별일은 아니오. 그대도 짐작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들과는 조금 인연이 있어 그저 소식을 전할까 했지. 그것을 알고 있소이까? 잊힌 옛 형제들의 그대의 명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소.
당시 놈은 뭔가 음흉한 목적을 가지고 성진에게 다가왔었다. ‘옛 형제들’이라는, 대단히 수상한 세력과 모종의 연관이 있어 보였지.
그리고 성진을 그들과 만나게 하고 싶어 안달 난 듯 굴지 않았던가.
-그럼 혹시 내 친구를 한번 만나보겠소? 그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는데.
-친구?
-그렇소. 그대의 형제들과 직접적으로 접점이 있는 것은 바로 그 친구지. 어렵지만 내 그와의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보리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성진이 지그스문트령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매일같이 만나자는 서신을 보내온 모양이었다.
‘어쩔까…….’
본래라면 일국의 왕자를 이렇게까지 바람맞히는 것이 썩 예의 바른 행동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면 성진은 레오나드를 만나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놈이 말하는 ‘형제들’을 만나는 순간, 대단히 나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 ‘형제들’은 분명, 과거의 모레스, 아니 내 행적과 뭔가 깊은 연관이 있어.’
지금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단체’가 무엇인지 짐작 가는 바가 없지 않았다. 그리고 성진과 어떤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는지도…….
두근-
문득 가슴이 세차게 박동하는 것을 느낀 성진은, 재빨리 그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이렇게 하자. 앞으로 레오나드, 저자에게서 오는 서신은 연무장 한쪽에 따로 모아 놔, 에디스.”
“네? 연무장이요?”
갑자기 내려진 엉뚱한 지시에, 맹한 전담 시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래. 막스의 개집 옆에 말이야.”
성진이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저 재수 없는 것들은 모조리 막스한테 장난감으로 던져줘야겠어. 흔적도 없이 갈기갈기 다 찢어져 버리라지!
“로한의 레오나드 왕자님이라면 최근 소문이 자자하신 그분이시군요.”
성진의 찻잔을 채워주며, 브루노 단장이 힐끔 서신들을 일별했다.
“소문?”
“예. 로한의 2왕자께서 탄신연이 끝나고도 황도에 머무르며, 연회며 사교 모임에 하나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신다고 말입니다. 세간에서는 그가 1왕자와의 후계 경쟁에서 밀려나, 몸을 의탁할 좋은 혼처를 찾는 게 아니냐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이유야 어찌 됐건, 놈의 번드르르한 외모 덕분에 어디를 가든 귀부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나?
“…뭐?”
잠깐, 잠깐만. 그럼 내가 어느 모임을 가든, 레오나드가 반드시 그 자리에 나타난다는 거 아냐?
그것은 조금도 상정해보지 않은 사태였다.
‘게다가 그 제비 자식이 탄신연에서 아멜리아 누님에게 찝쩍거렸던 걸 생각하면…….’
성진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계획을 바꾼다! 그냥 적당한 모임 하나 정도에만 얼굴을 비칠 셈이었는데, 일단 누님이 참석하는 모임만큼은 내가 모조리 따라가야겠어!’
[…진심이냐?]
‘당연하지! 놈에게 철벽 수비란 게 뭔지 제대로 보여줄 테다!’
한데 그러자니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성진이 델크로스에서 지낸 지도 어느덧 수개월. 이제 어느 정도는 이 세계의 상식들을 익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고위층의 ‘살롱’에서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의 교양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점이었다.
‘모임 한 번 정도야 대충 인사나 하면서 넘어간다지만…….’
젠체하는 황도 인사들과 어울려 몇 날 며칠이고 고상한 주제에 대해 떠들어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에서 쥐가 나는 기분이었다.
“대륙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이야기들이 오간다더군요. 거기다 문화‧예술 방면에서는, 델크로스를 넘어 오르토나의 고전 문학과 브르타뉴의 최신 공연 예술까지도 모조리 꿰고 있어야 한다죠?”
“어, 듣기만 해도 벌써부터 귀찮아지는데…….”
이건 황자로서의 평판을 생각해서 참석하자는 취지였는데, 잘못하면 그나마 빈약하게 만회되고 있던 평판까지 갉아먹게 생겼다.
“그렇다면 차라리 사냥 모임 같은 건 어떠십니까? 가을이 다가오니, 황도 근교에서도 소소하게 많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만.”
“사냥이라니, 쓸데없이 뭐 하러 그런 델 가?”
비교적 사냥 모임이 자유로운 남부나 북부와는 달리, 델크로스에서는 ‘사교 행위’로서의 사냥을 그리 곱게 보지는 않았다. 생업이 아닌 살생을 주신께서 ‘죄’라고 이르셨기 때문이라지.
그러니 사냥 모임이 아예 금지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류 모임으로 성장하기는 어렵다는 것.
‘누님도 분명 머레이나 소르차 가문이 여는 살롱 중 하나를 골라 참석하실 테지. 어떻게 간단하게 ‘교양’을 벼락치기 할 방법이 없을까?’
그런데 그때까지도 가만히 듣고 있던 마왕 놈이, 갑자기 성진에게 뜻밖의 의견을 냈다.
[다른 건 몰라도, 최신 공연 예술에 관해서라면 얼뜨기한테 대충 물어보는 건 어때?]
‘응? 브루노 단장?’
그러자 단장이 콧수염을 잡아당기며 떨떠름하게 물었다.
“저하. 어째서 빨강이 님이 말씀하시는 ‘얼뜨기’가 단번에 저라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음? 그거야…….”
[여기서 얼뜨기가 너 말고 누가 있단 말이야? 이 얼뜨기야.]
“정말 너무하시는군요, 빨강이 님.”
단장의 빳빳하던 콧수염이 눈에 띄게 아래로 축 처진다.
최근 드는 생각인데, 설마 이 인간, 그 뾰족한 수염을 계속 오러로 지탱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근데 브루노 단장이 왜?’
성진의 질문에, 마왕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너 전혀 몰랐냐? 이놈이 노래를 제법 잘 불러.]
‘…엉?’
[여자 파트와 남자 파트를 오가면서 틈만 나면 노래를 한다고. 가사 내용이 대충 이어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무슨 공연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그래?’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어도 진주궁에서는 가장 기감이 예민하다 자부하고 있지만, 지금껏 브루노 단장과 함께 지내면서도 그가 노래 부르는 걸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기 때문이다.
한데 마왕 놈의 말에, 단장의 얼굴이 시뻘게지는 게 아닌가.
“…그게 전부 들린단 말입니까?”
[그렇게 떠나가라 노래를 부르는데 당연히 들리지. 너는 이 위대한 마왕님을 뭘로 생각하는 거냐? 이 얼뜨기야.]
“…….”
그리고 성진은 곧 이 일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불러?”
“예, 저하. 주신께 맹세컨대 절대로, 누군가가 그걸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브루노 단장은 부끄러움으로 활활 타오르는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는 한때 회색 역병을 앓은 후, 머릿속에 불완전한 염상 결정이 남았다. 이후로 다른 사람들의 사념을 수신할 수 있게 됐지만, 반대로 남에게 사념을 날리는 것은 불가능한 반쪽짜리 영능력자가 되었지.
한데 그가 심심할 때마다 머릿속으로 부르던 노래가, 알고 보니 온전한 사념의 형태로 동네방네 퍼져 나가고 있었다는 말이다.
“당장이라도 무덤을 파서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군요. 빨강이 님 외에 또 누가 그 부끄러운 것들을 들었을지…….”
“흠.”
성진은 애석한 표정으로 그에게 확인 사살을 해 주었다.
“아마도 아버지랑…….”
쿨럭!
“샤론 경은 확실히 들었을 테지.”
커억!
브루노 단장이 깊은 내상을 입고 비틀거렸다.
[이런 잔인한 놈…….]
‘닥쳐! 누가 먼저 시작했다고 생각하냐? 어?’
어쨌거나 단장은 절절매는 얼굴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었다.
황궁에서 기사단장으로 근무하던 당시, 한창 오페라와 연극에 심취한 적이 있다나? 그래서 봉급을 받는 족족 베르트랑 거리의 모든 공연을 보러 다녔다고 한다.
“최근에도 이따금 시간이 나면 공연을 보곤 합니다. 참으로 송구합니다.”
아니, 자기 시간과 돈을 들여 취미 활동을 한다는데, 송구할 것까지야.
‘단장, 멜보른 차에 진심이더니, 공연 예술에도 조예가 제법 깊었던가?’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지.
황궁에서 유일한 평민 출신 기사단장이라 들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만나 본 기사단장들 중 가장 귀족적인 취미를 가진 듯 보였다.
대체 그동안 빈민가에서 답답해서 어떻게 살았대?
‘나도 들어볼 수 있을까? 그 오페라 노래라는 거.’
[내가 염상결정 속에서 한번 중계를 해 볼까? 영안을 중계하는 것처럼.]
‘그래, 좋아.’
그래서 성진은 무척이나 해맑은 얼굴로, 단장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럼 단장. 지금 여기서 한 곡 불러 볼 텐가?”
단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 * *
일생에 오직 한순간이라도
그녀의 꽃 같은 숨결을 마실 수 있다면
그녀의 가련한 박동을 느낄 수 있다면
아아, 나는 그대로 죽어도 좋으리-
생에 더 이상의 여한은 없으리-
간절한 사랑 노래가 응접실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물론 다른 이들은 들을 수 없는, 오직 마왕과 성진만이 감지하는 목소리다.
“오오. 훌륭한데?”
성진은 솔직하게 감상을 내뱉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노래는 브루노 단장이 직접 부르는 것이 아닌, 그의 기억 속 노래를 녹음기처럼 재생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음정 박자가 꽤 정확한 걸 보면, 단장의 음악적 재능이 제법 괜찮은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멀었어. 다음 파트에서 여인이 답하는 부분이 진정한 하이라이트지. 자 얼뜨기야, 어서 계속해 봐.]
“그래, 단장. 더 해봐.”
“…….”
그러자 브루노 단장은 깊은 고뇌에 휩싸였다.
어렵게 재기한 인생, 어떤 식으로든 은인인 모레스 황자를 위해 바치리라 결심하긴 했지만.
‘과연 이대로도 좋은 것일까?’
하지만 기대로 반짝거리는 어린 황자의 시선을 차마 저버릴 수가 없다.
그렇게 단장은 구슬땀을 흘리며, 최근 가장 유행하는 오페라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완창해냈다.
[좋아. 바로 이거지!]
“정말 대단해, 단장!”
짝짝짝짝!
마왕과 성진이 열렬하게 환호하는 와중-
“대단하다니, 무엇이 말입니까, 저하?”
에디스가 막스를 응접실로 데리고 들어오며 물었다. 슬슬 저녁에는 궁에서 지내는 훈련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성진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 그냥. 노래를 좀 듣고 있었어.”
“…네? 노래요?”
사념을 전혀 들을 수 없는 전담 시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웡!
막스가 힘차게 짖더니, 바닥에 쌓여있는 서신들을 코로 툭툭 건드렸다.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인지 눈치를 보는 것이다.
“그래. 괜찮아.”
성진의 허락이 떨어지자, 막스는 신이 나서 서신 사이로 뛰어들었다.
후두두둑-
알록달록한 서신들이 응접실 바닥에 이리저리 흐트러진다.
“아아, 청소가…….”
에디스가 탄식하고 있는데, 눈치를 보던 막스가 서신 하나를 물곤 성진에게 다가온다.
마냥 귀엽다는 듯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성진이, 서신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막스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응? 그래, 막스. 이게 마음에 드니?”
웡!
“그렇구나. 너 사냥 가고 싶어? 나랑 같이 여기 갈래?”
웡웡!
“그래, 가자!”
“…저기, 저하?”
아까는 분명, 쓸데없는 사냥 모임 따위는 가지 않으신다고…….
브루노 단장은 처량한 얼굴로 한탄했다.
‘그럼, 지금까지 나는 대체 왜…….’
Chapter 36: Chapter 336
Chapter Text
336. 살롱 (6)
막스를 데리고서 적당한 사냥 모임에 간다. 그리고 아멜리아 누님이 참석하는 살롱에는 무조건 따라가는 거야!
그렇게 결심한 성진이었지만, 의외로 아멜리아가 고른 것은 머레이나 소르차 가문의 살롱이 아니었다.
“캐도건이요?”
“그래. 캐도건 남작과는 탄신연에서 약간의 친분을 다졌단다.”
캐도건 남작은 황도에서 출판 사업을 주도하는 자다. 주로 성회에서 의뢰하는 ‘경전 동화’를 발간하고, 브르타뉴 왕국과 아세인 공국으로부터 여러 서적들을 수입한다나.
덕분에 그녀의 살롱에는, 대륙 서부와 관련된 행정 실무자들이나 중소상단 자제들이 주로 모여든다고.
“……?”
“캐도건 남작이 주최하는 살롱은 꽤나 알찬 모임이란다. 서부 정세에 대한 최신 정보들이 오가곤 하지.”
하지만 그러한 설명에도 성진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에게 처음부터 주류 모임을 권유한 걸 생각하면 의외의 선택이라 느껴졌으니까.
물론 아멜리아는 동생을 차기 황태자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큰 모임에서 영향력을 넓혀가길 바랐던 것이지만.
반면 그녀 스스로는 황도 고위층 인사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생각은 없었다. 실속이 없기도 하거니와, 자칫 그들에게 황위를 노린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니까.
아멜리아는 로한을 비롯한 서부 국가들의 정세를 파악할 수 있는 인맥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나는 클라노스가 될 테니까.’
언젠가는 마사인 경처럼, 황위 경쟁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델크로스를 위해 일하는 것. 그것이 아멜리아의 소박한 꿈이었다.
대개의 황도 인사들은 아멜리아가 브르타뉴나 로한의 왕비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 생에서만큼은 타국으로 시집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미 주변국들에 강력한 내정간섭을 하고 있는 신성제국이, 새삼 자신의 국혼으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크지 않다고 봤으니까.
‘게다가 타국의 왕족과 결혼을 하게 되면, 레오나드를 향한 복수의 길은 더욱더 멀어지게 될 거야.’
아마도 그곳에서 새로운 기반을 갈고닦기 위해 수년간 허송세월하게 될 테지.
설령 운이 좋아 든든한 입지를 확보한다 해도, 타국에서 온 왕비가 로한을 향해 과연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반면 델크로스에는 아멜리아의 힘이 되어 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황태자가 될 모레스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님 폐하 또한 물심양면으로 자신을 도와주실 테지.
‘그러니까 클라노스가 되어 정정당당하게 선발 시험을 치고, 외교부에서 차근차근 실력을 키워 갈 거야. 종래에는 홀로 로한의 내정을 총괄하면서, 적절한 순간 강한 압박을 가할 수 있도록.’
델크로스의 위세를 등에 업는 것이 비겁한 짓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정당하게 그녀의 손에 쥐어진 명검을 구태여 아낄 필요가 어디 있는가.
‘조금만 기다려, 레오나드. 제국을 위해, 황위에 오를 모레스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네가 가진 모든 것들을 철저히 빼앗아 주겠어!’
그리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게 해 주리라.
그렇게 모든 복수가 끝나면, 아멜리아는 여생을 델크로스에서 가족들과 보낼 생각이었다.
‘소중한 가족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아. 모레스와 아버님 폐하 그리고 성황가의 모두가 내 곁에서 함께 할 테니까!’
아멜리아는 주먹을 불끈 쥐며 조용히 의지를 다졌다.
한편,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성진은 조금 엉뚱한 생각을 했다.
‘누님, 어쩐지 의욕이 넘치네? 또 어딘가의 성벽을 부수는 상상을 하고 있나?’
* * *
캐도건의 살롱은 타운하우스에서 열렸다. 황도의 어지간한 인사들은 모두 그곳에 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개의 모임이나 연회는 곧잘 타운하우스에서 열리곤 했다.
“아멜리아 저하, 모레스 저하. 이렇게 찾아주셔서 더없는 영광입니다.”
캐도건 남작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성황가의 자제가 둘이나 참석했음에도, 그녀는 여유 있는 태도로 성진과 아멜리아를 자리로 이끌었다.
“최근 로한의 주류 산업 성장세는 놀라울 정도요.”
“하지만 아직은 질로 보나 양으로 보나, 브르타뉴의 와인들을 넘어설 수 없지.”
“글쎄, 어떨 것 같소? 증류주만으로는 이미 로한을 따라올 나라가 없는데. 두고 보시오. 아마 앞으로 10년 안에, 로한은 대륙의 주류 산업을 선도하게 될 거요.”
모임은 꽤 격이 없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구성원 대부분이 실무자다 보니, 업계 분위기나 서부 정세에 관한 직접적인 감상들이 가감 없이 오간다.
덕분에 온갖 교양 상식을 방패로, 날 선 귀족 화법이 오가리라 예상했던 성진은 한시름 놓았다. 요 며칠간 줄기차게 최신 오페라들을 열창해 준 브루노 단장한테는 조금 미안했지만.
“캐도건 남작은 황도에서 구하기 힘든 희귀 도서들을 많이 구입해 준단다. 어디 그뿐이니? 새로운 ‘경전 동화’가 발행되면, 가장 먼저 은장미궁으로 보내주곤 하지.”
“그렇군요.”
누님이 동화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도 이 사람 덕분인 모양.
그렇게 살롱의 주인과 아멜리아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성진은 무알콜 음료를 홀짝거리며 편안하게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놀랍게도 이 세상은 인쇄술이 비교적 발달되어 있었다. 책 가격이 꽤 높긴 하지만, 그래도 필사 시대에 비할 바는 아니라는 말이다.
심지어는 판화로 새겨진 정교한 삽화까지도 존재했다. 문학과 사상이 활발하게 꽃피던 옛 오르토나의 영향이었다.
“역사에 다시없을, 진정한 인문학의 요람이었습니다. 작금에는 그 역할을 브르타뉴가 일부 하고 있습니다만.”
오르토나의 멸망이 안타까웠던 캐도건 남작은, 그곳에서 도망친 인쇄 기술자들을 대거 받아들여 출판사의 덩치를 키웠다고 한다.
“아, 아멜리아 저하! 그러고 보니 마침 좋은 때에 방문해 주셨습니다!”
한동안 대화를 이어가던 남작이, 갑자기 뭔가를 떠올렸는지 집사에게 슬쩍 눈짓을 한다.
지시를 받은 노집사가 잠시 후 그들에게 가져온 것은, 성진에게도 꽤 익숙한 종류의 동화책이었다.
“오늘 새로운 출판물이 나와 가져 왔습니다.”
“또 다른 경전 동화군요?”
“네, 그렇습니다.”
인문학의 요람이었던 오르토나나 유명한 대학이 많은 브르타뉴와 달리, 델크로스의 서적 출판은 그 가짓수가 상당이 제한되어 있었다. 일단 성회의 검열을 거쳐야 했고, 조금만 구미에 맞지 않아도 이단 재판부의 소환을 받았으니까.
덕분에 경전의 일화를 재미있게 재구성한 ‘경전 동화’ 정도가, 황도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출판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었다.
그래도 쉬운 구성과 아름다운 삽화 덕에, 황도 신민들에게 제법 인기를 얻고 있다고.
-성 바스티안과 손가락 악마
아멜리아가 새 책의 제목을 쓸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스티안 성인의 이야기요? 의외로군요. 이번 출판물은 분명 성녀 그라지에의 일화일 거라 생각했는데요.”
성 바스티안은 경전에서도 극적인 장면들을 많이 만들어내기로 유명했다. 아름다운 외모까지 더해, 출판 동화로 대단히 인기가 많은 성인이지.
그럼에도 ‘경전 동화’는 다섯 성인들을 비교적 골고루 다루려 노력했다.
이는 제국 각 부처나 성기사단에서 주력으로 밀고 있는 성인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자신의 성인이 조금이라도 소홀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되면, 추기경이나 사제들로부터 항의가 빗발치니까.
아멜리아가 의아해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성 그라지에의 축일이 지난 지가 오래였지만, 돌연 ‘은총의 기사’ 이야기가 화제가 되면서 그라니우스의 [신기한 대륙 탐방기]에 출판 순번이 밀리고 만 것이다.
“정교회의 특별한 요청이 있었습니다. 마침 성 바스티안의 축일도 머지않았으니, 이해 못 할 일은 아닙니다만.”
남작의 설명에도 의문은 쉬이 가지실 않았다.
‘새로운 성녀의 취임도 있었고. 이번에야말로 그라지에 성녀의 동화가 출판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리고 책을 두어 장 넘겨본 아멜리아는 더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거대한 개는 성인을 태우고 바람처럼 달렸습니다.
-손가락 악마의 부하들을 훌쩍 뛰어넘고 다섯 개의 언덕을 쏜살같이 지나, 마침내 성 바스티안은 대륙의 가장 높은 설산에 도착했답니다.
아멜리아가 고운 아미를 슬그머니 찌푸렸다.
“…개?”
“왜 그러십니까, 누님?”
“아니, 내용이 조금 의외구나.”
“……?”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성진을 위해, 캐도건 남작이 설명해 주었다.
“경전에서는 성인께서 바람을 타고 설산으로 날았다고 간단히 기술하고 있죠. 물론 민간에서는 ‘바람’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짐승이었다는 구전도 전해지긴 하지만요.”
짐승을 타고 달렸다는 내용이 일반적인 해석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바람이면 바람이고, 짐승이면 짐승이지. 왜 콕 집어서 개?
“…성회에서 정식으로 출판 승인을 받은 도서입니다. 아무 문제 없는 내용이지요.”
남매의 의아한 얼굴을 마주한 캐도건 남작이 지레 대꾸했다. 하지만 스스로도 그리 자신이 없는 듯 부쩍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흠…….”
성진은 아멜리아의 어깨 너머로 동화책을 들여다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성진은 일단 이 이야기가 꽤 마음에 들던 차였다. 정교하게 그려진 삽화 속 개의 이미지가, 어딘가 막스를 많이 닮아 있었으니까.
“그림이 귀엽네요. 우리 막스에게도 보여주고 싶습니다.”
“아? 정말 그렇구나! 네가 데려온 늑대개와 많이 닮았어,”
성진의 말 한마디에 의문을 완전히 던져버린 아멜리아가, 마치 꽃이 피어나듯 화사한 웃음을 보인다.
“다시 보니 그냥 바람보다는, 개 쪽이 귀엽고 좋은 것 같구나.”
“그렇죠? 더욱 극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누님.”
“그래. 대담하게 각색한 이유가 다 있었던 거야.”
황녀의 빠른 태세 전환에, 캐도건 남작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풍문과 달리 두 분이 친하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하지만 아름다운 남매의 사심 없는 미소를 정면에서 마주하게 되자, 남작은 저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 웃고 말았다.
“이것이 마음에 드신다면, 모레스 저하를 위해 한 권 더 가져오겠습니다.”
* * *
대화는 꽤 늦게까지 이어졌다.
덕분에 성진과 아멜리아가 살롱을 막 나섰을 때는, 어느덧 깊은 밤이 되어 하늘에서 밝은 별들이 총총 빛나고 있었다.
“어떠니, 모레스? 이런 작은 살롱의 분위기도 꽤 괜찮지 않니?”
아멜리아의 물음에 성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작은 살롱이고 뭐고, 애초에 이런 모임 자체가 처음이었으니 비교할 것이 있나.
물론 예전에는 자신이 리카르도 스카르차피노의 모임에 자주 다녔다고 들었지만, 기억에 아예 남아있질 않으니까.
“나름의 성과는 있었습니다.”
성진은 어깨에서 미끄러지는 그녀의 외투를 추슬러주며 대꾸했다.
그래. 귀여운 동화책도 얻었고. 무엇보다도 ‘사교 모임의 저주’ 징크스가 사라졌다는 것이 꽤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잠시 입구에 서서 신선한 공기를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요? 캐도건 남작. 앞으로도 두 분이 계속해서 우리 모임에 나오시는 거요?”
멀리서 심상치 않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제법 먼 거리에서 이뤄지는 대화라, 오러로 청력을 한껏 돋워야 했지만.
“예의상 보낸 초청에 정말로 응해주실 줄은 몰랐소. 하지만 두 분 저하께서는 아마 모임의 좋은 구성원이 되실 거요.”
“하! 설마 그럴 리가? 우리 모임의 장점은 어디까지나 격식 없는 의견 교환에 있었소! 종교와 제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대화의 장이었지. 한데 이제는 다 끝이오!”
“진정하시오, 앨튼 상단주. 두 분 저하께서 자리를 뜨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소.”
성진은 비교적 무난한 만남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살롱의 오랜 멤버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었다.
“우리 모두가 신성 제국의 민낯을 알지 않소! 주신에게, 그리고 강력한 신의 대리자에게 억압되어 어떠한 정신적 자유도 가지지 못하는 황도 신민들을! 한데 이제는 이런 사사로운 모임에서까지 성황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거요?”
“상단주. 성황 폐하께서는 신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으셨소.”
“과연 그럴까? 타국을 오가는 상인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소! 지금 황도의 상황이 절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수위를 넘어서는 범죄는 절대 일어나지 않고, 신민들 모두가 그저 온순한 양이 되어 주신을 연호할 뿐이오! 이게 과연 정상이라 보오?”
“그건 그렇지. 다른 나라들은 절대 이렇지 않아. 어디 신민들뿐인가? 성황가 사람들도 이상한 것은 마찬가지네. 황위 계승권자들이 이렇게나 많음에도, 지금껏 잡음 하나 들리지 않는 것이 가능하냔 말이지.”
저자들이! 발언의 수위가 조금씩 강해지자, 성진은 인상을 쓰며 아멜리아의 팔을 끌어당겼다.
당장 이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혹시나 저들의 언성이 높아져, 누님이 듣게 되는 사태만은 막고 싶었으니까.
“모레스.”
한데 아멜리아가, 그런 성진의 손을 다독이며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녀는 그들의 대화를 진작 듣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은 수련 기간이 길지 않아 오러 총량이 많진 않으나, 아멜리아가 오러를 이용하는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니 청력을 한껏 돋우는 것쯤은, 그녀에게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
“저들의 말에는 너무 신경 쓰지 말렴.”
하아.
아멜리아가 시원한 공기를 들이켜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델크로스의 현재 상황이 얼마나 이상한 건지 모르지 않는단다. 공화정을 열었던 오르토나는 차치하고라도, 키프로스나 브르타뉴, 심지어는 로한조차도 이미 제도나 문화에서 오래전에 제국을 앞서 나가고 있어. 그럼에도 어째서 그들은 속절없이 낡은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걸까?”
“…….”
“강력한 군사력? 아니란다. 조각조각 나뉘어 좋을 대로 움직이는 기사단들을 보렴. 이처럼 비효율적인 군대를 운용하는 곳은 제국 외에 다시없어. 주신을 향한 강한 믿음? 그것도 아니지. 타국의 왕족들은 주신을 그저 내정간섭의 구실로밖에 여기지 않거든.”
성진은 쓸쓸하게 울려 퍼지는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바로 아버님 폐하란다.”
“…….”
“이 비효율적이고 불완전한 제국을 지탱하는 힘이, 신민들의 마음을 한데 규합하고 이끌어가는 힘이, 아버님 폐하, 오직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이야.”
지구에서 살았던 성진은, 부조리로 가득한 천년의 제국이 아직도 존속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기이한 현상인지를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렇기에 협정에 묶이기 전의 아버지는, 어떻게든 제국의 근본을 바꾸기 위해 급진적인 정책들을 펼치려 들었으리라.
‘만약에…….’
만일 이 세상에 성황이 없었다면, 아니, 지금이라도 그가 제국의 유지를 완전히 포기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갈등이 싹틀 것이다. 제국은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무너져 내리리라. 그럼에도 그것이 정말로 정상적인, 인간들의 세상인 것이다.
“한데 얼마나 다행한 일이니.”
허공을 향한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고요히 타올랐다. 온화하고 상냥하기만 한 평소와 달리, 절제된 분노와 광기가 혼재한 깊고 깊은 눈동자.
“이 모든 부조리를 눈앞에 두고도, 내가 마음 편히 거기서 눈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이.”
레오나드.
아멜리아는 그자가 시작하여 마침내 대륙 전체를 집어삼켰던 무자비한 전화를 기억한다. 그 피로 물든 하늘과, 죽음만이 가득했던 대지.
델크로스가 내재한 어둠이 아무리 깊고 거대하더라도, 단연코 그때의 세상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으리라.
“그자가 조금도 의심할 여지 없는, 세상 최악의 해악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기쁜 적이 없었단다.”
성진에게는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아예 짐작 가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그는 수개월 전의 일을 떠올렸다. 아마도 아멜리아와 처음으로 식사를 함께하며, 그녀의 상담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던 일을.
-끝에 이르지 못한 복수는 그저 허망한 것이라 여겼단다. 하지만 진정한 복수란 것은 결과뿐만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로도 삶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구나.
복수.
그날의 대화 이후, 줄곧 누님을 사로잡고 있던 단 하나의 명제.
“그래서 내가 제국의 안위보다도 ‘복수’를 우선한다 해도, 마음에 한 점 거리낌이 없구나.”
그 혹독했던 지그스문트령의 일들조차 이미 잊어버리다시피 넘어갔던 아멜리아다.
그런 그녀를 이렇게 불타오게 만드는 자가 누구란 말인가. 대체 누님에게 무슨 짓을 했던 거지?
“…네. 맞습니다.”
하지만 성진은 그놈이 누구인지 굳이 묻지는 않았다.
복수의 과정은 오롯이 누님의 몫. 그녀가 베어 물 달콤한 과실이다. 내가 아는 아멜리아 누님이라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빈틈없는 복수를 해낼 테지. 난 알 수 있어.
‘그리고 그자가 누구든, 그렇게 죽음에 이르게 된다면…….’
그다음이 바로 나의 차례.
놈의 영혼은 영원히 안식에 들지 못하리라. 내가 아는 인간들 중 가장 가엾고도 가여운 영혼이 되어, 언제까지고 지독한 고통 속을 헤매게 될 테지.
‘놈에게는 지그스문트 백작 부인에게 베풀어진 그 일말의 자비조차 허락되지 않을 테니까!’
Chapter 37: Chapter 337
Chapter Text
337. 사슴 사냥 (1)
의식과 무의식을 가르는 둑은 생각보다 높지 않아서, 강하게 밀려드는 감정이나 의지에 때때로 쉽게 범람이 일어나곤 한다.
“…모레스.”
아멜리아는 아까부터 어딘가 낯설어 보이는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표정이 씻겨 내려가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무표정해진 그의 얼굴은, 무감각함을 넘어 무기질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 생기 없는 얼굴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 이따금 허공을 향해 일렁이는 희미한 은회색의 안광뿐.
“모레스.”
아멜리아가 재차 이름을 부르자-
깜박.
그에 반응하듯 눈꺼풀이 천천히 움직이나 싶더니, 잠시 감춰졌다 드러난 눈동자에 일순 강력한 감정이 어린다.
그것은 묘한 절박감이었다. 마치 어딘가에서 벗어나려는 듯, 동시에 뭔가를 끝끝내 놓치지 않으려는 듯 보이기도 하는 양가적인 감정.
깜박.
하지만 그가 두 번째 눈을 깜박였을 때, 황자의 눈은 어느새 평소의 말간 회색빛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네, 누님.”
“…….”
“왜 그러십니까?”
아멜리아는 불안한 얼굴로 그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뭔가 고민이라도 생겼니? 갑자기 표정이 지나치게 어두워 보여서 걱정했단다.”
“……?”
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했더라?
“아! 별거 아닙니다. 그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전에 누군가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평소 누님이 부수고 싶어 하는 성벽의 주인이 혹시 그 복수의 대상인가요?”
아멜리아는 일순 당황했지만, 곧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단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죠. ‘나중에 누님이 성벽을 때려 부수는 힘으로 그놈을 치시면,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하고요.”
“그러니?”
물론 아멜리아 역시 이 분노의 감정을 쉽게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복수심이니, 동생에게는 꽤 뜬금없이 느껴지기도 했을 테지.
그런데 이어지는 그의 말이 의외였다.
“누님. 복수할 상대가 누구든, 부디 손속에 사정을 두고 살살 치십시오. 안 그러면 몇 대 못 때리고 놈이 죽어버리지 않습니까?”
응?
아멜리아가 눈을 깜박거렸다.
“살살?”
“네. 설마 한 대만 때리고 마실 건 아니죠? 치료해 가면서 두드려 줄 수 있다고 해도, 상대가 일격에 죽어버리면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
아아, 그렇구나.
아멜리아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상대가 기대 이상으로 약할 수도 있다는 거구나! 하지만 적당히 때리고 치료해 주면, 꽤 오래 복수할 수 있는 거야. 넌 정말 대단해, 모레스!”
하하, 뭘요.
아마 로건이나 시슬레에게 말씀하시면, 걔들은 기꺼이 누님을 도우려 할걸요?
“아니면 마물 전담반의 날라리 인퀴지터, 발레리 경을 빌려드리죠. 복수의 대상이 누가 되었든, 아마 진정한 지옥의 끝을 선사해 줄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생각이구나. 고마워, 모레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란히 미소 짓는 남매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워, 남작가의 사용인은 힐끔힐끔 그들을 훔쳐보며 내심 경탄해 마지않았다.
오직 멀리서 남매의 속삭임을 듣고 있던 마사인 경만이 조용히 식은땀을 흘리며 이렇게 생각했을 뿐.
‘지금까지 모레스 황자님을 보필하는 데 있어서 부족함이 너무도 많았구나! 이제부터는 저하의 정서 교육에도 더욱 신경 쓰지 않으면……!’
두 분의 사이가 전보다 좋아진 것은 다행이지. 한데 어째서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나쁜 영향만을 미치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 *
‘일이 모조리 틀어져 버렸어!’
다음날 오전.
부지런히 교외의 접선 장소로 향하던 앨튼 상단주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이대로는 [인형사]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 없다!’
앨튼 상단주, 캐런 로슨은 악마계약자였다.
상인 연합에 소속되어 있는 상단주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녀는 젊은 시절 악마와 계약하여 현재의 부를 거머쥐었다.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빠르게 요직에 오른 후, 상단주와 후계자들을 차례차례 저주로 죽여 자연스럽게 상단주 자리를 꿰찬 것이다.
한데 그것이 다였다.
일단 상단주가 되자 그녀는 수시로 황도를 오가야 했는데, [은총]의 범위 안으로 무사히 들어오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악마와의 소통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악마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는 자연스레 줄어갔다.
순수하게 자신의 수완만으로 상단을 키우기에는, 들어가는 노력과 시간이 영 만만치가 않았다. 그렇게 상단 운영에 지지부진하던 차에, 악마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그 [인형사]가 접근해 온 것이다.
‘대륙 서부의 국가들, 특히 로한을 오가는 상단주와 행정부 실무자들을 원합니다. 그들을 조종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인형사는 목표물들이 한데 모이는 캐도건 남작의 살롱에 참석하여, 특별한 지령을 수행할 것을 의뢰했다. 그녀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보상을 제안하며.
그렇게 캐런은 [인형사]와 손을 잡고, 다시 한번 부를 거머쥐기 위한 도약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설마, 설마.
그날 하필이면 성황가의 자제들이 둘이나 참석하게 될 줄이야!
덕분에 회원 전체를 저주로 옭아매려던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캐런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결국은 대단히 낭패한 심정으로 접선 장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군요.”
그리고 그런 캐런을 마주한 것은, 싸늘한 표정을 한 반가면의 남자.
바닥에다 뭔가 복잡한 도형들을 그리고 있던 로메인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타박했다.
“당신을 믿고 중요한 일을 맡겼습니다만, 무척이나 실망스럽습니다. 약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구겨버렸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봐도 좋겠습니까?”
“자, 잠깐! 나에게도 다 사정이……!”
한데 그녀가 섣불리 로메인에게 다가서려 들자, 그가 휙 고개를 돌리며 날카롭게 외쳤다.
“건드리지 마십시오!”
“……!”
“이 회로를 절대 망가뜨려서는 안 됩니다. 규상 세계의 법칙에 속하는 회로지만, 임시로 그린 만큼 지금은 대단히 불안정한 상태란 말입니다!”
규상 세계?
캐런은 당황한 얼굴로 오두막 바닥에 그려진 복잡한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규상 세계의 법칙! 그 불가해한 것들을 인간이 맨손으로 그려냈다고?]
머릿속에서 그녀와 계약한 악마가 경악한 듯 소리쳤다. 황도를 멀리 벗어난 접선 장소에 이르자, 임의로 그녀와의 연결을 회복한 것이다.
[분명 이오니아 멸망과 함께 사라진 기술일 텐데. 대체 저 ‘인형사’의 정체는 뭐지?]
하지만 캐런은 그런 것 따위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반가면의 남자가, 당장이라도 뭔가를 저지를 듯 위험한 기세를 풍기기 시작했으니까.
“자, 앨튼 상단주. 잘도 제 계획을 망쳐 주셨습니다. 혹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헉!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캐런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깐만!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오! 당신의 지령은 절대로 시행 불가능한 일이었단 말이오!”
“변명은 됐습니다. 고작 작은 마법 물품 하나를 몰래 발동시키는 것이,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나 하는 생각밖엔 들지 않는군요.”
“모르는 소리! 어제저녁 모임에 누가 참석했는지는 알고 있소? 바로 성황가의 1황녀와 3황자가 왔단 말이오!”
“호오……?”
그제야 남자의 기세가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인형사, 당신도 분명 알 것 아닌가! 델크로스 차원의 인간과 계약하는 악마들에게 절대 금기시되는 것들을!”
첫째. 악마의 힘으로 인간을 해치되, 인간의 능력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말 것.
둘째. 악마의 힘으로 사회를 혼란시키지 말 것.
셋째.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성황의 아이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 것.
특히 세 번째 사항을 어긴 악마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끔찍한 최후를 맞지 않았던가!
“아시겠소? 내가 거기서 계획대로 일을 벌였다간, 과연 성황이 어떻게 나왔을 것 같소?”
그런 소규모 모임에서 황자‧황녀를 만나다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어찌나 당황했던지, 주최자인 캐도건 남작에게 과하게 화를 낸 감도 없지 않았으니까.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어디까지나 약속.”
로메인은 자신이 완성한 회로를 마지막으로 찬찬히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그대의 군주 앞에서 직접 맹세했던 약속이 아닙니까?”
“……!”
캘런 로슨의 얼굴이 공포로 파랗게 질렸다. 로메인의 지적에, 그녀와 계약한 악마가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상인 연합의 인간들은 대부분 부와 명예를 위해 악마와 계약하기 마련. 따라서 그들이 계약한 악마들은 대부분 탐욕, 즉 [기아의 군주]의 권속들이었다.
그리고 탐욕은, 자신의 명을 어긴 권속을 곱게 내버려 둘 정도로 어진 군주가 아니었다.
“해명을! 부디 기아의 마왕께 한 번만 해명할 기회를 주시오! 나는, 나는……!”
그녀의 필사적인 외침에, 로메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상대가 델크로스의 성황이었으니까요. 저는 당신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니 특별히 만회할 기회를 드리죠.”
마침내 회로를 모두 검토한 듯, 로메인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반가면 아래의 입술이 흡족한 듯 크게 휘어진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이제 당신에게 다음 기회란 것은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사정사정해서, 캐런은 겨우 [인형사]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다. 탐욕께 잘 말해 주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그의 다음 요청은 무엇이든 [수락]하라는 새로운 지시와 함께.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지령이었다.
‘대체 그 작자는 무슨 생각이지?’
하지만 의문이 풀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창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던 그녀의 눈앞에, 갑자기 흐릿한 창 하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로 향하는 □털이 열□습니다. 이동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캐런 로슨은 눈을 비볐다.
‘…이게 뭐지?’
반사적으로, 무엇이든 [수락]하라는 인형사의 지시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런! 어서 거절해라, 캐런! 완전히 깨져버린 법칙이 아니냐!? 저런 불완전한 코드에 휘말리게 되면, 자칫 [미궁]에 빠져 영원히 탈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뒤늦게 귓가에서 악마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다. 그녀의 의식은 저도 모르게 [수락]을 선택하고 있었으니까.
시야가 순식간에 휙 하고 멀어져간다.
‘헉!’
뿅!
아찔한 추락감이 끝난 뒤 질끈 감았던 눈을 떠 보니, 놀랍게도 캐런은 아까의 접선 장소로 돌아와 있었다.
먼지투성이인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드니, 반가면의 남자가 싱글싱글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커다란 수정 구슬을 소중히 들고서.
“이게 대체……?”
“흠. 좋습니다. 이제야 제대로 작동하는군요.”
로메인은 지금까지 수차례 ‘임시 포털 생성기’를 사용해 이단 재판부의 죄수를 이동시켰다. 그러나 그들 중 절반가량의 영혼을 놓쳐버리는 통에, 이동 장소를 특정하는 데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
그렇다고 너무 많은 죄수들을 빼돌리면, 성황이 눈치를 챌 것이 빤했다.
그래서 다음으로 생각해 낸 것이, 이동 장소를 한쪽으로 왜곡시키는 보조 회로였다. 성공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했지만, 수일간의 삽질 끝에 결국은 성공하고 말았지.
‘이제 이것으로 황녀를 빼돌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단지 장소를 특정할 수는 있어도, [수락]을 선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의지.
‘그렇다면 아예 선택의 여지를 없애면 되는 거지.’
레오나드가 황녀를 구슬릴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녀의 마음을 빼앗는 데 실패한다면-
‘어떻게든 황녀를 막다른 길로 몰아, 어쩔 수 없이 [수락]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수밖에…….’
* * *
한편 같은 시각, 황궁.
찻잔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네이트가, 뭔가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음?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놈이 천진한 얼굴로 물어온다.
“아니, 아무것도…….”
어째서인지 등줄기에서 오한이 일었다.
왜지? 아이들은 얌전히 황도에서 보호받고 있고, 최근에는 삿된 것들의 움직임도 상당히 뜸해졌건만. 왜 이렇게도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걸까?
“네가 또 뭔가를 한 게냐, 모레스?”
“…네?”
그러자 사고뭉치 아들놈이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곧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네. 그러니까 방금 사냥 모임 가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저 사슴 사냥하러 갈 겁니다.”
“사슴…….”
“네. 마침 요즘이 이른 사슴 사냥철이라던데요? 그러니까 먼저 가서 사슴이란 사슴은 싹 쓸어 오려고 말입니다.”
“…….”
어쩐지 대단히 불안한 기분에 휩싸인 네이트가 물끄러미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비의 속도 모르는 이 철없는 아이가,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아, 걱정 마십시오. 저 이번에는 정말 사고 안 칩니다! 마사인 경이랑 상주기사들이 알아서 다 해줄 거예요. 저는 절대 직접 사냥하지 않고, 그냥 막스랑 사냥터에서 놀다 오기만 할 거라고요!”
괜찮은 생각이죠?
뿌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아들놈이 호로록 차를 들이켜더니 아, 하고 덧붙인다.
“가능하면 멧돼지도 잡아 오라고 할게요!”
“…….”
정말, 정말 이 아이를 이대로 보내도 괜찮은 것일까…….
네이트는 천천히 한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Chapter 38: Chapter 338
Chapter Text
338. 사슴 사냥 (2)
“그나저나 도시락은 좀 어떠십니까? 입에 맞으십니까?”
오늘 다과상 위에는 새로운 요리가 올라와 있었다.
예전에 클로디아 경에게 추천받았던 플란도르식 정통 돼지고기 파이. 당시 꽤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어서 싸 왔지.
‘치즈를 곁들이는 게 좋다고 했었나?’
그렇게 사이드 메뉴까지 손수 풀어놓은 성진이, 조금 긴장하며 성황의 반응을 기다렸다.
참연어가 아닌 다른 음식을 준비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매일매일 같은 것만 먹다 보면, 아무리 참연어를 좋아하는 아버지라도 금방 질리지 않겠어?
‘만약에 오늘도 도시락을 먹이는 데 성공한다면, 이제부터는 참연어 도시락 말고도 틈틈이 황도 맛집들을 돌아다니는 거야!’
다행히도 성황은 파이 접시를 천천히 비워냈다. 곰 고기는 썩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의외로 파이 속 돼지고기의 촉촉한 육즙은 마음에 드는 눈치.
좋아, 이건 입에 맞는구나! 기억해 두자.
‘근데 매일 맛집 요리만 먹어도 괜찮을까? 건강에는 그리 좋을 것 같지 않단 말이지. 내가 이 양반의 편식을 더더욱 부추기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
잠시 이런 회의감이 밀려들었지만.
‘뭐, 아예 아무것도 안 먹는 것보다는 낫지. 게다가 강대한 신성력이 있어서 영양소 불균형 따위 크게 문제 되지 않는 양반이잖아.’
그러면 그냥 맛있는 걸 잘 먹는 게 최고 아니겠어?
일단 깨작거리는 밥상머리 버릇부터 고치자! 그리고 나중에 건강식으로 천천히 바꿔 가면 되는 거겠지.
성진은 속 편하게 생각하며, 따뜻한 멜보른을 홀짝거렸다.
“…바서스트 백작의 사냥 모임을 선택한 이유가 있더냐?”
달그락.
잠시 입을 다물고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성황이 식기를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질문을 던졌다.
“음, 이유요? 글쎄요.”
생각해 보면 딱히 큰 이유는 없었지. 그저 막스가 물고 온 서신이 유독 눈에 띄었을 뿐.
반짝이는 걸 유난히 좋아하는 막스가, 금박 사슴이 아로새겨진 초청장에 끌린 것이 분명했다.
“상주기사들이 그러더군요. 바서스트 백작령이 있는 황도 서남쪽은, 숲이 울창해서 사냥감이 꽤 풍부한 편이라고요. 사슴과 노루가 많고, 때때로 곰이나 멧돼지도 출몰한다고 하더군요.”
여러 가지 동물을 잡을 수 있으면 좋잖아? 고기도 다양하게 맛볼 수 있고.
운이 좋으면 마왕 놈이 좋아하는 곰 고기도 확보하는 거다. 지그스문트령에서 가져온 것들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니까.
“하면 며칠간 황도를 벗어나야 하겠구나.”
“네,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사냥 모임은 주최자의 영지에서 수일에 걸쳐 이뤄진다. 그렇다 보니 아예 천막을 치고 사냥터 근처에서 숙박한다고 하던데.
성진은 나름 기대하는 중이었다. 이세계에 와서, 팔자에도 없는 캠핑 감성을 느껴볼 수 있다니!
‘지구에 있을 때는, 뭐 그런 귀찮은 일에 시간과 노력을 쏟나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입장이 완전히 달랐다. 나는 황자잖아?
아마도 천막 치기나 요리하기 같은 잡다한 일들은, 에디스나 상주기사들이 알아서 다 해주겠지, 뭐.
‘난 그냥 막스와 놀면서 여유를 즐기고, 틈날 때마다 명상이나 하면 되는 거야!’
밀로 상단의 조사도 다 끝났겠다, 이제 별로 급한 일은 없었다. 이참에 막스랑 상주기사들에게 기분 전환이나 시켜주지, 뭐.
남아있는 유일한 걱정거리는 아버지의 식사 정도일까. 내가 도시락을 챙겨야 하는데, 교외로 나가 있으면 이 양반은 며칠 동안 굶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일단은 카트리나 단장이 참연어 도시락을 가져다주기로 했지만.’
사실 이런 소소한 일을 부탁하기에, 그녀는 과하게 거물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단장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단 말이지.
그래서 도시락 배달을 부탁하러 갔더니, 프란시스의 반응이 대단히 격렬했다.
-우리 단장님은 신성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기사단 중 하나인 성 아우렐리온의 단장이십니다! 아무리 성황 폐하를 위한 일이라고는 해도, 왜 그분이 시종들이 하는 일을 직접 하셔야 합니까? 차라리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하지만 성진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 성격 더러운 부관이 가져다주는 도시락이라니.
-아버지가 체하면 어쩌려고? 그만둬.
-뭐요? 저하, 지금 그게 무슨 의미십니까? 예?
하지만 정작 부탁을 들은 카트리나는 대단히 기뻐했다.
-그런 중요한 일을 제게 맡겨 주시다니, 더없는 영광입니다, 저하!
-…아니, 단장님?
봐라. 단장은 분명 해 줄 거라 그랬지?
성진은 와락 표정이 구겨지는 부관을 신나게 비웃어 주고는, 의기양양하게 본궁에 도착한 것이다.
“모레스.”
“네, 아버지.”
성황의 얼굴이 어딘지 어두워 보였기에, 성진은 자세를 바로잡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너는 누가 뭐래도 다음 대의 오라클이다. 그러니 네가 무심코 결정했다고 생각해도, 그 선택에는 언제나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선택의 이유?
“알겠느냐? 앞으로도 매사에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느니라.”
“…….”
성진은 이제 그의 냉막한 얼굴에서, 희미하게 스쳐가는 걱정의 감정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하긴, 지금까지 내가 사고 친 걸 생각하면 무리도 아닌가.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먼 곳도 아니고 황도 근교입니다. 마사인 경과 상주기사들도 왕창 데려갈 거예요.”
“…….”
“저는 상주기사들한테 다 맡기고 그냥 놀기만 할 겁니다. 정말이에요!”
성진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애썼다.
어차피 막스 때문에 말을 타지도 못할 텐데, 제대로 사냥이 가능하겠는가? 소풍인 셈 치고 하루 종일 캠프 안에서 지낼 수밖에.
“설마 캠프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있겠습니까? [사교 모임의 저주] 징크스도 이미 없어졌는데요.”
바로 그때였다. 성황의 눈에서 유난히 밝은 은빛 안광이 번쩍인 것은!
하지만 성진이 그 모습을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성황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아래로 시선을 피했다.
“……?”
그러고 보니 이 양반과 대화를 하다 보면, 종종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찻잔만 멍하니 보고 있을 때가 많단 말이야.
‘지금까지는 그냥 버릇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방금은 마치 뭔가를 급히 피한 듯 보이지 않았나?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한데 모레스.”
“네?”
“직접 사냥한 것들을 먹어본 적이 있더냐?”
음?
“아뇨? 제대로 사냥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요?”
별로 기회가 없었다. 지구에서 헌터로 활동할 무렵에는, 마물들 덕분에 이미 생태계가 아작 난 후였으니까.
뭐, 모레스 시절에는 또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지.
“안 그래도 사슴이나 멧돼지는 먹어본 적이 없어서 기대하는 중입니다. 요리사들이 괜찮은 요리를 만들어 주겠죠?”
“…….”
그러자 성황이 뭔가를 더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뭐든 몸소 경험해 보는 것이 좋겠지.”
“……?”
* * *
“꽤 번거롭군.”
레오나드가 또다시 투덜거린다.
그는 아까부터 술병 하나를 손에 들고, 하릴없이 로메인을 졸졸 따라다니는 중이었다.
“오래 걸릴 테니 굳이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대꾸한 로메인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금 산기슭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이따금 바닥에 뭔가를 바쁘게 그러넣는 중이었다. 그것을 정오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거의 해가 질 무렵이 되어가고 있다.
“그게 다 뭐 하는 일인데?”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적절한 위치에 규상 세계의 회로를 새기는 중입니다.”
“규상 세계? 그게 뭐더라?”
“그것도 이미 여러 번 설명 드렸습니다만…….”
로메인은 지금 아멜리아 황녀를 막다른 길로 몰아넣을 궁리를 하는 중이었다.
일이 잘 풀려서 그녀를 포털로 빼돌릴 수만 있다면, 자신이 그녀에게 직접 [매혹]을 시도해 볼 수 있으리라.
“네가 하는 일들을 보고 있자면, 참 쓰잘머리 없는 것들이 많다고. 일전에 사람들에게 뭔가를 부지런히 심고 다니던 것도, 결국은 다 소용없는 일이 되었잖아?”
속 편하게 지껄이던 레오나드가 병째로 술을 들이켠다. 이쯤 되면 로메인도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왜 제가 이런 번거로운 일들을 하고 있겠습니까? 레오 님께서 처음 계획대로 움직여만 주셨다면, 이런 성가신 작업은 굳이 필요 없었을 테지요.”
황녀의 마음을 사로잡겠다고 그렇게 큰소리를 치지 않았던가.
-아멜리아, 나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부디 [수락]을 눌러줘. 내 사랑.
계획대로 풀리기만 했다면,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이 끝났을 텐데.
하지만 그의 적나라한 타박에도 불구하고, 레오나드는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난 노력했어, 로메인. 황녀가 끝까지 내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면, 그건 절대로 내 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단지 그녀의 취향이 조금 이상할 뿐인 거지.”
“…….”
이 인간과 싸우려는 내가 잘못이지.
로메인은 본신도 아닌 몸에서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넌 아까부터 뭘 그렇게 찾아 헤매는 거야? 그 회로라는 거, 그냥 아무 데나 그리면 안 되는 건가?”
작업을 마친 로메인이 또다시 수풀을 헤집으며 두리번거리자, 레오나드가 그 곁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저는 균열의 흔적을 찾고 있습니다, 레오 님.”
“균열?”
“네, 그렇습니다.”
스르륵. 스륵.
높이 자라난 풀들을 한 손으로 헤치던 로메인이 뭔가를 발견하고는 바닥의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다른 곳과 비교해서 유난히 붉은빛이 짙은 흙바닥을.
“이것을 보십시오.”
“그게 그 흔적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로메인이, 반가면 속의 눈동자를 고요히 빛냈다.
“수년 전 이오니아의 재앙에 휘말려, 하마터면 델크로스 차원이 조각조각 쪼개질 뻔한 흔적이죠. 불완전한 회로를 폭주시키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장소입니다.”
* * *
사냥감을 잔뜩 잡아와서 황궁 냉장고를 채우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성진의 꿈을 단숨에 날려버린 것은 그의 전담 시녀 에디스였다.
“멧돼지를 잡아먹는다고요? 저하, 그건 대단히 무리한 말씀인데요?”
평소 늘 맹한 모습을 보이던 그녀가, 오늘은 어쩐 일로 똑 부러지게 대꾸하는 게 아닌가.
“왜 안 돼?”
“멧돼지 고기가 얼마나 냄새가 고약한지 전혀 모르시는군요. 특이 이 계절에는 암컷 돼지를 잡아도 썩 냄새가 좋지 못해요.”
“…엉?”
성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내가 선임한테 분명히 들었는데? 예전에 보초 서다가 짬밥 먹으러 온 멧돼지를 잡아서, 그날 부대에서 고기 파티가 벌어진 적 있다고. 엄청 맛있었다고 했단 말이야.
하지만 그런 반박에도 에디스는 단호했다.
“누군가 그걸 먹은 적이 있다면, 분명 겨울철이었겠죠.”
…그랬던가?
“아마 그나마도 어린 암퇘지였을 걸요?”
“수컷인지 암컷인지는 못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크기가 작아서 고기가 모자랐다고 한 거 같기도…….”
뭐야. 그 정도로 맛이 나빠?
의문을 담아 바라보자, 마사인이 옆에서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다.
‘어, 망했다. 아버지한테 멧돼지 잡아 오겠다고 큰소리쳐 놨는데.’
물론 그 양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먹었을 것 같긴 한데.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뭐든 몸소 경험해 보는 것이 좋겠지.
그게 그 얘기였나 보다. 성진이 워낙 기대하는 듯 보이니까, 차마 진실을 말해주지 못한 모양.
잔뜩 실망하고 있는데, 에디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독한 술과 향신료로 어떻게 요리하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맛있어지는 것은 아니죠. 어지간히 먹을 것이 없는 시골이면 또 모를까, 먹거리가 풍족한 황도에서 굳이 그런 걸 먹을 이유가 있겠어요?”
그건 그렇지.
맛집이 넘쳐나는 황도니까.
“근데 에디스, 사냥감에 대해 제법 잘 아네?”
“그야 황도에 올라오기 전에는 저도 자주 사냥했으니까요. 깊은 산골에서 살았거든요.”
“그래?”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에요. 사냥이 은근히 일거리가 많거든요. 해체부터 처리까지, 대단히 귀찮은 일이죠.”
“…….”
왜 에디스 정도의 오러 유저가 스콰이어 대신 전담 시녀가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에디스, 정말 일하는 걸 싫어하는구나.
물론 전담 시녀가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 역시 아니긴 하다만.
“저하. 사슴이나 토끼 정도는 요리만 잘하면 꽤 먹을 만합니다.”
성진이 대단히 실망한 기색을 보이자, 옆에서 마사인 경이 넌지시 말을 덧붙였다.
“어, 그래. 고맙네, 마사인 경.”
좋아,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지!
상주기사 전원에게 사슴만 노리라고 해야겠다!
Chapter 39: Chapter 339
Chapter Text
339. 사슴 사냥 (3)
이른 가을 하늘은 높고도 맑았다. 대기는 고요했지만, 말을 빠르게 달리면 선선한 바람이 귓가를 스쳐온다. 사냥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그럼에도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바서스트 백작의 얼굴은 어두웠다. 저택을 나올 때부터, 그의 딸 마가렛과 마찰을 빚어 심기가 불편해졌던 까닭이다.
-사냥 모임에 시간을 허비할 틈이 없습니다!
사냥 캠프에 와서 회원들과 안면을 익히라는 말에, 마가렛은 강하게 만발하고 나섰다. 이제 멋진 신사들을 만나 슬슬 혼처를 정할 때가 되었건만, 딸은 아직도 어린애처럼 철이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일정이 3주는 더 남은 티파티 준비에 홀랑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이다.
-아버지! 이번 티파티에 누가 오시기로 한 줄 아세요? 세상에… 황궁의 장미! 그 아멜리아 황녀님께서 오신다고 했습니다!
마가렛은 잔뜩 흥분하며 외쳤다.
-그리고 최근 아멜리아 황녀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사교계의 여왕, 스카르차피노 영애가 따라온단 말이에요! 단연코 제 인생 최고의 티파티가 될 거라고요!
바서스트 백작은 어이가 없었다.
그깟 황녀가 다 뭐라고. 아무리 성황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한들, 어차피 조만간 국혼을 하고, 먼 외국으로 떠날 사람이 아닌가.
그때 늘씬한 중년의 여인 하나가 말을 몰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윌리엄. 마가렛의 일은 그만 잊어버리세요. 주최자의 표정이 그렇게 어두워서야, 참가한 사람들이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부인…….”
백작은 코를 씰룩거렸다.
아나톨리아에서 시집온 그의 아내는, 사냥을 즐기는 남부의 가풍을 그대로 이어오는 중이었다. 사냥 모임에 꾸준하게 참여할 뿐 아니라 매번 남편보다 많은 수의 사슴을 잡아냈지.
젊은 시절에야 사냥터를 달리는 그 모습이, 마치 신화에 나오는 여신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자, 이제는 그도 부인이 좀 더 우아한 취미를 가지고, 황도의 귀부인들과 어울렸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생각해 보세요, 윌리엄. 기껏 사냥 모임에 와서 그저 조신하게 캠프에 앉아있으라고만 하니, 마가렛이 좋아할 리가 있나요?”
부인, 그건 어디까지나 당신 생각이지. 마가렛은 사냥에도 딱히 흥미가 없지 않소.
불퉁하게 생각하던 백작의 눈에, 문득 주신의 문양이 박힌 커다란 마차 하나가 들어온다.
‘그래. 그러고 보니…….’
기껏 사냥 모임에 와선, 캠프에 얌전히 앉아있는 사람이 하나 있기는 하지.
모레스 클라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황가의 수치라고 불리던, 신성 제국의 망나니 3황자.
“이대로도 괜찮을까요? 황자님 홀로 계속 캠프에 계시는데…….”
그의 시선을 알아챈 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곁에 마사인 경이 함께 있지 않소.”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윌리엄. 우리가 모임을 주최했으니, 참석한 사람들 모두에게 최소한의 즐거움을 줄 의무가 있어요.”
“하지만 사냥 모임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이 사냥 외에 뭐가 있단 말이오?”
“그건 그렇지만…….”
예의상 보낸 초청장에, 갑자기 모레스 황자가 참여하겠다고 기별을 해 왔을 때는 얼마나 당황했던가. 그래도 최근 황자의 행보를 생각하면, 슬슬 평판에 신경을 쓰는가 보다 생각했지.
한데 막상 황자가 도착하니 가관도 아니었다.
성황과 리자베스 황비를 고루 닮은 외모에 감탄한 것도 잠시, 황자는 백작저에서 인사만 나누고는 도로 마차 안으로 틀어박혀 버렸다. 그러곤 그대로 사냥 캠프까지 꾸역꾸역 마차를 끌고 온 것이다!
‘미친놈인가…….’
포장도 되지 않은 산중턱까지 기어이 올라온 마차도 대단했지만,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킨 황자가 더욱 놀라웠다.
“저하. 캠프까지 마차가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지금이라도 말을 타시는 것이…….”
처음에 백작은 여러 번 만류했지만, 황자는 끝끝내 요지부동이었다.
“괜찮네, 백작. 끝까지 갈 수 있을 거야. 게다가 말을 타면 내 개가 싫어한다고.”
“…네? 개요?”
웡!
그러자 황자의 개가 크게 짖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짙은 잿빛 등과 노랗게 빛나는 눈이, 일견 개라기보다 거대한 야생 늑대처럼 보이는 녀석이었다.
끼이잉, 끼잉-
덕분에 용맹하게 사슴을 몰아야 할 사냥개들이, 잔뜩 주눅이 들어 한쪽에서 꼬리를 말고 있는 거다. 세상에 이런 민폐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야, 우리 막스가 여기서 대장이구나. 군기를 확실하게 잡았는데?”
웡웡!
“잘했어, 막스. 상으로 육포 줄까?”
워오오오-
윌리엄 바서스트는 두통이 올라오는 이마를 세게 문질렀다. 대체 저 철없는 황자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아, 그런데 바서스트 백작?”
“예, 저하.”
“저기 사냥개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바서스트령의 영지민인가?”
“반은 사냥꾼이고 반은 선별한 영지민들입니다. 영지에서도 가장 튼튼한 자들을 뽑았습니다. 숲에서 개들을 끌고 먼저 사냥감 몰이에 나서야 하니까요.”
“그래, 튼튼한…….”
그리고 어린 황자는 잠시 구석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로 서늘한 시선을 주었다. 겉모습만으로는 참으로 황족다운 기품과 위엄이 넘치는 모습.
“비실거리는 꼴들이 개들과 속도 맞춰 달리기에는 영 미덥지가 못한데? 영지민들은 그렇다 치고, 사냥꾼들은 또 왜 저리 말랐나?”
“네?”
“바서스트령에는 매년 사냥감들이 넘쳐난다고 들었는데, 참으로 이상하군. 아무래도 최근에 제대로 사냥을 못 한 것처럼 보이는데?”
하지만 저렇게 상식 없이 내뱉는 말들을 듣고 있으면, 그가 정말로 성황가의 피를 이은 황자인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영주의 허락이 없으면 당연히 사냥을 하지 않습니다. 저들에게는 사냥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냥권?”
“그렇습니다. 영지의 사냥감은 모두 영주의 것이니까요. 특히 사냥철 전후에는 사사로운 수렵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바서스트는 황자의 어이없는 질문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군.”
다행히 황자는 더는 질문하지 않고 또다시 얌전히 마차에 틀어박힌다.
“…….”
어딘가 싸해진 분위기에 떨떠름해진 바서스트 백작이, 황자가 지적한 영지민들을 힐금 돌아보았다. 비실거린다는 평가가 조금은 신경 쓰인 탓이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문제라는 거지? 저 정도면 평소보다 튼튼한데?’
별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황자를 다 보겠네.
하지만 황자의 기행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마차를 억지로 끌고 겨우 캠프에 도착했다 했더니, 모레스 황자는 이번에는 아예 천막 안에 조용히 틀어박혀 버린 것이다.
‘저럴 거면 대체 왜 온 거지?’
그렇다고 사냥에 아예 관심이 없지는 않았다. 호위 기사들을 잔뜩 끌고 와서는, 즉석에서 멋대로 사냥 대회까지 여는 게 아닌가!
-알겠나? 최대한 많이 잡아 와. 특히 사슴을 싹 쓸어오라고. 최고의 성과를 올리는 자에게는, 로한산 고급 증류주와 5일의 휴가를 주지. 잡은 사냥감은 마음대로 요리해 먹어도 상관없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모임에 어깃장을 놓는 것도 정도가 있지!
사냥 모임의 회원들은 대개가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로, 사냥을 즐긴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일반인에 불과하다. 한데 작정하고 달려드는 강력한 오러 유저들을 어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와아, 술이다!”
“휴가다!”
“고기 파티다!”
아니나 다를까. 사냥개들이 채 몰이를 시작하기도 전에, 황궁 기사들이 말보다도 빠르게 숲속으로 짓쳐 들어가는 게 아닌가!
남은 회원들의 열의가 한풀 꺾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저들이 정말 황궁 근위대 기사들입니까? 경박하기 그지없군요.’
‘진주궁 상주기사들은 조금 독특한 자들만 모였다고 들었소. 다들 지독한 술꾼에다, 성정이 거친 자들뿐이라더군.’
‘아아, 역시 3황자님의 사람들이라는 거군요.’
‘바서스트 백작은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이런 식이면 내년에는 다른 모임을 알아봐야겠소.’
회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
‘지금이라도 저분을 말리지 않으면……!’
1년간 기다려왔던 사냥 모임이 엉망이 될 위기. 잔뜩 약이 오른 백작은 항의하기 위해 황자의 천막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갑자기 건장한 기사 하나가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한때는 황가의 적장자였던 마사인 경이었다.
“멈추시오, 바서스트 백작. 저하께서는 지금 명상 중이시오.”
“…네?”
“수련에 방해가 되니, 용건이 있다면 일단 나에게 말하시오. 나중에 저하께 전해드리리다.”
“……?!”
…수련?
바서스트 백작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도저히 황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럴 거면, 저 인간은 대체 사냥 모임에 왜 온 거냐!
* * *
‘오길 잘한 거 같아.’
한차례 만족스럽게 명상을 마친 성진이 쭈욱 기지개를 켜며 생각하자, 마왕 놈이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잘하긴 뭐가? 진주궁에 있을 때와 달라진 게 전혀 없잖아.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달라진 게 없다니. 다들 좋아하잖아?’
막스는 성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신이 나서 산속으로 달려가 버렸다. 사냥을 하든 뛰어다니며 놀든, 뭘 해도 좋을 테지.
상주기사들도 오랜만에 교외로 나와서 다들 재미있어하는 눈치고.
[기사들도 잡종개랑 동급이구나? 한꺼번에 산책시키러 왔다는 거냐?]
마왕이 대단히 어이없어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인데…….’
최근 판게아 클로니클에 접속하느라 놈을 내팽개쳐 둔 감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오랜만에 황도의 [은총]을 벗어나 기분 전환을 시켜주려 했지.
물론 이 이야기를 마왕에게 직접 하지는 않았다. 자기도 잡종개와 동급이냐며 펄펄 뛸 것이 빤했으니까.
‘시끄러. 나도 바람 쐬면 되잖아.’
[바람을 쐬려면 일단 천막 밖으로 나가는 게 먼저 아닐까?]
‘뭐,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어.’
성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천막을 나섰다. 마침 밖에서 솔솔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겨왔기 때문이다.
“저하!”
모닥불 앞에 앉아있던 클로디아 경이 벌떡 일어나며 반색을 했다.
“명상은 다 끝나신 겁니까?”
“그래, 클로디아 경. 그런데 지금 뭘 굽고 있나?”
“네, 제가 잡은 멧돼지입니다!”
…멧돼지?
뭐야, 생각보다 냄새가 좋은데?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닥불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막 고기를 뜯으려던 칼멘 경이 엉거주춤 일어나 자리를 당겨준다.
‘또 클로디아 경과 칼멘 경인가…….’
언뜻 보기에는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이었지만, 티격태격하면서도 자주 붙어있는 모습이 참 신기했다.
“마사인 경이랑 다른 기사들은?”
“마사인 경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오신답니다. 다른 상주기사들은 아직 사냥 중이고요.”
“그런데 두 사람은 사냥을 벌써 끝낸 건가? 왜 더 잡지 않고?”
그러자 클로디아 경이 주근깨 가득한 코를 찡긋거렸다.
“이놈을 먼저 구워 먹으면 또 잡으러 가려고요. 굳이 먹지도 않을 짐승을 잡을 필요가 있을까 해서요.”
그래, 경쟁 심리 따위 요만큼도 없이, 당장 먹는 데만 신경 쓰는 것이 과연 클로디아 경답다.
“그럼 칼멘 경은?”
“……!”
벌써 입안에 잔뜩 고기를 욱여넣은 칼멘 경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며 입술을 우물거린다.
보다 못한 클로디아 경이 그를 대신해 냉큼 대꾸했다.
“칼멘 경이야 어차피 휴가를 받아봐야 쓸 일도 없으니까요, 저하.”
“응? 왜?”
“브루노 단장님이 계속 진주궁을 지키고 계실 거 아닙니까? 그러니 제자가 혼자 멋대로 놀러 다닐 수 없는 거죠.”
그러자 칼멘 경이 양 볼이 불룩한 채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브루노 단장은 평소에도 제자를 가르치는 걸 좋아했지만, 최근 지그스문트령에 다녀온 후부터는 더더욱 칼멘 경의 지도에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덕분에 어중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칼멘 경만 죽어나는 중이지.
“칼멘 경. 그렇게 대충 구워 먹으면 위험해. 야생동물의 몸에 기생충이 얼마나 많은지 아나? 바짝 익혀 먹어야지.”
“…기생… 뭐요?”
겨우 고기들을 목구멍으로 넘긴 칼멘 경이 되물었지만, 성진은 귀찮아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뭐, 그런 게 있어, 자넨 설명해도 잘 모를 거야.”
울컥!
칼멘 경의 이마에 핏대가 솟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전처럼 함부로 성진에게 욕설을 내뱉지는 않았다. [은총]을 막 벗어나서 분노조절장애가 도질까 조금 걱정했는데 말이지.
‘파블로프의 개’ 훈련이 제법 성과가 있었나 보다.
“그런데 고기는 이게 단가? 나머지는 어쨌어?”
모닥불에 놓인 고기가 몇 점 되지 않기에 물었더니, 클로디아 경이 고깃덩이를 뒤집으며 대답했다.
“영지의 사냥꾼들에게 품삯으로 넘겼습니다. 손질을 직접 해 본 적은 없어서, 처리를 부탁하고 맛있는 부위만 조금 잘라달라고 했죠.”
흠.
오늘 길에 본, 비쩍 마른 영지민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클로디아 경.”
“헤헤.”
클로디아 경이 천진하게 웃으며 성진에게 고기 한 점을 건넸다.
“아, 이게 제일 잘 구워졌습니다. 한번 드셔보시겠습니까?”
“그래, 좋아.”
성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칼멘 경이 먹고도 죽지 않았으니, 아마 괜찮지 않을까.
한데 그녀에게서 막 고기를 받아들었을 때였다.
‘음?’
갑자기 등줄기를 가르는 섬뜩한 감각에, 성진이 멈칫하며 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하? 왜 그러십니까?”
그와 동시에.
워우우우우!
저 멀리서 성진을 찾는 막스의 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Chapter 40: Chapter 340
Chapter Text
340. 사슴 사냥 (4)
그로부터 약 한 시간 전.
마사인이 이상한 조짐을 발견한 것은 정말로 우연한 계기로 인해서였다.
-마차는 여기 세워둘까?
그렇게 말하며 모레스 황자가 가리킨 곳은, 천막과 캠프 중앙을 가로막는 어중간한 위치였다.
-그러면 천막 입구가 가리지 않습니까, 저하?
-괜찮아, 마사인 경. 짐 옮기기도 편하고, 난 여기가 딱 좋다고.
그렇게 멋대로 정해버린 황자는 곧 명상을 위해 천막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연스럽게 천막 입구에 자리를 잡고 경비를 서던 마사인은, 그때부터 은근히 시야를 가리는 마차를 힐끔힐끔 곁눈질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스스스-
마차 지붕 너머로, 저 멀리 산봉우리의 나무들이 희미하게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언뜻 바람에 흔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묘하게 박자가 어긋나며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움직임.
‘기분 탓인가…….’
어쩐지 발밑에서 미미한 진동이 느껴진 듯도 했다.
마사인은 굳은 얼굴로 먼 산을 바라보았다. 사냥 모임이 열리고 있는 현재 장소에서, 조금 서쪽으로 치우친 높은 산봉우리를.
“왜 그러십니까, 마사인 경?”
마침 마부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고 있던 쿠르트 경이 의아해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별것 아니네, 쿠르트 경. 한데 자네 방금 그 진동을 느끼지 못했나?”
그러자 쿠르트 경이 고개를 돌려 서쪽 산을 바라보았다.
“진동이요? 어디서 말씀이십니까?”
“…….”
마사인이나 마리아 경을 제외하면, 상주기사들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쿠르트 경이다. 그런 그가 조금도 이상을 눈치채지 못했다니.
‘착각이었나?’
마사인이 막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스스스-
다시 한번 나무들이 흔들거린다. 이번에는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뭐지?’
이곳은 황도 근교의 숲. 해수 따위가 발을 붙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큰 짐승이라고는 기껏해야 멧돼지나 곰이 전부일 텐데.
‘한데 산이 통째로 흔들리는 듯한 저 움직임은 뭐란 말인가!’
불길한 예감이 밀려든다.
마사인은 오래전에도 한 번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던진 보이지 않는 올가미에 걸려, 서서히 숨통이 옥죄어드는 그 진득하고도 불길한 느낌.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으시면, 제가 가서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쿠르트 경의 말에, 마사인은 잠시 고민했다.
‘나는 저하의 곁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황자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을 저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아마도 자신이 직접 가 봐야 할 것이다. 상급 기사인 쿠르트 경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다른 자들을 아무리 보내본들, 진원지를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마사인은 기감을 최대한 확장하며 사위를 탐색했다.
다행히 주변에는 작은 산짐승들의 기척 외에 특별한 것은 없어 보이고, 사냥을 나간 상주기사들도 모두 근방에 있다.
‘그리고…….’
황자의 전속 정보원도 제법 가까이 있었다.
‘다샤…라고 했던가.’
마사인은 희미한 기척이 느껴지는 수풀을 잠시 응시했다.
일전에 마사인과 브루노 단장에게 안면을 튼 이후로, 다샤는 더는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더욱 대담하게 자기 할 일을 하는 중이었다.
‘저하께 오러 은폐라는 요상한 기술을 가르친 것은 무척 괘씸하나, 그래도 일신의 무력만은 제법 믿을 만하다.’
마음을 정한 마사인은 쿠르트 경을 돌아보았다.
“쿠르트 경.”
“네, 마사인 경.”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네. 그동안 저하의 경호를 부탁하지.”
그러자 쿠르트 경의 표정이 희한하게 바뀌었다. ‘이 인간이 어쩐 일로 자진해서 황자의 곁을 떠난다는 거지?’ 하는 의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얼굴.
“…….”
“아, 실례했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사인 경. 염려 마십시오!”
마침 클로디아 경과 칼멘 경이 함께 모닥불 앞에 자리 잡는 것까지 확인한 마사인은, 이내 몸을 돌려 빠르게 캠프를 벗어났다.
오러를 집중하여 속도를 올리자, 낮은 산 하나를 오르는 것은 금방이었다.
‘묘한 일이군. 같은 바서스트령임에도, 옆에 있는 사냥터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울창하게 숲이 우거진 탓일까. 서쪽 산은 이상하게도 어둡고 음울한 기운을 풍겼다. 심지어는 산짐승의 기척도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제법 높은 산등성이에 당도한 마사인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멀리 보이는 사냥 캠프를 살폈다.
‘저쪽은 별일 없는 모양인데.’
바로 그때.
우웅-
또다시 발아래가 작게 진동한다. 이번에는 제법 가까운 거리다. 덩달아 검게 우거진 나무들이 가지를 흔들며 스산한 마찰음을 내었다.
스스스스-
역시나 근처에 산짐승의 기척은 없었다. 땅이 저절로 울리고 있는 것이다.
마사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우웅-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잠시 후 땅에서 다시 작은 진동이 울려왔을 때, 마사인은 기어이 수풀 아래에 숨겨진 돌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광물의 자연스러운 색이 아닌, 아무리 봐도 확연한 이질감을 가진 붉은 색의 돌.
‘저건……?’
가까이 다가가는데 또다시 진동이 울린다.
우웅-
“……!”
순간 마사인은 경악하며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진동과 동시에 붉은 돌 주위로, 갑자기 희미하게 빛나는 붉은 문양들이 떠올랐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젠가, 마사인도 분명 본 적 있는 문양이었다.
-저, 저하의 말씀이… 전부, 사실이었습니다. 악마가… 황궁에 악마가 있습니다! 크헉!
그의 아버지 카메론 황자를 호위하며 떠났다가, 홀로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호위기사. 그의 미간에 선명하게 박혀있던 알 수 없는 핏빛 문양들.
-저주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모두 이곳에서 피해야 합니다!
그렇게 외치던 사제의 몸에서, 마치 전염이라도 되듯 연이어 나타나던 붉은 문양들. 그렇게 잠깐 사이에 피바다가 되었던 1황자의 진영.
미스라를 쥔 손이 떨려왔다.
-부디 보중하시옵소서, 황위를 이을 적통은 오직 마사인 님뿐입니다.
마지막까지 그렇게 당부하던 기사단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얼굴에서, 선명하게 솟아오르던 문양들. 저주의 문양들.
등줄기에서 오한이 일었다.
‘이곳에… 있어!’
마사인은 대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 이곳에 있어! 그때 그 삿된 저주를 만든 놈이, 지금도 주변을 맴돌며 황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한때 대륙을 완전히 집어삼키려 들었던 악마종들. 그 삿된 무리들이 아직도 버젓이 암약하고 있다.
그리고 마사인이 황도의 [은총]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보란 듯 꼬리를 드러낸 것이다.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숙부님께… 그리고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에!’
마사인은 이를 악물며 천천히 붉은 돌을 향해 나아갔다.
어린 시절 경험했던 그 무시무시한 저주의 공포는, 마치 낙인이라도 된 것처럼 아직도 그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더는 그때의 무력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성황가를, 그리고 모레스 황자를 지키는 어엿한 근위대의 기사가 아닌가.
‘성기사들을 데려올 때까지 저것이 남아있을지는 미지수다. 일단 증거로 가져가야…….’
마사인은 품속에 지니고 다니던 작은 미사포를 꺼내 들었다. 자수하는 데 쓰라며 시슬레가 직접 축성해 준 귀한 천이었다.
신성력이 없는 마사인으로서는, 저 돌에서 마기가 느껴지는지 어떤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혹여 예전의 저주처럼 접촉과 동시에 발동된다 하더라도, 이 신성한 천이 한동안은 마기를 막아주리라.
그렇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마음속의 공포와 싸우며, 어렵사리 돌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워우우우우!
멀리서 마치 늑대 소리와도 같은 긴 하울링이 들려왔다.
“……!”
이 근방에는 늑대 무리가 서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저런 소리를 내는 것이라면, 아마도 저하의 늑대개 정도일까?
“…저하?”
설마 저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모레스 황자의 얼굴이 떠오르자마자, 머릿속의 복잡한 상념들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마사인은 미사포로 감싼 돌멩이를 품에 넣은 채, 재빨리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 *
갑자기 섬뜩한 예감을 느낀 성진이 먼 서쪽 산을 바라보았다.
‘…뭐지?’
어쩐지 찜찜한 기분에 밀려들면서, 자연히 이곳에 오기 전 성황이 당부하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누가 뭐래도 다음 대의 오라클이다. 그러니 네가 무심코 결정했다고 생각해도, 그 선택에는 언제나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내가 이곳에 오기로 결정한, 특별한 이유…….
하지만 더는 깊이 생각할 틈이 없었다. 곧이어 사냥터 쪽에서 막스의 긴 울음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워우우우우!
녀석이 다급히 성진을 부르고 있었다.
“저하?”
성진이 고기를 내려놓곤 몸을 일으키자, 클로디아 경이 의아한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찜찜한 기분은 나중에 생각하자,’
우선 급한 것부터 해결해야지. 지금 내 강아지가 보호자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성진은 재빨리 호두까기를 허리에 매고는, 일언반구 없이 사냥터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 저하?”
“아니, 먹으려다 말고 갑자기 어디로 가는 겁니까?”
클로디아 경과 칼멘 경이 화들짝 놀라며 성진을 따라 달린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어, 강한 오러 유저 두 사람이 함께 따라붙는 것도 느껴졌다.
‘쿠르트 경! 다샤!’
기감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감지한 성진은 안심하곤 속도를 올렸다. 설마 이 정도의 전력을 데려가는데, 마사인 경이 나중에 뭐라고 잔소리하지는 않겠지?
“저하! 무슨 일입니까? 부디 기다려 주십시오!”
다급하게 들려오는 쿠르트 경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성진은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다.
막스가 그의 권속이기 때문일까. 굳이 애쓰지 않아도, 성진은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막스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끼가 무성한 어느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였다. 성진은 마침내 산짐승을 향해 용맹하게 짖고 있는 막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컹컹! 컹컹!
“막스?!”
다행이 개의 겉모습은 멀쩡해 보였다. 문제는 막스가 대치하고 있는 상대가, 엄청나게 거대한 곰이라는 점이겠지.
크워어어!
긴박한 순간임에도, 성진은 그 광경을 확인한 순간 대단히 당황했다.
‘뭐지? 곰이란 게 원래 저렇게 거대한 짐승이었나?’
적갈색의 곰은 두 발로 몸을 곧추세우고 막스를 위협하는 중이었는데, 저게 정말 곰인가 싶을 정도로 덩치가 컸다. 머리까지의 체고는 거의 3미터에 이르고, 날카로운 발톱 역시 어림잡아 20센티미터는 되어 보인다.
지구의 곰을 생각하면 대단히 비정상적인 크기.
‘저것이 이세계의 곰인가? 엄청난 위압감인데?’
한데 바로 뒤따라온 쿠르트 경이, 그 광경을 보자마자 경악하며 소리치는 게 아닌가.
“뭐지? 해수도 아닌데, 저렇게 큰 곰이 근교 숲에 산다고?”
어, 그럼 그렇지. 일반적인 곰이 아닌가 보다.
[뭐 하는 거야, 저 잡종개가! 시비도 상대를 봐 가며 해야지. 저놈, 제정신이야?]
마왕도 기겁하는 와중-
웡웡웡!
성진을 발견한 막스가 더욱 기세를 올리며 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딱 봐도 주인을 등에 업고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
성진은 식은땀을 흘렸다.
‘막스. 아무리 봐도 저건 네 능력을 크게 벗어난 상대 아니야?’
처음에 개를 사냥터에 풀어놓을 때만 해도, 신나게 뛰어놀다가 토끼나 잡아오겠지, 생각했는데.
이건 자기 덩치의 10배를 훌쩍 넘어가는 상대가 아닌가. 화난 곰이 숨결만 내뱉어도 막스는 휙 하고 날아갈 것 같았다.
‘막스. 너, 내가 잠깐 눈을 뗀 사이에 상상도 못 할 사고를 치는구나!’
막스는 곰의 주위를 빙빙 돌며, 잘도 놈을 한자리에 매어두는 중이었다. 덕분에 바짝 약이 오른 곰의 기세는 더욱 흉흉해져만 간다.
퍼억! 우지끈!
곰이 통나무 같은 팔을 휘두르자, 나무가 통째로 꺾이며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때까지도 부지런히 빈틈을 살피던 막스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나무를 피해 재빨리 뒤로 물러난다.
간발의 차였다.
‘……!’
하지만 다급한 상황에서도 성진은 섣불리 그들 사이로 뛰어들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웡웡!
-저건 내 사냥감이다! 내가 잡을 거야!
막스가 씩씩하게 짖으며 눈을 빛내고 있었으니까. 저걸 용맹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휘익-
따악!
재차 휘둘러진 곰의 공격을 피하며, 막스가 잽싸게 곰의 옆구리에 대고 입질을 한다.
물론 덩치 차이가 너무 큰 나머지 제대로 닿지도 못해, 곰이 몸을 틀자마자 재빨리 뒤로 물러서야 했지만.
어찌나 아슬아슬한지, 절로 손아귀가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
“막스! 그만둬!”
아니, 저 녀석은 왜 저렇게 무모한 거야! 내가 널 그렇게 키웠니?
그런데 성진의 의지에 반하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곰을 노려보는 막스의 시선은 당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웡웡웡!
-너 저거 좋아하지? 전에 매일매일 저것만 먹었잖아?
워오오!
-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잡아줄게! 강하고 거대한 내가 저걸 먹게 해 줄게! 조금만 기다려!
“아니, 막스…….”
녀석의 생각을 읽어낸 성진은 절로 가슴이 찡해졌다.
‘저 녀석, 내가 지그스문트령에서 매일 곰 고기 먹고 지낸 걸 기억하고 있었어?’
[흠. 잡종개 주제에 조금 기특… 아니!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냐? 어서 좀 말려봐, 이성진!]
워우우우우!
-내가 잡는다! 그러니까 주인아! 어서 날 강하고 거대하게 만들어 줘라아아아!
막스의 기운찬 하울링에 성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이런. 마왕 말이 맞아.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막스가 성진을 부른 이유는 분명했다. 루이제처럼 자신을 커다랗게 변하게 해 달라고 요청한 거겠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막스.’
스르릉-
성진은 호두까기를 뽑아 들며 곰과의 거리를 쟀다.
결국 이대로라면 저 대치의 결과는 불 보듯 빤했다. 막스의 기세가 조금 잦아들면, 성진과 상주기사들이 달려가 곰을 잡아야만 하리라.
‘분명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성진! 뭘 꾸물거리는 거야? 저러다가 잡종개가 죽겠어!]
아니, 마왕아.
하지만 저 녀석을 봐. 저렇게나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다고. 그런데 어떻게 내가 저 사이에 멋대로 끼어들어서, 녀석의 의욕을 무참히 박살 낼 수 있단 말이야?
그래. 성진은 어쩐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것은 권속과의 신뢰의 문제였다. 지금 한 발을 잘못 내딛는 순간, 막스와의 관계에서 돌이킬 수 없는 금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이성진!]
물론 성진 역시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막스의 움직임 하나하나, 그리고 곰이 내뱉는 숨결 하나하나가,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을 통해 성진에게로 여과 없이 전해진다.
컹!
성진을 힐끗 바라본 막스가, 재차 곰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성진은 순간 똑똑히 예지할 수 있었다. 그 공격을 기다리고 있던 곰이, 정확히 막스의 머리통을 향해 우악스러운 발톱을 내리찍으리라는 것을.
‘막스!’
안 되겠다!
성진은 더는 재지 않고 호두까기를 쥔 채 내달렸다. 하지만 절박한 심정 때문이었을까, 그의 몸보다 오러가 한발 먼저 움직였다.
쉬익-
순간 성진은 막연하게 감지하고 있던 막스와의 연결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성진의 몸을 따라 움직이던 오러가, 공간을 뛰어넘어, 의념을 따라 빠른 속도로 늑대개를 향해 이동한다.
후욱!
막스의 몸이 훌쩍 커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
크와와앙!
송아지? 아니, 조랑말보다 부쩍 커진 막스가 땅을 박찬다. 다리가 쭉 늘어남과 동시에, 막스의 몸은 수월하게 곰의 반격을 피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저게 대체?”
“개… 개가?”
성진을 따라 곰에게 달려들려던 상주기사들이, 일순 경악하며 허공을 올려다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훼엑-
곰의 발톱을 피한 막스가 몸을 빠르게 뒤틀며, 놈의 목덜미를 그대로 물어뜯은 것이다!
긴 송곳니가 번뜩이고, 대기를 울리는 섬뜩한 파육음이 들려왔다.
콰드드드득!
Chapter 41: Chapter 341
Chapter Text
341. 사슴 사냥 (5)
크허어엉!
곰의 비명이 온 산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갑작스럽게 급소를 내준 곰의 눈은 고통과 당혹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막스의 송곳니는 단번에 곰의 경동맥을 꿰뚫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오러가 흐르는 늑대개의 송곳니는 충분히 날카로웠다.
컹! 크헝!
통증에 몸부림치던 곰이 몸을 빙빙 돌리며 막스의 등줄기를 물어뜯으려 애썼다.
그에 따라 늑대개의 몸 역시 속절없이 흔들거린다. 크기가 부쩍 커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곰의 덩치에 비하면 어미와 새끼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차이가 컸으니까.
꽈악!
그럼에도 막스는 꿋꿋하게 곰의 목을 물고 늘어졌다. 두꺼운 털가죽이 완전히 뚫리고, 곰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털가죽을 흥건히 적셔간다.
“막스?! 설마?”
조금 뒤늦게 도착한 클로디아 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제법 눈썰미가 날카로운 그녀는, 덩치가 커졌음에도 막스 특유의 외형과 털색을 알아본 것이다.
“뭐? 저게 그 개라고?”
뒤이어 달려온 칼멘 경이 당황하며 물었지만, 정작 개가 커지는 것을 목격한 쿠르트 경은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결국 칼멘은 성진에게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저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지만 성진은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막스와의 위태로운 연결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지금 늑대개로부터 시선을 돌리면 이도 저도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까닭이다.
‘어떻게 한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 연결을 붙잡고, 계속해서 막스에게 오러를 보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늑대개는 도로 작아질 테고, 곰에게 붙잡혀 속절없이 찌부러질 테지.
우웅-
성진의 집중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오러의 활성도도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막스에게 전해지는 오러가 늘어나며, 골격을 감싼 근육이 힘차게 꿈틀거린다.
꾸득, 꾸드득.
덩달아 곰의 기세도 한층 거세진다. 송곳니에 꿰인 상처가 점점 깊어졌기 때문이다.
지독한 통증은 물론이거니와, 생각지도 못한 생명의 위협에 당황한 놈은 숫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쿠엉!
늑대개를 떼놓기 위해 마구 휘두른 앞발에, 나무들이 걸리며 무참하게 꺾여 나간다.
퍼걱! 우지끈!
도리질을 치며 뱅글뱅글 돌다가 바위와 나무들 여기저기에 몸을 부딪친다.
쿵! 콰앙! 쩌어억!
놈에게 매달린 막스 역시 그러한 충격들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늑대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녀석의 고집도 고집이었지만, 성진의 의지에 따라 오러가 늑대개의 몸을 겹겹이 감싸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꽈드드득!
늑대개의 이빨이 더욱 깊게 파고들며, 상처에서 더운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아아…….”
상주기사들은 미처 거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팽팽한 접전을 멍청히 지켜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 듯한 둘의 대결. 그럼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승기는 한쪽으로 뚜렷하게 기울어가고 있다.
그즈음에 이르러, 성진은 겨우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막스의 상태를 관찰할 수 있었다.
‘지그스문트령에서 처음 본 모습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때보다 덩치가 조금 더 커진 것 같은데.’
녀석과의 연결을 통해, 오러는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결국 막스의 변신은 오러로 인해 일어난다는 말이겠지.
그렇다면 확인해 볼 방법은 있었다.
‘야, 마왕아!’
성진이 호명하자마자, 마왕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알았어!]
마왕이 염상 결정 속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자, 성진의 동공 안쪽에서 붉은빛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곧 영안이 열리고 세상이 오색으로 환하게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막스의 오러가 전과 달라!’
성진은 이내 막스의 현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지그스문트령에서 영안으로 확인했을 때, 녀석은 다른 라이칸슬로프들과 마찬가지로 보랏빛의 오러를 뿜어내고 있었지. 확연하게 마기가 섞여있는 양상이었지만, 그저 마경 늑대의 피를 이어 그런가 보다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막스를 감싸고 있는 오러는, 전과 달리 뿌연 잿빛을 띠고 있었다. 성진과 연결되어 있는 희미한 실선 역시 마찬가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전에 막스가 보였던 오러는, 단지 루이제의 오러가 가진 특성을 그대로 반영했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 막스는 내 권속이야. 설마 녀석은 타인의 오러를 끌어 쓸 수 있는 건가?’
영안으로 본 성진의 오러 역시 짙은 잿빛이다. 그리고 성진은 델크로스에서 이런 오러를 가진 자를 자신 외에는 달리 본 적이 없었다.
‘이오니아의 늑대…….’
문득 예전에 라이칸슬로프 로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 바즈라를 조종하던 베르세우스 다시아노는, 막스를 탐내며 이렇게 말했지.
-그래. 이오니아 늑대의 피를 이었나. 비록 어설픈 잡종이긴 하지만, 이 차원에서는 이제 보기 힘든 혈통이겠지. 뭐, 권속으로 만들면 쓸 만할지도 모르겠구나.
또 바즈라의 영혼도 성진에게 이리 호소하지 않았던가.
-아아, 모든 것이 해결되었소! 내 영혼석을 이 개에게 맡겨 주게! 분명 로드가 계신 곳으로 날 데려다 줄 수 있을 거라오!
크와앙! 퍼어억!
그러는 와중에도 곰은 막스를 매단 채 무의미한 몸부림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런……!’
성진은 재빨리 오러 회전을 활성화시키며, 막스와 이어져있는 뿌연 잿빛 선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두근-
그러자 잔득 흥분하고 있는 막스의 상태가, 그 연결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나는 아직 멀쩡하다! 나는 더 할 수 있다!
막스, 이 철없는 녀석.
하지만 어이없는 심정과는 별개로, 막스의 몸에서 넘쳐나는 활력 역시 여과 없이 느낄 수 있었다.
쿠앙!
곰이 몸부림친 자리에서 흙이 파이며 얕은 구덩이가 생겨났다. 그 우악스러운 발버둥에, 잠시 늑대개가 바닥에 깔리는 듯했지만-
-괜찮아! 나는 거대하고 강하니까!
성진의 오러가 충격에 대비하며 빈틈없이 늑대개를 보호한다. 그러곤 재차 허공으로 개를 내동댕이치려는 곰의 움직임에 맞춰, 오러가 다시 막스의 송곳니를 향해 일시에 모여들었다.
-나는 주인과 함께하고 있어!
그것은 빙수들을 조종할 때와는 또 다른 일체감이었다.
마경에서 전투를 벌일 때는, 마치 성진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와 직접 빙수의 몸을 입었다는 느낌이었지.
하지만 막스와 함께하는 전투는 그와는 달랐다.
성진의 생각을 늑대개가 온전히 이해하고, 늑대개의 움직임을 성진이 고스란히 읽어낸다. 서로의 판단을 신뢰하며 전해지는 의지를 고스란히 실현하려는 마음.
‘…이것이 권속이라는 거구나!’
이보다도 굳건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가 또 있을까.
문득 성진은 묘한 고양감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크헝!
마침내 힘이 다한 곰이 쌕쌕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몸을 뉘었다.
그러자 막스는 단단하게 바닥을 딛고 서서는, 강한 치악력으로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푸슉!
마침내 곰의 경동맥이 완전히 찢어지며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쓰러진 곰은 이따금 사지를 휘둘렸지만, 이내 그것은 간헐적인 경련으로 변해갔다.
이윽고 곰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자, 그때까지도 숨을 참고 있던 칼멘 경이 신음 같은 탄성을 내뱉었다.
“저걸 정말 혼자서 잡아냈어……!”
막스가 피에 젖은 주둥이를 든 채 허공을 향해 힘차게 하울링을 한다.
워오오오!
-봤어? 내가 얼마나 거대하고 강한지 봤어?
“그래, 그래. 잘 싸웠다, 막스.”
역시 우리 막스가 대단하긴 하지. 마구잡이로 곰에게 달려든 건 따끔하게 야단칠 필요가 있겠지만.
[네가 잘도 잡종개를 야단치겠다.]
‘뭐라는 거냐? 난 한다면 하는 보호자라고!’
하지만 지금은 우선 승리에 취한 강아지를 칭찬해 줘야 할 때겠지.
그렇게 뿌듯하게 웃으며 막스에게 다가갔을 때였다. 성진은 멀리서 빠르게 달려오는 강한 오러 유저를 감지해냈다.
‘마사인 경?’
데카론 나이트를 향해가는 상급 기사는, 쏜살처럼 빠르게 성진의 기척을 쫓아왔다.
“저하!”
그렇게 헐레벌떡 달려온 그가 발견한 것은, 당당하게 곰을 내리누르고 있는 거대한 늑대. 그리고 겁도 없이 그 옆에 무방비하게 서 있는 어린 황자였다.
마사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저하에게서 떨어져라, 이 괴물아아아!”
스릉!
번쩍이는 미스라가 뽑혀 나오자, 성진이 기겁하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워워, 마사인 경!”
아니야, 그거 아니야! 그러니까 제발 멈춰!
* * *
성진은 황당한 심정으로 마왕에게 물었다.
‘마왕아, 근방에 아렌쟈가 있냐?’
[아니? 오늘 하루 종일, 영혼 단말은 따로 보이지 않았는데?]
그럼 아버지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안 거지?
[왜? 네 아버지가 보낸 것 같아?]
‘당연한 거 아냐?’
성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키가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성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타이밍 좋게 프란시스 경이 나타났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게 다 뭡니까, 저하? 사람이 준비를 채 끝내기도 전에 이런 사고를 내시면 어쩌란 말입니까?”
느긋하게 사냥 캠프로 들어선 프란시스는, 거대한 늑대개를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은 듯 여상한 얼굴로 성진을 타박했다.
“프란시스… 경이라고 했소이까?”
바서스트 백작이 주춤거리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갑자기 사냥터에서 본 적도 없는 거대한 곰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을 또 거대한 늑대개가 나타나 물어 죽인 것이다.
이런 초유의 상황에서,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의 정복을 입은 자가 나타나자, 이다지도 마음 놓일 수가 없었다.
“부디 확실하게 말해 주시오. 저, 저 늑대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오? 혹시 해수나 마수인 것은…….”
윌리엄 바서스트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영지 내에서 저런 것이 나타났으니, 혹여 인퀴지터들이 달려와 영주의 부덕을 탓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하지만 프란시스의 표정은 침착하기만 했다.
“이상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백작. 저것은 당연히 성스러운 개, ‘신수’입니다.”
“뭐요? 시, 신수?”
그게 대체 뭐지?
사교 모임의 회원 모두가 당황하며 수군거린다. 한데 이 키가 큰 성기사는 당연하다는 듯 말을 잇는 것이었다.
“성 바스티안을 곁에서 보좌했다는 그 [바람]이란 말입니다. 다들 경전 안 읽으십니까?”
성기사의 뻔뻔한 태도에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대체 경전 어디에 그런 내용이?
뒤이어 프란시스가 잘난 척을 하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즉 바스티안 성인을 높은 설산까지 태워주었다는 경전의 ‘바람’.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바람’이 아니라, 바람이라는 이름의 ‘신수’였다나?
“아아, 물론 모를 수도 있습니다. 경전을 겉핥기식으로 대충 익혔다면 헷갈릴 수도 있겠지요. 영지 관리며 상단 운영이며, 바쁘게 일을 하다 보면 교양을 쌓는 데 조금 소홀할 수도 있죠. 다 이해합니다.”
“…….”
단숨에 사교 모임 회원 전원을 교양 없는 자로 매도해버린 부관이 설명을 이었다.
“여러분은 잘 느낄 수 없겠지만, 성기사인 저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저 개에게서는 주신의 성스러운 은총이 느껴집니다.”
은총?
모두가 긴가민가 하는 표정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성기사가 아니더라도 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 모레스 황자님을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일어선 저 당당한 모습을 보십시오!”
좌중은 얼빠진 얼굴로 늑대개를 돌아보았다.
“막스, 그만둬. 지금 네가 이럴 때가 아니라고.”
할짝할짝.
개는 황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그의 머리를 핥아대고 있다. 덩치가 훌쩍 커진 만큼 흐르는 침도 두 배!
‘…당당한 모습? 어디가?’
한데 프란시스는 대단히 격앙된 목소리로 연이어 외치는 것이었다.
“성황가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저 신성한 자태를 보고도, 당신들은 정녕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습니까?”
좌중은 눈을 비비곤 다시 개를 돌아보았다.
“좀 떨어지라고. 자 이거나 물어와!”
컹! 와그작!
황자가 던진 나무 접시가 날카로운 송곳니에 의해 꿰뚫린다.
한데 개는 정작 접시를 주인에게 가져오지는 않고, 나무 접시를 문 채 휑하니 줄행랑을 치는 게 아닌가! 아무리 봐도 제대로 교육 안 된 똥강아지의 모습.
‘…신성한 자태? 농담이겠지?’
사교 모임 회원들의 눈에 강한 의혹이 서렸지만, 프란시스는 손을 휘휘 저으며 성의 없는 목소리로 설명을 마쳤다.
“자세한 내용은 [성 바스티안과 손가락 악마]를 확인하시길. 자고로 새로운 경전 동화가 발행되면, 재깍재깍 구입해 숙지하는 것이 교양 있는 황도 신민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와, 성진은 대단히 감탄했다.
선동과 날조에 이어 판촉까지 하다니. 프란시스는 참으로 다재다능한 성기사가 아닐 수 없었다.
Chapter 42: Chapter 342
Chapter Text
342. 붉은 저주 (1)
충격과 공포 속에서, 그렇게 사냥 모임의 첫날이 어영부영 저물어갔다.
“…….”
본래 서로의 사냥감을 자랑하고, 신선한 고기를 요리해 먹으며 친목을 다져야 할 시간.
하지만 사람들은 쭈뼛거리면서도 섣불리 캠프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바로 캠프 한가운데 버젓이 앉아있는 거대한 늑대개 때문이었다.
할짝할짝.
커다란 혀로 모레스 황자의 볼을 핥고 있는 괴물 개는, 수틀리면 그대로 황자의 머리를 통째로 물어뜯을 것처럼 보였다.
보다 못한 마사인이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저하.”
그는 아직도 막스의 모습이 낯선지, 한껏 경계를 풀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개, …신수는 이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겁니까?”
“음?”
그때까지도 반쯤 명상에 잠겨 멍하니 앉아있던 성진이, 그제야 막스를 올려다보며 볼을 긁적였다.
“아니, 그건 아닌데…….”
지금 막스가 이 크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진이 지속적으로 오러를 흘려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권속의 연결을 더욱 뚜렷하게 인식한 이후, 개에게 오러를 자유자재로 보내는 것이 가능해졌으니까.
문제는 성진이 이 연결에서 뜻밖의 효용을 깨달았다는 거겠지.
‘막스가 커져 있으면, 명상하기 엄청 좋단 말이야.’
오러 연공이란, 체내에서 끊임없이 순환하는 오러를 단전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당겨 궤도에 안착시키는 작업.
신체가 크고 건강할수록, 그리고 오러 친화력이 높을수록 층을 쌓는 속도도 빨라지게 마련이다.
한데 갑자기 막스와 오러 순환을 공유하게 되면서, 성진의 신체가 두 배로 커진 듯한 효과를 보게 된 거다. 오러를 순환시킬 수 있는 공간이 부쩍 늘어나니, 당연히 단전에 쌓는 오러의 양도 늘어날 수밖에.
“어차피 사람들에게 모습도 들켰겠다, 서둘러 되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틈틈이 개를 데리고 명상을 하고 있었는데…….”
성진의 설명을 들은 마사인의 얼굴이 괴상하게 변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까지 명상을 한다고?
“…하지만 저하,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뭐?”
의외의 말에, 성진이 당황하며 캠프 입구를 돌아보았다. 아니, 이렇게 귀엽고 순한 강아지를 보고도 무섭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진주궁에 돌아가서도 얼마든지 수련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은 개를 원래대로 되돌리시고,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음, 뭐, 그래.”
마사인의 권유에 성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오러의 흐름을 끊었다.
그러자-
스르르륵.
마치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막스의 몸이 대번에 홀쭉해진다. 언젠가 루이제와의 연결이 끊어졌을 때 보았던 모습처럼.
물론 본래대로 돌아온 막스는 대단히 서운해 했다.
끼잉-
-왜? 왜 이제 그만? 강하고 거대한 내가 좋지 않아? 응?
“막스, 너는 작아져도 충분히 강해.”
웡!
-그래. 네가 그렇다면 좋아.
붕붕 꼬리를 친 막스가 성진의 손을 핥았다.
챱챱챱!
“이 귀여운 녀석!”
그런데 막스를 되돌렸음에도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 듯 보였다. 늑대개가 작아지는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한 회원들이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쳤기 때문이다.
“허억!”
“늑대가 정말로 작아졌어!”
“쉿, 늑대가 아니라 신수라잖나. 혹시 성기사가 듣기라도 하면, 우리에게 신성모독죄를 물을 수도 있네!”
“아아, 그래도 너무나 두렵군! 저것이 언제든 또 커질 수 있단 말이 아닌가!”
어, 이런.
어쩐지 더 무서워하는 거 같은데?
* * *
오늘 사냥에서 최고의 성과를 올린 것은 단연 진주궁 상주기사들이었다. 최고급 증류주와 휴가에 눈이 먼 기사들이, 보이는 사슴이란 사슴은 모조리 쓸어온 것이다. 간혹 멧돼지나 노루를 잡아 온 자들도 있었다.
반면, 사교 모임 회원들이 가져온 결과물은 대단히 형편없었다. 바서스트 백작 부인이 잡은 사슴 한 마리를 제외하면, 다들 토끼나 꿩 같은 작은 사냥감 몇 마리가 성과의 전부.
성진은 작게 혀를 찼다.
“저런. 궁극적으로는 친목을 다지는 자리라는 걸 이해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사냥 모임 아닌가? 다들 사냥 실력을 더 키워야겠는데?”
“…….”
“뭐, 다 즐기자고 하는 일이니 이번에는 내가 배려하지. 기사들이 잡아 온 사냥감은 아낌없이 회원들과 나눌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백작.”
“…참으로, 감사한 말씀, 입니다. 저하…….”
성진의 너그러운 말에, 바서스트 백작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가 봐도 이것은 황자가 멋대로 사냥 대회를 연 탓이었지만, 차마 곧이곧대로 따지고 들 수는 없는 일. 백작은 통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번 사냥 모임을 위해 일부러 숲에 먹이까지 뿌려가며 사슴 수를 늘려놨건만, 정작 엉뚱한 자들이 사냥감을 모조리 쓸어 가지 않았는가!
‘혹여 내년에도 황자가 참석하게 된다면……!’
볼 것도 없이, 그의 사냥 모임은 두 번 다시 활성화되지 못하겠지. 상상만으로도 백작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듯했다.
주최자의 얼굴에 깊은 암운이 드리운 것과 별개로, 성진의 일행은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축하하네, 하벤 경!”
“정말 당할 수가 없군! 자네가 오늘처럼 의욕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모습은 처음 본다네!”
“음하하핫! 이 정도는 별거 아닙니다!”
상주기사들이 치하하는 가운데, 하벤 경이 고급 증류주를 품에 안고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
성진은 그 모습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설마 하벤 경이 우승할 줄은 몰랐는데…….”
매사 의욕 없는 월급 도둑인 줄 알았는데, 듣자 하니 눈이 벌게져서는 사슴들을 도륙하고 다녔다나? 여하튼 술 좋아하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나저나 이 사슴들을 다 어쩌지요, 저하?”
클로디아 경이 산더미처럼 쌓인 사냥감을 난감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자네가 했던 대로 하지. 회원들에게 일부 나눠주고, 나머지는 바서스트령의 영지민들에게 골고루 맡기면 되지 않겠어?”
“전문 사냥꾼이 아니면 가죽이 상할지도 모릅니다.”
“뭐 어때? 가죽을 팔 것도 아닌데. 어차피 전문적인 손질이 필요한 상태도 아니잖아?”
그 말대로였다.
사냥에 대해 잘 모르는 상주기사들이 사슴의 목이며 몸통을 뎅강 잘라내는 바람에, 가죽을 벗겨내려 해도 영 쓸 만한 것이 없었으니까.
“고기며 가죽이며 다 넘겨주고, 그냥 맛있는 부위만 좀 남겨달라고 해.”
성진은 그렇게 지시하며, 캠프 구석에 모여 있는 비쩍 마른 영지민들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영지민의 사냥을 아예 금지할 만큼 사냥터 관리에 진심이지만, 설마 황자가 내린 하사품까지 도로 뺏어갈 정도로 바서스트 백작이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닐 테지.
“아, 그렇군요!”
한데 무슨 착각을 한 건지, 클로디아 경이 대단히 감동한 얼굴로 성진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설마 저하께서 기사들을 시켜 미리 사냥감을 가로챈 것도 전부 다……!”
“응?”
“늘 느끼는 점이지만, 저하께서는 정말 생각이 깊으세요. 그런 저하를 곁에서 모시게 되어 더없는 영광입니다.”
“아니…….”
성진은 말문이 막혀 눈만 깜박거렸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이 친구는 매번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지? 성진이 무슨 짓을 하든, 거기에 좋은 의미를 덧씌워 멋대로 감동하고 있지 않나.
“저하, 저는 앞으로도 평생…….”
한데 클로디아 경이 뭐라고 말을 덧붙이던 때였다. 갑자기 잔뜩 흥분한 하벤 경이 그녀의 뒤에서 고개를 불쑥 들이밀며 소리쳤다.
“저하아! 저하께 제 남은 인생을 바치겠노라 다짐한 것이, 이렇게도 기뻤던 날은 다시 없습니다아!”
“뭐?”
“오늘 우승의 영광 또한 저하께 바치겠습니다! 모레스 황자님 만세! 로한산 고급 증류주 만세에에!”
성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금시초문인데? 내가 동의한 적도 없는데, 경은 뭘 멋대로 바치는 거야?”
그러자 하벤 경의 눈썹이 축 쳐졌다.
“네? 잠깐만요.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저하? 제가 앞으로 진주궁에 뼈를 묻겠노라고 예전에 분명……!”
아니, 몰라. 필요도 없어.
자네는 그냥 자네 인생을 살아. 괜히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성진은 손을 휘휘 저으며 울상이 된 하벤 경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다른 상주기사들이 낄낄거리며 하벤 경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자자, 기운 내라고. 자네가 인생을 바친 게 어디 한두 군데여야 말이지. 저하께서도 그걸 잘 알고 계신 거 아니겠나?”
“아니, 이번만큼은 저도 진심이란 말입니다! 모레스 황자님께서는 제 생명의 은인……!”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자자, 다 함께 위로하는 의미에서 지금 그 증류주를 까 보지 않겠나? 응?”
“크악! 지금 뭘 넘보는 겁니까? 이건 평생 가보로 아껴뒀다가 대대로 물려줄 거라고요!”
성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하튼 저 못 말리는 술꾼들 같으니.
“저하, 곰을 캠프로 옮겨왔습니다.”
때마침 쿠르트 경이 다가와 성진에게 보고했다. 막스가 잡은 곰이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옮기는 데 오러 유저 여럿이 달라붙어야 했다나?
“수고했네. 그런데 경은 따로 사냥을 하지 않았나?”
의외로 상주기사들 중 최고의 실력자인 쿠르트 경의 성적이 대단히 초라하기에 던진 질문이었다.
“하하, 마사인 경께서 저하의 곁을 지키라 단단히 이르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따로 솜씨를 발휘할 틈이 없었지 뭡니까?”
쿠르트 경이 빙글빙글 웃으며 멋쩍게 대답한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사냥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성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명상을 하는 와중에도, 계속 캠프에 붙어있는 상급기사의 기척을 감지하고 있었으니까.
“…….”
쿠르트 경은 마리아 경과 함께 상주기사 관리의 두 축을 담당하는 인물. 원리 원칙에 충실하며 후배 기사들을 강하게 휘어잡는 마리아 경과는 달리, 쿠르트 경은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후배들을 아무렇게나 방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상주기사들이 백작의 사냥터를 멋대로 휩쓸어도 내버려 두는 거겠지. 마리아 경이 통솔자였다면 어림없을 일.
하지만 기사들을 풀어놓곤 자신은 끝까지 캠프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상주기사의 본분을 잊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리라.
‘아니면 내가 잡아 온 사냥감을 어떻게 처리할지 미리 짐작하고 있었거나…….’
속을 알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은 친구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 내일도 수고해주게.”
어쨌든 계속 비슷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서 그렇게 대꾸했더니, 쿠르트 경은 어딘가 묘한 표정으로 성진을 살폈다.
“가끔 클로디아 경이 유난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하.”
* * *
한편, 사냥 모임 회원들의 분위기는 침통했다.
“이 정도면, 이미 사냥터에 남아있는 사슴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서쪽으로 사냥터를 조금 옮기는 게 어떻소, 백작?”
바서스트 백작이 생각하기에도 불가능한 제안은 아니었다.
사냥철을 위해 먹이까지 풀어가며 관리한 사냥터와는 질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황궁 기사들이 싹 쓸어버린 이곳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모레스 황자가 망나니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미친 짓을 할 줄은 몰랐지.’
원망스러운 눈으로 황자의 천막을 바라보던 그때, 백작의 눈에 커다란 황궁 마차가 보였다.
순간 바서스트 백작의 머릿속에 반짝 하고 멋진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그는 그길로 황자의 천막으로 달려가, 사냥터를 옮기게 되었다고 통보했다.
“서쪽 산?”
“예, 그렇습니다, 저하.”
공손히 대답한 백작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모레스 황자를 바라보았다.
“하온데 저하. 저하는 어찌하실 건지요?”
“응?”
“서쪽 산은 길이 험하여, 아마도 마차가 올라가지 못할 겁니다.”
일단 만악의 근원인 모레스 황자와 상주기사들을 모임에서 떼어놓자, 그런 계획이었지만.
한데 난감해하리라 생각했던 황자가 오히려 환하게 미소 지어 보이는 게 아닌가. 만일 그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면, 대단히 감탄했을 법한 멋진 미소였다.
“아아, 그런 걸 다 신경 써 주는군. 하지만 걱정 말게, 백작.”
“네?”
“나는 내 개를 타고 가면 되니까. 문제없어.”
윌리엄 바서스트는 자신이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의심하며, 눈을 끔벅거렸다.
…네?
Chapter 43: Chapter 343
Chapter Text
343. 붉은 저주 (2)
바서스트 백작은 완전히 얼이 빠진 표정으로 돌아갔다.
‘개를 탄다는 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성진은 도통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듣자 하니 유명한 성인도 개를 타고 다녔다며? 경전 동화까지 만들어졌다며? 근데 뭐가 문제야?
[진심이냐? 일부러 저놈을 약 올린 게 아니라?]
흠, 예리해졌구나, 마왕아.
사실 사냥도 충분히 했겠다, 막스도 운동시켰겠다, 먼저 황도로 돌아가지 못할 것도 없지.
하지만 우리 일행을 떼어놓으려는 수작이 빤히 보이잖아? 그러니까 괜히 놀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하여튼 성격 나쁜 놈.]
‘닥쳐!’
그나저나 아까부터 이상하게 휑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성진은, 곧 그 이유를 깨닫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마사인 경은 대체 어디 간 거지? 저녁부터는 통 보이질 않네?’
한껏 기감을 곤두세워 봤지만, 역시 캠프 근처에서는 그의 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한테 말없이 어디 갈 양반이 아닌데?’
의아해하며 천막 밖으로 나가보니, 마침 상주기사들이 커다란 모닥불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술을 푸고 있었다.
제대로 야외에 놀러 온 분위기를 내고 있군.
“저하!”
“저하, 어서 이쪽으로 오십쇼!”
클로디아 경이 성진을 발견하곤 소리치자, 상주기사들이 열심히 손을 흔든다.
그들은 진심으로 성진을 반기는 듯 보였다. 처음 이 몸으로 눈을 떴을 당시의 흉흉한 분위기와 비교하면, 참으로 장족의 발전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로한산 증류주의 힘이 대단하구나. 베르트란 & 리의 다음 사업 아이템은 증류주로 해 볼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았더니, 에디스가 시커멓게 우려진 멜보른 차를 내밀었다. 진주궁을 지키고 있을 브루노 단장을 대신해, 오랜만에 자신의 본업으로 돌아온 모양.
“저하. 모임 회원들과 동석하지 않으세요? 이곳까지 와서도 진주궁 사람들과 어울리면, 기껏 사교 모임에 참석한 의미가 없잖아요.”
그녀의 물음에 성진은 캠프 반대편을 힐긋 바라보았다.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성진의 의사가 제대로 전해졌는지, 아까보다 한층 우중충해 보이는 회원들의 모습을.
“뭐, 알아서들 놀라고 해. 저치들과는 딱히 친분을 맺고 싶은 생각도 없는데.”
“그럼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사슴 고기 먹으러. 겸사겸사 강아지‘들’ 산책도 시키고.”
“네? 강아지들요?”
에디스가 반문했지만, 성진은 딱히 대꾸하지 않고서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흠, 좋아. 마치 고향의 맛처럼, 변함없는 쓸개즙 향이 난다.
“헉!”
“정말로 그걸 드셨어!”
상주기사들이 기겁을 했다. 반응들을 보아하니, 이미 한차례 에디스의 쓸개차가 돌았던 모양이지.
“독이 아니라는 말이 사실이었어?!”
“제가 뭐랬어요? 못 먹을 걸 만든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에디스 씨는 왜 안 드세요?”
“전 맛없는 건 안 먹어요!”
“당신, 양심은 있는 거야?”
특히나 칼멘 경은 해쓱해진 얼굴로 이를 딱딱 맞부딪혔다. 얼마 전의 트라우마가 생생하게 떠오르는 모양.
성진은 그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뭘 겁먹고 그래? 그때 내가 딱히 자네에게 못 할 짓 한 건 아니라니까 그러네.
호록.
다시 차 한 모금을 들이켜자, 미친놈 보듯 하던 상주기사들의 시선에 곧 존경과 경탄의 빛이 어린다.
“다들 적당히 마셔. 당직 근무자는 마시면 안 되는 거 알지?”
“하하. 경호 책임자인 마사인 경도 계시는데, 어떻게 그런 간 큰 짓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저녁은? 자네들 지금 빈속에 술 마시고 있었어?”
“저기서 요리사가 막 손질 끝난 사슴 고기를 굽고 있습니다, 저하.”
그 말대로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기가 익어가는 진한 향기가 코끝으로 전해져왔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냄새.
‘그러고 보니, 아까 클로디아 경이 잡은 멧돼지 고기를 못 먹었네.’
가벼운 아쉬움과 함께 어딘지 나른한 기분에 젖은 성진이, 익숙한 맛의 차를 재차 호로록 들이켰다.
“으힉!”
옆에서 칼멘 경의 괴상한 비명이 들려온 듯도 했지만, 그냥 기분 탓이겠지.
챱챱챱.
모닥불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에서는, 오늘 사냥의 일등공신인 막스가 생고기 한 덩이를 뜯고 있었다. 에디스가 가장 먼저 챙겨준 사슴 고기다.
왁자지껄!
또 바로 앞에서는 한껏 술이 들어간 상주기사들이, 실없는 우스갯소리에도 배꼽을 잡고 웃어댄다.
저렇게 놀기 좋아들 하면서, 그동안 답답해서 진주궁 근무를 어떻게 했다지?
‘그래도 다들 좋아하네. 일부러 시간 내서 이곳에 온 보람이 있어…….’
타닥, 타닥.
그렇게 떠들썩한 와중에도, 일행의 한가운데서 모닥불은 조용히 타오르고 있다. 이따금 땔나무가 쩍 하고 갈라지며, 파스스, 가벼운 불똥이 하늘하늘 흩뿌려진다.
‘평화롭다…….’
성진은 멍하니 불꽃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는 눈 뜨고도 명상을 하십니까, 저하?”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마사인의 목소리에, 성진이 움찔 놀라며 눈을 깜박거렸다.
“음? 마사인 경, 언제 왔나?”
그런데 뭐? 내가 명상을 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에게 물어볼 것도 없었다. 단전에서 이제까지와 달리 충만하게 차오르는 오러가 느껴졌으니까.
언제부터인가 지지부진하던 오러 쌓기가 드디어 끝나, 이제 성진의 오러는 완벽한 8층을 완성하며 활발하게 돌고 있었다.
‘…엉?’
잔뜩 당황하고 있는데, 마사인이 성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매번 놀라는 것도 새삼스럽습니다. 제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그새를 못 참고 또 경지가 눈에 띄게 오르셨군요.”
“…….”
성진은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음. 마사인 경. 이건 내게도 전혀 예상외의 사태라고.
“그런데 프란시스 경은 어디 갔어? 사슴 고기 안 먹는대?”
“그는 급한 볼일이 있어 바로 황도로 돌아갔습니다, 저하.”
“그래?”
급한 볼일이라.
그러고 보니 마사인 경, 아까 프란시스와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눈다 싶었지.
딱히 해결된 것은 아닌지, 지금도 영 낯빛이 좋지는 않았다.
‘이 양반이야 워낙 표정에 다 드러난단 말이야.’
하지만 뭔가를 물어볼 틈은 없었다. 어느새 완전히 요리된 음식들이 성진의 앞으로 날라져 왔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소금과 후추를 뿌려 구운 사슴 고기였다. 모두들 그가 먼저 들기를 기다리는 눈치라, 성진은 지체 없이 식기를 잡고서 고기 한 점을 들어 올렸다.
“흠…….”
고기를 씹으며 마왕에게 미각을 공유해주던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법 부드럽긴 하지만, 약하게 잡내가 남아 있다.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아. 그런데 특별히 맛있다고 하기도 애매한데?”
“그러게, 말씀드렸잖아요? 애초에 황궁의 최고급 식재료들과 비교하시면 안 돼요, 저하.”
에디스가 핀잔을 주며 빈 찻잔을 채웠다.
“그러게. 이러면 계획이 좀 어긋나는데.”
성진은 아쉬운 마음으로 마차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마차 짐칸에 있는 냉장고를.
부득부득 여기까지 마차를 끌고 온 건 기본적으로 막스 탓이었지만, 이왕이면 맛있는 고기들을 신선하게 챙겨 가자, 싶어서 냉장고까지 실어 왔지.
“그건 아마도 피를 제대로 빼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쿠르트 경이 까슬까슬한 수염 자국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피?”
“네. 저하. 바로 피를 빼서 손질한 사슴 고기는, 이보다는 더 먹을 만합니다.”
“그래?”
그것은 아마도 성진의 패착이었다. 그저 사슴을 잡는 데만 급급해서, 일단 캠프 한쪽에 잔뜩 쌓아두기만 했을 뿐.
‘미리 알았으면 처음부터 영지민들에게 처리를 맡겼을 텐데.’
하지만 남아있는 고기는 또 있었다. 막스가 가장 마지막에 잡은 거대한 곰. 저건 바로 손질했으니 맛이 괜찮지 않을까?
[곰 고기~ 곰 고기~ 향이 강하고 불 맛 나는 곰 고기~]
아니나 다를까. 마왕 놈이 저 좋아하는 음식 냄새를 맡고는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른다.
“엉? 이거 너무 바짝 구운 거 아니야? 어쩐지 고깃덩어리가 반으로 쪼그라든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저기 곰도 어째 해체하기 전보다 조금 작아 보이고…….”
“에이! 멀쩡한 고기가 반이 되다니, 그게 말이 되나? 자네, 좀 취했구먼.”
옆에서 상주기사들이 좋을 대로 떠드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성진은 곰 고기를 입에 가져갔다. 앞선 사슴 고기보다는 빠짝 구워져, 씹자마자 진한 맛을 내는 육즙이 흘러나온다.
[맛있어!]
마왕이 탄성을 질렀다.
이놈은 그저 곰 고기라면 다 좋은 모양이지.
‘그래도 생각 외로 나쁘지는 않네.’
그런데 성진이 막상 고기를 꿀꺽, 목으로 넘겼을 때였다.
삐이이-
갑자기 귀에서 높은 이명이 들려오나 싶더니, 순식간에 시야가 캄캄하게 흐려졌다.
‘……?!’
그리고 다시 시야가 밝아졌을 때, 눈앞의 광경은 모닥불가가 아닌 울창한 풀숲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쉬익-쉬익-
귓가에서 거칠고 시끄러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뭐지?’
언뜻 아래를 내려다보니, 생각보다 시야가 낮은 듯 땅이 무척이나 가까웠다.
그리고 삐죽한 발톱이 돋은 두툼한 발이, 앞뒤로 부지런히 움직이며 땅을 박차는 것도 보인다.
…엥? 이건… 나야?
‘근데 내가 왜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다니고 있는 걸까?’
아니, 긴다고 하기엔 조금 어폐가 있었다. 풍경이 옆을 스쳐 가는 속도가 제법 빨랐기 때문이다.
크릉, 킁킁.
쉬익-쉬익-
그 와중에도 거친 숨소리는 귓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참 시끄럽고 괴상한 숨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보니 그게 자신의 목에서 나는 소리인 모양이었다.
컹컹! 컹컹!
저 멀리서 희미하게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매년 이 숲을 찾는 것들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성진은 자신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성가신 것들!
언어로 채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상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일단 피한다! 하지만 화난다!
이게 정말 자신의 생각인지, 아니면 누군가 다른 이의 상념이 흘러들어오는 건지도 구별하기 어려웠다. 무턱대고 달리는 움직임에 저항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성진은 그렇게 몸이 멋대로 움직이도록 내버려 두며, 주변 상황을 가만히 관조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문득 성진은 숲속 어딘가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아마도 바로 눈앞에서 붉은 돌멩이 하나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때때로 돌의 주변에서 이상한 문양이 스르륵 나타났다 사라진다. 딱 봐도 범상치 않은 광경.
‘이게 뭐지?’
하지만 오래 궁금해할 틈이 없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진의 몸이 그 돌을 냅다 목구멍 너머로 삼켜버렸으니까.
킁킁, 꿀꺽!
‘……!?’
쩝쩝쩝.
‘자, 잠깐! 그런 수상한 걸 먹으면……!’
당황한 성진이 급히 돌을 뱉어내려 했지만,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꼴깍!
작은 덩어리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꾸드드드득.
동시에 몸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근골이 두껍게 자라나고, 근육이 이리저리 뒤틀리며, 몸이 밖으로 밖으로 팽창하는 느낌이 밀려들었다.
크워어어엉!
성진은 한층 거대해진 몸을 일으키며 허공을 향해 거세게 포효했다.
고통은 없었다. 그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충만해짐과 동시에, 제어할 수 없는 흉폭한 기세가 사방으로 마구 뻗어나갔을 뿐.
머릿속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강한 상념이 메아리친다.
-그래. 왜 저것들을 피해 달아나야 하는가! 지금 당장 보금자리로 돌아가, 저 성가신 것들을 모조리……!
“…하!”
[…진!]
“저하! 왜 그러십니까, 저하!”
[이성진! 어서 눈을 떠! 이성진!]
마왕 놈이 어찌나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대는지, 머릿속이 윙윙 울릴 지경이다.
연이어 억센 손이 양어깨를 잡고서 강하게 뒤흔드는 바람에, 성진의 정신은 서서히 현실감을 되찾았다.
“…마사인 경?”
“네, 저하!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이성진! 이성지이이인!]
‘어…….’
깜박.
눈을 깜박이며 코앞에 바짝 다가와 있는 마사인 경의 얼굴을 확인한 성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불가를 내려다보았다.
‘곰… 고기…….’
식기와 함께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고기들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성진은 본능적으로 방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한데 모레스.
-네?
-직접 사냥한 것들을 먹어본 적이 있더냐?
그때, 아버지는 뭔가를 더 설명하고 싶은 눈치였지. 직접 사냥하고, 또 그것을 먹는 행위에 대해.
‘아아. 그렇구나. 저 곰은 내가 사냥한 것이다.’
성진의 머릿속이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절대 직접 사냥하지 않고 몸을 사리겠노라, 아버지에게 약속했지.
하지만 저 곰만은 성진의 권속이, 성진의 힘을 받아 잡아낸 것. 결국은 성진이 직접 사냥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죽은 것들이 남긴 업은, 그 죽음을 취한 자의 업이 되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려왔다.
‘그래. 이것은 죽은 곰의 업, 곰의 기억이야.’
성진은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마사인을 밀어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죽은 곰의 기억을 엿보았다고 해서, 특별히 몸이 힘들거나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아직도 꿈에 덜 깬 듯 몽롱한 기분이 들었을 뿐.
“내가 먹었어.”
성진이 입을 열자, 마사인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네? 저하. 그게 무슨…….”
“마사인 경. 저 숲에서, 내가 돌을 먹었어.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이상한 돌이야.”
“……!”
잠시 정신을 잃었던 황자가 엉뚱한 소리를 내뱉자, 에디스와 상주기사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한다.
하지만 성진은 어쩐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충직한 호위기사만은 분명 그 말을 알아들었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성진을 바라보는 마사인의 얼굴이, 전에 없이 새파랗게 질렸기 때문이다.
Chapter 44: Chapter 344
Chapter Text
344. 붉은 저주 (3)
그날 밤, 마사인은 숲에서 발견한 붉은 돌에 대해 뒤늦게 털어놓았다.
“서쪽 산?”
“네, 저하. 호위를 서는 중에, 정말로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그래.”
성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찰나의 순간이긴 했지만, 분명 자신도 서쪽 산에서 뭔가 불길한 기운을 느끼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막스가 자신을 부르기 바로 직전에.
“…보고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하.”
성진이 입을 다물고 있자, 마사인이 송구한 듯 재차 머리를 조아렸다.
“아니, 괜찮아.”
산에서 우연히 발견한 돌이 다 뭐라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굳이 내가 알 필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겠지.
‘아니면 되도록 내가 연관되지 않기를 원했거나.’
그의 속내를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성진은 모른 척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프란시스는 그 돌의 정체를 뭐라고 하던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마사인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하지만 프란시스는 그 돌에서 마기를 느끼지는 못했다고 했습니다. 딱히 저주의 흔적도 없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일단 조사를 위해, 그가 돌을 가지고 먼저 황도로 돌아갔습니다.”
프란시스가 급하게 돌아간 이유가 그거였구나.
“마기도 아니고, 저주도 아니다. 그럼 사람에게는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건가?”
“맨손으로 만져도 큰 문제가 없는 걸 보면, 일단은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럼에도 마사인은 어딘가 불안한 듯 말끝을 흐렸다.
“프란시스와 잠시 수색해 본 결과, 서쪽 산에서 비슷한 돌을 몇 개 더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뭔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뚜렷한 목적성을 가지고 준비했을 거란 뜻이군?”
“네, 저하. 그러니 아무런 해도 없으리라 쉽게 낙관하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하긴. 막스가 잡은 거대한 곰만 해도 그렇다. 비록 성진이 잠시 기억을 엿본 것에 불과했지만, 그 곰은 분명 붉은 돌을 먹었다고.
그런데 막상 해체를 해서 내장을 빼내자마자, 평범한 보통의 곰 크기로 되돌아가 버렸지. 고기 양이 무려 1/3로 줄어들어버린 거다. 아깝게도.
“한데 저하. 아까 그 돌을 드셨다는 말씀은…….”
“아아, 그거.”
곰과의 일체감에서 막 빠져나온 뒤라, 얼떨결에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내가 먹은 게 아니야.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잠시 실수를 했어.”
“…….”
“정말이야.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마사인 경.”
그러니까 그렇게 조마조마한 표정 하지 말라고. 괜히 죄책감이 들잖아.
물론 성진이 거듭 괜찮다고 강조했음에도, 마사인의 불안은 쉬이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불길합니다. 하필이면 저하께서 황도를 나오시자마자 또다시 이런 일들이…….”
“음.”
아무래도 ‘사교 모임의 징크스’가 여전히 남아 있는 모양이지.
‘오러 8층도 만들었겠다, 앞으로는 진주궁에 박혀서 열심히 수련이나 해야겠어. 이제 사교 모임 따위, 두 번 다시 참석하나 봐라!’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는데, 마사인이 어딘가 간절한 표정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
“저하. 외람되오나 감히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응?”
“지금이라도 당장 황궁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
성진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요청하는 마사인의 얼굴이, 마치 벼랑 끝에서 약한 구명줄 하나만을 간신히 부여잡은 양 절박해 보였기 때문이다.
“붉은 돌에 대한 것은 이미 알렸으니, 뒷일은 프란시스와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이 알아서 할 겁니다.”
“마사인 경.”
“바서스트 백작에게 일러, 사냥 모임도 즉시 중단하라 명하겠습니다. 그러니 저하께서는 이만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해 주시오면…….”
“…….”
“황궁이 아니라면 적어도 황도 내로, 폐하의 은총이 온전히 거하는 곳으로 돌아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충직한 기사가 때때로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그를 향해 걱정을 표하는 까닭. 그것에 대해서는 성진도 조금은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진은 그 절박한 목소리에 바로 답해줄 수가 없었다.
아버지도 그러지 않았던가. 내가 사냥 모임을 선택한 데에는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럴 수는 없어, 마사인 경.”
“저하!”
“자네가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건 이해해. 하지만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한데 이런 사소한 징조만으로 일일이 몸을 피해야 한다면, 어디 불안해서 평생 진주궁 밖을 나설 수나 있겠어? 모임의 회원들은 또 날 어떻게 생각하겠나?”
“하나 저하……!”
“게다가 이 일은 그저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에만 맡겨서 될 것도 아니야. 삿된 것임에도 악마종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마물 전담반’의 소관이 아니면 뭐겠어?”
마사인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다. 하지만 성진은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이건 마물 전담반의 고문인 내가 조사해야 하는 일인 거야, 마사인 경. 신성 제국의 황자로서, 나는 내게 주어진 ‘고귀한 자의 의무’를 다해야 해.”
“…….”
“괜찮아. 자네한테 약속하건대, 아마도 나한테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결국 성진을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은 마사인은 침통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하면 모든 것은 저하의 뜻대로. 저는 그저 곁에서 차질 없이 저하를 보필하는데 주력하겠습니다.”
“어…….”
성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저기, 마사인 경?”
“그럼 쉬십시오, 저하.”
마사인은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는 휑하니 천막을 나섰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이 화가 제대로 났다 싶었지만.
그럼에도 그 뒷모습이 어딘가 풀이 죽은 듯 보여, 사람이 그렇게 처량할 수가 없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지금부터 또 밤 늦게까지 미련하게 수련에 매진할 분위기인데.
‘매번 저 양반에게는 못 할 짓을 하는 기분이 든단 말이야…….’
성진의 씁쓸한 기분을 느꼈는지, 막스가 코를 울리며 손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어 왔다.
끼잉-
-괜찮아? 내가 놀아줄까?
“흠, 그럴래, 막스?”
웡웡!
-당연하지! 숲에는 신기한 냄새가 나는 것들이 많아! 같이 찾아다니자!
“나랑 생각이 통했구나, 막스! 안 그래도 내일은 다 함께 재밌는 놀이를 하려고 했거든.”
[재밌는 놀이? 그게 뭔데?]
마왕이 의아한 듯 물었지만, 성진은 의뭉스럽게 한쪽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날이 아침이 밝았을 때, 그는 상주기사들을 천막 앞에 모아놓곤 이렇게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오늘은 사냥 대회를 열지 않을 거다. 사냥 모임의 회원들에게도 조금쯤 성과를 낼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나?”
“네? 그럼…….”
“대신 오늘은 보물찾기를 할 거야.”
보물찾기? 뭐야, 그게?
상주기사들이 시선을 교환하며 수군거린다.
“자, 다들 이걸 한번 보도록.”
그런 그들의 앞에서, 성진이 당당하게 돌 하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어젯밤 몰래 곰의 위장을 헤집어 찾아낸 또 하나의 붉은 돌멩이였다.
“어제 부관 프란시스 경이 이 근처에서 발견한 물건이다. 그의 말로는 주신을 저버린 불온한 무리들이, 마침 이곳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정황을 포착했다 말했지. 이건 그 증거들 중 하나다.”
물론 프란시스는 그런 말 한 적 없지만.
선동과 날조에 능한 만큼, 그도 분명 성진을 이해해 주리라. 아무래도 성기사의 신분이다 보니, 사심 없이 이용해 먹기 좋단 말이지.
“프란시스 경이 이르길, 이것은 일종의 마법 물품이라 추측된다더군.”
어젯밤 성진은 영안으로 이 돌을 면밀히 조사해 보았다.
딱히 별다른 정보가 없어 허탕인가 했는데, 마왕 놈이 조심스럽게 확인해 주었지. 이 돌에서 미약하게나마 규상 세계의 법칙이 느껴진다고.
눈앞에 정보가 떠오르지 않는 것은, 이 돌이 담고 있는 규칙이 지극히 빈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돌멩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맞아. 충분한 수의 법칙들이 모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거야.]
그렇다면 해결책은 간단했다.
미리 모조리 수거하는 거다.
안 그래도 상주 기사들을 과하게 데려온 감이 있었는데, 다들 신나게 보물찾기나 한번 하는 거지.
“사람에게 크게 위험한 물건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고 불온한 무리들이 꾸미는 음모를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신성 제국을 지키는 주신의 검으로서, 그대들이 앞장서서 이 물건들을 모두 회수해 오도록!”
‘불온한 무리’라는 말이 나오자, 상주기사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마음 편히 놀러 나온 입장이라곤 하지만, 성황가와 제국을 지키는 자신들의 본분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으니.
물론 하벤 경처럼 의욕이 땅을 치는 기사들도 없진 않았지만. 성진은 그를 힐끔 일별하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당연히 보상은 있다. 이것을 가장 많이 찾아내는 자에게는, 최고급 로한 증류주와 브르타뉴산 와인, 그리고 일주일의 휴가를 주겠다!”
“……!”
상주기사들의 눈이 대번에 초롱초롱해진다. 오직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깨달은 마사인만이 기겁을 하며 성진을 바라보았을 뿐.
성진이 씨익 성격 나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돌이며, 문양이며, 음모며,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정 적의 의도가 신경 쓰인다면, 제대로 기능하기 전에 먼저 이쪽에서 깡그리 찾아 없애 버리면 되는 거 아니겠어?
* * *
“저하! 여기 또 하나 찾았습니다!”
하벤 경의 활약은 이번에도 상주기사들 중 가히 발군이었다. 쏜살같이 붉은 돌을 찾아온 그는, 또다시 산 중턱을 뛰어 올라가며 괴상한 구호를 외쳤다.
“이얍! 로한산 증류주! 흐압! 브르타뉴산 와인!”
어제 선배들의 꼬드김에 넘어가 기어코 증류주를 까고 만 하벤 경이었다. 그 손실을 만회하고자, 지금도 눈에 불을 켜고 온 산속을 뒤지는 중이라나?
“여기도 있습니다, 저하.”
사냥에 소극적이던 클로디아 경이나 칼멘 경, 그리고 쿠르트 경까지.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결과, 붉은 돌멩이들은 빠르게 늘어갔다.
‘숨겨진 돌이 생각보다 많은데?’
특히 서쪽 산의 중턱 부근에는, 거의 발에 채다시피 널려있지 않은가.
성진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혼자서 했다면 분명 대단한 삽질이었을 테지.
“그런데 이것들은 다 어디 둘까요, 저하?”
“응?”
클로디아 경의 물음에, 성진은 잠시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가 마침 근처에 있는 커다란 바위 하나를 가리켜 보였다. 위가 평평하게 마모된 것이, 딱 평상이나 선반처럼 생겼거든.
“저거 좋네. 일단 저기에 다 모아 둘까?”
“네, 알겠습니다, 저하!”
우루루루-
그렇게 붉은 돌멩이들이 바위 위로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 * *
“아쉽군, 아쉬워.”
“뭐가 말입니까?”
뜬금없는 레오나드의 한탄에, 로메인이 작업하던 손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렸다.
“캐도건 남작의 살롱 말이야. 황녀가 마침 그 모임에 나왔다며? 만약 앨튼 상단주가 계획대로 움직이기만 했다면, 황녀를 그대로 세뇌할 수 있었다는 말이잖아?”
“…….”
“그대로 꼬드겨서 나와 국혼을 했으면 좋았을 것을.”
로메인은 두통이 이는 것을 느끼며 작업하던 목걸이를 내려놓았다.
“설마 제국과 전쟁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음?”
“잊지 마십시오, 레오님. 델크로스의 수호자는 언제든 로한을 손짓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요.”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그가 그러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럴 만한 충분한 인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황녀를 세뇌하는 데 성공했다면, 성황 또한 기꺼이 로한을 박살 냈을 테지요.”
쳇. 레오나드가 혀를 차자, 로메인은 그에게 작업을 끝낸 목걸이를 내밀었다.
일전에 레오나드가 아멜리아 황녀를 위해 준비했지만, 도통 그녀를 만날 길이 없어 나날이 먼지만 쌓여가고 있는 물건이었다.
“황녀가 바서스트 영애의 티파티에 참석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날더러, 이걸 들고서 귀족 영애들의 귀여운 티파티에 가라고?”
“그저 바서스트 백작의 손님으로 가시면 됩니다. 우연을 가장해서 황녀를 만나고, 그녀에게 공개적으로 선물을 건네십시오. 아마도 남들 앞에서 타국 왕족이 내민 선물을 거절하진 않을 테지요.”
레오나드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별다른 투정 없이 순순히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황녀를 만나면 목걸이를 선물하며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이 보석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마법이 걸린 물건.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황녀님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 줄 겁니다.’라고요.”
“하지만 이건 그냥 연수정일 뿐인데? 그런 기능은 없어, 로메인.”
“압니다. 그저 요리를 하기 전 미리 적당한 조미료를 쳐 달라는 뜻입니다.”
이 모든 것은 황녀가 자진해서 [포털]을 이용하게 만들기 위한 밑 작업이다.
“미리 그런 이야기를 해 놔야, 갑자기 선택 창이 떠올랐을 때 아무 의심 없이 [수락]을 누를 게 아닙니까?”
“흠.”
레오나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걸이를 갈무리했다.
“그나저나 준비한 것은 어때? 시간에 맞춰 제대로 작동하겠나?”
그가 보기에 로메인의 준비는 허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무리 바쁘게 준비했다고는 해도, 그 많은 코드들을 그냥 맨땅 위에 어설프게 늘어놓지 않았던가.
한데 레오나드의 걱정을 들은 로메인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하하, 괜찮습니다. 레오님. 설마 그 정도의 안전장치도 없으려고요. 제가 만든 코드들은 지극히 불완전하기에, 이쪽에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쉽게 활성화되지 않습니다.”
“그래? 누군가가 발견할 가능성은?”
“바서스트 백작의 사냥터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백작은 영지민의 사냥도 엄격히 금지하고 있으니, 일부러 이 산에 올라오는 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테죠.”
“하지만 산짐승이 건드리거나, 바람에 어딘가로 굴러가버리면 어쩌려고? 준비한 게 말짱 헛수고가 될 거 아냐?”
“설령 정말로 코드 몇 개가 사라진다고 해도 문제는 없습니다. 충분히 많은 수를 준비했으니까요.”
로메인이 생각하기에, 이 일이 실패할 경우의 수는 오직 하나였다. 바로 늘어놓은 모든 코드들을 한자리에, 그것도 [재앙]의 흔적이 강하게 남은 장소에 모아, 코드의 기능을 완전히 꼬이게 만드는 것.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 많은 코드들이 우연히 특정 장소에 모일 확률은 거의 제로에 수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퍼엉!
갑자기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작은 오두막이 크게 뒤흔들렸다. 로메인과 레오나드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
“…어라?”
Chapter 45: Chapter 345
Chapter Text
345. 붉은 저주 (4)
이변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붉은 돌을 쌓아놓은 바위가 조금씩 떨리는 듯 보여,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려던 찰나였다.
퍽!
예고도 없이 꼭대기의 돌멩이 하나가 터져 나갔다.
“……!?”
“저하!”
마사인이 기겁하며 성진의 앞을 가로막고서 검막을 펼친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퍼벅! 퍽!
곧 산더미처럼 쌓인 돌무더기가 연이어 폭음을 터뜨렸다.
바위를 이고 있는 붉은 땅 역시 거세게 진동하기 시작한다. 마치 근방에서 대규모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이게 뭐지? 이게 뭐야?]
머릿속에서 마왕이 혼란스러운 중얼거렸다.
[이상해, 이성진! 규상 세계의 규칙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 저 보잘것없는 규칙들이 한데 모여 공명하며, 뭔가 엄청난 것으로 변하고 있다고!]
성진 역시 강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지금까지는 모호하기만 했던 예감이, 갑자기 뚜렷한 형체를 띄고 급격하게 구체화되는 느낌!
퍼엉!
그때, 멀리서 거대한 폭음이 일었다.
만일 이곳이 델크로스가 아니었다면, 수백 킬로그램의 다이너마이트가 한꺼번에 폭발을 일으켰다고 해도 믿을 정도.
흔들흔들.
발밑의 땅이 충격으로 거세게 뒤흔들린다.
“헉? 저하!?”
“무슨 일입니까?”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상주기사들이 화들짝 놀라 성진을 향해 달려왔다. 한데 곧 그들 모두의 눈앞에서 엄청난 광경이 펼쳐졌다.
콰콰콰콰콰-!
저기 보이는 작은 산 하나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들이 사슴을 잡느라 헤집고 다니던, 바서스트 백작의 사냥터 쪽이었다.
엄청난 소음과 함께 매캐하게 일어나는 흙먼지가, 사냥터와 캠프를 순식간에 뒤덮어버렸다.
“어…….”
이게 무슨 일이지?
멀쩡하던 산이 왜 갑자기 가라앉는 거야?
성진이 눈을 깜박이며 그 광경을 바라보는데, 옆에 있던 마사인이 기다렸다는 듯 소리쳤다.
“제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아니, 마사인 경? 그게 무슨?
그나저나,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데, 왜 자네는 놀라지도 않아?
“저하께서 계신 곳이 아닙니까? 이제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뭐? 잠깐…….”
“분명 이게 끝이 아니겠죠? 제가 말려도 분명 저하께서는 저곳으로 가겠다고 고집 부리실 것 아닙니까?”
“…….”
“그러면 저도 따라갑니다! 아시겠습니까?!”
아니, 마사인 경! 대체 날 뭘로 생각하는 거야?
이러나저러나 성진은 대단히 억울했다.
퍼벅! 퍼버벅!
그러는 중에도 붉은 돌들은 속절없이 깨져나가고 있다. 결국은 충격을 이기지 못한 바위가, 무너져 내리는 땅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쿠르르르르…….
‘이곳도 위험하다. 지진인지 뭔진 몰라도, 분명 같이 휘말릴 거야!’
발아래 진동이 점점 거세지는 것을 깨달은 성진은, 목소리에 오러를 실어, 있는 힘껏 소리쳤다.
“모두 들어라! 작업은 중단하고 당장 이리로 돌아와! 우리는 지금 바로 산 아래로 내려간다!”
상주기사들이 명령에 따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직 하벤 경 하나만 빼고.
“안 돼! 내 돌! 정확한 숫자를 세지도 못했는데!”
그는 무너지는 바위를 바라보며 허망하게 손을 휘젓고 있었다.
“내, 내 귀중한 술들이!”
“이런 정신 나간 놈이!”
빠직. 이마에 핏대가 솟은 성진이, 뒤에서 그의 오금을 세게 걷어찼다.
퍼억!
“정신 차려, 하벤 경! 지금 뭐 하는 건가!”
“어억! 하지만, 저하…….”
“자네가 찾은 돌은 정확하게 37개다!”
“…네?”
“내가 다 기억하고 있어. 의심할 여지 없는 1등이지! 그러니까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황궁 기사로서의 본분을 다해!”
잠시 멍청히 성진을 바라보던 하벤 경의 눈에, 서서히 빛이 돌아온다.
“송구…합니다, 저하!”
이내 빠릿한 태도로 되돌아온 그를 보며 성진이 작게 혀를 찼다.
할 때는 하는 놈이, 이게 무슨 추태야!
“상주기사들을 추슬러라, 쿠르트 경! 혹시라도 낙오된 자가 있는지 확인해!”
성진이 드물게도 잔뜩 긴장해 있는 쿠르트 경에게 명했다.
“그리고 모두의 안전이 확인되면, 즉시 기사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피신하도록!”
“네, 저하!”
“그리고 캠프에서 탈출하는 자들이 보이면 최대한 도와주게!”
그 말에 쿠르트 경이 당황하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마치 황자가 그들과 함께하지 않겠다는 듯 들렸기 때문이다.
‘하면 저하께서는?’
하지만 그의 시선이 곧 성진의 뒤에서 입을 다물고 서 있는 마사인 경에게로 가 닿는다.
쿠르트 경은 뭔가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웡웡!
기다렸다는 듯 막스가 성진의 곁으로 다가와 열렬히 짖어댄다. 자신의 주인이 무엇을 하려는지 이미 눈치챈 까닭이리라.
워우우우우!
-네가 가면 나도 가! 내가 필요할 거야! 나는 강하고 거대하니까!
“그래, 막스. 같이 가자!”
어제 막스를 옆에 끼고 틈틈이 연공을 한 보람이 있어, 어느샌가 성진은 개와의 연결을 찾아내는 데에도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급히 단전을 활성화하며 막스에게 다량의 오러를 흘려보내자-
후우욱-
이내 막스의 몸집이 무럭무럭 불어나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그 무렵, 무너진 사낭터에서도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자욱한 흙먼지가 서서히 잦아들자, 그 밑에서부터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퍼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악마종!”
마사인이 나직하게 침음을 흘렸다.
신성력이 없는 성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산이 무너지고 생겨난, 반경 수백 미터에 이르는 구덩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저변으로부터 엄청나게 강한 마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온다!”
삿되고도 불길한 기운 한가운데, 뿔로 뒤덮인 거대한 파충류의 머리 하나가 천천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르르…….
* * *
그 거대한 폭발은 황궁 집무실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
성황의 집무실에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아멜리아는, 그 충격에 화들짝 놀라 열린 테라스로 달려갔다.
“저건?”
먼 서남쪽 하늘이 자욱한 흙먼지로 뒤덮이고 있다. 오러로 한껏 안력을 돋운 것을 생각하면, 황도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장소.
“바서스트 백작령이구나. 지금 그곳에 악마종이 나타났다.”
담담한 성황의 목소리에, 아멜리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모레스!’
걱정으로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집무실을 박차고 달려가려는 마음과 달리, 그녀의 머릿속은 한없이 냉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진정해, 아멜리아! 신성력 하나 없는 내가 지금 악마종을 상대로 뭘 할 수 있어? 침착해. 그리고 생각해라. 나는 지금 아버님 폐하의 곁에 있어!’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
불필요한 절차를 건너뛰고, 최단 시간에 모레스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야!
“폐하!”
“폐하아!”
마침 성황의 집무실로 발타자르를 비롯한 여러 기사단장들이 들이닥쳤다.
“마기가! 강한 마기가 느껴집니다!”
“악마종의 출현입니다! 아아, 주신이시여!”
“당장 휘하의 성기사단을 보내겠나이다! 부디 명을!”
성기사단…….
자연스럽게 가장 믿음직한 동생의 얼굴이 뇌리를 스친다. 아멜리아는 곁에 있던 시종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로건에게 연락하세요. 그리고 속히 릴리움 별동대를 움직이도록…….”
그런데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초로의 남자가 황송한 듯 고개를 조아렸다. 성 바스티안 기사단의 단장, 울겐 경이었다.
“저하, 외람되오나 그것이…….”
“뭔가요? 울겐 경.”
“로건 저하께서는 이미 말을 끌고 황궁 밖으로 달려 나가셨습니다. 아마도 악마종을 감지하자마자 움직이신 듯하여…….”
아멜리아는 내심 감탄했다.
로건, 정말 빠르구나!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씀이오나, 릴리움 별동대가 그 뒤를 부랴부랴 따라가긴 했사옵니다.”
로건 역시 모레스를 걱정한 것일 테지. 평소라면 별동대를 챙길 정신은 있었을 텐데, 확실히 마음이 다급하긴 했던 모양이다.
‘좋아. 로건과 릴리움 별동대 이상으로 현장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전력은 없어!’
급한 불은 껐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가 할 일은, 모레스와 로건이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찾아 조력하는 것.
“릴리움 별동대의 전력이 모자라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악마종의 정확한 분류나 개체 수, 그리고 전력에 대해 전혀 파악된 것이 없다.
‘아버님 폐하께서는 태연하게 말씀하셨지. 바서스트령에 악마’종‘이 나타났다고…….’
그렇다면 1형, 단독형 악마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 말만을 믿고 준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
“폭발의 규모를 감안하면, 만일 단독형이라 해도 2급 이상의 거대종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즉시 추가 전력을 편성해서 만의 사태에 대비를…….”
그렇게 말하던 아멜리아가, 뜨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마음이 조급했던 것은 자신도 로건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님 폐하 앞에서 이게 대체 무슨 월권행위란 말인가!
“…….”
그런데 성황은 그런 아멜리아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가볍게 휘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한 아멜리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성황은 그녀에게 암묵적으로 전권을 위임한 것이다.
“성 그라지에 기사단을 소집하세요, 아그네스 경. 폭발이 일어난 곳은 아마도 백작의 사냥터 부근으로 추측됩니다. 인구 밀집 지역은 아니지만, 만에 하나 제국의 신민들이 말려들었을지도 몰라요. 인명 구조 경험이 많은 그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예, 저하.”
“필요하면 친위대 3기사단과 공조하세요. 바서스트 백작이 보고한 영지의 총 전력을 감안하면, 두 기사단이 함께 움직여도 제국법에 어긋나지 않을 겁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성 그라지에 기사단의 단장, 아그네스 경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디고리 추기경. 파견 가능한 황궁 의원들을 모아 바서스트령으로 보낼 겁니다. 약식 절차를 밟으세요. 그리고 행정부의 도리안을 불러, 급히 구할 수 있는 구호물자들을 준비하라 이르고요.”
겨우 손녀뻘인 황녀의 앞이었지만, 디고리 추기경은 어쩐지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며 주춤주춤 머리를 조아렸다.
“이 모든 일은 도탄에 빠진 신민들을 위해 긴급하게 조치되는 일. 성회에는 사후에 제가 보고할 것이니, 다소 시일이 소요되는 사전 절차는 일단 건너뛰어도 무방합니다.”
* * *
막 폭발이 일어나 사낭터가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천만다행한 일로, 캠프는 철수 작업의 거의 막바지에 달해 있었다. 오늘부터 사냥터를 옮길 예정이었으니까.
대부분의 회원들은 이미 이동 중이었으며, 캠프에 남아있는 자라고는 짐을 정리하고 있던 시종 몇몇과 소수의 영지민들뿐.
물론 보도로 움직여야 했던 그들은, 갑자기 지축을 울리는 진동과 밀려드는 흙먼지에 넋을 잃었다.
‘이대로 저 사람들이 피할 방법은 없어!’
마부와 함께 황궁 마차에 올랐던 에디스는 초조한 심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늘 평화로운 분위기에 맞춰 멍해져 있던 머리가,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을 맞아 빠르게 돌아간다.
‘만일 저들을 이 마차에 태울 수 있다면……!’
하지만 오직 성황가의 일원을 위해 준비된 귀한 마차다. 자신의 독단으로 그런 것을 결정해도 되는 것일까?
-저하, 마차는 왜 또 가져가신다는 건가요?
문득 에디스는, 오늘 아침 황자와 가볍게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늑대개라는 희대의 탈것(?)이 생겼음에도, 좀처럼 마차를 포기하지 않는 황자에게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일단 끌고 왔으니, 가지고 있으면 뭐든 실어 갈 것이 있지 않겠어? 상주기사들이 찾은 돌멩이도 날라야 하고, 사냥감도 들고 가야 하지. 저 많은 사슴들을 영지민들에게 모두 옮기라고 하는 건 너무 무리한 처사잖아.
하지만 귀빈을 위한 고급 마찬데. 거기에 피투성이 사냥감들을 실으라고?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이어지는 말이 더욱 가관이었다.
-에디스도 들고 가고 싶은 게 있으면 사양하지 말고 실어. 돌이든 풀이든, 뭐든 가져가자. 일부러 수석 수집하러 다니는 사람들도 있잖아?
-…네?
결정을 내린 에디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래, 저하께서 날 탓하지는 않으실 거야. 지저분한 사냥감이며 하찮은 돌멩이도 싣자 말씀하시는 분 아닌가.
“다들! 마차에 올라요!”
오러로 돋워진 목소리가,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쩌렁쩌렁 캠프 안을 울려 퍼진다.
“더는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어서!”
영지민들은 잠시 고민했지만, 거센 진동은 어느새 발밑까지 도달해 있었다. 결국 그들은 어영부영 마차 안으로 끼어들기 시작했다.
“서둘러요!”
* * *
한편, 사냥 모임의 회원들도 부리나케 움직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천재지변에 당황한 그들은, 사용인들을 그 자리에 내팽개친 채 호위기사들만을 데리고서 허둥지둥 줄행랑을 쳤다.
한데 회원들을 보낸 뒤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바서스트 백작이, 말을 몰려다 말고 흠칫 고개를 돌렸다. 먼저 출발한 줄 알았던 백작 부인이, 캠프 안으로 되돌아와 말에 올라탄 채 미동도 않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부인?”
“…윌리엄.”
그의 부름에 겨우 뒤를 돌아보는 그녀는 어딘가 몽롱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어찌 된 일일까요. 마치 꿈을 꾼 것만 같군요.”
“그게 무슨?”
백작이 말머리를 돌리려는데, 호위기사가 황급히 그를 만류했다.
“백작님!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부인은 제가……!”
“아아!”
그때 갑자기 뭔가를 떠올린 듯, 백작 부인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윌리엄! 저택에 찾아오는 수상한 손님을 조심하세요. 그는 오래전부터 바서스트 백작가를 오가며 뭔가를 꾸미고 있었어요! 그리고 어째서인지 제가 그를 도왔어요.”
“어서 오시오! 일단 여기로 와서 얘기해요! 응?”
백작을 보다 못한 호위기사가, 그의 고삐를 잡아채며 박차를 가했다.
다각다각.
캠프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부인!”
“들으세요, 윌리엄! 그가 우리 저택을 무너뜨리겠다고 말했어요! 제 귀로 똑똑히 들었다고요!”
“지금 피해야 하오!”
“아아, 하지만 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네요. 어쩌면 가면을 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도 지금은 모르겠군요.”
“알았소! 알았으니, 제발 이쪽으로……!”
백작이 절절한 목소리로 외치자,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부인이 입매를 휘었다. 세월이 흘러 눈가에는 잔주름이 잔뜩 잡혔지만, 바서스트 백작의 눈에는 여전히 여신처럼 곱기만 한 미소였다.
“그럴 수 없어요. 전 이제 그자로부터 평생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초점이 흐려진 그녀의 눈에는, 마치 환상 같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손에 쥐어진 나이프. 피투성이가 되어 더는 숨을 쉬지 않는, 그녀가 몹시도 사랑하던 사람들.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반드시 닥쳐오고야 말 암울한 미래.
“사랑해요, 윌리엄. 부디 마가렛을…….”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멀어지는 백작 부인의 머리 위로, 검은 흙더미가 무자비하게 내리덮였다.
Chapter 46: Chapter 346
Chapter Text
346. 쥐라기 아일랜드 (1)
한순간에 검은 마기로 뒤덮인 대지.
그 자욱한 연기 위로, 거대한 괴물의 머리가 서서히 고개를 쳐든다.
“드… 드래곤?”
캠프에서 줄행랑을 치던 자들이 눈을 의심하며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괴물의 모습은 마치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사악한 드래곤을 연상하게 했다.
집채만 한 머리통 위에는 세 개의 거대한 뿔이 솟아있고, 목에는 마치 판금과 같은 넓적한 뼈를 두르고 있다.
놈이 검은 마기에 젖은 몸체를 서서히 일으키자, 마치 웅장한 성채가 통째로 허공에 솟아오르는 듯 보였다. 그 간단한 움직임만으로도 지축이 진동하고 대기가 흔들린다.
“…아아, 주신이시여!”
괴물을 바라보는 모두가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 거대한 몸통 속에는, 분명 그에 비례하는 힘과 위력이 깃들어 있음을.
놈이 내쉬는 작은 입김에도 마치 천둥이 치듯 거센 파동이 일었다.
크르르르르…….
한데 모두가 그 장엄한 광경에 얼어붙어 있을 때.
정작 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성진의 감상은 지극히 단순했다.
“트리케라톱스?”
한때 공룡을 사랑하는 어린 시절을 거쳐본 자라면, 누구나 저 독특한 형체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단지 그냥 공룡이라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덩치가 크고, 비늘마다 기괴한 뿔들이 수없이 돋아있어 좀 더 흉흉해 보이긴 했지만.
“예? 저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등 뒤에서 마사인이 물어온다. 그들은 지금 거대해진 막스의 등에 올라탄 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산비탈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어, 내가 아는 동물이랑 어딘가 비슷한 거 같아서!”
“아는 동물요? 저것이요?”
“신경 쓰지 마, 마사인 경!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나 봐!”
그러자 마사인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공룡 괴물을 바라본다.
‘그래, 착각일 거야. 적어도 일반적인 공룡이 저렇게 마기를 뿜어내지는 않을 테니까.’
아닌 게 아니라, 괴물은 마치 타르를 뒤집어 쓴 것처럼 질척한 검은색을 띄고 있었다. 아마도 온몸에 짙은 마기를 휘감고 있기 때문일 테지.
[이성진, 뭔가 이상해!]
그때 놈을 유심히 살피던 마왕이 외쳤다.
[아무리 봐도 저건 일반적인 악마종이 아닌 것 같아!]
‘그럼?’
[본래 저런 모습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마치 만들어진 모습처럼 부자연스럽다는 말이야! 의식을 가진 하나의 개체라기보단 특정 모양으로 응축된 마기에 더 가까운 거 같아!]
‘흠…….’
마침 성진도 어렴풋한 위화감을 느끼던 차였다. 저렇게 위험한 마기를 도처에 흩뿌리고 있음에도, 놈에게서는 뚜렷한 적의나 목적성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놈에게서 약하게나마 규상세계의 법칙이 느껴져! 마치, 예전에 네가 조종하던 글래쳐 트롤들처럼 말이야!]
그래? 그렇다면.
‘마왕아!’
성진이 호명하자, 이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마왕이 염상 결정에 깃들었다. 곧 성진의 눈앞에 자동적으로 화려한 영안의 세계가 펼쳐진다.
‘……!’
빨갛고 파란 색체의 향연 속에서, 여전히 심연처럼 검기만 한 괴물의 모습. 놈이 악마종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데 놀랍게도 놈의 머리 위에, 성진에게는 꽤나 익숙한 글자들이 떠올라 있었다.
〚스티라코케라톱스〛
〚스프링벨리의 필드 보스. 중형 트리케라톱스 200마리를 잡을 때마다, 5%의 확률로 출몰합니다. 3인 이상의 파티 사냥을 권장합니다.〛
〚화염 저항 B. 전기 저항 B.〛
〚몬스터 등급: B+〛
〚*현재 노스랜드 서버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성진이 눈을 깜박거렸다.
뭐? 저게 정말 공룡이었어? 거기다 노스랜드 서버라고?
-예전에 이 회사 초창기에…….
자연스럽게 성진의 뇌리에, 난쟁이 공학자 덱스터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무료 미니 게임 하나를 출시한 적이 있어.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도 그때의 통합 서버가 ‘노스랜드’였을 거야.
그리고 덱스터의 노트북에서 보았던 게임 타이틀. 거대한 유인원이 하얀 예티와 싸우는 단순한 일러스트.
-콩: 쥐라기 아일랜드
성진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게임 소스! 전부터 임펄스 소프트 내의 게임 소스를 델크로스 차원에 꾸준히 옮겨온 자가 있어! 그 많은 글래쳐 트롤들도 그렇고, 이제는 저 거대한 공룡까지! 혹시 대륙을 잘 뒤져보면, 곳곳에 저런 것들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빈약한 근거 속에서 오직 감에만 의존한 논리의 비약은, 성진에게 대단히 많은 가능성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대륙을, 나아가 제국을 적대하는 놈이 아니라면 절대 이런 짓을 꾸밀 리가 없다. 한 놈일까, 아니면 다수의 소행일까? 적어도 고위 악마, 혹은 암흑 교단의 관계자임에는 분명하겠지. 대체 언제부터 계획하고 준비한 거야?’
어쨌든 상대가 우연히 쓸 만한 게임 소스들을 찾아냈다고 보긴 어려우리라.
‘이오니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 혹은 이오니아의 공학에 대해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자다. 임펄스 소프트의 게임 소스들이 이오니아의 기술과 접목되어 있음을 아는 거야! 어쩌면 직접 회사의 운영에 관여하는 고위 관계자일지도 모른다!’
바로 그때.
“저하!”
[이성진! 조심해!]
괴물이 일으키는 진동을 이기지 못한 나무 하나가, 우지끈 부러지며 빠르게 눈앞으로 날아든다.
순간적으로 반응하며 오러를 움직이자-
훌쩍!
다리에 탄력을 받은 막스가 힘차게 바닥을 박찼다. 자칫 머리를 정면으로 때릴 뻔한 나무가, 거센 바람소리를 내며 아슬아슬하게 성진의 귓가를 스쳐간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그런 와중에도 성진의 생각은 계속되었다.
‘산속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돌멩이들. 그것들이 이 사태를 만들기 위해서 준비된 것들인가?’
하지만 성진의 예감이 곧 그것을 부정했다.
아냐.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돌멩이나 그걸 삼킨 곰이나, 딱히 마기가 감지되지는 않는다고 프란시스도 말하지 않았나.
‘하지만 저 공룡을 델크로스로 가져다 둔 건, 분명 악마거나 악마 숭배자다!’
그럼에도 붉은 돌들이 일시에 폭발한 것과, 산이 무너진 뒤 괴물이 나타난 것을 아예 별개의 사건이라 생각할 수는 없었다.
마왕도 그러지 않았던가. 빈약한 규상세계의 규칙들이 한데 모여 공명하면서, 가늠할 수 없는 엄청난 뭔가로 변모했다고.
‘저 많은 돌멩이를 준비한 놈도, 설마 내가 그것들을 한곳에 끌어모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결국은 나 때문인가.
성진은 썩 내키지 않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보물찾기랍시고 그것들을 한데 모아둔 것이 패착이었던 거다.
‘젠장! 부디 아버지한테 거하게 딱밤 맞는 사태만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텐데!’
성진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크르르…….
그 무렵, 괴물에게서도 묘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냥터가 무너지며 나타난 거대한 싱크홀. 그곳에서 고개를 들고 어떻게 몸을 일으켰다곤 하지만, 놈은 좀처럼 구덩이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었지만, 지나치게 거대한 몸체가 오히려 놈에게도 큰 부담이 되는 것 같았다.
놈이 애써 몸을 꿈틀거린 것도 잠시.
퍼퍼퍽!
다리 쪽의 거죽과 비늘이 저절로 터져나가며, 피와도 같은 검은 마기들이 풀풀 쏟아져 내렸다. 엄청난 하중을 견디지 못한 공룡의 다리가 스스로 뭉개지기 시작한 것이다.
쿠워어어어!
지금까지 아무런 목적성을 띠지 않던 놈의 눈에, 처음으로 강한 고통과 적의가 어린다. 괴물은 비명을 지르며, 저 좋을 대로 거대한 머리통을 이리저리 휘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쿠우웅! 쿠웅!
불규칙한 진동과 함께 땅이 찢어지며, 거대한 균열이 지표를 빠른 속도로 가르며 퍼져나간다. 사냥터 근처에 있던 경작지들 역시 형체도 없이 뭉개지기 시작했다.
“으아악!”
마침 근처에 있던 영지민 하나가, 허겁지겁 도망가다 순식간에 균열에 삼켜진다. 하지만 그가 까마득한 무저갱으로 떨어지기 직전.
턱!
누군가의 억센 손아귀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성진의 뒤에 타고 있던 마사인이었다.
어느새 괴물의 발치까지 도달한 성진 일행이, 운 좋게 영지민을 발견하고 잽싸게 균열로 뛰어든 것.
타앗, 탓.
가벼운 도약 몇 번으로 균열을 뛰어오른 막스가 마침내 지표면 위를 딛고 서자, 마사인은 그를 가볍게 바닥에 내려주었다.
“자, 위험하니 어서 이곳을 피하게.”
그때까지도 영지민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가, 감사……!”
한데 엉겁결에 감사 인사를 건네던 그가, 눈앞에서 송곳니를 드러낸 커다란 늑대개를 보고 새파랗게 질리는 것이 아닌가.
“흐아아악! 괴, 괴물!”
꽁지가 빠져라 줄행랑을 치는 그를, 성진이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아니, 기껏 구해줬더니 지금 누구더러 괴물이래? 너는 귀여운 강아지랑 괴물도 제대로 구별 못 하냐? 응?
“저하…….”
그때 떨리는 마사인의 목소리가 성진의 귀를 잡아끌었다.
“진정 저 악마종을 몸소 상대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는 괴물 공룡의 위용에 완전히 압도되어 있었다.
이미 그 크기를 알고 있었음에도, 막상 코앞에서 올려다본 놈의 모습은 장엄하다 못해 충격적이기까지 했으니까.
“황도에서도 금방 이변을 눈치챌 겁니다. 아마도 최대한 빠르게 성기사단을 파견할 테니, 차라리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
성진은 잠시 대답 없이 트리케라톱스를 닮은 괴물을 올려다보았다.
쿠웅.
놈은 이제 망가진 다리 대신, 몸채를 밀며 꾸역꾸역 구덩이를 기어 나오고 있었다. 대상이 불분명한 적의와 원한이 넘실거리는 눈을 한 채, 때때로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파스스스.
놈이 그렇게 몸부림을 칠 때마다, 마구잡이로 흘러나온 마기에 땅이 검게 물들고 초목이 급격하게 시든다.
이대로라면 바서스트령은, 조만간 생명이 발붙일 수 없는 완전한 죽음의 땅이 될 테지.
“아냐, 마사인 경. 우리는 저놈을 여기서 멈춰 세워야 해.”
죽이지 못한다면 적어도 한자리에 묶어두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했다. 저 강력한 적의가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지금도 손에 잡힐 듯 뚜렷하게 예감할 수 있었으니까.
“저하…….”
잠시 황자의 눈에 어리는 묘한 광채를 바라보던 마사인이, 체념한 듯 미스라를 뽑아 들었다.
그가 잘 아는 누군가도 때때로 저런 눈을 할 때가 있었지.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가 결정한 일은 단 한 번도 번복된 적이 없었다.
“괜찮아. 우리는 놈의 꼬리부터 차근차근 다져나가면 되는 거야. 아마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할걸?”
그렇게 말한 성진이, 호두까기를 뽑아 들며 입꼬리를 비죽 끌어올렸다.
‘마구잡이로 소스를 들여와, 무조건 크기만 키운다고 능사가 아니지. 차라리 저게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는 크기였다면, 지금쯤 황도가 정말로 위험에 빠졌을지도 모르는데.’
성진은 얼굴도 모르는 적을 향해 조소를 날렸다.
뭣보다도 트리케라톱스는 쥐라기 공룡이 아니라고! 좀 고증이 제대로 된 게임을 찾아오란 말이야, 이 머저리야!
* * *
“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로메인은 의외에 사태에 망연자실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적절한 타이밍에 바서스트 백작저를 무너뜨릴 준비를 했을 뿐이었다. ‘균열의 흔적’이 서쪽 산과 백작저를 일직선으로 관통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
애초에 접선 장소를 이 산에 마련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예전에 했었던 몇 차례의 실험을 바탕으로, 그저 가볍게 지반을 뒤흔들 예정이었지. 적어도 이런 난장판을 의도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저건 또 어디서 튀어나온 괴물이야?’
로메인이 예상했던 변수는 단 하나. 코드로 증폭된 균열의 힘이, 살아있는 짐승의 오러와 결합하는 것이었지만,
‘설마 돌멩이를 삼키는 짐승이 있을 리도 없을뿐더러, 먹는다고 해서 코드가 중복 발동되는 것은 아닐 텐데.’
한데, 저 엄청난 크기의 괴물은 대체 뭐란 말인가!
“저건 뭐야?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로메인을 따라 달려 나온 레오나드가, 술병을 바닥에 집어 던지며 눈을 비볐다.
크워어어어!
거대한 괴물이 재차 포효한다.
그 광포한 외침만으로도 강한 충격파가 일며 산이 통째로 뒤흔들렸다. 나무들이 휘청거리고 바위가 갈라져 떨어진다.
“헉, 로메인! 우리도 어서 피하지 않으면……!”
때마침 그들이 있던 오두막 역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지난 수년간 로메인의 접선 장소가 되어주었으며, 지하에 공들여 만든 복잡한 코드가 새겨져 있는 소중한 오두막이.
“아아…….”
로메인은 멍하니 탄식했다.
어떻게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이리도 엉망진창이 될 수 있는가!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로메인! 이러다 다 죽어! 어서 산 아래로 피신해야 한다고!”
보다 못한 레오나드가 그의 팔을 끌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흔들흔들, 발밑에서 진동하는 지반이 위태롭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로메인은 쉽사리 괴물로부터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저건……!”
로메인의 눈에 똑똑히 들어오는 광경이 있었다.
보통 크기를 훌쩍 넘어서는 커다란 늑대 위에 올라, 괴물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는 정신 나간 사람을.
“저하! 갑자기 혼자서 그렇게 달려드시면……!”
연이어 누군가의 희미한 절규가 따라온다.
저 옅은 금발은 분명-!
“모레스 황자……!”
그저 혼란스럽기만 하던 머릿속에서 여러 상념들이 맞물려가며, 이윽고 한 가지 결론으로 귀결된다.
성황의 새로운 말.
암흑 교단의 예비된 자.
그리고…….
‘누구도 감히 예측할 수 없는 절대적인 변수!’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델크로스의 수호자여! 그대는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또 어디까지 준비를 마친 건가!’
진정 내가 그자를 상대할 방법은 없는 건가? 쥐 죽은 듯 본신을 숨기고, 이렇게까지 다방면에서 빈틈없이 준비를 한다 해도?
“서둘러, 로메인! 어서 앞을 보고 제대로 뛰라고!”
그를 끌고 달리던 레오나드가 답답해하며 소리쳤지만, 로메인의 눈은 언제까지고 모레스 황자로부터 떨어질 줄을 몰랐다.
Chapter 47: Chapter 347
Chapter Text
347. 쥐라기 아일랜드 (2)
갑작스럽게 일어난 천재지변이었음에도 인명 피해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마침 사냥 모임이 있던 터라, 해당 지역 영지민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덕분이다.
사냥 캠프에 있던 이들도 용케 제때 철수한 것 같고.
“으아악, 해수! 아니, 괴물 개다!”
경작지 부근에서 흙더미에 깔린 영지민 하나를 더 구출한 성진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괴물 공룡의 뒤로 다가갔다.
놈은 이제 구덩이에서 몸의 절반 정도를 밀어내며, 거의 뒷다리와 꼬리만을 아래에 남겨두고 있었다.
‘마기 때문에 더 이상 다가갈 수는 없다. 하지만 마사인 경의 오러 폭사가 닿기에는 거리가 조금 애매하군. 차라리 측면으로 더 다가가볼까.’
정면을 노리면, 놈이 더 빨리 구덩이를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괜히 뒤를 잡겠답시고, 마기로 가득한 구덩이 아래로 뛰어내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하. 저것은 1형 악마종, 그중에서도 1급 악마일 겁니다.”
검을 겨눈 마사인이 굳은 얼굴로 경고했다.
“저 거대한 것을 제대로 상대하려면, 많은 수의 성기사들이 모여 신성 결계를 펼쳐야 합니다. 그러니 부디 신중히 생각해 주십시오.”
“알고 있어, 마사인 경.”
성진은 번져나가는 마기로 인해 죽어가는 대지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지.’
참회 교단 잔당이 마계수를 소환했을 때.
당시 샤론 경이 들려준 얘기에 따르면, 과거에 출몰했던 마계수를 처치하기 위해, 5대 성황을 포함해 도합 서른이 넘는 성기사와 사제들이 방어 결계를 펼쳤다고 했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할 거야.’
거대한 빌딩도 훌쩍 웃도는 크기의 공룡이 아닌가. 길고 두꺼운 꼬리를 제하더라도 체장만 족히 100미터에 근접해 보인다.
기어가듯 움직이지만 마계수보다 이동도 빨랐다. 이러니 마기가 번져나가는 속도 역시 비할 바가 아니지.
‘놈을 도로 구덩이에 밀어 넣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전력으로는 불가능.
결정은 빨랐다. 뭐, 마기로 인해 늘어나는 경작지의 피해는, 아버지가 어떻게든 해 주시지 않을까.
“이 이상은 다가가지 않도록 하지, 마사인 경. 우리는 이쯤에서 놈을 잡아두자.”
조금 더 괴물의 옆으로 이동한 성진이 막스를 멈춰 세웠다.
쉬이익-
오러 운용을 멈추자, 막스가 급격하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자연히 뒤에 타고 있던 마사인 역시 바닥으로 내려서며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왔다.
“진심이십니까, 저하?”
“왜? 마사인 경. 설마 내가 저 마기 속으로 대책 없이 달려들 거라 생각한 건가?”
한 점 티 없는 눈으로 마주 보았더니, 움찔 놀란 마사인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니, 그건 아닙니다.”
“그래. 그렇겠지. 미친놈도 아니고, 내가 그런 짓을 하겠어?”
“…….”
뭐지, 마사인 경?
아, 안 간다고! 그러니까 그런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그만둬!
“이제 믿을 건 마사인 경뿐이야. 이 먼 거리에서 놈에게 타격을 입힐 방법은, 경이 외기를 날려 보내는 것뿐이니까.”
신성력이 전무한 것은 성진이나 마사인이나 마찬가지. 과연 어느 정도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적어도 오러 폭사 정도라면, 공룡의 주의를 끌어 몸을 돌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네. 알겠습니다, 저하.”
다행히 성진이 직접 공격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마사인은 조금 안심하고 자세를 잡았다.
우웅-
곧 미스라가 은은한 금빛 오러를 뿜어낸다. 제국의 몇 안 되는 성유물이라고 했지.
과연 자세가 안정적으로 변하자, 마사인의 검은 유감없는 위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쇄애액! 쇄액!
미스라가 몇 차례 휘둘러지고, 그에 따라 날카로운 검기가 공룡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든다. 공격은 어김없이 적중하여 공룡의 몸에 긴 자상들을 남겼다.
퍼퍼퍽!
판금 같은 비늘이 갈라지며 검은 마기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놈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힌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주의를 완전히 끌기에는 조금 역부족이다.’
문제는 공룡의 몸이 이미 정상 체중의 수천 배에 달하는 질량으로 짓눌리고 있다는 점이겠지.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몸 여기저기가 처참하게 터져나가는 걸 생각하면, 마사인의 공격 따위는 그저 긁힌 상처에 불과했다.
“역시 경의 장기인 ‘오러 폭사’를 쓸 수밖에 없어.”
성진의 말에, 마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고른 숨과 함께 미스라가 점점 찬란한 금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긴 들숨과 함께 호흡이 멈추고-
쉬익-
깔끔한 종베기의 궤도를 따라 빠르게 날아가는, 긴 금빛 달의 잔상.
퍼펑!
오러 폭사는 여지없이 큰 폭발을 일으켰다. 공룡의 등에서 검은 마기가 폭포수처럼 터져 나오며, 처음으로 놈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크워어어어어!
공룡은 하늘을 향해 거세게 비명을 내질렀다.
퍼엉! 펑! 퍼펑!
이어서 터져 나오는 큰 폭발음.
몇 차례 더 오러 폭사를 얻어맞은 공룡이, 마침내 목을 꿈틀거리며 힘겹게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좋아!”
연이은 기술 사용으로 지친 마사인이 잠시 오러를 가다듬는 동안, 성진은 옆에서 영안으로 공룡의 상태를 꼼꼼하게 관찰했다.
‘겉만 번드르르한 폴리곤 덩어리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사인 경이 폭파시킨 공룡의 몸체는, 제법 제대로 된 살과 뼈로 이루어져 있는 듯 보였다.
‘그저 얼음덩어리인 빙수들과는 완전히 다르군. 같은 게임에서 튀어나온 놈들인데, 어째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
생각해 보면, 빙수들은 본래 예티처럼 디자인된 게임 속 형체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었지.
어디 그뿐인가. 본상세계의 물리 법칙마저 완전히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한데 저 공룡은 명백하게 델크로스의 중력에 강하게 속박되어 있었다.
[글래쳐 트롤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니까. 그 녀석들이 단순히 규상세계의 법칙을 어설프게 본상 세계에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면, 저 괴물은 그 규칙을 바탕으로 고위 악마가 새로이 탄생시킨 악마의 권속인 거야.]
그러니까 악마종 특유의 마기를 뿜어내는 거지. 마왕이 그렇게 덧붙였다.
[단지 저 마기는 놈이 자체적으로 생성하는 건 아닐 거야.]
‘그럼?’
[놈을 만든 악마로부터 직접적으로 공급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저건 마기를 자연스럽게 생성하는 살아있는 개체라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마기를 응축한 힘의 덩어리에 더 가까우니까.]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급격하게 늘어난 마기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마왕이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 사태를 저놈의 주인은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 이렇게 대량의 마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악마는 세상에 없으니까.]
‘그럼 그 주인이란 놈이 이곳에 나타날 수도 있다는 말이야?’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이곳은 네 아버지의 은총 바깥의 장소니까.]
‘흠…….’
성진은 막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만일 공룡의 주인이 정말로 여기 나타난다면 일이 대단히 까다로워지겠지. 자신의 권속에게 이 정도의 마기를 스스럼없이 나눠줄 수 있는 악마가 아닌가. 못해도 마왕 정도의 급을 가진 대단한 놈이 아닐까?
‘그래도 이왕이면 여기 와 주면 좋을 텐데.’
성진의 말에 마왕이 기겁했다.
[뭐? 진심이야? 대체 왜?]
‘그렇다면 저 공룡이 놈의 회심의 한 수라는 뜻이 아닐까? 그러니 어떻게든 우리를 막으려 안간힘을 쓰겠지. 하지만 만약 저대로 본체만체 내버려 둔다면…….’
성진의 지적에 마왕이 침음을 흘렸다.
[그, 그렇구나. 저놈이 파괴되는 걸 무시한다면, 그걸 대체할 권속이 얼마든지 있다는 의미가 되는 거야.]
그리고 저 정도의 마기 손실은 눈도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악마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성진은 잠시 기감을 곤두세워 보았지만, 마사인과 다샤 외에 다른 이들이 다가오는 기척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이곳에 로건이 있었다면, 아무리 미약한 마기라도 감지할 수 있었을 텐데.’
뭐, 곧 이곳으로 달려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퍼펑! 펑!
그때 마사인의 공격이 재차 시작되었다.
덕분에 고통을 이기지 못한 공룡이 몸을 뒤틀며, 기껏 빠져나오던 뒷다리 일부가 다시 구덩이 안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쿠우우웅!
족히 수백 톤은 넘어갈 몸체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자, 사방이 지진이라도 난 듯 거세게 흔들렸다.
“잘했어, 마사인 경!”
웡웡!
-우리도 가자! 가서 저걸 물어뜯자!
워우우우!
-어서 나를 강하고 거대하게 해라아아!
잔뜩 흥분한 막스를 진정시키며, 성진은 마사인과 함께 놈의 시야각 밖으로 재차 후퇴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성진의 영안은 부지런히 놈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어쩐지 성기사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으니까.
‘아직 놈에게 규상세계의 특징이 남아있다면, 분명 어딘가에 치명적인 급소가 있을 거야. 대부분의 보스몹은 공략에 용이한 약점이란 게 있게 마련이니까.’
글래쳐 트롤에게도 그런 급소가 있었다. 바로 가슴에 있는 심장이었지. 지그스문트령의 병사들은 항상 조를 이루어, 그 심장을 중점적으로 공략하곤 하지 않았나.
‘같은 게임에서 온 거라면, 이놈도 비슷한 게 있을 가능성이 크지!’
과연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성진은 곧 놈의 코끝에 솟아있는 뿔에서 옅은 붉은빛이 점멸하는 것을 발견했다.
영안으로도 겨우 판별할 정도로 희미하기 짝이 없는 표식이었지만, 만약 게임 내에서 만난 몹이라고 생각하면 꽤나 그럴싸한 위치.
‘어쩐지 한 번쯤 때려보고 싶게 생겼는데?’
[뭐어? 잠깐만,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마왕이 기겁했지만, 성진은 점점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빨갛게 빛나는 코라니, 이건 무조건 때려야 할 것 같지 않은가!
‘나중에 성기사단이 도착하면, 다짜고짜 신성 결계부터 치고 시작하겠지.’
아무리 약점 같다고 말해본들, 그 말을 믿고 달려들어 악마종의 코끝부터 공략할 정신 나간 놈은 없을 테니까.
그러면 또 놈을 토벌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력이 소요될 것인가. 성기사단의 피해 역시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을, 성진은 불 보듯 빤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전에 내가 조금 두드려 두면 얘기가 달라진다. 피해를 훨씬 줄일 수 있는 데다가, 나중에 합류하는 성기사단에게도 정보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 거야!’
판단을 마친 성진이 슬그머니 옆을 돌아보았다.
단기간에 십수 차례의 오러 폭사를 난사하느라, 꽤 지쳐 보이는 마사인 경의 얼굴을.
“마사인 경. 막스는 주신의 은총을 받은 신수야. 그건 알지?”
“네?”
갑작스러운 성진의 말에, 호흡을 고르던 마사인이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어지간한 마기에 닿아도 끄떡없지. 참 대단하지 않아?”
“아, 네. 그렇군요.”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마기 따위가 나를 상하게 하지는 못할 테니까.”
“…네?”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낀 기사가 주춤거리는 동안, 성진은 그를 떼어놓을 준비를 완전히 마쳤다.
후욱-
오러를 전달받은 막스의 몸집이 삽시간에 불어난다.
“그러니까 우리는 걱정하지 말고, 마사인 경은 이 이상 다가가면 안 돼! 알겠어?”
“저하!?”
그 말의 속뜻을 알아들은 마사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어느새 성진은 막스의 등에 올라 맹렬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괴물 공룡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놈의 빨간 코를 똑바로 향해.
마사인은 아연실색했다. 아까 황자 스스로가, 그런 미친 짓은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저하! 갑자기 혼자서 그렇게 달려드시면……!”
기사가 그를 따라 달리며 절규했지만, 뒤를 돌아보는 황자의 얼굴은 해맑기만 했다.
“따라올 생각 하지 말고, 경은 거기서 오러 폭사 좀 날려줘! 그게 날 돕는 거니까!”
그렇게 늑대개와 어린 황자의 모습이 순식간에 멀어져간다.
“그런……!”
엄호하라는 명령에 반사적으로 주춤 멈춰 선 마사인은 허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의 순간으로, 이내 봇물처럼 밀려든 거센 분노로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이…….”
후우욱-
한계까지 억눌려 있던 인내심의 끈이 마침내 끊어지고, 가슴속에서부터 복받치는 울분이 오러와 함께 거칠게 터져 나왔다.
“모레스으으! 너 이놈 자식이 정마아알!”
* * *
‘어, 마사인 경 엄청 화났나 보다.’
뒤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분노의 외침을 들으며 성진이 식은땀을 흘렸다.
이거, 어쩌면 아버지한테 맞을 딱밤만 걱정할 때가 아닌 거 같은데?
[당연하지! 야, 이 미친놈아! 네가 지금 제정신이야? 응?]
마왕 놈 역시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염상 결정 안을 빙빙 돌던 놈은, 이제 결정 바닥에 앉아 꺼이꺼이 땅을 치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야! 내가 미쳤지! 제정신이 아닌 건 바로 나야! 이놈이 언제고 이런 짓을 할 걸 빤히 알면서, 아무 생각 없이 또 영안을 빌려주다니!]
가만히 뒀다간 아예 영안을 꺼버릴 것 같기에, 성진은 조심스레 놈을 달랬다.
‘괜찮아, 마왕아. 이래봬도 믿는 구석이 둘 정도는 있으니까.’
아예 빈말은 아니었다. 막스와 오러를 공유하게 되면서, 오러의 운용이 갑자기 눈에 띄게 좋아졌으니까.
전에는 의식하는 대로 거칠게 돌아가던 오러가, 지금은 마치 조금이라도 몸을 다치게 할 새라 조심스럽게 경로를 따라 순환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우웅-
어느새 호두까기의 검날에 뚜렷한 회색 오러가 맺히기 시작한다. 또 다른 예리한 검날을 덮어썼다 해도 좋을 정도로 형태가 명확한 외기가.
본래는 상급 기사 정도는 되어야 보여줄 수 있는 경지였겠지만, 지금의 성진은 막스의 몸을 빌려 평소의 두 배에 가까운 오러를 운용하는 중이다.
‘그리고…….’
쓸 수 있는 오러는 그 외에도 또 있었다.
가슴께에서 언제까지나 찰랑거리는 잔물결. 바로 아버지가 넘겨준 엄청난 양의 오러들.
‘지금까지는 아버지의 주의대로 사용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성진은 알 수 있었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이것을 아낌없이 쓸 때라는 것을!
Chapter 48: Chapter 348
Chapter Text
348. 쥐라기 아일랜드 (3)
공룡이 뿜어내는 엄청난 밀도의 마기는, 놈의 몸체 주변에서 서로 엉겨 붙으며 거대한 돔을 형성했다. 전속력으로 달려간 성진이 그 자욱한 마기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금방이었다.
헥헥!
성진의 의지에 따라, 늑대개는 조금의 거리낌 없이 마기로 뒤덮인 죽음의 땅을 박찼다. 위험천만한 상황임에도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양 들뜬 태도.
‘역시 마기를 두려워하지 않아!’
성진은 내심 안심했다.
막스가 루이제의 마기 섞인 오러를 휘감고도 끄떡없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악마종을 상대로도 그럴지는 완전히 확신할 수 없었던 탓이다.
‘괜찮을 것 같군. 하지만 이곳의 마기는 너무 짙으니까, 미리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개의 주위로 오러를 덧대며, 성진은 거대한 벽처럼 느껴지는 공룡의 몸체를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마기의 연무 속은 한 치 앞도 가늠하기 힘들다. 하지만 성진에게는 마왕의 영안이 남아 있었다.
[아, 내가 미쳤지, 정말!]
마왕 놈은 지치지도 않고 푸념했지만, 전처럼 멋대로 염상 결정 밖으로 튀어나가지는 않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 그렇다면 최대한 성진에게 협조를 해서, 되도록 빨리 일을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익힌 거겠지.
퍼펑!
또다시 익숙한 폭음이 들리며 공룡이 거세게 몸부림 쳤다. 아마도 성진이 다가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마사인이 멀리서 재차 오러 폭사를 날린 모양.
마음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따라오고 싶었겠지. 하지만 성진을 따라 마기 속으로 뛰어들었다간,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마사인 스스로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기에, 필사적으로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럴 줄 알고 떼어놓은 거지만.’
정말 미안, 마사인 경.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미처 이해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경의 충고를 새겨들을 테니까.
[웃기시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쳇. 쓸데없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구나, 마왕아.
그러는 사이 공룡의 발치에 이른 성진은, 자신과 막스의 몸에 동시에 오러 은폐를 시도해 보았다. 일전에 루이제도, 막스의 몸으로 슈니슈헤를 쉽게 펼쳐 보이지 않았던가.
‘가능성은 충분해!’
후욱-
한데 참으로 싱겁게도, 단 한 번의 시도만으로 정말 늑대개의 기척이 스르륵 옅어지는 게 아닌가.
‘…생각보다 간단한데?’
권속과의 연결 때문일까. 늑대개의 몸이 또 다른 자신이라도 된 양 자유롭게 오러를 움직일 수 있기에 가능한 재주였다.
‘이거, 잘하면……!’
성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빨간 코를 제대로 노리기 위해 꽤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대로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콧잔등까지 가서 선빵을 칠 수 있을지도?’
안심한 성진은 거침없이 공룡의 다리를 타고 올랐다. 이미 스스로의 질량으로 인해 무자비하게 내리눌리는 상태에서, 공룡이 그들의 은밀한 움직임을 알아챌 수 있으리라는 걱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쩌적-
푸슉!
이따금 눈앞에서 예고도 없이 공룡의 거죽이 터지고, 그 상처로부터 엄청난 양의 마기가 솟구친다.
하지만 영안을 완전히 활성화한 성진에게는, 그 모든 방해물들을 피할 수 있는 경로가 눈에 훤히 보였다.
길게 뻗어있는 은빛의 실선.
언젠가 본 적 있는 그 뚜렷한 경로를 따라, 성진과 늑대개는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볍게 공룡의 비늘을 밟고 뛰어올랐다.
타닥, 탁!
이윽고 막스가 훌쩍 발돋움하여 공룡의 어깨 부근까지 뛰어오르자, 눈앞에 자욱하던 마기가 겨우 걷히며 공룡의 머리를 육안으로 식별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덩달아 성진과 막스의 모습 역시 검은 연무를 벗어나 밖으로 훤히 드러나게 되었다.
“……!”
재차 오러 폭사를 날리려던 마사인이, 용케도 오러 은폐를 건 그들을 발견하고는 주춤 움직임을 멈췄다. 괴물이 요동치는 바람에 아래로 떨어지기라도 할까 두려운 모양.
웡!
반면 늑대개는 모처럼 신이 나있었다.
시야가 캄캄해지든 장애물이 앞을 막든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성진이 이끄는 대로 주인과의 일체감을 만끽하는 것이다.
어찌나 기분이 들떴는지 작은 하울링을 내뱉기까지 했다.
워오오!
-강하고 거대한 내가 간다! 세게 물어뜯어 준다!
쉿! 막스.
우리는 지금 오러 은폐 중이라고.
끼잉-
-그래도 물어뜯는다. 강한 이빨을 보여준다.
아니. 그만둬, 막스.
마기를 풍기는 삿된 것들은 함부로 무는 거 아니야.
‘자, 이제 어쩔까?’
울퉁불퉁한 비늘을 수월하게 딛고 오르며, 성진이 잠시 고민했다.
늘어난 오러로 만들어낸 검의 외기는, 호두까기의 날을 훌쩍 넘어 거의 두 배는 되는 길이로 늘어나 있었다.
이대로 콧잔등까지 가지 말고, 그냥 경동맥과 같은 급소를 파고들어 볼까?
‘아냐, 이 커다란 놈의 급소를 어떻게 단번에 꿰뚫겠어?’
성진은 이내 고개를 저였다.
지금 그들이 가진 전력을 생각하면, 아마도 본상세계의 물리법칙조차 무시하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하리라.
‘게다가 강한 예감이 든다고! 저 빨간 코는 제대로 된 급소일 거라는!’
마음을 결정한 성진은 거침없이 막스를 몰아 공룡의 미간을 타고 달려 내려갔다.
그러자 감각이 비교적 예민한 눈가를 씰룩이며, 공룡이 천천히 눈동자를 앞으로 굴렸다.
크르르……?
“…이런, 저하!”
발각될지도 모른다!
멀리서 초조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던 마사인이 다시 한번 오러 폭사를 날렸다.
퍼엉!
놈의 등줄기 어딘가에서 또다시 폭발이 일어나며, 공룡이 힘겹게 머리를 돌린다.
늑대개가 훌쩍 위로 솟구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후웅-
몸에서 일어난 작은 돌풍에 휩싸여, 늑대개는 똑바로 공룡의 콧잔등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위에는, 호두까기를 뽑아 든 성진이 있었다.
옆으로 길게 뻗어 나온 짙은 오러 블레이드가 붉은 뿔의 밑동을 가르고 지나갔다.
쩌엉!
호두까기의 날, 그것을 쥔 손아귀, 검을 휘두른 어깨, 그리고 마침내는 머리의 끝까지.
천둥 같은 충격음이 성진을 뒤흔들었다.
결과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먹혔다!’
* * *
“으헉!”
갑작스러운 파종의 비명에, 옆에 서 있던 길드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뭡니까? 부길마님.”
“아니, 이게 대체 무슨……!”
파종은 인상을 쓰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최근 중소 길드 하나에 들어가 미친 듯이 게임에 열중하던 그는, 지금도 길드원들과 대규모 레이드를 준비하는 데 한창이었다.
한데 갑자기 출처를 알 수 없는 충격이 머리를 강타하고 지나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내 마기는 또 왜 갑자기 훌쩍 줄어드는 거야?’
짐작건대 자신이 델크로스 차원에 뿌려둔 무수히 많은 씨앗들 중 하나가 개화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까지 마기를 많이 잡아먹는 씨앗이 있을 리가 없는데?
잠시 정신을 집중하며 사태를 파악하던 파종은 움찔 놀라 눈썹을 구겼다.
‘뭐야? 왜 이렇게 커진 거냐?’
어째서인지 씨앗들 중 하나의 격이 크게 늘어난 듯 보였다. 이렇게까지 많은 마기를 잡아먹다니, 어지간한 최상위 악마와 맞먹는 양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델크로스의 수호자가 뭔가 손을 썼나? 그런데 여지껏 가만히 있다가 왜 갑자기?’
한동안 게임을 하느라 규상세계에서 두문불출하다 보니, 도통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델크로스 차원으로 가자!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겠다!’
파종이 서둘러 접속을 종료하려는 순간이었다. 눈앞에 작은 창 하나가 빠르게 떠오른다. 최근 그의 골머리를 썩이던 퀘스트 창이었다.
[필수 퀘스트 – 잃어버린 얼음 심장을 수복하라!]
[퀘스트 등급 : EX+]
[판게아 클로니클의 귀중한 전직 아이템을 모조리 잃어버린 당신. 그 부주의한 만행 덕분에 한 차원의 운명에 시시각각 위험이 닥쳐오고 있습니다. 솔선하여 플레이어들을 이끌고, 아이템 수복에 필요한 인과를 채우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잃어버린 모든 얼음심장을 수복하여 세계를 구하십시오.]
[진행상황 :
1. 얼음 심장 1개를 수복하라. (23%)
2. 얼음 심장 1개를 수복하라. (0%)
3. 얼음 심장 1개를 수복하라. (0%)
4. 얼음 심장 1개를 수복하라. (0%)]
[보상 : 총 20P 캐시 – 얼음 심장 1개를 수복할 때마다 5P 캐시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본 상품은 판게아 클로니클 상점 창에서 사용 가능합니다. 보상이 너무 적다고요? 무려 당신이 저지른 만행을 무마하는 퀘스트에, 소량이나마 캐시가 지급된다는 사실에 깊은 감사를 느끼십시오!]
아, 애열. 이 쩨쩨한 놈.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파종이 고민하고 있는데, 그의 곁으로 작은 팔라딘 하나가 다가왔다.
“파종 님!”
“아, 길드장.”
“레이드 준비는 다 마치셨나요? 파종 님 같은 고위 랭커가 우리 길드에 와 주시다니, 아직도 꿈만 같습니다. 당신은 우리 글램핑 길드의 희망이에요!”
길드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한때 전직 아이템에 눈이 멀어, 악마 들린 산양을 습격하고 궤멸 직전에까지 이르렀던 글램핑 길드.
PEP 길드와의 합병까지 무산된 지금, 믿을 사람은 오직 새로 들어온 랭커밖에 없었다.
“음. 길드장. 그 레이드 말인데, 실은 내가 지금 급한…….”
파종이 주춤거리며 변명을 할 때였다. 갑자기 그를 협박이라도 하듯, 새로운 텍스트 창이 또다시 떠올랐다.
[경고! - 퀘스트 실패 페널티]
[최선을 다해, 최단 시간에 퀘스트를 완료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한 세계의 가능성을 완전히 날려버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셔야 할 겁니다.]
[결과 : 아바타 초기화. 모든 캐시 말소. 유저 블랙 리스트에 등록.]
[*과연 제대로 복구가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이 상황이 반복되면 ID 자체가 말소되어, 결국은 빚을 쉽게 변제할 기회조차 사라질지도 모르니까요. 그렇다고 당신의 빚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과연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갚게 될지, 심히 기대가 됩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위 마왕 중에서도 뒤끝이 길기로는 [애열]을 따를 자가 없건만.
만일 이 경고를 무시하면 이 미친 마왕이 또 무슨 짓을 꾸밀지 알 수 없었다.
“에휴…. 그래. 한다, 하면 되잖아.”
“…파종 님?”
“아무것도 아니야, 길드장.”
파종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길드원들이 모인 곳으로 발을 옮겼다.
그런데 그가 채 두 발짝을 떼기도 전에-
“컥!?”
또다시 엄청난 충격이 일며, 한 뭉텅이의 마기가 몸에서 빠져나갔다.
‘뭐야? 이런 미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파종은 크게 당황했다.
지금까지 손실된 양만 생각하면, 거의 염상 차원의 마왕에 필적할 분량.
어쨌거나 더 이상의 마기 손실은 위험했다. 아직 틈새에서 델크로스 수호자에게 당했던 마기의 손실도 완전히 복구되기 전이었으니까.
‘세계와 세계의 법칙 사이에 느슨하게 걸쳐둔 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규상세계의 법칙을 차용한 권속은 비교적 적은 마기로도 안정적으로 굴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지금은 마기를 잡아먹는 계륵에 불과하지만.
‘이런 젠장! 어쩔 수가 없군!’
파종은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권속과의 연결을 완전히 끊을 수밖에 없었다.
* * *
쩌억!
두 번째의 타격과 함께 또다시 빨간 뿔에 커다란 금이 간다.
하지만 공룡의 뿔은 완전히 부러지지는 않았다. 엄청난 양의 마기가 솟구치더니, 순식간에 멀쩡하게 복구되었으니까.
[소용없어, 이성진! 이놈, 계속 재생하는데?]
마왕이 기겁하며 외쳤지만, 성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괜찮아, 마왕아. 쓸데없는 짓은 아니야!’
놈에게 제대로 된 타격이 들어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검에서 느껴지는 손맛을 확실하게 느꼈으니까.
한데 성진이 외기를 모아 세 번째 타격을 가하려 들 때였다.
‘……!?’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성진은 흠칫 놀라며 호두까기를 내렸다.
‘빨간 표식이 사라졌어?’
그랬다. 아까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점멸하던 빨간 표식이, 이제는 완전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코끝의 뿔이 급소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공룡에게서 전해지는 기세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크르르르…….
성진이 재빨리 막스를 뒤로 물리며 공룡을 살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스티라□케라□스〛
〚&프□%d리의 필드 보스. □형 트□케라□스 200마리# ^sd 때마다, □%의 확률# 출몰합니다. □인 이상# 파티 사냥을 권장합□다.〛
〚*r!m 저항 □. $g 저항 □.〛
〚몬@터 등급 : □〛
〚*현재 노스랜드 서버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떠오른 텍스트는, 이전과 달리 형편없이 부서져 있었다.
‘…뭐지?’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부서지는 텍스트 창을 바라보며, 성진이 식은땀을 흘렸다.
한데 변화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뚜두둑, 뚜둑.
공룡의 몸이 조금씩 뒤틀리며 줄어들기 시작한다.
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이제껏 규상세계의 법칙에 속박되어 있던 어설픈 악마종이 온전한 본상세계의 괴물로 재탄생하고 있었다.
Chapter 49: Chapter 349
Chapter Text
349. 쥐라기 아일랜드 (4)
뚜두둑, 뚜둑.
느슨하던 조직들이 끊어지고 또 새로이 뭉치는, 섬뜩한 파육음이 들려온다.
[이성진, 뭔가 이상해! 놈에게서 흘러나오던 규상세계의 기운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어!]
마왕 놈이 소스라치기도 전에, 뭔가를 예감한 성진은 이미 막스를 움직이고 있었다.
‘악마가 권속을 버리기로 했구나!’
어쩐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휘익-
슈니슈헤로 급히 공룡의 몸을 타고 미끄러지는 와중, 뒤에서 거센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개체의 본질이 완전히 뒤바뀌며 발생하는 세계와 세계의 마찰.
콰콰콰콰콰-
그렇게 눈앞에서 공룡의 온몸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거대하던 몸이 조금씩 줄어들며, 질량에 비해 한없이 허술하던 체조직들이 밀도를 더해간다.
하마처럼 두툼하던 배가 홀쭉해지고, 펑퍼짐하던 다리가 선명한 근육의 굴곡을 드러낸다.
사방으로 풀풀 퍼져나가던 마기의 장막에도 약간의 변화가 일었다. 구심점을 잃은 검은 연기들은 순간 허공으로 빠르게 흩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기들은 소실되지 않은 채, 이내 공룡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소용돌이에 모여들며 함께 응축되기 시작했다.
슈우욱-
한데 흩어지던 마기 중 극히 일부가, 어쩐 일인지 빠른 속도로 성진을 향해 모여드는 게 아닌가!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도록 전속력으로 탈주하던 성진은 기겁을 했다.
‘응? 저게 왜 이리로 오는 거야?’
성진이 질색하며 모여드는 검은 연기들을 털어냈지만, 마기는 마치 환풍기에 빨려들기라도 하듯 성진의 몸속으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억!?’
당황하며 몸을 탈탈 털어봤지만, 한번 흡수된 마기는 다시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성진은 일순 긴장했으나, 다행히 당장 생명에 큰 지장은 없어 보였다. 몸 상태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좀 찝찝하긴 하지만 말이지.’
성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공룡을 가만히 살피고 있던 마왕이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이상한데? 저 권속을 만든 고위 악마가, 권속은 물론 마기의 소유권까지도 완전히 포기해 버린 거 같아.]
‘소유권을 포기해?’
[응. 마음만 먹으면 마기만이라도 회수할 수 있었을 텐데, 저 많은 마기들을 미련 없이 버렸어.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걸까?]
공룡의 주인이었던 [파종]에게도 피치 못할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지만, 지금 성진 일행이 그 사실을 알 방법은 없었다.
[놈은 대체 얼마나 마기가 남아돈다는 거지?]
‘배때기가 불렀나보지?’
[쳇! 그러게 말이야.]
어쨌든 주인을 잃은 마기는 완전히 소멸하거나, 가까운 마족에게 굴복하여 흡수되기 마련이라고 마왕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이쪽을 향해 날아온 거지. 네 머릿속에는 위대한 불의 마왕님이신 이 몸이 계시잖아?]
‘…그래, 그렇군.’
성진은 막스를 내달리며, 검은 소용돌이에 휘감긴 공룡을 돌아보았다.
‘그럼 저 버려진 권속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데?’
이제는 영안으로 아무리 살펴봐도 텍스트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도 놈이 규상세계의 법칙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의미이리라.
[저건 새로운 악마가 될 거야!]
마왕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흥분이 섞여 있었다.
[악마는 본래 마기가 모인 곳에서 탄생하지. 하지만 이렇게 다량의 마기가 자연적으로 모이는 일은 마계에서도 흔치 않아. 인간 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면…….’
[그래, 이성진! 이건 그야말로 새로운 고위 악마가 인간계에서 탄생하는 기념비적인 순간인 거야!]
야야, 그게 뭐 별거라고. 세상에 기념할 게 따로 있지.
‘그럼 저놈이 완전히 변한 다음, 우리 쪽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 가능성은?’
[음, 아마 제로에 가깝지 않을까? 비록 본질이 뒤바뀐다고는 해도, 네가 아까 저놈의 코를 두 번이나 깨부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이런.
그럼 기껏 인간계에서 탄생한 고위 악마가, 얼마 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되겠군. 그건 제법 기념할 만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는 새에 어느덧 성진과 막스는 마기로 오염된 땅을 완전히 벗어났다.
“저하!”
초조하게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던 마사인이 반색하며 달려왔다. 물론 성진이 다짜고짜 소리치는 바람에 그 자리에 주춤 멈춰 서야 했지만.
“아, 그 이상 가까이 오지마, 마사인 경! 위험해!”
“…네에?!”
“아까 내 몸에 꽤 많은 마기가 들어왔단 말이야. 나야 괜찮은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될지 잘 모르니까.”
“마, 마기가, 들어……!”
그 충격적인 말에, 불쌍한 기사는 창백한 얼굴로 몸을 휘청거렸다.
“제가… 제가! 저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여……!”
아냐. 그거 아니니까 정신 차려, 마사인 경!
휘이이-
그즈음이 이르러, 공룡을 휘감은 마기의 소용돌이는 완전히 잦아들고 있었다. 검은 연기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처음보다 한층 작아진 악마종의 모습.
크르르르르…….
전체적인 인상은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보다 날렵해진 모습은 이제 트리케라톱스라기보단 뿔이 세 개 달린 도마뱀에 더 가까워져 있었다.
목에 두른 판금 때문에 일견 목도리 도마뱀처럼 보이기도 하는 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묵직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쿠웅!
지축이 여전히 강한 충격으로 뒤흔들렸지만, 자신의 중량을 아예 감당하지 못하던 처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드래곤?”
놈을 멍하니 바라보던 마사인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래. 공룡도 아닌 저 악마의 모습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아마도 건국 신화에 나오는 전설의 생물에 가장 가까우리라.
“하지만 드래곤이 아니야, 마사인 경. 저건 그냥 파충류의 형태를 띤 악마종일 뿐이지.”
성진이 호두까기를 고쳐 쥐며 대꾸했다.
“심지어는 날개도 없잖아? 물론 그쪽이 우리가 상대하기는 더 수월하겠지만.”
“네? 상대하다니, 잠깐…….”
마사인의 얼굴에 흉흉한 기세가 어리기 시작했다.
“저하, 설마 아직도 계속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음? 하지만 마사인 경. 저걸 그냥 내버려 두면…….”
“곧 성기사단이 와서 상대할 겁니다! 저하께서는 이미 충분히 할 일을 하셨습니다. 처음보다 괴물의 크기가 훨씬 줄어들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건…….”
내가 줄인 게 아닌데.
하지만 성진이 뭐라고 더 대꾸하기도 전에, 마사인이 버럭 화를 냈다.
“이제 작작 좀 하십시오! 제가 이 상황을 가만히 좌시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또 다시 그런 위험한 짓을 하시면, 이번에야말로 마기 속이든 어디든 반드시 저하를 따라가고 말 겁니다!”
“엉?”
“제가 이 자리에서 죽는 꼴을 보려거든, 어디 그렇게 해 보십시오!”
“음…….”
그러자 성진이 대단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그게 내 맘대로 될 것 같지가 않아, 마사인 경.”
“네?”
“어차피 우리가 가지 않아도, 놈이 우릴 알아서 쫓아올 것 같단 말이야.”
“……!?”
그 말대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던 거대 도마뱀이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성진 일행을 쏘아본다.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강한 적의!
으르르르…….
위협적인 저주파의 숨소리와 함께, 입가에서 검은 마기가 넘실거렸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던 자신을 향해 오러 폭사를 남발하고 콧잔등을 깨먹은 자가 누구인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태를 파악한 마사인의 얼굴이 해쓱해진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멀리 흩어지자. 놈의 주의를 분산시키려면 별다른 수가 없어, 마사인 경!”
“아니……!?”
“그럼, 건투를 빌어. 마기에 닿지 않게 조심하고!”
마사인이 뭐라고 더 말하기도 전에, 성진은 막스를 몰아 재차 달리기 시작했다.
악마종의 외형이 조금 바뀌었다고 해도, 놈을 상대하는 원칙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최대한 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묶어 놓는다!
“잠깐, 저하아!”
절규하는 마사인의 모습이 빠르게 멀어진다.
갑자기 성진이 눈에 띄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공룡의 홍채가 바짝 조여들며 목표물을 특정했다.
쉬이익-
세게 마기 섞인 콧김을 내뿜은 놈이, 곧 육중한 몸을 움직여 그들을 쫓았다.
쿵! 쿵! 쿵!
다행히도 놈의 움직임은 꽤 굼뜬 편이었다.
몸이 큰 만큼 신경 전달에 걸리는 시간이 긴 건지, 아니면 아직도 중력이 감당하기 벅찬 건지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여간해서는 막스를 쉽게 따라잡을 것 같지는 않아.’
늑대개의 다리에는 많은 양의 오러가 안정적으로 휘감겨 있었다. 성진 자신의 오러는 물론이거니와, 통로에 차 있는 성황의 오러까지도 아낌없이 끌어당긴 덕분이다.
‘오러에는 아직 여유가 있어. 그렇다면 빙빙 돌면서 놈을 최대한 오래 유인해 보자!’
성진이 놈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막스의 방향을 조금 틀었다.
[너, 이대로 도망만 다니게?]
‘어.’
달리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덩치가 조금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어지간한 빌딩과 맞먹는 크기의 공룡이라고.
저런 놈을 한 번에 처치할 방법 따위가 당장 있을 리 없었다. 더는 빨간 코 같은 약점도 보이지도 않고 말이지.
‘이 자리에 갑자기 운석이 떨어지면 또 모를 일이지만.’
[갑자기 웬 운석이야?]
뭐, 그런 게 있다, 마왕아.
공룡들의 영원한 천적이랄까.
* * *
한편 마사인은 바닥이 보이는 오러를 끌어 모으며, 달리는 성진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정확히는 그의 검에 맺혀 있는 또렷한 회색의 오러 블레이드를.
‘…외기! 그것도 상급 기사 이상의 수준이다!’
그가 알기로, 저 오러 블레이드는 절대 황자의 경지에서 나올 수 있는 외기가 아니었다.
어디 그뿐인가. 황자가 생각보다 안정적으로 도주하는 모습을 보이자, 지금까지는 당황해서 놓치고 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 개의 몸에 감겨 있는 오러 역시, 저하께서 운용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마사인은 대체 황자가 무슨 재주를 부리고 있는 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 황자가 운용하는 것은 일반적인 바나하스 연공법은 아니었다. 아무리 바나하스가 불세출의 천재였다고 해도, 설마 늑대개를 타고 검을 써야하는 경우까지 대비하지는 못했겠지.
지금 황자는 무의식적으로, 순전히 자기만의 방식으로 오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바나하스 연공이 어느 정도 기본이 되어준 것은 사실이겠지만, 지금 황자가 보여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연공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운용.
설마.
‘형과 식이 사라지는 경지……?’
문득 뇌리를 스쳐간 생각에 마사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말도 안 되지. 겨우 몇 개월 전에 오러 입문에 든 황자에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때 겨우 오러가 다시 모이고, 미스라에 찬란한 금빛 외기가 어린다. 마사인은 후들거리는 팔을 들어 괴물의 꼬리를 향해 겨냥했다.
‘언제까지 멋대로 저하를 쫓게 만들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 이쪽을 봐라, 이 삿된 악마종아!’
쉬익-
금빛의 잔월이 빠르게 공기를 가르며 쏘아진다. 그 혼신의 공격은 악마의 꼬리 부근에 적중하며, 여지없이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콰앙!
크와아아악!
미처 예상치 못한 공격에, 악마가 걸음을 멈추고는 포효했다. 꼬리의 거죽이 터져 나가며 피 대신 검은 마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쿠웅! 쿵!
공룡이 충혈된 눈으로 뒤를 돌아본다. 거대한 몸체가 180도로 휙 돌아가자, 덩달아 놈의 긴 꼬리가 바닥을 쓸며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응?”
문제는 공룡의 코앞에서 놀리듯 달리던 성진에게, 그 꼬리가 엄청난 속도로 쇄도했다는 점이었다.
말이 채찍이지, 성진에게는 높은 언덕이 통째로 밀려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그 다급한 상황에서도 성진은 의아해졌다.
그의 기감은, 그의 영안은, 그의 예감은, 이 사태를 조금도 경고하지 않았건만!
[이성진! 위험해!]
마왕의 외침에 성진은 눈을 부릅떴다.
갑자기 빠르게 가속하는 의식 속에서,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거대한 파충류의 꼬리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 최대한 속도를 낸다 해도 이미 어디로 피할 구석은 없었다.
‘…늦었어!’
성진은 반사적으로 온 몸의 오러를 모아 최대한 늑대개를 감쌌다.
적어도 막스만은……!
휘이익!
그렇게 강풍이 휘몰아치고-
콰아앙!
이어서 엄청난 충격음이 고막을 강타했다.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예상했던 충격은 없었다.
성진이 당황하며 눈을 뜨자, 정면에 펼쳐져 있는 것은 은청색으로 빛나는 커다란 오러의 장막.
“이성진!”
그리고 그 중심에 로건이 있었다.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흰 기사단 정복. 평소와 같은 단정한 모습의 전직 소드 마스터가, 황당한 얼굴로 성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인마! 신성력 하나 없는 놈이, 지금 뭘 믿고 1급 악마종을 멋대로 상대하고 있는 거야?!”
Chapter 50: Chapter 350
Chapter Text
350. 신성한 바람 (1)
쿠우우웅!
균형을 잃은 공룡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우레와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빠르게 휘둘러지던 꼬리가 강한 검막에 부딪히며, 반쯤 절단되다시피 패여 나갔기 때문이다.
쏴아아아-
찢어진 상처로부터 검은 마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1급 거대 악마종이 황도 부근에 나타난 것은 거의 10년 만일 거다. 네가 혼자서 어떻게 해 볼 상대가 아니란 말이야.”
한데 순전히 검막만을 펼쳐 이런 엄청난 일을 해낸 소드 마스터는, 위협적인 마기의 폭포를 쳐다보지도 않고서 잔소리 삼매경이었다.
“알겠어, 이성진? 설령 이 자리에 성기사단이 있었어도, 제대로 전략을 수립해서 조심스럽게 접근했을 거란 뜻이다.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냐?”
“아니. 그건 오해야, 로건! 난 그저 놈을 여기 묶어두려 했을 뿐이라고! 절대 혼자서 어떻게 해볼 생각이었던 건 아니…….”
하지만 성진은 말을 마칠 수 없었다.
“저, 저하아!”
멀리서 혼비백산한 마사인 경의 외침이 들려왔기 때문.
연이은 오러 폭사로 탈진하다시피 한 기사는, 자신의 공격으로 일어난 아찔한 사고에 거의 정신을 놓을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로건이 그런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작게 혀를 찼다.
“저것 봐. 네가 이런 무모한 짓을 하니까 괜히 마사인 형님만 고생이잖아. 아무리 성황가의 핏줄을 타고났다고 해도, 이렇게 마기에 오래 노출되는 건 위험한 일이다.”
그 지적에는 할 말이 없었기에 성진은 뚱하니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그 개는…….”
로건은 거대해진 막스를 잠시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제 주인과 마찬가지로 전혀 위기감이 없었던 늑대개는, 방금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알기는 하는지 헥헥거리며 기분 좋게 꼬리를 치는 중이다.
“아, 얘는 우리 막스야. 절대 수상한 녀석이 아니라고!”
“막스……?”
“어, 음. 얘가 갑자기 커져서 좀 놀랐겠지만, 주신의 은총을 받은 신수라고 하니까…….”
“신수.”
거짓.
사람의 진심을 단숨에 파악하는 소드 마스터는, 그 대답이 얼마나 허황된 변명인지 모르지 않았으리라.
어딘가 냉정해 보이는 로건의 눈초리에, 제풀에 찔린 성진이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 프란시스 경이 그랬어! 바람이라고, 예전에도 이런 신수가 나타난 사례가 있었대! 경전 동화에도 잘 나와 있다던데…….”
“…그래.”
진심.
로건의 표정이 조금 오묘해진다.
왜 아니겠나. 지금 늑대개를 휘감고 있는 오러는 온전한 이성진의 것. 미약하나마 삿된 기운까지 풍기고 있는데, 저것이 어떻게 주신의 은총에 속한 생물이란 말인가!
그러나 로건은 이내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그 사람이 뭔가 미리 작업을 해 둔 모양이구나. 만일 오르토나였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행각이지만.”
“…….”
“그래도 지금만큼은 델크로스가 절대적인 황권을 가진 국가라는 사실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았다면 완고한 고위 성직자들을 제어할 방법이 아예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니, 고위 사제들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가능한 자제하도록 해.
로건은 그렇게 말하며 펼쳐두었던 검막을 해제했다. 공룡의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가며, 쏟아지는 마기 역시 줄어들 기미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대신, 로건은 그들의 주위로 작은 신성 결계를 펼쳤다.
“저놈을 잡을 거야?”
성진이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는 공룡을 바라보며 물었다. 로건이라면 분명 가능할 거라는, 한 점 의구심 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의외로 로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기서 성기사단이 오기를 기다릴 거다.”
“왜?”
“놈의 숨통을 쉽게 끊을 수는 있어. 하지만 저놈이 품고 있는 마기를 정화하는 건 또 다른 문제지.”
요컨대 지금 공룡의 상태는, 엄청난 양의 마기를 싸고 있는 약한 주머니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만약 아무 생각 없이 그 구심점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면, 거대한 마기의 해일이 바서스트령을 뒤덮는 사상 초유의 재난이 발생하리라.
“저 정도의 마기를 단숨에 처리할 수 있는 건 아마 그 사람뿐일 거다. 그러니 먼저 성기사단이 이곳으로 와서 빈틈없는 신성 결계를 쳐야 해. 놈의 숨통을 완전히 끊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지.”
“신성 결계…….”
“무엇보다도 마기의 유출을 막는 게 먼저니까. 보통은 신성 결계를 유지한 채로, 많은 수의 성직자들이 몇날 며칠을 매달려 마기를 정화해야 하지.”
그래?
성진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럼 굳이 너 먼저 올 이유가 없었잖아? 왜 성기사단을 다 데려오지 않았어?”
그 질문에 로건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네가 할 말이야? 대체 왜라고 생각하는 거냐?”
“어…….”
“방금도 죽을 뻔한 주제에, 이성진 넌 도통 위기의식이 없구나?”
딱하다는 듯 내려 보는 그 시선이, 아무래도 한창 철없는 애송이를 대하는 듯하다. 성진은 저도 모르게 울컥 반발심이 일었다.
“야야, 죽기는 누가! 그 직전에 분명 오러로 잘 막았다고!”
“물론 네가 필사적으로 감싼 저 개는 살아났겠지.”
작게 한숨을 쉰 로건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는 검을 휘둘렀다.
휘익-
써컹!
지극히 단출한 일격.
그것만으로도 겨우 몸을 일으키던 공룡이 다시 바닥으로 주저앉는다. 아르쥬나로부터 뿜어져 나온 날카로운 외기가,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꼬리 끝을 통째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쿠우웅!
땅이 뒤흔들리고, 잘린 단면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마기가 유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뒤로하고, 소드 마스터가 담담한 목소리로 성진을 나무랐다.
“한번 물어나 보자. 넌 왜 그 긴박한 상황에서 엉뚱하게 개나 감싸고 있었던 거지? 네 몸을 돌볼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던 거냐?”
그들은 마치 태풍의 눈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밀려드는 마기의 흐름이 아무리 거세고 위협적인들, 성진과 로건을 감싸고 있는 신성 결계만큼은 조금도 침범하지는 못했으니까.
그 기묘한 평온함 속에서, 로건의 타박이 이어졌다.
“몸속에서 아무렇게나 오러를 돌릴 때부터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너한테는 정말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본능적인 자기방어기제란 게 없구나?”
“야, 그건 비약이 심하잖아! 상황이 너무 다급하다 보면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단지 실수라는 말로 얼버무릴 수 있을 것 같아? 사람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되면 무의식적으로 본심을 보이곤 하는 법이다. 대체 평소에 너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기에,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오러를 모조리 엉뚱한 곳으로 보낼 수 있단 말이야?”
로건의 신랄한 지적에 성진은 찔끔 입을 다물었다.
대꾸할 말이 없기는 했다. 그저 말로 내뱉지 못할 어설픈 상념만이 어지러이 머릿속을 메아리쳤을 뿐.
‘아니, 하지만 어차피 나한테 죽음은…….’
“저하! 저하아!”
생각은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마기로 뒤덮인 그들을 항해 달려오며, 마사인이 거의 숨이 넘어갈 듯 절규했기 때문이다.
“이런.”
다행히도 로건의 잔소리 역시 금방 끝났다. 걱정스러운 듯 마사인을 일별한 그는, 몸을 돌리며 빠르게 성진에게 일렀다.
“그럼 난 마사인 형님의 상태 좀 보고 올게. 마기에 노출된 지 제법 시간이 흘러서, 신성 결계가 없으면 형님도 슬슬 위험할 테니까.”
“나도 같이 가?”
“그냥 결계 안에 있어. 넌 아직 내 움직임을 따라오기는 역부족일 거다.”
뭔가 대단히 자존심 상하는 말을 던진 로건이,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덧붙였다.
“위험하지 않게, 가면서 적절한 조치는 취해 둘게.”
“조치?”
“그래. 뭐, 너 정도면 어지간한 돌발 상황이 아니고서야, 쉽게 저런 놈에게 당하지는 않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로건은 놀라운 움직임을 선보였다.
가볍게 결계 밖으로 몸을 날리나 싶더니, 이내 작은 산만 한 높이의 공룡을 미끄러지듯 타고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
기척이 조금 흐려진 로건의 모습은, 마치 공기 중에 녹아들기라도 하듯 자연스럽기만 했다.
오러 은폐를 펼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완전한 오러의 균형.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나름의 법칙으로 정의하고, 오러의 움직임 또한 완전히 이 법칙에 순응시키는 데 성공한 기사의 모습.
그렇게 대륙 최연소의 데카론 나이트는, 한 줄기 은청색의 바람이 되어 공룡의 등마루를 가볍게 넘어갔다.
콰직!
물론 정상에서 공룡을 완전히 타고 넘기 전에, 놈의 척추에 다시 한번 깊은 검격을 꽂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쿠우웅!
마침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던 공룡은, 그 치명적인 오러 블레이드로 인해 꼬챙이에 꿰인 표본이라도 된 것처럼 도로 바닥에 세게 처박혔다.
크와아악!
놈의 신경질적인 포효가 허공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와…….”
성진은 빛나는 눈으로 그 일련의 움직임들을 일일이 뇌리에 새겼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원리를 짐작하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동공 안에서 붉은빛이 점멸한다.
전보다 한층 예민해진 기감에다 마왕의 영안까지 더해져, 성진에게는 일견 불가사의해 보이는 현상 그 이면에 숨어있는 법칙들이 눈에 잡히는 것도 같았다.
‘대체 원리가 뭐지? 어떻게 저렇게 움직이는 게 가능한 거지?’
슈니슈헤의 응용인 걸까? 아니면 헤네시스 연공법에 속한 특유의 보법인가.
‘…아니, 그런 것과는 조금 달라.’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 결정적인 차이가 뭔지 언뜻 알 것 같기도 했다.
‘오러를 단지 신체에 휘감는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야. 저건 신체의 외부, 즉 공기의 흐름 자체를 원하는 대로 변화시키는 거다!’
로건의 묘한 움직임을 보라. 딱히 발에 오러를 집중하지 않고 있음에도, 마치 투명한 레일을 타고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대충의 요령을 파악하자, 자연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잘하면 나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뭐어? 야, 인마! 너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염상 결정 속에 숨죽이고 있던 마왕 놈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일이 이 지경이 되고도 정신을 못 차렸어? 그냥 결계 안에 가만히 있어! 위험하다고!]
하지만 바람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로건을 보고 있자니 절로 손이 근질거렸다.
생각해 봐라, 마왕아. 저런 걸 보고도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어?
‘마침 오러도 전에 없이 풍족하고 말이지.’
휘이이-
성진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 막스의 발아래에는 오러가 실체화되며 생겨난 미약한 바람이 일고 있었다.
* * *
“형님, 그만 멈추십시오! 몸은 괜찮으십니까?”
한편, 금세 공룡을 타고 반대편에 도착한 로건이 마사인을 멈춰 세우며 물었다. 이 고지식한 기사는 다급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죽음의 땅으로 깊숙이 발을 들이민 참이었다.
그의 몸 여기저기에서 침식의 조짐을 보이는 것을 확인한 로건이, 재빨리 신성 결계를 치며 강한 신성력을 쏟아냈다.
“저하! 모레스 황자님이……!”
“모레스는 무사합니다, 형님. 그러니 안심하시고 이만 몸을 추스르세요.”
“……!”
믿음직한 동생의 말에, 마사인은 겨우 정신이 돌아오는 듯 보였다.
나이가 무색하게도 칠칠치 못하게 추태를 보였다는 것을 깨달은 기사는,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안도와 자괴가 뒤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휴우, 송구합니다. 제가 제대로 모레스 황자님을 보필하지 못하여…….”
“형님.”
“제 소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면목 없습니다, 저하!”
로건은 난감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작정하고서 말썽을 피우는 모레스를, 대체 이 세상 누가 ‘제대로’ 보살필 수 있단 말인가.
“모레스를 단속해야 할 일이지요. 형님은 할 만큼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습… 헉!”
한데 무슨 광경을 보았는지, 고개를 든 마사인의 얼굴이 또다시 해쓱해진다.
무심코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로건은, 일순 눈에 들어온 광경에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성진?”
그랬다.
어느새 막스와 함께 공룡의 몸통 꼭대기에 올라선 이성진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게 아닌가.
로건이 이동한 경로를 그대로 따라온 것이 분명했다.
“아하하! 생각보다 간단하잖아?”
하지만 성진의 만행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거세게 꿈틀거리는 악마종 위에서 뭔가를 가늠하던 성진은, 불안한 발치를 딛고는 조심스럽게 늑대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저……!”
보다 못한 마사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사뿐사뿐.
그렇게 위태롭게 마사인과 로건을 향해 늑대개의 몸을 돌린 성진은, 마지막으로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가 정말 재미있는 걸 보여줄 게, 로건! 너도 아마 깜짝 놀랄걸?”
그 말을 끝으로.
슈우욱-
성진은 막스와 함께 미련 없이 몸을 날렸다.
“……!”
“저하아!”
성진은 그야말로 쏜살같이 떨어져 내렸다.
공룡의 높은 등을 지지대 삼아, 마치 허공에 놓인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듯 미끄러지는 것이다.
조금 어설프긴 해도, 로건이 보여줬던 움직임과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
“하하하! 이것 좀 봐, 로건! 누가 못 따라간다고? 내가 훨씬 빠르잖아?”
슈우우우-
개를 마치 썰매처럼 올라탄 채로, 황자가 점점 엄청난 가속을 붙여간다! 어찌나 무서운 속도였는지, 이대로 바닥에 부딪혔다간 영락없이 납작하게 찌부러질 기세!
보다 못한 마사인이 벌떡 일어서서는 결계 밖으로 내달렸다.
“저하! 위험합니다! 제발 멈추십시오!”
“아하하하!”
“저하아!”
그런 그의 뒤를 따라 달리며, 로건이 조금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정말 대단하군요.”
“네?”
“저 변칙적인 움직임을 바로 따라할 줄은 몰랐습니다. 모레스는 정말로 오러 연공의 천재인가 봅니다, 형님.”
“…….”
그 태평한 경탄에, 마사인이 저도 모르게 와락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다른 사람이면 또 모를까. 저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그냥 기만 아닙니까?
Chapter 51: Chapter 351
Chapter Text
351. 신성한 바람 (2)
다행히도 마사인이 우려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급격히 바닥이 가까워지자, 성진의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으니까.
공기 미끄럼틀은 어디까지나 슈니슈헤의 응용. 그 기술의 요체는, 오러로 마찰력을 높여 빙판에서도 미끄러지지 않는 것이다.
톡.
가뿐하게 바닥에 착지한 성진이, 늑대개의 등에서 내려서며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
그리고 창백해진 마사인의 얼굴을 마주하곤 대단히 의아해졌다.
‘마사인 경, 왜 아까보다 더 안색이 나쁘지? 워낙 걱정하는 거 같기에 빨리 합류하려고 달려왔는데?’
나 좀 잘하지 않았나? 로건의 흉내도 제대로 냈고, 괜히 왔다 갔다 하지 않게 내 쪽에서 잘 따라왔잖아?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것은 순전히 성진의 착각이었다.
“저하…….”
부들부들 떨리는 기사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오더니 성진의 양어깨를 턱 짚는다.
‘방금, 멱살 잡으려다 방향을 튼 거 같은 기분이……?’
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 설마, 마사인 경이 그럴 리가.
“마사인 경, 조심해. 아까도 말했지만, 내 몸에 마기가 들어와서…….”
“그딴 건 이제 아무래도 좋습니다.”
마사인은 드물게도 성진의 말을 자르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꾸욱, 아래로 내리누르는 그 악력에, 어째 감정이 실린 느낌이 들었다.
“마사인 경?”
“어디까지 하실 셈이십니까?”
“뭐?”
“저하께서 멋대로 위험 속으로 뛰어드시는 걸, 제가 언제까지 그냥 보고 있어야 하는 겁니까?”
으르렁거리듯 끓어오르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저하의 안전을 위해 지금껏 최선을 다해왔다 자부합니다. 한데 막상 저하께서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시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는 제가 대체 무엇을 위해, 어떤 방향으로 노력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 이런.
성진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마사인 경, 정말 화가 많이 났나 보다.
휘익-
쿠웅!
그때 로건이 강한 검기를 날려 또다시 공룡을 주저앉혔다.
그렇게 손짓 한 번으로 거대한 악마종을 제압한 녀석은, 성진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여상한 얼굴로 이렇게 귀띔하는 게 아닌가.
‘어서 잘못했다고 비는 게 좋겠다, 이성진.’
‘아니…….’
성진은 대단히 억울했다.
‘잠깐만, 내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증원을 기다리지 않고, 겁도 없이 혼자 1급 악마종에게 덤볐으니까.’
하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단 말이야! 어쩐지 아슬아슬한 고비를 여러 번 넘겨, 최고의 결과를 도출했다는 기분이 든다고!
이건 모두 성황가와 델크로스를 위한 일이었어. 근데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아까도 죽을 뻔해놓고는, 그새를 못 참고 또 악마종을 타넘어 왔잖아?’
‘그거야……!’
로건이 왔으니 이미 위험하지 않다고 느꼈을 뿐이다. 그래서 서둘러 합류하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라 생각했다고.
거기다 미끄럼틀, 엄청 재미있었는데!
“너도 즐겁지 않았니, 막스?”
한데 늑대개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묻자, 녀석이 처량한 눈망울로 성진을 바라보며 코를 울리는 게 아닌가!
끼잉, 낑!
-그거 뭐였어? 이제 안 하면 안 돼? 난 좀 무서웠는데…….
어, 그래?
성진은 즉각 태세를 바꿔 반성했다.
“그렇구나. 역시 위험한 짓이었나 봐. 걱정시켜서 정말 미안해, 마사인 경.”
그 영혼 없는 사과에, 마사인의 기세가 대번에 흉흉해졌다.
“대체…….”
으드득.
기사가 이를 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대체 언제까지 말로만…….”
어디 그뿐인가.
우우웅-
미스라가 그의 거친 오러에 반응하며 위협적인 검명을 울리기까지!
성진은 식은땀을 흘렸다.
‘워워. 진정해, 마사인 경. 지금 자네 손에 과하게 힘이 들어가고 있어. 슬슬 어깨가 아프다고!’
이러다가 정말로 멱살 잡히는 거 아냐?
성진이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저하!”
“로건 저하아!”
저 멀리서 로건을 애타게 찾는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토, 엘리, 뒤상 경을 위시한 릴리움 별동대였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어쩔 줄을 몰라 허둥지둥 말을 달려오는 모습들이 가관도 아니다. 어지간해서는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는 성기사들인데, 마음이 대단히 급하기는 급했던 모양.
심지어 그들은 로건의 애마 록사나까지 데려오는 중이었다.
“또 도중에 말을 버리고 가시다니, 대체 얼마나 큰일이 난 겁니까아아!”
“아무리 저하라도, 1급 악마종을 혼자 상대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지금 저희가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으헉! 헉!”
마사인 경의 마음고생이 무색할 정도로 절절하기 짝이 없는 외침들.
머쓱해진 기사가 표정을 풀고는, 성진의 어깨에서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아, 이제야 도착했구나. 서두르느라 고생들이 많았겠다.”
정작 장본인인 로건만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
“말도 내팽개치고 혼자 뛰어온 주제에, 지금 누가 누구에게 쓴소리를 하는 거야! 어?”
“흠.”
성진의 따가운 눈총을 받은 로건이 시선을 돌려 딴청을 피웠다.
* * *
방문자의 존재를 고하려던 수석 시종장은, 집무실에 들어오다 말고 발을 멈췄다.
오도카니 자리에 앉아 테라스를 바라보고 있는 성황의 뒷모습에서, 어쩐지 심상치 않은 공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
이럴 때는 그를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걸, 루이스는 오랜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짐작대로, 지금 성황의 눈은 서남쪽 하늘을 향해 있었지만, 기실 그가 보고 있는 장면은 조금 다른 것들이었다.
난데없이 일어나는 큰 규모의 지진.
흙더미에 파묻힌 수많은 사상자들.
아멜리아의 실종.
바서스트령의 처절한 몰락.
그리고 로한에서 시작되어,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갔을 전화.
이것들은 비교적 가까운 미래에, 정말 일어났을지도 모를 재난들이었다.
“…….”
그렇게 얼마나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잠시 후, 이 모든 장면들이 마치 거짓말처럼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사고뭉치 아들놈이 뭔가를 해낸 모양.
성황은 잠시나마 안도했다.
한데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내 눈앞에는 또 다른 암담한 미래의 이미지들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안배를 즐기는 어느 고위 마왕의 강림.
대륙 곳곳에서 개화하는 수많은 악마종의 씨앗.
차례차례 파괴되어 가는 종족 결계.
이윽고 황도로 진격해오며, 발에 걸리는 모든 것들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삿된 자들의 부대.
이것들 또한 아들의 작은 발걸음이 아슬아슬하게 피해간 재난들이었다.
이제는 다시 돌아올 일 없는, 그래서 성황이 비로소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이 가능한 미래들.
‘하나 이래서는 끝나지 않는다.’
그의 어린 아들만이 홀로 미래를 향해 아등바등 몸부림을 치고 있다.
정작 그런 아이를 보호해야 하는 자신은 한탄이 나올 만치 무력할 뿐이거늘.
“…폐하.”
“…….”
성황이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서 예의 은빛 광채를 발견한 루이스가, 대단히 죄스러워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방해를 드려 송구하오나, 방문하신 분께서 오래 기다리고 계십니다.”
“방문.”
“예, 지금 서이서 성녀님께서 폐하를 뵙길 청하십니다.”
성황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들어오는 성녀의 눈이 밝은 금빛으로 번쩍이고 있었으니까.
카드모스.
평소에도 달갑지 않았지만, 지금 그의 기분으로는 도저히 반길 수 없는 작자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다니, 참으로 별일이 다 있구나.]
카드모스는 허락도 받지 않고서 성황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 삿된 것이 위험에 빠지면, 가장 먼저 허겁지겁 달려갈 거라 여겼거늘.]
성황은 대답 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저것이 1급 악마종의 출현을 모를 거라 생각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비위를 거스를 것을 알면서도 굳이 찾아와 들먹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너를 이해 할 수가 없다, 후손아. 왜 저 악마를 가만히 두고 보느냐?]
“이미 성기사단을 보냈다. 그들이 필요한 조치를 할 테지.”
[우습구나. 그 못미더운 것들이 뭘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천하에 오직 자신의 힘만이 의미 있다고 믿는 오만한 반신은, 진심으로 궁금한 듯 성황을 응시했다.
[모처럼 황도 근처에 나타난 악마종이 아니냐? 여기서 고작 지척이니라. 네가 그렇게 몸을 사릴 만큼 많은 인과가 필요하지도 않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작자가 좋을 대로 [인과]를 들먹이고 있다.
‘하지만…….’
원인과 결과.
간단하게는 그리 부를 수도 있었지만, 성황이 바라보는 인과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직접 악마종을 쳐 죽인다. 그 간단한 행동 하나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인과가 엮여 있었다.
그것은 비단 악마종의 존재 자체를 말소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신의 대리자를 정의하는 세간의 인식. 자칫 주신을 향한 광신으로도 치달을 수 있는 신앙. 이에 좌우될 현재와 미래의 수많은 신민들.
성기사단, 나아가 제국의 일에 관여하는 모든 기관들의 존재 의의. 그리고 질서와 절차가 불안해지며, 덩달아 가속화될 델크로스의 혼란까지.
아마도 대륙의 정세는 빠르게 변화할 테고, 십중팔구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으리라. 이를 틈탄 삿된 것들의 장난질 역시 도를 더할 것은 자명한 일이고.
이렇게,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는 행동 하나가 대륙의 미래에 돌이킬 수 없는 평지풍파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다시 그 모든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또 그만큼의 많은 인과가 소요될 수밖에.
‘하지만 저 죽다 만 것에게 일일이 설명해 줄 의리도 없지.’
성황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카드모스도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재미있는 게 뭔지 아느냐? 이 모든 것이, 너 스스로가 만든 인과의 감옥이라는 사실이다. 후손아.]
“…….”
[이몸의 눈을 속이지는 못한다. 겉으로는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듯 보이나, 델크로스는 이미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지.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과거의 너도 모르지는 않았을 터.]
그래서 카드모스는 언제나 궁금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후손은 인간이면서도 신의 영역을 넘보는 자. 델크로스에서 유일하게, 반신인 자신과도 비견될 수 있는 존재였다.
한데 어떻게 그 모든 힘을 내려놓고서, 순순히 황도에 틀어박혀 무력한 옥살이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왜 그런 짓을 했느냐? 그때의 일을 후회하지는 않느냐? 그 과오를 돌이키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이라도 들지 않더냐?]
이제라도 제대로 예언을 시작하는 건 어떠하냐. 그렇게만 한다면, 아마도 세계는 예언자로서의 너에게 일말의 인과를 허락하겠지.
그렇게 거듭해서 질문을 가장한 권유를 던지던 카드모스의 홍채가, 일순 요사스러운 금빛을 뿜어냈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걸림돌이 되는 것을 없애고, 네 권리를 되돌려 받는 것은 어떠냐?]
그 어이없는 수작에 성황은 내심 실소를 흘렸다
제까짓 것이, 지금 누구의 자비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지 정녕 모른단 말인가.
[그렇게 해서라도 네게 필요한 모든 인과를 돌려받으면, 이 무너져가는 세계는 또다시 소생의 기회를 얻을 수…….]
“제 처지에 대해 이리도 무지하니, 관짝에 누워있던 700년의 긴 세월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음이다.”
[…뭣이?]
민감한 주제가 흘러나오자, 카드모스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 네 처지가 내 아들의 인과에 얽혀 있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된 모양이구나. 그래서, 네 눈에는 그 아이가 마치 너를 가두고 있는 간수라도 되는 듯 보이더냐?”
정곡을 찔린 카드모스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를 향한 성황의 냉소는 계속되었다.
“작금의 상황이 어려워 보이니, 드디어 그 아이를 눈앞에서 치울 기회가 왔다 싶었나 보구나. 반신을 자처하고도 어찌 이리도 모자랄 수가 있나.”
[너 이놈이……!]
카드모스는 잠시 발끈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를 노려보는 성황의 은회색 눈동자에, 전에 없이 살벌한 기색이 어렸기 때문이다.
“그래. 내 예언을 듣고 싶다면 기꺼이 들려줄 수 있다. 그러니 그 모자라는 머릿속에 똑똑히 새기거라. 지금의 네가 규상세계 인간에 빌붙어서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은, 다 그 아이의 인과가 너를 허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
“그렇지 않고서야, 감히 시슬레를 노린 시점에서 이미 네 목숨을 보존할 까닭이 없지 않느냐?”
제국의 근간을 만든 반신.
그 위대한 존재를 마치 타다 남은 쓰레기 취급하는 발언이었지만, 카드모스는 성황의 말이 어디까지나 진심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알겠느냐? 내 눈에 보이는 그 어떠한 미래에도, 지금까지 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세계는 달리 없었느니라.”
그 추상같은 예언에 당황한 카드모스가 눈을 잘게 떨었다.
[… 그게, 그것이 정녕……!]
하지만 더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카드모스는, 성황의 손이 은가시를 향해 천천히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으리라는 간접적인 의사 표현.
[…어디까지나 내가 세운 델크로스를 아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괜한 말을 했다 싶구나!]
잔뜩 토라진 카드모스가 인사도 없이 휑하니 집무실을 떠나버렸다.
그제야 겨우 혼자가 된 성황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테라스 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직…….”
재차 서남쪽의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어둡게 침잠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들아.”
Chapter 52: Chapter 352
Chapter Text
352. 신성한 바람 (3)
현장에 도착한 릴리움 별동대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것이 1급 대형 악마종…….”
온갖 해수며 악마종 소탕엔 잔뼈가 굵은 이들에게도, 공룡 악마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작은 산 하나는 가볍게 능가할 덩치는 차치하고서라도, 마기로 검게 오염된 땅만 벌써 반경 수백 미터에 이르렀으니까.
다행히 공룡은 이리저리 꿈틀거리기만 할 뿐, 더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로건이 놈에게 깊숙이 찔러넣은 오러 블레이드 덕분이다.
“어떻게 저게 아직도 남아 있지?”
성진이 긴 꼬챙이 같은 은청의 블레이드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보통 오러 유저의 몸을 떠난 외기는 공기 중으로 빠르게 사그라지기 마련. 그런데 아까 날린 외기가 아직도 선연한 형태로 남아있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네가 나한테 그걸 물으면 어떻게 해?”
그런데 로건은 오히려 의아한 듯 반문했다.
“응?”
“너야말로 지금도 떨어져 있는 늑대개한테 계속 오러를 보내고 있으면서.”
로건에게는 그 둘이 비슷한 재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성진과 막스를 잇는 권속의 연결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겠지.
“오히려 내가 너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움직이는 생물한테 직접 외기를 보내고, 또 그걸 지속하는 재주는 없어.”
“그렇게 말해도 난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단 말이야. 그러니까 얼른 요령을 가르쳐 줘.”
성진이 다짜고짜 고집을 부리자, 로건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명상 중에도 무의식적으로 오러 실체화를 남발하는 이성진이 아닌가. 곧 그러려니 생각한 로건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시선이 이르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의 인식이 따르잖아?”
“응.”
“그러니 그곳에 자연히 의념이 일어나고, 덩달아 오러가 이끌려 흐르는 이치일 뿐이다.”
“……?”
“중요한 건 외기와의 일체감을 절대 놓지 않는 거야. 그리고 잠시라도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거지. 그렇게 하면 외기는 내 손을 벗어나되 벗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가 되니까.”
…괜히 물었나.
아버지나 로건이나, 선문답 하는 건 똑같구나. 하긴, 그러니까 이 녀석이 소드 마스터겠지.
“저하, 그 짐승은?”
그때 오토, 엘리, 뒤상 경이 로건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한눈에 봐도, 거대한 늑대개의 모습은 범상치가 않았으니까.
“…….”
성진을 슬쩍 일별한 로건이, 그들에게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저것은 신수다.”
“신…수? 그게 뭡니까?”
“주신의 은총을 받은 신성한 짐승이라고 하네.”
“주신의 은총이요?”
“그래.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의 부관, 프란시스 경이 명확히 확인한 사항이라고 하지. 그러니까 이 짐승은, 음…….”
하지만 사실은 그 역시 이제 막 알게 되었을 뿐.
설명이 궁해진 로건이 말꼬리를 흐리자, 옆에서 성진이 냉큼 덧붙였다.
“[바람]이라는 신수와 같은 거라고 프란시스 경이 말했어. 성 바스티안의 경전 동화에 등장하는 귀여운 개야.”
“아, 그래. 경전 동화에도 나와 있다. 그러니 성 바스티안의 미덕을 추종하는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이 성스러운 짐승의 가치를 명확히 인지하고 이에 합당한 대우를 할 필요가 있다. 만인의 귀감이 될 수 있도록 말이네.”
“……?”
별동대의 기사들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그들의 정신적 지주, 로건 황자의 표정은 반듯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렇군요. 저희의 경전 공부가 아직도 미흡했습니다.”
로건 저하께서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거겠지. 별 의심 없이 납득한 별동대의 기사들은, 감탄 섞인 눈으로 막스를 돌아보았다.
“주신의 성스러운 짐승…….”
헥헥헥!
방정맞게 꼬리를 흔들며 호시탐탐 성진의 머리카락을 노리는 똥강아지를.
“저 활기가 넘치는 모습! 총기가 넘치는 눈을 보게!”
“참으로 늠름하고 믿음직스럽기 그지없군!”
릴리움 기사들의 눈에 실시간으로 콩깍지가 씌는 모습을 목도한 성진은 조용히 식은땀을 흘렸다.
‘로건, 이 무서운 녀석. 대체 기사들을 평소에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네 말이라면 종교처럼 신봉할 수가 있는 거지?’
어쨌거나 별동대가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악마종 토벌 계획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릴리움의 기사들은 피해 범위를 정확하게 파악한 후, 농경지 방향을 중심으로 넓게 산개하기 시작했다.
“그라니우스식 결계를 만들 준비를 하는 거다.”
성진이 멀뚱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로건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일단 소수의 인원만으로 악마를 둥글게 감싸는 반원의 진을 만든다. 정면을 방어하는 그라니우스식 1형 방어진이었다.
그렇게 급한 대로 형태를 잡아두면, 이후 다른 성기사단이 도착했을 때 완전한 구형의 0식 결계를 빠르게 구축할 수 있다나.
그러는 동안, 침식에 오래 노출되었던 마사인은 당장 황도로 이송하기로 결정되었다.
“저는 모레스 저하의 곁을 지켜야 합니다!”
고지식한 기사는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무리한 말씀입니다, 마사인 경.”
“지금이야 로건 저하의 신성력에 억눌려 있지만, 침식의 범위가 생각보다 큽니다. 이를 완전히 치료하려면 당장 황도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버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앞을 가로막은 엘리 경은 가차 없었다.
“고집도 정도껏 부리십시오! 대체 경의 침식을 저지하기 위해 몇 명의 성기사가 매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지금의 인원으로는 악마종을 막기 위한 결계를 치기에도 한참 부족합니다!”
“아니…….”
“설마 스스로의 임무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모두에게 그런 엄청난 민폐를 끼칠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그렇게 해서 마사인은 찍소리도 하지 못한 채 황도로 끌려가게 되었다.
“저하아아아…….”
멀어지는 마사인의 절규를 들으며, 성진이 애석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자신의 몸이나 추슬러, 마사인 경.
그리고 화가 완전히 풀릴 때쯤 천천히 진주궁으로 돌아와. 자네는 화가 빠르게 식는 편이니까.
그 와중에 모두가 예상치 못한 조우도 있었다. 바로 지그스문트령에서 만난 이후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게 된 록사나와 막스였다.
킁킁.
막스가 꼬리 치기를 멈추고서 고개를 들자, 아름다운 백마 또한 고고한 태도로 늑대개를 내려다본다. 일순 두 마리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데 예전처럼 날카롭게 신경을 세우며 서로를 견제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록사나와 막스는 꽤나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찰나의 시간이 흐른 뒤-
막스가 먼저 나직하게 목을 울렸다.
크르르.
-이제 알았겠지? 나의 거대함과 강함을.
그러자 록사나 역시 가볍게 코를 울렸다.
푸릉.
-흥. 큰소리칠 만은 하군. 아직 내 상대가 되기에는 시시하지만.
으르르…….
-덤벼 볼 테냐? 나는 지지 않는다!
푸르르…….
-경거망동하지 마라, 애송아. 너와는 언젠가 결판을 낼 날이 오겠지.
마치 두 마리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보고 있던 마왕 놈이 머릿속에서 실소를 흘렸다.
[…저놈들 대체 뭐 하는 거지?]
그러게나 말이다.
어쨌거나 별동대가 열심히 결계를 준비하는 동안, 성진은 상대적으로 한가해진 로건을 붙잡고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이왕 오러가 넉넉한 김에, 배워둘 것은 배우고, 시험해 볼 것은 시험하고 싶었으니까.
어쩐지 서둘러야 할 것 같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조급함이 느껴지기도 했고.
“외기를 날리는 법? 당장 여기서?”
“응. 나도 그거 한번 해보고 싶었어. 마사인 경은 물론이고, 마리아 경이나 쿠르트 경도 곧잘 써먹던데?”
“그야 그들은 상급 기사들이니까.”
그렇게 대꾸한 로건이, 잠시 성진의 상태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지금 정도의 오러라면 네게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갑자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오러가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아버지한테 받은 거야. 지금까지는 아끼고 있었던 것뿐이라고.”
“…오러를 타인에게 양도받아?”
로건은 잠시 갸웃거렸지만, 곧 그러려니 생각한 모양이었다.
“뭐, 그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그런 것도 가능한가 보구나. 그럼 일단 해보자. 너 바나하스 4식 5형의 ‘작은 검막 펼치기’는 이미 알고 있지?”
“응. 연공식 자체는 완전히 익혔어. 하지만 마사인 경의 설명처럼 검막이 짠, 하고 펼쳐지지는 않던데?”
“그건 순전히 네 오러의 총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로건은 직접 시범을 보여주었다.
우우웅-
곧 아르쥬나가 작게 울리며, 물결치는 검날 주위로 은청색의 얇은 막이 생성된다.
그렇게 주력 연공법도 아닌 바나하스 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 보인 로건이 설명을 이었다.
“여기 검을 둘러싼 얇은 막이 보이지? 외기를 날리기 위해 준비하는 것도 이와 요령은 비슷하다. 가장 효율적으로 오러의 막을 만들어내는 방법이거든. 어때? 지금 4식 5형을 펼쳐볼래?”
“어. 알았어.”
성진이 호두까기를 들어 자세를 잡자, 로건이 옆에서 덧붙였다.
“편하게 검에만 오러를 집중하려면, 우선 그 개는 좀 떼어놓고…….”
하지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 아니다. 그냥 두는 게 좋겠군. 평소보다 네 오러가 부드럽게 흐르는 게, 다 그 개 덕분인 거 같네.”
“응?”
“너 혼자 움직이면 또 몸속에서 막무가내로 오러를 휘두를 거 아냐? 그러게 평소에 스스로를 좀 그렇게 아끼면 오죽 좋을까.”
“……?”
오러를 그냥 움직일 뿐인데, 대체 전과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이지?
성진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어쨌거나 지금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금세 작은 검막 펼치기에 집중한 성진은, 몇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희미한 회색의 검막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넌 정말로 오러로 하는 것이라면 뭐든 곧잘 해내는구나.”
로건은 대단히 감탄한 듯했다.
“그럼 이제 그 검막을 분리해서 멀리 날려볼까? 요령은 바나하스 3식 7형, ‘물수제비뜨기’와 비슷해.”
“3식 7형… 3식 7형…….”
“그게 조금 어렵다면, 그냥 돌 하나를 실로 묶어, 검날에 매달고 휘두른다고 생각해도 좋다.”
소드 마스터의 조언은 꽤나 직관적이며 단순했다. 그런데 그게 또 의외로 성진의 머리에 쏙쏙 들어왔달까.
‘돌을 던진다. 검날에 실을 매달고 돌을 던진다…….’
부르르르…….
호두까기가 작게 떨리기 시작하자, 결계를 준비하던 성기사들이 힐끔힐끔 성진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오러 흔들기에 집중하던 성진은 그것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몰입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피잉-
픽!
이윽고 성진의 검에서 작은 오러 조각이 떨어져 날았다. 지금까지 봐왔던 것에 비하면 형편없이 작은 외기였지만, 그것은 분명 공룡의 몸에 적중하여 작은 마기의 분수를 만들어냈다.
“됐다!”
성진이 신이 나서 외치자, 로건도 덩달아 들뜬 눈치였다.
“하하, 잘하는데? 그럼 내친 김에 이것도 한번 배워볼래?”
그러곤 로건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가볍게 발을 디뎌 보이는 게 아닌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까 보여준 움직임과 요령은 비슷하지. 아마 너라면 금방 따라할 수 있을 거다.”
성진이 자세히 살펴보니, 로건의 발밑에서 그때그때 실체화되는 오러의 바람이 보였다.
“…소드 마스터는 참 신기한 재주를 많이 부리는구나?”
“별건 아니야. 나도 우연히 다른 사람에게 배웠어.”
그렇게 대답하는 로건의 뇌리에는, 허공을 박차고 적진으로 뛰어들던 한 용병 소년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당시만 해도 그런 식으로 오러를 운용하는 게 가능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
“음…….”
성진이 집중한답시고 잔뜩 미간을 찌푸리자, 로건이 부담을 덜어주려는 듯 말을 덧붙였다.
“검이라는 구심점 없이 오러를 한 점으로 모으는 일이야. 생소한 방식일 테니 당장은 힘들지도 모른다. 그리 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그런데 한참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군분투하는 듯 보이던 성진이, 잠시 후 허공에 작은 오러의 소용돌이를 만들기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로건이 드물게도 감탄한 얼굴을 했다.
“이성진.”
“응?”
“넌 역시 검과 오러 연공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 이참에 정식으로 헤네시스 연공법을 익혀보지 않을래?”
“…….”
성진은 황당함에 말문이 막혔다.
이 조국 사랑에 미친놈이, 이런 상황에서도 오르토나의 연공법 전수를 포기하지 못했어?
하지만 로건의 태도는 진지했다.
“들어봐. 내가 가엘 베르트란으로 살던 시기에도, 진심으로 가르쳐 보고 싶다고 느낀 인재는 일생에 단 하나뿐이었지. 아쉽게도 상황이 상황이라 무산되고 말았지만. 그 이후로는 정말로 이런 제안을 하는 건 네가 처음이다.”
“그래?”
그제야 조금 솔깃해진 성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가엘이던 시절에는 왜 제자 양성이 무산 된 거야? 그 단 하나의 인재가 누구였는데?”
“예전에 전선에서 만났던 용병 소년이다.”
그렇게 대답한 로건이, 잠시 주저하더니 덧붙였다.
“…그러니까, 바로 지금의 아바마마시지.”
그 황당한 대답에 성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아버지를 가르치려 했다고? 이런 미친 천재 자식! 너, 제자를 고르는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냐?’
그렇게 성진이 새로운 기술 익히기에 여념이 없을 무렵.
꿈틀!
가만히 누워있던 악마종이 묘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드드드드드드…….
Chapter 53: Chapter 353
Chapter Text
353. 신성한 바람 (4)
스티라코케라톱스.
본래라면 [콩: 쥐라기 아일랜드]라는 RPG 게임에 등장하는 필드 보스.
규상세계 코드로부터 조립되는 대부분의 존재가 그러하듯, 악마는 눈을 뜬 순간부터 이미 스스로의 격과 의무를 정확히 깨닫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리 지정된 코드와 자신이 발현된 현실에는 큰 격차가 있었다.
몸을 구속하는 거대한 중력에 당황하던 악마는, 이전의 기록을 급히 살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했다.
-어째서인지 [나]의 [컨트롤러] 위에, 불완전한 ‘증폭’ 코드가 겹겹이 쌓이게 되었다.
지정된 코드와 다른 크기로 눈을 뜬 것은 그때문인 모양.
그러나 악마는 처음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덕에, 자신을 부리는 고위 마왕의 마기를 아낌없이 빼앗아 올 수 있었으니까.
마기의 유출을 걱정했는지, 고위 마왕은 곧 자신과의 연결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제 하위 마왕에 필적하는 힘을 가진 고위 악마다!
그를 옭죄던 무수한 코드들로부터 놓여난 악마는, 자신의 본질을 기꺼이 현실에 맞게 뒤바꾸며 커다란 해방감을 느꼈다.
그럼 이제 무엇을 하는가? 답은 간단했다.
-비록 ‘행동 목표’를 지정하는 코드는 사라졌지만, 어디까지나 필드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나의 존재 의의!
악마는 굳이 그것을 바꿀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 부순다! 그저 아낌없이 [나]의 힘을 펼쳐 보이면 되는 것이다!
한데 일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탄생을 기뻐하는 포효를 내지른 것도 잠시. 그는 몇몇 인간들의 손에 이리저리 얻어맞기만 하다가, 결국은 무력하게 바닥에 꿰여있는 사태에 이른 것이다.
-……?
저 인간들과는 가지고 있는 힘이나 격의 차가 이리도 명확할진대, 대체 어떻게 이런 결과가 일어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쳤을까. 문득 악마는 깨달았다.
-[나]는 분명, 다시 태어났다.
자신의 외형과 의식, 심지어는 존재의 의의까지도 지정하고 있던 코드들. 그 치밀한 규칙들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았음이라. 그러니 이런 고난들이 이어지는 것이다.
-완전히 해방되었다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나]는 여전히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외형을 하고 있지. 애초에 아무것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었는데!
이제 갓 깨어난 데다, 스스로의 근간을 이루던 규상세계의 법칙까지 잃어버린 악마.
급격한 변화를 겪은 그의 자아는 지나치게 흐릿하고 모호했다. 게다가 그런 어설픈 자아에 애착을 붙일 시간적 여유도 없었지.
그래서 악마는 생각했다.
-하면 이것들을, [나]를 포기하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 * *
“인원의 배치가 완전히 끝났다, 오토 경.”
결계 준비를 전두 지휘하던 엘리 경이, 진의 중심으로 돌아오며 신호를 보냈다.
“가급적 서두르지. 다행히 악마종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마기는 조금씩 퍼져 나가며 점점 대지를 죽이고 있어. 증원을 기다리기 전에, 우선 1형 결계를 전개하는 쪽이 좋을지도 모른다.”
중앙에 서 있던 오토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릴리움 별동대에서 가장 신성력이 강한 이를 꼽자면, 의심할 여지없는 로건 황자일 것이다. 하나 그는 별동대 최강의 무력이기도 했기에, 온전히 신성 결계에만 주력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따라서 릴리움이 결계를 칠 때마다 구심점으로 삼는 것은, 황자 다음으로 신성력이 강한 오토 경이었다.
“나도 준비는 끝났네. 그럼 저하께 아뢰어 바로 시작을…….”
오토 경은 고개를 들어 그들의 우상을 눈으로 쫓았다.
오염된 지역으로부터 꽤 거리를 두고 있는 그들과는 달리, 로건 황자는 죽음의 땅 경계에 바짝 다가서 있었다. 아마도 악마종을 꿰어 둔 오러 블레이드를 유지하며, 놈을 확실히 견제하기 위해서일 터.
의외인 것은, 그의 옆에 그 모레스 황자가 함께 있었다는 점이다.
‘저하께서야 워낙 신성력이 강하시기 때문이겠지만.’
어째서인지 모레스 황자 역시 전혀 마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눈치. 오토 경은 신기한 심정으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기에, 형제는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는 것 같았다. 이따금 모레스 황자가 검을 휘두르는 걸 보면, 막간을 이용한 로건 황자의 검술 지도인 것 같기도 하고.
“저 나이에 벌써 저런 외기라니!”
성기사 하나가 호두까기에 또렷하게 맺힌 검기를 보며 감탄을 뱉는다. 한때는 3황자가 검술 재능이 없는 개망나니라 소문난 적도 있지만,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역시 성황가의 일원이 맞기는 한 모양.
그러나 오토 경이 주목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로건 저하께서, 저 모레스 황자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관계가 어땠었는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다.
본래라면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쪽을 잡아먹을 듯 닦달하던 관계.
로건 황자가 하루가 멀다 하고 해수 토벌에만 열중했던 것은, 어쩌면 그 심각한 불화의 영향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혹 우연하게라도 망나니 형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로건 황자는 매번 씁쓸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리곤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웃기도 했다가 티격태격 하기도 하는 모습들이 자연스럽기 이를 데 없다. 말 그대로 우애가 좋은, 그냥 보통의 형제로 보일 뿐 아닌가.
“저하께오서 참으로 기뻐 보이시네.”
마침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옆에서 뒤상 경이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오토 경은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나 깨나 신민들의 안위만을 걱정하시느라, 정작 저하 스스로는 마음 쉬일 곳이 없으셨지. 하지만 이제는…….’
이변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드드드드드드…….
오토 경은 바짝 긴장하며 악마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땅에 못 박혀 있던 놈으로부터, 난데없이 심한 진동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뭐지?”
진을 만들고 있던 성기사들이 어리둥절하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악마종은 여전히 무력하게 바닥에 꿰여 있을 뿐인데, 발밑으로부터 전해지는 불길한 진동은 점점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적어도 진원지가 저 거대한 악마종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상황!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우뚝.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어느 순간, 악마종은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진동을 멈췄다.
그러고는-
쩌적, 쩌저적!
대기를 뒤흔드는 섬뜩한 파열음이 울렸다.
악마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오토 경은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놈의 몸체에 몇 개의 큼직한 금이 번져 나간다 싶더니, 곧 아무 이유도 없이 악마종의 몸이 잘게 조각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
베이거나 터져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바람에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뜰채 사이로 부서지는 물방울처럼, 그저 본래의 형상을 급격하게 잃어가는 것에 가까웠다.
웅성웅성.
성기사들의 동요가 번져나가는 동안, 악마종은 마침내 급격하게 형체를 잃으며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이제 그들이 식별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마기와 뒤섞여 꿈틀거리는 엄청난 양의 검은 살점들뿐.
“…구, 구더기?”
뒤상 경이 옆에서 얼빠진 소리를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그렇게 완전히 해체된 악마종은 더는 로건 황자의 오러 블레이드에 꿰여있지 않았으니까.
완전히 해방된 검은 살점들이 몇 줄기의 다발을 이루며 급격하게 허공으로 솟구친다.
촤아아악!
일견 아무렇게나 분출되는 듯 보였지만, 그 움직임에는 분명한 목적성이 있었다. 대부분이 황자들이 있는 쪽으로 내쏘아졌으며, 그중 한 줄기는 땅 위를 요동치는 뱀처럼 빠르게 성기사들을 향해 기어오기 시작했으니까.
인간들을 향한 의심할 여지없는 적의!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오토 경이, 신성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소리쳤다.
“1형 전개!”
“…저, 전개!”
그렇게 오토 경을 필두로, 연이어 릴리움의 성기사들이 차례차례 신성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희게 빛나는 신성력의 막이 대형을 따라 빠르게 전면을 뒤덮어간다.
파아아-
하지만 부족한 인원으로 지나치게 넓게 구성한 방어진. 밀도가 옅디옅은 신성 결계는, 거세게 쇄도해오는 살점들을 온전히 막아내기에 역부족일 것이 빤했다.
‘…뚫린다!’
오토 경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절대 자리에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움직이면 모든 결계가 무너진다! 삿된 마기가 경작지를 침범하고, 종국에는 주신의 신민들을 덮치리라!’
그렇다면 비록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하다못해 자랑스러운 릴리움의 일원으로서……!
“주신이시여,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적에게 분노하소서. 하여 당신의 분노가 적의 분노로부터 우리를 구하게 하옵소서!”
결계를 조금이라도 더 강화하기 위해 기도문을 외우던 그는, 이윽고 거대한 마기의 뱀이 지척까지 다가오자 끝을 예감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콰아앙!
강한 마기와 신성력이 맞부딪히며 커다란 폭음이 일었다.
하지만 단숨에 마기에 휩쓸릴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의외로 신성 결계는 굳건하게 검은 살점들을 버텨내고 있었다.
“……?”
놀란 오토 경이 천천히 눈을 뜨자, 눈앞에 익숙한 신형 하나가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하!?”
로건 황자.
언제나처럼 흐트러짐 하나 없는 그들의 우상은, 어느새 신성 결계 앞으로 다가와 자신의 신성력을 보태고 있었다.
겨우 틀만 잡혀 있던 1형 결계를 홀로 지탱할 정도로 강력한 신성력을.
“주신이시여, 당신의 아이들을 지켜주소서.”
황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그저 기도문의 극히 일부. 하지만 그 단순한 문구를 읊는 것만으로도, 로건 황자가 뿜어내는 신성력은 한층 거세졌다.
허술하기 그지없던 거대한 반원진이, 그제야 비로소 완전한 1형 결계로 완성되며 눈부시게 흰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 * *
성진과 로건은 악마종의 가까이에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빠르게 이변을 알아챌 수 있었다.
휘익!
심상치 않은 변화를 감지한 로건이, 곧장 아르쥬나를 휘둘러 신성력 뒤섞인 검기를 날렸다.
하지만-
치지직!
외기에 닿은 극히 일부의 살점만이 정화되며 타들어갔을 뿐,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진 검은 살점들은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뭉치며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
성진과 로건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예민한 기감을 가진 두 사람은, 저 급변하는 악마종을 일반적인 방법으로 상대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단숨에 깨달았다.
‘저건 더 이상 하나의 개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아니야. 마구잡이로 때려 봤자 아무 소용없어!’
‘그래. 저런 것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은 단 하나. 강한 신성 결계로 남김없이 둘러싸서 정화하는 것뿐이다!’
사태 파악이 끝나자, 이에 대한 대응은 빨랐다.
“막스!”
마구잡이로 쏘아지는 거대한 기둥들을 용케도 피하며, 두 사람은 각자의 방법으로 빠르게 신성 결계를 향해 달렸다.
그런데 거의 반원진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갑자기 성진이 막스의 방향을 급격하게 트는 것이 아닌가!
놀란 로건이 절박한 시선을 던져왔다.
“잠깐만, 지금 뭐 하려는 거야, 이성진!”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너도 알잖아? 지금 신성 결계를 펼쳐봤자 불완전한 형태가 될 뿐이야. 그러니 놈을 완전히 둘러싸려면, 우선 사방으로 흩어지는 마기들을 한곳으로 모아 범위를 좁혀야 한다고!”
“너 혼자서는 위험해! 그럼 나도 같이……!”
“그런데 네가 없으면, 결계가 아예 유지되지 못할 거 같은데?”
정곡이었다.
말문이 막힌 로건이 불안한 표정으로 릴리움의 기사들과 성진을 번갈아가며 일별했다.
“너도 잘 알잖아?”
그런 로건을 안심시키듯, 성진이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렸다.
“내게 마기 따위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거.”
“……!”
“그리고 절대 내 개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리라는 것도.”
로건이 낭패한 얼굴로 입술을 깨문다.
물론 그는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성진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릴리움 별동대보다도 이성진 하나가 더 믿음직스럽지. 녀석이라면 아마 여간해서는 악마에게 쉬이 당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그래도 이성으로 파악하는 것과, 가슴이 이를 허용하는 것은 전혀 별개 문제가 아닌가!
깊은 갈등에 빠진 로건을 뒤로하고, 성진은 막스와 함께 힘차게 내달렸다. 뭐, 똑똑한 녀석이니 뭐가 최선인지 모르지 않겠지.
“가자, 막스!”
웡!
힘차게 대답한 늑대개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주인의 의지에 따라 땅을 박찼다.
[아, 이성진, 이 미친놈. 너 이 자식이 또……!]
머릿속에서 자포자기한 듯한 마왕 놈의 탄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렇게 투덜거릴지언정, 마왕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반짝.
성진의 동공에서 언제나처럼 붉은 빛이 점멸하기 시작하고-
화아악-!
곧 그의 눈앞에, 수많은 가능성의 실선들이 깔린 익숙한 오색의 세상이 펼쳐졌다.
Chapter 54: Chapter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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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 신성한 바람 (5)
사방으로 거칠게 터져나가는, 검은 살점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기둥들.
그것은 마치 머리 여럿 달린 신화 속 괴물의 모습 같기도, 혹은 용암이 거세게 분출하는 무시무시한 자연재해의 장면 같기도 했다.
마기를 잔뜩 머금은 대기가 진동하고, 시커먼 죽음의 대지가 사정없이 뒤흔들린다.
“이대로는……!”
반원진의 한쪽에서 기를 쓰고 신성력을 퍼붓던 엘리 경이, 참담한 결과를 예감하며 침음을 삼켰다.
일견 늦지 않게 펼쳐진 그라니우스식 1형 결계가 악마종을 성공적으로 막아선 듯 보였다.
하지만 처음 결계의 구도와 위치를 잡은 그녀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한번 펼치고 나면 다시 조정하기 어려운 대형 결계의 특성상, 성기사단의 증원 없이 악마종을 완전히 가두는 것은 요원한 일임을.
그리고 신성 결계에 가로막힌 악마종은, 종국에는 반대편 임야를 넘어 다른 영지들을 무자비하게 휩쓸게 되리라.
‘게다가…….’
모레스 황자.
그 어린 소년이 아직 저 마기의 폭풍 속에 남아 있었다.
평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망나니 황자가 갑자기 검은 살점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엘리 경은 하마터면 결계를 지키는 것도 잊고서 그를 향해 달려갈 뻔했다.
황가의 일원을 목숨 바쳐 지키는 것 역시 성기사의 중차대한 임무일진대.
‘그런데…….’
의외로 가장 먼저 달려갈 거라 생각했던 로건 황자는, 그런 돌발 상황에서도 생각보다 침착한 모습이었다.
엄청난 신성력을 쏟아부으며 결계의 중심을 잡는 한편, 한 손으로는 은청의 외기를 두른 아르쥬나를 거머쥔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그 냉철해 보이는 푸른 눈을 살피던 엘리 경은 순간 의아해졌다.
‘…믿고… 있어?’
저 사고뭉치 황자를?
어째서?
오랜 시간 추종해온 우상의 심경을 잘못 헤아렸을 리가. 엘리 경은 반신반의한 기분으로 저 멀리 내달리고 있는 모레스 황자를 돌아보았다.
쐐애액-
마치 뱀처럼 움직이는 검은 살점들이, 갑자기 흩어지기도 하고 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뭉치기도 하는 지극히 혼란스러운 상황.
그 속에서 어린 황자는 용케도 악마종의 공격을 피해가며 능숙하게 늑대개를 몰고 있었다.
휘익-
퍼석!
이따금 그가 휘두르는 호두까기에, 검은 살점들이 마기를 흩뿌리며 속절없이 흩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모레스 황자는 기본적으로는 악마종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놈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마치 교란하는 듯 어지러운 움직임을 보이는 중이었다.
‘대체 왜?’
그러다 순간 깨달은 사실에, 엘리 경은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확실히 보였다. 두서없이 사방팔방 퍼져나가는 듯하던 검은 살점들이, 어느 순간 모레스 황자에게 이끌리며 자리에 정체되거나 조금씩 이곳으로 되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설마, 놈을 이곳에 잡아두기 위해?’
콰앙!
그때, 또 다른 검은 기둥 하나가 날아와 신성 결계에 부딪친다.
화르륵-
신성력에 정화되며 희게 타오르기 시작한 살점들이,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이리저리 요동치기 시작했다.
콰앙! 쾅! 쾅!
연이어 무지막지하게 결계를 강타하는 엄청난 충격.
‘……!’
하지만 당장 결계가 부서질 것만 같은 엄청난 충격이었음에도, 로건 황자는 손에 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결계를 향해 더욱 거세게 신성력을 쏟아낼 뿐.
‘저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가!’
비로소 엘리 경은 확신할 수 있었다.
로건 저하께서는 모레스 황자의 목적을 처음부터 알아채었고, 그가 결국은 해내리라는 것에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으신 거다.
그러니 혹여 악마종을 자극할 만한 공격은 일절 하지 않으며, 놈이 이곳으로 모여들 때까지 그저 버티고만 계시는 거겠지!
‘어쩌면……!’
암울하기만 하던 전망 한편에서, 어쩌면 큰 피해 없이 제국을 지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겨났다.
“주신이시여,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적에게 분노하소서! 하여 당신의 분노가 적의 분노로부터 우리를 구하게 하옵소서!”
전투 중 릴리움 별동대가 가장 자주 읊는 경전의 한 구절을 되뇌며, 엘리 경은 이내 신성 결계에 그녀의 온 힘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 *
수천 혹은 수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자잘하게 조각났을 공룡의 살점들.
그것들이 일제히 마기를 뿜어내며 두서없이 날뛰는 모습은, 감히 사람의 눈으로 쫓기에 불가능하리만치 어지러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속에 파묻혀 있는 성진은, 악마종의 움직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복잡한 광경을 보는 중이었다.
‘저 선들……!’
그는 예전에 한번 본 적 있는 실선들을 다시금 눈앞에 마주하고 있었다.
악마종의 살점들이 흩어지고 모이는 엄청난 확률의 구름 속에서, 이들의 움직임을 선명하게 예측하는 은빛의 선들이 이리저리 뒤엉키며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그중에서 유독 선연하게 빛나는 하나의 선. 바로 성진이 나아가야 하는 단 하나의 경로 또한,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휘익-
그 경로를 따라 막스를 가볍게 움직이자, 방금 그들이 있던 자리 위로 검은 기둥이 채찍처럼 내리꽂혔다.
쿠아앙!
빈 땅을 때린 충격으로 잘게 부서진 검은 살점들은, 다시 성진의 양옆에서 뭉쳐들며 좌우로 휘둘러졌다. 쇄애액!
하지만 이를 예측한 성진은 이미 땅을 박차곤 막스와 함께 허공을 날고 있었다.
일순 무방비해진 체공 시간.
그 찰나를 노리고서, 또 다른 검은 기둥들이 성진을 휘감기 위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친다.
파앙!
순간 성진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박차며 거짓말처럼 소용돌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오러를 실체화시켜, 디딤돌로 삼는 기술.
아까 로건에게 막 배운 재주에 불과했지만, 한번 요령을 파악하고 나니 다급한 상황에도 써먹을 정도로 능숙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촤아악!
그러고는 바닥으로 내려서는 동시에 정면으로 호두까기를 휘둘렀다.
그 매서운 공격에, 꿈틀거리던 살점의 밑동이 흩어지며 검은 기둥 하나가 부르르 움직임을 멈췄다. 서쪽을 향해 막무가내로 뻗어나가던 줄기 중 하나다.
‘야, 이쪽으로 와라! 너 혼자 멀리 가지 말라고!’
그렇게 기세 좋게 악마종을 몰아가던 성진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지끈-
너무 현란하게 움직인 탓일까, 잔뜩 혹사당한 눈이 벌써부터 지끈지끈 아려오기 시작한다.
이전과 달리 마왕의 제대로 된 중계를 받고 있는 영안이었지만, 눈앞에 펼쳐져 있는 실선은 거의 기백에 이른다.
그 수없이 많은 가능성들을 동시에 응시하는 시야가, 결국은 과부하를 이기지 못하고 손상되고 있는 거다.
성진은 급한 대로 가슴께 통로에서 찰랑거리는 오러를 끌어올려 눈 주변에 덧댔다.
아버지의 오러가 가진 특성일까. 어쩐지 시원한 느낌과 함께 한결 통증이 가시는 것을 느끼며, 성진은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럭저럭 할 만한데?’
[야, 이성진……!]
마왕이 침음을 삼킨다.
하나 거기까지.
현재 성진의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차마 그의 몰입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마치 칼날 위를 내달리듯 아슬아슬한 순간들. 만일 조금이라도 그 경로를 어긋나는 순간, 이성진은 저 검은 살점들에 뒤덮여 단숨에 갈가리 찢어지고 말리라.
그렇게 한동안 남쪽 방면의 살점들을 유인하던 성진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동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앗!”
지켜보던 성기사들이 나직한 신음을 흘렀다. 황자가 갑자기 악마종의 살점이 우글거리는 중앙으로 달려드는 듯 보였으니까.
바로 그때-
퍼엉!
멀리서 날아온 은청의 검기가 폭발하며 정면의 장애물을 날려버린다. 로건이 적절한 시점에 오러 폭사를 날려준 것이다.
“조심해! 집중을 잃지 말고!”
로건이 멀리서 외치는 소리를 들은 성진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은빛의 실선은, 실은 로건의 엄호까지도 모두 고려한 경로라는 걸 저 녀석이 알기는 할까.
휘리릭-
그렇게 긴 오러의 레일을 만들어 살점 뭉치들을 빠르게 타넘을 때였다. 성진은 갑자기 섬뜩한 예감을 느끼며 황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부르르…….
잠시 떨리는가 싶던 살점들이 일제히 뾰족하게 일어서며, 마치 고슴도치처럼 사방으로 섬뜩한 가시를 세웠다.
촤르르르륵!
살벌한 빛을 흘리는 검은 가시들의 소용돌이. 멀리서 결계를 유지하고 있던 성기사들이 기겁하며 숨을 들이켰다.
“흡!”
한데 긴장한 것도 잠시.
속절없이 가시들에 꿰이리라 생각했던 모레스 황자가, 마치 모든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유유히 몸을 움직이는 게 아닌가!
그는 어느새 결계를 향해 똑바로 내달리고 있었다. 자신을 뒤쫓는 한 무더기의 가시들을 꽁무니에 단 채로.
“대체 어떻게…….”
성기사들의 눈에, 어린 황자의 움직임은 이미 신기에 가까웠다.
차르르륵!
그러는 와중, 결계 부근에서 꿈틀거리던 살점들 역시 같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쐐애액!
마치 비늘이 일어나듯 일제히 솟구친 가시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성진을 향해 힘껏 내쏘아진다.
하지만 성진은 경로를 그대로 유지한 채 가볍게 호두까기를 치켜들었다. 검날을 견고하게 둘러싸고 있는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가, 쇄도하는 가시들을 가볍게 쳐낸다.
태앵! 탱!
지금 성진이 만들어내는 오러 블레이드는, 그의 오러층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적인 방법으로 오러를 응축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만의 방법으로 실체화 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이것을 잊지 말거라, 모레스. 모든 세계에는 이런 오러와 같은, 근본적인 바탕이 되는 힘이 존재한다.
일전에 아버지는 그렇게 설명했었다.
-만일 네 눈에 발군의 힘처럼 보이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보인다면, 언제나 그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거라.
판게아 클로니클.
염상이 쉽게 정형화되고 또 실체화되도록 만들어진 그 규상세계에서, 성진은 자신의 염상을 재료로 마왕 2호를 간단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 델크로스 차원에서 그 바탕이 되는 재료라고 하면-
‘오러!’
모든 생명이 자연스레 만들어내는 힘, 그리고 의지를 통해 뚜렷하게 실체화시킬 수도 있는 힘.
오랜 기간 검을 수련함으로써 구체화되는, 엄밀하게 말하면 의념이 모여 만드는 염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힘.
‘그리고 나는 아버지에게, 염상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법을 배웠어!’
촤아악!
실제 호두까기의 검날보다 한 뼘은 더 길어진 견고한 외기. 그 회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재차 검은 뱀의 몸체를 갈랐다.
비록 로건처럼 신성력이 뒤섞인 오러는 아니었지만, 성유물인 호두까기의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파아악!
검은 가시로 이루어진 뱀이 단숨에 힘을 잃고는 각각이 꿈틀거리는 살점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진다.
찰랑-
동시에 소모된 오러를 채우려든 듯, 가슴으로부터 시원한 물줄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전에 없이 풍족한 오러에, 성진은 잔뜩 고양되어 내키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촤악! 촥!
무력하게 흩어지는 검은 살점들.
성진의 들뜬 기분을 그대로 전달받은 막스 역시, 흥분을 참지 못하고 경쾌하게 짖었다.
웡웡!
-이거 좋아! 나는 본래 강하고 거대했지만, 지금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고 거대하다! 그리고 더 빨라졌어!
“아하하하!”
과도하게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의 영향일까, 절로 쾌활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의념이 실체화된 검을 들고서, 또한 의념이 실체화된 바람을 온몸에 휘감은 채, 성진은 막스와 함께 마기 사이를 마음 내키는 대로 누비며 악마종 몰이를 이어갔다.
쿠르르르르!
사방으로 흩어지던 악마종의 살점들이 조금씩 신성 결계를 향해 모여든다. 그 경이롭기까지 한 광경을, 릴리움 별동대는 그저 넋을 잃고서 바라볼밖에.
“…저것이 바로 신수, [바람]…….”
뒤상 경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경전 동화에 나와 있다 했던가. 과연 로건 황자의 설명대로였다.
온몸에 회색의 짙은 바람을 휘감은 채 달리는 저 모습이야말로, 바람을 타고서 위대한 이적을 행했다 전해지던 성 바스티안의 재림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신수 바람!’
‘오래전 성인을 높은 설산으로 이끌었다는, 그리고 마침내 손가락 악마를 무찌르게 했다는 바로 그 바람!’
‘모레스 저하께서 지금 그 바람과 함께 하신다!’
경탄은 곧 기이한 열기와 함께, 릴리움의 성기사들 전원에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성진, 조심 좀 하라니까 왜 저렇게 신이 난 거야.”
그들 중 오직 로건만이, 내심 초조한 심정을 감추기 위해 애쓰며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Chapter 55: Chapter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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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 신성한 바람 (6)
“쿠르트 경. 이제 근처에 남은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한 상주기사의 보고에, 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마무리해야겠군.’
모레스 황자의 명대로, 그는 상주기사들을 이끌고서 산을 내려가자마자 곧바로 영지민과 사냥 모임 회원들의 대피를 도왔다.
상주기사들의 본문은 어디까지나 황자의 호위. 하지만 모레스 황자의 의지가 워낙 강력했던 데다, 그의 곁에는 전 근위대 단장인 마사인 경이 붙어 있으니까.
‘그래도 재난에 비해 인명 피해가 극도로 적다.’
마지막 농가까지 피난이 완료된 것을 확인한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악마종이 출현한 것은 영지 외곽의 사냥터. 경작지 일부를 제외하면 주로 임야만이 넓게 펼쳐진 인적 드문 지역이었다.
무너지는 산에 휩쓸려 생사 불명인 나무꾼 하나를 제외하면, 현재까지 파악된 영지민의 피해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유일한 변수라면, 하필 근처에 황도 인사들의 사냥 모임 캠프가 있었다는 정도.
하지만 산사태와 함께 캠프가 단번에 휩쓸려 나간 걸 생각하면, 그들의 대피 역시 시의 적절할 때 이루어졌다. 아마도 사냥터를 옮기려고 미리 철수를 준비한 덕분이리라.
어디 그뿐인가.
사고 현장에서 황자의 시녀가 남은 영지민들을 마차에 꽉꽉 채워 달려온 덕분에, 역시나 인명 피해가 전무하다시피 한 것이다. 닥쳐온 재난의 크기를 생각해 보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침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고, 마침 빈 마차가 캠프에 있었다니…….’
순간 쿠르트 경의 뇌리에, 부득부득 사낭터까지 마차를 끌고 올라가겠다 고집부리던 모레스 황자의 모습이 스쳐갔다.
‘설마?’
저하께서 일이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예상했다고?
아니, 하지만 그럴 리가? 예고도 없이 나타난 악마종을 그가 대체 어떻게 알고?
‘음? 그러고 보니, 처음에 사냥터를 옮기려던 이유도…….’
따지고 보면 상주기사들을 풀어 사냥 모임을 훼방 놓고, 사냥감을 모조리 쓸어버린 모레스 황자 때문이 아니었나?
…아니, 잠깐만. 정말인가?
설마 이거 정말로……?
“쿠르트 경!”
그런 쿠르트의 생각을 끊어버린 것은,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클로디아 경의 목소리였다.
“서둘러 주세요! 구조에 너무 오래 시간을 지체했습니다!”
“…클로디아 경.”
“어서 우리 저하를 찾아야 해요!”
‘우리’ 저하라니. 그 맹목적인 태도에 쿠르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 클로디아 경의 충성심은 갈수록 기이하게 느껴졌다. 안면 튼 지 얼마나 됐다고 뭔가에 홀린 듯 3황자를 따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잠시라도 떨어지면 불안해하는 것이 꼭 주인 잃은 개 꼴이 아닌가!
“지금쯤이면 저하께서 또 혼자서 악마종과 싸우겠다고 달려들고 계실지도 모른다고요!”
설마, 아무리 황자가 막무가내기로서니, 그런 짓을 할 리가.
그런데 옆에서 잠자코 서 있던 칼멘 경이 갑자기 이렇게 한마디 거드는 게 아닌가?
“아, 정말 그렇겠군. 더 사고 치기 전에 어서 찾아서 말리는 게 좋겠습니다, 쿠르트 경.”
이 친구가 지금 농담하나? 쿠르트가 미심쩍게 그의 얼굴을 살폈지만, 의외로 칼멘 경은 더없이 진지해 보였다.
오히려 그 말에 발끈하며 반발한 것은 클로디아 경.
“칼멘 경! 그런 불경스러운 소리 하지 마세요! 우리 저하는 사고 따위는 치지 않아요!”
“뭐? 혼자 악마종에게 달려드는 게 사고 아니야?”
“아니에요! 우리 저하는 그냥 용맹하신 겁니다!”
“그래. 용맹하게 사고 치기 전에 빨리 가자고.”
“이익!”
하지만 약간의 온도 차가 있을지언정, 대거리 하는 두 사람은 똑같이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구르는 중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지체했다가는, 저들끼리 저하를 찾아 무작정 달려 나갈 눈치.
결국 쿠르트 경은 서둘러 상주기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거 놔라! 나는 캠프로 돌아가야겠다!”
“백작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곧 구조대가 갈 테니……!”
쿠르트 경이 상주기사들과 함께 우르르 말을 몰고 달려 나갈 때였다. 저 멀리서 바서스트 백작이 호위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절규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날 놓으라니까! 그러면 너무 늦는단 말이다!”
아아, 하필이면 캠프의 유일한 인명 피해가 바로 바서스트 백작 부인이었다고 했던가. 산사태가 일어날 때 함께 휩쓸렸다고 들었다.
“어서 가서 부인을 구해야 해! 부인! 부이-인!”
데면데면한 것이 보통의 부부처럼 보였는데, 생각보다 금슬이 좋았던 모양.
그런 백작의 딱한 모습을 일별하며 혀를 차는데, 옆에서 클로디아 경이 말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이 보였다.
“역시 위험하잖아! 저하를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끝까지 곁에 있었어야 했는데…….”
히히힝!
세게 걷어차인 말이 크게 울음소리를 내며 쿠르트 경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한데 이번에도 의외의 광경이 있었다.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한 채로, 칼멘 경이 바짝 그녀의 곁을 따라붙기 시작했으니까.
“먼저 갑니다, 쿠르트 경. 그 자식 혼자 놔두면 또 무슨 미친 짓을 하고 있을지…….”
“……?”
쿠르트는 눈을 끔벅거렸다.
아니 불경스러운 혼잣말은 제쳐두고라도, 지금 저놈이 그 모레스 황자를 걱정하고 있는 건가? 정말로?
‘클로디아 경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칼멘 경, 자넨 얼마 전까지만 해도 3황자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잖아?’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가며 일행과의 간격을 벌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또 틀로 찍어낸 듯 똑같아 보여서, 쿠르트는 무심결에 갸우뚱거리게 되는 것이었다.
“저놈들이 언제부터 저렇게 호흡이 잘 맞았었지?”
그렇게 얼떨떨하게 앞서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눈으로 쫓고 있을 때였다. 쿠르트 경은 갑자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
언젠가.
아주 오래전, 언젠가.
그때도 자신은 저 두 사람의 뒤를 쫓아, 이렇게 다급하게 말을 달린 적이 있지 않았던가?
위이이잉…….
묘한 이명과 함께, 일순 시야가 흐려지는 느낌이 있었다. 아니, 시야가 흐려진다기보다는, 눈앞의 광경에 기억 속 또 다른 모습이 겹치며 생기는 혼란과 현훈.
그때 그를 앞서가던 두 사람은, 어쩐지 근위대 제복이 아닌 정식 갑주를 입고 있었던 것 같다.
바람에 나부끼는, 신성제국의 문양이 선명히 아로새겨진 망토. 그리고 그들이 말 머리를 향하던 곳은, 저 검은 마기의 소용돌이가 아니라 무수하게 쏟아지는 화살비…….
“쿠르트 경!”
뒤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쿠르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동안, 어느새 다른 상주기사들이 하나하나 그를 앞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괜찮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쿠르트 경은 휘휘 머리를 저어 어지러운 상념들을 쫓아냈다. 빠르게 현실감이 찾아들며, 묘한 기시감은 그대로 그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마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어서 서두르자!”
“이럇!”
히힝! 히히힝!
그의 말에 여기저기서 박차를 가하는 소리가 들리며, 상주기사들의 속도가 더더욱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둘러 모레스 황자에게 도착했을 때, 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저하?”
무수한 살점으로 조각나 폭풍처럼 무시무시한 움직임을 보이는 악마종.
이에 맞서 소수의 인원만으로 엄청난 규모의 신성 결계를 펼치고 있는 릴리움 별동대.
모든 것이 상상을 초월했지만, 어디 모레스 황자의 모습만 하겠는가.
“…오러 블레이드?”
지금 그들의 어린 황자는, 이미 상급 기사를 아득히 넘어서는 경지의 오러 블레이드를 휘두르고 있었다!
“오러 실체화……!”
어디 그뿐인가. 눈으로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강한 바람을 온몸에 휘감은 채, 거대한 늑대개를 자유자재로 몰며 전장을 달리는 모습이라니!
괴물들에 맞서며 세 고룡의 시대의 막을 내렸다는 초대 성황의 전설도 이렇게까지 웅장할 수는 없으리라. 그야말로 오랜 신화의 한 장면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재현된 것만 같았다.
“물러서시오! 마기가 강하니 그대로 결계 바깥에 머무르시오!”
릴리움 성기사들의 제지를 받은 그들은, 그저 신성 결계 밖에서 멍하니 황자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보세요. 누가 사고를 친다고… 역시 우리 저하는 대단하세요!”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클로디아 경의 벅찬 목소리에 쿠르트는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비록 신성력이 없어 악마종을 직접 상대하기 어려운 그들이지만, 그래도 릴리움의 성기사들을 보조하고 전열을 갖춰야 했다.
“자자, 다들 정신 차리라고!”
쿠르트 경은 상주기사들에게 호통을 날리며 재촉했다.
다른 기사들 보기 부끄러우니, 제발 그렇게 적나라하게 반한 것 같은 얼굴들 하지 말란 말이다!
특히나 칼멘 경! 클로디아 경은 그렇다 쳐도, 칼멘 네놈이 그러고 있으니 어쩐지 소름이 돋는다고!
* * *
‘슬슬 끝이 보이나?’
곧 증원이 올 거다. 그런 예감을 강하게 느끼며, 성진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구잡이로 뻗어나가던 악마종의 살점들은, 다행히도 열린 결계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성진이 사방을 부지런히 살피며 놈들을 몰아온 덕분이다.
워낙 범위가 넓다 보니 간혹 놓치는 살점들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멀리서 로건이 검기를 날려 적절하게 타격해 주었지. 저 먼 거리에서도 오러 폭사의 위력이 조금도 죽지 않다니, 정말 괴물 같은 녀석이 따로 없었다.
‘어차피 비결을 물어본들, 또 시선이 이르는 곳에 오러가 자연히 이끌리니, 손을 벗어나되 벗어나지 않느니 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해 대겠지만.’
그즈음에 이르러, 두서없이 날뛰던 악마종의 움직임에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어떻게 움직인들 성진에게 저지되기만 하니, 놈‘들’도 점점 혼란에 빠진 모양이었다.
-[나]는 고위 악마. 하위 마왕에 필적하는 힘을 가졌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어차피 [나]는 실패했는데.
-실패를 말하긴 일러. [나]는 아직 자유롭다.
-아아, 그런데 이 근처에서 [나]보다 더욱 강한 ‘격’이 느껴져! 차라리 그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나]의 의지를 반하는 것!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 안 되는 거지? [나]는 이미 [나]를 포기했는데……!
마왕 놈이 대충 전해주는 놈들의 사념은 그런 식이었다.
어째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의 몸체처럼 움직이는 살점들이 조금씩 통일성을 잃어가는 것 같긴 하더라니.
지끈-
통증이 심해지는 두 눈을 의식하며, 성진이 가슴께의 오러를 재차 끌어올렸다. 그래도 놈들의 움직임이 조금씩 잦아들면서, 떠오르는 선들의 개수가 대폭 줄어든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이성진.]
그때, 마왕이 불안한 듯 성진을 불렀다.
[저놈들의 분위기가 아무래도 이상해.]
‘응?’
[분열하고 있던 시간이 너무 길었나 봐. 더는 저것들을 하나의 개체라고 보기 어려울 것 같은데?]
그 말과 동시에-
우뚝.
뱀처럼 서로 뭉쳐있던 악마종의 살점들이 일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
파아아-!
그러더니 놈들이 갑자기 구심점을 잃고서 공기 중에 힘없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분진이 이는 것 같은 어지러운 광경.
[드디어 저항을 완전히 포기한 건가?]
마왕이 반색했지만, 성진은 흠칫 놀라며 호두까기를 고쳐 쥐었다. 그의 예감이 전에 없이 위험한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으니까.
휘이이-
흩어진 살점들이 바람에 힘없이 휘날린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그 떨어져 나간 살점 하나하나가, 마치 개별적인 의지를 가지기라도 한 듯 모조리 성진을 향해 날아왔던 것이다.
“……!”
수천 혹은 수만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쫓던 시야가, 순식간에 은빛 선으로 뒤덮이며 새하얗게 변한다. 순간 눈에서 끔찍한 통증이 일었다.
성진은 다급하게 마왕과의 연결을 해제했다. 하지만 때는 늦어, 이미 크게 손상을 입은 시신경은 바로 회복되지 않았다.
낭패였다.
-그래. [나]는 이미 변화했다. 처음에 코드로 지정된 그대로의 [나]가 아니지 않나!
-새롭게 다시 태어났으니, 몇 번이고 다른 존재로 태어날 수 있지!
-그렇다면 더욱 강한 ‘격’과 함께 하는 것이……!
-새로운, 그리고 더 강한 [나]가 되자!
마왕과의 감각을 완전히 차단했기에, 놈들의 사념을 일일이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살점들이 몰려오는 기척만으로도, 성진은 놈들의 강한 의지를 피부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아무런 힘이 없는, 그저 먼지나 공기에 불과한 것들. 그런 것들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것을 막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성진은 급한 대로 가슴께의 오러를 재차 끌어올려, ‘작은 검막 펼치기’의 요령으로 막스를 뒤덮었다.
“……!?”
바로 그때.
성진은 전에 없던 묘한 감각에, 흠칫 몸을 떨었다.
‘…이상한데?’
이건 전부 아버지의 오러잖아?
눈 상태를 나아지게 하고, 내 몸을 보호해 주고 있는 좋은 오러야.
그런데 왜 정작 그 오러가 차 있는 가슴 쪽이, 이렇게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지고 있는 거지?
Chapter 56: Chapter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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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 신성한 바람 (7)
가슴이 후끈하다 못해 따가워지고, 피가 바싹바싹 말라가는 느낌.
이 이상한 감각은 절대 착각이 아니다.
‘뜨거워……?’
위기감을 느낀 성진이 재빨리 몸 전체를 관조해 보았다.
하지만 운용하는 오러에는 딱히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통로 자체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
[이성진!]
마왕 역시 뭔가를 느꼈는지, 불안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일단 급한 불은 끄자!’
성진은 급히 통로의 오러 운용을 중단했다. 그러자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막스의 크기가 슈우욱 줄어드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끼잉!
불안한 듯 코를 울리는 늑대개를 손으로 더듬어 끌어안고서, 성진은 모자라는 오러를 한껏 긁어모아 개를 감쌌다.
그러는 한편, 그의 머릿속은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모레스.
꽤 오래 전, 성황이 본궁 뒤뜰을 부숴가며 손수 통로를 막아줬던 날.
성진은 그가 강한 사념으로 전하는 주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수로의 물을 당기면, 맞은편에 있는 것들이 함께 끌려온다는 것을 명심해라.
그래, 잊지 않았다.
그날부터 아버지의 경고는 늘 가슴에 새기고 있었어.
하지만…….
‘통로를 막기 위해 밀어 넣은 엄청난 오러에 비하면, 내가 운용한 오러 따위는 고작 한 줌도 되지 않아!’
그 정도라면 황궁에 돌아갔을 때, 아버지가 딱밤 한 대 때리고 가볍게 보충해 주실 수 있는 양이잖아. 그런데 대체 왜 이런 변화가 생기는 거지?
[이, 이성진! 이거 아무래도……!]
마왕 놈이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재차 성진을 불렀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순간 멈칫하더니 그대로 조용히 침묵에 빠진다.
그런 성진의 주위로 점차 검은 살점들이 뒤덮이기 시작했다. 뇌리를 어지러이 메아리치는 수많은 사념과 함께.
-[나]가 되어줘!
-아니면 [나]를 [너]의 안에 받아들여라!
-[너]와 하나가 되는 순간, [너]는 분명 새로운 [나]가 될 테니까!
신경질적으로 그것들을 쳐내던 성진은, 곧 무의미한 움직임을 멈추고는 몸을 웅크렸다.
부서진 살점들은 작은 물리력에도 쉽게 밀려나는 듯했지만, 금방 빈 공간으로 다시 밀려들며 사위를 꽉꽉 채우려 들었으니까. 마치 검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이었다.
-부디 거부하지 마. 이질감 따위,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아!
부족한 오러로는 막스를 보호하는 것이 한계. 이내 농도 짙은 마기가 빨려들 듯 몸으로 흡수되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나 쉽게 녹아들어, 잠시나마 긴장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
이어서 악마종의 살점들 역시 몸속으로 파고들 듯 달라붙어와, 성진은 재빨리 막스의 털가죽에 코를 묻었다.
낑낑낑!
곁에 있는 막스의 울음소리가 어쩐지 멀게만 느껴지고, 덩달아 귓가를 파고드는 사념이 더더욱 거세졌다.
-자, 한층 강한 격을 가진, 무적의 [나]가 되는 거다!
-그건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일이 될 테지!
-어서! 어서! 어서!
그 혼란스러운 아우성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며, 성진은 막스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제야 작게나마 후회가 일었다.
‘내가 너무 날뛰었나…….’
아니, 하지만 분명 괜찮을 거라는 계산이 있었는데. 최선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거기다 풍족한 오러를 마음껏 시험할 기회는 지금뿐이라는, 그런 생각도 들었단 말이지.’
어쩌면 예감을 너무 맹신했는지도 몰랐다.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이제는 애꿎은 막스까지 이 지경으로 말려들지 않았는가.
손상된 눈에는 이미 아무것도 비치지 않고, 악마종에게 뒤덮여 점점 숨이 막혀가는 상황.
하지만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성진은 사태가 이 지경이 되어서도 크게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술렁-
어쩐지 박동이 거세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성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뭐, 당장 믿을 만한 구석이 하나 있긴 하지.
지원이 오면 결계에 묶인 로건도 자유로워질 거다. 그럼 녀석이 반드시 뭔가 좋은 수를 낼 터.
‘그때까지 만이라도 막스를 지키는 데 주력하는 거야!’
마기로 가득한 살점들이 피부를 파고들 듯 덕지덕지 달라붙는 것을 느끼며, 성진은 마지막으로 남은 오러를 긁어모아 막스의 주위를 한차례 더 휘감았다.
* * *
검은 살점들이 갑자기 이성진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을 때, 로건은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오토 경.”
아르쥬나를 고쳐 쥐며, 로건이 곁에 있는 기사에게 빠르게 지시했다.
“네, 저하.”
“내가 빠지더라도 그대가 자리를 지켜주게.”
“…네?”
“악마종이 저대로 더 움직이지 않는다면, 혹여 결계가 잠시 사라지는 일이 있더라도 괜찮을 것 같군. 이참에 신성 결계를 재정비하도록.”
“저하. 그게 무슨……?”
하지만 오토 경이 채 되묻기도 전에-
후욱!
일순 막대한 신성력이 거둬지며, 신성 결계가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흔들거렸다.
“저하?!”
오토 경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로건 황자를 수행하면서, 황자의 돌발 행동에 놀란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이내 마음을 다잡은 그는, 있는 힘껏 신성력을 뿜어내며 소리쳤다.
“리, 릴리움 모두! 자리를 지켜라! 결계를 유지하라!”
결계의 가장자리에 있던 엘리 경 역시, 침착하게 뒤를 돌아보며 주의를 주었다.
“근위대는 부디 섣부른 행동을 하지 마시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뒤에서 작은 소란이 일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려는 클로디아 경을, 쿠르트 경이 간신히 붙잡고 있는 것이다.
“진정해, 클로디아 경!”
“쿠르트 경!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우리 모레스 저하께서……!”
“그렇다고 경이 대책 없이 뛰어들었다가는, 순식간에 침식이 일어나 그대로 죽게 될 뿐이라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저하를 지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잖아요!”
“지금은 릴리움의 지시를 따라야 해! 로건 저하께서 움직이셨어. 그러니 잠시만 상황을 지켜보자고!”
그러는 사이, 로건은 벌써 악마종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이미 두어 차례의 오러 폭사까지 날린 뒤였다.
“이성진! 정신 차리고 어서 거기서 빠져 나와!”
하지만 폭발로 밀려나는 것도 잠시.
이성진을 중심으로 모여든 살점들은 순식간에 그를 파묻어 버리곤 점차 부피를 늘려간다.
그렇게 악마종은 어느새 거대한 구체가 되어, 죽음의 대지 위해 홀로 덩그러니 놓이게 되었다.
“이성진!”
아르쥬나가 새파란 오러를 뿜어냈다. 신성력이 거의 바닥나며 드러난 로건 본연의 오러였다.
쇄액! 쇄애액!
소드 마스터의 매서운 검격이 거대한 구체의 가장자리를 잘게 가른다. 저 중심부 어딘가에 이성진이 있기에, 무턱대고 중앙을 꿰뚫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괜찮아. 이대로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깎아 나간다면……!’
파스스…….
하지만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살점들은 잠시 베여서 흩어지나 싶더니 이내 모여들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다.
퍼억! 퍼어억!
재차 오라 폭사를 날려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자잘하게 부서져 마치 액체처럼 출렁이는 살점들은, 아르쥬나로 베고 또 베어도 금방 멀쩡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역시 신성력으로 모조리 정화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나.’
로건은 난감한 심정으로 거대한 검은 구체를 올려다보았다.
혼자서 저 거대한 악마종을 정화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그러니 지금까지 놈을 이곳에 묶어두기만 한 채, 다른 성기사단이 오길 기다리지 않았던가.
거기다 지금 그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점도 문제였다. 수십 명이 지탱해야 할 거대 결계를 오랜 시간 홀로 감당하고 있었기에, 이미 신성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에 가까웠던 것.
그 증거로, 마기를 여러 차례 접촉한 몸에서 조금씩 침식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해야 한다.’
아르쥬나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언제 올지도 모를 증원을 기다리는 동안, 이성진이 저 속에서 무사할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야.’
로건은 남은 신성력을 억지로 쥐어짜내, 검날에 다시 은청의 성화를 피워 올렸다.
‘그러니 지금, 내가 이성진을 구해내야 해!’
화아악!
그의 의지에 반응하듯, 희미해지던 신성력이 다시 희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은청의 성화를 몸에 두른 로건은, 천천히 악마종의 중심부를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치지지직!
신성력이 닿아오자, 그제야 검은 살점들이 희게 타오르며 조금씩 바깥으로 밀려나가기 시작한다.
로건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서 파고들어, 다시금 중앙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쿠르르르르…….
침입자의 존재가 불쾌한 듯, 검은 구체가 거세게 출렁거린다.
‘…돌파할 수 있나?’
반복되는 검격.
문득 영혼이 비틀리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며 로건이 생각했다.
‘내가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반드시 결과를 만들어야 했다.
무거운 짐을 홀로 짊어지는 것. 그리고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내며 죽을 때까지 버텨내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미련한 짓이야말로, 불세출의 천재라 불렸던 가엘 장군이 가장 잘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주신이시여, 당신의 아이들을 지켜주소서.”
검을 휘두르며 나직하게 읊조리자, 은청의 성화는 이에 화답하듯 점점 빛을 더해가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오라가 사람의 성정을 어느 정도 반영하듯, 마기 역시 본래 주인이 가진 성질을 고스란히 닮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성진을 뒤덮고 있는 마기들은 대단히 성가신 성질을 가졌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온 세상에 뿌리자…….
-씨앗을 뿌리고, 일구자. 그리고 수확을 해야지…….
-더 멀리 가려면, 더욱 더 작은 씨앗으로 나뉘는 것이…….
악마종은 이제 [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잘게 나눠지고 분열하기만 할 뿐, 더는 의식이라 불릴 만한 사념을 발하지도 못한다.
놈은 개체로서의 성질을 완전히 잃고, 마기 그 자체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저 먼 우주에도 나의 씨앗을…….
물론 시끄럽다는 데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지만.
성진은 마기가 전해오는 강한 의지에 두통이 이는 것을 느꼈다.
‘…전 차원은 물론 온 우주에, 빈틈없이 자신의 씨앗을 뿌리고자 하는 성가신 자의 마기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리 일러준다.
어, 그런 모양이네. 대체 머리가 어떻게 돌아있으면, 온 우주에 자신의 씨앗을 뿌리고 싶다는 허황된 욕망을 가질 수가 있지?
그런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그냥 죽은 듯 잠이나 쳐 자면 서로가 오죽이나 좋을까.
‘…….’
여기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성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손에 쥔 막스의 감촉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아니, 버티는 게 문제가 아니지. 정확히는 버티고자 하는 의지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아, 그래. 지금까지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지. 하지만 이 ‘마기’들이 왠지 친숙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어.
그렇다면 결과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거 아닐까? 이게 과연 의미 있는 저항이기는 한 걸까?
두근-
조금씩 의식이 확장되어가며, 시야가 다시 환하게 열리기 시작했다.
아니, 시야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의 멀어있는 양 눈은 여전히 굳게 닫힌 채, 막스의 부드러운 털가죽에 맞닿아있을 뿐이니까.
그럼에도 성진의 정신은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 열려있는 작은 통로와, 그곳을 스멀스멀 잠식하며 들어오는 검붉은 불꽃의 움직임을.
그것의 정체를 깨달은 성진은 잠시 숨을 들이켰다.
‘…게헤나의 불!’
영혼은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심지어 다른 차원의 여신까지도 지극히 두려워하는 지옥의 겁화.
‘저게 어떻게 여기까지?’
하지만 신기하게도, 의문을 가짐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답이 튀어나왔다.
‘아버지가 만들어 둔 경계를 내가 무너뜨렸기 때문이구나!’
성황의 오러가 물처럼 출렁거렸던 것은, 그 무형의 기운이 결계 같은 묘한 막에 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진이 그것을 계속해서 끌어당기는 통에 경계가 완전히 망가지고 만 것이다.
덕분에 막을 넘어온 게헤나의 겁화가, 그때부터 오러를 모조리 불사르며 통로를 순식간에 잠식해가는 것일 테고!
성진은 문득 깨달았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구나. 게헤나의 불을 완전히 막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거였어.’
아버지의 결계가 아무리 강한들 무슨 소용일까.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 궁지에 몰린 성진은 분명 이 통로의 오러를 한 번 정도는 억지로 끌어 써야 했을 텐데.
‘이대로라면 곧, 이 몸은 불타서 없어지겠구나.’
성진은 지독한 불꽃이 통로에 번져나가는 광경을 별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이성진…….]
그때 마왕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뭔가를 치열하게 갈등하는 듯, 깊은 고뇌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아마 아직 늦지는 않았어. 지금이라면 남은 오러로 게헤나의 불을 저지할 수 있어.]
‘음, 뭐…….’
성진이 미지근하게 대꾸하자, 마왕이 재차 그를 구슬렸다.
[어서. 지금이라면 아마, 네 아버지가 다시 손을 쓸 때까지 버텨낼 수 있을 거야.]
…아버지.
그에게로 생각이 이르자, 성진은 어쩐지 식어가던 가슴이 빠르게 술렁이는 것을 느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넌 이곳을 꽤 좋아하잖아?]
그래서일까, 마왕의 제안이 제법 솔깃하게 들려왔다.
그래, 어차피 언젠가는 도달할 결말이라고 해도.
‘굳이 지금 끝낼 필요는 없을지도 몰라. 어떻게 해도 바뀌는 것이 없는 걸 알지만, 그저 조금만 더 그것을 늦출 수 있다면…….’
마음을 정한 성진이 바로 의지를 일으켰다. 남은 성황의 오러를 의욕적으로 움직이며 조금씩 게헤나의 불을 통로로부터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파르르륵!
그러자 갑작스레 방해를 받은 겁화가, 이에 항의라도 하듯 거세게 몸부림친다.
[…….]
하지만 성진의 강한 의지를 이기지는 못하고, 결국은 속절없이 반대편으로 천천히 밀려나는 수밖에 없었다.
‘됐다!’
하지만 성진의 기세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영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로건?’
빛으로 감싸인 희끄무레한 형상. 하지만 성진은 어쩐지 그 영혼의 주인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근데 저놈이 지금 뭘 하는 거지?’
본래부터 신성력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을 것이 분명한 로건의 영혼.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 빛의 양상이 조금 다른 듯 여겨졌다.
그의 주위로 활활 타오르는 성화가, 주변을 밝히는 것과 동시에 영혼 속을 천천히 잠식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
신성력을 방출하다 못해 영혼을 쥐어짜내는, 그래서 종국에는 자신의 영혼까지 성화와 함께 불사르는 모습.
지금의 성진은, 로건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를 잘 알 수 있었다. 멍해져 있던 머리에 갑자기 찬물이 끼얹어지듯, 순식간에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저 미친놈이!’
기겁한 성진이 온 힘을 다해 통로의 오러를 도로 이쪽으로 끌어올렸다.
더는 앞뒤 잴 것도 없었다.
어서 로건의 바보 짓을 막아야 한다!
화르르륵!
오러가 통로를 빠져나가자, 게헤나의 불꽃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속도가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성진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게헤나의 겁화 따위, 여기로 따라오면 어떤가! 이대로 내 몸을 넘어서, 이 빌어먹을 악마종까지 모조리 활활 불살라 버리라지!
[…아아, 넌 이렇게 하는구나. 결국은 이런 식이 되어버리는 거야.]
잠시 침묵하며 바라보던 마왕 놈이, 어쩐지 슬픈 목소리로 탄식했다.
Chapter 57: Chapter 357
Chapter Text
357. 신성한 바람 (8)
“곧 도착합니다, 발타자르 님.”
부관 딤로스의 보고에 발타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 기사단의 총책임자이자 대륙 제일의 기사인 그는, 현재 여러 성기사단이 연합된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잘도 이 정도의 인원을 만들어냈군.’
금빛으로 선연히 빛나는 주신의 문양.
그 아래 은은한 은빛 갑주를 걸친 수백의 성기사들.
자주 보기 힘든 장관을 돌아보며, 발타자르는 다짜고짜 자신을 총사령관으로 지목한 아멜리아 황녀를 떠올렸다.
-일단 인퀴지터의 보고를 기다려야 해요. 성기사단의 출동 여부와 적절한 파견 규모는 오직 성회가 결정할 사항이오!
수년 만에 나타난 대형 악마종의 위협에도, 꼬장꼬장한 베니투스 추기경은 황녀 앞에서 길길이 날뛰었다.
-성기사단은 명실상부 델크로스 최고의 무력. 성회의 승인 없이 사사로이 움직일 수 있는 집단이 아니란 말이오!
-하지만 각하!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에도, 악마종에 의한 피해는 점점 늘어날 겁니다!
-그럴수록 일의 혼선을 빚게 만들어서는 곤란하지 않소! 정찰 결과를 기다리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소. 오히려 저하가 이리 관여할수록, 상황이 점점 복잡해지는 것을 왜 모른단 말이오!
-……!
-설령 성황 폐하시라 해도 이리 막무가내일 수는 없소! 아시겠소? 그것이 바로 절차이자 법이란 것이외다, 아멜리아 저하!
그러자 베니투스를 노려보는 황녀의 눈이 일순 서늘하게 번뜩였다. 평소 따뜻하고 다정하게 빛나던 눈이, 어떻게 순식간에 그리 돌변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각하가 좋아하시는 그 적법한 절차를 따르도록 하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멜리아 황녀는 악마종 대응에 관한 성법 조항 대신, 전시‧사변에 대응하는 제국법에 의거하여 황도 병력의 긴급 동원을 명했다.
그리고 평기사들을 황도 비상경계로 죄다 빼돌려버린 후, 남은 다섯 개의 성기사단을 예비 차출 병력으로 묶어버린 것.
어디 그뿐인가. 뒤죽박죽 섞여버린 성기사들의 명령 체계에 혼선이 빚어지지 않도록, 그 위에 누구도 항변할 수 없을 델크로스 최고의 무장, 발타자르를 떡하니 책임자로 앉혀버린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말장난이오! 차출이라니!?
-다섯 기사단장은 적법한 절차대로 성회의 승인을 기다리십시오. 그동안 우리 발타자르 경께서, 성기사단의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제국의 위협에 맞서실 겁니다.
-일부라니, 농담에도 정도가 있소! 이건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편법으로 빼내가는 것 아니오? 그동안 근위대와 친위대는 무엇을 하고?
-성황 폐하와 황도 신민들을 지켜야죠. 너무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니, 그런 말도 안 되는……!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성기사단으로만 이루어진 악마종 토벌 부대를, 신성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발타자르가 책임지고 이끄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아멜리아 황녀라…….’
발타자르의 눈이 깊어졌다.
대귀족인 지그스문트 백작가를 외가로 두고 있으나, 사생아인 탓에 전혀 가문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황녀.
변변한 세력이나 뒷배가 없어 황위 계승권에 닿아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황녀.
‘하지만 어쩌면…….’
오늘 그가 본 황녀의 모습은, 막무가내로 자신들을 밀어붙이곤 했던 젊은 날의 성황을 쏙 빼닮아 있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그녀는, 현재 로건 황자로 기울어져 있는 황위 계승 구도를 단숨에 뒤바꿀 새로운 기수로 부상할지도 모른다.
“발타자르 경.”
바로 그때, 발타자르를 재촉하는 차분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이들 토벌 부대에 유일하게 포함된 엑소시스트였다.
“악마종의 기운이 조금 심상치 않습니다. 아무래도 행군을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은 대규모 전투에 취약하다 알려진 데다, 그마저도 대부분이 멀리 외근을 나간 상황. 따라서 현재 병력 차출은, 다른 네 개의 기사단에서 주로 이루어진 실정이었다.
하지만 발타자르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저 여자, 아까까지는 인상이 조금 다르지 않았던가?
-엑소시스트?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도 차출 대상이었나?
-흐으흐으. 아닙니다, 발타자르 경. 전 어디까지나 마물 전담반의 소속으로 참여하는 겁니다.
처음 합류할 때만 해도, 저 여자는 어딘가 기분 나쁜 웃음을 헤죽헤죽 흘리고 있었다. 간혹 허공을 향해 작게 중얼거리기도 하는 꼴이,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영락없는 정신병자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한데 지금은 그녀의 인상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음침하게 얼굴을 뒤덮고 있던 머리카락은 뒤로 곱게 넘겨져 찰랑거리고,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던 피곤한 낯빛은 조금 창백하긴 해도 꽤나 단정해 보인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기척이 조금 변한 것 같기도…….
“발타자르 경.”
엑소시스트가 재차 그를 부르자,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발타자르가 화들짝 놀라 얼버무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네. 그래. 어서 서둘러야지.”
한데 발타자르가 막 부관에게 속도를 올릴 것을 명했을 때였다.
“……!”
화악-
엑소시스트의 눈에서 은빛의 광채가 번쩍였다 싶더니, 그녀가 갑자기 전열을 이탈하며 빠르게 앞으로 쏘아지기 시작했다.
“……!?”
“이봐! 갑자기 대열을 이탈하지 마라!”
깜짝 놀란 부관이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그런 그를 막아선 것은,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의 부관 프란시스였다.
“그냥 두셔도 됩니다, 딤로스 경. 샤론 경은 체계 없이 자유로이 움직이는 기사니까요. 성황 폐하의 명이십니다.”
“체계 없이 움직이다니, 그게 대체 무슨……?”
황궁 기사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딤로스가 멍청히 중얼거리는 동안, 발타자르는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엑소시스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발타자르가 놀란 것은 부관과는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저런 신묘한 오러 운용을? 저리도 천재적인 자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단 말인가?’
왜 내가 이제껏 저런 검재를 놓쳤지?
지금 당장이라도 저자를 제자로 받아야… 아니, 일단 레안드로스 경에게 허가를 받는 게 우선인가. 그런데 그치가 과연 저런 대단한 인재를 순순히 내게 넘겨줄지…….
하지만 발타자르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엑소시스트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력이 향한 방향으로부터 마치 폭풍과도 같은 오러가 터져 나왔던 것이다.
* * *
퍼어엉!
내부로부터 터져 나온 거대한 폭발.
그 거대한 힘은 악마종의 구체를 갈기갈기 찢어발긴 것도 모자라, 살점들을 모조리 아우르는 검은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살점들은 다시 중앙으로 뭉쳐들지 못한 채 바람을 따라 빙글빙글 흩날리는 중이었다.
화아악!
뒤이어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신성한 기운을 품고 있는, 은빛의 오러의 실체화로 이루어진 바람이.
“……!”
모두가 얼어붙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릴리움 별동대도. 발을 동동 구르며 황자들의 상황을 바라보던 상주기사들도.
“저 신성한 기운!”
“이곳에 주신의 은총이 함께하심인가!”
그런 그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은빛 바람에 감싸인 모레스 황자.
그는 커다란 늑대개를 끌어안은 채,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꽃씨라도 된 것처럼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옛 성인들이 보여줬던 기적의 한 장면인 양, 지극히 성스럽고도 장엄한 광경.
“아……!”
그 바람의 정체가 성황의 오러임을 인지해 놀란 것도 잠시.
로건은 꽤 멀쩡해 보이는 성진의 모습에 반색하며 아르쥬나를 아래로 내렸다.
“이성……!”
“야, 인마!”
그러고는 생각지도 못한 거센 호통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 정신 나간 놈아!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여기서 그대로 자살할 생각이었냐?”
“…뭐?”
“기껏 증원이 오고 있는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혼자서 신성력을 걸레 짜듯 쥐어짜고 있어? 성미가 급한 것도 정도가 있지!”
툭.
바닥을 디딘 성진이 미간을 찡그리며 주변의 기척을 감지했다.
악마종의 살점을 태우며 아직도 꺼지지 않고 있는 로건의 성화. 그리고 평소보다 부쩍 약해져 있는 녀석의 기척을.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
반면, 로건은 다른 의미로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을 타박하는 이성진의 눈에 제대로 초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눈이……!’
절로 지그스문트령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로건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성진, 대체 너야말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눈은 또 왜 그 꼴이고?”
“흠, 뭐.”
성진은 대충 대꾸하며 막스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하지만 통로에 남아있던 엄청난 양의 오러를 일시에 뿜어버린 탓일까. 늑대개의 무게가 사라지는 순간, 성진은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엇……!”
놀란 로건이 얼떨결에 그를 부축하려 팔을 내민다.
그러나-
“어어……!”
“어라?”
막상 성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덩달아 비틀거렸다. 따지고 보면 로건 역시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콰당! 쿵!
결국 둘은 너 나 할 것 없이 바닥에 주저앉는 꼴이 되고 말았다.
“…….”
모양 빠지게 이게 무슨 꼴이람.
“…네가 무슨 재주를 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회는 지금뿐인 것 같다.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야지.”
잠시 침묵하던 로건이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빠르게 소용돌이치던 악마종의 살점들이, 오러의 바람이 서서히 잦아듦에 따라 다시 뭉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야지. 그래야 하는데…….”
성진은 얼굴을 핥아오는 막스를 밀어내며 인상을 썼다.
게헤나의 불을 막고 있던 오러를 모조리 방출한 탓인가, 가슴에서 마치 불길이 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 탓이다.
‘…피하기에 난 이미 늦은 것 같기도 하고.’
게헤나의 불은 거의 통로 끝에 다다라 있다. 이대로라면 곧 온몸이 속절없이 불길에 휩싸이게 되리라는 걸 성진은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대로 악마종과 함께…….’
그렇게 속으로 꽤나 비장한 각오를 다지려는 찰나.
성진과 로건은 동시에 움찔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부터 그들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는 익숙한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
그 기척의 주인은 이내 가시거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까마귀처럼 새까만 머리카락과 창백한 얼굴. 그리고 은빛의 광채를 발하는 익숙한 은회색의 눈동자.
테르바키아의 잿빛 정복을 차려입은 엑소시스트가, 오러를 박차며 죽음의 땅 위로 빠르게 쏘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아바마마!’
어쩐지 안도한 로건은, 성진을 부축하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성력을 바닥까지 쥐어짜느라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적어도 눈이 멀어 있는 이 녀석보다는 상태가 나을 터.
“자, 일어나, 이성진. 남들 눈도 있는데, 제대로 일어서서 맞이해야지.”
저기 아버지가 오고 있어.
로건은 뒷말을 내뱉지 않았지만, 성진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그의 기세가 대번에 누그러졌으니까.
성진 역시 강한 안도감과 함께 슬그머니 웃음이 새어 나오던 차였다.
“하하하.”
“지금 뭘 좋다고 웃고 있어. 이렇게 엄청난 사고를 친 주제에.”
로건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아르쥬나로 지탱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성진을 타박했다.
“여기서 느끼기에도 아바마마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넌 후환이 두렵지도 않아?”
“어, 그래. 전혀 무섭지 않아.”
성진은 비식 입꼬리를 올리며 생각했다.
적어도 오늘만은, 딱밤을 사이좋게 나눠 맞을 동지가 있는 거 같으니까.
Chapter 58: Chapter 358
Chapter Text
358. 입단 (1)
통로를 막고 있던 성황의 오러가 완전히 사라진 후.
게헤나의 불씨들은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통로를 잠식하며 성진을 향해 밀려들었다.
그가 뒤늦게 스스로의 오러를 억지로 긁어모아 봤지만, 거의 고갈되다시피 한 오러는 거센 불길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화악!
오히려 오러에 불길이 옮겨붙으며, 온몸에 엄청난 작열감이 일었다.
“……!”
로건 또한 심상치 않은 열기를 느낀 모양이었다. 성황을 맞이하기 위해 한걸음 앞서 나가던 그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성진, 괜찮아? 왜 갑자기 너한테서 열이 나는 것 같지?”
“어, 뭐…….”
그런 게 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아. 아버지가 오셨으니까.
“부축해 줄까?”
“됐어. 모양 빠지게 무슨.”
성진은 로건에게 휘휘 손을 저어 보인 후, 고열로 빙빙 돌기 시작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버지라면 이번에도 멀쩡하게 고쳐주실 거야. 일단 딱밤 한 대는 거하게 맞을 각오 해야겠지만.’
오늘은 내가 생각해도 좀 아슬아슬했던 감이 있지.
달리 뾰족한 수가 없긴 했지만, 아마 아버지는 화가 많이 났을 거다. 그 양반이라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래도 아버지잖아? 아마 금방 화를 푸시지 않겠어?’
한데 성진이 막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서, 성황의 기척이 거의 지척으로 다가왔을 때였다.
쿵!
조금 어지럽다 싶더니 뜬금없이 뒤통수로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성진은 어리둥절해하며 생각했다. 역시 아버지가 화가 나셨나 보다. 아니, 근데 어째서 이마가 아니라…….
“이성진!”
그를 부르는 로건의 목소리가 이내 저만치 멀어졌다.
* * *
수년 만에 황도 인근에 출현한 대형 악마종, 그리고 성공적인 토벌.
그 엄청난 소문은 빠른 속도로 황도 전역에 퍼져 나갔다.
“놀랍게도 인명 피해가 거의 없다는군! 참으로 경이로운 주신의 보살핌일세!”
“무려 대륙 제일의 기사, 발타자르 님이 토벌 부대를 이끄셨다지?”
“아아, 그럼 걱정 없겠군. 아마 지금쯤이면 그분께서 사악한 악마종에게 제대로 쓴맛을 보여 줬겠지.”
피해를 체감하지 못하는 재난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신선하고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곧 황도의 모든 이들이 눈만 마주치면 이 사건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집채만 했다지 아마?”
“아니, 집채가 다 뭔가! 듣기로는 산만 한 놈이었다고 하던데?”
그리고 그중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활약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놈을 토벌한 것이 실은 모레스 황자님이셨다는군! 때마침 그분께서 바서스트령에 계셨는데, 신민들을 지키기 위해 홀로 놈과 맞서셨대.”
“뭐? 예끼, 이 사람이 헛소리하기는! 그게 말이나 되는가?”
“아니, 정말이야!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모레스 황자님께서 성황가의 신성한 기운으로 악마종을 단숨에 갈가리 찢어버리셨다던데?”
허황되다 여겼던 소문은 점차 신빙성 있는 근거를 갖추기 시작했다. 토벌을 위해 떠났던 발타자르의 부대가, 수월하게 정화를 끝내고는 금방 황도로 복귀한 까닭이었다.
분해되고 또 분해되어, 거의 마기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악마종.
그런 놈을 정화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저 거대한 결계를 친 뒤, 인원수로 밀어붙여 신성력을 쏟아붓기만 하면 되는 일.
덕분에 토벌 부대의 피해는 전무했다. 오직 성황가의 두 황자만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본궁까지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을 뿐.
그 무렵이 되어, 모호하던 소문에도 조금씩 살이 붙어가기 시작했다.
“세상에, 모레스 황자님께서 [바람]을 타고서 악마종을 향해 용맹하게 돌진하셨다지.”
“바람? 그게 뭔데?”
“주신의 은총을 받은 신수라고 하던데?”
“신수는 또 뭐고?”
“아, 이 사람이! 자네 성 바스티안의 새로운 경전 동화를 아직도 보지 못했나?”
곧 모레스 황자와 신수 [바람]에 대한 소문이 폭풍처럼 황도를 휩쓸기 시작했다. 막 발간된 경전 동화에 힘입어, 엄청난 속도로 확대 및 재생산된 덕분이다.
그래서 그날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는, 모레스 황자가 성 바스티안의 사도라는 소문이 황도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성 바스티안의 사도라니!”
그 엄청난 소문은 자연히 성회의 구성원들에게도 흘러들어 갔다.
제대로 된 ‘절차’를 거치기 위해, 일이 모두 마무리가 된 이후에야 겨우 황궁에 소집된 사람들이었다.
휘하의 성기사들을 모두 차출 보내고, 명목상 성회의 승인을 기다리던 다섯 성기사단장 역시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대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냐! 인퀴지터! 조사를 나간 인퀴지터는 아직인가!?”
베니투스 추기경은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의 신임 단장인 패리스 경을 죽어라 닦달하고 있었다. 주신의 뜻을 왜곡하는 이단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구는 자였으니까.
“이런 터무니없는 말이 나도는 경위를 알아야 할 게 아닌가! 설마 3황자가 직접 그런 불온한 소리를 입에 담았다던가?”
“그것은 아닌 듯하지만…….”
“아닌 듯해? 이보게! 아직도 그런 것 하나 파악하지 못하다니, 자네는 단장이라면서 대체 뭐 하고 있는 게야!”
“진정하십시오, 추기경 각하. 2차로 인퀴지터를 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두 분 황자님은 물론, 현장에 있던 대부분의 기사들이 지금 치료를 받고 있는 실정 아닙니까?”
증원 부대가 막 현장에 당도했을 때, 상황은 이미 대부분 끝난 다음이었다.
발타자르는 그라니우스식 결계를 치기에 앞서, 먼저 두 황자를 포함한 현장 전원을 급히 황궁으로 이송했다.
신성력을 쥐어짜던 릴리움 별동대는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고, 진주궁의 상주기사들 또한 약하게나마 전원 침식의 조짐을 보였으니까.
“그들의 휴식을 감히 방해하지 말라는 성황 폐하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에잉! 이런 쓸모없는 것들!”
그 와중에 침묵을 지키던 마이어 추기경은, 이마를 문지르며 조금 걱정스러운 낯빛을 했다.
“좋지 않네. 좋지 않아…….”
“대형 1급 악마종을 피해 없이 퇴치했습니다. 성황가와 델크로스의 이름을 대륙에 드높일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요?”
웨스터 대주교의 물음에, 마이어 추기경은 착잡한 표정을 했다.
“모르겠나? 주신의 제국이 아닌 성황가 자체가 신성시되는 것. 주신을 대신하여 성황가가 신민들의 신봉을 받는 것. 그것이 지금의 폐하께서 가장 경계하시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각하.”
웨스커는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황자님들의 활약이 이처럼 명확한 것을요. 그러니 저 베니투스 추기경도 평소처럼 함부로 모레스 저하를 폄하하지 못하는 거겠죠. 그 어린 황자님들이, 다섯 성기사단 모두가 몰려가도 힘들었을 일을 해내셨습니다.”
“하나…….”
“신민들에게 있어서 성황가는 이미 주신의 힘 그 자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성황가를 향한 칭송은 결코 힘의 주체이신 주신에 대한 경애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래도 성 바스티안의 사도라니, 그건 좀 너무 나간 것 아닌가.
여전히 걱정의 기색이 역력한 마이어 추기경을 향해, 웨스커 대주교가 심드렁한 얼굴로 덧붙였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사도로 인정받은 시슬레 님도 있지 않습니까?”
“시슬레 님과는 경우가 많이 다르네. 그분께서는 이미 오랜 봉사활동으로 신민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성녀가 아니셨나.”
하지만 모레스 황자는 어떠한가.
“저하는 최근에야 두각을 나타내신 데다, 심지어 신성력을 조금도 타고나지 못하셨어. 그런데도 지금 그분이 신성한 은총을 일으켜 악마종을 물리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걸세! 그것이 성황가를 향한 과도한 신격화가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게다가 모레스 황자는 성황가의 다른 황자‧황녀들과는 조금 [다르]다.
고위 성직자들은 이미 대부분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 이상한 황자로부터 때때로 흘러나오곤 하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삿된 기운을.
만일 그가 성황이 아끼는 황자가 아니었다면, 베니투스 추기경이 진작 이단 재판부로 연행해 심문하고도 남았을 터.
“불경한! 신성력 하나 없는 자가, 감히 주신의 은총을 행사했다는 소문이 돌다니요! 이것은 이단!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단이란 말이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베니투스 추기경이 분노로 펄펄 날뛰었다.
“이 세상에서 주신의 도구를 자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고하신 성황 폐하, 그리고 주신을 섬기는 성직자들과 성기사들뿐이오! 모레스 황자는 절대 그럴 자격이 없소! 아시겠소이까!?”
성회에 참석한 모두가 그런 그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던 차였다.
‘정말 시끄럽군. 저치는 또 기운이 다 빠질 때까지 저 난리를 치겠구나.’
신성력이 강한 자이니 꽤 오래 날뛰겠지.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하게 사후 대책을 위한 서류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오늘의 성회가 이런 결론으로 끝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모레스 황자님은 명실상부한 주신의 도구이시오. 그분께서는 머지않아 성기사가 되실 테니.”
거친 쇠를 긁어내는 듯 걸걸한 목소리에, 성회의 모두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마른 고목나무 같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레안드로스,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의 단장.
모든 엑소시스트들을 이끄는 음침한 사내가 다시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이 레안드로스가, 명예를 걸고 모레스 황자님을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의 일원으로 추대할 테니까.”
“……?”
“아마도 그분은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으실 테지.”
일순 성회 전체에 침묵이 흘렀다.
“…모레스 황자님을?”
“그게, 말이 되오? 그분은 신성력도 없지 않소?”
“신성력 없는 성기사라니? 그게 무슨…….”
하지만 번져가는 동요에도, 레안드로스 경은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모두들 잊고 있는 모양이오만,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직 둘. 바로 악마종을 향한 강한 적대감과 그에 상응하는 강한 멸악의 힘이오.”
보통 신성력을 가진 자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치유와 축복, 그리고 멸악의 힘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중 엑소시즘을 주 과업으로 삼는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의 일원은 대부분 멸악의 능력에 특화된 경우가 많았고.
하지만 이 [멸악]의 힘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신성력의 한 성질이기에, 신성력을 가진 자들이 주로 입단하는 것뿐. 원칙적으로는 악마만 잘 때려잡을 수 있다면 누구든 자격 요건에 부합했다.
여기에는 전례도 있었다. 엑소시스트들이 유지를 잇고자 하는 지혜의 성인, 테르바키아. 그 역시 본래는 신성력이 전무했던 자라 전해진다.
하지만 성 테르바키아는 양손에 강력한 성유물을 들고서, 그 시절 누구보다도 많은 악마들을 때려잡았다. 그래서 후대에 이르러 성인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레안드로스 경 또한 마찬가지.
악마들의 악몽이라 불릴 정도로 강한 멸악의 힘을 가졌지만, 그 또한 다섯 성기사단의 단장들 중 유일하게 신성력이 전무한 인물이었다.
“하, 하지만…….”
충격으로 멍청하게 서 있던 베니투스 추기경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그자, 아니 3황자는 그럴 자격이 없…….”
“모레스 황자님의 무력은 이미 황궁의 평기사를 넘어섰다 들었소. 어디 그뿐인가? 지금까지 그분이 이룬 업적들을 생각해 보면, 악마종에 대항하는 [멸악]의 능력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지.”
“……!”
감히 그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자는 없으리라.
모레스 황자는 황도의 마물 사태를 해결한 장본인. 게다가 얼마 전에는 울프 기사단을 이끌고서 수백 년 만에 나타난 마계수를 성공적으로 토벌하지 않았나.
게다가 오늘의 활약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어지간한 성기사단 단장도 평생에 이루기 힘든 업적들이 아닌가!
“또한 저하께서 사용하시는 애검은, 바로 성유물의 격을 가진 그 호두까기요.”
“…….”
“자, 다들 대답해 보시오. 어디 그분의 자격에 조금이라도 부족한 점이 있소?”
침묵에 휩싸인 성회의 구성원들을 돌아보며, 레인드로스 경이 무표정한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하니, 일이 모두 정리되는 대로, 이 레안드로스가 직접 성황 폐하께 말씀 올리겠소이다.”
* * *
그렇게 모두가 3황자를 두고 열을 올리는 동안, 정작 성진의 정신은 현실이 아닌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었다.
[음. 아버지가 고쳐주신 것 같기는 한데…….]
성진은 아리송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죽은 것 같지는 않지?
그래도 어째서인지 지금은 반쯤 몸을 떠난 상태가 되어, 영혼의 눈으로 스스로를 관조하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몸과 연결된 긴 통로를.
‘저건 아버지의 오러!’
곧 희게 빛나는 성황 특유의 오러가, 통로로부터 게헤나의 불을 서서히 밀어내는 것이 보였다.
‘역시 아버지라면 가능할 거라 생각했어!’
내심 안도한 성진이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성진과 함께 그것을 지켜보는 다른 존재도 있었다.
[이성진. 저기 게헤나의 불이 있어.]
언제나처럼 작고 하찮기만 한 붉은 영혼.
성진은 물끄러미 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저 길게 이어진 길은 차원을 넘어가는 지름길이겠지?]
그제야 성진은 마왕이 아까부터 뭘 그리 고민하는 눈치였는지 깨달았다.
검붉은 화염으로 뒤덮인 기나긴 통로, 그곳은 바로 게헤나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시구르트 34지구와 완전히 융합된 마계. 성진과 마왕이 떠나왔던 그 차원으로.
[그런데 이성진.]
성진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데, 마왕이 불안한 듯 다시 물어왔다.
[내가 만약 게헤나로 되돌아가게 되면, 그때도 넌 날 지금처럼 대해줄까?]
Chapter 59: Chapter 359
Chapter Text
359. 입단 (2)
성진은 붉게 점멸하는 마왕의 영혼을 말없이 응시했다.
‘…마왕이 돌아간다? 게헤나로?’
솔직히 말하면 꽤나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일말의 가능성조차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성진은 이미 자신의 몸에 게헤나와 연결된 통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스스로가 통로를 통해 직접 그곳으로 튕겨나간 적도 있었지.
하면 마왕의 영혼 역시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어쩐지 앞으로도 녀석이 계속 이곳에 있을 거라고 근거 없이 믿고 있었단 말이야.’
마왕이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놈은 지금까지 조금씩, 꾸준하게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으니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감각은 물론 모든 힘과 격을 잃고, 이제는 놈의 이름마저도 흐지부지 없어질 지경.
그 충격으로 마왕이 주책없이 훌쩍거린 것이 지금까지 한두 번이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성진은 쉽게 확신할 수 없었다.
게헤나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이전의 모습과 힘을 되찾는 것. 그것이 진정 마왕 자신을 되찾는 길이라고 생각해도 좋은 것일까?
[게헤나로 돌아가면, 나는 이전보다 더 강한 마왕이 될 수도 있어.]
[그래?]
[응. 시구르트 34지구와 게헤나는 완전히 융합이 끝났으니까. 이제 내가 마왕의 격을 되찾으면, 아마도 저 두 차원은 이전보다 더욱 새롭고 견고한 하나의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을 거야.]
[흠.]
성진이 별 감흥 없이 대꾸하자, 조바심을 내듯 마왕의 영혼이 불규칙하게 일렁거렸다.
[이제 한동안은 다른 차원을 침범하지도 않아. 나도 내 차원의 내실을 먼저 다져야 할 테니까. 물론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또 다른 도약을 도모해야 하는 날이 오겠지만…. 아! 물론 네가 있는 델크로스를 침범하는 일만은 절대 없을 거야!]
[…….]
[이곳은 내가 당장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고위 차원이잖아? 거기다 괴물 같은 네 아버지와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고 상상하기만 해도… 영혼에도 없는 오금이 다 저려올 지경이라고.]
그래. 우리 아버지에 대해 잘 아는 놈이니까, 감히 그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라 기대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성진은 아까부터 묘한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오랜 시간 놈과 부대끼며 지낸 탓일까. 로건처럼 진실을 간파하는 능력은 없었지만, 성진은 어째서인지 마왕 놈이 정말 말하고 싶은 화제를 애써 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뭐가 그렇게 무섭냐, 마왕아?]
그냥 통로를 타고 돌아가서, 다시 마왕이 되면 끝날 일 아닌가.
그 과정 중 어디에, 네가 두려움을 느낄 만한 게 있어?
[……!]
그런데 그 지적이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마왕이 움찔 놀라며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으니까.
그렇게 잠시 대화의 단절이 있었다. 성진과 마왕은 각자의 생각에 잠겨, 통로에서 힘없이 밀려나가는 검붉은 겁화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즈음에 이르러, 성진은 성황의 오러가 불꽃을 밀어내는 힘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뭐지?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성진이 의아해하는데, 이윽고 마왕 놈이 뭔가를 결심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성진, 그거 알아?]
[음?]
[처음 만났을 때, 너는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미친놈이었어. 타협이나 회유는 애초에 불가능한 데다, 너보다 훨씬 강한 상대를 향해 겁도 없이 적의를 불태웠지. 세상에 뭐 저런 정신 나간 놈이 다 있나 싶었다고.]
닥쳐라, 마왕 놈아!
결국은 내 주먹에 만신창이가 된 주제에, 너는 이 상황이 되어서까지 사람의 인격을 비방하고 싶냐?
[그런데 이 세계로 넘어오고 나서 불가항력으로 함께 지내다 보니, 너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알게 되더라.]
붉은 영혼은 오랜 추억을 회상하듯 아련한 빛을 뿜어냈다.
[넌 생각보다 화를 잘 내지 않았어.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되는데도 말이야. 뭐든 네 좋을 대로 밀어붙이기만 하는 사이코패스일 거라 생각했는데, 몇몇 특별한 경우만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좋게좋게 넘어가는 호구 같은 면도 있지 않겠어?]
…뭐? 호구?
성진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대꾸할 마음이 사라졌다.
지금 이게 누구더러 호구래? 나만큼 제대로 손익과 실리를 따지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특히나 널 위협하지 못하는 약한 것들에는 무한한 아량을 베풀었지. 네 전담시녀가 쓸개즙을 먹이는 것도, 그 욕쟁이 기사가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도 내버려 뒀으니까. 어디 그뿐이야? 간혹 네 흉을 보는 건방진 상주기사들을 향해서도 인상 한번 구긴 적 없었어.]
[…그거야 뭐.]
딱히 표현의 자유 같은, 그 녀석들의 기본권을 존중하겠다는 마음가짐은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행동이 성진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지.
딱히 신경 쓸 가치가 없잖아? 걷는 중 발에 툭툭 채여 나가는 돌멩이들을, 조금 성가시다는 이유로 일일이 청소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래서 깨닫게 되었지. 너의 적의는 기본적으로 네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들, 그리고 너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강한 것들에 한해서만 작동한다는 것을.]
거기까지 말한 마왕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금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럼, 나는 어떨까?]
뾰오옹.
붉은 영혼이 둥실 떠오르더니 성진을 마주보며 흐릿하게 깜박거렸다.
[이성진. 너는 나를 죽이기 위해 헌터가 됐다고 했잖아. 그리고 끝끝내 그 목적을 이루고 말았지.]
그래. 그랬었다.
동료들은 물론 스스로의 몸까지 완전히 불살라가며, 마침내 마왕 놈을 완전히 끝장냈어.
[내 영혼을 어쩌지 못하고 내버려 둔 것도, 사실은 날 어떻게 죽여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잖아? 그런데 내가 만약 힘을 되찾아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잠시 말끝을 흐린 작은 영혼이, 불안감을 반영하듯 불규칙적인 빛을 내뿜었다.
[네 사람들을 해친 적 있고, 더는 네가 아량을 베풀 정도로 약하지도 않은 나는… 그런 나는 네게 있어서 어떤 존재가 되는 거지?]
[…….]
[그때도 네가 지금처럼 날 대해줄까? 아니, 날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있어? 또다시 모든 것을 바쳐가며 날 죽여 버리겠다고 한다면, 나는…….]
성진은 그 물음에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힘을 되찾은 마왕 놈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이런 의문은 들었다.
‘마왕 놈은 왜 굳이 이런 걸 묻는 거지? 설마 힘을 되찾는 데 내 허락을 구하는 건가?’
대체 왜? 그저 내가 무서운 거라면, 그냥 저 멀리 도망가 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이제 델크로스에서 모레스로 살기로 결심한 성진은, 전처럼 모든 것을 버려가며 놈을 쫓지 못할 텐데.
그러다가 문득 성진은, 게헤나의 불꽃에 잠식되어 가던 절체절명의 순간을 떠올렸다.
-이성진. 아마 아직 늦지는 않았어. 지금이라면 남은 오러로 게헤나의 불을 저지할 수 있어.
그때, 마왕 놈이 치열하게 갈등하던 이유를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마왕이 게헤나로 되돌아가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으리라.
성진이 게헤나의 불길에 휩싸여 죽어버리고, 그래서 통로가 게헤나의 불에 완전히 지배당하는 것.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설령 통로의 존재를 알았더라도 마왕 놈이 돌아갈 길은 요원했겠지.
아무리 아버지의 결계를 두르고 있다고 해도, 신성력이 가득 배어있는 오러를 뚫고서, 그 긴 통로를 넘어갈 수는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결국 마왕 놈은 게헤나로 돌아가 힘을 되찾는 대신, 성진을 먼저 살리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놈이 부모님의 원수라는 사실을 절대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놈이 자신을 위해 애써줬다는 사실 또한 변하지 않는다. 받은 호의를 그대로 돌려주는 것은 성진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말 간절히 돌아가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와 이런 대화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야.’
마왕의 진짜 속내를 짐작할 단서는 충분했다.
놈이 직접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넌 이곳을 꽤 좋아하잖아?
아마 놈은 그때 성진의 생각을 대변해 줬을 뿐이라고 여기겠지.
하지만 내심은 마왕 놈 역시 이곳을 무척 좋아하는 거다.
곰고기 스테이크가 있고, 맛있는 여러 요리들이 있는 곳. 얼뜨기라고 타박할 브루노 단장이 있고, 그 외 시끌벅적한 인간관계로 가득한 곳.
이곳을 쉽게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아마 성진 혼자만의 것은 아니리라.
그래서 성진은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제안할 수 있었다.
[그냥 가지 마라, 마왕아.]
[…어?]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마왕의 영혼이 당황한 듯 깜박거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성진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내가 살아있는 한 통로는 어차피 계속 남아있을 거고, 언젠가 한번은 다시 열릴 일이 있겠지. 넌 언제든 게헤나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야.]
그래. 길은 조만간 다시 열릴 거다.
어째서인지 성진은 그런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니 서둘러서 갈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저 너머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을 텐데. 게헤나의 불이 지구와 게헤나의 모든 것을 불살라 버렸을 거 아냐.]
[…그건 그런데…….]
[그렇다면 어차피 돌아가 봐야 다 부질없는 짓이 아닐까. 너, 거기 가서 혼자 뭐 하려고?]
[아니, 하지만 이성진. 전에도 말했다시피, 융합한 두 세계가 가진 엄청난 잠재력은…….]
[그러면 뭐 하냐. 거기에는 곰고기 스테이크도 없는데.]
[……!]
내면의 갈등을 나타내듯 강하게 점멸하는 마왕을 향해, 성진이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리며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네가 없으면 나도 꽤 불편한 점이 많다고.]
[응?]
의외의 말이었는지 마왕이 다급한 빛을 흩뿌리며 성진에게 물었다.
[내가… 내가 너에게 필요해?]
[그래. 당연하지. 넌 영안을 가지고 있고, 거짓말 탐지도 가능하고, 황도 밖에서는 꽤 멀리까지 정찰하는 것도 가능하잖아?]
거기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꽤 똑똑하기도 하지. 마왕답게 아는 것도 많고.
[게다가 생각해 봐라, 마왕아. 네가 내 옆에 붙어 있어야, 만약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내 길동무가 되어 주지 않겠어?]
[어……?]
[내가 죽으면 너도 같이 죽는 거야. 설마 내가 너만 살려두고서 순순히 갈 것 같아?]
[……!]
마왕은 잠시 얼이 빠진 듯 깜박임을 멈췄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머물고 있던 공간에도 서서히 변화가 생겨났다.
게헤나의 겁화가 뿜어내던 불길한 빛이 저만치 밀려나고, 사위가 눈부시게 흰빛으로 뒤덮여 나간다.
성황의 오러가 어느새 통로의 절반가량을 수복한 것이다.
‘생각보다 느려. 아버지, 뭐 하고 계신 거지? 이번에는 단번에 밀어내지 않으실 셈인가?’
성진이 주변을 둘러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에휴…….]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마왕 놈이, 곧 어이없다는 빙그르르 성진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게 뭐야? 그게 뭔데? 다른 사람을 상대로는 잘만 협상을 하는 놈이, 나한테 하는 제안은 대체 왜 그 모양이야?]
뭐? 왜? 뭐?
여기에 협상의 여지가 있냐? 네놈한테 곰고기 스테이크 말고 뭐가 더 필요한데?
성진이 뻔뻔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조만간에 이곳을 나가, 눈을 뜨게 될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으니까.
[…그래. 어쨌든 날 당장 끝장낼 생각은 없다는 거구나.]
잠시 주저하던 마왕은 곧 포옥 한숨을 휘며 성진의 손아귀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곁에서 쫓아내지도 않는다는 거고. 그래도 이왕이면 말을 좀 곱게 해 줄 수는 없는 거냐, 이 매정한 놈아?]
하지만 그렇게 한탄하는 놈의 목소리에는 미약하게나마 안도감이 어려 있었다.
이놈은 그게 뭐가 그렇게 마음이 놓이는 걸까. 늘 함께 부대끼면서 어지간한 건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은 놈이다.
[훌쩍. 그래도 내가 갈 때는, 너도 길동무가 되어 준다는 말이지? 그지, 이성진?]
[시끄러워. 이제 그만 좀 징징거려.]
[훌쩍. 훌쩍. 이성진, 이 멍청아.]
성진은 더는 대꾸하지 않고는 마왕의 영혼을 감싸 쥐었다.
그때-
-모레스.
누군가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부름을 기쁜 마음으로 반기며, 성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Chapter 60: Chapter 360
Chapter Text
360. 입단 (3)
깜박.
처음 눈을 떴을 때 성진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우아하게 늘어져 있는 낯선 캐노피였다.
‘여기가 어디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그 의문에 답하듯 옆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무실 옆에 마련된 임시 치료실이다.”
“…아버지?”
“치료와 정무를 자주 병행해야 할 것 같아 취한 조치이니,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도록 해라.”
성황을 발견한 성진은 반가움과 당혹감을 동시에 느꼈다.
역시 아버지가 바로 손을 써 주셨구나! 어쩐지 눈이 멀쩡하더라니.
‘그런데 치료가 끝났으면 끝난 거지, 여기서 무슨 치료를 더 병행한다는 거야?’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곁에 있었는데, 내가 왜 이 양반의 기척을 금방 알아채지 못했지?’
한데 성진이 몸을 일으키려고 꿈틀거리자, 성황이 그의 이마를 꾹 누르며 타일렀다.
“가만히 누워 있거라, 모레스.”
“네? 하지만…….”
“네 상태는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다. 아직 고열이 남아 있지 않느냐.”
그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평소와 다른 묘한 탈력감이 느껴졌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성황의 강력한 신성력을 쐬면 보통은 몸 상태가 대번에 말끔해지곤 했는데, 어째서 아직도 이런 감각이 남아 있는 걸까.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화아악-
재차 쏟아져 내리는 신성력을 만끽하던 성진은 문득 번쩍 정신이 들었다. 엉망진창이었던 아까의 상황이 서서히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형 악마종에게 대책 없이 달려들었다가 놈의 살점에 속절없이 둘러싸였던 일.
또 자신을 구하려 달려든 로건을 말리겠답시고, 게헤나의 불을 왕창 끌어와 오히려 몸까지 불태울 뻔한…….
억!
‘큰일 났다! 오늘은 정말 사고 한번 제대로 쳤는데!’
이마에서 삐질삐질 식은땀이 흘렀다.
이게 제 발 저려 긴장으로 흐르는 땀인지, 아니면 고열이 내리면서 일어나는 생리적 현상인지도 잘 모를 지경.
어쨌든 성황은 후자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성진의 이마에서 손을 뗀 그는, 삐뚤어진 침구를 끌어올려 주며 말했다.
“누워 있거라. 잠시 다른 아이들을 보고 오마.”
…다른 아이들?
그제야 성진은, 방 안에 있는 것이 그들 두 사람뿐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가슴께를 덮고 있는 아름다운 장밋빛의 물결. 그건 분명 침상 옆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는 아멜리아의 머리카락이다.
“……?”
누님이 왜 여기서 자고 있지?
성진이 당황하는 사이, 성황은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아멜리아를 안아 올렸다. 그러더니 성진의 바로 옆에 그녀를 편히 누이는 게 아닌가.
‘왜 굳이 여기에?’
워낙 침상이 큰 덕에 딱히 불편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있어도 괜찮은 건가? 저들이 침대 밑 괴물이 무서워 손을 꼭 잡고 잠을 청하는 어린애들도 아닌데.
“아멜리아는 분명 일어나자마자 너를 찾을 테지.”
이번에도 묻지 않았는데 성황이 먼저 답을 주었다.
“…….”
조금 숙연해진 성진이 고개를 돌려 곁에 누운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새삼 그녀의 찌푸려진 미간과 두 뺨에 선명한 눈물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누님. 나 때문에 울었구나.’
성진이 가슴을 내리누르는 죄책감 속에 그녀의 말간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성황이 이번에는 침상 반대편으로 돌아가 작은 성녀를 안아 들었다.
“시슬레…….”
그래, 아멜리아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꼬맹이 시슬레가 똑같은 자세로 엎드려 있었으니까.
잠들기 직전까지 신성력을 쏟고 있었는지, 그 조막만 한 손으로 성진의 소매를 꼭 쥔 채였다.
성황은 이번에도 시슬레를 성진의 곁에 누였다. 그 탓에 성진은 졸지에 두 황녀 사이에 끼여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가 되었다.
“어…….”
한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침상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긴 소파에, 이번에는 로건과 마사인 경이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게 아닌가!
이쯤 되니 죄책감과 더불어 스멀스멀 불길한 예감이 솟아올랐다.
뭐지? 내가 왜 이들을 진작 기감으로 느끼지 못했지?
“아버지.”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성황을 불렀지만,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이번에는 소파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기분 탓일까, 어쩐지 대단히 무거워 보이는 발걸음이다.
그렇게 로건과 마사인 경까지 차례로 소파에 반듯하게 누인 다음에야, 그는 겨우 성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옆을 지키겠다고 다들 고집들을 부리기에, 그냥 그리하라 일렀느니라.”
“어…….”
“오히려 잘됐다 싶기도 하더구나. 그래야 내가 너희 모두를 동시에 봐줄 수 있지 않겠느냐?”
마치 성진의 곁을 오래 떠날 수 없다는 소리로 들린다.
그에 성진은 아까 지나가듯 들었던 말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치료와 정무를 자주 병행해야 할 것 같아 취한 조치이니,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도록 해라.
설마?
성진에게 그의 곁에서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하는 뭔가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인가?
“아버지, 감각이… 제 감각이 조금 이상한 것 같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이상을 털어놓자, 성황이 잠시 성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제게 정확히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래.”
순순히 대답한 성황은,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표정으로 설명했다.
“내 오러가 너의 오러와 감각을 묶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오러와, 감각을요?”
그게 무슨 말이지?
어리둥절하고 있자니, 성황이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장황한 설명보다는 몸소 겪어보는 것이 좋을 테지. 잠시 풀어줄 테니, 어디 한번 자의로 오러를 움직여 보겠느냐?”
후욱-
그 말과 함께 몸을 내리누르고 있던 작은 압력이 사라진다.
“……!”
성진은 그제야 성황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은 성황의 오러가 마치 공기처럼 가득 들어찬 공간이었다.
실체화된 오러가 방 안을 가득 채우다 못해 성진의 오러가 흐르는 길을 잠식하고, 종국에는 그의 호흡과 감각마저 앗아가고 있었던 거다.
지금까지 그 흐름에 조금의 빈틈도 없었기에, 마치 그것이 성진 자신의 오러라도 된 양 아무런 이상도 느끼지 못한 것.
‘대체 왜 그런 일을?’
하지만 성진은 곧 그 이유를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었다.
단전에서부터 스스로 회전을 시작하던 오러층이, 이내 불타는 듯 뜨거워지기 시작했으니까.
“……?!”
그것은 이전까지 성진이 느끼던 오러와는 사뭇 달랐다.
물처럼 부드럽게 흐르던 오러가, 마치 용암으로 변하기라도 한 듯 닿아오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있다. 홧홧한 작열감과 함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구쳤다.
‘이건… 설마 게헤나의 불?’
당황한 성진은 우선 급한 대로 오러의 흐름을 컨트롤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이상하게 오러를 다스리려 하면 할수록, 속에서 치솟는 불길은 더욱 거세게 날뛰려 들었다. 오러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며, 타는 듯한 통증 역시 점점 심해져만 간다.
그렇게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자니-
후욱-
시원한 바람이 몰아쳐 순식간에 몸 안의 불길을 단전에 가두었다.
성황의 오러였다.
동시에 머리 위로도 재차 환한 신성력이 쏟아져 내린다.
“…….”
순식간에 통증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성진은 낭패한 얼굴로 성황을 올려다보았다.
‘틀림없다. 온도가 꽤 떨어지긴 했지만, 그건 분명 게헤나에서 넘어 온 겁화였어.’
아까 아버지가 통로로 불을 다 밀어낸 것 아니었나? 왜 그것이 아직 몸 안에 남아 있지?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리라. 지금 그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든, 그것은 분명 성진의 자업자득이라는 것.
성진은 성황의 눈치를 보며 재빨리 자아비판을 시전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버지. 전에 분명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셨는데, 제가 예감만을 믿고 너무 성급하게 행동했습니다.”
“…….”
“아무래도 오러를 너무 당겨쓰는 바람에, 아버지가 말씀하신 불이 기어이 이곳으로 넘어 온 모양입니다. 제가 절대 이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횡설수설 변명을 하고 있는데, 성황의 손이 천천히 성진을 향해 다가온다.
하지만 이번에야 말로 딱밤이 날아오리라는 예상과 달리-
쓱쓱.
성황은 마치 위로하듯 성진의 머리를 한차례 가볍게 쓰다듬었을 뿐이다.
“너는 그저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서 델크로스를 구하려 했느니라.”
“아니, 전 그냥…….”
“그리고 그로 인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지. 정작 오러를 마음대로 쓰지 못해 상심한 것은 너일 텐데, 스스로를 돌보기는커녕 어찌 다른 이를 먼저 위로하려 애쓰느냐.”
“……!”
성황의 지적에 성진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상심해? 내가?
‘아냐.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분명 해결할 방안이 있으실 거다. 아버지잖아?’
성진은 성황을 믿었고, 자신의 예감 역시 믿고 있었다.
‘내 오러는 돌아와. 나는 그걸 알 수 있어.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 분명 다시 전처럼 오러를 쓸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강한 예감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밀려드는 것은 생각보다 커다란 상실감이었다.
마치 열심히 질주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목표가 사라져 버린 기분. 잘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속절없이 빼앗긴 기분.
성진은 새삼스럽게 자신이 얼마나 오러 연공 수련을 좋아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저는…….”
생소한 기분에 젖어 멍하니 중얼거리는데, 성황이 잠시 그런 성진에게 시선을 주더니 말을 이었다
“너도 내심은 이러한 결과에 이르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게다. 그러니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그리도 최대한 많은 것들을 익히려 든 것이겠지.”
그래.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할 정도로 막무가내로 군 것 같긴 했다. 악마종의 옆에서 로건을 재촉해가며 태평하게 오러 활용법이나 배우고 있었다니.
하지만 그때, 성진은 분명 알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한동안 기회가 없으리라는 걸.
“그리고 네가 그 불을 굳이 끌어온 데에도 분명 이유가 있을 터. 하니 내가 어찌하겠느냐. 결국 네가 그리하겠다 결정했다면, 그저 곁에서 이루어지도록 도울 수밖에.”
“…….”
“너무 실망하지 말거라. 그 지옥의 불이 네 오러와 완전히 결합하긴 했지만, 오랜 시간을 들이면 지워내지 못할 것도 없느니라. 통로를 모두 막는 대신, 내가 약간의 여력을 남긴 것도 그 때문이란다.”
쓱쓱쓱.
성황이 입을 다물고 있는 성진의 머리를 부스스 흩트리며 덧붙였다.
“명심하거라, 아들아. 네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단다. 만일 탓할 자가 있다면, 그저 이런 상황으로 너를 내몬…….”
그는 거기서 더는 말을 잇지 않았지만, 성진은 그가 흐린 뒷말을 알아듣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지금 내가 이렇게 기운 빠져 있을 때가 아니지.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이 양반은 정말로 로건과 닮은 구석이 많구나. 특히나 자신의 탓이 아닌 것을 가지고 쓸데없이 땅을 깊이 파고드는 점이 말이야.
“아버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제……!”
하지만 성진은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성황이 그의 눈을 가리며 가볍게 타일렀기 때문이다.
“쉬- 깨어나 움직이려 들면 네 의념을 따라 계속 오러가 움직인다. 그러면 또 열이 오를 테니, 지금은 더 자는 것이 좋겠구나.”
툭.
잔뜩 힘이 빠진 딱밤과 함께, 성진의 의식이 다시 속절없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잠시나마 좋은 꿈을.
귓가에서 희미하게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다.
* * *
[크흑! 정말 못 해먹겠습니다!]
성진은 내심 의아해졌다.
‘잠깐, 분명 좋은 꿈이라 하지 않으셨나?’
하지만 그 ‘좋은’ 꿈속에서 성진이 처음 들은 것은, 마사인 경의 울분 어린 한탄이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로건 저하? 매번, 매번 이렇게 되고 마는 겁니다. 모레스 저하께서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마사인 경?
그래, 지금 그의 눈앞에는 마사인 경이 서 있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어려보이는 것이 이상했지만, 그럼에도 성진은 그가 자신의 충직한 호위기사라는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다 이해합니다, 마사인 형님. 형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에서, 역시 이상할 정도로 작아 보이는 로건이 어깨를 토닥거리고 있었다.
[제 각오가 부족했던 것일까요? 만일 해야만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저하의 손을 빌리지 않고 이 검을 쓰겠노라 다짐했건만…….]
[아니, 절대로 형님의 탓이 아닙니다.]
토닥토닥.
‘…이게 뭐지?’
성진은 상상도 못 한 광경에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Chapter 61: Chapter 361
Chapter Text
361. 입단 (4)
성진은 그림 같은 들판 위에 서 있었다.
새파란 하늘에는 솜사탕 같은 구름이 둥실둥실 흘러간다. 고르게 펼쳐진 초록 양탄자 위로는 알록달록 피어난 꽃들이 어지러이 흔들리고.
이 유치할 정도로 화려한 천연색의 향연.
‘…모여라 친구들?’
자연히 판게아 클로니클의 사악한 유아용 스킨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그 ’좋은‘ 꿈입니까, 아버지?’
이곳은 아무래도 성황이 만든 임시 염상 차원인 모양. 딱히 별다른 설명을 듣지는 못했지만, 성진은 어쩐지 그 사실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푹 쉬라고 아예 영혼을 다른 차원으로 보내버리다니, 이걸 아버지답다고 해야 할지…….’
뭐, 영혼을 날리거나 임시 휴식터를 만들어 주는 건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도대체 대상 연령을 어떻게 잡으신 거지?’
성진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버지. 당신한테 나는 대체 언제까지 어린애인 겁니까? 예?
[크흑! 정말 못 해먹겠습니다!]
그때, 저 앞에서 어딘가 익숙한 한탄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성진이 매일같이 보는 금발의 기사가 잔뜩 울상을 짓고 있었다.
[매번 이렇게 되고 맙니다. 모레스 저하께서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마사인 경?’
말끔한 근위대 제복까지 입고 있는 걸 보면 마사인 경이 맞는데.
그럼에도 성진이 그의 정체를 바로 확신하지 못했던 것은, 마사인 경의 모습이 평소보다 훨씬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성진의 말썽으로 나날이 찌들어가던 얼굴 대신, 어쩐지 파릇파릇한 청소년으로 보이는 마사인 경. 그런 그가 지금, 로건을 향해 참았던 울분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다 이해합니다, 마사인 형님. 형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옆에서 토닥거리는 로건의 모습은 더욱 가관이었다.
평소처럼 말끔한 성기사단 정복을 차려입고는 있지만, 고작 유치원에 다니면 딱 좋을 정도로 작은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특유의 분위기나 꼬리가 처진 파란 눈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성진은 절대 로건을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이게 뭐지?’
성진은 당황했다.
분명 느낌으로는 마사인 경과 로건, 두 사람이 맞기는 한데. 어째서 저런 모습들을 하고 있는 거야?
[함께 있을 때, 저 둘에게 가장 익숙하게 기억되는 모습이기 때문이 아닐까?]
[육신과 가장 가까운 바이온은, 간혹 기억과 무의식에 따라 변하기도 하니까.]
대답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두 개의 작은 구슬 같은 것이 성진의 머리 주변을 각기 다른 속도로 맴돌고 있었다.
[아, 모르니? 바이온은 영혼을 구성하는 3요소 중 하나야.]
[영혼 3원설은 어디까지나 그라니우스의 주장일 뿐이지만.]
영혼 3원설?
갑자기 튀어나온 소리에 의아해하고 있는데, 두 개의 구슬이 성진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재차 사념을 전해왔다.
[우리가 보기에, 영혼은 에이온과 바이온 2요소로 정의하는 쪽이 더 적절해.]
파란 구슬이 팔짝팔짝 뛰어오르듯 움직이며 성진의 얼굴 주위를 빙빙 돌았다.
[거기에 다키온을 끼워 넣은 건, 순전히 그라니우스의 정치적 사정 때문이었지.]
반면 분홍 구슬은 느긋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더니, 성진의 어깨 위에 얌전히 자리 잡는다.
그리고 두 구슬은 동시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여긴 성황 아빠가 임시로 만든 염상 결계야!]
[깨어나면 모두 잊어버릴 작은 놀이 공간이지.]
[깜짝 놀랐지, 모레스?]
[너 놀랐구나, 모레스?]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느낌은 분명 그가 알고 있는 두 사람이 맞는데?
성진은 미심쩍은 목소리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들을 입에 담았다.
[…헤르나? 가데스?]
[……!?]
한데 성진의 호명에 대한 두 구슬의 반응은 대단히 열렬했다. 처음에 둘은 놀란 듯 파드득 떨어대더니, 갑자기 왁자지껄한 사념들을 앞다투어 쏟아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와아! 네가 드디어 우리를 알아보는구나?]
[알아? 우리는 계속 네 옆에 있었다는 걸.]
[우리도 조금쯤은 네 걱정을 했다고.]
[물론 엄청 많이 걱정한 건 아니지만.]
저 특유의 말투, 아무리 봐도 쌍둥이가 확실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 이런 변화가 생긴 거지?]
[아빠 폐하가 각성한 상태로 보내서 그런가 봐.]
[그렇다면 이제는, 밤에 놀러가도 모레스가 우리를 알아볼 수 있는 걸까?]
[이름을 입에 담았잖아? 아마 기억하기 충분한 인과가 만들어 졌을 거야.]
성진은 정신 사나운 사념들을 대충 흘려들으며 물었다.
[바이온…은 그렇다 치고. 왜 두 사람은 아예 인간의 모습조차 아닌 거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쾌활한 대답들이 돌아왔다.
[그야 우리는 바이온이 아니라, 제대로 분리한 영혼 단말을 이용해 이곳에 왔으니까 그렇지.]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그저 꿈이라 여기고 잊어버리지만, 우리는 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성황 아빠가 아니더라도, 언제든 우리끼리 여기 올 수 있어.]
[물론 아빠 폐하가 만든 곳이니, 반드시 허락이 필요하지만.]
쌍둥이의 영혼 단말이 떠들어대는 사념을 통해, 성진은 마사인 경과 로건 역시 성황의 손에 의해 이곳으로 날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사인 오라버니는 침식이 심해서 제법 위중한 상태였어.]
[그런데도 휴식을 취하지 않겠다고 끝까지 고집 부리더라.]
결국 보다 못한 성황이 부득이하게 마사인 경을 재웠다고 한다. 꿈의 차원을 만들어, 강제로 영혼을 날려버리면서 말이지.
[어디 그뿐이야? 아멜리아 언니도 그랬어.]
[로건 형님이랑 시슬레도 마찬가지였지.]
성진은 납득했다.
아, 어쩐지. 성황과 한참 대화를 나누는데도, 기감 좋은 두 사람이 전혀 잠에서 깨어나지 않더라니.
[예전에도 성황 아빠는 이런 차원을 몇 번인가 만든 적이 있었어.]
[오웬 형님이 있을 때 주로 그랬지. 그는 심한 악몽을 꾸곤 했거든.]
물론 강제로 영혼을 떼어놓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아무래도 몸과 정신에 큰 무리가 간다나.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란다.
[그런데 예전과는 놀이터의 모습이 꽤 많이 달라졌네?]
[아빠 폐하의 상상 속 이미지에 뭔가 변화가 생겼나 봐.]
[너무 알록달록해서 뭔가 이상해.]
[새로운 동화책이라도 읽으셨나?]
…글쎄, 어쩐지 난 아버지가 무엇을 참고했는지는 알 것 같은데.
어쨌거나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친 성진은, 쌍둥이의 영혼 단말을 달고서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도 생겼다.
놀이터라는 말이 어울리게, 이곳은 어린애들을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제법 푸짐한 다과상이 차려져 있고, 얕은 연못에는 어린아이 혼자 뱃놀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나룻배들이 떠다닌다.
목마나 인형 같은 아기자기한 장난감들이 널려있는 커다란 천막도 있었다.
그러다가 성진은 어쩐지 괴상한 광경을 발견하게 되었다. 들판 한쪽에 커다란 버섯들이 옹기종기 모여, 허공을 향해 일제히 거센 바람을 뿜어내는 모습을.
‘…저건 또 뭐야?’
사람 몸통만큼 거대한 버섯 대들이, 마치 땅에서 펌프질이라도 하듯 꿈틀거리며 위로 위로 공기를 뿜어내는 중이었다.
휘잉- 후웅-
세찬 바람과 함께 작은 포자들이 하얗게 흩날렸다.
[부웅이구나.]
[응. 부웅이야.]
…부웅? 그게 뭔데?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성진은 그 버섯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한참 마사인 경을 달래던 로건이, 그를 이끌고 곧장 그곳으로 향했으니까.
[제가, 제가 다시는 모레스 저하의 작은 손에 미스라를 넘기지 않겠노라고, 지금까지 얼마나 각오를 다져왔는지……!]
[마사인 형님. 그만 진정하십시오.]
[하지만 저하. 저는 요즘 들어 하루에도 몇 번씩 죽다 살아나는 기분입니다! 오러 유저고 뭐고, 이러다가는 정말 제명에 못 죽을 것 같단 말입니다!]
[형님 마음 잘 압니다.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같이 부웅을 하시면 기분이 훨씬 나아지실 겁니다.]
두 사람은 영차영차 버섯 위로 기어 올라가더니, 이내 바람을 타고서 붕붕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번갈아 가며 올라갔다 가라앉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게 아닌가!
‘…….’
성진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들이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아니, 로건은 그렇다 치고. 마사인 경, 저 양반은 나잇값도 못 하고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흠. 이건 어디까지나 꿈에 불과할 따름이니까.]
[그냥 영혼이 무의식적으로 원하는 것뿐이니까.]
[원인을 따지자면 모레스 때문이라고.]
[그래. 알고 보면 모두 모레스 탓이지.]
[조심해라, 모레스!]
[자중해라, 모레스!]
두 사람을 위한 변명이, 어쩐지 성진을 향한 비난으로 끝이 났다.
[어, 그래그래, 알았어. 반성한다고.]
성진은 마구 달려드는 쌍둥이들을 대충 떼어놓으며, 놀이터의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이곳에 누님이랑 시슬레도 함께 있다는 말이겠지?’
성진은 그들까지 찾아볼 요량으로, 볕이 내리쬐는 들판을 천천히 산책했다.
꿈인 듯 현실감 없는 풍경.
기분 탓인가. 이러고 있으니 오러를 잃은 상실감이 조금은 해소되는 것 같기도…….
그러다가 성진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인물을 마주치게 되었다.
[으하하하하!]
‘…오웬?’
그래. 저건 분명 오웬이다.
판게아 클로니클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어려 보였지만, 구릿빛의 긴 머리카락을 단정치 못하게 흩날리는 꼴은 여전했다.
그는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는 건지, 이리저리 활기 차게 들판을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심지어 그의 어깨 위에, 한층 더 작아진 시슬레를 목말 태우고서!
[으하하하! 정말 보고 싶었어, 시슬레! 우리 애기, 우리 막내야!]
[오라버니, 난 이제 애기가 아니라고!]
[하하하! 그게 무슨 소리야? 여전히 이렇게 작기만 한데?]
[그건 그냥 오라버니가 큰 거… 아! 저기 귀여운 토끼가 있다!]
[그래? 쫓아가 볼까?]
두두두두두!
쏜살처럼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성진은, 천천히 이마를 짚었다.
‘어, 혼란스럽다. 이건 정말로 꿈일 뿐이구나.’
바로 그때였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니, 모레스?]
노래하듯 울려오는 맑은 목소리.
묘한 기시감에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깜찍한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풍성한 장밋빛 머리카락.
[누님……?]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소녀의 모습이었지만, 그 청초하고 화려한 분위기는 결코 다른 사람일 수가 없다.
성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나보다 어린 모습의 누님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러자 작은 아멜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니, 모레스? 너보다 어리다니?]
[네?]
[내가 누나인걸. 그러니 내 쪽이 너보다 어른인 게 당연하잖아?]
[……?]
성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어?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내 눈높이가 이렇게 낮아진 거지?
당황하며 자신의 몸을 살펴보니, 그는 정말로 작은 어린아이의 몸을 하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단추가 달린 작은 소매와, 그 아래 삐져나와 있는 조막만 한 손.
[……?!]
이건 또 뭐야?
성진이 당황하며 몸을 더듬고 있으려니, 옆의 쌍둥이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서 종알거렸다.
[이것이야말로 무의식이 느끼는 적정 연령.]
[즉 너의 진정한 정신 연령이라 할 수 있지.]
[모두가 알고 있으니 새삼 부끄러워할 것 없어, 모레스.]
[빤히 눈에 보이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니까, 모레스.]
닥쳐, 이 악마들아!
따지고 보면 이곳은 아버지의 상상 속 세상이라고. 그러니 이게 정말 내 정신 연령일 리가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인식, 즉 아버지 탓이란 말이야!
잔뜩 약이 오른 성진이 성가시게 구는 단말들을 잡기 위해 손을 마구 휘저었다.
[이리 와라, 이 녀석들아! 어서 이리 오지 못해?]
애초에 너희는 왜 나한테만 이렇게 버릇이 없어? 오냐, 마침 잘 됐다! 오늘 이 형님께서 너희들의 버르장머리를 단숨에 뜯어고쳐 주마!
그러자 쌍둥이들은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그를 피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꺄하하하! 모레스 바보!]
이 철없는 꼬맹이들은 그저 재밌어 죽겠다는 눈치다.
이놈들! 지금 내가 놀아주는 걸로 보이냐? 어?
[하하, 지금 뭐 하는 거니, 모레스?]
그 모습을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던 아멜리아가, 결국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누님…….]
[괜히 힘 빼지 말고 이리 오렴, 모레스.]
터무니없이 어려진 손을 맞잡아오는 작고도 여린 손.
거기서 전해지는 것은, 상실감으로 허전해진 가슴을 조금씩 채워주는 따뜻한 온기였다.
[저쪽에 재미있어 보이는 연못이 있단다. 나와 함께 뱃놀이를 하러 가지 않겠니?]
* * *
“폐하…….”
사후 보고를 위해 집무실에 들어온 카트리나는, 어딘가 생소한 성황의 모습에 흠칫 걸음을 멈췄다.
은빛의 기이한 광채가 감도는 눈동자.
일견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에는, 희미하긴 해도 분명 미소라 불릴 만한 것이 걸려 있다.
카트리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당신의 아이들을 보고 계신다.’
충직한 기사단장은 마음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폐하의 안식은 어디까지나 자식들의 곁에 있건만, 이제는 그분들을 보살피는 것조차 뜻대로 하실 수 없는 건가!’
지금은 이미 많은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성황은 카트리나에 눈에 여전히 어린 황자님이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곁에서 보살펴 오던, 세상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소년.
“수고했네, 카트리나. 보고하게.”
재촉하는 성황의 말이 떨어졌음에도, 잠시 머뭇거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폐하.”
이내 마음을 다잡은 카트리나는, 보고를 하는 대신 결연한 얼굴로 그를 향해 고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총력을 기울여 남은 1기의 호문클루스를 압수해 오겠습니다. 저스틴 그자가 대체 어디에 그것을 숨겼는지는 모르나, 분명 황도 근교를 멀리 벗어나지는 못했을 겁니다.”
“…카트리나.”
“그러니 부디 호문클루스를 늘 모레스 저하의 곁에 두시어 시름을 잊으소서. 그것이 정 여의치 않다면, 우선 당장은 샤론 경을 아예 상주기사로 들이는 방안을…….”
“그럴 수 없다, 카트리나.”
말을 자르는 차분한 목소리에 카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곧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을 느꼈다.
성황은 카트리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예전에 어렸던 그가, 베스세바 황비의 방을 나설 때마다 매번 보여주던 것과 같은 표정을 짓고서.
“그런 방식으로 모레스를 지켜봐서는 안 되네.”
“…….”
“그것이 불러올 결과를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럴 수가 없어.”
그것은 오래전부터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을 인지했고, 또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자의 얼굴이었다.
Chapter 62: Chapter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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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입단 (5)
“발타자르의 부대가 현장에 당도하기 전, 악마종으로부터 흘러나온 마기 일부가 교외 곳곳으로 퍼지는 현상이 관측되었습니다.”
잔뜩 갈라진 레안드로스의 목소리가 조용한 집무실에 울려 퍼진다.
카트리나는 성황의 곁에 서서 가만히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기는 더욱 강한 마기에 이끌리는 법. 하여 엑소시스트들에게는 일단 섣불리 정화를 시도하지 말고, 마기의 행방을 추적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모레스 황자와 로건 황자의 활약에 힘입어 악마종은 한자리에 갇힌 채로 오랜 시간 현장에 묶여 있었다. 덕분에 그렇게 엄청난 마기가 발생했음에도, 이로 인한 추가 피해는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
그러나 반원으로 펼쳐진 신성 결계는 절대 완벽하지 않아, 미처 가두지 못하고 흩어져버린 일부의 마기들이 있었던 것.
“보고드릴 것은 이것이 다입니다. 부디 하명하십시오.”
그러자 성황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레안드로스에게 지시를 내린다.
“마지막으로 마기를 확인한 장소로 각각 조사단을 보내게. 마침 카트리나가 이 자리에 있으니,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과 공조하는 편이 좋겠군.”
그 여상한 태도에 카트리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폐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다. 당신의 시야에, 그리고 모레스 저하의 계획에는 이미 거기까지 들어 있었던 거야!’
모레스 황자님은 힘이 닿지 않아 마기를 놓치신 게 아니다. 어쩌면 이조차도 모두 황자님께서 일부러 의도하신 일은 아닐까?
오랜 시간 성황을 보필해 온 카트리나는 자연히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추측을 뒷받침해 준 것은, 갑자기 입구에서 들려온 한 젊은이의 목소리였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그곳에는 또 다른 악마종의 씨앗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저희 아렌쟈가 이미 그 위치를 정확히 추적하였으니, 폐하께서는 더는 심려치 마소서.”
검은 후드로 얼굴을 감싼 왜소한 청년이 집무실에 들어선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표정에 변화가 없던 성황이 눈에 띄게 미간을 찌푸렸다.
“…리브가.”
카트리나와 레안드로스 역시 자연히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리브가.
성황의 비밀스러운 직속 기관, 아렌쟈의 수장.
영혼의 단말을 만들어 소통하는 독특한 방식 덕에, 카트리나와 레안드로스 역시 아렌쟈의 실체를 직접 목도한 적은 거의 없었다.
수년 전 인퀴지터들에 의해 일족이 전멸할 뻔한 위기를 겪은 뒤로, 그들의 조심성이 거의 편집증 수준으로 강해진 탓이리라.
어쨌거나 현재 그들은 황궁 지하에 깊숙이 숨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때때로 그들의 수장 리브가만이, 외부 요원을 대신 움직이며 필요한 소통을 이어갈 뿐.
“리브가라고? 기척이 아예 바뀐 것을 보니, 또 새로운 외부 요원을 들인 모양이군.”
레안드로스의 지적에, 청년은 그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직 솜털이 가시지 않은 하관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이번에 마련한 대변자는 생각보다 어린 자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두 단장님을 ‘직접’ 뵙는 것도 오랜만이외다.”
“재미없는 농담은 관두시오. 그대는 매번 인과가 부족하다며 몸을 사리더니, 갑자기 여기는 또 어쩐 일이오?”
카트리나의 입에서 답지 않게 퉁명스러운 질문이 튀어나왔다. 성황의 기분에 예민한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심기를 반영하는 경우가 잦은 것이다.
그러나 리브가는 그녀의 날 선 기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였다.
“걱정하실 것 없소이다, 카트리나 단장. 수색을 위한 인과는 이미 채워졌소. 하면 이 리브가가 조금 일찍 비밀을 털어놓더라도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터.”
그렇게 대꾸한 리브가는, 천천히 성황의 앞으로 다가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모레스 황자님이 애써 주신 덕분으로, 씨앗 뿌리는 자의 오랜 안배들을 모두 밝혀낼 수 있었사옵니다, 폐하. 이는 분명 주신께서도 델크로스를 가엾이 여기심이 아니겠습니까.”
“…….”
“그러니 허락만 해 주신다면, 우리 [아렌쟈]가 폐하를 대신해 그 장소로 차질 없이 성기사들을 인도하겠나이다,”
리브가의 태도는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성황의 눈은 어둡게 가라앉다 못해 한기가 일 정도였다.
“…그 아이가 너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니, 이제는 다른 자들을 직접 들쑤셔 보려 드는군.”
움찔, 정곡을 찔린 청년이 미세하게 몸을 떤다.
아무리 능구렁이 같은 아렌쟈의 수장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성황의 앞에서 감히 뻔뻔한 태도를 유지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런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던 성황이, 비식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덧붙였다.
“허락한다.”
“…황공…하옵니다.”
“하나 리브가.”
담담한 호명에 리브가는 자연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순간 그 자리에서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바로 그곳에, 그가 평생에 걸쳐 갈구해 오던 일족의 정수, 오라클의 경이로운 시선이 있었음에.
“황궁은 너희 코른시임을 보호하는 울타리임과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다. 그 사실을 단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알겠느냐?”
새파랗게 질린 리브가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자-
“보고가 끝났으면 이만 물러들 가게. 아이의 열이 다시 오르고 있군.”
머리 위로 차가운 축객령이 떨어졌다.
* * *
[와, 이 맛이 그리웠어! 이런 달콤한 과자를 먹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오웬의 감탄사에, 성진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서 타박을 했다.
[그럼 재깍재깍 집에 돌아올 것이지, 지금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그러자 오웬은 뭔가 묘한 표정으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음, 나에게도 나름 정리할 일들이 있어, 뉴비야. 전선의 중심을 잡고 있는 황자가 멋대로 자리를 비우면 어떻게 되겠어?]
[…….]
무의식적으로 익숙한 기분이 드는지, 오웬은 때때로 성진을 뉴비라고 불렀다. 물론 본인은 그러고서도 큰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그런데 우리 시슬레도 아니고, 왜 모레스 네가 날 돌아오라 마라, 구박하는 거야? 난 네가 싫어.]
[그래. 미안해, 멍청아.]
[멍청이라니! 뉴비 너는 매번, 날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고! 봐봐. 지금도 내가 너보다 훨씬, 훨씬 어른인데 말이지!]
어, 이러니까 멍청이지.
성진은 콧방귀를 뀌곤 다과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한바탕 놀이터 여기저기를 쏘다닌 그들은, 어느새 삼삼오오 다과상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곳은 시간 감각이 무딘 새로운 차원. 늘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을 정도로 불어오고, 중천에서 내리쬐는 햇볕은 여전히 따사로웠다.
[그런데 모레스.]
딱 좋은 온도의 멜보른을 홀짝이고 있는데, 아멜리아가 성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었단다. 대체 그 천이 뭐길래 그렇게 소중히 두르고 있는 거니?]
성진은 그제야 자신의 차림새를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다.
‘꿈일 뿐이라고 생각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녀의 말대로, 지금 성진은 목에 괴상한 천 하나를 감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옷에 어울리지 않는, 허름하게 낡은 천 조각.
묘한 기시감을 느낀 성진이 붉은 천을 풀어내니,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거기로 모인다.
‘이건?’
거기에는 검을 든 남자와 거대한 공룡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렉스?]
성진이 눈을 깜박거렸다.
잠깐만, 이거 뭐지? 왜 델크로스의 물건에, 뜬금없이 티라노사우르스가 새겨져 있지?
[렉스? 그게 뭐니, 모레스?]
아멜리아가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며 성진에게 묻는다.
[어, 그건…….]
잠시 망설이던 성진은, 곧 순순히 그녀에게 대답해 주었다.
뭐, 어떤가. 이건 모두 꿈인데.
아마 누님은 이 대화를 기억하지도 못할 거야.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입니다. 공룡이에요.]
[공룡?]
[한때 지구라는 곳에서 살았던, 지금은 이미 멸종해 버린 고대 생물입니다.]
[그래?]
아멜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눈엔 그냥 초대 성황과 광폭한 드래곤의 그림처럼 보이는데.]
[네?]
놀란 성진은 천을 다시 찬찬히 살폈다.
‘이게 드래곤이라고?’
아니,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누님.
이 커다란 머리와 볼품없는 앞발, 그리고 포악해 보이는 이빨들을 보세요. 이건 아무리 봐도 티라노사우르스 렉스라고요!
[아, 렉스. 정말 오랜만이구나.]
그런데 갑자기 로건이 불쑥 옆에서 끼어들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다시 봐도 여전히 험악한 인상이다. 이왕 새길 거, 좀 멋지게 만들 수는 없었던 걸까?]
[어, 잠깐만!]
성진이 경악했다.
[로건, 네가 지구에 살던 백악기 공룡을 어떻게 알아?]
그러자 로건이 되레 의아한 듯 성진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긴? 네가 저 드래곤에게 번듯하게 이름도 붙여 줬잖아? 매번 렉스, 렉스, 하고 불렀었지.]
[내가?]
[그럼.]
[…….]
성진이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천을 보고 있는데, 로건이 마치 엄청난 비밀이라도 말하는 양 소리를 죽여 소곤거렸다.
[그거 아십니까, 누님? 모레스는 어릴 때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는 나중에 크면 거대한 렉스가 되겠다고 말입니다.]
[…내가? 정말 그랬다고?]
성진은 대단히 당황했다.
물론 어린 시절 한때나마, 티라노사우루스가 되고 싶다는 웅장한 장래 희망을 가진 적이 있었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지구에서 살던 시절 아니던가?
[그래? 우리 모레스는 어릴 때부터 꿈이 남달랐구나.]
아멜리아가 어째서인지 뿌듯한 얼굴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나 자랑스러운 건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런데 보통은 초대 성황 폐하같이, 드래곤을 잡는 용사가 되기를 꿈꾸지 않아? 모레스 오라버니는 왜 하필 사악한 드래곤이 되고 싶어 했어?]
시슬레 역시 골똘히 장식 천을 바라보며, 작은 손으로 꼼지락꼼지락 드래곤을 쓰다듬었다.
어, 낸들 알겠냐? 전혀 기억에 없는데?
[…가장 강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마사인 경이었다.
[어린 시절 저하께서는 언제나, 강한 것이 곧 정의의 편이라고 하셨죠. 그러니 스스로가 기꺼이 사악한 드래곤이 되어, 눈앞에 있는 적들을 모두 때려 부수겠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워, 어린 시절의 모레스… 아니, 나는, 꽤나 과격한 놈이었구나.
[그때부터 제가 저하를 잘 보필해야 했는데. 저의 정서 교육이 너무나도 부족하여…….]
겨우 진정했던 마사인 경이 다시 눈물을 글썽거린다. 그러자 작은 로건이 책망하는 표정으로 성진을 돌아보았다.
뭐? 왜? 뭐?
아니, 왜 다들 사람이 기억도 하지 못하는 흑역사를 가지고 그러는 거야?
물론 그 의미를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지만.
[…멋져.]
작은 아멜리아는 양손을 부여잡으며 깊이 감동한 얼굴을 했다.
[가장 강한 것이 바로 정의…. 이 얼마나 멋진 울림을 가진 문장이니?]
…네?
[순수하게 강함만을 좇는 전사의 기개가 느껴진단다. 혹은 목적을 위해서 어떠한 오명이라도 뒤집어쓰며, 강하게 관철해 나가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상도 될 수 있겠구나.]
[……!?]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
맑은 소녀의 회색 눈망울에, 문득 시퍼런 광망이 스쳐 지나갔다.
[강한 복수. 그것은 곧 정의라는 말과도 다르지 않은 거야. 어쩜 이리도 아름다운 문장이 있단 말이니? 모레스 넌 역시 대단하구나!]
성진은 기함했다.
아니, 누님! 중2병 취향을 제발 거기까지 발전시키지는 마세요!
[괜찮아, 모레스.]
[걱정 마, 모레스.]
쌍둥이들이 성진의 주위를 맴돌며 위로의 말을 던졌다.
[다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할 거야.]
[모두 그저 기분 좋은 꿈을 꿨다고 생각할 테니까.]
[물론 아멜리아 언니의 무의식에는 깊은 인상으로 남을 테지만.]
[네가 아멜리아 누님의 잠재의식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말았지만.]
참다못한 성진은 결국 버럭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아, 이 녀석들아!
위로를 하든지 놀리든지, 한 가지만 해라, 어?
Chapter 63: Chapter 363
Chapter Text
363. 입단 (6)
언제까지고 한결같을 것만 같던 꿈속의 놀이터.
그곳에서도 예외 없이 시간은 흘러, 결국은 어두운 밤이 찾아들었다.
[저길 보렴, 모레스. 밤하늘의 벨루나와 그녀의 아이들이야.]
초롱초롱 쏟아질 것만 같은 수많은 별들을 가리키며, 아멜리아가 어쩐지 감회에 젖은 얼굴을 했다.
[어릴 때는 저 밤하늘을 바라보며, 아버님 폐하와 단둘이 들판에서 잠들곤 했었지. 무척 그리운 추억이구나.]
정말 있었던 일은 아닐 것이다. 누님의 어린 시절에, 실제 아버지는 그녀의 곁에 없었으니까.
‘다락에서 이정표를 끌어안고 꿨다는 그 꿈 이야기겠지.’
하지만 성진은 아멜리아에게 사실을 일깨워주는 대신, 이렇게 대꾸했을 뿐이었다.
[그리울 게 뭐 있습니까?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아버지와 함께 밤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데요.]
언제 한번 밤늦게 본궁에 놀러가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몇 번 해봐서 잘 압니다.
아마 아버지는 누님이 한밤중에 찾아가도 평소처럼 기쁘게 맞아줄걸요?
그렇게 덧붙이자, 아멜리아가 성진을 향해 배시시 웃음을 흘린다. 기쁨으로 상기된 양 볼이 밝은 달빛을 받으며 희게 빛났다.
[후후. 그래. 네 말이 맞구나, 모레스.]
그러는 동안 어느새 놀이터 한가운데는 커다란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누구도 피운 적 없는데,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나타난 모닥불이었다.
또 그 불을 빙 둘러가며, 푹신한 침구들이 하나하나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성황 아빠가 드디어 우리를 깨우기로 결정했나 봐.]
[그럴 만하지. 지금 델크로스는 아침이 되었으니까.]
쌍둥이의 영혼 단말들이 모닥불 주위를 각기 다른 속도로 맴돌며 설명했다.
[이제 여기서 잠들면, 모두 현실에서 눈을 뜨게 될 거야.]
[여기서 놀았던 기억은 없이, 즐거웠던 심상만이 남겠지.]
[힘들었던 하루 일을 모조리 털어버려, 모레스.]
[마음속에 그저 안정감과 평화로움만이 남도록.]
…그렇구나.
성진은 약속이나 한 듯 꾸물꾸물 침구로 기어 들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이걸로 꿈이 끝나는 건가. 이 따스한 한때가 기억에 남지 않는다니,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걸.
그런데 아이들이 모두 잠에 빠지고, 가장 마지막으로 성진이 자리에 누웠을 때였다.
헤르나와 가데스의 영혼 단말들이, 차례로 성진의 양옆에 살포시 붙어오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그의 귓가에 엄청난 비밀을 속삭였다.
[그거 알아, 모레스? 인형사는 지금 키프로스에 있어.]
[이대로라면 로건 형님과 시슬레가 곧 그를 만나겠지.]
[그래서 우리도 전부터 걱정이 커, 모레스.]
[물론 넌 괜찮을 거라고 판단한 걸 테지만.]
[…뭐라고?]
정신이 번쩍 드는 소리다.
성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잠깐! 너희들, 인형사의 행방을 알고 있었어? 그걸 왜 이제야 말해주는 거야?!]
[그거야…….]
뽀로롱 성진의 눈앞으로 떠오른 영혼 단말들이, 조금 난처한 듯 파르르 흔들렸다.
[어차피 모레스는 이미 알고 있었는걸?]
[매번 스스로 잊어버리는 걸 어떻게 해?]
[이번에도 장담할 수는 없지.]
[응. 또 잊어버릴지도 몰라.]
알지만 잊어버려? 뭐야, 그게?
[게다가 인과를 걱정하는 건 성황 아빠만이 아니야.]
[그래. 많은 것을 알수록, 더 많은 제약이 생기니까.]
[리브가도 분명 성가시게 굴 테고.]
[리브가는 쓸데없이 간섭이 심해.]
리브가, 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덕분에 성진은 그를 기억해 내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면 지금은? 왜 하필 지금 굳이 내게 그걸 말해주는 건데?]
[이제부터 네가 우리를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 아까 네가 우리 이름을 제대로 불렀으니까.]
파랑과 분홍의 영혼 구슬들이 심란한 듯 불규칙한 빛으로 점멸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곳은 델크로스 차원이 아니니까, 조금은 자유롭기도 하고.]
[응. 눈을 뜨면 곧 사라질 세계니까, 다소의 인과 불균형은 그대로 없어지겠지.]
[그래서 이번 기회에 한 번쯤은 모험을 해 보기로 했어.]
[넌 어디까지 인과를 거스르고 기억을 지킬 수 있을까?]
[아, 아닌가? 정확히는 얼마만큼 기억을 지키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디까지 허용할까의 문제겠지.]
[그렇군. 우리로서는 모레스 네가 뭘 기준으로 이 모든 걸 판단하는지 짐작할 방법이 없으니까.]
인과, 그리고 기억…….
성진은 터무니없이 작아진 손을 잠시 내려다 보다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특별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야. 그저 그에 따른 결과를 대충 알고 있을 뿐이지.]
그러자 쌍둥이가 놀란 듯 움찔하더니, 곧 동시에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봐봐! 늘 이렇다니까! 모레스는 정말 음흉해!]
시끄럽다, 이 악마들아!
음흉하긴 누가? 너희들이 세계를 짊어진 내 고충을 약간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성진은 뚱한 얼굴로 도로 자리에 누었다. 그러자 쌍둥이가 양쪽 베개맡에 자리를 잡으며 종알거린다.
[결과가 문제란 말이지? 그렇다면 이번에는 기대할 만하지 않아?]
[응. 어차피 다 기억한다고 해도, 모레스는 아무것도 못 할 테니까.]
[뭐? 왜 그런데?]
성진의 질문에, 대번에 쾌활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거야, 모레스는 외출 금지니까!]
[응, 한동안 절대 외출 금지니까.]
[덕분에 인과가 어그러질 일도 없으니까!]
[응, 당분간은 아무 사고도 못 칠 테니까.]
어, 그건 조금 곤란할지도.
마지막으로 그렇게 생각한 성진은, 잠시 고르게 숨소리를 내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곧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에서 뭔가가 깨끗하게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또 이런 식이구나.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
[…훌쩍, 훌쩍.]
그리고 처음 정신을 차린 성진이 들은 것은, 머릿속을 울리는 작은 훌쩍거림이었다.
‘…마왕아?’
[…이성진? 이, 이성진!]
화들짝 놀란 마왕이, 곧 잔뜩 소리를 죽이며 소곤거렸다.
[너 괜찮아, 이성진? 게헤나의 불이 통로를 넘어와서, 난 이대로 네가 영락없이 죽는 줄 알았다고!]
‘어, 그래. 이제 괜찮아.’
끄떡없다고.
너도 곁에 있었으니 잘 알 거 아냐? 아버지가 벌써 다 봐 주셨는데.
[끄떡없긴 뭐가! 이게 대충 넘어갈 문제야? 지옥의 겁화가 네 오러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다고! 이제는 영영 저걸 없애버릴 방법도 없단 말이야! 이제 어쩌면 좋으냐고!]
흠.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던 성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마왕 놈이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훌쩍! 아무래도 뭔가 잘못 생각한 거 같아. 이곳에 남는 게 아니었는데. 만일 그때 내가 게헤나로 완전히 떠나버렸다면, 결과가 조금은 달라졌을까?]
글쎄. 설사 달라졌다고 한들 그것이 마왕의 탓은 아닐 것이다. 놈에게 이곳에 남으라고 권유한 것은 성진이 아니었던가.
거기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어떠한 결과가 발생하든 그것을 결정한 것 역시 나라는 모양이니까 말이야.
한데 마왕 놈은 어째서인지, 답지 않게 깊은 죄책감에 휩싸여 있었다.
[인간의 몸에 게헤나의 겁화가 들어오다니, 일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됐는데… 훌쩍!]
‘…….’
그런데 이놈은 대체 언제부터 혼자서 울고 있었던 거지? 벌써 날이 환하게 밝았는데.
[훌쩍, 훌쩍.]
‘아, 난 괜찮다고! 그러니까 이제 청승 좀 그만 떨어!’
잔뜩 낙담한 녀석을 보다 못한 성진이 괜스레 윽박질렀다. 가만히 놔두면 하루 종일 울고 있을 기세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이놈은 한 차원의 마왕이었다는 놈이 너무 자주 우는 거 아냐?
‘자, 뚝 그쳐! 기분이 영 나아지지 않으면 전처럼 운동이나 하던가.’
[훌쩍. 응, 그래. 그게 좋겠다.]
붕붕붕.
곧 염상 결정 모서리를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기척이 느껴지면서, 놈의 울음소리도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조금 안심한 성진은 멍하니 밝아진 방 안을 둘러보았다.
깜박.
그때 성진의 뒤척임을 느꼈는지, 곁에 누워 있던 아멜리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사이로, 언제나처럼 다정한 회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안녕, 모레스.”
* * *
감동적인 형제자매들의 해후는 잠깐이었다.
성진은 순식간에 기세등등해진 모두에게 둘러싸여 잔뜩 잔소리를 들었다.
“모레스! 전부터 네 몸을 좀 소중히 여기라고 했잖니! 다시는 위험한 곳에 뛰어들지 않겠다고 나와 약속까지 했으면서!”
“그러게 말입니다, 아멜리아 저하. 부디 모레스 저하께 따끔하게 한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소용없습니다, 마사인 형님. 충고를 해도 좀처럼 들어먹질 않으니 말입니다.”
“모레스 오라버니.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오라버니는 좀 깊이 반성할 필요가 있어.”
“어…….”
성진은 문득 대단히 억울했다.
아니, 부상으로 여기 실려 온 게 어디 나 혼자야? 로건도 엄청 위험했잖아? 마사인 경은 또 어떻고?
“그건 모두 너를 지키기 위해서였잖니!”
아멜리아에게 정곡을 찔린 성진이, 급히 반항기를 지우곤 얌전히 시선을 내렸다.
“네가 다치면 크게 심려하실 아버님 폐하와 성황가 사람들을 생각하렴. 알겠니, 모레스? 네 몸은 이미 너만의 것이 아니란다. 성황가는 물론, 델크로스의 모든 신민들이 널 우러러보고 아낀다는 것을 늘 명심해아지!”
아멜리아의 꾸지람은 전에 없이 엄했다.
왜 아니겠는가. 이미 그녀는 마사인 경으로부터 성진의 만행을 똑똑히 전해 들은 뒤였으니까.
-목숨이 경각에 달한 긴박한 상황에서, 모든 오러를 뽑아내어 늑대개를 감싸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이러실 수 있단 말입니까?
-…마사인 오라버니.
-오러를 가진 자라면 그 누구든, 위기 앞에서는 반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법입니다. 한데 모레스 저하를 보고 있자면, 마치 자신의 안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 사람 같습니다!
사실 아멜리아는 이미 그런 모레스의 행동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빗발치는 화살비 속에서, 자신의 안전을 도외시하고 오직 그녀를 위해 모든 힘을 쏟아낸 적이 있지 않았던가.
당시에는 모레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오러 연공을 이해하게 된 지금에는 확신할 수 있었다.
먼 거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아멜리아를 받아낸 것은, 아마도 실체화된 모레스의 오러였으리라.
그때 모레스는 쥐어짤 수 있는 오러를 한 줌도 남기지 않고서 모두 아멜리아를 향해 쏟아내며, 당시 그의 경지로는 불가능했을 묘기를 부린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수많은 화살에 꿰뚫린 채 맞이한 비참한 죽음이었다.
지끈-
또다시 아려오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멜리아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하지만 너는 본래 그런 아이였으니까…….”
“…네?”
쓱쓱.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당황하고 있는데, 아멜리아가 어쩐지 결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려면, 우리 성황가가 더욱 힘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겠지.”
“……?”
“모두 모레스를 지켜보고 있어 주렴.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단다. 성회에 사후 보고도 해야 하고, 바서스트 백작 부인의 장례식에도 참석해야 해.”
황도 근교에서 일어난 사고이니만큼, 성황가의 일원이 얼굴을 들이미는 쪽이 남들 보기에 좋다나.
그러자 로건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누님. 그런 일이라면 제가…….”
그러나 곧바로 아멜리아의 단호한 제지를 받았다.
“로건. 오늘은 이곳에서 가만히 요양하렴.”
“네? 누님. 하지만…….”
“제대로 휴식을 취하는 것도 두 사람의 의무란다. 너희들이 어제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지 아직도 모르는구나.”
그녀의 위엄 넘치는 목소리에, 로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 조금은 더 고생했다는 생색을 내렴. 성회는 물론이거니와, 델크로스의 모두에게 확실히 보여줘야지. 두 사람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그러자 시슬레도 아멜리아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잠시 다녀올게. 오라버니에게 기사단 수련을 절대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나도 어서 강해져서, 두 번 다시 오라버니들만 위험한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그러고는 꼬맹이는, 오후에 성 그라지에 기사단을 따라 구호 활동을 하겠노라 덧붙였다.
“구호 활동?”
“응. 성 마르시아스의 기사가 되었지만, 아직은 성녀로서의 입지가 더 강하잖아? 그러니 성녀로서 제대로 바서스트령의 사람들을 보살펴야지.”
갑작스럽게 대형 악마종 출현이라는 엄청난 재난을 겪은 사람들이었다.
실제 인명 피해가 거의 없다고는 하지만, 그런 보여주기식 구호의 효과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이 바로 꼬맹이 시슬레였다.
오랜 시간 봉사 활동을 이어오며 민심을 다독인 경력이라면, 아마도 그녀가 성황가 제일일 테니까.
“모레스 오라버니만이 아니야. 두 사람 역시 아직은 움직이기 이르다고. 그러니 쭉 여기서 지내면서, 한동안은 더 폐하의 치료를 받도록 해.”
듣자 하니 황궁으로 실려 왔을 때, 로건과 마사인 경의 상태 역시 가관이 아니었단다.
마사인 경은 온몸에 침식이 일어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이었고, 로건 역시 신성력을 무리하게 쥐어짠 통에 한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고.
그런 두 사람은 성황의 신성력을 한차례 받은 후, 일어나자마자 사이좋게 딱밤을 나눠 맞았다나.
“…딱밤?”
“응. 폐하가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으시는 건 나도 처음 봤으니까.”
시슬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마 로건 오라버니는 처음 맞아 봤을 거야. 오라버니가 말썽 부린 건 이번이 처음이지?”
“와…….”
성진이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로건을 돌아보자, 그가 쑥스럽게 이마를 어루만진다.
“정말 맞았냐?”
“…응.”
“너, 소드 마스터잖아. 그런 너조차도 딱밤을 피하지 못한 거야?”
“뭐, 아바마마셨잖아. 살기가 전혀 없었던 데다가, 반사적으로 움직일 틈도 없을 만큼 빨랐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로건이, 슬그머니 말끝을 흐렸다.
“거기다가 어쩐지 피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때 아바마마의 기세는 뭐랄까,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거든.”
어, 과연.
아버지의 분노의 딱밤 앞에서는, 소드 마스터건 뭐건 없는 거구나.
Chapter 64: Chapter 364
Chapter Text
364. 입단 (7)
입구를 막고 있던 천이 열리자, 캄캄한 천막 가운데로 환한 빛줄기가 쏟아졌다.
“저하.”
나직하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오웬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알리샤?”
“네, 접니다.”
“벌써 아침인가?”
“예, 저하. 어서 서두르셔야 합니다. 오늘이 바로 바르샤의 대부족회의가 열리는 날 아닙니까?”
추수 감사절!
번쩍 정신이 든 오웬이 침상에서 튕겨지듯 일어났다.
“알리샤. 내가 언제 잠이 들었지?”
“어제저녁 식사를 가져왔을 때, 이미 침상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래?”
오웬은 눈썹을 찡그렸다.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닌가. 어제는 그리 피곤하지도 않았는데,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의 일이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남부 지도를 펼쳐두고서, 늦게까지 대부족회의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한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말이지.
심지어 지도 위에는, 벗어놓은 검은 토끼 안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안대도 없이 자다니, 내가 정신이 나갔군. 그나마 악몽을 꾸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다행히 컨디션은 그리 나쁘지 않다. 기억에는 없지만, 꽤 행복한 꿈을 꿨던 것 같기도 하고.
오웬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넘기며 습관적으로 퀘스트 창을 열어 보았다. 최근 그에게 동기부여는 물론 삶의 활력소가 되어주는 소중한 퀘스트였다.
[특별 퀘스트 ? 황도로 돌아가자!]
[퀘스트 등급 : E]
[한 차원을 지배하는 여신이, 누군가의 특별한 요청을 받아 삼라만상의 정수를 한곳에 담았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노력 덕분에 당신은 생각보다 손쉽게 ‘궁극의 엘릭서’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귀한 물건에는 언제나 귀한 쓰임새가 있음이 당연지사. 이제 당신은 황도로 돌아가, 이 아이템을 선물할 사람을 찾아내야 합니다.]
[보상 : 30 P캐시]
[*본 상품은 판게아 클로니클 상점 창에서 사용 가능합니다.]
궁극의 엘릭서.
모든 상태 이상 회복과 능력치의 영구적인 상승은 물론, 사망 페널티를 받은 플레이어마저 멀쩡하게 일으켜 세운다는 초희귀 아이템.
그 아이템이야말로, 오웬이 매일같이 판게아 클로니클에 접속하던 이유였다.
처음에 불친절한 상태창 씨는, 이것을 얻으라는 퀘스트만 주고서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았더랬다.
덕분에 오웬은 이러다가 평생 황도로 돌아가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좌절감에 휩싸이기도 했었지.
다행히 최근에 사귄 귀여운 뉴비로부터 얼음 심장을 양도받아, 생각보다 쉽게 퀘스트 아이템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런데 황도로 가서, 이 엘릭서를 누군가에게 줘야 한단 말이지…….’
퀘스트 창을 바라보는 오웬의 눈매가 깊어졌다.
드디어 황도로 돌아간다, 그런 기쁨도 잠시. 퀘스트의 내용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걱정과 함께 이런 의문이 인 것이다.
‘이런 아이템이 왜 필요한 거지?’
그가 황도에서 선물을 주고받을 만한 사람들이라면, 성황을 포함한 성황가 사람들이 전부.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이미 강한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거나, 혹은 그 신성력의 도움을 즉각적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들 아닌가.
‘게다가 이제까지의 퀘스트들이 그러했듯, 이번 퀘스트도 메인 스트림과 연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서둘러 황도로 돌아가고자 의욕적으로 퀘스트를 수행한 덕에, 최근 들어 쭉쭉 진도가 나간 메인 스트림은 어느새 마지막 퀘스트를 앞두고 있었다.
[메인 스트림 2 ? 진행율 87%]
아마도 오늘 있을 대부족회의에서 성공적으로 전선의 안정을 이끌어낼 수만 있다면, 메인 스트림 2는 이대로 완료되리라 기대해도 좋을 테지.
그리고 그다음으로 수행해야 할 메인 스트림은 바로…….
[메인 스트림 3 ? 성□을 (를) 구하라!]
역시 여기에 ‘궁극의 엘릭서’가 쓰인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대체 내가 누구를 구해야 하는 거지? 정말로 성녀를 구하는 퀘스트인가? 부디 꼬마 시슬레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지는 않아야 할 텐데.
“저하. 늦겠습니다.”
“아아, 그래.”
생각에 잠겨 있던 오웬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바로 가도록 하지. 한데 바르토자의 준비는 어떤가?”
그러자 알리샤의 얼굴에 희미한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어련하겠습니까? 며칠 전부터 꽁무니에 불붙은 개 마냥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요. 모르긴 몰라도, 어젯밤은 아마 한숨도 못 잤을 겁니다.”
푸르마의 바르토자.
그는 카라잔의 부족장 와카나 투사이가, 오웬을 암살하기 위해 보냈던 얍삽한 배신자다.
-너는 가라. 가서 와카나 투사이에게 전해. 바르샤 부족들 전체를 전란에 휘말리게 하고 싶다면, 어디 뜻대로 해 보라고.
놈의 음모를 파훼한 직후, 오웬은 그를 돌려보내 카라잔에 경고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대로 부리나케 꽁무니 뺄 줄 알았던 바르토자는 대단히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순식간에 납작하게 부복한 채, 적인 오웬을 향해 완전한 굴종의 의사를 표한 것이다.
-나 푸르마의 바르토자는 전사 오웬의 무용과 아량에 깊이 탄복하는 바요!
-…뭐?
-그러니 훌륭한 전사인 그대에게 우리 일족의 미래를 맡기려 하오. 방금 저들의 간악한 계략을 보았듯이, 이제 바르샤에는 전사의 긍지를 잊고 수치를 모르는 겁쟁이가 늘어가고 있소. 바르샤는 점점 타락하고 있는 거요!
그 ‘간악한 계략’의 핵심 인물이었던 놈이 할 소리냐? 거기다 네가 뭔데 델크로스인에게 멋대로 바르샤의 미래를 맡기는 건데?
어처구니가 없어진 오웬이 알리샤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뭐지? 이놈?’
‘글쎄요. 겁에 질린 나머지 미쳤나 봅니다, 저하.’
오웬은 몰랐지만, 사실 바르토자는 얼마 전 와카나 투사이 앞에서 외쳤던 것과 같은 맥락의 말을 고스란히 내뱉고 있었다.
-이 바르토자, [불패]의 전사라 불리는 델크로스의 오웬과 함께, 타락해 가는 바르샤의 부족들을 쇄신해 가려 하오! 그러니 부디 나를 심복으로 받아 주시오! 다시 한번 그대의 옆에서 무기를 들 기회를 주시오!
놈은 꼬리를 친다는 말이 적절할 정도로 비굴하게 오웬에게 굽실거렸다.
바르샤의 땅 어디로 도망쳐 본들 꼼짝없이 죽을 거라는 계산이 선 거겠지. 그러니 차라리, 바르샤의 오랜 적이었던 오웬에게 붙겠다는 것이다.
‘이런 놈을 어디에 쓴단 말이지? 푸르마를 배신하고, 카라잔을 배신한 놈이, 나라고 배신하지 못할 것은 없잖아?’
물론 처음에 오웬은 그를 받아 줄 의향이 전혀 없었다.
바르토자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가오는 대부족회의! 그곳에 부디 이 몸을 함께 참석하게 해 주시오! 그러면 내 기꺼이 그곳에서 와카나 투사이의 만행을 만천하에 증언하겠소이다!
-……!
오웬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지금 전선을 안정화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무언가. 바로 호전적인 부족장 와카나 투사이 아닌가.
그러잖아도 이번 대부족회의에서, 독침을 증거로 제시하며 와카나 투사이를 압박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예 이를 뒷받침할 증인까지 확보하여, 종국에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볼란타 부족에게 회의의 주도권을 쥐여줄 수만 있다면!
‘잠시나마 전선을 안정화시키는 것도 꿈은 아니야. 그렇게만 된다면, 나도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황도로 향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오웬과 바르토자,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마음으로 추수 감사절을 기다렸던 것이다.
“오, 바르토자! 벌써 준비를 마쳤군.”
무장을 마치고 목책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던 오웬은, 입구에서 비굴하게 눈치를 보고 있는 바르토자와 마주쳤다.
무시무시한 와카나 투사이를 마주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그의 안색은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는 중이었다.
“네게 거는 기대가 크다, 바르토자. 부디 대부족회의에서는 전사다운 당당한 태도로 증언해 주게.”
오웬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바르토자는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눈을 굴렸다.
듬직한 덩치며 투박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저렇게 볼수록 얍삽해 보이는지 참으로 신기한 놈이었다.
“부디 일이 잘 풀려야 할 텐데.”
“주신께서 굽어 살피실 겁니다, 저하.”
“어쨌거나 네게는 큰 짐을 넘기게 됐다, 알리샤.”
말에 오르며 넌지시 사과의 말을 건네자, 호위기사가 가볍게 예를 취하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하.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을요.”
오웬은 이번 황도행에, 늘 곁에 붙어 있던 호위기사를 전선에 남기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부 전선에서 알리샤의 명성은 이미 단순한 황자의 호위기사를 넘어선 지 오래였으니.
아마도 그녀라면, 오웬이 자리를 비운 동안 전선을 지탱하는 충분한 억제력이 되어주리라.
알리샤 또한 그 점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기에, 남으라는 오웬의 명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리라.
“대신 내가 전선으로 돌아오면, 네게 곧바로 긴 휴가를 주지, 알리샤.”
“됐습니다, 저하. 그냥 황도에서 달달한 먹거리들이나 좀 사다 주십시오.”
가볍게 대꾸하던 알리샤의 눈이 일순 진중하게 빛났다.
“잠시도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저하. 와카나 투사이, 그 늙은 여우가 또 어떤 방법으로 부족장들을 뒤흔들지 모르니까요.”
이미 암살 모략에 대한 증거와 증인까지 확보한 상태.
하지만 와카나 투사이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다. 바르샤에서 가장 강한 전사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절대 방심하지 않고 기민하게 머리를 굴리는 것이 늙은 여우라는 별명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
오웬 역시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녀에게 당한 전적이 있지 않은가.
“흠.”
하지만 침묵도 잠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오웬이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뭐, 오랜만에 잠을 잘 자서 그런가? 어째 든든한 기분이 드는데?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그녀에게 질 것 같지 않다, 알리샤.”
“…….”
“걱정하지 마라. 제대로 성과를 내고서 돌아오지.”
알리샤는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어 오웬을 올려다보았다.
어리숙한 소년일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어느 모로 보나 믿음직스럽기만 한 제국의 1황자다.
한때 남부 전선에서 불패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발타자르. 그 [불패]의 이름이, 이제는 채 약관도 되지 않은 오웬의 수식어로써 종종 세간에 오르내리는 것이다.
알리샤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자신의 황자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 저하. 누가 감히 그것을 의심하겠습니까.”
* * *
평화로운 꿈에서 깨어나 안정된 상태를 보인 것도 잠시.
이내 시도 때도 없이 오르는 고열 탓에, 성진은 좀처럼 임시 치료실을 떠날 수가 없었다.
질병이 아닌, 순전히 오러의 성질 변화로 인한 열. 그렇기에 의원의 약은 물론, 사제들의 치료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로지 성황이 만사 제쳐두고 달려와 막대한 신성력을 쏟아부어야만, 겨우 열이 내리고 상태가 안정되곤 하는 것이다.
덕분에 성황이 업무를 위해 잠시라도 자리를 비울라 치면, 마사인은 대단히 초조해하며 집무실 방향을 기웃거리곤 했다.
“저하, 다시 열이 오르는 게 아닙니까? 지금 당장 폐하를 모셔오겠습니다!”
“진정해, 마사인 경. 아버지라면 방금 전에도 다녀가셨잖아.”
성황은 공사가 다망한 양반이다. 계속 성진의 곁에 붙어 앉아, 언제까지고 오러와 감각을 억눌러 둘 수는 없는 노릇.
성진 역시 그런 보살핌을 원치 않았다. 타인에 의해 모든 오러와 감각을 억제당하는 것은, 작은 움직임은 물론이거니와 호흡마저 일일이 통제당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모르고 있을 때야 그냥 넘어갔다지만, 막상 인식하게 되니 어찌나 답답하던지, 사람이 견딜 만한 짓이 아니더라고.
그래서 성진은 일단 자구책으로 오러 묶기를 시도해 보았다.
‘오러를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최대한 버텨 보는 거야!’
하지만 그러한 전략도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오러는 살아 있는 생물에게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보다 생명의 근원에 가까운 힘.
그러니 아무리 완전히 배제하려 해도 미약하게나마 꾸준하게 몸속을 맴돌 수밖에 없고, 자연히 거기에 동화된 지옥의 겁화가 성진을 불사르기 위해 수시로 날뛰게 되는 것이다.
[…훌쩍, 훌쩍.]
그리고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서는 마왕 놈이 연신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Chapter 65: Chapter 365
Chapter Text
365. 입단 (8)
“끄응, 삭신이야…….”
몸을 뒤척이던 성진이 저도 모르게 영감님 같은 신음을 흘렸다.
헌터가 된 이후로는 딱히 질병에 걸린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열이라는 게 그리 만만하게 볼 게 아니구나. 온몸이 아프지 않은 구석이 없다.
[훌쩍! 이성진. 나는…….]
그러자 머릿속에서 영락없이 마왕 놈의 훌쩍임이 들려왔다.
‘갈수록 가관이구나…….’
자신도 문제지만, 최근 마왕 놈의 상태가 영 이상하다.
신성력으로 가득 찬 본궁이라 주눅이 든 건가? 어째 말수도 확 줄어들고, 점점 우울해하는 것 같단 말이지.
걱정스레 마왕의 상태를 가늠해보고 있는데, 고민하는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마사인이 재차 유난을 떨었다.
“저하. 또 아프십니까? 어서 자리에 누우십시오!”
“어, 괜찮아. 그나저나 마사인 경, 지금 점심 먹을 때가 지나지 않았나?”
“…네?”
“주방장에게 좀 전해 주겠어? 오늘은 꼭 곰고기를 먹고 싶은데…….”
그러자 마사인의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가셨다.
“방금… 점심으로 드신 묽은 수프를 모조리 토하셨는데,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응? 토했어? 내가 언제……?”
“헉! 저하께서 또 고열로 헛소리를 하신다! 의원! 의원!”
“…어어?”
그러고 보니 눈앞이 어째 빙빙 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레스!”
다행히도 그때마다 성황은 귀신같이 알고서 성진을 찾아왔다. 때로는 급한 마음에 처리하던 서류를 손에 든 채 달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화아악-
그렇게 신성력의 폭포를 한차례 쐬고 나면, 몸이 도로 말짱해지며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새삼 성황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안 그래도 바쁜 양반한테, 내가 이게 무슨 민폐람.’
그렇게 성진이 치료를 받고 있다 보면, 곁에 있던 로건과 마사인 경까지 덩달아 신성력 세례를 맞기 일쑤였다. 성황은 그들 역시 중환자 취급을 하며 임시 치료실에 머물 것을 명했던 것이다.
로건과 마사인은 그때마다 대단히 송구한 표정을 지었다.
“아바마마. 저는 이제 괜찮으니, 그만 업무로 복귀…….”
참다못한 로건이 작은 일탈을 시도했지만-
“로건.”
“예, 아바마마.”
“황궁의 어느 의원이 감히 네 상태가 괜찮다는 헛소리를 고하더냐?”
“예? 그건…….”
“…….”
“그…….”
지그시 바라보는 성황의 시선에, 로건은 결국 오래 견디지 못하고 곧바로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래. 알았다면 되었다.”
화아악-
쏟아지는 신성력을 로건이 체념한 얼굴로 맞는 동안, 성진은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함께 투병(?)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혼자 지루하게 시간을 보낼 필요도 없고, 간혹 그들을 놀려먹는 재미도 있었으니까.
“수련하고 싶다아…….”
그럼에도 임시 치료실에 계속해서 묶여 있다 보니, 성진의 답답한 기분은 점점 도를 더해갔다. 특히나 마음대로 수련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잔뜩 낙심한 성진을 보다 못한 마사인이 위로하듯 말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저하. 한동안 오러 묶기를 계속 수련한다고 생각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애초에 오러 묶기는 너무 쉽다고. 수련이 안 된단 말이야.”
성진이 뚱하게 대꾸하자, 옆에서 명상을 하려던 로건이 슬그머니 눈치를 본다.
“하지만 오러를 묶어두고 생활하다 보면, 적어도 기본적인 근력을 올리는 데는 큰 도움이 됩니다.”
“근력?”
“네, 그렇습니다.”
일찍 오러 입문에 든 사람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근육에 오러를 싣게 된다. 그렇다 보니 근력 자체를 수련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
‘생각해 보니 그러네.’
아버지나 로건만 봐도, 막 근육이 두드러진 편은 아니지.
반면에 늦게 오러 입문에 든 마사인 경의 경우는 어떤가? 기사치고도 제법 건장한 축에 들지 않는가.
‘어쩌면 해볼 만할지도…. 마사인 경의 검격이 다른 황궁 기사들에 비해 월등히 매서운 건, 단지 오러 사용이 능숙하기 때문만은 아닌 거야.’
분명 근력은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리라.
좋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근력이나 키워보자!
“그런데 애써 근육을 만들어 봤자, 오러가 돌아오면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거 아니야?”
적어도 성진의 상식으로는 그랬다. 적절한 단백질 공급을 하며 꾸준히 하중을 지속해주지 않는 한, 근육의 부피는 온전히 유지되지 않는다고.
그러나 그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으니, 이곳은 지구가 아닌 델크로스라는 점이었다.
“오러 유저가 한번 키운 근육은 당연히 고스란히 남습니다. 몸을 항상 최상의 상태로 유지해주는 오러가 있는데, 대체 뭐가 걱정입니까?”
“……!”
성진은 입을 쩍 벌렸다.
와! 이곳 델크로스야말로, 헬창들을 위한 천국임에 틀림없어!
* * *
결과적으로 말하면 근력 키우기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성진이 오러를 묶어두고서 살금살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열이 오르는 빈도 또한 확연히 늘어났으니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오러도 활발하게 움직이게 마련 아닌가.
[훌쩍, 훌쩍. 나는 대체 어떻게 하면…….]
이놈은 또 이러고 있네.
어서 달래줘야 할 텐데, 마왕이 좋아하는 걸 마음껏 먹어줄 수가 없으니 참으로 곤란한 일이었다.
“저하. 정신이 드십니까? 목이 타시면 음료라도 가져올까요?”
곁에서 에디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괜찮아.”
“그럼 물수건을 올려드리겠습니다.”
곧 축축한 물수건으로 이마를 닦아내는 손길이 느껴진다. 어쩐지 낯설면서도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리자베스 황비가 곧잘 이런 식으로 얼굴을 닦아주곤 했는데.
“어머니는…….”
리자베스 황비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다샤가 오면 물어나 볼까? 그녀에게 시킨 조사들도 이제 슬슬 결과를 보일 때가 됐고.
쏟아지는 잠을 이기기 위해 성진은 열심히 눈을 깜박거렸다. 한데 그런 그의 귓가에서, 누군가가 조잘거리는 작은 목소리들이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좀처럼 사그라질 기미가 없잖아? 성황 아빠의 힘으로도 온도를 낮추는 정도가 한계인가 봐.]
[이건 절대 사라지지 않는 불이거든. 그게 고유한 속성이지. 무려 차원을 지배하는 힘이라고.]
[빨강이와 관련이 있을까?]
[응, 빨강이 쪽도 문제지.]
[모레스, 이제 어쩌지?]
[모레스, 정말 불쌍해.]
어, 쌍둥이들이다. 이놈들은 여전히 여기 있었구나.
성진이 힘겹게 알은척을 하자, 갑자기 녀석들의 목소리에 활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우와, 모레스! 이제 우리를 기억하겠어?]
[그거 진짜야, 모레스? 정말? 정말이야?]
그야 당연하지.
이런 성가신 말투를 가진 녀석들이 세상에 또 있지는 않을 거 아냐.
[잘 됐어. 들어봐, 모레스! 우리 생각에는 아무래도 빨강이를……!]
동시에 떠들어대는 녀석들의 목소리를, 성진은 단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 녀석은 됐어. 이번 일과는 아무 상관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보다 마침 잘 됐다. 들어봐. 안 그래도 지금 당장 너희들이랑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
성진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서늘한 사념이 울려왔다.
[허튼짓은 그만하고, 얌전히 황궁에 있거라, 아들아.]
어, 이런. 들렸나 보다.
화아악-
또다시 머리 위로 쏟아지는 익숙한 신성력을 느끼며, 성진은 그대로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 * *
잠을 자는 동안에도 열은 수시로 오르내렸다.
이따금 불편함에 몸을 뒤척이던 성진은, 머리 위로 한차례 신성력이 쏟아지고 나서야 다시 안정을 찾곤 했다.
그렇게 얕은 잠과 깊은 잠을 반복하는 동안, 성진은 일일이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꿈들을 꿨다.
대부분은 인식하기가 무섭게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개중에는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 꿈도 있었다.
그것들 중 하나가, 바로 그를 향해 절규하는 낯익은 여인에 대한 기억이었다. 아마도 어린 모레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오래된 기억.
-너는 이리 태어나서는 안 됐어!
난장판이 된 방 안에서, 잔뜩 흐트러진 모습의 여인이 성진을 노려보며 울부짖었다.
-네가 나의 꿈을 모조리 망쳐버렸다! 이제부터 나는, 나는 대체 어찌 살아가야 한단 말이더냐?
지끈-
그를 노려보는 붉어진 시선이, 마치 폐부를 저며내는 비수처럼 가슴 깊이 박혀온다.
-좀 더, 지금보다 더 네 아버지를 빼닮아야 했는데! 어째서 하필이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사람을 닮을 수 있느냐! 네가 어찌 그럴 수가 있어!?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성진은 답답한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어마마마.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람은…….
“…사라니, 그게 가능합니까?”
“물론 그렇소이다. 감히 빈말은 하지 않소.”
“하지만 경도 알다시피 저하께오서는…….”
“지금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가 다 무슨 소용이겠소. 그러니 우선 저하께서 깨어나시면, 한 번쯤 의향을 여쭤주실 수는 없겠소?”
쇠를 긁어내는 듯 거슬리는 목소리에, 성진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부스스 고개를 돌려보니, 마사인이 치료실 입구에 서서 누군가와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사인 경. 누가 왔나?”
성진의 물음에, 마사인이 움찔 놀라며 몸을 돌렸다. 덩달아 그의 몸에 가려져 있던 방문자가 모습을 드러내며, 성진을 향해 정중히 예를 표했다.
“모레스 저하를 뵙습니다.”
레안드로스 경. 마른 고목나무처럼 음침한 기운을 풍기는 엑소시스트들의 수장.
묘하게 붉은빛이 감도는 그의 어두운 눈을 바라보며, 성진이 천천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사람이 갑자기 여긴 어쩐 일이지?’
평소보다 감각이 둔해진 지금에도, 성진은 지난번 만났을 때처럼 그에게서 어딘지 이질적인 느낌을 받고 있었다.
“휴식을 취하시는 데 방해를 드려 송구합니다. 하나 저하께 꼭 허락을 구할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허락?”
“예, 저는 곧 폐하의 명을 받아 서부 지역으로 떠날 예정입니다. 그러니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더는 일을 처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 같아, 부득이하게 저하께 실례를 범하였습니다.”
이어서 레안드로스 경이 꺼낸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무려 성진에게,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에 정식으로 입단을 해달라 요청해 온 것이다.
성진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성기사? 내가?”
신성력도 한 줌 없는데, 대체 어떻게?
그러나 정작 그런 엄청난 발언을 한 레안드로스 경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저하께서는 이미 충분한 [멸악]의 능력을 증명하셨습니다. 거기다 어린 나이에 황궁 기사들을 능가하는 무력을 지니셨으며, 지금도 나날이 빠르게 발전해나가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찌 저하의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흠…….”
“하여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은, 저하께서 단지 마물 전담반의 고문이 아닌, 정식 성기사단의 일원으로서 활동해 주시기를 요청 드리는 바입니다.”
성진은 이내 사태를 파악하곤 마사인 경에게 몰래 눈짓을 했다.
‘다른 이들은 아직 모르나?’
그러자 마사인 경이 난처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네, 모릅니다.’
‘그렇군.’
성진은 턱을 괸 채 찬찬히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황자가 오러 유저의 능력을 잃었다고 대놓고 공표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이제야 겨우 평판을 얻기 시작한 3황자의 입지가 단번에 무너져 내릴 것이 명확한 데다, 어쩌면 신의 대리자의 전능함에 대한 의심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문제니까.
한데, 성진과 마사인 사이에서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느낀 레안드로스가, 조금은 초조한 듯 덧붙였다.
“부디 긍정적으로 재고해 주십시오. 만일 저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 전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에 입단하신 시슬레 님처럼, 저희 기사단에서도 바로 부관급의 지위를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판단이 끝남과 동시에 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할게!”
“또한 이후 저하의 업무에 엑소시스트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네?”
“한다고. 그야말로 나와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이 더불어 상생하는 탁월한 방안이 아닌가? 정말 잘 생각했네, 레안드로스 경.”
“…….”
그러자 레안드로스 경의 표정이 떨떠름해진다.
워낙에 개인 수련 시간을 중요시 여긴다 알려진 황자다 보니, 마물 전담반 외 업무를 부담시키는 데 꽤 긴 설득이 필요할 거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은 레안드로스 경은 묵묵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저하께서도 허락하셨으니, 이 레안드로스가 명예를 걸고 저하의 입단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하겠습니다.”
흠칫-
그러자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로건이 대단히 당황하며 성진을 돌아보았다.
무려 제국의 다섯 성기사단 중 하나를 움직이는 단장이 자신의 명예까지 걸었다.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을 터.
한데 그가 나서서 입단시킨 황자가, 더는 오러를 쓸 수 없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어허!’
하지만 로건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성진이 눈을 크게 부라렸다.
방해하지 마, 로건.
자고로 건강 보험이란 말이지, 암 진단 전에 들어야 유효한 거라고!
지금 제 발로 찾아와서 내게 엄청난 공권력을 안겨준다는데, 그걸 사양할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응?
Chapter 66: Chapter 366
Chapter Text
366. 돌아온 탕아 (1)
아세인 대공가에는 여러 개의 별채가 있다.
대륙 최고 부호이자 권세가답게 대부분 큰 규모와 화려한 건축 양식을 자랑했지만, 개중에는 어울리지 않게 수수하고 작은 별채가 존재하기도 했다.
이는 독특한 분위기를 원하는 일부 손님들의 취향이 원인이었는데, 찾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보니 아예 잊혀 방치된 별채들도 몇몇 있었다.
지금 그 방치된 별채의 안뜰을, 잠행복을 입은 초로의 여인이 걷고 있었다.
시커먼 잠행복과 대비되는 소담한 반백의 머리카락이 꽤 별나게 보일 법도 했지만, 사용인들은 이상하리만치 아무도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빨랫감을 이고 걸어가는 하녀와 정원수를 다듬는 하인, 그리고 별채의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까지.
그 누구도 그녀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채 자기 일에 분주한 사이, 여인은 유유히 저택의 입구를 지나 침실이 모여 있는 2층 계단으로 향했다.
그녀가 막 황비의 방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짜악!
거세게 따귀를 올려붙이는 소리에 이어, 앙칼진 여자의 호통이 울려 퍼졌다.
“무슨 짓이야! 내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누누이 일렀지 않느냐!”
“소, 송구합니다, 황비마마! 저는 그저 바닥의 쓰레기들을 치우려……!”
“감히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
쿵쿵!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연신 바닥 걷어차는 신경질적인 소리.
“감히! 네까짓 것이 감히 내 물건들을 쓰레기라 했겠다?”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그게 아니면 뭐냐? 입이 있으면 어디 말을 해 봐라!”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황비마마!”
여인이 스며들듯 방 안으로 들어가니, 잠옷 가운 바람의 리자베스 황비가 하녀 하나를 향해 무섭게 성질을 부리고 있는 중이었다.
갑작스레 떨어진 날벼락에, 하녀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바닥을 설설 기었다.
“정신이 빠졌구나! 빌면 다인 게야? 혹시라도 너 때문에 내 물건들이 망가지기라도 하면, 그땐 네가 어찌 보상해 줄 수 있느냐!”
“그, 그냥 건드렸을 뿐입니다! 아무것도 망가지지 않았으니 부니 용서를……,”
“이익! 너, 꼴도 보기 싫다! 지금 당장 꺼지지 못하겠느냐?!”
씩씩거리는 리자베스의 앞에서, 하녀는 네발로 기다시피 하며 후다닥 방을 도망쳐 나갔다.
‘흐음…….’
여인이 대충 방 안을 둘러보니, 방바닥 한쪽에 구겨져 있는 편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 쓰여 있는, 어린애처럼 동글동글한 글씨체.
-어머니. 저는 지그스문트령에서 할 일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거기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는데, 황도로 돌아오시면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언제 오실지 몰라, 여행 기념품을 일단 편지와 같이 보냅니다.
모레스 황자가 보낸 서신이었다. 그녀가 직접 황비에게 배달했기에 잘 알고 있는 내용.
그리고 그 옆에는, 황자가 동봉했다는 작은 장신구가 나란히 내동댕이쳐져 있다.
‘저리 바닥에 던져두니 하녀가 쓰레기라고 생각했겠지.’
바닥을 굴러다니는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침대맡을 뒹구는 것은 반쯤 타다 남은 나무조각상. 저것 역시 모레스 황자가 기념품이랍시고 보낸 물건이다.
저것에 불을 지르다 입은 화상 자국이, 아직도 황비의 손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저렇게 못 쓰게 망가뜨려 놨으면서, 왜 굳이 여기까지 들고 오셨는지…….’
게다가 기껏 들고 와서는 또다시 바닥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져 놓았다. 오랜 시간 그녀를 보필했지만, 황비의 제멋대로인 심사는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
잠시 혼자 서서 분을 삭이던 리자베스 황비는, 곧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충 빗질한 부스스한 백금발과 헐렁하게 늘어진 잠옷 가운. 황궁에서 보는 늘 완벽하고 화려한 황비를 생각하면, 보통은 쉽게 상상하기 힘든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여인이 보기에는 지금의 황비야말로, 제게 가장 익숙한 그늘을 찾아 숨어든 생쥐처럼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리자베스 님.”
나직하게 그녀를 부르자, 황비는 움찔 놀라며 자신의 정보원을 돌아보았다.
방금까지도 기척을 죽이고 있었던 탓에 전혀 여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
“…4호?”
“네. 접니다. 지금 막 황궁에서 서신이 도착했기에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자 리자베스 황비는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서신? 폐하로부턴가?”
“이번에는 아멜리아 황녀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그래?”
황비는 고개를 끄덕이곤 4호로부터 서신을 받아 들었다.
친정인 아세인 대공가 사람들과는 본래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데다, 황도 인사들 중에도 그다지 깊이 사귀는 자가 없는 리자베스 황비다.
그럼에도 신기하게, 황비에게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개인적인 안부를 묻는 서신이 날아들었다.
그중 절반가량은 성황이 보낸 것이었고, 그 밖에도 상냥한 멜로디 황비나 다정한 아멜리아 황녀가 주기적으로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오는 것이다.
리자베스 황비도 내심은 싫지 않은지, 답장은 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을 고이 편지함에 쌓아두곤 했다. 그리고 심심하면 한 번씩 서신들을 들춰보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는 것이다.
-리자베스 어마마마.
어제까지만 해도 녹음으로 푸르기만 하던 황궁 정원이, 본래 그랬던 것처럼 하루 만에 옅은 노을빛으로 물들었습니다.
어마마마께서 얼마나 오래 황궁을 떠나 계셨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 하루입니다…….
언제나처럼 미려한 글씨체로 시작되는 친근한 인사.
여느 사교 편지와 같은 장황한 미사여구는 없었지만, 황녀의 서신은 언제나 그녀만의 세심한 시선이 엿보이곤 했다.
아멜리아 황녀는 이어서 성황가의 이런저런 소식들을 담담하게 서술해 나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모레스 황자의 소식이었다.
-…최근 황도에는 엄청난 사건이 있었답니다. 지금 신민들은 모레스를 가리켜 성 바스티안의 재림이라며 소리 높여 칭송하고 있습니다…….
황도 근교에 나타난 악마종.
놈과 맞선 모레스 황자가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했는지, 그리고 황도의 신민들은 또 이를 얼마나 칭송하고 있는지.
이런 모든 상황을 세세하게 적어놓은 문장들에서, 아멜리아 황녀가 느끼는 뿌듯함이 절로 전해져왔다.
-…이런 분위기는 정교회의 사제들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어쩌면 시슬레와 마찬가지로, 모레스 역시 성인의 사도로 추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주장하는 자들도 간혹 보일 정도입니다.
그간 정교회에서 모레스에 대해 종종 불경하고 미심쩍은 태도를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최근의 변화는 무척이나 고무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까지 읽은 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성인의 사도? 대체 누구를?
이 순진한 황녀가,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못 하기에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그렇게 소식 전하기를 빙자한 아멜리아의 동생 자랑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끝맺음하고 있었다.
-…리자베스 어마마마. 꼭 알려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아십니까? 최근 모레스는 잠결에 이따금 어마마마를 부른답니다. 그 대견한 아이는 지금껏 의연하게 모든 고통들을 감내하며, 평소 저희가 보는 앞에서는 절대 약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열과 고열을 오가는 사이, 굳은 의지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 그 아이는 마치 겨우 숨 쉬는 것을 허락받은 것처럼 어머니를 부르곤 하는 겁니다.
그런 모레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무척이나 가슴이 아파지곤 합니다. 그러니 리자베스 어마마마.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예정보다 조금만 더 일찍 황도로 돌아와 주실 수는 없으실는지요?
거기까지 읽은 리자베스는, 그대로 서신을 닫아 편지함 안으로 밀어 넣었다.
“…황녀가 시시한 소리를 하는구나.”
“워낙 다정하신 분이시니, 지나치게 황자님의 걱정을 하시는 거겠죠,”
“흥.”
황비는 4호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지만 딱히 반박은 하지 않았다.
아멜리아 황녀는 분명 성황이 밖에서 낳아 온 자식이건만, 묘하게도 그녀를 대하는 황후나 황비들의 태도가 너그러운 것이 4호는 늘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폐하께서도 최근에는 매일같이 리자베스 님의 소식을 물어보십니다. 하니 이쯤 하여 황도로 돌아가시는 것은…….”
하지만 황비는 안락의자에 머리를 기대며 단호하게 말했다.
“싫다.”
“…….”
“아직은 싫어. 지금은 그냥 모든 것이 다 귀찮구나.”
리자베스는 고개를 돌려 테이블에 놓여 있는 편지함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후 줄기차게 날아오는 서신들로, 어느새 커다란 편지함은 가득 넘칠 지경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녀의 안부를 묻는 따뜻한 서신들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리자베스는 더없이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느끼는, 어둡고도 질척한 불안감.
-그대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에 불안감을 느낀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소.
성황은 그런 리자베스에게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리자베스. 기적은 그렇게 당돌하게 우리를 찾아오기도 한다오. 그러니 그 예기치 못한 일들이, 때로는 조심스럽게 건네지는 신의 선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줄 수는 없겠소?
그 담담한 목소리가 어찌나 상냥하게 들렸던지, 한때는 그 말을 진실로 믿고 싶어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예비는 결코 신의 몫이 아니란 것을.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은 그저 삿된 누군가의 장난질일 뿐, 신의 기적도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을…….’
어둡게 가라앉는 리자베스의 얼굴에, 4호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여기 서신이 떨어져 있습니다, 리자베스 님. 지금 제가 정리해 두겠습니다.”
“…….”
황비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4호는, 바닥에 구겨진 편지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편지함 아래로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 * *
“이게 이렇게 얼렁뚱땅 끝나는 일이었구나.”
성진은 며칠 만에 자신에게 전해진 성기사 서임서와 부관 임명서를 받아 들고는 혀를 내둘렀다.
그가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에 입단하는 데는 별도의 조건은 필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성황의 허가.
레안드로스의 보고에 잠시 침묵하던 성황이 물었던 것은, 오직 순수한 성진의 의사뿐이었다.
“…하고 싶더냐?”
네, 당연하죠. 공권력이잖아요!
성진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성황은 그 자리에서 곧장 다른 성기사단장들과 추기경들을 임시 치료실로 호출했다.
그러곤 얼떨떨한 표정으로 방에 들어선 그들을 향해 간단한 한마디를 내뱉었던 것이다.
“모두 왔으니 됐군. 그대로 진행하게, 레안드로스 경.”
“네? 폐하, 지금 이건 무슨?”
호출된 자들은 의아한 얼굴을 한 채 도로 그 자리에서 되돌아가야 했다.
“아버지, 저들은 왜?”
“방금 저들은 성기사 서임식에 입회한 것이다.”
“…네?”
알고 보니 성기사 서임식에는 세 명 이상의 고위 사제와, 두 명 이상의 성기사단 단장이 입회한다는 원칙이 있다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얼렁뚱땅 날림 서임식을 치른 후, 입단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덕분에 그날 저녁에는, 황도에 3황자의 성기사단 입단을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임관을 축하드립니다.”
오죽했으면 그날 저녁 들른 다샤조차 이렇게 인사를 건넸을까.
“엇! 다샤. 언제 왔어?”
홀연히 치료실 한가운데 나타난 정보원을, 성진이 신기한 얼굴로 반겼다. 그녀의 기척을 처음으로 먼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정말 감쪽같은 은신술이야, 다샤. 다들 이런 기분으로 정보원을 맞이하는구나?”
그러자 다샤는 기뻐하는 대신 어딘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거군요.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저하?”
“응, 괜찮아.”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때 제가 저하께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하여…….”
다샤는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면 악마종과 대적할 당시, 성진은 근처에서 계속 그녀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 그녀로서도 답답했을 것이다. 황자는 위험에 처해 있고, 상황은 점점 다급해지는데, 당장 모습을 드러낼 수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이제는 이런 의구심이 듭니다. 저라는 존재가 과연 저하께 쓸모가 있기는 한지…….”
한때 그런 소리를 입에 달고 살던 19호를 신나게 비웃어주던 다샤였지만, 최근에는 그녀 역시 그런 우울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고 한다.
성진은 대단히 당황했다.
워워, 다샤. 그러지 말라고. 오러 은폐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믿음]이라고 하지 않았어?
“괜찮아. 자신을 믿어, 다샤!”
“네에…….”
“아니면 다샤를 믿는 나를 믿든지! 난 언제나 다샤가 델크로스 최고의 정보원이라고 생각하니까!”
“대단히 감사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는 저하보다도 무력이 약한 데다, 심지어는 오러 은폐 기술마저 훨씬 뒤떨어지지 않습니까?”
“응? 그거야 당연한 거 아냐?”
“…….”
그리고 그날.
성진이 다샤에게 들은 조사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불임 치료?”
“네, 저하.”
고개를 끄덕인 다샤가, 조금은 무거운 얼굴로 덧붙였다.
“리자베스 황비님은 어린 시절부터, 아세인 대공가의 주치의로부터 지속적으로 불임 치료를 받으셨습니다.”
Chapter 67: Chapter 367
Chapter Text
367. 돌아온 탕아 (2)
리자베스 황비를 조사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난관들이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성황이 안전을 위해 붙인 대단한 정보원들이 포진해 있었고, 아세인 대공 또한 수많은 세작들을 부려가며 황비를 감시 중이었으니까.
그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사를 진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그래서 다샤는 부득이하게 황비의 정보원 하나에게 협조를 구했다고 한다.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전설적인 선배님이 한 분 계십니다. 저하의 요청이 있었다고 전하니 흔쾌히 협조해 주시더군요.”
황비의 어린 시절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아세인 대공의 1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난 리자베스 아세인. 그녀는 대공의 자식들 중에서 그다지 특출한 편은 아니었지만, 여느 귀족가의 아가씨들처럼 적당한 교육을 받으며 저택에서 고이 자라났다.
어린 시절에는 지금과 달리 그리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던 터라, 저택 밖으로 나가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고. 거기다 몸도 약하다고 알려져, 어릴 때부터 주치의와 약을 달고 살았다나?
그러다 보니 황비를 아기 때부터 전담했다는 늙은 주치의, 갈레노에 관해서도 조사하기에 이른 것이다.
“갈레노는 이미 죽고 없었지만, 저택에 남아 있는 진료 기록들을 확보하여 황비님이 당시 무슨 치료를 받으셨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주치의는 놀랍게도 어린 리자베스에게 불임 치료를 하고 있었다.
임신에 좋다고 알려진 수많은 약재들과 함께, 말린 돼지 자궁을 달여 꾸준히 복용시켰다고 하니까.
‘…불임? 리자베스 황비가?’
충격도 잠시.
성진의 머릿속에 곧바로 이런 의문이 찾아들었다.
‘어린 나이부터 불임 치료라고? 대체 무슨 수로 그런 걸 진단했다는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성진은 이 세계의 의학을 믿지 않았다. 역병 환자에게 향수를 뿌리고, 외상 환자에게 사혈 치료를 하는 미친 세상이 아닌가.
하물며 여성의 불임 진단은, 현대 지구에서도 상당히 어려운 축에 들지 않았던가?
상식선에서 생각해 봐도 그렇다. 일단은 결혼 한 이후에 수년간 아이가 생기지 않아야, 병원으로 가서 이런저런 검사 같은 걸 하기 시작하는 거지.
한데 2차 성징도 없는 어린 시절부터 불임을 진단하다니,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지?
‘거기다 황비는 나… 모레스를 낳았잖아? 그렇다면 결과적으로는 불임이 아닌 거 아냐?’
백번 양보하여 리자베스 황비가 정말 불임이었다 한들, 이 세계의 의학 수준으로 그런 걸 치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성진이 물었다.
“누구야? 그 갈레노라는 자식은. 대체 어디서 의술을 배웠기에 그런 병신 같은 진단을 한 건데?”
그렇게 해서 성진은 다샤로부터 갈레노의 진료 노트를 통째로 넘겨받았다.
팔락팔락.
노트를 넘기자, 황비가 보였던 증상들과 그에 따른 처방을 대충 휘갈긴 메모들이 보였다. 잔뜩 날려쓴 악필 중의 악필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성진은 그 제국어들을 해독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다른 공녀들은 모두 건강하게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단전에 오러 층을 쌓는 연습을 시작했다. 하지만 리자베스 아가씨만은 대공비께서 조산을 한 탓인지, 유난히 키가 작고 뼈대가 가늘어 미처 연공을 익히지 못하였다 한다.
하여 딸의 건강을 염려한 아세인 대공이, 당시 역병회 회원들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본인을 찾아와 리자베스 아가씨의 치료를 담당하도록 요청하셨다.
그리고 성진의 곁에 서 있던 다샤는, 일순 그의 눈에서 희미한 안광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착각인가?’
그녀는 잠시 의아해했지만, 황자의 상태에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곧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노트로 시선을 옮겼다.
기록에 따르면, 갈레노는 크샨트라의 역병회라는 곳에 소속된 의원이었다. 당시는 아세인을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가던 꽤나 급진적인 역병회라는 모양이었다.
“지금도 활동하는 단첸가?”
자연히 그런 의문이 들었다.
후원하고 있는 역병회 관련으로, 성진은 한때 대륙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역병회들을 죄다 조사하라고 명한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크샨트라 역병회라는 곳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지금은 활동하지 않습니다, 저하. 그들은 이단 논란이 일어, 수년 전에 모두 재판을 받고서 화형당했으니까요. 당시 그들과 관련된 기록들도 모조리 불살라졌으니, 이 진료 노트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흠.”
성진이 보기에 어느 역병회든 미개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크샨트라 역병회는 당시에 꽤나 파격적인 치료를 시행하는 실력파 학파였다고 한다.
덕분에 갈레노라는 자 역시, 인체의 오러 활성도까지 감지해가며 진단에 이용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이기도 했다고.
-다른 공녀들과 비교하면, 리자베스 아가씨는 특히 복부의 오러가 현저하게 약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복부에 찬 기운이 가득하여 소화를 잘 시키지 못하고, 이른 아침에 일찍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이는 불임 여성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이다.
성진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오러 연공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단전의 오러가 약하겠지. 멀쩡히 오러 활성도를 감지해 놓고는, 지금 무슨 개소리를 갈겨놓은 거람?
-아마도 자궁의 기운이 약하고 간 기능이 정체되어 울혈이 생겼기 때문이라. 의심할 여지 없는 불임의 증상인 것이다.
아아, 벧엘라. 주신이시여. 안타깝게도 아세인 대공가의 귀한 아가씨는 불임을 앓고 계신다.
엉뚱한 추론의 과정을 거쳐 내린 진단은 역시나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잠깐. 그런데, 벧엘라?
“이건… 주로 암흑 교단이 사용하는 성호가 아닌가?”
성진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는 죽고 없는 참회의 교구장 벨린다가, 성진과 대화하던 중에 이런 성호를 읊었던 적이 있었지.
거기다가 레오나드는 또 어떠했나.
-벧엘라.
로한의 그 재수 없는 제비 자식 역시, 성진에게 처음에 이렇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던가.
-그것을 알고 있소이까? 잊힌 옛 형제들이 그대의 명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소.
성진은 언제부터인가 레오나드가 암흑 교단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껏 놈이 줄기차게 만나자는 서신을 보내와도 철저하게 무시로 일관하는 중이고.
“네, 그렇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사장되었습니다만, 수년 전까지만 해도 활발하게 활동하던 지하 교단이 이 성호를 널리 사용하곤 했었죠.”
성진의 물음에 다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갈레노가 정말로 이단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어째서 그렇지?”
“그가 활동하던 당시는 지하 교단이 아직 이단으로 낙인찍히지 않았던 때니까요. 현 성황 폐하께서 지하 교단을 [암흑 교단]으로 명명하고 완전히 퇴출하신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때만 해도, 신민들은 정교회와 지하 교단의 구분 없이, 그저 주신께 드리는 찬양으로 이 성호를 곧잘 사용하곤 했죠.”
흐음.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지만, 성진은 달리 반문하지 않고는 노트를 빠른 속도로 넘겼다.
-하여 라무스의 열매를 달여 먹여, 먼저 복부의 찬 기운이 자연히 빠져나가도록 유도하였다. 하지만 설사를 하면 할수록, 리자베스 아가씨는 호전되지 않고 점점 말라가기만 할 뿐이었다. 아마도 치료를 견디기에는 아가씨의 몸이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이리라.
어이, 설사를 유도하니 사람이 점점 탈수가 생기며 약해졌겠지. 이 자식이 지금 멀쩡한 어린애에게 무슨 짓을 했던 거야?
-그래서 곧 치료 방침을 바꾸기로 결단을 내렸다. 안젤리카의 뿌리, 시나몬의 껍질, 말린 돼지의 자궁을 복용하도록 처방했다. 또한 일반 향수를 쓰지 말고, 지열을 품고 있는 구근 식물의 향기를 늘 가까이하도록…….
사락사락.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기록들을 넘겨보는 동안, 문득 성진에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어머… 리자베스 황비는 이런 엉터리 치료를 받아 왔구나. 그러면 불임이 사실이든 아니든, 적어도 그녀는 자신이 불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겠지?’
그러던 중, 거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문득 성진의 눈에 들어오는 문구 하나가 있었다.
-모든 방법을 강구하였음에도 치료가 이렇게 지지부진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신께서 이리되도록 미리 안배하신 까닭일 것이다.
혹한에 불꽃이 일고 사막에서 풀이 자라는 것은, 죽음께서 친히 그 숨을 불어넣었기에 가능한 기적일지니. 이를 위해서는 먼저 그 바탕이 지독히 추워야 하고, 지극히 메말라야만 하는 것이다.
성진은 눈을 깜박였다.
“어……?”
잠깐만.
어라? 나, 이거 어디선가 들은 적 있지 않았나?
‘그러니까, 아마도 이런 말이었던 것 같은데.’
애열이 혹한에 불꽃을 틔우고, 파종이 사막에 농사를 지으니, 안식이 친히 그 숨을…….
삐이-
갑자기 귀에서 이명이 들리며 의식이 아득해졌다.
“…저하? 왜 그러십니까?”
성진이 노트를 내려놓고서 비틀거리자, 화들짝 놀란 다샤가 황급히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
하지만 성진의 귀에선 이미 그녀의 목소리가 인식의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훌쩍 멀어진 뒤였다.
대신 청신경을 한가득 메우는 것은, 지독한 열기와 함께 점점 거세지는 누군가의 심장 소리.
쿵! 쿵! 쿵!
그리고 망각으로부터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환의에 가득 찬 군중들의 함성이었다.
-기뻐하라! 그리고 경배하라!
-아기는 교단의 영광을 위해 [예비된 자]이니!
그것은 언젠가부터 잊어버리고 있던 오랜 악몽이었다.
‘아, 맞아. 언젠가 그런 일이 있었어…….’
그날, 성진은 검은 로브에 감싸인 채 높은 제단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똑같이 검은 로브를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런 성진을 향해 줄줄 눈물을 쏟아내며, 동시에 정신없이 광소를 터뜨리고 있었지.
-예비된 자여! 주신의 사도시여!
-아아, 이제야 때가 왔도다!
-오랜 억압에서 벗어나, 지하 교단은 다시금 번성하리라!
영혼의 고통에는 결코 끝이 없음을 알고, 기다리는 구원은 아직도 멀기만 함을 깨달았지만, 다른 이들 또한 결코 구원에 다다를 수 없다는 사실에 되레 안도하며, 그저 답이 없는 기도만을 목이 터져라 외치는 자들.
이들의 얼굴에 서린 복잡하고도 강렬한 감정들을, [광기]라는 말 외에 달리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겠는가!
성진은 그런 광신도들을 바라보며, 한없는 연민과 깊은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도래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또한 [그자]가 있었다. 이 모든 난장판을 계획하고 실행해 온, 저주받을 안식의 대주교가.
제단 옆에 꼿꼿이 서서 이 모든 광경을 보고 있던 대주교는, 성진과 똑바로 눈을 마주하며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휘었다.
-보아라! 아직 그의 예비는 끝나지 않았으니!
아니, 아직은 아니야.
뚜벅뚜벅.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대주교로부터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성진이 생각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지금은 저자를 봐서는 안 돼!’
분명 자신의 기억 속 어딘가에 뚜렷이 남아 있을 안식의 대주교.
그런 그의 얼굴을 똑바로 인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성진은 다급하게 눈을 감고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어서! 어떻게든! 지금 당장 이 악몽을 벗어나지 않으면……!’
[모레스!]
바로 그때, 어디선가 그를 부르는 다급한 사념이 들려왔다.
그날과 똑같은, 하지만 그때는 차마 화답하지 못했던, 그럼에도 성진이 무의식중에 언제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구원의 목소리였다.
‘…아버지?’
성진이 반사적으로 그 목소리에 대답한 순간이었다.
쏴아아-
폭포처럼 쏟아지는 강대한 신성력과 함께, 이내 악몽이 저만치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피로 물든 검은 제단과, 이를 경배하는 섬뜩한 광신도들의 모습이. 그리고 악착같이 성진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대주교의 모습까지도.
그 모든 기억들이 이내 인식의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성진은 이번만큼은 그것이 조금도 아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레스, 괜찮으냐?”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성진은 깜박, 눈을 떴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눈앞에는 성황의 모습이 있었다.
평소와 같이 침착한 그의 회색 눈을 마주하자, 어째서인지 절대적인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후우.
언제부터 참고 있었는지 모를 숨을 내뱉으며, 성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눈에, 새파랗게 질린 채로 방 한쪽에 달라붙어 있는 다샤의 모습이 들어왔다.
“서, 서서서, 성황 폐하!”
갑작스러운 성황의 등장에 미처 도망치지도 못한 다샤는, 어쩔 줄을 모르며 바짝 얼어붙어 있었다.
“대체 어, 어떻게? 어디서 갑자기? 이 근처에서는 분명 그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아.
성진은 조금 딱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상할 것도 없어, 다샤. 아버지는 옆에 있는 집무실에서 잠시도 움직이지 않으셨을 테니까.
아마도 네가 기회를 엿보며 근처를 맴돌고 있으니까, 그냥 편하게 들어오라고 기척을 완전히 지워주셨던 게 아닐까?
하지만 다샤의 수난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저하아!”
콰앙!
문을 거의 부수듯 밀어젖히며, 마사인 경이 치료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잠시 로건에게 끌려 나갔다가, 성진의 이상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로건 저하께 들었습니다! 또 열이 오르시는 것 같다고…! 이제 괜찮으십니까?”
“어, 응. 괜찮아.”
그런 마사인의 뒤로 로건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 들어왔다. 그러고는 방구석에 바짝 웅크리고 있는 다샤를 향해 곧장 다가가, 애석한 표정으로 사과의 말을 전했다.
“아직 용무가 다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 미안합니다. 모레스의 상태가 상태라서 말입니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금방 마사인 경과 자리를 비켜드릴 테니, 다시 모레스와 천천히 대화하시면 됩니다.”
“……!”
다샤는 일언반구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 그래. 뜬금없이 야간 산책을 한답시고 마사인 경을 끌고 나갔을 때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로건. 역시 너, 다샤가 온 걸 알고 일부러 자리를 피한 거냐?”
녀석이 자리를 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샤가 찾아왔으니 아마도 틀림없겠지.
그러자 로건이 난처한 듯 대답했다.
“음. 그게, 밖에서 네 정보원이 너무 오랜 시간 기다리는 것 같길래…….”
결국 다샤의 움직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알고 있었다는 뜻.
“헉!”
다샤는 깊은 내상을 입고는 비틀거렸다.
원숭이 망루 최정예 정보원의 [믿음]이 실시간으로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Chapter 68: Chapter 368
Chapter Text
368. 돌아온 탕아 (3)
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음에도, 다샤는 한동안 임시 치료실을 떠나지 못했다. 모레스 황자의 상태가 생각보다 위중해 보였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본궁에 붙잡아 둘 정도로 상태가 나쁘다는 것은 이미 들었지만…….’
멀쩡히 대화하던 사람이 갑자기 고열로 쓰러지는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하지만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한 그녀와는 달리, 치료실에 있는 모든 이들은 이런 일을 겪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였다.
“열이 내리면서 땀을 많이 흘리셨습니다. 갈아입으실 옷을 가지고 올 테니, 잠시만 쉬고 계십시오.”
마사인 경의 호출로 달려온 에디스가, 모레스 황자를 바로 뉘인 후 빠른 손놀림으로 척척 흐트러진 침구를 정리했다. 전담시녀로서의 소양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지만, 적어도 체력 하나만큼은 남다른 여자였다.
“슬슬 저녁 바람이 차가워질 때가 되었지. 일단 커튼은 모두 닫아 두는 게 좋겠다.”
로건 황자가 한쪽에서 가볍게 손짓을 하자, 두꺼운 커튼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저절로 밀려 나간다.
대륙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탄생했다고 소문이 자자하긴 했지만, 설마 오러 실체화라는 전설적인 경지를 이런 식으로 확인할 줄은 몰랐지.
“저하! 괜찮으십니까? 바로 물수건을 올려드리겠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이없는 것은 단연코 마사인 경이었다. 어느새 황자의 보모로 전락한 전직 황궁 기사단장은, 급한 마음에 장갑 낀 손으로 물수건을 쥐어짜며 발을 동동 구르는 중이다.
화아악-
그러는 와중에도 황자의 머리 위에서는 엄청난 양의 신성력이 연신 쏟아져 내렸다.
“아버지, 그만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이제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지금은 제법 멀쩡해 보이는 모레스 황자가 만류했음에도, 성황은 못들은 척 그의 머리 위로 기적을 펑펑 쏟아 부었다. 참 낭비도 이런 낭비가 따로 없었다.
“신성력 아깝게시리 왜 자꾸… 꾸웳?!”
말하던 중에 톡, 하고 이마를 밀린 황자가 혀를 씹으며 괴상한 소리를 낸다.
그러자 성황이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의 충격에도 그리 정신 못 차리는 걸 보니, 아직 네가 기운이 많이 없는 게구나. 그러니 잔말 말고 얌전히 누워 있거라.”
“아니, 아버지의 딱밤 위력을 정말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거기다 예고도 없이 그렇게 때리시면 누구든지……!”
“그럼 이번엔 예고해 주마. 준비하렴.”
“…네?”
톡.
“꾸엑!?”
“이것 보거라. 예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느냐.”
”아니, 이 양반이 진짜……!”
잔뜩 약이 오른 황자가 팔을 버둥거리며 항의하자, 성황은 그의 이마를 지그시 누르며 아무렇지도 않게 또 한 차례 신성력을 쏟아낸다.
‘…폐하. 이런 분이셨던가?’
평소 다샤가 아는 성황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능청스러운 태도다.
‘음?’
그러던 중 다샤는 뭔가 묘한 허전함을 느끼고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눈앞에 응당 있어야 할 것이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눈이, 어느새 성황의 손에 들려 있는 갈레노의 진료 노트를 발견했다. 다샤는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저기, 폐하. 그것은…….”
하지만 다샤는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시선을 눈치챈 성황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기 시작했으니까.
“…….”
자체적으로 빛을 뿜어내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형형한 은회색의 눈.
그 지독히도 무기질적인 시선에 무언의 압박을 느낀 다샤는, 하는 수 없이 모레스 황자를 향해 머뭇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하면 저하. 지금은 때가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갈레노의 건은 추후에 다시 보고드리는 것으로…….”
“응?”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모레스 황자가, 마치 거짓말처럼 고개를 갸웃하는 게 아닌가!
“무슨 보고? 갈레노가 뭔데?”
“……!”
당황한 다샤가 저도 모르게 성황을 향해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정작 의구심 어린 시선을 받은 성황은, 여상한 태도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보고는 다음에 해도 늦지 않겠지. 사람이 많은 자리가 제법 불편한 듯 보이니, 저자는 이만 보내주는 것이 좋겠구나.”
‘…알고 계시는구나!’
방금 모레스 황자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폐하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래서 저하의 눈에 띄지 않도록, 갈레노의 노트를 손수 회수하신 거다!
문득 다샤는 처음 모레스 황자에게 배정받은 날, 브레만이 그녀에게 해준 충고를 떠올렸다.
-알았나? 어디까지나 저하께서 원하시는 임무만을 수행해라. 딱 거기까지가 네 역할인 게다. 그 이상의 일은 생각할 필요도, 또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 넘겼던 말. 한데 지금은 어쩐지 그 의미가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다정한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온화하고도 아름답기만 한 광경.
하지만 그 완벽한 세공의 가운데를 마치 센터 스톤처럼 장식하고 있는 모레스 황자는, 미묘하게 축이 어긋난 보석처럼 어딘가 희미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불편할 게 뭐 있어? 어차피 다들 알고 있는데 그냥 마음 편하게 있어, 다샤. 오랜만에 얼굴 보는 건데, 조금 더 있다 가지 그래?”
날카로운 눈매와 대비되는 순진해 보이는 회색 눈동자.
평소 모레스 황자의 과격한 성미를 아는 다샤로서는, 아무래도 그에게서 강한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목구멍까지 솟구치는 의구심을 애써 집어삼키며, 다샤는 천천히 황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저하. 저는 이만 물러가겠으니 부디 보중하십시오.”
* * *
백작 부인의 장례식은 생각보다 늦게 공표되었다.
그녀가 흙더미 아래로 깔리는 광경을 목격한 자가 여럿이었지만, 바서스트 백작이 끝끝내 생존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수색대를 닦달했던 탓이다.
하지만 무너진 흙더미 아래 처참하게 짓이겨진 시신을 발견하자, 결국엔 그도 사랑하는 부인의 죽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사고 수습으로 어수선한 영지 분위기 속에서, 백작 부인의 장례는 그렇게 조용하게 치러졌다.
성황가 대표로 장례식을 찾은 것은 아멜리아 황녀.
두 황자가 모두 큰 부상으로 본궁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지금, 성황가에서 바서스트령에 보낼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조의의 표시였다.
“바쁘신 중에 이리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멜리아 저하. 성황가에 언제나 주신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백작 부인의 젊은 시절을 쏙 빼어 닮은 소녀가, 서글픈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맞이했다.
바서스트 백작 영애, 마가렛.
탄신연 당시만 해도 티파티 소식을 알리며 천진하게 웃던 소녀였지만, 영지의 재난과 모친의 죽음을 연이여 겪은 탓에 지금은 한층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바서스트 영애. 백작 부인은 참으로 아름답고 기품 있는, 그야말로 훌륭한 귀족의 표상 같은 사람이었어요. 제국이 너무도 아까운 분을 잃었습니다.”
“어머니를 그리 기억해 주시니 더없는 영광입니다.”
그렇게 대답한 마가렛은 슬픈 눈으로 어머니의 관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두터운 베일에 꽁꽁 감싸인 백작 부인이 누워 있다. 흙더미에 짓이겨진 그녀의 처참한 시신은, 아무리 다듬어도 남들에게 보일 만한 것이 못 되었기에 한 조치였다.
“우선 사과드릴 게 있습니다. 저하께서 모처럼 참석해 주시기로 한 티파티를, 아마 예정대로 열지는 못할, 것 같아… 너무나, 송구…….”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쏟아내는 불쌍한 영애를, 아멜리아는 다정하게 끌어안으며 한참동안 달래 주었다.
그 자리에는 며칠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윌리엄 바서스트도 자리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어린 마가렛 대신, 영지의 주인인 바스서트 백작이 친히 황녀를 맞이해야 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의 불경을 탓하지 못했다. 부인을 잃은 백작은 며칠간 식음을 전폐한 데다, 멍청히 허공만 쳐다보는 모습이 숫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아마도 사제들이 신성력으로 계속 그를 보살피지 않았다면, 백작 부인에 이어 백작까지 나란히 장례식을 치렀을지도 모른다.
“백작의 상심이 대단히 큰 모양이오.”
“사람의 관계란 참으로 겉보기와는 다르군요. 평소 티격태격하는 듯 보였는데, 부부가 생각보다 금슬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모두가, 그가 부인을 잃은 슬픔에 상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멜리아만은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백작의 눈에서 이따금 타오르고 있는 광망은, 아직 목표를 특정하지 못한 극도의 분노.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허망하게 잃어버렸을 때의 심정을, 아멜리아는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저 갈데없는 슬픔과 분노를 어디로 이끌어야 할지도 잘 알고 있었다.
“백작 부인은 참으로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백작인 그대조차 미처 모르는 세세한 일들을 살펴가며, 영지의 안팎을 빈틈없이 관리해 왔죠. 때로는 그녀가 백작의 작위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기에 아멜리아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다소 도발적인 인사를 백작에게 건넸던 것이다.
“…….”
백작이 조금의 반응도 보이지 않자, 아멜리아는 조금은 차갑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영지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이기도 했죠.”
번쩍!
순간 조용하던 백작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거 아는가? 사실 백작 부인은 자살한 걸지도 모른다는군. 그녀 스스로 쏟아져 내리는 흙더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지, 아마?
-뭐어? 세상에 주신이시여! 아니, 대체 원인이 뭐라고 하나?
부인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져나간 소문은, 어느새 그녀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하고, 그 원인에 대한 근거 없는 추측까지 재생산하기에 이르러 있었다.
아무리 눈과 귀를 막아왔다 한들, 백작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단지 믿고 싶지 않아 지금껏 부정하고 있었을 뿐.
“그럴 리 없소! 황녀께서 뭔가를 잘못 알고 계신 게요……!”
백작은 당장이라도 아멜리아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벌떡 일어났다.
사랑하는 부인이 절대 그럴 리 없다. 마가렛을, 그리고 나를 두고 어떻게 쉽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가 미처 불경죄를 저지르기 전에-
쿠웅!
갑자기 황녀로부터 엄청난 기세가 쏟아져 내려, 백작은 그 자리에서 바짝 굳어버렸다.
“……!?”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늘 한 떨기 장미처럼 연약하기만 한 줄 알았던 황녀가, 언제부터 이런 기세를 뿜어내며 사람을 압박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일까.
“바서스트 백작.”
전에 보지 못한 냉정한 눈을 한 황녀가, 얼어붙은 백작을 향해 나직하게 경고했다.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보세요. 부디 백작 부인의 깊은 뜻을 더는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
“1급 대형 악마종이 바서스트령에 나타났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바로 백작의 사냥터에 말입니다. 만일 백작 부인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누가 가장 먼저 이단 재판부의 의심을 샀으리라 보십니까?”
아멜리아 황녀의 지적은 정확했다.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인명 피해가 백작가에서 나왔기에, 그리고 성황가가 기꺼이 그 죽음에 애도를 표했기에. 바서스트 백작가는 겨우 피해자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하나 더 있습니다. 사냥터 서쪽에서 발견된 붉은 저주의 흔적이, 영지의 중앙을 가로질러 백작저까지 똑바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큰 재난을 겪은 바서스트령의 신민들과, 고귀한 희생을 선택하신 백작 부인의 명예를 위해 따로 이 사실을 공표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격렬하게 흔들리는 바서스트 백작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멜리아는 오랜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지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머나먼 미래이기도 한 기억.
당시 아멜리아는 로한의 왕실에 자주 드나들던 차가운 얼굴의 여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로메인의 곁에서 마치 심복처럼 서 있곤 하던, 지금은 관에 들어가 있는 낯익은 여인의 얼굴.
-저 제국인은 대체 누구길래 로한의 왕실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거지?
-델크로스에서 온 바서스트 백작이라지? 독거미 같은 여인이오.
-맞아. 독거미가 아니면 뭐겠소? 남편은 물론, 백작위의 정당한 후계자인 딸까지 제 손으로 죽였다고 하니.
소문에 의하면 여인의 남편과 딸은 악마 숭배자와 접촉한 혐의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처단한 후, 이단 재판부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바서스트가의 작위를 지킬 수 있었다고.
-세상에! 제 손으로 직접?
-아무리 그렇다곤 해도 쉽지 않은 선택이오. 참으로 독한 여자로군.
아멜리아가 다른 곳을 제쳐두고 바서스트 백작 영애의 티파티에 참석 의사를 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결국 로메인의 부하가 되는 바서스트 백작, 즉 지금의 백작 부인의 미래를 아는 까닭에.
‘그래서 천천히 이들과 가까워지며, 백작 부인이 그러한 무정한 선택을 한 이유를 알아보려 했었지.’
설마 부인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리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어쩐지 그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래에도 유능하기로 소문났던 여자였으니, 악마종의 출현으로 차후 영지가 어떠한 위기를 맞을지 충분히 예상했을 테지.
그리고 어쩌면.
‘그녀는 이미 로메인의 지배를 받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붉은 저주의 문양이 저택까지 이어진 것은 아마 우연이 아니겠지. 그러니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선택한 걸지도 모를 일이야.’
괴상한 술수로 곧잘 사람을 홀리곤 했던 로메인이다.
미래에 그의 심복이 되었던 백작 부인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쳤을 가능성을, 아멜리아는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저주라니, 그런…. 부인은 그런 일과는 아무런 상관…….”
연신 믿기 힘들다는 듯 중얼거리던 백작은, 순간 뭔가 짐작 가는 것이 있는 듯 천천히 말끝을 흐렸다.
불현 듯 자신을 향해 외치던 부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윌리엄! 저택에 찾아오는 수상한 손님을 조심하세요. 그는 오래전부터 바서스트 백작가를 오가며 뭔가를 꾸미고 있었어요!
누군가가.
이 사태의 원흉이 된 누군가가 있다!
백작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아멜리아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심하십시오. 고인에 대해 괜한 의심을 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백작 부인의 명예를 믿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단언하는 아멜리아의 얼굴에는 조금의 의혹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백번이고 믿어줄 수 있으리라. 이미 죽은 사람만큼 무해한 자가 세상에 또 어디 있으랴.
“하지만 바서스트 백작. 이 모든 일들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재난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붉은 저주를 이용해 바서스트령에 악마종을 소환하고, 백작 부인을 기어이 죽음으로 내몬 자가 지금도 어디선가 이 영지를 지켜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
“황궁에서는 이번 일을 끝까지 추적할 생각입니다. 이미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이 붉은 저주를 바탕으로 조사에 착수했으며, 조금씩 그자들의 정체에 대한 실마리를 잡아가고 있어요. 그들의 음모를 파헤치고 이를 사전에 완전히 막아내는 것, 그것만이 제 일생일대 과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백작을 향해 쏟아내던 기세를 거두어들이며 부드럽게 제안했다.
“그러니 바서스트 백작, 내게 부디 협조해 주겠습니까? 제국을 뒤흔들려는 음흉한 세력들을 막고,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한 백작 부인의 넋을 위로할 수 있도록.”
윌리엄 바서스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며칠 동안 바짝 말라버린 백작의 모습은 이미 반쯤 죽어버린 시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직 그의 눈동자.
슬픔과 의문, 그리고 분노가 뒤섞여 복잡한 빛으로 일렁이는 형형한 눈빛만이, 백작의 몸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부분이었다.
“…저하!”
마침내 결심을 굳힌 바서스트 백작이 황녀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사랑하는 부인을 둘러싼 의혹을 기꺼이 눈감아 주겠노라며 손을 건넨, 의심할 여지없는 성황의 대변자를 향해.
“부디 제가, 이 바서스트가 그 과업에 동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백작.”
“저의 충성을, 필요하다면 영지의 모든 것을 저하께 바치겠습니다! 제국의 안위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나이다! 그 대가로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저하의 과업이 끝나는 그날…….”
거기가지 말한 윌리엄 바서스트는, 열렬한 눈빛으로 황녀를 올려다보았다.
그 강렬한 눈동자에 번뜩이는 것은, 언젠가 아멜리아가 성황에게 보였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광망이었다.
“오직 부인을 죽게 만든, 그자 하나만을 제 손에 넘겨주십시오!”
Chapter 69: Chapter 369
Chapter Text
369. 돌아온 탕아 (4)
동굴 안에 앉아 있던 로메인은 갑작스러운 오한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그저 밤공기가 차갑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지금의 둔한 몸은 그의 본체가 아니기에, 어지간히 극심한 온도 차가 아니고서는 추위를 감지하기조차 힘들었으니까.
“무슨 일인가, 로메인?”
맞은편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갈래머리 소녀, 탐욕이 의아한 듯 물어온다.
로메인은 잠시 한쪽 눈을 감고서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다가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탐욕의 군주시여. 그저 기분 탓이었나 봅니다.”
오랜 시간 안락한 은신처가 되어주던 오두막을 잃은 로메인은, 두 마왕들의 닦달에 부랴부랴 새로운 접선 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델크로스 남쪽에 위치한 이 작은 동굴이었다.
황도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으면서, 현재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바서스트령과도 제법 멀찍이 떨어져 있는 곳.
급하게 마련하느라 아직은 변변한 가구 하나 없는, 춥고 누추한 장소였다.
인간의 감각에 둔한 두 마왕들이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는 못하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랄까. 물론 좁은 동굴 안에 쪼그리고 모여 앉은 모습들이 지독히도 궁상스럽긴 했지만.
“아, 그나저나 정말 미쳐버리겠네!”
늙은 사제의 모습을 한 파종이 분통을 터뜨렸다.
“어쩌면 일이 이 지경으로 꼬일 수가 있는 거지? 잠시 빚을 갚으러 다녀온 것뿐인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이렇게까지 일이 최악으로 치달을 수가 있냔 말이야!”
애열의 독촉에 못 이겨 강제로 판게아 클로니클에 접속해 있는 동안, 파종은 엄청난 양의 마기를 잃고 말았다.
만일 거기서 조금만 더 나갔더라면, 휘하의 마왕들이 세대교체를 하겠답시고 들고 일어났을 정도로 심각한 양이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황도 주변에 겨우 심어 둔 씨앗이, 왜 하필이면 그때 멋대로 깨어나 그 난리를 치냔 말이야!”
“이 근방에는 제법 많은 ‘균열의 흔적’이 있다. 인과를 거스르고 법칙과 경계를 파괴하는 [재앙]의 흔적들이지. 파종, 혹시 네가 부주의하게 그 흔적 근처에 씨앗을 숨긴 것이 아닌가?”
작은 소녀의 지적에, 노인이 벌컥 화를 냈다.
“이봐, 탐욕. 내가 그 정도로 생각이 없는 줄 아는 거냐?”
“네 권속은 분명 균열의 영향을 받아 폭주한 듯 보였다만.”
“아, 물론 씨앗 몇몇은 균열 근처에 심어두긴 했어! 나중에 제대로 델크로스를 뒤흔들려면, 언젠가는 균열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내 나름의 대비를 다 해뒀다고!”
파종이 황도 근처에 심어둔 씨앗들은, 애열로부터 비싼 대가를 치르고서 구해온 규상 세계의 산물이었다.
정해둔 조건이 아니면 절대 활성화되지 않는 규상 세계의 육체야말로, 고위 마왕의 권속이 풍기는 짙은 마기를 몰래 숨기는 데 제격이었으니까.
덕분에 지금껏 황도를 오가던 수많은 성직자들이, 아무도 그 씨앗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던 게 아닌가.
“물론 ‘균열의 흔적’이 권속을 불안정하게 만들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예상했지. 그래서 만에 하나의 사태에 대비해, 따로 컨트롤러를 만들어 근처에 숨기는 수고까지 했단 말이야!”
“컨트롤러?”
“그래. 그것도 애열로부터 비싸게 산 물건이다. 수틀리면 조건에 상관없이 권속을 통제할 수 있는 절대적인 물건이지. 씨앗 근처에 잘 파묻은 다음에, 누가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커다란 바위로 덮어두기까지 했다고!”
아마도 그 바위야말로, 성진이 상주기사들을 시켜 붉은 돌멩이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장소였으리라.
물론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무너져버린 지금, 파종이 그 사실을 알 방도는 없었지만.
“이익!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것들이 아까워서 죽을 것 같아!”
점점 열을 내는 파종을 보다 못한 로메인이 그를 달랬다.
“진정하십시오, 파종이시여.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다행히도 이번에 잃은 것은 안배하신 씨앗들 중 겨우 하나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뭐야?”
“더는 잃어버린 것에 연연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성황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질지를 예측하고, 서둘러 이에 대응하는 수를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안배한 것들을 허망하게 잃은 자는 파종뿐만이 아니었다. 로메인 역시 지난 수년간 준비해왔던 대부분의 기반을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아멜리아 황녀를 빼돌리기 위해 공들여 만든 회로는 오두막과 함께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캐도건 남작의 살롱을 장악하기 위해 포섭한 앨튼 상단주는, 강력한 악마종이 출현하자 제풀에 놀라 멀리 줄행랑을 치고 말았지.
언젠가 회심의 한 수가 되리라 여겼던 바서스트 백작 부인은 또 어떤가. 로메인이 혼란과 충격으로 잠시 통제를 잃은 사이, 그대로 산사태에 휘말려 어이없이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심지어는 ‘균열의 흔적’까지도 모조리 발각될 판이다. 이미 악마종 출몰지부터 바서스트 백작저에 이르는 모든 길목을, 황궁에서 나온 성기사들이 점령하고 샅샅이 뒤지는 중이 아닌가!
‘일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냐고?’
로메인은 어쩐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지금도 눈을 감기만 하면, 거대한 늑대를 타고 악마종을 향해 돌진하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으니까.
‘모레스 황자……!’
3황자가 경전에 나오는 신수 [바람]을 타고서, 주신의 성스러운 은총을 내뿜어 악마종을 끝내 침몰시켰다는 소문은 대륙에 이미 모르는 자가 없었다. 지금도 황도에서는 두 사람만 모이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댔으니까.
모레스 황자가 성 바스티안의 환생이라느니, 그게 아니면 성황가에서 새로운 성인이 탄생했다느니 하는 터무니없는 소리들이다.
‘이 모든 일의 뒤에는 분명 델크로스의 수호자가 있겠지.’
성황의 새로운 말.
암흑 교단이 오래전부터 예비해온 자.
그리고, 누구도 감히 예측할 수 없는 절대적인 변수.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이해가 얽혀 있는 판세를, 그런 미지의 존재가 멋대로 휘젓는 꼴을 로메인은 결코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자, 이렇게 두 눈으로 보고도 모르겠습니까? 위대한 군주들이시여. 3황자는 이미 암흑 교단의 영향에서 벗어나, 성황의 손짓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저번부터 누누이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로메인은 매번 위험을 무릅쓰고서, 고위 마왕들에게 그를 이만 판세에서 배제하도록 은근이 권유해왔던 것이다.
“보시다시피 [예비된 자]의 존재는 군주들께 있어서 결코 이로운 것이 아니… 컥!”
하지만 그가 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강한 손아귀가 그의 로브를 힘껏 잡아챘다. 약이 바싹 오를 대로 오른 파종이었다.
“가소롭구나. 지금 한가롭게 [예비된 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한 손으로 로메인의 숨통을 바짝 조이던 노인은, 다른 손에 쥔 돌멩이 하나를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간혹 그 주위로 불완전한 코드가 점멸하다 사라지는 붉은색의 돌이었다.
“이것을 봐라. 하찮은 인형아. 내가 저 난리통에서 찾아낸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끄으…….”
“왜 마침 내 권속이 폭주한 곳에 이런 것들이 흩어져 있지? 왜 여기에서 네놈의 비루한 기척이 느껴지느냔 말이다!”
로메인이 식은땀을 흘리며 재빨리 변명했다.
“이, 이건 우연입니다, 파종이시여! 저는 그저 델크로스의 수호자에게 덫을 놓으려 했을 뿐…….”
“닥쳐라! 딱 봐도 수상한 물건이 아닌가? 이번 사태가 절대 네놈의 탓이 아니라고 내 앞에서 확실하게 말할 자신이 있느냐?”
겉으로는 질문하는 척하지만, 이미 파종은 모든 것이 로메인의 탓이라고 심증을 굳힌 듯했다. 반가면 위로 쏟아져 내리는 강한 살의는 진짜였으니까.
“자, 어서 말해 봐라. 내가 더 이상 네놈의 오만방자함을 봐줄 이유가 있는가?”
“큭!”
로메인은 덜덜 떨려오는 이를 악물었다.
오랜 시간 부정하며 지내왔으나, 역시나 그의 본질은 한낱 인간이었다. 한 차원의 존폐마저 좌지우지하는 고위 마왕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작은 벌레만도 못한 미물에 불과할 따름.
저들의 강한 시선만으로도 언제든 납작하게 눌려서 죽어버릴 수 있는 운명이다.
‘하지만… 이대로 끝나서는 안 돼! 절대로 이들 고위 마왕들과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수 있는 절대자의 손아귀에서, 로메인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떨리는 입을 열었다.
“인간의 거짓 따위는 단숨에 꿰뚫어보시는 위대한 군주 앞에서,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 사태가 제가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럼 네 잘못임을 인정하는 거냐?”
“저의 준비가, 예기치 않게 위대한 군주의 계획에 약간의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번쩍-
노사제의 눈에서 흉흉한 녹색 안광이 뻔뜩이는 것을 본 로메인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비, 비록 그렇다고 한들, 저에게는 당신의 자비를 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모든 질병의 군주시여! 당신이 제게 큰 빚을 지셨으니까요!”
“…뭐라?”
“제가 아니었다면 어차피 당신의 안배는 모두 무용지물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대로 델크로스 차원에서 역소환되어, 오랜 시간 강림의 기회만을 노리며 차원 밖을 맴돌아야 했겠지요.”
“……!”
파종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확실히 그런 일이 있기는 했지. 괴상한 불꽃에 휩싸여 역소환되려는 찰나, 때마침 저 건방진 인형이 지금의 몸을 제공해 주지 않았던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런 형편없는 몸 따위가 무슨 빚……!”
파종은 왈칵 인상을 썼지만, 어느새 로메인을 움켜쥔 손아귀에서는 스르륵 힘이 빠지고 있었다.
다 늙어 빠졌다곤 해도, 이 노사제의 몸이야말로 차원에서 튕겨나갈 뻔했던 파종을 이 세계에 붙어 있게 만들어 준 유일한 수단이었으니까.
델크로스의 수호자가 빤히 두 눈을 뜨고 있는데, 언제 다시 대규모의 공양 의식을 치르고 이 차원으로 강림할 기회를 노린단 말인가.
“끄응…….”
결국 파종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물러나자, 잠시 비틀거리던 로메인이 조심스럽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흥! 자만하지 마라. 널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아직 완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파종이 매서운 눈으로 로메인을 노려보았다.
“인형 주제에 용케도 주인의 흉내를 내고 있기에, 조금은 쓸모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 내버려두는 것뿐이야. 다들 구분하기 귀찮아서 편의상 널 [인형사] 취급하곤 있지만, 본래의 인형사 또한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지 않은가? 수틀리면 우리는 널 버리고 그쪽과 손을 잡을 수도 있어.”
“글쎄요.”
아직 잔 떨림이 남아 있는 로메인의 입꼬리가 비식 휘어지며, 일그러진 미소를 그렸다.
“제가 본래의 [인형사]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이미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질병의 군주시여.”
“뭐? 네가 언제?”
“지금 그 증거를 직접 쥐고 계십니다.”
파종은 어안이 벙벙하여 손에 든 돌과 로메인의 반가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모든 차원에서 오직 유일하게, 본상 세계의 물건에 코드를 덧입히는 능력 말입니다.”
“엥?”
“그 돌은 언뜻 보기에 규상 세계의 물건처럼 보이고 규상 세계의 물건처럼 기능하겠지만, 정말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가 본상 세계의 돌 위에 직접 코드를 그려 넣었을 뿐이니까요.”
“……!”
잠시 멍해졌던 파종이 마침내 그 말의 뜻을 파악하곤 커다랗게 눈을 치떴다.
“…맨손으로 규상 세계의 법칙을 그려내? 대체 어떻게? 네가 무슨 수로?”
“글쎄요. 이래봬도 인형이 되기 전의 저는, 제법 재능 있는 프로그래머였으니까요.”
로메인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파종이 황당한 표정으로 작은 소녀를 돌아보았다.
“오호라…….”
노인의 눈이 가늘어지며, 자글자글한 눈매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럼 그렇지. 탐욕, 네가 웬일로 시구르트 시구르슨이 아니라 굳이 버려진 인형을 선택했나 했더니. 녀석에게 이런 비밀이 있었단 말이군…….”
* * *
성진은 고열과 고열을 반복하며 좀처럼 몸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가 체감하지 못하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보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즈음에 이르러, 성황은 겨우 로건을 임시 치료실에서 벗어나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간 진심으로 반성했다고 생각한다. 아마 아바마마께서도 그 점을 헤아려 주신 거겠지.”
로건은 순전히 성황이 자중하라는 의미로 치료실에 머물라 지시한 줄 아는 모양. 하지만 성진은 성황의 결정 이면에 있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로건 녀석, 그때 영혼에 제법 큰 손상을 입은 것 같았단 말이지.’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 쉽게 스스로의 영혼을 불사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아마도 소드 마스터의 초인적인 의지는 그런 엄청난 짓을 가능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성황은 이를 알아차렸으리라. 성진을 치료하러 올 때마다, 매번 로건에게도 잊지 않고 신성력을 쏟아붓는 걸 보면 말이지.
그리고, 드디어 녀석의 영혼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가 영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마왕 놈의 협조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최근 염상 결정 속에 콕 틀어박힌 마왕 놈은, 이따금 훌쩍거리기만 할 뿐 좀처럼 성진의 부름에 대꾸하지 않았으니까.
‘이놈은 대체 언제까지 우울해할 참이야? 매일 곰 고기 수프를 먹는 것도 슬슬 질린단 말이다.’
그렇게 어영부영 임시 치료실에서 지내는 중, 마침내 로건과 시슬레가 키프로스로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결국 오웬 형님을 못 보고 가는 것이 아쉽다. 부디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형님이 황궁에 머물러 있으면 좋을 텐데.”
악마종 출몰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부 전선으로부터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1황자 오웬이 바르샤의 대부족회의에 참가하여, 제법 장기간의 안정적인 휴전 협정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덕분에 오웬은 몇 년 만에 황도로 돌아오게 되었고, 황궁은 지금 그의 개선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시슬레, 아직도 너는 황도에 남을 생각이 없니? 오웬 형님은 특히나 널 귀여워했잖아. 모처럼 황도에 왔는데 네가 없다면 형님이 무척 섭섭해할 거다.”
로건의 물음에 시슬레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키프로스로 떠날 예정이라고 진작 편지를 보냈어. 휴전이 꽤 길어질 모양이니까, 아마 오웬 오라버니라면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줄 거야.”
성진은 이미 시슬레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일전에 꼬맹이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으니까.
-토벌대가 꾸려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자꾸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어. 저기 키프로스의 검은 해안에서, 기분 나쁜 뭔가가 로건 오라버니를 집어삼키려 몸을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성진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시슬레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라, 꼬맹아.”
“뭐? 오라버니. 언제부터 은근슬쩍 날 꼬맹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럼 꼬맹이를 꼬맹이라고 하지, 뭐라고 부르냐?”
하지만 막상 대규모의 토벌대가 황도를 떠나는 날, 성진은 또다시 고열이 오르는 바람에 그들을 배웅하지도 못하고 치료실에서 끙끙거려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척척척!
갑자기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벌컥! 하고 치료실 문이 세차게 열렸다.
“모레스 이 망둥이 자식!”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꼴사나운 가마우지 깃털을 잔뜩 머리에 꽂은 낯익은 호구 자식이었다.
“너 인마! 아무리 몸살이 났기로서니, 형님이 오셨는데 인사도 없이……!”
기세 좋게 소리치던 오웬은, 침상에 누워 있던 성진과 눈이 마주치자 순간 멍청히 입을 벌렸다.
“…모레스?”
“그래. 시끄러워, 멍청아.”
“……!?”
성진이 뚱하게 대꾸해주자, 오웬의 눈동자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세차게 흔들렸다.
“너… 너, 인마… 괜찮은 거냐? 대체 얼마나 아팠기에 사람이 완전 반쪽이 된 거야?”
Chapter 70: Chapter 370
Chapter Text
370. 돌아온 탕아 (5)
1황자 오웬이 돌아온다는 소식은, 대형 악마종의 출현으로 어수선했던 황도 분위기를 쇄신하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그가 세운 공로는 대단한 것이었다.
지난 수년간 남부 전선을 성공적으로 안정화한 데다, 델크로스 건국 이래 이교도들과 처음으로 공식적인 휴전 협정을 성사시켰으니까.
물론 이 모든 일이 그저 갑작스럽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수년째 전선이 고착화되어감에 따라, 무력 충돌이 현저히 잦아들고 일부 온건한 부족들과는 알음알음 교역까지 이뤄지던 실정.
그런 분위기 속에서, 대부족회의에 참석한 오웬이 호전적인 와카나 투사이를 효과적으로 압박한 것이 주요하게 작용했으리라.
물론 거기에는 상태창 씨의 자잘한 지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돌발 퀘스트 ?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퀘스트 등급 : F]
[소지하고 있는 독침 통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실수인 듯 흘리고, 재빨리 도로 회수하십시오. 물론 이것의 출처에 대해 섣불리 언급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중요한 자리에 시답잖은 장난감을 가져 온 당신에게 일부 부족장들이 불만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하나 그게 무슨 상관일까요? 그것을 보아야 할 단 한 사람의 시선만큼은 확실하게 잡아끌 수 있을 텐데요.]
[보상 : 1P 캐시]
[*본 상품은 판게아 클로니클 상점 창에서 사용 가능합니다.]
퀘스트 보상이 유례없이 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매번 귀찮은 듯 틱틱거리는 상태창 씨지만, 이번만큼은 순전히 오웬을 돕기 위해 친절하게 지시를 내려주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대부족회의의 분위기를 주도하기 위한 자잘한 퀘스트는 계속되었다.
[깜짝 퀘스트 ? 칭찬은 마주리도 춤추게 한다!]
[전투 중 만났던 마주리 부족 전사들의 활 솜씨가 인상적이었음을 언급하고, 전사한 이들의 명예를 드높여 주십시오.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부족장의 마음이 당신에게로 크게 기울 것입니다.]
[돌발 퀘스트 ? 새로 사귄 친구를 소개하라!]
[당신과 볼란타 부족의 친분은 이미 유명합니다. 하지만 부족장들은 당신의 호의가 그저 볼란타 부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지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새로 사귄 푸르마 부족의 친구가 있음을 강조하십시오. 다른 부족장들에게는 호감을, 그리고 늙은 여우에게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라면 오웬은 독침을 와카나 투사이 앞에 내밀며, 정정당당하지 못한 암살 시도에 대해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필요하다면 푸르마의 바르토자를 증인으로 내새워 그녀를 거세게 몰아붙이려 했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상태창 씨의 방법이 옳아. 자칫하면 바르샤 부족 전체가, 자신들을 모욕하고 있다고 여기며 반발할지도 모른다.’
조금만 영역을 침범해도 서로 피 터지게 싸우는 부족들이었지만, 외부의 적 앞에서는 아무래도 강하게 단합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오웬은 충실하게 상태창 씨의 퀘스트를 따르며, 마침내 온건한 방법으로 휴전 협정을 끌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호오…….”
다행히도 와카나 투사이는 다 되어가는 휴전 협정에 어깃장을 놓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카라잔의 늙은 여우가 독침이나 바르토자의 고발을 두려워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부족장들을 열심히 설득하는 동안, 그녀는 대단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오웬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지금에 와서 오웬의 추측하기에, 와카나 투사이는 당분간 힘의 소모를 피하고 내실을 다지기로 결심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최근 오웬과 친분을 맺으며 이런저런 교역의 이점을 차지하던 볼란타가, 근방의 해수들까지 성공적으로 소탕하며 어느새 카라잔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급부상하는 중이었으니까.
어쨌든, 성공적인 휴전협정 후 이런저런 뒤처리까지 끝낸 오웬은, 추수감사절로부터 정확히 1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남부 전선을 떠날 수 있었다.
* * *
히히힝!
“워워,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지.”
갑자기 말을 세우며 오웬이 지시하자, 뒤따라오던 병사가 의아한 듯 물었다.
“네? 하지만 저하. 아까 점심 식사를 하며 이미 한차례 쉬지 않았습니까? 황도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까마득합니다.”
“우리 같이 힘만 센 무식쟁이들 사정만 생각하면 안 되지. 병약하신 바트 사제님도 함께 계시지 않나?”
오웬의 지적에, 병사가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건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사제님은 긴 여행길이 무척 힘드실 겁니다.”
오웬은 현재 열댓 명의 병사들과 포교단 일부를 데리고 황도로 귀환하는 중이었다.
신성제국 1황자의 행렬치고는 대단히 초라했지만, 전선에서 함부로 병력을 빼돌릴 수는 없는 일.
거기다 오웬 자신이 전선에서 가장 강한 전력에 속하다 보니, 따로 많은 호위 인력을 둘 필요도 없었다.
그런 그들의 뒤를 작은 마차 하나가 따라오고 있었다. 남부 전선의 살아 있는 성인이라 알려진 바트 사제의 마차였다.
언제는 돌아가라 돌아가라, 노래를 불러도 꿋꿋하게 전선에 눌러앉아 있더니만, 이번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웬과 함께 황도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바트 사제님은 간혹 뵐 때마다 늘 불안해 보이지 말입니다. 그냥 전선에 남아 계시는 쪽이 좋지 않았겠습니까?”
“모르는 소리. 남부의 환경이 사제님의 건강에 무척 해롭다지 않나. 이참에 우리를 따라 올라가시는 쪽이 사제님의 건강에도 훨씬 좋을 거야.”
오웬은 말에서 내리며 느긋하게 대꾸했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지. 이미 휴전 협정도 끝났겠다,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고.”
오웬은 이미 시슬레로부터 로건과 함께 키프로스로 떠난다는 서신을 받은 뒤였다. 아무리 서둘러 봐야 결국 그들과 엇갈리게 될 테니, 굳이 무리해서 길을 재촉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 막내의 얼굴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지만…….’
지난 몇 년간 힘들게 인내해 왔으니, 그리움을 조금 더 달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황궁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만나게 되겠지. 두 사람이 키프로스에서 돌아올 때까지 충분이 오랜 시간 머물 예정이니까.
‘황도에 도착하면 바로 원숭이 망루에 들러 뉴비의 행방부터 수소문해 볼까?’
오웬의 뇌리에 작은 아기 산양의 뚱한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뉴비 녀석, 우리에게 제대로 말은 안 했지만 뭔가 팍팍하게 사는 눈치였단 말이지. 오웬이 그를 찾아내면 분명 어떻게든 도와줄 방법이 있을 터.
‘아, 하지만 일단은 가족들 얼굴을 먼저 봐야지!’
아버님과 아멜리아, 그리고 쌍둥이들을 만나서 실컷 회포부터 풀자! 기회가 되면 겸사겸사 망나니 모레스 녀석도 들여다보고.
‘흠. 이렇게 생각해 보니, 역시 모레스도 조금은 그리운 것 같단 말이야.’
그렇게 얄미운 놈이라도, 막상 얼굴을 마주한다고 생각하니 무척 기대가 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이토록 설레고도 즐겁기만 한 것이다.
그렇게 혼자서 싱글싱글 웃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옆으로 바트 사제를 전담하는 수행원이 지나가기에, 오웬은 그를 재빨리 불러 세웠다.
“이봐. 바트 사제님은 좀 괜찮으신가? 왜 휴식 중에도 좀처럼 마차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지?”
“헉! 저하?”
그러자 수행원은 왠지 과하게 놀라며 부산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식사는 제때 잘 가져다 드리고 있는 거겠지?”
“여, 염려 마십시오. 제가 잘 챙기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이왕 휴식하고 있으니 잠시 바람이라도 쐬시자 전해드려 주겠나?”
“그것이, 저, 폐… 사제님께서는 지금… 주, 주무시고 계십니다!”
“뭐?”
오웬의 눈썹이 꿈틀 솟아올랐다.
“지금 사흘 내내 주무신다는 답뿐이군. 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사람이 매시간 잠만 잘 수 있단 말이야?”
“하지만 저, 정말로 주무시고 계신 것을 어찌합니까?”
“이 사람 좀 보게. 안 그래도 몸이 약하신 분인데, 사람이 계속 깨어나질 못하면 이상하다고 생각해야지! 지금은 괜찮으신 건가? 잠시 내가 보러 가…….”
오웬이 마차를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자, 혼비백산한 수행원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아아,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여행으로 무척 피곤하니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고 폐, 사제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음?”
“감히 저하의 앞길을 막아 송구하옵니다! 하나 바트 사제님께서! 절대! 절대! 깨우지 말라고 하신 터라……!”
수행원은 필사적이었다.
만일 지금 1황자가 마차 문을 열게 되면 어찌 되는가. 성황의 영혼이 임하지 않아 맥이 완전히 멎어 있는 호문클루스를 마주하게 되리라.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래?”
한데 완강하게 마차로 향할 것만 같았던 1황자가, 우뚝 발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뭐, 알았네. 사제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셨다면야. 뭐든 본인의 의사가 제일 중요한 거지.”
“그… 네?”
“생각해 보니 예전에 한창 전선의 상황이 다급할 때도, 사제님은 늘 한나절 이상을 죽은 듯이 잠만 주무시곤 했었어. 그리 이상할 것도 없군.”
툭툭.
오웬은 당황한 수행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직하게 덧붙였다.
“그나저나 자네 말이야. 요 며칠간 점점 살이 찌고 있지 않나? 꼭 한 끼에 두 사람 분을 먹어치우는 사람처럼 말이지.”
“……!”
“자네만 챙겨 먹지 말고, 사제님의 식사도 제대로 챙겨 드리게. 알겠나?”
바짝 얼어붙은 수행원은 그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1황자는 사람이 예리한 건지 둔한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 * *
그렇게 해서 전선을 떠난 지 대략 보름이 경과한 후, 오웬은 보무당당하게 황도로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그런 오웬을 맞이한 것은, 화려하게 준비된 개선식과 황도 신민들의 거대한 함성이었다.
“와아아아!”
“남부 전선을 지키는 불패의 영웅!”
“오웬 저하 만세!”
오웬은 순간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얼핏 개선식이 있을 거라는 소식은 들었지. 하지만 이런 풍성한 환대를 생각지도 못했던 오웬은 조금 당황하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알록달록한 꽃과 리본으로 장식된 건물들. 대로를 따라 길게 도열하며 예를 갖추는 근엄한 황도 수비대의 모습.
그리고 손수건을 흔들며 소리 높여 외치는 신민들의 물결.
“이건…….”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솟아 오른다.
오웬은 지금껏 성황을 아버님이라고 친근하게 불러왔다. 다른 황자?황녀들과도 친형제처럼 허물없이 지내곤 했지.
어디 그뿐인가. 오랜 시간 부대껴 온 남부 전선의 병사들은 어느새 진심으로 그를 따르고 있다.
그럼에도 오웬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성황가의 황자로서 떳떳하게 대우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황도의 모든 이들이 그를 자랑스러운 성황가의 1황자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는 어느 샌가… 정말로 성황가의 일원이 된 거야!’
바로 그때, 오웬의 눈앞에 뾰롱 하고 새로운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깜짝 퀘스트 ? 신성제국 1황자로서 부끄러움 없는 모습을 보여라!]
[신민들은 당신에 대해 무척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타지에서 명성을 떨쳐왔으나, 정작 신민들의 앞에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수수께끼의 황자였으니까요. 자, 바로 지금입니다! 어깨를 쭉 펴고 이 자리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지위와 명성을 과시하십시오. 비록 당신의 너저분한 차림새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황자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만, 당당하게 뿜어내는 강한 자신감은 이 모든 흠을 덮고도 남음이 있을 테지요.]
[보상 : 2P 캐시]
[*본 상품은 판게아 클로니클 상점 창에서 사용 가능합니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 이런 솔직하지 못한 상태창 씨 같으니. 그냥 자신감을 가지라고 간단하게 격려해 줘도 될 텐데.
척척척.
오웬이 상태창의 지시대로 어깨를 펴고 말을 몰자, 대기하고 있던 황도 수비대가 일제히 그의 뒤로 따라붙으며 초라한 규모의 행렬을 감춰 주었다.
Chapter 71: Chapter 371
Chapter Text
371. 돌아온 탕아 (6)
황도는 연이은 개선식에 들떠 있었다.
지그스문트령에서 전공을 세운 로건 황자와 모레스 황자의 개선식이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렇게 큰 경사가 연이어 생긴다는 것은, 곧 주신께서 델크로스를 굽어 보살피신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저기 오신다!”
“와아아아!”
“남부 전선을 지키는 불패의 영웅!”
이윽고 환호와 함께 나타난 오웬 황자의 모습에, 황도 신민들은 일순 가벼운 충격을 느꼈다.
이제까지 봐온 성황가의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무척이나 낯설고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는 중이었으니까.
“저분이… 오웬 저하?”
그는 17세라는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장성한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허름하고 편안한 경갑 차림에, 자유분방하게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
심지어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여기저기에는, 야만인들이나 쓸 법한 깃털 장식들이 줄줄이 꽂혀 있기까지!
사제들처럼 머리를 짧게 정리하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델크로스의 신민들에게, 그 차림새는 무척이나 낯선 모습이 분명했다.
이는 호위기사 알리샤의 부재 때문이었다. 만일 그녀가 오웬을 따라왔다면, 정신 사나운 가마우지 깃털 따위는 모조리 떼다 버리고, 좀 더 번듯한 차림새가 되도록 쉴 새 없이 힐난했을 텐데.
“대단…하시군!”
하지만 오웬의 당당한 태도와 자신감 넘치는 표정 때문일까, 황도 신민들은 곧 그의 모습에 대해 이런저런 감탄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하의 저 늠름하고 훌륭한 기도를 좀 보게!”
“이교도들이 전장에서 오웬 황자님을 보기만 해도 벌벌 떤다더니, 그게 다 빈말이 아니었던 모양이야!”
“참으로 강해 보이시는군! 그야말로 신성제국을 수호하는 주신의 기사일세!”
그렇게 생각하니, 어째 1황자의 뒤에서 찬란한 후광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폐… 사제님?! 일어나셨습니까? 한데 왜 갑자기 허공에다 대고 신성력을 일으키시는 건지요?”
뒤따라오는 마차에서 일어난 작은 소요 따위, 그들이 알 리가 만무했다.
오웬 황자가 주신의 광영 속에 있는 자임을 확신한 신민들은, 이내 소리 높여 그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오웬 저하 만세!”
“오웬 저하 만세!”
그렇게 환호 속을 지나쳐 황궁 앞에 이르자, 오웬의 기억 속 모습보다 훌쩍 성숙해진 소녀가 그를 맞이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예의 부드러운 장밋빛 머리카락을 확인한 오웬이,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아멜리아!”
오랜만에 소리 내어 부르는 이름.
어쩐지 목소리가 조금 갈라지는 것을 느낀 오웬은, 새삼 자신이 성황가의 형제들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녀가, 곧 전과 변함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드디어 왔구나! 잘 돌아왔어, 오웬 오라버니.”
“그동안 잘 지냈냐? 너 정말 많이 변했다. 그러니까, 뭔가…….”
반갑게 말을 건넨 오웬은, 곧 그가 느낀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 말끝을 흐렸다.
“…정말, 어른스러워졌어.”
늘 오웬을 향해 배시시 웃곤 하던 상냥한 소녀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많이 변해 있었다.
키가 훌쩍 자란 것은 물론, 그러잖아도 황도 최고의 미녀라 칭송받는 얼굴이 한층 더 아름다워졌지. 최근 오러 연공을 시작했는지 뿜어내는 기세도 확연히 달라졌다.
하지만 기분 탓일까. 오웬은 그녀에게서 조금 더 본질적인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멜리아만이 알고 있는 과거. 그 오랜 시간 홀로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슬픔이, 도로 어려진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든 희미한 흔적을 남겼음이라.
“너, 정말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걱정스러운 오웬의 물음에, 아멜리아는 푸스스 웃어버리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긴. 오라버니야말로 정말 많이 변했는걸? 너무 커버려서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잖아.”
아멜리아 또한 오웬과 비슷한 충격을 느끼는 중이었다.
과거의 그녀는 오웬이 전선에서 돌아오기 전에 이미 레오나드를 따라 로한으로 떠났었다. 그러니 실제로 그와 얼굴을 마주했던 것은 이미 까마득한 과거의 일.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어수룩한 시골 소년은, 어느새 제국의 전선을 떠받치는 굳건한 전사가 되어 있었다.
“어서 가자, 오라버니.”
반가움이 지나쳐 가슴이 찡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아멜리아가 정겹게 오웬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아버님 폐하께서 오라버니를 기다리고 계셔.”
* * *
“그 호전적인 카라잔의 부족장을 대체 어떻게 설득한 거야? 휴전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부터, 온 대소신료들이 입을 모아 오라버니의 정치적 수완을 칭찬하고 있어.”
특히 외교부의 체사레 추기경의 경우는, 남부 외교 일체를 아예 1황자에게 완전히 일임해야 한다며 열을 올리는 중이라나?
이어진 아멜리아의 설명에 오웬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의외의 반응인데?”
추기경들과 고위 사제들.
그 고루한 치들은 예전부터 오웬을 절대 성황가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었다.
뭐든 그에게서 작은 흠집 하나라도 잡아내려고, 매번 흰 눈으로 그를 노려보곤 하지 않았던가.
“그럴 만도 하지. 오라버니는 정말 엄청난 공을 세웠는걸! 이교도와의 휴전협정이라니. 천년의 제국이 이어져 오는 동안 아무도 이루지 못했던 일을 오라버니가 해낸 거야.”
작은 새처럼 조잘거리는 아멜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오웬은 그리웠던 공기를 폐부 가득히 들이켰다.
오랜만에 밟는 황궁의 땅은 참으로 포근했다.
예전에는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하고 넓기만 한 곳이라고 생각했었지.
한데 지금 오웬은 거짓말처럼 이곳에서 고향의 아늑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리고-
‘…아버님!’
마침내 대회의장에 선 오웬은, 떠날 때와 한 치도 변함이 없는 성황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묘한 감회에 젖어들었다.
“이리 가까이 오라, 오웬.”
명령에 따라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1황자에게, 모두의 시선이 모여든다.
단정치 못하고 자유분방한 그의 차림새는, 빈말로도 신성제국의 황자다운 모습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쉽게 그를 향해 험담을 내뱉을 수 없었다. 마치 대륙 제일의 기사 발타자르를 마주할 때처럼, 황자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세에 모두가 압도당하고 만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아버님.”
옥좌 앞에 다다른 오웬이 예를 갖추자, 잠시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던 성황이 입을 열었다.
“수년 전 위태로웠던 남부 전선의 상황을 경들은 기억하는가. 빠르게 북쪽으로 전진하는 이교도들을 막은 것이 누구인가.”
성황의 담담한 목소리가 대회의장에 울려 퍼진다.
무척이나 그리웠던 목소리. 이상하게 최근에 자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아마도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그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또한 경들은 남부에 고립되었던 3차 포교단이 전멸의 위기에 처했던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 그들을 잔혹한 이교도들의 손으로부터 무사히 구출한 것은 누구인가. 바로 1황자 오웬이 아니던가.”
오웬은 울렁이는 심경을 애써 감추며 그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한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고아였던 나를, 아버님은 기꺼이 자신의 아들이라 불러주셨다.’
그 호칭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오웬은 어느 날 눈앞에 상태창이 나타났을 때, 모든 안락함을 저버리고서 주저없이 남부 전선으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줄곧 퀘스트를 완료하며 부단한 노력을 이어오기까지 했다.
자, 이제는 어떨까. 조금은 성황의 기대에 부합하는 아들의 모습이 되었을까?
“그때 그곳에 나의 용맹한 아들이 있었기에, 이 모든 위협들로부터 제국과 신민들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종국에는 이교도들의 포악한 심성을 잠재우는 데 성공했으니, 그야말로 신성제국의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을 세우고 돌아왔구나. 내 어찌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겠는가.”
차분하게 치하하는 목소리에 오웬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것은 언제나와 같은 냉막한 얼굴이었지만, 그곳에 희미하게 어려 있는 것은 분명 미소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정말 수고했다, 아들아.”
* * *
개선을 기념하는 황궁 정찬이 예정되어, 오웬은 그날만 임시로 청장미궁이 아닌 본궁에 머물기로 했다.
그리고 본궁에서 그를 반갑게 맞이한 것은, 어째서인지 한층 성숙해 보이는 마사인 경이었다.
“마사인 형님!”
반갑게 그를 부르며 다가가자, 기사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오웬 황자님을 뵙습니다.”
“하하, 그런 딱딱한 인사는 제발 그만 두시고요.”
오웬에게 있어 모레스와 비슷할 정도로 껄끄러운 인물이 성황가에 또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근위대 기사인 마사인 경이다.
지금이야 얼떨결에 제국의 1황자로 대접받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오웬은 성황가의 핏줄이 아니다.
반면 황궁 기사로서 깍듯하게 자신을 대하는 마사인 경은 어떤가. 만약 클라노스가 되지 않았다면, 성황 다음으로 황위에 가까운, 정통 황가의 핏줄.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면, 참으로 얄궂게도 교차하는 운명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오랜만에 마사인 경을 마주하니, 껄끄러움은 온데간데없이 반가운 심정만이 가득 들어차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멜리아도 그렇지만, 형님도 어쩐지 많이 변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도 모레스 황자를 모신 뒤로, 하루가 10년과도 같은 마음고생에 시달린 탓일 것이다.
마사인은 허허 웃으며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남부 전선에서 펼치시는 활약은 늘 전해 듣고 있습니다. 먼 타지에서 홀로 그런 공을 세우시다니, 참으로 대견하십니다!”
그리고 오웬은 그로부터 최근 모레스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기억을 잃어요?”
“네,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마사인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최근 모레스의 행적에 대해 설명했다.
지그스문트령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최근에 나타난 악마종 역시 그의 활약으로 무사히 퇴치했다는 것을.
“안타깝게도 저하께서는 아직 몸이 완쾌되지 않아, 지금은 임시 치료실에 머물고 계십니다. 잠시 들러보시겠습니까?”
“…….”
모레스.
무척이나 얄밉고 괘씸한 망나니 녀석이지만, 그래도 녀석의 몸이 많이 아프다니 마음이 썩 좋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전의 기억까지 없다니, 대체 녀석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 것인가.
“흠…….”
잠시 고민하던 오웬은 마음을 정했다.
뭐, 그냥 허물없이 아무렇게나 대해주자! 녀석 앞에서 나부터 쭈뼛거리기 시작하면, 기억이 없는 모레스 녀석은 더더욱 어색해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오웬은 무턱대고 임시 치료실의 문을 열어젖힌 뒤, 모레스를 향해 당당하게 큰소리를 쳤던 것이다.
“모레스 이 망둥이 자식! 너 인마! 아무리 몸살이 났기로서니, 형님이 오셨는데 인사도 없이……!”
하지만 과장된 쾌활함도 거기까지였다. 눈앞에 펼쳐진 의외의 광경에, 오웬은 순간 흠칫 놀라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곳에는 이전의 절반으로 쪼그라든, 작은 소년이 누워 있었다.
‘이게 뭐야! 저놈 왜 저렇게 됐어?’
오웬의 기억 속 모레스는 동글동글하니, 차라리 굴러다니는 쪽이 훨씬 빠를 것 같은 새끼 돼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침상이 크고 화려한 만큼, 그 속에 파묻힌 파리한 소년은 더욱 작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모레스?”
오웬이 긴가민가하며 묻자, 소년으로부터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온다.
“그래. 시끄러워, 멍청아.”
“……!?”
저 시건방진 말투, 역시 모레스가 맞는데?
오웬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너, 인마… 괜찮은 거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체 사람이 얼마나 아팠기에, 그 풍채 좋던 녀석이 한 줌 손아귀에 들어올 것처럼 쪼그라들었단 말인가!
‘게다가 오러 활성은 또 왜 저 모양이지? 지금 당장이라도 죽어 넘어갈 것 같잖아!’
오웬은 다급한 마음으로 후다닥 침상을 향해 다가갔다.
“너 왜 그래? 대체 어디가 아픈 거야? 아버님께서 치료해 주시지 않았어?”
그때, 일순 모레스의 눈이, 오웬의 목에 걸린 선홍색 목걸이에 가닿은 것도 같았다.
하지만 녀석의 상태에 기함한 오웬은 그딴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저도 모르게 옷깃에 있는 주머니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니까.
‘혹시, 이걸로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 속에는 오웬이 밤마다 게임을 하며 힘들게 구한 ‘궁극의 엘릭서’가 들어 있었다.
‘분명 가능성이 있어. 이건 몸의 모든 이상을 치료해 주는 궁극의 치료제잖아?’
그럼에도 그가 고민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것이 운 좋게 겨우 구한, 메인 스트림의 필수 아이템이라는 것.
‘하루라도 빨리 메인 스트림을 깨야 하는데…….’
시슬레가, 나아가 성황가와 제국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번에 이것을 써버리면 다음에 다시 얻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전 서버에서 품귀 현상을 겪고 있는 얼음 심장을 언제 구해서, 유스티티아 여신을 다시 소환한단 말인가!
‘하지만…….’
오웬은 손을 꾸욱 말아 쥐었다.
그렇다고 이 위태로워 보이는 녀석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 결국 그는 질끈 눈을 감고는 금빛의 엘릭서를 내밀었다.
오늘 밤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판게아 클로니클에 매진하겠다는 비장한 각오와 함께.
“모레스, 너 이거 먹어!”
“…….”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뚱한 얼굴로 그가 내민 물건을 바라보던 모레스 놈이, 이내 픽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대꾸하는 게 아닌가!
“필요 없어.”
“…뭐?”
상상도 못 한 반발에, 오웬은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엘릭서 사용을 두고서 치열하게 고뇌하긴 했지만, 설마 저놈 쪽에서 이걸 거부할 줄이야!
“너 인마! 이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알고 그러는 거냐? 자자, 제대로 한번 보기라도 해봐.”
하지만 그럼에도 모레스 놈은 요지부동이었다.
“싫어, 딱 봐도 수상쩍고 맛없어 보이는데.”
“야! 사람이 선물을 주면 좀 성의껏 받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어, 안 받아. 안 먹을 거니까.”
머리끝까지 혈압이 오른 오웬은, 결국 뒷목을 감싸 쥐며 이렇게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놈의 망둥이 자식이 진짜!”
Chapter 72: Chapter 372
Chapter Text
372. 돌아온 탕아 (7)
그래, 모레스는 원래 이런 놈이었지.
남이 하는 말은 귓등으로도 들어먹지 않고, 입만 열었다 하면 사람 속을 벅벅 긁어대는 데 도가 튼 놈.
오웬이 간만에 치밀어 오른 화를 삭이려 애쓰고 있는데, 소년이 힘없이 한 손을 까딱거렸다.
“에디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모레스의 전담시녀가, 기다렸다는 듯 오웬에게 작은 꾸러미 하나를 건넨다.
의아해하며 열어보니, 거기에는 작은 브로치 하나와 성인을 새긴 나무 조각상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뭐냐?”
저 모레스 녀석에게 뭔가를 받다니, 별일이 다 있다.
빙그레 웃고 있는 대머리 영감님을 꺼내어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자니, 소년의 짤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기념품.”
“기념품? 무슨 기념품?”
“별다른 의미가 있는 물건은 아니야. 굳이 필요할까 싶긴 했지만, 아무래도 너만 빼놓고 돌리려니 기분이 찜찜해서 말이지.”
대충 그렇게 설명한 모레스는, 곧 침상에 푹 파묻히며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이제 줄 건 다 줬으니까 어서 가 봐. 괜히 성가시게 굴지 말고.”
“뭐? 인마! 기껏 보러 온 사람한테 성가시다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 너도 슬슬 제대로 준비를 해야 할 거 아냐. 설마 황궁 정찬자리에 그 꼴로 나갈 생각은 아니겠지?”
“응? 지금 모습이 뭐 어때서?”
오웬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경갑을 쓱쓱 문지르자, 모레스가 미간을 잔뜩 구기며 그를 힐난했다.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깃털이 왕창 뽑혀 나간 쌈닭 같은 머리를 한 주제에.”
“쌈닭… 뭐라고?”
전에 없이 박한 평가에 멍청히 입을 벌렸더니, 모레스는 뚱한 얼굴로 그를 향한 비난을 이어갔다.
“거기다 옷차림은 또 그게 뭐야? 정 격식에 맞게 차려입을 여건이 되지 않으면, 적어도 남들 눈에 단정하다는 인상 정도는 줘야 할 것 아냐!”
“아니…….”
“그 꼴을 하고서 개선식까지 했단 말이지? 정말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로건을 좀 본받아 봐라. 그 녀석은 아무리 전장에서 험하게 굴러도, 이제 막 다린 것 같은 빳빳한 정복 차림을 유지한다고.
알겠냐? 너도 이제부터는 어리바리 집 밖만 나돌지 말고, 슬슬 신성제국의 1황자라는 자각을 가지란 말이야!
설마 모레스로부터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잔소리들이 연이어 쏟아졌다.
그렇게 어린 스콰이어의 군기를 잡는 원로 기사처럼 한바탕 쓴소리를 늘어놓은 모레스는, 조금 지친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그 보기 싫은 닭 털들부터 어떻게 좀 해 봐. 내친 김에 산발한 머리도 깔끔하게 다듬고.”
“닭 털…….”
와, 그건 너무한 심한 평가 아냐?
이건 민물 가마우지의 깃털이야. 강한 전사의 상징 같은 장식이라고! 척 봐도 닭 털과는 차원이 다른 광택이 느껴지지 않냐?
하지만 오웬은 부당한 평가를 제대로 정정할 틈이 없었다. 그를 매섭게 노려보는 소년의 눈에서, 일순 섬뜩한 안광이 번뜩였기 때문.
“아깝다. 내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기운이 있었어도, 저놈의 보기 싫은 닭 털들을 죄다 뽑아 버렸을 텐데.”
“……!”
분명 다 죽어가는 녀석인데, 그 살벌한 중얼거림에서는 어째 묘한 박력까지 느껴졌다.
놀란 오웬이 움찔 뒤로 물러서자, 곁에 있던 모레스의 전담시녀가 빙긋 웃으며 그를 향해 다가왔다.
“걱정 마세요, 저하. 제가 저하를 대신해서 모조리 뽑아드리겠습니다.”
“그래, 에디스. 본궁 사용인들에게도 전해. 정찬 전까지 저 녀석에게 제대로 광을 내 보라고.”
“알겠습니다.”
덥썩!
“그럼 오웬 저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오웬을 잡아끄는 시녀의 팔 힘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가 조금 당황하며 모레스를 향해 물었다.
“모레스. 이거 뭐냐? 네 시녀, 상당한 수준의 오러 유저 같은데?”
“음. 그렇지.”
그러자 소년이 조금 졸린 듯 눈을 깜박거리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한다. 어째서인지 작은 손바닥을 그의 앞으로 내밀어 보이면서.
“그러니까 이거 보고, 지금까지처럼 내 말을 잘 들으라고. 괜히… 귀찮게 저항하지 말고.”
손을 보라고? 왜?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근데 왜 이런 여자가 기사단에 있지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시녀 노릇을 하고 있는 건데?”
“그야… 기사단에는, 에디스에게 접시를… 던져주는, 사람이 없으니…….”
…접시?
“그게 대체 무슨 말……?”
하지만 더 이상은 모레스에게서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다. 소년은 천천히 팔을 아래로 내리더니, 이내 잠에 빠지듯 스르륵 눈을 감아버렸다.
얼핏 보기에도 평범한 수면은 아닌 듯했다. 호흡이 대단이 불안정한 데다, 급격하게 달아오르는 안색이 심상치가 않았으니까.
갑작스러운 사태에 오웬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소년의 곁으로 다가간 마사인이 그의 이마를 조심스레 짚어보더니 말했다.
“…또 열이 오르고 있군요.”
자주 겪어본 상황인 듯 침착한 태도였지만, 그럼에도 기사는 근심 어린 표정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
오웬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피부로 생생하게 느끼는 중이었다. 그저 침상 근처에 있을 뿐인데, 벌써부터 모레스로부터 뿜어지는 뜨거운 열을 감지할 수 있었으니까.
마치 작은 소년 따위는 한순간에 불살라 버릴 것만 같은 강한 열기였다.
‘이게… 뭐지?’
대체 모레스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인간의 몸이 자연적으로 이런 고열을 발생시킬 수 있단 말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하. 아마도 곧 폐하께서 오실 겁니다.”
“아버님께서요?”
한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말로 치료실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성황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오는 게 아닌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대회의장에 있었던 사람이, 어떻게 알고 이렇게 즉각 달려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모레스!”
화아악-
머리 위로 기적처럼 강대한 신성력이 쏟아져 내리자, 소년의 호흡이 점차 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몸에서 거칠게 날뛰던 오러가 잠잠해지고, 당장이라도 불길이 일 것 같던 열기가 빠르게 가라앉는다.
‘아버님은 역시 대단하시다!’
이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른 오웬은 성황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대충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신성력과 오러를 동시에 운용하여, 모레스의 오러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능숙하게 통제해 나가는 중이었다.
지금의 오웬으로서는 꿈에서조차 닿을 수 없는 신묘한 경지.
“……?”
하지만 어째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성황은 오러 운용을 완전히 중단하더니, 모레스를 향해 연거푸 신성력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직 그의 몸 어딘가에서 미약한 열기가 느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레스는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지만, 그가 내쉬는 숨결에는 여전히 사나운 고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어째서?”
대체 왜 아버님은 저 열기를 완전히 없애버리지 않으시는가.
오웬은 미처 질문을 마치지 못했지만, 성황은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곤 순순히 답을 주었다.
“이 열기야말로 모레스 본연의 오러이기 때문이다.”
“모레스의… 오러요?”
“그래. 몸 전체를 잠식한 불길은 이미 모레스와 하나가 되어, 더는 피아를 구분 지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구나.”
그러니 아들의 몸에서 열기를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짓을 했다가는, 아이가 오러를 완전히 잃어 폐인이 되는 것은 물론, 자칫 잘못하면 목숨마저 잃게 될지도 모를 테니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오웬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럼, 아버님. 모레스는 이제 어떻게 해야……?”
뿌드득.
손에 쥐고 있는 금빛 엘릭서의 존재마저 잊은 오웬이, 그것을 부셔버리기라도 할 듯 거세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오웬의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황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머리를 덮는다.
그리고 이미 장성하여 키가 엇비슷할 정도로 자라 있는 대자의 머리를,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가볍게 쓰다듬기 시작하는 것이다. 언젠가 오웬이 악몽으로 잠을 못 이루는 날이면, 매번 그런 식으로 달래주던 것처럼.
“그런 얼굴 하지 말거라, 오웬. 오늘은 네가 수년 만에 황궁에 돌아온 경사스러운 날이지 않느냐.”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 손길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을진대, 정작 오웬이 느낀 것은 위로가 아닌 쓰디쓴 감정의 편린이었다.
아무리 되삼켜도 해소되지 못하고, 결국 겹겹이 응어리져 남아버린 것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정말로 위로가 필요한 것은, 성황 자신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국, 모레스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란다.”
* * *
무슨 정신으로 황궁 정찬에 참석했는지 모른다.
모레스의 전담시녀에게 깃털 장식을 모조리 빼앗기고, 황궁 사용인들의 손에 이끌려 멀끔하게 단장까지 마친 오웬은, 근래 들어 처음으로 말끔한 귀공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웬은 모레스에 관한 문제에 골몰하느라 정작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인지하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이미 음식을 앞에 둔 채 관성적으로 식기를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또 밥은 엄청 맛있네.’
자신을 위해 특별히 신경 쓴 티가 나는 풍성한 식탁. 떨떠름하게 고기 조각을 입에 넣고 있자니, 곁에서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꺄르르륵!
수년 만에 만났음에도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쌍둥이들이, 그런 그를 보며 연신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오웬 오라버니.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는 있어? 아까부터 대체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는 거야?”
헤르나의 쾌활한 질문에, 오웬 대신 가데스가 점잖게 대꾸했다.
“오웬 형님은 아마 모레스를 걱정하고 있는 거겠지. 두 사람, 최근에는 무척 친하게 지냈잖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누가 친해? 설마 그와 모레스 사이를 말하는 것은 아닐 테지?
전에도 생각했지만, 간혹 쌍둥이들이 하는 대화는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런데 마사인 오라버니는 결국 불참이구나.”
“어쩔 수 없지. 형님은 너무 걱정이 많으니까.”
“하긴, 모레스가 언제 고열이 날지 모르는걸.”
“그래. 모레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거야.”
그것은 오웬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일 오늘 정찬의 주인공만 아니었다면, 그 역시 불안감으로 임시 치료실에서 잠시도 발을 뗄 수 없었겠지.
“오웬 황자. 개선식에서는 더없이 훌륭한 장수의 기개를 보였다더니, 지금 보니 또 이렇게 잘생긴 귀공자가 따로 없구려. 황도에 머무는 김에, 이런저런 사교 모임에 참석해보는 것이 어떻겠소? 아마 델크로스의 아가씨들이 서로 그대를 남편으로 들이고자 줄을 설게요.”
그가 황자비를 맞는 것이 아닌, 델크로스의 아가씨들이 그를 남편으로 들이리라는 말. 칭찬인 듯 뼈 있는 한마디를 잊지 않는 타티아나 황후였다.
“참으로 대견하십니다, 오웬 황자. 고귀한 자의 의무를 이리도 훌륭하게 수행하다니, 다른 황자?황녀들의 좋은 귀감이 되어주셨어요. 그간 타지에서 고생이 많았으니, 당분간 황도에 머물면서 편히 휴식을 취하도록 해요.”
언제나처럼 순수한 멜로디 황비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하지만 그를 어떻게든 황위로부터 떨어뜨리려는 황후 타티아나의 견제도, 상냥한 멜로디 황비의 사심 없는 칭찬도, 지금 오웬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기운 없는 모레스와 씁쓸한 성황의 얼굴만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으니까.
그 모습이 어찌나 불안하던지, 당장 뉴비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한동안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황도에 오면 하고 싶은 것이 그렇게 많았는데, 왜 정작 잘 지내는 줄 알았던 녀석이 저렇게 골골거리고 있냔 말이야!’
더는 궁극의 엘릭서를 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과연 이 엘릭서가, 사람이 가진 오러 본연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을까?’
그래, 이제는 과연 이것만으로 치료가 가능한가 아닌가의 문제였다.
시슬레와 성황가를 덮쳐올지도 모르는 잠재적인 위험도, 황도 어딘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뉴비도.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는 형제의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봐요, 상태창 씨. 난 아무래도 이 엘릭서를 모레스에게 넘겨줘야겠습니다!’
오웬이 머릿속으로 수차례 되뇌어 보았지만, 다행히도 상태창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퀘스트를 벗어나는 행동을 할 때마다, 페널티를 들먹이며 줄기차게 방해하던 걸 생각하면 의외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설령 상태창 씨의 방해가 있다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오웬은 이미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하고 말았는데.
‘오늘부터 이것이 내가 완수해야 할 새로운 퀘스트다!’
두고 보라고!
저 망둥이 녀석에게 반드시 이걸 먹이고 말 테니까!
Chapter 73: Chapter 373
Chapter Text
373. 모레스 탐구 일지 (1)
처음 모레스를 만났던 날을 오웬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를 싸늘한 회색 눈으로 쏘아보던, 어딘가 귀티가 흐르는 통통한 아이.
-이건 또 뭐지?
아이러니하게도, 모레스는 오웬이 만난 사람들 중 가장 황족다운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근본 없는 시골 무지렁이를, 진짜 가족처럼 허물없이 대해주는 다른 성황가 사람들이 어딘가 이상한 것일 테니까.
-오웬 록우드. 다 죽다 살아난 놈이, 용케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구나.
성황가에 완전히 입적한 이후에도, 모레스는 고집스럽게 그를 ‘록우드’라고 부르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대체 자신의 본래 성을 어떻게 알았던 걸까? 오웬이 자신의 진짜 성을 언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똑똑히 기억해 두라고, 이 멍청한 놈아! 앞으로도 내가 네 녀석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너 같은 애송이가, 감히 이 몸에게 그런 대접을 받길 기대하는 건 아닐 테지?
그를 마주할 때마다 모레스가 내뱉는 싸늘한 말들.
이쯤 되니, 황도 귀족 문화에 문외한이었던 오웬조차도 알 수 있었다.
모레스 저 자식, 인성이 정말 개판이구나.
* * *
그랬었는데 말이지…….
‘모레스 녀석, 의외로 인간관계가 좋은 거 아냐?’
최근 들어 오웬은 그런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매일같이 본궁을 들락거리며 녀석을 관찰하고 있자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앓아누운 3황자를 걱정하며 임시 치료실을 찾아오는 것이다.
저 딱딱해 보이는 근위대 기사가 대표적인 예였다.
“저하, 오늘은 몸이 좀 어떠십니까?”
“아주 좋아, 마리아 경. 아버지가 잘 치료해 주시거든. 그나저나 매번 여기로 오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러네.”
“아닙니다. 저하를 호위하는 것이 저희 상주기사들의 임무인 것을요.”
“본궁에도 근위대 기사들이 있잖아? 이참에 유급휴가다, 생각하고 연무장에서 수련들이나 해. 난 신경 쓰지 말고.”
기껏 찾아온 기사를 대하는 모레스는 언제나처럼 퉁명스러웠다. 적어도 오웬이 보기에는 그랬다.
“대체 이게 무슨 쓸데없는 인력 낭비야? 게다가 최고참인 경이 자꾸 날 찾아오니까, 다른 상주기사들도 안절부절못하면서 경을 따라 본궁을 들락거리는 거 아냐?”
한데 그런 모레스의 대꾸에, 기사가 빙긋이 미소를 보이는 게 아닌가.
“와병 중에 저희 상주기사들의 처지까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도 저하를 많이 걱정했습니다.”
“…아니, 뭐.”
오웬은 도통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모레스 녀석의 말을 저런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거지?
“저하. 전에 이르신 대로 새로운 맛집 리스트를 뽑아뒀습니다.”
주근깨가 가득한 기사 또한 최근에 오웬이 자주 보는 얼굴이다. 그녀는 특히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는데, 아직은 앳된 얼굴에 3황자에 대한 숨길 수 없는 호감과 충성심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특히 얼마 전 문을 연 아나톨리아식 디저트 가게가 인기라고 하죠. 제가 어제 직접 가 봤는데, 최고급 브르타뉴 과자점과 비교해도 절대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음, 디저트 가게?”
모레스가 눈썹을 슬쩍 찌푸린다. 발랄하게 말을 건네는 기사와 비교하면 확연한 온도 차였다.
“디저트류는 그다지 재미없는데. 클로디아 경. 혹시 거기에 식사가 될 만한 메뉴도 있던가?”
그런데도 기사는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아마 있을 겁니다. 없으면 새 메뉴를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되죠! 헤헤, 포장이 되는지도 한번 알아볼까요?”
그녀와 비슷한 빈도로 찾아오는 청년 기사도 하나 있었다. 이마 위에 크게 찢어진 흉터 탓일까, 어딘가 성격 더러워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답지 않게 어색한 표정을 하고서 쭈뼛거리며 모레스에게 물어오는 것이다.
“저하의 말씀대로… 최근에는 단장님 밑에서 매일같이 수련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의 밝기는 좀 어떻습니까? 눈에 띄는 변화가 있습니까?”
척 보기에도 그리 사회성 좋아 보이지 않는 친구였는데, 나름대로 꽤나 용기를 내서 물어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모레스가 대놓고 그에게 면박을 주는 게 아닌가.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지, 칼멘 경? 오러 연공과 밝기가 대체 무슨 상관인데? 최근에 자네가 수련이 너무 과했나 보군. 그런 헛소리를 다 하다니.”
“네? 우씨! 하지만 분명 저하께서……!”
“뭐? 우씨? 우씨이? 자네, 거기 잠시만 있어봐. 에디스가 어디 갔지? 분명 아까까지 여기 있었는데…….”
“흡! 아닙니다! 이만 수련하러 가보겠습니다, 저하!”
“왜? 차 한 잔 줄 테니 천천히 마시고 가지?”
“괜찮습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바짝 군기가 든 청년이 정 자세를 잡으며 식은땀을 흘린다.
그런 그에게 모레스가 꼰대 선배 기사라도 된 것처럼 잔소리를 덧붙였다.
“그래, 더 열심히 정진하라고. 나와 오러의 밝기에 관해 논하려면, 적어도 경이 안정적으로 외기를 뿜어내는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겠냔 말이야.”
“하지만 전에는…….”
“전에는 뭐?”
“…….”
“뭐? 왜?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청년 기사는 대단히 당황한 얼굴로 임시 치료실을 떠났다.
저렇게 얼굴을 붉혀가면서도 줄기차게 이곳을 드나들다니, 정말 성격 한번 이상한 친구였다.
“그런데 너 말이야.”
갑자기 모레스가 오웬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때까지도 멍청히 턱을 괴고 있던 그가 움찔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응?”
“너는 그렇게 할 일이 없냐? 오랜만에 돌아왔으면 이런 저런 사교 모임도 나가고, 좀 더 황도에서의 네 입지를 공고히 할 생각을 해야지. 왜 허구한 날 여기서 뒹굴거리고 있어?”
그때서야 문득 오웬은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자신 역시, 좋은 소리 못 들으면서 매일같이 임시 치료실에 드나드는 사람 중 하나였던 거다!
“아…….”
오웬은 잠시 충격에 휩싸였지만, 곧 자신의 목적을 상기하고는 주머니에서 금빛 엘릭서를 꺼내 들었다.
최근 그가 매일같이 본궁을 드나드는 이유.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레스에게 궁극의 엘릭서를 먹이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자, 모레스. 이걸 봐봐. 금빛으로 빛나는 이 찬란한 약을. 마치 꿀처럼 달콤해 보이지 않냐?”
“…또 그 얘기냐.”
소년이 완전히 질린 얼굴을 했다.
“싫어. 내가 안 먹는다고 했잖아.”
“이거 정말 좋은 거라니까? 내가 어렵게 구한 거야. 한입, 그냥 한입만… 아니, 맛만 보면 안 돼?”
“그렇게 좋은 거면 네가 다 먹든지.”
“아, 진짜……!”
벌써 며칠째 허탕인지 모른다.
이쯤 되면 그의 성의를 봐서라도 한 번쯤 귀 기울여 볼 법 하건만, 고집불통인 모레스 녀석은 도통 요지부동이었다.
‘이대로는 정말로 기약이 없어!’
차라리 몰래 먹여볼까? 오웬은 잠시 그렇게 갈등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약이라고 해도 상대방의 동의 없이 무작정 먹인다면, 그게 독살 시도와 무엇이 다른가.
거기다 모레스의 곁을 절대 떠나지 않는 마사인 경도 문제였다. 조만간 데카론 나이트가 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한, 전직 기사단장.
비록 오웬이 현재 남부 전선의 영웅이라는 찬사를 듣고 있더라도, 저 인간 몰래 모레스의 식사에 엘릭서를 섞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
지금도 보라고.
마사인 경은 어쩐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오웬의 손에 들린 엘릭서를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엘릭서의 출처를 의심하는 모양인데.
‘결국은 모레스 본인을 직접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그나저나 이게 왜 그렇게까지 싫다는 거지? 이건 궁극의 엘릭서란 말이야. 모든 상태이상은 물론, 사망 페널티까지도 날려버리는, 무적의 회복 아이템이라고!
“아, 이거 정말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답답해진 오웬이 가슴을 쾅쾅 두드리자, 모레스가 어이없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멍청이냐.”
그렇게 그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본궁 사용인 하나가 모레스의 늦은 점심 식사를 가져왔다.
오웬이 호기심에 트레이를 들여다보니, 그곳에는 어쩐지 묘한 향을 풍기는 묽은 수프가 올려져 있었다.
”이거 맛있냐? 환자식치고는 좀 자극적인 냄샌데?”
썩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기에 물었더니, 의외로 순순한 대답이 돌아온다.
“곰 고기가 들어가서 그래. 익숙해지면 먹을 만해.”
“아, 그렇구나.”
오웬은 조금 신기한 얼굴로 모레스를 바라보았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데도 자신의 질문에 어떻게든 반응해 주는 걸 보면, 확실히 어딘가 변한 것 같기도 하고.
‘신기하네. 이 녀석과 이렇게 평화롭게 지낼 수도 있다니.’
그러니까 아마도 계속 옆에서 말을 붙이게 되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곰 고기? 모레스, 너 그런 거 좋아하냐? 전에는 매일 단것만 달고 살더니만.”
“무슨 실없는 소리야? 당연히 좋아하니까 먹는 거지.”
“그래? 근데 너, 왜 먹으면서 그렇게 인상을 쓰냐?”
오웬이 긴가민가하며 되물었다.
정말 좋아하는 거 맞나? 억지로 삼키고는 있지만, 어쩐지 속이 많이 불편해 보이는데.
‘게다가 어째 아까보다 기운이 없는 것 같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챙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스푼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모레스가 집어던진 게 아니라, 순전히 힘 빠진 손에서 식기가 미끄러져 떨어진 것이다.
“저하!”
“모레스!?”
앉은 채 비틀거리는 모레스를 보며 두 사람이 기겁하는데, 집무실에서 바로 달려온 성황이 소년에게 곧장 강대한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파아아아-
임시 치료실이 순식간에 환한 빛에 휩싸인다.
“모레스, 괜찮으냐?”
잠시 후.
성황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방금까지도 숨이 넘어가던 녀석이 반짝 눈을 뜨더니 반갑게 알은척을 했다.
“…어, 아버지. 오셨습니까?”
그러고는 이내 멀쩡한 얼굴이 되어, 엉망이 된 바닥을 보며 혀를 차는 것이다.
“아, 아까운 곰 고기 수프…….”
그 태평한 꼴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울컥! 속이 뒤집어졌다.
“모레스, 너 인마!”
오웬은 저도 모르게 소년에게 버럭 소리를 치고 있었다. 예전의 그였다면 절대 상상하지도 못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수프가 문제냐? 괜찮은 척 꾸역꾸역 먹을 생각만 하지 말고, 아프면 아프다고 미리 말을 좀 하란 말이야! 네가 그러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뭐가 되냐! 어엉?”
“음? 하지만 아까는 별로 안 아팠는데.”
“아, 이놈 자식이 그래도……!”
끄아아아-!
오웬이 급격히 상승하는 혈압을 느끼며 뒷목을 감싸 쥐자, 어떻게 알았는지 성황이 그에게 다가와 슬그머니 신성력을 쏟아주었다. 마치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침착한 태도였다.
화아아-
어쩐지 익숙한 느낌을 주는 신성력에 묘한 기분이 되어 있는데, 성황은 연이여 곁에 있는 마사인 경을 향해서도 신성력을 쏟아냈다.
그러자 마사인 경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사의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덕분에 최근에는 만성위염이 한결 좋아졌습니다.”
오웬은 어쩐지 알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그간 모레스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시켰으면, 상급 기사 정도 되는 강력한 오러 유저에게 만성위염이 다 생기는 거지?
* * *
결국 오늘도 모레스에게 엘릭서 먹이기에 실패한 오웬은, 조금 착잡한 심정으로 임시 치료실을 나섰다.
한데 그가 본궁 로비를 막 벗어나려 할 때였다.
“으아아악! 살려주시오!”
저 멀리서 제법 익숙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황도에서 여간해서는 들을 일 없는, 바르샤 소수 부족의 비명이었다.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요, 오웬이여어어!”
아, 바르토자. 저 녀석을 잊고 있었군.
오웬은 혀를 차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결국 와카나 투사이의 눈에 띄고 만 겁쟁이 바르토자는, 대부족회의가 끝나자마자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그래서 오웬의 바짓가랑이를 잡고서 절절하게 매달려 온 것이다. 부디 황도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매일같이 안절부절못하며 오웬의 뒤를 따라다니던 그는, 지금 황궁 안뜰에서 거대한 늑대에게 깔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것 좀 보시오, 오웬! 델크로스의 부족장이 이렇게 무지막지한 괴물을 기르고 있소오오오!”
괴물이라니. 조금 덩치가 크긴 하지만, 평범한 늑대가 아닌가.
오웬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바르토자를 신나게 가지고 놀던 늑대가 고개를 들어 오웬의 냄새를 맡았다.
킁킁!
그러더니 곧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늑대가 갑자기 주둥이를 젖히며 허공을 향해 구슬프게 울어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우우우우-!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오! 오웬이여! 푸르마의 오랜 친구여!”
그사이에 바르토자는 허겁지겁 도망쳐 오웬의 뒤로 숨었다. 푸르마 부족의 원수를 갚겠노라 찾아온 게 엊그제 같은데, 볼수록 태세 전환이 빠른 놈이었다.
아우우우-! 끼잉! 끼이잉!
“오웬이여! 제, 제발 저 괴물을 어떻게 좀 해 주시오!”
앞에서는 늑대가 시끄럽게 울어대고, 뒤에서는 성가신 바르토자가 벌벌 떨며 달라붙어 있는 상황.
오웬은 난감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황궁 안뜰에 왜 늑대가 멀쩡히 돌아다니는 거지? 위험하지 않나?”
본궁 근위대 기사들이 가만히 두는 걸 보면, 혹시 황궁의 누군가가 기르는 놈인가 싶기도 하고.
긴가민가하고 손을 내밀었더니, 늑대가 거짓말같이 울음을 멈추고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곤 오웬의 손에 코를 들이밀며 또다시 킁킁 냄새를 맡는다. 살벌한 외양과는 달리, 사람에게 공격적인 녀석은 아닌 모양.
“어? 신기하네요? 막스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렇게 살갑게 구는 놈이 아닌데?”
그때, 커다란 개 밥그릇을 든 시녀 하나가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오웬에게도 안면이 있는 모레스의 전담 시녀였다.
“아마도 저하로부터 모레스 황자님의 냄새를 맡았나 봅니다.”
“모레스의 냄새?”
“네, 저하. 이 늑대개는 모레스 저하께서 기르시는 개입니다.”
“그래?”
목덜미를 쓱쓱 쓰다듬어 주자, 늑대개는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고 호박색 눈으로 빤히 오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꼬리를 치거나 살갑게 치대는 기미는 없었다. 그저 주인과의 친분을 생각해 이 정도는 참아 주겠다는 듯한, 고고한 태도에 가까웠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모레스 녀석이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달칵.
에디스가 밥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자, 늑대개는 툭 하고 오웬의 손을 떼어버린 후 느긋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개치고는 정말로 희한한 놈이었다.
“거, 쉽지 않는 녀석이군.”
“네, 막스는 사람을 정말로 우습게 압니다. 저 바르샤인만 해도 그렇잖습니까? 조금이라도 어설픈 모습을 보이면, 단숨에 막스의 장난감 취급을 받죠.”
???.
개의 식사가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에디스는 오웬에게 이런저런 사정을 들려주었다.
“모레스 저하께서 한동안 자신으로부터 막스를 멀리 떼어놓으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막스가 본궁 안뜰로 와서는 저하를 찾으며 울고 있어요.”
그 모레스가 개를 키우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 했다. 주인을 애타게 찾는 걸 보면, 무척이나 귀여워한 것 같기는 한데.
“그런데 왜 개만 떼어놓나? 병상에 있다고는 해도, 다들 잘만 모레스를 찾아오던데.”
“듣기로는 막스가 저하의 오러에 대단히 민감하기 때문이라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덩달아 영향을 받아 아프게 될까 걱정하시는 거겠죠.”
“오러에 민감해?”
의외의 대답에, 오웬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런데 이어지는 시녀의 설명은 더더욱 황당한 것이었다.
“네, 저하. 막스는 모레스 저하의 오러를 빌어 커다랗게 변신한다고 하거든요?”
“변신… 뭐라고……?”
도무지 듣고도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오웬이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에디스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예, 저하. 변신합니다. 바로 이 개야말로, 세간에서 칭송하는 주신의 신수, [바람]이랍니다.”
…어엉?
Chapter 74: Chapter 374
Chapter Text
374. 모레스 탐구 일지 (2)
주신의 은총으로 악마종을 물리친 기사.
지그스문트령과 바서스트령의 구원자.
신수 [바람]의 주인.
위대한 성 바스티안의 재림.
놀랍게도 이 모든 것들이 모레스를 지칭하는 수식어였다.
황도에 돌아온 후 그에게 엘릭서 먹이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던 오웬은, 뒤늦게 이런저런 소문을 듣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지? 모레스 녀석, 못 본 사이에 어쩐지 엄청난 녀석이 되어 있지 않나?
“지금 온 황도 사람들이 그 얘기를 하고 있잖수. 아마 오웬 님이 황궁 밖으로 잠깐 외출이라도 했으면 진작 아셨을 거라우.”
전담 시녀 캐리가 가볍게 오웬을 타박했다.
그녀는 말끝마다 구수한 로한 악센트가 묻어나는, 나이 지긋한 노인네다. 오웬이 황궁에 있는 동안 쭉 그를 보살펴준 잔뼈 굵은 시녀였는데, 듣기로는 선대 황비의 시중을 든 적도 있다 했던가.
“저기 산더미처럼 쌓인 초청장들이 보이지도 않수?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웬 님을 찾고 있는데, 왜 아예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는답니까?”
현재 황도 인사들은 남부 전선의 영웅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젊고 잘생긴 미혼의 황자.
친분을 쌓을 이유는 차고 넘쳤다. 비록 성황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이 돌고 있음에도, 그가 세운 엄청난 공적이나 정치적 영향력은 쉽게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여간해서는 사교계에 얼굴을 보이지 않는 황자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도 있을 테지.
하지만 오웬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런 쓸데없는 곳에 갈 시간이 어디 있나?”
“오웬 님은 성황가의 맏이잖수. 사교계에서 제대로 인맥과 입지를 쌓으셔야 하지 않겠수? 심지어는 저 모레스 황자님까지도, 요즘은 사교 모임에 한 번씩 얼굴을 비춘다고 합디다.”
“그 녀석이야 그러든지 말든지. 난 가족들과 보내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남부의 상황이 갑자기 변하면, 또 전선으로 달려가야 할지 모른다고.”
오웬에게 있어서 황자로서의 입지 따위 어찌 되어도 좋을 일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성황가의 안위뿐이었으니까.
“어이구. 가족들이 그렇게 그리웠으면 진작 돌아오실 것이지.”
캐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기다 기껏 돌아와서는, 청장미궁에는 잠시도 붙어있질 않으시는구랴. 로건 님도 그렇고, 오웬 님도 그렇고. 주인들이 이리 궁을 오래 비워두시니 늙은이가 그간 많이 적적했수다.”
“음. 그건… 면목 없어, 캐리.”
“마음에도 없는 사과는 마시구랴. 뭐, 그래도 황궁에 적을 둔 것치고는, 말년에 일이 편해진 것 같아서 좋기는 하다우.”
투덜거리며 오웬의 옷가지들을 정리하는 캐리는 예나 지금이나 정겹기만 했다.
하지만 수년 만에 부쩍 늙어버린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오웬으로 하여금 가슴 아릿한 애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나저나 오웬 님. 내가 분기마다 빳빳한 새 옷들을 지어 보냈는데, 이게 왜 죄다 누더기가 된 거랍디까?”
그녀가 침침한 눈으로 실을 꿰는 것을 보다 못한 오웬이, 그녀로부터 바늘과 실을 뺏어 들었다.
“어쩔 수 없었어, 캐리. 난 계속 전장에 있었잖나. 매일매일이 험한 전투의 연속이었단 말이지.”
“헹! 어련하시겠수.”
깔끔하게 꿰인 실을 도로 받아들며, 캐리가 코웃음을 쳤다.
“이 노인네가 장담하건대, 남부 전선의 모든 기사님들이 다 오웬 님 같지는 않을 게요. 어릴 때부터 워낙 옷을 험하게 입으셨잖수?”
…그랬던가?
매일 아침 빳빳하게 다린 새 옷이 준비되어 있었기에, 지금까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다.
“생각해 보면 성황가의 아이들 중에서도 오웬 님이 참 유별나긴 했수다. 어찌 그리 옷이 잘 떨어지던지. 오죽했으면 모레스 황자님과도 매일같이 옷을 두고 싸웠겠수?”
“…응? 내가?”
의외의 말을 들은 오웬이 눈을 끔벅거렸다. 모레스와는 얼굴만 보면 서로 으르렁거렸지만, 왜 싸웠는지에 대해서 일일이 다 기억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자 캐리가 돋보기안경 너머로 눈을 가늘게 뜨며 대꾸했다.
“왜 아니겠수? 복장이 단정치 않다고 욕을 먹고 싸우고, 또 싸우고 나면 복장이 더 지저분해지고, 그걸 모레스 황자님이 또 지적하고. 그런 악순환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니까 말이우. 곁에서 두 분을 보고 있으려면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더이다.”
“…….”
“뭐, 그때는 두 분 다 어렸으니까 말이우.”
거기까지 말한 캐리는,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바느질을 시작했다.
사락사락. 부드러운 천이 일정한 간격으로 꿰뚫리며 마치 음악 소리와도 같은 리듬을 만들어낸다.
오웬은 잠시 눈을 감고선, 오랜만에 듣는 캐리의 콧노래와 바느질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래도 가끔 이 늙은이는 모레스 황자님에게 감사할 때가 있었다우.”
갑자기 들려온 캐리의 목소리에, 소파에 기대어 있던 오웬이 눈을 뜨고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감사? 그 녀석한테?”
대체 무엇을?
“그야, 오웬 님이 악몽을 꾸는 날이면, 식욕도 없이 하루 종일 기운 없어 하지 않았겠수? 그런데 모레스 황자님과 싸우고 나면, 신기하게도 아침의 고민 따위는 매번 말끔히 잊어버리게 되지 뭐요?”
저 재수 없는 녀석! 절대 이대로 용서할 수 없다! 녀석과 제대로 싸우려면 체력을 비축해야 해! 캐리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씩씩거리는 오웬을 흉내 내 보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식사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곤 하셨수. 오웬 님이 좀 단순하셔야 말이지.”
아련하게 추억을 회상하나 싶더니, 기어이 그녀의 입에서 불경스러운 한마디가 튀어나온다.
캐리는 예전부터 늘 그런 태도였다. 나이가 지긋하여 죽을 날이 가까워졌다 싶은지, 가벼운 불경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담대함을 보였지.
물론 오웬은 오히려 그녀의 그런 면에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지만.
“내가, 그랬다고? 전혀 기억에 없는데?”
오웬이 놀라서 입을 쩍 벌리자, 캐리가 눈가에 한껏 주름을 잡으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렇고말고요. 그래서 가끔 지나치게 처져 계신다 싶으면, 일부러 진주궁 길목으로 산책하시도록 호위 기사님들에게 부탁드리곤 했다우. 지금까지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셨수?”
“……!?”
오웬은 거듭되는 충격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모레스로부터 들은 심한 비난들을 힘들게 털어놓으면, 언제나 따스하게 그를 위로해 주던 사람.
어쩌다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는 날이면, 데운 목욕물과 함께 맞아주던 친할머니 같은 사람.
적어도 오웬의 기억 속 캐리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런데…….’
실은 그녀가 그들의 불화를 대수롭지 않은 애들 싸움이라고 여기며, 가끔은 일부러 부딪치도록 부추기기까지 했다고?
아무리 어린 시절의 추억이 미화되어 있기로서니,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잠깐만, 캐리! 그게 진짜란 말이야? 난 당시에 엄청 심각했다고!”
“그럼그럼, 왜 아니겠수? 어릴 때는 모두가 별것 아닌 일로 다들 심각하다우.”
“아니! 정말이라니까? 모레스 그 자식이 한창 감수성 풍부하던 시절의 나한테 뭐라고 했냐 하면……!”
“그렇게 감수성 풍부하신 분이, 매번 옷을 험하게 찢어먹으면서 온 황궁을 뛰어다니셨단 말이우? 욕먹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참 우습지도 않수.”
오웬의 항변 따위, 캐리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러니 슬슬 지난 일은 지난 일로 넘기시구랴. 모레스 황자님은 그만 좀 미워하고 말이우.”
덜컥.
갑작스레 정곡을 찔러오는 직언에, 오웬은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미워하다니, 대체 누가.”
조금 힘 빠진 목소리로 대꾸하자, 캐리가 바느질을 멈추고는 오웬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정말 그리 생각하시우? 이 늙은이를 속일 생각은 마시구려. 오웬 님이 남부 전선에 계신 동안, 어디 모레스 황자님께 서신이라도 한 번 보내신 적 있수?”
“…….”
“오웬 님이 성황가의 모두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거, 이 늙은이가 모르지는 않수다. 하지만 유독 모레스 황자님에게만 박하게 대하시는 것도 사실 아니우?”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성황가 사람들은 물론, 전담 시녀 캐리에게까지 정기적으로 소식을 전한 오웬이었지만, 정말로 지금껏 단 한 번도 모레스에게 서신을 쓴 적은 없었지.
이유는 빤했다.
모레스가 정말로 싫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 녀석이 나한테 먼저…….”
“처음 황궁에 오셨을 때, 오웬 님 앞에서 그런 태도를 보인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었답디까? 하지만 오웬 님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셨잖수? 그걸 잘 생각해 보우다.”
“…….”
“지금이야 훌륭한 장수가 되셨으니 하는 말이지만, 예전의 오웬 님은 이 늙은이가 보기에도 여러 가지로 불안한 점이 많았다우.”
갑자기 제국의 1황자가 되며 모든 이들의 눈총을 한 몸에 받게 된 소년. 그 날선 시선들에 담긴 감정이 결코 호의일 리는 없었으리라.
거기다 오웬은 매일같이 악몽을 꿀 정도로 부모님의 죽음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 그의 가슴속에는 목적 없는 슬픔과 울분이 가득했던 것 같다.
“물론 성황 폐하와 황자?황녀님들이 오웬 님을 위해 많은 애들을 쓰셨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했을 거라우. 사람이 어디 좋은 말만 듣고, 좋은 말만 하고 살 수가 있소?”
“…….”
“그런데 오웬 님은 황궁에 달리 아는 사람도 없소. 그럼 당시에 속 편하게 욕하고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모레스 황자님 말고 또 누가 있었겠수?”
“아니, 캐리. 그건……!”
발끈하며 대꾸하려던 오웬은, 곧 입을 다물고는 거세게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스스로에게 강한 의구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것이 아니었을까?
부모님의 죽음과 급격한 환경의 변화, 그리고 지위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한 압박감.
그 무거운 감정들을 해소할 돌파구의 일종으로, 모레스와의 불화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고 온전히 장담할 수 있나?
“오웬 님도 이제 어엿한 어른이 되셨잖수? 겸허히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우.”
따악.
가위로 실을 끊어낸 캐리가, 말끔히 수선된 셔츠를 오웬에게 내밀었다.
“이 늙은이가 보기에는, 당시 두 분의 싸움은 전혀 마음에 담아둘 만한 것이 아니었수다. 다른 형제들과 비교하며 욕을 해대니 그렇지, 당시 모레스 황자님이 또 그렇게나 악독하신 분은 아니었다우.”
오웬은 도지히 지금 들은 말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모레스의 패악질이야, 온 황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 아닌가!
-감히 스스로를 성황가의 일원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오웬 록우드. 넌 그저 운 좋게 목숨을 건진 촌구석 무지렁이일 뿐이야!
-그런 덜떨어진 꼬락서니를 하고서도 당당히 황궁을 활보하는 거냐? 넌 되도록 빨리 황도를 떠나 대륙 구석탱이에라도 얌전히 처박히는 쪽이 좋을 거다. 그리고 옆에서 시키는 말만 잘 듣는 꼭두각시로 살라고! 그럼 적어도 남들이 하는 것의 절반은 갈 테니까!
모레스가 성황가의 일원이었기에, 오히려 더욱 가슴에 사무치던 폭언들.
그런데 지금 캐리는, 그 모든 것들이 그저 아무것도 아니었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늙은이가 보기에는, 모레스 황자님은 그저 버릇없이 자라 사람 대하는 요령이 없는 어린애 같았다우.”
혼란스러워하는 오웬을 바라보며, 캐리가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오랜 세월을 헤쳐 온 노인만이 가질 수 있는, 현기 가득한 눈을 하고서.
“무릇 어린 시절의 허울은 담대하게 용서하고 넘어가 주는 것이 손윗사람의 도리라우. 우리 별난 오웬 님은, 어릴 때부터 아량 하나만큼은 남부의 대초원보다 넓지 않았수?”
Chapter 75: Chapter 375
Chapter Text
375. 모레스 탐구 일지 (3)
그날 저녁.
캐리에게 감화되어 다시 긴가민가하고 모레스를 찾은 오웬은, 이내 자신의 생각을 후회하게 되었다.
‘응. 역시 모두가 너의 착각이었을 뿐이야, 캐리. 모레스 저 자식은 대륙에서 가장 성격 더러운 애새끼야! 구제할 수 없는 고집불통 멍청이라고!’
아무리 애를 써도, 한번 막무가내로 나가기 시작한 모레스와는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어째서지? 나름 진지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내 말을 요만큼도 들어먹지 않는 거야?’
모레스를 설득하기 위해,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엘릭서의 출처까지 그럴싸하게 꾸며냈다.
살아 있는 성자이신 바트 사제님께서, 손수 몸에 좋다는 약초들을 달인 후 매일같이 기도하며 축성을 들인 만능 치료제라고!
물론 당사자의 허락을 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마도 바트 사제님은 다 이해해 주실 거라 굳게 믿으며 말이지.
“야! 이게 얼마나 귀한 치료제인지 알기나 해? 서버에서 아예 동이 난 아이템을, 우리 뉴비가 얼마나 고생고생해서……!”
어찌나 열을 냈던지, 하마터면 진짜 출처가 튀어나올 뻔했다.
오웬이 황급히 입을 틀어막자, 모레스가 힐끔 그를 바라보더니 또다시 뚱한 얼굴로 대꾸한다.
“…아무리 좋은 치료제면 뭐 해? 어차피 지금은 나한테 소용없어. 안 들을 거야.”
“아니, 그러니까 소용이 있는지 없는지 일단 써 보기는 하란 말이야!”
“싫어. 빤히 아는 걸 왜 굳이 먹어서 확인해야 해? 어차피 아버지의 신성력보다 강한 치료제는 없는데.”
“그래도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란 게 있잖아!”
오웬은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는 소리쳤다. 더 늦어지면 또 언제 이렇게 설득할 기회가 생길지 몰랐다. 슬슬 그를 바라보는 마사인 경의 눈초리가 심상찮게 변해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애타는 속도 모르는지, 모레스 녀석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응. 없어. 그리고 그거, 엄청 맛없어 보인다고.”
“크아아악!”
결국 뒷목을 잡으며 넘어간 오웬은, 잠시 후 나타난 성황에게 신성력을 나눠 받은 후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모레스가 또 한차례 고열이 올랐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거지? 저렇게 힘들어하는 주제에.’
쌕쌕 가쁜 숨소리를 내는 모레스를 바라보며, 오웬은 허탈하게 엘릭서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황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전부터 계속해서 그것을 들고 오는구나, 오웬. 용도가 무엇인지 내게 말해줄 수 있느냐?”
“…아, 네. 아버님.”
설마 성황의 주의까지 끌게 될 줄이야.
번뜩 정신을 차린 오웬은, 잠시 주저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건… 남부에서 어렵게 구한… 몸에 좋은 약입니다.”
차마 그에게까지 장황한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 없어 어색하게 말을 흐렸더니, 성황은 크게 개의치 않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 보이는구나.”
“…….”
“모레스가 지금은 소용없다 말하니, 다음에는 다를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부디 잘 간수하거라. 내 거기에 축성을 해 주마.”
어쩐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성황은, 엘릭서 위에도 한 차례 신성력을 쏟아준 후 이내 집무실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한 것도 잠시. 오웬은 엘릭서를 갈무리하며 침상 옆에 걸터앉았다.
그래도 덕분에 한 가지 좋은 점은 있었다. 엘릭서를 바라보는 마사인 경의 눈초리에서 약간이나마 힘이 빠졌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오웬은 한숨을 쉬며 시선 아래에 떠 있는 작은 창을 일별했다.
[메인 스트림 3 ? 진행률 0%]
메인 스트림 2를 마치고 나서는, 좀처럼 진행이 되지 않는 메인 스트림이다. 아마도 선행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특별 퀘스트 ? 황도로 돌아가자!]
[퀘스트 등급 : E]
[한 차원을 지배하는 여신이, 누군가의 특별한 요청을 받아 삼라만상의 정수를 한곳에 담았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노력 덕분에 당신은 생각보다 손쉽게 ‘궁극의 엘릭서’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귀한 물건에는 언제나 귀한 쓰임새가 있음이 당연지사. 이제 당신은 황도로 돌아가, 이 아이템을 선물할 사람을 찾아내야 합니다.]
[보상 : 30 P캐시]
[*본 상품은 판게아 클로니클 상점 창에서 사용 가능합니다.]
오웬은 상태창 최상단에 떠 있는 퀘스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델크로스로 돌아온 지가 언젠데…….’
제목이 ‘황도로 돌아가자’이건만, 대체 이 퀘스트는 왜 완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가. 상태창 씨에게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뾰족한 대답이 돌아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오웬은 충족시켜야 하는 다른 숨은 요건이 있는 게 아닌가 짐작하는 중이었다.
-이제 당신은 황도로 돌아가, 이 아이템을 선물할 사람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래. 누군가를 찾아 궁극의 엘릭서를 넘겨야 한다는 뜻이겠지.
메인 스트림의 제목이 ‘성□을 (를) 구하라!’인 것을 생각하면, 그 ‘성□’이라는 사람을 찾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그런데 그게 대체 누굴까?
정말로 시슬레나 아버님을 뜻하는 걸까?
‘어쩌면 그 대상이 모레스일 가능성은 없는 걸까?’
그것은 꽤나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오웬이 퀘스트 따위 제쳐두고서 모레스에게 엘릭서를 먹여보겠다고 매달리고 있는 게 벌써 며칠째인가.
하지만 상태창 씨에게서는 여태까지 가타부타 반응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단 하나.
‘내 행동이 상태창 씨가 원하는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뜻이지.’
본래라면 부족장을 만나는 자리에서까지 자잘한 행동 방침을 지시할 정도로, 매사에 꼼꼼하고 정확한 상태창 씨였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상태창이 이렇게 모호한 지시를 내릴 때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트 사제에 대한 퀘스트였다.
간혹 그의 방문과 오웬의 일정이 어긋날 것 같으면, 상태창 씨는 이상할 정도로 갖은 이유를 들며 진지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곤 했다.
그저 ‘진지에서 기다리는 바트 사제를 만나자!’라는 퀘스트를 띄우기만 하면 될 것을. 마치 말을 꺼내는 것조차 힘들다는 듯, 한사코 그에 대한 언급을 두루뭉술하게 피해 가지 않았던가.
‘볼란타 부족에서 나즈랑카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당시 오웬이 받았던 퀘스트는 이런 것이었다.
[특별 퀘스트 ? 볼란타에서 당신을 도울 조력자를 얻으라!]
그 외에는 도통 정보가 없어 헤매고 다니다, 끝내 포기하려던 차였지.
한데 장로회에서 완고해 보이는 샤먼을 만나자, 갑자기 퀘스트가 완료되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던가!
그녀가 조력자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볼란타의 샤먼 나즈랑카는, 오래전부터 제국에 큰 반감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자였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녀는 의외로 철저한 중립을 유지함으로써, 오히려 다른 장로들의 반발이 과도하게 일어나는 것을 막아주긴 했다.
오웬이 언젠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나즈랑카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위대한 영혼께서 내가 그리하길 원하신다.
그래, 그때도 상태창 씨는 아무런 언질이 없었어. 그저 오웬이 움직이는 대로, 일이 흘러가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뒀을 뿐.
오웬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드르륵.
마사인 경이 커다란 안락의자를 끌어오더니, 침상을 사이에 두고 오웬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그러더니 품에서 주섬주섬 수예 물품을 꺼내 드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모레스 저하께서 이렇게 치료실에 누워 계시니, 가슴이 아픈 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한동안은 위험한 사고를 치지 않으실 테니까요.”
그러고는 점잖은 태도로 푸른 천에 앙증맞은 꽃잎들을 새겨 넣기 시작한다.
보고도 이게 뭔가 싶었던 오웬은, 잠시 멍하니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다 물었다.
“…자수? 형님께서 자수를 다 두십니까?”
“예. 이것도 제법 마음 수양이 됩니다. 화난 감정을 다스리기에 이보다 좋은 취미가 또 없더군요.”
누구 때문에 화가 났는지 어째 알 것 같기도 했다.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이제 저하께도 어엿한 영감님이 생기셨지 않습니까? 제가 잘 어울리는 영감님 고깔을 하나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
영감님 고깔? 그게 뭐지?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오웬은 섣불리 입을 열지는 못했다. 마사인 경이 이내 진지한 태도로 자수에 열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폭. 스르륵. 폭, 스르륵.
조용한 방 안에는 한동안 바늘과 실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
그렇게 오웬이 모레스의 얼굴을 봤다가, 바늘을 봤다가 하며, 하릴없이 눈동자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저하께서 아직 황궁에 오시기 전, 그 시절의 모레스 황자님은 저하께서 아시는 모습과는 많이 다르셨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참으로 상냥하고 활발한 분이셨지요. 그렇게 사랑스러운 어린 황자님은 세상에 다시없었을 겁니다.”
상냥하고… 활발? 사랑스러워?
오웬으로서는 전혀 상상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과거를 회상하는 마사인 경의 입에는 숨길 수 없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처음에는 일신의 안녕을 위해 황궁 기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레스 황자님을 뵌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인생의 진정한 목표를 찾아낼 수 있었죠. 바로 모레스 황자님의 곁에서, 일생을 바쳐 그분을 지키는 것.”
“…….”
“그분께 해를 입히는 것은, 그 무엇이 되었든 이 손으로 직접 단죄하는 것.”
거기까지 말한 마사인 경은, 바느질을 멈추고는 오웬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래서 이전부터 꼭 여쭙고 싶었습니다. 저하께서 모레스 황자님께 수차례 복용하라 강요하시는 그 물건 말입니다.”
일견 차분한 눈빛이었지만, 그 눈동자의 한가운데에는 강한 불길이 고요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정녕 치료제입니까? 저하께서는 그것이 모레스 황자님께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고 계시기에 그런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 물음에 오웬은 새삼 깨달았다.
그저 사람 좋아 보이는 저 기사는, 모략과 암투가 횡행했던 선대 성황의 시대를 황궁 한가운데서 보낸 자였다.
달리 말하면, 이 평화로운 시간들을 마음으로 온전히 믿지는 못하는 자. 그래서 이미 모레스의 편에 서기로 마음을 정한 후, 필요하다면 언제든 비정한 선택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인 것이다.
오소소.
갑자기 등줄기에서 미약한 소름이 돋아났다.
그럼에도 오웬은 떳떳했다. 비록 모레스에 대한 그의 감정을 완전히 정리하지는 못했을지언정, 성황가 전체를 향한 그의 애정만은 진심이었으니까.
그리고 만일 이대로 모레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분명 크게 슬퍼하리라.
그래서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이 물건을 형님께서 선뜻 믿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건 모레스에게 이득이 될지언정, 결코 해가 되지는 않을 물건입니다.”
“…….”
“그 증거로, 방금 아버님께서 이것을 직접 축성까지 해 주시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잠시 빤히 그의 눈을 바라보던 마사인 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하를 믿겠습니다.”
그 대답에 오웬은 잠시 안도했다.
하지만 마사인 경의 용건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하면, 일단 제게 그것을 맡겨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저 역시 지금은 모레스 황자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성황 폐하께서 곁에 계신 지금, 폐하의 신성력만큼 도움이 되는 치료제는 세상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언제고 모레스 황자님께 그것이 필요한 날이 온다면…….”
거기까지 말한 마사인 경은, 잠시 주저하더니 덧붙였다.
“그리고 폐하께서 부득이하게 황자님을 도울 수 없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반드시 이 마사인이 직접 저하께 그 치료제를 드리겠습니다. 그리하면 안 되겠습니까?”
“…….”
본래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 다시 구할 수 있을지 모르는 귀중한 엘릭서.
하지만 마사인 경이 풍기는 진중한 분위기 때문일까, 오웬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막 마사인 경의 손아귀에 그 엘릭서를 떨어뜨렸을 때-
띠링!
오웬은 드디어 그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작은 알림음을 들을 수 있었다.
바로, 퀘스트 완료를 알리는 갱신음이었다.
[특별 퀘스트 ? 황도로 돌아가자!(완료)]
Chapter 76: Chapter 376
Chapter Text
376. 모레스 탐구 일지 (4)
청장미궁으로 돌아온 오웬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소파 위에 주저앉았다. 한손에는 마사인 경이 만들어 준 작은 고깔이 들려 있는 채였다.
[특별 퀘스트 - 황도로 돌아가자! (완료)]
눈앞에서 깜박거리는 작은 창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묘한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궁극의 엘릭서는 아마도…….’
모레스에게, 혹은 모레스를 위해 쓰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메인 스트림 3 역시 모레스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터.
‘어차피 퀘스트와 상관없이 그 녀석에게 줄 생각이었지만.’
그럼에도 막상 진상을 알게 되니, 의욕이 한풀 꺾이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웬은 지금껏 한시도 퀘스트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그다음으로는 성황가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 위해. 그리고 최근에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퀘스트에 매진해 온 나날.
하지만 그렇게 노력해서 구하고자 하던 상대가, 하필이면 지금껏 아웅다웅하던 그 얄미운 녀석이라니!
물론 오웬은 모레스에게 어떤 위기가 닥쳐오든, 결국에는 그것을 못 본 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진작 사실을 알았더라도, 과연 지금까지처럼 발을 동동 굴리며 퀘스트에 온 힘을 쏟을 수 있었을까?
솔직히 오웬은 그것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상태창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성□을 (를) 구하라!’ 같은 애매한 제목을 만들었을지도 모르지.
‘그거 압니까? 나 어쩐지 크게 속은 기분이 든다고요, 상태창 씨!’
허공을 향해 투덜거려봤지만, 상태창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바로 그때-
똑똑.
창을 두드리는 작은 소리와 함께, 잠행복을 입은 왜소한 신형이 스며들 듯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랫동안 그를 보필해 온 원숭이 망루의 정보원이었다.
“저하. 제가 조금 늦었슴다.”
털털하게 인사를 건네는 동글동글한 얼굴의 여인을 향해, 오웬이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며 외쳤다.
“9호!”
그녀는 제법 나이가 지긋한 베테랑 정보원으로, 오웬이 떠난 후에도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지금껏 남부 전선에 남아 있었다.
언어와 풍습이 다양한 이교도들의 부족을 오가는 복잡한 업무를 금방 다른 이에게 인계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후임 정보원에게 되도록 꼼꼼하게 업무를 인계해 준 후, 뒤늦게 오웬을 따라 황도에 도착한 것이다.
“잘 돌아왔다, 9호. 요즘 남부 분위기는 좀 어떤가?”
“현재로서는 조용함다. 아마도 가장 호전적인 카라잔이 답지 않게 몸을 사리고 있기 때문이겠죠. 다른 부족들도 대부분은 휴전을 반기는 분위기고요.”
9호는 중견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빠르고 가벼운 어투를 쓰고 있었다. 본래도 성격이 급하고 말이 빠르긴 했지만, 지난 수년간 오웬과 함께 지내게 되며 그런 경향이 더 두드러지는 중이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오웬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그의 명에 따라 오랜 시간 바르샤 부족들 사이에 잠복하며 임무를 수행하다 보니, 점점 제국어 발음이 뭉개지다가 끝내 이교도들의 어투를 닮아가게 된 꼴이니.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와카나 투사이는 현재 후계 문제로 제법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함다. 이미 어린 장녀를 후계자로 낙점했지만, 장남 와카나 쿠샤트의 반발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라죠.”
카라잔은 볼란타와 달리, 대부분 모계에 권력을 세습하는 부족이다. 딸에게 피가 더 짙게 이어진다고 여기는 바르샤의 오랜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식 농사란 것이 늘 부모의 마음 같지는 않아, 간혹 그 모든 전통을 뒤흔들 정도로 출중한 자식이 태어나기 마련.
와카나 투사이의 장자인 와카나 쿠샤트가 그런 경우였다.
“그래. 대부족회의에서 그를 본 적이 있다. 꽤 당차고 야망 있는 자처럼 보였지.”
오웬 역시 와카나 쿠샤트에게서 차기 후계자의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늙은 와카나 투사이를 제치고서, 그와 먼저 천천히 친분을 다져볼까 생각했겠는가.
외부인인 오웬이 느끼기에도 그럴진대, 같은 부족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가 얼마나 아까운 인재였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덕분에 최근 카라잔의 장로회가 두 패로 갈라져 한창 시끄러운 모양이었다. 와카나 투사이, 그 늙은 여우가 휴전 협정에 순순히 응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게다.
“그나저나 저하께서는 요즘 어떻게 지내셨슴까? 어째 안색이 좋지 않으심다.”
“음. 실은 말이지…….”
본래 9호와 담소를 즐기는 오웬은, 최근 그가 가진 고민에 대해 천천히 털어놓았다. 물론 상태창이나 퀘스트에 관해서는 빼고.
그리고 9호는, 캐리가 오웬에게 했다는 말을 듣고는 이내 불같이 화를 냈다.
“그게 말이 됨까? 망할 할멈 같으니라고!”
“9호. 네 생각은 좀 다른가?”
“당연함다! 그 노인네는 정말 아무것도 모름다! 오러를 수련한 적이 없었으니, 두 분이 나누는 이야기를 자세히 들은 적도 없겠죠! 그걸 그냥 애들끼리 또 싸우고 있구나, 했단 말 아님까?!”
9호는 마치 자신이 모욕받은 것처럼 분개하며 씨근덕거렸다.
“모레스 황자님은 명백히 선을 넘었슴다! 절대로 좋게 넘어갈 만한 문제가 아니었단 말임다!”
“흠. 그렇군.”
남들의 입장은 이렇게나 명확한데, 당사자인 오웬은 오히려 헷갈리는 중이었다.
사람이 너무 변해서 그런가, 어째 최근 들어 모레스에 대한 미움이 조금씩 희석되고 있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뭐, 어찌 보면 무리도 아님다. 캐리 할멈은 베스세바 황비의 충실한 전담 시녀가 아니였슴까? 그러니 남들이 뭐라 하든 성황가 사람들 일이라면 그저 좋게 보아 오냐오냐하고 넘어가는 수밖에요!”
그 말대로 캐리의 이전 주인은 현 성황의 어머니인 베스세바 황비였다. 듣기로는 선대 황후가 다른 별궁으로 내치기 전까지, 물심양면으로 버림받은 황비를 섬기고 따랐다고 하지.
어쩌면 매일같이 독살 시도가 난무하던 별궁에서, 신성력 하나 없는 베스세바 황비가 그리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캐리의 덕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였기에, 갑자기 굴러들어와 성황가에 입적한 오웬 또한 진심으로 보살필 수 있었으리라. 황궁에 오래 몸을 담은 전담 시녀쯤 되면, 대부분은 쓸데없이 콧대가 높아지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런 캐리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오웬과는 달리, 9호는 매번 그녀의 무던하고 무심한 처사에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감히 저하를 그런 허술한 마음가짐으로 보필해 왔다니, 용서할 수 없슴다! 하긴, 그 고약한 할멈은 예전부터 늘 그랬을 테죠! 그러니까 남들은 다 꺼림칙해하던 정신병자 황비를 아무 생각 없이 섬길 수 있……!”
정신병자?
오웬이 움찔 놀라자, 당황한 9호는 황급히 말을 주워 삼켰다.
“…아, 아무것도 아님다. 제가 실언을 했으니 그냥 잊어주십쇼.”
뭔가 엄청난 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오웬은 거기에 대해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전대 황비는 경애하는 아버님의 어머니가 아닌가. 그러니 아무리 헛소문이라도 그녀에 대한 험담을 귀에 담고 싶지 않았다. 그와는 별개로, 과열된 9호의 기분을 풀어줄 필요성을 느끼긴 했지만.
“진정해, 9호. 나 역시 그때 모레스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만 있지는 않았잖아.”
“그건……!”
발끈하던 9호는, 순간 과거를 떠올리고는 무심코 혀를 씹었다.
확실히 그랬지. 모레스 황자에게 무식하다고 욕을 먹으면, 오웬은 그 무식함에 걸맞은 걸걸한 쌍욕을 퍼부어대곤 했으니까. 무려 로한의 변두리에서 습득한 엄청난 강도의 욕들이었다.
적어도 캐리의 말이 하나는 옳았을 것이다. 오웬은 모레스를 상대할 때면 늘 기운이 넘쳤고, 절대로 뒤로 물러선 적이 없었다.
“그리고 캐리의 말도 일리가 있지.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들이 아니야. 언제까지나 녀석과 멱살 잡고 쌈박질만 할 수는 없지 않나.”
“저하…….”
9호는 대단히 감동한 표정을 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저하는 참으로 마음이 넓으심다! 모레스 황자님이 저하의 마음 씀씀이의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엉뚱한 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일 얘기 좀 하자. 실은 9호 네가 꼭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
오웬은 아픈 모레스를 신경 쓰느라 이제까지 미뤄왔던 중요한 문제를 끄집어냈다.
바로 판게아 클로니클에서 만났던 뉴비를 찾는 일.
“이성진…이라는 이름임까? 발음이 막 꼬이는 것이, 참 이상한 이름임다만.”
자초지종을 들은 9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들어도 델크로스식 작명이 아닌 듯했으니까.
“그래. 황도에 살고 있다고 했는데, 듣기로는 주변 환경이 꽤 험한 것 같았다. 그러니 되도록 빈민가 위주로 찾아보는 것이 좋겠지.”
“알겠슴다. 혹시 모르니 황도 근교 지역에도 수배를 해 두고,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보고 드리겠슴다. 그럼 이만 쉬십셔!”
9호는 황급히 오웬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자리를 떴다. 그 급한 성격에 새로운 임무를 받고 나니 손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었던 모양.
그렇게 또 혼자가 된 오웬은, 무심코 손에 쥐고 있던 고깔을 앞에 놓인 나무 조각상에 씌워 보았다.
‘이렇게 보니, 또 영감님과 제법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멍하니 조각상을 바라보며 오웬은 생각을 정리했다.
결국 그와 모레스의 관계는 어떻게든 변해야만 할 것이다. 과거의 앙금을 기억하는 것은 이제는 오웬 혼자뿐인 데다, 최근에는 모레스도 답지 않게 자신을 살갑게(?) 대해주는 것 같으니까.
‘그리고 다음 퀘스트 문제도 있지.’
오웬은 시선을 움직여 새로이 반짝이는 퀘스트 창을 열어보았다.
[메인 퀘스트 - 자신이 있을 자리는 스스로 찾아내자! new!]
[퀘스트 등급 : E]
[당신은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이교도들과의 불화를 잠재웠으며, 어쩌면 완전한 평화의 시발점이 될지도 모를 휴전 협정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증명하며 훌륭한 황자로서 자리매김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당신의 모든 업적과 명성의 기반은 현재 남부 전선에 있습니다. 뾰족한 지지 기반이 없을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행동이라면, 아마도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 그의 기반을 빌리는 것일 터. 이제부터 황궁 내에서 당신의 힘이 필요한 곳을 스스로 찾아내고, 여기에 조력을 아끼지 마십시오.]
[보상 : 20 P캐시]
[*본 상품은 판게아 클로니클 상점 창에서 사용 가능합니다.]
오웬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자, 보라고. 이렇게 모든 표현이 모호한 것을 보니, 이 또한 모레스와 관련된 퀘스트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뭐, 한동안은 계속 녀석 옆에서 죽치고 있으란 말이군. 틈틈이 뉴비 탐색에 관해 보고나 받으면서 말이야.’
조각상의 푸근한 미소를 잠시 응시하던 오웬은, 곧 검은 토끼 안대를 쓰고선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본래라면 아침이 밝는 즉시 본궁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오웬은 청장미궁을 나서자마자 바로 일정을 변경해야 했다. 아멜리아로부터 잠시 시간을 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
그리고 아멜리아가 웃으며 그를 인도한 곳은, 지금은 주인이 자리를 비우고 없는 진주궁이었다.
‘이렇게 마음대로 드나들 정도로 둘이 가까워졌다고?’
진주궁은 전과 달리 환한 분위기로 변해 있었다.
오웬이 떨떠름하게 주변을 둘러보자, 잔뜩 늘어난 사용인들이 오가며 오웬에게 정중히 예를 건넨다. 모레스가 없어도 그들이 진주궁을 드나드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는 듯했다.
“이곳이야.”
마침내 아멜리아가 걸음을 멈춘 곳은, 진주궁 안뜰이 환히 내다보이는 커다란 아틀리에였다.
햇살이 내리쬐는 창 아래에서 작업에 몰두하던 젊은 화가가, 그들이 들어서자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다.
“저 사람은 황도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초상화 화가야. 모레스가 그를 평생 고용하기로 계약하고서, 무려 진주궁 내에 전용 아틀리에까지 마련해 줬지.”
“그래?”
모레스 녀석이 예술가를 후원하다니 상당히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어지는 아멜리아의 말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앞으로 성황가 사람들을 전담하는 초상화 화가가 될 거야. 평생에 걸쳐 가족들의 모습을 그리겠다고 했지.”
“…가족들을, 그린다고?”
그 모레스가?
오웬은 새삼스레 화가가 한창 작업하던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대단히 웅장한 그림이었다. 너른 들판을 뒤로 한 채, 거대한 검을 들고 선, 위풍당당한 소년의 모습.
“이건… 모레스의 초상화야?”
아직은 미완성에 불과했지만, 그림에 문외한인 오웬이 보기에도 대단히 뛰어난 초상화였다.
검은 옷과 어두운 배경 사이로, 인물의 말간 얼굴과 밝은 금발 머리가 환하게 부각되고 있다.
정면을 응시하는 소년의 깊은 회색의 눈동자는, 어쩐지 그림 너머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마치 대부님의 눈을 볼 때마다 오웬이 종종 느끼곤 했던 것처럼.
“잘 그렸네. 그런데 모레스치고는 너무 어른스러워 보이지 않냐?”
오웬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돌아보았다. 왜 아니겠는가. 그가 생각하는 모레스는 조막만 한 어린애에 불과했다.
물론 오랜만에 돌아와서 본 모습이, 하필이면 침상에 웅크리고 골골거리는 모습이었던 탓이 크지만.
“걘 아직 작은 꼬맹이잖아?”
꼬맹이라고 소리 내어 말하고 보니, 문득 최근에 사귀었던 귀여운 친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모레스가 뉴비와 비슷한 또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혹 말하는 중에 그의 눈앞으로 손을 내미는 것도, 어쩐지 그 작은 친구의 버릇을 연상하게 만든단 말이야.
황궁에서 좋은 것만 먹고 잘 지냈을 텐데, 대체 모레스 녀석은 왜 아직도 그렇게 작은 걸까?
그러자 아멜리아가 오웬을 돌아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야? 모레스는 또래에 비해 키가 큰 편인걸. 그저 오라버니가 갑자기 너무 자라버리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거지!”
“…그래?”
“그럼. 거기다 얼마나 생각이 깊고 의젓한데? 오라버니가 그 앨 어린애 취급하니 어쩐지 생소하다.”
생각이 깊고… 의젓해?
말이 통하지 않는 그 고집불통 모레스가?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모레스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아멜리아의 눈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오웬은 어쩐지 의아해졌다.
생각해 보면 모레스와 제일 으르렁거리며 지낸 건 자신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체면 차릴 것 없이 큰소리로 맞섰기 때문이었지.
따지고 보면 당시 모레스 녀석에게 가장 많이 상처받았던 건, 아멜리아나 로건 쪽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떻게 지금은 이렇게들 잘 지내고 있는 거지?
“그런데 아멜리아. 왜 날 여기서 보자고 한 거야?”
“아, 그래. 이번 기회에 오라버니의 초상화를 그리면 어떨까 하고 불렀어.”
“내 초상화?”
오웬이 멍청히 되묻자, 아멜리아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직 첫 번째 그림이 미완성이지만, 순서를 조금 바꿔도 좋을 것 같아서. 모레스가 그랬거든. 또 언제 남부 전선으로 불려갈지 모르니까, 아무래도 오라버니의 초상화를 먼저 그리는 쪽이 좋겠다고.”
“모레스가…….”
가족 전담 화가에게 내 초상화를 그리자고 했다고?
“정 오라버니가 원한다면, 이번만큼은 닭털을 붙이고 그려도 아무 말 않겠다고 모레스가 전해달랬어.”
농담처럼 이어진 아멜리아의 말에 갑자기 말문이 막힌 오웬은, 한동안 멍하니 초상화 속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Chapter 77: Chapter 377
Chapter Text
377. 모레스 탐구 일지 (5)
그날 오전.
본격적으로 초상화의 모델이 되기에 앞서, 오웬은 간단하게 구도를 잡아보며 그림에 관해 아멜리아와 이런저런 논의를 했다.
그러던 중 그는 화가로부터 뜻밖의 요청을 받았다.
“가마우지 깃털 장식들을 그리고 싶다고?”
“네, 저하. 일전에 있었던 개선식을 무척 감명 깊게 봤습니다.”
델크로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이국적인 장식들이, 이 재능 넘치는 예술가에게 뭔가 강력한 영감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모레스는 지저분하다고 그렇게 구박했는데 말이지…….’
오웬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젊은 화가는 확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저하! 이제 제게 맡겨만 주십시오! 그날의 위풍당당하던 모습, 저하의 뒤에서 은은하게 비쳐오던 후광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제대로 살려 보이겠습니다!”
의욕이 넘치는 건 좋은데, 뭐? 후광?
‘화가라는 친구의 안목이 영 시원찮은데? 이대로 맡겨도 괜찮은 건가?’
오웬이 황당해하고 있는데, 곁에 서 있던 아멜리아가 뿌듯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좋은 생각이야. 깃털들은 모두 금으로 치장하고, 긴 머리카락과 함께 바람에 흩날리는 멋진 망토도 그려넣자. 분명 멋질 거야!”
“그건 좀…….”
과하게 오글거리지 않나? 아멜리아의 취향이 본래 그런 거였던가?
오웬은 만류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아멜리아의 눈앞에는 이미 완성된 초상화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전신이라 불렸던 리무스 대제의 초상화보다도 웅대하겠지. 분명 훌륭한 그림이 될 거야, 오라버니.”
“그, 그래.”
오웬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괜찮겠냐? 저 친구는 모레스가 고용한 화가잖아. 모레스는 가마우지 깃털들을 영 탐탁잖아 하는 눈치던데, 멋대로 그려넣었다가 나중에 괜히 한 소리 듣는 거 아닐까?”
그러자 아멜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응? 모레스가 왜 그러겠어. 아, 닭 털이라고 해서 그래? 그건 그냥 그 애가 하는 농담이야. 깃털을 그리자는 말을 먼저 꺼낸 건 모레스 쪽인걸.”
“하지만 나한테 너저분하다고…….”
“뭐, 오랜 여행 때문에 먼지가 좀 묻긴 했더라. 아마 지금쯤이면 모레스의 전담 시녀가 그것들을 깨끗하게 세척해 뒀을 거야.”
“…….”
“오라버니.”
오웬의 표정에서 뭔가를 감지한 듯, 아멜리아가 부드럽게 그의 손을 잡아왔다.
“지저분하지 않아. 그 깃털들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전적이잖아? 남부 전선에서 오라버니가 힘겹게 일궈낸 것들을 증명하는 물건인데, 모레스가 어떻게 감히 그것들을 함부로 할 수 있겠어?”
오웬은 듣고도 반신반의한 심정이었지만, 그를 똑바로 응시하는 아멜리아의 시선에는 조금의 의구심도 없었다.
“아마도 모레스는 오라버니를 조금 걱정하고 있는 거겠지. 우습게도 고위 사제들 중 일부는, 신성제국의 황자가 이교도의 야만적인 풍습을 따라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니까.”
“…….”
“전부터 오라버니를 트집 잡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이잖아? 그러니 모레스는 한동안 그들에게 번듯하고 친숙한 모습을 보여주어, 쓸데없는 반발심을 조금이라도 줄였으면 하는 마음일 거야.”
“…아멜리아.”
이쯤 되니 오웬은 그녀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는 어떻게 모레스의 의도를 그렇게 좋게 생각할 수 있지? 아무리 녀석이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말이야. 예전의 모레스가 우리 모두를 어떻게 대했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잖아?”
“오라버니…….”
오웬은 본래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고, 쓸데없는 일에 굳이 마음 쓰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부터 남들의 깔보는 시선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 온 것이다. 갑자기 굴러들어 온 황자가 받는 당연한 견제려니 생각했으니까. 괜히 따지고 들어봐야 평판만 나빠질 뿐이겠지.
그러면 못 들은 척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그리고 자신이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이면, 결국은 자연히 가라앉을 문제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모레스에 한해서는 절대 그렇게 넘길 수가 없었다. 어린애처럼 화내며 서로 언성을 높이고 싸워대기만 했지.
어디 그뿐인가. 그것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불편한 감정들이, 수년이 흐른 지금에도 가슴에 응어리져 남아 있지 않은가.
전혀 자신답지 않았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나는 지금 뭘 어쩌고 싶은 거지? 아멜리아에게 괜한 말을 꺼낸 건 아닐까? 별것 아닌 과거의 일들을 이제 와 문제 삼을 이유 따위…….’
이제 와서는 자신이 대체 모레스에게 뭘 원하는 건지, 스스로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그렇구나.”
잠시 침묵하던 아멜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림 속 모레스와 꼭 닮은 그녀의 회색 눈이, 깊은 이해를 담은 채 오웬의 눈을 마주 보았다. 모든 것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불가사의한 시선이었다.
“오라버니는 진심으로 그 애와 화해하고 싶은 거구나?”
“……!”
“다른 사람의 일이었다면 오라버니는 아마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거야. 애초에 그 애가 아니었다면, 과거의 일들이 마음속에 상처로 남는 일도 없었겠지.”
예전부터 또래답지 않게 똑똑하던 여동생은, 오웬의 기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물론 어느새 그도 모르는 속내까지도 정확하게 짚어 주는 것이다.
“대충 덮어두고 잘 지내는 척할 수도 있겠지만, 오라버니는 역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아마도 그건 진심이 아닐 테니까. 가족에게는 언제나 진심으로 다가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내가, 나는…….”
“응.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제대로 그 애와 마주하고서, 마음속에 있는 응어리를 모두 풀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를 올려다보는 아멜리아의 눈은 애정과 신뢰로 가득 차 있었다.
“모레스를 포기하지 않고 아직까지도 진심으로 대해줘서 고마워. 오라버니는 역시 상냥한 사람이야.”
* * *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것 같았지만, 사실 성진은 혼자서 이런저런 시도를 하며 전전긍긍하는 중이었다.
게헤나의 겁화.
그것은 아무렇게나 꺼버릴 수 있는 성질의 불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딘가로 휙 떨쳐버릴 수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어. 반드시 내 의지대로 저것을 제어해내야만 한다!’
그가 고열에 시달릴 때마다 매번 달려오는 성황이, 끝내 마지막 불씨만은 없애지 않고 남겨두는 이유.
성진은 그에게 따로 설명을 듣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잠깐씩 정신이 들 때마다, 티끌만큼 남겨져 있는 단전의 오러를 제어해 보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
‘이런……!’
하지만 결과가 영 신통치 않았다. 어설프게 단전을 건드리다 보면, 괜히 열 오르는 간격만 짧아지는 통에 또다시 비몽사몽 정신을 잃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어영부영 하는 새에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게헤나의 불이 과연 통제 가능한 것인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머지않았다는 모호한 예감만이 있었을 뿐.
하지만 성진에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언젠가는 오러를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모든 것이 결국은 잘 해결되리라는 희망. 그 실오라기 같은 느낌 하나에 기를 쓰고 매달릴 수밖에.
‘야! 말해 봐라, 마왕아! 이건 예전에 네가 쓰던 불꽃이잖아? 대체 어떻게 제어하는 거야?’
답답해진 성진이 이렇게 물으면, 마왕 놈은 대답 없이 그저 훌쩍거리기만 했다.
대체 이놈은 뭐가 문제지?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르겠다. 매번 곰 고기 수프를 먹는 것도 이제 질린다고!
사실을 말하면 곰 고기는 썩 성진의 취향이 아니었지만, 저렇게 염상 결정 속에 콕 틀어박힌 놈에게 달리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행한 점은 미각을 공유해 줄 때마다, 마왕 놈이 훌쩍임을 멈추고서 가만히 감각에 집중한다는 점이겠지.
‘이러니 곰 고기를 포기할 수도 없고…….’
이렇게 골머리를 앓고 있는 그를 괴롭히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시도 때도 없이 치료실로 찾아와, 치료제를 먹으라고 아우성치는 오웬 자식이었다.
실제로 얼굴을 보면 어색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녀석은 판게아 클로니클에서 보던 모습과 한 치도 변함이 없었다. 거기다 현실에서도 만만치 않은 호구 자식이었지.
‘저놈, 미친 건가?’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녀석이 치료제랍시고 꺼내 든 물건을 처음 봤을 때, 성진은 내심 크게 당황했다.
그 치료제야말로, 유스티티아 여신을 만나러 갔던 오웬이 소중하게 품고 돌아온 그 물건이었으니까!
‘이 정신 나간 놈이! 대체 어떻게 구한 물건인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내미는 거야? 그거 무슨 중요한 퀘스트의 필수 아이템이라면서?’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기껏 오웬이 내민 치료제가 자신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거였다.
성진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놈에게 제대로 설명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의 감 외에는 따로 근거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소용이 있는지 없는지 일단 써 보기는 하란 말이야!”
봐. 이 눈치 없는 녀석은 이렇게 나오게 된다고.
“그래도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란 게 있잖아!”
나잇값도 못 하고 빽빽 우기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성진은 정말 기도 차지 않았다.
‘아니, 이 멍청아. 가능성은 둘째 치고 말이지.’
그 귀한 물건을 한번 시험 삼아 써 보라고 하다니, 이 자식 지금 제정신인가? 그러다가 아무런 소득 없이 그냥 허공에 증발해 버리기라도 하면, 그러면 네가 나중에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짜증이 오른 성진이 팩 고개를 돌리며 뚱하게 대꾸했다.
“응. 없어. 그리고 그거, 엄청 맛없어 보인다고.”
그러니까 저리 치워. 난 절대 안 먹을 거라고.
“크아아악!”
끝내 오웬이 목 뒷덜미를 잡고서 넘어가자, 성진은 그를 보며 슬쩍 미간을 구겼다.
그러게 자꾸 여기서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황도에 온 김에 좀 더 자신을 위한 생산적인 일을 찾아보라고, 이 호구 자식아!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어쩐지 평소와 조금 다른 얼굴을 하고서 나타난 오웬이, 언제나처럼 안락의자를 침상 옆으로 끌어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답지 않게 힐끔힐끔 성진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닌가.
‘이놈, 지금 뭐 하는 거지?’
어색한 분위기를 참다못한 성진이 먼저 오웬에게 물어보았다.
“뭔데? 또 약 먹으라고 강요하러 왔어?”
“…내가 강요하면 언젠가 먹을 생각은 있냐?”
“아니.”
성진의 단호한 대답에, 오웬은 어쩐지 기운이 빠진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 뭐. 그럴 줄 알았다. 그냥 잊어버려.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니까.”
순간 오웬이 슬쩍 마사인 경과 눈짓을 주고받은 것도 같았지만, 성진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래. 이제는 치료제를 권유하지 않는다는 거지?’
다행이다. 지금껏 거절하느라 괜히 진땀 뺐잖아.
성진은 조금 안심하며 침상에 깊이 몸을 묻었다.
“흠.”
최근 잔소리를 한 보람이 있었는지, 오웬은 평소 입던 낡은 경갑은 어딘가 벗어 던지고서 제대로 된 델크로스의 복식을 하고 있었다. 물론 아무렇게나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과 두어 개 풀어헤친 단추는 여전했지만.
무심코 열린 셔츠 사이로 드러난 선홍색 이정표에 시선을 주는데, 오웬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황급히 단추를 채우며 변명했다.
“아, 내 복장이 그리 단정치 못하지? 미안. 요즘 신경은 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오랜만에 이런 옷을 입으니 답답해서 말이지.”
딱히 복장을 지적할 생각은 없었지만. 뭐, 일단 지저분한 닭 털들을 모조리 빼 버린 것만 해도 어디야.
한데 알아서 과하게 조심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오웬은 얼마 전 성진이 지적한 걸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에디스에게 닭 털들을 손질해 두라고 일렀어. 나중에 갈 때 받아 가든지.”
그러자 의외의 말을 들은 듯, 오웬은 동그래진 눈으로 한동안 성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
“뭐. 왜, 뭐.”
“아니. 진짜 아멜리아의 말이 맞았…….”
“응?”
“음, 그러니까 너, 정말 많이 변했구나?”
성진은 잠시 인상을 썼다.
‘이놈이 갑자기 뭐 하자는 거지?’
하지만 치료제를 잘 거절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서일까, 성진의 마음은 전에 없이 너그러워진 상태였다.
“뭐, 지금껏 과하게 지적했다면 그건 미안. 너도 알아서 잘할 텐데, 내가 좀 지나친 감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엉?”
“보자. 내친 김에 더 미안할 게 있는지 생각해 볼까? 일단 예전에 너랑 많이 싸웠다고 들었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지 기억 못 해서 그것도 일단 미안해.”
“뭐어?!”
드드득!
오웬이 화들짝 놀라며 의자째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런 그의 얼굴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질려 있는 터라, 성진은 슬슬 빈정이 상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 자식이! 사람이 사과를 해도 말이야!’
하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던가. 어쩐지 적절한 타이밍이 왔다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던 성진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오려는 쓴소리를 꾹꾹 눌러 참으며 말을 이었다.
“뭐, 이참에 너도 그간에 섭섭했던 게 있으면 다 말해 보든지. 일단 들어는 볼 테니까.”
“…….”
바로 그때였다.
오웬의 표정이 스르륵 풀어지나 싶더니, 이내 판게아 클로니클에서 익히 봐오던 헤픈 웃음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하하. 너나 나나 별일이 있어서 싸운 건 아니었지. 나도 자세히는 기억 못 해. 어차피 다 지난 일인데, 뭐.”
그것은 오웬의 진심이었다.
일전에 캐리가 말했듯, 그 모든 과거들이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어린애 싸움처럼 느껴졌으니까.
켜켜이 쌓여온 만년설도 약간의 진동만으로 쉽게 무너져 내리듯, 얼기설기 뒤엉킨 감정의 응어리 역시 약간의 계기만으로도 눈 녹듯 사라질 수 있는 모양이었다.
“하하하하!”
오웬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치료실 가득히 울려 퍼진다.
“……?”
성진과 마사인이 의아해하며 서로 마주 보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웬은 한참을 그렇게 시원하게 웃어댔다.
Chapter 78: Chapter 378
Chapter Text
378. 빨강이 (1)
동풍이여, 무심히도 그를 가엾다 말하지 마오.
나는 그이의 이름을 찬란한 영광이라 부르리오.
만일 내 노래가 헛되이 흩어질 칭송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검은 물결 위로 몸을 던지리라.
청아한 여인의 목소리가 본궁 가득히 울려 퍼진다.
아니, 여인이라기엔 조금 어폐가 있었다. 그 노래는 공기의 진동이 아닌, 온전히 인간의 사념이 자아내는 노랫가락이었으니까.
‘흠. 이번 이야기도 결국 비극으로 끝날 모양이군. 이왕이면 밝은 노래 쪽이 좋았을 텐데.’
애인을 잃고서 절망한 여인이, 브리즈 강 하구를 바라보며 부르는 절절한 노래라니. 이건 끝까지 들어보지 않아도 십중팔구 그녀가 강으로 뛰어들며 막을 내릴 것 같지 않은가.
성진이 떨떠름하게 뺨을 긁적이고 있는데-
찌이잉-
아니나 다를까, 마왕의 영혼이 가사에 깊이 동조하며 울렁이는 게 느껴진다. 어째 이놈, 더 우울해 하는 거 같지 않아?
“어떠십니까? 이번에 베르트랑 거리에서 초연된 인기 오페라입니다. 무려 그 유명한 소르본 선생이 오랜만에 각본을 썼다고 합니다.”
온 힘을 다해 열창을 마친 브루노 단장이 멋쩍은 듯 콧수염을 잡아당긴다. 최근 그는 잔뜩 침울해진 마왕 놈을 위해, 자진해서 신작 오페라 공연들을 사념으로 펼쳐 보이곤 했다.
문제는 한동안 베르트랑 거리에 비극 열풍이 불었었다는 점이겠지. 그가 가져오는 노래 대부분이 슬픈 정서를 강하게 자극했다는 뜻이다.
[훌쩍! 마지막까지 소중한 이름을 부르며 스러지겠다니, 정말 아름답고 멋진 노래야!]
잠시 여운을 음미하던 마왕 놈이, 훌쩍거리며 칭찬의 말을 던졌다.
[그나저나 얼뜨기야, 너 진짜 노래 잘 부르는 구나?]
“흠흠. 과찬이십니다, 빨강이 님.”
[그래서? 훌쩍! 마지막에 암브로시아는 어떻게 되었어? 결국 애인을 따라 브리즈 강에 몸을 던졌나?]
“네, 그렇습니다. 음유시인이 부르는 후일담이 남아 있는데, 그 노래도 마저 불러 드릴까요?”
[응. 어서 해봐. 훌쩍!]
저렇게 슬퍼하면서도 재미있게 듣는 걸 보니, 차마 하지 말라고 말릴 수도 없고 말이지.
성진이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브루노 단장이 상기된 얼굴로 괜히 큼큼 목청을 가다듬었다. 실제로 목을 쓰는 노래가 아닌데도 말이다.
잔혹한 머리 탑이 하나 둘 무너지고
그 위로 돌과 흙이 쌓이기를 수백 년-
남에게 들키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것치고, 단장은 의외로 마왕에게는 순순히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아마도 놈을 자신과 같은 취미를 가진 친구라 여기는 것 같았다. 마왕의 격한 반응과 칭찬을 조금은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저벅저벅-
바로 그때, 복도로부터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이 시간이면 매일같이 임시 치료실에 찾아오는 오웬 녀석이다.
훗날의 그대들에게 이 슬픈 이야기를 들려-
“저기, 단장…….”
성진이 뒤늦게 주의를 주려 했지만, 빠르게 다가온 발소리의 주인은 미처 경고할 새도 없이 힘차게 문을 열어 젖혔다.
콰앙!
“모레스! 이 형님이 오셨다!”
“으헉!”
혼비백산한 브루노 단장이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심장 발작이라도 일으켰나 싶을 만치 격렬한 반응이었다.
그는 명실상부한 데카론 나이트였지만, 워낙 사념으로 노래 부르기에 집중하고 있던 탓인지 미처 누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딱딱하게 얼어붙은 방 안의 기류를 아는지 모르는지, 눈치 없는 오웬이 빙글빙글 웃으며 침상 옆으로 다가왔다.
“너, 오늘은 식사를 제대로 했냐? 또 곰 고기 수프 따위로 대충 때운 건 아니지? 음, 근데 웬일로 마사인 형님이 자리를 비우셨다지?”
“…….”
“이 사람은 또 누구야? 황궁에서 처음 보는 얼굴인데?”
결국 오웬이 먼저 물을 때까지도, 브루노 단장은 호흡을 완전히 정지한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찌나 놀랐던지, 황자에게 마땅히 취해야 할 예도 생각나지 않는 모양.
보다 못한 성진이 나직하게 주의를 주었다.
“진정해, 단장. 신성제국 1황자의 앞이다.”
“……!”
그제야 오웬이 사념을 전혀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한 단장이, 뒤늦게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1, 1황자님을 뵙습니다. 저는 모레스 저하를 모시고 있는… 브, 브루노 그린이라 합니다.”
하지만 충격의 여파가 쉬이 가시지 않는지, 단장의 다리는 여전히 후들후들 떨리고 있다.
성진은 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로 옆방 집무실에 아버지가 계실 텐데…….’
단장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버지가 듣고 있는 자리에서 당당하게 오페라를 열창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성진이 짐작하기에는, 아마도 성황이 브루노 단장이 오기 전에 일찌감치 기척을 지우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가 마음 편히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성진이 고열이 날 때마다 곧바로 달려오는 걸 보면, 어지간해서는 집무실을 떠나지 않는 것 같단 말이지.
‘그 말인즉, 아버지 역시 매번 단장의 최신 공연을 듣고 있다는 뜻이야.’
뭐, 단장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이 사실은 굳이 짚어주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이참에 아버지도 기분 전환 하시는 거지, 뭐.
“아아, 그대가 그 유명한 평민 기사단장인가? 만나서 반갑네!”
다행히 오웬은 단장의 불경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털털하게 웃으면서 곁에 있는 안락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런데 마사인 형님은 어디 가셨어?”
“잠시 행정부에 볼일이 있어서.”
“행정부? 기사단장은 아예 사임했다면서? 그럼 형님의 공식 업무는 네 경호가 전부 아니야?”
“본래는 내가 해야 할 업무지. 요즘은 마사인 경이 내 대신 마물 전담반 관리를 하고 있거든.”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에 입단한 이후, 성진은 아예 공식적으로 부서의 책임자가 되어버렸다. 자문이라는 어중간한 직책으로 설렁설렁 일하는 것도 이제 끝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거대 악마종이 날뛴 이후로, 수도 근교 여기저기에서 그와 비슷한 악마의 권속이 발견되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규상 세계의 법칙을 따르는, 아직 제대로 개화하지 않은 악마종의 씨앗.
마기가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으니, 본래라면 악마 이외의 것을 다루는 마물 전담부의 소관이 될 터였다.
지금이야 성진의 몸이 성치 않고, 몇 안 되는 인원들은 죄다 토벌대에 딸려 보낸 상황이니 망정이지, 아마도 그들이 돌아오게 되면 그 모든 일들이 성진에게로 넘어올 것이 빤했다.
‘그리고 참회 교단의 본거지도 제대로 조사해야지.’
도망친 자코모 밀로의 행방도, 또 로페룸의 알이 유출된 경로도, 추적하다 보면 결국은 모든 것이 참회 교단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래서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만 하면, 성진이 직접 암흑 교단을 들쑤셔 볼 계획이었다.
지금까지는 마물 전담반의 인력만으로 조사하는 데 한계가 있었지. 하지만 모처럼 공권력도 손에 쥐었겠다, 이제는 휘하의 엑소시스트들을 제대로 동원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헤…….”
그러자 오웬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대단한데? 너 제법 제대로 일을 하고 있잖아? 언제까지나 천방지축 날뛰는 꼬맹이일 줄만 알았는데 말이지.”
…뭐, 이 자식아?
꼬맹이라니, 이 애송이가 지금 누구더러 꼬맹이래? 이 몸이 제대로 결혼만 했으면, 지금쯤 너만 한 손자가 있을 연배란 말이다!
와락 인상을 쓴 성진은 하마터면 오웬의 이마에 전처럼 거세게 딱밤을 날릴 뻔했다.
‘…아차!’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어중간하게 치켜든 손을 뒤로 물릴 수밖에 없었다. 겨우 수습한 1황자와 3황자 불화설에 다시금 불을 지필 뻔하지 않았나.
‘익명성에 기대어 놈을 마구 구박할 수 있을 때가 좋았지.’
판게아 클로니클의 그 징글징글한 산양 스킨이 그리워질 때가 다 있네.
“그나저나 넌 그렇게 할 일이 없냐? 기껏 황도에 와서는 왜 하루 종일 여기에만 붙어 있는 거야?”
성진이 타박하자, 오웬은 빙글빙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음. 본궁에 오면 아버님이 계시잖아? 그 곁에는 우리 예쁜 아멜리아도 있고. 그러니 가족들 얼굴을 보면서 겸사겸사 너한테도 들르는 거지.”
성진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오냐오냐 봐주고 있었더니, 이 자식이 지금 사람을 덤으로 붙여주는 떨이 상품 취급 하고 있네?
“그리고 이래봬도 놀고만 있는 것도 아니야. 나 지금 사람을 하나 수소문하는 중이거든?”
“…….”
사람?
뭔가 싸한 예감이 든 성진은, 그에게 누구를 찾는지 굳이 캐묻지 않았다.
“또 할 일을 찾으려고 여기 오는 것도 있지. 누가 그러더라.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 기반을 빌리라고. 내가 있을 자리는 스스로 찾아내라고 하던데?”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람?
어쨌거나 할 일을 찾는다니, 지금은 한가하다는 소리 아닌가?
“정 할 게 없으면, 옆에서 마사인 경이나 좀 도와주든지.”
사실은 굳이 마사인 경이 아니라도, 브루노 단장이나 상주기사들을 시키면 될 일이었다. 그저 근래에 하도 곁에서 안절부절못하기에, 일을 핑계로 머리나 식히라고 잠시 떼어뒀을 뿐이지.
한데 마지못해 행정부에 다녀올 때마다, 마사인 경이 폭삭 삭은 얼굴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너무 불안해서 만성 위염이 도질 것 같다나?
‘아니, 옆에 있어도 속이 타들어가고, 떼어놔도 위염이 생긴다니. 날더러 대체 어쩌란 거야?’
그래서 차라리 공식 직책 없이 놀고 있는 오웬을 끌어들일까 생각한 것이다. 이 털털하고 허술한 애송이를 신경 쓰다 보면, 마사인 경도 잠시나마 잡다한 걱정을 잊게 되지 않을까?
한데 그 제안을 들은 오웬이 묘한 얼굴을 했다.
“흠. 그 말은 이 형님더러 네 밑에 들어와 일 하라는 뜻이냐? 썩 내키지는 않는데?”
“밑에 들어오라는 게 아니라 그냥 가볍게 일을 도우란 뜻이야. 로건도 여기 있는 동안 잠시나마 마물 전담반 일을 했다고.”
“로건이야 애초에 벨도 없는 호구니까 그렇지.”
…그건 맞는 말이지만, 그게 지금 네놈 자식이 할 소리냐?
“뭐, 마사인 형님을 돕는 거야 좋지만. 난 애초에 쌈박질이나 할 줄 알았지, 행정 업무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고.”
“잘 됐네. 그럼 이참에 마사인 경에게 제대로 배워둬. 너, 평생을 전장에서만 살 것도 아니잖아?”
“흠. 그건 그렇지…….”
그래도 녀석이 잔뜩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 있길래, 성진은 반사적으로 그의 눈앞에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뭘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야? 자, 잔말 말고…….”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오웬의 얼굴빛이 심각하게 변하더니, 성진의 손을 악수라도 하듯 꽈악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어?”
“…아, 역시. 조금 뜨끈한 것 같아.”
녀석은 뭔가 깨달은 얼굴을 하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냅다 옆방으로 달려가며 이렇게 소리를 치는 거다.
“아버님! 모레스가 또 열이 날 것 같습니다! 저 녀석, 매번 고열이 날 때마다 손을 앞으로 내미는 버릇이 있더라고요!”
…내가 그랬던가?
성진이 스스로의 이마를 만져보며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정작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때까지도 방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브루노 단장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으니까.
“폐, 폐하께서… 집무실에, 계셨……?!”
어. 역시 미리 말해 줄 걸 그랬나 보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생각한 성진은 급격하게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제는 배경음처럼 익숙해진 아이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왔다.
[모레스! 마침 잘 됐다. 우리랑 지금 키프로스에 가보지 않을래?]
[로건 형님과 시슬레는 이미 도착했어! 곧 인형사를 만날 거야!]
뭐어? 그럼 지체하지 말고 어서 가 봐야지.
[아니, 이눔아!]
마침 그의 곁에 있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서 그를 타박하는 영감님의 울상인 목소리도 들려왔으니까.
[그만 놓아달라고 했더니, 기어이 내게 정성들이는 놈을 한 놈 더 만들어 놨구나! 이제 어쩔 거냐! 날 대체 어떻게 해줄 거냔 말이다아아!]
아니, 이 영감님이 엄살도 심하시네.
오웬 녀석은 딱 봐도 신앙심 없고 허술한 놈이잖아요. 걔가 정성을 들여 봤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입니까! 예?
[지금 내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 아이고! 내가 속이 터져서!]
쾅쾅쾅!
영감님이 가슴을 치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뇌리를 울린다.
거, 전보다 힘도 세지고 풍채도 훨씬 든든해 지셨는데, 뭘. 대체 뭐가 문제란 겁니까?
“모레스!”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성황의 목소리를 인식한 것을 끝으로, 성진은 다시 비몽사몽 꿈속을 헤매기 시작했다.
Chapter 79: Chapter 379
Chapter Text
379. 빨강이 (2)
거대 악마종이 출현하고, 이에 대한 소문으로 한동안 세상이 떠들썩하던 시기.
대륙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은밀하고도 신비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이를 접한 이들에게는 미래의 행보를 뒤바꿀 수도 있는 확실한 변화의 계기. 인과와 인과의 결손을 덧대어가는,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그 우연은 먼저 황궁에서 일어났다.
“…이건, 뭐지?”
진주궁.
언제나처럼 비어 있는 황자의 방을 정돈하던 에디스는, 발치에서 굴러다니는 작은 구슬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텅 빈 영혼석이었다.
“그러고 보니, 모레스 황자님께서 종종 이걸 가지고 다니셨던 것 같기도 한데…….”
황자님의 물건이 대체 어떤 경위로 바닥을 굴러다니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에디스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로 구슬을 주워들었다.
“일단 가져가서 저하께 여쭤봐야겠다.”
황자의 물건에 함부로 손댄다는 위기감은 없었다. 그녀가 모시는 분은 그렇게 융통성 없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일전의 일만 해도 그랬다. 그녀가 허락 없이 멋대로 황궁 마차를 사용했지만, 모레스 황자는 오히려 에디스를 크게 치하하며 막대한 포상금까지 내려주지 않았던가.
덕분에 향후 수년간은 먹고 놀기만 해도 될 정도의 수입을 얻었지.
‘하지만 내가 일을 쉬면 안 되지. 막스도 돌봐줘야 하고, 가끔 접시 던지기 놀이 하는 것도 재미있으니까.’
에디스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영혼석을 앞치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 *
작은 우연은 어느 극작가에게도 찾아왔다.
“소르본 선생! 이번 작품도 대박이요! 지금 황도의 사교계에서는, ‘머리 탑의 암브로시아’를 재관람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하지. 그대는 정말 신이 내리신 재능을 가지고 있소!”
오페라 극장주가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이자, 귀가 예민한 극작가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빈말은 그쯤 하지. 또 내게 뭘 원하는 게요?”
“빈말이라니, 어디까지나 진심이외다! 그것보다 선생. 우리 슬슬 다음 작품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소? 내 필요한 것은 뭐든 지원해 드리리다!”
“뭐요? 새 작품을 시연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차기작 타령이지? 이봐요, 극장주 양반. 당신 지금, 창작의 고통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격한 반발에 당황한 극장주가 말을 더듬었다.
“하, 하지만 선생. ‘머리 탑의 암브로시아’는 어디까지나 키프로스 음유시인들에게서 전해져 오던 오랜…….”
“아, 시끄럽소! 그런 낡은 노래 한 곡을 재료로 4막에 달하는 긴 극을 써내는 게 창작이 아니면, 이 세상에서 과연 무엇을 창작이라 말할 수 있다는 거지?”
신경질적으로 대꾸한 극작가는, 갑자기 양손을 같은 속도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같은 손가락으로 동시에 극장주의 머리 좌우를 가리키며 버럭 화를 내는 것이다.
“게다가 누누이 말하지만, 내 저택에 올 때만큼은 가르마에 신경을 써 달라 말하지 않았소? 세상의 균형을 어지럽히는 당신의 그 비뚤어진 가르마를 눈앞에 두고 있자면, 찾아오던 작품의 영감도 대번에 진저리 치며 달아날 판이오만!”
“뭐……?”
별 쓸데없는 지적질을 하는 여자였다.
하지만 극장주는 화를 꾹꾹 눌러 참았다. 현재 소르본 선생은 베르트랑 거리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 작가다. 그녀의 이름을 단 작품이라면, 설사 대사를 발로 쓴 극이라도 확실하게 흥행할 테지.
선생의 저런 인격적 결함도, 어디까지나 찬란한 천재성과 비례하는 반대급부 아니겠는가.
“자,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선생. 내 금방 머리를 고칠 테니, 우리 조금만 더 차기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극장주가 정확하게 가르마를 5:5로 만들기 위해 거울 앞으로 달려간 사이-
투둑!
갑자기 애먼 책 하나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며 둔탁한 소음을 냈다.
“아, 갑자기 뭐지?”
어디서 바람이 불어온 것도 아닌데, 왜 멀쩡하게 꽂아둔 책이 바닥으로 떨어진단 말인가.
극작가는 급히 책을 주워들어 책장에 도로 꽂아 넣었다. 자신이 정렬해 둔 대칭 구조를 잠시만 벗어나는 꼴을 봐도, 불쾌함으로 가습이 답답하다 못해 내장이 다 뒤틀릴 지경이었다.
한데 그런 그녀의 눈에, 문득 책의 제목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한때 대륙의 문학 사조를 풍미했던, 오르토나 낭만주의의 걸작.
‘[인형의 노래]라…….’
뭐, 이것도 꽤 괜찮은 작품이긴 하지. 구조와 결말을 조금만 손보면, 꽤 근사한 수미상관을 보이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번에는 고전 문학을 좀 각색해 볼까? 완전히 창작하는 것보다는 완성도 훨씬 빨라질 테고.”
극작가의 무심한 중얼거림에, 오페라 극장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 * *
바쁘게 길을 재촉하던 청년 하나도 그 작은 우연을 만났다.
“드디어 레지나에 도착했습니다, 케네스 도련님. 이대로 브리즈 강까지 가서 배를 타기만 하면, 키프로스까지는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수고했네.”
청년은 마물 은닉 혐의와 후배의 살해 시도, 그리고 사용인 두 사람의 살해 의혹을 받고서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케네스 디고리였다.
조부의 막강한 권력 덕분인지, 그의 모든 범죄는 결국 심신미약으로 인한 우발적 사고로 결론지어진 후였다.
그렇게 대폭 줄어든 형량에 막대한 보석금까지 내고서 풀려난 케네스는, 현재 황도 인사들의 눈을 피해 몰래 다른 지역으로 도주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디고리 추기경께서는 본래 도련님께서 평화로운 아나톨리아로 가시길 바라셨습니다만.”
“고루한 지주들의 아성에서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난 북부로 갈 거다. 현자님께서는 전부터 항상 말씀하셨네. 대륙의 모든 신비는 저 거칠고 자유로운 북부에 몰려 있다고 말이야.”
잠시 꿈꾸듯 몽롱한 눈을 하던 청년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수행원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네. 길거리 곳곳에서 이런 게 날아다니던데, 이건 대체 뭔가?”
케네스 디고리의 손에는 작은 전단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건……?”
“갑자기 바람에 날려서 내 손에 쏙하고 들어왔다네. 마치 세상의 신비가 기꺼이 나를 초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
수행원이 눈을 가늘게 떠 그 전단지를 살펴보았다. 제대로 된 활자가 아닌, 조잡한 글씨체로 새겨진 등사 인쇄지.
-현자님께서 전하시는 미래의 비밀.
대륙은 머지않아 닥쳐올 무시무시한 지옥의 불길을 앞두고 있다! 들으라! 오직 깨어난 자만이 빛나는 구원의 문을 열게 되리라!
수행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미치광이 현자의 이야기군요.”
“현자?”
그리 낯설지 않은 호칭에, 케네스가 귀를 쫑긋 세웠다.
“네. 수년 전부터 신이 예비하신 지옥을 봤다고 주장하는 정신 나간 자입니다. 지금은 인퀴지터들을 피해 벤소 후작령 인근에 자리 잡았다고 하더군요. 그런 번듯한 전단지까지 뿌리는 걸 보니, 이제는 꽤나 추종자들의 수가 많아진 모양입니다.”
흠.
케네스 디고리는 전단지를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에서는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봐. 키프로스 행은 중지다. 우리, 우선 벤소 후작령으로 한번 가 보자.”
“…네?”
갑작스러운 사태에 수행원이 당황하자, 청년은 고른 이를 드러내며 반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 시간 지옥을 대비하며 준비해 왔다는 자가 아닌가? 그런 자의 지성과 탐구는 얼마나 치열할 것이며, 또 얼마나 세상의 신비에 가까워져 있겠나?”
* * *
황도에서 멀리 떨어진 아세인 대공가 또한, 그러한 작은 우연을 피해갈 수 없었다.
“참으로 오랜만의 연회가 아닌가요? 아가씨… 아니, 황비님께서 돌아오신 후 처음 참석하시는 연회죠?”
내키지 않는 듯 불퉁한 표정을 하고 있는 황비의 머리를 빗질하며, 시녀들이 애써 그녀의 기분을 풀기 위해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이번에는 아나톨리아의 지주들도 대거 참석한다고 하죠? 그 촌사람들이 리자베스 님의 아름다우신 모습을 보게 되면, 아마도 너무 눈이 부신 나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거예요!”
“…….”
꺄르르르…….
조금의 변화도 없이 굳어 있는 황비의 표정에, 시녀들의 억지웃음 소리가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그, 그런데 리자베스 님. 오늘은 외출복 장식이 조금 심심한 느낌이 드네요. 늘 걸치시는 적금 장식과는 색이 맞지 않는데, 어디 여기에 어울릴 만한 다른 장신구가 없을까요?”
달그락 달그락.
시녀 하나가 열심히 보석함을 뒤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손에 도로록, 작은 장신구 하나가 굴러들어왔다. 전에는 그다지 본 적 없는, 얼음 조각처럼 하얀 수정이 장식된, 수수한 브로치였다.
“어머? 보석함에 이런 물건이 다 있었네? 리자베스 님! 이게 딱 적당할 것 같아요!”
시녀는 희희낙락하며 그 브로치를 허락 없이 외투에 꽂아 넣었다. 그러다가 뒤늦게야 하얗게 질린 다른 시녀들의 표정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엉?’
‘야! 이봐! 그만 둬!’
‘응? 왜?’
시녀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동료들이 온갖 인상을 써가며 소리 없이 입술을 움찔거렸다.
‘그거, 리자베스 님의, 쓰레기.’
‘쓰레… 헉!’
리자베스 황비의 쓰레기.
쓰레기처럼 멋대로 방 안을 굴러다니지만, 혹여 누군가가 함부로 손을 대면, 대번에 경을 치는 물건들.
뒤늦게야 사태를 파악한 시녀가 턱을 덜덜 떨며 황비를 돌아보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불호령이 떨어지리라 예상하면서.
“…….”
하지만 의외로 리자베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귀찮은 듯 고개를 돌리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을 뿐.
덕분에 브로치를 도로 떼어내야 할지 놔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시녀는,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그대로 부리나케 자리를 뜨고 말았다.
* * *
아세인 구석에 자리 잡은 저택 역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우연의 사각지대는 될 수 없었다.
오랜만에 심복 로드리고를 심부름 보냈던 카이엔은, 잠시 후 그의 영혼으로부터 다급한 정보를 전달받았다.
“…경비대에 붙잡혀?”
대체 왜?
그의 영혼이 드문드문 전해오는 정보를 오랜 시간 종합한 결과, 카이엔은 마침내 그 이유를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마침 로드리고는 카이엔의 지시에 따라 흑시에서 희귀한 독약을 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주머니 끈이 끊어지며, 독약병이 고스란히 길바닥에 나뒹굴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나가던 경비대원의 눈에 우연찮게 들고 말았다는 모양.
‘아니, 이게 뭐야? 재수가 없으려니, 뭐 이런 일이 다 있담?’
로드리고는 현재 카이엔이 유일하게 온전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영혼. 그러니 어떻게든 그를 감옥에서 빼내야 할 텐데, 뾰족한 수를 생각해 내려면 또 한동안 골치 아프게 생겼다.
‘완전 망했네. 이제 아버지가 오면 뭘 하고 놀아야 하는 거지?’
잠시 고민하던 소년은, 한동안 먼지가 쌓여가던 체스판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뒤적거렸다.
* * *
매일같이 마주하던 누군가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시선에 계속 들어온다고 하면, 이 역시 우연의 장난질이 가져온 변화라 봐도 좋을 것이라.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의 부관, 인퀴지터 루미에의 경우가 그러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서먹하게 자신들과 동행하는 작은 성녀로부터 도통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선두에서 휴식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잠시 행군을 멈추고 대기하십시오!”
“대기!”
“대기!”
기사 하나가 빠르게 역주행하며 알리자, 루미에가 뒤따르는 인퀴지터들을 돌아보며 지시했다.
“마침 적절한 타이밍이군. 좋다. 당장은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 각자 편하게 휴식들 취하지.”
그러자 곁에 있던 성녀 시슬레가 고개를 끄덕이곤 가볍게 말에서 뛰어내린다.
직책상 부관으로 인퀴지터 루미에와 동급이지만, 성녀는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루미에의 지시를 따르는 모양새였다.
어린 황녀와의 치기 어린 알력 싸움을 예상했던 루미에로서는 꽤 의외의 결과다.
‘그나저나 전혀 피로한 기색이 없군.’
루미에는 내심 감탄했다. 숙련된 인퀴지터들조차도 허덕일 정도의 강행군 속에서, 소녀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깨끗한 수정으로 빚어낸 것 같은, 완전무결한 주신의 피조물.
인퀴지터 루미에가 멍하니 작은 성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행렬의 선두를 향해 걸어나갔다. 그러고는 마침 약속이라도 한 듯, 선두로부터 다가오는 로건 황자와 마주친다.
과연 핏줄이 어디 가지는 않아, 그 역시도 그린 듯 단정한 모습의 황자님이었다.
“로건 오라버니.”
“그래, 시슬레. 막간을 이용해 나와 함께 기도를 드리겠니?”
“좋아.”
그렇게 남매는 그 자리에서 경건히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아……!”
순간 루미에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착각이었을까? 어쩐지 기도하는 두 남매로부터, 신성한 후광이 환하게 퍼져나오는 듯 보였던 것이다.
“주신이시여. 당신의 아이들을 지켜주소서.”
“부디 모레스 오라버니가 어서 쾌차하도록 보살펴 주소서.”
남매의 차분한 읊조림이 들러온다.
루미에는 어쩐지 확신할 수 있었다. 만일 만물을 굽어살피는 주신께서 하계를 내려다보고 계신다면,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분명 그들만을 위해 시선을 고정하고 계시리란 것을!
지금 작은 성녀와 로건 황자는, 바야흐로 돌아가는 세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엉뚱한 생각을…….’
화들짝 정신을 차린 루미에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꺄르륵-!
기분 탓일까. 어쩐지 귓가에서 천진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얼핏 들린 것도 같았다.
Chapter 80: Chapter 380
Chapter Text
380. 빨강이 (3)
인퀴지터 루미에가 처음부터 성녀에게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저 쌓이고 쌓인 우연이, 강철같이 단단하던 그녀의 신경을 반복해서 자극한 결과일 터.
갑자기 나뭇잎을 잔뜩 끌고 온 산들바람에 재빨리 고개를 돌려 피하고 보면, 그 시선 끝에는 늘 작은 성녀가 있었다.
행렬을 단속하다 날아든 티끌에 눈을 문지르고 있을라치면, 마침 그녀의 곁을 지나가며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는 회색의 시선과 마주쳤다.
이런 우연이 수차례 반복되자, 인퀴지터 루미에는 어느 순간부터 습관처럼 성녀 시슬레의 모습을 눈으로 쫓게 되었다.
그렇게 차츰 작은 성녀에 대해 알아가게 되자,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 있었다.
‘과연, 어린 나이에 성녀로 추대된 분은 뭔가 다르군.’
귀찮게 어린애 뒤치다꺼리까지 도맡게 되리라는 예상과 달리, 성녀 시슬레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스콰이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승마가 그리 익숙하지 않을 텐데도, 하루 종일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몰아간다. 나이 지긋한 인퀴지터들도 이따금 꾸벅꾸벅 조는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집중력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단원들 중 가장 늦게 배식을 받고, 루미에의 지시에는 또 가장 먼저 반응한다.
어린 나이를 감안하여 불침번에서 제외되자, 새벽같이 일어나고 밤늦게 잠들며 불침번을 선 인퀴지터들에게 신성력을 나눠주기도 했다.
자신을 기꺼이 기사단 가장 낮은 곳에 두고, 철저하게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원의 일원으로서 움직이는 모습.
‘평소 심방길을 수행하던 시스터 우슬라조차, 이번에는 아예 황도에 떼어두고 오지 않았던가.’
토벌대와 함께하는 또 다른 성녀인 서이서가, 두 사람의 시스터를 거느린 채 편안하게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부분이다.
그렇게 바지런히 노력하는 성녀의 모습에, 서먹하게 거리를 두던 단원들이 조금씩 마음의 거리를 좁혀가는 것이 루미에의 눈에도 빤히 보일 정도였다.
그녀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작은 성녀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처세술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꾸며낸 겸손함이든, 정말로 타고난 성품이든. 이제 막 12세가 된 소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노련함이었다.
‘아무리 어려도 성황가의 일원이라는 건가?’
그러고도 약간의 의문은 남았다.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의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성기사로서의 몸가짐을, 저 작은 소녀는 어떻게 저리도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가.
‘아예 짐작 가는 구석이 없지는 않지만.’
로건 황자.
바로 성녀의 눈앞에, 훌륭한 성기사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성황가의 일원이 있잖은가!
‘그래. 자신의 오라비의 모습을 참고 삼아, 영리하게 행동을 조율해 나가는 거군.’
의식의 흐름이 로건 황자에게로 이어지자, 루미에는 덩달아 그를 둘러싼 릴리움 별동대의 모습 역시 관찰하게 되었다.
“……?!”
그러다 보니 또 자연히, 릴리움 별동대의 실체에 대해 적나라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저하! 여기 배식을 받아왔습니다! 단원 모두가 공평한 거리를 공유할 수 있도록, 부디 이 가운데 자리에 앉으시지요!”
“내가 갈 수 있는데 뭣 하러 그런 수고까지 했나. 고맙네, 엘리 경.”
“저하! 기도 시간에 맞춰 어제 읽으시던 경전의 페이지를 미리 펼쳐 두었습니다! 지금 가시겠습니까?”
“그래, 자네의 사려 깊은 준비에는 늘 감사하네. 뒤상 경.”
“저하! 저하!”
뭐랄까, 보고 있자니 참으로 가관이었다.
릴리움 별동대가 로건 황자를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황자가 그들의 극성스러움을 견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
‘오토, 엘리, 뒤상 경이라고 했지…….’
인퀴지터 루미에는 슬쩍 미간을 구겼다.
주신의 뜻을 받들어 그분의 공정한 검이 되어야 할 성기사단이다. 한데 저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마치 주신이 아니라 순전히 로건 황자만을 숭배하는 사이비 집단처럼 보이지 않는가!
“대체 저치들은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성기사로서의 자부심이나 사명감이 염두에 있기는 한 겁니까?”
곁에 있던 인퀴지터 보리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루미에만이 아니라, 보고 있던 다른 인퀴지터들 역시 그런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만큼 저들이 로건 저하를 마음 깊이 존경하고 있다는 거겠지.”
차마 부관으로서 공식적으로 다른 성기사단의 흉을 볼 수 없었던 루미에가 점잖게 대꾸했다.
그러나 인퀴지터 보리스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저치들의 유난스러움은 도가 지나칩니다. 오죽했으면 그 웨스터 대주교조차 학을 뗄 정도라는 소문이 다 돌겠습니까?”
릴리움의 기사들이 로건 황자를 위해, 교회에서 성 바스티안의 성상을 바꿔치기한 사실은 이미 유명했다. 그야말로 황자를 위한 일이라면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뜻이겠지.
“릴리움 별동대의 ‘릴리움’이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말이겠습니까? 저 작자들은 기사단의 오랜 상징과도 같은 백합의 이미지를, 일개 어린 성기사에게 부여하여 그를 숭배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인퀴지터는, 저 앞쪽에서 말을 몰고 있는 작은 성녀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성녀 시슬레. 평소와 다른 약식 갑주 차림을 하고도, 고아한 성녀의 품격을 조금도 잃지 않은 소녀의 모습을.
“정말 어처구니없는 작자들이지요. 마치 자신들만이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분을 모시고 있다는 듯 호들갑이잖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우리 기사단에는 로건 황자님보다 더 대단한 분이 계시는데 말입니다.”
“더 대단한 분?”
“네. 시슬레 성녀님이야말로, 유례없이 어린 나이에 성녀로 추대받으신 분입니다. 성기사단의 진정한 꽃을 꼽으라 한다면 단연코 저분이 아닙니까? 저들이 로건 황자님을 백합에 비한다면, 우리 시슬레 황녀님은 그야말로 한 송이 흰 작약과도 같……!”
“…….”
급격히 싸늘해지는 루미에의 시선에, 주접을 떨던 인퀴지터 보리스가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렸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부단장님.”
루미에는 입을 꾹 다물고는 앞서가는 성녀를 바라보았다.
성황가라 해서, 연줄로 갑자기 떨어진 부관급 인사라고 해서 그녀를 특별 취급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작은 성녀의 저 살랑거리는 은빛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그녀를 지금보다 더 귀히 여겨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에 마음이 무거워지곤 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시슬레 님은 일개 스콰이어. 절대 예외적인 대우를 할 수는 없다!’
루미에는 고집스럽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는 사이, 토벌대는 어느새 브리즈 강 하구의 도시, 키프로스에 도착하게 되었다.
* * *
키프로스는 무척이나 독특한 정치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따로 왕이 존재하지 않으며, 8명의 원로들을 구심점으로 매년 새로운 평의회를 조직해 도시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것이다.
-대륙의 모든 나라들이 본받아야 할,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인 정치의 모습이다!
한때 오르토나의 공화정을 이끌었던 베니시오 왕자가 이렇게 칭찬했다던가.
어쨌거나, 토벌대는 키프로스에 입성하자마자 원로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어서 제대로 휴식을 취할 새도 없이 급하게 평의회에 초청받게 되었다. 어업 중단 사태가 장기화되자, 해양 마수 토벌의 사안이 무엇보다 다급해졌기 때문.
“지금부터는 실무자들끼리의 자리입니다. 외람되오나 성녀께서는 다른 단원들과 함께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루미에의 지시에, 시슬레는 고개를 끄덕이곤 단원들의 곁에 섰다.
토벌대의 총 책임자인 로건 황자를 위시해서 부관급 인사들이 모두 참석하는 자리. 하지만 이번 토벌행이 처음인 성녀의 경우는, 어차피 참석해 봤자 별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는 판단이었다.
“…….”
로건 역시 힐끔 그녀를 일별하기는 했지만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성기사단의 일은 어디까지나 성기사단 내부에서 조율해야 할 사안이니까.
그렇게 해서 시슬레는, 다른 토벌대 사람들과 함께 커다란 평의회 건물 안에 덩그러니 서 있게 되었다.
“뭐야? 저 루미에라는 여자. 시슬레 님께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요? 재수 없어요!”
서이서가 뒤에서 작게 구시렁거리자-
화르륵!
복도를 밝히던 횃불 하나가 마치 장단이라도 맞추듯 거세게 타올랐다.
하지만 시슬레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을 뿐이다.
‘나는 아직 배울 게 많은 어린 아이야.’
성황을 뒷배로 둔 덕에 처음부터 부관급 자리를 꿰찼다고는 하나, 그녀는 아직도 성기사단의 생리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정작 자신을 지도해 줘야 할 인퀴지터들이 데면데면하게 굴며 은근이 따돌린 탓이다.
하지만 그들만을 탓하고 있을 수는 없으리라.
‘인퀴지터들의 입장에서, 나는 허락 없이 끼어든 외부인이나 마찬가지인걸. 그러니 그들의 마음을 천천히 다독여가며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거야.’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성녀님.”
갑자기 옆으로 다가온 시종 하나가, 시슬레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외람되오나 평의원 한 분께서 잠시 성녀님을 뵙고자 청하십니다.”
…평의원이?
“왜 나를? 거기다 지금은 평의원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하는 중이 아닙니까?”
“그분은 다른 업무로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셨습니다. 우연히 지나가다 성녀님을 뵈었는데, 주신의 작은 은총을 이곳에 세워두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셨나 봅니다.”
“…….”
“소박한 다과 자리를 마련했으니 잠시나마 편히 쉬시기를 바란다 말씀하셨습니다.”
시슬레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의 자신은 성녀가 아닌,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의 일원으로 이 자리에 있다. 굳이 저 요청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막상 거절의 말을 내뱉으려는 찰나, 시종의 다급한 첨언이 이어졌다.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성녀님을 초대하신 분은 헬리오스의 암브로시우스, 원로원의 수장 크뤼세스 님의 장남이십니다.”
과연, 시종이 지시를 이행하지 못할까 안절부절못할 만했다.
헬리오스의 암브로시우스. 그는 풍문에 어두운 시슬레조차 수차례 들은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자였으니까.
그의 아버지인 크뤼세스는, 키프로스의 원로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진 자였다.
그런 이의 장남인 암브로시우스는 또 어떠한가. 젊은 나이부터 정치에 두각을 보여, 매년 평의원 자리를 놓치지 않는 실력자 중의 실력자.
왕이 없다 하여 권력의 세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죽했으면 왕정이 없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그를 일러 ‘키프로스의 왕자’라 칭하겠는가.
‘시스터 우슬라가 있었더라면…….’
시슬레는 잠시 자리에 없는 충직한 수행원을 떠올렸다. 본래라면 이런 경우, 그녀가 먼저 나서서 불필요하다 여겨지는 일들을 막아 주었을 텐데.
하지만 하필이면 시슬레가 직접 그 요청을 받은 탓에, 이제는 그녀의 대답이 곧 성황가와 정교회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하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잠시 다과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그럼에도 시슬레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가급적이면 거절하고 싶다, 어쩐지 가고 싶지 않다. 그런 기분이 아까부터 강하게 온몸을 사로잡은 탓이었다.
“헬리오스의 암브로시우스라면, 키프로스의 왕자라 불리는 그 사람이 아닙니까? 어디까지나 순수한 호의로 자리를 청하는 것 같으니 요청을 받아들이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바로 그때, 뒤에서 젊은 성기사 하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최근 시슬레의 근처에서 함께 행군을 하느라 이래저래 안면을 튼 자였다.
“인퀴지터 보리스…….”
시슬레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젊은 인퀴지터는 조금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갑자기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들 역시 성녀님을 이리 세워두는 것이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던 찹니다. 그렇다고 시슬레 님을 홀로 낯선 곳에 보낼 수는 없으니, 제가 끝까지 곁에서 수행하겠습니다.”
같은 기사단의 단원이 이렇게 나오는데 더는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시슬레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크게 안도한 듯 보이는 사용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한데 막상 시슬레가 몇 걸음 걷기도 전이었다.
화르르륵-!
복도를 비추는 횃불들이 갑자기 일제히 술렁거리며 어지러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건물 내부라 딱히 바람이 불어올 곳도 없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
묘한 예감에 사로잡혀 불꽃이 일렁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시종이 다시 한번 시슬레를 재촉했다.
“성녀님, 어서 이쪽으로.”
시슬레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순순히 시종의 뒤를 따라 걸었다.
절그럭 절그럭.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직도 낯설게 느껴지는 갑주의 마찰음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 * *
같은 시각.
이변은 델크로스의 중심에 있는 황궁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아버님, 모레스가 또 열이 오르는 겁니까?”
오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성황을 불러 한차례 신성력을 퍼부은 것도 잠시, 모레스가 누운 침상 근처에서는 또다시 엄청난 열기가 솟구치는 중이었다.
‘이상하다? 평소라면 한번 신성력으로 가라앉힌 뒤에는, 얼마간 열 오르는 일 없이 잠잠했었는데?’
오웬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열에 달뜬 모레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화르르륵-!
오웬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누워 있는 모레스로부터 일순 사나운 불길이 치솟은 듯한 착각이 일었던 것이다.
“……!?”
뭐지?
오웬이 눈을 비비며 다시 모레스를 살폈지만, 소년은 그저 눈을 감은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을 따름이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고열이 나기로서니, 사람의 몸에서 어떻게 갑작스레 불꽃이 일 수 있단 말이야?’
하지만 오웬은 이내, 모레스에게 뭔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재차 모레스를 향해 신성력을 쏟아 붓는 성황의 얼굴이, 핏기가 가시다 못해 하얗게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나직하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가, 임시 치료실의 공기를 희미하게 뒤흔들었다.
“아들아. 그만 두거라. 지금 그곳에서 무엇을 하려 드는 게냐?”
Chapter 81: Chapter 381
Chapter Text
381. 빨강이 (4)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철저히 인간의 몸으로만 움직이며,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행위를 쉬이 범하지 말 것.
그것이 6인 회의가 요구하는 [협정]의 제약이자, 오라클로 완전히 각성한 성황이 차원에 오래 발을 붙일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성황은 황궁을 벗어나야 할 일이 있으면, 늘 샤론 경과 같은 영능력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혹은 호문클루스와 같이 최소한이나마 인간의 성질을 지닌 몸이 필요했지.
[샤론 경.]
성황은 다급하게 키프로스에 보내둔 성기사를 찾았다. 하지만 현재 그녀의 상황 역시 그리 녹록지는 않은 듯했다.
[당장 움직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폐하. 평의회 건물은 비교적 경계가 삼엄합니다. 거기다 상급자의 허락 없이 섣불리 대열에서 몸을 빼려 들었다가는, 키프로스의 병사들보다 토벌대의 동료 성기사들이 먼저 저를 제압할 겁니다.]
물론 해결 방법은 있었다. 성황의 영혼이 임하여 그녀의 몸을 직접 움직이는 것.
하지만 공교롭게도 지금의 그는 만사를 제쳐두고서 키프로스로 향할 수가 없었다. 아들의 상태가 극도로 불안정했기 때문.
“모레스.”
만일 성황이 평소처럼 영혼 상태로 이 장소를 벗어난다면, 더는 위태로운 아들의 상태를 곁에서 억제할 수 없게 된다. 찰나의 방심만으로도 그의 아들은 지옥의 불길에 휩싸여 당장 목숨을 잃게 되리라.
문제는 일신의 제약을 벗어던진 아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헤르나와 가데스가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앞뒤 따지지 않고 날뛰려 드는 거겠지.
-와아! 모레스, 진정해! 이러다 정말로 큰일 난다고!
-이거 놔! 날 방해하지 마! 여기서는 내가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일부러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어린 아들의 영혼이 이렇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아. 이런 식이라면 너 역시 인과를 크게 어지럽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영혼의 힘을 직접 세상에 행사하는 것. 그것은 분명 아들로 하여금 상상 이상의 인과를 소모하게 만들리라.
지금껏 그 아이가 장난처럼 움직인 인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임이 자명한 일. 이제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인과의 소모를 줄여, 되도록 오래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괜히 몸을 사리다, 정작 자신의 아이가 먼저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결과가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오웬.”
잠시 후, 마음을 굳힌 성황이 대자를 불렀다.
“네, 아버님.”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돌아온다.
오웬 역시 어설프게나마 지금의 위태로운 상황을 감지한 모양. 성황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곳은 걱정하지 말고 내게 맡기거라. 너는 지금 바로 행정부로 가서, 부디 마사인을 이곳으로 데려와 주지 않겠느냐?”
“……?”
순간 오웬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서렸다. 사람을 부르는 일이야 다른 사용인을 시키면 될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경애하는 대부님의 명이었다. 오웬은 별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고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러겠습니다.”
그렇게 그의 대자가 몸을 움직이자, 성황은 지체 없이 의식을 확장시켰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수행하기 위해, 그의 영혼을 구속하고 있는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완전히 풀어버린 것이다.
가히 한 차원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권능. 그리고 이로 인한 여파는, 곧바로 현실 세계에 나타났다.
“……!”
막 문을 밀고 나가려던 오웬이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등 뒤가 텅 빈 듯 허전하고, 서늘한 이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웬은 곧바로 목도할 수 있었다.
창가에서 내리쬐는 햇살이 급격히 회색으로 빛바래는 광경을-
고요히 움직임을 멈추는 공기의 흐름과, 성에가 번지듯 굳게 얼어붙어 가는 시간을.
또한 오웬은 대부의 이상 역시 알아차렸다.
성황은 여전히 모레스의 손을 잡은 채 강대한 신성력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멀쩡히 두 눈을 뜨고 있음에도, 오웬은 어쩐지 그가 순간적으로 숨이 완전히 멎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창백하게 굳어 있는 성황의 얼굴은, 생물이 아니라 차라리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조각이라 해도 믿을 만큼 비인간적으로 보였다.
또 생의 증거를 완전히 잃은 채 반개한 눈.
기실 초점이 흐린 성황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또한 그 시선은, 세상 모든 것을 동시에 응시하는 듯 깊고 아득하기만 했다.
‘…멀다.’
오웬은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성황은 고작 몇 걸음 너머에 있을 뿐이건만, 마치 그와의 사이에 한 꺼풀 회색의 장막이 덧씌워진 듯,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아버…….”
놀란 오웬은 그를 향해 되돌아가려 했다.
한데 그 보이지 않는 경계에 한 발을 들이민 순간이었다. 갑자기 아찔한 현기증이 오웬의 머리를 거세게 잠식했다.
정신이 아득하게 빨려드는 기분과 튕기듯 밀려나는 기분이 동시에 느껴지는 괴상한 감각. 온몸의 신경이 일시에 풍랑을 만난 배처럼 요동치는 느낌.
놀라는 것도 잠시, 이내 격렬한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우욱!”
입을 틀어막은 오웬은,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서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이게, 뭐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오웬은 한 가지 사실만은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성황이 뜬금없는 심부름을 시킨 까닭. 아마도 그는 오웬을 이 괴상한 경계에서 멀찌감치 떼어두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 사태 역시, 어디까지나 대부님의 통제하에 있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오웬은, 보이지 않는 경계 앞으로 다시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러고는 초조한 얼굴로 성황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버님. 지금 대체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 * *
“서둘러 주시오, 로건 황자! 토벌대가 타고 갈 전함은 이미 준비되어 있소이다!”
평의원들은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토벌대의 책임자가 어린 황자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일단은 기세만으로 거세게 밀어붙이려 작정한 듯 보였다.
하지만 로건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원합니다. 마수의 종류와 출몰하는 지역, 그리고 그 규모를 자세히 알려 주십시오.”
“가는 동안 모두 설명할 수 있소. 우리 해군에서 일찌감치 상세한 토벌 작전을 입안해 두었소이다!”
“자자, 우리 지금 이럴 시간이 없다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키프로스의 시민들은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보내고 있음을 알아주시오!”
하지만 신성제국의 황자는 의원들의 압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다급한 사안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우리 토벌대는 어디까지나 나의 계획하에서만 움직입니다. 그러니 한번에 토벌에 성공하기 위해서라도, 마수에 대한 더 자세하고 정확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
일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자, 평의원들은 다급히 동석하고 있는 나이 지긋한 부관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로건 황자의 말에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 딱히 대놓고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제야 평의원들은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로건 황자의 명성이 그저 과장된 허명이 아니라는 것을.
신성제국의 애송이 황자는, 정말로 토벌 작전을 직접 입안하고 시행하는 저들의 지휘관인 것이다.
잠시 시선을 주고받던 평의원들은, 결국 이 만만찮은 황자를 달래기로 마음먹었다.
“급한 마음에 실례를 범했소. 준비된 작전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로건 황자. 제대로 설명 드리겠소. 우선 우리 해군이 준비한 [고대의 불]이라는 병기가…….”
바로 그때였다.
끼이이-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회의실의 문이 열린 것은.
“……?!”
“뭐지? 왜 문이 열리게 내버려 두었나? 대체 경비들은 뭘 하고 있기에…….”
갑자기 회의를 방해받은 평의원들이 웅성거린다.
그렇게 열린 문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우중충한 잿빛 정복을 걸친 까마귀 같은 여인이었다.
“…샤론 경?”
로건의 호명에, 동석한 부관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린다.
다들 그녀를 바로 알아보았다. 샤론 경은 이번 토벌대에서 유일하게 참가한 성 테르바키아의 엑소시스트였으니까.
“갑자기 여기는 무슨 일로?”
“왜 멋대로 대열을 이탈한 거지?”
하지만 로건의 예민한 감각은, 일순 그녀의 눈이 묘한 은빛으로 번뜩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바마마?
당황하며 시선을 마주하자, 엑소시스트는 굳은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로건 저하.]
마치 머릿속에 직접 울려오는 듯, 기이하게 가까이서 들리는 목소리. 예전에 한 번 들은 적 있는 목소리지만, 소드 마스터의 감각은 전과는 어딘가 다른 기묘한 간극을 감지하고 있었다.
[서둘러 주시기를.]
그녀의 표정 또한 전과는 어딘가가 달랐다.
예전에는 성황의 영혼을 덮어썼을지언정 사람 같은 느낌이 남아 있었다면, 지금은 마치 완전한 기계인형으로 변하기라도 한 듯 지극히도 무표정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공들여 한 마디 한 마디 내뱉는 말 역시 매끄러운 문장이 아니었다. 마치 소리를 내는 것이 두려운 듯, 극도로 말을 아끼는 모습.
[성녀께서.]
하지만 로건에게는 그 몇 마디 말로 충분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버지가 왔고, 시슬레에 관해 언급했다. 필시 그의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리라.
마음이 움직이자, 이내 주위의 모든 오러가 그에게 필요한 정보들을 실어 나른다. 복도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술렁거림과, 어린 동생의 유난히 빠른 심장 박동을.
‘시슬레!’
로건은 곧장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그러고는 모두가 얼이 빠져 있는 사이, 시슬레의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주저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 * *
건물 곳곳에서는 마수 토벌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시슬레가 시종의 안내를 받아 걷는 사이에도, 복도 한쪽에서는 인부들이 커다란 나무 상자를 여럿 실어 나르는 모습들이 보였다.
“어이, 거기 좀 조심해서 옮겨!”
“인화성이 강하다고. 되도록 횃불 근처에 다가가지 말란 말이다!”
그 와중에 복도로 쭉 이어진 횃불들은 점점 더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타닥! 탁! 탁!
그것이 어찌나 신경이 거슬렸던지, 인퀴지터 보리스가 끝내 한마디 내뱉었을 정도였다.
“키프로스는 횃불에 대단히 질 나쁜 기름을 쓰나 봅니다.”
시슬레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묘한 불길함이, 점점 두근거림으로 신체화되는 현상을 경험하면서.
‘뭐지?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바로 그 무렵이었다.
복도 저편에 있던 횃불 하나가 기묘한 움직임을 보인 것은.
화르르륵!
난데없이 높이 솟구쳐 오른 커다란 불꽃은, 마치 나비의 날개처럼 팔랑이는 작은 불씨 하나를 허공에 날려 보냈다.
“……?”
하늘하늘.
바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홀로 날갯짓하던 붉은 불씨는, 꿈결처럼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시슬레의 눈앞을 가로질렀다.
“…음?”
그리고 끝내 그 붉은 나비가 안착한 곳은, 마침 인부들이 한쪽 복도에 놓아둔 커다란 나무 상자 위였다.
“자, 잠깐! 저, 저……!”
인부들이 미처 손쓸 틈도 없었다.
화르르륵!
키프로스 해군이 야심 차게 준비한 비밀 병기, [고대의 불] 위로 거센 불길이 치솟아 오른다.
연이어-
콰아앙!
커다란 폭음이 평의회 건물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Chapter 82: Chapter 382
Chapter Text
382. 빨강이 (5)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사곱니다! ‘고대의 불’이 실린 상자 하나에 불똥이 떨어졌습니다!”
“뭐? 그런데 왜 폭발이 일어나?”
갑작스러운 폭발은 평의회 건물 한 귀퉁이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복도에 접해 있던 두어 개의 방들이 경계를 잃은 채 고스란히 드러나고, 맞은편의 외벽 또한 형편없이 부서져 인접한 안뜰이 훤히 내다보였다.
그리고 그 모든 공간들을, 이내 뜨거운 주홍색의 불길이 빠르게 뒤덮어 나간다.
화르르르륵!
“물을 가져와라! 어서!”
“미쳤어? 물은 안 돼! 불길이 더 번지고 만다고!”
“흙! 우물쭈물하지 말고 흙을 퍼 와라! 최대한 많이! 보이는 불길은 모두 덮어야 해!”
인부들이 혼란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동안, 복잡한 인파 사이를 수월하게 주파한 로건이 순식간에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
“……!”
불길이 이는 복도에는 세 사람이 나란히 쓰러져 있었다. 운이 좋았는지 아직은 화마에 휩쓸리지 않은 상태.
그들 중 익숙한 은빛 머리카락을 발견한 로건은, 오러의 장막을 넓게 펼치며 곧장 불길의 가장자리로 달려갔다.
“시슬레!”
재빨리 작은 소녀를 끌어안고서 꼼꼼히 상태를 살피니, 다행히도 겉보기에 별다른 외상은 없어 보였다. 그저 거센 폭발에 휘말리며 잠시 의식을 잃은 모양.
어린 동생의 안정적인 오러를 감지한 로건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화아악!
그렇게 시슬레에게 한바탕 신성력을 쏟아낸 다음에야, 로건은 겨우 주변의 상황을 살필 정신이 생겼다.
그리고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문을 잃고 말았다.
“…….”
그것은 끔찍한 화염의 지옥.
고대로부터 전해진 비밀스러운 인화성 물질을 타고, 거대한 화마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시시각각 집어삼키는 중이었다.
후두둑-
폭발의 여파로 인해, 건물 외벽은 아직도 조금씩 흙먼지를 일으키며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면 거기서 발생한 분진이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이며, 바닥뿐만 아니라 주위의 대기마저 잠식하고 마는 것이다.
불길이 또다른 불길을 만들어내는 지독한 악순환.
‘…이런 상황에서 용케도 무사했구나!’
뜨거운 불길이 오러 장막의 좌우로 갈라지며 번져나가는 광경을, 로건은 조금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하!”
“로건 저하!”
“헉! 성녀님?!”
뒤늦게 로건을 쫓아 달려온 릴리움의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연이어 오러 장막을 펼친다.
“저하! 피하셔야 합니다! 어서 이쪽으로!”
로건은 시슬레를 안고서 기사들이 확보한 퇴로를 따라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뒤이어 오토 경과 엘리 경이 달려들어, 곁에 쓰러져 있는 인퀴지터와 시종 또한 무사히 뒤쪽으로 끌어낸다.
화르륵! 화륵!
그러는 동안 현장에서는 진화 작업이 한창이었다. 사방에서 달려온 경비병들이 인부들과 합세하여 쉴 틈 없이 흙을 실어다 나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 이미 기세를 타기 시작한 화마는 더욱 넓게 번져나갈 뿐, 좀처럼 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무서운 화염이군요. 이것이 바로 평의회에서 말하던 그 [고대의 불]인가 봅니다.”
뒤상 경의 중얼거림에 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여간해서 불길이 잡히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바다 위에서도 쉽게 화공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그때, 품 안에 있던 시슬레가 작게 몸을 움찔거렸다.
“…로건 오라버니.”
“그래, 시슬레. 정신이 좀 드니?”
잠시 눈을 깜박이며 초점을 맞추던 시슬레는,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반짝 눈을 치떴다.
“오라버니! 인퀴지터 보리스는?”
“함께 있던 인퀴지터를 말하는 거라면 걱정 마라. 그는 무사하다.”
고개를 돌려 복도 한쪽에 누워 있는 인퀴지터와 시종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시슬레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어찌 된 일이냐? 시슬레. 왜 네가 폭발에 휘말린 거지?”
“나는… 이곳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어.”
“누구를 만나?”
시슬레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벽이 무너지고 내부가 온전히 드러난 어느 넓은 방 하나를 향해.
무심코 소녀의 시선을 따라가던 로건은, 순간 뭔가를 감지하고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사람……?!”
거대한 불의 장벽 너머, 그곳에 정말로 또다른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이미 완전히 의식을 잃은 듯, 몸의 일부가 불길에 휩싸여 있음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로건은 적잖이 당황했다.
‘뭐지?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는데? 언제 저곳에?’
마침 화재를 진압하던 이들 역시, 그 사람의 존재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암브로시우스 님께서 불에 휩쓸리셨다!”
“사제! 어서 사제를 불러!”
“잠깐! 불길을 잡는 것이 먼저다! 서둘러라!”
그 소동에 시슬레가 정신을 완전히 차린 듯 번쩍 몸을 일으켰다.
“아…! 헬리오스의 암브로시우스! 그와 만나기로 했는데, 아마 나를 마중 나오다 불길에 휩쓸려 버린 것 같아!”
저자가 시슬레를 멋대로 이곳으로 불러낸 장본인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저것이 정말로 살아 있는 사람의 기척인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어떻게 내가 지금껏 눈치채지 못할 수가 있지?’
로건이 묘한 기분을 느끼며 망설이자, 시슬레가 간절한 얼굴로 로건을 바라보았다.
“로건 오라버니, 난 괜찮으니 오라버니는 어서 저 사람을 도와줘.”
“시슬레.”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불길 속에 사람을 내버려 둘 순 없잖아? 쓰러진 다른 사람들은 내가 보살필 테니, 어서!”
타당한 말이었다. 로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화아악-
강력한 은청색의 장막이 펼쳐지자, 사나운 불길이 이내 힘없이 갈라지며 소드 마스터를 위해 기꺼이 길을 열었다.
* * *
폭발의 여파는 엄청났다. 정작 불씨를 일으킨 성진조차 그 충격을 피해갈 수 없을 정도였으니.
아니, 어쩌면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욱 큰 영향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꾸엑……!’
성진의 영혼은 단숨에 델크로스를 향해 날려졌다. 곁에서 조잘거리던 쌍둥이들의 영혼 단말 역시 비슷한 충격을 받았는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더는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성진은 어질어질 혼란스러운 와중에 생각했다.
‘뭐지? 저게 왜 저렇게 폭발하는 거야?’
성진이 알기로, 저 상자에 담긴 물질은 단숨에 폭발하는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단지 불길이 제법 빠르게 번지고, 여간해서는 진화하기 어려운 액체연료였을 뿐.
그래서 성진은 그저 조용히 불길을 일으켜 시슬레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겸사겸사 방향을 조금 조종해서, 거슬리는 놈 하나를 완전히 태워버릴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라 생각하면서.
‘그래. 내가 노린 것은 인형사 놈의 목숨이었어!’
인형사의 영혼을 없애려면, 놈이 깃든 몸을 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실제로 그 사람 자체는 [인형사]가 아니라는 사실도 성진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생면부지의 타인을 살해하려 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었다. 심지어 영혼으로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인과를 소모하게 될 것이 빤했다.
하지만-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지금과 같은 기회가 생기지 않겠지. 그러니 여기서 놈의 허를 찌르는 거야! 인형사도 설마 내가 인과를 뒤틀어가며 직접적으로 손을 쓰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대단히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주변의 사물들을 잘만 이용하면, 아마도 인과의 허용치를 완전히 넘어가지는 않으리라.
적어도 성진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시슬레와 로건을 노리는 원흉 자식! 내가 이 자리에서 네놈의 싹을 완전히 없애주마!’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불씨를 일으켰건만, 결과는 이 모양이다. 그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라져버린 거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불씨를 당겼다고 해서 그런 폭발이 일어났을 리가 없어.’
짐작컨대 뭔가가 중간에 끼어든 것이리라. 성진도 미처 눈치 채지 못했을 정도로 미세한 양의 인과를, 누군가가 대단히 효율적으로 조종하여 일의 결과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것이다!
‘대체 누가?’
6인 회의 놈들인가? 아냐, 아직 그들은 인형사가 뭘 꾸미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
혹시 고위 마왕들 중 하나? 하지만 날 방해한다고 해서 지금은 딱히 얻을 것이 없을 텐데?
아니면…….
‘…설마, 아버지?’
성진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삐이-
이내 시끄러운 이명과 함께, 언제나처럼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성진은 급격히 멍해지는 머리로 드문드문 생각을 이어나가려 애를 썼다.
‘아직, 아직은 아니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좀 더 파악해야 한다고! 로건과 시슬레에게 알려줄 것도 있어! 그 상자는……!’
…그런데 잠깐. 상자?
내가 저 상자가 뭔지 어떻게 알고 있지?
아니, 그것보다 나는 방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지? 난 대체 무엇을 위해…….
쏴아아-
썰물처럼 기억이 빠져나간다. 무척이나 허망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일.
결국 생각을 포기한 성진은, 영혼의 힘을 빼고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일단 몸으로 되돌아가, 또다시 모레스로서 눈을 뜨길 기다리며.
[이성진.]
바로 그때, 누군가가 성진을 부른다. 고개를 돌려보니 제법 익숙한 모습의 작은 불똥 하나가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왕?’
현재 반쯤 몸을 떠나 있는 성진의 영혼은, 굳이 영안을 빌리지 않더라도 영혼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한데 웬일인지 마왕은 더는 울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와 달리 꽤 결연하기까지 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 않은가!
‘마…….’
성진이 놈을 한 번 더 부르려는데, 마왕이 먼저 선수를 치며 대화의 물꼬를 텄다.
[잠시만 기다려봐, 이성진. 잠시만, 지금 이 상태에서 나랑 조금 이야기하지 않을래?]
‘이야기? 뭐야, 갑자기? 그거라면 조금 있다가 하자. 우선 내가 일어나서…….’
[아니야.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이제 더 이상은 내 소중한 기억들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
[이번 한 번뿐이니까! 응?]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다.
그럼에도 놈의 간절한 목소리에 실린 감정이 생생하게 전해져 와, 성진은 문득 그 부탁이 뭐든 들어주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그 생각을 어떻게 안 건지, 마왕의 작은 불꽃이 미소 짓듯 잔잔하게 흔들렸다.
[…고마워.]
‘…….’
성진은 대답 없이 눈앞의 초라한 불꽃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놈은 평소의 마왕답지 않았다. 매일 어린애처럼 징징거리기만 하던 하찮은 녀석이었는데 어째서일까, 지금의 놈에게서는 전과는 다른, 일종의 품격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내 용건은 별것 아니야. 오늘에야말로 너에게 내 진짜 이름을 말해 줄 때가 온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
성진은 의아해졌다.
‘왜 하필 지금이지?’
예전에 놈이 그러지 않았던가? 자신의 이름은 입 밖으로 불러서는 곤란하다고. 뭔가가 잔뜩 걸려 있다고.
[그 잔뜩 걸려 있던 금제가 지금은 훨씬 옅어졌으니까.]
‘금제?’
[응. 너도 알다시피, 방금 허락을 받았거든.]
‘……?’
의아해져 가만히 놈을 응시하고 있자니, 마왕은 마치 시선을 맞추기라도 하듯 성진의 눈높이까지 올라와 깜박거렸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천천히, 자신에게 되뇌기라도 하듯 힘을 주어 말했다.
[잘 들어, 이성진. 내 이름은 칼파그니. 위대한 불의 마왕이자, 차원의 파멸을 부르는 게헤나의 겁화다.]
칼파그니.
한데 그 이름을 듣는 순간이었다.
쩌엉-
성진은 갑자기 머리를 강타하는 커다란 충격을 느끼고는 비틀거렸다.
‘이건……!’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통증. 분명 언젠가 베르트랑 거리에서, 엉망진창으로 진행되는 인형극을 보았을 때 받았던 충격과 같았다.
성진이 영문 모를 현상에 깊이 당황하고 있는데, 마왕이 사심 없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솔직히 말해봐. 이성진. 방금 너, 많이 아팠지?]
‘……!’
[그래. 그야 그렇겠지.]
뜬금없이 한 대 얻어맞은 기분. 하지만 정작 이 현상을 만든 장본인인 마왕 놈은, 마치 모든 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담담한 태도였다.
[그럴 수밖에. 왜냐하면 그 이름은 이미 그릇된 이름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이제 더 이상 불의 마왕의 이름은, ‘칼파그니’가 아닐 수도 있는 거거든.]
‘뭐……?’
[예전에 네가 말해준 인형극 이야기, 기억하고 있어?]
마왕은 마침 성진이 떠올렸던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난 그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 놈이 그릇된 이름을 불러 공격한 건 분명 불의 마왕인 나일 텐데, 왜 너 역시 그렇게 큰 타격을 받았었는지 말이야.]
‘…….’
썩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문제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내키지 않는 결론에 이르리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마왕 놈의 말을 이제 와서 제지할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이번에는 놈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성진. 너는 마왕의 세대교체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
그래도 하지 마.
더는 말하지 마라, 마왕아.
성진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머리 한편으로는,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사실을 깊이 실감하면서.
[힘이 있는 한 빼앗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취하는 것. 그리고 약한 자는 더 강한 자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 그것이 악마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야.]
지금껏 마왕의 진명에 금제를 가하며, 애써 인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버텨왔던 사실을.
[그리고 그것은 한 차원의 왕인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
찬찬히 설명을 이어가는 마왕의 영혼이 때때로 불규칙적인 빛을 점멸한다. 너무나 하찮은 나머지 조금은 슬프게도 느껴지는 희미한 빛을.
[너는 홀로 한 차원의 마왕을 죽였어. 그리고 게헤나의 모든 것을 통치할 자격을 얻었다.]
불의 마왕은 그때 세대교체를 끝냈던 거야. 그렇게 말하는 마왕은, 무척 서글픈 것 같기도, 혹은 조금 기쁜 것 같기도 했다.
[알겠어? 이성진. 처음 이 세계로 왔을 때부터, 너는 이미 불의 마왕이자 나의 군주였던 거야.]
Chapter 83: Chapter 383
Chapter Text
383. 빨강이 (6)
세대교체는 이미 일어났다.
하지만 처음에는 마왕 역시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어떻게 지옥의 겁화로부터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영혼이 멀쩡히 보존되지 않았던가.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 한, 자신은 어디까지나 불의 마왕이라 생각했었지.
간혹 자신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그는 점점 거기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 이성진이 지나가듯 이름에 대해서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
‘내 진명에는 많은 것들이 걸려 있다. 함부로 이 이름을 입에 올렸다가는, 아마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 애매한 두려움이 영혼을 강하게 잠식하고 있었기에, 마왕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채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제 자정쯤에 내가 뭘 했지? 잤나?’
물론 때때로 눈에 띌 정도로 기억에 공백이 생긴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마왕은 그저, 자신의 영혼이 너무나도 무료한 나머지 잠깐씩 수면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했더랬지.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본래라면 진작 이상을 감지하고 고민했어야 할 일들, 아마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마왕의 영혼에 직접 개입하며, 그의 의구심과 위기감을 처음부터 거세하고 있었음일 것이라.
예를 들자면 마왕은, 언젠가 얼뜨기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빨강이 님은 악령이 아니라, 실은 저하의 충직한 종이라고요.
감히 위대한 마왕이신 자신을 한낱 인간의 종이라 칭하다니! 마왕은 즉시 분개했지만, 이상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게 되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이성진에게 영안을 빌려주며 규상세계의 물건들을 살피던 때였던가.
?소환수로 소환 가능한 영혼의 목록 2/4?
?1. □□□□ (비활성)?
?2. □□□ □□ (비활성)?
?3. 헤이즈 마틴 (활성)?
?4. 빨강이 (활성)?
언제나 객관적인 정보만을 보여주는 규상세계의 물건이, 자신을 마왕이 아닌 이성진의 소환수로 표기한다고?
그때 마왕은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체통도 잊은 채 잠시 훌쩍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또다시 이성진이 제공하는 곰 고기를 먹으며 대충대충 넘겨 버리지 않았던가.
그 모든 일들에 일찌감치 의문을 가졌어야 했는데.
왜 이성진에게만은 처음부터 [영혼 탐지]가 통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인간인 이성진이 어떻게 자신의 감각을 마음대로 탈취하는 것이 가능했는지를 말이다.
그러다가 결국 그 일이 일어났다. 지그스문트령에서 이성진이 웬 정신 나간 노부인과 마주쳤던 날.
몹시도 분개한 이성진은, 잠시 스스로에게 걸어 둔 제한을 풀어버리곤 모두의 눈앞에서 그가 가진 권능의 일부를 드러냈던 것이다.
-너는 앞으로도 영원히 네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 너는 죽을 때까지 편히 잠들 수 없을 거다. 죽은 이후에도 네 영혼은 결코 쉴 수 없을 거다.
인간의 영혼에 깊이 아로새겨져, 감히 저항할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강력한 저주.
그 무거운 한 마디 한 마디는, 저주의 대상이었던 노부인은 물론 곁에 있던 오르덴의 영혼에도 큰 충격을 남겼다.
그러니 영혼 상태로 생생하게 그 광경을 목격한 마왕은 어땠겠는가.
그날 마왕은, 이성진으로부터 자신이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아득한 [격] 같은 것을 느꼈다.
감히 한 차원의 마왕인 그조차도 헤아릴 수 없었던 불가사의한 기운. 월등한 격을 가진 고위 마왕의 시선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듯한 충격.
그리고, 영혼을 단숨에 압살해 버릴 것만 같은 끔찍한 압박감.
오랜 시간 두려움에 떨던 마왕은, 결국 이성진에게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너, 정말 이성진이야?
그때 이성진이 뭐라고 했던가.
-괜찮아. 아버지가 다 고쳐주셨어. 이제 다 괜찮아졌어, 마왕아.
전혀 괜찮을 리가 없었다.
한데 그러한 이성진의 대답에, 마왕은 이상할 정도로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새 그는 이성진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그의 감정 상태에까지 지나치게 큰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이상하다. 이성진과 나의 관계에는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구석이 있어…….’
마왕이 이성진의 세계를 멸망시킨 원수이듯, 이성진 또한 마왕의 모든 것을 빼앗은 원수일진대…….
한데 어째서 마왕은 이성진의 말 한마디에 그리도 기뻐하거나 슬퍼하며, 그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안달했던가. 왜 그의 안위를 위해 자진해서 영안을 공유하는 수고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마왕은, 잠시 깜박임을 멈추고는 성진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나는 왜 이성진, 널 죽이고서 게헤나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두고도, 굳이 너와 이 세계에 남고 싶다고 생각했던 걸까?]
‘…….’
[물론 금제가 풀린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지. 아마 그때 네가 불길에 휩싸여 사라졌다면, 마왕의 격을 잃은 나 역시도 그리 멀쩡히 살아남지는 못했을 거라는 걸.]
그래. 그랬을 터다.
지금의 마왕은, 부주의한 손짓 한 번만으로도 훅 하고 꺼져버릴 위태로운 촛불 같은 상태니까.
[넌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겠지? 그러니까 그때, 나한테 돌아가지 말라고 했던 거야. 대체 왜 그랬어? 왜 이제 와서 날 살려둘 마음이 든 거지?]
왜 그랬냐니, 달리 이유랄 것은 없었다. 그때 마왕 놈이 먼저 성진을 살리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놈이 먼저 보여준 호의에, 동일한 호의로 응했을 뿐.
‘말했잖아? 넌 내 옆에 붙어 있다가 언젠가 함께 길동무가 되어 줘야 한다고.’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마왕은 조금 당황한 듯 빠르게 빛을 점멸하기 시작했다.
[……!]
‘그리고 너는 꽤 쓸모가 있단 말이야. 영안을 빌려줄 수 있고, 거짓말 탐지기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 정찰용 드론이 될 수도 있잖아?’
[하지만 이성진. 처음부터 내가 없었다면, 넌 오히려…….]
‘처음부터, 뭐?’
[그러니까…….]
‘뭐? 왜? 뭐?’
[…….]
성진의 퉁명스러운 태도에 잠시 멍해져 있던 마왕은, 이내 고개를 젓는 것처럼 영혼을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니. 나의 새로운 군주는 어울리지 않게 자비로운 구석이 있구나. 전혀 악마답지 않게도 말이지.]
그야 마왕아, 난 악마가 아니기 때문이야.
성진은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지만, 허투루라도 그 소리를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함부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해서는 안 되니까.
더욱이나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일을 미리 부정한다는 건 어불성설 아닌가.
[어쨌거나 그날 이후, 나도 나름대로 게헤나의 불을 제어하기 위해 애를 써봤어.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지. 그래서 점차 깨닫게 된 거야. 내가 이미 게헤나의 불에 대한 통제를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본래라면 이러한 깨달음 또한, 평소처럼 금제 속에서 서서히 흐려졌으리라.
하지만 최근에 성진의 상태가 극도로 불안정해진 탓일까. 금제 또한 덩달아 불안정해지며, 마왕은 지금까지 의식 한편에 미뤄 두었던 의문들을 서서히 되새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어중간한 상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어.]
듣고 싶지 않다.
성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들어야 했다. 더는 기억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왕의 바람을, 그리고 놈이 성진에게 간절히 전하고자 하는 말들을 들어주겠노라, 암묵적으로 허락하고 말았으니까.
[이성진. 그날 힘의 저울이 완전히 기울었을 때, 이미 우리의 세대교체는 시작되었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 과정이 그리 깔끔하게 끝나지는 않았지.]
왜냐하면 아직 내 영혼이 남아 있잖아?
마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늘하늘 영혼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죽기 전에 게헤나의 불에 마지막으로 명령했다. 이성진과 함께 세상의 모든 것을 불태우라고. 심지어는 겁화의 주인인 내 영혼까지도 남김없이 모두 말이야.]
하지만 어째서인지 둘의 영혼은 살아남았다. 그래서 게헤나의 겁화는, 지금까지도 마지막 목표로 지정된 이들을 불사르기 위해 저리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 둘이 함께 저 불에 휩쓸린다면, 아마 네 영혼보다는 초라한 내 영혼이 먼저 불타서 소멸하게 될 거야. 그리고 넌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아, 결국은 지옥의 겁화에 대한 통제권을 거머쥐게 되겠지. 즉, 이 모든 건 어차피 일어나게 될 일이라는 뜻이야.]
‘…….’
[그래, 잘 알고 있어. 아직까지도 내 영혼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은, 그저 새로운 군주로 내정된 자가 베풀어 주는 작은 자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하지만 그 유예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겠지.]
마왕의 영혼이 향한 곳은 바로 모레스의 단전 쪽이었다. 아직도 살아 있는 작은 게헤나의 불씨가, 언제든 다시 몸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며 혀를 날름거리는 장소.
성진은 그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왕 놈이 최근 계속해서 훌쩍거리며 우울해했던 이유.
아마도 놈은 그때부터 이미 자신의 끝을 결심하고, 천천히 이 상황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잠깐만, 마왕아. 너 지금 뭘……!’
성진이 화들짝 놀라며 다시 놈을 통제하려 해 봤지만, 이미 금제를 벗어난 마왕의 영혼은 게헤나의 불을 향해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오직 쓸쓸하게 울리는 놈의 사념만이, 귓가로 점점 또렷하게 전해질 뿐.
[그거 알아? 본래 악마들의 행동 원리는 꽤나 단순하지.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그의 불행을 원동력 삼아 스스로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들거든.]
성진은 빠르게 놈을 따라 영혼을 움직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애를 쓰면 쓸수록 놈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조금이나마 인간의 생리와 감정에 대해 알게 된 지금은 이런 생각도 든다. 소중한 것은 그 무엇이든 멀쩡히 간직할 수 없는 악마의 영혼이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영혼이 아닐까?]
아마도 일전에 성황이 무언가 손을 쓴 모양이었다. 게헤나의 불길이 성진의 영혼과 최대한 멀어지도록, 그만의 방법으로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비틀어 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이성진, 나는 아직도 너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수는 없어. 차원을 파멸시키고 삼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악마인 나의 본성이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마왕의 힘을 되찾을 방법이 있다면, 나는 언젠가 또다시 영혼의 깊은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런 일을 반복하게 될 테지.]
거기까지 말한 마왕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곤 성진을 향해 희미한 불빛을 깜박였다.
[하지만 이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오랜 세월 마계의 왕으로 군림해 왔지만, 너와 함께한 지난 몇 개월간의 시간만큼 밀도 있고 충실한 경험을 한 적은 없다는 걸 말이야. 그 기억들이야말로 내게는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결국 놈을 따라잡기를 포기한 성진이 소리쳤다.
‘야, 인마! 뭐 하는 거야? 당장 그만둬!’
하지만 마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유언처럼 들리는 말을 계속해서 전해왔다.
[그래서 네게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이성진. 누군가를 권속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가 지닌 업 또한 등에 함께 짊어진다는 의미지. 네 덕분에 잠시나마 나는 악마의 본성에서 벗어나, 정말로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많은 감정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너, 내 권속이라며? 그럼 명령을 들어! 거기 멈추라니까!?’
[행복한 기억이 충분히 쌓이도록, 내 영혼에 긴 유예를 줘서 정말 고마워.]
‘…그러지 마라, 마왕아.’
[그리고 내가 소멸하는 한이 있어도, 언제까지나 잃고 싶지 않다 느끼는 것을 만들게 해 줘서 고맙다.]
거기까지 말한 마왕의 영혼은, 마지막으로 환한 빛을 뿜어내며 고해왔다.
[안녕, 이성진.]
Chapter 84: Chapter 384
Chapter Text
384. 충돌 (1)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오웬은 초조한 얼굴로 기묘한 경계 앞을 서성거렸다.
‘마사인 형님! 만약 형님이 이 자리에 계셨다면,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알려주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찾아 달려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저리도 불안한 상태의 아버님과 모레스를 두고서, 혼자서 이곳을 뜰 수도 없는 일!
“밖에 아무도 없는가? 시종장! 루이스!”
오웬은 몇 차례인가 문밖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한데 이상하게도, 분명 바로 옆 집무실에 있을 루이스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평소라면 사용인들의 기척으로 북적거렸을 복도 또한 사람들이 일시에 소거되기라도 한 듯 조용하기만 한 것이다.
마치 임시 치료실 자체가 현실에는 없는 장소가 된 기분, 혹은 사람의 인식 범위를 아득히 벗어난 어딘가로 밀려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회색으로 빛바랜 공간 앞을 얼마나 지키고 서 있었을까.
반짝.
갑자기 침상에 누워 있던 소년이 거짓말처럼 눈을 떴다.
“야, 모레스! 너……!”
오웬이 반색하며 그를 불렀다.
하지만 곧장 침상을 향해 다가가려던 것도 잠시, 오웬은 이내 움찔 뒤로 물러서며 말끝을 흐렸다. 기묘한 공간의 경계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아직 이 이상한 상황은 완전히 끝나지 않은 모양. 무엇보다도 눈을 뜬 소년의 상태가 어딘가 많이 이상해 보였다.
‘……?!’
커다랗게 눈을 뜬 채 잠시 정면을 응시하던 모레스는, 곧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한데 그 모습이 마치 기계인형이 삐걱거리기라도 하듯 대단히 이질적으로 보인다.
‘저 녀석, 갑자기 왜 저래?’
오웬은 저도 모르게 피부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일견 소년의 몸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마치 완전한 무기질로 이뤄진 것처럼 차갑고 견고해 보였던 것이다.
그 생기 잃은 모습 한가운데, 오직 유일하게 살아 있는 듯 보이는 것은 소년의 두 눈뿐이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밝은 회색의 눈동자는, 역광의 어둑한 그림자 속에서 기이한 은빛의 안광을 뿜어내고 있다.
그 광경은 오웬에게는 낯설면서도 또한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까부터 멍하니 굳어 있는 성황의 상태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도 저 눈-
어둠 속에서 홀로 발광하는 환한 저 광채는, 언젠가 던전 안에서 이따금 묘한 안광을 뿜어내곤 했던 신기한 친구의 모습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가운데로 가자!
-야! 함부로 튀어나가지 마, 뉴비! 위험하다고!
????!
귀여운 발소리를 내며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가던 작은 산양의 모습이, 불현 듯 뇌리를 스친다.
‘…뉴비?’
아니, 하지만-
오웬은 휘휘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정신이 나갔나? 갑자기 왜 엉뚱한 녀석 생각을 하는 거야? 지금은 아버님과 모레스의 일이 무엇보다 급하다고!’
바로 그때였다.
무표정하게 앞을 응시하고 있던 소년이, 갑자기 데굴 눈동자만 굴려 곁에 있는 성황에게 시선을 던진 것은.
* * *
[왜!]
아마도 오웬은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성진은 눈을 뜨자마자, 다짜고짜 성황을 향해 거세게 분통을 터뜨리는 중이었다.
[대체 왜 그랬습니까! 내가 하는 판단에 따라, 모든 일을 어디까지나 내 의지에 맡기고 있는 줄 알았는데!]
미처 의식하지 않고 있던 마왕의 희생 때문일까. 어찌나 감정이 격앙되었던지, 성진은 평소에는 완전히 억누르고 있던 의식 일부를 남긴 상태로 눈을 뜨고 말았다. 그 탓에 그는 현재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조금 헷갈리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후 처음으로, 멀쩡한 의식을 유지한 채 염상 결정을 이용해 능동적으로 사념을 쏘아낸 것이다.
[왜 그런 짓을 한 겁니까! 동시대에 두 사람의 오라클이 공존할 수 없다고 말한 건, 바로 당신 아니었습니까?]
한껏 억누르고 있던 인격의 편린이 드러나자, 자연히 현재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역시 표면으로 떠오른다.
덕분에 성진은 아까 있었던 방해가 성황의 짓이었음을 명백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인식의 충돌을 피하려면 둘 중 하나는 완전히 미래에 대한 의지를 포기해야 한다고! 그래서 지금까지는 항상 그래 왔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갑자기 당신이 전면에 나서서 나를 방해하는 겁니까?]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일들을 파악하고 관장할 수 있는 자다.
그러니 성진이 마음껏 따지고 들 수 있는 자 또한, 세상에는 이 사람 외에 다시없으리라.
[방금 그놈을 죽이기만 했다면, 앞으로 많은 문제들이 원만하게 해결되었을 텐데!]
분통이 터졌다.
아슬아슬하게 놓치고 만 목표물. 때문에 성진이 생각하고 있던 가장 이상적인 미래가 고작 한 끗 차로 이리도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시슬레에게도! 로건에게도! 그리고 당신에게도! 그것이 훨씬 나은 미래임을 의심할 수 없었을 텐데!]
전에 없던 거센 반발이었다.
그럼에도 성황은 이를 예상한 듯, 대답 없이 가만히 성진을 바라볼 뿐이다.
[결국, 결국 이럴 작정이었다면, 대체 왜 나한테 그렇게……!]
성진은 현재 묘한 배신감과 좌절감에 휩싸여 있었다. 비단 자신과 성황의 의지가 정면으로 충돌한 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불완전하게나마 인격과 기억을 가지고 있는 지금의 성진은, 자신을 막기 위해 성황이 어떠한 부담을 짊어졌는지 알았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이번 일로 인해, 그가 앞으로 무슨 대가를 치러야 할지 눈에 빤히 보였으니까!
[당신은 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 왜 가장 쉬운 길을 놔두고서, 굳이 이렇게 인과를 복잡하게 뒤얽히도록 조종하는 거죠? 그러잖아도 미련하게 짊어진 게 많은 주제에, 거기서 무엇을 더 얹고 싶어서? 대체 그것들이 다 뭐라고!]
성진조차도 곧바로 파악하기 어려웠을 만치 미세한 인과. 그렇게나 작은 인과를 비틀고 굴렸음에도, 영혼으로 직접 권능을 행사한 파급은 엄청나리라.
참으로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이 미련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 수많은 인과의 갈래를 모두 한 점으로 수렴시키겠다니, 당신 욕심이 너무 지나치단 말입니다! 댁이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는 완벽한 미래란 결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깜박.
그러자 그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던 성황이 천천히 눈꺼풀을 움직였다.
하지만 정작 그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 네게는 그 삿된 것의 미래 역시 소중했음이라. 그러니 무의식적으로 예상하고 이에 대비했음에도, 그것이 보인 뜻밖의 희생이 그리 충격이 큰 것이다.
[…아들아.]
성황은 잠시 말을 고른 후, 극도로 격앙되어 있는 성진을 달래듯 불렀다.
[너는 다음 세대의 오라클이며,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에 너의 의지가 가장 우선시된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러나 이점만은 확실히 알아야 하느니라. 네가 완전한 오라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을 때만이, 작금의 결과를 초래한 모든 인과를 이해하고 그것들에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 없이, 나는 지금까지 완전한 오라클로서 모든 인과를 움직였습니다. 조금이라도 결과가 뒤틀리게 될까 봐 매번 스스로의 기억을 없애기까지 했단 말입니다! 설마 당신이 멋대로 개입할 것까지 ‘내’가 예상했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겁니까? 결국 이 모든 일들이 ‘내’가 원한 결과라고?]
[그런 뜻은 아니다.]
[그럼……!]
[그저 오라클로서의 네 판단은, 조금이나마 개인적인 의지를 유지하고 있는 지금의 너와는 조금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었느니라.]
지금까지 성진은 딱히 그 둘을 크게 구별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그 사실을 제대로 체험하게 되었지.
‘나’는 아마도 마왕의 행동을 예상하고 이를 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마왕이 그런 희생을 각오한 것을 방금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지 않았던가. 그것을 조금도 원치 않았기에, 권속이 자신의 의지를 거스를 거라는 가정조차 해보지 않았지.
[본디 오라클의 시선이란 그런 것이다. 처음부터 뚜렷한 의지를 관철하려 들면,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시야에 담는 일이 되레 불가능해진단다.]
그런 시선을 언제까지고 유지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 성황은 그렇게 덧붙였다.
[본연의 의지와 감정을 완전히 말살하지 않는 한, 인간은 그 모든 인과의 소용돌이 앞에서 언제까지고 이성적일 수는 없을 테니까.]
그의 말에 성진은 잠시 곰곰이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벌컥 하고 도로 화를 낸다.
[하지만 그때 난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요! 인형사를 죽이는 것, 오직 그것만이 성황가의 모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단 말입니다!]
[그래. 그럼 물어보마.]
성진의 거센 항변에, 성황은 당황하지 않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들아. 그 최선의 선택이란 것이, 너 스스로의 안위를 충분히 고려한 결과였더냐?]
[…네?]
[인형사의 목숨을 취하겠다 결심했던 그 순간 너의 의념이 그렸던 미래에, 너 또한 모두와 함께 존재하고 있었더냐?]
[그…….]
성진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물론 위험할 수 있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를 잃는 만큼, 얻는 것의 가치도 그에 못지않으리라는 계산이 섰기에 저지른 일.
하지만 지금 찬찬히 생각해 보면, 조금쯤 걸리는 부분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인형사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풀고자 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
인형사가 사라지고 없는 세상이라 해도, 그에 못지않은 또 다른 위험은 반드시 생긴다.
그러니 그것이 미래를 위한 가장 완벽하고 효율적인 선택이냐 묻는다면, 보는 시각에 따라 약간의 이견이 생길 수는 있는 것이다.
[그래도 시슬레나 로건에게는 그쪽이 훨씬…….]
성진이 고집스럽게 중얼거리자, 성황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에 대한 답 역시 너는 충분히 알고 있느니라. 설마 그 아이들이 네 도움 없이는 스스로의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반편이라 생각하느냐?]
[…….]
성진은 잠시 불퉁하게 침묵을 지키다가,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뭐, 당신의 말은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두 번 다시 이런 식으로 날 간섭하지 마십시오. 앞으로는 내가 더 완벽하게 해낼 수 있으니까요.]
[…….]
[그러니까 괜히 얼마 남지 않은 인과를 그런 식으로 낭비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러자 성황은 잔잔하게 흔들리는 파동을 전해왔다. 세상의 법칙에서 조금 벗어나느라 육신의 통제를 일부 잃었지만, 아직까지 그의 감정만은 여느 때처럼 활발하게 움직인다는 증거.
하지만 그 옅은 웃음과 함께, 사념으로부터 동시에 전해지는 감정은 묘한 씁쓸함이었다.
[너 홀로 어디까지 아등바등 하려 드는 게냐. 왜, 이제부터는 기억을 지우는 것으로 모자라, 스스로의 감정까지 더 완벽히 죽이는 연습이라도 할 생각이더냐?]
[…….]
[결국 너 또한 네 조모와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으리라 믿고 싶구나.]
철저하게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던 성진의 눈이, 그제야 미약하게 흔들렸다.
지금의 성진은, 전대 오라클이 어떤 선택을 했으며, 결국 어떤 결과를 맞았는지 결코 모르지 않았으니까.
[…뭐,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이제 넘어갑시다. 문제는 이 다음입니다.]
성진은 빠르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간발의 차로 인형사를 놓친 것만이 다가 아니다. 최근 차원의 수호자로서 성황의 입장은 대단히 위태로웠는데, 성진의 곁에 계속 붙어 있느라 정작 델크로스 차원을 돌보는 일에 소홀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곳을 침략하는 자들이 성황의 사정을 봐줄 리가 없었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놈들이 평소보다 더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는 통에, 성황은 결국 최대한 대처를 미루느라 시간의 흐름을 뒤죽박죽 뒤틀어가며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가 다시 한번 틈새로 들어가 이것들을 처리하려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일전에 있었던 대규모 공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공세를 감당해야 하리라.
[오늘 있었던 일까지 생각하면, 이번에야말로 6인 회의가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대체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한 겁니까?]
한데 이 모든 업보들을 눈앞에 두고도, 성황은 그저 의연하게 대꾸했을 뿐이다.
[그리 걱정할 것은 없단다. 이미 모든 대비는 되어 있느니라.]
[…대비? 저 엉망진창인 상태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온다고요?]
산더미처럼 방학 숙제를 쌓았다가 개학 전날 끄집어내는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데 성황은 정말로 이 난장판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모든 것은 아직 온전히 내 통제하에 있다. 너무 심려치 말거라.]
그렇게 대꾸한 성황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근육을 움직여 미약하게나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런 걱정을 하기에 너는 아직 650년은 이르단다.]
성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꼭 나이로 어떻게든 10년은 이겨 먹으려 들지.]
결국 성진은 화를 삭이며 중얼거렸다.
로건이나 댁이나 하는 짓이 완전히 똑같잖아. 어쩜 이리들 한결같을까.
* * *
우웩!
갑자기 모레스가 몸을 웅크리며 크게 구역질을 한다.
“……!”
동시에 눈앞에 있던 경계가 거짓말처럼 허물어지고, 회색으로 빛바랬던 공간이 평소의 존재감을 되찾는다.
오웬은 화들짝 놀라며 소년을 향해 달려갔다.
“모레스! 너 괜찮냐? 이게 다 무슨 일이야?!”
한데 입을 틀어막은 채 고개를 숙인 소년이, 다급하게 한 손으로 어딘가를 향해 손짓하는 것이 아닌가!
“아……!”
“응? 뭐?”
“어버지… 우웩!”
“……!?”
오웬은 어리둥절했지만, 곧 모레스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스르륵-
그때까지도 굳은 듯 앉아 있던 성황의 몸이, 갑작스레 지지하던 힘을 잃은 듯 천천히 옆으로 허물어졌으니까.
풀썩!
“아버님!? 이게 대체…….”
오웬이 당황하며 그를 붙잡는데, 모레스가 숨을 고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카트리나, 단장을, 불러. 당장!”
“…카트리나 단장을?”
“그래. 그리고, 에디…….”
거기까지 말한 모레스는, 비실비실 침상 한쪽으로 누워 잠시 밀려드는 구역질을 억눌렀다.
“지금 당장, 여기로 에디스를 불러줘!”
Chapter 85: Chapter 385
Chapter Text
385. 충돌 (2)
“폐하!”
콰앙!
오웬이 부르러 가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인간의 인식을 저해하는 틈새가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성황의 충직한 방패는 곧바로 이상을 감지하고서 임시 치료실로 달려왔던 것이다.
답지 않게 거친 태도로 문을 열어젖힌 카트리나는, 오웬의 팔에 기대어 있는 성황을 발견하고는 일순 안색이 파리해졌다. 하지만 그간의 연륜이 헛되지 않아, 곧 평정심을 되찾고는 침착하게 그들을 향해 다가온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조심스레 성황의 맥을 짚어 본 그녀는 금방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프란시스 경. 성기사들을 소집하라. 지금 당장 폐하를 모시고서 기도실로 가야 한다.”
얼떨떨한 얼굴로 뒤를 따라온 부관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빠릿빠릿한 태도로 달려 나간다.
“기도실? 어째서? 아버님은 이유도 없이 갑자기 쓰러지셨네. 그러면 우선 원인이 되는 병을 치료하는 것이 순서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는 오웬이 걱정스레 묻자, 카트리나는 그로부터 성황을 넘겨받으며 안심시키듯 미소 지었다.
“심려 마십시오, 오웬 황자님. 세상의 어떠한 질병도 감히 폐하를 침범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께서는 그저 중대한 과업을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친히 기적을 행사하고 계시는 겁니다.”
“기적을… 행사해?”
“예, 그렇습니다. 그것이 당신께서 일하시는 방식이시죠. 폐하의 손길이 세상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저희 같은 범인의 눈으로는 감히 이를 모두 담아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카트리나는 그간의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성황의 영혼이 예기치 못하게 자리를 비우는 경우에는, 최대한 그의 몸을 지상의 물리법칙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만이 그의 영혼이 틈새로부터 받은 충격을 완화시킬 유일한 방법이란 것을.
이를 위한 장소가 바로 황궁 심처에 마련된 기도실이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면-
“모레스 저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지금도 침상에 누워 끙끙거리고 있는 어린 황자의 일이다.
원인불명의 열병.
모레스 황자가 크게 다쳐 본궁으로 실려 온 이후, 성황은 임시 치료실을 꾸리곤 그날부터 단 한 번도 기도실에 들지 않았다.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황자의 상태가 불안정했던 탓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폐하를 이대로 기도실로 옮겨도 괜찮은 건가?’
카트리나가 뒤늦게 고민하자, 성진은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짐작하곤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어, 난 이제 괜찮… 그러니 어서, 아버지 좀… 우웩!”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습니다만.”
“이건, 그냥 멀미야. 열병, 이라면 아버지도 이제는 괜찮을… 거라고 하셨다고. 그래서, 안심하고 자리를, 비우신 거야.”
성진이 비실비실 대꾸하고 있자니, 곁에서 듣고 있던 오웬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엉? 아버님이 언제 그러셨어? 그냥 가만히 앉아 계시다 갑자기 쓰러지셨잖아! 너 인마, 사람 안심시킨답시고 괜히 없는 말 지어내는 거 아냐?”
뭐? 내가 왜 그런 짓을?
이놈은 대체 날 뭘로 생각하는 거지?
‘아버지와는 어디까지나 사념을 통해 긴 대화를 나눴… 아! 오웬이 그걸 알 리가 없구나!’
성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카트리나 역시 굳은 얼굴로 재차 확인했다.
“정말입니까? 부디 현재 상태를 정확히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저하. 지금도 이렇게 열기가 느껴지는데…….”
“어, 이건 그냥… 가벼운 열기야. 별거 아니지. 그냥 내 오러의 성질이, 성질이다 보니.”
그 말대로, 성진은 실로 오랜만에 후련한 해방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게헤나의 불과 결합한 오러가 재차 단전에서 요동치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성진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열기는 아니었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지옥의 겁화가 갑자기 힘을 잃은 것도 아니건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력을 벗어난 재해와도 같던 화염이, 이제는 마구잡이로 불길을 키우려다가도 슬그머니 성진의 눈치를 보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오래지 않아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 시간을 들여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게헤나의 불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도 기다려 준 거겠지. 그런데 아까 아버지가 나한테 뭐라고 하셨더라? 어쩐지 한시름 놓았다는 투로, 이제 밀린 일을 하러 가신다고 한 거 같기도 한데…….’
물론 지금의 성진은 일이 이렇게 된 경위를 자세하게 알지는 못했다. 눈을 뜬 이후로 뇌리에 어렴풋이 잔존하던 기억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게다가 반드시 남겨야 하는 중요한 사실들까지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이 급진적인 변화는, 어디까지나 울보 마왕 놈이 성진을 위해 희생을 감수한 덕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놈을 되찾아야 해. 분명 내가 마지막에 뭔가를 했어! 그런 기분이 든다고!’
다행히 질식할 것 같던 구역감은 서서히 안정되어 가고 있다. 성진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카트리나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니 난 걱정 말고, 어서 아버지를 모시고 가보게.”
“예, 저하.”
카트리나는 더는 파고들지 않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녀는 성황과 이 신기한 황자 사이의 묘한 유대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범인이 알 수 없는 세상을 보고, 이따금 그들만이 아는 방식으로 대화를 한다는 것도.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혹시 폐하께서 저희에게 특별히 지시하신 말씀이라도?”
“아, 그거…….”
성진은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떼어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뭐라고 하셨더라? 맞아. 이제부터 며칠간, 정무는 황후께 모두 일임한다 하셨어. 나머지 업무 분담은 늘 하던 대로 하면 된다고, 아마 시종장 루이스가 잘 알 거라고 하셨지.”
“…….”
또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실 셈인가. 저 간단한 지시조차 모레스 황자님을 통해 전해야만 했다니, 대체 무슨 급박한 일이 일어난 것인지.
카트리나는 우려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성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단장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때, 프란시스가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을 이끌고 돌아왔다.
그들은 카트리나의 지시를 받아, 능숙하게 사람 하나를 몰래 옮길 준비를 했다. 명색이 지고하신 성국의 군주이신데, 의식이 없는 모습을 남들 눈에 보여서 그다지 좋을 것이 없었으니까.
뒤이어 달려온 시종장 루이스가 대단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배웅하곤 어수선해진 임시 치료실을 정돈했다.
“맞다. 얼굴을 보니 생각나네. 그리고 보니 시종장에게도 부탁할 것이 있었지.”
“그것이 무엇입니까, 모레스 황자님?”
“어, 미리 만들어 둔 무슨 서류…를 보내라고 하셨어. 루이스 자네라면 무슨 말인지 잘 알 거라고 하시던데.”
“…‘나대지 말라’ 공문 말씀이시군요.”
응? ‘나대지 말라’ 공문? 그게 대체 뭔데?
성진이 무심코 고개를 갸웃거리다, 겨우 안정되었던 전정기관이 재차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는 입을 막았다.
“우웩!”
“이런! 괜찮으십니까, 저하? 지금 당장 진탕 된 속을 가라앉힐 수 있도록 차를 내오겠습니다!”
그 와중에 아무것도 모르는 오웬만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엉? 그러니까 아버님이 언제 그런 말씀들을 하셨다고? 왜 나만 빼고 다들 알아들었다는 분위기야? 뭐야, 이게?”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겨우 지독한 멀미에서 벗어난 성진은, 에디스를 시켜 몇 가지 물건들을 가져오게 했다. 바로 진주궁에 고이 놔두었던 규상세계의 물건들이었다.
선물받은 마법 돌멩이들이며, 투명한 몇 개의 영혼석들, 반쪽짜리 이정표, 그리고 라이칸스로프의 종족 열쇠.
그 모든 것들을 한쪽으로 치워버린 성진은, 마지막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금속의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네브라스카의 증표?
바로 그때, 곁에서 성진이 하는 양을 바라보던 오웬은 뭔가 묘한 것을 발견했다.
“……!?”
또다시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소년의 은회색의 눈과, 이따금 그 속에서 붉은빛을 뿜어내는 기이한 동공.
‘이 녀석, 뭐지? 진짜로 괜찮은 상태가 맞는 거야?’
성진을 바라보는 오웬의 눈초리가 점점 날카로워진다.
하지만 성진은 그가 느끼는 작은 의혹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느새 마왕에게서 빌리던 영안을 스스로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된 이유 역시 대충 무시하고 넘겨 버렸다.
지금 이 눈으로, 서둘러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소환수로 소환 가능한 영혼의 목록 1/3?
?1. □□□□ (비활성)?
?2. □□□ □□ (비활성)?
?3, 벨린다 마일스 (활성)?
정신을 집중하자, 이내 흐릿하게 떠오르는 텍스트들.
그곳에서 마왕의 이름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성진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끝에 뭔가 이상한 것이 하나 끼어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목록에서 사라진 마왕의 영혼이 지금 어디에 있냐는 것.
‘아니! 아직이다! 아직 실망하기는 일러!’
성진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옆에서 굴러다니는 영혼석들을 뒤적거렸다.
‘처음에 시험 삼아 헤이즈의 악령을 소환했을 때, 그때도 놈의 이름이 목록에서 지워졌었지. 그러니까 분명 어딘가에 영혼석 형태로 놈의 영혼이 남아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소용없었다. 몇 개 남지 않은 텅 빈 영혼석들은, 야속하리만치 투명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을 뿐.
?영혼석?
아니, 이러면 곤란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성진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헤이즈의 악령은 내가 소환해서 영혼석이 되었어. 그럼 바즈라? 그의 영혼의 경우는 어땠지?’
라이칸스로프 로드에게 조종당하던 그는, 성진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면서 곁에 있던 영혼석에 자연히 빨려들어 갔던 걸로 기억한다.
‘혹시, 그런 건가? 바로 근처에 영혼석이 없으면 안 되는 건가?’
그렇다면 멀리 진주궁에 놔두었던 영혼석들에, 본궁에 있던 마왕의 영혼이 보존될 방법 따위는… 아니, 아니야! 예감이 있었어! 분명 내가 뭔가 조치했단 말이야!
‘야, 마왕아?’
미약한 희망을 가지고 재차 불러보았지만, 역시나 놈의 영혼의 기척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머릿속이 텅 빈 듯 허전한 느낌.
“어……!”
성진의 안색이 시시각각 나빠졌다.
정말로 끝인가? 이제는 놈에게서 받은 호의를 되돌려 줄 방법이 없는 건가? 더는 닥치라고 면박을 주지도 못하고, 곰 고기 먹으면서 시끄럽게 노래 부르는 것도 듣지 못하는 거야?
성진이 아뮬렛을 부서져라 거머쥔 채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자, 오웬이 곁에서 걱정스러운 듯 물어왔다.
“이봐, 모레스. 너 진짜 괜찮은 거냐?”
바로 그때였다.
“아, 맞아요. 그러고 보니!”
에디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벽에 있던 장식장 앞으로 다가갔다.
“며칠 전에 저하의 방에서 이걸 주워놓고선 깜빡했네요. 저하께 가져다 드리려고 들고 왔다가, 갑자기 열이 나시는 통에 여기 넣어두고서 잊고 있었어요.”
…뭐?
성진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에디스가 장식장의 서랍을 뒤져 작은 구슬 하나를 끄집어냈다.
투명한 영혼석들과 달리, 짙은 붉은빛으로 물든 작은 구슬 하나를.
“어? 어라? 잠깐만. 이게 이런 색이었나? 뭔가 변한 거 같은데?”
에디스가 어리둥절하는 사이, 성진은 그 구슬에서 스르륵 떠오르는 희미한 텍스트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빨강이의 영혼석?
* * *
“모두 저 때문입니다! 제가 괜히 시슬레 님을 부추기는 바람에 이런 일이……!”
치료실에 옮겨졌던 인퀴지터 보리스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가슴을 치며 한탄했다.
“제가 보좌하겠노라 큰소리를 쳤습니다. 한데 성녀님을 곁에서 지키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꼴사납게 기절한 주제에, 성녀님의 치료까지 받다니요!”
크으윽!
자괴감에 허우적거리는 후배 인퀴지터를 바라보며, 루미에는 착잡한 얼굴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루미에 역시 책임이 있다 할 수 있었다. 그냥 성녀를 회의실에 데리고 가면 끝이었을 일을, 괜히 기강을 잡겠답시고 떼어놔서 이 사달을 만든 게 아닌가.
“주신께 맹세코 이 치욕을 만회하겠습니다! 이제부터 평생을 시슬레 성녀님의 곁에서 머물며, 저의 죄를 두고두고 갚을 겁니다!”
한참을 괴로워하던 인퀴지터 보리스는, 마침내 과하게 의욕을 불태우며 이런 맹세를 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곁에 있던 루미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겉으로는 모든 인퀴지터들의 책임자답게 무게를 잡고 있었지만, 내심은 이런 다짐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갑작스러운 사고로 놀라셨을 텐데, 다친 동료 인퀴지터를 먼저 보살피는 전우애를 보여주셨지. 이런 분을 괜히 시험하고 경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제부터는 되도록 시슬레 님을 곁에서 정중히 모시며 결코 눈을 떼지 말아야겠다!’
바로 그때.
그들의 곁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까지 정신을 잃고 있던 또 다른 폭발의 피해자였다.
“결국은 주신의 작은 은총께서 이리 찾아주셨구려. 괜한 청을 하여 갑작스러운 사고에 휘말리게 만들었으니, 참으로 면목이 없소이다.”
막 병상에서 일어나 기운 없이 들렸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마음을 깊이 파고드는 묘한 매력을 가진 목소리였다.
“그리고 키프로스에도 명성이 자자한 주신의 기사, 로건 황자를 뵙소이다. 그대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졌으니 내 어찌 이에 걸맞은 사의를 표할 수 있을지.”
헬리오스의 암브로시우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키프로스의 왕자가, 시슬레와 로건 남매를 번갈아 바라보며 부드럽게 입매를 휘었다.
Chapter 86: Chapter 386
Chapter Text
386. 충돌 (3)
키프로스 평의회에서는 한동안 큰 소란이 있었다.
마수 토벌을 위해 달려온 작은 성녀가, 도착하자마자 인부들의 부주의로 화재에 휘말렸다.
그들이 자신 있게 준비한 비밀 병기의 안정성에 의문이 제기된 것은 물론, 자칫 잘못하면 키프로스와 신성제국 사이에 큰 외교적 마찰을 초래할 수도 있었던 불의의 사고.
다행한 점은 평의원 한 명을 제외하면 별다른 부상자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한번 불이 붙으면 여간해서는 꺼지지 않는다는 화공 병기, [고대의 불].
그것이 성녀의 눈앞에서 상자 째 터져나갔건만, 잠시 정신을 잃었을 뿐 긁힌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아, 주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주신께서 내리신 작은 은총이라더니 그 말대로구나! 만일 시슬레 님께 무슨 일이 생겼다면, 델크로스의 토벌대가 마수들이 아니라 우리들을 향해 검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최악의 상황은 면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물론 원로들과 평의원들은 그 생각을 감히 겉으로 내비치지는 못했다. 하필이면 그 한 명의 부상자가, 키프로스 최고 권력자인 크뤼세스 원로의 장자였으니까.
“암브로시우스 님이 방금 정신을 차렸다고 합니다! 몸 전체에 큰 화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다고 하는군요!”
“오오! 그야말로 주신의 보살피심이오! 큰 폭발의 중심에 있었던 데다, 여간해서는 꺼지지 않는 고대의 불에 전신이 휘말렸다지 않았소?”
“마침 로건 황자께서 늦지 않게 구해주셨다지? 평소 건강하신 분이니, 그깟 화상 정도는 사제들의 치료를 받으면 금방 좋아질 거요!”
다른 원로들이 사고 소식을 전하며 조심스레 크뤼세스의 눈치를 본다.
그러나 정작 크뤼세스 원로는 이에 관심 보이지 않은 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작전 회의는 내일 다시 이어서 하십시다.”
잠시 후,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지금은 우선 사고를 수습하고, ‘고대의 불’을 다시 점검하는 것이 순서요. 제대로 된 작전 회의는 아마 그 이후에나 가능하겠지.”
아들이 목숨을 잃을 뻔했음에도 이상하리만치 무미건조한 반응이었다.
원로들과 평의원들이 당황한 기색으로 수군거리자, 크뤼세스 원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덧붙였다.
“오늘은 토벌대를 더욱 극진히 대접하라 이르시오. 키프로스의 시민들을 위해 기꺼이 조력의 손길을 내밀어준 고마운 이들이 아니오? 거기다 내 아들의 목숨까지 구해주었으니, 이 모든 감사를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그 말을 끝으로 장년의 남자는 성큼성큼 회의실을 걸어 나갔다. 감사의 기색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딱딱한 표정을 지은 채.
* * *
“천만 다행한 일입니다, 암브로시우스 님.”
그리고 사고의 당사자는 현재, 침상에 앉아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향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렇지. 이것이 모두 성녀와 로건 황자의 덕분이다. 주신의 총애를 받는 두 사람의 곁에 있으니, 보이지 않는 보살핌의 손길이 미천한 내게까지 미쳤던 게지.”
“잠시만 자세를 낮춰 주시겠습니까? 어깨의 붕대를 새로 갈아 드리겠습니다.”
헬리오스의 암브로시우스, 그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로건이 달려갔을 때, 그의 몸은 이미 강한 인화성 물질과 함께 고온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으니까.
황급히 불길을 진화한 로건이 시슬레와 합심하여 신성력을 퍼부었음에도, 그의 피부는 이미 심한 화상으로 대부분 녹아내린 상태였다.
크고 작은 물집이 잡힌 부분은 양호한 편이다. 그의 상체 대부분과 오른팔은 이미 완전한 회색으로 변색되어 딱딱하게 변해 있었으니까.
피부 심부층을 넘어, 근육까지 완전히 익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증거.
한데 그런 극심한 부상 속에서, 저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영혼의 근본이 뒤흔들릴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소.”
사고 당시,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던 덕에 하관의 일부를 제외한 얼굴은 그나마 멀쩡했다.
암브로시우스는 그 온전히 남은 피부를 힘겹게 움직여, 제법 매력적으로 보일 법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내 영혼의 일부가 정말 죽음을 맞았다고 착각했을 정도니 말이오. 참으로 다행하고도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지. 다시 한번 그대들에게 감사를 표하오.”
대체 뭐가 다행하고 애석하다는 말인가.
어쩐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시슬레가, 찬찬히 암브로시우스의 모습을 살폈다.
‘저자가 키프로스의 왕자…….’
그는 대단히 멀끔하게 생긴 남자였다. 대륙 동부에서는 보기 힘든 밝은 금발과 날카롭고 단단한 하관. 부드럽고도 정중하나, 동시에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압박감을 지닌 목소리.
들리는 풍문으로는 청년에 가까운 나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시슬레가 보기에, 그는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완숙한 분위기를 휘감고 있었다.
‘…뭐지? 나, 어디선가 이 사람을 본 적 있지 않나?’
초면임이 분명한데도, 시슬레는 이상하게 그로부터 낯이 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때마침, 그런 감상을 느낀 것이 그녀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암브로시우스 님. 이런 상황에서 여쭙기는 외람되지만, 우리가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습니까?”
로건의 질문에,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눈매를 휘었다.
“글쎄.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없을 거요. 이래봬도 꽤나 공사가 다망한 터라, 탄신연 기간에도 신성제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오.”
진실. 약간 미묘한 느낌이 섞여 있긴 했지만, 남자의 말은 틀림없는 진심이었다.
“대체 왜 그리 생각하셨는지, 실례가 아니라면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겠소?”
“별건 아닙니다. 그저 아는 사람과 조금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느끼셨다니 참으로 기쁜 일이오.”
낮게 웃음소리를 내던 암브로시우스는, 강한 통증이 이는 듯 잠시 얼굴을 굳혔다.
“뭐, 짐작 가는 곳이 없진 않구려. 알고 계시오? 내 모친께서는 아세인 대공의 막내 누이셨다오.”
“그러면…….”
“그렇소. 그대의 여러모로 유명한 동생 분께서, 내 먼 친척뻘이 되시겠소만.”
“…….”
…모레스의, 친척이라고?
로건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 남자는, 밝은 금발머리 외에는 어느 곳 하나 동생을 떠올릴 만한 구석이 없었으니까.
거기다 아까부터 소드 마스터의 신경을 건드리는 미약한 불쾌감까지.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헬리오스의 암브로시우는 처음부터 한결같이 정중하고 온화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건만, 이상하게도 로건은 그를 마냥 태연하게 대하기가 힘들다는 느낌을 받았다.
“크음……!”
그때, 암브로시우스가 재차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딱딱하게 굳은 피부를 박리하던 치료사의 손이, 하필 타지 않고 남아 있던 신경을 건드린 모양.
엉망이 된 피부를 닦아내는 천에서 점점이 붉은 피가 묻어나온다.
“…치료를 돕겠습니다.”
보다 못한 로건의 손이 상처로 향하자, 암브로시우스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사양하겠소. 지금까지 아낌없이 신성력을 쏟아주신 분들께, 더 이상의 수고를 바랄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소이다. 이후는 키프로스의 치료사들이 알아서 할 일이니, 두 분께서는 이만 휴식을 취하도록 하시오.”
“…….”
“여담이오만, 두 분께는 제대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소.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나 있었겠소? 그러니 부디 오늘 저녁은 내 아버지의 저택에서 머물러 주지 않겠소이까? 조금이나마 이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셨으면 하오만.”
꾸깃-
그때, 뒤에서 그의 정복 옷깃을 슬그머니 잡아당기는 손이 느껴졌다.
“오라버니.”
어쩐지 잔뜩 긴장한 듯한 시슬레의 목소리.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막내의 의도를 알아챈 로건은,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마찬가지로, 심한 부상을 입은 분께 손님 대접을 바랄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만 물러날 테니, 부디 편히 휴식을 취하며 회복에 전념하십시오.”
대충 인사를 건넨 로건은 시슬레의 손을 잡고서 서둘러 치료실을 나왔다.
뒤에서 빤히 그를 바라보는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더는 그에 대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왜 그 삿된 것이 굳이 나를 딸려 보내나 했더니, 이곳에 위험한 자가 있었구나.]
치료실 문밖에서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서이서, 아니 카드모스였다.
금빛으로 환하게 빛나는 홍채가, 닫힌 방 안의 광경을 가늠하기라도 하듯 바짝 조여든다.
“당신이 아는 자입니까?”
무심코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한때는 저것을 친우라 여기기도 했지. 저놈의 달콤한 말에 속아, 700년을 관짝 안에서 허송세월하기 전에는 말이다.]
“…네?”
로건과 시슬레가 시선을 교환했다.
정말로 초대 성황과 알고 지내던 자라고? 그럴 리가 있나?
설마 헬리오스의 암브로시우스가 천 년을 살지는 않았을 텐데,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후손아.]
두 사람의 당황한 기색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카드모스가 으르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치료실 문을 향해 있는 시선에선, 여전히 위협적인 안광이 뿜어지고 있었다.
[가급적이면 저자와는 더 이상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너와 시슬레, 둘 모두 말이다.]
* * *
웡!
힘찬 울음소리가 본궁 복도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성진은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스!”
성진이 병석에서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황궁 안뜰에 붙박여 있던 늑대개를 부르는 것이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바람처럼 달려 들어온 막스는, 침상 앞에 발을 모으고 앉더니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워오오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왜 이렇게 나를 오래 버려둔 거야?
“미안미안, 막스. 이게 다 너를 위한 일이었다고.”
아우우우-!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걸 알았잖아! 내가 부르고 있는 걸 알았잖아!
“그래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앞으로는 더 자주 놀아줄 테니까, 응?”
끼이잉.
그러자 늑대개가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살랑 꼬리를 친다.
“잠깐만 있어 봐. 여기 어디 에디스가 챙겨둔 간식 주머니가 있을 텐데…. 아, 여기 있다! 간식 먹을까, 막스?”
육포 하나를 이리저리 흔들며 어르고 달래자, 막스는 곧 활짝 입꼬리를 올리며 붕붕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곧장 침상 위로 훌쩍 뛰어올라, 정신없이 성진의 얼굴을 핥아대는 것이 아닌가.
????!
“아니! 으학! 막스! 간식 먹으라니…! 으학학! 간지럽다고!”
성진은 막스와 함께 침상을 마구 뒹굴며 바동거렸다. 그 난장판을 지켜보던 오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저 고고한 척 점잔 빼는 놈이 저런 애교도 부릴 줄 알아?”
점잔을 빼? 대체 누가?
“설마 지금 우리 귀염둥이 막스를 두고 하는 말이냐? 너 뭔가 착각한 거 아냐?”
성진이 겨우 늑대개를 밀어내며 묻자, 막스가 덩달아 오웬을 향해 힘차게 맞장구를 쳤다.
웡웡!
-맞아! 너는 틀렸다! 주인의 말대로 나는 강하고, 거대하고, 귀엽기까지 하다고!
그 태연자약하고 뻔뻔한 태도에, 오웬은 커다란 배신감에 휩싸였다.
“아니, 저 녀석이 정말! 제 주인이 앓아누운 사이 내가 매일같이 밥도 챙겨주고, 간식도 챙겨주고, 산책까지 시켜 줬는데……!”
끼잉.
오웬의 하소연에, 늑대개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낑낑 딴청을 피운다. 그러자 성진의 눈이 대번에 뾰족해졌다.
“오웬! 너는 인마! 왜 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를 구박하는 거야? 이 어린것이 뭘 안다고?”
“아니……!”
야, 잠깐만! 네 개의 저 뻔뻔한 표정이 보이지도 않냐? 너는 정말로 저놈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느냔 말이야!
오웬이 하도 어이가 없어 입을 뻐금거리자, 뒤에 서 있던 에디스가 어딘가 애상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후후, 저하께서도 아마 저 내숭에 금방 익숙해지실 거예요. 이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거든요. 네, 모두가 부질없는 노력일 뿐이랍니다.”
Chapter 87: Chapter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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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 충돌 (4)
“검토해 주실 건은 이 케이스가 끝이에요, 마사인 경.”
지브릴의 말에 마사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서류 작업이 드디어 막바지에 이르렀으니.
그녀로부터 마지막 서류를 받아들며, 마사인은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이렇게 둘만 남아 있으니, 어쩐지 이곳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그리 넓지 않은 사무실을 허전하다 느끼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평소에는 모레스 황자와 발레리 경, 샤론 경, 심지어 로건 황자까지 함께 복작거리던 공간이 아니었던가.
잠시 묘한 상념에 젖어 있던 마사인은, 이내 잡생각을 휘휘 털어내고 마지막 집중력을 쥐어 짜냈다.
“…내용을 보면 단순히 열병이 돌았던 모양이군요. 회색 역병과는 초기 증상부터 감별점이 뚜렷합니다.”
“역시 그렇죠? 확인만 해 주시면 그 건은 바로 되돌려 보내겠습니다.”
지브릴의 순순한 대답에, 마사인은 아까부터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을 물었다.
“지브릴 의원. 이런 명확한 케이스는 라이오라 역병회에서 먼저 걸러 주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것들이 구별 없이 모조리 마물 전담반으로 올라오는 이유가 뭡니까?”
“글쎄요? 일단 의심 사례 보고는 모조리 가져오라는 모레스 황자님의 명이 있었으니까요.”
마물 전담반은 애초에 회색 역병 조사를 위해 발족된 기관. 따라서 대륙 각지에 퍼져 있는 라이오라 학파의 역병 의사들은, 아직도 꾸준히 회색 역병 의심 사례에 대한 보고서를 황궁으로 보내오고 있다.
그러면 그것들을 마물 전담반에서 모조리 취합해, 조사가 필요하다 싶은 부분은 따로 뽑아서 관리하는 것이다.
“게다가 모레스 저하는 서류 처리가 의외로 빠르시거든요.”
“흠.”
마사인은 침음을 흘렸다.
하긴. 평소에는 모레스 황자가 휙휙 넘기듯 처리하던 일이라, 이렇게 살펴볼 구석이 많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만 해도 그렇지. 자신은 고작 한 달 치 서류를 붙잡고서 하루 종일 끙끙거렸지만, 만일 모레스 황자가 있었다면 차 한 잔 들이켤 시간에 모조리 해치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하께서는 지금쯤…….’
의식의 흐름에 따라 마사인이 또다시 멍한 얼굴을 하고 있자, 지브릴이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또 저하를 걱정하고 계시는 거군요, 마사인 경.”
“…그렇게 보입니까?”
“네. 아까부터 틈만 생기면 계속해서 본궁 방향을 쳐다보고 계시잖아요?”
“…….”
물론 걱정으로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겠지.
하지만 모레스 황자가 고열에 시달릴 때, 정작 마사인은 그의 곁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런 잡일이라도 처리해 드리는 쪽이, 나중에 저하께 더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아, 그리고 마사인 경. 이왕 오신 김에 봐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어요. 발레리 경이 저하께 드리는 보고입니다.”
“네? 그는 지금 토벌대와 함께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 마수 토벌은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텐데, 대체 뭘 보고하겠다는…….”
“보고라기보다는 단순히 징징거리는 서신에 가깝지만요. 계속 저하께 보내오고 있으니, 이걸 좀 어떻게 해 주시겠어요?”
그렇게 해서 마사인의 눈앞에 내밀어진 서신은 다음과 같았다.
-모레스 저하. 토벌대와 함께 키프로스로 향하던 도중 무척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글쎄 스스로를 선지자라 칭하는 웬 미친놈 하나가, 세상의 종말이 도래하였다는 둥 지옥의 불이 다가오리라는 둥 헛소리를 하며 순진한 백성들을 현혹하고 있다지 뭡니까? 이런 일이야말로 우리 마물 전담반이 나서야 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이라면 인퀴지터의 신경을 긁기 딱 좋은 사안이겠군. 마사인은 납득하며 다음 서신을 읽었다.
-저하! 소문을 듣고 있자니 갈수록 가관입니다. 글쎄, 저 미치광이 놈이 구원을 받기 위해 자신을 찾아오라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주신의 종을 자처하지 않고, 스스로를 새로운 구원자로 우상화 하다니, 이것이야말로 곧 신성모독이요, 이단의 짓거리가 아닙니까? 급한 사안입니다. 조사에 착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과연, 신성모독과 이단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마사인은 지끈지끈 두통이 이는 것을 느끼며 다음 서신을 펼쳤다.
-저하!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그 정신 나간 현자라는 놈이 이미 벤소 후작령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다니, 배후에 암흑 교단이 암약하는 것은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이 듭니다. 이 발레리, 저하께서 허락만 해 주시면 당장 토벌대를 떠나 후작령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날아든 서신.
발레리 경의 초조한 마음을 대변하듯, 서신의 어투 역시 갈수록 다급해지고 있다. 보고 있자니 절로 골치가 아파 왔다.
‘이것 역시 저하가 계셨다면 명쾌한 답을 주셨겠지만…….’
잠시 고민하던 마사인은, 결국 이렇게 답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모레스 저하께서는 아직 병석에 계시오. 틈이 생기면 내가 따로 보고를 드리겠으니, 경은 일단 마수 토벌을 제대로 마치고 돌아오시오. 도착하는 대로 함께 조사 방안을 궁리해 봅시다.
물론 머릿속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했다.
이 보고를 내 선에서 처리해도 되는 걸까? 혹시 보고를 받고도 조사를 미뤘다며, 나중에 이단 재판부에서 괜히 모레스 저하를 책잡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발레리 경에게 원하는 조사를 하도록 허락하는 쪽이… 아니, 하지만 저하께서 직접 발레리 경에게 토벌대에 합류하라 명하셨는데…….’
고민하다 보니 또다시 속이 쓰려온다.
마사인이 가슴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니, 지브릴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장미 향수가 든 작은 분무기를 고이 챙겨 주었다.
“저런. 그렇게 저하께서 걱정되시면 어서 돌아가 보세요. 부디 치료실 주변의 방역도 잊지 마시구요.”
그렇게 저녁때가 다 되어 본궁으로 돌아온 마사인이 발견한 것은, 고열에 시달리는 황자가 아니라 진수성찬이 펼쳐진 어수선한 치료실이었다.
모레스 황자는 물론 오웬 황자와 전담 시녀 에디스까지, 방 안에 격식 없이 음식들을 펼쳐놓고는 왁자지껄 환담을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마사인의 눈이 당혹감으로 잘게 흔들렸다.
“아니, 저하? 이게 무슨……!”
그러자 냠냠 식사에 열중하고 있던 황자가 밝은 얼굴로 그를 반긴다. 얼마 전까지 죽도 못 넘기고 빌빌거리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찬 모습이었다.
“마사인 경, 어서 와! 늦게까지 일하느라 식사도 못 했을 텐데, 경도 빨리 여기 앉으라고!”
“저, 저하. 대체 이게 다 뭡니까?”
“응. 에디스가 ‘베르트란 & 리, 참연어 전문점’에서 직접 사 들고 온 음식들이지. 오웬한테도 맛보여줄 겸, 대표 메뉴란 메뉴는 모조리 포장해 오라고 했거든.”
그렇게 설명한 황자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쓴웃음을 흘렸다.
“맛있는 건 지금 다 먹어둬야지. 아마 한동안은 또 곰 고기만 줄기차게 먹어야 할 거 같으니까.”
“…네에?”
지금까지 좋아서 찾으신 게 아니셨습니까?
얼떨떨해진 마사인이 엉거주춤 그들 사이에 끼어 앉자, 오웬이 잘 구워진 참연어 스테이크 접시를 옆으로 밀어준다. 또 반대편에서는 에디스가 어느새 새 식기 한 벌을 냉큼 펼쳐 주는 게 아닌가.
“너무 걱정 마십시오, 마사인 형님. 모레스는 이제 정말 괜찮아진 모양입니다. 오후 내내 열이 한 번도 나지 않았거든요.”
“…그게 정말입니까?”
마치 꿈만 같은 말이었다. 아직도 현실감을 찾지 못한 마사인이 멍하니 되묻자, 모레스 황자가 얼른 음식을 삼키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아버지가 괜히 자리를 비우신 게 아니라니까?”
“폐하께서…….”
“응, 밀린 숙제를 하러 기도실로 가셨지. 아버지 일은 너무 걱정 마. 카트리나 경이 곁에서 제대로 보좌하고 있고, 밀린 정무는 황후께서 맡아주실 테니까.”
“……!”
폐하께서 오랜만에 기도실에 드셨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상기하자 마사인의 머릿속이 서서히 맑아지기 시작했다.
가끔 정무 회의도 미루고서 치료실을 지키시던 폐하께서, 황후께 일을 맡길 정도로 오랜 시간 기도실에 드신다.
이제는 마음 놓고 모레스 저하의 곁을 비울 수 있다고 판단하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저하께서는, 이제 정말로…….’
갑자기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강한 안도감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울컥!
속에서 복받치는 강렬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마사인은 얼른 고개를 돌리며 참연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그나저나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네. 내가 계속 옆에 있었는데, 대체 너랑 아버님이 언제 그런 대화를 나눴다는 거냐?”
“아까 설명했잖아? 조용히, 잘 이야기했어.”
“…뭐? 그게 말이 되냐?”
“시끄러워!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 있으면 이거나 좀 먹어봐. 이게 키프로스 전통의 참연어 조리법이래. 네가 남부에서 이런 귀한 걸 먹어볼 수나 있을 거 같아?”
“아니, 귀하면 귀한 거지, 왜 음식 가지고 잘난 척이냐? 응?”
“다 자랑할 만하니까 그런 거야. 내가 이걸 들여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네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어?”
마사인이 눈시울을 붉히는 사이, 형제들은 당연하다는 듯 서로를 사이좋게(?) 핀잔주기 여념이 없었다.
‘흠. 모레스 녀석. 나더러 촌뜨기라고 눈치 주는 건가? 그런 것치고는 꽤 세심하게 이것저것 먹어보라고 권해주는 것 같단 말이지. 이걸 좋아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둘 중 하나는 내심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오웬 녀석. 평소에는 호구처럼 대충 넘어가면서, 간혹 이상한 데서 까다롭게 군단 말이지. 시끄러우니까 딱밤이나 한 대 때려줄까? 나중에 아버지한테 들키더라도, 한 번 정도면 그냥 눈감아 주실 것 같은데.’
또 다른 하나는 잠시 폭력 행사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타진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금 마음을 진정시킨 마사인은, 겨우 깊은 안도감에서 해방되며 서서히 몇 가지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저하. 그런데 아직 저하의 단전에서 미약한 열기가 느껴지온데…….”
“괜찮아, 마사인 경.”
그의 주저하는 질문에 황자는 이렇게 확답했다.
“오러의 성질이 조금 바뀌어서 그래. 곧 괜찮아질 거야.”
“…그렇습니까.”
마사인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어쩐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오러의 성질이 바뀌다니…. 거기다 듣도 보도 못한 열기로 화하다니.
오랜 시간 기사단장을 역임하며 스콰이어들의 연공을 봐줬지만, 지금껏 그런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면, 저하.”
그리고 그보다 더욱 중대한 문제점이 하나 남아 있었다.
“저하의 오러의 활성도가 왜 아직도…….”
전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그리 약하기만 합니까? 마사인은 그렇게 물으려 했다.
조금 조심스러운 문제였지만,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었다. 그는 모레스 황자의 검술 스승이기도 하며, 자신의 제자가 얼마나 오러 연공에 열중하고 있었는지를 잘 아니까.
한데 황자는 그가 채 질문을 마치기도 전에 단호하게 대꾸하는 게 아닌가.
“회복 중이라서 그래.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 다 괜찮아질 거야.”
“…….”
마사인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최근 모레스 황자를 곁에서 보필하며, 이따금 찾아들곤 했던 어딘가 선뜩한 느낌.
그리고 그 기시감은, 식사를 모두 마친 후에 뚜렷하게 가시화되었다.
“오늘은 이만 일찍 쉬고 싶어. 그러니 오랜만에 마사인 경도 방으로 돌아가서 푹 쉬도록 해.”
오웬 황자와 에디스를 물리며, 어린 황자는 마사인에게도 자리를 피해줄 것을 은근히 요구해 온 것이다.
“네? 하지만 저하. 아직은 이릅니다! 적어도 완전히 병세가 안정된 것을 확인하려면 오늘까지는…….”
하지만 황자의 태도는 강경했다.
“괜찮으니 내 말대로 해, 마사인 경. 거의 한 달이 넘게 치료실 소파에서 선잠만 자지 않았어?”
“…….”
“경이 그렇게 고생을 하고 있으니, 내가 모처럼 편히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잖아.”
뭔가 있다. 분명히 있다!
마사인은 확신했지만, 더는 황자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하면 근처에 머물고 있겠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저하.”
하지만 치료실을 나서는 그의 눈빛은 굳은 결심으로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은 밤새 치료실을 감시해야겠군. 브루노 단장도 부르는 것이 좋겠지. 그리고 근위대 대원들에게 일러, 본궁 경계를 한층 더 강화하라고 지시해야겠다!’
* * *
그렇게 마사인까지 완전히 내보낸 후, 성진은 침상에 얌전히 누워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본궁을 드나들던 고위 사제들이 모두 돌아가고,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 역시 모조리 기도실 경계에 한창일 지금.
마침내 적당한 시간이 되었다고 판단하자, 성진은 소리죽여 일어나 침상 옆에 고이 숨겨놓았던 붉은 영혼석을 끄집어냈다.
?빨강이의 영혼석?
떨리는 마음으로 떠오르는 글귀를 거듭 확인한 성진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마왕의 영혼을 현실에 소환하는 거다. 마기가 얼마나 퍼질지 알 수 없어. 본래라면 성직자 출입이 전면 금지된 진주궁에 가서 시험해 보는 게 더 좋았겠지만.’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지금, 어쩐지 혼자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가 성진을 보살피느라 잔뜩 밀린 일을 처리하러 갔는데, 무사히 돌아오는 모습을 보지도 않고서 혼자서 돌아가 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고 진주궁으로 돌아갈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어.’
성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네브라스카의 아뮬렛을 집어 들었다.
달칵.
긴장으로 미약하게 손끝이 떨렸지만, 다행히도 마왕의 영혼석은 제자리를 찾아가듯 아뮬렛의 홈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자 일전에도 한 번 경험했듯이, 눈앞에 새로운 안내창이 솟아오른다.
?소환수 빨강이?
?소환 / 해제?
아아. 다행이다.
이제 성진의 머릿속을 맴도는 걱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이것으로 소환한 마왕이, 과연 내가 알던 그 마왕 놈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헤이즈는 생전의 선한 인상과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었고, 바즈라 역시 약간의 변화를 겪은 듯 보였으니까.
일전에 성황도 이런 충고를 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영혼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종류의 물건이다. 귀한 것임에는 분명하나, 사용에는 조금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하지만 그에게 남은 마왕의 흔적은 이제 이것밖에 없다.
‘그렇다면 달리 방법이 없잖아?’
성진은 마음을 다잡으며 결심했다. 이번만큼은 설령 호러 영화 분위기를 풍기더라도 평정심을 유지하겠노라고.
하찮은 마왕 따위에게 겁먹기에는 헌터 이성진의 체면이 있지 않은가.
?*소환* / 해제?
그렇게 조심스럽게 선택을 누르자-
뿅!
그것은 마치 물방울이 떨어지듯, 허공 한가운데서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났다. 언젠가 영혼의 눈으로 몇 차례 본 적이 있는, 작고 붉은 불꽃의 형태로.
‘……!’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연기도, 불길한 마기도 없었다.
그저 이전보다 크기가 조금 커지고, 영안이 아닌 눈으로도 보일 정도로 뚜렷하게 실체화되어 있다는 정도가 차이점일까. 그곳에 있는 것은 여전히 볼품없고, 여전히 하찮은 빨간 불꽃이었다.
[…엉?]
갑자기 나타난 마왕 놈은, 뭔가 불안한 듯 붉은빛을 깜박거렸다. 영락없이 예의 얼빠진 마왕 놈이 할 법한 행동이다.
[어엉? 엉?]
성진은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가시적인 형태로 변하긴 했지만, 놈이 가진 영혼의 본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게 뭐지? 주마등인가? 내가 지금 인간들이 말하는 그 주마등을 보는 거야?]
“…주마등은 무슨, 살다 보니 별 같잖은 소리를 다 듣겠네.”
툭 하고 갈라진 목소리를 내뱉자, 불꽃이 움찔 놀라며 빤히 성진을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이성지이이이인!]
놈은 호들갑스레 소리를 지르며, 성진에게로 와락 달려들었다.
Chapter 88: Chapter 388
Chapter Text
388. 충돌 (5)
놈은 말 그대로 타오르는 불꽃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주먹만큼 커진 몸체는, 가시적인 빛을 뿜어내는 일종의 붉은 광원이 되어 있다.
불길의 움직임에 따라 가구들의 그림자가 어지러이 일렁이는 것을 보면, 명백하게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봐도 좋겠지.
그저 단순한 영혼이 아닌, 불이라는 실체를 몸처럼 덧입었다는 느낌. 따지고 보면 영혼의 본질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뿐이지, 마왕 놈도 제법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었다고 볼 수 있을 거다.
‘전에 만들었던 마왕 2호의 모습에 가까워졌는데?’
성진이 그런 감상을 떠올린 것도 잠시.
[이성지이이인!]
정신을 차린 마왕이 갑자기 울먹거리며 성진의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화르르륵!
[이성진! 이성지이인!]
“……!”
성진은 순간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가 직접 피부에 닿아오자, 강한 열기로 인해 순식간에 얼굴이 후끈해졌으니까.
다행히 게헤나의 불이 그러하듯, 열기 자체가 성진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 듯했다. 물론 그을리거나 화상을 입지 않았다 뿐, 제법 뜨겁다는 감각은 온전히 남긴 했지만.
[으아아앙! 이성진이다! 정말 여기 이성진이 있어!]
그러거나 말거나, 잔뜩 흥분한 마왕 놈은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듯했다.
정신없이 성진의 머리 주위를 빙빙 돌던 놈은, 곧 방바닥을 휩쓸며 뱀처럼 구불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쏜살같이 천장으로 솟구친다.
타닥타닥!
놈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샹들리에에 불똥이 튀기라도 한 듯 거슬리는 소음이 들려온다.
“야. 정신 사나우니까 그만하고 이리 와.”
성진의 부름에, 놈은 다시 머리 위로 날아와 빙글빙글 빠른 궤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네가 나랑 같이 있어? 설마 너까지 죽은 건 아니겠지?]
이놈, 설마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평소에도 매번 이런 식으로 날 따라다녔던 걸까?
어처구니가 없어진 성진이 놈의 빠른 움직임을 눈으로 쫓으며 대꾸했다.
“죽긴 누가 죽어? 그냥 내가 널 다시 델크로스로 부른 거야.”
[뭐어? 어떻게? 난 분명 게헤나의 불 속으로 뛰어들어 완전히 사라졌을 텐데?]
마왕 놈은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대체 왜 내 영혼이 아직 남아 있는 거야?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건데?]
“흠, 설명하자면 좀 길지만.”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제대로 다 기억나지도 않았다.
성진이 잠시 할 말을 고르는 사이, 마왕 놈은 다시 방향을 바꿔 빠르게 방구석을 향해 날아갔다.
[와아! 진짜다! 델크로스야! 여긴 정말 치료실이구나! 마지막으로 본 모습 그대로인데?]
그렇게 온 방 안을 살피듯 날아다니던 마왕 놈이, 뭔가 생각난 듯 쪼르륵 성진의 눈앞으로 돌아왔다.
[근데 이성진, 아까부터 왜 나한테 소리 내서 말하고 있어?]
“응?”
성진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거야… 지금은 네가 내 머릿속에 있는 게 아니니까?”
굳이 시험해 보지 않아도, 전과 같은 대화는 불가능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정신을 집중하면 머릿속에서 늘 느껴지곤 했던 마왕의 존재감이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채니까. 놈은 이제 완전히 성진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봐도 좋겠지.
“그렇다고 의식해서 너한테 사념을 쏘아 보내는 법 따위도 잘 모르겠단 말이지.”
[뭐? 그럼 내가 다시 돌아가면 되는 거 아냐?]
마왕 놈의 불꽃이 다짜고짜 성진의 머리를 향해 쇄도한다. 아마도 염상 결정 속으로 돌아가려 시도하는 거 같은데-
화르르륵!
[……!?]
그러나 허무하게도, 성진의 머리를 그대로 통과해 지나치고 말았다. 그저 머리통을 오븐에 넣었다 뺀 것처럼 뜨거운 열기만을 남긴 채.
‘음. 제법 화끈하군.’
성진이 떨떠름한 얼굴로 머리통을 흔들자, 마왕은 당황한 듯 타다다닥 불똥을 튀겼다.
[그런…! 정말 들어갈 수가 없잖아? 그럼 내 영혼은 이제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 거야?]
거기에 대해서라면 이미 훌륭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 성진은 빨갛게 물든 영혼석을 보란 듯 마왕에게 내밀었다.
?빨강이의 영혼석?
[…엉? 뭐야, 그건?]
“보다시피 영혼석이야. 이것 덕분에 완전히 소멸하기 직전에 네 영혼을 보존할 수 있었지.”
지금까지 마왕 놈은 성진의 염상 결정을 임시 거처로 삼았었지만, 이제는 더 새롭고 안정적인 보금자리가 생긴 셈이다.
아마도 이 물건 덕분에 마왕의 영혼이 부분적으로 규상세계의 법칙에 속하게 되고, 덩달아 성진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것 같으니까.
“이제 너와 나 사이에 더는 남아 있는 문제가 없다는 말이지. 제대로 잘 끝났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
[세대 교체?]
“…든 뭐든 간에.”
[그럼 너는 이제 제대로 불의 마왕이 된 거야? 더는 게헤나의 불이 널 괴롭히지 않아?]
“어…….”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놈의 입에 걸려 있던 제… 뭔가도 조금 느슨해진 모양.
[응? 이성진. 왜 갑자기 아무 말이 없어?]
“…….”
[응? 응? 이성진. 이성지이인!]
“…어. 그만 닥쳐.”
더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훌쩍!]
이놈이 더 캐물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마왕의 주 관심사는 그쪽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놈의 깊은 실망감을 반영하는 듯, 붉은 불꽃의 빛이 조금 약하게 바래졌으니까. 아마 사람의 표정으로 치자면 창백하게 질린 것에 가까울까?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 알잖아? 우리는 본래 영혼의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어! 거기다가 그 볼품없는 구슬은 영 맘에 차지 않는단 말이야!]
“영혼석이 뭐 어때서?”
[몰라서 물어? 염상 결정에 비하면, 이건 터무니없을 정도로 단순한 모양이잖아! 두고 봐! 난 다시 네 염상 결정 속으로 돌아가고 말 테니까!]
화르르륵!
파르르 불꽃을 뿜어내며 전의를 다지던 마왕이, 재차 날아와 유령처럼 성진의 머리를 통과했다.
휘익-
‘으엑……!’
애써 인식하지 않으려 했는데, 유령이라고 생각하니 어째 기분이 나빠지려 한다고.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마왕은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서성이더니, 또다시 머릿속으로 빠르게 달려든다.
휘익- 휙- 휘익!
결국 참다못한 성진이 소리쳤다.
“야! 야! 잠깐만! 다 쓸데없는 짓이라니까? 잠시 멈춰봐!”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릴에 매달려 머리통을 골고루 굽고 있는 기분이 이러할까. 이러다가 정말로 머리카락에 불붙겠다고!
하지만 성진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왕 놈은 몇 차례나 의미 없이 머릿속을 투과하며 들락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지친 마왕은 마침내 현실을 깨닫고는 깊이 좌절했다.
[이럴 수가…! 내… 내 완벽한 24면체의 보금자리는? 좌우 대칭을 그리며 멋들어진 곡률로 뻗어 있던 일곱 개의 아치들은?]
설마, 이제는 더 이상 모서리 돌기 놀이를 못 하는 거야? 아치를 타면서 점점 가속하는 스릴을 즐기지도 못 하는 거야? 그런 거야?
마왕은 부르르 떨며, 눈물 대신 작은 불똥을 뚝뚝 쏟아낸다. 어째 희생을 각오하고서 마지막 인사를 건넬 때보다 지금이 더 서글퍼 보인다면, 기분 탓일까.
“……?”
한데 여기서 조금 문제가 생겼다.
놈이 카펫에 떨군 불똥이 점점이 검게 눌어붙은 자국을 만드는가 싶더니, 이내 그곳으로부터 거센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화르르륵!
“어…….”
그 광경이 어찌나 비현실적으로 보였던지, 성진은 잠시 멍하니 불타오르는 카펫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도 불길은 빠르게 번져나가, 순식간에 가구와 커튼으로도 옮겨 붙기에 이르렀다. 임시 치료실 전체가 이내 거대한 불길에 휩싸인다.
활활활!
어두웠던 방 안이 환하게 밝아진 뒤에야 성진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헉! 큰일 났다!’
어째 아까부터 놈이 물건을 스칠 때마다, 치직 하고 심상찮은 소리가 난다 싶더니만!
성진이 뒤늦게 침구를 들고 불길을 두드리려는데, 그보다 한발 빠르게 반응한 누군가가 있었다.
두두두두!
다급하게 복도를 달려오는 발소리.
성진은 더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선택창을 눌렀다.
?소환수 빨강이?
?소환 / *해제*?
[엇! 잠깐만! 이성지이이이……!]
뿅!
마왕 놈의 모습이 허공에서 증발해 버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치료실의 방문이 거칠게 열린다.
콰앙!
“저하아!”
마사인 경이었다.
그는 불길 앞으로 막 다가가고 있던 성진을 발견하고는, 이내 얼굴이 핼쑥해졌다.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저하!”
“아, 마사인 경. 미안. 지금 빨리 불을 끌 테니…….”
하지만 성진은 미처 말을 다 마칠 수 없었다. 쏜살같이 달려든 마사인 경에게 붙잡혀, 순식간에 복도 저편까지 끌려 나왔으니까.
“불이다! 치료실 불이 났다. 근위대는 어서 화재를 진화하라!”
마사인 경이 오러를 실어 쩌렁쩌렁 외치자, 본궁에 있던 기사들과 경비원들이 일제히 치료실 앞으로 모여든다.
“헉! 마사인 경? 이게 어쩌다가……!”
“불이다! 불이 났다!”
“폐하의 집무실로 번지기 전에 어서 수습해라!”
이런. 엄청난 소동이 되어 버렸다.
성진이 낭패한 얼굴로 돌아보니, 마사인 경은 아직까지도 멀쩡한 근위대 정복 차림이었다.
아예 잠잘 준비도 하지 않은 모양인데? 그렇게 쉬라고 했는데, 이 양반 정말 사람 말을 안 듣는구나.
하지만 아마도 화내야 할 쪽은 성진이 아닌 마사인 경이었다.
“제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마사인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으로 성진을 쏘아보았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겨우 몸이 회복되었으면 편히 쉬면서 체력을 보존하셔야죠! 그새를 못 참고 또 밤늦게 일어나 불장난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 불장난이라니. 마사인 경. 그게 아니라…….”
뭔가 변명하려던 성진은,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과 복도 밖으로 환하게 비치는 불길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어, 정말 그렇구나.
아무리 봐도 훌륭한 불장난의 현장이네.
다행히 성진이 입을 다물고 있자, 금새 화가 식은 마사인 경이 망토를 어깨에 걸쳐 주었다.
“오늘은 다른 방에서 쉬실 수 있도록 전담 시녀에게 일러두겠습니다. 대체 저하께서는 언제 철이 드시려는지…….”
“뭐…….”
아냐, 마사인 경! 나는 억울하다!
이번에는 정말로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 * *
다음 날 아침.
베니투스 추기경의 소집 요청에 따라, 회의실에는 오랜만에 다섯 추기경이 모두 모여 있었다.
성회의 수장 마이어 추기경.
행정부의 디고리 추기경.
외교부 일체를 담당하는 체사레 추기경.
마지막으로, 의회의 수장이자 황후의 아비 되는 카프란 추기경이다.
“그나저나 그대가 우리를 소집해도 되는 거요? 베니투스 추기경. 분명 폐하께서 그대에게 예의 공문을 보내셨을 거라고 생각하오만.”
마이어 추기경의 지적에, 다른 추기경들의 눈이 모두 베니투스에게로 쏠렸다.
나대지 말라 공문.
베니투스 추기경이 워낙 사건 사고를 쳐대니, 성황의 부재 시에 이미 관례처럼 보내지는 공문이다.
그러자 베니투스 추기경은 움찔 놀라더니 슬그머니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다.
“그…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오! 우리에게는 당면한 더 중차대한 문제가 있지 않소이까? 최근 ‘그자’에게서 풍기는 마기가 한층 강해진 것을 모두 느끼셨을 테요.”
그자.
그것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지만, 아무도 그의 불경죄를 지적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최근 모레스 황자가 풍기는 기운이 너무나도 불길했으니까. 다섯 추기경 모두가 은연중에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최근 그자를 치료한다는 핑계로, 폐하께서 한 달이 넘도록 그자를 곁에 끼고 있던 것을 다들 알고 있을 거요! 대체 왜 그러셨겠소?”
성황의 기적과도 같은 신성력은 다섯 추기경들이 더 잘 알고 있다. 단순히 몸을 치료하는 문제로 그렇게 시간을 끌지는 않았을 터.
그리고 베니투스 추기경은 이미 머릿속으로 그 답을 추론해 낸 후였다.
“폐하께서 그자를 싸고돌 때는 분명 커다란 문제가 생겼을 때요. 이제 더 이상은, 성직자들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것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긴 게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함은?”
“당연하지 않소? 이번에야말로 그것이 제 사악한 본성을 드러낸 것이외다!”
잠시 뜸을 들이며 당당하게 추기경들을 둘러본 베니투스는, 소리 높여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을 이어갔다.
“저리 마기를 흩뿌리는 데도 모르겠소? 그 삿된 것은 명백히 악마의 세력에 속한 것, 그러니 감히 주신의 종을 사칭하게끔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오만!”
“베니투스, 자네. 설마……!”
마이어 추기경이 베니투스의 뜻을 파악하고는 안색이 변했다.
성기사 서임에 필요한 것은 세 명 이상의 고위 사제와 두 명 이상의 성기사단 단장.
하지만 그의 직위를 해제하는 데는? 다섯 이상의 고위사제, 혹은 성기사단 단장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다섯의 추기경이 모두 모여 있다.
“그렇소.”
베니투스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우리는 지금, 그자의 파면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거요.”
Chapter 89: Chapter 389
Chapter Text
389. 충돌 (6)
추기경들의 머리 위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파면한다? 은총의 기사와 함께 돌아온 지그스문트령의 구원자를? 거대 악마종을 쓰러뜨리는 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바서스트령의 영웅을?
무엇보다도, 성황이 정무까지 미뤄가며 저리도 애지중지 돌보는 아들을?
“…그것은 안 될 말입니다.”
잠시 후, 침묵을 깨고서 입을 연 것은 카프란 추기경이었다. 품위 있고 세련된 그의 외양은, 성직자라기보다는 일견 고위 귀족에 더 가까웠다.
“성기사의 파면에는 어디까지나 명확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성법에도 제시되어 있듯, 그에게 악마 소환이나 악마 숭배에 준하는 중대한 결격사유가 있어야 하죠.”
“그자가 풍기는 마기가 있잖소! 그것이 악마 숭배의 결정적 근거가 아니면, 대체 무어란 말이오?”
“단순히 모레스 황자님으로부터 ‘생소한 기운’이 느껴진다 하여, 뚜렷한 증거도 없이 그분의 파면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거대 악마종을 무리해서 상대하느라 침식의 일부가 후유증처럼 남은 것인지도 모르니까요.”
카프란 추기경은 ‘마기’라는 말도 섣불리 내뱉지 않는 조심성을 보였다. 막말을 하며 펄펄 날뛰는 베니투스 추기경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성황가의 일원에게 깍듯하게 예를 갖추는 말투까지.
”게다가 만약 정말로 모레스 황자님께서 그런 죄를 저지르셨다면, 과연 성황 폐하께서 저렇게까지 그분을 비호하셨겠습니까?”
아마도 그것은 그가 정말로 모레스 황자를 존중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저 자신의 입지가 성황의 손짓 한 번에 언제든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제대로 인지하고 있을 뿐.
그러니 성황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더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손자의 경쟁자를 한 번에 쳐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음에도.
“주신의 대리자께서 통치하시는 천년의 성국은 삿된 무언가가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땅입니다. 감히 그러한 의심을 품는 것조차 신성모독이 될 수 있으니, 증거도 없이 함부로 ‘마기’라 단정 지어서는 안 될 일이지요.”
짐짓 빤히 보이는 것을 두고서 모르는 척하는 태도였으나, 카프란 추기경의 지적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부분. 옆에 있던 체사레 추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델크로스는 지상에 세워진 주신의 왕국이자, 대륙의 모든 나라들이 우러러보는 상국이요. 한데 성황가의 황자를 그런 이유로 파면시켰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우리 제국의 체면이 대체 뭐가 되겠소?”
정교회와 웨스커 대주교를 견제하기에 급급한 체사레에게 있어, 모레스 황자의 입지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그러니 그는 외교부의 수장답게 타국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추기경들의 소극적인 태도에, 베니투스 추기경이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그게 지금 주신의 가장 가까운 종 된 자들로서 할 수 있는 언사요? 저 삿된 것이 버젓이 황궁을 활보하고 있소! 게다가 폐하께서 부재하신 사이 대놓고 황궁에 불까지 지르고 있단 말이오! 한데 지금 당신들에게는 그따위 체면치레가 더 중요하다는 거요?!”
베니투스는 당장이라도 눈에서 불을 뿜어낼 기세로 펄펄 날뛰었다.
하지만 추기경들의 반응은 영 마뜩잖았다. 심지어는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디고리 추기경조차,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을 보태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런 중요한 사안은 역시 성황 폐하의 뜻을 먼저 타진해봐야 할 것이오. 아무래도 그분께서 기도실을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디고리는 두려움에 젖어 있었다. 최근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를 들어, 겨우 손자 케네스를 황도 밖으로 빼돌린 상황이다.
한데 여기서 다시 한번 모레스 황자를 모함했다가는, 그의 손자에게 어떤 불똥이 튈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런 일이…! 그대들은 정녕 주신의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소이까!”
혈압이 잔뜩 오른 베니투스가 목 뒷덜미를 잡으며 비틀거리자, 카프란 추기경이 그를 달래듯 점잖게 대꾸했다.
“진정하십시오. 베니투스 추기경.”
“당신들은 지금 눈에 빤히 보이는 진실을 두고도, 그저 닥쳐올 후환이 두려워 눈을 감고 있는 거요! 이런 기만을 보고서 내가 어찌 진정할 수 있겠소이까!”
“각하를 기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모든 일은 성법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요.”
베니투스를 응시하는 카프란 추기경의 푸른 눈이 깊게 가라앉는다. 타티아나 황후와 로건 황자에게 고스란히 물려준, 예의 총명한 눈빛이었다.
“만일 모레스 황자님에게 정말로 피지 못할 결격사유가 있다고 한다면, 적어도 주신의 대리자이신 성황 폐하께서도 납득하실 정도로 확실한 증거를 가져오십시오. 아니라면 함부로 그분을 폄훼하는 불경을, 이 카프란이 더는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크흠…….”
그때, 지금껏 잠자코 있던 마이어 추기경이 침음을 흘렸다. 겉으로는 카프란 저자가 황자의 파면을 대놓고 반대하는 듯 보이지만-
‘확실한 증거를 바라는군.’
그의 속내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카프란은 코른시임의 불길한 피를 이은 현 성황이, 잡음 없이 보위에 오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다.
결국 딸을 황후의 자리에 추대하고, 손자가 온 대륙에 명성을 떨칠 수 있도록 토벌대 지원에 힘을 아끼지 않았지. 그 모든 행보는 결국 다음 대의 황위로 향하는 길목에 닿아 있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모레스 황자는 미처 예상치 못한 손자의 경쟁자일 터. 최근 3황자는 신민들 사이에서 ‘성 바스티안의 재림’이라고까지 칭송받으며 빠르게 평판을 회복하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소?”
성회의 수장이자 최고 연장자가 마침내 무거운 입을 열자, 후배 추기경들은 논쟁을 멈추고는 가만히 그의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모레스 황자의 파면은 지금 당장은 어려울 것이오.”
“하지만 그건……!”
“베니투스.”
무거운 눈빛으로 베니투스를 침묵시킨 마이어 추기경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의 성기사단 임명을 무효로 만드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르지.”
레안드로스 경이 모레스 황자를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에 입단시킨 독단의 근거가 무엇이던가. 바로 그의 전적이 보여주는 의심할 여지 없는 [멸악]의 힘이었다.
한데 지금은 어떻지? 황자가 검을 들기는커녕 제 몸을 가누기도 벅차하는 상태가 아닌가. 심지어 가지고 있던 오러를 전부 잃었다는 소문까지 암암리에 들려오고 있는 실정.
“그러니 모레스 황자에게 직접 [멸악]의 능력을 증명해 달라고 합시다. 만약 그가 모두의 앞에서 제대로 힘을 펼쳐 보인다면, 그 힘이 삿된 것의 영역에 있는지 어떤지를 모두가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테지.”
“…하지만, 하지만 그것이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짓을 할 리가……!”
“하면 성기사가 지녀야 마땅한 무력을 증명하지 못하였으니, 그에게 정중히 사퇴를 요청하면 되지 않겠소?”
그것이 마이어가 생각한 가장 부드러운 해결책이었다.
추기경들이 작당하고 벌인 파면이 아니라 황자가 자진 사퇴하는 그림이 된다면, 타국이 보기에도 겸양의 미덕 정도로 보일 수 있지 않겠나.
추후에 기도실에서 나온 성황의 분노를 온전히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덤이고.
“각하. 역시 그건 지나치게 온건한 처사가 아닌지…….”
베니투스는 여전히 불만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마이어 추기경은 그가 선을 대놓고 넘어가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베니투스는 웨스커 대주교와 마찬가지로, 생사를 함께 했던 소중한 후배 사제였기 때문이다.
“베니투스.”
그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제발 나대지 좀 말게. 더 이상은 옥새가 찍힌 공문을 가볍게 보는 처사를 용서치 않을 테니.”
“하지만 각하! 그건 그냥 폐하께서 매번 보내시는……!”
“매번 같은 공문을 보내시는 저의가 무엇인지 잘 헤아려 보길 바라네. 정녕 그것이 폐하께서 주시는 마지막 자비라는 것을 모르겠나? 부디 이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걸세. 모두 자네를 위한 충고야.”
* * *
“야, 이 정신 나간 놈아!”
다음 날 아침.
황궁을 찾은 오웬은 성진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게임에서 딱밤을 얻어맞고도 실실 웃기만 하던 놈이, 처음으로 내보이는 진지하게 화난 얼굴이었다.
“불장난? 불장나안? 모레스, 네가 어린애냐? 앞뒤 분간도 못 하는 꼬맹이야? 대체 이게 무슨 꼴사나운 짓이야?!”
“아니, 그러니까 그건 불장난이 아니었다고…….”
“시끄러워!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알기는 해?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그런 짓을 했다가, 잘못해서 불길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어쩔 뻔했어? 아직 몸도 다 회복되지 않은 놈이!”
“…….”
이럴 수가. 내가 이 멍청한 녀석한테 명분에서 밀리는 날이 오다니.
성진이 뚱하니 입을 다물자, 오웬은 더욱 기가 살아 펄펄 날뛰기 시작했다.
“듣고 있는 거냐? 응? 너, 어디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해 봐라, 내가 아주 그냥……!”
“저, 저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마사인 경이, 보다 못해 오웬을 달래며 밖으로 데려갔다.
“저하. 모레스 황자님께서도 충분히 반성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만 진정하시지요.”
“형님이 모레스에게 너무 무르신 겁니다! 저 사고뭉치에게는 똑 부러지게 말을 해 둬야 한다고요! 야! 알아들었어? 명심하라고! 너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목소리가 복도 저만치 멀어져 간다.
어, 시끄럽다. 꼭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느낌인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모레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아멜리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방으로 달려온 것이다.
“불이 났다고? 어디 다친 덴 없고? 아아, 이렇게 미약한 오러 활성도라니!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자리에 누우렴!”
“누님…….”
성진은 결국 아멜리아를 붙잡고서, 어제 아버지가 병을 멀쩡히 고쳐 주셨다는 사실을 한참 동안 설명해야 했다.
“그럼 이제는 열이 더 오르지 않는다는 거니?”
“네, 그렇습니다. 누님.”
“그래…….”
그러자 아멜리아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물었다.
“한데 왜 오러 활성도가 조금도 회복되지 않는 거니? 내게는 여전히 네가 많이 아픈 것처럼 느껴지는구나.”
“음.”
성진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오러는 분명 다시 성진의 통제하에 돌아왔다. 지금이라도 명상을 하며 오러를 회복한다면, 아마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이전의 경지를 회복하겠지.
하지만 성진은 현재 극도로 조심하는 중이었다.
그의 오러는 지금 게헤나의 불과 융합되어 있다. 그것이 활성화되면, 혹여 강한 마기를 풍기게 되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성황이 부재한 지금, 어느 누구에게도 이 문제를 상담할 수 없다.
‘신성력이 없는 내가 마기를 감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성진은 현재 최대한 오러를 단전에 묶어두고 있는 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바뀐 오러를 시험해 보고 싶었지만, 안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모레스…….”
그때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아멜리아의 맑은 눈동자에 다시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부디 숨기지 말고 네 상태를 정확히 말해주렴. 너는 몸이 아프더라도, 혹여 남들이 걱정할까 봐 끝까지 그걸 숨기려 들잖니. 넌 상냥한 아이니까.”
“아니…….”
성진은 황당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누님은 날 대체 뭘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깊은 회한과 슬픔이 동시에 아른거리는 눈동자에, 성진은 결국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뭐, 오러를 조금 보여주는 정도는 괜찮겠지? 누님도 나처럼 마기를 느끼지 못하니까.’
주변에 마사인 경과 오웬 외에는 달리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성진은 조심스럽게 단전의 오러를 손끝에 모았다. 얼마 전 로건으로부터 배운 ‘작은 검막 펼치기’의 요령이었다.
몸 전체의 오러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크지만, 적어도 단전의 오러 일부를 가시적인 형태로 방출하는 정도는 가능하겠지.
“자. 보세요, 누님. 제 오러는 이렇게 멀쩡합니다.”
화르륵.
곧 성진의 손끝에서 실체화된 오러가 작은 불꽃을 만들어 냈다. 본래의 회색 오러와는 달리, 검붉은 빛이 뒤섞인 불길한 오러.
“……!”
아멜리아의 눈이 충격을 받은 듯 둥그레진다.
힐끔 그 모습을 일별한 성진은, 그녀가 더 놀라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좀 이상하죠? 아무래도 열병의 후유증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괜찮다고 확답을 주시기 전까지는 활성화시키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중이에요.”
깜박.
그때 긴 속눈썹을 깜박이며 남은 눈물을 털어낸 아멜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검은 악마.”
“네?”
지끈-
어째서일까. 그러한 반응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건만, 성진은 아멜리아의 말에 묘하게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누님. 그렇다고… 다짜고짜 악마라시면…….”
말끝이 미약하게 떨리며 절로 흐려진다. 여상하게 내뱉으려 애쓴 것이 무색하게, 자신의 목소리가 어쩐지 타인의 것인 양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기분.
한데 이어지는 그녀의 반응은 성진이 생각한 것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아멜리아가 갑자기 환하게 미소 지으며 성진의 손을 꼬옥 부여잡아온 것이다.
“그렇구나! 정말 다행이야, 모레스!”
“…어?”
당황하며 시선을 마주하니, 아멜리아의 눈에는 어느새 형언할 수 없을 만치 강렬한 감동의 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래. 드디어 오러를 되찾았구나!”
“그…….”
“게다가 너무나 멋진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니? 생동감을 가지고 물결치는, 참으로 아름다운 빛의 오러구나!”
…이 누님이 진심인가?
잠시 멍해졌던 성진은, 곧 세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맞아! 그랬지. 내가 누님의 중2병 취향을 깜박하고 있었네!’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 ‘악마’란, 엄청나게 멋지고 쿨하다는 뜻을 가진 찬사 중의 찬사가 아니었던가.
어쩐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을 느끼며, 성진이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좀 이상…하지는 않습니까? 저는 사람의 오러가 이런 색을 낸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어서…….”
하지만 아멜리아는 되레 성진을 안심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모레스!”
“네? 뭐가 괜찮다는…….”
“네 오러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이거야말로 언젠가 네가 가지게 되었을 오러임에 분명하니까!”
“……?”
뭐지? 저 근거 없는 확신은?
하지만 이어지는 아멜리아의 찬사에는 조금도 거침이 없었다.
“두고 보렴. 머지않아 이 아름다운 오러는 네 강함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될 거야. 적군에게는 피할 수 없는 두려움과 재앙이, 그리고 아군에게는 무엇보다도 강한 무기이자 버팀목이 되어 주겠지.”
“어…….”
“그러니 안심하렴, 모레스. 네 오러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단다.”
상냥하게 돌아오는 애정 어린 시선은, 이전과 한 치의 변함도 없다. 이에 묘하게 안도한 성진은 결국 그녀를 향해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네.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누님.”
그것은 진심이었다.
살면서 지금껏 단 한 번도 기도라는 것을 해 본 적 없는 이성진은, 그날 처음으로 이 바람이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기를 마음속 깊이 기원했다.
Chapter 90: Chapter 390
Chapter Text
390. 충돌 (7)
“저 망둥이 녀석! 감흥 없는 저 표정 좀 보십시오!”
한편, 복도로 끌려나온 오웬은 쉽게 진정하지 못하며 씨근덕거렸다.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해야 할 황궁에서, 하필이면 화재 사고에 휘말릴 뻔하다니!
일전에 꿨던 악몽이 갑자기 떠오른 탓도 있었다. 검붉은 불꽃같은 오러를 온몸에 휘감은 채, 화마로 뒤덮인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던 한 소년의 모습.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 흐릿한 인상만이 남았지만, 당시는 어쩐지 그 소년을 뉴비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꿈속의 광경에 지금의 모레스가 겹쳐 보이는 듯 느껴져,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을 주체할 수 없어진 거다.
“이참에 단단히 주의를 줍시다, 형님! 저 사고뭉치 녀석이 다시는 불장난을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해요!”
“하하.”
펄펄 뛰는 오웬을 복도 끝으로 인도한 마사인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쯤 했으면 모레스 황자님도 잘 알아들었을 겁니다. 그러니 그만 진정하십시오.”
“하지만!”
“다 이해합니다, 저하. 저하께서 화재 사고를 어찌 느끼시는지 저도 모르지 않습니다.”
“윽……!”
마사인이 인내심을 가지고 거듭 달래자, 오웬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마사인 경이야 말로 어젯밤의 사건을 수습하느라 고생한 장본인이 아닌가. 뒤늦게 달려와 그에게 성질을 내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형님 앞에서 제가 추태를 보였군요. 면목 없습니다.”
“아닙니다. 다 한 식구가 아닙니까? 화내는 것이 당연합니다.”
생각보다 부드러운 대답이 돌아오자, 오웬이 멍청히 그를 바라보았다.
기분 탓인가? 어쩐지 마사인의 태도가 전과 달리 묘하게 풀어진 느낌이 든다.
“제가… 조금 주제넘게 화를 내긴 했죠.”
급격히 풀이 죽은 오웬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럭저럭 친근하게 부대끼고는 있지만, 자신이 정말로 성황가의 핏줄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은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유독 혼자서 길길이 뛰는 꼴이 남들 눈에는 어찌 보였을까.
‘특히나 마사인 형님은 유난히 모레스를 아끼고 있으니까.’
그러자 마사인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젓는다.
“주제넘다니, 전혀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하께서 그리 역정을 내신 것도 모두가 모레스 황자님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
의외의 반응이었다. 안 그래도 아이러니하게 뒤바뀐 입장 탓에, 지금까지 미약한 거리감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이 아니었던가.
며칠 전만 해도 엘릭서를 두고서 오웬에게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내오기도 했고.
그런데 지금 그를 바라보는 마사인 경의 표정은 어떠한가. 경계심은 온데간데없고, 어딘가 후련해 보이기까지 하다.
아마도 하고 싶었던 말을 누군가가 대신 시원하게 쏟아내 준 덕분이겠지만, 오웬이 미처 그런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이곳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오히려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이의 존재가 더욱 소중해지는 법입니다, 저하.”
마사인은 만면에 평온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모레스 저하께서도 내심은 그리 생각하실 겁니다. 저리 철없어 보여도 의외로 날카로운 구석이 있으시거든요.”
“…모레스가 말입니까?”
“네. 황궁의 생리를 본능적으로 아는 분입니다. 이곳에서는 여상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자가 가장 무서운 법이니까요.”
“그렇…군요.”
오웬은 떨떠름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웃는 사람이 무섭다니. 형님이 어린 시절에 겪은 황궁은, 대체 어느 정도로 무시무시한 복마전이었단 말이지?
한데 공교롭게도 잠시 후, 오웬은 그 ‘여상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자’의 표본를 만날 수 있었다. 점잖고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초로의 남자 하나가 그들을 찾아왔기 때문.
바로 로건의 외조부인 카프란 추기경이었다.
“모레스 황자님을 뵙습니다.”
고위 사제임에도 어린 황자에게 과하게 정중한 예를 보인 남자는, 연이어 마사인과 오웬을 향해서도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마사인 님, 그리고 오웬 황자님을 뵙습니다. 두 분께서 이렇게 함께 계신 모습을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어딘가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인사다.
적장자지만 황위 계승권을 잃은 마사인과, 표면적으로는 계승권을 가지고 있지만 성황가의 피를 잇지 않은 오웬. 굳이 두 사람을 묶어서 언급할 필요가 있었을까?
“두 분께서 이리 깊은 우애를 보이시니 참으로 보기 좋지 않습니까. 성황 폐하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테지요.”
그저 오웬의 기우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마사인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으니까.
카프란 추기경. 그는 흠잡을 데 없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왠지 사람을 묘하게 기분 나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갑자기 각하께서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저하의 병세가 위중하시니, 사사로운 병문안은 되도록 자제하라는 폐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만.”
마사인이 의구심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진주궁 출입에 인원 제한을 둔 것과 마찬가지로, 본궁의 임시 치료실 역시 그러한 원칙이 적용되는 상태. 고위 사제의 출입이 금지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가 대놓고 이리 경계심을 드러내는데도, 카프란 추기경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부드럽게 입매를 휘어 보인다.
“감히 폐하의 명을 어길 생각은 없습니다. 외람되오나, 마사인 님. 저는 병문안차 이곳에 들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저 성회의 의견이 하나로 모여, 대표로 모레스 황자님께 이를 전해 드리러 온 것뿐이지요.”
카프란 추기경의 눈이 다시 모레스에게로 향했다.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푸른빛의 눈동자에, 일순 미약한 불편함이 빠르게 어렸다 사라졌다. 황자로부터 꺼림칙한 기운을 강하게 감지한 까닭이었다.
“성회는 저하께 다음의 사항을 요청 드리는 바입니다. 우선…….”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한 카프란 추기경이 담담하게 자신의 용건을 읊어나가기 시작했다.
대충 ‘성회가 어떠어떠한 점을 걱정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이러저러한 것을 모두의 앞에서 증명해 달라’라는, 뭐 그런 식의 장황한 설명들을.
그 따분한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오웬은 멍하니 이런 생각을 했다.
‘…로건이랑 어딘가 닮은 것 같으면서도 완전 달라 보이는 사람이군. 앞으로도 썩 호감이 생길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그런데-
“나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의 용건을 모두 전해들은 모레스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소년은 뚱한 얼굴로 잠시 남자를 쳐다보더니, 이내 불쾌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던 것이다.
“성회도 참 시답잖은 요구를 하잖나. 다들 미친 건가? 적반하장이 따로 있지. 내가 황도를 악마종으로부터 구한 영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들 있을 텐데?”
예상치 못한 강한 반발. 게다가 영웅이라니? 본인 입으로 직접 그런 소리를 한다고?
‘저 녀석이 뭘 잘못 먹었나? 갑자기 왜 저래?’
오웬은 당황하며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황궁에 돌아와서 모레스와 마주한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최근에 녀석은 저런 성격이 아니었잖아?
“어떻게 생각해, 카프란 추기경? 내가 지금 화나게 생기지 않았나? 아무리 생각해도 불쾌감을 참을 수 없군!”
한데 지금은 어떤가. 턱을 한껏 치켜들고서 오만한 표정으로 사람을 깔아보는 것이, 영락없이 옛날의 망나니 모레스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다들 두고 보라고! 아버지가 기도실에서 나오시는 대로, 내 성회가 보인 방자함에 대해 낱낱이 일러바칠 테니까!”
“…송구합니다, 저하.”
그러자 카프란 추기경은 잠시 모레스를 빤히 살피더니, 이내 철없는 어린애를 보듯 애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든 것은 어리석은 저희들의 불찰이오니, 부디 성회의 요청에 너그러이 응해 주십시오.”
“물론이야. 난 그런 자리에 겁쟁이처럼 몸을 사리지 않는다고.”
“감사합니다. 하면 성회에는 저하의 뜻을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래. 잘 전해 둬. 나중에 후회하고 빌어도 소용없다고. 추기경들에게 목이나 잘 닦고 기다리라고 하지. 내 직접 가서 본때를 보여 줄 테니까!”
듣고 있던 오웬은 머릿속이 점점 혼미해졌다.
저 막돼먹은 애새끼 같은 녀석은 대체 누구냐! 너 정말 모레스야?
“……?”
한데 곁에 서 있는 마사인의 표정은 더더욱 기괴했다.
카프란 추기경이 누구인가. 신성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다섯 추기경 중 하나이자, 타티아나 황후의 아비이기도 하다.
한데 그런 사람에게 적절한 예의를 보이라 다그쳐도 모자랄망정, 마치 다 자란 손주를 보는 것처럼 더없이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충격과 혼란의 시간이 지나가고, 카프란 추기경은 다시 모두에게 정중히 예를 보이고는 물러났다.
한데 복도를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모레스의 눈이, 어느새 본래의 침착한 빛으로 되돌아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보다 성회가 발 빠르게 움직이려 드는군. 앞으로는 ‘나대지 말라’ 공문을 다섯 추기경 모두에게 보내두는 게 좋겠다고 아버지께 건의 드려야 할까 봐.”
“……!?”
저 봐. 또 사람이 변했어!
오웬이 크게 당황하고 있는데, 마사인이 환하게 밝아진 얼굴로 모레스를 향해 성큼 다가섰다.
“훌륭하십니다, 저하!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처신이셨습니다!”
“…엥?”
이건 또 무슨 말이람?
오웬이 멍청히 눈을 끔벅거리는데, 이어지는 마사인의 설명은 더욱 가관이었다.
“카프란 추기경은 황후마마와 함께, 알게 모르게 황궁에서 가장 저하를 견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이에게 일부러 어리숙한 모습을 보여 방심을 유도하시다니, 역시 저하께서는 황궁의 생리를 제대로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모레스가 어딘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마사인을 바라보더니 퉁명스레 대꾸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마사인 경. 나는 그런 귀찮은 짓은 하지 않아.”
“예, 그러시겠죠.”
“진짜라니까? 그냥 저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심술을 부려 본 거뿐이야. 저 징그러운 내숭을 보고 있자니 괜히 거드름을 피워보고 싶더라고.”
“네, 다 압니다. 참으로 대견하십니다, 저하.”
“…아니, 그러니까 그게 아니래도.”
멍하니 듣고 있던 오웬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설마 황궁은 아직도 서로가 속고 속이는 복마전이었던가? 전선을 전전하던 자신만이 지나치게 순진할 뿐이었던 건가!
그렇게 오웬이 혼란에 휩싸여 있는 동안, 모레스와 마사인은 머리를 맞대고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그나저나 저하, 지금 확답을 주신 것은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니었을까요? 추기경들의 오랜 연륜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대단히 까다롭고 어려운 증명을 요구할 테지요.”
마사인은 이런저런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 당연했다. 고위 사제들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고이 보살펴 온 황자가, 이제 제 발로 그들의 소굴에 들어가게 생겼으니.
하지만 모레스의 태도는 담담했다.
“괜찮아. 내가 이단 재판부로 소환되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성회에서 적당한 능력을 선보이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하오나 [멸악]의 힘을 증명해 보이라니요. 오러도 온전치 않은 지금, 대체 어떻게 해야만…….”
하지만 어린 황자는 무슨 근거인지, 대단히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걱정 말라니까? 마사인 경. 나는 저들이 뭘 준비할지, 그리고 내게 뭘 요구할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 * *
그렇게 이틀의 시간이 흘러, 마침내 성회가 요구한 증명의 날이 밝아왔다.
성진은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성회에 출석할 채비를 시작했다.
사락사락.
빳빳하게 다려진 짙은 잿빛의 정복을 팔에 꿰자, 선명한 은빛 검과 두 개의 갈고리가 가슴 중앙에 자리 잡는다.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을 상징하는 교차하는 쇼텔의 문양이었다.
-두고 보렴. 머지않아 이 아름다운 오러는 네 강함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될 거야.
철컥.
그 위로 다시 은빛의 약식 갑주를 착용하고, 마지막으로 호두까기가 매인 검대를 두른다.
-그러니 안심하렴, 모레스. 네 오러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단다.
그러는 동안에도 성진의 뇌리에는 아멜리아가 해준 말들이 차례차례 떠오르고 있었다.
마기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누님이 멋모르고 한 말들이지. 아마 고위 성직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서 흠을 잡으려 시도하는 자리에서는, 이렇다 할 도움이 되지 못할 터.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성진은, 아멜리아가 했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기할 정도로 커다란 위안을 얻고 있었다.
이런저런 걱정으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그날 이후 오히려 환하게 맑아진 기분이랄까.
‘그래. 단순한 해결책이 최고지. 일단 부딪쳐 보자. 만약 일이 조금 틀어지더라도 무슨 상관이람? 아버지는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을 다 예상하고 계셨을 텐데.’
아마 [틈새]에서 돌아오시기만 하면, 분명 성진을 위해 적당한 핑계거리를 생각해 주실 터다.
삐걱.
채비를 마치고서 방을 나서자, 그 앞에는 벌써부터 마사인과 오웬이 초조한 얼굴로 성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옆에는 예의 성기사 또한 자리하고 있었다.
‘프란시스 아젠.’
성황이나 카트리나가 부재할 경우, 성진에게 생기는 일체의 종교적, 법률적 문제를 위임받는 자.
성진을 맞이하는 그의 눈에 옅은 당혹감이 스쳐 지나간다. 성진이 풍기는 마기가 제법 짙어져, 이제는 프란시스처럼 무늬만 성기사인 이들도 알아차릴 정도가 된 모양.
‘이렇게 오러를 단단히 묶어두고 있는데도 말이지.’
하지만 성진은 그에 대해서만큼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성황이 그의 편인 한, 카트리나 역시 언제까지나 그의 편이다. 그러니 단장에게 지극히 충성스러운 저 부관도 절대 자신의 독단으로 성진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터.
“크흠!”
아니나 다를까, 작게 헛기침을 한 프란시스가 표정을 관리하며 입을 열었다.
“저하,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이번 성회의 소환은 여러 가지로 절차상의 허점이 많습니다.”
“다시 생각하면?”
“언제든 출석을 거부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적절한 핑계를 대며 미루다가, 폐하께서 깨어나시길 기다려 문제를 해결하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흠…….”
성진 역시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쩐지 아버지가 금방 일어나실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고.’
이제는 성진이 살아 숨 쉬는 한, 그의 오러에서 숨길 수 없는 마기가 계속해서 피어오를 것이다.
이 문제를 언제까지나 피하기만 해서는 답이 없었다. 오러를 계속 묶어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게다가 아버지가 안 계신 지금이야말로, 어쩌면 역으로 성회의 반발을 확실하게 눌러 둘 기회가 될지도 몰라.’
잠시 생각을 정리한 성진은 재차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냥 이대로 진행하지.”
“지금이라도 충분히 소환을 미룰 수 있습니다. 그 결심에 변함이 없으십니까?”
“물론이다.”
성진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프란시스는 곧 한숨을 쉬며 안경을 추슬러 올렸다.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원 일부를 대회의장 밖에 대기시켜 두겠습니다. 혹여 저하께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다른 이들이 지원 오는 동안 충분히 무력시위를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 말에 성진은 황당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워워, 이 친구가 보자 보자 하니 큰일 날 소리를 하네? 마기를 풀풀 풍기는 사람 하나를 지킨답시고, 성회에서 추기경들과 고위 성직자들을 향해 검을 들이대겠단 말이야?
“안심해. 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성진은 그렇게 대꾸하며 프란시스를 지나쳤다.
철컥철컥.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금은 생소한 약식 갑주의 마찰음이 들려온다.
성진은 그렇게 조금은 믿음직한 세 사람을 대동한 채, 고위 사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대회의장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Chapter 91: Chapter 391
Chapter Text
391. 담판 (1)
대회의장은 서늘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다섯 추기경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고위 사제들이 참석한 자리. 심지어 평소와는 달리, 완전 무장한 성기사들이 회의장을 빙 둘러가며 물 샐 틈 없는 경계를 서고 있다.
“…….”
그들은 침묵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암암리에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경계하던 자.
이단재판부의 수장이 공공연하게 삿되다며 불경한 발언을 하게 만드는 자.
그리고 최근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성인의 재림이라고까지 일컬어질 만큼 커다란 업적을 세운 자.
“…크흠!”
무거운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누군가가 작게 침음을 흘린다.
뭔가 큰일이 되어가고 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참석한 자들 모두가 은연중에 그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황자가 이리 순순히 출석하겠다고 나올 줄은 몰랐지.”
체사레 추기경이 무심코 중얼거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웨스커 대주교가 왈칵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왜? 누구도 벗어나지 못할 고약한 함정을 파 놓고 나니, 이제야 괜한 일을 벌였다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기라도 하는 거요?”
“뭣? 함정이라니! 말을 삼가시오, 웨스커 대주교!”
“왜, 내가 틀린 말을 했소이까? 나이가 지긋하신 양반들이, 고작 손주뻘 되는 어린 황자님을 견제하지 못해 그렇게 안달들을……!”
“쉿! 그만 정숙하시오.”
수장인 마이어 추기경이 주의를 주자, 웨스커 대주교는 베니투스와 체사레를 번갈아 노려보며 으름장을 놨다.
“다들 똑똑히 알아 두시오. 나중에 성황 폐하께서 기도실에서 나오시면, 필시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지만은 않으실 거요.”
“…쯧!”
베니투스 추기경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혀를 찬다.
하지만 그들의 잡담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열려 있는 회의장 입구 너머로부터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으니까.
철컥철컥.
약식 갑주가 만들어내는 자잘한 마찰음이, 넓은 복도에 메아리치며 묘하게 불길한 울림을 자아냈다.
“모레스 황자님께서 드십니다!”
그리고 모두의 눈앞에, 마침내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의 정복을 차려 입은 말쑥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낸다.
“……!”
대회의장은 조용한 충격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방금까지 황자를 비호하던 웨스커 대주교마저 할 말을 잃고서 멍하니 입을 벌렸으니.
“헉……!”
일견 모레스 황자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흐트러짐 하나 없는 잿빛 정복과 당당한 걸음걸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모두를 오시하는 태연한 눈빛.
기도 또한 빼어나다. 미약해진 오러 활성도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소년을 이제 막 병석에서 일어난 환자라고 느끼지 못했을 정도.
아아. 어쩌면 로건 황자에 이어, 제국이 자랑할 만한 또 다른 주신의 기사가 탄생했다고 여길 수도 있었으리라.
만약 그로부터 스멀스멀 뿜어져 나오는 저 불길한 기운만 아니었다면!
“저, 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어린 황자를 삿대질하고 있던 베니투스 추기경은, 채 말을 잇지 못한 채 턱을 덜덜 떨어댔다. 예상외로 강하게 느껴지는 마기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탓이다.
“저런 삿된……!”
그가 황자의 앞에서 대놓고 불경한 말을 쏟아내기 전에, 마이어 추기경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리 소환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리오, 모레스 황자님.”
“그래, 당연히 감사해야지.”
소년은 거만한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이 쓸데없이 낭비하려던 시간을, 내가 친히 움직임으로써 대폭 절약해 준 거나 마찬가지니까. 본래라면 이럴 시간도 없지 않나?”
성황을 쏙 빼어 닮은 차가운 회색 눈동자가, 회의장에 앉아 있는 면면들을 차례로 훑어간다.
“지금 그대들은 아버지로부터 위임받은 일들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만도 만만치 않을 텐데?”
“성황 폐하께서도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하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그래. 그들의 우려는 역시나 기우가 아니었지.
모레스 황자를 마주 응시하는 마이어 추기경의 눈매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굳이 증명이 필요한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이곳에 모인 성직자들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저 황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악의 세력에 속한 자라는 사실을.
“…해명해 주실 수 있소?”
성기사들에게 체포를 명하기 전, 마이어 추기경은 성황가에 대한 예우의 뜻으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답으로 황자가 내뱉은 말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해명할 것이 뭐가 있나? 이 모든 것이 주신의 뜻인데.”
“…뭣이?”
그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할 새도 없이-
화아악!
갑자기 모레스 황자의 기세가 변하기 시작했다.
거센 영압이 폭풍처럼 뿜어지며, 미약하기만 하던 오러가 거칠게 맥동을 시작한다.
강해지다 못해 뚜렷하게 실체화된 검붉은 오러가,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온몸에서 피어오른다.
당연하게도 소년의 몸에서 뿜어지는 마기 또한 걷잡을 수 없이 강해져 갔다!
“……!”
스르릉!
성기사들이 창백한 안색으로 검을 반쯤 뽑아 들었다. 심지어는 황자의 뒤를 지키고 있던 프란시스마저 크게 놀라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을 정도.
“…컥!”
“허억!”
고위 사제들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매일같이 기도 드리는 것만이 소일거리인 연약한 사제들은, 황자의 강력한 마기에 압박당하며 마치 천적을 만난 소동물처럼 식은땀만 뻘뻘 흘려댔다.
“…아, 악마가!”
“어서, 막아야만……!”
한데 막상 성기사들이 불길한 황자에게 달려들려던 찰나였다.
슈우우우-
그렇게도 강력했던 마기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가라앉는 게 아닌가!
“……?!”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당황하며 눈을 끔벅거렸다.
대체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오직 이 모든 사태를 만들어 낸 장본인만이 거짓말처럼 오연한 얼굴로 그들을 둘러볼 뿐.
“모두 똑똑히 들어라.”
그렇게 연이어 사제들의 뒤통수를 후려친 소년이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들 앞에 서 있는 황자는, 아까보다는 훨씬 은은하게 느껴지는 마기를 점잖게 흘리고 있을 뿐이다.
“주신 앞에 서는 모든 이들은, 그분의 충실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
“이는 세상 만물이 결코 주신의 의지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방증이겠지.”
…이게 대체 무슨 개소리지?
모두가 충격에 빠져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사이, 이 삿된 황자는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며 당당하게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니 이만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눈을 떠라! 주신의 거룩한 성전 앞에 한 점 거리낌 없는 이의 말을 새겨들으라. 나는 주신의 시련을 받은 구도자요, 동시에 그분의 고귀한 사명을 받드는 사도일지니!”
“……?!”
* * *
“하벤 경?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교대를 위해 기사 숙소에 들른 마리아 경은, 휴게실에 푹 퍼져 있는 하벤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물론 모셔야 할 황자가 궁에 없으니 업무 시간에 딱히 할 일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왜 혼자 게으름을 부리나? 다른 기사들은 모두 연무장에서 훈련에 한창이다.”
마리아 경의 지적대로였다.
상주기사들을 굴리던 마사인 경이 황자의 곁을 지키느라 자리를 비운 동안, 뒤늦게 호랑이 교관으로 각성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모레스 황자의 측근인 브루노 단장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제자인 칼멘 경을 굴렸다. 그러다 보니 제자와 유난히 전투 합이 잘 맞는 클로디아 경의 검까지 봐주게 되었고.
그렇게 연무장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이제는 상주기사 대부분이 그의 지시를 받아 데굴데굴 구르는 처지가 된 것이다.
“경은 어제오늘 근무 아닌가? 설마 비번도 아닌데 밤새 술을 푼 거냐?”
마리아 경의 타박에, 하벤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리아 경. 오늘만 좀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제 제가 하루 종일 무슨 고생을 했는지 아신다면 절대 그런 말씀 못 하실 겁니다.”
목소리가 쩍쩍 갈라지는 걸 보니 어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그런 하벤으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는 뜻밖의 것이었다.
“경전 동화를 낭송해? 모레스 저하의 앞에서?”
“네, 그렇다니까요! 지금까지 발간된 경전 동화란 동화는 모두 읊어드린 것 같습니다. 근데 더 이상한 게 뭔 줄 아십니까? 그때 정작 저하께서는 혼자서 다른 책을 읽고 계셨다, 이겁니다!”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다른 책을 낭송시켜?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마리아 경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하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죠? 정말 이상하죠?”
“…독서 중에 귀가 심심하셨나 보지.”
“그건 절대 아닙니다! 글쎄 제 낭송을 전부 제대로 듣고 계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간혹 이상하다 싶으면 귀신같이 짚고 넘어가시더라고요.”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건성으로 넘어가지 말고 제대로 읽어, 하벤 경. 경이 자꾸 단어나 문장을 빼먹으니까 문맥이 어색해지잖아.
-어. 그 이야기는 이제 됐어. 앞에 읽었던 경전 동화와 틀은 그리 다르지 않군. 그냥 다음 권으로 넘어가지.
-잠깐만, 하벤 경. 일이 꽤 흥미롭게 흘러가는데? 차근히 되짚어 보고 싶으니, 앞에 발단이 나왔던 부분부터 다시 한번 읽어봐 주겠어?
마리아 경이 혀를 내둘렀다.
“그걸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일일이 지시하셨다고?”
“네. 못 믿으시겠죠? 저도 직접 겪어보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하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근데 그러면서도 읽고 있던 책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으시더란 말이죠. 심지어 책장 넘기는 속도도 엄청나게 빨랐다고요!”
“흠.”
왜 저하께서는 몸이 회복되자마자 그런 기행을 하신 걸까?
마리아 경은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지만, 아무리 궁리해 봐도 도무지 답을 알 수가 없었다.
* * *
성진의 전략은 간단했다. 자고로 단순한 것이야말로 강하고 또 명쾌한 것이다.
본래 경전 따위는 관심도 없었고, 하다못해 신학개론 머리말도 제대로 펼쳐보지 않은 성진이다. 그러니 아무리 시간을 들여 벼락치기를 한들, 평생토록 경전을 파고들며 토론해 온 노인네들과 논리로 맞서 싸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겠지.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쉽고 명료한, 그리고 직관적인 일화들을 내세우자.’
성진이 설득해야 하는 것은 고작 성회의 늙은이들 따위가 아니었다. 궁극적으로 황도 신민들을 비롯한 온 대륙의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해답이 바로 그간 발간된 경전 동화들에 있었다.
“성 아우렐리온께서 신의 계시를 받고 움직이려 할 때, 주신께서 이용하신 것이 바로 한 무리의 삿된 까마귀들이었지.”
경전에는 이렇게 스쳐가듯 기록되어 있지만-
-산 너머에서 맴도는 까마귀 떼를 발견한 뒤, 주신의 종 아우렐리온은 사라졌던 마기의 행방을 찾아냈다.
그 일화가 경전 동화에는 이리 표현되어 있었다.
-성 아우렐리온에게 목적지를 알려주기 위해, 주신께서는 친히 삿된 까마귀 떼를 움직여 그 여정의 이정표로 삼으셨답니다.
얼마 전 발간된 ‘성 바스티안과 손가락 악마’ 역시 마찬가지-
-신실한 바스티안은, 바람을 타고서 악마 숭배자의 뒤를 쫓았다.
이런 단순한 내용이, 동화에는 이렇게 바뀌어 있다.
-성 바스티안께서는 신수 바람을 몰고서, 악마의 끄나풀을 하수인으로 복종시켜 길잡이로 삼았습니다.
일견 아이들을 위해 읽기 편한 문장으로 바꾼 듯 보였지만, 어느 샌가 삿된 악마의 세력이 주신의 도구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이렇듯 차근차근 찾아보면, 지금껏 발간되었던 수많은 동화들이 경전의 내용을 미묘하게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원전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경전 동화들을 연이어 독파해가며 성진은 손쉽게 그런 미묘한 뉘앙스를 잡아낼 수 있었다.
‘우연인가? 아니면 아버지가 이 모든 일들을 사전에 준비하신 걸까?’
성황이 기도실에 든 지금으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왕 먹기 좋은 판이 준비되어 있다면, 이를 이용해 주는 것이 자식 된 도리가 아니겠나.
“내가 악마종과 싸울 당시, 주신의 거룩한 은총이 사방을 뒤덮었다는 이야기를 다들 들었겠지? 그때 나는 분명 그분의 목소리를 들었다. 한층 신실한 주신의 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더욱 강한 시련을 이겨내야 하리라는 말씀을.”
그래서 경전 동화의 이야기와 흡사한 내용을 암시한다. 굳이 콕 찍어주지 않아도, 고위 사제들이라면 이정도 언급만으로도 다들 성녀 그라지에에게 내려진 ‘오해의 시련’을 떠올리겠지.
“그리고 거기에는 또한 주신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이 새로운 힘은 단지 나 개인을 시험하기 위한 시련만은 아닐 테지. 간혹 악마종의 삿된 기운은, 동일하게 삿된 방식으로 대처해야 할 때도 있다지 않나.”
악마를 처단하기 위해 정말로 악마를 사역한 적도 있다는 성 테르바키아의 이야기 역시 넌지시 암시한다.
다른 성인들의 수많은 일화들에 비해, 고작 두어 권의 동화만이 발간되어 있는 어둠의 성인. 공교롭게도 성진은 현재 그를 기리는 기사단의 정복을 입고서, 사제들이 되도록 잊고 싶어 하는 일화를 일부러 생생하게 상기시키고 있는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신성한 은총에 둘러싸인 주신의 왕국에서, 그분을 섬기는 종들과 함께 무사히 주신을 경배하고 있지. 이 이상 내가 주신의 도구라는 사실을 명확히 증명할 방법이 어디 있단 말이지?”
이 모든 논리의 비약과 억지 주장들을 최대한 빠르게 머리통으로 쑤셔 박는 거다.
연이어 큰 충격을 받고서, 아직 저들이 이성을 채 되찾지 못한 지금 이 순간에!
“그건… 그건 궤변이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을까.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 말을 듣고 있던 베니투스 추기경이, 이윽고 갈라지는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이, 이런 불경하고 삿된 기운이, 정말로 주신의 뜻에 따라 내려진 시련일 리가……!”
“대체 뭐가 문제지? 삿된 것들이 그분의 도구로 쓰인 사례가 어디 한두 개인가? 베니투스 추기경, 그대는 경전을 제대로 다시 읽어봐야겠어.”
“……!”
실제로 경전을 읽어야 하는 쪽은 성진이었지만. 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추기경을 힐난할 구실이 아니겠는가.
“최근에 발간된 경전 동화를 아직도 읽지 않았나? 주신께서는 손가락 악마의 다섯 손가락을 파괴하기 위해, 직접 성 바스티안께 악마의 하수인을 길라잡이로 보내셨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그건 어디까지나 해석의 문제……!”
“그 해석이야말로 성회의 심사를 통해 발간된 정론이잖아?”
평소 경전 동화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노인네가, 뒤늦게 업보를 뉘우치며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문다.
그러자 성진은 기세등등하게 공격을 이어갔다.
“그대는 내 말에 불만이 무척 많은 것 같은데, 그러면 어디 한번 들어나 보지. 신의 대리자이신 아버지께서, 굳이 내 힘을 정화하지 않고 이대로 내버려 두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그것 역시 내 힘이 주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방증이 아니면 뭘까?”
역시나 개소리였다.
하지만 이런 일은 당당하게 밀어붙이는 기세가 중요한 거 아니겠나.
“뭐, 정 믿기 힘들다면 또 다른 방법이 하나 있긴 하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뜸을 들인 성진은, 여유롭게 주변을 둘려보다가 다시 베니투스를 향해 지긋이 시선을 주었다.
“어디, 자신 있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대들이 한번 나를 정화해 보든지.”
바로 그 순간-
베니투스 추기경은 마주한 소년의 동공에서 뿜어지는 강렬한 붉은빛을 보았다.
Chapter 92: Chapter 392
Chapter Text
392. 담판 (2)
신성력을 느끼지 못하는 성진은, 그 힘이 작용하는 방식 따위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악을 멸하고, 혹은 어떻게 악을 정화할 수 있는 건지도.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단언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강대한 신성력조차 그를 해하지 않는데, 이 세상 어느 누가 감히 그를 정화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이렇게 안심하고 입을 털 수 있는 것이다.
“어디, 자신 있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대들이 한번 나를 정화해 보든지.”
대회의장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저 제안이 내포하는 의미는 생각보다 컸으니까.
성황조차 손쓰지 못한 자를 정화하려 시도한다? 혹은 성황이 허락한 자를 부정하고 그를 정화하려 든다?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든, 이는 신의 대리자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신성모독!
“…….”
물론 신성모독을 차치하고라도 산적한 문제는 많았다.
만약 정말로 정화가 불가능하면? 자신의 능력 부족을 만인 앞에서 시인하는 꼴이 되는 데다, 괜히 나서서 저 삿된 것을 주신의 사도로 인정하는 데 앞장서는 셈!
‘…이건 절대 피해야 하는 역할이다!’
웅성웅성.
사제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수군거린다.
하지만 어디에고 앞뒤 재지 않고서 달려드는 자는 있게 마련이니-
“이익! 어디, 하라고 하면 내 못 할 것 같은가?”
베니투스 추기경이 씩씩거리며 단상에서 내려와 성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불경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마사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지만, 그의 손이 채 검에 닿기 전에 성진이 조용히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참아, 마사인 경. 우리는 어디까지나 저들을 평화적으로 설득하러 왔다고.’
‘…그거 진심이십니까?’
방금 오러를 있는 대로 뿜어내며 사제들을 압박하신 분이?
마사인의 황당한 시선을 모른 척하며, 성진은 자신의 앞으로 깡마른 노인의 손이 뻗어지는 것을 태연히 바라보았다.
“이 삿된 것아! 지금 당장 이 경건한 주신의 전당에서 사라져라!”
화아악!
잿빛 정복을 움켜잡은 손에서, 곧 신성한 하얀빛이 터져 나온다. 신성제국 5대 추기경 중 하나이자, 한때 악마 토벌로 위명을 떨치던 베니투스의 강대한 신성력이었다.
‘…대단하군! 이제는 쓸모없는 뒷방 노인네라고만 여겼거늘…….’
고위 사제들이 그를 다시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성황의 신성력을 매일같이 접하던 성진에게는 빛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힘이었지만.
“……?!”
신성력에 직격당하고도 성진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베니투스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내 오만상을 다 써가며 자신의 영혼을 쥐어짜내기 시작했다.
“이이이이익!”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모든 기력을 밖으로 쏟아낸 불쌍한 늙은이는,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자, 다들 보았겠지?”
탁.
주름진 옷깃을 절도 있게 잡아 펴며, 성진이 대회의장을 빙 둘러보았다.
“이렇게나 명확하지 않나? 나는 제국의 적이 아니며, 그대들이 퇴치해야 할 상대도 아니다. 주신께서 내려주신 힘이 주신의 확고한 뜻을 표한 것이다.”
“……!”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결코 삿된 것의 궤변에 현혹되지 않으리라. 그 자리에 있는 사제들이 공통적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의외의 결과가 펼쳐지자, 그들의 뇌리에는 생각보다 강한 반향이 일어났다.
‘…잠깐. 설마 했지만, 혹시?’
‘가능성이… 있는 건가? 그 옛날 성녀 그라지에가 받았던 ‘오해의 시련’처럼, 정말로 모레스 황자에게 주신의 손길이 닿은 건가?’
대회의장의 공기가 고요히 술렁이는 가운데, 마이어 추기경은 가라앉은 눈으로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것은 좋지 않은 흐름이야. 모두가 의구심을 느끼고 있지 않는가.’
악마종이 황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지 어언 10여 년. 젊은 사제들 중에는, 이제 악마와 악마 계약자의 속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니 황자의 말에 저렇게들 흔들리는 것이겠지.’
베니투스 추기경이야, 모레스 황자가 절대 ‘인간이 아닌 무언가’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모양이었지만.
‘모레스 황자는 어쩌면 고위 악마와 연결된 악마 계약자일지도 모른다.’
악마 계약자는 악마를 직접 몸에 강림시키기 전까지는 어디까지나 인간에 불과하다.
따라서 주신의 은총 속에 거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악마와 오래 소통하지 않고서 마기 자체를 흐릿하게 지우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각하.”
웨스커 대주교 역시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전에 없이 불안한 눈빛으로 마이어 추기경을 마주 본다.
“모레스 황자님은 어쩌면…….”
“쉿! 확실치 않은 일을 섣불리 입에 담는 우를 범하지 말게, 웨스커. 만일 저하가 모종의 계약 관계에 놓여 있었다면, 아까처럼 악마의 힘을 강하게 드러내 보인 시점에서 이미 침식 현상을 보였을 거야.”
그래. 그것이 문제였다.
악마를 강림시키거나 악마의 힘을 강하게 방출한 계약자는, 결국 빠르게 침식에 휘말리며 영혼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보라.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모레스 황자는 지금까지 멀쩡해 보이지 않는가.
문득 두려운 가정 하나가 마이어 추기경의 뇌리를 스쳤다.
모레스 황자가 차라리 주신의 도구나 사도라면 다행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것’은 이미 주신의 권능을 능가하는 무언가라는 뜻일 테니.
“…하지만 각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모레스 황자님을 조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웨스커 대주교가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소곤거리자, 마이어 추기경이 작게 혀를 찼다.
“조사? 대체 어떻게?”
정체를 감추려 들면 일반인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계약자는 보통 어떻게 조사하는가.
본래라면 간단했다. 혐의가 있는 자는 일단 이단재판부로 끌고 가서, 실토할 때까지 계속해서 고문과 치료를 반복하면 되는 거지.
하지만-
“폐하께서 총애하시는 아들을 무턱대고 고문실에 처넣을 수 있을 리가 없잖나! 거기다가 황자 본인이 주신의 시련을 받았다 주장하며, 스스로 마기를 당당하게 드러내 보인 다음에야…….”
“그, 그럼. 정말로 황자님의 말씀이 맞을 가능성은 있습니까?”
“글쎄…….”
거기에 대해서 마이어 추기경은 회의적이었다.
성녀 그라지에가 받았다는 ‘오해의 시련’은, 말 그대로 그녀가 마녀로 몰려 이단재판부로 끌려왔던 일화를 의미했다. 성녀가 마기 따위를 풍겨댔다는 기록은 전무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모함만으로도, 그녀는 결국 3세트에 이르는 ‘성녀의 시련’을 모두 견뎌내야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모레스 황자더러 성녀가 했듯이 증명해보라 말하기도 애매하다. 이미 폐하께서 직접 금지하신 시련들이 아닌가. 황자가 스스로 나서지 않는 한, 우리 쪽에서 먼저 시련을 받으라 강권할 수는 없는 노릇.’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 만일 저 어린 황자가 여기까지 생각하고서 일을 벌였다면, 참으로 영악하다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렇게 마이어 추기경의 고민이 깊어지는데, 누군가가 점잖은 목소리로 혼란스러운 대회의장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여러분.”
바로 의회의 수장, 카프란 추기경이었다.
그는 이 일련의 사태에도 전혀 동요하는 기색 없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잠시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오늘 이 자리는 모레스 황자님을 모종의 혐의로 고발하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요? 저리 삿된 기운이 풀풀 흐르는 걸 빤히 보고도, 그런 소리가 잘도 입에서 나오는구려?”
“진정하십시오, 베니투스 추기경 각하. 우리는 그저 저하께서 가지신 [멸악]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 점을 잊지 마십시오.”
카프란은 오히려 평온해 보였다.
그래. 황자가 삿된 것이든, 아니면 정말로 주신의 시련을 받은 사도이든 무슨 상관이랴. 저런 사악한 기운을 풍기는 순간, 이미 18대 황위로부터 멀찌감치 밀려나버리고 만 것을.
“그, 그래! 그것이 있었지!”
번쩍!
그의 지적에, 흐려져가던 베니투스의 눈이 생기를 되찾는다.
맞아. 절대 실패할 수 없는 함정을 만들어 두지 않았던가. 주신께 맹세코, 저 삿되고도 위험한 것을 절대 주신의 사도라는 영광된 이름하에 내버려 두지 않겠노라!
“자! 어서 증명해 봐라! 어서!”
그는 허둥지둥 단상으로 달려가, 준비해 두었던 작은 조각상들을 와르르 품에 그러모았다.
“네까짓 것이 진정 주신의 사도라면, 아마 이 시험을 능히 통과할 수 있을 터! 자, 어서 이것들을 해결해 봐라!”
후다닥!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온 그는, 안고 있던 물건들을 거칠게 성진의 손아귀에 내동댕이쳤다.
후두두둑!
“성 테르바키아에 대해 말했는가? 삿된 기운은 삿된 방식으로 대처한다 했더냐? 그렇다면 증명해라! 이 사악한 물건들을 모두 정화하여, 그 잘난 [멸악]의 능력을 만천하에 보이란 말이다!”
“…….”
성진은 손바닥 위에 놓인 조각상들을 슬쩍 눈으로 훑었다.
그것들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크기의 나무 조각들이었는데, 일견 괴물의 형상 같기도, 혹은 공룡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 어쩐지 이럴 거 같더라니…….’
대형 악마종이 나타났던 날, 놈으로부터 흘러나온 마기가 황도의 곳곳으로 끌려가는 기현상이 목격되었다.
성기사들이 그 장소를 오래 물색한 끝에 찾아낸 것이, 바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마종의 씨앗’, 즉 이 작은 나무 조각상들인 것이다.
듣기로는 사제들이 몇 차례 정화를 시도했으나 절대 파괴되지 않았다던가. 성회에서는 극비리에 취급하는 정보라며 다샤가 조심스레 알려주었었지.
한데 지금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규상 세계의 물건들이니까.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본상 세계의 힘으로 쉽게 없앨 수는 없지.’
그래. 결국은 이것을 꺼내들지 않을까 하는 짐작은 있었다.
저들이 어떻게 [멸악]의 힘을 시험하겠나. 명색이 성직자란 자들이 나서서 황도에 악마를 소환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혹여 가능하다 하더라도, 악마는 소환된 순간 황도를 둘러싼 은총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하고 말 터.
‘그렇다면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는 과제를 던지는 거지. 만약 내가 정말로 힘을 증명해 낸다면, 소환한 본인들의 입장이 꽤나 곤란해지니까.’
짐작한 바와 같이, 베니투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고위 사제들이 어딘가 묘한 열의를 가진 채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성진을 소환하기 전에 이미 성회 선에서 이야기가 모두 끝나 있었던 모양.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가 절대 해결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들 하는군.’
절로 실소가 흘렀다.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다들 의도가 투명하게 보이지 않는가.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쏘아보는 베니투스 추기경의 시선을 무시하며, 성진은 손가락으로 조각상 중 하나를 슬쩍 건드려보았다.
우웅-
의지를 일으킴과 동시에 성진의 동공에 희미한 붉은빛이 어린다. 그리고 곧, 예상했던 대로 그의 눈앞에 희미한 창 하나가 떠올랐다.
?스피노메갈로사우르스 소환권?
?스프링벨리의 필드 보스, 스피노메갈로사우르스를 1회 소환할 수 있습니다. 공룡을 소환한 직후, 소환권은 사라집니다. 파괴를 선택하면 역시나 아이템 창에서 삭제됩니다.?
?물리저항B. 물저항B.?
?몬스터 등급 : B+?
?*현재 노스랜드 서버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일전에 바서스트령을 휩쓸었던 악마종은 규상 세계의 법칙을 따르는 놈이었지.
대체 어디서 그런 괴상한 공룡이 튀어나왔나 했더니, 아마도 이런 식의 소환권으로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소환을 하거나 아예 파괴할 수도 있단 말이지?’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려니 아니나 다를까, 그 옆에 또다시 작은 선택창이 연이어 떠오른다.
?소환권을 파괴하시겠습니까??
?삭제 / 취소?
그래.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짐작조차 할 수 없겠지만, 지금의 성진이라면 정말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손쉽게 이것들을 부숴버릴 수 있다.
이렇게 쉬운 증명 방법이 세상에 또 있을까?
?기가노토알로사우르스 소환권?
?아르히노모사사우르스 소환권?
다른 나무 조각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의식을 집중하고 있으면 다들 비슷비슷한 설명창이 떠오른다.
“무리라면 지금 포기해도 좋습니다, 모레스 저하. 아무도 어린 성황가의 자제분께 능력 밖의 일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멀리서 카프란 추기경의 여유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짐짓 부드럽게 달래는 듯 들리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감정은 손자의 경쟁자가 이대로 몰락하기를 바라는 들뜬 희열.
성진은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렸다.
뭐, 굳이 망설일 필요가 있을까? 판이 이렇게나 예쁘게 깔려 있다면, 걸음걸음 가뿐이 즈려밟아 주는 것이 인지상정.
“모두 아집으로 멀어 있는 그 두 눈에 똑똑히 새기는 것이 좋을 거다.”
성진은 턱을 거만하게 치켜들고는 선언했다. 목청껏 외치지 않아도, 오러가 실린 또렷한 목소리는 대회의장 구석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이것이야말로 주신께서 내리신 사도의 힘, 바로 주신의 기적이다!”
조각상 하나를 높이 치켜들며 주위를 한차례 일별한 성진은-
?소환권을 파괴하시겠습니까??
?*삭제* / 취소?
미련 없이 눈앞에 떠오르는 선택창의 [삭제] 버튼을 눌렀다.
Chapter 93: Chapter 393
Chapter Text
393. 담판 (3)
파스스…….
머리 위로 높이 쳐들린 조각상은 급격한 변화를 보였다. 부서지는 소리는커녕 어떠한 조짐도 없이,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공기 중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
장내는 충격에 휩싸였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간 고위 사제들이 돌아가며 신성력을 퍼붓고, 성기사들이 오러 블레이드로 기백 번을 두드려도 멀쩡하던 ‘악마의 씨앗’이 아니던가.
“…끄끼억?”
누구보다도 당황한 것은 베니투스 추기경이었다.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린 그는, 마치 모가지가 비틀린 닭이라도 된 마냥 괴상한 소리를 냈다.
아무렴, 놀랄 수밖에.
-수색을 위한 인과는 이미 채워졌소. 하면 이 리브가가 조금 일찍 비밀을 털어놓더라도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터.
평소에는 그렇게도 몸을 사리던 아렌쟈의 수장이, 손발을 걷어붙이고 성기사들을 이끌어 찾아낸 물건들이다.
-이것들은 씨앗 뿌리는 자의 오랜 안배들이오. 이 세계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으니, 여간해서는 쉬이 부서지지 않을 테지. 정화를 포기하고 그냥 황궁 깊숙이 보관하는 것이 좋겠소.
심지어 절대 정화할 수 없을 거라고 장담하기까지 했지.
그래서 자신 있게 시험대로 꺼내 온 것이 아닌가. 저 삿된 황자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으리라고 철석같이 믿고서.
하지만 결과는 어떠한가.
황자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베니투스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조각상으로부터 꾸준하게 흘러나오던 마기가, 황자의 외침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그야말로 의심할 여지 없는 [멸악]의 증거!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저것은 분명 황자의 탈을 쓴……!’
카프란 추기경 또한 베니투스와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떠한 상황에도 늘 품위를 잃지 않던 초로의 남자는, 답지 않게 체통도 잊은 채 휘둥그레진 눈으로 허공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마치 황자가 모종의 술수를 부려 모두의 앞에서 사기를 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
“자. 모두 보았나? 이것이 내가 가진 [멸악]의 능력이며, 주신의 종임을 증명하는 힘이다.”
오직 태연한 이는 이 [기적]을 일으킨 장본인뿐.
충격에 휩싸인 차가운 대회의장의 공기를 느끼며, 성진은 속으로 담담히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안녕, 스피노메갈로사우르스.’
사실 소환권으로 실제 공룡을 소환해 보고 싶다는 욕망이 없었던 건 아니다.
왕년에 티라노사우르스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졌던 성진이 아니던가. [콩: 쥐라기 아일랜드]의 게임 디렉터가, 스피노사우르스와 메갈로사우르스를 합쳐서 과연 어떤 디자인의 공룡을 뽑아냈는지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하지만-
‘정작 소환해 봤자, 일전의 거대 악마종처럼 해로운 마기를 쏟아내는 악마의 권속이 될지도 모르잖아?’
가지고 있어봤자 영 못 써먹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단 말이지.
그렇다면 더 이상 미련 둘 필요는 없을 터.
“…이, 이럴 리가 없다!”
그때, 번쩍 정신을 차린 베니투스가 와락 성진의 정복을 부여잡았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대체 무슨 짓을 한 게야! 이 삿된 것아! 어서 네 술수를 낱낱이 고하지 못하겠느냐?”
“베니투스 추기경! 보자 보자 하니 정말로……!”
으르렁거리는 마사인 경을 다시 한번 진정시킨 성진은, 여상한 태도로 남은 조각상들을 베니투스 추기경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가 얼떨결에 그것들을 넘겨받자-
척!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치켜들며, 또 다른 조각상 하나를 가리켰다.
“주신의 사도가 주신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조금 과하게 거들먹거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남들이 보기에는 꽤 멋들어진다고 느낄 만한 제스처였다.
“사라져라.”
반짝.
명령과 함께, 또다시 성진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일었다 사라진다.
?소환권을 파괴하시겠습니까??
?*삭제* / 취소?
파삭!
기가노토알로사우르스가 재차 먼지로 화한다.
아마도 강력한 이빨이 즐비한, 근사한 주둥이를 가진 수각류 공룡일 거라 짐작되었지만, 이제는 영영 놈의 모습을 알 길이 없어지고 말았다.
“…허억!”
자신의 손 위에서 또 하나의 조각이 먼지처럼 사라지자, 베니투스는 이제 거의 혼절할 것처럼 보였다.
그는 화들짝 손아귀의 조각들을 내팽개쳐 버리곤, 핏기가 가신 얼굴로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아아……!”
데구르르르.
마구잡이로 쏟아진 조각상들이 초라하게 바닥을 나뒹군다. 그중 발치께로 굴러온 조각상에 대고, 성진은 당연하다는 듯 다시 한번 명했다.
“너도 사라져라. 이 삿된 악마의 도구야.”
파스스…….
“……!!”
대회의장의 공기는 이제 완전히 얼어붙었다.
눈앞에서 연이어 일어난 세 번의 기적.
“다들 확실하게 알았겠지? 이 모든 게 주신의 뜻이라는 것을.”
뒤이어 울리는 황자의 목소리가, 마치 신의 음성인 양 뇌리에 쨍하게 내리꽂힌다.
“나야말로 주신의 뜻을 좇는 신실한 구도자이며, 주신의 의지를 행하는 그분의 충실한 사도라는 사실을.”
충격으로 마비된 머리는 더 이상 이견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들은 삿된 기운을 흘리면서도 주신의 힘 앞에서 굳건한 황자의 모습을 보았다. 그 황자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불길한 악마의 씨앗을 정화하는 모습도 보았다.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이 일련의 기적들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감히 주신의 시련을 받는 사도에게 인간의 부족한 잣대로 시험을 내리려던 자들아. 신의 뜻을 미루어 재단하고, 이를 감찰하려고까지 들었던 어리석은 종들아.”
혼란스러운 그들의 귓가에 대고서 모레스 황자가 천천히 쐐기를 박아 넣는다.
“내게 내려진 이 모든 시련들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주신의 왕국을 실현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니.”
그런 황자의 고귀한 자태는 경전 속 성인들에 견주어도 조금의 손색이 없으며-
“하여 내가 제국에서 이어가는 모든 행보는 곧 주신의 뜻을 행사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 목소리 또한 주신의 뜻을 고지하는 천사의 것인 양 청아하기 이를 데 없으니-
“이를 모두들 명심하고, 앞으로 더는 주제넘게 내 일에 참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장내에는 오직 싸늘하고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 따름이다.
다름 아닌, 커다란 죄책감과 강한 의구심이 한꺼번에 뒤섞여 모두의 가슴을 옥죄어왔기 때문이다.
정말로 자신들의 눈이 욕심과 아집으로 흐려져 있었던 것인가. 그래서 이토록 명확하기만 한 주신의 뜻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던 건가…….
“소, 속지 말아야 한다!”
바로 그때, 먼저 정신을 차린 베니투스 추기경이 광인처럼 울부짖었다.
“다들 정신을 바짝 차려라! 더는 저 삿된 것에게 현혹되어서는……!”
저벅.
순간 황자가 베니투스 추기경을 향해 한 걸음 다가온다.
“헉!”
불쌍한 노인은 저도 모르게 팔로 바닥을 밀어내며 몸을 벌벌 떨었다.
그저 오러 유저 특유의 가벼운 발걸음. 한데 그 소리에서 어찌 이리도 태산 같은 무게감이 느껴지는가.
베니투스가 점점 짙어지는 압박감에 떨고 있는데, 머리 위로 소년의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이내 추상 같은 꾸짖음이 내려앉는다.
“주신께서는 항상 무지한 자를 가엾이 여기라 하셨지. 하지만 그로 인한 방만함을 봐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물론 성진은 경전에 실제 그런 말이 있는지 어떤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두꺼운 경전에 깨알같이 기록된 것들이 온통 주신의 가르침뿐이니, 어쩌면 한 문장 정도는 그런 말이 있겠거니 생각했을 뿐.
아마도 그 짐작이 들어맞은 모양이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노인의 눈동자가 미약한 죄책감으로 파르르 떨려오기 시작했으니까.
“감히 아버지께서 직접 내리신 ‘나대지 말라’ 공문을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 성황가의 일원 앞에서 그리도 불경한 언사를 서슴지 않다니.”
“그, 그건…….”
“베니투스 추기경. 내가 너의 모욕과 무례를 대체 언제까지 참아줘야만 하는 거지?”
저벅-
성진이 또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다.
점점 강해지는 압박감으로 아득해지는 머릿속에서, 베니투스는 부단히 혼잣말을 되뇌며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저것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거죽을 쓰고서 우리를 속이고 있는, 삿된 것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 저것이 눈앞에서 무엇을 보여주던 절대로, 절대로 현혹되어서는……!’
하지만 정작 성황을 쏙 빼어 닮은 회색 눈을 코앞에서 마주하자, 지금까지의 굳은 결심이 무색하리만치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되기 시작한다.
“앞으로 더는 내게서 자비를 구하지 마라. 알아듣겠나?”
묘하게 무기질적으로 보이는 은회색의 반사광.
사람의 마음은 물론 무의식까지도 속속들이 파고들며, 종국에는 그의 영혼마저 옴짝달싹 못 하게 속박하는 힘을 가진 눈동자.
그런 무서운 시선이, 베니투스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경고하고 있었다.
“명심해라. 이제 두 번은 없다, 베니투스 추기경.”
* * *
“으악! 이런 젠장!”
노인의 주책없는 비명 소리에, 안 그래도 좁은 동굴이 시끄러운 메아리로 쩌렁쩌렁 울려왔다.
로메인은 손 인형을 꿰매던 손을 멈추고는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부디 진정하십시오, 파종이시여. 모든 질병의 군주시여.”
그러자 늙은 사제가 그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뭘 모르면 잠자코 있어라, 인형아!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느냐?”
바서스트령에 갑자기 파종의 권속이 풀려나는 사고가 생긴 이후, 그들은 접선 장소로 쓰던 오두막을 잃은 채 이 초라한 동굴로 급히 몸을 피해야 했다.
한데 정작 문제는 그 이후였다.
사건의 여파로 황도 근교의 이상을 눈치챈 델크로스의 수호자가, 성기사들을 시켜 주변을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파종은 숨겨놓았던 권속의 씨앗 대부분을 잃어야 했다.
‘아니,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저들이 알아서 씨앗을 황도 내부로 옮겨다 줬으니까.’
한데 그런 낙관도 잠시, 이제는 그 씨앗들까지 모조리 이유 없이 파괴되고 있는 게 아닌가!
“인간들이 대체 어떻게 그걸 부술 수 있는 거지? 분명 규상세계의 법칙을 빌려온 물건인데?”
그러자 잠자코 듣고 있던 양갈래 머리의 소녀, 탐욕이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어차피 이 세계의 실체를 입은 물건들 아닌가? 하면 영향을 받는 주된 법칙이 무엇이든 간에, 종국에는 파괴할 방법을 찾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텐데.”
“하지만 적어도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들었단 말이다! 그러니 내가 그렇게 비싼 값을 주고서 구입한 거지!”
탐욕의 지적에, 파종이 울화통을 터뜨렸다.
“애열이 내게 그것들을 팔 때만 해도,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고! 기존의 권속들을 낭비하지 않고, 즉석에서 쓸 만한 전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이었으니까!”
게다가 표면적으로 규상세계의 형질을 가지고 있기에, 성직자들도 쉬이 간파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것들을 근교 곳곳에 파묻어 두고, 언젠가 한꺼번에 소환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건만!
“파종이시여. 그 씨앗들이 정말 규상세계의 물건이 확실합니까?”
“그래. 애열이 직접 뽑아내는 것을 보았다.”
“그렇군요.”
로메인은 이 일이 시사하는 의미를 깨닫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델크로스의 수호자가 벌인 짓인가? 워낙 능력의 한계를 가늠하기 어려운 작자이니, 어쩌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무리 그라 할지라도, 규상세계의 코드까지 직접적으로 조종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쩌면 로메인이 예상한 것보다, 코드를 짜는 자신의 능력이 델크로스에 그리 큰 위협이 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한데 파종이시여. 만일 저들이 씨앗에 간섭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혹여 당신의 권속을 저쪽에서 멋대로 소환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헉! 뭐어어?!”
파종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지금까지는 가능성조차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찬찬히 따져보니 어째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닐 성싶다.
“이런 젠장! 그냥 다 버려야겠어!”
결국 파종은 피눈물을 흘리며, 황급히 씨앗들과의 연결을 모두 끊어버려야 했다.
균열의 증폭과 함께 깨어난 불완전한 권속이 그의 마기를 엄청나게 소모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한데 자칫 잘못해서 저것들마저 그런 식으로 깨어나 버리면, 이번에야 말로 파종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마기를 잃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권속들을 아껴 여력을 보존하기는커녕, 그 권속에게 밀려 ‘세대교체’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크흐흐흑! 아까워 죽겠네! 이거 환불, 안 되겠지?”
“…….”
잠시 동굴 안에서 썰렁한 정적이 흘렀다. 고위 마왕의 체통은 온데간데없이 눈물 콧물을 찔찔 흘리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란, 참으로 꼴사납기 그지없었으니까.
“어흑! 이럴 순 없어! 이럴 수 없다고! 내가 그것들을 어떻게 구입했는데!”
결국 보다 못한 탐욕이 짜증을 냈다.
“작작 좀 해라, 파종. 애초에 네놈이 계획 없이 마구잡이로 그 씨앗이란 걸 뿌린 게 문제 아닌가?”
“그야 씨앗은, 기회가 될 때마다 무조건 많이 뿌려두는 것이 이득이니까!”
“하, 이리도 어리석을 데가!”
작은 소녀는 진저리를 치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와 누구를 탓할 텐가? 본연의 힘을 기르지 않고, 그런 모호하고 불확실한 물건에 의지하려 든 대가일 뿐이다.”
그녀가 총총걸음으로 동굴 입구로 발을 옮기자, 로메인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탐욕이시여? 기아의 군주시여. 아직 대책 회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어디로 가시는…….”
“한심해서 더는 어울려 주질 못하겠구나. 잠시 휴식을 취할 예정이니, 그동안 네놈들은 머리나 식히고 있거라.”
소녀의 길게 늘어진 양 갈래 머리가 마치 인사라도 건네듯 살랑살랑 흔들린다.
그것을 끝으로, 탐욕의 작은 형체는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앗! 기아의 군주시여……!”
“걱정 마라, 인형아. 탐욕은 곧 돌아올 거다. 아마 그리 멀리 가지는 않을걸? 저 녀석이 향하는 곳이야 빤하지.”
팽, 하고 코를 풀어낸 파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바로 탐욕에 젖은 인간들이 가장 많이 몰려드는 장소이자, 기아의 군주가 종종 허기를 채우는 상업의 나라 아니겠나.”
그 설명에 로메인은 자연히 서남쪽에 위치한 작은 나라의 이름을 떠올렸다.
“…아세인 공국.”
“그래. 이러니저러니 핑계를 늘어놓긴 했지만, 저 녀석은 어디까지나 불똥이 튈까 두려워서 자기가 가장 편하다고 느끼는 장소로 잠시 몸을 피신한 것에 불과해.”
델크로스의 수호자가 규상세계의 법칙마저 좌지우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면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파종이 분실한 ‘씨앗’을 가지고 자신들의 행적을 역추적할 수도 있지 않은가.
최악의 경우 일전의 악마종 소환이 빚어낸 인과를 빌어, 자신들을 향해 검을 겨누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를 일.
그러니 현재의 어수선한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모든 일의 원흉인 파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려는 거다.
“그래도 그간 함께 부대낀 정이 있는데, 이런 얍삽한 녀석 같으니!”
하지만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정작 그들이 경계하는 델크로스의 수호자는 현재, 조금은 복잡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 * *
차르륵-
양팔에 감겨오는 네 개의 사슬을 확인한 네이트가 고개를 들었다.
[어르신, 이건 무슨 의미입니까?]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쌓이고 쌓인 침입자들을 단번에 물리치느라 불철주야 뛰어다닌 것도 잠시.
현재 네이트는, 모든 정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곧바로 틈새에 있는 [6인 회의]에 소환되어 있었다.
Chapter 94: Chapter 394
Chapter Text
394. 담판 (4)
네이트는 숨 쉴 틈도 없이 참연어를 휘둘렀다. 오죽했으면 강한 신성력에 의해 실시간으로 회복되고 있는 팔에서, 통증이 일다 못해 감각이 무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까.
잠시도 휴식을 취하지 못한 정신에 급격히 피로감이 쌓이는 것도 문제였다.
그럼에도 침입자들은 줄기차게 밀려들었다.
비틀린 차원의 경계를 끼워 맞춰 열고 다시 닫기를 벌써 수천 번. 그 와중에 네이트가 무수한 [GAME OVER]를 만들고, 또 어느 게임 회사가 소비자들의 격렬한 항의로 몸살을 앓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리라.
그렇게 몇날 며칠을 쉬지 않고 움직여, 마침내 차원의 침략자들을 ‘거의’ 해치웠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네이트는 자신의 영혼을 끌어당기는 강한 힘을 느꼈다.
‘이건……?’
올 것이 왔나.
이내 사태를 파악한 네이트는, 굳이 저항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그 인력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곧 그의 영혼은 자욱한 안개에 감싸여 어디론가 끌려갔다.
깜박.
잠시 후 회복된 시야에 펼쳐진 광경은, 이미 네이트에게는 익숙한 거대한 회랑. 그리고-
차르륵…….
그의 온몸을 휘감은 채 사방에서 움직임을 옥죄는 금빛의 사슬이었다.
[…….]
사슬의 수는 총 네 개.
현재 부재중인 라이칸스로프 로드를 제외하면, 남아 있는 모든 경계의 종족 대표들이 열쇠를 발동했다는 뜻이었다.
구속에 무리하게 저항하는 대신, 네이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현재 거대한 회랑 정중앙에 서 있었다. 그리고 사위를 빙 둘러싼 [6인 회의]의 회원들이, 각자 높낮이가 다른 단상에 올라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하하, 조금은 놀랐나?]
가까이에 있던 미트라가 마치 인사라도 건네듯 커다란 술병을 치켜든다.
늘 술에 취해 있는 이 드라코니언의 비늘은, 최근 못 본 사이에 마치 부식된 청동처럼 푸석한 푸른빛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입장도 좀 이해해 주게, 네이트. 이러지 않고서는 통 자네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서 말이네.]
그의 뒤를 이어 거대한 가오리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른다.
[캬?!]
작은 산호와 따개비로 뒤덮여가는 그 둔중한 몸체는, 살아 있는 생물의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해저의 땅 한 자락을 지상으로 퍼 올린 듯 보였다.
정수를 잃고 이지를 완전히 상실한 이 불쌍한 종족 대표는, 불안한 듯 이빨로 [열쇠]를 갈아내며 의미 모를 소음을 만들어 냈다.
[꺄르뱌ㄴㄹㄹ라락! 빠각! #%깍!]
머리에 폭풍을 인 거인족 여인 역시 네이트를 비난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감히 처우에 대해 불평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오. 이 모든 것이 그대의 자업자득이니!]
여인의 감정 상태를 반영하듯, 바람 한 점 없는 회랑에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허공에 요동치고 있었다.
필시 무지개처럼 곱게 빛났을 옷자락 역시, 그녀 스스로가 일으킨 폭우로 흥건히 젖어 이미 광택을 잃은 지 오래.
아마도 네이트가 태만을 부리던 최근 한 달간, 마음고생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언젠가 그대가 이런 짓을 벌일 줄 알았소! 수호자의 의무를 방기하고 차원을 내팽개치더니, 종국에는 인간의 생사에까지 관여하며 인과를 크게 어지럽혔지! 대체 이 모든 업들을 어찌 수습하려 그러는 게요!]
거기에는 또 낯선 얼굴도 하나 보였다.
나무 종족 특유의 길쭉한 신체를 가진 회원 하나가, 네이트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건넨다.
이제는 메아리 같은 사념만을 반복해서 내뱉는 늙은 고목을 대신해, 새로 종족 대표의 자리를 물려받은 젊은 나무였다.
[이런 식으로 당신을 처음 만나게 되어 대단히 유감입니다, 델크로스의 수호자여.]
그는 일견 기품이 넘치는 자로 보였다.
그의 정수리로부터 우아하게 뻗어 나온 가지들은 사슴의 관처럼 위풍당당하고, 마른 풀로 곱게 엮어낸 망토는 마치 사금을 녹여낸 듯 은은한 광택을 흘렸다.
[공교롭게도 이런 모양새가 되었습니다만, 우리의 취지는 어디까지나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그렇게 종족 대표들의 면면을 한 차례 훑어본 네이트는, 마지막으로 정면에 서 있는 노인, 그러니까 6인 회의의 대표 격인 고룡을 돌아보았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이 상황에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은 [6인 회의]의 회원들뿐으로, 정작 그들의 죄수가 된 네이트의 태도는 태평하기 짝이 없었으니.
[어르신, 이건 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네이트.]
[경계의 종족 모두가 저와 척을 지기로 합의하신 겁니까? 하면 이제부터는, 여러분께서 직접 델크로스 차원을 수호하기로 결심하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움찔 몸을 떨더니, 그답지 않게 버럭 화를 냈다.
[아, 작작 좀 하게! 이게 다 자네 때문이 아닌가! 그러게 왜 그간 외부의 침략도 내버려 두고, 호출에 응답조차 하지 않은 채 황궁에만 틀어박혀 있었던 겐가?]
[…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웃기는 소리 말게! 그런 게 있었으면, 적어도 차원을 경계하는 우리 회원들에게만은 제대로 설명을 해 줬어야 할 게 아닌가!]
[…….]
[대체 우리더러 어쩌란 말인가? 무슨 수를 써 봐도 도통 답이 없으니, 어떻게든 자네 목소리를 들으려면 이렇게 강제로 긴급 소환권을 발동하는 수밖에!]
[6인 회의]의 반응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차원의 유일한 수호자가 소통을 닫은 채 침묵하는 사이, 수백, 수천의 군세가 일제히 델크로스 차원을 향해 몰아쳤으니까.
놈들은 네이트가 만들어낸 틈새의 뒤틀림에 휘말려, 각기 다른 속도로 델크로스를 향해 맹렬히 돌진해 왔다.
그렇게 차원의 경계 너머에서 천천히 달려오는 멸망을 마주해야 했던 종족 대표들로서는, 지난 한 달의 시간이 마치 수백 년의 악몽과도 같았으리라.
[거기다 얼마 전 키프로스에서는 또 무슨 짓을 한 건가? 왜 한동안 가만히 잘 있다가, 뜬금없이 인간들의 생사 여부에 끼어드는 엄청난 사고를 치느냔 말일세!]
[…딱히 누군가의 생사에 관여한 것은 아닙니다.]
네이트는 드물게도 자신 없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그것은 일부 사실이었다. 그는 그저 평의회가 준비한 인화성 연료에, 약간의 온도와 압력 변화를 가해 극히 일부를 기화시켰을 뿐이니까.
어차피 아들의 의지에 따라 일어났을 화재다. 하면 기화된 연료가 작은 폭발을 추가로 일으킨 것 정도야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보게, 네이트. 대체 요즘 왜 이러나? 자네가 말이 안 통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말일세!]
그간 쌓인 게 많은 듯, 말을 하면 할수록 노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다.
[지난 ‘협정’ 이후로 한동안은 잘 해왔지 않나? 그런 자네가 갑자기 이러는 데에는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야.]
[…….]
[자, 아직 늦지 않았네. 제발 부탁이니 우리에게 제대로 설명을 좀 해 보게나! 대체 그간 자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네이트가 더는 대답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자, 그의 희박한 표정을 귀신처럼 알아챈 노인이 한탄을 했다.
[아아, 그래! 자네가 이렇게 나올 일은 단 하나뿐이지. 분명 ‘그것’에 관계된 일이었겠군!]
네이트를 바라보는 길쭉한 노인의 홍채가, 더는 작아질 수 없을 정도로 바짝 조여든다.
[또다시 ‘그것’을 위해, 하등 쓸데없는 일에 애꿎은 인과를 낭비해버린 게야!]
[…….]
[그러니 우리가 알게 되면 방해가 되리라 여겨, 아예 소통 자체를 거부한 거군! 그러곤 침략자들이 지척에 닿을 때까지 방치함으로써, 자네를 이곳에 강제 소환하지도 못하도록 만들었지!]
흠.
이에 대해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던 네이트는, 시선을 내려 몸에 휘감겨 있는 사슬 하나를 슬쩍 끌어당겨 보았다.
그러자 회색 공간의 경계 너머, 저 보이지 않는 어딘가로 길게 이어진 금빛 사슬이 무겁게 바닥을 긁으며 그의 움직임에 따라온다.
차르르르…….
[이보게, 네이트!]
사슬은 보기보다 견고했다. 아마도 이들이 열쇠를 이용해, 종족 결계의 힘을 일부 차용한 모양.
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부수지 못할 것도 없지.’
만일 저지른다면, 지금부터 종족 대표들과는 완전히 반목하게 될 것이다.
[네이트! 자네, 듣고 있나?]
또 사슬과 연결된 결계가 망가짐으로써, 덩달아 차원의 경계가 대폭 약해지리라는 사실도 조금 뼈아픈 일이겠지.
[네이트!]
[더는 애쓰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어르신.]
둘의 대화에 도통 진전이 없자, 폭풍의 여인이 그들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거인족 여인의 부리부리한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니, 이에 동조하듯 머리에 인 폭우에서 작은 번개가 튀어 올랐다.
[내 저치가 언젠가 이런 사달을 낼 줄 알았습니다. 자신의 의무는 항상 뒷전이고, 지극히 사사로운 목적에만 사로잡혀 매번 일을 그르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그에게 확실한 답변을 받아야 마음이 놓이겠습니다!]
이런, 저 여인에게 회의의 주도권이 넘어가버리면 이 자리가 점점 피곤해질 게 빤했다. 네이트는 그녀를 향해 성의 없이 항변했다.
[과한 참견입니다, 폭우. 약간의 사정으로 늦어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침략자들은 모두 처리되었고 차원도 멀쩡하지 않습니까.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뭐라고?]
[이제 모든 일이 원만히 끝났으니 이만 절 보내주십시오. 지금 당장 우리 아이들을 보러 가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는 못 하겠네!]
이번에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어르신이었다.
[모든 일이 원만하게 끝났다? 결과가 괜찮으니 이제는 문제없다? 네이트, 제발 웃기지 좀 말게!]
노인은 분노와 걱정이 한껏 뒤섞인 눈으로 네이트를 쏘아보았다.
[우리가 어디 우리 좋으라고 이렇게 잔소리를 하는 줄 아는가? 제발 자네의 한계를 걱정하란 말일세! 네이트, 자넨 어디까지나 인간에 불과해!]
몰려드는 수백, 수천의 차원들을 동시에 왜곡시키는 것.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시간의 간극을 쉽게 눈치채지 못하도록 섬세하게 틈새 내부를 맴돌게 만드는 것.
그 엄청난 정신적 작업은, 설령 종족 정수의 이상이라 불리는 오라클이라 할지라도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무리한 짓을 네이트는 근 한 달이 넘도록 홀로 지탱해온 것이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자네를 걱정했는지 알기는 하나?]
자신이 임명한 수호자가 끝끝내 미쳐버리는 것은 아닐지. 정신과 감정의 균형을 잃은 채 그 손에 쥔 재앙의 힘마저 놓아버리는 것은 아닐지.
델크로스 차원은 물론이거니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의 손으로 말살하고, 종국에는 자신의 영혼조차 완전히 파멸시키고 마는 것은 아닐지…….
[자네가 곧 델크로스나 마찬가지야. 자네가 없는 이 차원은 더는 존속할 방법이 없단 말일세! 한데 왜 자네만 그걸 모르나?]
[…….]
[왜 인과를 보존하려 노력하지 않나! 왜 언제든 모든 걸 미련 없이 버릴 준비를 하는 이처럼, 그렇게 뒤가 없는 사람처럼 멋대로 구느냔 말일세!]
네이트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어차피 길게 대화를 나눠봤자, 노인과 그의 의견 차는 좁혀지지 않고 영원히 평행선을 그리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네이트에게 있어서, 이 차원의 존속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
[이미 틀렸습니다, 어르신.]
그때, 미트라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유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기 저 친구 표정을 좀 보십시오. 전혀 우리말을 들을 생각이 없습니다. 수틀리면 결계 하나 정도는 시험 삼아 부숴 버려도 별 지장은 없지 않을까, 이따위 궁리나 하고 있는 얼굴이라고요!]
킬킬킬!
술 취한 드라코니안의 자조적인 웃음이 무거운 회랑의 공기를 뒤흔든다.
그때, 격앙되는 분위기를 보다 못한 젊은 나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자자, 모두 진정들 하십시오. 지금 분위기가 너무 과열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직은 이번 소집의 내막을 자세히 알지 못하여 감히 여쭙습니다만…….]
[하타수 티티.]
[조금 대처가 늦긴 했지만, 어쨌거나 우리의 수호자는 자신의 본분을 훌륭히 마쳤다고 봅니다. 이제 이쯤하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우리에게 저분 외에 다른 대책은 없지 않습니까?]
[자세한 내막을 제대로 모른다면, 적어도 분위기를 파악하려는 노력이라도 하시오, 어린 나무여!]
폭풍의 여인이 나무를 향해 버럭 화를 냈다.
이제 막 중책을 짊어진 애송이 따위, 연륜 지긋한 그녀가 딱히 존중을 보일 필요 없는 종족 대표 아닌가.
[잘 들으시오. 지금 저 오만한 자가, 오라클이라는 허명에 기대어 멋대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며 차원 전체의 안위를 위협하고 있는 거요!]
[하하.]
그때 네이트가 처음으로 나직한 웃음을 터뜨리며 걸음을 옮겼다.
차르륵-
그가 움직임에 따라, 길게 늘어진 사슬들이 마치 법복을 치장하는 장식이라도 된 듯 우아하게 흔들린다.
[감히 오라클이 아닌 자가, 함부로 오라클의 한계를 재단하고 질책하다니.]
[뭣이?]
울컥한 거인족 여인이 막 네이트를 향해 버럭 화를 내려 할 때였다.
[잠깐만, 이게……!]
갑자기 뭔가 이상을 감지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허공을 응시한다.
그러다가 잠시 후-
[이게 뭔가! 어떻게 된 일이야? 저들이 왜 우리 영역으로……!]
비명을 지르듯 네이트를 향해 절규한다.
곧이어 하나둘, [6인 회의]의 회원들도 사태를 깨닫고는 크게 당황한다.
거인족들이 모여 있는 커다란 섬.
그 폭우가 잘 날이 없는 하늘 위로, 새로이 검은 소용돌이가 생겨나 있었다.
게이트였다.
[……?]
[다른 차원의 마왕? 대체 저 많은 군세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그러다가 그들은 자연스럽게 사태의 원인을 깨달았다.
지난 한 달간 시간축이 잔뜩 비틀리고 꼬여버렸던 침략자들의 차원.
그것들 중 하나가, 뒤늦게 시간의 흐름을 되찾아 델크로스를 향해 빠르게 밀려들고 있는 것이다.
[다 끝난 게 아니었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네이트!]
고룡이 다급히 네이트를 향해 물었다.
[아, 이런.]
하지만 모든 회원의 질책 섞인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네이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내 계산이 조금 어긋난 모양입니다.]
[…뭐라고?]
[방금 당신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폭우. 나는 어디까지나 인간. 당신이 우려하던 대로, 오라클의 능력을 맹신하다 못해 끝내 이런 실수를 벌이고 말았군요.]
[……!]
그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것이 개소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Chapter 95: Chapter 395
Chapter Text
395. 담판 (5)
검은 먹구름이 몰려든다.
수천수만의 군집 마물들이 떼거리로 뭉쳐 이루어진 재해의 전조가, 폭풍우 치는 섬의 하늘 위를 새까맣게 뒤덮어가기 시작했다.
[아아…….]
[6인 회의]는 망연자실하여 그 광경을 올려다보았다. 결계에 연결된 [열쇠]가 여과 없이 중계해 주는, 그 무서우리만치 생생한 침입의 현장을.
까드득. 꾸득. 꾸득.
갑각으로 둘러싸인 긴 체절을 꿈틀거리며 유영하는 마물들의 모습은, 일견 갯지렁이나 지네의 형상을 닮아 있었다. 단지 그 크기가 놈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다는 것이 차이점일까.
그 선두에, 놈들을 이끄는 하위 마왕의 모습이 보인다.
뚜렷한 잎맥을 갖춘 세 쌍의 날개를 제외하면 동족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 아마도 개체가 가진 격은 그리 높지 않지만, 군집 마물이 공유하는 특유의 집단의식을 이용해 마왕의 자격을 얻은 모양이었다.
까득, 까드드득.
이미 자신들의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갉아먹은 마물들은, 풍요로운 먹이가 가득한 새 차원으로의 길이 열리자 미친 듯이 달려드는 중이었다.
그렇게, 차원과 차원이 전속력으로 충돌한다.
쩌-엉!
그리고 이내, 허공에 떠 있는 투명한 막에 부딪쳐 잠시 제지된다. 델크로스 차원을 지키는 다섯 개의 종족 결계 중 하나였다.
[…흡!]
거인족의 여인이 안도인지 비명인지 모를 신음을 토해내자, 네이트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게이트가 결계 밖에서 열린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오늘은 운이 좋았군요.]
[……!]
폭풍의 여인은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로 네이트를 노려보았다.
게이트가 열리는 시간은 물론이거니와 그 위치까지, 모든 것이 그의 철저한 계산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저 결계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습니까?]
과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마치 네이트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쿠웅! 쿵!
밀려드는 마물들이 계속해서 투명한 막을 거세게 두드리기 시작한다.
차원 전체가 충격을 받아 흔들리자, [6인 회의]가 모인 회랑 또한 그 여파로 진동을 시작했다.
쿠르르르…….
[…….]
새로운 수호자를 임명한 이래, 이렇게 직접적으로 결계가 공격받는 것은 처음 있는 일. 그 초유의 사태에 모두가 넋을 잃은 채 네이트와 여인을 번갈아 바라본다.
바로 그때였다.
차르르륵!
갑자기 네이트를 옥죄고 있던 사슬 하나가 맹렬한 속도로 어디론가 끌려가기 시작했다. 연동된 결계가 극도로 불안정해진 까닭이었다.
채앵-!
팽팽하게 당겨지는 힘에 잠시 비틀거린 네이트는, 곧 한 손으로 사슬을 용케 지탱하며 폭풍의 여인을 돌아보았다.
[어쩌시겠습니까? 폭우. 여기서 내가 조금만 힘을 줘도, 이 사슬은 당장 끊어질 것 같습니다만.]
사슬이 이대로 망가지면 종족 결계 또한 큰 타격을 받는다. 그러면 온전치 못한 결계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침입자들에 의해 부서져 버리겠지.
저 무시무시한 먹구름들이, 순식간에 거인족들의 은신처 위로 쏟아지게 되는 것이다.
[비열한 짓거리를…….]
으득!
거인족 여인이 이를 갈며 네이트를 노려본다. 그녀의 감정 상태를 반영하듯, 마구잡이로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연신 사나운 뇌우가 울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선택할 길은 단 한 가지뿐인 것을.
[…이번만큼은 어쩔 수가 없구려.]
파스스…….
여인이 체념한 듯 열쇠를 조작하자, 팽팽하게 당겨지던 사슬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사라진다. 결계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나 똑똑히 기억해 두시구려! 그대가 수호자의 본분을 망각하고서 우리 동족의 안위를 겁박한 일을, 나는 죽는 날까지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마지막으로 네이트에게 험악하게 쏘아붙인 여인은, 몸을 돌려 공기 중에 녹아들 듯 사그라진다. 자신의 동족들을 지키기 위해 섬으로 이동한 것이다.
[…….]
남아 있던 이들 사이에 잠시간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는다.
[…이제 어찌할 텐가, 네이트?]
침묵을 깬 고룡이 한숨을 쉬며 묻자, 네이트가 의아한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답했다.
[그걸 왜 내게 묻습니까? 한창 차원 수비에 바쁘던 사람을, 굳이 열쇠의 힘까지 써 가며 이곳으로 소환한 건 바로 당신들인데.]
[자네가 아무 대책도 없이 저런 사고를 치지는 않았으리라 보네. 분명 이제라도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있겠지?]
[무리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네이트의 말간 회색 눈동자가, 답지 않게 유순한 빛을 띠며 고룡을 마주 보았다.
[‘협정’에 의거하여, 제 육신은 황궁 밖을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현장으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만.]
[하지만 자네의 영혼은…….]
[영혼의 힘을 행사하기에는 인과가 매우 부족하군요. 아시다시피 이적에는 언제나 그에 합당한 인과가 요구되지 않습니까?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어르신의 충고에 따라 인과를 좀 아껴볼까 합니다만.]
정중하기 이를 데 없는 빈정거림에, 결국 고룡의 이마에 빠직 핏대가 솟았다.
[아, 이보게, 네이트! 작작 좀 하게!]
바로 그때였다.
파삭! 스르륵-
또다시 네이트의 팔을 휘감고 있던 사슬 하나가 사라진다. 이에 고룡이 기겁을 하며 구속을 해제한 장본인을 바라보았다.
[…미트라!?]
[하하. 네이트, 자네가 원하는 건 바로 이것이겠지? 부탁이니 불쌍한 폭우를 위해 저것들을 좀 막아주지 않겠나?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협정 당시에 제한했던 인과의 일부도 풀어주겠네.]
[아니, 잠깐만! 미트라, 상의도 없이 대체 이게 무슨 짓……!]
그러자 불콰한 상태의 드라코니언이, 고룡을 바라보며 두 겹으로 겹쳐 난 눈두덩이의 비늘을 긁적거렸다.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르신. 지금으로선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
[어르신도 아시다시피, 제게 있어서 종족 결계나 델크로스 차원의 안위는 이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지켜야 할 이도, 종족의 영토도 더는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이오니아가 재앙에 휘말렸던 날, 모든 동족을 잃은 마지막 종족 대표가 깊어진 시선으로 전대 수호자를 응시했다. 투명한 순막에 감싸인 그의 눈에서는, 마냥 취기라고 치부할 수 없는 빛바랜 슬픔이 울렁거린다.
[하지만 어르신. 적어도 저 친구와의 필요 없는 알력 다툼을 위해, 이오니아의 마지막 유산인 결계들이 의미 없이 부서져 버리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습니다.]
[…….]
한데 돌발 행동을 한 것은 미트라가 끝이 아니었다.
파삭-!
작은 소음과 함께, 연이어 사슬 하나가 사라진다. 새로 종족 대표가 된 어린나무가 서툴게나마 열쇠를 조작한 것이다.
[…하타수 티티?!]
[다른 방법이 없다는 미트라 님의 말씀이, 제게는 제법 합리적으로 들립니다만.]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 말일세! 혼자서 무턱대고 협정으로 제한한 인과까지 풀어버리면 어찌하는가?]
[어차피 이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저분의 인과 일부를 풀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건……!]
그들이 아웅다웅하는 사이, 꽤 몸이 가벼워진 네이트는 하나 남은 사슬을 몸에 감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혼란한 사태에서 벗어나, 홀로 열쇠 갉아먹기에만 열중하고 있는 거대한 가오리를 향해.
차르르르…….
[로드 만타. 당신은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러자 빠득빠득 이빨을 맞부딪치던 가오리가, 거짓말처럼 하던 행동을 멈추고는 멀뚱히 네이트를 내려다본다.
[…그ㄹ쥘;뷰??]
[크게 고민할 문제는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6인 회의’의 중론은 이렇게 모여 가는 듯합니다만.]
[스비ㅜ쟈댈$락ㅂ티!]
[네, 물론입니다.]
그 황당한 광경에, 미트라와 하타수 티티가 눈짓을 주고받는다.
‘외람되지만, 미트라 님. 저분이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태였습니까?’
‘그러게 말이야. 정말 대화 비슷한 것이 되는군. 나도 방금 알았네만.’
그들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네이트와 만타 사이에서 뭔가 의미 있는 대화가 오가긴 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사슬까지 힘없이 사라져 버렸으니까.
파스스스…….
[협조 감사합니다.]
[로드 만타!]
고룡의 비명과 같은 외침에, 가오리 역시 지지 않고 빼액 소리를 친다.
[캬까히;야?ㄷ저ㄹ이%니뱝!]
[이게 무슨 짓이오! 입이 있으면 어디 설명을 해 보시오!]
[샤뿌?마제#?끄부르캭!]
[아니! 그러니까 좀 알아듣게 말을 하라고!]
그 혼란의 와중, 오랜만에 홀가분한 몸이 된 네이트가 느긋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6인 회의’의 의견 잘 받았습니다. 오늘의 이 결정을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 * *
쿠르르르르…….
검은 게이트와 함께 마물의 군세가 통째로 전이되어 간다.
커다란 공간의 비틀림이, 더욱 광대한 비틀림 속으로 힘없이 밀려 들어가는 기적과도 같은 광경!
마침내 네이트가 차원의 입구와 함께 [틈새]로 사라지자, 몰려오던 먹구름이 흩어지며 일그러졌던 하늘도 반듯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정말 대단하군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젊은 나무가, 나직한 목소리로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는다.
다른 회원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비단 델크로스의 수호자가 자신의 힘을 마음껏 행사하는 광경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건만, 그럼에도 그 경이적인 광경은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것이 오랜 시간 종족들을 영도해 오며, 이오니아의 멸망이라는 최악의 사태까지 넘긴 종족 대표들일지라도.
[하하하! 멋진 광경이군요!]
미트라가 허공을 향해 술병을 높이 치켜든다. 모두의 앞에서 나름의 경의를 표하는 드라코니언의 방식이었다.
물론 그에 동조해 줄 일족들은, 더는 그의 곁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어쩐지 강제 소환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응한다 싶었습니다.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인과를 강탈해 갈 작정이었겠죠. 은근히 영악한 친굽니다.]
반면 그들과 달리, 고룡은 조금 복잡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타수 티티.]
[네, 어르신.]
[자네와 알고 지낸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 하지만 방금 그 행동은 전혀 자네답지 않았네. 늘 원리원칙에 충실하던 평소와 달리, 아까는 다분히 충동적이었다고 느껴지네만.]
그러자 젊은 나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지적은 합당합니다. 위대한 고룡이시여. 잘 생각해 보니,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조금 이상하긴 점이 있긴 하군요.]
아닌 게 아니라, 하타수 티티는 델크로스의 수호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묘한 감정을 느끼는 중이었다.
약간의 익숙함, 혹은 설레는 반가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감정의 편린들이었지만, 어쨌거나 종합적으로 판단컨대 그것은 호감이라 뭉뚱그릴 수 있을 법했다.
그 이례적인 첫인상이, 이후의 판단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저 그를 보는 순간 대단히 믿음직스럽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저런 이가 하는 말이라면 순순히 따라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니까요. 마치 ‘매혹’에라도 걸린 기분이군요.]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머리에서 길게 뻗어 나온 나뭇가지들이 서로 부딪히며 단조로운 마찰음을 냈다.
[그런데 참 이상하군요. 어쩐지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묘한 기시감이…….]
* * *
찰랑찰랑.
가볍게 볼을 치는 잔물결을 느끼며, 네이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기분 탓일까. 기도실에 든 지는 아마도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터인데, 무척이나 오랜 시간 몸을 떠나 있다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페하!”
연못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 전보다 부쩍 초췌해 보이는 카트리나가 반갑게 달려왔다. 또 나중에 프란시스에게 잔뜩 잔소리를 듣게 생겼군.
“생각보다 오래 자리를 비우게 되었네, 카트리나. 그간 별일은 없었나? 아이들은?”
“예, 폐하. 그것이…….”`
그러자 충직한 기사단장이 떨떠름하게 시선을 피한다. 늘 절도 있는 모습을 보이는 그녀답지 않게 어딘가 미묘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네이트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그래. 그 아이가 그리하였나.”
주신의 사도라 자칭했다. 모든 고위성직자들이 모인 성회의 한가운데서, 당당하게 마기까지 뿜어내어 보이며.
“그 아이가 하는 일이니 이제는 놀랍지도 않군.”
하지만 충격에 무뎌진 것과는 별개로,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대체 이 엄청난 사고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가!
“조금 시기가 이르지만, 준비 단계에 있던 경전 동화들의 발행을 서두르게. 그리고 프란시스에게 일러, 아카데미 교과과정을…….”
빠르게 지시를 내리던 네이트는, 순간 급격하게 밀려드는 회의감에 천천히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Chapter 96: Chapter 396
Chapter Text
396. 피안 (1)
대부분의 원시 종교들이 그러했듯, 수천 년 넘게 이어져 온 주신 신앙에는 어딘가 초법적인 구석이 있었다.
일단 누가 수상하다 딴죽을 걸기만 해도, 별다른 증거 없이 멀쩡한 사람을 종교재판에 회부할 수 있다. 처벌의 수위에도 제한이 없으니, 정말 농담 한마디 잘못 했다가 인생 종 치는 경우도 부지기수인 것이다.
보다 못한 5대 성황이 성법을 정비하여, 경전에 근거한 죄목들과 그에 대한 적절한 처벌을 명시하긴 했다.
하지만 그러한 법조항들도 결국 발췌하여 갖다 붙이기 나름 아니던가.
-저자가 자신의 영지에서 영지민들과 사사로이 예배를 드렸소. 정교회의 허가 없이 멋대로 주신의 성소를 마련하다니, 그야말로 이단의 짓거리가 아니겠소?
이웃한 영주의 무고로 한 영지가 박살 나는 일이 생긴다. 고위 사제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쪽이, 식량과 병사를 소모하며 영지전을 일으키는 것보다 비용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해에, 이웃을 고발했던 영주는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한 가신에 의해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정확히 그가 고발한 것과 정반대의 이유 때문이었다.
-옛 성현들께서는 일찍이, 황량한 황무지에서조차 마음속 교회를 세워야 한다 말씀하셨지. 한데 저 무도한 자는 정교회의 허가를 핑계로, 성소에서 제대로 주신을 배알코자 하는 영지민들의 신앙심을 저버렸소!
한데 사태가 이쯤 되고 보니, 오히려 알 만한 자들끼리는 함부로 법 조항을 들이밀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초법적 권력 행사의 부작용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야야. 모든 게 말하기 나름이지.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우리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설마 이번 한 번 이겨 먹자고 이렇게까지 해야겠냐?
-황도의 ‘은총’ 안에 기거한다는 말은, 곧 우리가 인두겁을 쓴 악마가 아니라는 증거지. 서로 이쯤 해 두자. 만약 네가 선을 넘으면, 다른 이들이 그런 널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아?
이렇듯 황도 인사들 간에는 어느샌가 암묵적인 합의가 생겨나 있었다. 만인의 눈앞에서 악마 소환 같은 중죄를 공공연히 저지르지 않는 한, 적어도 자신들끼리는 함부로 무고하지 않는 것으로.
모레스 황자가 적나라한 ‘마기’를 드러낸 데다 제멋대로 주신의 사도라 자칭했음에도, 이들이 쉽게 황자를 구금?고문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며칠간 고뇌하던 웨스커 대주교는, 밤늦게 마이어 추기경의 집으로 쳐들어가 하소연을 했다.
그녀야말로, 과거 성황과 함께 악마 처단의 일선에 서 있던 자였다. 그러니 3황자가 내보인 마기에 다른 이들보다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3황자를 그냥 저대로 내버려 둔단 말입니까? 각하! 그것은 명백히 악마의 세력에 속한 기운이었습니다!”
마이어 추기경은 피곤한 눈으로 아끼는 후배를 바라보았다. 기실 며칠간 밤잠을 설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으니까.
“하면 어찌하고 싶은 건가, 웨스커?”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마기를 지닌 주신의 사도라니, 정말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 않습니까? 황자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제대로 조사를 해야 한단 말입니다!”
“어떻게? 지금이라도 성기사단을 이끌고, 본궁으로 쳐들어가 무력으로 그를 압송할 텐가? 폐하의 허락도 없이, 폐하께서 기거하시는 장소에서?”
“그건……!”
따지고 보면 반역이나 마찬가지. 아마도 그것이 영악한 3황자가 아직 본궁에 머물고 있는 이유겠지.
“진정하게, 웨스커. 내 심정도 마냥 편하지는 않으니.”
마이어 추기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저 이런저런 논란에 휩싸인 3황자가 당분간 자중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되도록 서로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스레 준비한 자리였건만, 오히려 황자 본인이 한발 더 나서서 그 논란에 불을 지펴 버리다니!
‘모레스 황자의 뜻은 명확하다. 겨우 확보해 놓은 입지를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게지.’
어느 정도 반발은 있으리라 예상했다.
한데 워낙 저돌적인 정면 돌파였던 터라, 오히려 그에 대응할 틈이 없었다. 성회의 모두가 마기에 압도되어 우왕좌왕하는 동안, 거하게 준비한 증명의 자리는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카프란 추기경의 얼굴이 참으로 가관이었지.’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그가 아끼는 후배들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는 점이다.
일단 웨스커 대주교는 전에 없던 경계의 눈초리를 보였다. 지금껏 모레스 황자의 사건 사고들을 그저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
반면 베니투스 추기경은 뭔가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진 듯, 이단재판부 내에 마련된 기도실에 칩거한 채 몇 날 며칠 기도만 드리는 중이었다.
수장의 태도가 이렇게 흐지부지하니, 휘하의 인퀴지터들도 감히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각하. 아무리 사소한 위험이라도, 그것의 존재를 깨닫는 즉시 배제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델크로스의 신민들을 위한 길입니다!”
“위험을 그냥 방치하자는 게 아닐세. 적어도 모레스 황자가 가진 [멸악]의 힘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그저 모든 게 명확해질 때까지 추이를 지켜보자는 거야.”
마이어 추기경은 잔뜩 열이 올라 있는 웨스커를 다독였다.
“어찌 보면 진실이 어떠하든, 자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실리에는 확실히 닿아 있지 않나? 모레스 황자님께서도 말씀하셨지. 자신에게 내려진 시련을 달게 받고, 이 땅에 주신의 왕국이 영원히 번영할 수 있도록 온 힘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던가?”
“…그 발언의 저의를 각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웨스커가 조금 힘 빠진 목소리로 항변했다.
당시 모레스 황자는 성회를 앞에 두고서, 델크로스를 위해 평생을 봉사하겠다는 기조의 발언을 했다.
하지만 그 속뜻을 생각하면,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곧 주신의 행사이니 감히 이를 멋대로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이다.
“참으로 당돌하더군요. 끝까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다니, 여간 보통내기가 아니었습니다.”
“자자, 그쯤 하게. 폐하께서 돌아오시기만 하면 모든 일이 깔끔하게 해결될 걸세. 그러니 더는 마음 쓰지 말고, 자네도 어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게나.”
그렇게 겨우 웨스커 대주교를 달래서 밖으로 내보낸 그는, 문득 복도 한편에 서 있는 낯익은 신형을 발견했다.
줄리아 마이어.
어린 나이에 황도 수비대의 부관을 꿰찬, 그가 늘 자랑스레 생각하는 어여쁜 손녀.
퇴근이 조금 늦었는지, 그녀는 아직까지도 말끔한 기사단 정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모두 들었느냐?”
그러자 손녀는 진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명확한 긍정의 의미였다.
“아직은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 그러니 괜한 억측은 삼가도록 해라.”
“네, 할아버님.”
줄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황도에 이미 모레스 황자님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성회에서 무엇이든 제대로 입장을 표명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쓸데없이 민심이 흔들릴까 우려됩니다.”
“…….”
마이어 추기경은 잠시 눈을 끔벅이며 손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답지 않은 걱정의 기색이 묻어난 탓이다.
‘행실이며 성품이며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아이지만, 인간관계만큼은 도통 깊이 유지되지 않아 늘 걱정했거늘…….’
의외로 약혼 이야기가 오가는 모레스 황자와는 제대로 친분을 쌓고 있었던 모양이다.
“얘야. 너는 그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느냐? 황자님을 둘러싼 그 소문들은, 어쩌면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추기경의 물음에, 줄리아는 의아한 듯 반문했다.
“이곳은 황도입니다, 할아버님. 어떠한 삿된 기운도 이 신성한 땅에 함부로 발을 들일 수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압니다.”
“…….”
추기경은 잠시 입을 다물고는 어두워진 눈으로 손녀를 응시했다.
“얘야, 줄리아.”
“예, 할아버님.”
“혹여 네 어머니로부터, 우리 가문의 시조에 대해 전해 들은 바가 있느냐?”
“시조… 말씀입니까?”
줄리아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마이어 가문의 현 가주인 어머니는 무척이나 바쁜 사람이었다. 줄리아가 젖먹이를 막 벗어난 시절에도, 잠시 느긋하게 대화할 시간조차 전무할 정도로.
하지만 그녀의 조부가 허튼 질문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가주님으로부터 따로 들은 바는 없습니다. 마이어 가의 시조께서 이번 일과 뭔가 관련이 있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추기경의 자줏빛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자신을 쏙 빼닮은 손녀의 눈가를 잠시 어루만졌다.
“이 할애비가 괜한 얘기를 했구나. 별일 아니니 그만 잊어버리렴.”
* * *
황궁 안의 공기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일견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 평온함은 마치 급류 위에 낀 살얼음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그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느끼고 있는 것은 성진이었다. 그래서 그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음에도, 서둘러 진주궁에 돌아가지 않고 본궁에서 두문불출했다.
“모레스. 내가 우연히 재미있는 일화들을 알게 되었단다. 곧 경전 동화로 발행될지도 모른다고 하니, 시간 있으면 나와 함께 그 이야기들을 읽어보지 않겠니?”
우연은 무슨.
경전을 들고 찾아온 아멜리아의 고운 눈가는 다크써클로 퀭해져 있었다.
아마 성회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뒤, 밤새워 경전을 뒤적이며 성 테르바키아의 일화들을 찾아낸 것이 분명해 보였다.
“감사합니다, 누님. 하지만 누님도 황후마마의 정무를 곁에서 돕느라 많이 바쁘시잖아요? 이건 나중에 제가 잘 읽어보겠습니다.”
죄책감으로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끼며, 성진은 그녀가 가져온 경전을 방 한편에 잘 갈무리했다.
워오오오오!
-주인아! 나랑 놀러 가자! 어서 나를 크고 강하고 귀엽게 만들어라!
때때로 방문 앞에 쳐들어온 막스가, 주둥이를 든 채 소리 높여 하울링을 하기도 했다.
절대 안 될 말이었다. 변화된 오러가 녀석에게 어떻게 작용할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만약 아무 탈 없이 변신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괜히 남들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살 뿐이지.
그냥 지금 상태를 유지하면, 만에 하나 성진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신수]로 인정받은 막스에게는 별 탈이 없겠지.
“안 돼, 막스. 자, 여기 에디스를 던져 줄 테니, 나무 접시랑 같이 얌전히 놀아. 알았지?”
“네? 저하! 네에?!”
어리둥절한 에디스가, 성진에게 떠밀려 늑대개와 함께 정원으로 쫓겨났다.
“아니! 이것들이 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여기서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해? 모두의 앞에서 제대로 [멸악]의 힘을 보였잖아. 그럼 된 거 아닌가? 다들 정신들이 어떻게 된 게 틀림없어!”
이따금 잔뜩 분개한 오웬이 찾아오기도 했다.
최근 특별히 하는 일 없이 황궁을 배회하다 보니, 사제나 사용인들이 주고받는 흉흉한 귓속말을 자주 접하는 모양이었다.
성진은 한심한 눈으로 이 미덥지 않은 첫째를 바라보았다.
“네 생각에는 남들이 바보라서, 그냥 아무런 근거 없이 그런 소리들을 하는 것 같아?”
이런 아무 생각 없는 호구 자식 같으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날 조금은 의심해야 하는 거 아냐? 네가 이러는 걸 남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냐.
황도에 별다른 입지가 없다면 분위기를 읽는 능력이라도 익히라고. 네가 어찌나 멍청하게 구는지, 반사적으로 딱밤이 날아가려는 걸 겨우 참았잖아!
“엉? 어엉?”
어쩐지 섬뜩한 예감을 느낀 오웬이. 반사적으로 이마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휘돌렸다.
“…….”
하지만 개중 성진을 가장 신경을 쓰게 만든 것은 바로 마사인 경의 반응이었다.
언제나처럼 펄펄 뛰며 성진에게 ‘마기’의 출처를 추궁할 것이라 여겼건만, 의외로 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의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마사인은 본궁의 2근위대와 긴밀하게 경호 스케줄을 조율하고, 틈틈이 시간을 내 진주궁의 상주기사들도 점검했다.
간혹 성진을 대신해 마물 전담반 일을 보고 올 때면, 대단히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해 와서 하나하나 읊어주기도 하고.
그러고도 시간이 나면, 성진의 옆에 앉아서 조용히 자수를 두었다.
폭, 사락.
폭, 사락.
안정적인 손놀림 아래서, 아름다운 꽃잎들이 하나둘 완성되어 간다.
그 광경은 일견 참으로 평화롭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도안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마사인 경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저기… 마사인 경?”
“예, 저하, 부디 하명하십시오.”
“…어, 아무것도 아냐.”
그렇게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
예전보다도 더욱 예민해진 성진의 기감에, 갑자기 공기 중 오러의 흐름이 일제히 뒤바뀌는 이변이 감지되었다.
누군가 도선에 강한 전류를 흘리기라도 한 듯, 자기장처럼 차분하게 정렬되는 일대의 공기.
성진은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버지!”
Chapter 97: Chapter 397
Chapter Text
397. 피안 (2)
성황은 기도실에서 나오자마자 빠른 속도로 밀린 업무들을 정리했다.
예고도 없이 이렇게나 오래 자리를 비운 건, 2년 전 있었던 이교도의 준동 이후 처음이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그가 오랜 시간 정교하게 조율해 놓은 톱니바퀴들이 탈선하는 일 없이 제대로 굴러갔다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기계장치의 중심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덕망 있고 유능한 황후의 존재였다.
“대단하군.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계를 하지도 못했는데, 거의 손댈 구석이 없이 완벽하게 국정을 돌봤구려. 타티아나.”
성황의 순수한 감탄에 타티아나 황후는 저도 모르게 치솟으려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렸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그녀는 전투적으로 업무에 집중함으로써 오히려 생기를 얻고, 여기서 파생되는 성과와 인정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물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마주한 두 사람의 머릿속은 완전히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황후에게 정무를 조금 더 맡겨보는 쪽이 좋을 것 같군.’
‘아슬아슬했어. 슬슬 한계다 싶었는데, 폐하께서 하루만 더 늦으셨으면 어쩔 뻔했담!’
타티아나 스스로가 돌이켜보기에도 놀라운 성과이긴 했다.
지금껏 그녀가 성황의 자리를 대신한 적은 많았지만, 이리도 오래, 그리고 성공적으로 모든 업무를 마무리한 적이 있었던가.
“아멜리아 황녀의 도움이 컸습니다. 곁에 있다가 필요한 일에 늘 적절한 도움을 주더군요. 보면 볼수록 참으로 훌륭한 행정 인재가 아닌가 하…….”
기분이 부드럽게 풀린 탓일까, 무심코 칭찬의 말을 내뱉던 타티아나는 흠칫 놀라며 말끝을 흐렸다.
지금까지는 성황 앞에서 다른 아이들을 교묘하게 돌려 까기에 바쁘던 그녀가 아닌가. 갑자기 안 하던 칭찬을 하려니, 어색함을 넘어 이제까지의 속내를 들킨 것만 같은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
타티아나가 반사적으로 성황의 눈치를 보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이렇다 할 감정 표현 없이 그저 그녀의 말을 경청할 뿐이다.
“적절하게 사람을 부리는 것 또한 황후의 인덕인 것이지.”
“…….”
타티아나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성황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감정이 희박한 듯하지만, 오랜 시간 그만을 바라봐 온 타티아나는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 담겨 있는 신뢰와 이해, 애정 그리고 약간의 애석함.
오래전, 타티아나가 어린 황자님을 두고서 꿈꾸었던 미래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마찬가지로 성황 또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미래를 바라보았겠지. 어쩌면 그 곁에는 타티아나의 모습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이리도 예상치 못한 형태로 재회했고, 불완전하게나마 서로를 끌어안기로 결심했다.
단지 타티아나가 조금도 예상치 못한 것은, 자신이 생각보다 지금의 상태를 평화롭고 따뜻하다고 느낀다는 점이었다.
“…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모두 아멜리아 황녀의 공인 것을요.”
타티아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성황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만일 그녀가 이 자리에서 황녀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더라도, 아마 그녀를 향한 성황의 눈빛이 크게 변하는 일은 없으리라.
그만큼 그들이 오랜 시간 쌓아 올린 관계란 것은, 비록 완벽한 모습은 아닐지언정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과 같았다.
성황이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고 보듬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기에, 타티아나는 때때로 이렇게 마음이 약해지곤 하는 것이다.
“아마 황녀가 없었다면 저는 절대로 지금처럼 국정을 끌어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소.”
“아닙니다. 한동안은 황녀가 제 마음이라도 읽고 있나 의심했을 정도랍니다. 어찌 그리도 사람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그대의 일이기에 가능했던 것이겠지.”
성황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지금의 아멜리아는 명실상부 신성제국의 가장 고귀한 장미.
하지만 처음 황궁에 발을 들였을 무렵의 그녀는, 그저 수줍음 많고 어설프기만 한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그러던 아이가 언제부터인가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그린 듯 권위가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이기 시작했지.
없는 시간을 쪼개어 되도록 많은 시간을 아이와 함께하려 애쓴 성황은 잘 알고 있었다. 아멜리아가 황후와 황비들을, 특히 고아한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보며 흉내 내려 노력했다는 사실을.
-타티아나 어마마마.
그 예절 바른 아이가 유일하게 친근함을 담아 부르는 호칭에는, 황후가 미처 깨닫지 못한 존경과 애정이 담겨 있는 것이다.
“…….”
“…….”
그리고 두 사람은 각자의 상념에 사로잡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큼큼”
“으흠! 어흠!”
기다리다 못한 추기경들이 밖에서 헛기침을 해대고, 마침내 루이스가 송구한 표정으로 집무실에 들어올 때까지.
이후로도 성황의 바쁜 일정은 이어졌다.
그는 아렌쟈를 비롯해, 대륙 각지로부터 전해지는 사념을 통해 많은 보고를 들어야 했다.
이어서 다섯 추기경들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성황의 집무실에 들고, 잠시 후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비틀거리며 돌아 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늦은 저녁 무렵이 되어, 마침내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다.
성회의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기 섞인 오러를 뽐낸다는, 그야말로 희대의 사고를 친 말썽쟁이 아들놈을 대면할 순간이.
“아버지.”
이제는 완전히 건강을 되찾은 아이가, 긴장한 표정으로 집무실 문가에 빼꼼 머리를 들이민다. 뭔가 엄청난 것을 각오한 듯, 어딘가 비장하기까지 한 표정.
성황은 생각했다.
‘그래, 내 어찌 이 아이의 기대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결심과 동시에 의념이 일어나고, 결과적으로 번개처럼 손이 움직였다.
따콩!
“꾸엑!”
* * *
‘사실 딱밤이란 것도, 그저 이 양반이 신성력을 쏟아내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건 아닐까?’
환한 빛의 폭포 속에서, 성진은 이마를 문지르며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만큼 성황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신성력을 쏟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딱밤의 통증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
하지만 성진은 섣불리 성황에게 그만하시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뭔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한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무거워 보였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내키는 만큼 힘을 쏟아냈는지, 성황은 자리에 앉으며 턱으로 슬쩍 맞은편의 소파를 가리켰다.
“앉거라.”
“넵.”
“설명.”
“넵!”
무엇을 설명하라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진은 이 사고의 발단부터 차근차근 털어놓기 시작했다.
원인은 잘 모르겠지만-아마도 마왕 놈이 뭔가를 했으리라 짐작되지만, 이 부분은 대충 무시하기로 했다-그의 오러와 게헤나의 불이 완전히 결합되며 아예 마기를 숨길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이를 빌미 삼아, 성회가 그를 시험한다는 명목으로 기사단의 자진 사퇴를 종용한 것.
기껏 공권력을 손에 넣었는데, 저들의 쓸데없는 견제에 괜히 손발이 묶이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그 시험의 자리를 또 다른 기회의 장으로 삼을 수는 없을까? 차라리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저들이 입을 대기도 까다로운 상대로 새로이 자리매김해보는 건 어떨까?”
물론 썩 고상하고 매끄러운 방식은 아니었기에, 성진은 딱밤 한 대 정도 더 얻어맞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차분히 듣고 있던 성황은, 예상외로 성진에게 가벼운 칭찬의 말을 던져왔다.
“그래. 잘했다. 외통수에 몰렸다 생각되는 상황에서야말로, 상대의 방심을 부르고 허를 찌르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게다.”
“그럼……!”
“하지만 아비로서 네 행동 방식이 조금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구나.”
뒤이어 말을 덧붙인 성황은,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성진과 시선을 맞추었다.
“이를 명심하거라, 모레스. 지금 당장은 네가 그들로부터 손쉽게 승리를 쟁취해 낸 듯 보일 것이다. 하나 세상만사가 그리 단순하게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란다.”
성황은 찬찬히 설명을 이어갔다.
어디까지나 정해진 규칙 내에서 이루어지기에, 그것이 온전한 게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데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다 하여 아예 규칙을 무시하고서 판을 뒤집어 버린다면, 정작 나중에 그 판이 필요해지는 상황이 왔을 때 이를 이용할 방법이 없다는 것.
“생각해 보거라. 네가 이렇게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매번 판을 뒤엎다 보면, 종국에는 어느 누구도 너를 쉬이 자신들의 협상 자리에 청하지 않게 될 것이다. 너 역시 그런 결말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
“내 말의 뜻을 잘 알겠느냐?”
“네, 아버지.”
성진은 그의 충고를 제대로 납득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은 있었다. 그저 성회의 영감들을 한번 이겨먹겠다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아니었으니까.
성진에게는 보다 중요한 목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실은 그 일과 관련해서 아버지께 따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탁.”
“네, 아버지.”
짧게 대꾸한 성진은, 주섬주섬 목에 걸린 아뮬렛을 셔츠 밖으로 꺼내 들었다. 마왕 놈의 붉은 영혼석이 박혀 있는 규상 세계의 물건이다.
“제가 그들에게 마기 섞인 오러를 드러내 보인 건, 실은 이 녀석을 위한 포석이기도 합니다.”
자신이야 아버지의 후광을 빌어 어물쩍 넘어간다고는 해도, 이 녀석만은 도무지 성회에 납득시킬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평생 영혼석에만 가둬두기에는, 마왕 놈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아마 이 녀석을 아버지께 보여드리는 건 처음인 것 같네요. 실은 아버지도 다 알고 계셨다고 생각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성진은, 눈앞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창에서 선택지를 눌렀다.
?소환수 빨강이?
?*소환* / 해제?
그러자-
뾰용!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 하나가 나타나 집무실을 환하게 밝힌다.
[이성지이이인!]
언제나처럼 하찮기 그지없는 모습. 아니나 다를까, 마왕은 나타나자마자 성진을 향해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야, 너 인마! 그렇게 다짜고짜 소환 해제를 해 버리면 어떻게 해? 그리고 왜 날 바로 불러주지 않았… 응?]
그러다가 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마왕이,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는-
“…….”
[……?!]
딱딱하게 굳어 있는 성황의 모습을 확인하곤, 사색이 되어 모가지가 꺾인 닭처럼 바람 빠진 비명을 질렀다.
[히이이익! 서, 성황?!]
아.
급격하게 얼어붙어 가는 공기 속에서, 빠른 중재의 필요성을 느낀 성진이 부랴부랴 설명을 쏟아냈다.
“그, 네. 이 녀석은 악마가 맞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도 보시다시피 지금은 이렇게 작고 힘없는 소환수일 뿐이에요. 절대로 무해하단 점, 아버지께 분명히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
성황이 할 말을 잃은 채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를 응시하는 동안, 성진은 다급하게 변명을 쥐어 짜내기 시작했다.
“어, 물론 이 녀석이 한때 마왕이긴 했지만, 지금은 제 완전한 권속이 되었어요. 아버지도 전에 그러셨잖아요? 이런 식의 종속 관계는 절대적이기 때문에, 함부로 배신하거나 반항하지 못한다고! 즉, 이 녀석은 언제까지나 제 편이에요! 분명합니다!”
“…….”
“게다가 따지고 보면 제가 녀석을 이런 꼴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제가 보살펴야 하는 저의 책임, 어떻게 보면 제 자식…이나 마찬가지인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성황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성진은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바짝 얼어 있는 불덩이를 향해 눈짓했다.
자! 마왕아! 어서 귀여운 애교라도 보여 봐라! 네가 내 자식 같은 존재란 걸, 얼마나 무해하고 하찮은 지를 아버지한테 제대로 어필해 보라고!
[으어어……?!]
성진의 내적 응원이 통하기라도 한 걸까? 마왕 놈은 불덩어리답지 않게 눈에서 눈물을 찔끔 쏟아내더니, 마침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 안녕, 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하…….]
하?
[…할아버지?]
“…….”
“…….”
쏴아아-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완연한 가을날의 저녁이었다.
Chapter 98: Chapter 398
Chapter Text
398. 피안 (3)
[야! 너 정말 악마에게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냐? 드디어 불러주나 싶더니, 그게 하필 네 아버지의 코앞이냐고!]
“어, 미안미안.”
졸지에 신의 대리자 앞에 소환되어 벌벌 떨어야 했던 마왕의 당혹감을 성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마왕 놈이 퍼뜨리는 마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없다 보니, 미리 다른 곳에서 소환하여 마음의 준비를 시킬 수가 없었지.
그렇다면 차라리 아버지가 있는 자리에서 저지르고, 놈이 무해하다는 확답을 받아야 했다. 혹여 다른 성직자들이 걸고넘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아버지라면 필시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실 테니까.
‘뭐, 갑자기 이놈이 할아버지 운운할 줄은 예상도 못 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마왕 놈의 무리수는 소정의 효과를 보였다. 한동안 침묵하던 성황이, 마침내 깊은 한숨을 쉬며 놈에게 직접 신성 결계를 덧씌워 주었기 때문이다.
성진은 제대로 느낄 수 없었지만, 아마도 놈에게서 풍기는 마기의 강도가 한층 낮아졌을 것임은 분명했다.
어디 그뿐인가.
-내 방법을 알아보마. 그동안은 되도록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잘 숨기도록 해라.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이제 성진은 그를 믿고 기다리면 되는 거다. 부끄러움을 조금 감수한 것치고는 막대한 이득 아닌가!
물론 그 이득이, 어느 불쌍한 영혼의 손상된 존엄성을 대신할 정도였는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이건 전부 이성진 너 때문이야! 그러게 왜 괜히 자식 같다는 소리를 해서!]
지글지글.
마왕의 눈에서 불똥이 뚝뚝 떨어지며 점점이 눌어붙은 자국을 만들어낸다.
다행히 또다시 화재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마왕은 지금 성진이 미리 준비해 놓은 화려한 접시 위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놈이 염상 결정을 잃은 걸 워낙 서러워하기에, 그 대신이라 하긴 뭐하지만 황궁에서 가장 화려하게 세공된 접시를 준비해 달라고 했지.
뭐, 이렇게 보니 호롱불 같기도 하고. 제법 운치 있는데?
“그나저나, 마왕아. 이제 너도 슬슬 적절한 이름을 하나 생각해 둬야 하지 않을까?”
어느 정도 놈이 진정되길 기다려, 성진은 조심스레 생각하고 있던 용건을 끄집어냈다.
그는 앞으로도 되도록 마왕을 곁에 데리고 다닐 생각이었다.
한데 기껏 놈의 정체를 감추려고 피곤한 아버지께 무리한 부탁까지 드렸는데, 정작 사람들 앞에서 놈을 ‘마왕’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응?]
물론 마왕은 어리둥절했다.
[왜 그런 게 필요해? 나한테도 마왕답고 근사한, 제대로 된 이름이 있는데?]
“그건…….”
성진이 대답을 못 하고 말끝을 흐리자, 마왕 놈의 눈매가 대번에 뾰족해졌다.
[설마 이성진. 너, 내 진명을 그새 잊어버린 거냐?]
…음.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마왕아. 내가 이런 제안을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이유? 무슨 이유?]
그러니까, 생각을 좀 해 봐라.
말 그대로 널 ‘마왕답고 근사한’ 이름으로 소개한다고 쳐 봐. 안 그래도 네 정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더욱 미심쩍은 시선으로 널 보지 않겠어?
또 안전을 위해서도 가명을 쓰는 게 나아.
델크로스에는 [이계 묵시록]처럼, 다른 세계의 진실을 담았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된 도서들이 많이 있다잖아? 어쩌면 그런 책들 어딘가에 정말 네 진명이 적혀 있을지도 몰라.
금서 중독자인 발레리 경을 차치하고라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네 정체를 들킬 여지가 충분하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조금 하찮아 보이는 가명으로 사람들의 방심을 유도하는 쪽이 좋지 않을까?
그렇게 한참을 설명했더니, 마왕 놈이 불꽃을 파르르르 튀기며 화를 냈다.
[이성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왜? 귀엽잖아? 빨강…….”
[하지 마!]
결국 마왕 놈은 화를 참지 못하며 온 방 안을 멋대로 휘젓기 시작했다.
치직, 치직.
놈이 스쳐 지나가는 물건들에서, 매캐한 연기와 함께 불길한 소음이 발생한다.
[절대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네가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정말로 내 존재가 돌이킬 수 없이 고정되어 버릴 것 같단 말이야!]
흠.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할 건 없어, 마왕아. 어쨌거나 그렇게 임시로 부를 만한 이름이라도 있었기에, 영혼석에 아슬아슬하게나마 네 흔적이 남은 거 아니겠어?”
[뭐라고? 말 다 했냐? 크아아악!]
치지직!
놈이 스쳐가는 물건들에서 그을리는 소리가 점점 강해지는 것 같았지만, 성진은 침착하게 놈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지금은 몸도 멀쩡한 데다 오러 역시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하다. 혹여 마왕이 또 불길을 제어하지 못해 화재가 일더라도, 이번에야말로 그걸 막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이성진, 너 인마!]
한데 한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마왕 놈이, 갑자기 휘이익 성진의 코앞으로 다가오더니 투덜거렸다.
[내가 네 속을 모를 것 같냐? 오늘 기분이 무척 좋은 줄은 알겠지만, 슬슬 날 놀리는 건 그쯤 해 두라고! 왜 이렇게 평소보다 들떠 있는 거야?]
“…내가?”
[그래, 너! 말은 안 해도 아까 엄청 안심했잖아?]
“……?”
성진이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거리자, 마왕 놈이 한숨처럼 포옥, 타다 남은 매연을 뿜어냈다.
[어차피 난 영혼석 안에 보존되어 있으니까, 네가 조금 늦게 소환한들 그리 큰 문제는 아냐. 그런데 왜 그렇게 서둘러서 네 아버지와 날 대면시키고, 하필 날 보고 자식 같은 존재니 어쩌니 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릴 지껄였어?]
…어?
[솔직히 말해 봐라. 너 설마, 갑자기 마기를 풍기게 된 네 존재를 아버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확신이 없었던 건 아냐? 그러니까 날 대신 그의 앞에 내밀어서 제대로 반응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겠지.]
“…….”
[자, 내 말이 틀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 봐!]
성진은 할 말을 잃고는 멍하니 마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머릿속을 스치는 확신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확인하고 싶었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아버지는 본래 ‘예전’부터 내 존재를 알고 계셨다. 그리고 기꺼이 ‘날’ 아들이라 불러주고, 언제까지나 곁에 있어 주겠다고까지 말씀하셨어.
…그게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하여튼 확실하다고! 그러니 그런 아버지를 의심할 리가 없지 않아?
“뭐…….”
그래도 그의 반응에 기분이 좋아진 건 별개의 문제지.
그래서 오랜만에 푹 쉬시라고, 아버지께 직접 토끼 수면 안대까지 걸어드리고 왔다. 어째 병 주고 약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잠시 붉게 점멸하는 불꽃을 응시하던 성진은, 곧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내일부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처신할지나 제대로 의논을 해 보자니까. 응? 빨강…….”
[아, 하지 말라고!]
* * *
성황은 홀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오웬이 선물해 준 토끼 안대의 이능 덕이다.
-그간 틈새에서 많이 힘드셨을 텐데, 오늘만큼은 아무 생각 마시고 푹 쉬십시오. 델크로스 차원은 조금도 걱정 마시고요.
토끼 안대를 내밀며 그의 아들이 직접 한 말이다.
‘그 아이가 그리 말했다면, 그러면 되는 것이겠지.’
수백, 수천의 차원을 틈새에 우겨 넣으며 버틴 것이 근 한 달. 그리고 그것을 모조리 정리하는데 걸린 시간이 일주일이다.
다른 이라면 일평생을 보내도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정신력을 소모한 그는, 오늘만큼은 순순히 아들의 말을 듣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늘 시끄럽기만 하던 머릿속이 조용히 잦아들자, 오히려 기감이 예민해지며 기억 속의 목소리들이 환청처럼 들려오기 시작한다.
-왜 인과를 보존하려 노력하지 않나! 왜 언제든 모든 걸 미련 없이 버릴 준비를 하는 이처럼, 그렇게 뒤가 없는 사람처럼 멋대로 구느냔 말일세!
어르신은 길길이 날뛰며 그에게 그런 소리를 했었지.
하지만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성황이 이렇듯 때때로 마음 내키는 대로 굴 수 있는 것은, 뒤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뒤가 든든하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자리를 비웠음에도 막힘없이 국정이 굴러가는 것을 보라. 이렇듯 그를 대체할 것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차곡차곡 준비되어 가고 있지 않나.
마지막으로 자신만만한 아들의 얼굴까지 떠올린 성황은, 조금 안심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끼익-
잠시 후, 그가 쉬고 있는 방의 문이 조용히 열린다. 혹여 주군의 휴식을 방해할까, 무장까지 일부 해제하고 온 카트리나였다.
“…….”
그녀는 잠시 놀란 얼굴로 쉬고 있는 성황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직 철부지 기사였을 무렵, 어리디어린 황자님을 모실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
아마 기도실에서 유난히 긴 시간을 보낸 만큼, 성황은 분명 카트라나가 짐작조차 하지 못할 중대한 일들을 처리하고 왔으리라.
‘부디 지금만큼은 근심을 잊고서 편히 쉬시길…….’
마음속으로 기도한 충직한 기사단장은, 이내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기민하게 움직이는 암살자 하나가 그의 방을 몰래 찾았다.
“…….”
성황이 기도실에 들어있는 긴 시간 동안 괜히 걱정하며 황궁 주위를 맴돌던 암살자는, 성황의 멀쩡한 모습을 확인하고는 조금 안도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물론 뒤늦게야 성황을 암살해야 한다는 본래의 목적을 상기하고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지만.
그리고 이곳을 방문한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아까부터 성황의 주위를 맴도는 작은 영혼 단말들이 있었다.
[…….]
[…….]
파랑과 분홍빛으로 각각 점멸하는 작은 영혼들은, 이내 함께 눕기라도 하듯 살포시 성황의 침상 위로 내려앉았다.
[성황 아빠가 우리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처음이야. 기분이 좀 이상한데?]
[아빠 폐하도 슬슬 휴식을 취해야지. 솔직히 이번엔 좀 무리한 게 아닌가 생각했어.]
[그러면 그동안 델크로스 차원은 어쩌고?]
[모레스가 여기 있잖아? 별일 없을 거야.]
그리고 둘은 잠시 침묵한 채 성황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기실 그들의 아비는 도통 빈틈이 없는 자였으므로, 이렇게 평온하다 못해 무방비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충분히 그를 구경했다 느낀 영혼들은 다시 하늘하늘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좋아. 그럼 오늘은 우리가 성황 아빠 대신 차원을 경계하자.]
[그래.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모레스에게 알리는 거야!]
[…그냥 지금 모레스에게 한번 놀러 가 볼까? 빨강이도 전과는 좀 달라진 거 같고.]
[아냐, 그만두자. 전처럼 모레스의 곁으로 몰래 다가갔다가는 금방 들키고 말걸?]
그리고 둘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며 영혼을 깜박거렸다.
[근데 참 이상하지? 영안이 없는 모레스가 어떻게 그런 대체 영안을 만든 거지?]
[전에도 빨강이의 눈을 빌려 썼잖아. 빨강이의 능력을 완전히 가로챈 게 아닐까?]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걸까. 두 영혼 단말은 성황의 머리맡을 빙글빙글 돌며 각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뭐, 이상할 것도 없지. 모레스는 모레스니까.]
[하긴 그렇군. 모레스는 다름 아닌 모레스니까.]
* * *
드물게 단잠에 들었던 성황은, 간만에 개운한 아침을 맞았다. 그 말은 곧, 깐깐한 추기경들을 상대할 만전의 태세가 되었다는 뜻과 같았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먼저 불려온 마이어 추기경은, 성황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불의 요정… 말입니까?”
“그래. 신화 속 정령들에 대한 동화를 발간할 예정이네. 하니 이단 재판부의 연행 지침을 일부 수정하고, 금서로 지정되어 있는 몇 가지 도서들도 풀어줘야겠네.”
“…….”
너무나 당당한 요구에 마이어 추기경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하오나 폐하…….”
“그대도 알다시피, 아직까지 초대 성황과 달의 요정 올리비에의 이야기가 큰 인기이지 않나? 한동안 출생하는 모든 여아의 이름이 올리비에가 될 정도로 말일세. 아마도 신민들은 새로운 요정의 이야기 또한 크게 반길 테지.”
이 모든 일들은 결국 형식적으로나마 성회의 승인을 통해야 할 터. 그러니 그들의 수장인 마이어 추기경에게 먼저 언질을 주는 것이다.
-내 뜻이 이러하니 알아서 큰 잡음 없이 진행하라.
다행히 마이어 추기경은 후배인 베니투스처럼 꽉 막힌 인사는 아니었다. 웨스커 대주교처럼 성급히 굴지도 않았고, 성회의 사제들을 잘 다독일 줄도 알았다.
즉, 성황이 부리기에 가장 좋은, 정도를 지키되 유연한 사고를 가진 인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폐하. 요정이라 함은…….”
마이어 추기경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이들은 구전으로 전해지던, 옛 신화 속에나 등장하는 존재였다. 백성들이 주신의 빛을 알지 못하고 무지 속에서 고통받을 당시의 어리석은 믿음이었다.
이단 재판부는 이 ‘요정’이란 존재 자체를 ‘악’으로 규정했다. 경전에 ‘주신의 백성’이라 명시되지 않은 모든 것은 악의 무리였으니까.
구전되던 이야기들은 발설이 금지되었고, 그나마 기록으로 남아 있던 몇 개의 저작물도 대부분 금서로 지정되었다.
그나마 달의 요정 올리비에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건, 그 일화의 대부분이 초대 성황의 업적에 대한 찬양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 아닌가.
“다른 이도 아닌, 마이어 가문의 사람인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조금 외람되오나… 폐하, 부디 한 번만 더 재고해 주십시오.”
마이어 추기경의 생각은 굳건했다.
‘악’이 조금이라도 파고들 여지를 줘서는 안 된다. ‘악’과는 절대 소통할 수 없다.
이렇듯 형편에 맞춰 경계를 조금씩 내려놓다 보면, 어느새 교리는 변질되고 악덕이 미덕으로 바뀌고 말겠지.
주신을 향한 의심과 배덕은, 이성과 합리라는 미명하에 그럴싸하게 포장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 오래지 않아, 전 대륙의 신민들이 악마의 꾐에 넘어가 깊은 도탄에 빠지리라.
분명 그럴진대-
“…마이어 추기경,”
“예, 폐하.”
“인격은 물론 이름마저 잃어버린 주신께서, 대체 언제까지 신민들의 버팀목이 되어 줄 것 같은가?”
공교롭게도 그런 추기경의 믿음을 크게 뒤흔드는 것은, 세상 누구보다도 주신에 가까이 닿아 있다 여겨지는 신의 대리자였다.
Chapter 99: Chapter 399
Chapter Text
399. 피안 (4)
-어찌하여 저희에게 당신의 이름을 부르라 명하지 않으시나이까.
-그리하여 비로소 내 지팡이가 너의 손에 거할 수 있음이라.
-어찌하여 그리 눈을 닫고 저희의 모습을 보려하지 않으시나이까.
-그리하여 그 지팡이의 방향을 내가 미리 가늠치 않음이라.
-어찌하여 결과의 선과 악을 판단치 않겠노라 하시나이까.
-그리하여 너의 인과가 온전히 네게 속하는 것이니라.
-하면, 저희가 대체 무엇을 좇아 당신의 뜻을 이루리이까.
-네 마음속 가장 경건한 자리에 교회를 세우고 이리 자문할지니-
-그것이 너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냐.
-그것이 너의 판단에 올바른 것이냐.
-그것의 결과를 네가 짊어질 것이냐.
-이에 한 점 거리낌이 없다 하면 내 너를 기꺼이 사역할지니,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에 추호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 * *
경전에 이르기를, 주신께서는 더는 선악을 판단치 않겠다 이르셨다 한다. 심지어는 계시를 받는 사도에게 자신의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지.
마이어 추기경은 지금까지 그것을, 순전히 주신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기 때문이라 여겨 왔었다.
방금, 신의 대리자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기 전까지는.
“인격은 물론 이름마저 잃어버린 주신께서, 대체 언제까지 신민들의 버팀목이 되어 줄 것 같은가?”
“……!”
마이어 추기경의 두 눈이 충격으로 잘게 흔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성황이 직접 신을 부정하는 말을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그가 어렴풋이 우려하던 무언가가, 마침내 사실로 확인되었기에 받은 충격일 뿐.
“…….”
그런 추기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성황은, 그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 한마디를 내뱉는 데도 생각보다 많은 인과가 소요되었기 때문.
아마도 [6인 회의]에서 인과를 조금 강탈해 오지 않았다면, 그 진실의 일부라도 입에 담지 못했으리라.
‘하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현재 남아 있는 고위 성직자들 중, 어렴풋하게나마 [태초의 협약]을 알고 있는 자는 마이어 추기경이 유일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 그리고 향후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부터라도 성직자들의 수장인 그가 든든하게 성회의 중심을 잡아 주어야만 하리라.
“…폐하.”
잠시 후, 겨우 충격을 가라앉힌 마이어 추기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혹시, 저희 마이어가의 시조님에 대해 뭔가를 알고 계시는…….”
하지만 성황은 더는 듣지 않고 그의 말을 잘랐다. 이제 추기경에게 할애할 수 있는 인과의 여분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이미 그대와 그대의 누이를 끝으로, 마이어 가문에는 더 이상 신성력을 가진 자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걸세.”
“……!”
추기경의 눈동자에 서린 의혹이 이내 확신으로 바뀐다.
지난 수세기 동안, 마이어가는 고위 성직자들을 대거 배출해낸 명문 중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유독 주신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가문의 시조가 맺은 [약속]의 증거가 핏줄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 시조께서는 그것을 [태초의 협약]이라 이르셨다고 들었다.’
마이어 추기경이 전전대의 가주로부터 전해 들었고, 또 수년 전에는 현재의 가주에게 전해주었던 시조님의 진실.
‘하지만…….’
성황의 지적대로, 최근에는 어쩐 일인지 현 가주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신성력을 타고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진실을 전해 들은 마이어는 이미 그 원인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조가 말한 [태초의 협약]이 끝나는 시기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만일, 만일에 시조님의 그 모든 말씀들이 다 사실이라면…….”
충격이 가신 그의 눈에는 이제 미약한 공포감이 어려 있었다. 인간으로서는 감히 감당하기 어려운 막막한 현실이, 어느새 실체를 가지고서 코앞으로 성큼 다가온 격이니.
“그렇다면, 폐하. 저희들은 이제 어찌해야 할지…….”
“지금처럼 나태하게 기도만을 읊조리지 말고, 진리를 향한 겸손한 구도의 자세를 가져야겠지. 내가 내린 지시들은 모두 이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예?”
“주신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마음에 교회를 세우고 스스로를 향한 물음을 게을리하지 않는 한, 이 모든 노력들이 모여 언젠가 창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리라고.”
…하지만 폐하. 적어도 불의 정령 이야기를 세간에 퍼뜨리는 것이, 그 구도자가 추구해야 할 진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만.
마이어 추기경은 대번에 그런 생각을 했다. 다행히 연이은 충격에도 불구하고, 성황에게 그따위 질문을 소리 내어 던지지 않을 자제력은 남아 있었지만.
“이점을 잊지 말게, 추기경.”
부쩍 혼란스러워하는 추기경을 향해, 성황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황도를 지키는 은총은 건재할 것이며, 악마종이 이곳까지 마수를 뻗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지금보다 조금 더 유연한 태도를 가진다고 해서, 악마의 혓바닥에 쉽사리 농락당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뜻이네.”
“……?!”
그러자 마이어 추기경의 눈이 커다래진다. 문득 황도 내에서 위풍당당하게 마기를 흩뿌리던 누군가에게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폐하. 모레……?”
“…….”
서늘하게 가라앉는 대기.
마이어 추기경은 재빨리 성황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제, 제가 크게 실언했습니다. 부디 잊어주십시오!”
* * *
불의 정령의 존재는 생각보다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 웬일로 성회의 수장인 마이어 추기경이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나.
거기다 지금은 이곳에 없는 카드모스의 영향도 컸다고 한다.
-이성진. 저 안에서 어딘가 묘한 힘이 느껴지는데? 신성력이라기에는 뭔가 부정 탄 느낌이고, 그렇다고 마기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성스러운 힘이야.
처음 그가 나타났을 당시 마왕이 평했던 것처럼, 초대 성황이 내뿜는 기운은 어딘가 마기와 닮은 구석이 있다는 모양이었다.
그 느낌이 마치 성황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인 신성 결계와, 그 사이로 희미하게 느껴지는 마왕의 마기와 비슷하다나?
‘마왕이 가진 본연의 마기가 이미 형편없이 약하다는 점도, 사제들의 거부감을 줄이는 데 한몫했겠지.’
물론 성진은 굳이 그 점을 꼬집어 마왕을 좌절시킬 생각은 없었다. 놈은 이미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해 크게 낙담하는 중이었으니까.
[불의… 정령? 이 위대한 마왕님께서, 고작 그런 하찮은…….]
충격을 받은 마왕이 비틀비틀 접시 위로 내려앉자, 고열로 인해 접시 중앙에 구불구불한 물결무늬가 생겨났다.
흠, 역시 유리 접시는 불길에 쉽게 물러져 버리는군. 이전처럼 녹는점이 높은 금속 접시를 쓰거나, 아니면 브르타뉴산 포슬린 접시 쪽을 알아봐야겠어.
어쨌거나 정령의 존재가 성회에 받아들여지자, 그 이후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성진은 무사히 주신의 ‘사도’임을 인정받았다. 덩달아 그의 오러 변화 역시, ‘주신의 시련을 받기 위해 불의 정령이 내려준 축복 어쩌구저쩌구’ 정도로 무마되었다지.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왕을 대하는 황궁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부드러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 불의 정령님은 정말 깜찍하면서도 아름다우시구나! 어쩐지 모레스, 네 오러와 많이 닮았어.”
아멜리아는 유리 접시 위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불꽃을 보고는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물밑에서 어떤 흉흉한 소문이 돌든, 그저 성진의 오러와 비슷해 보이면 무조건 좋은 모양이었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불장난질을 하겠구나? 모레스 너 인마, 앞으로 내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본다. 잘 알아들었어?”
오웬 녀석은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성진에게 화재의 위험성에 대해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평소에는 어리바리한 호구인 주제에, 간혹 이상한 곳에서 깐깐하게 구는 녀석이었다.
“성회에서 인정한, 고대의 정령…….”
그리고 마사인 경.
그는 전에 비해 한층 편안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비록 겉으로 대놓고 티 내지는 않았지만, 자수 놓는 빈도가 현저히 줄어든 걸 보면 그간의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였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군요. 그런 거였습니다.”
마사인 경에게 있어서는 갑자기 나타난 수상한 불의 정령이든 뭐든, 그저 모시는 황자가 악마와 관련된 이슈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만으로도 감지덕지인 듯했다.
물론 주위에 잡음이 완전히 없지는 않았지만.
“뭐? 정령? 그게 무슨 무리한 날조야? 마사인. 저건 아무리 봐도 마기…….”
“이만 꺼져 주지 않겠나? 아니면 쓸데없는 소리만 지껄이는 그 주둥이는 그만 닥치게. 프란시스.”
“…마사인? 너, 이런 성격이었냐?”
하지만 황궁에서 누구보다도 격한 반응을 보인 사람은 따로 있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이 두 눈으로 빨강이 님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되는군요!”
예쁜 접시 위에 앉아 하늘거리는 불꽃을 영접한 브루노 단장은 크게 감격했다. 물론 활활 불타는 마왕에게 기름을 끼얹는 눈치 없는 발언은 여전했지만.
“정말 상상 이상으로 귀여운 모습이 아니십니까? 물론 여태껏 사념으로 듣던 목소리도 깜찍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만.”
[…뭐야?]
절대 칭찬으로 넘길 수 없는 발언. 마왕은 잔뜩 분개하며 불꽃을 파르르 떨어댔다.
[너, 지금 이 위대한 마왕님을 무시하는 거냐? 날 함부로 그런 덜떨어진 이름으로 부르지 말란 말이야, 이 얼뜨기야! 너 때문에 이성진이 점점 그 이름에 익숙해져 가고 있잖아!]
그러자 브루노 단장이 무척 억울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하지만, 빨강이 님께서도 절 매번 얼뜨기라 부르시지 않습니까?”
[그거야 네가 항상 얼빠진 소리만 골라서 하니까 그렇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빨강이 님이야말로 언제나 변함없이 빨갛지 않으신가 하는…….”
[뭐라고?! 너 이 자식! 정말 나랑 해볼 테냐?]
화르르르!
재빨리 단장에게 달려든 마왕이 거세게 고열의 불꽃을 튀겨 댄다.
하지만 브루노 단장은 최근 한층 강해진 오러 층을 이용해 여유롭게 검막을 만들어 냈다.
바동바동바동!
검막에 가로막힌 마왕이 불꽃을 나풀거리며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나름 전직 데카론 나이트인 단장을, 고작 E랭크 소환수인 빨강이가 당할 재간이 없었다.
성진은 묘한 애상에 젖어 그 깜찍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귀엽긴 한데, 조금… 딱한가?’
이제 ‘고대의 정령’이라는 그럴싸한 타이틀도 붙었겠다, 남들에게 제대로 위엄을 보여줄 수 있을 정도는 힘을 갖추면 좋을 텐데.
‘그런데 저 녀석은 영혼이잖아. 영혼의 힘을 키워 주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어쩌면 판게아 크로니클에 그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환수의 랭크를 측정하고, 소환수 레벨 업 시스템도 존재하는 곳이니까.
늘 함께 게임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으니까, 언젠가 마왕과 함께 그곳에 접속해 봐도 좋겠지.
[이성지이이인!]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마왕 놈이 갑자기 울상을 지으며 성진을 돌아보았다.
[이 얼뜨기가 자꾸만 기어오른단 말이야! 너도 녀석에게 뭐라고 말 좀 해봐!]
“응, 알았어. 잠깐 이리 와 봐.”
성진은 미리 준비해 둔 음식 접시를 내밀며 놈에게 손짓했다.
마왕이 머릿속 염상 결정을 떠난 후, 단 한 가지 좋은 점을 꼽으라면 단연코 이것이겠지.
더는 놈에게 미각을 공유해 주며 억지로 곰 고기를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
[…와! 이건?]
“지그스문트령에서 공수해 온 신선한 곰 고기야. 잘 구워져 있으니 한번 먹어 봐.”
[정말? 정말 이걸 나 혼자 먹어도 되는 거야?]
고개를 끄덕여주니, 이내 고기 위로 거센 불꽃이 일었다.
화르르륵!
실체를 가지게 된 후로, 마왕 놈은 이렇게 음식을 직접 태워 흠향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섭취하는 음식에 더 이상 제한이 없어진 거다.
[곰 고기~ 곰 고기~ 향이 강하고 불맛 나는 곰 고기-!]
곧 단백질이 연소되는 매캐한 냄새와 함께, 방 안에 신명 나는 가락이 울려 퍼진다. 얼마 전만 해도 다시는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마왕의 노랫소리였다.
“흠…….”
단조로운 가락을 귀에 담으며, 성진은 의자에 느긋하게 기댔다.
오랜만에 만끽하는 평화로운 한때. 아마도 슬슬 진주궁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 모양이었다.
Chapter 100: Chapter 400
Chapter Text
400. 피안 (5)
그로부터 수일이 채 지나지 않아, 성진은 마침내 고대하던 아침 수련을 재개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병석에 있던 3황자가 간만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연무장에 있던 상주기사들이 반색을 하며 그를 향해 달려왔다.
“저하!”
“아예 진주궁으로 돌아오신 겁니까? 이제 몸은 괜찮으신 거지요?”
“감사합니다, 주신이시여! 그간 저하께서 돌아오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열렬한 환영에 성진은 조금 떨떠름한 기분이 되었다.
‘뭐지? 왜 다들 나를 무슨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는 거야?’
아마도 상주기사들을 굴리는 데 점점 열성이 되어 가는 브루노 단장 때문이었지만, 이러한 사실을 성진이 알 리가 만무했다.
“가서 수련들이나 해. 뭘 오랜만에 본 것처럼 호들갑이야? 자네들, 호위 시간마다 매번 본궁에 찾아오지 않았나?”
“그건 그냥 병문안이지, 정식 근무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상주기사들은 이내, 성진의 주위를 맴도는 작은 불꽃에 홀린 듯 시선을 빼앗겼다.
“저것… 아니, 저분이 소문에 들려오던 그 고대의 요정!”
“신비하군요. 정말 불꽃이 허공을 날아다닙니다!”
“와아! 쪼그만 게 어쩐지 귀여워!”
기사들이 서로 한마디씩 던져대니, 연무장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진다.
“정말 달의 요정 올리비에와 같은 존재란 거죠?”
“저는 지금까지 요정이란, 그저 동화에 나오는 허구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브루노 단장이 날카로운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앞으로 나섰다.
“정숙! 모두들 잘 들으시게! 이분은 불의 요정이시자, 모레스 황자님의 충실한 종이신 빨강이 님이시다! 앞으로 이분을 만나면 늘 깍듯이 인사를 드리고, 기사단장에 준하는 적절한 예를 갖추길 바라네!”
“오오……!”
상주기사들은 반짝이는 눈빛을 교환했다.
‘빨강이 님이래!’
‘이름도 정말 깜찍하지 않아?’
화르르륵!
마침 그 말에 긍정이라도 하듯, 붉은 불꽃이 브루노 단장의 머리 위를 빠른 속도로 맴돌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주기사들의 착각일 뿐, 실제로 ‘불의 요정’은 단장을 향해 미친 듯이 화를 내는 중이었지만.
[닥쳐! 그 입 닥치라고! 대체 지금 무슨 헛소리를 잘난 척 지껄이는 거야? 내가 누누이 말해왔지만, 내 이름은 빨강이가 아니란 말이다아아아!]
“흠흠.”
[이성진! 이성지인! 이 얼뜨기 좀 말려 봐!]
하지만 마왕의 사념을 듣지 못하는 다른 기사들의 눈에는, 그저 발랄한 요정이 이리저리 장난을 거는 듯 보일 뿐이었다.
“저 작은 요정님이 브루노 단장님을 무척 좋아하나 봅니다.”
“벌써 요정과 친해지시다니, 정말 부럽습니다!”
“으흠! 별것 아니네.”
[아냐! 아니란 말이야! 야, 이 얼뜨기야! 넌 또 왜 쟤들 말에 잘난 척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당장 모두에게 아니라고 말 하라고! 어서!]
타닥! 타닥! 타닥!
빠르게 움직이는 불꽃이 단장의 오러 막을 이리저리 두드리며 불똥을 튀긴다.
그러자 멀리서 나무 접시를 가지고 놀던 막스가 귀를 쫑긋 세우더니 쏜살같이 불꽃을 향해 달려드는 게 아닌가.
웡웡!
-뭐야? 그거 뭐야? 새로운 장난감이야?
커다란 늑대개가 불꽃을 향해 폴짝폴짝 뛰어오르기 시작한다. 다시없을 마왕의 수난 시대였다.
[넌 또 왜 이래? 저리 가! 이 바보 잡종 개야!]
‘불의 요정’이 짜증을 내며 하늘로 솟구치자, 상주기사들이 놀라 흥분한 늑대개를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빠, 빨강이 님! 진정하시고, 어서 이리 돌아오십시오!”
“막스, 이 녀석! 그렇게 빨강이 님을 위협하면 안 된다고!”
“빨강이 님! 빨강이 님!”
[아, 다들 입 다물어! 난 빨강이가 아니라니까아아!]
그렇게 난장판이 된 연무장을 뒤로한 채, 성진은 오랜만에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자고로 무인이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집중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 거다. 아무렴! 절대로 저놈들을 보고 있자니 골치가 아파져서가 아니야.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며 검을 들어 올린다.
그사이 굳은살이 다 사라진 손에, 익숙한 호두까기의 손잡이가 감겨들었다.
‘드디어!’
두근두근.
귓가에서 박동하는 이명이, 조용히 내면으로 침잠하려는 정신을 쉴 새 없이 두드려 깨운다. 온전한 기쁨으로 술렁이는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 탓이었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성진은 결국 완전한 평정심을 포기하고는 그저 기쁨에 순순히 몸을 맡기기로 했다.
황실 기사단 표준 검술, 1식 1형.
세 갈래 내려베기.
휘익-
정면으로 곧추세웠다 떨어지는 검날 위로,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감히 검로를 방해하지 못한 채 비스듬히 흘러내린 빛줄기는, 이윽고 연무장 바닥에 기다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이상한데?’
휘릭- 휘릭-
몸이 기억하는 대로 흘러가듯 움직이며, 성진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어딘가 기묘한 감각이었다. 온전히 예전과 같은 동작일진대, 길게 가르려 들면 공기가 절로 움직이며 검로를 비워낸다.
검을 교차시키며 방어식을 구사할라치면, 밀도 낮은 대기가 날에 부딪치며 있을 리 없는 경쾌한 탄성을 만들어 냈다.
대기는, 검을 빠르게 찌르고 회수할 때마다 장단을 맞춰 날을 밀어주고, 가볍게 비트는 손짓 하나에도 작은 돌개바람이 되어 춤을 췄다.
마치 온 세계가 성진의 검과 함께 노래하는 것 같았다.
“…….”
소란스럽던 연무장은 언제부터인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오랜만에 보는 황자의 검 사위.
예전에도 매번 감탄스러웠지만, 지금 황자가 보여주는 모습은 이전의 움직임과는 명확히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검재를 가지고 있는 자라면 그 사실을 결코 모를 수가 없으리라.
“…대단하군.”
“천재는 다 저런 걸까요? 수련을 꽤 오래 쉬셨는데 오히려 전보다 실력이 더 늘어 오셨네요.”
“쉿! 조용히!”
그렇게 오러를 완전히 묶고 오로지 검에만 정신을 집중하던 성진은, 황실 기사단 표준 검술을 연거푸 두 차례나 펼쳐 보인 후에야 마침내 움직임을 멈췄다.
“후…….”
검을 내리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자,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마사인이 조용히 말을 건네왔다. 황자의 집중이 끝났음을 안 까닭이다.
“…병상에서도 그저 수련할 생각에만 골몰하셨던 거군요. 그건 가만히 쉬기만 한 사람의 검이 아닙니다.”
성진은 작게 헛웃음을 뱉었다.
“하하. 들켰나? 사실 본궁에 있는 동안 머릿속에서 틈나는 대로 제국 검법을 되뇌긴 했어.”
검을 휘두르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었거든. 아마 그거라도 하지 않았으면, 고열이 나건 말건 다짜고짜 연무장으로 달려 나갔을지도 모른다고.
“어때? 머릿속으로만 하는 훈련도 꽤나 효과가 있는 거 같지 않아? 어쩐지 몸이 전보다 훨씬 가볍게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고.”
성진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다시 자세를 잡는다. 그러자 마사인이 의아한 듯 재차 물어왔다.
“한데 저하. 오러 층이 충분히 회복되었는데, 왜 계속 오러를 묶고 검 수련만 하시는 겁니까? 오늘은 아예 명상도 건너뛰실 생각이십니까?”
“음? 그렇다기보다…….”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까.
“실은 마사인 경. 어젯밤에 진주궁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명상을 해 보긴 했어.”
검술 훈련과 마찬가지로, 오러 연공 역시 성진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하지만 본궁에서는 차마 명상을 시도할 수가 없었지.
아무리 ‘고대 정령의 축복 어쩌구’라고 결론이 났다지만, 성기사들이 우글거리는 본궁에서 오러를 풀어 보이는 건 대단히 껄끄러운 일 아니겠나.
그래서 되도록 오러를 묶어두고 인내하다가, 진주궁에 돌아오자마자 신이 나서 명상을 시작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요?”
“경도 잘 알다시피, 내 오러가 축복… 때문에 엄청 뜨거운 기운으로 변해버렸잖아?”
물론 게헤나의 불이 아무리 뜨거워도, 이를 다스리는 성진의 몸은 멀쩡했다. 하지만 주변의 사물들에 관해서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오러가 막 활발하게 순환하기 시작하자, 곧바로 입고 있던 잠옷부터 타들어 가더군.”
“…네에?”
마사인의 표정이 금세 심각해졌다.
“옷이 탈 정도라니, 오러가 그렇게나 뜨겁단 말입니까? 몸은 정말 괜찮은 겁니까?”
“응, 걱정 마. 이 불은 절대 나한테 해를 끼치지 않아.”
하지만 ‘하하, 신난다! 이제부터는 모든 공격에 불속성 추가 대미지 +3이다!’ 같은 초반의 계획은 전면 재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 열기를 어떻게든 컨트롤하지 않으면, 오러를 쓸 때마다 입고 있는 옷부터 모조리 불쏘시개가 될 참이라고.
물론 지금도 성진이 강하게 원하면 어느 정도 온도 컨트롤이 가능하긴 했다. 단지 이것을 호흡하듯 자연스럽게 다루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뿐이지.
“헤에? 요정의 축복이라더니 대단하군요. 오러의 온도가 그렇게나 높습니까?”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던 하벤 경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거 겨울에는 엄청 좋을 것 같은데, 여름에는 정말 답이 없겠는데요? 내년에도 곁에서 저하를 호위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등에 땀이 흐르는 것 같습니다.”
‘…여름.’
게헤나의 불과 함께하는 후끈한 여름을 떠올리고 만 성진이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뭐, 그때까지는 완전히 온도를 조절할 수 있지 않을까? 일단은 겨울이 먼저 올 테니까.
* * *
그렇게 오랜만에 하루의 대부분을 수련하는 데 쏟아부은 성진은,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서 오랜만에 노곤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오러만 멀쩡했다면 마음껏 명상했을 텐데 말이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의미 없이 놀면서 시간을 보낼 생각은 없었다. 진주궁에 오면 알아보려고 잔뜩 벼르고 있던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
달칵.
조금 착잡한 심정으로 네브라스카의 아뮬렛을 집어 들자, 예의 희미한 텍스트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일전에 마왕을 소환할 때는 급한 마음에 대충 보고 넘겼는데 말이지.
?소환수로 소환 가능한 영혼의 목록 1/3?
?1. □□□□ (비활성)?
?2. □□□ □□ (비활성)?
?3, 벨린다 마일스 (활성)?
역시나.
영혼석에 넣어 사라진 헤이즈와 빨강이 대신, 새로운 친구가 소환 목록에 버젓이 들어앉아 있는 거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놈은 또 뭐지? 갑자기 왜 여기 붙어 있어?’
벨린다? 설마 성진이 아는 그 벨린다인가?
-그래. 고통의 너머에서 언젠가 주신께 다가갈 수 있다 여겼지. 온전한 피안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
이단 재판부를 탈출하자마자 성진 일행에게 걸리는 바람에, 결국은 로건의 정보원 19호의 손에 목이 베인 참회 교단의 잔당.
-마침내 나는 주신의 곁으로……!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환희에 찬 눈동자를 기묘하게 번뜩이던 암흑 교단의 광신도.
“끄응…….”
성진이 아뮬렛을 쥔 채 한참을 주저하자, 모처럼 마음에 드는 그릇에서 쉬고 있던 마왕 놈이 불꽃을 살랑거렸다.
[네가 아는 그놈인지 아닌지는, 일단 불러 보면 확실해지지 않을까?]
“음. 그거야 그런데…….”
성진이 고심하는 이유는 따지고 보면 별거 없었다. 제일 처음 영혼석으로 불러냈던 광신도 하나가 어떤 꼴로 나타났는지를 상기해 보면, 또 다른 광신도 쪽도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거기다 벨린다는 죽는 순간까지 온갖 고문에 시달리다, 결국에는 목이 댕강 잘리지 않았던가. 그 원혼이 대체 어떤 꼴로 변해서 눈앞에 나타날지 상상만 해도 뒷골이 당겼다.
[와… 너 설마, 정말로 그런 게 무섭냐? 명색이 불의 마…….]
“아, 아니야! 그러니까 닥쳐! 좀 껄끄러울 뿐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해?”
성진은 버럭 마왕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해 봐도, 결국은 영혼을 직접 소환하는 것밖에 다른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작게 한숨을 쉰 성진은, 비어 있는 영혼석을 집어 들고서 눈앞에 떠오르는 창을 선택했다.
?3. 벨린다 마일스 (활성)?
?영혼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수락* / 거절?
싸아아-
선택과 동시에 영혼석이 어두운 빛으로 물든다. 소환된 악령의 영혼이 깃드는 것이다.
잠시 후, 성진의 손바닥 위에는 작은 군청색으로 변한 영혼석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벨린다의 영혼석?
아, 정말 싫다.
?*소환* / 해제?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소환을 선택하자-
화아악!
짐작했던 대로, 강력한 영압이 순식간에 방 전체를 휩쓸었다. 헤이즈에 비해 강했으면 강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는 기세!
[주인이시여! 저를 불러주셨나이까!]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성진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벨린다?”
반신반의하며 묻자, 소환된 영혼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네, 그렇습니다. 주인이시여. 당신의 충실한 종, 벨린다입니다.]
“…….”
성진은 내심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검은 눈물을 흘리는 기분 나쁜 악령 대신, 갑주를 두르고 거대한 곤봉을 장비한 건장한 전사 하나가 서 있었으니까.
Chapter 101: Chapter 401
Chapter Text
401. 피안 (6)
소환된 영혼의 외양은, 성진이 기억하는 광신도 교구장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두툼한 근육을 감싸는 단단한 갑주.
어지간한 척추동물의 등뼈 따위 한 방에 으스러뜨릴 것 같은 흉흉한 곤봉.
만약 피부를 뒤덮고 있는 오랜 고행의 증거들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성진은 그녀를 절대 알아보지 못했으리라.
“…벨린다?”
반신반의하며 묻자, 영혼으로부터 지극히 정중한 대답이 돌아온다.
[네, 그렇습니다. 주인이시여. 당신의 충실한 종, 벨린다입니다.]
그래. 저 은은하게 돌아 있는 눈동자나, 19호가 남긴 목의 검상을 보면 그녀가 맞는 것 같긴 한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왜 참회 교단 녀석이 뜬금없이 내 소환수가 되어 있지? 왜 아무 거리낌 없이 날 ‘주인’이라 부르고 있는 거람?
[흐음.]
그때, 새 소환수를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던 마왕 놈이 뭔가를 짐작한 듯 입을 열었다.
[죽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나 보네. 순수한 영혼 상태가 되니, 그간 육체의 한계에 가로막혀있던 깨달음들을 얻은 거야.]
[네, 정확합니다.]
벨린다의 영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시여. 죽음을 맞은 영혼은 그동안 멀어 있던 영안이 트이며, 세상의 진리를 조금이나마 엿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살아생전 그리도 갈구하던 ‘피안’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피안의 실체?
[아아! 그 감당키 어려운 진실 앞에서 제가 느껴야 했던 두려움과 절망을, 어찌 말로 다 설명 할 수 있으리까! 만일 주인이 아니셨다면……!]
우웅-
벨린다가 동요함에 따라, 방안 가득 들어차 있던 그녀의 강력한 기운이 함께 일렁거린다.
[당신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저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달을 새도 없이 티끌처럼 스러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
성진은 자신 앞에 무릎 꿇은 광신도의 영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살아생전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데 한 시도 게으름이 없었던 단단한 정신의 소유자다.
만약 영혼의 모습이 그 인간의 본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면, 그녀가 두르고 있는 저 훌륭한 갑주야말로 영혼으로서의 격과 견고함을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으리라.
[주인이시여! 저는 당신으로 인해 마침내 진정한 영혼의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읍하지 않겠나이까!]
“…뜬구름 잡는 소리는 그만하고.”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직감한 성진이, 침상에 편하게 걸터앉으며 명했다.
“처음부터 좀 자세히 설명해 봐. 네가 어쩌다가 내 소환수가 된 건데?”
[예, 주인이시여. 예비된 분이시여. 기꺼이 당신께 모든 것을 고하겠나이다.]
그렇게 대답한 벨린다는,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눈으로 성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려면 먼저, 제 죽음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부터 설명 드려야겠군요.]
* * *
그날, 벨린다는 19호의 손에 목이 베이며 죽음을 맞았다.
‘아아……!’
몸을 벗어나자마자 그녀가 느낀 감정은 격렬한 환희.
벨린다는 기쁨에 휩싸여 칠흑 같은 어둠을 헤쳐 나갔다. 강력한 이끌림에 따라, 자신의 영혼이 곧장 [참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벧엘라! 기나긴 고행의 끝에, 마침내 내 영혼은 주신의 곁으로……!’
지금이야 ‘암흑 교단’이라 배척받고 있지만, 지하 교단의 본질 또한 주신을 향한 경배와 찬양.
단지 그들은 정교회와 달리, 지상에 내려오신 주신의 현신을 함께 떠받들 뿐이다. 각각 [애열], [파종], [참회], [안식]이라 불리는 네 명의 현신을.
그중에서도 벨린다는, 인간과 함께 끝없이 고행하시는 [참회]께 깊이 감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철이 들면서부터 매일같이 스스로를 향한 채찍질을 멈춘 적이 없었지.
‘벧엘라……?!’
한데 [참회]께, 주신의 곁에 당도했다는 기쁨도 잠시. 벨린다는 이제 막 밝아진 영안이 보여주는 진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주신이 있는 곳도, 심지어는 피안의 세계도 아니었으니까.
‘…음?’
텅 비어 있는 검은 우주 공간.
그 가운데, 스스로의 밀도를 이기지 못하고 주위의 모든 것을 끌어들이며 붕괴해 가는 거대한 존재가 있었다.
‘…참회시여?’
벨린다는 일순 자신의 영안을 의심했다.
저것이 정말로 자신이 그리워마지않던 그 ‘주신의 현신’인가?
아니, 신은커녕 제대로 된 인격인지도 의문이었다. 벨린다의 눈에 그것은, 그저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많은 톱날이 달린 커다란 바퀴로 보였으니까.
비대하다 못해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거대한 가시 바퀴가, 메아리치는 비명과 폭포처럼 쏟아지는 핏물에 휘감겨 그녀를 맞이한다.
-참회하라.
어쩌면 주신께서 내리신 또 다른 고행이나 시련이 아닐까? 벨린다는 잠시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어디선가 빨려 들어온 영혼 하나가, 그 가시 바퀴에 걸려 순식간에 갈가리 찢어지는 광경을 보기 전까지는.
[끄아아아……!]
마지막 단말마마저 제대로 내뱉지 못한 영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퀴에 갈려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
급격하게 불안해진 벨린다는, 영한을 부릅뜨고 그 불가해한 존재를 제대로 바라보려 노력했다.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어!
‘…참회여! 나의 주신이시여!’
하지만 소용없었다. 처음에는 하나의 형상이라고 생각했던 가시 바퀴가, 시선을 집중하면 할수록 제대로 된 형체와 경계를 잃어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하나이되, 하나가 아니었다.
거대한 가시 바퀴는 또 다른 수많은 피의 바퀴가 모인 집합체였고, 그 피의 바퀴 속에는 더욱더 많은 고통의 바퀴들이 가득 들어차 제멋대로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바닷가의 모래알을 한눈에 담는 것이 훨씬 수월하리라.
바로 그때, 우주의 별만큼이나 많은 그 가시 바퀴들이, 일제히 형형한 눈을 깜박이며 벨린다를 짓이기듯 마주 응시해 왔다.
-참회하라.
아! 저것을 누가 감히 ‘피안’이라 칭할 수 있는가. 오롯이 ‘고통’만을 위해 존재하는 보이는 저것을.
일찍이 역사 속에 수없이 등장했던, 그리고 미처 등장하지 않은, 영혼을 끔찍하게 담금질하는 모든 고문과 고통들의 총합체.
‘아니야! 담금질이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저것의 실체를 단 한 순간이라도 버틸 영혼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자살하는 모든 이들의 좌절감이요, 도시와 나라, 심지어는 문명 그 자체를 기꺼이 불사르게 만드는 지독한 후회였다.
별을 땅으로 떨어뜨리고 은하마저 스스로 빛을 잃게 만들 비통함이었다. 죽음 이후에도 스스로에게 참회의 기회를 허락하지 못할 참담함이었다.
그것은 감히 인간의 감각으로 형언할 수 없는, 온 우주가 내지르는 회한의 비명이었다.
‘아…….’
충격으로 덜덜 떨리는 영혼에 무자비하게 때려 박히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수만 수억의 목소리.
-참회하라. 참회하라.
‘아아아아…….’
-네가 존재함으로써 범하는 너의 원죄를 알라. 감히 뉘우치려 시도조차 하지 말고 그저 온몸으로 피눈물을 흘려라! 모든 죄를 남김없이 그 영혼으로 끌어안고, 그대로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세상에서 스러져라!
벨린다는 극심한 공포와 좌절에 휩싸였다. 차라리 영혼을 거듭 죽여서라도 당장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을 정도로.
그래. 아마도 저것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곧바로 그렇게 되리라. 그녀의 영혼은 저것의 존재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 것이다.
벨린다의 영혼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아냐! 저것은, 저것은 나의 주신이 아니야!]
아아그래인간을현혹시켜끌어당기는자비롭게마중나오는저무자비하고증오스러운톱날은황홀하고아름다운세례는위대한주신이라할지라도아니면참회그자체라할지라도수천수만번을두드리고귀한피로서칭송하며결국은흔적도없이사라지게만들어버릴고행이니만물에온전히깃들게하는축복이니그것만이영혼에유일하게허락된피안이며더는영혼을위한장소따위…….
바로 그때였다.
휘리릭-
갑자기 벨린다의 시야를 가로막는 검은 장막이 있었다.
[당장 눈을 돌리시오, 자매여!]
[아, 아아……!]
[저것을 똑바로 마주 봐서는 안 됩니다. 지금 자매가 느끼는 감정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 아니니, 더 이상 현혹되어선 안 되오. 우선 시선을 완전히 닫아 보도록 해요.]
그녀의 눈을 가린 것은 검은 로브를 입은 비쩍 마른 사내였다.
그래도 벨린다가 충격으로 덜덜 떨며 영혼을 가누지 못하자, 그는 결국 직접 그녀의 영혼을 이끌어 어딘가로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참회하라!
머릿속에서 끔찍하게 공명하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져간다.
[…다, 당신은?]
‘그것’에게서 얼마나 멀리 도망쳤을까, 조금씩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한 벨린다가 반사적으로 희미한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자 남자는 고개를 돌려 거뭇한 눈가를 부드럽게 휘었다.
[나는 마지막 안식의 형제이자, 모든 영혼들의 주인께서 임명하신 세 번째 사도라오.]
[안식의…….]
[그렇소. 내 영혼의 주인의 뜻에 따라 당신을 도우러 왔으니, 지금 그대의 영혼은 구원받았소.]
그렇게 벨린다는 처음 보는 남자에게 이끌려 또 다른 불가해한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창백하게 질려 있는, 아무것도 살아 움직이지 않은 완전한 죽음의 세계에.
그러나 한계까지 혹사당한 벨린다의 영혼에게는, 그 섬뜩한 고요함조차 마치 천국의 평온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 * *
[참회]의 실체를 접한 벨린다의 영혼은 크게 타격받았지만, 다행히도 회복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껏 수행이랍시고 제 몸을 학대한 것이-특히 죽기 직전까지 이단 재판부의 미친 인퀴지터로부터 고통받은 것이-그녀의 영혼을 한층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던 모양이었다.
짧게 잠에 빠졌던 벨린다는, 곧 의식을 회복하고 이 새로운 세계를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날 [참회]로부터 구한 것은 안식의 형제였지. 그렇다면 내가 이곳에 머무는 것 또한 [안식]의 의지라고 봐도 좋을까?’
처음에는 ‘주신의 또 다른 현신’께서 구원의 대가로 그녀에게 뭔가를 명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벨린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도통 [안식]으로부터 호출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벨린다는, 이 의외의 평화를 즐기기로 결심했다.
이곳은 완전한 죽음의 세계.
발아래는 깊은 잠에 빠진 회색 주검들이 끝없이 뒤엉켜 있고, 하늘에는 빛을 잃은 천체들이 부조처럼 얼어붙어 있는 경직된 공간.
시간이 흐를수록 이 세계에 대한 궁금증들이 피어났지만, 모든 것이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이곳에는 벨린다와 상호작용 가능한 영혼 자체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검은 영혼은 지나칠 정도로 과묵한 자였다.
[서둘러 많은 것을 알려 들지 마시오, 자매여. 지금은 그저 그분의 뜻에 따라 이곳에 영혼을 누이고, 편히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오.]
다행히 이따금 벨린다의 말 상대가 되어줄 친절한 선배가 하나 있긴 했다. 죽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자주 잠에서 깨어난다는 여인의 영혼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당신이 궁금해하는, 이곳의 진정한 주인을 뵐 수 있도록 도와 드리죠.]
여인의 제안에, 벨린다는 홀린 듯 그녀를 따라 날았다.
그들은 들판의 풀들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비석들과, 여기 저기 금이 간 납골당 항아리들, 그리고 바닥에 멋대로 누워 있는 수많은 주검들 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마치 거대한 전화가 한바탕 휘몰아친 듯한 광경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누워 있는 영혼들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감정들은 지극히 평온…….
[그만! 오래 한곳에 시선을 두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조금이라도 안식의 본질을 접하게 되면, 그 즉시 자신도 모르게 끝없는 휴식을 갈구하게 될 테니까.]
가녀린 여인이 하늘하늘 앞서 날아가며 주의를 준다.
[당신은 제법 격이 높은 영혼으로 보여요. 그러니 생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휴식이 필요할 테고, 그만큼 잠들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가 쉽답니다.]
그러니 너무 깊이 잠들지 않으려면, 분주히 돌아다니며 구경하되, 한곳에 오래 관심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여인이 재차 강조했다.
[물론, 마구잡이로 돌아다니다가 다른 영혼들의 잠을 방해해서도 안 되겠죠.]
벨린다는 앞서가는 여인의 모습에 시선을 주다가, 문득 오른팔이 사라진 채 너덜거리는 어깻죽지를 발견했다.
‘저이는 누구지? 딱 봐도 전사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대체 생전에는 뭘 하던 여인이었을까? 저 팔은 날붙이에 베인 것이 아니라, 마치 산짐승에게 사정없이 물어뜯긴 것 같구나.’
그러자 앞서가던 여인이 고개를 돌려 한때 팔이 있었을 자리를 내려다본다.
영혼의 생각이 고스란히 사념이 되어 전해지는 공간. 벨린다의 의문 역시 당연히 그녀의 귀에 들릴 수밖에 없었다.
[…험한 삶이 아니었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식의 재난은 아니었어요. 그냥 제 아이가 틈틈이 영혼을 뜯어 먹었을 뿐이죠.]
뜯어 먹… 뭐?
벨린다의 의문이 깊어졌지만, 그녀를 돌아보는 여인의 눈동자는 지나치게 메말라 있었다.
[하지만 제가 구원받은 것 역시 그 아이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수순대로 다른 마왕들에게 끌려가는 대신, 저는 환한 빛에 휩싸여 곧장 이곳으로 날아왔으니까요. 함께 죽은 이들 중 구원받은 영혼은 오직 저 하나뿐이랍니다.]
여인은 벨린다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젊은 나이에 산적들에게 끌려가 평생을 착취당하며 살아온 것.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이 키우던 아이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만 것.
[그건… 그건 너무나도 슬프기만 한 생이었지 않은가!]
벨린다의 탄식에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별것 없는 이야기랍니다. 막상 죽음을 맞이하고 나니, 제가 겪은 생전의 고통 따위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이곳에 잠들어 있는 영혼들 중에는, 간혹 보통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고의 삶을 버텨낸 자들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주변의 풍경은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누워 있는 영혼의 빈도가 점점 드물어지고, 버석한 땅과 부서진 무기의 파편들이 간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곳은… 누군가의 전장이었나?’
벨린다는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얼마간 여인을 따라 날았을까.
[자, 이곳입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벨린다는, 순간 그녀를 압도하는 장엄한 광경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검은 공동. 그곳에 수만, 아니 수십만에 달하는 악마의 주검들이 얽히고 얽혀 산처럼 우뚝 솟아 있는 장소가 있었다.
[저들은…….]
[주인께 대항하던 전대 ‘안식’의 권속들입니다.]
악마들의 심장에 박힌 무기는 채 녹슬지 않았고, 주검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피 또한 아직은 굳지 않았다.
죽음 이후에도 해방되지 못하고 잔뜩 일그러진 채 굳은 표정들은, 해일처럼 몰아닥친 재난에 온 힘을 다해 항거한 생생한 투쟁의 증거.
[놀랍지 않나요? 저렇게 많은 악마들이 한번에 ‘그분’을 향해 달려들었다 들었습니다. 유례없이 치열했던 세대교체의 흔적이라 하더군요.]
전율이 일었다.
저렇게 많은 악마들의 목숨을 취하여 권위를 세우고, 그들의 주검을 쌓아 오롯이 자신의 자리를 쟁취하였으니, 그 정상에 놓여 있는 검은 좌를 어찌 감히 왕의 옥좌라 칭하지 않으리.
[아아……!]
그리고 그 정상에 조용히 앉아 있는 존재를 마주한 벨린다는, 차마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느새 철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 그곳에, 그녀가 평생을 갈구하던 진실이, 영원한 피안이 있었다.
[그래! 바로 이분이야말로, 내 영혼의 진정한 주인이신……!]
* * *
후두둑!
거기까지 말한 벨린다의 눈에서, 갑자기 시커먼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Chapter 102: Chapter 402
Chapter Text
402. 피안 (7)
후두둑!
벨린다의 영혼이 갑자기 시커먼 피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한다.
덕분에 그녀의 이야기를 잘 경청하던 성진은, 난데없이 시야를 강타한 호러 테러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야 했다.
‘이런 젠장! 어쩐 일로 멀쩡해 보인다 했어. 역시나 저 녀석도 영락없는 악령이잖아!’
쿨쩍!
다행히 그녀는 금방 감정을 추슬렀다. 영혼답지 않게 검은 코를 킁 풀어내며, 벨린다가 젖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하여 저는 그곳에서 당신을 영접하게 된 겁니다, 주인이시여. 바로 당신의 덕분에, 제 텅 빈 영혼은 기쁨과 환희로 지극히 충만해졌습니다.]
“음, 벨린다. 이야기 중에 미안한데…….”
성진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고행을 통해 [참회]의 곁에서 피안을 찾겠노라 주장하는 참회 교단.
백번 양보하여 성진이 정말로 헤이즈가 말하는 그 [안식의 대주교]라 하더라도, 벨린다네와는 아예 계통부터 완전히 다른 거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멋대로 숭배의 대상을 바꿔도 되는 거야?
하지만 그 질문에 벨린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순수한 영혼의 모습이 되었으며, 따라서 결코 주인께 거짓을 고하지 않습니다. 제가 섬겨야 하는 이가 곧 당신임을 모를 수 없었습니다. 예비된 자여, 영혼의 주인이시여!]
벨린다의 논리는 단순했다.
그녀가 살아생전 [참회]를 섬긴 것은, 그가 다른 이름으로 세상에 현현한 주신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모든 암흑 교단의 형제들이 스스로를 참된 주신의 종이라 자부하는 데는 그러한 이유가 있었다.
한데 주신을 위해 예비된 자가, 지금은 또 다른 주신의 현현이신 [안식]과 함께한다.
즉, 그녀는 [안식] 자체를 섬긴다기보다는, [예비된 자]를 통해 구원을 실현하실 주신을 섬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 설명에 표정을 굳히고 있던 성진이, 잠시 침묵하다 되물었다.
“…거짓된 구원을 피해, 또 다른 ‘거짓’을 섬기겠다는 거냐?”
[주인이시여! 물론 제가 믿고 있던 ‘참회’는 거짓된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좌’에서 느낀 의지는, 영원토록 이어질 ‘안식’의 약속만큼은 절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
[감히 단언컨대, 오직 당신께서 계신 그곳만이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피안’이었습니다.]
몸을 납작하게 조아린 거구의 여인은, 기이하게 번들거리는 눈을 들어 성진을 열렬히 바라보았다.
[하여, 저는 성심을 다해 당신을 섬기겠나이다. 원하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 증거를 보이겠습니다.]
“증거?”
[네. 생전의 신념을 등지고 오직 주인을 따르겠습니다. 주인께서 잠적한 자코모 밀로를 찾도록 돕겠습니다. 당신께 참회 교단에 대해 제가 아는 것들을, 당신이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 모두 말씀드리겠나이다!]
…어, 이런.
순간 성진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 것은, 기쁨이 아닌 미묘한 거북함이었다.
어디선가 일거리가 잔뜩 늘어나고, 아버지와 마사인 경이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은데?
* * *
예감은 좀처럼 빗나가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성진의 계획을 전해 들은 마사인은, 상복부에 손을 얹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부터 내쉬었다.
“밀로 상단주의 체포… 말씀입니까?”
“그래.”
자코모 밀로가 행방불명된 이후, 공판은 피고 없이 진행되었고 그에게는 끝내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마계수를 소환해 대규모 살인을 저지른 악마 숭배자의 당연한 말로다.
이미 상단의 재산은 제국에 귀속되었고, 자코모의 목에는 소량의 현상금까지 걸렸지. 이제부터는 누구든 그를 발견하기만 하면, 합법적으로 그를 죽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저하. 자코모 밀로는 이미 암흑 교단 깊숙이 몸을 숨긴 뒤일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하면 그를 찾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잘 아시겠군요.”
마사인은 무거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난 수년간 인퀴지터들이 혈안이 되어 온 대륙을 뒤졌습니다만, 암흑 교단의 본거지를 찾아내는 것은 끝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우리 부서가, 굳이 그런 일에까지 나서야 하는 겁니까?”
그의 지적은 타당했다.
자질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모시는 황자가 성회에 호출된 것이 고작 수일 전이다. 그런데 지금 당장 제대로 된 성과를 보여도 부족할 판에, 갑자기 영영 기약 없는 수색에 뛰어들겠다니?
“애초에 악마 숭배자를 체포하는 일은 이단 재판부의 몫이 아닙니까? 증거를 모아 그를 깔끔하게 재판에 넘긴 것만 해도, 마물 전담부는 이미 차고 넘칠 만큼 일한 겁니다.”
“뭐, 그건 그렇지만.”
성진은 슬쩍 미간을 구겼다.
근데 마사인 경. 이제 슬슬 그자를 잡아내지 않으면, 조만간 대단히 골치 아파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단 말이야. 그렇다고 이단 재판부 놈들이 일하는 꼴을 보고 있자면 영 미덥지가 못하고.
게다가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지만, 전혀 가망 없는 수색이라 할 수도 없었다. 성진에게는 무려 참회 교단 고위직 관련자가 정보 제공자로 붙어 있지 않은가.
물론 약간의 한계는 있었지만.
-주인이시여. 저는 육신의 한계를 완전히 벗었기에, 본래라면 당장이라도 자코모 밀로의 현재 위치를 주인께 알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영혼을 강하게 속박하는 일종의 ‘제약’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약?
-예. 그 ‘제약’이, 인력을 벗어난 정보를 함부로 발설해 괜한 반동을 일으키지 말라 경고합니다. 하여 주인께 드릴 수 있는 정보는, 아마도 살아생전 제가 알고 있었던 것들로 대부분 제한될 겁니다.
그렇기에 벨린다의 영혼은 자코모 밀로의 행방을 ‘알려준다’고 하지 않고, ‘찾도록 돕겠다’고 말한 것이다.
-…….
성진은 무심코 그릇 위에 놓인 작은 불꽃을 돌아보았다. 벨린다가 하는 말을 듣고서도, 아직은 아무런 동요를 느끼지 못하는 태평한 마왕을.
이 이야기가 더 길어져서 좋을 것은 없겠다, 그렇게 판단한 성진은 벨린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그래, 좋아. 그럼 ‘참회 교단의 교구장 벨린다’로서, 네가 알고 있는 교단의 모든 정보들을 털어놔 봐.
성진이 잠시 어젯밤 일을 회상하는 동안, 마사인의 간곡한 만류는 계속되었다.
“저하. 이미 대륙 각지를 떠도는 엑소시스트들에게 자코모 밀로의 인상착의가 도착했을 겁니다. 악마 숭배자를 색출하는 것은 그들의 임무니, 이번 일도 그냥 그들에게 맡기시면 안 되겠습니까?”
“흠. 엑소시스트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성진은 마사인을 향해 깔끔하게 다려진 정복 옷깃을 두드려 보였다.
툭툭.
“마사인 경. 내가 지금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경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아!”
마사인이 허를 찔린 듯 멍한 얼굴을 한다.
그래. 비록 성회에서 보인 [멸악] 퍼포먼스가 모조리 사기 행각이라 할지라도, 어쨌거나 정식으로 입단하긴 했으니 성진도 이제 엄연한 엑소시스트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자코모 밀로의 수색 역시 마땅히 나의 임무가 되겠지. 내가 일전에 성회에서도 말했잖아? 주신의 사도로서 시련을 달게 받고, 델크로스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따라서 앞으로 정교회는 물론, 다른 네 개의 성기사단에도 마물 전담반에 대한 아낌없는 협조를 기대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더랬다. 그때 베니투스 추기경이나 다른 고위 사제들의 얼굴이 참 볼만하게 변했었지.
“허어?”
그런데 옆에서 갑자기 작은 헛웃음이 들려왔다. 한쪽 구석에서 재미로 [이계 묵시록]을 뒤적거리던 오웬이었다.
“뭐야. 그때 그게 제국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뜻이었냐? 나는 또, 앞으로 뭐든 네 멋대로 할 예정이니, 감히 방해할 생각하지 말라고 늙은이들을 협박하기라도 한 줄 알았지.”
“…협박이라니, 사람을 뭘로 보고.”
성진이 뚱하니 대꾸하자, 타악! 소리 나게 책을 덮은 오웬이 어딘가 묘한 시선을 던져왔다.
“너, 보면 볼수록 정말 낯설다. 별궁에서 하릴없이 뒹굴거리기만 하던 놈이, 왜 지금은 안 해도 되는 일까지 사서하고 있냐?”
“그러는 너는, 왜 괜히 여기까지 따라와서 잔소리 중인데? 그렇게나 할 일이 없어?”
그러자 오웬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한껏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와, 진짜 너무하네! 언제는 이 형님에게 부디 마물 전담반 일을 도와주십사 하고 그렇게나 사정사정하더니! 막상 병을 털고 일어나니, 이제는 내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 이거냐?”
대체 누가, 언제 사정사정했다는 거야?
“웃기지 마! 행정 업무가 서툴다며 거절할 땐 언제고! 그렇게 뻔뻔하게 형님 소리를 할 거면, 우선 로건부터 좀 본받아 봐. 걘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았더라도 기꺼이 도와주러 왔을 거야!”
“그거야 로건은 밸도 없는 호구니까 그런 거고.”
“…게다가 넌 아까부터 괜히 사무실을 어지르기만 하고 있잖아? 로건은 내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성심성의껏 일했단 말이야!”
“그거야 당연히 로건이 밸도 없는 호구니까 그렇지.”
그, 그런가?
하마터면 설득당할 뻔했던 성진은, 이내 마음을 다잡고 오웬을 험악하게 쏘아보았다.
“애초에 왜 네가 로건더러 그런 소리를 하는 건데? 물론 녀석이 꽤 허술하고 호구 기질이 있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너처럼 아무한테나 퍼주는 생각 없는 멍청이는 아니라고!”
“웃기시네! 지금 누가 할 소릴! 아까 보니까 여기 있는 누군가가, 자기 일도 아닌 업무를 사서 하겠다고 나서더란 말이지. 대체 지금 네가 하는 짓이 로건보다 나은 점이 뭐야?”
“뭐, 인마? 지금 날 누구하고 비교하는 거냐! 말 다 했냐?”
“그러는 너는! 왜 날 로건 같은 호구랑 비교하냔 말이야!”
두 사람은 새삼 진지한 태도였다. 물론 다른 이들의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지만.
참담하게 일그러져가는 마사인의 얼굴을 돌아보며, 지브릴 의원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마사인 경. 두 분이 지금 왜 애꿎은 로건 황자님을 경쟁적으로 욕하고 계신 거죠?”
“…….”
* * *
다행히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언쟁은 자연스레 소강상태에 빠졌다.
성진이 마물 전담반에 출근한 것이 워낙 오랜만인지라, 어떻게든 밀려 있는 서류들을 처리해야 했던 것이다.
“남부 지방 3분기 역병 보고서가 모두 누락된 것 같아, 지브릴 의원. 어떻게 된 거지?”
“아, 저하! 그 건이라면 일전에 마사인 경께서 두 차례 검토하셨어요!”
“그래? 만만찮은 작업이었을 텐데 고생했겠네. 그런데 마사인 경?”
“예, 저하.”
“저 구석에 있는 서류는 또 뭐지? 교외 각지에서 발견된, ‘악마의 씨앗’ 조사에 대한 협조 공문……?”
“아, 그건!”
마사인 경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린다. 눈치를 보아하니, 딱히 부서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 판단하고는 성진 몰래 옆으로 치워버린 모양.
“그… 송구합니다, 저하. 행정부의 부서란 부서에는 전부 돌린 공문이라 들은 터라…….”
“그래?”
…뭐, 별로 상관없나?
이거라면 아마도 이미 해결이 끝난 그 건이겠지. 성진이 일전에 성회에서, 그 규상 세계의 아이템들을 속 시원하게 삭제해 줬으니까.
성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공문을 한쪽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나저나 앞으로가 문제군.’
마사인 경이 평소 악마와 관련된 문제에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성진은 엑소시스트로서의 업무도 병행해야 하는 처지 아닌가. 앞으로는 악마나 악마 숭배자에 대한 보고서도 심심찮게 올라올 텐데.
‘저 양반, 이대로 가면 만성 위염은 괜찮을까?’
성진은 조금 복잡한 상념에 사로잡혀, 옆에 있던 다른 서류 뭉치들을 펼쳐 들었다. 어찌나 분량이 많은지, 아예 작은 책자처럼 한데 엮여놓은 서신들이었다.
-모레스 저하. 키프로스로 향하던 중 선지자를 자처하는 미친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자가…….
-저하! 소문을 듣고 있자니 갈수록 가관입니다! 글쎄…….
-저하! 벤소 후작령으로 가야 합니다! 그 미치광이 현자라는 놈을 반드시 잡아 조사해야 한단 말입니다! 여기에 그 이단의 증거를 첨부하니, 반드시 조치해 주십시오!
“이건……?”
“아, 발레리 경의 서신입니다. 최근 벤소 후작령에 자리 잡은 ‘현자’라는 배교자에 대한 보고를 매일같이 보내오고 있습니다.”
“그래?”
사서 일거리를 만들어 오는 친구가 또 하나 있구나. 성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첨부된 증거물을 펼쳐 들었다. 등사지로 조잡하게 인쇄되어 있는 작은 전단지였다.
-현자님께서 전하시는 미래의 비밀.
대륙은 머지않아 닥쳐올 무시무시한 지옥의 불길을 앞두고 있다! 들으라! 오직 깨어날 자만이 빛나는 구원의 문을 열게 되리라!
크기는 손바닥만 한데, 그 속에 혹세무민을 위한 모든 내용들이 알차게 기재되어 있었다.
심지어 전단지 한편에는 작게 그림도 그려져 있다. 거센 화염에 휘말려 몸부림치는 인간들을 그린 삽화.
“흠.”
성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전단지를 덮었다. 그러나 아까의 공문처럼 한쪽으로 던져버리리라는 마사인의 기대와 달리, 성진은 그것을 곱게 접어 기사단 정복 안으로 집어넣었다.
“…저기, 저하?”
“응? 왜, 마사인 경?”
“설마…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오나, 그 건도 조사에 착수하실 생각이십니까?”
성진은 불안해 보이는 마사인 경에게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래, 당연하지. 발레리 경이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건인데, 아마 무척 중요한 일이 아니겠나? 이런 애매한 일일수록 우리 마물 전담부가 나서서 해결해야지.”
마사인 경의 얼굴이 그 즉시 해쓱해진다.
“하지만 저하! 이건 아무리 봐도 보통의 사기꾼이 아닙니까? 알고 보면 온 대륙에 이런 시답잖은 작자들이 넘쳐나고 있을 겁니다!”
“이 건은 좀 달라. 설마 우리 발레리 경이 내게 허튼 보고를 이렇게 열성적으로 올리겠어?”
“아니, 평소에는 그 친구의 말 따위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시면서……!”
“그건 오해야, 마사인 경. 난 그 친구를 동료 성기사로서 충분히 존중하고 있다고.”
“대체 언제부터 성기사였다고 그런 말씀을……!”
성진과 마사인이 그렇게 입씨름을 하는 동안, 어쩐 일인지 오웬은 자리에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는 작은 텍스트 창 하나가 깜박이며 정보의 갱신을 알려오고 있었다.
[메인 퀘스트 - 자신이 있을 자리는 스스로 찾아내자! (완료)]
갑자기 허무하게 완료되어버린 퀘스트.
‘역시 내 짐작이 맞았어. 이번 메인 스트림은 모레스의 옆에 있어야 진행할 수 있는 거야!’
아마도 자신이 있을 새로운 자리라는 것이, 마물 전담반을 의미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다음 퀘스트 완료 조건 역시 마찬가지겠지.
[메인 퀘스트 ? 미치광이 선지자를 찾아라! new!]
[퀘스트 등급 : B]
[사람의 일상은 간혹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인해 크게 변하기도 합니다. 어찌하겠습니까. 인력을 벗어난 운명의 뒤틀림에 나약한 인간은 그저 힘없이 비명을 지를 수밖에요. 여기에, 우연히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하고 차라리 미쳐버리기를 선택한 인간이 있습니다. 그를 만나 그날의 진실을 전해 들으세요. 스스로의 처지를 다시 돌아볼 기회를,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보상 : 100 P캐시]
[*본 상품은 판게아 클로니클 상점 창에서 사용 가능합니다.]
상태창 씨치고는 보상이 후한 편이다. 진행에 제법 시간이 걸리거나, 완료를 위해 한동안 고생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
“그러니까 그런 자들은 제대로 된 사기꾼도 못 됩니다. 그냥 길에 흔하게 널린 미치광이란 말입니다! 이런 자들을 일일이 조사하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겁니다!”
“뭐, 자코모 밀로를 찾는 김에 겸사겸사 벤소 후작령에도 들러 보자는 거야. 발레리 경이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사안인데, 마사인 경은 그가 신경 쓰이지도 않아?”
옆에서 다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오웬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최근 퀘스트들은 하나 같이 맥락이 없네. 별다른 정보도 없이 이렇게 다짜고짜 사람을 찾으라니, 늘 생각하지만 상태창 씨는 너무 막무가내란 말이야…….’
Chapter 103: Chapter 403
Chapter Text
403. 머리 탑 (1)
델크로스의 기후는 내륙치고는 비교적 온화한 축에 속했다. 특히 습기가 대폭 줄어든 맑은 가을의 공기는, 명징한 지성과 충만한 감성을 동시에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대는 내게 아름다운 하늘을 약속해요.
빛나는 별을 주겠노라 새처럼 속삭이죠.
하지만 나는 세상에서 오직 단 하나.
바로 보석 같은 당신의 영혼을 원해요.
사각사각.
그렇게 가을의 감성에 젖어 밤새 작업하던 극작가 하나가, 커튼 너머로 스며드는 햇살이 강해질 무렵 깃펜을 내렸다.
“조금만 더 쓰면 1장이 마무리되는데. 끄응…….”
안타깝게도 오늘의 작업은 여기까지인 모양.
깃펜을 양손으로 공평하게 쥘 수 없다는 사실이 슬슬 신경 쓰이기 시작하면, 그날의 집중은 이미 완전히 끝났다고 봐야 했다.
“흐음.”
극작가는 허리와 목을 이리저리 돌린 후, 지금까지 작업한 내용물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럭저럭 재미있게 진행될 거 같긴 한데, 아무래도 인형이 주인공이다 보니 조금 위험하려나?’
현재 그녀가 작업하고 있는 [인형의 노래]는, 한 인간이 만든 아름다운 인형이 살아 움직이며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오르토나의 고전 문학이다. 당시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주체 의식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담았다 하여 높이 평가받았지.
하지만 이곳 델크로스에서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자칫 잘못하면 ‘생명의 창조’라는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단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딱히 금서로 지정된 건 아니라 건드려 보긴 했는데, 역시 권선징악의 느낌을 살짝 가미해서 교훈을 주는 방향으로 가는 쪽이 안전하겠지?’
잠시 고민하던 극작가는 이내 고개를 저였다.
될 대로 되라지. 뭐가 문제겠는가. 아마 자신의 애인이라면, 설령 논란이 생기더라도 단숨에 일축해줄 수 있을 텐데.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슬슬 끝낼까.”
그녀는 팔을 쭉 뻗으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마침 일을 마치기에 적절한 시각이기도 했다.
똑똑.
곧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마치 틀로 찍어낸 듯 똑같은 얼굴들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으니까. 그녀의 아이들인 헤르나와 가데스였다.
“일어날 시간이야, 조.”
“나와서 밥 먹어, 조.”
극작가는 답지 않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내 사랑스러운 보물들!
* * *
조슬린 랭스터.
비극의 변주자, 갈등의 마술사.
세간에는 본명보다 ‘소르본 선생’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 젊은 극작가는, 예민한 예술가들이 간혹 보이곤 하는 기벽이 남들에 비해 유달리도 두드러진 인간이었다.
그녀는 일단 사물의 ‘비틀림’을 잘 견디지 못했다. 특히 ‘아름답지 않은’ 조형이나 ‘비대칭적’인 형태에 유독 쉽게 피로를 느끼곤 했다. 뭐든 보이는 것을 이상적인 형태로 끊임없이 보정 처리하려 드는 머릿속 때문이었다.
이 탓에 대인관계가 엉망진창으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심지어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도 제대로 보려 들지 않았다. 밤샘 작업 후에 종종 비대칭적으로 푹 꺼지는 눈두덩을 견딜 자신이 없어서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아이들은, 함께 지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존재들이라 볼 수 있었다. 언제나 양쪽에서 똑같이 말을 걸어오고, 얼굴의 조형 또한 완벽하게 아름다웠으니까.
생각해 보라.
지독한 뇌의 피로감 때문에 사랑하는 아이들을 향해 진심으로 웃지 못하게 된다면, 부모에게 있어서 이 얼마나 크나큰 비극일 것인가!
“그렇지. 나같이 불완전한 성격 파탄자가 완벽한 외모의 애인을 만나 연애를 하고, 또 이런 보석 같은 아이들까지 얻게 되다니. 이건 정말 주신이 내리신 기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아무렴.”
쿨쩍.
새삼스러운 안도감에 코를 훌쩍이자, 똑같은 두 쌍의 보라색 눈동자가 걱정의 기색을 띠며 그녀를 올려다본다.
“몸이 좀 안 좋은가 봐.”
“또 밤새 작업한 거야?”
조막만 한 손 하나가 조슬린의 이마 위로 올라온다. 행동력이 강한 헤르나였다.
“열은 없는 거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약은 잘 챙겨 먹어. 조.”
또 다른 작은 손 하나는 냅킨으로 그녀의 입가를 훔쳤다. 늘 사려 깊은 가데스다.
“아무리 영감이 대중없이 떠오르더라도,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해. 조.”
그렇게 작은 아이들에게 덜떨어진 애 취급을 받곤 하는 조슬린은, 행복함과 동시에 어딘가 찜찜한 감상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이 아이들은 내게 있어 주신이 내리신 기적이지만, 정작 아이들에게 있어서 나는 대체 뭘까? 잘 보살펴 주고, 가끔 놀아줘야 하는 반려 인간?’
그 찜찜함이 걷잡을 수 없는 자괴감으로 치닫기 전에, 조슬린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 참! 얘들아. 조만간에 나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가지 않겠니?”
“공연을?”
“갑자기?”
“그래. 내가 얼마 전에 각색한 극이 지금 대유행이잖니! 너희들이 좋아하는 그 ‘머리 탑의 암브로시아’ 이야기 말이야. 그게 마침내 베르트랑 거리의 가장 큰 극장에서도 공연될 예정이란다!”
순수 창작극으로 이름을 떨치던 조슬린이, 첫 각색 작품으로 ‘머리 탑의 암브로시아’를 고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그녀의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늘 읽어달라고 부탁하던 동화였기에 자연히 먼저 손이 갔을 뿐.
“흐음?”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쌍둥이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게 아닌가.
“뭐, 그때는 딱히 우리가 그걸 좋아했다기보다는.”
“모레스가 늘 찾아와서 읽어 달라고 졸라댔으니까.”
“…응?”
“우리는 그냥 모레스가 바라는 걸 곁에서 들어준 것뿐이야.”
“모레스는 그때 글을 잘 읽지도 못하고, 조금 외로워했거든.”
“그리고 그 애는 사람들로부터 일괄적 형태의 염상을 모으고 싶어 했지.”
“아무리 약한 염상들이라도, 집단의식이 뭉치면 힘을 발휘할 수 있댔어.”
그들의 대답에 조슬린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3황자와는 대면한 적도 없는데, 그가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와 책을 읽어달라고 조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아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녀는 곧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서 멋대로 납득했다.
“너희들은 그렇게 모레스가 좋니?”
쌍둥이들의 입에서 매일같이 오르내리는 이름 아닌가.
오죽했으면 조슬린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3황자를 친숙하다고 여기게 될 정도일까.
“흠. 좋으냐고 한다면 좋은 쪽이긴 하지.”
“걔는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흥미롭잖아.”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외였다. 쌍둥이들이 이내 뾰로통한 얼굴로 투덜거리기 시작했으니.
“근데 요즘 모레스는 빨강이하고만 놀아.”
“뭐, 가끔 다른 애들을 부를 때도 있지만.”
“한동안은 매일같이 놀아줘서 재밌었는데, 최근에는 모레스가 너무 많이 바빠졌어.”
“수련이니 마물 전담반에만 신경 쓰고, 이제는 밤에도 잘 놀아주려 하지 않는다고.”
“그렇다고 모레스가 또 아파서 누워 있기를 바라면, 성황 아빠가 너무 불쌍하잖아.”
“걔가 그럴 때마다 큰 사고가 터지는 게 더 문제지. 아빠 폐하가 너무 힘드니까.”
“…….”
조슬린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3황자가 아픈 동안 정기 알현 시간이 대폭 줄어들지 않았던가. 덕분에 헤르나와 가데스는 한동안 저택에서 잘 나가지도 않고, 하루 종일 서로 체스만 두면서 지냈던 것이다.
“음… 그 대신, 요즘은 너희들이 황궁으로 놀러 가잖니?”
3황자가 병석에서 일어난 후, 쌍둥이들은 전처럼 점심을 먹으러 자주 진주궁으로 찾아가고 있었다.
“응, 요리가 맛있어. 베르트란 & 리 참연어 전문점에서 직접 배달 오기도 하거든.”
“조도 다음에 우리와 함께 가보지 않을래? 모레스라면 아마 조를 환영해 줄 거야.”
“글쎄…….”
“우리 이참에 아예 황궁에서 살아도 좋을 거 같아, 조.”
“맞아. 모두와 함께 지내면 무척 재미있을 거라고, 조.”
“…….”
조슬린이 그런 제안을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의 애인이 바라던 일이기도 했고.
하지만-
“헤르나. 가데스. 너희는 황궁 생활이 얼마나 빡빡한지 알고는 있어? 지금처럼 하루 종일 잠옷만 입고 지낼 수도 없고, 체스를 두고 놀면서 밤을 새우지도 못하게 될 거야.”
“…그런가?”
“그럴지도?”
아닌 게 아니라, 조슬린은 지금의 생활에 지극히 만족하는 중이었다.
물질적인 풍요와 사회적 지위를 마음껏 누리고, 밤낮이 바뀌어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하는 일상. 바로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주체적 삶의 최고봉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있지! 황궁의 구조는 끔찍한 비대칭이란 걸 아니? 그곳은 우리가 사는 이 저택처럼 완벽하고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지 못한단다.”
“황궁보다 이 저택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세상에 조밖에 없을 거야.”
“뭐, 그래서 우리가 조를 좋아하는 거지만. 보고만 있어도 흥미롭잖아.”
“그래그래. 칭찬 고마워.”
식사를 완전히 마친 조슬린은 곧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밤샘 작업의 여파가 슬슬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황궁에 갈 거지? 그럼 잘 다녀오렴, 얘들아. 너희들을 보내고 나면 나는 한숨 늘어지게 잠이나 자야겠어.”
“와…….”
쌍둥이들의 얼굴이 대번에 못 말리는 사춘기 딸을 둔 부모처럼 바뀌었다.
“밥 먹고 바로 자는 거야, 조?”
“건강에 무척 나쁠 거야, 조.”
“괜찮아, 얘들아.”
자식들보다 더 철이 없는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두드리며 대꾸했다.
“어차피 황궁에 놀러 가면, 너희 아버지가 뭐든지 말끔하게 치료해 주잖니?”
* * *
같은 시각, 황궁.
조용히 식기를 움직이고 있던 네이트가, 순간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음? 갑자기 왜 그러세요? 음식 맛이 이상합니까?”
“아니, 아니다. 무척 맛있다만…….”
네이트는 오랜만에 아들이 가져온 ‘훈제 참연어 에그 베네딕트’라는 생소한 요리를 내려다보았다.
어째서인지 무척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왜일까? 늘 가족들을 위해 최선의 행동을 한다고 믿고 있건만, 왜 요즘은 때때로 자신이 뭔가를 심각하게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할까.
“이번에 네가 또 뭔가를 한 게냐?”
“…네?”
그러자 사고뭉치 아들놈이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곧 뿌듯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아, 네. 그러니까 저 또 출장 간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꽤 믿을 만한 정보원이 생겨서, 이번에 잘하면 자코모 밀로를 체포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체포…….”
“네. 가는 길에 겸사겸사 슈미트 지부장에게 맡겨둔 사업도 점검하고요. 마지막으로 벤소 후작령에도 잠시 들를 겁니다. 발레리 경이 저한테 특별히 조사를 부탁한 건이 있어서요.”
“…….”
네이트는 조금 묘한 기분이 되어 물끄러미 아들을 바라보았다.
최근에 그의 아들은 말끔하게 다려진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 정복을, 어째선지 자랑스러운 기색으로 입고 다니는 중이었다. 이는 단순히 아이가 노래를 부르던 그 ‘공권력’을 얻었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늘 아들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는 네이트는, 간혹 습관처럼 정복을 쓰다듬는 아이의 손길에서 미약한 안도감을 함께 감지하곤 했다.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짐작 가는 바가 있기에,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네이트는 대단히 착잡해지고 마는 것이다.
“참! 이번 출장은 어디까지나 성기사단의 공식 업무니까, 예산은 성회에서 제대로 타낼 생각입니다. 용돈은 따로 안 주셔도 돼요.”
저한테 돈을 왕창 뜯기고 나면, 성회의 영감님들도 이번에는 속 꽤나 쓰리겠죠?
기분 좋게 히죽거리던 아들놈이 호로록 차를 들이켜더니 아, 하고 덧붙인다.
“현상금도 제대로 타 올게요!”
“…….”
정말, 정말 이 아이가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둬도 좋은 것인가…….
네이트는 방금 삼긴 참연어 조각이 어쩐지 목에 걸린 것 같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Chapter 104: Chapter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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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 머리 탑 (2)
출장 준비는 성진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먼저 비용.
다행히 성회에서는 군말 없이 성진이 요구한 예산을 내어주었다. 깎일 걸 생각해서 제법 후하게 불렀는데도 말이지.
-주신의 사도로서, 델크로스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 그러니 앞으로 정교회는 물론, 다른 네 개의 성기사단 또한 마물 전담반의 일에 전력으로 협조해 줄 거라 믿네. 그것이 곧 주신의 뜻이니까.
성회에서 대충 던져본 으름장이 통하긴 한 모양. 물론 협조를 한다기보다는, 아마 저놈이 어디까지 하는지 두고 보자는 심산인 것 같았지만.
그리고 인원.
몇 안 되는 마물 전담반 사람들을 모조리 키프로스로 보낸 뒤라, 아무래도 마사인 경과 진주궁 상주기사들을 중심으로 인원을 새로 꾸릴 수밖에 없었다.
“나도 갈래.”
의외인 점은, 오웬이 덜컥 성진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는 것.
“네가? 왜?”
“딱히 할 일도 없잖아? 초상화 작업도 거의 막바지라, 이제는 꼬박꼬박 아틀리에에 가지 않아도 되거든. 참! 모레스. 바르토자를 데려가도 되냐?”
“바르토자? 그게 누군데?”
“응. 푸르마 부족의 생존자인데, 불쌍하게도 바르샤 최강의 부족장으로부터 미움을 샀지. 겉보기와 달리 소심한 놈이라 내가 근처에 없으면 엄청 불안해하거든. 아마 함께 데려가면 짐꾼 역할은 톡톡히 할 거야.”
성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혼자 속 편해 보이는 장남에게 시선을 주었다.
오웬의 긴 머리에는 어느새 풍성한 가마우지 깃털들이 되돌아와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황도에 붙잡아 둔다 한들, 고위 사제들의 반감이나 사기 딱 좋은 이교도의 꼬락서니.
“그래, 그러든가.”
성진은 순순히 허락했다. 저 녀석더러 황자답게 차려입으라고 또 잔소리를 하느니, 차라리 곁에 데리고 다니는 쪽이 마음이 편할지도.
그러자 이번에는 지브릴 의원도 번쩍 손을 들었다.
“저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저하? 언제 부상자가 생길지 모르니, 제가 동행하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한동안은 꼭 참석해야 할 학회도 없고요.”
“뭐, 그다지 상관은 없는데.”
긍정적인 답변을 하려던 성진은, 문득 그녀의 자리에 수북이 쌓여 있는 불길한 단지들을 발견하고 말았다. 각각으로부터 지독하고 독특한 꽃향기가 진동하는, 거대한 향수 단지들을.
“…설마 지브릴 의원. 저 많은 향수들을 모조리 들고 갈 생각이야?”
“네, 저하! 저는 역병과 싸우는 의사입니다. 얼마나 오래 황도를 떠나 있을지 모르니, 방역을 위한 준비는 가능한 철저히 할 생각이에요!”
“아! 다시 생각해 보니, 역시 한 명은 사무실에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역병 보고서들도 처리해야 하고.”
“네에? 아니, 저하! 대체 어째서?”
그렇게 충격받은 지브릴 의원을 제외한 대강의 인원이 꾸려졌다.
상주기사들을 나누어 선별하고, 그 과정에서 쿠르트 경과 마리아 경이 서로 성진을 따라가겠다고 다툰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마물 전담반으로 처음 보는 엑소시스트 하나가 찾아왔다. 정식으로 작성된 전입신고서와 함께였다.
“그대가 내 선임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저하.”
그는 부스스한 고수머리에 납작한 안경을 눌러쓴, 인상 흐린 장년의 남자였다. 마치 오랜 가뭄에 잔뜩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처럼 메마른 인상.
레안드로스 경이나 샤론 경도 그랬지만, 사람이 삭막해 보이는 게 엑소시스트들의 전반적인 특징이 아닌가 싶었다. 오랜 시간 고독과 싸우며 홀로 악마를 상대하다 보면, 어느샌가 다들 그렇게 변해가는 모양이지.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은 다른 기사단처럼 신입을 모아놓고 훈련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대신 신입 엑소시스트에게는 한동안 그를 지도해 줄 선임이 개별적으로 붙게 되죠. 일종의 도제식 지도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 이해했어. 하지만 왜 갑자기 자네가 우리 부서로 전입 오는 거지? 마물 전담반에는 이미 샤론 경이 있는데?”
그러자 엑소시스트는 자세를 바로 하며 대번에 정색을 했다.
“저하, 저는 샤론 경을 뛰어난 실력을 가진 후배로서 존중합니다. 하지만 설마, 진심으로 그녀로부터 제대로 된 뭔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 기대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
매번 히죽히죽 정신 나간 듯이 웃는 엑소시스트를 떠올린 성진은, 무심코 그의 말에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뭐, 암흑 교단의 본거지를 치는 일이다. 성기사가 하나라도 더 붙어주면 이쪽이 오히려 고마운 일이지.
“그래. 뭐, 어쨌든 잘 부탁하네. 그…….”
전입신고서를 슬쩍 곁눈질하며 성진이 덧붙였다.
“…로버트 경.”
“부디 로베르라고 불러주십시오, 저하. 제 양친께서는 브르타뉴 출신이셨고, 저 또한 지금까지 브르타뉴식 이름으로 불려 왔습니다.”
높낮이가 거의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 언뜻 보기에는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였지만, 그래도 성진이 알고 있는 엑소시스트들 중에서는 가장 사교적으로 보이는 인간이다.
성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답했다.
“그러지, 로베르 경.”
* * *
여타의 성기사단과 달리,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을 하나의 거대한 공권력이라 말하기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다. 기본적으로 엑소시스트들은 대륙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홀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렇다 보니 어쩌다 신입 엑소시스트가 들어오더라도, 체계적으로 그를 단련시킬 마땅한 방안이 없었다. 그래서 일정 기간 동안은 베테랑 선배를 따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일종의 관례가 되었다나.
그렇게 신입 기사는 선배를 마치 스승처럼 따르며, 엑소시스트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저하께서는 이례적으로 입단과 동시에 부관급의 지위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니 일개 엑소시스트가 저하를 스콰이어 취급하며 달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죠.”
물론 그 이외에도, 귀한 성황가의 황자를 오지 여기저기로 데리고 다닐 수 없는 이유 따위 차고 넘쳤다.
그 덕에 경험 많은 엑소시스트인 로베르 경이, 역으로 후배를 따라 전입신고를 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거, 자네에게는 조금 미안하게 됐네, 로베르 경.”
“아닙니다, 저하. 저도 슬슬 내지 근무를 할 때가 되었지요. 더욱이 저하께서는 무력의 기초가 탄탄하시니, 제가 그리 오랜 시간 따라다니지 않아도 괜찮을 겁니다.”
거기다 성진에게는 다른 신입 엑소시스트와 다른 특이 사항이 또 하나 있었다.
선임 성기사들이 가장 골치 아파하는 교육이 바로, 후배에게 신성 결계에 대해 가르치는 거라나?
그런데-
“나는 신성력이 없는데?”
“네, 그러니 가르칠 거리가 큰 폭으로 줄어들게 되었군요. 외람되오나, 저나 저하에게나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르는 이들이야 단순히 신성력을 뿜어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하지만, 신성 결계를 치는 데는 생각보다 복잡한 과정이 수반된다.
자신이 가진 힘을 일정한 형태로 만들어 안정적으로 외부에 발출하는 일. 어떻게 생각하면, 신성력으로 특정 모양의 검막을 펼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특히 다른 성기사들과 함께 대규모 결계를 펼치는 일은 더 문제다. 그러니 정확한 범위를 일정한 강도로 방어하는 동시에, 타인의 힘과 어우러지도록 함께 공명시키는 수련을 지겹도록 반복해야 한다는 것.
“어, 그거 듣기만 해도 골치 아픈데?”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저하.”
와, 신성력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한데, 그러면 나는 딱히 로베르 경에게 배울 게 없는 거 아닌가? 검술은 이미 마사인 경이 봐주고 있고.”
“아닙니다, 저하. 성기사에게는 신성 결계보다 더 중요한 기본 소양이 있습니다.”
“기본 소양?”
“네. 바로 사열식과 의장 시범, 그리고 수월하게 정복 세탁하기 등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
그러고 보니, 언젠가 로건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긴 했지.
-외부인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성기사단에 입단하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바로 제대로 의장을 갖추고 사열식을 하는 거야.
-사열식? 검술이 아니라?
-그래. 어떤 의미에서는 성기사단의 본질을 꿰뚫는 일이기도 하지. 주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기 위해서는 ‘무력’을 행사하는 것보다는, 멋지게 ‘보여주기’가 더 중요하다는 거니까.
당시는 반쯤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 정말로 그런 걸 익힌다고?
하긴, 로건이 쓸데없는 농담을 하는 성격은 아니지.
“그리고 신성력이 없는 저하께서 무엇보다 제대로 배우셔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미리 준비된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이죠.”
거기까지 말한 로베르 경은, 들고 있던 커다란 가방을 척척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저하의 입단이 결정된 후, 레안드로스 단장님께서는 곧바로 저를 저하의 선임으로 명하셨습니다. 한참 활동 중인 엑소시스트를 황도로 불러들이는 일은 잘 없지만, 그 이례적인 임명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이유?”
“네. 감히 자부하건대, 저는 엑소시스트들 중에서도 가장 도구 사용에 익숙합니다. 퇴마 도구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방법을, 저하께 그 누구보다도 자세히 가르쳐 드릴 수 있다는 뜻이죠.”
로베르 경이 장담한 대로, 그의 가방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물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크고 작은 성수 병들부터 주신의 문양이 아로새겨진 복잡한 술식의 스크롤들. 한 무더기의 나무 송곳과 나무망치. 그리고 검은 실이 칭칭 감겨 있는 낡은 지푸라기 인형 등…….
아마도 저것들 모두가 사제들의 축성을 받은 신성한 도구들이리라.
[으와. 무서운 놈. 저런 흉악한 것들을 들고 다닌다고?]
책상 위에 앉아 있던 마왕 놈이 진저리를 쳤다. 놈에게는 그야말로 흉기의 향연으로 보이겠지.
“……?”
그러던 중, 성진의 눈을 끌어당기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눈처럼 하얀 곰 인형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어딘가 익숙한 디자인이다.
“로베르 경. 이건?”
“아, 그건 이번에 새로 축성한 부적입니다. 아이들의 수호자, [빈스 베어]라고 하더군요. 최근에 엑소시스트들이 자주 축성해서 길동무 삼아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죠.”
“…엥?”
뭐야. 정말 빙수 3호를 본뜬 인형이야?
그런데 대체 왜 엑소시스트가 이런 인형을 부적으로 가지고 다녀?
“이왕이면 의미 있는 형상에 힘을 부여하는 쪽이 강한 힘을 발휘하니까요. 게다가 보기에도 꽤나 귀엽지 않습니까?”
“…….”
“황도 인사들 사이에서도 제법 유행이라 하더군요. 전혀 모르셨습니까?”
와. 테디 베어가 어디에든 잘 먹히는 디자인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설마 엑소시스트들 사이에서도 유행할 줄이야!
* * *
로메인은 최근 수상한 기류를 느끼고 있었다.
정보 수집을 위해 수일에 한 번씩 방문하는 베르트랑 거리, 그곳의 분위기가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빈스 베어! 주신의 작은 은총을 지키는 빈스 베어를 사세요!”
“주신의 사도이신 시슬레 성녀님을 위해, 기꺼이 지상으로 내려온 깜찍한 주신의 기사!”
가판대에 일렬로 놓인 하얀 곰 인형들을 발견한 로메인은 속으로 조용히 식은땀을 흘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이 델크로스 차원에 테디 베어가 있어?’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상한 것은, 거리 여기저기에서 펼쳐지는 단막극들이었다.
“아아, 애달프다! 초대 성황 폐하를 향한 달의 요정의 짝사랑 이야기!”
“새로운 극이 왔습니다! 아름다운 성 바스티안과 그의 충실한 수하, 그림자 요정의 기묘한 모험!”
“장난꾸러기 불의 요정 인형극을 보러 오세요! 관람하시면 맛있는 불의 요정 사탕도 드려요!”
로메인은 도무지 지금의 현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십 년 전, 달의 요정 올리비에 이야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적이 없진 않지만, 이렇게까지 단숨에 거리의 분위기가 바뀌어 버리다니?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은 아무리 봐도, 이례적이다 못해 작위적이기까지 하다.
‘…어째서 갑자기?’
그 이면에 누구의 입김이 닿아 있는지 모를 수가 없는 바. 그래서 로메인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두려움을 느끼며, 무력하게 몸을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들은 다 무엇을 위한 포석인 거지? 아무것도,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구나! 델크로스의 수호자! 대체 그는 어떠한 미래를 보고 있기에……!’
Chapter 105: Chapter 405
Chapter Text
405. 머리 탑 (3)
로메인은 터덜터덜 임시 집결지로 삼은 동굴로 되돌아왔다.
본래는 정보를 수집하러 간 김에, 베르트랑 거리에서 인형극이나 한판 펼치고 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요정’들의 물결 속에서, 도저히 자신의 낡은 인형들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치 지금의 성황과 자신의 격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만 같았으니까.
그렇게 힘없이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마침 바닥에서 뒹굴거리던 [파종]이 그를 돌아보며 묻는다.
“그것들은 다 뭐냐, 인형아?”
로메인은 무심코 노인의 얼굴을 뒤덮어가는 검버섯에 시선을 주었다.
급하게 조치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임시로 마련한 육체. 노인의 몸은 마왕의 그릇이 된 이후 빠르게 쇠락해가고 있었다.
‘조만간 새 그릇을 준비해야겠군.’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며, 로메인은 주책없이 바닥에 퍼져 있는 고위 마왕을 향해 정중하게 대답했다.
“제 보잘것없는 인형들입니다, 질병의 군주시여. 이곳에서 매일같이 수선하는 걸 보지 않으셨습니까?”
“뭐, 보긴 했는데. 네 말대로 어찌나 볼품이 없는지, 그 누더기들이 설마 ‘인형’이라 불릴 만한 물건인 줄은 몰랐지.”
그의 신랄한 평가에, 로메인은 새삼스레 자신의 손인형들을 내려다보았다.
“…….”
주관적인 시각으로도 그의 인형들은 썩 상태가 좋지 못했다.
여기저기 손때가 타 이미 본래의 색도 알아보기 어려운 데다, 군데군데 서툰 솜씨로 바느질한 땜빵 자국도 눈에 들어온다.
본래 빨간색이어야 할 불의 마왕 인형이, 이제는 회색의 용사 인형과 아예 구별되지 않을 지경. 이대로라면 설령 인형극을 펼쳤더라도 유의미한 성과를 보기는 어려웠으리라.
염상의 바탕이 되어야 할 [형태]가 이렇게까지 무너져 버렸으니, 아무리 목소리의 힘으로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한들 결국 염상 결계를 구축하는 데 한계가 생길 수밖에.
“너덜너덜하군. 보아하니 특정 대상을 겨냥한 인형들 같은데, 혹시 저주의 [반동]으로 망가져 버린 거냐?”
놀랍게도 고위 마왕의 눈썰미는, 누더기 인형들을 훼손한 부자연스러운 힘의 흔적을 단번에 파악해 냈다.
“꼴에 상대도 되지 못하는 표적을 대상으로, 저주를 담은 염상 결계를 치려 들었던 모양이군. 인형아. 대체 그 어설픈 도구들을 가지고 누구를 해치려 했지?”
“…….”
수개월 전, 황도를 지키는 성황의 기척이 일시적으로 약해졌던 일이 있었다.
당시 로메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황도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를 찾아 제대로 된 [염상 결계]를 펼치려 시도했었다. 그의 숙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살아서 의념을 일으키는 상대를 염상으로 공격하려 들면, 당연히 그에 대한 [반동]이 생기게 마련.
완전히 적의 숨통을 끊지 못한 인형들은, 되레 그 반동에 의해 손상되기 시작했다. 몇 차례 극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마치 수백 년의 세월을 정면으로 맞은 것처럼 형편없이 망가지고 말았지.
‘그래도 이로써 확실하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용사와 불의 마왕, 두 인형 모두에게 반동이 생겼다는 건, 그 둘이 지금도 멀쩡히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뜻이니까.’
세대교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숙적은 결국 불의 마왕이 되지 못한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은 불의 마왕은, 원한을 잊지 않고서 지금까지도 내 영혼을 쫓아 이 델크로스 차원을 헤매고 있는 거겠지.’
이 사실 또한 얼마 전 직접 확인한 바 있었다. 로메인이 어설프게나마 영혼의 단말을 만들어 황궁에 잠입했던 날의 일이다.
당시 불완전한 비술을 흉내 내느라 영혼의 방어가 약해지자, 불의 마왕은 그 즉시 자신을 추적해 그가 점령한 인간의 몸속까지 쫓아 들어오지 않았던가!
-너냐? 네놈 새끼가 나한테 그런 하찮은 공격을 날린 거냐?
잠시 그때의 일을 돌이켜보던 로메인은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당시는 단말을 잃은 충격에 미처 신경 쓰지 못했는데, 그때 불의 마왕은 자신을 전혀 못 알아보는 눈치가 아니었던가.
-아, 네놈이냐? 너무 하찮아져서 몰라볼 뻔했네! 죽지도 못한 것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냐!
-뭐? 이 새끼야? 너 나 알아? 너 정체가 뭐야?
설마.
‘나를… 기억하지 못하나? 그저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았으니, 남아 있는 염상의 흔적을 따라 공격한 자를 추적해 왔을 뿐인 건가?’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불의 마왕이, 자신을 감쪽같이 속여 모든 것을 잃게 만든 꿈의 마왕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아니면 인형사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나란 존재는, 더는 자신이 쫓는 [꿈의 마왕]이 아니라는 뜻인가?’
지끈-!
불완전한 기억에 깊이 몰두한 탓일까, 머릿속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통증이 인다. 로메인은 반가면 속에 감춰진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언젠가 인형사로부터 예기치 못하게 분리되며, 로메인은 기억의 일부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받았다.
그 탓에 지금의 그는 자신과 용사 그리고 불의 마왕이 종국에 어떠한 결말을 맞이했는지 또렷하게 기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사실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만일 이대로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용사’와 ‘불의 마왕’은‘ 향후 끊임없이 로메인의 안위를 위협하는 걸림돌로써 깊숙이 자리매김하겠지.
‘그러니 당장 끝장을 내지는 못하더라도,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그리고 착실하게 놈들을 말살해 나가야만…….’
그렇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로메인은, 문득 그때까지도 말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노인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크게 헛숨을 들이켰다.
인간의 영혼 따위 단숨에 압살할 수 있는 절대자의 시선. 그 무서운 시선이, 마치 자신을 관찰이라도 하듯 진득하게 훑어 내리고 있는 것이다!
“……!”
황도에서 받은 충격으로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이 분명했다. 무려 고위 마왕의 질문을 들은 척 만 척하고서, 혼자 잡생각에 빠져 있다니!
“…소, 송구합니다, 파종이시여. 별일 아닙니다. 그저 제가 모시는 왕자님의 정적을 멀리서 제거하려 했을 뿐이니까요.”
로메인은 재빨리 말을 둘러댔다.
“하찮은 인간사에 불과하니, 위대하신 질병의 군주께서 굳이 관심을 두실 일은 아닙니다.”
불완전한 기억과, 언제든 자신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숙적의 존재.
이 커다란 약점들을 섣불리 고위 마왕에게 들켜서는 곤란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는 순간, 그는 자신을 잡아채어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곧바로 진짜 인형사의 편에 붙을 게 빤하니까.
“정적? 모시는 왕자? 뭐야, 그거 강한 놈인가?”
“그리 강하지 않기에 그냥 멀리서 손을 써보려 한 겁니다.”
“그래? 그런데 왜 실패했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이 미천한 인형이 성황의 눈을 피해 벌릴 수 있는 수작이라곤, 결국 그런 어설픈 염상 결계밖에 없더군요. 그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준비를 마치지 못했습니다.”
“흐음…….”
완전히 납득할 만한 설명은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파종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 네 별거 아닌 사정 따위는 알 바 아니지. 근데 생각할수록 웃기지도 않는구나! 인형이 인형을 가지고 노는 셈이 아니냐? 킬킬킬!”
“…….”
역린을 건드리는 무례한 언사였으나, 감히 어느 누가 저 고위 마왕에게 이를 따지고 들 수 있는가.
대신 로메인은, 마음을 가다듬고 당면한 문제에 대해 절대자의 조언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파종이시여. 실은 당신께 의논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바로 베르트랑 거리를 온통 휩쓸고 있는 요정 열풍에 대해서.
* * *
“그래. 요정이라고? 지난 천 년 간 허접한 경전에만 매달리던 신성제국에서 말이지? 거,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로메인의 설명을 모두 들은 노인은 묘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정교회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어쨌거나 참 재밌을 것 같구나! 그 희한한 광경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물론 불가능한 바람이었다. 성황의 [은총]이 황도를 감싸고 있는 한, 악마가 감히 그곳으로 접근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어쨌거나 우리에게는 나쁠 것 없는 얘기다, 인형아. [악]에 대한 인간들의 정신적 방어가 조금이나마 약해질수록, 내 휘하의 교단이 대륙을 잠식하는 것도 훨씬 쉬워지겠지! 침략에 더욱 가속이 붙지 않겠냐?”
집단의식이 강제하는 맹목적인 믿음은, 영혼의 무의식적인 방어에 예상보다 훨씬 큰 영향을 발휘한다.
특히 인과율의 제약으로 차원의 정신적 침략을 우선시해야 하는 고위 마왕들의 입장에서, 이는 더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겠지.
한데 지금 델크로스의 수호자는 그러한 이점을 깡그리 무시하고, 선악의 경계조차 불분명한 존재들을 하나둘 인식의 범위로 끌어들이며 인간들의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있다.
로메인이 혼란에 빠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앞으로 있을 본격적인 침략에 대비해 경계를 단단히 하는 것도 모자랄 판에, 스스로 나서서 인간들의 방어력을 약화시키다니!
“…그렇다면 델크로스의 수호자는 대체 무슨 목적을 가지고 그런 일을 벌이는 걸까요?”
“글쎄다, 인형아. 내가 그자의 복잡한 속을 어찌 알겠냐?”
노인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텅 비어가는 정수리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뭐, 빤한 일 아니겠냐? 그자 역시 네가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하려는 거겠지. 황도 인간들의 집단의식을 이용해서, 이 차원에 ‘요정’에 대한 새로운 ‘염상’을 넓게 덧씌우는 작업을 하는 거다.”
“주신을 향한 맹목적인 신앙이 주는 방어력을 포기하고, ‘요정’이란 불확실한 존재를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말입니까? 어째서요? 실익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뭐, 요정도 요정 나름이니까.”
그렇게 대꾸한 파종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킬킬 기분 나쁜 웃음을 터뜨렸다.
“한데 인형아, 너 그거 아느냐? 처음 델크로스의 수호자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는 대륙의 악마란 악마는 깡그리 소탕할 기세로 날뛰었다. 어찌나 악마들을 잡아 죽이는 데 열중했던지, 손에 들어오는 도구라면 그야말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용했었지.”
심지어 성황이 직접 마계로 쳐들어온 적도 부지기수. 어떻게 인간이, 그것도 주신의 대리자라는 자가 저렇게까지 정신 나간 짓을 할 수 있는가!
당시 고위 마왕들이 느낀 당혹감이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그자는, 자신의 휘하에 제법 강력한 악마까지 하나 부리고 있더구나! 처음 그놈을 봤을 때 내가 어찌나 놀랐던지.”
그 말에 로메인이 흠칫 놀라며 파종을 바라보았다.
“…악마…요?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마다. 이 몸이 너에게 왜 허튼소리를 하겠느냐?”
딱딱하게 굳은 로메인의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 관찰하던 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누가 알겠느냐? 어쩌면 말이다-”
노인의 장난스러운 눈매가, 그답지 않게 깊어졌다.
“이번에도 델크로스의 수호자에게, 그때 이상으로 강력한 패가 들어온 건지도 모르는 일인 게다.”
* * *
“이건 레몬 파이.”
[우와! 레몬 파이다!]
“이건 곰 고기 커틀릿.”
[와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곰 고기다!]
성진이 유리 그릇 위로 잘게 자른 음식을 던질 때마다, 하늘거리는 붉은 불꽃이 날름날름 그것들을 태워 없앤다.
그 꼬락서니를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로베르 경이, 납작한 안경을 바로잡으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분이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불의 요정’ 님이시군요. 저하의 손에 요정님의 불꽃이 닿는 거 같은데, 혹여 뜨겁거나 하지는 않으십니까?”
“어, 괜찮아. 로베르 경.”
성진은 본래부터 마왕의 불꽃에 해를 입지 않았다. 엄청 뜨겁다는 느낌만은 고스란히 전해지곤 했지만.
한데 최근에는 놈으로부터 느껴지는 온도가 처음보다 현저하게 떨어져 있었다. 마왕이 부단히 열기를 조절하려 노력한 탓이다.
-내 멋진 유리 접시가아아!
그동안 실체가 없었던 탓에, 마왕은 갑자기 얻은 불꽃 몸체를 외부 환경과 조율하는 데 꽤나 애를 먹었다. 덕분에 한동안은 값비싼 접시들을 여럿 못쓰게 만들어 버리곤 했지.
하지만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이제는 놈도 음식을 빠르게 연소시켜 흠향을 하면서도, 동시에 그릇을 멀쩡히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온도를 찾아냈으니까.
그래서 지금은 장인들이 열과 성을 다해 만든 다면체 유리그릇에 앉아, 성진으로부터 편안하게 음식들을 받아먹고 있는 거다.
“으악! 뜨거워! 손가락에 물집이이이!”
그러니까 저건 어디까지나 마왕의 고의라는 뜻이다. 슬쩍 불꽃에 손을 가져다 댄 하벤 경이, 화상을 입고 꼴사납게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상황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게 왜 허락도 받지 않고 얘를 만지려 드는 거야?”
“네에? 하지만 저하! 아멜리아 황녀님이나 다른 기사들은 다들 괜찮았지 않습니까?”
하벤 경은 화상 입은 손가락을 입에 넣으며 울상을 지었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불의 요정님은 유독 저만 미워하시는 것 같단 말입니다!”
“그거야 자네가 매번 무례한 짓을 하니까 그렇지. 잔말 말고 어서 닌니아스 의원한테 가서 치료나 받아, 하벤 경.”
그렇게, 평소보다 유난히도 평화로운 오후가 흘러가고 있었다.
Chapter 106: Chapter 406
Chapter Text
406. 머리 탑 (4)
성황이 정무에 복귀한 이후, 황궁은 일견 빠르게 평온을 되찾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의 모습에 불과했다. 언제든 다시 터져 나올지 모르는 용암처럼, 식어가는 암석 아래에는 아직도 치열한 의혹과 혼란이 뜨겁게 들끓고 있었으니까.
우선 성회의 고위 사제들.
그들은 교묘한 악이 속삭여오는?아아, 주신이시여! 두렵게도 정말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지도 모릅니다!-현혹의 목소리에, 일생 동안 지켜왔던 신앙의 방어막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어찌하겠는가. 선과 악에 무뎌진 스스로의 눈과 귀를 닫고, 그저 주신께서 어서 이 가혹한 시련을 거둬 주시기를 부단히 기도드릴 수밖에.
그런 겉보기와 다른 내부의 동요와 긴장은, 최근 황궁 밖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 일례로 황가를 밀착 보좌하는 정보 조직, ‘원숭이 망루’를 들 수 있겠다.
오랜만에 성황에게 간단한 보고를 마치고 돌아온 21호는, 평소 은밀한 정적에 휩싸여 있던 주점 지하의 공기가 지나치게 날 서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여기 분위기가 왜 이렇습니까?”
그러자 반나절 만에 몰라보게 해쓱해진 19호가 그를 향해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린다.
‘몰라! 제발 날 좀 살려줘!’
아니나 다를까. 그 서슬 퍼런 공기의 중심에는, 19호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베테랑 정보 요원들이 있었다.
“9호 선배와… 13호 선배?”
실로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게 된 둘은, 21호가 알기에 애초부터 그다지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 모두, 뭔가 단단히 심사가 꼬인 듯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정보원들의 주된 업무가 몸을 쓰는 험한 일이다 보니, 간혹 부대끼는 중간중간 마찰이 생기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문제는 짬 깨나 되는 두 사람이, 하필이면 애꿎은 19호를 사이에 끼고서 알력 다툼 중이라는 거겠지.
“웃기네. 주인 모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무신 만고의 충신이 된 듯 기고만장인감. 넌 이걸 어찌 생각하남? 19호야.”
아담한 체격의 9호가, 역시나 그다지 크지 않은 19호의 어깨에 정겹게 팔을 올리며 묻는다. 수년간 바르샤 부족들 사이에서 치이느라 발음이 심각하게 무너져, 유난히 건들거리는 듯 느껴지는 가벼운 말투다.
19호는 까마득한 선배 앞에서 뭐라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었다.
“모신 기간이 길다고 해서, 신뢰 관계 또한 그에 비례하지는 않겠지. 얼마나 밀접하게 곁에 두느냐에 따라, 정보원에 대한 주인의 신뢰가 드러나는 것 아니겠어? 어디 대답해 봐, 19호.”
말쑥하게 키가 큰 13호가 싸늘한 표정으로 19호를 노려본다. 안 그래도 평소 빈틈없는 선배가 정색을 하니 배로 무서웠다.
19호는 이제 완전히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아하!’
21호는 그 언쟁의 내막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 출장 간다는 마물 전담반의 문제구나.’
듣자 하니 13호 선배는 이번에도 모레스 황자를 따라간다 했지.
하지만 지난 수년간 남부 전선에서 오웬 황자를 성심성의껏 모셨던 9호에게는, 어째서인지 이곳에 남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황도에 계속 머무르면서 누군가를 찾으라는 임무를 받았다던가?
아마 실력에 유난히 자부심이 넘치던 9호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두 사람, 너무 무신경한 게 아닌가? 정작 저기 있는 19호야말로 가장 오래 로건 황자를 모셔왔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토벌대를 따라가지 못했는데.
“뭐라? 지금 말 다 했남? 19호야, 저 근본 없는 바르샤의 잡것이 하는 소리를 너도 똑똑히 들었지?”
9호가 드디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버럭 화를 냈다.
자신과 썩 사이가 좋지 못한 후배 정보원이, 역시나 한때 자신의 주인을 괴롭히던 호감 가지 않는 황자를 모시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설 수밖에.
“훗! 과연 지금 이 자리에서 누가 바르샤 촌놈 억양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네. 이봐, 잘 듣고 있어, 19호?”
물론 이에 대항하는 13호도 만만찮았다. 평소 바르샤인이라며 그녀를 업신여기는 이들에게, 늘 실력으로 당당히 스스로를 증명해 온 깡 넘치는 선배였으니까.
파지직!
마주한 둘의 시선에서 위험한 불꽃이 튀어 올랐다. 오직 숫기 없는 19호만이, 그 살벌한 신경전 사이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를 뿐.
‘제발, 누가 여기서 제발 날 좀 빼내 줘!’
바로 그때였다.
쾅! 쾅쾅! 콰앙!
누군가 위층과 이어진 연통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숭이 망루의 책임자이자, 암살조직 ‘오베론의 손’의 간부인 브레만이었다.
가장 강한 강도로, 네 번.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저 신호는 브레만의 최후통첩. 즉 ‘작작 하지 않으면 가게 문 닫고 당장 내려간다!’라는 뜻이다.
“…….”
한층 무르익었던 긴장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9호는 물론 21호까지,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브레만의 혹독한 교육을 거친 기수들이었으니까.
“저, 저는 가보겠습니다! 로건 황자님께서 긴히 지시하신 일이 있어서!”
19호가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부랴부랴 서류를 챙기기 시작한다.
잠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려 생각했던 21호 역시 마음을 바꿔 발걸음을 돌렸다. 여기 계속 있다가 또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그럼 나도, 준비할 게 좀 있어서 이만.”
그렇게 13호까지 새침하게 몸을 움직이자, 곧 넓은 지하에는 풀 죽은 9호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쳇!”
9호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며 내심 입을 삐죽거렸다.
까마득한 후배들 앞에서 추태를 보였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오죽 속이 상해야 말이지.
“오웬 황자님도 정말 너무하시담. 다짜고짜 여기서 이……라는 사람을 찾으라니, 대체 그자가 뭐라고…….”
“…응?”
“네에?”
한데 뜻밖의 일이 생겼다. 이미 복도로 나섰던 13호와 19호가, 동시에 문 너머에서 9호를 돌아본 것이다.
“선배, 지금 누구를 찾는다고……?”
“…….”
“…음? 아아.”
예상치 못한 관심에 9호는 조금 당황했다.
“오웬 황자님께서 전부터 찾고 계시던 사람인데, 아마 델크로스 출신은 아닌 거 같암. 혹시 너희들, 이게 어느 지방 작명인지 알 수 있음? 좀 이상한 발음이었는데, 그러니까 이, 손…진?”
그렇게 또박또박 이름을 말해주자-
“아, 그건……!”
“어엇?!”
놀랍게도 13호와 19호, 두 사람 모두의 얼굴에서 어색한 깨달음의 빛이 스쳐 지나간다.
9호는 어리둥절했다. 어쩐지 다들 이 이름을 아는 것 같지 않아?
“너희들, 정말로 알앙? 이손, 진을?”
“아니, 그러니까…….”
그로부터 잠시 후, 9호가 그들로부터 전해 들은 진실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거, 그 발음이 까다로운 이름. 아마 저하의 애칭일 텐데.”
“애칭? 그나저나 저하라니, 그게 대체 누구?”
그러자 19호가 냉큼 대답했다.
“모레스 황자님입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로건 저하께서 간혹 둘만 계실 때 모레스 황자님을 그렇게 부르곤 하시더군요.”
뜻밖의 정보에 9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어어?!”
이손진이, 그 모레스 황자라고?
* * *
장기 출장을 준비하는 동안, 성진은 로베르 경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다.
무지했던 성기사로서의 소양?물론 정복을 세탁하는 요령은 에디스가 성진 대신 전수받았다-들은 물론, 지금까지 막연하게 알고 있던 악마종들의 분류 및 특성들에 대해서도.
그러다가 상식의 일환으로, 성기사들이 학을 뗀다는 신성 결계의 실체에 대해서도 대충 알게 되었지.
“이건 완전 기하학이잖아?”
복잡한 도형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교과서를 뒤적거리며 성진이 혀를 내둘렀다.
현재 신성 결계의 기초를 집대성한 인물은, 바로 5대 성황 당시의 유명한 신학자인 그라니우스라고 한다.
그 전까지는 성직자들이 만드는 결계라고 해봤자, 그저 무턱대고 신성력을 쏟아부어 정면에 큰 단면의 장막을 만드는 것에 그쳤다고 하지.
한데 그가 나타난 이후, 악마종의 특성에 따라 맞춤 결계를 치는 것이 가능해졌다.
보다 적은 인원으로, 그리고 더욱 효율적인 방식으로.
‘결계를 치는 인원과 대열의 각도, 그리고 감싸야 하는 대상에 따라 형태와 기울기, 높이까지 천차만별 달라지는 입체라니…….’
그렇게 해서 완성되는 결계는, 다각형의 구가 되기도, 혹은 다각뿔이 되기도 했다.
어느 것이든 만만한 모양이 아니다. 왜 성기사들이 신성 결계 연습에 그렇게 학을 떼는지 알겠는데?
“그나마 우리 엑소시스트들은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기껏해야 두 사람 정도가 연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하지만 대륙 여기저기 토벌을 다니는 릴리움 별동대 같은 경우는 사정이 많이 다르죠.”
온갖 종류의 해수나 악마를 상대로, 갖가지 결계를 펼쳐야 한다. 그렇다 보니 결계의 주축이 되는 자는, 당연히 기하학과 수학에 능할 수밖에 없다나?
릴리움 별동대는 물론, 그들을 이끌고 쏘다니는 로건까지 다시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저 로건의 주책맞은 팬클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리고 로베르 경은, 성진에게 퇴마에 사용하는 도구들에 관해서도 꼼꼼하게 가르쳤다.
물론 그중 대부분은 관심이 없어 한 귀로 듣고 흘렸지만, 간혹 성진이 생각하기에도 제법 쓸 만하다 싶은 물건들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한 달간 축성을 받았다는 작은 비표들이 그랬다.
이 비표는 주신의 문양이 아로새겨진 작은 송곳 형태의 도구들로, 던질 수도 있고 망치로 박아 넣을 수도 있게 만들어진 물건들이었다.
“각각이 가진 힘은 미약하지만, 비표 여러 개를 연이어 꽂으면 즉석에서 가벼운 정화나 결계의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로베르 경의 설명을 새겨들으며, 성진은 비표 한 뭉치를 집어 들었다.
타다다닥!
몇 개 시험 삼아 던져보니, 비표들은 성진의 의도대로 깔끔한 반원을 그리며 벽에 꽂힌다. 뒤에서 지켜보던 로베르 경이 나직한 탄성을 질렀다.
“훌륭하십니다, 저하! 혹시 따로 투검술을 배운 적이 있으십니까?”
“음? 그거야 뭐…….”
사실 성진은 전도유망한 암살자의 새싹. 이미 정예 요원 다샤로부터 요령을 쏙쏙 빼먹으며 성장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로베르 경에게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이 정도로 사용법이 간단하다면, 나도 요긴하게 쓸 일이 있겠는데?’
성진은 내친 김에 로베르 경으로부터 한 다발의 비표 세트를 받아 챙겼다.
“아!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도구를 아직 저하께 보여드리지 않았군요.”
주의를 환기시킨 로베르 경이, 가방에서 서둘러 작은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어린아이의 주먹보다도 작은 물건이었는데, 좌우로 침이 달려 있는 팽이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
“이것은 자이로컴퍼스라 합니다.”
“자이로컴퍼스?”
“네. 마기를 추적하는 데 쓰는 장치입니다. 홀로 악마를 추적해야 하는 엑소시스트들의 길라잡이가 되어주는 중요한 물건이죠.”
그는 탁자 위에 그 팽이를 조심스레 놓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신성력이 강한 이들은 아무리 미약한 마기도 느낄 수 있다고 하지요. 하나 신성력이 약한 저 같은 엑소시스트들에게는 이것만큼 유용한 도구가 또 없습니다. 이렇게 바닥에 내려 두기만 하면, 주변에서 가장 마기가 강한 방향을 알려주는…….”
하지만 로베르 경은 미처 설명을 마칠 수 없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자이로컴퍼스의 바늘이, 곧바로 방향을 돌려 성진을 가리켰으니까.
휘리릭!
“…….”
“…….”
잠시 방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Chapter 107: Chapter 407
Chapter Text
407. 머리 탑 (5)
부르르르…….
바깥쪽 팽이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와중에도, 내부의 바늘은 꼿꼿하게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다. 민망하게도 성황가의 황자를 똑바로 겨냥하면서.
멍하니 바늘을 바라보던 로베르 경은, 순간 흠칫 놀라며 자이로컴퍼스를 가방 안으로 후다닥 집어넣어 버렸다.
“큼큼. 이게 왜…….”
첫인상부터 유독 딱딱하고 건조해 보이던 로베르 경이었다. 한데 그런 그가 갑자기 눈에 띄게 당황하며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그, 변변찮은 물건을 보여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저하. 아마도 고장… 아니, 오염되었나 봅니다. 최근에 제가 축성을 좀 소홀히 했더니…….”
어, 괜찮아, 로베르 경. 빤히 보이는 상황을 무마해 보려고 굳이 애쓸 필요 없어.
“기자재 부서에도 제대로 항의하겠습니다. 내지 근무가 길어지다 보니, 이 친구들이 다들 기강이 빠져 가지고…….”
괜히 엄한 부서를 족칠 생각도 말고. 그 자이로컴퍼스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건 그대도 알고 나도 아니까.
“어쩌면 불의, 요정님이 내린 축복…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오해의 시련’이라더니 과연, 주신의 사도가 받는 시험이라는 것은 만만치가 않군요.”
“…….”
성진은 달리 대꾸하지 않고 찬찬히 로베르 경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는 내 옆에서 직접 이질적인 기운을 느낄 텐데,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신성력이 딱히 강하지 않은 프란시스조차, 최근에는 날 볼 때마다 매번 움찔거리고 있는데.’
하지만 성진은 곧 그 해답을 알 수 있었다. 로베르 경이 연이어 이런 제안을 해왔기 때문이다.
“저하. 자이로컴퍼스를 사용할 수 없다면, 순수하게 신성력만으로 마기를 감지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참에 마물 전담반에 다른 성기사를 하나 더 초빙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른 성기사를?”
“예. 이번에 편성하신 인원들을 보면, 저하와 저를 빼고는 성기사가 전무하지 않습니까?”
물론 성진을 제대로 된 ‘성기사’라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으니, 실질적으로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로베르 경이 전부다.
“그런데 하필 제 쥐꼬리만 한 신성력은 그나마도 [멸악]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제가 퇴마 도구 사용에 남들보다 능숙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죠.”
시력이 나쁘지 않은 그가 굳이 축성 받은 안경을 쓰고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 마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워낙 미약하다 보니, 특수 처리된 감지 안경으로 보조를 받아야 한다나?
“그렇군.”
어쩐지. 이 친구의 진주궁 출입 허가가 웬일로 순순히 났나 싶었어.
“마침 얼마 전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동기 엑소시스트가 하나 있습니다. 추적 실력이 무척 뛰어난 친구인데, 그녀를 데려오는 것은 어떨지요?”
“흠, 글쎄?”
성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럴 필요 없지 않을까? 굳이 다른 성기사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참회 교단을 추적하는 방법은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얼마 전까지 거기서 교구장을 지내던 사람이 지금은 내 권속이 되었거든.
오히려 마물 전담반과 관계도 없는 자를 달고 다녔다가, 괜히 정보의 출처를 의심받을 수도 있잖나.
아니면 이쪽을 퇴치하겠다고 덤벼들지도 모르지. 신성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성진으로부터 꺼림칙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고 하니까.
“일단은 이대로 간다.”
우리가 찾는 건 어디까지나 자코모 밀로지, 그와 계약한 악마가 아니잖아?
“지하에 숨어 있는 암흑 교단을 뒤지는 일이야. 조촐한 인원으로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성진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로베르 경은 더는 증원을 권유하지 않았다. 단지 조금 푸석해진 얼굴로 작게 우려의 한숨을 쉬었을 뿐.
“과연 감각도 둔한 제가 악마 계약자 추적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부끄럽게도 엑소시스트들 중에는 신성력이 가장 약한 축에 속하니까요.”
“괜찮아. 그보다는 실적이 더 중요하니까.”
성진은 그의 전입 신고서에 기재된 악마 토벌 이력이 대단히 화려했던 것을 기억했다.
“거기다 레안드로스 경을 보라고. 신성력이 아예 없는 그 양반도 무려 성기사단의 단장을 해먹고 있잖아?”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런데도 엑소시스트들 중 가장 굵직굵직한 성과를 올리는 것도 전부 그 양반 아냐?”
레안드로스 경은 다섯 성기사단 단장들 중 유일하게 신성력이 전무한 인간이다. 그런 이가 단장의 자리를 꿰찰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멸악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자연히 이런 의문이 따라왔다.
“그런데 레안드로스 경은 대체 어떻게 혼자서 악마 토벌을 다니는 거지? 신성력 부재로 마기를 감지하지도 못할 텐데. 그도 자네처럼 여러 가지 추적 도구를 쓰는 건가?”
그 묵직한 인상의 남자가, 로베르 경처럼 퇴마 도구를 바리바리 짊어지고 돌아다니는 모습도 잘 상상이 되질 않는다고.
“글쎄요.”
로베르 경은 보조 안경을 콧잔등 위로 바로잡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분과 함께 외지를 다녀 본 적이 없어, 실제 악마를 상대할 때 퇴마 도구들을 사용하시는지 어떤지는 잘 모릅니다. 단지 기자재 부서에 요청하는 물품은 거의 없으신 듯하더군요.”
“그럼 대체 어떻게?”
“하지만 조금은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 레안드로스 단장님은 기사단에 대대로 내려오는 귀한 성유물의 주인이시니까요.”
“…성유물?”
“네, 성 테르바키아께서 친히 휘두르셨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쌍둥이 곡검, ‘상현’과 ‘하현’ 말입니다.”
상현과 하현,
그것들은 대륙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무기형 성유물이다. 성진도 날림으로 입단식을 치르면서 대충 들은 기억이 있었더랬지.
그것들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당시 성인의 공격을 채 두 합도 버티는 악마가 없었다던가.
그렇다 보니 결국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된 거다. 기사단의 문양인 교차하는 은빛 갈고리는, 실제로는 갈고리가 아니라 한 쌍의 쇼텔을 상징하니까.
“쌍둥이 곡검의 힘은 단지 [멸악]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문에는 근방에 악마가 나타나면, 스스로 긴 검명을 울려 주인에게 경고한다고 하더군요.”
대대로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 단장에게 전해지는 쌍둥이 쇼텔. 그 전설의 무기들 덕분에, 레안드로스 경은 신성력이 전무함에도 가장 강한 성기사단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래전 황도가 악마종에게 잠식될 뻔했을 때, 성황의 곁에서 가장 많은 악마들을 베어 넘긴 인물 중 하나가 되었지.
“상현과 하현은 현존하는 성유물들 중 두 번째로 격이 높은 무기입니다. 격은 곧 무기의 강함이니, 레안드로스 단장님께서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강한 ‘멸악’의 도구를 늘 곁에 지니고 계시는 셈이지요.”
“음? 두 번째?”
성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그럼 첫 번째는? 그걸 쓰는 사람은 누군데? 상현과 하현이 그렇게나 강하다면, 첫 번째 무기 역시 악마 소탕에 엄청 유용할 거 아냐?”
그러자 로베르 경이 되레 의아한 듯 성진을 바라보았다.
“…네?”
“응? 왜? 뭐?”
“아니, 그…….”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로베르 경의 시선이 슬그머니 아래로 이동한다. 성진은 곧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있었다.
“호두까기?”
“…설마 정말로 모르셨습니까?”
호두까기.
수천수만의 대가리를 깨고도 흠집 하나 남지 않은 단단한 검.
-이제는 목검 대신 그걸 가지고 놀거라. 무슨 장난을 치건 여간해서는 부러지지 않을 거다.
성황이 직접 성진에게 무기를 건네며 했던 말이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인가?’
무려 신의 대리자가 반평생을 지니고 다녔다는 애검이다. 그 격을 귀함의 기준으로 본다면, 아마도 호두까기는 만고의 보물로써 칭송받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호오…….”
이제는 완전히 손에 익은 호두까기의 손잡이가 착 감겨든다. 그것을 잠시 살갑게 어루만지던 성진의 입가에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건 뭐든 뜻대로 하라는 아버지의 암묵적인 허락이라 봐도 좋지 않을까?’
무려 대륙에서 가장 강한 성유물이 성진의 손에 있다. 그가 흘리는 기운을 찜찜해할 순 있을지언정, 어느 누가 감히 그의 행보를 방해하려 들겠는가.
게다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고위 악마를 죽이더라도 함부로 의심할 수 없을 테지. 최강의 성유물인 호두까기의 소유자라면, 당연히 그런 이적도 하나둘 정도는 일으킬 법하지 않은가!
‘좋아. 정말 잘 됐어! 안 그래도 최근 거슬리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지. 이제는 그것들을 하나씩 찾아가서, 마음 편히 대가리를 깨기만 하면 되는 거구나!’
한데 바로 그때였다.
지금까지 성진이 흘리는 기운에도 꿋꿋하게 평정을 유지하던 로베르 경이, 갑자기 새하얗게 질리며 흠칫 뒤로 물러나는 게 아닌가!
‘응? 저 친구가 갑자기 왜 저래?’
그러자 그때까지 유리그릇 위에 조용히 앉아 있던 마왕 놈이, 깊은 한숨과 함께 성진에게 사념을 보내왔다.
[…이성진. 내가 너 제발 그렇게 웃지 좀 말라고 대체 몇 번을 말했어, 응?]
* * *
“…음?”
갑자기 묘한 한기를 느낀 파종이 고개를 들었다.
“뭐지? 날씨가 그리 추워진 것도 아닌데…….”
아니, 설령 정말로 기온이 내려갔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고위 마왕인 그가 고작 조금의 온도 차이를 춥다고 느낄 리가.
잠시 의아해하던 파종은 곧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
“인형아! 이 그릇의 수명이 다 되어 가는 모양이다. 좀 더 제대로 된 다른 그릇은 없는 거냐?”
그러자 한창 여장을 꾸리던 로메인이 하던 일을 멈추며 순순히 대답했다.
“그 몸을 준비할 때 함께 사로잡은 파종의 형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곳에 두고 갈 테니 부디 마음대로 쓰십시오, 질병의 군주시여.”
“그래? 그거 고맙…….”
무심코 대꾸하던 파종이 갑자기 인상을 와락 구겼다.
“잠깐만. 어차피 파종의 형제들은 모두 내 종들이 아니냐? 네가 내 것을 마음대로 빼돌린 것에 화를 내야 하는 거냐, 아니면 그것들을 도로 내게 고스란히 바친 걸 기뻐해야 하는 거냐?”
“당시는 그 외에 달리 그릇을 구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위대한 군주시여. 부디 저의 무례를 너그러이 용서하시기를.”
“뭐, 그래? 그렇다면야.”
파종은 휑하니 비어 있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그런데 인형아, 너 어디 멀리 가는 거냐? 갑자기 왜 짐을 모조리 꾸리고 있어?”
아닌 게 아니라, 로메인은 임시로 동굴에 두었던 짐들을-그래봤자 바느질 도구와 몇 개의 손 인형이 다였지만-모조리 등짐에 구겨 넣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껏 준비하던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지 않았습니까? 다른 길을 모색해야겠지요. 저는 이제부터 키프로스에 가 보려 합니다, 파종이시여.”
“키프로스에? 갑자기 거기는 왜?”
“이제 황도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오래전 그곳에 안배해 둔 것들이라도 되찾으려 함입니다.”
키프로스에는 예전에 로메인이-엄밀히 말하면 인형사로 지내던 시절-준비해 둔 몇 개의 기물들이 남아 있었다.
준비하던 계획 대부분이 무용지물이 된 지금, 그것들은 어쩌면 성황에게 대항할 마지막 패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키프로스의 대양에는 경계의 종족 하나가 숨어 있지. 지금쯤이면 그들의 지도자는 한낱 미물로 전락했을 테니, 잘하면 그것으로부터 손쉽게 [종족 열쇠]를 빼앗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본래라면 진작 그곳으로 향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차질이 생겨 조금 늦어졌습니다만.”
레오나드 왕자가 호언장담한 대로 제때 황녀를 꾀어낼 수 있었다면.
계획대로 황도 여기저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게이트가 열렸다면.
그리고 [인형사]가 모종의 이유로 갑자기 몸을 피해, 키프로스에 남겨 둔 마지막 인형에게로 도망치지만 않았다면.
하지만 로메인은 이제 모든 것을 잃은 채로, 과거의 자신이었던 인형사와 경쟁하여 모든 안배를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일이 잘 풀린다면 곧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질병의 군주시여. 부디 다음에는 기아의 군주와 함께 아세인에서 뵐 수 있기를.”
로메인은 정중하게 예를 취해 보인 후 천천히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
파종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
‘정말 가버리네? 귀찮은데 저놈, 지금 죽여 버릴까?’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저 인형은 본체가 아니라고 했지. 지금 저것을 죽여 봤자, 진짜 몸은 어딘가에 멀쩡히 살아남아 이후에는 [파종]을 지극히 경계하게 되리라.
놈은 이오니아의 잃어버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코드]를 직접 짜는 능력은 그냥 보면 별것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간혹 대단히 성가신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탐욕도 그렇게 말했어. 저놈은 [미궁]의 숨겨진 입구를 알고 있다고.’
그렇다면 조금은 더 지켜볼까?
그렇게 결정한 파종은, 동굴 구석으로 들어가 인형이 두고 간 새로운 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최근 몸을 보살피지 못해 깡말라버린 체격에 덥수룩하게 수염까지 자라 있는, 참으로 볼품없어 보이는 남자였다.
‘클레멘스라…….’
파종은 슬쩍 훑어본 것만으로 남자의 이력을 알아낼 수 있었다.
본래 자신의 품에 들겠다고 서약한 파종의 형제이니, 그가 마음대로 기억을 엿보고 조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지금 쓰고 있는 그릇과 함께 오래전 황도에 숨어들었던 또 다른 파종의 형제였다.
어쩌다 운 나쁘게 인형에게 사로잡힌 후, 이지를 잃은 상태로 계속 그들을 따라다니는 중이었지. 이제 더는 예전의 신실하던 모습을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딱하긴 했지만 거기까지. 파종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이것도 저것도 다 변변찮다. 최근에는 마력 소모도 컸겠다, 그냥 지하 교단으로 돌아가서 한동안 편히 쉬어야겠어.’
마음을 정한 파종은 미련 없이 노인의 몸을 떠났다.
털썩!
그러자 통제를 잃은 노인의 몸이 그대로 숨이 끊어지며 바닥으로 쓰러진다.
이미 노인의 영혼은 고위 마왕에게 치여 소멸된 지 오래. 몸을 지켜주던 마왕의 기운마저 사라지자, 군데군데 번져 있던 검버섯이 급격히 확장되기 시작했다. 마기로 인한 침식 현상이었다.
파스스…….
잠시 후, 노인의 몸은 때 묻은 사제복만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
그러자 그때까지도 멍하니 서 있던 클레멘스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Chapter 108: Chapter 408
Chapter Text
408. 머리 탑 (6)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선 채로 조금씩 휘청거리던 클레멘스는, 곧 비틀비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신음을 흘렸다.
“으…….”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아 굳어버린 근육과 관절이 비명을 지른다. 그럼에도 둔중한 고통 속에서 그의 정신은 더없이 뚜렷해져 갔다.
지금까지 클레멘스를 통제하고 있던 자는, 갑자기 정신지배를 풀어주곤 훌쩍 떠나 버렸다. 그의 소유권을 넘겨받은 [파종] 또한 뭔가 성에 차지 않는지, 그를 방치하고서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지.
덕분에 근래에 처음으로 온전한 정신을 되찾은 클레멘스는, 허망한 눈으로 한참 동안 부스러져 버린 노인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한때 이단재판부에 몰래 숨어들어, 함께 대수확의 때를 기다리며 울고 웃던 동료의 흔적을.
“형제여…….”
바싹 마른 성대에서, 이윽고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리들이 그 오랜 시간 정성을 쏟아오던 [과업]이란, 실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동안 멍한 정신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던 수많은 정보들이, 조금씩 뚜렷한 의미를 빚어가며 머릿속에서 재정립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차마 맨정신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참담한 진실.
클레멘스의 목소리가 점차 떨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온 마음을 바쳐 섬겨오던 [파종] 또한, 진정한 주신의 화신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그들에게 속아온 겁니다! 바로 주신을 빙자한, 저 잔혹한 악의 세력들에게!”
비통하고, 또 비통했다.
그럼에도 더 이상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처음에 흘렸던 약간의 눈물만이, 클레멘스의 몸에 남아 있던 마지막 수분이었던 모양이었다.
“형제여. 이제 나는 어찌하면…….”
하지만 더는 좌절할 시간도, 죽어버린 동료를 애도할 틈도 없을 듯했다.
노인의 몸은 침식으로 인해 완전히 소멸했다. 분명 마기가 아직 남아 있을 테니, 이곳에 계속 머물다가는 클레멘스 역시 같은 운명을 맞게 될지도 모르는 일.
잠시 침통한 표정을 짓던 클레멘스는, 곧 뻣뻣하게 굳은 관절들을 움직이며 조금씩 동굴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쓰윽- 쓰윽-
기다시피 힘겹게 몸을 밀어내자, 울퉁불퉁한 바닥에 쓸리며 몸 여기저기에 깊은 상처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힘들면 힘들수록, 이상하게도 생을 향한 열망은 더욱 또렷하게 타올랐다.
‘악마들의 손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서 황도로, 성황의 은총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게다가 그의 어수선한 기억 한편에는, 언젠가 꿈결처럼 귓가에서 속삭이던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북쪽으로 가서 [참회]를 찾아라. 그러면 내가 곧 너를 찾을 거야.
-우와아! 이건 너무 위험한 짓이야!
-조심해! 자칫 잘못하면 들키겠어!
-어서 도망쳐!
-빨리 서둘러!
그들은 대체 누구였을까.
강력한 지배로 억제되어 있던 정신이 그저 헛된 망상을 만들어낸 걸까?
아니면 거짓 구원이었던 파종을 대신해, 또 다른 주신의 화신께서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일까.
‘어쩌면, 그들이 말한 [참회] 역시 파종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악의 축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그렇다 한들, 그게 다 무슨 상관일까. 현재는 뇌리에 남아 있는 그 의미 모를 지시만이, 모든 것을 잃은 클레멘스를 움직이는 유일한 원동력이 되었는데.
그렇게 클레멘스는 몸에 남아 있는 힘을 단 한 방울이라도 더 쥐어 짜내려 무진장 애를 썼다.
하지만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몸이 가진 한계는 너무나도 명확한 것.
풀썩!
결국 클레멘스는 산을 채 반도 내려가지 못하고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아마도 쓰러진 클레멘스는 그대로 산짐승의 먹이가 될 운명에 처했을 것이다. 때마침 교외를 수색하던 한 무리의 성기사들이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말이다.
“…여기다!”
“정말, 리브가 님의 말대로 사람이 쓰러져 있어!”
“이자에게서 마기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다행히 아직 침식이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만, 지금 당장 정화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성기사들은 이내 돌아가며 클레멘스를 향해 신성력을 연거푸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곳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교외에 거대 악마종이 나타난 이후, ‘악마의 씨앗’을 탐색하는 작업은 아직도 한창 진행 중이었으니까.
“잘 찾아 주셨소. 일단 그를 살려야 합니다.”
곧이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산기슭에 그들을 지휘하는 자가 나타났다.
“리브가 님!”
“그자는 중요한 참고인이요. 반드시 살려서 이단재판부로 넘겨야 합니다.”
‘리브가’라 불린 인물은, 겉보기에는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소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성기사들 중 어느 누구도 그의 지시를 가벼이 여기거나 무시하는 자는 없었다. 그 소년이야말로 땅속 깊이 묻혀 있던 ‘악마의 씨앗’을 대거 찾아낸 일등 공신이었으니까.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대체 리브가 님은 어디서 온 분일까.’
‘소문에는 그 비밀 정보 조직, 아렌쟈 소속이라던가?’
‘뭐? 그게 실재하는 부서였어? 그렇다 쳐도, 저렇게 어린애가 어떻게?’
‘쉬잇! 목소리 낮춰. 어쩌면 우리 대화를 다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리브가에 이어 또 다른 소년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애슬리! 헉헉! 너 걸음이 너무 빠른 거 아냐?”
그 소년의 이름은 조나단 맥캘핀. 본래 그는 신학 아카데미의 재학생으로, 지금쯤이면 한창 기말시험에 골머리를 싸매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회색 역병의 후유증이 알려진 이후, 보호관찰이라는 명목하에 지금까지 쭉 아렌쟈의 엄격한 감시 속에서 지내는 중이다. 그의 동기이자 같은 증상으로 와병했던 애슬리 베쳐와 함께.
“으헥! 숨차 죽겠네! 너 인마! 내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아까부터 그렇게 말했는데!”
조나단은 일행과 합류한 후에도 숨을 고르느라 한참 동안 애를 먹었다. 회색 역병을 앓은 직후보다는 살이 부쩍 올랐지만, 여전히 예전의 체력을 되찾지는 못한 모습.
그런 그를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던 리브가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미 여러 번 말했을 거요, 조나단. 내 이름은 애슬리가 아니라 리브가요.”
“뭐라는 거야? 애슬리. 너는 내 동기인 애슬리 베쳐가 맞아.”
“애슬리의 의식은 더는 존재하지 않소. 지금은 텅 빈 그릇이 된 그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잠시 그의 몸을 빌려 사용하고 있는 것뿐이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냐? 요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아. 그것도 역시나 회색 역병의 후유증인가?”
“…….”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다.
리브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몸을 돌렸다. 후유증도 거의 없는 조나단을 대체 언제까지 곁에 데리고 다녀야 하는 걸까 고민하면서.
“어어? 야, 애슬리! 오자마자 내려가는 거냐? 이왕 올라온 김에 경치 구경이라도…….”
“…….”
“…저놈 정말로 가네? 어이! 거기 잠시만 기다려!”
* * *
리브가에게는 일생을 두고 후회하는 실책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규상 세계로 피하자는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여, 일족의 일부를 이끌고 델크로스 차원으로 넘어온 일이다.
호문클루스의 몸에 갇혀 열등한 보통의 인간처럼 살아가느니, 죽는 한이 있어도 고상한 코른시임으로서 죽겠다는 각오였지. 결과적으로 정말로 대부분의 일족을 잃고 말았지만.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실수로 일족의 보물인 오라클을 제국의 손에 넘기고 만 것이었다.
‘베스세바…….’
아마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당시 코른시임 일족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그녀가 [오라클]일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일족의 정신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던 그녀의 정신을 제대로 파악했던 이가 전무했던 것이다.
‘베스세바는 애초에 정상적인 코른시임의 일원이라 보기 힘들었다.’
그녀는 미래를 예지하는 일족이라면 당연히 알아서 피해야 했을 사고에 휘말려, 어린 시절 머리에 큰 손상을 입고 말았다.
그 결과로, 그녀는 지독한 정신적 결함을 가지게 되었고, 만장일치로 일족의 정신 연결로부터 추방되었지.
외모만은 아름다운 베스세바를 화친의 증표로 16대 성황에게 바친 것은, 어쩌면 필수불가결한 일이었으리라.
일족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데다, 열등한 델크로스 차원의 인간과도 아무렇지 않게 부대낄 수 있는 유일한 순혈 코른시임이었으니까.
리브가가 자신의 큰 실수를 깨달은 것은, 베스세바가 낳은 제국의 3황자를 처음 보았을 때였다. 그들이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일족의 정수가, 어린 황자의 눈 속에서 생생히 빛나고 있었음에.
지금에 와서는 리브가도 확신할 수 있었다.
‘베스세바는 이미 오래전에 오라클로서 각성했다. 어쩌면 그때 그 사고를 피하지 않고 굳이 정신적 결함을 만든 것도, 그래서 일족의 연결로부터 추방된 것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그녀의 계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종족으로부터 귀중한 일족의 정수를 감쪽같이 빼돌리는 데 성공한 거다!
‘하지만, 대체 어째서?’
[오라클]로서의 영광된 지위를 놔두고, 왜 베스세바는 스스로의 운명을 그리도 험한 가시밭길로 내몰았는가.
그녀가 죽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지난 일은 지난 일. 얼마 남지 않은 일족의 영도자로서, 리브가는 다음 대의 오라클을 찾아 코른시임 일족에게 다시 되돌릴 의무가 있었다.
‘다음 대의 오라클은 이미 세상에 나타났을 것이다.’
리브가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현재의 오라클인 성황의 행보를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되도록 인과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며, 물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듯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마치 누군가의 확고한 의지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으려는 것처럼.
‘아마도 인식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는 거겠지.’
본래라면, 전대 오라클이 죽기 전엔 다음 대의 오라클이 태어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둘이 공존하는 시기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드물긴 해도 그 경우, 한쪽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었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리브가는 이미 두 사람의 오라클이 오랜 시간 성공적으로 공존한 전례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찾고 있는 다음 대의 [오라클]은 과연 누구일 것인가.
* * *
“왜 그러십니까.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저하?”
아까부터 계속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더니, 성진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을 용케 알아챈 로베르 경이 묻는다.
“아냐, 로베르 경. 아까부터 귀가 간지러워서.”
“혹시 힘드시면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는 게 어떻습니까?”
“어, 괜찮아. 지금 자네가 해 주는 ‘악마의 저주’ 이야기, 무척 재미있는데?”
성진이 속성으로 엑소시스트 수업을 받는 동안, 출장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끝까지 접전을 벌이던 쿠르트 경과 마리아 경의 경쟁을 끝으로, 상주기사의 마지막 인원도 완전히 결정되었고.
“핫핫핫!”
눈가에 시퍼런 멍을 단 채로, 쿠르트 경이 신나게 웃음을 터뜨린다.
마리아 경과의 대련 중 한 차례씩 사이좋게 주고받은 골절상과, 이어진 질펀한 술 내기 끝에 결정된 사항이었다.
“저하! 저 못 미더운 녀석을 보내면 제가 도저히 안심이 되질 않습니다. 저도 함께 저하를 따라가겠습니다!”
“안 돼, 마리아 경. 고참 기사 중 하나는 진주궁에 남아서 다른 기사들을 관리해야 줘야지.”
“그래, 마리아 경. 즐거운 경험을 많이 쌓고 무사히 다녀올 테니, 그동안 집이나 잘 보고 있으라고. 기념으로 좋은 술이나 한 병 사오지! 핫핫핫!”
앞으로 무슨 고생길이 펼쳐질지 모른 채, 마냥 신이 난 쿠르트 경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제대로 준비되어 가는 듯 보였다.
최근 유난히 성진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한 녀석을 빼면 말이다.
“뭐야? 오웬. 이번엔 무슨 일인데?”
오늘만 벌써 몇 차례인가. 또다시 방문으로 슬쩍 고개를 내미는 녀석을 향해 성진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오웬이 답지 않게 쭈뼛거리며 조심스레 말을 걸어오는 게 아닌가.
“저기, 모레스…….”
“응?”
“…….”
“뭐? 왜? 뭐?”
그러자 녀석은 잠시 입을 달싹거리더니, 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야, 아무것도.”
“뭐어? 야! 너 진짜 아까부터 왜 그러는데?”
“음, 미안. 그럼 수고해라.”
그렇게 돌아서는 오웬의 뒷모습에서, 축 처진 닭털들이 유난히도 처량해 보인다.
뭐야? 아무리 봐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저 자식, 대체 요즘 왜 저래?
Chapter 109: Chapter 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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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9. 머리 탑 (7)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 어느덧 성진이 황도를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하지만 출발하는 날 아침이 밝았음에도, 진주궁의 공기는 평소와 같이 차분하기만 했다.
‘일전에 한 번 다녀와서 그런가? 이번 출장은 다들 그러려니 하는 느낌이군.’
기대인 듯 불안인 듯, 묘하게 술렁이는 기분이 드는 건 오직 성진뿐인 듯했다. 그는 애써 그 찜찜한 느낌을 무시하며 생각했다.
‘그래. 오지를 찾아가는 것도 아닌데 별일 있겠어? 얼른 끝내고 금방 돌아올 거니까!’
그사이에 성진은 성황과 한 차례 더 알현 시간을 가졌다. 물론 전적이 있기에, 대화하는 중에도 성진은 되도록 성황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이번에는 정말 별일 없을 겁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자코모 밀로의 은신처에 대한 양질의 정보를 손에 넣었거든요. 아마 잠입만 제대로 성공하면, 그를 체포하는 건 금방일 겁니다.”
“잠입.”
하필 성황이 신경 쓰이는 단어를 콕 집어내자, 성진은 조금 당황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어, 잠입… 네, 그게 그러니까…….”
“…….”
“그냥… 약간의 눈속임… 같은 걸 해 보자는, 그런 의미입니다! 기사들을 왕창 이끌고 무턱대고 찾아간들, 놈들이 순순히 자코모 밀로의 신병을 넘기지는 않을 테니까요.”
거기까지 말한 성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대충 털어놓자!
사고 치고 나중에 들켜서 딱밤 맞는 거보다는, 미리 말하고 혼나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어디까지나 놈들의 작은 점조직 하나를 급습하는 것뿐입니다. 물론 마사인 경은 허락하지 않을 테니, 그 몰래 일행을 빠져나와 오러 은폐를 시도하는 게 조금 문제지만요. 그래도 어떻게 되지 않겠습니까? 제 정보원인 다샤도 따라갈 겁니다.”
“…….”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버지. 더 중요한 건 그다음이에요! 일단 자코모 밀로를 잡고 나면, 돌아오는 길에 북부 토박이 귀족들을 좀 을러볼까 합니다. 그치들이 자잘하게 우리 사업을 방해하는 통에, 요즘 슈미트 지부장이 영 골치가 아픈 모양입니다.”
“그래.”
다행히 성황은 더는 ‘잠입’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며 이렇게 물었지.
“하나 북부 토착 세력은 그리 만만치 않느니라. 온전히 힘으로 압박하기에는, 네 일행이 조금 조촐한 규모가 아닌가 싶다만.”
“음…….”
성황의 지적은 타당했다.
마물 전담반 인원이라고 해 봐야 지금은 성진과 로베르 경뿐.
거기에 마사인 경과 브루노 단장을 위시한 상주기사 대여섯이 더 따라간다 한들, 제대로 된 무력 집단이라 보기는 조금 힘들겠지.
어찌 생각하면 울프 기사단과 함께했던 첫 출장보다도 적은 인원이었다.
‘하지만 엑소시스트로서의 업무를 수행한다고 생각하면 과한 숫자야.’
이쪽은 기회를 봐서 참회 교단의 말단 조직에 몰래 잠입해야 하는 거다. 그러니 황자의 출장치고는 최대한 머릿수를 줄인 거라고.
‘게다가 북부 쪽은 또 어찌저찌 될 거 같단 말이지…….’
물론 전혀 근거 없는 예감이었기에, 성진은 재차 성황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섣불리 북부 세력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전처럼 위험한 짓은 절대 하지 않을게요. 정말입니다.”
“…….”
물끄러미 되돌아오는 시선을 보건대, 성황은 그다지 성진의 말을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생각 외로 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로건과 시슬레에게 샤론 경을 딸려 보내버렸으니, 이번에는 조금 걱정하시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참으로 의외의 일이었다.
어쨌든 성진은 이후로도 자잘한 이야기들을 더 늘어놓다가, 성황에게 조금 이른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당일 아침에도 정무 회의가 있으실 테니, 출발 직전에 인사드리러 오기는 힘들 거 같네요. 카트리나 경에게 도시락 배달을 맡겨놨으니까 제가 없는 동안 식사 거르지 마시고요.”
그러자 성황은 잠시 미묘한 시선을 던지더니, 인사 대신에 영문 모를 당부를 남겨왔다.
“모레스.”
“네?”
“신성력 없는 네가 엑소시스트로서 활동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준비된 퇴마 도구들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가지고 간 짐들을 되도록 분실하지 않게 잘 단속하거라.”
“……?”
성진은 잠시 의아해졌지만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당연히 도구들이 중요하긴 하겠지.
* * *
마침내 출발하는 당일 아침.
가볍게 명상으로 아침 운동을 끝낸 성진이 밖으로 나오자, 배웅을 위해 일찌감치 나와 있던 아멜리아가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몸은 괜찮으니?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부디 무리하지 말고 무사히 다녀오렴, 모레스.”
아멜리아는 이번에도 성진을 위해 정성스러운 선물을 준비해 왔다.
“누님, 이건……?”
“이제 너도 어엿한 엑소시스트가 아니니? 퇴마 도구들을 지니고 다니는 데 도움이 되도록 준비해 봤단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성진에게 건넨 것은, 튼튼한 벨트가 달린 작은 가방이었다. 검은 가죽에 화려한 은실 자수가 놓인 것이,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방이다.
“…이 자수는 누님이 놓으신 게 아니군요?”
가방 한가운데 새겨진 반듯한 주신의 문양과, 멋들어진 필기체로 수놓아진 경전의 문구까지.
‘이건 절대로 누님의 솜씨가 아니지.’
성진은 조금 안도했다. 만일 이것들을 모두 혼자서 하려 들었다면, 누님의 손가락은 지금쯤 바늘 자국으로 남아나지도 않았을 테지.
그러자 아멜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대꾸한다.
“후후, 들켰니? 직접 수까지 놓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손대면 멋진 가방이 다 망가질 것 같았단다. 그래도 문구의 글씨는 내가 직접 쓴 거야.”
역시 우리 누님은 신성제국 최고의 명필이라니까!
성진은 아멜리아가 보는 앞에서 퇴마 도구 몇 가지를 집어넣고는, 자랑스럽게 허리춤에 가방을 맸다.
이렇게 장비하고 보니, 이제 나도 제법 멀쩡한 엑소시스트처럼 보이는데?
“기사단 정복이랑 잘 어울리네요. 감사합니다. 역시 누님의 미적 감각은 탁월하십니다.”
그러자 마왕 놈이 성진의 머리 위를 빙빙 돌며 깐족거렸다.
[검은색 일색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 감각이랄 게 뭐가 있어? 쟨 그냥 검은색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거 같던데.]
…닥쳐!
성진이 으르렁거리는 동안, 아멜리아는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곁에 서 있던 오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건 오웬 오라버니에게.”
그때까지도 머쓱하게 딴청을 부리던 오웬은, 갑자기 아멜리아가 선물을 안겨오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가 받은 것 역시 성진의 것과 비슷한 모양의 가방이었다. 매끄럽고 튼튼한 갈색 가죽에, 무훈시의 한 구절이 멋들어지게 새겨져 있는 고급품이다.
“뭐, 나한테까지 이런 걸 다…….”
멍하니 가방을 바라보던 오웬이 울컥한 표정을 짓자, 아멜리아가 그를 향해 애석한 듯 웃어 보였다.
“진작 챙겨주지 못해 미안해. 예전에 오라버니가 갑자기 전선으로 향했을 때, 그때의 나는 모든 게 미숙하기만 한 어린애였지. 그래서 걱정스러운 기분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어떻게 오라버니의 무사를 기원해야 할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어.”
“아멜리아…….”
“하지만 이제는 나도 달라졌지. 소중한 가족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마친 채 그들을 믿고 기다리는 법도 배우게 되었어.”
오웬이 시큰한 코를 훌쩍이며 뭐라 대꾸도 하지 못하자, 아멜리아는 살포시 그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매일 기도할 테니, 부디 모레스와 함께 무사히 돌아와, 오라버니.”
성진은 생각했다.
‘천사다! 역시 우리 아멜리아 누님은 하계를 빛내기 위해 내려오신 천사야!’
심지어 아멜리아는 빨강이를 위한 선물도 준비해 왔다. 작은 접시가 들어 있는 텅 빈 램프였다.
“여행길에 요정님의 접시를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불의 요정님이 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었어.”
예쁘장한 램프를 받아든 성진은 조금 감탄했다.
이런 모양이라면, 설령 마왕이 속에 들어가 있더라도 그냥 보통의 호롱불인 척 위장할 수 있겠는데?
[와아아!]
당연한 일이었지만, 당사자인 마왕의 반응은 그야말로 격렬했다.
[뭐야? 이거 뭔데 이렇게 예쁘지?]
놈은 부산스럽게 램프 주위를 맴돌며 호들갑을 떨었다. 워낙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놈인 만큼, 램프의 예스러운 장식들에 금세 정신이 빠진 모양.
[저 녀석, 매번 검은색 타령 일색이더니 생각보다 취향이 괜찮잖아?]
성진은 안장 옆에 그 작은 램프를 단단히 비끄러맸다.
그러자 마왕 놈이 기다렸다는 듯 날아와 잽싸게 램프 안에 안착한다.
[히히히히!]
아멜리아가 그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어쩜? 정말 다행이다. 불의 요정님도 선물이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구나?”
성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왕아, 네 그 얼빠진 웃음소리를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게 천만 다행인 줄 알아. 누님에게는 아직도 네가 신비한 요정님의 이미지로 남아있는 거 같으니까.
그렇게 대강 작별 인사를 마치고, 성진이 드디어 말에 오르려 할 때였다.
“…설마 정말로 승마를 하실 계획이십니까, 저하?”
상주기사들과 마차의 상태를 정비하고 돌아온 마사인 경이 놀란 눈으로 물어왔다.
“응? 어. 황도 밖으로 나갈 때까지만.”
일단 황도의 은총을 벗어나기만 하면, 전처럼 편안하게 마차 안에 틀어박힐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황자로서의 인지도도 쌓았겠다, 적어도 황도 신민들 앞에서만은 멋진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저하……?”
“왜, 마사인 경?”
“아니, 그러니까…….”
마사인은 어쩐지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마구와 장비들을 점검하는 상주기사들부터, 마차로 짐을 옮기느라 부산하게 움직이는 인부들까지.
“…이건 또 뭐지? 아직 옮기지 않은 짐이 있었나?”
“아! 그거 오늘 아침에 행정부에서 넘어온 물건이야. 취급에 주의하라는 거 보니, 아마 성수처럼 깨지기 쉬운 퇴마용 도구겠지.”
“성수우? 설마? 길쭉하게 생긴 것이, 내 눈에는 꼭 관짝 같아 보이는데?”
“쉿! 그게 무슨 불길한 소리야? 자자! 이게 마지막이니까, 어서 마저 싣고 끝내자고.”
“자자, 서둘……!”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가 찾는 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마사인 경은 조금 심각한 얼굴이 되어 재차 물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저하의 늑대개를 전혀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어? 아아, 막스.”
성진은 볼을 긁적였다.
“막스라면 잠시 놀러갔어. 내 심부름도 할 겸 친구를 보고 오겠다는 거 같던데?”
“…네? 심부름…….”
“걱정 마. 녀석은 마음 내키면 언제든 다시 돌아올 거야. 내가 있는 곳은 아무리 멀어도 찾을 수 있으니까.”
“……?”
마사인의 의문이 더욱 늘어가는 듯했지만, 더는 이에 대해 답해줄 시간이 없었다. 오늘 중으로 레지나에 도착하려면, 이제부터 슬슬 길을 서둘러야 했으니까.
끼이이-
황궁의 정문이 열리자, 이내 격렬한 환호가 성진 일행을 감싸왔다.
“모레스 저하!”
“바서스트령의 구원자!”
“저기 봐! 고대 요정의 축복을 받으셨다더니, 정말로 작은 불의 요정이 저하의 곁을 맴돌고 있어!”
황도 신민들은 진심으로 불의 요정을 반기며, 성진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모두가 ‘요정’의 존재를 친숙하게 느끼게 된 모양.
“…….”
예상외의 반응에 잠시 당황했던 성진은, 곧 꼿꼿하게 등을 펴고는 환호 속으로 말을 몰았다.
적어도 지금만은 자신이, 그들의 눈에 성황가의 자랑스러운 일원으로 비치기를 바라면서.
* * *
워오오오-
어디선가 희미하게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별난 일이군요. 이 근방에는 야생 늑대가 서식하지 않을 텐데.”
동그란 눈으로 귀를 쫑긋 세운 남매를 향해, 암브로시우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 분 저하. 야생 짐승들은 감히 키프로스의 도시에 얼씬도 하지 못하니까요.”
로건과 시슬레는 현재, 암브로시우스와 함께 배를 타고 브리즈 강 하구로 향하는 중이었다.
“자, 이제 다 왔습니다.”
물살을 따라 얼마나 흘러왔을까. 등대의 맞은편에 높이 서 있는 회색 탑이 눈에 들어오자, 암브로시우스는 자랑스러운 듯 손을 들어 보였다.
“로건 님, 시슬레 님. 저 건물이 키프로스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 바로 암브로시아의 ‘머리탑’입니다.”
Chapter 110: Chapter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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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머리 탑 (8)
본래라면 신성제국의 토벌대는 지금쯤 먼 대양으로 나가 있어야 했다. 키프로스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의 해군과 합류하여 바로 출항할 예정이었으니.
하지만 당장 토벌대를 보내지 못해 안달하던 것도 잠시-
평의원들은 첫날과 달리 계속해서 출항을 지연시키기 시작했다. 작전의 중심이 될 예정이었던 비밀 병기, [고대의 불]에 대한 심각한 안전성 문제가 제기된 것이 그 이유였다.
일단 키프로스 해군이 보유한 선박의 재질이 죄다 나무인 데다, 먼 대양에서는 급히 피신할 섬도 마땅치가 않다.
한데 관리를 잘못하여 선박 하나에 불이라도 났다 해 보자. 물 위에서도 급속하게 번지는 [고대의 불] 특성상, 주위의 다른 배들도 모조리 화재에 말려들어 갈 게 빤했다.
기껏 모아놓은 대군을 깊은 바다에 수장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칫 잘못하면 성황가의 귀중한 황자와 황녀까지 잃게 될 판인 거다.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발생할 경우, 해군 자체의 손실은 차치하고라도, 이만큼 심각한 외교 문제도 다시없으리라.
“리산드로스 장군. 애초에 해군을 이끌고 물에 쉽게 번지는 화공을 쓴다는 작전 자체가 문제 아닙니까?”
로건은 초조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물었다. 평의회의 논쟁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이 순간에도, 키프로스 시민들과 오르토나 난민들의 고통은 나날이 커져만 갈 테니.
그러자 질문을 받은 리산드로스가 조금 착잡한 눈빛으로 대꾸한다.
“그 외에는 달리 해양 마수들을 상대할 뾰족한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하.”
헬리오스의 리산드로스.
그는 키프로스 해군의 총지휘관으로, 지금까지 여러 차례 해양 마수들과 조우, 이들을 토벌한 경험이 있는 노장이었다.
“단언컨대 그것들의 가죽은 세상의 어느 고래보다도 질기며, 뱃전을 휘갈기는 지느러미는 한 번의 타격으로 어선을 침몰시킬 정도입니다. 창과 작살만 가지고는 도저히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힐 수가 없습니다.”
“…….”
“그나마 다행히도, 그놈들은 우리 군의 선박 이상으로 화공에 취약합니다.”
하지만 로건이 정말로 조바심을 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가 보기에, 이 [고대의 불]에 대한 논쟁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다는 것.
지금까지 평의회의 회의를 빠짐없이 참관하며 로건이 받은 인상은 다음과 같았다.
‘꼴좋다. 그러게 저것들이 고대의 불 제조법을 쥐고서 혼자 잘났다고 설치는 게 영 꼴사나웠어.’라며 비방하는 파와-
‘그래서 뭐 어쩔 건데? 네들이 이제 와서 우리의 비밀 병기를 써먹지 않겠다는 거냐?’라며 배짱부리는 파의 싸움.
그리고 지금 그 논쟁은, 서서히 ‘안전을 위해 고대의 불 제조법을 만천하에 공유해라! 아니면 대신 우리에게 뭐라도 하나 내놔 보든지.’파와-
‘지금 이게 누구한테 강짜냐? 이대로 상단 활동이 위축되고 어업이 중단되면, 여기서 누가 제일 먼저 말라죽을 거 같아? 어?’ 파의 대립으로 변모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는 키프로스가 통일된 하나의 국가가 아닌, 어디까지나 이익을 위해 뭉친 ‘도시 연합’이라는 특수성에서 기인한 문제였다.
당장의 어업 손실에 연연하기보다는, 지금의 상황을 기회 삼아 다른 도시보다 상대적인 우위를 점하는 쪽이 장기적으로 자신들의 도시에 이익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들의 대표인 평의원들은, 담장 밖의 적들보다는 자신의 발아래 있는 한 줌 땅을 빼앗는 데 혈안이 될 수밖에.
돌아가는 상황을 묵묵히 바라보던 로건의 안색이 날이 갈수록 해쓱해졌다.
“오라버니…….”
시슬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로건을 올려다보았다. 토벌대를 이끌고 키프로스로 오는 중에도, 그가 얼마나 조바심을 억누르려 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다행히도, 로건은 그 상황에서 용케 평정을 유지해냈다.
“…지금까지 몇 차례에 걸쳐 서둘러 달라 건의를 했지만, 저들을 완전히 설득할 명분이 마땅치 않다. 출항에 앞서 화기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니까.”
꾸욱.
아르쥬나의 손잡이를 말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래도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아직은 헬리오스를 중심으로 한 자들의 목소리가 더 큰 것 같군. 이대로 두면 크뤼세스 원로를 중심으로 무난하게 출항하게 될 가능성이 커. 외부인인 우리가 저들을 재촉해 봤자, 괜한 경계와 반감으로 저들의 결정을 늦추게 될지도 모른다.”
로건에게는 목소리만 큰 공화파의 인원들을 이끌고 실질적으로 전선을 책임졌던 오랜 경험이 있다.
그러니 잘 알고 있었다. 저들은 떠들고 싶은 대로 떠들게 놔두고, 차라리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백번 낫다는 사실을.
“발레리 경.”
“네, 저하?”
“예정되어 있던 교회 감사의 순서를 조금 바꿔줄 수 있겠나? 본래는 헬리오스부터 북서쪽 도시들을 향해 차근차근 진행할 예정이었겠지만, 차라리 인원을 분산하여 여러 도시를 동시다발적으로 감사하는 게 어떨까 싶군.”
로건은 싸우느라 한창인 평의원들의 시선을 다른 곳에 집중시키기로 했다.
‘너희들. 적당히 하고 끝내지 않으면, 이단재판부의 감사에 제대로 준비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을 거다’라는 위기감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물론 분산된 인원으로는 당장 강도 높은 감사를 진행하기 힘들 테지. 그러니 일단은 분위기만 좀 잡아주게. 우리가 출항하고 나면, 그 이후에는 다시 모여서 저들의 교회 기둥까지 하나하나 가루로 분해해도 말리지 않겠다.”
그러자 발레리 경이 대단히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걸 왜 저에게 말씀하십니까, 저하? 이번 감사의 책임자는 따로 있습니다만.”
“…….”
로건은 물끄러미 발레리 경을 바라보았다.
매번 이성진에게 호구라고 놀림받기는 하지만, 그도 눈치가 전혀 없지는 않은 터. 매번 그의 형제와 발레리 경의 말싸움을 듣고 있다 보면 절로 깨달아지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단재판부에 전해, 발레리 경.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돌았던 건 단순한 역병이라고. 괜히 인퀴지터들을 파견해서 아픈 사람들을 잡아들이지 말고.
-아니, 그런 걸 왜 저에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하?
-그야, 아마도 자네가 이단재판부에서 제법 입김이 세니까?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저는 말단 인퀴지터에 불과합니다. 절대 저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빨간머리 인퀴지터가 질색하며 대꾸하는 말이 거짓임을, 감정에 따른 오러 변화에 민감한 로건이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그래. 발레리 경은 생각보다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 내에서 입김이 세단 말이군.’
그리고 로건의 판단은 적절했다. 그렇게 부탁한 바로 다음날, 감사를 위해 헬리오스에 모였던 사제단과 인퀴지터들이 각자 여러 도시로 흩어지기 시작했으니까.
“고맙네, 발레리 경.”
“그러니까 오해십니다, 저하. 저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거짓.
로건은 더는 이 일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그저 부루퉁한 인퀴지터의 어깨를 정답게 툭툭 두드렸다.
이것이 로건이 할 수 있는 외부인으로서의 역할의 전부일 것이다. 다음은 평의회 의원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질 때까지, 최대한 인내하며 그의 ‘개인적인’ 구호 활동을 하는 수밖에.
이 과정에서 로건의 늘어난 ‘용돈’이 제법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주신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델크로스에서 오셨다고 했소? 제국에도 아직 당신과 같은 사람이 있다니…….”
“…도움에는 감사드리오.”
간단한 식료품을 건네받은 오르토나의 난민들은, 대단히 어색한 표정으로 로건에게 감사 인사를 보내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슬레는 몇몇 사제들을 이끌고 와서 아예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오랜 시간 봉사 활동을 해 온 성녀의 짬이었다.
“아마 토벌대의 성기사들을 데리고 오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을 거야, 오라버니.”
“그건 힘든 일이겠구나, 시슬레. 성기사들을 움직이는 것은 명백한 군사적 행동이다. 아무리 시민들을 위한 구호 활동이라 해도, 눈치껏 하지 않으면 결국 평의회의 반발을 사게 될 거야.”
그렇게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니, 로건은 때때로 이런 정보도 주워들을 수 있었다.
“이봐, 언제까지 배가 뜨기를 기다려야 하나? 이제는 끼니를 때우기도 어려우니, 우리도 이참에 북부로 가는 건 어떤가?”
“북부? 거기 가서 뭘 하는데?”
“소문 못 들었나? 듣자 하니, 북부로 가면 어느 상단에서 일자리를 주선해 준다고 하더군. 오르토나 난민들을 차별하지도 않는 데다 임금도 나쁘지 않아서, 최근에는 사람들이 북쪽으로 제법 몰린다나 봐.”
“응? 거기에 뭐가 있다고 그 많은 사람들에게 임금을 줘? 어느 상단인데?”
“요즘 소문이 자자한 ‘베르트란 & 리’가 사람을 고용한대. 알아보니 큰 갱도를 보수하는 사업 때문이라더구먼. 그게 끝이 아니야. 갱도 보수가 끝나면, 인부들을 그대로 광부로 써 주겠다고 약조까지 했다던데?”
“광부라…….”
“그쪽이 내키지 않으면, 북서쪽 상류에 새로 생긴 큰 벌목장도 괜찮고.”
그런 이야기들이 들려올 때마다, 로건은 그의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장담하던 모레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어? 이 ‘베르트란 & 리’는 오르토나 최북단과 황도를 이어주는 물류 이송의 통로가 되는 거야!
-오르토나 북부?
-그래! 이 ‘베르트란 & 리’를 기점으로, 오르토나의 경제를 서서히 자생하게 만드는 거야!
당시에는 그 녀석이 워낙 열렬하게 설명하기에 얼떨떨하게 호응했을 뿐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될까 하는 생각이 더 컸지만.
‘그래, 모레스. 어쩌면 정말 네 말대로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대로 낙관하기는 아직 힘들었다. 로건은 마냥 희망을 품기에는 너무나도 절망적인 시간들을 경험해오지 않았던가.
평의원인 암브로시우스가 이런 제안을 던져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마도 며칠 후면 토벌대가 무사히 출항하게 될 것 같소. 그 전에 나와 함께 키프로스를 둘러보며 명소 구경이나 하지 않겠소?”
* * *
헬리오스의 암브로시우스.
키프로스의 실세인 크뤼세스의 아들이자, 평의회의 최연소 의원. 세간에는 ‘키프로스의 왕자’라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얼마 전 일어난 불의의 화재에 휘말린 후, 그는 어딘가 묘한 행동을 보였다.
-여담이오만, 두 분께는 제대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소.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나 있었겠소? 그러니 부디 오늘 저녁은 내 아버지의 저택에서 머물러 주지 않겠소이까? 조금이나마 이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셨으면 하오만.
명분은 그럴듯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라면 모를까, 온몸에 화상을 입은 중환자 본인이 할 만한 제안은 아니지 않은가.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정작 로건과 시슬레를 초대했던 주제에, 이야기가 무산되자 그 역시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평의회 건물에 계속 머문다는 것.
“그는 어째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걸까? 헬리오스의 크뤼세스는 키프로스 제일의 권세가잖아. 분명 그의 집에는 이곳보다 더 좋은 약재와 훌륭한 의원들이 많을 텐데.”
불편한 장소에서 고된 치료를 이어가는 그를 보고서, 시슬레가 강한 의문을 표했다.
“어쩌면 자신의 저택이 그리 안전하지 않다는 뜻인지도 모르지.”
로건의 대답은 씁쓸했다. 지금으로부터 꽤 오랜 과거. 완전히 갈라서기 전의 오르토나 국왕과 친우 베니시오 왕자의 관계를 떠올리고 말았으니까.
“세상에는 부모와 자식이 가장 큰 정적으로 대립하는 경우도 아예 없지는 않아, 시슬레.”
“…응, 그렇구나.”
시슬레의 얼굴 역시 어두워진다. 자신이 끝내 성황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델크로스 연대기]의 내용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암브로시우스가 제안을 해 왔다. 자신과 함께 키프로스를 둘러보지 않겠냐는 것.
역시나 그다운 뜬금없는 제안이었지만, 로건은 내심 좋은 기회라 여겼다.
개인적인 구호 활동에는 한계가 있고, 그렇다고 타국 황자의 신분으로 키프로스 구석구석을 혼자 휘젓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그렇다면 차라리 평의원인 암브로시우스와 함께 다니며, 키프로스에 있는 오르토나 난민들의 실태를 자세히 파악하는 쪽이 좋겠지.’
시슬레 역시 순순히 동의했다.
물론 곁에서 쓸모없는 식충이 하나가 마구 날뛰기는 했지만.
[아니, 후손아! 지금까지 내 말을 뭘로 들은 거냐! 저 음흉한 자와는 가급적 마주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로건은 그의 말을 가뿐하게 무시했다.
설령 암브로시우스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 하더라도, 겨우 병석에서 일어난 그가 소드 마스터 앞에서 무슨 수작을 부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해서 로건과 시슬레는, 암브로시우스와 함께 작은 유람선을 타고 브리즈 강을 따라 하구까지 흘러오게 된 것이다.
“자, 이제 다 왔습니다. 로건 님, 시슬레 님. 저 건물이 키프로스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 바로 암브로시아의 ‘머리탑’입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커다란 회색 탑을 가리키며 미소 지었다.
아직은 몸 여기저기 붕대를 감고 있는 데다 다리 하나를 절기도 했지만, 그는 오늘 하루 남매를 위해 훌륭한 안내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마지막 명소로 꼽은 장소가 바로 저 회색의 을씨년스러운 ‘머리탑’이다.
“고대에는 정말로 죄수들의 머리가 쌓여 있었다는 괴담이 전해집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낡고 보잘것없는 유물에 지나지 않지요.”
암브로시우스는 대수롭지 않게 설명을 덧붙였지만, 로건은 그의 발언에서 미묘한 감정의 편린을 느끼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진실… 그리고 거짓? 대체 무엇이?
바로 그때였다! 멀뚱히 회색 탑을 바라보던 시슬레가, 뭔가에 놀란 듯 갑자기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 것은.
“오라버니!”
깜짝 놀란 로건이 그녀를 부축하자, 시슬레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의 소매를 마주 잡아왔다.
“저기, 저기에 머리가……!”
Chapter 111: Chapter 411
Chapter Text
411. 머리 탑 (9)
강렬한 예지는 정신이 가장 무방비한 상태에 있을 때 찾아오곤 한다.
그것이 대부분 예지몽의 형태를 갖추는 이유는, 잠들어 있는 시간이야말로 인간의 정신적 경계가 약해진다는 의미일 터.
그렇게 허물어진 정신이 갑자기 강렬한 재난의 상징을 접했을 때-
예지는 은밀하게 깔려오는 안개처럼 빠르게 정신에 침투하여, 이내 시야를 완전히 잠식하고 마는 것이다.
* * *
꾸벅꾸벅.
시슬레는 반쯤 졸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던 것도 잠시, 소녀는 안내를 자처한 평의원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눈치껏 도로 눈을 내리깔았다.
아마도 수일간의 열성적인 구호 활동에 조금 지친 까닭이리라. 애초에 느린 강의 흐름을 따라 흘러가는 고만고만한 풍경이, 어린 소녀에게는 그다지 감흥 없이 느껴지기도 했고.
그렇게 멍한 기분으로 뱃전에 기대어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시슬레는 잠잠하던 브리즈 강의 물결이 갑자기 거세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
이게 뭐지?
시슬레는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온한 풍경에 무료해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타고 있는 배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다.
파도가 거세게 뱃전을 때린다. 작은 유람선 따위는 단번에 뒤집어버릴 듯 흉흉한 기세였다.
맞은편의 강둑도 무사하지는 않았다. 급격하게 불어난 강물 위로, 거센 바람에 휘감긴 나무들이 당장이라도 뽑혀 날아갈 듯 요동치고 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분노가 이 자리에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것만 같았다.
우르릉! 쾅!
검게 물든 하늘에는 거대한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며 불길한 뇌우를 흩뿌렸다.
그리고-
그 모든 재난의 중심에, 암브로시아의 [머리탑]이 있었다.
“……!”
지옥 같은 풍경 속에서 홀로 하늘을 향해 머리를 세운 탑은, 이 폭풍우가 불러오게 될 모든 절망과 죽음을 대표하는 상징처럼 보였다.
‘저기에 뭔가… 뭔가 무서운 것이 있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저 탑에는 뭔가 사악하고 끔찍한 것이 깃들어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시선을 잠시 두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불길한 예감과 두려움을 자아낼 수 있겠는가.
꿈틀-
그때, 가만히 서 있던 머리탑의 형상이 미약하게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지금껏 조용히 서 있다 생각했던 것이 그저 착각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곰곰이 되짚어 생각해 보면, 저 탑은 아까부터 계속 하늘을 향해 크게 울부짖고 있지는 않았던가?
찢어지는 듯 휘몰아치는 바람소리는, 실은 탑이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인 것이다.
‘머리가.’
그래. 저 성긴 벽을 이루고 있는 돌 하나하나는, 자세히 보니 각각이 사람의 잘린 머리다. 높다랗게 한데 쌓인 수백의 머리들이, 붉은 핏물을 뒤집어쓴 채 하늘을 향해 커다랗게 소리를 내지른다.
아- 아- 아- 아-!
시슬레는 몸을 떨었다.
이 모든 비현실적인 광경을, 어떻게 단 한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저기…….”
소녀는 무력하게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저기에 머리가……!”
“…뭐?”
“오라버니! 저기서 머리들이 무서운 비명을……!”
“시슬레!”
동생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로건이, 거세게 소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갑자기 왜 그래? 정신 차려, 시슬레!”
깜빡.
그제야 시슬레는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아?”
사위는 삽시간에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선선한 강가의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히고, 어느새 노을이 지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하다.
거센 폭풍우도, 비명을 지르는 괴상한 탑의 모습도 없었다. 그저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직도 몸을 옥죄어 오는 긴장감과 흥건하게 배어나오는 식은땀뿐.
‘예지몽이었어!’
시슬레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지몽을 꾼 이후에는 언제나 찾아오는 감각. 이 짙은 불안감과 두려움.
‘거기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야!’
꿈에서 본 사건이 가까울수록, 그리고 시슬레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칠수록 예지몽은 더더욱 강렬한 기억과 감정을 남기곤 했다.
하물며 빤히 눈을 뜨고 있음에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악몽임에야.
시슬레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주먹을 애써 다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 예지몽의 중심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굳이 찬찬히 되짚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머리탑.”
“응?”
“저 머리탑을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갑작스러운 말에 로건은 당황하며 시슬레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동생의 정신은 멀쩡해 보였다. 몸은 아직도 간간히 떨리고 있었지만, 암브로시우스를 돌아보는 소녀의 눈동자는 맑고 올곧기만 했으니.
“부탁드립니다, 암브로시우스 님. 저 탑이 있는 언덕에 올라가 볼 수 있을까요?”
그 요청을 들은 암브로시우스가 미묘한 미소를 보임과 동시에-
우우우우-
저 멀리서 또다시 긴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 *
[암브로시아의 머리탑]은 명소라고 부르기에는 꽤나 손색이 있는 건물이다.
언덕에 홀로 서 있어 제법 눈에 띄기는 하지만, 실제 높이는 3층이 채 되지 않는 데다 관리 상태도 엉망이었다.
“오래된 건축물이군요.”
로건은 가까이 갈수록 볼품없어 보이는 탑을 한 마디로 평가했다.
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의 돌들이 불규칙적으로 얽혀 있는 탑은, 딱히 양식이랄 것도 없이 엉망으로 쌓여 있어 도통 제작 시기를 추측할 수 없었다.
거기다 성긴 돌 사이에 덧발라진 진흙에는 곳곳에 금이 가 있어, 바람만 불어도 당장 허물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였다.
“하하. 명성에 비해 별것 없는 탑입니다. 소르본 선생이라 했던가요? 그 극작가가 쓴 오페라 덕분에, 최근 머리탑을 찾는 이들이 부쩍 늘긴 했습니다만.”
아직은 불편한 몸을 천천히 이끌면서, 암브로시우스는 남매에게 친절한 설명을 이어갔다.
“예전에는 키프로스의 명소라 하면 평의회 건물과 시민 원형 광장을 꼽곤 했지요. 하지만 갑자기 공연 하나가 유행하기 시작하니, 이제는 이 ‘머리탑’이 키프로스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군요.”
짧게 대꾸한 로건이, 조금 주저하며 질문했다.
“한데 그 이야기처럼, 정말로 저 안에 그…것이 있습니까?”
[암브로시아의 머리탑] 내용처럼, 정말로 탑 안에 잘린 사람의 머리가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단지 아까 시슬레가 보였던 모습 때문에, 로건은 직접적으로 ‘머리’라는 언급을 피했다. 다행히 암브로시우스는 그의 질문을 제대로 알아들은 듯했지만.
“글쎄요. 저 탑에는 내부로 들어가는 변변한 입구조차 없습니다. 그저 속이 텅 비어 있는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지요.”
“그럼…….”
“단지 수년 전, 큰 태풍으로 탑의 일부가 무너진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보수에 동원되었던 인부들의 말에 따르면, 실제 탑 안에서 사람의 머리뼈 같은 것은 보지 못했다 하더군요.”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잠시 묵묵히 탑을 향해 걸었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 시간이 제법 흘러, 이제 해는 완전히 지고 주변에는 어두운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뭐, 구전이란 것이 대개 그런 식이 아니겠습니까.”
잠시 걸음을 멈춘 암브로시우스가, 힘겨운 듯 숨을 고르며 설명을 이었다.
“이야기에 나오는 암브로시아는 제국이 세워지기도 전에 죽은 고대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 탑이 제대로 기록에 남기 시작한 것은 4대 성황 폐하의 시절이죠.”
“그 말씀은, 지금의 탑은 이야기에 나오는 탑이 아니라는 뜻입니까?”
“네. 적어도 이곳 사람들은 아무도 저걸 그 암브로시아가 직접 쌓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엘레우시스의 암브로시아.
그녀는 지금은 멸망하고 없는 고대 도시국가, 엘레우시스의 공주였다고 전해진다.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엘레우시스는 한창 헬리오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암브로시아의 연인이 비참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고.
동풍이여, 무심히도 그를 가엾다 말하지 마오. 나는 그이의 이름을 찬란한 영광이라 부르리오.
깊은 슬픔에 잠긴 암브로시아는, 연인의 머리를 시작으로 동포들의 죽은 머리를 하나하나 모아 탑을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헬리오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높다란 언덕 위에.
그리고 탑은 마침내 거대한 저주가 되어, 적군인 헬리오스의 병사들을 무참히 휩쓸었다 전해지지.
“하지만 실제 그 전쟁으로 멸망한 것은 엘레우시스죠. 헬리오스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멀쩡히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도시입니다. 그 이야기가 어디까지나 허구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이보다 분명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들은 마침내 언덕의 정상에 이르렀다. 잡초도 제대로 나지 않은, 푸석하고 황량한 땅에 홀로 외로이 서 있는 탑 아래로.
“자, 어떠십니까? 로건 님, 시슬레 님. 저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암브로시아의 머리탑입니다. 소개하기 민망할 정도로 초라합니다만.”
“…….”
로건은 가만히 회색의 탑을 올려다보았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서일까. 탑을 이루는 돌들 각각이 마치 누군가의 묘비라도 되는 듯 지독히도 을씨년스럽다.
‘그저 텅 빈 돌탑일 뿐이라고 했지만.’
로건의 예민한 감각에도 특별히 마기나 저주의 기운은 감지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 그건 대체 뭐였을까? 암브로시우스의 말에서 이따금 느껴지던,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그 모호한 감각은…….’
그렇게 로건이 묘한 찜찜함에 기감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였다.
“로건 오라버니.”
지금껏 줄곧 침묵에 잠겨 있던 시슬레가, 어딘가 몽롱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시슬레?”
“난 역시 이 탑이 암브로시아의 머리탑이라고 생각해.”
“…뭐?”
당황한 로건과 달리, 시슬레의 행동을 지그시 바라보는 암브로시우스의 눈이 강한 이채를 띠며 번쩍인다.
“너 괜찮니? 시슬레.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지만 로건의 질문에도, 소녀는 뭔가에 홀린 듯 천천히 탑을 향해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이 탑은 아마도 강한 저주를 품고 있어.”
“저주라니…….”
“내가 똑똑히 봤어, 오라버니. 그건 키프로스를 재난에 빠뜨릴 저주의 징조였으니까. 저 아래에 있는 건 분명-”
그때, 암브로시우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녀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찾을 수 있겠소?”
그러고는 그는, 서둘러 시슬레에게로 다가가며 재차 물었다. 부상의 후유증이 남았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치 빠른 걸음걸이였다.
“시슬레 님이라면 알 수 있겠소? 오래 전에 탑을 세운 이가 가장 먼저 이 땅에 올린 주춧돌이, 과연 어느 것인지.”
“아마도 알 수 있어요. 그건 저기…….”
그 모든 광경을 빤히 보고 있음에도, 로건은 좀처럼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의 예민한 본능은, 지금 당장 시슬레의 행동을 멈춰야 한다고 속삭인다.
“기다려, 시슬레!”
그렇게 서둘러 암브로시우스를 앞지르며 달려가던 로건은, 반사적으로 일별한 그의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희열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
바로 그때였다.
커엉!
갑자기 시커먼 짐승의 그림자가 그들의 눈앞으로 불쑥 솟구친 것은.
이 근방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늑대의 그림자였다.
“……!”
놈의 뜬금없는 등장에 미처 놀랄 새도 없이-
타닥!
순식간에 땅을 박찬 짐승은, 곧장 시슬레와 암브로시우스를 향해 쇄도해갔다.
탓 탓 탓!
“위, 위험합니다! 평의원님!”
“어서 이쪽으로!”
호위를 위해 뒤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검을 뽑는다.
그러나 그들은 위험한 짐승을 향해 바로 달려들 수 없었다. 델크로스의 황자가 재빨리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
“잠깐! 괜찮으니 거기 멈추십시오!”
일순 모두가 황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저 야생의 짐승이 성녀를 항해 똑바로 달려가고 있는데, 이 무슨 태평한……!
“모두 무기를 내리십시오. 그대들은 저기, 저 황가의 문양이 똑똑히 보이지 않습니까?”
연이은 황자의 일갈에, 병사들은 겨우 늑대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
한데 정말 그의 말대로, 늑대가 찬란한 황가의 휘장을 망토처럼 목에 휘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란 병사들이 엉거주춤 자리에 멈춰 서자, 로건은 아르쥬나에 닿아 있던 손을 내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늑대개의 주인이 혼자 돌아다닐 녀석의 안전을 위해 둘러준 것이겠지.
역시나 애마 록사나를 위해 종종 이 방법을 써먹던 로건은, 녀석을 보자마자 대번에 늑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다들 보시다시피 저 개는 델크로스 황가의 소유물입니다. 위험하지 않으니 경계를 풀어도 좋습니다.”
그러자-
컹!
마치 그 말에 대꾸라도 하듯, 늑대가 로건을 향해 짧게 짖어 보였다. 그리고는 이내 시슬레 옆으로 다가가서 재빨리 소녀의 옷깃을 잡아챈다.
덥석!
“어?”
갑자기 그 자리에 덜컥 멈춰 서게 된 시슬레가, 멍하니 옷깃을 물고 늘어진 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막스?”
살랑-
늑대개의 꼬리가 반갑다는 듯 흔들린다. 물론 여전히 주둥이로는 그녀의 옷깃을 강하게 당기는 채였지만.
“막스! 너 정말 막스야?”
작은 성녀의 얼굴이 서서히 미소로 밝아진다. 어느새 그녀의 정신에 깃들었던 안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소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늑대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자, 그제야 녀석은 소녀의 옷깃을 놓으며 힘차게 대답했다.
컹!
물론 몸으로는 여전히 시슬레와 머리탑 사이를 미묘하게 가로막은 채다.
순간 로건은 늑대개의 눈에서, 묘하고도 익숙한 은회색의 안광이 스쳐가는 것을 보았다.
* * *
“…하! 저하!”
“응?”
“왜 눈을 뜨고 졸고 계십니까? 설마 지금 명상 중이십니까?”
“어……?”
마사인의 부름에, 성진은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눈을 깜박거렸다. 황도를 나오자마자 마차에 틀어박히고는 그대로 꾸벅꾸벅 졸았던 모양이지.
‘아냐, 그게 다가 아니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었더라? 분명 뭔가 중요한 일을…….’
손으로 몇 차례 쓱쓱 눈가를 비벼봤지만, 안개라도 낀 듯 도통 머리가 맑아지질 않는다.
그렇게 성진이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더니, 마사인 경이 애석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많이 피곤하십니까? 마음 같아서는 더 주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이제는 정말로 일어나셔야 합니다. 저하. 마차가 레지나에 도착했습니다.”
“레지나…….”
그제야 성진은 눈을 깜박이며 마차의 차창을 돌아보았다.
과연, 어둠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는 휘황찬란한 도시의 풍경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온 대륙의 물류가 모여드는 불야성의 도시, 레지나였다.
Chapter 112: Chapter 412
Chapter Text
412. 이성진 탐구 일지 (1)
숙소에 도착한 이후에도 성진의 멍한 상태는 계속되었다. 마치 기면증처럼 깜빡 의식이 멀어졌다가, 눈을 뜨고 보면 어느 순간 주위 풍경이 바뀌어 있는 식이다.
“저하, 저하!”
옆에서 에디스가 연거푸 성진을 부르며 정신을 일깨우려 노력한다.
[이성진, 왜 그래? 이성지이인!]
“저하. 지금 바로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드문드문 마왕과 마사인 경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다들 놀라겠다. 어서 괜찮다고 말해 줘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제대로 입을 움직일 정신이 없었다.
‘아직 안심하긴 일러. 조금만 더.’
그렇게 흐린 정신으로 휘청휘청 걷고 있자니, 옆에서 누군가가 팔을 붙들며 부축하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성진은 그 사람이 마사인 경인지 에디스인지 구별할 정신도 없는 상태였지만.
그 와중에 쥐고 있던 마왕의 램프를 바닥에 떨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일까.
‘다 끝나지 않았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내가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 금방이다.
그렇게 스스로도 의미 모를 생각을 되뇌며, 성진은 마사인 경과 에디스의 인도에 따라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파파파팍!
또 깜박 흐려진 시야가 이리저리 파헤쳐지는 흙더미로 가득 찬다. 얼핏 부지런히 땅을 파고 있는 개의 앞발이 보인 듯도 했다.
좋아. 잘 하고 있어, 막스. 바로 거기니까…….
“…모레스?”
한데 바로 그때, 성진의 집중을 갑자기 방해하는 녀석이 있었다.
먼저 들어가 숙소를 잡고 나온 오웬 녀석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녀석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성진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어 집중을 단번에 흩뜨려 버렸다.
“너 왜 그래? 괜찮냐? 또 어디가 아파?”
“어. 시끄러워… 멍청아.”
성진은 인상을 쓰며 손을 휙휙 휘저어 보였다. 아직 집중해야 하니까 옆에서 말 걸지 좀 말라고.
“야! 어디 아프면 차라리 아프다고 얘기를 해! 답답하게 혼자서 그러지 말고!”
“호들갑 떨지 마.”
성진은 인상을 쓰면서 그를 향해 한 손을 쓱 내밀어 보였다. 예전에 오웬이 귀찮게 징징거릴 때마다 효과적으로 써먹곤 했던 방법이었다.
“뭐……!”
순간 오웬이 과하게 움찔 놀라며 물러났지만, 지금의 성진은 그의 상태를 세심하게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이제 거의 끝나간다. 다 끝나가니까…….
“이야기는 내일, 하자고. 아무 것도 아니니까. 가서 잠이나 자.”
어떠냐! 네 취향의 귀여운 발굽 스킨이 여기 있다. 그러니까 어서 진정하고 얌전히 내 말 들어. 잘 때 수면 안대 잊지 말고.
오웬 녀석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성진의 정신은 다시 급격하게 현실에서 멀어졌다.
휘익- 휘익-
눈앞의 풍경이 이리저리 바뀐다.
그렇게 뭔가를 물고 부지런히 어딘가를 달리던 성진은, 마침내 그가 찾던 믿음직스러운 신형을 발견했다.
-…막스! 또 어디로 사라졌다가 이제야……!
멀리서 그를 부르는 흰 정복의 성기사를 향해, 성진은 꼬리를 흔들며 소리 높여 화답했다.
컹!
‘…컹?’
뭐야. 내 목소리가 왜 이래?
강렬한 위화감을 깨닫는 순간, 정신은 급격하게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다.
깜박.
멍하니 자리에 서서 눈을 깜박이던 성진은, 맑아진 시야로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곤 이내 오웬의 잔뜩 얼어붙은 얼굴과, 마사인 경의 걱정스러운 얼굴, 그리고 에디스의 맹한 얼굴을 차례로 마주하게 되었다.
“어라……?!”
또한 자신이 괜히 애먼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잠깐만.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성진은 얼른 팔을 회수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열었다.
“다들 왜 그래? 난 괜찮아. 어서 숙소로 들어가지.”
“…저하!”
“아아…….”
한데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는 두 사람과 달리, 오웬은 여전히 뭔가에 크게 충격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뭐야? 이 성가신 녀석.
“뭐? 왜? 뭐?”
“…으응?”
“너는 왜 거기 그러고 있냐고.”
그러자 오웬은 그제야 움찔 놀라더니.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어헉?!”
그러더니 성진이 더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슬슬 뒷걸음질 치며 멀어지는 게 아닌가!
“응?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너 지금…….”
“그럼 피곤한 거 같은데, 이만 푹 쉬라고! 내일 보자!”
그렇게 건성으로 저녁 인사를 내뱉은 오웬은, 그대로 몸을 돌려 부리나케 복도 너머로 내빼고 말았다.
“……?”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성진이 와락 미간을 구겼다.
대체 뭐야? 저놈, 갑자기 왜 저러는 거람?
한편. 당황한 나머지 꼴사납게 방으로 도망친 오웬은, 안 그래도 부스스한 머리를 미친 듯이 헤집으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설마 설마 했는데… 혹시, 정말인가?”
* * *
지금으로부터 수일 전.
처음 전담시녀에게 출장 소식을 전했을 때만 해도, 오웬은 그저 가벼운 마음가짐이었다. ‘할 일도 없는데, 겸사겸사 모레스를 도와주고 퀘스트도 수행하면 좋지’ 하는 정도의 생각이었지.
“네에? 모레스 황자님과 여행을 가신다고요?”
전담시녀 캐리도 은근히 반기는 눈치였다.
“아니, 여행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출장인데.”
“여행이든 출장이든 그게 그거 아니우? 뭐든 같이 가신다는 게 중요한 거지.”
늙은 시녀가 흥흥, 코웃음을 흘렸다.
“내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우. 우리 너그러운 오웬 님이라면, 어린 아우와도 금방 화해할 거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언제쯤 출발하시는 거유?”
“음? 아. 아마 며칠 있으면 금방…….”
“그럼 나도 준비할 것들이 참 많겠수다! 일단 우리 별난 오웬님을 위해 새 셔츠나 몇 벌 더 지어야겠수.”
“그만 둬, 캐리. 얼마 전에도 새 옷을 충분히 짓지 않았어?”
오웬이 대충 옷을 벗으며 대꾸하니, 캐리가 시중을 들기 위해 재빨리 다가섰다.
그러다가-
찰랑!
셔츠 깃에 걸렸던 선홍색 펜던트가 훅 떨어져 내리며 빛을 반사하자, 움찔 놀라며 후다닥 뒤로 물러난다.
“…….”
오웬은 딱딱하게 굳은 캐리를 슬쩍 곁눈질했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늘 저랬었지. 곁에서 살갑게 오웬의 시중을 들어주다가도, 펜던트가 나오면 요령 좋게 손을 피하곤 하지 않았나.
자연히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캐리. 캐리는 이 목걸이에 대해 잘 알고 있나?”
그러자 늙은 시녀는, 이내 푸스스 표정을 풀며 대꾸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수? 내가 이래 봬도 한창때는, 황비 마마들만 모시던 고참 시녀장 중 하나였다우.”
“그렇군.”
베스세바 선황비의 전담시녀였다 했던가. 언젠가 9호가 ‘정신병자'라고 불렀던, 그리고 오웬에게 이 이상한 단말을 남긴 수수께끼의 여인.
“그 목걸이는 틀림없는 베스세바 님의 유품이우.”
“…….”
“많은 이들이 그분을 오해하고들 있수다. 하지만 이 사람이 본 베스세바 님께서는 보통 분이 아니셨수.”
황비를 떠나보낸 지도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캐리의 기억에는 아직도 아름답고 우아했던 여인의 모습이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걸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황비의 물품에 멋대로 손을 댄 하녀 하나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자, 빤히 그녀를 내려다보며 냉막한 목소리로 그런 주의를 줬더랬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인과에 한 번이라도 말려들면, 이후로는 더는 돌이킬 수 없으니.
캐리는 감히 그녀의 말을 추호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웬을 섬기는 이 날까지도, 실수로라도 저 목걸이에 닿지 않으려 조심하고 또 조심했지.
“잠시나마 그 훌륭하신 분을 곁에서 모신 것은 내 평생의 자랑이우.”
오웬을 바라보는 캐리의 눈이 아련한 애상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분의 손자를 보필하게 되다니, 황궁의 시종으로서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수?”
“캐리, 나는…….”
아버님의 친아들이 아니야.
그렇게 대꾸하려던 오웬은 문득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오웬을 보살펴 온 전담시녀는, 그가 차마 내뱉지 못하고 삼킨 말이 무엇인지 훤히 꿰뚫어보는 듯했다.
“뭘 걱정하시든 오웬님의 생각과는 다르지. 잃어버린 베스세바 님의 목걸이가 무사히 오웬 님에게로 흘러갔소.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니라우.”
“…….”
“그리고 그 신비한 물건을 매일같이 지니고 계심에도, 오웬 님은 다른 이들과 달리 여전히 멀쩡하시지 않수? 이보다 더 오웬 님의 비범함을, 베스세바 님의 떳떳한 손자임을 나타내는 증거가 또 어디 있겠수.”
오웬은 말없이 선홍색의 펜던트를 만지적거렸다. 흐릿한 달빛 아래에서 요사스러운 붉은빛을 뿜어내는 보석.
오웬에게 퀘스트를 주고, 판게아 클로니클에 접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비로운 단말이다.
‘베스세바 선황비라…….’
자연히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것의 본래 주인이었다는 선황비는, 대체 뭘 하는 인간이었을까.
* * *
9호로부터 뜻밖의 보고를 받은 것은 그날 밤의 일이었다.
“뭐? 이손진? 그게 모레스의 애칭이라고?”
“네, 그렇다고 함다, 저하.”
오웬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자식은 애칭이 왜 그 모양이야? 모레스와 이손진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고.’
잠시 생각이 잠겼던 오웬은, 기대로 한껏 상기되어 있는 9호를 내려다 보았다.
“그래서 9호. 네가 하고 싶은 말은, 그 이손진이 바로 ‘뉴비 이성진’이라는 뜻이냐?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그러자 9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심 임무를 수월하게 마쳤다고 안심하던 중이었으니까.
“그럼 아님까?”
“아마 아니지 않을까? 발음이 미묘하게 좀 다른데?”
“네?”
“달라.”
“…네에?”
처음 가르쳐 줬을 때는 곧잘 따라하는 것 같다니, 어느새 9호는 이름의 발음이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뭐, 무리도 아니지. 아무리 생각해도 델크로스식 이름이 아니니까.’
오웬도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는, 세상에 뭐 이런 이름이 다 있나 생각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그가 아직까지 제대로 된 발음을 기억하는 이유는, 이성진의 이름을 여러 차례 사념으로 정확히 전달받았기 때문이었다. 침묵 빌런들과 대화할 때는 늘 사념을 이용해야 했으니까.
‘사념은 본질을 정확하게 전달해 준다. 그래서 내가 그 구릅?바… 뭐, 그 괴상한 구릅의 이름도 제대로 알고 있는 거지.’
하지만 설령 모레스가 정말 뉴비라고 가정해도, 오웬이 알기에는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이 전혀 달랐다.
“뉴비는 황도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살고 있다고 했어. 절대 모레스일 리가 없다.”
오웬은 처음 뉴비를 만났던 날의 일을 떠올렸다. 꽃잎 같은 발굽을 내보이며, 애잔하게?아마도 오웬의 왜곡된 기억이리라-말하던 아기 산양을.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살던 동네가 본래 좀 험한 곳이었어.
그 작은 산양 친구는 깔끔하게 플레이어들을 학살하고선, 오웬에게 그렇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었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생존을 위해 이런 기술들을 익혀야 했어. 네 눈에 내가 능숙해 보였다면 기쁜 일이지.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홀로 살아남은 완벽한 증거가 될 테니까.
오웬은 아기 산양의 말을 굳게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린 친구답지 않게 숙련된 살인 기술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모레스는 황궁에서, 아버님의 보살핌 속에 편히 지내고 있지 않은가.
“가능성은 열어 두셔야 함다. 이참에 모레스 황자님 곁에서 좀 더 조사를 해 보는 건 어떠심까? 그러려면 일단 제가 저하를 따라서…….”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오웬은 단언했다.
“게다가 모레스라면 앞으로도 내가 옆에서 지켜볼 수 있지 않나? 그러니 9호, 너는 이대로 황도에 남아 계속 뉴비를 탐색해 줘.”
“하지만…….”
“이참에 이름도 좀 제대로 외우고. 그 중요한 걸 헷갈리면 어쩌나? 자, 제대로 다시 발음해 보게. 이.성.진.”
“이, 성…진.”
“그래. 바로 그거야, 9호!”
“…….”
9호는 결국 축 처진 표정이 되어 원숭이 망루로 돌아갔다. 그렇게 그날 밤의 일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어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알고도 모를 일이다. 퀘스트를 위해 매일같이 모레스 곁에 붙어 있게 되다 보니, 오웬은 아무래도 점점 9호의 말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로건은 저 녀석을 이손진이라고 부르는 거지? 본래 둘은 애칭을 주고받을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었잖아? 정작 모레스와 친한 아멜리아는 잘 모르는 거 같은데…….’
그렇다고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자니, 그것도 영 마뜩잖았다.
로건과 서로 무슨 애칭으로 부르건, 그걸 대체 오웬이 왜 궁금해한단 말인가.
‘…아, 미치겠네!’
그렇게 황도를 떠나기 전. 성황과의 마지막 알현 시간까지도, 오웬은 혼자서 끙끙대느라 영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성황이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다른 아이들을 이끌어야 할 맏이가 되어선,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어서야…….”
“네? 아버님. 방금 소자에게 뭔가 하명하셨습니까?”
“아니, 아니다. 무사히 잘 다녀오거라, 오웬.”
“……?”
Chapter 113: Chapter 413
Chapter Text
413. 이성진 탐구 일지 (2)
그렇게 어영부영 하는 동안 어느새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다.
“선물 감사합니다, 누님. 마… 불의 요정도 무척 기뻐하네요. 다녀오는 동안 소중하게 아끼겠습니다.”
아멜리아로부터 받은 작은 램프를 손에 든 채, 모레스가 답지 않게 환한 얼굴로 헤실거린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오웬은 생각했다.
‘그래, 모레스는 뉴비가 아니야. 걘 항상 어딘가 차분하고 의젓한 녀석이었잖아? 저렇게 사람들 앞에서 쉽게 풀어지지 않았어.’
황궁을 나서는 모레스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능숙하게 말을 몬다. 답지 않게 ‘차분하고 의젓해’ 보였다.
그러자 오웬은 또다시 생각했다.
‘그래, 저 녀석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귀여운 뉴비가 아니라고. 걘 검으로 플레이어들을 도륙할 때조차 지나치게 깜찍해 보이는 산양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모레스가 정말 뉴비였다면, 오웬을 만나고도 지금껏 모른 척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성진과 함께 헤쳐온 갖가지 역경들에는 분명 그 정도의 무게는 있을 터.
거기까지 생각한 오웬은, 문득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잠깐만. 그런데 내가 언제 뉴비에게 내 이름을 말해준 적이 있던가?’
처음에 자기소개를 하긴 했었지. ‘오웬 록우드’라고. 하지만 델크로스에서, 오웬은 공식적으로 제국의 1황자 ‘오웬 클라인’이 아닌가.
‘아냐! 그래도 모레스라면 모를 리가 없다. 녀석은 내 본명을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옛날부터 지겹도록 날 록우드라고……!’
음? 그런데 모레스 녀석, 지금은 예전의 기억이 아예 없다고 하지 않았나?
‘…어? 어어?’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을 떠올린 오웬이 말 위에서 뻘뻘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고 보면, 뉴비는 그때 그래픽이 깨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어. 그래서 저렴한 아동용 스킨을 쓰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만에 하나, 뉴비 녀석이 날 보더라도 바로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설마!’
오웬은 깊은 혼란에 빠져 한동안 허둥거렸다. 그런 그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황도 대로에 들어서자마자 들려온 신민들의 우렁찬 함성이었다.
“모레스 저하!”
“바서스트령의 구원자!”
“저기 봐! 고대 요정의 축복을 받으셨다더니, 정말로 작은 불의 요정이 저하의 곁을 맴돌고 있어!”
환호에 휩싸인 모레스는 모로 봐도 그린 듯한 황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무랄 데 없는 정복의 옷매무새와, 잘 갈무리하고 있음에도 은연중에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도. 매일 마주하는 옅은 금빛의 머리카락은, 마치 신성한 후광을 인 듯 찬란한 백금빛으로 빛난다.
“…….”
잠시 그런 모레스의 모습에 정신이 팔렸던 오웬은, 문득 신민들이 자신의 이름 역시 열렬하게 연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웬 저하!”
“남부 전선을 지키는 불패의 기사!”
분위기에 휩쓸린 건가, 심지어는 이런 찬사도 드문드문 들려왔다.
“이야, 정말 훤하시구먼! 두 황자님으로부터 주신의 신성한 빛이 드리우는 것 같네!”
“왜 아니겠나! 주신의 사랑을 받는 성황가의 일원답군!”
“저런 분들이 우리 제국을 지켜주시니, 참으로 든든한 일 아닌가!”
그래, 성황가의 명성에 추호도 흠이 되지 않도록.
오웬은 이내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적어도 신민들의 눈에는, 그가 모레스처럼 당당하고 의연한 황자로 보이길 바라면서.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바로 뒤에서 이런 대화가 오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음? 마부 아저씨. 방금 보셨어요? 저기 짐칸에 실어 둔 상자가 들썩거렸어요.”
“뭐어어?”
“거기다 이상한 빛도 막 뿜어져 나오고.”
“어이구, 에디스 양! 무서운 소리 마시게! 안 그래도 생긴 게 관짝 같아서 볼 때마다 영 섬뜩하단 말이야!”
“하지만, 정말 움직였는데…….”
* * *
오랜 시간 남부 전선을 전전하면서, 오웬은 혼자 몸을 움직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모레스와는 달리 전담시녀와도 동행하지 않았다. 긴 여행을 함께 하기에는, 캐리의 나이가 적지 않았으니까.
그가 어쩔 수 없이 데려온 일행이라면, 카라잔의 늙은 여우를 피해 도망쳐 온 바르토자뿐이었다. 지금 뒤에서 커다란 짐을 짊어지고, 줄기차게 우는 소리 하는 친구 말이다.
“헉! 허억! 델크로스의 오웬이여! 부디 조금만 천천히 갈 수는 없겠소?”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바르토자.”
“어째서 그렇소? 그대는 델크로스 부족의 장자가 아닌가?”
“이번 일의 책임자는 어디까지나 내 동생이거든. 녀석 말로는 오늘 중에 레지나에 도착해야 한다던데.”
그렇게 대꾸한 오웬은, 말의 속도를 조금씩 늦춰 바르토자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게 무리라고 했잖아. 왜 그걸 들고 오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나?”
아닌 게 아니라, 바르토자는 보기에도 무거운 워해머를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언젠가 오웬이 푸르마의 부족장을 죽이고서 얻은 전리품이었다.
“허억! 허억! 이 무기는 우리 부족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물건이오! 언젠가 부족장이 될 이 몸이 고이 간직해야 한단 말이오!”
“그럼 그것과 함께 얌전히 황도에 남았으면 좋았잖나.”
“아니, 오웬이여! 말도 통하지 않는 잔인한 제국인들의 손에, 날 던져놓고 본 체 만 체할 셈이었소?”
대체 어쩌라는 건지.
“그럼 조금만 더 힘내 보든지.”
“크흑! 그럴 수가!”
완전히 좌절한 바르토자는, 결국 소중한 워해머를 질질 땅에 끌며 푸념처럼 한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 제국인의 겉과 속이 다른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부족장의 아들인 그대까지도 그럴 줄은 몰랐소이다! 역시나 델크로스인이란… 족장이 그렇지 않… 이 몸이 어쩌다… 이게 다 저놈의… 조상의 영혼에 맹세코… 지 않으면… 이런… 한… 같은…….”
“어이, 이봐…….”
점점 그의 말이 빨라지기 시작하자 오웬은 적잖이 당황했다.
푸르마 부족의 언어는 볼란타 부족과 유사한 점이 많기에 지금껏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거다. 하지만 저렇게 빠르게 중얼거리는 방언은, 오웬조차도 모두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하늘에 고하… 땅에서 일어… 영원히… 용서치…….”
“바르토자?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분노로 잔뜩 일그러진 놈의 표정을 보건대, 결코 좋은 뜻은 아닐 것이다.
오웬이 대체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멈춰! 잠시 휴식하지.”
앞서가던 모레스가 갑작스럽게 선언했다.
“…네?”
“하지만 저하. 지금 길을 멈추면 일정이…….”
“이참에 이른 점심이라도 들면 되잖나.”
예정에 없던 일이라 다들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하지만 일행은 이내 황자의 명대로 순순히 휴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모레스는 말을 돌려 천천히 오웬에게로 다가왔다.
다각, 다각.
“흡……!”
뭔가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꼈는지, 바르토자가 대번에 입을 다문다.
오웬이 보기에도 그랬다. 안 그래도 사나운 눈매가 잔뜩 날카로워져 있는 것이, 아무래도 모레스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오웬.”
서릿발 같이 한기가 흐르는 목소리에, 오웬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으, 응?”
“저놈에게 전해. 짐을 내 마차에 싣고 당장 그 입 닥치라고.”
일견 모레스는 오웬을 향해 말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의 차가운 시선은 명백히 바르토자의 겁에 질린 얼굴로 향해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는 입도 벙긋하지 말라고 해. 한 번만 더 내 귀에 옛 주술로 델크로스나 성황가를 저주하는 소리가 들렸다간, 내가 친히 놈의 목을 베어 무게를 줄여 주겠다고 똑똑히 전하라고.”
뭐? 옛 주술?
오웬이 당황하며 돌아보자, 잔뜩 주눅이 든 바르토자가 황급히 시선을 피한다. 모레스가 어떻게 그도 모르는 바르샤어 방언을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뭔가 나쁜 짓을 하려 든 것만은 사실인 모양.
“너 이 자식, 바른 대로 말해라. 정말로 성황가를 저주했나?”
“어헉? 그, 그대가 그걸 어떻게……!”
“…진짜였냐.”
화가 나기에 앞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동족 하나 없는 적국의 땅에서 대체 이게 무슨 깡이냐.
“바르토자. 다시는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 마. 앞으로는 절대 자기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내 동생이 전하라는군.”
“그런…! 저치가 옛 주술을 어떻게 알아 듣…….”
“누군가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의 문제가 아니다. 알겠나? 한 번만 더 그런 짓을 했다가는, 동생이 나서기 전에 내가 먼저 자네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그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에도, 모레스는 가만히 그 자리에서 서서 바르토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낌새를 보아하니 정말로 그들의 대화를 대충 알아듣는 눈치다.
그렇게 목을 베겠다는 말이 나오고 바르토자의 안색이 퍼렇게 질리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마침내 모레스는 휙 고개를 돌려 자리를 떴다.
“저하. 식사는 어찌…….”
“생각 없어, 에디스. 애초에 점심 먹기는 너무 이른 시각 아냐?”
“네에? 하지만 방금 저하께서 분명……!”
전담시녀의 말을 들은 척 만 척, 모레스는 말에서 내리더니 그대로 마차 안에 틀어박혀 버렸다. 떠날 때 공언한 대로, 황도를 벗어났으니 이제부터는 아예 마차로 이동할 생각인 모양.
녀석의 전담시녀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그녀는 곧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모레스의 말을 수습해 사라진다.
‘모레스…….’
오웬은 그 일련의 광경을 눈에 담으며 생각에 잠겼다. 바르토자만큼은 아니겠지만, 방금 있었던 일은 그에게도 제법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니까.
‘일순간이었지만, 모레스 녀석이 정말 아버님처럼 보였어.’
친근한 듯, 생소하다.
집으로 돌아온 후 매일같이 함께 부대끼며, 오웬은 모레스를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녀석이 과연 뉴비인가 아닌가를 차치하고라도, 자세히 살피면 살필수록 점점 더 녀석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닌가.
‘게다가 모레스 녀석, 대체 바르샤 말은 또 어떻게 알아듣는 거지?’
바로 그때, 멀리서 마사인 경과 상주기사들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웬 저하!”
“어서 이쪽으로 오셔서 식사하십쇼!”
“아아, 그래!”
뭐, 한동안은 계속 함께 있을 테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물어 볼까.
그렇게 마음을 정한 오웬은, 그때까지도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바르토자에게 마차를 가리켜 보였다.
“뭐 하나? 어서 짐을 놓고 오지 않고?”
* * *
드득. 드드득…….
‘델크로스 부족장의 차남…이라 했나.’
아직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며, 바르토자는 힘겹게 워해머를 끌었다.
‘믿을 수가 없구나! 대체 어떤 자기에, 어린 나이에 저런 인간 같지 않은 기세를 뿜어낼 수 있나!’
지금은 바르샤 전체에 배신자의 상징으로 낙인 찍혔지만, 바르토자는 본래 푸르마의 족장 자리를 두고 경쟁했던 자. 수없이 많은 전장을 누빈 것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살기에는 눈도 깜작하지 않는 강건한 전사다.
그랬던 그가, 잠시 어린 소년의 시선을 받은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를 느끼다니.
‘맹세컨대 그 잔인한 부족장, 와카나 투사이 앞에서도 이 정도로 긴장하지는 않았다.’
심장이 얼어붙은 듯 조여오고 시야가 삽시간에 흐릿해졌었지. 아마 조금만 더 그 시선을 받았다면, 꼴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그 압박감은 단순한 공포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영혼이 통째로 짜부라드는 충격이라면 이와 비슷할까.
‘두렵다. 진정 두렵구나! 다시는 그 소년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
그러니 앞으로는 되도록 그에게 거슬리지 않게 조용히 입을 다물고 지내야겠다. 바르토자는 그렇게 결심했다.
드드드…….
그렇게 겨우 마차에 다다른 바르토자는, 짐으로 빈틈없이 들어찬 짐칸을 바라보며 잠시 침음을 흘렸다.
대체 이 무거운 짐을 어디에 두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마침 짐칸 한구석에, 해머를 놓기 딱 좋아 보이는 길쭉한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흠…….”
바르토자는 잠시 고민했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그 외에는 다른 뾰족한 대안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어, 상자 위로 워해머를 번쩍 들어올렸다.
“영차!”
쿠웅!
무거운 해머가 떨어져 내리자, 상자가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롭게 흔들린다. 하지만 부서지거나 금이 가지 않는 걸 보니, 다행히도 보기보다는 튼튼한 모양.
‘적당하군.’
그러고도 어딘가 불안했던 바르토자는, 곁에 있는 노끈을 집어 들어 소중한 워해머를 상자에 꽁꽁 비끄러맸다. 혹여 마차가 심하게 흔들리더라도 상자에서 쉽게 떨어져 내리지 않도록.
‘좋아. 이제 좀 안심이다.’
드디어 이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었다!
바르토자는 조금은 홀가분해진 발걸음으로 마차를 떠났다. 그래서 잠시 후, 미약하게 들썩이는 상자의 움직임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어엇? 마부 아저씨! 이번엔 확실히 들리지 않았어요?”
“또 뭘 말이야?”
“방금 저 상자 안에서 뭔가가 콩콩 두드리는 소리가…….”
“히익? 에디스 양! 제발 그만!”
Chapter 114: Chapter 414
Chapter Text
414. 이성진 탐구 일지 (3)
이번에 모레스가 꾸린 인원은 생각보다 조촐했다.
측근인 마사인과 브루노 단장 외, 진주궁 상주기사가 4인. 엑소시스트인 리베르 경. 그리고 전담 시녀와 마부 하나.
거기에 오웬과 바르토자를 더해 봐야 겨우 열 명 남짓 되는 소규모 인원이다.
‘아버님께서 잘도 이번 출장을 허락해 주셨군.’
오르토나가 망한 현재, 북부는 거의 무법지대라고 봐도 좋았다. 때문에 영지와 영지를 오가는 상단은 물론이거니와, 드물게 북부를 여행하는 귀족들도 소대 하나는 가뿐히 넘어가는 호위 병력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보통.
한데 모레스는 대체 무슨 자신감인 걸까.
‘물론 녀석도 그리 만만한 실력은 아니지만.’
오러를 되찾은 모레스는, 수년간 남부 전선에서 구른 오웬조차도 깜짝 놀랄 만큼 강한 오러 유저였다.
상태창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오러를 익히고, 간혹 아이템이나 스킬까지 사용해 가며 ‘불패’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오웬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모레스 앞에서는 어쩐지 쉽지 않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 것이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닐지도. 어쩌면 저 녀석, 나보다 강한 거 아닐까?’
성회에 소환되었던 그날의 일만 봐도 그렇다. 대회의장에서 성기사단을 단숨에 압박하던 그 기세는, 오웬은 물론 어지간한 상급 기사들도 쉽게 흉내 내기 힘든 경지임이 분명했다.
그가 황궁을 떠난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오러 한 줌 없었던 모레스가 저런 경지까지 올랐단 말인가.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살던 동네가 본래 좀 험한 곳이었어.
문득 쓸쓸하게 말하던 아기 산양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오웬은 머리를 휘휘 저어 그 잔상을 떨쳐 버렸다.
‘하긴, 모레스는 아버님의 아들이지. 로건만 해도 아버님처럼 검술 천재로 명성이 자자하잖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족은 닮은 구석이 있기 마련이니까.’
피가 이어지지 않은 자신만이 뒤처지는 게 아닌가 하는 감상도 잠시, 오웬은 그 망나니 모레스가 이렇게까지 강해질 수밖에 없었을 상황이 못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벌써 오러 8층에 가깝다고 했던가. 오웬처럼 상태창의 도움을 받는 것도 아닐 텐데, 상식적으로 그게 보통 노력으로 도달 가능한 경지인가. 본인 스스로가 대단히 필사적이지 않고서야…….
‘잠깐만! 모레스가 상태창의 도움을 받을 방법이 정말로 없는… 건가?’
이정표를 가진 게스트 ID 유저들은, 모두 상태창을 통해 쉽게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힘을 얻는다.
그렇다면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지만, 모레스가 정말로 뉴비일 경우는?
‘최대한 서둘러서 퀘스트들을 완료하고서 나처럼 유용한 스킬들을 몇 개 얻는다면, 몇 년 안에 오러 8층을 이루는 것도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아!’
물론 가족들을 위해 매일같이 퀘스트에 매달리던 오웬보다도 진도가 훨씬 빨라야 한다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
‘설마, 정말로 모레스가…….’
그러자 또다시 머릿속에서, 기다렸다는 듯 작은 산양의 잔상이 뾰롱 하고 떠올랐다.
-함께 했던 동료들은 모두 죽어버렸지. 결국 살아남은 것은 나 혼자뿐이야.
씁쓸하게 울리던 목소리와, 무방비하게 내밀어지던 작은 발굽.
아니, 하지만 그럴 리가. 모레스는 황궁을 떠난 적이 없을 텐데, 동료들을 모두 잃을 정도의 위기를 겪었을 리가…….
“저하.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마사인 경의 목소리에 오웬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모두가 식사를 마쳐가는 가운데, 저 혼자 스튜 그릇을 든 채 멍하니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다.
“입맛이 없으십니까? 오늘따라 두 분 저하 모두 기운이 없어 보여 걱정이 큽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장년의 기사가 멋들어진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모레스 저하라면 너무 걱정 마십시오, 마사인 경. 제가 지금 바로 저하께 따뜻한 멜보른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 그래주시겠습니까? 늘 감사합니다, 브루노 단장.”
“별말씀을요. 저하의 다과를 빠짐없이 챙기는 것이 제 일생의 사명인 것을요.”
오웬은 점잖은 표정으로 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남자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브루노 단장이라고 했지. 듣자 하니 왕년에 기사단장까지 역임한 데카론 나이트라 들었는데, 왜 일생의 사명이 ‘황자의 다과 챙기기’인 거지?
한데 모레스의 전담시녀 에디스의 행동은 더욱더 가관이었다. 짐을 뒤져 찻잎과 주전자를 꺼내들더니, 뻔뻔한 얼굴로 그것들을 단장에게 넘기는 것이 아닌가!
“저런!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부디 조금이라도 찻잎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에디스 양.”
“네. 알겠습니다, 단장님.”
어째서? 차를 타는 건 어디까지나 전담시녀의 업무잖아?
‘잠깐. 그러고 보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식사 준비 때도 마찬가지였지. 애꿎은 상주기사들만 분주했을 뿐이었지, 정작 전담시녀는 한가롭게 모닥불 주위의 낙엽이나 정리하고 있지 않았던가.
대체 무엇을 위해 따라온 시녀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바지런하게 주인의 시중을 드는 것 같지도 않아. 모레스는 왜 저런 시녀를 곁에 두는 거지?’
혼란스러운 가운데, 저쪽에서 희미한 콧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브루노 단장이 찻잎을 우려내며 나직하게 흥얼거리는 아리아였다. 황자를 위해 봉사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그에게 커다란 기쁨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
자연히 이런 의문이 들었다. 대체 브루노 단장에게 있어, 모레스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
오웬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 식어버린 스튜를 입에 넣었다.
새삼 자신이 모레스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 * *
황도의 은총을 벗어난 이래, 상주기사들 사이에서는 줄곧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진작 그 변화를 알아채고 있던 오웬은, 함께 식사를 하는 김에 대놓고 그들에게 이유를 물었다.
본래 남부 전선에서도 병사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던 터라, 상주기사들 사이에 친근하게 녹아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무슨 일인가? 조금 전부터 다들 저 기사만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 같네만.”
오웬이 가리킨 것은 젊은 하급 기사였다. 이마에 길게 흉터가 있는, 조금은 성격 나빠 보이는 젊은이.
“아. 눈치채셨습니까, 저하?”
이에 대답한 것은, 이들의 책임자인 상급 기사 쿠르트 경이었다. 그는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젊은 기사를 곁눈질했다.
“저 친구의 이름은 칼멘이라 합니다. 실은 아까부터 저놈이 언제 폭발하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폭발?”
“네. 칼멘 경이 겉보기엔 멀쩡해도 성격에 조금 하자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 친구의 화려한 전적을 말씀드리자면…….”
“이씨! 다들 이럴 겁니까!?”
참다못한 칼멘 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몇 시간동안 지속된 동료들의 눈치에 잔뜩 울화가 치미는 모양.
물론 그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없이, 한 번 놀릴 빌미를 잡은 상주기사들은 가차 없었다.
“와하하! 그럼 그렇지! 지금 보셨습니까, 저하?”
“자네가 이겼어, 클로디아 경. 저 친구 방금 분명히 ‘이씨-’라고 했다고!”
주섬주섬 동전을 꺼내드는 것은 중급기사 빈센트 경이다. 북부에서 유행하는 이름에다, 말하는 억양을 보면, 아마도 지그스문트령이나 그 인근 지역의 출신이리라 짐작되었다.
“제가 그렇다고 했잖아요, 빈센트 경. 저 성격에 폭발은 반나절도 채 안 걸린다니까요.”
그 돈을 신나게 받아 챙기는 이는 클로디아 경. 동그란 얼굴에 주근깨가 잔뜩 박혀 있는 쾌활해 보이는 인상의 기사다.
“…안 그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칼멘 경. 그렇지 않아도 무뚝뚝한 얼굴이 잔뜩 어두워져 있다.
참으로 딱하게도, 그가 반발하면 반발할수록 동료 기사들이 더욱 재미있어 한다는 걸 깨닫지 못한 눈치.
“안 그러긴, 똑똑히 들었다고! 방금 칼멘 경, 엄청 심한 욕 하려고 했어!”
“맘대로 억측하지 마십시오! 전 그저 조금 세게 한숨을……!”
“대체 뭐라고 할 생각이었냐? 오늘도 또 아슬아슬하게 불경죄 한 번 가는 거냐?”
“아냐! 절대 아니란 말입니다아!”
왁자지껄. 황궁 기사답지 않은, 참으로 시답잖은 분위기였다. 물론 오웬은 군기 꽉 잡힌 본궁 기사들보다, 이쪽의 분위기가 더 마음에 들었지만.
“왜? 저 친구가 예전에 뭘 어쨌는데?”
“아, 저하!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글쎄 예전에 울프 기사단과 함께 지그스문트령으로 가는 중에 말입니다. 세상에, 이 친구가 겁도 없이…….”
“아씨! 클로디어 경!”
그나마 일행들 중 제대로 무게를 잡고 있는 친구도 있긴 했다. 바로 새로 마물 전담반에 합류하게 된 로베르 경이었다.
“…….”
그는 상주기사들을 철없는 스콰이어들 보듯 한심하게 쳐다보더니, 곧 짐을 풀어 몇 가지 잡다한 물품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막간을 이용해 여러분들께 나눠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며칠 내로 황도의 은총으로부터 멀어져 무법지대, 즉 악마 숭배자들이 판을 치는 땅에 들어갈 겁니다.”
그가 모두에게 나눠준 것은 간단한 구마 물품들이었다. 자세한 사용법을 몰라도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무기나, 작은 호신부 같은 것들.
“이건 성수입니까? 어떻게 쓰는 겁니까?”
“몸에 지니거나 입에 머금는 것만으로도 영혼을 보호해 줍니다. 아니면 악마에게 직접 뿌리는 방법도 있겠군요.”
“로베르 경. 여기 이 멋진 그림은요?”
“그것은 그라니우스의 보호 술식을 새긴 호신부입니다. 옷 안에 지니고 계십시오, 클로디아 경.”
그렇게 로베르 경이 꺼내온 물건들을 찬찬히 살피던 중, 오웬의 눈에 방향을 잃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몇 개의 팽이 같은 물건들이 들어왔다.
“이것들은 어디 쓰는 건가? 꼭 장난감 같이 생겼는데?”
“아, 저하. 아무래도 그것들은 모두 못 쓸 거 같습니다.”
오웬의 질문에 로메르 경이 난감한 듯 대답했다.
“마기를 찾는 자이로컴퍼스라 합니다. 혹시나 하고 몇 개를 새로 얻어왔습니다만, 어째서인지 이번 여행에서는 전부 먹통일 듯하군요.”
“흠.”
한데 빤히 자이로컴퍼스를 바라보던 브루노 단장이, 은근슬쩍 그 작은 팽이 하나를 주머니에 챙겨 넣는 게 아닌가.
“…단장님?”
로베르 경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브루노 단장은 조금 붉어진 얼굴로 목을 울렸다.
“큼큼. 혹시 만에 하나의 사태란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
모두가 의아하게 생각했다.
대체 장난감 팽이를 사용해야 할, 만에 하나의 사태가 뭐가 있을까?
“한데 우리가 이것들을 지녀도 괜찮습니까? 제가 알기로 축성받은 구마 물품들은, 자격이 있는 자만이 소지하도록 성회에서 엄격하게 수량을 제한하는 것으로 압니다만.”
마사인 경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까다로운 이단 재판부는, 허가 없이 구마 물품을 소지하는 것만 가지고도 배교라고 트집 잡을 수 있을 터.
그러자 로베르 경이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인다.
“그런 염려는 마십시오. 이미 성회에는 모두 허가를 받은 사항입니다. 출발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일행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모레스 황자님께서 누차 제게 당부하신 일이니까요?”
…모레스가?
오웬은 반사적으로 모레스가 쉬고 있는 마차를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곁에 있던 상주기사들 역시 자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아까까지만 해도 가볍게 시시덕거리던 이들의 눈에는, 어느새 하나같이 충실한 신뢰의 빛이 어려 있었다.
“…….”
순간 오웬은,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모레스의 일면을 엿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이들에게 있어서, 모레스는 또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이성진은 언제까지나 나의 친구! 그러니 믿는다! 용사의 내장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문득 그의 뇌리에, 눈물을 머금은 얼굴로 흐물텅거리던 레인저의 모습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오웬은, 다른 이들에게 이와 비슷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작은 친구를 하나 알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에 늘 빛났던 우리의 리더를 잊지 않습니다. 순혈 마슈나무, 이 하타수 티티가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억할 겁니다.
늘 진중하되 사람을 잘 믿지 않던 방패 전사로부터, 거짓말처럼 진정한 신뢰를 이끌어냈던 녀석.
그래. 마치 게스트 ID 유저들을 이끌던 이성진처럼.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오웬은 잡생각으로 어지러워진 머리를 훌훌 털어냈다.
9호의 엉뚱한 보고 탓이리라. 그날 이후로 괜히 모레스를 뉴비와 연관 지어 생각하다 보니, 아무 접점 없는 녀석에게서 점점 뉴비를 겹쳐 보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오웬은 머릿속으로 일부러 딴생각을 하려 애를 썼다. 한 번 의심을 시작하니, 점점 이성적인 판단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고 느꼈으니까.
덕분에 그날 저녁 레지나에 도착했을 때, 오웬은 머릿속에서 뉴비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었다.
이변이 생긴 건 숙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뭐야? 무슨 일이야?”
하루 종일 마차에만 틀어박혀 있던 모레스가, 어디가 불편한지 숙소에 도착해서도 계속 비실거리는 게 아닌가.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자연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너 왜 그래? 괜찮냐? 또 어디가 아파?”
한데 기껏 걱정해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도 아니다.
“어. 시끄러워… 멍청아.”
이 자식이! 너는 이 형님이 하는 말이라면 그저 다 우습지?
“야! 어디 아프면 차라리 아프다고 얘기를 해! 답답하게 혼자서 그러지 말고!”
“호들갑 떨지 마.”
바로 그때였다.
모레스가 인상을 쓰면서 손을 내밀어 보인 것은.
쿠웅!
순간 오웬은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뭐……!”
이번에야말로 그의 착각이 아니었다. 모레스는 정말로 뉴비가 했던 것과 똑같이, 그를 향해 태연하게 작은 손바닥을 내보이고 있는 거다!
“이야기는 내일, 하자고. 아무 것도 아니니까. 가서 잠이나 자.”
모레스가 뒤이어 뭐라뭐라 더 이야기를 했지만, 이미 충격에 휩싸인 오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저 모레스가, 정말로 그 뉴비라고?
정말로?
“어헉?!”
오웬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럼 피곤한 거 같은데, 이만 푹 쉬라고! 내일 보자!”
그렇게 대충 인사를 내뱉은 오웬은, 그대로 몸을 돌려 부리나케 방으로 내빼고 말았다.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깊은 혼란과 자괴감에, 안 그래도 자유분방한 머리칼을 이리저리 쥐어뜯게 된 것이다.
“…설마 설마 했는데… 혹시, 정말인가?”
이제 어쩌지? 역시 모레스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방법이 없나? 하지만 어떻게?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는 거지?
그날 밤, 오웬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심란해져 한숨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퀭한 얼굴로 식당으로 향한 오웬은, 고상한 자태로 식후 멜보른을 들이켜는 모레스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너 얼굴 꼴이 왜 그래? 혹시 그 나이 먹고 잠자리를 가리냐? 다 큰 녀석이 별 이상한 데서 예민하게 구네.”
“…….”
전부터 늘 생각했던 거지만, 모레스는 참 얄미운 소리만 골라서 하는 녀석이었다.
Chapter 115: Chapter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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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이성진 탐구 일지 (4)
일행이 묵는 숙소는 레지나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여관이다.
자연히 식당은 아침 식사를 위해 몰려온 사람들로 붐볐는데, 그중에서도 모레스는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녀석이었다.
언제나처럼 뚱한 얼굴은 오늘따라 유독 비밀스러운 카리스마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다. 레지나에서는 그리 드물지 않게 보이는 엑소시스트의 정복 역시 모레스의 몸에 걸쳐지니, 괜히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모레스가 정말 난놈은 난놈이구나.’
새삼 오웬이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자, 모레스가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핀잔을 준다.
“늦었잖아. 잠을 못 잤으면 식사라도 빨리 할 것이지. 설마 잠자리 가리는 걸로 모자라, 밥투정까지 할 생각은 아니지?”
그의 입이 열리자, 주위에 흩어져 식사하고 있던 사람들이 아닌 척 이쪽으로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그저 앉아서 차를 홀짝이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관심을 집중시키다니, 그야말로 엄청난 존재감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나 모레스의 곁에는, 어딜 가나 녀석의 머리 위를 환하게 비추는 작은 불꽃이 딸려 있었다.
“와아. 저것이 소문의 요정…….”
“쉬잇! 들리겠네. 목소리를 좀 줄여.”
붉은 불꽃은 경쾌한 움직임으로 모레스의 주위를 맴돌다가, 이따금 녀석이 던져주는 다과들을 날름날름 집어삼키곤 했다. 완전히 길든 그 모습은, 고대의 요정이라기보다 차라리 녀석이 키우는 애완조에 가까워 보인다.
오웬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뉴비도 저런 적이 있지 않았나? 우리 파티가 모인 식당에서 갑자기 작은 불꽃을 불러낸 적이 있어. 크기가 딱 저만큼 작았는데, 거기에 휘말린 구릅의 다리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질 정도로 강력한 불꽃이었더랬지.’
그때 쿠르트 경이 다가와 두 사람에게 가볍게 묵례한 후 물었다.
“저하. 오늘 하루는 예정대로 레지나에 머뭅니까?”
“그래, 쿠르트 경. 나는 이런저런 볼일이 있으니까, 자네는 그동안 상주기사들을 데리고 도시 관광이라도 하게.”
“목적지를 알려 주시면 곁을 수행하겠습니다.”
“어, 괜찮아. 마사인 경이 쭉 함께 있을 거니까. 앞으로 줄곧 야영하는 날이 이어질 텐데, 레지나에 온 김에 다들 즐길 수 있는 건 즐겨 두라고.”
“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하.”
쿠르트 경이 담백하게 예를 취하고는 자리에서 물러난다. 모레스의 지시를 받는 것에 꽤나 익숙해 보인다.
“아, 그리고 로베르 경?”
“네, 저하.”
“시간이 나면 자네는 교외에 있는 교회에 한번 들러 주게.”
레지나의 교회는, 북부를 순회하는 엑소시스트들과 인퀴지터들이 반드시 한 번은 거쳐 가는 곳이다. 자연히 그들이 모아온 정보들이 한데 모이는 장소가 될 수밖에.
“그러잖아도 제 쪽에서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어떤 것을 중점적으로 알아보면 되겠습니까?”
“일단 벤소 후작령의 분위기가 어떤지 궁금해. 겸사겸사 참회 교단에 대한 전반적인 동향도 알고 싶고.”
“네, 잘 알겠습니다.”
리베르 경 역시 자연스럽게 예를 갖춘 후 자리를 뜬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오웬은 또다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뉴비도 저러곤 했지. 다들 깨닫지 못하는 사이, 어느새 당연하다는 듯 모두의 리더가 되어 척척 지시를 내리곤 했어. 그 조그만 녀석이 어찌나 당차고 위압감이 넘쳤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단 말이야.’
굳이 따지자면 모레스는 정말로 이 일행의 총책임자였다. 모두에게 명령하는 것이 당연한 위치였지만, 오웬은 그러한 사실을 가뿐히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정말로 모레스가, 이성진이란 말인가…….’
지금까지는 왜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까. 보면 볼수록 모레스는 뉴비와 비슷한 구석이 많은데.
사람의 마음이란 이리도 간사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온 힘을 다해 부정해 왔지만, 어렵게나마 가능성을 인정하고 나니, 이제는 마치 거짓말처럼 모레스의 모든 행동에서 이성진이 보이는 것 같지 않은가.
“아, 그리고 오웬.”
“…응?”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터라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그러자 부하들에게 대강의 지시를 끝낸 모레스가 호록, 멜보른을 들이킨다.
“너는 오늘 나랑 같이 물류 중계소에 좀 가자.”
“물류 중계소?”
“그래. 너 자금에 여유가 좀 있지? 마침 엄청 좋은 투자 상품이 있는데, 함께 사업 좀 해 보지 않을래?”
“…사업?”
“어. 내 장담하건대 투자금의 두 배, 아니 세 배는 가뿐히 벌 수 있는 사업이야. 네가 허락만 하면, 슈미트 지부장이 곧바로 계약서를 챙겨줄 거야.”
멍청하게 눈만 끔벅이는 오웬에게, 모레스가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해 줬다. 현재 ‘베르트란 & 리’라는 중소 상단을 운영하며, 바닥에서부터 북부 유통망을 힘겹게 개척하는 중이라고.
전망은 밝았다. 하지만 아직은 이익보다 초기 자금이 더 많이 들어가는 시기라, 여유 있는 새 투자자를 찾고 있다는 거였다.
“이미 로건은 자기 용돈의 대부분을 상단에 투자했어.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 명실상부 상단의 최고 대표라 할 수 있지.”
다 식은 스튜를 입에 떠 넣던 오웬은 무심코 코를 찡그렸다.
상단의 최고 대표인 동시에 명실상부한 델크로스 최고의 호구이기도 하지. 로건 녀석이 대표라니, 과연 그 상단은 괜찮은 걸까?
오웬의 떨떠름한 기색을 알아차린 모레스가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나도 꽤 지분이 커. 그리고 비교적 소량이긴 하지만, 아멜리아 누님과 시슬레도 이미 용돈 일부를 투자했다고.”
“…아멜리아와 막내가?”
“그래. 넌 여태껏 누님이 허튼짓을 하는 걸 본 적 있냐?”
하긴, 아멜리아라면 믿을 만하지. 오웬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꽤 괜찮게 들리네. 하지만 난 돈이 없는데? 너도 알다시피, 여태 남부 전선에 매여 있느라 딱히 돈 모을 기회가 없었단 말이야.”
그러자 모레스가 대단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매달 네 앞으로 나온 용돈이 하나도 남김없이 헤이든 은행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고 들었는데.”
“…용돈?”
“그래. 네가 도통 쓰질 않으니 몇 년간 이자만 고스란히 붙고 또 붙었대. 이제는 제법 무시 못 할 금액이 되었다더라.”
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아버님께서 매달 큰돈을 주신다고 시종장에게 얼핏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워낙에 쓸 일이 없어서 지금까지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
오웬은 식기를 멈추고는 묘한 감상에 젖어 들었다. 어리석게도 지금껏 자신이 온전히 손에 쥔 것이라곤 [판게아 클로니클]에서 모은 것들이 전부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선물이든 뭐든 캐시를 벌어서 해결하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았던가.
‘한데 생각해 보니, 지난 몇 년간은 돈이 필요하다고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군.’
전장에서조차도 비교적 풍족했다는 뜻이다. 그가 제국의 황자로서 얼마나 많은 혜택들을 누려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내가 그 돈의 존재를 잊어버리든 무시하든, 아버님은 그저 묵묵히 내게 지원을 이어주셨던 거다. 마땅히 내가 받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셨을 테니까.’
문득 오웬은, 자신이 예전과는 달리 무척 편안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오웬은 이제 더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과분하다 여기지 않는다. 그저 손아귀에 쥔 것을 충분히 누리는 것만이, 자신에게 베풀어진 사랑과 배려에 대한 온전한 보답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선물들을 죄다 가족에게 쏟아붓는 것 역시 헛되다 여기지 않는다. 어차피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은 가족들을 위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모레스에게 가볍게 대꾸했던 것이다.
“그렇군. 나 돈 많구나. 그럼 투자니 이익이니,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할 설명을 자세히 할 필요는 없어. 어쨌거나 모레스 너, 지금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구나?”
“뭐……?”
“그래, 얼마나 주면 될까? 이대로 너랑 같이 물류 중계소로 가서, 계약서에 서명만 하면 되는 거지?”
그러자 모레스가 갑자기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오웬을 노려보았다. 뭔가 그의 대답이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다.
“…너 말이야, 어디서 함부로 서명하지 말라는 말, 들어 본 적 없어?”
“응? 글쎄…….”
어렴풋한 기시감을 느끼며, 오웬은 잠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랬나?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왜? 왜 그래야 하는데?”
그러자 휘익-!
뭘 하려는 건지 재빠르게 팔을 치켜들던 모레스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는 주먹을 꾸욱 말아 쥐는 것이 아닌가!
“아, 이 멍청이가!”
난데없는 인신공격에 오웬은 적잖이 당황했다.
“뭐? 뭐가 문제야! 왜 또 멀쩡한 사람더러 멍청이래?”
“이 세상 어느 누가 투자하라는 말만 듣고 돈을 그냥 줘? 제대로 알아볼 생각은 들지 않냐? 내가 전부터 정신 좀 똑바로 차리고 살라고 했어, 안 했어? 어?”
오웬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야, 그게 화내는 이유야? 도통 알 수가 없네! 그럼 아예 처음부터 돈을 달라고 하질 말든지!”
“너 인마, 지금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잖아! 내가 돈을 달라고 한 게 문제가 아니라, 네가 아무 생각 없이 막 퍼주는 게 문제라고! 그걸 아직 모르겠냐?”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억지……!”
지지 않고 버럭 마주 화를 내던 오웬은,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어라? 이것 좀 보라지.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줘도 뜬금없이 짜증을 내는 걸 보면, 역시 모레스는 뉴비와 정말 많이 닮았잖아?
* * *
이른 아침 햇살이 흐트러진 은빛 머리카락 위에 희미한 빛무리가 되어 내려앉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햇살은 작은 소녀의 흰 볼과 그녀의 목에 걸린 분홍색 안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이윽고, 소녀의 곁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소드 마스터의 발치에까지 힘겹게 기어온다.
“…….”
로건은 그렇게 완전히 날이 밝을 때까지 미동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 손은 아르쥬나의 손잡이를 쥐고, 또 다른 한 손은 납작한 돌멩이 하나를 움켜쥔 채로.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똑똑.
“저하. 오토 경이 잠시 저하를 뵙길 청합니다.”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젊은 인퀴지터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최근 시슬레의 호위를 도맡곤 하는 보리스 경이었다.
“평의회 일로 급히 보고드려야 할 게 있다고 합니다. 이제 성녀님의 곁은 제가 지킬 테니, 부디 염려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
로건은 일견 순박해 보이는 인퀴지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이단 재판부의 일원임에는 변함이 없으리라.
하지만 최근 시슬레를 대하는 보리스 경의 태도는 언제나 깊은 진심이 느껴지곤 했지. 그래서 로건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 시슬레를 잘 부탁하네, 보리스 경.”
그러고도 로건은 잠시 시슬레의 곁에 서서, 잠든 동생의 오러 상태가 지극히 평온하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서야 겨우 방을 나섰다.
“저하, 평의회에서 드디어 결단을 내릴 모양입니다.”
오토 경은 로건에게 예를 취하자마자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결단이라 함은?”
“출항입니다. 총지휘관 리산드로스 장군이 방금 전 병력의 소집을 명했다고 합니다.”
“…그렇군.”
발레리 경을 움직여 교회 감사를 서두른 보람이 있다.
로건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며, 오토 경과 빠르게 논의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각 기사단의 편제는 일전에 논의한 대로 가지. 릴리움 역시 그에 맞춰 세 팀으로 나누는 것이 좋겠네.”
“[고대의 불] 안정성 문제는 어찌합니까?”
“리산드로스 장군은 그것들을 편대 중앙에 적재할 계획인 것 같더군. 우리 토벌대는 주로 외곽에 배치될 테니, 아마도 직접적으로 그 까다로운 화공 병기를 다룰 일은 없을 걸세.”
그렇게 그들이 한창 평의회 안뜰을 가로지르던 중이었다. 예민한 로건의 감각은, 저 멀리서 일어나는 평소와 다른 공기의 소요를 감지했다.
“…저하?”
갑자기 황자가 걸음을 멈추자, 오토 경이 의아한 듯 돌아본다. 하지만 로건은 그에게 작게 손을 저어 보인 후, 가만히 어딘가로 감각을 집중했다.
평의회 건물 바로 밖, 해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담벼락 아래로.
“…….”
그곳에는 마침 몇 명의 인부들이 모여, 포대에 지고 온 돌들을 한창 바닥으로 쏟아내는 중이었다.
우르르르…….
“이것들이 다 뭔가?”
“아아, 암브로시우스 평의원님이 시키신 일입니다. 갑자기 머리탑의 보수 공사를 하신다나 봐요.”
“보수 공사? 갑자기 왜?”
“요즘 해풍의 저주를 불러온다는 머리탑 이야기가 유명하잖습니까? 그러니까 토벌대가 출항하기 전에, 탑을 말끔하게 재정비하고 사제들을 불러 축성도 하신대요.”
암브로시우스.
그의 이름이 나오자, 로건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렇군. 그런데 해체한 돌들을 왜 모조리 여기로 가져오나?”
“그, 뭐라더라? 탑 남동쪽 아랫단에 있던 돌들은 일단 전부 가져오라고 지시하셨답니다. 역사적 사료로 보존할 가치가 높다고 했다던가요?”
“별일이구먼. 보존하면 전부 보존하는 거지, 남동쪽만 콕 찍을 건 또 뭐래.”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로건은, 저도 모르게 정복 코트의 안쪽을 더듬었다.
그 속에는 어젯밤, 모레스의 늑대개가 물어온 납작한 돌덩이 하나가 고이 숨겨져 있었다.
* * *
악마 글럼고스, 아니 슈미트 지부장은, 기다리던 황자 일행을 맞이하자마자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어찌나 놀랐던지 적절한 예를 갖출 정신도 없었지.
바로 모레스 황자의 머리 위를 맴도는, 심상치 않은 불꽃 때문이었다.
“저하, ‘그것’은 대체……?”
그러자 빨간 불꽃이 위협하듯 슈미트 지부장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것’이라는 지칭에 대한 강력한 항의의 뜻이 분명했다.
“그것이라니, 제대로 예의를 갖춰 주게, 지부장. 내게 주신의 시련이자 축복을 나눠 준 고대의 요정님이다.”
“…고대의… 요정?”
모레스 황자의 대꾸에, 슈미트 지부장은 채 말을 잇지 못한 채 멍청하게 입을 뻐금거렸다.
아니, 농담이시겠지요, 저하? 저건 어느 모로 보나, 마기를 지닌 훌륭한 악마가 아닙니까?
한데 왜 악마가 신성 결계를 두르고서, 사람들 눈앞에서 멀쩡하게 날아다니고 있는 겁니까?
Chapter 116: Chapter 416
Chapter Text
416. 이성진 탐구 일지 (5)
그 불꽃은 슈미트에게는 대단히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졌다.
마기를 스멀스멀 피워 올리는 것을 보면 그 근원은 의심할 여지없는 악마의 영혼이다. 하지만 놈이 실체를 입은 방식이 어딘가 이상했다.
‘근처에 저 악마의 직접적인 계약 대상이 보이지 않는다!’
악마가 다른 차원에 현현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계약자의 몸을 빌려 강림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막대한 인과를 소모하여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계약자를 매개로 한다고 보기에는, 저 불꽃은 지나치게 순수한 에너지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정말로 활활 타오르는 불꽃 그 자체라는 뜻이다.
하면 자신의 기운을 뚜렷하게 실체화시킬 정도로 강한 마기를 뿜어내고 있다는 뜻일 텐데, 잘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정작 놈이 풍기는 마기의 양 자체는 대단히 보잘것없었으니까.
‘설마… 실체화의 과정에서 조금 다른 법칙, 어쩌면 규상 세계의 법칙이 개입했나?’
무언가 장막에 한 꺼풀 가로막힌 듯, 묘하게 존재에 필요한 인과를 비껴나간 듯한 느낌.
하지만 슈미트의 생각은 거기서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 쥐똥만 한 불꽃이, 그를 향해 분기탱천하여 소리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무례한 놈! 어디 감히 주제도 모르고, 이 위대한 마왕님을 ‘이것’이라 멸칭하느냐?!]
한 줌 거리도 되지 않는 놈이, 저게 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가.
그런 슈미트의 생각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난 모양. 불꽃은 이제 불똥까지 팍팍 튀겨가며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저저, 건방진 표정 좀 보라고! 어서 예를 갖추지 못하겠느냐? 혼자서는 제 앞가림도 못하고, 동족의 명부나 만들어 팔아먹는 반푼이 주제에!]
그 호통에 슈미트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잠깐! 저 악… 아니, ‘요정’이 어떻게 ‘계약의 명부’에 대해 알고 있지?
“…저하?”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레스 황자뿐. 하지만 황자를 돌아본 슈미트는 더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저 이상한 불꽃에 정신이 팔려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까부터 모레스 황자가 뿜어내는 마기도 이상하기론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어찌 인간의 몸으로 저런 짙은 농도의 마기를 견디고 있나 심히 의아할 지경.
‘예전에도 마기가 미약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물론 최근에 슈미트 역시 여러 믿을 수 없는 풍문을 전해 듣긴 했다.
모레스 황자가 주신의 시련을 받은 사도라느니, 그게 아니라 실은 고대 요정의 축복을 받았느니 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도에서 저런 꼴을 하고 무사히 지내셨다고? 대체 어떻게?’
경악한 슈미트와 달리, 모레스 황자는 지나치게 여유가 넘쳤다. 그는 사무실 한쪽에 있는 장식장을 쓱 둘러보더니, 여상한 태도로 전시되어 있던 접시 하나를 끄집어냈다. 테두리에 금칠이 되어 있는 귀한 브르타뉴산 포슬린 접시였다.
“이거 좋네. 너 잠시 여기 앉아 있을래?”
황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헤헤헤.]
수상한 불꽃은 기다렸다는 듯, 포로로록 접시 위로 내려앉았다.
마치 잘 조련된 애완동물을 보는 기분이었다. 마왕이니 뭐니, 기세 좋게 떠들어댄 것치고는 참으로 하찮기 그지없는 모습.
“저하…….”
“말하지 말게, 지부장.”
“하오나, 저하…….”
“쟨 내 소관이다. 그러니 더는 신경 쓰지 말고 우리 할 일이나 하자고.”
아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한들 그게 쉬울 리가…….
슈미트가 접시 위에 편안하게 자리 잡은 불꽃을 곁눈질하자, 놈은 또다시 슈미트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와하하하! 이 접시, 정말 마음에 드는구나! 위대한 마왕님의 격에 어울리는, 참으로 예쁜 물건이 아니더냐? 마침 잘 됐다, 반푼아! 존경과 복종의 표시로, 이 접시를 위대한 마왕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하마!]
슈미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저 조막만 한 걸 그냥, 확 패줄 수도 없고.
* * *
오웬은 마사인과 함께 상인 연합의 귀빈으로 깍듯하게 대접받았다.
지부장이 손수 안내하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이내 그의 비서가 따뜻한 차와 다과를 부리나케 들여온다. 모레스가 받는 대접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
‘슈미트라고 했지. 완고하고 삭막한 인상이라 생각했는데, 보기보다 정감 가는 구석도 있군,’
오웬은 과자 하나를 우물거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성황의 친자가 아닌 그나, 황위 계승권에서 아예 멀어져 버린 마사인 경. 두 사람 모두, 평소 실리를 추구하는 상인들로부터 은근히 얕잡아 보이기 쉬운 처지였으니까.
‘…아니면, 이것도 다 모레스 덕분인가?’
오웬은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는 모레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슈미트 지부장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쟨 그냥 모른 척해, 지부장.” “하오나, 저하. 저것… 아니, 요정님이 분명 자신을 가리켜 마와…….” “어허! 자네가 잘못 들었겠지.”-모레스의 모습을 보니, 평소에도 두 사람은 친분이 꽤나 두터웠던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까 모레스의 사업을 도맡아서 관리해 주는 거겠지?’
사실 그 내막을 따져보면, 두 사람 역시 악마들이 가장 연관되기 두려워하는 ‘성황의 아이들’ 에 속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지금의 오웬이 그 사실을 알 방도는 없었지만.
“여기, 저하께서 투자하시기에 적당한 사업들을 추렸습니다. 부디 천천히 검토해 주십시오.”
모레스의 말대로, 지부장은 곧 오웬에게 잘 정리된 서류철 하나를 가져왔다.
도로가 자세히 나와 있는 대륙 전도와, 분야별로 묶여 있는 각양각색의 사업 계획서들.
‘음. 어차피 나는 봐도 잘 모르는데…….’
빽빽한 서류들을 집어든 오웬은, 곧 그것들을 도로 닫아버리고 싶다는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을 어떻게 안 건지, 뒤돌아보는 모레스의 눈초리가 매섭기 짝이 없다.
“…….”
오웬은 어쩔 수 없이 글자가 겉도는 서류들을 억지로 눈에 집어넣으려 애썼다. 눈치를 보아하니, 어쩐지 나중에 모레스가 내용을 물어볼 것 같단 말이지.
그렇게 한참을 끙끙거리고 있자니, 보다 못한 마사인이 옆에서 훈수를 둔다.
“여기, 구리 광산 쪽은 어떠십니까? 갱도의 보수가 꽤 진척되었다고 하니, 내년부터는 제법 높은 수익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 형님께서도 사업에 대해 잘 아십니까?”
오웬이 반색하자, 마사인이 빙긋이 미소 지었다.
“실은 저도 잘 모릅니다. 하나 모레스 저하의 계획 중 가장 수익성이 떨어지리라 예상했던 참연어 사업이 벌써부터 궤도에 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처음부터 좋을 거라는 기대를 받았던 다른 사업들의 전망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 그렇군요.”
뭘 고르든 본전 이상은 한다는 말이겠군.
‘좋아. 자세한 건 제쳐두고, 대충 종류만이라도 눈에 담아 두자.’
그렇게 마음에 한결 여유가 생긴 오웬은, 서류철과 씨름하는 대신, 옆에서 일어나는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마침 모레스는 한창 지부장의 사업 보고를 듣는 중이었다.
“구리 광산의 보수는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방치된 곳이다 보니 사람들이 기피하지 않을까 했습니다만, 보수를 넉넉히 책정하니 결국 인원이 모이기는 하더군요.”
“그렇군.”
“벌목장의 가동도 벌써부터 순조롭습니다. 이미 키프로스 조선소에 일부 목재들을 팔고 있고, 육로가 확보되면 곧 북부 전역으로 공급을 확대할 방침이죠. 난민들을 추가로 더 고용할 수 있을 겁니다.”
“좋아. 어쨌거나 고용과 보수에는 돈을 아끼지 말지. 저온 마차가 확보되면서 이미 비용을 많이 절감했으니까.”
그렇게 대꾸하는 모레스는 마치 노련한 사업가처럼 보였다. 보면 볼수록 새로운 구석이 많은 녀석이다.
“사업장 주위로 마을이 여럿 생겼다고 했나? 치안은 어떻게 유지하고 있지?”
“사업장에는 충분한 경호 인력들을 배치했습니다. 마을 같은 경우는 정착한 난민들이 자체적으로 자경단을 조직했다 들었습니다만.”
그러자 모레스가 잠시 고개를 모로 기울이더니, 곧 추가 지시를 내린다.
“그럼 그 마을들에 상단이 운영하는 작은 판매소를 내지. 일단 생필품을 값싸게 팔고, 기구 수리도 되도록 저렴하게 해 주라고. 우리가 마을 시장을 선점하는 거야.”
“…네?”
“아, 판매소를 지킬 경비 인력을 추가로 투입하는 것도 잊지 말고.”
그러자 슈미트 지부장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저하. 그 판자촌에 선점할 시장이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괜히 경호 인력만 낭비하는 꼴…….”
“…….”
“엇, 설마! 마을의 치안 때문에 그런……?”
하지만 모레스의 지긋한 시선을 받자,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인다.
“네. 잘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거행하지요. 대체 북부 난민들에게는 왜 그리 퍼주지 못해 안달이신지, 원…….”
흠,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본격적인데.
멍하니 모레스가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마사인이 오웬을 돌아보며 뿌듯하게 웃어 보였다.
-어떻습니까? 우리 어린 저하께서, 어느새 저렇게나 대견하게 자라지 않았습니까?
그런 생각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표정.
오웬은 조금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가 남부 전선으로 떠나기 전만 해도, 마사인 경은 늘 먼발치에서 하염없이 진주궁 쪽을 바라보곤 했으니까.
“…음?”
차락차락.
그때 거침없이 보고서를 넘기던 모레스가 갑자기 슬쩍 눈썹을 찌푸린다.
“한데 지부장.”
“예, 저하.”
“남부의 곡물을 들여오는 일은 왜 여전히 지지부진하나? 우리가 시작한 사업들 중에서 가장 먼저 수익을 거두리라 기대하지 않았나?”
그러자 슈미트 지부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협조를 구했던 영주들의 반응이 썩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마력세를 지금의 두 배로 쳐주지 않으면, 절대 길을 내주지 않겠다고 뻗대지 뭡니까.”
오웬은 마사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형님. 마력세가 대체 뭡니까?”
“마차를 끄는 말의 숫자에 일일이 세금을 물리는 겁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북부를 오가는 상단은 영지마다 각각 책정된 마력세를 모두 따로 낸다고 하더군요.”
“아, 그렇군요.”
거 별 희한한 세금이 다 있네.
어쨌거나 저 ‘마력세’란 것이, 모레스의 사업에 악영향을 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녀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살벌해졌으니까.
“대체 왜? 이미 시세보다 마력세를 더 쳐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장기적으로 보면, 자신들의 영지에도 크게 이익을 주는 구조인데?”
“그 이유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하.”
슈미트는 난감한 듯 대답했다.
카스티야, 밀로, 벤소, 카보우르, 그리고 다시아노.
그들 5인은 현재 북부 각지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옛 왕당파의 귀족들이다. 그런 이들이 뭔가 돈이 되는 냄새를 맡은 건지, 하나같이 슈미트의 제안에 냉담한 답을 한 것이다.
한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모레스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다시아노 후작이 그 분위기를 주도하지 않던가?”
그러자 슈미트 지부장이 놀란 듯 모레스를 바라보았다.
“예, 맞습니다, 저하. 그 다시아노 후작의 태도가 너무나 강경합니다. 한데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그래. 그렇군.”
모레스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는다.
순간 오웬은 처음 보는 녀석의 섬뜩한 기세에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 녀석…….’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모레스가 정말 화가 많이 났다는 것을.
우습게도 오웬은, 지금껏 모레스와 그렇게나 다투면서도 녀석이 정말 화났을 때의 모습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일정을 좀 바꿔야겠어.”
모레스의 서늘한 회색 눈이 섬뜩한 은광을 흘린다.
“모든 출장 일정이 끝나고 나면, 곧바로 다시아노령에도 한 번 들러줘야겠는데.”
Chapter 117: Chapter 417
Chapter Text
417. 이성진 탐구 일지 (6)
마력세.
그 유서 깊은 세금의 유래는 장장 5대 성황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성제국 델크로스가 건국되고도 한동안이나, 대륙에는 딱히 그 외에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갖춘 나라가 없었다. 즉 지방 영주들의 권력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다는 뜻이다.
당시의 영주란 그야말로 주신 다음으로 전능한 존재. 이들에게 있어 ‘사회 계약’의 개념 따위, 세상 물정 모르는 철학자들의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영지의 모든 것이 영주의 소유이며, 모든 권력 또한 영주의 손안에 있다. 따라서 그들이 가진 것을 점검하고 여기에 기발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장사치가 장부를 쓰고 돈을 세는 것과 같은 당연한 일과였다.
영주들은 재산을 늘리기 위해 세금을 쥐어짤 갖가지 방법들을 고안해냈다. 낚시세나 사냥세, 저수지세, 강수유입세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내 땅에서 수렵을 하고 농사를 지어 먹으려면, 이에 합당한 사용료를 내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나.
또 어떤 영주들은 가진 것이 많은 자에게 세금을 더 물리겠다는 획기적인 발상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래서 ‘사치’품이라 생각되는 것들에도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난로 개수를 세어 세금을 물린 북부의 ‘난로세’나, 창문의 개수대로 세금을 책정한 남부의 ‘창문세’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그런 영주들에게도 상인이란 대단히 애매한 존재였다. 영지민도 아닐뿐더러, 그들이 파는 물건 역시 자신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니 세금을 물릴 만한 명분이나 기준이 딱히 마땅치가 않았다.
-어쨌거나 놈들이 내 땅에서 이익을 얻는 만큼은 돈을 걷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처음에 영주들은 마차의 개수당 세금을 책정하는 ‘마차세’를 걷었다. 물건을 많이 파는 놈에게 많이 걷는 것이 공평하지 않겠냐는 취지였다.
한데 마차세를 걷는 기조가 대륙 전반에 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익에 눈이 먼 상인들이 괘씸한 짓거리를 시작했다. 합당한 세금을 줄여보겠다고 점점 더 커다란 짐마차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이런 지독한 것들…….
그래서 다음으로 시행되기 시작한 것이 ‘마차 중량세’다. 원리는 간단했다. 물건 적재량에 따라 세금을 물리면 되지 않느냐는 것.
문제는 영지마다 도량이 통일된 것도 아니거니와, 일일이 물건을 빼내어 중량을 측정하는 것이 제법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는 거다.
-주군! 징수관 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무게를 재는 동안 물건들이 상했다며, 상인들이 성문 앞에서 보상을 요구-!
그러자 영주들은 이번에는 마차의 바닥 면적을 계산하여 ‘마차면적세’를 물리기 시작했다. 징수관들이 일일이 줄자를 가지고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중량을 재는 중노동에 비하면 일이 한결 수월해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한데 ‘마차면적세’가 제대로 정착을 하기 무섭게, 이번에도 또 상인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 도리를 모르는 막돼먹은 것들이, 이제는 포장을 높게 치고 바닥 면적을 최대한 줄인 기형적인 마차를 만들어낸 것이다.
세수는 영 늘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회전 반경이 불안정해진 마차들은 수시로 전복 사고를 일으킨다.
이쯤 되자 영주들도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 일관성은 개뿔, 그냥 내키는 대로 걷기로 한 거다.
-짐마차가 너무 높구먼. 자네는 이번에는 ‘중량세’를 내게.
-네에? 하지만 징수관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면적세’를 적용하지 않았습니까?
-거 무슨 배부른 투정인가? 옆 영지에서는 마차세와 중량세 둘 다 매기는 것도 모르나? 상인들을 생각하는 우리 영주님의 깊은 아량에 감사드리게.
그렇게 중구난방으로, 혹은 이중, 삼중으로까지 세금이 매겨지기를 수백 년. 이 복잡한 세금 체계에 강한 반감을 표한 자가 나타났으니, 당시 전 대륙을 여행하며 [신기한 대륙 탐방기]를 집필하던 그라니우스였다.
그는 주로 영지에서 영지로 이동하는 상단을 따라 여행을 하곤 했는데, 번번이 이 세금에 발목이 잡히다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이 바보들아! 짐이 크든, 짐이 무겁든, 그래서 마차 개수가 늘어나든, 그걸 끄는 것은 어차피 모두 짐말 아니야? 그럼 필요한 말의 수대로 세금을 물리면 쉽잖아!
-그, 그런 간단한 방법이……?!
그렇게 해서 5대 성황의 제위 기간 중 점차 하나로 통일되기 시작한 세금이 바로 ‘마력세’였다.
짐의 적재량은 물론 짐말이 오가며 축내는 영지의 초목 소모량까지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 영주들에게 큰 각광을 받으며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유서 깊은 마력세의 초기 취지를 일깨우는 자가 있었다. 바로 돈 버는 만큼 제대로 뱉어내라 뻗대고 있는 베르세우스 다시아노 후작이었다.
-당신네들의 사업은 분명 기존 상단의 배는 넘는 수익을 발생시킬 터. 그러니 당연히 마력세도 두 배로 내시오.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 이상 북부와의 대화는 없소.
또한 여기에, 그 뿌리 깊은 마력세의 명분에 대해 근본부터 의문을 제기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내 돈을 탐내는 놈에게는 동전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모레스 황자였다.
“애초에 말도 되지 않은 마력세를 순순히 납부하려던 게 문제였어. 꼼수를 부려 쉽게 가려 하니, 결국은 이렇게 문제가 생기는군.”
모레스의 투덜거림에, 슈미트 지부장은 물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오웬과 마사인까지 의아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제대로 마력세를 내는 것이 왜 꼼수라는 거지?
“역시 일은 정석대로 진행해야 하는 법이다.”
“…하면 저하. 그 정석대로라는 것은?”
지부장이 조심스레 질문하자, 모레스의 한쪽 입꼬리가 장난스레 솟아올랐다.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주신을 저버리는 것들에게 더는 놀아나지 않겠다는 뜻이다. 어딜 감히 주신의 종이, 주신의 땅에서, 주신의 과업을 수행하는 이에게 세금을 물린다는 건가?”
“…….”
“그러니 다소 번거로워지더라도 잘못을 엄중히 따져, 그들을 제대로 된 신앙의 길로 인도하겠다. 그것이 바로 정석이지.”
슈미트는 순간 대꾸할 말을 잃고 입을 뻐금거렸다.
그, 그야 정교회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정론일 수 있다. 그럴 수는 있는데…….
“하지만 저하. 귀족의 영지는 그가 관리하는 그의 땅입니다. 하면 통행세든 마력세든, 그 권리에 합당한 값을 지불하는 것은 당연한…….”
“하면 지부장. 주인 없는 산에 자리를 틀고 길을 관리하는 산적들은 어떤가?”
“…네? 산적, 이요?”
“그래. 만약 그들이 통행로를 제대로 관리하며 그 비용을 받겠다고 한다면, 자네는 그들에게 순순히 돈을 지불할 건가?”
…아니, 그건 정말로 억지 아닌가?
순간 사무실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모레스의 태도는 당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잘 알아두라고, 슈미트 지부장. 오르토나가 멸망한 이후, 그곳을 다스리는 영주들은 더는 우리 외교부의 정식 외교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국의 입장에서 그들은, 그저 주인 없는 땅과 백성들을 멋대로 점거한 산적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신용도 없고, 신뢰도 없지.”
“그-”
“마력세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순순히 그 돈을 내려 한 이유는 그들이 정당한 권리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야. 그저 내란으로 오랜 시간 고통 받아온 그 땅을, 다시 무력으로 짓밟지 않기 위함일 뿐이다.”
탁.
거기까지 말한 모레스는, 서류철을 닫으며 지부장을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니 다시아노 후작에게 다시 정중히 우리의 입장을 전하게. 그 땅에 있는 흙 한 줌과 풀 한 포기까지, 그 모든 것이 주신의 소유임을 결코 잊지 말라고. 그곳을 오가는 주신의 백성들에게 이제 더는 도적질을 하지 말라고.”
전혀 정중히 전할 수 있는 발언이 아니었다. 이건 아예 싸우자고 시비를 거는 거 아닌가.
“알겠나? 앞으로 우리 상단의 지출에 더는 ‘마력세’는 없네.”
“…….”
“왜 그런 얼굴이지? 기뻐하라고, 지부장. 북부 재건 사업에 들어가는 예산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지 않았나?”
말릴 수가 없구나.
결국 낙담한 슈미트 지부장은 고개를 숙였다. 이제 북부 전 지방을 아우르는 대규모 사업 계획이 모조리 수포로 돌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잘 알겠습니다, 저하. 그럼 다섯 영주들에게 조속히 그리 답을 보내겠습니다.”
한데 그 말을 들은 모레스가, 갑자기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며 대꾸했다.
“응? 뭣 하러 다섯에게 다 보내? 우리는 그냥 한 놈하고만 싸우면 돼.”
“…네?”
“내가 말한 건 다시아노뿐이었잖아? 본보기는 하나면 충분하지.”
순간 사무실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본보기.
모레스 황자의 그 발언이 내포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 없는 오웬조차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걱정 마, 슈미트 지부장. 일을 크게 벌이지는 않을 테니까. 난 어디까지나 한 놈만 때릴 거거든.”
아무렇지 않은 듯 덧붙이는 그 말에, 오웬은 문득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 * *
이후로 모레스의 업무는 일사천리였다.
이제까지의 점검은 물론 앞으로의 계획까지 빠르게 의논을 마친 그는, 슈미트 지부장에게 사적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거처를 요구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잠시 출장 일정을 미루고 한동안 레지나에 머물겠다는 모양이었다.
‘대체 이곳에서 뭘 더 하시려고요?’
그런 의문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슈미트는 차마 그것을 황자에게 대놓고 물어보지 못했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난 모레스는, 드디어 오웬에게 기다리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그래, 오웬. 그동안 계획서는 좀 읽어 봤어?”
“으응? 그, 그야 물론이지.”
슬쩍 마사인을 일별한 오웬이 덧붙었다.
“나는 구리 광산 쪽이 괜찮아 보이던데? 그래서 여기에 좀 투자를 할까 하는데…….”
“흠, 그래. 거기도 좋지.”
모레스는 순순히 대답했지만, 슬쩍 미간을 구기는 걸 보니 그리 마음에 드는 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근데 그거 말고 그냥 곡물 사업에 투자하지 그래? 아직은 실적이 없지만, 이제는 마력세가 아예 없어져서 판매 차익이 고스란히 수익으로 돌아올 예정이거든.”
‘아니, 어차피 네가 정할 거였으면 왜 나한테 읽어보라고 했냐?’
물론 정말로 그렇게 따질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스스슥.
오웬은 얌전히 서명을 갈겼다. 어쩐지 지금의 모레스에게는 뻗대지 않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평소와 뭔가 달라. 모레스 이 자식, 어쩐지 답지 않게 무섭단 말이지.’
그렇게 늦은 오후가 되어 드디어 모든 일정이 종료되었다.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나서며, 모레스가 여상하게 지부장을 돌아보았다.
“아, 그런데 슈미트 지부장?”
“네, 저하?”
“자네만 괜찮다면, 이 접시는 내가 가져가고 싶네만.”
“…….”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절의 말을 고하랴.
* * *
모레스가 레지나에 며칠간 더 머물겠다고 알리자, 일행의 반응은 천차만별이었다.
“그거 잘 됐군요! 안 그래도 클로디아 경이 음식점만 이곳저곳 끌고 다니는 통에 제대로 된 구경을 못 했습니다. 배만 터져 죽는 줄 알았지 뭡니까.”
“그런 약한 소리 마세요, 쿠르트 경. 아직 가볼 곳은 많이 남았거든요? 그런데 저하는 함께 안 가시나요?”
클로디아 경의 순진한 물음에, 모레스는 슬쩍 그녀의 앞으로 오웬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오웬이랑 같이 다니면 되겠네, 클로디아 경. 이 녀석도 레지나는 초행일걸? 부디 잘 안내해 달라고.”
“…….”
기분 탓일까. 순간 오웬은, 모레스가 어쩐지 자신을 떼어놓으려 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잘 되었군요. 저하께서 요청하신 정보들을 제대로 취합하려면, 며칠은 더 교회에서 엑소시스트들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로베르 경까지 그렇게 대답하자, 대략적인 일행의 일정이 결정된 듯했다. 칼멘 경이야 그런가보다 하고 옆에서 눈만 끔벅일 뿐, 통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고.
“좋아. 그럼 난 오늘부터 며칠간 슈미트 지부장의 별장에 가 있을게. 그와는 사업 건으로 할 얘기가 꽤 많으니까.”
호위 인력 대부분을 떼어 놓고 굳이 다른 곳에 가 있겠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다.
이를 이상하게 느낀 것은 확실히 오웬만이 아니었던 듯했다.
“그럼 저하. 저희도 그냥 저하의 곁을 수행하면 안 될까요?”
클로디아 경이 그렇게 질문했을 때였다.
오웬은 순간, 마사인과 브루노 단장이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는 광경을 목격했다.
‘…뭐지?’
워낙 찰나의 순간이라 미처 의아해할 새도 없이, 모레스가 아닌 마사인이 그 질문에 답했다.
“저하의 곁에는 내가 있을 테니 신경 쓰지들 말지. 잠시 사적인 시간이 필요하신 것뿐이니, 자네들도 당분간은 이곳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게,”
오웬은 여기서도 이상함을 느꼈다.
이 형님이 이럴 사람이 아닌데. 상주기사들을 굳이 임무에서 풀어두고, 자기가 홀로 모레스의 경호를 도맡겠다고 하다니?
“그런데, 저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전부터 뭔가 이상해요. 우리 마차에서 자꾸 콩콩 두드리는 소리가…….”
“그래? 그럼 너도 숙소에 남는 게 좋겠어, 에디스. 굳이 날 따라오지 말고, 오가며 마차를 잘 살펴봐. 알았어?”
“아니……?”
그렇게 해서 모레스는 일행과 헤어져, 마사인 경과 함께 그대로 숙소를 떠나고 말았다.
‘아, 신경 쓰인다! 아무래도 모레스 녀석, 뭔가 이상하다고!’
그날 밤. 오웬은 어딘가 찜찜한 기분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데 그런 그의 눈앞에, 돌연 작은 텍스트 창 하나가 휙 하고 솟아올랐다.
[돌발 퀘스트 ?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new!]
Chapter 118: Chapter 418
Chapter Text
418. 이성진 탐구 일지 (7)
달빛도 잘 들지 않는 캄캄한 방 안.
갑자기 떠오른 환한 퀘스트 창이, 허공에 번쩍이며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돌발 퀘스트 ?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new!]
[퀘스트 등급 : E]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쁜 일과를 끝내고, 이제는 휴식을 취하며 내일을 준비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알고 있나요? 현명하고 부지런한 이들은 모두가 잠든 이 순간에도 결코 몸을 쉬이 누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소수의 사람들이 가진 열정이야말로, 세상의 거대한 역사를 만들어가는 참된 원동력일지도 모른답니다.]
[보상 : 150 P캐시]
[*본 상품은 판게아 클로니클 상점 창에서 사용 가능합니다.]
순간 오웬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보상에 대한 의문이었다.
‘뭐야? 웬일로 상태창 씨가 이렇게 캐시를 후하게 책정한 거지?’
그다음으로 든 생각은, 퀘스트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뭔지 도통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이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역사의 원동력이 뭐 어쨌다는 거지?’
오웬은 입을 다문 채 반짝이는 창을 노려보았다.
어쩌면 최근의 퀘스트 대부분이 그러하듯, 이것 역시 모레스와 관련된 내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태창 씨는 녀석에 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모호한 표현을 일삼곤 했으니까.
‘그나저나 대체 날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렇게 오웬이 창을 거듭 읽으며 내용을 곱씹을 때였다.
핑!
작은 효과음과 함께, 갑자기 멀리서 희미한 빛이 쏟아진다.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니 과연, 저 멀리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얇은 빛기둥이 솟아 있었다. 저곳이 바로 퀘스트가 요구하는 목적지리라.
‘…일단 저기로 가라는 말이군.’
오웬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잠도 오지 않는데 잘 됐다. 퀘스트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지.’
한데 오웬이 손도끼를 차고서 방문을 나서려는 때였다.
뾰롱!
또다시 작은 창 하나가 떠올라 그의 시야를 가로막는다.
[퀘스트 진행을 위해 다음의 스킬을 발동할 것을 추천합니다.]
[‘오러 은폐’ 발동 - 분당 2P 캐시 소모]
[이벤트 한정으로 스킬 숙련도가 최대 숙련도인 S랭크로 적용됩니다. 스킬을 발동하시겠습니까?]
[발동 / 발동]
오웬이 눈을 끔벅거렸다.
‘뭐야. 어차피 선택지가 하나잖아? 어쩐지 등급에 비해 보상이 높다 했어!’
이러면 캐시를 받아봐야 고스란히 스킬을 쓰는데 날아갈 판이다.
‘치사하다고요, 상태창 씨.’
하지만 상태창이 스킬 사용을 강제하는 일은 좀처럼 드물었다. 즉 지금 퀘스트를 완료하려면 반드시 이 스킬이 필요하다는 의미.
오웬은 한숨을 쉬며 선택지를 눌렀다.
[*발동* / 발동]
스르륵-
이내 오웬의 기척이 완벽하게 사라진다. S랭크 숙련도에 걸맞은 감쪽같은 오러 은폐였다.
그렇게 오웬이 소리 죽여 숙소를 빠져 나오는 동안, 대부분의 일행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오직 브루노 단장만이, 잠시 침상에서 일어나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을 뿐이다.
* * *
째깍째깍.
[00:57:22]
타이머와 함께 캐시가 빠르게 소모된다.
[누적 소모 ? 116P캐시]
다행히 조금 일찍 목적지에 도착한 오웬은, 보상으로 떨어질 캐시가 완전히 소진되기 전에 스킬 취소를 누르려 했다.
하지만 상태창은 도통 요지부동으로, 새로운 선택지를 띄우는 일 없이 그저 타이머만 표시할 뿐이었다.
째깍째깍.
[01:00:01]
‘…아직은 스킬 사용이 필요한 모양이군.’
결국 스킬 취소를 포기한 오웬은, 지정된 장소에 서서 가만히 때를 기다렸다.
[01:05:18]
그가 도착한 곳은 레지나의 외곽에 있는 한적한 골목길이었다. 대낮처럼 밝은 번화가와 달리, 인적이 드문 이곳은 달빛 한 점 들지 않아 지나치게 을씨년스럽다.
[누적 소모 ? 138P캐시]
‘이거, 보상을 받아봐야 남는 게 없을 거 같은데?’
슬슬 소모되는 캐시가 보상을 초과하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무렵이었다. 오웬은 저 멀리서 흔들리는 작은 불빛 하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치떴다.
‘…응?’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램프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붉은 불빛이었다.
이어서 그 작은 빛에 의지한 채 걸음을 옮기는 세 사람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온다.
‘저들은?’
거리는 제법 멀었지만, 오러로 최대한 안력을 돋운 오웬은 곧 선두에서 걷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두 사람에 비해 조금 작은 체구와, 붉은빛을 받아 희미하게 드러나는 섬세한 이목구비.
바로 모레스였다.
‘그럼 그렇지! 별장에서 쉬겠다는 건 모두 거짓말이었군. 급한 볼일이 있어서, 일행을 떼어 놓고 움직이기로 한 거야.’
그렇다면 바로 뒤따라오는 건장한 남성 역시 누군지 빤했다. 절대 모레스의 곁을 떠나지 않는 마사인 형님이리라.
또 다른 한 사람은 낯선 이였지만, 언뜻 보이는 신형으로 보건대 키가 큰 여성 같았다.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세 사람을 응시하며, 오웬은 고민에 빠졌다.
‘자. 상태창 씨 덕분에 어떻게 여기까지 따라오긴 했는데, 이제 어쩐다지? 이미 날 떼어 두겠다고 결정했는데, 지금 따라가겠다고 한들 모레스가 순순히 들어 줄지…….’
바로 그때였다. 오웬의 눈앞에 또 다른 작은 알림창이 갑자기 솟아오른 것은.
[이벤트가 종료되어, 잠시 후 스킬을 자동으로 해제합니다.]
[스킬 종료까지 카운트 다운 시작.]
…뭐?
[5]
‘자, 잠깐만, 상태창 씨! 지금 스킬을 해제해 버리면……!’
어어?
당황한 오웬이 허둥거리고 있을 때였다. 선두에 있던 모레스가 뭔가 낌새를 느꼈는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4]
“저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마사인 형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근처에 누군가가 기척을 죽이고 숨어 있어, 마사인 경.”
“네에?”
[3]
그렇게 휘휘 주변을 둘러보던 모레스가, 곧 오웬이 서 있는 곳을 똑바로 응시한다.
꿀꺽.
오웬은 옥죄어 오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이쪽을 눈치챈 것은 아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분명 S랭크 ‘오러 은폐’ 스킬은 아직 해제되지 않았을 텐데.
[2]
스릉!
이런, 역시 착각이 아니었나? 스스럼없이 검을 뽑아 드는 소리가 들린다.
오웬이 앗 하고 놀라는 사이, 모레스는 한 손에 호두까기를, 또 다른 한 손에는 붉은 램프를 거머쥐고선 순식간에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저하!”
“저하?!”
[1]
다른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그의 뒤를 따라 달렸지만, 그때 이미 모레스는 오웬의 지척이었다.
먼지로 지저분해진 옅은 금발과 검댕이 잔뜩 묻은 앳된 얼굴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쇄도한다.
아마도 빈민가 사람인 척 위장하려 했던 모양. 그러나 모레스의 얼굴에는, 검댕만으로는 숨길 수 없는 타고 난 기품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그 낯익은 얼굴에 어려 있는,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적인 살의.
오웬은 완전히 얼어붙은 채로,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무기력하게 눈에 담았다.
[0]
그 순간, 상태창의 카운트가 끝났다.
팟!
스킬로부터 오웬의 기척이 풀려나자, 모레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오웬?”
단언컨대 소년은 오웬이 근래에 본 얼굴 중 가장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야? 너 기척도 없이 어디서 갑자기… 게다가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그렇게 묻는 와중에도, 모레스의 검은 거의 오웬의 코앞에서 멈춰 있었다.
굳은 얼굴로 그 섬뜩한 검날을 마주한 오웬은 깨달았다. 만일 상태창 씨가 조금만 더 늦게 스킬을 해제했어도, 저 검은 주저 없이 자신의 몸통을 찔렀으리라는 사실을.
* * *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모레스 저하께서 갑자기 달려 나가셨을 때, 제가 어찌나 마음을 졸였는지…….”
거적때기를 걸친 마사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는 현재 화려한 금발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제국의 고귀하신 황자님을 뵙습니다.”
그 곁에서는 바르샤인처럼 짙은 피부를 가진 여자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잠행복을 보아하니 모레스의 정보원인 듯했다.
“…….”
그리고 그들의 사이에 선, 뚱한 얼굴의 모레스. 역시 너덜너덜한 망토를 두른 것으로 보아, 이 지역 사람으로 대충 변장하려 한 모양이었다. 물론 오웬이 보기에는 썩 성공적인 위장은 아니었지만.
“그나저나 저하. 대체 이곳은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마사인의 미심쩍은 물음에, 오웬은 되도록 의심을 사지 않으려 노력하며 답했다. 차마 퀘스트를 하러 왔다고는 답할 수 없었으니까.
“그게… 우연히 그렇게 됐습니다, 마사인 형님. 잠이 안 와서 거리를 거닐고 있는데, 마침 멀리서 요정님의 붉은빛이 보이지 뭡니까.”
“흠…. 우연히요.”
이런. 오히려 마사인 형님의 의구심을 더 자극한 것 같은데.
“한데 저하. 오러 은폐는 또 언제 배우신 겁니까? 저는 물론, 솜씨가 좋은 정보원도 전혀 저하의 은신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만.”
순전히 상태창이 주도한 이벤트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곧이곧대로 설명할 수는 없으니, 오웬은 최대한 어색해 보이지 않도록 머리를 쥐어짜 보았다.
“남부에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수행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러 은폐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완전히 터득한 것이 아니라, 매번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흠. 그렇군요.”
이런.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느니만 못한 답이었나 보다. 의심의 빛이 더욱 깊어졌어.
한데 오웬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갑자기 모레스의 정보원이 그 자리에서 가볍게 비틀거리는 게 아닌가. 그녀는 마치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이럴 수가! 심지어는 제대로 배우지 않아도 재능만 있으면 오러 은폐가 가능하다는 거야? 그런 거야? 천재가 다 해 먹는 이 더러운 세상!”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걸 보니, 황족의 앞임을 잠시 잊고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정신적인 대미지가 상당했던 모양.
한데 그런 두 사람의 반응과는 달리, 정작 그들의 책임자인 모레스는 오웬에게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듯 보였다. 그저 간결하게 그의 의사를 확인했을 뿐.
“그래서, 너도 함께 갈 거냐?”
“…으, 응.”
“그래, 그럼.”
오웬의 대답에, 모레스는 짧게 대꾸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왕 만났으니까 따라와. 참, 얼굴에 검댕이 바르는 거 잊지 말고.”
때문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오웬 쪽이었다.
‘그게 끝? 알고 싶은 건 그게 다야?’
척척.
앞서서 걸어가는 소년을 바라보는 오웬의 표정에 복잡한 감정이 어린다.
자잘한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미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듯한 태도. 역시나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파티원들을 자신 있게 이끌던 어린 산양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자세한 설명은 좀 있다 해 줄 테니까, 일단 지금은 던전부터 마저 돌자. 아직은 타임 챌린지 중이니까.
생각해 보면 그때의 뉴비 녀석 역시,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오웬에 대해 이미 많은 것들을 아는 듯 굴었더랬다. 그러니 오웬에게 여상하게 다가와서는, 그 귀한 얼음심장을 선뜻 건넨 거겠지.
-나는 필요 없지만, 오웬 너한테는 필요하지 않냐? 너, 여신을 만난다며?
어디 그뿐인가. 난데없이 오웬에게 필요한 한정판 토끼 안대를 구해 와서는, 우쭐거리며 내밀지 않았던가.
-뉴비, 네가 이걸 어떻게…….
-어, 다 방법이 있어.
그래. 돌이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당시에 뉴비의 정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하단 말이야? 왜 널 보면 볼수록, 자꾸만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 들까?
오웬은 그렇게나 뉴비로부터 익숙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야. 역시 모레스는……!’
오웬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거침없이 걸음을 옮겨, 어느 허름한 건물 앞에 도착한 모레스가 입을 열었다.
“오웬.”
“…응?”
딴생각을 하고 있던 오웬이 한 박자 늦게 대답하자, 모레스가 뒤를 돌아보며 여상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잘 기억해. 지금부터 넌 바르샤인이야.”
“…어엉?”
“너는 종교적인 이유로 지금 막 제국에 망명한 거야. 그렇기에 아직 제국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모르지.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뭘 물어보든, 너는 전부 바르샤어로 대답하는 거야. 알겠어?”
“……?”
“알겠어?”
“으, 응.”
모레스의 단호한 태도에, 오웬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하지만 만일 이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았다면, 오웬은 절대로 그렇게 쉽게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간 모레스는 곧 험상궂은 인상의 문지기와 대면했다. 그러고는 그에게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물건을 배달하러 왔다. 지하 교단에 귀의할 자야.”
순간 오웬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응? 지하 교단?’
야, 잠깐만! 그건 이단의 세력 아니야? 너 지금 그게 신성제국 황자로서 당당하게 할 소리야?
한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단재판부가 알았다면 당장이라도 종교 재판에 회부하겠노라 길길이 날뛸 만한 발언을, 모레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이는 것이다. 그것도 오웬을 똑바로 가리키면서 말이다.
“북부로 가는 자유 지하도를 이용하려 한다. 이 바르샤의 이교도를 참회의 형제로 맞아들일 생각이거든. 그러니 어서 상급자를 불러 줘.”
…뭐?
모레스, 잠깐만! 뭐라고오오?!
Chapter 119: Chapter 419
Chapter Text
419. 자유 지하도 (1)
자유 지하도.
성진은 벨린다의 영혼을 통해 그 비밀 조직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자유 지하도는 실제로 지하에 뚫려 있는 길 따위는 아니었다. 그저 이곳을 이용한 이들 상당수가 지하 교단에 투신했기에 자연스럽게 생긴 은어일 뿐.
[처음 이 조직을 만든 자는, 어느 부유한 오르토나인이었다고 합니다. 제국의 억압으로부터 사상의 자유를 찾는 이들을 자국으로 구출하려 했다는군요.]
신성제국의 역사는 장장 천 년에 이른다. 그러니 많든 적든, 종교적 억압이나 가혹한 종교재판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생겨날 수밖에.
자유 지하도는 이들에게 소량의 음식과 안정적인 탈출 경로, 그리고 필요시에는 새 신분까지도 제공해 주었다. 철저한 점조직으로 운영되기에 어지간해서는 발각되지도 않고, 만일 걸린다 해도 쉽게 꼬리 자르기가 가능하다.
그렇다 보니 처음의 취지와는 달리, 나중에는 온갖 잡범들까지 몰려들게 되었다고.
[제국에 남아봤자 희망이 없는 중범죄자들이 주로 자유 지하도로 모여듭니다.]
그러던 수년 전.
성황이 무력으로 교단을 통일하면서, 이 ‘자유 지하도’의 성격에 약간의 변화가 생겨났다.
황도로부터 완전히 축출된 지하 교단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온존하기 위해 자유 지하도의 탈출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부와 서부 방면은 [파종] 교단이-
그리고 북부 일대는, 오르토나 전역으로 세를 확장했던 [참회] 교단이.
“그래서, 자코모 밀로가 지하 교단에 숨어들지 않고, 이 북부 탈출로를 이용했을 거라고?”
[그렇습니다, 주인이시여.]
자유 지하도는 지하 교단의 도움을 받아 운영되기는 하되, 완전히 교단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니 마계수 사건으로 참회 교단과 조금 껄끄러운 관계가 되어버린 자코모 밀로가 은신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조직이라는 거다.
“흠.”
성진은 입가를 쓸어내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코모 밀로가 잠적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 왜 그는 아예 서쪽이나 남부로 멀리 도망치려 시도하지 않았을까?”
성진의 질문은 자코모 밀로가 북부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진과 벨린다 모두, 거기에 대해서 일말의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자의 모든 기반은 북부에 있습니다. 쉽게 버리고 떠나기는 힘들었을 테죠.]
“그렇게 상단을 철저하게 압수했는데, 아직도 남은 게 있단 말이군.”
그건 좋은 소식이었다. 몰래 빼돌려서 사업에 투자해야지.
성진이 저도 모르게 씨익 입꼬리를 올리자, 마왕 놈이 화들짝 놀라며 진저리를 쳤다.
[또, 또 나왔다! 저 계약서를 들이미는 장기매매 브로커 같은 표정!]
닥쳐! 네가 앉아 있는 그 값비싼 그릇들이 다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거냐! 응?
[은닉한 재산도 재산이지만, 자코모 밀로는 [파종] 교단과는 아예 접점이 없습니다. 그들과 새로 접촉하여 뭔가를 꾸미기에, 수배 중인 처지로는 여의치도 않았을 테고요. 거기다 그의 가문인 밀로 백작가는 본래…….]
열심히 설명을 덧붙이던 벨린다의 영혼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뭔가 걸리는 듯 입을 다물었다.
“왜? 뭔데?”
[…죄송합니다, 영혼의 주인이시여. 이것은 제가 살아생전 알지 못했던 정보로, 아무래도 발설에 강한 제약을 받는 듯합니다.]
“…….”
그래. 그러고 보니 ‘제약’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긴 했지.
[하나 안심하십시오. 저는 알 수 있습니다. 주인께서는 분명 머지않아 필요한 진실에 스스로 도달하시게 될 겁니다.]
어쨌거나 그녀가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성진은 충실한 출장 계획을 세웠다.
일단 자코모 밀로를 수색한다는 명목하에, 거슬리는 참회 교단부터 대놓고 들쑤시는 것이 일차 계획이었다. 그러면 일시적으로나마 참회 교단의 활동은 위축될 것이요, 자코모 밀로도 섣불리 자유 지하도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테지.
밀로 상단주는 어디까지나 활개 칠 구실. 참회 교단은 예전부터 성진에게 있어서 눈엣가시처럼 거슬리는 존재였다.
안 그래도 사회 기반이 무너져 버린 곳에 사이비 교단까지 설쳐 대니, 북부의 민생이 계속해서 파탄 나는 거 아닌가. 그대로 내버려 두면 향후 ‘베르트란 & 리’가 세를 확장하고 경제를 재건하는 데 분명 크나큰 걸림돌이 될 터였다.
게다가-
‘아무래도 로건의 환생이, 이들 참회 교단과 깊이 얽혀 있는 거 같아.’
차마 당사자에게는 상담하지 못했지만, 성진이 전부터 꾸준히 신경 쓰고 있는 지점이다.
로건도 일전에 그렇게 말했지. 환생한 사람이 또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없으며, 왜 자신만이 그렇게 된 건지도 잘 모르겠다고.
성진은 여기에 참회의 교단이 깊이 관여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언젠가 벨린다도 성진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는 참회의 대주교께서 공들여 엄선하신, 오직 주신에게 바쳐지기 위한 ‘참회의 제물’이다!
하지만 막상 권속이 된 벨린다에게 다시 질문해 보니, 이번에는 이런 대답이 돌아올 뿐인 거다.
[그, 도움이 되지 못해 참으로 송구합니다, 영혼의 주인이시여. 그러나 당신께서는 머지않아 홀로 진실에 도달하시라 믿어 의심치…….]
“어어, 알았어. 됐어.”
물론 마음 한편으로는 괜찮다는 예감도 있었다. 지금껏 아버지가 로건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데도 다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아무래도 가족의 일이니만큼, 과하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릇된 목적을 가지고 시행된 일이, 어찌 제대로 된 과정을 통해 이뤄졌을 거라고 낙관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일단 참회 교단을 패자. 손 가는 대로 때리다 보면 로건에 관해서도 뭔가가 나오겠지.’
그런 연유로, 처음에 성진은 날뛸 만큼 날뛴 다음, 적절한 시기에 자코모 밀로를 잡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참회 교단을 만족할 만큼 족치고 나면, 그다음에는 북부를 한 바퀴 돌아보며 사업을 방해하는 영주들의 기강이나 잡아볼까 생각했던 것이다.
한데 막상 레지나에 도착해 슈미트 지부장의 보고를 받자, 성진은 자신의 생각이 너무나도 물렀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북부 토박이 영주들의 태도가 생각보다 완고한 데다, 저희끼리 연계하며 제법 조직적으로 사업을 훼방 놓는 중이 아닌가!
아마도 이 방해 공작은 꽤나 장기화되겠지. 그렇다면 그들 중에서 계획적으로 모두를 부추기는 자도 있을 법했다.
-예, 맞습니다, 저하. 그 다시아노 후작의 태도가 너무나 강경합니다. 한데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슈미트 지부장의 대답을 다 듣기 전에, 성진은 머릿속은 이미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다시아노 후작에게는 갚아줘야 할 빚이 있다.
놈에게는 루이제의 복수를 해야 하고(아마도 살아 있지만), 지그스문트령을 박살 낸 대가도 받아야 하고(성진은 지그스문트령과 아무 관련 없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보는 앞에서 막스를 탐낸(탐내지 않았다)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순서를 조금 바꿔도 괜찮지 않을까?’
제대로 난장을 치려면, 조금 더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지. 그러나 딴짓을 하느라 자코모 밀로의 신병 확보가 너무 늦어져도 곤란하다.
그래서 성진은 슈미트 지부장에게 순순히 그의 별장 하나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고는 마사인 경과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이런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사실 난 한동안 이곳을 떠나 있을 생각이야, 지부장. 남몰래 해야 하는 일이니, 그동안 나의 부재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지부장이 알아서 손을 써 주게.”
갑작스레 황가의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사용인들을 분주하게 부리던 슈미트 지부장의 얼굴이 삽시간에 해쓱해졌다.
“아니, 이렇게 요란하게 손님맞이 준비까지 했는데, 어떻게 사용인들 몰래 저하께서 계신 척을 합니까?”
“그거야 자네가 알아서 할 일 아니겠나? 뭣하면 메에메에를 불러서 사람들에게 최면이라도 걸든지.”
“네에? 그런 억지가……!”
“어쨌거나 자네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으니까. 믿겠네, 지부장.”
“저, 저하! 저기, 잠시만!”
애절하게 매달리는 지부장을 뒤로하고, 성진은 척척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일단 다샤는 데려가야겠지. 잠행에는 그만한 인재가 없으니까. 여기까지 온 마당에 마사인 경도 떼어 놓을 수는 없으니, 함께 가고…….’
그렇게 계획을 세우던 성진의 머릿속에 불현듯 오웬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어쩐지 아까부터 녀석을 데려가면 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바쁜 다샤 대신 바르샤 인으로 위장하기도 좋고, 만에 하나의 사고가 생겨도 제 한 몫은 충분히 해낼 텐데.
하지만-
‘…관두자. 안 그래도 이교도의 풍습에 흠뻑 물든 것 같은 녀석인데, 누군가가 녀석을 알아보기라도 했다가는 곤란하잖아.’
이교도에 이어, 암흑 교단과 내통하는 황자라니. 그 사실이 알려지면, 안 그래도 성회에서 바닥을 기는 평판이 떨어지다 못해 바닥을 뚫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녀석도 레지나는 처음일 테니까, 이참에 느긋하게 관광이나 하라고 하지, 뭐. 지금껏 계속 전장에서 고생만 했잖아.’
그렇게 생각하던 성진은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아무래도 뭔가가 약간 부족하다는 기분이 드는데. 내가 뭘 빼 먹었나…….
‘뭐, 어떻게든 되겠지.’
자, 그럼 일단. 마사인 경에게 이실직고부터 해 보실까.
* * *
“…잠입이요.”
“응.”
“빈민으로 위장해 범죄자들의 탈출로로 숨어든다고요.”
“맞아. 바로 그거야!”
“일행을 떼어 두시는 데서 뭔가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 짐작은 했습니다만… 대체 왜요?”
마사인이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자코모 밀로를 수색하기 위해 출장 인원을 꾸린 게 아닌가.
한데 왜 일행 몰래, 그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 황자가 손수 그런 짓을 한다는 거지?
“쯧쯧. 마사인 경. 경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어. 이번 출장의 핵심은 자코모 밀로를 검거하는 게 아니야.”
“…그럼요?”
“놈을 찾는다는 구실로 여기저기 난장판을 치는 데에 의의가 있지. 그러려면 일단 우리가 그를 먼저 빼돌려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둬야 한단 말이야. 그래야 기한에 제약을 받지 않고, 내키는 대로 쥐 잡듯 뒤질 수 있어.”
“…….”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물론, 우리 일행조차도 자코모 밀로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사실을 몰라야 해. 그래야 그 모든 일이 자연스러워진다고.”
마사인은 잠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한번 쳐다본 후,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납득은 안 되지만 어쨌거나 이해는 했습니다. 하면 저하, 그걸 왜 모조리 제게 털어놓으시는 겁니까?”
“음, 그거야…….”
성진이 고개를 들어 충직한 기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말 안 하면 분명 마사인 경이 화낼 테니까?”
“…그래서, 계획을 미리 들으면 제가 화를 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뭐, 화는 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할 도리는 다했다는 변명거리 정도는 생길 거 아냐? 어쨌거나 명분은 중요하니까.”
턱!
마사인이 뒷목을 짚으며 눈을 감는다.
“하면 저하. 제가 저하를 막아서며 계획을 방해하면 어쩝니까?”
“뭐? 경이 그럴 리가 없잖아?”
성진이 해맑게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내가 몰래 나가 버리면, 경은 날 절대 못 찾아.”
“……!”
뿌득.
음? 지금 이 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이…….
워워, 진정해 마사인 경! 그 주먹에 들어간 힘도 좀 빼라고!
그렇게 해서 성진은, 다샤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마사인 경과 함께 빈민 분장을 시작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 무렵이 되어, 마사인 경의 분노는 제법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물론 다샤의 일거수일투족에 불만을 쏟아내긴 했지만 말이다.
“저하께 어찌 이런 허름한 옷을…….”
“저하의 용안에 그 무슨 불경한 짓을…….”
“그러고 보니, 저하께 그 시답잖은 재주를 가르친 것도 전부…….”
저하, 제발 살려주세요!
검댕을 발라주던 다샤가 간절한 눈빛을 쏘아 보냈지만, 제발이 저린 성진은 그녀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잠시 마왕과의 실랑이도 생겼다.
[싫어! 선물 받은 저 예쁜 램프를 놔두고, 내가 왜 이런 허름한 램프에 들어가야 하는 거야?]
“그럼 어쩔 수 없지. 놔두고 가는 수밖에”
[뭐어? 하지만……!]
“어서 선택해. 이제 시간이 없어.”
[…훌쩍!]
엉엉, 오늘따라 내 완전무결한 24면체의 염상 결정이 그리워!
마왕은 잔뜩 칭얼거렸지만, 더는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램프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모든 채비를 마친 성진은, 슈미트가 술수를 부려 사용인들을 재워 둔 틈을 타 감쪽같이 그의 별장을 빠져나온 것이다.
그리고-
“…오웬?”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딱딱하게 굳은 오웬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뭐야? 너 기척도 없이 어디서 갑자기… 게다가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Chapter 120: Chapter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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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 자유 지하도 (2)
처음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오웬을 발견했을 때, 성진은 그로부터 강력한 이질감을 감지했다.
‘…오러 은폐? 아냐.’
평범한 ‘오러 은폐’가 아니라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오러 발산을 세밀하게 조정해 기척을 지웠다기보다는, 아예 오러 활성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장막을 한 꺼풀 뒤집어쓴 느낌.
감각을 왜곡시켜 인식의 경계를 허무는, 보통 사람은 본질을 엿보는 것조차 불가능한, 세계의 법칙에 대한 근본적인 간섭…….
“……!”
성진의 경계는 본능에 가까웠다. 나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버지의 것도 아닌, 이 세계에 갑자기 끼어든 제3자의 의지가 아닌가!
상황을 명확하게 인지하기도 전에, 성진의 손은 이미 호두까기의 손잡이에 닿아 있었다.
더는 깊이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 자세히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저것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이 대폭 줄어든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휘익-!
한데 성진이 막 그 이질감의 중심으로 검을 들이밀었을 때였다. 장막은 나타났을 때처럼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어 호두까기의 검날이 닿은 끝은, 어둠 속에서도 진한 핏빛으로 빛나는 펜던트.
“…오웬?”
성진은 이정표와 상대를 동시에 알아보고, 곧바로 호두까기를 회수했다.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간다.
-혹시 이거, 그겁니까? 오라클이 만든, 오라클의 정신을 반영한다는 그 [이정표]가 맞습니까?
처음 이정표를 보았을 때, 극도로 흥분하며 소리치던 덱스터가 생각났다.
-그러니까 이 엔진 편집기의 원리가, 바로 이 [이정표]에 모든 바탕을 두고 있단 말입니다!
덱스터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오라클이 가진 고도의 정신세계가 실제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본떠 만든 것이 바로 [호문클루스 엔진 소스 편집기]라고.
‘그러니까 방금 내가 본 은폐 장막이, 규상세계의 법칙이 이 세계에 끼어들면서 발생한 현상이란 말이지?’
그 찰나의 순간 느꼈던, 뚜렷한 목적성을 가지고 개입하던 강력한 의지.
‘역시 죽은 조모님의 의지는 어떤 형태로든 이정표에 남아 있는 거구나. 그리고 오웬을 시켜서-’
하지만 성진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모습을 드러낸 오웬 녀석이, 어째서인지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허망한 표정으로 성진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놀랐다고 보기에는 녀석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이 녀석은 기껏 여기까지 와 놓고서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그러고 보니 공격에 대응하는 방식도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 게임을 했던 성진은 오웬의 전력을 잘 알았다. 작은 한손도끼만 가지고도 플레이어들을 도륙하며 날아다니는 녀석이었다고.
현실에서는 또 어떤가. 내로라하는 바르샤 전사들의 뚝배기를 앞장서서 깨고 다닌 통에, 전선에서는 이미 [불패]라는 이명으로 불린다잖아?
그러니 내가 아무리 빠르게 달려들었다 한들 충분히 방어할 시간이 있었을 텐데.
“야, 너 혹시 말이야…….”
설마 그 상태창이라는 것이, 네 정신 상태까지 좌지우지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성진은 그렇게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불가능해졌다. 마사인과 다샤가 그들을 향해 헐레벌떡 달려왔기 때문이다.
“저하아!”
“거기 누가… 오웬, 저하? 대체 어떻게 여길?”
* * *
“한데 저하. 오러 은폐는 또 언제 배우신 겁니까?
마사인이 미심쩍은 얼굴로 오웬을 추궁한다.
하지만 성진은 알고 있었다. 아까 오웬이 보여줬던 것은 제대로 된 오러 은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역시나 오웬이 우물쭈물하며 대꾸했다.
“…아직은 완전히 터득한 것이 아니라 매번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겠지. 그건 분명 규상세계의 법칙, 측 상태창의 개입 같았으니까.
그렇다면 오웬은 지금, 상태창이 준 퀘스트를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는 뜻일 테다. 성진은 더는 쓸데없는 시간 낭비 없이, 이 자리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도 함께 갈 거냐?”
그러자 답지 않게 주눅 들어 있던 오웬이, 조금 안도한 얼굴로 대답한다.
“…으, 응.”
“그래, 그럼.”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휙 몸을 돌렸다. 내심 못마땅한 심정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기껏 쉬게 뒀더니, 그새 부려 먹지 못해 사람을 여기까지 끌고 와?’
뭐, 어쨌거나 조모님의 뜻이다. 본능적인 반감이 들었던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인도가 오웬에게 크게 해가 된다는 느낌은 아직까지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써 먹어야겠지. 안 그래도 다샤에게는 다른 일을 시키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성진은 처음 계획과 달리, 다샤 대신 오웬을 바르샤인으로 위장시키기로 결심했다.
“잘 기억해. 지금부터 넌 바르샤인이야.”
“…어엉?”
딴생각 중인지 영 정신이 없는 그에게 거듭 주의를 준 성진은, 미리 알고 있던 접선 장소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뒤를 따르던 마사인과 다샤의 얼굴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어떻게 저하께서 이런 곳을 알고 계시지?’ 하는 의문을 애써 모른 척 무시하면서.
벨린다가 알려 준 정보에 의하면, 레지나에는 자유 지하도를 이용할 수 있는 접선 장소가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중 참회 교단이 가장 많이 이용한다는 어느 허름한 건물에 도착한 성진은, 태연한 얼굴로 문지기에게 말을 건넸다.
“물건을 배달하러 왔다. 지하 교단에 귀의할 자야.”
그러자 입구에 앉아 있던 늙은 문지기가 성진을 가늠하듯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배달? 어디로 가는데?”
“북부로 가는 자유 지하도를 이용하려 한다. 이 바르샤의 이교도를 참회의 형제로 맞아들일 생각이거든. 그러니 어서 상급자를 불러 줘.”
그러자 문지기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문을 정면으로 막아섰다.
“잠깐 기다려. 이 지역에서는 처음 보는 얼굴들에다, 그중에서도 어린애가 대장이라? 뭔가 수상한데.”
“…….”
“이봐, 꼬마야. 중간책은 대체 어쩌고, 배달하는 놈이 직접 여길 찾아온 거냐?”
그러자 성진은 약간 짜증을 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벧엘라. 지금 누굴 멋대로 범죄자 취급이야? 신실한 지하 교단의 형제들이 길을 이용한다는데, 거기에 중간책이 왜 필요해?”
이미 벨린다에게 들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실제 일정 수수료를 받고서 이곳으로 이끄는 중간책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범죄자들의 경우일 뿐. 직접 조직 운영에 발을 걸친 지하 교단의 신도들은 사정이 좀 다르다고 했지.
“흐음.”
틀린 대답은 아니었나 보다.
그래도 뭔가가 미심쩍은 듯, 문지기는 자리에서 뭉그적거리며 도통 길을 열려 하지 않았다.
“근데 꼬마야. 너 진짜로 참회의 형제냐? 그렇다고 보기에는 다들 별다른 고행의 흔적도 없고… 피부도 너무 깨끗한데?”
“그럼 멍청하게 보이는 곳에 흔적을 남기겠어? 인퀴지터들에게 대놓고 광고하는 꼴도 아니고. 말 같지도 않은 억지 그만 부리고, 빨리 길이나 열어.”
“아, 잠시만 있어 봐. 저 친구도 바르샤인으로는 안 보이는데? 좀 그을렸다 뿐이지, 아무리 봐도 제국인 아니냐고.”
성진은 푸욱 한숨을 쉬며 성호를 되뇌었다.
“벧엘라. 이 친구는 미주리 부족 출신이야. 미주리는 예로부터 아나톨리아 사람들과의 혼혈이 많지. 다 이해해. 잘 모르는 사람은 헷갈릴 수도 있지.”
“아니, 그렇게 말해봤자-”
문지기의 눈이 가늘어진다. 애송이의 대답이 너무 매끄러우니, 되레 의심이 짙어지는 모양.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저 녀석이 바르샤인인 척하는 인퀴지터면 어쩌려고. 자신 있으면 증명해 봐라.”
“뭘 어떻게 증명하란 말이야?”
“바르샤인이라며? 그럼 바르샤 말이라도 해 보라고 시키든지.”
“하면 알아들을 수는 있고?”
“그거야 꼬마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이 자식 봐라. 생각보다 깐깐하게 구는데?
그래서 성진은 오웬을 돌아보며 주문했다.
“들었어? 저놈이 못 믿겠대. 너 빨리 바르샤어로 아무 말이나 해 봐.”
순간 오웬이 움찔 몸을 떨었다. 설마 여기서 제대로 된 볼란타어를 들을 거라고는 예상치도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눈이 휘둥그레져 성진을 돌아보는 실수 따위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억! 그……!”
하마터면 무심코 제국어를 내뱉을 뻔한 오웬이, 겨우 혀를 깨물며 말을 바꿨다.
“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거짓말을 나중에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지만 성진의 태도는 느긋했다.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끼어든 건 너잖아? 지금 네 꼴을 보고서 말하든지. 머리에 꽂은 그 닭털들은 어떻게 설명하려고?”
“그럼 차라리 남부 전선 인근 지방에서 왔다고 하든지.”
“괜찮아. 날 믿어. 차라리 이교도인 척하는 쪽이 나중에 편해.”
아무리 체계 없는 점조직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행동 원칙은 있는 법이다. 혼자 처리하기 부담스러운 사안이라는 생각이 들면, 문지기도 결국은 못 이긴 척 제 상급자를 부르게 될 테지.
“거기다 앞으로 한동안은 자유 지하도의 밀착 감시가 있을 거라고. 네가 이교도라고 미리 우겨 놔야, 만일의 사태 때 놈들 모르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거 아냐?”
거기까지 설명한 성진은 문지기를 돌아보았다.
“들었어? 사정을 잘 설명했더니, 이 친구가 화를 내는데? 당장 [참회]께로 귀의하지 못하면, 조만간 자네 부모님의 안부를 묻겠대.”
“…그다지 화내는 걸로는 안 보이는데?”
그러자 돌아가는 눈치를 살피던 오웬이, 대뜸 이를 드러내며 한껏 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처참하리만치 형편없는 연기력이었다. 뭐, 워낙 어색하고 생소한 표정이라, 그게 오히려 문지기를 바짝 긴장하게 만든 모양이지만.
“그런데 부모님 안부는 갑자기 왜?”
…흠. 이 세계에는 패드립이 안 통하나 보다.
“바르샤의 오랜 예절이야. 적대하는 자에게는 힘으로 안부를 묻지.”
그러자 늙은 문지기가 와락 인상을 쓴다.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마라, 꼬마야. 우리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다.”
“저런. 그러면 필히 안부를 여쭤야겠네. 조만간 저세상에서 아들을 만날지도 모르는데, 부모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어?”
“…….”
“벧엘라.”
경건하게 성호를 긋는 성진을, 문지기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너무 태도가 당당하다 보니 오히려 화를 내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위협해서 쫓아내려니, 그들 일행이 풍기는 기도가 만만치 않고.
다행히도 문지기는 나이 든 만큼 진상들을 상대한 경험이 많은 자였다.
골치 아픈 친구들을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고스란히 상급자에게 책임을 넘겨버리는 것.
“뭐, 어차피 너희들의 처우는 상부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들어가 봐라.”
문지기를 넘어서자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마중 나온 왜소한 여인의 안내를 받아 건물의 뒷문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 꾸불꾸불한 골목을 걸어, 마침내 건초가 잔뜩 실린 웬 허름한 짐마차 앞에 도착했다.
“…….”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여인이 말도 없이 사라진다.
‘…저하?’
마사인이 당황하며 돌아보았지만, 어느새 성진은 당연하다는 듯 마차에 올라타는 중이었다.
“……!”
뒤이어 오웬과 마사인이 건초 사이에 떨떠름하게 자리를 잡자, 곧 마부가 일언반구 없이 마차를 출발시킨다.
따각따각.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오웬과 마사인은 어쩔 줄 모르고 눈동자만 떼룩떼룩 굴렸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들은 어느새 천천히 레지나를 벗어나고 있었다.
‘다샤는 잘 따라붙고 있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녀가 오러 은폐를 사용한 채 뒤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성진은 조금 안심하며, 마왕이 앉아 있는 작은 램프를 끌어안았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야, 이성진?]
“응, 자유 지하도의 중간 접선지로 갈 거야. 출발지에서 상급자 대면을 건너뛴 걸 보니, 우리를 조금 더 윗선에다 바로 넘기려나 봐.”
[오래 걸릴까? 거기는 위험하지 않아?]
“위험할 게 뭐가 있어? 여차하면 너도 램프에서 뛰어나오면 되잖아. 네 힘으로 마차에 불 지르고 다 같이 도망치면 되지.”
그러자 마왕이 흡족한 듯 불꽃을 일렁거렸다.
[으흐흐흐! 그렇군. 드디어 내 힘을 세상에 펼칠 때인가! 이제 모두가 이 몸의 위대함을 알아보겠구나!]
그래봤자 단거리 네비게이션에서 휴대용 라이터가 되었을 뿐이지만.
성진은 어쩐지 짠한 기분이 되어 램프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한데 그 숨죽인 대화가, 앞에 있는 마부에게는 성진의 혼잣말처럼 들린 모양이었다.
“이봐들, 지금 몰래 도시를 떠나고 있는 중인 걸 모르겠나? 좀 조용히 하라고. 대체 아까부터 저 어린 친구는 뭘 자꾸 중얼거리고 있는 거야?”
마부의 신경질에, 성진이 고개를 들며 그에게 대꾸했다.
“어, 난 신경 쓰지 마. 열병으로 머리가 이상해져서 간혹 헛소리를 하거든. 그래도 조금 시끄러운 게 다고, 딱히 해를 끼치는 녀석은 아냐.”
“아아, 그렇군. 열병으로 머리가…….”
무심코 대꾸하던 마부가 이상한 표정으로 성진을 돌아봤다.
“아니, 그런데 그게 지금 당사자가 할 소리냐?”
그러나 성진의 태도는 뻔뻔했다.
“그럼, 내 일이니까 당연히 내가 제일 잘 알지. 그래서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거잖아. 대체 뭐가 문제야?”
“……?”
“아니면 내 친구들이 날 험담하길 바란 거야? 거, 성격 참 나쁘네.”
마부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그런가? 내가 나빴던 건가?
Chapter 121: Chapter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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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 자유 지하도 (3)
레지나를 벗어나자 제대로 된 길은 끊기고, 이내 황량한 황무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건초 마차는 그 어둡고 거친 들판을 쉬지 않고 달렸다.
덜컥덜컥.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메마른 땅에서 메케한 흙먼지가 일었다.
“상단이 주로 오가는 경로가 아니군요. 변변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데, 과연 저 마부가 길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사인이 주변을 경계하며 나직하게 속삭인다.
그의 말대로, 불야성의 도시를 빠져나오자마자 거짓말처럼 인적이 증발했다. 작은 마을들이 들어서 있던 자리는 이미 허물어져 집터조차 남지 않았고, 한때 길이 나 있었을 땅은 버석한 풀과 자갈들이 마구잡이로 뒤얽혀 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마사인 경.”
“하지만 북부는 이미 무법 지대가 아닙니까?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사방이 훤히 트여 있는 길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흠.”
성진은 적당히 달궈진 마왕의 램프를 끌어안고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마사인 경. 저기 저, 마차 모서리에 새겨진 표식이 보이나? 작은 점 네 개가 삼각형 모양으로 찍혀 있을 거야.”
마사인은 성진이 가리키는 곳을 돌아보았다. 오러로 안력을 돋워 한참을 살피자, 어렴풋이 중앙에 점이 있는 삼각형 비슷한 낙서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냥 얼룩 같기도 합니다만. 저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있고말고. 저게 있는 한, 우리는 안전하다는 뜻이니까.”
“…어째서 그렇습니까?”
“이 마차가 자유 지하도 소속이라는 표식이라서 그래. 약탈을 시도해 봐야 썩 재미없다는 걸 산적들도 잘 알고 있거든.”
자유 지하도의 마차는 상단과 달리 가치 있는 물건을 옮기지 않는다. 그들이 ‘배달’하는 것이라곤 제국에서 발을 붙일 수 없는 흉악범, 아니면 지하 교단의 광신도들뿐이지. 그러니 어느 쪽을 건드리든, 산적들에게는 좋을 것이 없었다.
그 설명에 마사인은 대충 납득했지만, 어쩐지 또 다른 의문이 생긴 것 같았다.
“한데 저하. 저하께서 대체 그것을 어찌…….”
마사인은 질문을 던지려 했다. 하긴, 아까부터 뭔가 묻고 싶은 것이 많은 표정이긴 했지.
하지만 성진이 시선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자, 그도 황자가 표하는 무언의 거절을 깨닫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심심해, 이성진. 나 주변을 조금 산책하고 오면 안 될까?]
“그만둬, 마왕아. 네가 갑자기 막 허공을 날아다니면, 저 마부가 널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냥 마차째 다 태워 버리면 안 될까?]
“안 돼.”
[쳇!]
밤의 시간은 무척 느리게 흘러갔다.
그동안 성진은 별도 없는 흐린 밤하늘을 멀뚱히 올려다보기도 하고, 때로는 소리 죽여 마왕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몇 번이고 성가시다고 눈치를 주던 마부는, 성진과 몇 차례 더 말씨름을 겪은 후에는 아예 뒤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괜히 입을 열어봐야 엉뚱한 타박만 들을 뿐,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겠지.
그러다 새벽녘이 될 무렵, 그들은 황무지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작은 오두막에 도착했다.
“여어!”
마침 문 앞에 앉아 파이프를 태우던 중년의 여자가, 마차를 발견하자 모자를 쓱 들어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대단히 질 나쁜 연초를 피우는지 멀리서도 지독한 연기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봐. 댁이 왜 이렇게 멀리까지 와? ‘건초’ 배달은 루벨 쪽이라고.”
그러자 마부는 마부석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아아, 이번 배달은 ‘특송’이야. 이대로 짐들을 인수해서 베르드론까지 수송해 주게.”
“특송? 그래애?”
여자는 의아한 눈빛으로 잠시 성진 일행을 훑어보았다. 자세히 보니 확실히 허름한 옷가지와 검댕으로는 숨길 수 없는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긴 했다.
“드문 일이군. 오늘은 좀 쉬나 했더니 다 텄구먼.”
대화는 그것이 끝이었다. 마부는 그대로 건초 마차를 내버려둔 채 오두막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는 동안 여자가 또 다른 마차 하나를 털털 끌고 왔다. 오크통이 잔뜩 들어차 있는 작은 짐마차다.
“들었지? 어서 ‘짐’들을 이쪽으로 실어.”
그 말을 들은 성진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를 옮겨 탔다. 그 뒤를 따라 오웬과 마사인이 엉거주춤 자리를 옮기자, 지켜보고 있던 여자의 눈에 작은 이채가 일었다.
“호오.”
그녀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마부석에 오르며, 조금 유쾌한 목소리로 성진에게 말을 건넸다.
“지하도를 이용하는 게 제법 익숙해 보이는데?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보는 얼굴이라 이상하구나. 꼬마야. 너 혹시 ‘특송’이 뭔지 알고는 있니?”
‘짐’들을 아예 무시하던 이전의 마부와 달리, 여자의 태도에는 작게나마 여유가 느껴졌다. 가만히 그녀의 무력 수위를 가늠해 보던 성진이 대꾸했다.
“알아. 중간 경유지 없이 빨리 도착하면 좋은 일이지.”
“하하, 그래. 그럼 유난히 빨리 배송된 짐들이 대개는 영영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도 잘 알겠구나?”
움찔.
오웬과 마사인이 그녀의 협박 아닌 협박에 긴장하자, 성진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글쎄, 적어도 이거 하나는 알지. 우리는 아마 꽤 높은 중간 관리자를 대면하게 될 거고, 제일 먼저 그쪽이 ‘배달’ 수칙을 어겼다는 사실을 털어놓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거.”
“…….”
“벧엘라. 자유 지하도에서 해고된 중간책이 대개는 영영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쪽은 알고 있어?”
“…이런, 조금 겁만 주려 한 건데 본전도 못 찾았네.”
여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고삐를 잡았다.
“그럼 특급 배송을 시작해 볼까? 이럇!”
덜그덕덜그덕.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적재되어 있던 텅 빈 오크통들이 힘없이 툭툭 튀어 오른다. 성진은 대충 그것들을 한쪽으로 밀어내곤, 바짝 긴장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아마 이번 마부도 쭉 쉬지 않고 베르드론까지 갈 모양인가 봐. 도착하려면 한나절은 훌쩍 지나야 할 테니, 두 사람 모두 눈이라도 조금 붙여.”
“…….”
오웬과 마사인은 대단히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성진이 마왕 램프를 끌어안으며 먼저 눈을 감자, 마지못해 각자 오크통 사이로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또다시 침묵 속에서 일행은 한동안 조용히 ‘배달’되기 시작했다. 오웬의 눈앞에 기다리던 텍스트 창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뾰롱!
[돌발 퀘스트 -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완료)]
* * *
가을날의 새벽 공기는 무척이나 차가웠다.
꾸벅꾸벅.
따끈한 마왕 램프의 온기에 기대어 잠시 졸고 있던 성진은, 부산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오웬의 기척에 눈을 떴다.
“…왜 그렇게 두리번거려? 잠이 안 오면 눈이라도 감고 있지.”
성진의 목소리는 속삭임처럼 작았다. 다분히 그들을 ‘배달’하는 이를 고려한 조치다. 이전의 마부와 달리, 저 여자는 제법 쓸 만한 오러 활성도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응? 아, 그냥…….”
오웬 역시 그것을 의식했는지, 마부석을 힐긋 곁눈질한 다음 작게 대꾸했다.
“네 정보원이 어디쯤 있나 찾고 있었지. 아무리 살펴봐도 도통 기척이 느껴지질 않는데, 괜찮은 걸까? 지금 잘 따라오고 있는 게 맞아?”
“다샤?”
성진은 잠시 기감을 돋워 다샤의 기척을 살폈다. 엄밀히 말하면 기척이라기보다는, 부자연스러운 오러 흐름의 부재를 감지한 거지만.
곧 그녀의 위치를 특정한 성진이 오크통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걱정 마. 다샤는 최고의 정예 요원이야. 거의 완벽한 수준의 오러 은폐를 익히고 있다고. 네가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그렇구나. 오러 은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오웬의 표정이 침울해진다.
“그러고 보니 너한테 고백해야 할 것이 있어. 뉴… 모레스. 실은 말이지, 아까 내가 보여준 건 제대로 된 오러 은폐가 아냐. 어떻게 성공했는지도 모르고, 또 언제 그걸 다시 할 수 있을지도 절대 장담할 수 없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성진은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러니 만약, 만약에 말이야. 네 변경된 계획에 어떤 식으로든 내 역할이 존재한다면, 미안하지만 내가 아까와 같은 재주를 다시 부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영 기운이 없다 싶더니, 계속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건가? 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괜찮아. 너한테 딱히 그런 기대는 하지 않았어.”
“그, 그래?”
오웬의 눈썹이 눈에 띄게 축 처졌다. 어이, 잠깐. 왜 표정이 더 나빠지는 거야?
“그러니까, 어차피 넌 이번 ‘배달’의 중심이 되는 이교도잖아? 딱히 기척을 감출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성진은 그가 더욱 침울해지기 전에 재빨리 덧붙였다.
“게다가 오러 은폐는 네 오러 운용 방식과 어울리지도 않아. 아마 너라면, 제대로 오러 은폐를 익히는 것보다 차라리 데카론 나이트가 되는 쪽이 빠를걸?”
“데카론 나이트?”
“그래. 오러 활성을 보면, 너도 대충 9층 정도는 쌓은 거 아냐? 그러니 조금만 더 수련하면 금방일 거라고.”
그러자 오웬은 잠시 성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빈말인지 아닌지 가늠이라도 해 보는 모양새였다.
“왜?”
“아니, 내 오러층은 9층이 맞아. 하지만 데카론 나이트라니, 그건 아무나 가능한 경지가 아니잖아. 뉴… 모레스 너는, 내가 언젠가 정말로 데카론 나이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성진이 눈썹을 휙 치켜 올렸다. 뭐야, 새파랗게 젊은 놈이 왜 이리 패기가 없어?
“그럼, 안 할 생각이었어?”
“아니, 그게 생각한다고 쉽게 되는 것도 아닌…….”
“왜 안 돼? 너는 인마, 잡생각 지우고 더 정진해도 모자랄 판에 왜 자꾸 그런 힘 빠지는 소리를 하고 있어? 어느 정도 강해졌으니 이제는 슬슬 게으름 부려도 되겠다, 싶어?”
로건을 좀 본받아 봐라. 걘 이미 옛날 옛적에 데카론 나이트가 되었지만, 아직도 릴리움 기사들과 매일같이 수련에 매진하고 있다고!
성진의 잔소리에, 잠시 멍해져 있던 오웬이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한데 웃음소리에도 영 매가리가 없다. 어쩐지, 아까부터 상태가 좀 이상하다 싶었던 게 그저 착각이 아니었나?
성진이 미간을 슬쩍 구기며 오웬을 살피자, 그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무릎에 턱을 괴었다.
“게으름이라… 어쩌면 네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네. 예전부터 이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거든. 전선에 제법 도움이 될 정도로 활약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두드러지지는 않는 정도의 무력이니까.”
“그게 어째서 적당하다는 거야?”
성진의 물음에, 오웬이 잠시 주저하며 맞은편에 앉은 마사인을 돌아본다.
그가 눈을 감고 고른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오웬은 소리를 죽여 나직하게 대답했다. 이 자리에서는 성진 외에 알아들을 사람이 없는 바르샤어였다.
“만일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내가 데카론 나이트가 돼서 제국에 좋을 게 뭐가 있겠어?”
“……!”
그 한 마디로, 성진은 오웬에 대해 제법 많은 것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오웬이 유독 침울해 보였던 이유. 그리고 아까도 굳이 성진의 공격을 피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진짜 이유를.
어쩌면 성진의 검이 눈앞에 쇄도했을 때, 오웬은 먼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치열한 황위 쟁탈전의 전조를 보았다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오웬은 그의 인생에 갑자기 찾아든 생각지도 못한 행복을, 혹시나 빼앗길까 두 손으로 꽉 움켜쥐려 발버둥 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행복이 약간의 균열만으로도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리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는 거다.
“…오웬.”
언제나 마음 한편에 작은 불안감을 지닐 수밖에 없는 처지. 성진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오웬의 심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아까 나는 널 공격하려 했던 게 아냐.”
“그래, 알아. 오러 은폐 중이라 내 정체를 몰랐잖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내가 없애려 했던 건, 어디까지나 그 시답잖은 은폐 현상의 중심에 있는 강한 이질감의 매개체였어.”
“응? 매개……?”
오웬이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아니,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흠.”
고민하던 성진은 잠시 마사인 경을 눈에 담았다.
한 손에 금빛 미스라를 거머쥔 채, 잠을 자는 척 성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충직한 기사의 모습을.
자연스레 성진의 입에서 바르샤어가 튀어나온다.
“뭐, 적어도 이거 하나는 알아 둬. 앞으로도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오웬.”
어째서일까. 적어도 지금만큼은, 마사인이 이 대답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가족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서로에게 검을 겨누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한 성진은 어딘가 미묘한 감상에 젖어 입가를 어루만졌다.
이미 내뱉은 뒤였지만, 아직도 그 대답이 남긴 작은 울림이 계속 입가를 맴도는 것만 같았다.
* * *
한편, 그때까지 성진과 오웬이 완전히 잊고 있던 자가 있었으니. 바로 오웬이 숙소에서 사라진 것을 깨닫고는, 엄청난 충격에 빠진 바르샤 전사였다.
“크으…. 델크로스인들은 이리도 신의가 없는 자들이로다!”
푸르마의 바르토자.
그는 지저분한 손톱을 물어뜯으며 후다닥 황실 마차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제국인들의 시야로부터 되도록 몸을 숨기고자 하는 본능이었다.
“오웬이여! 델크로스 부족장의 장자여! 그대는 이 바르토자를 홀로 사지에 던져두고서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에 답하듯, 마차 뒤쪽에 있던 상자 하나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심지어는 바로 아래에 있던 바르토자마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덜컹!
Chapter 122: Chapter 422
Chapter Text
422. 자유 지하도 (4)
브루노 그린.
그는 스스로 상황 대처 능력이 그리 미흡하지 않은 편이라 자신했다.
비록 불의의 사고로 퇴직했다고는 하나, 한때는 유일한 평민 기사단장으로서 성황의 곁을 잡음 없이 보좌한 전적이 있지 않나.
이번에도 마찬가지, 브루노는 레지나에 남겨진 상주기사들을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다독였다.
“다들 왜 그렇게 쳐져 있는 건가?”
“단장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우리 모레스 저하같이 부지런한 분께서, 혼자 휴식을 취하겠다고 저희를 떠나셨을 리가 없다고요! 어쩌면 저하께서 일을 하시는 데, 저희의 존재가 많이 거추장스러웠던 건 아닐까요?”
클로디아 경이 울상을 짓자, 브루노 단장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경은 모레스 저하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못했나? 한동안 레지나를 관광하면서 겸사겸사 자코모 밀로에 관해 공개적으로 수소문하라지 않으셨나.”
“하지만 그는 이미 암흑 교단 깊이 잠적했을 거예요. 우리가 여기서 아무리 찾아본들 달라질 게 있나요?”
“클로디아 경. 저하께서는 그를 찾아내라고 하지 않으셨네. 그저 수소문하라고만 하셨지.”
그러자 눈치 빠른 쿠르트 경이 그 말의 뜻을 바로 이해했다.
“아! 저하께서 물밑으로 뭔가를 하시는 동안, 표면적으로는 우리들이 레지나에서 열심히 수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알리라는 말씀이군요!”
“그래. 바로 그거네. 저하의 측근인 우리들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지.”
또한 브루노는, 최근 마차를 향해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에디스도 보살펴야 했다.
어딘가 맹한 구석이 있는 이 황자의 시녀는, 오늘이야말로 소리의 정체를 밝히겠노라며 아예 밤을 새울 기세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에디스 양. 시간이 늦었네. 빈 마차는 그만 감시하고, 이제는 방으로 들어가서 좀 쉬시게나.”
“하지만 브루노 단장님. 이건 저하의 명이십니다. 모레스 저하께서 저더러 오가며 마차를 잘 살펴보라고 하셨다고요.”
“그렇다고 그게 자네 일을 모조리 내팽개치고, 하루 종일 마차만 감시하라는 뜻은 아니지 않겠나?”
그러자 시녀는 동그란 눈을 끔벅거리며 단장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달리 할 일도 없어요. 전 평소 식사 준비도 하지 않고, 다과 준비도 하지 않고, 심지어 지금은 모셔야 할 저하도 안 계신 상황인데요?”
…이 시녀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저하의 훌륭한 월급 도둑임을 잠시 잊고 있었다.
결국 단장은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모포 한 장과 따듯한 멜보른 차를 건넸다.
“그럼 마음 내키는 대로 하시게. 대신 춥지 않게 이거라도 좀 걸치고 있지 않겠나?”
1황자 오웬이 몰래 숙소를 빠져 나갔을 때도 그랬다.
“큰일났습니다, 단장님! 아무리 숙소를 뒤져봐도 오웬 저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직 데카론 나이트는 당연하게도 진작 그 사실을 알아챘지만, 황자를 제지하는 대신 또 다른 혼란이 생기는 것을 대비해 일행을 단속했다.
“괜찮네, 쿠르트 경. 어젯밤 떠나시기 전에 내게 행선지를 말씀하셨어.”
아렌쟈의 수장, 리브가의 사념을 통해 거듭 확인한 정보였다.
“오웬 황자님께서는 지금 모레스 황자님과 함께 계신다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브루노는 때때로 마차 짐칸에서 느껴지는 익숙하고도 그리운 기척을 무시하려 노력해야 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꺼내드리고 싶다. 그러나……!’
틈만 나면 뚜껑을 콩콩 두드려 보는 것이 참으로 안쓰럽기 그지없었지만, 브루노는 이제 성황과 일말의 접점도 가져서는 안 되는 몸.
기적과 같은 힘으로 자신을 치료해 주셨지만, 아직도 시선조차 부딪칠까 조심하시는 그분의 뜻을 어찌 함부로 저버릴 수 있으랴.
그래서 그는 당장이라도 상자를 열어젖히고 싶은 충동을 힘들게 억눌렀다.
‘크흑! 이 모두가 저의 불찰입니다. 부디 못난 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하지만 그런 브루노도, 다음 날 아침 클로디아 경이 이런 보고를 해왔을 때는 평정심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단장님, 큰일 났어요! 황궁 마차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오웬 황자님께서 데려오신 바르샤인이 마차를 끌고 도주했다는 거 같아요! 지금 추격할까요?”
“…뭐?”
멀쩡히 여관에서 마차를 관리하고 있었을 텐데, 대체 그자가 어떻게?
브루노가 크게 당황하고 있는데, 연이어 쿠르트 경이 숙소로 뛰어 들어왔다.
“서둘러야 합니다, 단장님. 경비들의 말로는 이미 그가 레지나를 벗어났을지도 모른다더군요.”
“아니, 왜 경비들이 진작 막지 않고……?”
“처음에는 그들도 말려보려 했답니다. 하지만 바르샤인과 도통 말이 통하질 않았다더군요. 그렇다고 힘으로 저지하자니, 그 바르샤인의 무력 역시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던 터라……!”
게다가 그 또한 엄연한 황자의 일행이라, 차마 강하게 손을 쓸 수 없었다는 설명이었다.
띠잉-
브루노는 현기증이 이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아. 내가 가지. 아직 늦지 않았을 거네. 지금 당장 말을 준비-”
한데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칼멘 경이 후다닥 달려 들어오며 소리치는 게 아닌가!
“크, 큰일 났습니다, 스승님! 에디스 씨가……!”
“그녀는 또 왜?”
“아무래도 계속 마차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나 봅니다. 폭주하는 마차로부터 젊은 시녀 하나가 거세게 튕겨 나가는 걸 목격한 사람이 많습니다!”
전력으로 달리는 마차에서 떨어져, 무방비하게 길바닥에 내팽개쳐졌다고?
최악이었다. 사고가 나기 전에 진작 그녀를 말렸어야 했는데!
“그, 그래서, 에디스 양은 지금 얼마나 다쳤나? 살아는 있나?”
“근데 멀쩡해 보였답니다. 오히려 씩씩거리며 한참 마차를 따라 달리기까지 했다는데요?”
“…뭐?”
“그러다가 기어이 사고를 쳤습니다. 글쎄 지나가던 용병의 말을 빼앗아 타고는 그대로 마차를 따라 사라졌다는 겁니다! 지금 그 용병이 숙소 앞으로 찾아와 거세게 항의하고 있습니다!”
“……!”
어질어질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손을 써야 한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브루노는, 마차 짐칸 한편에 놓여 있던 귀중한 짐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폐, 폐하……!”
* * *
바르토자는 미친 듯이 레지나의 거리를 질주했다.
“으아아아! 비켜라! 모두 비켜어어!”
“으악!”
“뭐야? 마부가 미쳤나 봐!”
“모두 피해!”
아무도 폭주하는 마차를 세우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몰고 있는 것이 지엄한 황궁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무에게도 제지받지 않은 마차는, 어느새 레지나의 외곽을 넘어 황량한 평야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델크로스의 오웬은 결국 나를 버렸다! 이제 이 바르토자가 몸을 의탁할 곳은 아무 데도, 세상 아무 데도 없구나!’
슬픔과 패닉에 빠져 있었지만, 바르토자는 본능적으로 레지나의 북서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왔던 길로부터, 황도로부터, 되도록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렵, 누군가가 빠르게 말을 달려 그의 뒤를 쫓아왔다.
“이봐, 멈춰! 어서 저하의 마차를 세우라고!”
졸지에 마차에서 튕겨 나갔다가, 뒤늦게 용병의 말을 빼앗아 쫓아온 에디스였다.
물론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바르토자는 더욱 패닉 상태에 빠졌지만.
“우워어어! 오지 마라, 여자! 이쪽으로 오지 마!”
“대체 뭐라는 거야? 어쨌든 당장 세워! 거기에는 저하의 중요한 물건들이 잔뜩 들어있단 말이야!”
“아아, 오웬이여! 신의를 저버린 자여! 어찌하여 이 바르토자를 버렸는가! 오웬이여어어어!”
마부가 평정을 잃고 고삐를 이리저리 휘두르자, 마차를 끌던 말들 역시 공황 상태에 빠져 비명 같은 울음을 내지른다.
이히히히히힝!
그러는 사이에도 주변의 풍경은 조금씩 변해갔다. 드문드문 풀밭이 보인다 싶더니, 어느새 마차는 완만한 산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길에 경사가 생기며 겨우 마차의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싶은 시점.
파앗-!
에디스는 달리던 말에서 훌쩍 뛰어올라, 겨우 마차의 한쪽 귀퉁이를 잡아채는 데 성공했다.
“윽! 어서 멈추란 말이야!”
그러자 힐끔 뒤를 돌아보던 바르토자가, 마차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에디스를 발견하곤 기겁을 했다.
“으아아아! 떨어져라! 떨어져라, 여자!”
덜컹덜컹!
그의 어설픈 조종 실력에, 마차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좌우로 위태롭게 흔들린다.
“이익!”
긴 스커트가 바람에 부딪히며 거센 저항을 일으킨다.
한동안 두 손으로 매달려 이를 악물고 버티던 에디스는, 겨우 발 하나를 마차 벽에 고정해 몸을 지탱했다. 평소 맹하기만 하던 그녀의 눈은, 이제 강한 투지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저하께서 내게 마차를 잘 살피라고 하셨어! 안 그래도 하는 일이 없어 눈치 보이는데, 이것까지 잃어버리면 앞으로 저하를 무슨 면목으로 뵈어야 하냔 말이야!’
물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바르토자는 더더욱 겁에 질렸지만.
‘저 여자는 분명 부족장의 차남을 지키는 전사였지! 오웬의 곁에 있는 알리샤처럼, 저 여자 역시 노련한 전사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마땅히 주인의 소유물을 훔친 내 목숨을 노리겠구나!
“으히익! 안 돼!”
바르토자가 잔뜩 긴장하며 고삐에 힘을 주자-
덜컹!
마차가 크게 뒤흔들리며, 순간 에디스 몸이 부웅 허공으로 떠오른다.
“으윽!”
하지만 끝내 마차를 놓지 않은 그녀는, 눈동자를 이글이글 불태우며 천천히 마차의 지붕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오지 마라! 오지 마!”
하지만 바르토자의 난폭한 운전에도 불구하고 끈기 있게 몸을 움직이던 에디스는 마침내 마부석 가까이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제 바르토자는 아예 고삐를 놔 버리고는, 그녀를 향해 마구잡이로 도끼를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붕웅! 붕!
“저리 가라아아!”
“좋은 말 할 때 당장 고삐 내놓으라고!”
“죽어라아아!”
“이익! 이 자식이 끝까지……!”
한데 바로 그때, 우연히 전방에서 뭔가를 발견한 에디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헉?
“어어어? 앞을 봐! 저 앞을 좀 보라고!”
“저리 가라, 여자! 오지 말란 말이다!”
“야야! 절벽! 바로 앞에 절벽이 있다고! 어서 고삐 잡아! 어서!”
“으아아아! 날 내버려둬라!”
“이봐! 지금 그럴 때가……!”
에디스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까마득한 절벽은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바르토자가 뒤늦게 상황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한참은 늦은 뒤였다.
후웅-!
마차는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향해 쏘아졌다. 그러고는 일순 중력을 잃은 듯 멈추더니, 그대로 절벽 아래로 거세게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으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아!”
* * *
“…어?”
성진은 고개를 들어 먼 남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뉴… 뭔데? 뭔데에?”
어딘가 심상찮은 낌새를 느꼈는지, 오웬이 곁에서 집요하게 물어온다. 성진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정작 그렇게 대답하는 성진 스스로도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뭐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맞나?
왜 갑자기 이렇게 가슴이 술렁거리고, 발아래가 허전한 기분이 들지?
“…저하.”
바로 그때, 마사인이 눈을 뜨며 나직하게 경고했다.
“아까부터 우리 뒤를 쫓는 자들이 있습니다.”
“응.”
성진은 동요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마사인보다 훨씬 먼저 그들의 존재를 감지한 까닭이다.
다음 목적지인 베르드론에 가까워지자, 조용하기만 하던 주위 환경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겨났다. 반파된 집들과 엉망으로 부서진 집기구들이 드문드문 보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들의 뒤를 따르는 몇몇 ‘오러 은폐’의 기척이 느껴졌던 것이다.
마사인이 뒤늦게 눈치챈 것으로 보건대 제법 괜찮은 실력들 소유자들이다.
‘다샤가 무사히 따라와야 할 텐데…….’
처음보다 부쩍 멀어져 버린 그녀의 기척을 재차 확인한 후, 성진은 마사인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마사인 경. 우리는 중간 과정을 건너뛰고, 조금 빨리 상위 관리자를 만나러 가는 것뿐이야.”
어느 정도는 성진의 노림수가 통했던 것이리라.
약간은 어설픈 분장. 뜬금없이 참회에 귀의하겠다는 수상한 바르샤인. 그리고 자세히 관찰해 보면 결코 범상치 않은 마왕의 램프.
미끼는 충분히 던져뒀다. 만일 자유 지하도가 벨린다의 말처럼 북부 대부분의 지역에 정보망을 펼치고 있다면, 분명 성진의 노림수에 어떻게든 반응하겠지.
물론 아무 일 없이 여타 광신도들처럼 통과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을 일이었다.
-이번 배달은 ‘특송’이야. 이대로 짐들을 인수해서 베르드론까지 수송해 주게.
다행히도 이들은 제법 적절한 대처를 보이는 듯했다. 단지 조금 의외였던 점은, 이들이 성진의 예상보다 더욱 빠르고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것이지만.
설마 경유지를 거의 거치지 않고, 하루 만에 핵심 거점으로 냅다 내달릴 줄이야.
“그래도 모든 것은 상정 범위 내야.”
“…그렇습니까?”
“응.”
어찌 그런 것을 아십니까?
마사인은 그렇게 묻지 않았다. 대신 미스라를 고쳐 쥐고는, 기도를 좀 더 날카롭게 가다듬었을 뿐.
하지만 그들이 폐허가 된 베르드론에 도착해 마침내 ‘특송’이 완료되었을 때-
“오시는 길,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성진도 미처 이것만은 예상할 수 없었다. 기대보다 더욱 대단한 거물이 직접 그들을 맞이하러 나오리라는 것은.
“귀한 분께서 친히 자유 지하도를 이용해 주시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저는 이 보잘것없는 자유 지하도의 총 책임자-”
거기까지 말한 남자는, 어딘가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아니, 우리의 소중한 후원자님께는 [푸른 공화혁명전선]의 수장이라고 소개 드리는 쪽이 더욱 적절할까요.”
Chapter 123: Chapter 423
Chapter Text
423. 거래 (1)
성진 일행이 탄 마차는 동틀 녘부터 쉬지 않고 달려, 정오가 될 무렵 폐허가 된 어느 마을에 이르렀다. 아마도 이곳이 마부들이 언급한 ‘베르드론’이리라.
“…제대로 거주민이 있는 곳 같지는 않군요.”
마사인이 황량한 마을 풍경을 바라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확실히 주변에는 멀쩡히 남아 있는 건물이라곤 없었다. 지붕 없는 집터에는 무너진 벽돌들이 쌓여 있고, 잡초가 무성한 길 곳곳에는 부서진 오크 통이 굴러다닌다.
단지 광활한 폐허의 규모만이, 한때 이곳의 번영과 영광을 짐작게 할 뿐.
“제국인들은 모르겠지. 이 마을에서 빚은 술이 그렇게나 끝내줬는데 말이야…….”
여태껏 침묵을 지키던 마부가, 연초 연기를 후욱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모는 짐마차는 그대로 폐허 사이를 달려, 마침내 어느 커다란 헛간 앞에 정차했다. 그나마 마을에서 유일하게 지붕이라 부를 만한 것이 남아 있는 건물이었다.
삐걱.
다 부서져 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성긴 지붕 사이로 듬성듬성 새어드는 햇살 아래에 웬 초로의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귀한 분께서 친히 자유 지하도를 이용해 주시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사교적인 미소와 함께 건네는 정중한 인사.
그가 이 모든 여정을 지시한 장본인임을 성진은 직감할 수 있었다. 딱 봐도 어디서든 한자리해 먹을 것 같은 관록이 느껴졌으니까.
희끗희끗 새어 가는 머리와 뺨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 거칠게 주름진 피부를 보건대 지금껏 제법 만만찮은 시간들을 헤쳐 온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외관과 대비되는 어딘가 가벼운 분위기가 공존했다. 그의 의복은 정갈함에도 자유분방해 보였고,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에서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명랑한 총기가 반짝였다.
그리고 그는 성진 일행에게, 자신을 ‘자유 지하도의 총책임자’이자 ‘푸른 공화혁명전선의 수장’이라고 소개했다.
“제 이름은 조반니라고 합니다. 이리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가명.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든 성진은, 별다른 대꾸 없이 주변에 숨어 있는 암살자들의 기척을 살폈다.
‘넷, 다섯… 아니, 총 여섯인가?’
헛간을 에워싸고 있는 생소한 ‘오러 은폐’의 기척.
다샤는 아예 근처에 다가올 엄두도 내지 못하는 듯 희미한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저하…….”
이렇게 암살자들이 한곳에 몰려 있다 보니, 오웬과 마사인 역시 그들의 존재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하며 성진의 곁으로 붙어 섰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뉴… 모레스.”
불안한 듯 소곤거리는 오웬에게 간단히 눈짓한 후, 성진은 꽤 여유로운 태도의 ‘조반니’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정도의 준비라면, 만일의 사태에도 충분히 제 한 몸 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 건가?’
안타깝게도 그는 성진의 전력을 계산에 넣지 못한 실수를 저질렀다. 물론 대화가 잘 끝난다면 그 실수를 영영 깨닫지 못하겠지만.
“총책임자? 수장? 그대가?”
딱히 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성진이 ‘조반니’에게 물었다.
물론 그 또한 성진으로부터 딱히 자기소개를 기대하지는 않는 듯 보였다. 이미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으며, 그것을 조금도 숨길 생각이 없다는 뜻이리라.
“네. 그렇습니다.”
“아무리 ‘특송’이라고 해도, 설마 자유 지하도의 총책임자가가 마중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러자 조반니는 부드럽게 입매를 휘며 제법 호감 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이 자유 지하도의 입구를 방문했을 때, 마침 그곳에 제 유능한 부하 하나가 시찰을 나가 있던 참이었습니다. 저는 또 우연찮게 이 근방에 있었지요. 덕분에 기적적으로 이 자리가 성사된 겁니다. 서로가 운이 좋았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순간 성진의 뇌리에 한 여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문지기에게 ‘짐’을 인계받고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건초 마차로 인도했던 왜소한 여인.
설마 그녀인가? 저자의 부하라는 게?
“…솔직히 예상치 못했네. 내 예정이 꽤나 어긋나 조금 당황스럽군.”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립니다. 뭐,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이제는 그게 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저 이 우연한 만남을, 우리가 더욱 뜻깊은 자리로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
역시나 어딘가 기묘한 느낌이 드는 자다.
겉모습만 보면 오랜 세월의 풍파가 느껴지는데, 언행은 젊은이 같은 데다 목소리 역시 청년처럼 깨끗하다. 허름한 차림새에 어울리지 않게, 행동거지에는 묘한 기품이 배어 있고.
“그대가 총책임자라면, 이곳이 바로 자유 지하도의 본부인가?”
“본부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겠군요. 자유 지하도는 딱히 한곳에 구심점을 둔 조직은 아닙니다. 그저 사상의 자유를 꿈꾸는 철없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서로를 도와가며 조금씩 얽어낸 성긴 그물에 불과하지요.”
“그래도 나름의 위계질서가 있으니, 그대 같은 책임자도 있는 거겠지.”
“하하. 총책임자라고는 하지만, 제가 하는 일은 보잘것없습니다. 그저 외부 세력과 조직을 조율하거나, 자금 융통을 도맡는 정도에 불과하죠.”
…그거야말로 조직의 실세 아닌가. 이 자식이 뭘 아무것도 아닌 척을 하고 있어?
성진의 험악한 표정을 눈치챘는지, 그가 멋쩍게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곳이 자유 지하도에서도 제법 중요한 거점 중 하나라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사방으로 괜찮은 길이 나 있으니까요. 당신은 이 베르드론이, 한때 오르토나에서 가장 거대한 양조 마을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건 몰랐던 사실이군.”
성진은 대충 대꾸하며 잠시 생각했다.
굳이 몰락한 양조장에 관해 들먹거리다니, 지금 이 모든 게 제국의 탓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흠잡을 데 없는 제국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저 작자는 아마도 오르토나인이겠지.’
조반니는 일행의 정체를 이미 짐작하고 있고, 성진을 들어 ‘귀한 분’이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딱히 존칭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칭호를 고집하고 있지.
그렇다면-
‘오르토나 내전 당시 공화정의 편에 섰던 자거나, 혹은 내색하지 않아도 제국에 꽤나 깊은 반감을 가진 자일 거야.’
그럼에도 굳이 자신과 푸른 공화혁명전선의 관계를 밝혀가면서까지 성진의 앞에 직접 행차하셨다. 그 말인즉, 저자는 지금 성진에게 분명한 용건이 있고, 그것은 십중팔구 ‘푸른 공화혁명전선’에 관한 일일 터.
‘뭐, 본인에게 직접 들을까.’
성진은 더는 시간 끌지 않기로 했다.
“잡담은 이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조반니. 그대가 우리를 곧바로 이곳으로 안내한 이유가 있겠지?”
“네, 그렇습니다.”
조반니는 웃음기를 거두고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빙 둘러말하지 않겠습니다. 당신 같은 이가, 제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만이 찾아드는 이 자유 지하도를 방문한 목적을 알고 싶습니다.”
“왜? 알면 도와 줄 건가?”
“조직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그 목적 여하에 따라서…….”
“그럼 기꺼이 그 도움을 받지. 우리는 이곳에 숨어든 자코모 밀로를 검거하려 한다. 그 외에 딱히 다른 이유는 없고, 자유 지하도의 운영을 방해할 생각도 없어. 아마 그대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겠지?”
“…….”
조반니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성진이 조금의 탐색도 없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
“그보다 내가 그대에게 궁금한 건 조금 다른 부분이다. 왜 굳이 우리에게 푸른 공화혁명전선의 수장이라 밝힌 거지? 그게 이번 일과 무슨 상관이 있어서?”
“별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저 두 단체의 활동은 결코 분리될 수 없기에 미리 말씀드린 것이죠. 짐작하셨을지 모르겠지만, 자유 지하도의 중간책 대부분이 푸른 공화혁명전선의 회원입니다. 애초에 자유 지하도의 유래가, 사상의 자유를 쫓아 공화국으로 망명하려던 사람들을 돕는…….”
성진이 대답 없이 매섭게 노려보았더니, 그는 결국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군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 ‘푸른 공화혁명전선의 수장’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다고 보는 쪽이 옳겠습니다.”
푸른 공화혁명전선. 성진이 수년간 출처 모를 자금으로, 자신도 모르는 방법으로 후원하고 있는 이적 단체.
다샤가 진작 조사에 착수했지만 아직까지 뾰족하게 알아낸 것이 없어 이상하다 싶었지. 알고 보니 이들은 자유 지하도를 통해, 주로 북부에서 은밀하게 활동하는 단체였던 거다.
“그래서 예전부터 당신에게 꼭 묻고 싶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우리 단체를 알고, 또 그런 거금을 후원하겠다고 결정한 겁니까?”
수년 전만 해도, 푸른 공화혁명전선은 대단히 영세한 단체였다.
회원을 포섭하고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황도에 발을 뻗고는 있었지만, 이미 온갖 이적 단체가 암약하고 있는 황도에서 어설픈 그들이 살아남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데 수년 전, 갑자기 아무런 조건 없이 거금의 후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푸른 공화혁명전선은 이 자금을 바탕으로 조금씩 자유 지하도의 그물망을 회복했으며, 마침내 참회의 교단과도 직접적으로 거래할 수 있는 튼튼한 조직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흠. 참회 교단과 함께 북부를 좀먹는 놈들이다 싶어, 기회가 되면 일단 다 때려잡으려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성진, 그러니까 모레스가 후원한 지원금이, 자유 지하도를 재차 활성화시킨 원인이었다니.
“처음에는 당신이 우리 단체를 후원하겠다 결정한 게 그저 우연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망국 이후에도 오르토나의 사상과 혁신을 그리워하던 이들이, 너도나도 이를 추종하는 단체를 만들었으니까요.”
황도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이들 단체에 투신하거나 후원하는 것이 일종의 낭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니 철없는 황자가 그 시류에 탑승한다 한들 크게 이상하다고 여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당신의 행보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우리 단체를 선택한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최근의 행보?”
“베르트란 & 리.”
순간 조반니의 눈이 답지 않게 날카로운 안광을 뿜었다.
“대부분은 그 상단이 부유한 황자의 사업 병에 불과하다 여깁니다. 하지만 상업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라면 분명 깨달았을 테죠. 당신이 벌이고 있는 모든 사업들은, 사실 난민들의 정착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요.”
거기까지 말한 조반니는,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은 제국의 황자가 아닙니까? 한데 왜 아무 상관 없는 이들을 도우려 합니까?”
하지만 성진은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일순 조반니가 내보인 기묘한 위화감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다.
“나도 하나만 물어보지. 그러니까 그대는, 지금 우리 상단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가? 그대가 운영하는 단체에 해를 끼치기보다는, 오히려 뜻을 같이하는 쪽이라고 생각하는데. 분명 난민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예정이잖아?”
“마음에 들지 않다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는 모든 일들이 오르토나 전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니 저는 먼저 당신의 저의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아냐, 그게 아니야.”
성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반니의 말을 끊었다.
“그대는 아까부터 내게 화를 내고 있다고. 대체 어째서지?”
“…네?”
조반니가 어리둥절해하며 반문했다. 하지만 이어서 성진이 내뱉은 말에,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진다.
“베르트란 & 리.”
“……!”
“우리 상단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그대의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졌잖아. 그렇지 않아?”
언어는 어디까지나 표면에 불과하다.
그 말을 하는 이의 목소리 톤과 시선의 방향, 잠시 떠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미세 표정, 그리고 잘게 동요하는 오러의 움직임까지.
기감이 극도로 예민한 성진에게는, 그 누구도 무의식중에 내비치는 본심을 온전히 숨길 수 없는 것이다. 특히나 오러 연공에 입문하지 못한, 조반니 같은 일반인의 경우에는 더더욱.
“숨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그거 자네 얼굴에서 다 드러나거든.”
성진의 지적에, 조반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확실히 그 문제도 있었죠. 네, 그렇습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뒤.
이윽고 입을 연 조반니의 눈에서, 일순 무의식 속에 깊이 감춰져 있던 날 선 적의가 번뜩였다.
“사실 제가 당신에게 가장 궁금했던 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이 운영하는 상단, 그것의 이름이 어째서 하필 [베르트란]인 것인지요?”
* * *
베르트란은 대륙에서 아주 드문 성은 아니다. 같은 성이 브르타뉴에도, 또 남부 아나톨리아에도 있다고 했던가.
예를 들자면 브르타뉴 출신의 유명 배우 ‘알랭 베르트랑’을 꼽을 수 있다. 수백 년 전 황도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그는, 말년에 황도 한쪽에 커다란 극장을 세웠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주로 활동하던 거리의 이름은 그대로 베르트랑 거리가 되었지.
하지만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베르트란이라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그를 꼽을 수밖에 없다. 바로 동부 최후의 검, 가엘 베르트란 장군.
다행히도 거기에 대해서 성진에게는 할 말이 있었다.
“그거야, 우리 로건이 베르트란 장군의 열렬한 팬이라서 그래.”
“…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조반니의 무표정에 금이 가며 일순 당황한 기색이 드러난다.
“그대도 알다시피 베르트란 & 리 상단의 최고 대표는 로건이지. 그런데 로건이 그 가엘 베르트란 장군을 우상으로 여기고 있거든.”
“…….”
“사실 우리 상단이 오르토나 경제 부흥 사업을 벌이는 것도 다 그 녀석 때문이지. 걘 완전히 오르토나에 미쳐 있다고.”
“…….”
“정말이라니까?”
성진은 당당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의 말을 완벽하게 증명할 수단이 있었으니까.
“로건은 정말이지 가엘 베르트란 장군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그의 가족관계, 그의 인간관계, 그의 어린 시절…. 심지어는 그가 생전에 야식으로 뭘 좋아했는지까지 다 알걸?”
어디 그뿐이야? 오르토나어도 능숙하고, 오러 연공이나 검법도 오르토나식으로만 쓴다고. 그리고 가엘 베르트란의 애검을, 가엘 베르트란처럼 능숙하게 다루지.
이런데도 그 녀석이 장군의 광팬이 아니라면 대체 뭐겠어?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한번 그대와 함께 로건과의 자리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군. 보아하니 그대도 가엘 베르트란 장군을 몹시 흠모하는 모양인데, 아마 둘이 만나면 동일한 관심사에 대해 대화하며 무척이나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야.”
어째 뒤통수에서 오웬과 마사인의 경악한 시선들이 느껴진다.
뭐? 왜? 뭐?
아, 진짜라니까? 다들 못 믿겠으면 나중에 로건에게 직접 물어들 보든지!
Chapter 124: Chapter 424
Chapter Text
424. 거래 (2)
전부터 성진은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로건을 오르토나인들 앞에 당당히 세우기 위해서는,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거라고.
-나는 단지 도망치고 있었을 뿐이었던 거야. 고작 그들로부터 받을 차가운 눈길이 두려워서, 지름길을 알고 있음에도 차마 들어서지 못한 거지.
언젠가 로건은 그렇게 말했었다.
당연한 걱정일 것이다. 지금 녀석은 마지막까지 조국을 위해 싸운 자랑스러운 장군이 아니라, 오르토나를 멸망시킨 제국의 황자니까.
‘본래라면 힘들었던 전생 따위 잊고, 성황가의 황자로서 새 삶을 살았으면 하지만…….’
아마 로건의 성격에 그런 건 절대 불가능하겠지.
게다가 성진은 이미 들어 버렸다. 폭우가 쏟아지던 그날 저녁, 잔뜩 비에 젖은 로건이 힘겹게 쏟아낸 진심을.
-어떠한 오명도 쓸 수 있다고 생각 했는데, 실제로는 전생의 동료들 그 누구와도 제대로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거다.
조금 열받는 일이지만, 바꿔 말하면 로건은 어지간한 오명을 쓰더라도 전생의 동료들 곁에 서고 싶다는 뜻인 거다.
그래서 성진은 생각했다.
‘그래? 제대로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좋아, 그럼 내가 강제로라도 준비시켜 주지!’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일명 ‘축구로 대동단결’ 작전.
어느 유명한 축구팀의 팬이었던 직장 상사가, 휴가를 맞아 팀의 본고장에 놀러갔다가 엄청난 환대를 받은 경험에서 착안한 전략이다.
전형적인 꼰대였던 상사의 얼굴이 마치 천국에 다녀 온 양 풀려 있더라. 자고로 골수팬의 세계에는 인종이고 국경이고 없는 거다.
‘그러니까 일단 장군의 극성팬이라고 우겨 보는 거야!’
오르토나인이라면, 특히 옛 공화정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우리 로건, 아니 가엘 베르트란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설마 같은 우상을 가진 사람한테 그렇게까지 야박하게 굴겠어?’
과연 그 대책을 로건이 반길지 아닐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 순해 빠진 호구 자식에게는 어차피 선택의 여지 따위 없다고.
물론 이렇게 빨리 옛 공화정의 잔당을 만나, ‘축구로 대동단결’ 전략을 시험해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네? 네에?”
저것 봐. 역시 효과가 있잖아.
조반니의 저 얼빠진 표정을 보라고! 제국에 대한 반감 따위는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날려 버리는, 이 천재적이고 획기적인 전략을!
휘이잉-
쌀쌀한 늦가을의 바람이 맴도는 헛간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간간이 흐릿한 빛을 깜박이는 마왕의 램프뿐.
[저기, 이성진. 내 생각에는 말이지, 네가 오히려 걔의 첫인상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친 거 같다는…….]
닥쳐! 절대 그럴 리 없어!
* * *
어쨌든 성공적으로(?) 분위기를 환기한 그들은, 본격적으로 ‘자코모 밀로’에 관해 화제를 전환할 수 있었다.
“예상하셨겠지만, 현재 우리가 자코모 밀로의 신병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조반니는 담담하게 시인했다. 다행히 그는 더 이상은 ‘베르트란 & 리’에 대해 문제 삼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유 지하도의 방침상, 우리가 직접 그를 구속해 제국에 넘길 수는 없습니다. 자칫 동지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까요.”
개개인의 가치관과 신념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만큼, 조직원들 다수로부터 조직의 정당성을 의심받는 사태만은 피해야 한다고 조반니는 덧붙였다.
“하지만 당신들 일행을 자코모 밀로가 있는 거점으로 무사히 안내하는 것은 가능할 겁니다.”
“글쎄 어떨까. 자네들의 방침이란 게, 제국을 피해 몸을 의탁한 자들을 최대한 보호하는 거라며? 그런데도 우리를 순순히 그에게 안내한다고?”
“더 많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선택입니다.”
성진에게 그렇게 대꾸한 조반니가,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위선과 모순이란 것은 잘 압니다. 하나 제국의 힘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와 같습니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는 일이 아닙니까?”
“…….”
“결국 우리가 아무리 목숨 바쳐 막으려 해도, 당신들은 자유 지하도를 샅샅이 뒤져 결국 그를 찾아내고 말겠죠.”
그건 그렇지.
사실을 말하자면 내친김에 겸사겸사 자유 지하도를 왕창 뒤집어 볼까 생각하기도 했어.
“그동안 자유 지하도의 그물망은 완전히 마비될 테고, 엄청난 인명 피해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자코모 밀로 역시 시간이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곱게 잡히지는 못할 테고요.”
물론 자유 지하도 역시 만만한 조직은 아니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침입자를 성공적으로 배제할 만한 충분한 무력을 갖추고 있지.
만약 입구를 건드린 이가 한낱 인퀴지터나 엑소시스트였다면, 단칼에 쓱싹하고 증거를 인멸하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가 하필 성황이 애지중지하는 황자임에야……!’
제국을 비난하는 여러 이적 단체들이 지금껏 무사히 대륙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 성황의 자비 외에 그 무엇 때문도 아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가 모종의 이유로, 끝내 자유 지하도를 없애겠다 결심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안식의 교단과 같은 꼴이 되고 말겠지.’
조반니는 한때 황도와 레지나 일대에 성행했던 안식의 교단이, 성황의 손에 얼마나 철저하게 무너져 내렸는지 목도한 바가 있었다.
“우리는 그저 닥쳐올 홍수에 대비해, 작은 둑을 쌓아 물길을 틀려는 것뿐입니다. 설령 집이 한두 채 쓸려 내려간들, 마을이 모두 잠기는 것에 비하면 훨씬 나은 장사죠.”
“그래…….”
성진은 그의 결정이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조반니와는 이제 막 만났을 뿐이지만, 그의 첫인상은 꽤나 이상주의자라는 느낌이 강했으니까.
그가 이끌고 있는 단체만 봐도 그렇다. ‘푸른 공화혁명전선’이라니, 꽤나 공화주의적인 낭만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하지만 세월이 쌓아 올린 관록을 무시할 수 없어, 늙은 이상주의자는 결국 현실과의 타협이란 것을 하게 된 모양이다.
“거래를 하죠. 당신들을 지금이라도 바로 자코모 밀로가 있는 장소로 안내하겠습니다.”
“거래라 하면, 조건은?”
“부디 최대한 거점에 피해를 주지 말고, 동지들에게 해를 가하지도 마십시오. 혹여 근방의 다른 거점들을 알아내려 시도하지도 마시고요. 그것이 조력에 대한 우리의 조건입니다.”
“흠.”
성진은 잠시 조반니를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최대한 자네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노력하지. 조직 내부를 파헤치려 시도하지도 않겠어. 자네들은 언제나처럼 아무 일 없이 자유 지하도를 운영하면 될 거야.”
“양해해 주셔서 참으로-”
“아, 그런데 말이지.”
안도한 듯한 조반니를 향해, 성진이 여상한 얼굴로 덧붙였다.
“이제 와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해. 그대들이 그냥 자코모 밀로를 자유 지하도에서 내쫓는 쪽이 빠르지 않았을까? 어디든 눈에 띄는 곳에 버려 뒀다면 우리가 알아서 그를 추적했을 텐데.”
움찔.
저도 모르게 반응한 조반니가, 어딘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조직의 방침상 어렵습니다. 신념으로 뭉친 조직은 그 신념을 저버리는 순간 빠르게 와해되고 말 테니까요. 우리는 자유를 찾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우리를 자코모 밀로에게 안내하겠다는 시점에서 이미 신념 따위 물 건너간 거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조직원들 몰래 그를 처리하는 쪽이 낫잖아? 보아하니 제대로 된 암살자들도 여럿 데리고 있는 거 같은데.”
“…….”
“굳이 직접 손을 쓸 생각은 없어. 우리야 나중에 그의 시체를 회수해 갈 수만 있다면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니까.”
조반니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진다. 그 반응에 성진은 확신 섞인 얼굴로 입꼬리를 비식 끌어올렸다.
“어디 그것뿐이야? 자네들은 벌써 내게 두 군데의 거점을 들켰어. 그리고 이제 곧 세 번째 거점으로 날 안내할 생각이지. 대체 왜 굳이 그런 피해를 감수하려 하지?”
“…….”
“그러니 도와주는 척 생색내지 말고, 우리 좀 더 솔직해지자고.”
순간 조반니는, 어린 황자의 눈이 기이할 정도로 밝게 빛나는 모습을 보았다. 옅은 회색 눈동자가 마치 햇살을 반사하는 검이라도 된 것처럼, 시리고도 예리한 안광을 머금는 광경을.
“골칫덩어리를 별다른 피해 없이 깔끔하게 도려내 주는 걸로, 우리 또한 그대에게 큰 도움을 주는 거나 마찬가지인 게 아닐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미처 낭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를 향해, 성진이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어,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야. 거래를 하자.”
“…그 조건은?”
“언제 한번 정말로 로건과 자리를 만들어 보는 거지. 나중에 그대에게 다시 연락하려면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
* * *
황자 일행은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작은 짐마차 하나를 타고 떠났다. 빈 나무 상자가 잔뜩 들어 있는 또 다른 ‘특송’ 마차다.
이제 그들은 꼬박 하루를 더 달려, 내일 새벽에는 자코모 밀로가 있는 ‘푸리아노’ 지부에 도착하게 되리라.
다가닥. 다가닥.
멀어지는 마차를 잠시 응시하던 조반니는, 어느새 그의 뒤로 다가와 있는 잠행복의 여인에게 물었다.
“…저 황자를 어떻게 생각하나? 그레타 부장.”
조반니가 스스로를 푸른 공화혁명전선의 수장이라 밝힌 것은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일단은 어린 소년의 허를 찔러보려는 심산이 컸지. 오랜 시간 가슴에 묻어 두었던 소중한 이름을 들춰낸 장본인이기에, 잠시 욱하는 감정이 든 것 또한 사실이고.
하지만 황자와의 짧은 대화 끝에 그에게 남은 것은, 어딘가 묘한 이질감과 의아함뿐.
“자네는 그 황자의 이상한 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나?”
그의 물음에 그레타라 불린 여인은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했다
“확실히 나이에 비해 묘하게 침착해 보이더군요. 제멋대로에다 까탈스러운 성격이라 들어왔는데, 털털하게 대화를 끌어가는 것이 조금 의외였습니다.”
“그런가?”
“네. 베… 조반니 님과도 막힘없이 이야기가 잘 통하는 듯 보이더군요.”
“막힘없이… 역시 그렇게 보였던가.”
조반니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게 아니네, 그레타. 모레스 황자는 어딘가 이상한 소년이었다.”
“…….”
그레타가 의문을 담고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조반니는 이미 자신만의 생각에 침잠하고 있었다.
그래. 저 어린 황자와의 대담은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그는 응당 의문이 생겨야 할 부분에서, 내게 아무것도 물으려 하지 않았지.’
무려 자신이 후원하고 있는 이적 단체가, 알고 보니 북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하면 이런저런 질문을 통해 조금 더 상황을 자세히 파고들 법도 한데.
하지만 황자는 조직에 관해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듯 보였지.
자코모 밀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을 느낀 것이 분명함에도, 딱히 정보를 더 얻으려 들지 않는 것이다. 대체 무슨 배짱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대화를 통해 나를 탐색하려 들지도 않았다. 주도면밀해 보이진 않았는데, 그럼에도 어설프게 정보를 흘리거나 내게 쉽게 휘둘리지 않았어.’
아무리 그와의 대화를 반추해 봐도, 조반니는 도무지 그가 사고하는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를테면 황자와의 대화에는 제대로 된 맥락이 결여된 부분이 많았다. 대충 지레짐작하며 던져보는 건지, 아니면 그저 감이 좋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대화에서 겉도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거기에 장단을 맞추다 보면, 또 어느샌가 이야기의 핵심에 성큼 다가가 있기도 했지.
이를테면, 이런 느낌이었다. 마치 결정된 결과를 향해, 그저 대화를 대충 끌고 가는 듯한…….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있는가. 가엘의 문제로 내가 너무 과민했던 건지도 모른다.’
조반니는 씁쓸하게 웃으며, 이제는 볼 수 없는 그리운 얼굴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그는 언제나 자신만만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었고, 언변은 언제나 유창했다. 어디에 가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강한 힘이 있었지.
자신이 이상적인 공화정에 대해 치기 어린 설파를 늘어놓을 때마다, 아카데미의 모두가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곤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가엘은 다른 이들과 달랐다.’
어린 마음에 자랑하듯 현란한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면,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친구는 늘 이렇게 대꾸하곤 했다.
-저는 공화정의 가치가 이 모든 희생들을 감수할 만큼 값진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를 확신하는 왕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검이 되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
당시에는 남들처럼 열렬한 반응을 돌려주지 않는 친구에게 조금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아마도 어렸던 그가, 친우의 말이 가진 무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그리고 결국, 그의 친우는 검이 되겠노라는 약속을 지켜냈다.
자신이 옛이야기에 나오는 마법사처럼 사람들을 홀려 마침내 파국을 향해 달려들었을 때, 친우는 그 자랑스러운 검으로 수천수만의 피를 흩뿌려 의지를 관철해 냈다.
감수할 만한지 확신할 수 없다던 희생을 홀로 떠안고서 묵묵히 피의 길을 걸어갔지. 심지어는 모두를 내전으로 밀어 넣은 당사자인 조반니 스스로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한 길을.
일말의 의문도 없이, 그리고 조금의 원망도 없이.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가엘. 저 제국의 황자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자네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더군. 증오스러운 원수를 들먹이게 되어 미안하네만, 남들보다 걸출한 이들은 어릴 때부터 뭔가 다르기는 다른 모양이네.’
어느새 마차가 사라지고 없는 황무지의 지평선을, 조반니는 쓸쓸한 표정으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 *
덜컹덜컹.
짐마차의 거친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성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기분 탓인가, 아까부터 석연찮은 예감에 마음이 썩 편치 않았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으십니까, 저하?”
아니나 다를까, 아까부터 성진을 유심히 살피던 마사인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응? 어어, 아냐. 왜?”
“그냥… 어쩐지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으셔서요.”
그게 그렇게 표가 났나?
성진은 멋쩍게 볼을 긁적거렸다.
“어, 별일은 아니고. 아무래도 내가 조반니에게, 로건에 대해 충분히 얘기를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자 의외의 말을 들은 듯, 오웬과 마사인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로건? 갑자기?”
“…로건 저하요?”
“그래.”
성진은 마왕의 램프를 끌어안으며 자세를 편히 고쳐 앉았다.
“나중에 로건에게 조반니를 소개해 주려고 하거든. 어쨌거나 둘이 잘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리고 조반니는, 언젠가 로건과 오르토나 사람들을 잇는 가교가 되어 줘야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가 로건에 대한 인식을 썩 완벽하게 바꿔주지 못한 거 같아. 그게 계속 마음에 걸린다고.”
한데 그 말을 들은 오웬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상한 고민을 하네? 그거야 로건이 알아서 할 일 아냐?”
“…응?”
“그러니까 저 조반니라는 사람과 어떻게 지낼지는 순전히 로건에게 달려 있는 문제잖아? 그걸 왜 뉴… 모레스 네가 미리 준비하려 드는 거야?”
어? 그런가?
성진은 잠시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아아, 그래. 정말 그렇네.”
오웬의 말이 옳았다. 그런 사소한 것까지 자신이 단번에 조율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아무래도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이상하게 최근 들어 자주 마음이 불안했다.
처음엔 괜찮다는 확신을 가지고 로건과 시슬레를 배웅했지만, 뒤늦게 불안감에 사로잡혀 막스를 다시 키프로스로 보낸 것처럼.
‘모든 것들이 처음의 계획과는 다르게, 미세하게, 조금씩, 점점 더 삐걱거린다는 느낌이 든다고.’
어쩐지 그런 근거 없는 상념을 되뇌며, 성진은 먼 남서쪽 하늘을 향해 걱정스레 시선을 주었다.
Chapter 125: Chapter 425
Chapter Text
425. 거래 (3)
“으으…….”
바르토자는 가물거리는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신이 조금 맑아지자, 차라리 기절하고 싶을 정도의 격통이 인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면 그때는 정말로 죽은 목숨이란 걸 그는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그래. 절벽에서 떨어졌었지…….’
주변이 어둑어둑하기에 일순 밤인가 싶었다. 하지만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높은 침엽수들 사이로 까마득한 절벽과 푸른 하늘이 보인다.
‘운이 좋았다.’
아무리 부족의 비전으로 몸을 보호했다지만, 대체 어떻게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지 신기할 정도의 높이.
주위를 둘러보니 엉망으로 박살 난 마차의 잔해와, 그 아래 참혹하게 짓이겨진 말들의 사체가 보인다. 자연히 함께 떨어진 여자에게로 생각이 미쳤다.
‘…그 무서운 여자는 어찌 됐지? 죽은 건가?’
사위가 고요한 것을 보니 그럴지도 모른다. 꼴은 말이 아니게 되었지만, 본의 아니게 매서운 추격에서 벗어난 모양.
“끄으…….”
바르토자는 사지를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보려 했다. 하지만 이내 해일처럼 밀려드는 새로운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도로 드러누웠다.
“으아아!”
온몸이 아프지 않은 구석이 없어 미처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왼팔이 완전히 부러져 꺾여 있는 게 아닌가. 다행히 절단은 면한 듯했지만, 피투성이가 된 두 다리도 분명 성한 상태는 아니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긴 하였으나, 이 또한 바람 앞의 잔불인 셈이다.
‘…차라리 혼자 도망칠 것을!’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푸르마 부족의 힘의 상징. 부족장의 무기. 그것을 함께 빼내려는 욕심만 아니었어도!
낙심하며 눈을 굴려 보니, 마침 문제의 워해머는 그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었다.
추락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무기는 멀쩡해 보였는데, 그것을 올려 두었던 상자는 처참히 박살 나 옷자락 같은 내용물 일부가 흘러나와 있었다. 바르토자가 정성스레 동여매어 둔 매듭 역시 완전히 끊어진 채고.
‘…응?’
한데 그때 바르토자의 눈에 뭔가 이상한 것들이 들어왔다.
뭐지? 왜 상자에 저렇게 피가 묻어 있지? 그리고 붉게 물든 옷자락 아래로 비쭉 튀어나와 있는 것은…….
‘…손?’
바르토자는 멍청하게 눈을 끔벅거렸다.
아니, 그럴 리가? 마차에는 그 무서운 여자뿐, 분명 다른 사람의 기척은 없었는데.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쳐다봐도, 저 모양은 분명 창백하게 질린 사람의 손이다!
‘설마 제국인들은 죽은 이에게 제를 올리지 않는 건가? 경건한 마음으로 고인을 기리기는커녕 저렇게 상자에 넣어 짐짝처럼 아무렇게나 들고 다닌단 말인가?’
이 무슨 예를 모르는 끔찍한 자들이란 말인가!
한데 정말 무서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영락없는 시체라고 생각했던 손이, 갑자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꿈틀.
‘……!’
그리고 곧이어 바르토자의 눈앞에서, 꿈에 다시 볼까 두려운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꿈틀꿈틀, 비틀비틀.
삐그덕, 삐걱. 우둑, 우두두두둑-!
“히이이이익!”
* * *
스스스스…….
차가운 바람 속에서 나무들이 음산한 마찰음을 낸다.
그 적막한 협곡 아래, 처참한 추락 사고의 현장.
그곳에 사람, 아니 시체로부터 되살아난 괴물이 피투성이 채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눈이 시리도록 환한 빛무리에 휩싸인 채.
화아아아…….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괴물을 감싸고 있던 빛이 천천히 스러진다.
덜컥.
어긋난 목뼈를 바로 맞추는 것을 끝으로, 훤칠하게 키가 큰 신형이 바르토자의 앞에 우뚝 섰다.
치렁거리는 사제복에 감싸여 있었지만, 바르토자는 그 괴물이 제대로 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피에 젖은 긴 옷자락을 펄럭이는 꼴이, 옛 구전에 나오는 저주받은 샤먼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어쨌거나 저 불길한 괴물은 절대 이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되는 끔찍한 무언가였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히이이…….”
바르토자가 극도의 공포심에 사로잡혀 바르작거리자-
삐그덕.
괴물의 고개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두터운 후드에 덮여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괴물의 시선은 바르토자를 향해 똑바로 와 닿는 것처럼 느껴졌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한기. 이는 단지 최근 기온이 지나치게 내려간 탓만은 아니리라.
“으으… 흐으으… 사, 살려…….”
바르토자는 벌벌 떨면서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한데 놀라운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그 무시무시한 괴물이, 갑자기 선명한 바르샤어로 말을 걸어온 것이다.
“괜한 소란 부리지 말고 그 입 다물거라. 몹시도 시끄럽구나.”
“으허어어억?!”
“거기 얌전히 누워 있으면 조금 있다 치료해 주마.”
“힉? 히익?”
그러더니 괴물은 그대로 바르토자로부터 몸을 돌려,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어딘가로 향했다.
마차의 전해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그리고 또 다른 희미한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으으…….”
함께 추락한 여자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겉으로는 큰 손상이 없는 듯한데, 상체와 하반신의 각도가 이상하게 비틀린 걸 보니 척추를 크게 다친 듯했다. 바르토자와 달리 운이 없었던 게다.
간간이 밭은 숨을 내뱉는 꼴은 이미 살아나기는 완전히 그른 듯-
파아앗-!
보였는데.
아까의 괴이한 빛이 재차 퍼지는가 싶더니 여자가 갑자기 번쩍, 눈을 떴다!
“…아앗?”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수상한 괴물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당신은 누구세요?”
“…지나가던 치료 사제다. 제법 큰 사고가 난 것 같기에 살피러 들렀느니라.”
만일 바르토자가 제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그 대답에 반박할 말이 무척이나 많았을 것이다.
거짓말이다! 놈은 처음부터 마차 안에 숨어 있었어! 애초에 이런 외진 숲속을 맨몸으로 지나가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자, 에디스는 평소에도 그다지 생각이란 걸 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고… 아, 그렇군요! 저 절벽에서 떨어졌죠.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는 거 아닌가 했는데, 운이 좋았네요!”
에디스는 부상 따위 온데간데없이, 활기찬 태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제님! 아, 혹시 성함이……?”
“…바트라고 한다.”
“네. 바트 사제님.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어요!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그러다가 에디스는, 사제의 치렁치렁한 사제복이 핏물로 흥건한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앗, 한데 사제님. 혹시 사제님도 다치셨나요? 이 핏자국들은…….”
“그대를 치료하다 보니 이리되었다. 난 괜찮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아, 네. 그렇군요! 저 때문에 멋진 사제복이 엉망이 되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역시나 바르토자가 이들의 대화를 알아들었다면, 이 대목에서 또 한 번 기겁했으리라.
이 멍청한 여자가! 저 흥건한 피가, 단지 옆에서 치료한다고 묻을 수 있는 양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애초에 네가 흘린 피는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나저나 큰일 났네요. 마차는 완전히 망가져 버렸고, 말들도 모조리 죽어 버렸으니.”
에디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게다가 이곳이 어딘지 전혀 모르겠어요. 일단은 레지나로 돌아가야 할 텐데…….”
그러자 수수께끼의 사제가 점잖게 대꾸했다.
“레지나로 가는 건 무리일 게다. 절벽 위로 바로 되돌아갈 수 있는 지름길은 없으니까.”
“그럼…….”
“대신 협곡을 우회해서 며칠만 걸으면 오르토나 중부 영지들이 나온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 안내해 주마.”
“아, 정말요? 이제 어찌해야 하나 싶었는데… 너무 감사합니다, 바트 사제님! 그럼 짐을 꾸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에디스는 활기찬 걸음으로 마차의 잔해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실려 있던 물건 대부분은 박살 났지만, 그래도 챙길 수 있는 것들은 챙겨 둬야 했으니까.
“저하의 옷 가방은 일단 놔둘까. 귀한 장신구들만 좀 챙겨야겠다. 아, 빨강이 님의 접시 컬렉션! 이건 완전히 박살 나서 못 쓰겠는데…….”
그러는 사이, 바트 사제는 마침내 고개를 돌려 비척비척 바르토자를 향해 다가왔다.
“으…….”
단기간에 너무나 많은 정신적 고통을 겪은 불쌍한 바르샤인이 겁에 질려 소리쳤다.
“다, 다가오지 마시오! 당신은 대체 뭐요!”
그러자 괴물로부터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제국의 성직자다. 그저 흔히 있는 보통의 치유 사제지.”
“보통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부, 분명 당신 목이 부러진 걸 봤는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 움직이는……!”
“이 또한 주신의 은총이니라. 크게 감읍하였다면 지금이라도 새 신앙을 갖겠느냐? 이 시끄러운 이교도야.”
보통의 치유 사제?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바르토자는 생각했다.
그도 제국과의 전쟁 중 몇 차례 사제라는 족속들을 겪은 적이 있었다. 개중에는 간혹 놀라운 치유 능력을 보이는 자도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목이 부러진 인간을 되살려내는 광경 따위……!
척.
바로 그때, 사제라고 주장하는 괴물의 손이 가볍게 그의 어깨에 닿았다.
“왜 이러는 거요? 제발 날 놔 주시오!”
바르토자의 비명 같은 물음에, 괴물은 의아한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이대로 죽고 싶은 게냐?”
“뭐…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거요?”
“딱히 네게 바라는 건 없느니라. 그저 나와 저 시녀를 도와, 인근의 마을로 향하기만 하면 되는 것을.”
“그, 그러기만 하면… 그럼 나를 살려주는 거요? 고대의 악령들처럼, 거래의 대가로 내 영혼을 요구한다든지 하는 것은…….”
“…거래?”
짧게 반문한 괴물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또한 일종의 거래라고 봐도 좋겠구나. 내게 큰 불편을 끼친 만큼, 이후로는 내 수족이 되어 성심성의껏 봉사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화아악-!
끔찍하도록 환한 빛이 바르토자의 온몸을 감싸 돌았다.
* * *
드드드, 드드드득.
무거운 둔기가 땅에 끌리는 소리가 귓가를 쉴 새 없이 어지럽힌다.
“저 물줄기를 따라 쭉 내려가거라. 저녁까지는 잠시도 쉬지 않는 게 좋겠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에서는 끔찍한 괴물이 거부할 수 없는 지시를 내린다. 바르토자는 정말이지, 이게 다 꿈이었으면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르토자는 지금 막 도축한 말고기와 함께 피투성이의 괴물을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사람이라기엔 지나치게 가볍다. 역시나 이 괴물은 사악한 악령인 게야!’
게다가 이 괴물에게서는 사람이라면 응당 느껴져야 할 활기-제국어로는 ‘오러 활성’이라 부르는 것이다-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바르토자는 밀려드는 공포감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아, 바르토자야, 바르토자야! 그저 얌전히 웅크리고 부족 내에서 세력이나 기를 것을! 네 어리석은 선택이 결국 스스로를 죽음의 길로 내몰았구나!’
문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제국 여자였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 맹한 여자는 천진한 얼굴로 괴물과 거리낌없이 재잘거릴 뿐이다.
“바트 사제님. 그런데 사제님은 어떻게 그렇게 바르샤어를 잘하세요?”
“한때 남부 포교단에 몸을 담았던 적이 있느니라. 그때 배워 뒀다.”
“그럼 전선에도 계셨겠군요? 정말 대단하세요!”
마음 같아서는 저 멍청한 여자에게 이 버거운 짐을 당장이라도 넘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저 여자에게는 이미 다른 중요한 짐이 있었다. 바로 바르토자가 그토록 힘겨워했던 워해머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질질 끌며 걷고 있는 게다.
드드드드득!
보면 볼수록 가공할 힘이었다.
“…그래, 너희들이 왔구나.”
하지만 이 괴물을 지고 가는 동안 가장 두려웠던 점을 꼽자면, 역시 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중얼거림을 들 수 있겠다.
괴물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며, 바르토자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연신 쏟아내는 중이었다.
“서두르지 말렴, 헤르나. 보는 바와 같이 나는 무사하단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가데스. 다치거나 하지 않았으니, 그만 레지나에 연락해 모두를 안심시켜 주거라.”
바르토자는 이제 점점 두려워졌다.
이 괴물이 지금 또 다른 사악한 악령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설마 나를 저주해서 끝내 죽게 만들려고?
바로 그때였다.
움찔.
괴물이 뭔가에 놀란 듯, 갑자기 몸을 경직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모레스.”
그러더니 놈은, 한동안 조용히 침묵하며 바르토자를 더더욱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드문 일이구나. 네가 이렇게 여기까지…….”
잠시 후, 괴물은 마침내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무 화내지 말렴. 정말 미안하구나.”
“그래. 내 잘못했다. 그저 아무런 대비 없이 널 보낼 수가 없었…….”
“아니, 그런 게 아니다. 네가 샤론 경을 떼어 놓았다고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건 단지…….”
그러다 또다시 길고 긴 침묵이 흐른다. 마치 다른 악령에게 꾸지람을 듣고 있기라도 하듯 괴물이 점점 침울해지는 기색이 바르토자의 등을 통해 생생히 전해졌다.
‘이 무서운 괴물을 침묵시키다니, 대체 얼마나 무서운 악령이 찾아온 것인가!’
바르토자는 이제 이를 딱딱 떨 정도로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아아, 두렵다. 너무나도 두려워!
“…그래.”
그리고 그 침묵의 끝에, 괴물은 마치 웃는 것처럼 가볍게 몸을 진동시켰다.
“괜찮다.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너를 찾아갈 수 있단다.”
순간 놀란 바르토자가 멍하니 귀를 기울일 정도로, 사악한 괴물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부드러운 웃음소리였다.
Chapter 126: Chapter 426
Chapter Text
426. 거래 (4)
“…아버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오웬이 곁에 앉은 소년을 돌아보았다.
모레스는 아까부터 램프를 끌어안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뭔가 꿈이라도 꾸는 듯 미약하게 눈썹을 찌푸려 댔다.
‘잠자리가 편치 않나?’
오웬이 발치에 굴러다니는 짐짝들을 옆으로 치워주자, 소년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렇게 감쪽같이… 인식… 피하면…….”
…깨워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니, 그의 생각을 짐작한 듯 마사인이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그냥 잠꼬대하시는 겁니다.”
“잠꼬대요? 혹시 악몽이라도 꾸는 거 아닙니까?”
“그건 아닐 겁니다. 매번 그러시니까요. 단지 낮잠을 주무시면서 잠꼬대하시는 건 처음 보는군요. 애초에 낮잠을 주무시는 일도 잘 없습니다만.”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구나.
조금 안심한 오웬이 낡은 망토를 벗어 어깨 위로 둘러주자, 모레스가 재차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작작 좀… 이 양반아…….”
* * *
에디스와 바르토자가 계곡을 따라 하염없이 걷는 동안, 어느새 해가 져 어스름한 저녁이 찾아왔다.
흠흠흠, 흠흠~
신성력 덕에 쌩쌩해진 에디스가 이따금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하지만 바르토자의 경우는 그녀와 사정이 좀 달랐는데, 에디스를 애절한 눈으로 힐끔거리며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중이었다.
‘저기… 여자, 큰일 났소! 아까부터 이치가 숨을 쉬지 않소!’
하나 제국어를 모르니 말을 전할 방법이 없다.
바르토자는 이를 딱딱 맞부딪히며, 짊어지고 있는 괴물을 조심스레 더듬어 보았다. 안 그래도 활기가 아예 없어 무서웠는데, 이제는 그에 더해 맥박도 호흡도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역시 이자는 저세상에서 올라온 악령이구나!’
그럼에도 바르토자가 걸음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괴물이 마지막으로 당부한 한마디 때문이었다.
-알현이 있어 잠시 다녀오마. 쉬지 말고 물길을 따라 쭉 걸어라. 해가 지면 너희들을 마중 나온 이와 만나게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바르토자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목이 부러져도 되살아나는 괴물 아닌가. 세상 끝까지 날 쫓아오겠지…….’
다행히도 바르토자의 고뇌는 길지 않았다. 완전히 해가 지기 전, 그들은 새 포장이 덮인 짐마차 하나와 그 앞에서 타고 있는 작은 모닥불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아! 근처에 일행이 있을 거라더니, 바트 사제님의 말씀이 맞았어요!”
에디스가 반색하며 모닥불을 향해 다가갔다.
불을 지키고 있던 자는 어딘가 피로해 보이는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농부들이나 입을 법한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날카로운 눈빛이나 입가에 길게 아로새겨진 흉터를 보건대 평화롭게 농사나 짓는 인간 같지는 않았다.
그는 에디스 일행을-정확히는 바르토자가 들쳐 업은 피투성이의 사제를-발견하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페하?!”
그러곤 앗 하는 사이에 바르토자에게로 다가와, 어느새 그로부터 사제의 몸을 빼앗다시피 받아들고 있었다.
“대체 이 피가 다……!”
“저기, 바트 사제님께서는 괜찮다고 하셨어요. 저희를 치료하시려다 피가 묻었다고…….”
에디스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남자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
순간 바르토자는 남자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비록 제국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일단 이쪽으로 오십시오.”
대충 사제를 눈으로 훑어 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남자는, 그제야 진정한 기색으로 그들을 짐마차로 데려갔다.
“사제님께 들으셨겠지만, 이제부터는 제가 여러분을 인근 마을까지 안내할 겁니다.”
마치 그들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듯한 태도.
보통은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마땅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초면인 데다, 정작 연결 고리가 되어주어야 할 사제는 깊은 잠에 빠져 침묵하는 중이었으니.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 중 하나는 별생각이 없었고, 하나는 아예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일단 가져온 물건들은 이 마차에 실으세요”
“아? 네.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이건 잠시 여기에 두겠습니다.”
쿠웅!
에디스가 워해머를 거칠게 내려놓자, 이번에도 남자는 그녀를 향해 묘한 시선을 던졌다.
“한데 폐… 바트 사제님께서 뭐라고 하지 않으시던가요? 안 그래도 손이 모자라는데, 대체 그 쓸데없는 짐은 왜 가져 온 겁니까?”
“이건 쓸데없지 않아요. 중요한 물건이거든요.”
“당신은 제국인 아닙니까? 하지만 그 무기는 아무리 봐도 바르샤의 물건처럼 보입니다만.”
물론 이 워해머는 모레스 황자의 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저하께서는, 제가 피치 못한 사정으로 저하의 물건을 한둘 잃어버린들 크게 신경 쓰지 않으실 거예요. 하지만 이 무기는 저하의 것이 아닌, 오웬 황자님의 물건이죠.”
그러니 모레스 황자는 다른 물건들보다 이걸 우선적으로 챙기길 바랄 것이다, 에디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
물론 일반적인 사용인의 태도는 아닐 것이다.
남자는 잠시 생각했다. 이 여자는 생각이 깊은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고.
“그런데, 당신은 누구신가요?”
“…21호라고 불러 주십시오.”
한참 늦은 질문에 괴상한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짐마차 한쪽에 마련된 침상에 바트 사제의 몸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사제님은 주무시는 건가요? 왜 계속 안 일어나시죠?”
“이곳에 또다시 임하시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 내일 오전 정무회의를 끝내야 다시 오시지 않겠습니까.”
“네?”
알아듣지 못하는 시녀와, 아예 제국어를 모르는 바르샤인. 21호는 어쩐지 두통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일단 당신들은 냇가에서 좀 씻으십시오.”
아무리 북부가 무법 지대가 되었다 한들, 피투성이 상태로 계속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21호는 그들에게 대충 갈아입을 옷가지를 내밀었다. 보통의 평민들이 입을 만한 허름한 옷들이었다.
“다 끝나면 모닥불에 몸을 말리고 계십시오. 폐… 사제님을 봐 드리고 나면, 간단히 요기할 거리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세 사람은 모닥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불 위에는 어느새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작은 스튜 냄비가 걸려 있었는데,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가 퍼지자 두려움에 질려 있던 바르토자도 눈에 띄게 안정을 되찾았다.
“아, 맞다! 이것도 상하기 전에 얼른 구워 먹죠.”
식사를 하던 에디스가 뒤늦게 생각난 듯 수상한 꾸러미 하나를 내민다. 꾸러미에 피가 흥건히 배어 있는 것을 확인한 21호가 움찔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건 뭡니까?”
“말고기예요.”
말?
일순 멍해졌던 21호는, 겨우 마차 추락 사고와 말고기의 상관관계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말들은 황실의 재산이 아닙니까? 그런 걸 당신 마음대로 도축해도 되는 건지…….”
“귀한 말들이니 고기라도 챙겨야죠. 외딴 장소에 떨어졌는데 언제 식량을 또 구할 줄 알고요. 그대로 뒀으면 어차피 산짐승들이 뜯어 먹었을 거예요.”
그건 그렇지만.
잠시 맹한 에디스의 얼굴을 살피던 21호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이 여자는 생각이 없는 쪽인 것 같다.
21호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에디스는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말고기를 불 위에 올렸다. 곧 모닥불 주위로 고기 익어가는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어디에도 수상한 점은 없다.’
요리하는 에디스로부터 묘하게 활발한 오러 활성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뿐. 그녀는 폐하께서 이미 신원을 보증해 주신 자가 아닌가.
21호는 별다른 의심 없이 그녀가 내민 고기를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흠칫.
미뢰가 맛을 감지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고기를 바닥에 뱉어냈다.
“앗, 왜 그러세요?”
“…왜 이리 씁니까? 대체 도축하면서 고기에 무슨 짓을 한 거죠?”
“쓰다고요?”
그 말에 에디스가 조심스레 고기 한 점을 베어 물더니 와락 인상을 쓴다.
“흠, 실망인데? 혈통 좋은 군마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근육이 많아서 고기가 질긴가 봐요”
“아니, 이건 질긴 수준이 아니라, 마치 쓸개즙이라도 묻은 듯 이상한…….”
“담낭은 안 터뜨렸어요! 아마 별로 맛이 없는 품종인가 보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입니다만, 전 당신들을 돕기 위해 온 사람입니다. 설마 독을 탄 것은…….”
“아니, 독이라니요! 절 뭘로 보고 그런 말을!”
잠시 옥신각신하긴 했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저 가벼운 해프닝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끔찍하게 쓴 고기를 뱉어낸 바르샤인은, 돌아가는 상황을 몰라 또다시 엄청난 불안에 떨어야 했다.
‘사악한 제국인들! 결국은 음식을 주는 척 조용히 나를 독살하려는 거구나!’
그가 이대로 뜬눈으로 밤을 새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어느 누군가가 그 소소한 괴롭힘에 흡족해 하리라는 것도.
* * *
꼬르륵.
성진은 심각한 허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
“배고파…….”
생각해 보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단 말이지.
그러자 마사인이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작은 육포 한 조각을 건넸다. 다샤로부터 건네받은 비상식량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저하. 주무시는 동안, 마부가 한 번 더 바뀌었습니다.”
성진이 육포를 받아들자, 그는 이어서 작은 수통을 내민다.
“말을 걸어봤지만 아예 대답하지 않더군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마차를 멈출 생각도 없어 보입니다.”
“뭐, 그렇겠지. 그게 자유 지하도의 배송 방식이니까.”
성진은 물 한 모금을 들이켠 후, 육포의 반을 갈라 그중 하나를 마왕의 램프에 던져 주었다.
화르륵!
붉은 불꽃이 날름날름 마지막 비상식량을 먹어 치운다.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오웬이 투덜거렸다.
“그걸 또 아깝게 요정에게 나눠주고 있냐. 네 또래는 잘 먹어야 잘 큰다고.”
“시끄러워, 멍청아. 그나저나 넌 뭐 먹을 거 가진 거 없어?”
“아니, 내가 여기까지 올 줄 어떻게 알고 미리 그런 걸 준비했겠……?”
퉁명스럽게 대꾸하던 오웬이, 갑자기 뭔가를 떠올렸는지 눈이 동그래진다.
“어라…? 잠깐만 기다려 봐. 간단한 먹거리라면, 왠지 나한테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
그러더니 오웬은, 목에 걸려 있는 선홍색 펜던트를 꼬옥 거머쥐며 눈을 감았다.
“상태창 씨.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제발 부탁합니다!”
모두가 그의 기행을 지켜보는데-
도로롱.
신기하게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웬이 그대로 고개를 툭 떨구더니 깊이 곯아떨어지는 게 아닌가!
“……?”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녀석이 순식간에 의식을 잃은 듯 보이자, 마사인이 조금 당황하며 성진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상태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요? 오러 활성이 괜찮은 걸 보면 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 텐데요.”
물론 성진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녀석, 잠시 판게아 클로니클에 다녀 올 생각이구나.
‘그런데 성격 나쁜 상태창이 녀석을 쉽게 돌려보내 줄까?’
다행히 상태창은 심술을 부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웬이 무사히 눈을 떴으니까. 그러고는 무척 밝은 얼굴이 되어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자자, 우선 이거라도 먹자고!”
그가 내민 손 위에는 성진에게는 이미 익숙한 어묵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게 뭡니까?”
생전 처음 보는 음식에 마사인이 잔뜩 경계하며 묻자, 오웬이 싱글벙글 대답했다.
“네. 먹을거립니다, 형님.”
저 어묵은 성진도 예전에 얻은 적이 있었다. 그린 존에서 식료품점 일일 퀘스트를 하면 주는 거였지.
가격은 저렴하지만 난이도가 쉽고 맛도 나쁘지 않아, 침묵 빌런들도 간혹 간식 삼아 퀘스트를 수행하곤 했었다.
물론 그러한 배경을 모르는 마사인에게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음식이었겠지만.
“먹을거리라니, 보기에도 썩 제대로 된 음식처럼 보이지는… 저하?!”
그는 성진이 아무 말 없이 어묵을 받아 드는 것을 보고는 기함했다.
“먹을래. 배고파.”
“그, 그럼! 외람되오나 제가 먼저 먹어보겠습니다!”
마사인은 눈을 질끈 감고서 어묵 한 조각을 삼켰다. 그리고는 이내 눈이 휘둥그레져서 성진을 돌아본다.
거봐. 이거 맛있다니까.
잊지 않고 램프 안에도 하나 넣어주자, 마왕 역시 만족스러운 듯 어묵을 살라 먹는다.
[이건 뭐야? 뭔가 새로운 맛이네?]
그렇게 잠시 급한 허기를 채우는 동안에도, 마차는 덜컹덜컹 흔들리며 쉬지 않고 달렸다.
“근데 오웬. 너, 빵 가진 건 없어?”
“응? 빵?”
성진의 뜬금없는 요구에 잠시 어리둥절하던 오웬은, 곧 뭔가를 떠올렸는지 환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 식료품 가게 옆에 있는 교회 아르바이트를 잊으면 안 돼. 거기 빵도 꽤 먹을 만했다고.
“잠깐만 기다려!”
오웬은 또다시 이정표를 쥐고는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고는 제법 오랜 시간이 흘러 의기양양한 얼굴로 눈을 뜬다.
“자, 여기 빵이랑, 어묵도 조금 더 가져왔다! 뉴… 모레스, 너 이거 좋아하지?”
성진은 냉큼 그 음식들을 받아 들었다. 오직 마사인만이 눈을 비비며 황당한 얼굴로 오웬과 음식들을 번갈아 바라볼 뿐.
“아니, 저하. 대체 이것들이 다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괜찮아, 마사인 경. 일단 먹고 보자고.”
냠냠.
“근데 오웬, 마실 만한 건…….”
“응? 아! 그러고 보니 잡화점 저녁 퀘스트가…! 잠깐만 기다려 봐!”
그렇게 밤새 오웬이 조달해 온 음식을 이것저것 주워 먹는 사이-
성진 일행은 ‘특송’의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다. 바로 오르토나에서 두 번째로 큰 난민촌, 푸리아노였다.
Chapter 127: Chapter 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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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거래 (5)
푸리아노가 거대한 난민촌이 된 것은 필연이었다.
오르토나 중부에 자리 잡은 이 지역은, 서쪽 산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해수들의 출몰이 드물었다. 주변은 메마른 황무지뿐이라 인근의 영주들에게도 썩 개간하기 매력적인 땅은 아니었고.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주요한 요인을 꼽자면, 아마 푸리아노가 내전으로 인해 ‘적당히’ 파괴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영주 일가가 아예 재건을 포기하고 도주했을 정도로, 푸리아노 지상에는 멀쩡하게 남아 있는 기간 시설이 없었다.
반면 지하에는 아직 완전히 망가지지 않은 하수도 시설이 남아 있다. 그 덕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어 몇 년이나 오염 물질을 배출해도, 아직까지 큰 질병이 돌지 않고 견딜 만한 수준의 악취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푸리아노의 넓은 하수도는 적절한 은신처가 되기도 하오. 범죄자들 중에서도 가장 뒤가 구린 자들은, 모조리 이곳 지하 하수도에 숨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성진 일행을 ‘특송’으로 넘겨받은 남자가 길을 안내하며 말했다.
그는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였는데, 위계질서가 애매한 자유 지하도에서 나름의 중간 관리자쯤 되는 모양이었다.
“이곳 지하에 숨어든 자들은 일반적인 난민이나 잡범들이 아니라오. 인퀴지터들의 눈을 반드시 피해야 하는 중범죄자들이지. 조반니 님께서 그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오.”
설명을 이어가던 안내인은, 부서진 벽과 벽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낡은 천막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곤 천막을 툭툭 두드리며 신경질을 냈다.
“이봐! 내 몇 번이나 말하나! 자꾸 통로 사이에 천막을 치지 말란 말이네! 사람 다니는 길을 가로막으면 어쩌란 말인가!”
그러자 천막에서 튀어나온 난민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천막을 거둬갔다.
투두두둑.
곧 장애물이 사라지고, 좁고 지저분한 골목길이 드러난다.
“이쪽이 지름길이오.”
그를 따라 구불구불한 골목을 지나치자 눈앞에 너른 광장이 나타났다. 지저분한 천막들이 빼곡히 들어찬 어수선한 장소다.
“내가 어디까지 했더라? 아, 그래. 숨어든 이들 중 일부는 연금술사나 마술사 같은 이단이고, 그 외 나머지는 죄다 사악한 악마 숭배자들이라고 볼 수 있지. 그들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어이! 너무 두리번거리지 마시오. 사람들이 자칫 시비를 건다고 오해할 수 있소.”
갑자기 주의를 받은 오웬이 찔끔 놀라며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그때까지 잠자코 뒤를 따르던 마사인이 처음으로 안내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한데 우리가 시선을 피한들 의미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이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만.”
그의 지적대로, 성진 일행은 난민촌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중이었다.
풀과 진흙을 빗어 말리던 사람도, 더러운 분수대 근처에서 빨랫감을 두드리던 사람도. 그 모두가 성진 일행을 발견하는 순간 하던 일을 멈추고는 뚫어져라 시선을 고정한다.
“어째 분위기가 좀…….”
오웬이 질린 얼굴로 소곤거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검댕이 잔뜩 묻은 비쩍 마른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안광만을 번쩍이는 모습은 일견 기괴하기까지 했으니까.
안내인은 슬쩍 주위를 둘러본 후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그야 댁들이 보통의 난민들과 너무 다르니까 그렇지. 아무리 먼지를 뒤집어쓴들 지나치게 때깔들이 좋단 말이오! 자자, 괜한 위화감 조성하지 말고 어서 서두르시오!”
그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을 빠르게 지나쳐, 마침내 어느 냄새 나는 하수도 입구로 성진 일행을 데려갔다.
“자, 도착했소. 당신들이 찾는 자는 아마 이 안에 있을 거요.”
“잠깐. 우리끼리 직접 저곳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마사인이 당황하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행을 안내한 남자는 어느새 코를 틀어막으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서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조반니 님과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소? 우리는 거점으로 피신해 온 이들에게 직접 손을 쓰지 않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들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성진은 말없이 하수구를 바라보았다.
“흠.”
뚝 뚝 뚝.
오수가 방울져 떨어지는 지저분한 입구에는, 식물인지 뭔가의 찌꺼기인지 구별할 수 없는 줄기들이 잔뜩 늘어져 있었다.
역하고 습한 공기는 차치하고, 벽에 눌어붙은 저 축축하고 미끈거리는 오물들은, 과연 구성 성분이 무엇일지 상상조차 하기 싫을 만큼의 불쾌감을 자아낸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해. 얼마 전부터 뭔가가, 자꾸만 조금씩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다면 그만큼 서두르는 수밖에.
“푸리아노 전체에 건설된 하수도라면 분명 거미줄처럼 복잡할 겁니다. 길을 안내할 자나, 적어도 내부 구조를 알 수 있는 지도라도 있어야…….”
“어이가 없구려. 폐허가 된 난민촌에서 지금 멀쩡한 지도를 찾는 거요?”
“그러면 하다못해 횃불이라도…….”
“마사인 경.”
안내인과 지치지 않고 실랑이를 벌이는 마사인 경을 향해, 성진이 깜박이는 작은 램프를 들어 보였다.
“괜찮아. 우리에게는 이 녀석이 있으니까.”
그러자 마왕 놈이 오랜만에 잘난 척을 한다.
[에헴! 이 위대한 마왕님께 맡기라고!]
의기양양하게 점멸하는 램프 갓을 톡 두드려 준 성진은-
“자, 가자.”
짧은 한마디를 던지고는 그대로 하수도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저, 저하?!”
화들짝 놀란 마사인이 말리려 들 때였다.
툭.
오웬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밝은 목소리로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안내인이나 지도 따위는 없어도 괜찮을 겁니다, 형님. 뉴… 모레스가 그래도 던전에서 길 하나는 정말 잘 찾잖아요?”
…네?
* * *
“대체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
그 시각, 하수도의 어느 깊은 은신처.
성진 일행이 찾고 있는 자코모 밀로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다급하게 채근하고 있었다.
“사람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소, 마법사.”
현재 자코모 밀로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지저분한 몰골과 부스스한 더벅머리, 그리고 퀭하게 내려간 눈두덩까지.
저 모습을 보면 그 누구도, 그가 한때 북부에서 제법 번성하던 상단의 주인이었음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다소 불완전해도 좋소. 어서 내게 그 비약을……!”
그러자 마법사라 불린 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로브에 휘감겨 있었지만, 묘하게 나긋한 몸가짐이 고귀한 귀부인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오. 기다리시오.”
마법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코로 밀로를 지나쳤다. 그러고는 한쪽 벽에 마련되어 있는 여러 개의 시궁쥐 우리 앞에 선다.
찍! 찌직!
그곳에는 놀랍게도 반쯤 썩어가는 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심장은 멎은 지 오래였지만, 녀석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서로를 물어뜯거나 우리를 집요하게 갉아대고 있다.
까드득, 까드드득.
“후후.”
끔찍하고 역겨운 광경이었으나, 마법사는 귀여운 애완동물에게 하듯 그 지저분한 우리를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보다시피 비약의 완성이 머지않았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니…….”
“이미 충분하지 않소? 그 정도의 완성도만으로도 황도의 인간들에게는 큰 재앙이 될 거요!”
“섣불리 복수하려 드는 것이 능사는 아니오, 자코모 밀로. 어설프게 움직였다가 그나마 당신에게 남아 있는 것들마저 모조리 잃고 싶소이까?”
그 말에 자코모 밀로의 눈에서 불똥이 튀어 올랐다.
“웃기지 마시오! 나는, 내게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단 말이오!”
“…….”
마법사는 입을 다문 채로 흉흉하게 핏발이 선 그의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래. 저자는 이미 평생토록 일궈온 상단을 잃었지. 모든 것을 잃었다고 여긴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마법사가 보기에, 자코모에게는 아직도 잃을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와 계약한 악마도 그 사실을 잘 알겠지.
아직 가진 것이 남은 이가, 이리도 자기 파괴적인 행각을 하는 이유. 그것은 아마도…….
‘악마 계약자의 어쩔 수 없는 말로인가. 처음 계약한 소원을 실현시키기 요원해졌으니, 악마가 계약자로 하여금 계약 파기를 부추겨 영혼을 가로채려 드는 거군.’
눈에 띄게 거뭇해진 그의 안색을 찬찬히 살핀 마법사는, 그것이 느리게 일어나는 침식의 증거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어차피 길지 않겠구나. 비약이 완성될 때까지 버티기는 힘들겠어.’
하지만 자신이 상관할 일은 아닐 것이다.
악마와의 계약은 어디까지나 당사자들의 문제. 비록 과하게 충동을 부추기더라도, 어디까지나 그 근본은 계악자의 의지인 것이다. 하면 마땅히 이를 존중할 수밖에.
‘지금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은 받아야겠다.’
마음을 결정한 마법사는 품속에서 작은 시약병을 끄집어냈다. 진득한 검은색 물질이 가득 들어차 있는 불길한 물건이었다.
“여기 있소. 그럼 이 비약의 대가는?”
그러자 자코모 밀로 역시 마법사에게 작은 책자 하나를 내민다. 예전에 그의 가문에서 도망쳐 나올 때 훔쳐 온 낡은 마법서였다.
“약속했던 다키아누스의 비서요. 소문에는 거기에 불로불사의 비밀이 담겨 있다고 하더군.”
마법사가 말없이 그 책자를 받아 들자, 자코모 밀로는 비약이 든 병을 빼앗듯이 가로챘다. 이내 그 속에서 찰랑이는 검은 액체를 확인하자, 그의 얼굴에 겨우 희미한 안도의 빛이 밀려든다.
“이미 끝난 거래이니 하는 말이오만, 그 비서의 진위는 나도 장담할 수 없소.”
“그건 나도 알고 있지. 귀족이 수집한 고서라는 것들은 태반이 사기꾼의 작품이라는 걸.”
“그럼 왜 굳이 그런 것을 요구한 거요?”
그러자 마술사는 후드 아래 드러난 입꼬리를 잔뜩 비틀어 보였다. 미소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씁쓸하고, 또 괴로워 보이는 웃음이었다.
“뭐, 어쩌겠소? 세상의 깊은 신비를 아는 자들은 이런 것에라도 기댈 수밖에 없다오.”
더없이 고통스러운 생과, 그 이후에 더욱 끔찍한 사후 세계가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면.
* * *
“헉! 헉!”
마침내 원하던 물건을 손에 넣은 자코모 밀로는 정신없이 하수도를 달렸다. 한시라도 빨리 이것을 황도로 가져가 퍼뜨려야 했으니까.
물론 이것을 운반한 자신 역시 무사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이제는 그딴 것은 아무 상관 없었다. 지금 그를 이끄는 것은, 세상을 향한 지독한 복수심 외에 그 무엇도 아니었으니까.
-명심하시오, 자코모 밀로. 그 비약은 어디까지나 ‘안식’을 속이는 술수에 불과하오.
숨이 턱 끝까지 닿아온다. 산소가 부족해 멍해진 뇌리에, 마지막으로 마법사가 당부한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 혹여 ‘그’를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오. 그런 속임수 따위, 진정한 죽음의 주인 앞에서는 아무 소용 없을 테니.
진정한 죽음의 주인. 그것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짐작 가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실수라도 그와는 마주치지 않는다. 나는 황도로 직접 들어가지 않아! 먼저 레지나의 외곽에 이 치명적인 재앙을 풀어, 충분히 사람들을 감염시킨 후 마침내 황도를 순식간에 휩쓸도록 만들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모든 일이 그러했듯. 세상은 이번에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깜박, 깜박.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작은 불빛을 발견한 순간, 자코모 밀로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이런! 어서 피해라, 자코모! 저것은 예비된 자다!]
뇌리에서 그의 악마, 샐로스가 아우성친다. 하지만 이내 그 소리는 귓가에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이봐.”
그리고 마침내 그의 눈앞에 가득 들어찬 훤칠한 소년.
“기억과 달리 꼴이 말이 아니긴 한데, 아무래도 내가 찾는 게 너인 거 같단 말이지.”
샐쭉 가늘어지는 소년의 눈이, 일순 기이한 붉은빛을 점멸한다.
“어때? 시간 있으면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
Chapter 128: Chapter 428
Chapter Text
428. 불로불사의 비서 (1)
‘예비된 자가 어떻게?’
자코모 밀로는 그야말로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거기다 어찌 호위하는 자 하나 없이, 저런 허름한 행색을 하고 이곳에 있단 말인가!’
털썩!
완전히 허를 찔린 자코모 밀로가 넋을 잃은 채 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러자 성진은 나름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대화를 위한 자세가 되어 있네. 얘기가 빠르겠는데.”
안타깝게도 그 미소가 자코모 밀로를 완전한 패닉 상태에 빠뜨리고 말았지만.
‘아아, 이제 끝이다! 예비된 자는 끝내 이곳에서 날 죽일 셈이구나!’
자코모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귀중한 검은 비약을 움켜쥐었다.
겨우 이것을 수중에 넣었건만! 이제야 나와 내 상단을 무너뜨린 것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 여겼는데!
‘샐로스! 왜 하필 이런 중요한 때에 샐로스는 응답이 없는 건가!’
계약자의 감정이 격해지자-
스르륵.
일순 자코모 밀로의 그림자로부터 희미한 검은 안개가 일렁이는 듯했다.
[조심해, 이성진! 저 녀석, 지금 옅게나마 마기를 흘리고 있어.]
마왕이 램프를 깜박이며 경고했다.
[저놈, 악마 계약자라고 했지? 저건 분명 계약 파기의 조짐이야. 아무래도 악마가 저자를 포기하려고 결심한 모양이야!]
“그래? 포기하면 어떻게 되는데?”
[인간 쪽의 유책이 다가 아니니만큼, 영혼이 곧바로 마계로 끌려가지는 않아. 하지만-]
마왕은 빠르게 설명을 이어갔다.
[놈과 계약한 악마 역시 마기로부터 계약자를 보호할 의무가 사라지지. 악마가 완전히 연결을 끊는 순간, 아마 저 인간은 곧바로 죽어버릴 거야.]
자코모 밀로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바 있다. 그러니 여기서 죽든 황도에서 사형당하든, 그것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겠지.
하지만 놈과 계약한 악마의 경우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는 모양이었다.
[임의로 계약을 파기한 악마는 실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해. 너무나도 무거운 나머지, 겸사겸사 몇 가지 죄목을 추가하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느낄 만큼의 형벌이지.]
그리고 그러한 위기에 빠진 악마는 거의 대부분 사고를 치려 들었다. 악마가 괜히 악마가 아니란 거다.
[차원의 규칙을 무시하고, 인과로부터 눈을 감으며, 희생양이 된 인간의 몸을 통로로 이용해 최대한의 마기를 지상에 풀어버리곤 하지. 그것만으로도 인간 세계는 큰 혼란에 빠지곤 하니까.]
즉, 지금의 자코모 밀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마기의 시한폭탄이란 뜻이다.
자유 지하도의 수장, 조반니가 한사코 놈에게 직접 손대는 것을 꺼린 이유가 다 있었던 거다.
“그럼 내가 여기서 저놈을 먼저 죽여버리면?”
“으힉……!”
자코모 밀로의 안색이 희게 질린다.
[계약을 이행하지 못한 인간의 영혼은 마계로 끌려가겠지. 그리고 저 몸은 급격한 침식을 일으키며 소멸할 거야. 제법 많은 양의 마기를 이곳에 남긴 채 말이야. 너야 멀쩡하겠지만, 아마 주변의 인간들은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걸?]
그리고 인간은 미약한 마기에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지. 마왕은 그렇게 덧붙였다.
“그렇군.”
성진은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거 좀 곤란하게 됐는걸.’
그 어느 쪽이 되었든, 난민촌이 마기에 노출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란 뜻이다.
바서스트령에 대형 악마종이 출현했던 경우와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그때는 거대한 공룡이 그 난리를 치고도 인명 피해가 전무하다시피 했지.
하지만 이곳 지하도는 어떤가. 위로 몇 미터만 올라가도, 수많은 난민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천막촌이 아니던가.
지금부터 마기를 정화할 사제나 성기사들을 빠르게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혹여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 이미 난민촌에는 끔찍한 지옥도가 펼쳐지고 말리라.
‘결국 안전한 장소로 이동할 때까지는, 자코모 밀로를 멀쩡히 살려 둬야 한다는 뜻이다.’
더불어 그와 계약한 악마도 진정시켜야겠지. 지레 겁먹고서 멋대로 계약을 파기하지 않도록.
그렇게 마음을 정한 성진은, 천천히 자코모 밀로를 향해 한 발을 떼었다.
“그만 안심해. 당장 해칠 생각은 없어.”
자코모 밀로와 그와 계약한 악마, 둘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다. 내적 동요를 조금도 내비치지 않는 실로 유유자적한 태도.
하지만 망자의 목에 낫을 들이민 사신처럼 자신만만한 표정과는 달리, 성진은 내심 초조하게 주위의 기척을 살피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쪽의 상황이 빨리 끝날 것 같진 않군. 마사인 경과 오웬이 잘 해줘야 할 텐데.’
* * *
사실 성진이 홀로 자코모 밀로를 맞닥뜨리게 된 데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조금 전-
“……?”
한창 복잡한 하수도를 앞장서서 걷던 도중, 성진은 묘하게 집중력이 분산되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왕의 램프로부터 몇 발자국만 벗어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저 칠흑 같은 터널의 정면을 쏘아보았다.
‘…이게 뭐지? 어쩐지 감각이 조금 혼란스러운데?’
졸졸졸졸…….
오수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잔잔한 소리들을 한 귀로 흘리며, 성진은 한껏 정면을 향해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래. 난 가야할 길을 알아. 갈림길에서도 헷갈리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은 어쩐지, 그 길이 내가 예상한 길이 아니게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그 기묘한 예감에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이성진, 저것 좀 봐! 저기 이상한 것이 있어!]
마왕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갑자기 포로로 램프로부터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오수가 줄줄 흐르는 수로 아래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이놈 좀 보라고! 분명 죽었는데, 아직 움직이고 있어!]
마왕이 빛을 밝힌 곳에는 과연, 완전히 반 토막 난 시궁쥐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
한데 그것이 끝이 아니다. 끔찍하게도, 잔뜩 부패한 시궁쥐는 아직까지 앞발을 간헐적으로 경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꿈틀. 꿈틀.
뒤이어 성진의 어깨 너머로 수로 아래의 광경을 확인한 마사인이 훅 숨을 들이켰다.
“…주신이시여! 이건 또 무슨 삿된 것의 농간이란 말입니까?”
삿된 것의 농간이라. 확실히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긴 했다. 정상적인 사후근경련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쥐의 사체는 이미 반쯤 썩어서 거의 뼈가 드러나 있었기 때문.
그리고 그쯤 되어, 성진은 이 하수도에서 느낀 위화감의 원인 중 일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근처에 살아 움직이는 쥐들이 하나도 없어?’
어째 아까부터 조용히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린다 했지, 하수도에 으레 있을 법한 쥐들의 기척은 전무하지 않은가.
‘여긴 그냥 하수도가 아닌 건가? 쥐들조차 발을 붙이지 못하는 공간이라니,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성진이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마왕이 사체의 주변을 부산하게 돌아다니며 또다시 소리쳤다.
[근데 여기 이것도 좀 봐, 이성진! 많이 옅어지긴 했지만, 여기서 미약하게 규상세계의 흔적이 느껴져!]
마침 안력을 집중한 성진도, 부서진 텍스트의 희미한 편린을 발견한 차였다.
?TY□E_m_und□□d_no297□402?
?err! 적절한 오□젝트를 확□할 수 없습니다!?
?err! ge□아ㅋ!$2ㅗ서버를 확□할 수 없습니다.?
?err……?
그럼 그렇지. 뭔가 상식으로 설명 되지 않는 현상이 있다 싶으면, 십중팔구는 규상세계의 법칙이 끼어든 결과더라고.
한데 저건 그나마도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법칙이 아니라, 형편없이 조각나고 부서져 심각한 오류가 나 있는 상태…….
‘…어, 기분 나빠.’
성진은 생각을 멈추고는 사체로부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인지 저것을 계속 보고 있자니 스스로도 기이할 정도로 불쾌한 감정이 치솟았다. 당장이라도 속에서 뭔가가 울컥 튀어나올 것 같단 말이지.
“그냥 두기 찜찜하네. 보기 싫으니까 태워버려.”
성진이 미간을 구기며 지시하자, 마왕이 쾌활하게 대답했다.
[응! 알았어!]
오랜만에 자신의 쓸모를 증명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척이나 기쁜 모양.
화르륵!
그렇게 쥐의 사체는 순식간에 거센 불길에 휩싸였다. 매케하게 타들어가는 사체에 힐긋 눈길을 준 성진은, 마왕이 램프로 되돌아오자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역시 이것이고 저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아. 이런 모호한 예감은 정말 오랜만인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이 가야 할 장소는 이리도 명확한데, 대체 어째서 아까부터 자꾸만 탐탁잖은 기분이 드는 거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성진은 곧 스스로 위화감의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의 예민한 감각에, 언제부턴가 두 사람의 인기척이 동시에 감지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 목표가 둘이었구나!’
언뜻 느끼기에는 둘 모두 오러 활성이 낮은 일반인이다.
그중 하나가 자코모 밀로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전에 비해 조금 오러 활성이 약해지긴 했지만, 마계수가 출현했을 당시 멀리서 감지한 밀로 상단주의 기척을 성진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다른 한쪽이었다.
오러 활성을 보면 딱히 무력이 강한 것 같지 않은데, 이상하게도 계속 그 인물 쪽으로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 드는 거다.
‘저건 대체 누구지?’
함께 있는 걸로 보아, 아마도 자코모 밀로와 일면식이 있는 자겠지.
이곳 자유 지하도에서 놈이 만날 사람이라고는, 당장은 참회 교단의 잔당 정도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는데.
‘어쩐지 그건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긴 하지만.’
어쨌거나 둘 다 잡을 수 있으면 좋겠다. 성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
하지만 조바심을 낸 보람도 없이, 성진은 이내 목표물들이 헤어져 둘로 갈라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낭패였다.
‘이대로 놓쳐선 안 돼! 일행을 나눠서라도 둘 다 쫓아야겠어.’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쪽은 자코모 밀로가 아닌, 다른 쪽이다. 그렇기에 마음 같아서는 성진이 직접 놈을 쫓고 싶었다.
‘하지만 자코모 밀로는 악마 계약자다. 마기에 내성이 없는 두 사람과 마주치게 두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다고 두 사람만 저쪽으로 보내자니 조금 걸리는 것이 있었다. 깔끔하게 일을 끝내기에는 어쩐지 전력이 충분치 않다는 느낌.
다샤의 도움을 받거나, 하다못해 자신이 직접 권속으로 오러 은폐를 펼치고 다가갈 수만 있었어도 결과가 많이 달랐을 텐데!
‘본래는 이곳에 막스를 데려올 예정이었지.’
참으로 난감했다. 최근에는 왜 이렇게 계획대로 딱딱 맞아떨어지는 일이 없는 걸까.
“저하. 기척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그 무렵, 마사인 역시 전방의 인기척을 희미하나마 감지한 모양이었다.
주변을 바짝 경계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성진은 마침내 마음을 정했다. 어쩌면 미래의 결과를 정한 건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군.’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어엉?”
뒤따라오던 오웬이 화들짝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잠깐만, 너무 뜬금없잖아?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긴급 퀘스트가?”
성진과 마사인이 돌아보니, 오웬은 황당한 표정으로 빤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마사인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텅 빈 허공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모습이 제정신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저게 그 상태창…….’
성진의 눈에는 이제, 오웬의 정면에 떠 있는 희미한 안개 같은 형상이 보였다.
안의 내용까지 뚜렷하게 읽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했다. 저게 바로 그 성격 나쁘다는 상태창 씨인 거겠지.
“저하…….”
또다시 성진의 눈에서 기이하게 점멸하는 안광을 발견하곤, 마사인이 조금 불안한 얼굴로 성진의 눈치를 살핀다.
그에게 안심하라고 손을 휙휙 저어준 성진이, 오웬을 향해 여상하게 물었다.
“왜? 퀘스트가 대체 뭐라고 되어 있는데?”
“음? 어, 그러니까 뭔가 중요한 문서를 찾으라는데? 어디 보자…. 중부의 한 영주가 오랜 시간 보관했던 귀한 문서를 손에 넣…….”
주절주절 설명하던 오웬이, 갑자기 경악하며 성진을 돌아본다.
“…어라? 너?”
“응?”
“아니, 그러니까. 방금 너 말이야…….”
설마 성진이 퀘스트에 대해 직접 언급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리라.
하지만 성진은 뻔뻔했다.
뭐? 왜? 뭐?
뚱하니 시선을 맞받아치자, 오웬이 우물쭈물하며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린다.
그래. 모레스, 넌 역시 알고 있었구나?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다 알고 날 찾아온 거야. 그리고 내가 이미 네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내가 어렴풋이 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이제 나는, 네가 알고 있는 걸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네가 아는 것까지 알게 되었으니, 그 사실을 아는 너는…….
혼란에 빠진 오웬의 동공이 거센 지진을 일으킨다. 성진은 결국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이 이런 중요한 순간에 정신을 못 차리네.’
때가 때이니만큼 성진은 빠르게 대처했다.
그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가장 적당한 위치에, 응당 해야 할 것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휘익-!
따악!
엄청난 타격음이 조용한 지하도의 터널로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마사인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으악!”
졸지에 이마를 세게 얻어맞은 오웬이, 어딘가 대단히 충격받은 표정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아니! 갑자기 왜 때려? 아프잖아!”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얼른 정신 안 차릴래?”
“으, 응?”
“어서 가. 퀘스트를 하려면 서둘러야 할 거 아냐?”
“어, 어? 으응!”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오웬은, 갑자기 확 밝아진 얼굴을 했다.
“그래!”
그리고 그길로 허둥지둥 하수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뭐, 마왕의 램프나 횃불은 없지만, 저 녀석의 안력이라면 어둠 속에서도 충분하겠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성진은, 고개를 돌려 마사인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사인 경.”
“…예, 저하,”
아니나 다를까, 다음 말을 예상한 듯 마사인 경의 얼굴이 벌써부터 어두워져 있다. 이제는 그도 성진의 돌발 행동에 완전히 도가 튼 것이다.
그리고 결국 떨어진 명령.
“가서 오웬을 도와줘. 자네가 함께 가주지 않으면 저 녀석 혼자서는 많이 힘들 거야.”
“…….”
마사인은 잠시 치열하게 갈등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찰나의 순간으로, 이내 충직한 기사의 얼굴에 굳은 결심이 어린다.
“예, 저하. 그 무엇을 명하시든, 저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Chapter 129: Chapter 429
Chapter Text
429. 불로불사의 비서 (2)
핑-!
눈앞에 작은 빛기둥이 솟아오른다. 상태창 씨가 표시해 주는 목적지다.
오웬은 잔뜩 들뜬 마음으로 그 빛을 향해 달려 나갔다.
‘역시 모레스가 이성진이었어! 모레스가 그 뉴비였다고!’
이런 정 없는 자식 같으니! 알았으면 진작 말을 할 것이지, 왜 지금까지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거야?
그때 뒤에서 빠른 속도로 마사인이 따라붙어 왔다.
“…마사인 형님?”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돕겠습니다, 저하!”
“…….”
순간 잔뜩 흥분했던 기분이 가라앉으며, 서서히 머릿속이 맑아졌다.
아마 형님의 자발적인 조력이 아닐 거다. 분명 모레스가 시킨 일이겠지.
‘그러고 보니, 이 타이밍에 퀘스트가 나온 것도 어쩌면…….’
모레스의 판단에 따른 변화가 아니었을까? 오웬은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다.
딱히 근거는 없다. 하지만 어쩐지 상태창 씨가 계속 모레스를 쫓으며, 그의 의도에 맞춰주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거다.
[긴급 퀘스트 ? 중요한 문서를 찾아 손에 넣어라! new!]
[퀘스트 등급 : A]
[중부의 한 영주가 오랜 시간 보관했던 귀한 문서를 손에 넣으십시오. 그 문서는 한때 인간을 미혹케 한다는 미명하에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저자의 후손에게조차 철저히 외면 받았지만, 사실 거기에는 마법사들이 오랜 시간 찾아 헤매던 귀한 진리가 숨어 있답니다. 어쩌면 그 문서의 발견으로, 의외의 부가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보상 : 500P 캐시]
[*본 상품은 판게아 클로니클 상점 창에서 사용 가능합니다.]
‘상태창 씨치고는 보상이 엄청 후한데?’
조금 긴장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오웬은 허리춤의 한손도끼를 뽑아 들었다.
찌직-! 찍!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예상치 못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쥐?’
지하도에 씨가 마른 듯했던 쥐들이 어째 모조리 이곳에 몰려 있는 것 같았다.
악취 역시 심해졌다. 안 그래도 축축한 공기에, 뭔가 썩어가는 냄새가 어우러지며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이윽고 도착한 곳은, 수로와 수로가 교차하는 제법 넓은 공간. 오웬과 마사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일순 침음을 흘렸다.
“이게 다…….”
이곳은 사악한 마법사의 연구실이었다.
한쪽에는 책이며 문서가 빼곡히 꽂힌 낡은 책장이,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여러 동물들이 갇힌 크고 작은 우리들이 쌓여 있다.
지저분한 이물질로 가득한 벽에는, 또 알 수 없는 도료로 그린 빽빽한 마법진이 보인다. 한눈에 봐도 사악한 이단의 술법, 혹은 악마 숭배의 증거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그 중앙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서 있었다.
“…침입자?”
그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자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후드로 얼굴을 모조리 가리고 있어 표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당신들, 대체 어떻게 아무 일 없이 이곳까지 들어왔소? 중간에 침입을 대비한 함정들이 많았을 텐데.”
“함정?”
순간 오웬의 머릿속에, 간혹 곧은길을 빙글빙글 우회하던 모레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아! 그게 함정을 죄다 피한 거였나?
‘아무렴! 그 녀석은 뉴비니까!’
‘오크왕의 미로’를 공략하던 당시, 함정과 알람을 귀신같이 피하던 그 솜씨가 어디 가지는 않았단 말이지.
잠시 뿌듯해하던 오웬은, 마사인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하! 저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은 전부 죽은 것들입니다!”
마사인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심지어는 저 사악한 술수를 사람에게까지……!”
‘사람?’
움찔 놀란 오웬의 시선이 안쪽에 있는 커다란 우리 하나에 멈췄다. 그곳에는 다른 것들에 비해 유난히 덩치가 큰 동물들이 갇혀 있었다.
까드득, 까드득.
이지를 잃고 창살을 물어뜯는 모습은 일견 짐승과도 같다. 하나 찬찬히 살펴보니, 그것들은 분명 팔다리가 멀쩡히 달린 인간의 형상.
“……!”
오웬과 마사인은 동시에 깨달았다.
설마 저 마법사가, 이런 열악한 환경에도 굳이 난민촌 아래 자리 잡은 이유가……!
“후우…….”
검은 로브의 마법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한숨 같은 탄식을 내뱉었다.
“겨우 성과를 보는 줄 알았건만, 끝내 귀중한 표본들을 이렇게 소모하게 되다니. 하나-”
번쩍!
어두운 로브 사이로 섬뜩한 안광이 빛을 발했다.
“이것을 봤다면 더는 당신들을 살려둘 수 없소!”
그 말과 동시에-
따앙!
수많은 우리가 일제히 열리며, 반쯤 썩어가는 동물들이 한꺼번에 두 사람을 향해 쏟아져 나왔다.
* * *
“그만 안심해. 당장 해칠 생각은 없어.”
같은 시각, 성진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코모 밀로를 달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와 계약한 악마 쪽을.
자포자기 끝에 또 다른 죄를 서슴지 않고 저지를 정도로, 임의적인 계약 파기가 불러올 인과는 두려운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악마는 어지간해서는 인간 쪽에서 파탄의 책임을 져 주길 바란다는 뜻일 터.
‘이제 막 찾아냈을 뿐인데 갑자기 계약을 팽개치고 도주하려 들다니. 대체 저 악마는 뭐에 겁을 먹은 거지?’
어쨌거나 실낱같은 가능성만 던져준다면, 악마는 계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터다. 그래서 성진은 악마를 포섭하기로 결정하고 조심스레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약속하겠어. 너희들의 계약을 보호해 주지.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지금 이 자리에서 네 계약자를 죽이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악마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저 자코모 밀로만이 겁에 질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릴 뿐.
“거, 거짓말 마시오!”
이윽고 자코모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계약을 보호하다니, 그건 다 거짓이잖소?”
“아니, 난 정말로 여기서 널 죽이지 않는다니까.”
“그건 다 말장난이오! 내게는 이미 사형선고가 내려졌소! 그러니 당신이 인적 없는 곳으로 날 유인해, 언제든 다른 이를 시켜 내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는 뜻 아니오? 내가 속을 줄 아시오?!”
흠. 그야 그렇지. 이미 처참한 끝이 예정된 녀석을 뭐라 설득하겠어.
성진이 딱히 부정하지 않자, 자코모 밀로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진다. 그는 잔뜩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샐로스! 듣고 있습니까? 어서 나를 지켜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에게 내 몸을 내어드리겠습니다!”
[…….]
“그러니 우리의 계약대로, 눈앞의 적을 물리칠 힘을 내려 주십시오! 계약자의 위험을 방기하는 것 역시 중차대한 계약 위반이 될 겁니다!”
그러자 여태껏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던 악마가 마지못해 응답했다.
[자코모…….]
“샐로스!”
[이것 봐. 지금 계약 운운할 상황이 아니라고. 이제 와서 네 몸을 얻어 뭘 어쩌란 거야? 위대한 군주들의 대리자 앞에 직접 강림하라니, 지금 날더러 흔적도 없이 소멸하라는 말이냐?]
아아, 그래.
당장이라도 계약자의 몸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두고도, 악마가 굳이 몸을 사릴 이유는 달리 없었다.
차라리 계약 파기의 죄를 받더라도, 계약자를 내팽개치고서 도망칠까 고민할 정도로 가시화된 공포.
‘예비된 자…….’
자코모는 눈앞의 소년을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허름한 행색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금까지 봐 왔던 어느 누구보다 무거운 존재감을 드러낸 이를.
[하나만 묻겠소.]
자코모의 정신이 위태로이 흔들리는 사이, 샐로스는 그의 몸을 빌려 입을 열었다.
[정말로 우리의 계약을 지켜 주시겠소? 설마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마계까지 날 쫓아오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거요?]
…뭐? 그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
“마계로 쫓아가다니, 내가 무슨 수로?”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자코모 밀로, 아니, 악마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으로 침음을 흘렸다.
[그야 그대는 예비된… 크흠…….]
잠시 우물쭈물 거리던 악마는, 마음을 정한 듯 이번에는 쩔쩔 매며 성진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부디, 부디 약조해 주시오! 감히 계약으로 명시하기를 바라지는 않소! 그저 이번 일을 문제 삼지 않겠다, 그 한마디만 내게 해 주면 안 되겠소?]
악마가 생각보다 저자세로 나오자, 성진은 잠시 생각했다.
뭐야? 이 정도면 그냥 계약을 파기하고 도망치게 뒀더라도 괜찮지 않았을까? 저놈이라면 홧김에 마기를 풀어버리는 깽판을 치지 않고도 그냥 조용히 물러났을 거 같은데.
“…약속해 주면?”
[그리만 해준다면! 그러면 나는 계약을 유지한 채, 이후로는 당신의 뜻을 절대 거스르지 않겠소!]
“…샐로스?!”
갑작스러운 악마의 태세 전환에, 자코모 밀로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당신은 저 말을 믿습니까?”
[자코모. 일단 지금 상황은 네게 있어서 큰 위기가 아닌 듯하다. 그러니 딱히 내가 나서지 않아도 계약 위반은 아닌 거야.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어쨌거나 예비된 자는 나를 끌어내어 형을 치르게 할 셈입니다! 결과적으로 내 목숨을 노리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도 악마가 도통 움직일 기색이 없자, 자코모는 절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좋습니다! 정 당신이 날 돕지 않는다면, 차라리 스스로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어버리겠습니다! 그가 나를 바로 베지 않고 구슬리려 드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궁지에 몰린 것치곤 제법 예리한 판단이었다.
“자, 이건 어떻겠소? 내게는 다 썩은 시체도 걸어 다니게 만드는 비장의 무기가 있소!”
자코모는 검은 비약을 세게 움켜쥐며 성진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이대로 내가 죽어 시체가 침식되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소? 제국은 영원히 멈추지 않고 마기를 퍼뜨리는 공포를 맞이하게 되는 거요! 그 또한 세상을 향한 복수로는 나쁘지 않을 터!”
성진의 시선이 잠시 자코모 밀로의 손아귀에 머물렀다.
과연, 썩어서 움직이던 쥐도 모두 이 작자의 수작이었나? 믿는 구석은 있었다는 말이군.
하지만 협박도 상대를 봐가며 해야지.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사제나 성기사만 있다면, 너 하나 정화하는 건 금방이지.”
“이곳 자유 지하도의 거점에서, 멀쩡한 사제나 성기사를 찾을 수 있으리란 기대는-”
“왜? 당장 여기에도 하나 있는데. 이래 봬도 나는 엑소시스트, 그러니까 성기사거든?”
“…뭣?”
악에 받쳐 있던 자코모의 눈에 조금은 불손한 빛이 떠올랐다.
‘당신이? 엑소시스트? 지금 어디서 약을 파는 거요?’ 이런 뜻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눈빛이다.
“흠, 못 믿는군. 역시 증거를 보여줘야 하나…….”
성진은 품속에 갈무리하고 있던 성수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손에는, 날리기 좋은 비표까지 뽑아 들었지. 모두 로베르 경으로부터 받은 물건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퇴마 도구들을 놓지 않는다. 그야말로 준비된 엑소시스트의 자세 아니겠는가.
“근처에 사람들이 너무 밀집해 있으니 신중을 기하는 것뿐이지, 침식으로 죽은 자가 흩뿌리는 마기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들었어. 이 도구들로 간단한 결계를 만들면, 정화해 줄 사제를 부를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지.”
물론 블러핑이었다. 움직이는 대상을 상대로 결계가 과연 어느 정도 효과를 보일지는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거기다 자유 지하도의 거점에 멋대로 다른 성기사를 부르면, 그날로 푸른 공화혁명전선과의 관계는 끝장이라 봐야겠지.
“설마 그런…….”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자코모 밀로에게는 그 정도의 언질만으로도 충분했다.
연이어 그의 악마가 도구들에 깃든 신성한 기운까지 확인해 주자, 자코모는 그제야 솔깃해지는 모양이었다.
“…이럴 수가!”
그는 완전히 절망하여 절규했다.
“내가, 내가 왜 죽어야 한다는 말이오? 나는 그리 큰 죄를 짓지 않았소!”
“악마와 계약하고, 사익을 위해 사람들에게 해를 가했지.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한가?”
“악마와의 계약? 그게 어쨌다는 거요! 상인으로 살아남으려면, 다른 경쟁자들의 마수로부터 버텨내려면, 스스로가 악마 계약자가 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단 말이오! 그게 과연 모두 내 탓이라 할 수 있소이까?”
자코모 밀로는 번쩍 고개를 들어 성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공포와 절망으로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는, 내재된 분노와 뒤틀린 희열이 한데 뒤섞여 들끓고 있었다.
“나는 대륙을 크게 어지럽히지 않았소! 다른 이들처럼 마구잡이로 살육을 벌인 것도 아니란 말이오!”
“너 때문에 많은 이들이 마계수에 희생되었잖아.”
“그것이야말로 누명이오! 마계수를 불러낸 것은 어디까지나 암흑 교단의 소행! 오히려 모든 것을 잃은 내가 그 사건의 최대 피해자란 말이오! 한데 어째서 내가 그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거요?”
크흐흐흑!
자코모 밀로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구친다.
“지그스문트령의 약차 건도 마찬가지요! 나는 그저 돈이 되는 물건들을 팔았을 뿐이란 말이오! 북부를 좌지우지하는 참회의 세력이 팔길 원했고, 지그스문트령의 가주가 사들이길 희망했소! 대체 그 사이에서 상인인 내게 어떤 선택지가 있단 말이오?”
“…….”
성진은 조금 따분해졌다.
그래. 정상을 참작할 만한 부분이 없다고는 못 하겠다. 그런데 대체 날더러 뭘 어쩌라는 거지? 우리 아버지라면 또 모를까, 나는 살아생전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자가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삐이이-
갑자기 높은 이명이 들리며 언뜻 시야가 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는 의아해할 새도 없이 눈앞에 펼쳐지는 생생한 광경.
살아 있는 시체들과, 공포에 질린 사람들. 그리고 불타는 건물들이 보인다. 지옥도와도 같은 처참한 광경이었지만, 성진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곳은 분명 레지나의 거리였다.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자신이 지나쳐 버린 가까운 미래.
‘아아, 그래!’
성진은 문득 깨달았다.
‘이번이 다가 아니구나. 이자는 어차피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끔찍한 미래를 불러올 이다.’
찰나의 순간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것으로 성진은 완전히 결정을 내렸다.
[히이익! 이봐, 자코모! 계약자로서의 마지막 인정이야. 어쩌면 이건 너에게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그의 말을 듣고, 이제 더는 나를 부르지 마라아아아…….]
“샐로스?”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악마가 비명을 지르며 마계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자코모는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다가 이내 바짝 얼어붙었다. 어둠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은색의 안광이 그를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안 그래도 축축하고 무겁던 공기가, 한층 농밀한 밀도를 가지고서 그의 몸을 내리누른다.
“하소연은 그쯤하고 순순히 그 물건을 내 놔. 그리고 얌전히 날 따라와라.”
“…….”
본래라면 거부하는 것이 옳았으리라. 이 비약은 그가 가진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니.
하지만 어째서인지 자코모의 몸은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그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영혼에 직접 새겨지는 듯한 추상 같은 한 마디 한 마디에, 그로서는 더 이상 저항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나는……!”
“아직도 모르겠나?”
절망적인 무력함에 허우적거리는 상단주를 향해, 성진은 담담하게 알려 주었다.
“나는 너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거다, 밀로 상단주.”
“기회? 서, 설마 나를 살려 주신다는-”
“아니, 넌 죽을 거야.”
희미한 희망을 짓밟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네가 하려던 일을 멈춘다면, 적어도 네 영혼에는 한 번의 기회를 주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의 책임을 묻는 것도 꽤나 가혹한 일이다.
그러니 만회할 기회를 주겠다. 죽은 이후에도 영혼이 마계에 끌려가지 않고, 마계보다 더욱 끔찍한 다른 곳으로 빠지지도 않도록.
“……!”
짧은 대답이었지만, 자코모는 악마 계약자로서 그 말이 지닌 무게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주신의 신앙이 지배적인 대륙에, 기이할 정도로 악마 계약자들이 판을 칠 수 있는 이유. 그중 하나가 바로 사후 세계에 대한 깊은 절망이었기 때문이다.
-주신의 구원은 없다. 어차피 너희 인간들이 죽고 나면, 마계의 악마들보다 무서운 고위 마왕들의 손에 끝없이 고통받을 뿐이야.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우리의 힘을 빌려 권세를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자코모는 샐로스의 마지막 말도 떠올렸다.
-이봐, 자코모! 계약자로서의 마지막 인정이야. 어쩌면 이건 너에게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는 한때 가문에서 내쳐져, 아무런 기반 없이 중소 상단을 운영하던 자. 본능적으로 어느 쪽이 이익인지를 판단하는 능력만큼은 탁월한 편이었다.
“…당신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때에 조용히 죽겠습니다.”
드디어 복수를 완전히 포기한 자코모는, 떨리는 손으로 비약을 치켜들며 바짝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은 일견 무언가를 열렬히 경배하는 자세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바라옵건대, 부디 제게 구원의 기회를 주십시오!”
Chapter 130: Chapter 430
Chapter Text
430. 불로불사의 비서 (3)
시작은 단순한 발상이었으리라.
저당 잡힌 영혼이 죽음과 동시에 채권자의 손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면, 혹시 영혼을 육체에 속박하는 것으로 얼마간의 유예 기간을 가질 수 있지는 않을까?
육체 자체를 영원히 살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생명력 그 자체라 여겨지는 신성력의 도움으로도 생의 한계는 명확했으니.
주신의 대리자라 불리던 역대 성황들도, 심지어는 반신이라 일컬어진 초대 성황마저도 고작 300년을 버틴 것이 다가 아니었나.
그래서 세상의 신비를 아는 자들은 생각했다.
하면, 이건 어떨까? 이 세계의 법칙을 벗어난 다른 세상의 방식으로, 육체를 속이고 영혼을 속여 마침내 ‘죽음’까지 속일 수 있다면? 약간의 편법을 가미한 비술로, 잔혹한 채권자들의 눈을 잠시 피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이 비루한 생을 조금이나마 연장해 볼 수 있지는 않을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발상이지만, 또한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었지.’
영혼이 죽은 육체를 제때 떠나지 못했을 때 벌어지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 비술을 시험한 이들이 영안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들의 실패를 그 자리에서 생생하게 목도할 수 있었으리라.
육체와 함께 서서히 썩어 들어가는 인간의 본질을, 그 비참한 영혼의 모습들을.
‘언젠가 아버지도 그렇게 말했잖아? 영혼은 끊임없이 육체의 영향을 받는다고.’
그러니 썩어가는 육체에 묶인 영혼은 처참하게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부패하며 무너지는 피부와 함께 형상을 잃고, 녹아내리는 뇌수와 함께 이지를 잃는다.
자신의 본질이 철저하게 부식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그저 동물적인 고통과 공포에 휩싸여 기나긴 시간 절규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저렇게.
[아으아… 살… 끄으… 내가… 왜… 크흐흐……!]
성진이 손을 휘젓자, 수로 한편에 가라앉아 있던 부패한 유기체에 검붉은 화염이 옮겨붙는다. 게헤나의 겁화였다.
화르륵!
매섭게 타오르는 겁화는 조각난 살점들은 물론, 희게 드러난 뼈까지도 순식간에 소각해 버렸다.
덩달아 고통스럽게 울고 있던 영혼도 검붉은 불길에 휩싸여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찍… 찌지…….]
축축한 벽 한쪽에 눌어붙어 있던 정체 모를 이물질도 마찬가지. 성진이 힐긋 눈길을 주는 것만으로, 그것들은 단숨에 깔끔하게 불타올랐다.
연기조차 피어나지 않는 완전무결한 연소.
[…냐오오…….]
[으르르르… 컹!]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부패한 살점에 묶인 각양각색의 영혼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성진은 실소를 흘렸다.
‘잘 하는 짓이다. 저 꼴들을 좀 보라고. 대체 얼마나 오래 이런 짓을 해 온 거지?’
문득 지하 하수도 전체를 게헤나의 불로 휩쓸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참아야겠지. 마음 내키는 대로 저질렀다간, 아마도 푸리아노 전체가 생명이 살지 못하는 불지옥이 되어버릴 테니.
“그러니 너희들만 깨끗하게 불타 없어져라.”
화르륵!
“시답잖은 술수는 그만 퍼뜨리고, 이대로 사라지라고.”
화륵!
“여기도.”
화르르륵!
“또 여기도.”
화르르르르…….
성진의 작은 손짓에 맞춰, 불꽃은 계속해서 번져나가며 어두운 하수도를 휩쓸었다.
검붉은 화마가 마기와 함께 춤추는 광경은 일견 지옥도의 한 장면.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모습과 달리, 결과만을 두고 본다면 게헤나의 겁화가 하는 일은 오히려 ‘정화’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부패한 것들을 소각하는 것은 물론, 끝이 정해진 비참한 영혼들까지 모조리 태워 없애고 있었으니.
“…….”
겁먹은 얼굴로 성진의 뒤를 따르던 자코모 밀로는, 그 불가사의한 광경에 완전히 압도되고 말았다.
‘이것이… 강력한 군주들을 대리하는 이의 힘!’
뜨거운 불꽃이 번져나가는 기세는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앞서가는 소년과 자신의 몸은 조금도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
자포자기한 가운데 새삼스러운 안도감이 솟아올랐다.
‘그래! 적어도 내 마지막 선택은 틀리지 않은 것인가!’
저항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자, 놀랍게도 자코모의 가슴속에서는 새로운 열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욕망과 이기심을 모두 버리고, 절대자의 은혜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
모자란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완벽한 절대자의 힘에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
절대자를 향한 헌신과 복종을 통해, 내면의 평화와 행복을 찾고자 하는 마음.
그가 평생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싹트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지극히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신앙의 마음…….
“벧엘라…….”
자코모 밀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성호를 외웠다. 참회 교단과 접선하며 건성으로 흉내 내던 이전과 달리,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건한 성호였다.
“제 모든 것을 당신의 손에 맡기오니, 부디 제가 당신의 계획에 쓰이도록 하소서…….”
붉은 화마로 가득 들어찬 눈동자에, 기이한 희열이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그렇게 반쯤 맛이 간 자코모를 이끌고 얼마간 수로를 따라 걸었을까.
[…진…….]
어디선가 성진을 부르는 작은 목소리가 울려왔다.
‘뭐지?’
사념은 바로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니, 용솟음치는 게헤나의 겁화 한가운데서, 꿋꿋하게 희미한 빛을 점멸하는 작은 램프가 보인다.
[…이…진…….]
고양된 정신이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아아, 그렇구나. 아무래도 나한테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어쩐지 얼마 전부터 어딘가 아귀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
이대로도 괜찮을까? 일단 이 자리에는 아버지가 없는데.
[이성진.]
본래라면 이렇게 되기 전에 아버지가 나를 말려 줬을 거야. 그래야 했는데.
하지만 내가 굳이 샤론 경을 멀리 보내 버렸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녀에게는 더 중요한 일을 부탁해야 했으니까.
[이성진. 이성진.]
어, 알고 있어, 마왕아.
그래도 괜찮을 거야. 나는 지금 내가 누구인지,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하게 알고 있으니까.
* * *
컹컹! 으르릉 컹!
찍! 찍찍찍!
크와아아아악! 구왁!
썩어 문드러진 시체들이 일제히 몰려드는 광경은, 혐오를 넘어 가히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마사인은 크게 팔을 휘두르며 연이어 오러 폭사를 만들어 냈다.
퍼엉! 펑!
가장 선두에서 달려들던 쥐 떼들이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뒤따라 달려들던 동물들 역시 부패한 살점을 흩뿌리며 멀찌감치 밀려난다.
“…허억!”
사실 소모되는 오러를 생각하면 오러 폭사는 썩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도 없는 것이, 상대는 몸이 반 토막이 나더라도 부득부득 바닥을 기며 달려드는 시체들이다. 그러니 일일이 베기보다는, 차라리 광역 타격이 가능한 공격으로 한 번에 멀리 날려 버릴밖에.
물론 남은 체력과는 별개로, 정신적 타격도 만만치는 않았다.
구에에에…….
뇌수가 박살 나고도 다시 멀쩡히 일어서는 한 어린아이의 시체를 발견한 마사인이, 창백한 얼굴로 침음을 흘렸다.
“맙소사. 주신이시여……!”
그사이 오웬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시체들 사이를 이리저리 파고들었다.
‘잠시만 버텨 주십시오, 마사인 형님!’
마법진이 그려진 벽면을 따라 반시계 방향으로 이동하던 그는, 앞을 막아서는 건장한 남자의 시체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퍼걱!
한손 도끼가 그의 머리통을 단번에 부순다. 그럼에도 시체는 쓰러지지 않고, 오웬을 향해 집요하게 팔을 뻗어왔다.
퍽!
그의 가슴팍을 걷어차 멀리 날려 버린 오웬은, 반동을 이용해 몸을 빙글 돌리며 뒤에서 튀어나온 노파의 손톱을 피했다.
휘익-!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팔을 세게 털어 도끼에 묻은 살점을 제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위로 높이 팔을 치켜든 오웬은, 그대로 도끼를 사선으로 휘둘러 옆에서 달려드는 여자를 길게 갈랐다.
파악!
한쪽 목에서부터 옆구리까지 깔끔하게 절단된 단면에서, 붉은 피 대신 하얀 구더기들이 튀어 올랐다.
‘…끔찍하군!’
그나마 오웬이 이러한 광경에 제법 익숙하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판게아 클로니클에는 언데드 몬스터 위주로 쏟아져 나오는 던전들도 제법 많았으니까.
덕분에 오웬은 눈앞의 참상에 매몰되지 않고, 비교적 상황을 멀리까지 돌아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상태창 씨가 준 퀘스트는 시체들을 없애는 게 아니었어!’
그렇다면 그가 해야 할 일은 어디까지나 그 ‘중요한 문서’를 찾는 일.
일단 퀘스트를 완료하기만 하면, 마사인 형님과 재빨리 이곳에서 발을 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쿠어어…….
밀려났던 남자의 시체가 재차 달려들자, 오웬은 이번에는 그의 다리를 노려 도끼를 세게 휘둘렀다.
퍽!
대퇴가 꺾이며 옆으로 비틀거리는 놈을 다시 걷어찬 후, 오웬은 부지런히 눈을 굴려 상태창 씨의 표식을 찾았다.
‘…저기 있군!’
반짝!
한쪽에 놓인 낡은 책장 위, 어수선한 종이 뭉치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낡은 책 한 권. 귀한 고서라는 것은 분명 저걸 의미하는 거겠지.
오웬은 괴물들을 경계하는 척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책를 향해 전진했다.
콰아앙!
그 와중에도 마사인은 착실하게 시체들의 수를 줄여 나가고 있었다. 데카론 나이트에 가까운 상급 기사의 오러는, 성유물 미스라의 격을 얻어 그야말로 경이로운 파괴력을 보이는 중이었다.
후두두둑!
썩은 살점들이 마치 분쇄기에 다져진 고기처럼 사방으로 흩어진다.
연이은 폭발에 낡은 하수도 터널이 통째로 흔들리며 머리 위로 우수수 흙먼지를 떨궜다.
“오웬 저하! 혼자 너무 멀리 떨어지시면 위험합니다!”
이쯤 되자, 그때까지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던 흑의의 마법사도 커다란 동요를 보였다.
“…이럴 수가! 대체 어디서 갑자기 이런 자들이?”
몸을 부들부들 떨던 마법사는, 마음을 결정한 듯 재빨리 몸을 돌렸다. 정확히는, 오웬이 목표로 하고 있는 바로 그 책장을 향해.
‘이런!’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곳은 사악한 마법사의 비밀 연구실. 만약 이곳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면, 마법사가 가장 먼저 챙길 것은 지금까지의 연구 기록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마음이 급해진 오웬은 재빨리 소리쳤다.
“이 사악한 배교자! 수치를 모르는 악마의 앞잡이야!”
“……?!”
멈칫.
하수도를 쩌렁쩌렁 울리는 오웬의 외침에, 마법사가 당황한 기색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화려하게 오러를 터뜨리고 있는 마사인과 달리, 오웬의 활약은 아직까지는 소소한 정도였기에 지금껏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오웬이 외치는 다음 말은, 그로서도 절대 간과할 수가 없었다.
“나는 신성 제국 델크로스의 황자다!”
“…황자?”
“그렇다! 자랑스러운 성황가의 일원으로서, 내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네놈의 목만은 가져가야겠다!”
오웬이 흉흉한 기세로 소리치며, 마법사를 향해 똑바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조심스레 다가가고 있던, 책장이 위치한 마법사의 오른편에서.
“으읏!”
그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마법사는 주춤거리며 차마 책장으로 더는 다가서지 못했다.
그사이 오웬은 훌쩍 시체 하나를 뛰어넘은 후, 일부러 도끼날의 각도를 비틀어 뒤따라오는 아낙의 머리를 난폭하게 터뜨렸다.
휘익- 빠각!
반쯤 녹아내린 뇌수가 악취와 함께 거칠게 비산한다.
“너, 움직이지 말고 거기 가만히 있거라! 곧 네놈의 저주받은 모가지에, 내 신성한 도끼날을 박아 줄 테니!”
일견 황자라기보다는, 전선에서 큰소리로 드잡이질하는 바르샤 야만인에 가까운 작태.
하지만 그 무식한 압박은 마법사를 상대로 소정의 효과를 보였다. 오웬의 기세에 질린 마법사가, 결국 책장을 포기하고는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크으…….”
바로 그때, 오웬은 갑자기 마법사로부터 방향을 돌려 벽 쪽을 향해 빠르게 몸을 날렸다.
타앗!
그리고 시체들 사이로 번개처럼 손을 휘둘러, 마침내 책장 위에서 반짝이는 책자를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잡았다!’
동시에 예의 작은 창이 눈앞에 뾰로롱 튀어 오른다.
[긴급 퀘스트 ? 중요한 문서를 찾아 손에 넣어라! 완료!]
‘해냈어!’
오웬은 책을 품에 안고 우당탕쿵탕 바닥을 굴렀다.
“저하!”
콰아앙-!
유난히 커다란 오러 폭사가 작열하며, 근처에 남은 시체들을 모조리 쓸어 버린다.
갑자기 오웬이 바닥으로 몸을 날리자, 마사인은 크게 당황한 듯했다.
“저하! 무슨 일입니까! 괜찮으십니까?”
“네, 형님! 별일 아닙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던 마법사는-
“…쯧!”
승산이 없다고 여겼는지, 결국 몸을 돌려 급히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이곳이 하수도의 막다른 구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비상시를 대비한 마법사만의 비밀 통로 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
그렇게 새까만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오웬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그의 기척을 쫓았다. 아쉽게도 마법사의 기척은 빠른 속도로 멀어져, 이내 영영 감지할 수 없게 되고 말았지만.
순간 오웬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태창 씨. 왜 마법사를 잡으라고 하지 않고, 굳이 이 문서를 찾으라고 한 거지?’
지저분한 혼전이었지만, 마사인의 활약 덕에 시체들은 금방 활동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다. 만일 오웬이 처음부터 문서를 신경 쓰지 않고 맞섰다면, 어쩌면 아슬아슬하게 마법사를 잡아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문서 또한 모든 처리가 끝난 뒤에 천천히 챙길 수 있었을 터. 한데 어째서, 굳이 이 문서를 먼저 확보하라고 한 것일까?
하지만 의문을 가진 것도 잠시, 오웬은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화르륵!
하수구 한쪽에서부터 갑자기 거센 불길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화륵-!
검붉은 빛을 띤 불길한 화염이었다. 불길은 빠르게 하수도로 밀려와 수로를 뒤덮고, 조각난 사체들을 소각했다. 심지어는 벽에 눌어붙은 살점들과 복잡한 마법진들까지 깡그리 불태웠다.
화르르르륵!
그렇게 빠르게 벽을 타고 번진 불꽃은, 앗 하는 사이에 마법사의 책장과 문서들까지 휘감아 활활 거세게도 타올랐다.
‘…헉?’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그저 오웬은 멍청히 일렁거리는 불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거 조금만 늦었으면, 퀘스트 문서까지 속절없이 날아가 버릴 뻔하지 않았나!
“…저하?!”
그때 저쪽에서 마사인의 경악한 외침이 들려왔다. 오웬은 그제야 정신을 차려 불길과 함께 나타난 이를 바라보았다.
검붉은 불길을 온몸에 휘감고 서 있는 소년. 그건 다름 아닌 모레스였다.
그는 자신을 부르는 마사인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여 그를 응시했다.
“마사인 형님.”
“……!”
오웬은 크게 당황했다.
저 녀석 갑자기 왜 저래? 마사인 형님? 아무래도 애가 어딘가 이상한데?
“모… 뉴비야. 너 괜찮냐?”
그러자 이번에는 모레스가 데굴 눈동자만 굴려 오웬을 바라본다.
“그래. 멍청아.”
“…….”
아니, 뉴비라는 호칭에 용케도 대답해 주는구나 싶긴 한데.
아무리 봐도 녀석의 표정은 부자연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아, 얼굴 근육을 적절히 움직이는 방법도 잊어버린 사람처럼.
오웬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향해 다가가며 물었다.
“야, 일은 어떻게 잘 됐어? 아니면 그사이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던 거냐?”
“…….”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너 어디 아파?”
그러자 모레스는 어딘가 멍한 표정으로 오웬을 바라보더니, 번뜩이는 반사광을 흘리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별건 아냐. 그저 눈앞에 마사인 형님도 있고 너도 있으니까, 뭔가 신기한데? 아무래도 난 아직까지 행복한 악몽 속에 있는 모양이야.”
Chapter 131: Chapter 431
Chapter Text
431. 불로불사의 비서 (4)
이 모든 것이 실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치열한 투쟁으로 점철된 생을 딱히 여긴 누군가가, 그저 선심으로 덧씌워 준 가벼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
신기하게도 그 목소리 하나로, 줄곧 고독하기만 했던 전장에 의미를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가치 있는 싸움이라 여길 수 있었지.
[□□□.]
그래서 지금도 머릿속에 머물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늘 약해질 수밖에 없는 거다.
철저히 복수하겠노라 다짐했던 성가신 녀석을, 어느새 거짓말처럼 용서하고 만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불완전한 환상과 함께했던 짧은 시간. 어쩌면 그것은 드물게도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나날이었으리라.
그래서 그 시간은 동시에 악몽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언젠가 눈을 뜨고 나면, 늘 곁에 있던 목소리가 더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말 테니까.
* * *
“별건 아냐.”
소년은 여상하게 대답했다.
“그저 눈앞에 마사인 형님도 있고 너도 있으니까, 뭔가 신기한데?”
아무래도 난 아직까지 행복한 악몽 속에 있는 모양이야. 그렇게 덧붙인 소년은, 허공을 향해 천천히 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화르르륵!
그 손짓이 신호라도 된 듯, 사방으로 번져 있던 불길이 빠르게 소년 주위로 모여들었다.
마법사의 작업장을 단숨에 소각해 버린 불꽃은, 이제 소년의 몸을 휘감으며 거칠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일견 소년을 통째로 삼킬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기세.
하지만 오웬에게는 그 모습이 어쩐지, 무표정한 소년 대신 혼란스러운 감정을 사위로 표출하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뉴비야, 그 불…….”
“어, 걱정 마. 이건 위험하지 않아. 내 거니까.”
그 말대로 현재 소년은 불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듯 보였다. 하수도의 오수를 모조리 증발시킬 기세로 타오르고 있지만, 소년의 몸은 털끝 하나 상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오웬과 마사인에게도 불은 일정 거리 이상은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럼에도 오웬은 소년을 저 불꽃으로부터 당장 떼어놓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불은 언제나 위협적이었다. 어느 날 그의 부모님을 집어삼켰던 화마가, 그리고 언젠가 꿈속에서 세상을 불태우던 화마가 딱 저러하지 않았던가.
‘잠깐만, 꿈?’
순간 강렬한 깨달음이 오웬의 뇌리를 강타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이런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었다.
검붉은 겁화에 뒤덮인 지옥의 풍경과, 그 속으로 태연하게 걸어 들어가던 소년의 모습.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악몽 속의 광경을.
‘역시 불길하다. 뉴비를 이대로 둬서는 안 돼!’
기억과 함께 그때의 감정을 생생히 되살려낸 오웬은 초조한 심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상황에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이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형님. 마사인 형님! 아무래도 모레스를……!”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소년의 이상을 발견한 순간 한달음에 달려갔을 이가, 지금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형님?”
“…….”
재자 불렀음에도 마사인은 뻣뻣하게 굳은 채 멍하니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뭔가를 크게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또는 뭔가를 치열하게 망설이는 것 같기도 했다.
오히려 오웬의 부름에 반응한 것은 소년 쪽이었다. 그는 눈동자만 굴려 마사인을 일별하더니, 슬쩍 입꼬리를 위로 비틀었다. 조각처럼 생기 없는 얼굴이 처음으로 만들어 낸, 표정이라 부를 만한 모습이었다.
“이것 봐. 역시 꿈이잖아? 마사인 형님이 아직 곁에 남아 있는걸.”
움찔.
순간 마사인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린다.
“저하. 저는…….”
하지만 소년은 그의 뒷말을 듣지 않고, 다시 시선을 돌려 오웬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멍청이. 너도 멀쩡해 보이고.”
“…뭐?”
“시슬레를 구하겠다며 무리하게 회군했을 때부터, 내가 너 그 꼴 될 줄 알았다고. 그러게 말릴 때 진작 말을 들었어야지. 너 때문에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거기까지 말한 소년은 하하하,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 진짜 뭐지?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한번 되짚어 주는 건가? 진짜 지독한 악몽이네.”
…악몽!
순간 소년의 그 한마디가 오웬의 정신을 번쩍 일깨웠다.
‘모르겠어! 대체 뉴비 녀석이 왜 저런 상태가 된 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녀석은 지금을 악몽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해답은 하나뿐이다. 악몽에서 깨어나야겠지.
그리고 고통스러운 악몽에서 벗어나는 쉬운 방법을, 오웬은 적어도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어이, 잠시 이것 좀 볼래? 뉴비야.”
오웬은 품속에 소중하게 갈무리하고 있던 안대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앞으로 내밀며 소년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기억나냐? 이건 귀중한 한정 아이템이야.”
“…….”
“나쁜 꿈을 없애주는 대단한 물건이다.”
소년은 입을 다문 채 오웬이 내민 검은 안대를 빤히 응시했다.
저벅.
오웬이 소년을 감싸고 도는 거센 불길 속으로 또 한 걸음 다가가자-
화악!
불길이 그를 피해 좌우로 갈라진다. 순순히 길을 열어주는 걸 보니 적어도 그를 배척하는 기색은 아니다.
조금 안심한 오웬은 서두르지 않으려 애쓰며 소년을 향해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여기에는 높은 정신 저항도 붙어 있어. 그러니 뭐가 됐든, 이걸 쓰기만 하면 지금의 네 상태도 조금은 호전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오웬은 불길을 헤치고 천천히 나아가, 마침내 소년의 코앞에 멈춰 섰다.
“그런데 말이지, 이건 본래라면 네가 얻은 물건이잖아?”
“…….”
“그러니까 뉴비야. 지금 이걸 네게 돌려줄게.”
소년은 조심스레 안대를 씌우는 오웬의 손길을 막지 않았다.
하지만 오웬은 전혀 알지 못했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안대를 바라보며, 소년이 멍하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런데 오웬. 나는 가급적이면 아직 이 꿈에서 깨고 싶지 않…….’
소년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스르륵-
새까만 천이 완전히 눈을 덮자, 소년의 정신은 이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 * *
…어라?
성진은 멍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뭐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이 온통 환한 빛에 휩싸여 있었다. 어찌나 밝게 빛나고 있는지, 주변의 풍경은커녕 자신의 모습조차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을 지경.
성진은 잠시 눈을 깜박이며 어지러이 흩어진 기억들을 찬찬히 더듬었다.
‘…맞아. 나는 자유 지하도를 찾아왔었어. 하수도 안쪽으로 오웬과 마사인 경을 먼저 보내고, 혼자서 자코모 밀로의 뒤를 쫓으려 했었지. 그런데…….’
혼란스럽다.
‘대체 하수도에 있다가 왜 갑자기 이런 곳으로 날아온 거람?’
바로 그때, 곁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아.]
어?
[…아버지?]
성진은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예의 강한 빛에 눈이 부실 지경이라, 성진은 도통 목소리의 주인을 특정해 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당황하여 허둥거리는데, 다행히 상대방이 먼저 성진에게로 다가왔다.
툭.
가볍게 머리를 두드리는 익숙한 감촉.
[이제 괜찮다. 네가 대단히 상심한 게로구나.]
[상심, 이요?]
영문을 몰라 반문하자, 성황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다.
쓱쓱.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그들은 네가 해친 것이 아니니라. 어차피 구할 수 없는 영혼들이었으니, 고통을 덜어 준 것만으로 너는 그들을 위해 큰일을 한 게다.]
…아.
성진은 그제야 자신이 평정을 잃었던 결정적인 순간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하수도에서 그것들을 보았을 때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썩어 들어가던, 이제는 손을 쓸 수 없이 망가져 버린 수많은 영혼들을.
[너는 그리 느끼지 않은 모양이다만, 그들에게는 너의 겁화가 분명 큰 구원이었을 터. 그러니 더는 그 일로 상심하지 말거라.]
담담하게 울리는 성황의 사념으로부터, 성진은 걱정과 위로의 기색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성진은 저도 모르게 안도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럼 그렇지. 이 양반이라면 늘 곁에서 맴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그러니, 이제 나는 정말로 괜찮은 거야.
[…요즘 제가 뭔가 이상합니다, 아버지.]
푹 안심한 성진은 그에게 전부터 계속 마음에 걸리던 것을 당장 털어놓았다.
[요즘은 뭐든지 생각한 대로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뭔가가 자꾸만 어긋나는 것 같단 말입니다. 대체 제가 왜 이러는 걸까요?]
툭.
또다시 가볍게 머리를 두드리는 감각.
이번에는 어째 약간의 책망이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제는 슬슬 어긋날 때도 되지 않았느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인과의 줄기에, 최대한 무리 없이 간섭하려고 욕심을 부리느라, 그간 네가 그렇게나 스스로의 기억을 지우고 또 지우려 들었거늘.]
…그랬나?
뭔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아들아. 네가 아무리 불필요한 기억들을 선별하려 노력한들, 사람의 기억이란 것은 그리 간편하게 조각나는 것들이 아니란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얽히고 꼬여 있어, 작은 실마리 하나만 틀어져도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렇군요.]
아무리 스스로 정보를 통제하려 들어도 모든 현상으로부터 완전하게 눈을 감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모든 인과와 기억들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까.
[게다가 일전에 내가 널 방해했던 탓도 있겠지.]
귓가에서 나직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오라클의 의지가 일으키는 충돌은 생각보다 파장이 크고 깊단다. 덕분에 나 역시 요즘은 뜻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는구나.]
좀처럼 통제할 수 없는 바르샤의 야만 전사가 대표적인 예겠지.
[거기다 너는 최근에 오웬과도 자주 붙어 있지 않았더냐.]
그야 그랬지.
황궁에서도 자주 만났고, 자유 지하도에도 동행했으니. 정확히는 떼어놓을 때마다 녀석이 귀신같이 알고서 따라온 거지만.
[그런데 오웬은 또 왜 문제가 됩니까?]
[지금 오웬을 인도하는 것이 오라클의 유산이 아니더냐. 하니 아무리 서로 간섭하지 않으려 조심한다 해도,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커다란 변수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게다. 그러니 네 감각이 더욱 혼란스러울밖에.]
어, 그렇구나.
시원한 설명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성진은, 문득 어딘가 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성황을 불렀다.
[저기… 그런데, 아버지?]
그러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온다.
[그래.]
[아버지.]
[그래, 아들아.]
[…….]
연거푸 그를 부르고 난 후에야 성진은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잠깐만.
왜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지?
왜 더 이상 날 모레스라고 불러주지 않는 거야?
왜 굳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도록, 주위를 강한 빛으로 감싸려 하시는…….
툭.
의문이 깊어지기 전에, 또다시 머리를 두드리는 감각이 생각을 방해해 왔다.
[아들아.]
툭. 툭, 툭.
일정한 간격으로 전해지는 감촉에, 성진은 어쩐지 급격하게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 괜찮아. 그래도 아버지는 여전히 날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저항이 만만치 않아, 이제는 나도 슬슬 가봐야 할 것 같구나.]
저항이요?
[혹여 큰일이 날까 싶어 너를 살피러 왔다만, 이미 네가 대비를 다 해 두지 않았느냐.]
대비?
멍하니 그의 말을 곱씹고 있자니, 이번에는 성황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감촉이 느껴졌다.
쓱쓱.
[그러니 너무 불안해하지 말거라. 지금껏 그래왔듯 너는 이번에도 잘 해낼 게다. 내가 매번 너를 찾는 이유는 네가 미덥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저 널 혼자 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니라.]
처음에는 뒤통수를 쓰다듬던 손길은, 이제 정수리를 거쳐 조금씩 앞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에 성진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어… 그래서 이다음은, 그거죠?]
[…….]
[…그렇겠죠.]
그러자 잔잔한 공기의 진동이 느껴졌다. 가볍게 울리는 성황의 웃음소리였다.
[그래. 아주 잘 알고 있구나.]
따악!
예상하고 있던 충격과 함께, 성진의 정신은 급격하게 현실로 밀려났다.
Chapter 132: Chapter 432
Chapter Text
432. 불로불사의 비서 (5)
감정은 기억 없이 독립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기억이 존재하면, 거기에는 크든 작든 감정의 발생이 뒤따르는 것이 필연.
다시 말해 기억과 감정의 결합체는, 인간의 의식을 구성하는 일종의 기본단위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를 고스란히 유지했을 때만이, 인간의 정신은 비로소 연속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
성진은 실로 오랜만에 명료한 정신을 가진 채 눈을 떴다.
영혼이 겪은 기억과 감정이 고스란히 육체로 이어진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 그래서 성진은 바닥에 누운 채, 새삼스러운 심정으로 방금까지의 기억을 곱씹었다.
‘아버지… 평소와는 분위기가 뭔가 달랐어. 내 의문에 대해 직접적으로, 또 자세히 대답해 주셨지.’
성황은 여간해서는 말을 아끼는 편이지만, 간혹 상황이 허락하는 경우에는 지금처럼 성진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 주는 때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라면, 일전에 약차를 마시고서 겪었던 스펙터클 한 자해 쇼 경험을 들 수 있겠지.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야. 최근에 줄곧 신경 쓰이던 부분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버지에게 물어볼 수 있었어.’
그날도 그랬다.
성진이 줄곧 억누르고 있던, 그 낯부끄러운 불안감을 밖으로 표출했던 날, 성황은 그에게 이렇게 반문했었지.
-하지만 이를 생각해 보았느냐? 너는 어째서 진작 내게 이렇게 묻지 않았을까.
이번에도 성진은 뭔가가 계속해서 뒤틀린다는 느낌을 그에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물론 그 질문은, 다음 세대의 오라클인 자신이 이미 무의식적으로 미래의 많은 것들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었지.
그러니 본래라면, 그 의문을 입에 담는 것 역시 인과에 큰 영향을 미쳤을 텐데.
-그럼, 왜 이제야 비로소 그 의문을 소리 내어 말할 수 있게 되었겠느냐?
그래, 어째서 이번에도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답 역시 예전의 기억 속에 있었다. 성황은 그날 성진에게 이렇게 말해 줬으니까.
-그건 지금 네가 어설프게나마 델크로스의 차원을 벗어났기 때문이니라. 한 세계에 온전히 속하기 위한 조건과 제약에 대해, 아마도 너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던 거겠지.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하나뿐이다.
‘설마… 방금까지 내가 아버지와 있었던 곳은 델크로스 차원이 아니었다는 뜻인가?’
처음에 성진은 그저 성황의 영혼이 자신의 곁에 머물다가 말을 걸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은 그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이곳을 떠나 어딘가로 멀리 날아갔었던 건가?
빠르게 돌아가던 머리가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을 때, 성진은 문득 시야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멀쩡한 상태로 눈을 떴는데…….
‘왜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지? 벌써 밤인가?’
성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어?”
하지만 당황하는 것도 잠시, 성진은 이내 두툼한 뭔가가 자신의 시야를 덮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치적거리는 물건을 손으로 잡아 뜯자, 태평하게 눈을 감고 있는 토끼 모양의 자수가 보인다.
‘이건… 한정판 안대?’
기억에 있는 물건이었다. 일전에 유스티티아로부터 헐값에 강탈해 오웬에게 던져줬던 물건 아닌가. 이걸 왜 자신이 쓰고 있는 거지?
“음…….”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지만 도통 떠오르는 게 없었다.
방금 아버지와 만났던 기억은 이다지도 선명한데, 어째서 안대를 쓰게 된 경위는 머릿속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거야?
‘자코모 밀로를 찾은 것까진 기억에 있어.’
성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있었던 일을 잘 모르겠단 말이야. 오웬은 퀘스트를 잘 끝냈나? 하수도에 있던 또 다른 수상한 기척은 잡아냈으려나?’
언제 하수도를 빠져나온 건지, 성진은 지금 작은 천막 안에 홀로 누워 있었다.
성긴 천막 틈으로는 어느새 붉게 번져가는 석양이 비쳐 든다. 기억이 사라진 시점으로부터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뜻이다.
“…….”
게다가 천막 바닥에는, 아마도 마사인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낡은 망토가 깔려 있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어떻게든 제대로 뒷일을 수습했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오웬이랑 마사인 경은 어디 있지? 날 여기 두고 다들 어디로 가 버린 거야?’
평소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드는 마사인 경을 생각하면 이건 꽤나 의외의 상황이다.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안대를 목에서 완전히 벗겨내며 생각하는데, 곁에서 갑자기 신경을 잡아끄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훌쩍…….]
고개를 돌려 보니, 머리맡에 놓인 낯익은 램프가 보인다.
‘…마왕?’
어째서인지 마왕 녀석은 낡은 램프 위에 앉아, 붉은 불꽃을 희미하게 점멸하며 울고 있었다.
[훌쩍! 이성진… 훌쩍, 훌쩍.]
그 딱한 모습에, 성진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뭐야? 저놈 왜 저러고 있어? 임시 치료실을 벗어난 후로, 저 녀석이 우는 소리를 한동안 들은 적이 없는데.
“저기, 마왕아?”
[…훌쩍?]
성진의 목소리에 움찔 울음을 멈춘 마왕이, 불꽃을 파르륵 떨며 물었다.
[이… 이성진?]
“어.”
[이성진…….]
“그래, 맞아. 너 지금 왜 우는 건데?”
[……!]
그러자-
파앗!
갑자기 번개처럼 램프에서 튀어나온 마왕이, 와락 성진의 머리에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활기를 띄며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성진은 숫제 머리카락을 심지로 한 인간 양초 같은 꼬락서니가 되고 말았다.
[우와아앙! 이성지이이인!]
마왕이 눈물 대신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불똥을 뚝뚝 떨어뜨린다.
칙, 치직-!
바닥에 깔린 망토가 타들어 가는 섬뜩한 소리를 들으며, 성진은 생각했다.
어, 오랜만에 머리가 뜨끈한데?
[너 인마!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왜! 왜 지금까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어?]
“그, 그랬나? 안 들렸는데?”
[이 바보야! 그럴 리가 없잖아! 계속, 계속 쉬지 않고 네 이름을 불렀단 말이야! 으아아아앙!]
펑펑 쏟아지는 서러운 울음소리에, 성진은 적잖이 당황했다.
아니, 하지만 정말로 몰랐다고. 방금도 기억을 정리한다고 한참 누워 있었지만, 녀석의 사념 따위는 조금도…….
‘-어라?’
문득 손에 쥐고 있던 검은 안대가 눈에 들어온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방금 전까지 내가 이걸 쓰고 있었던가?
[이성진, 이 바보, 멍청이! 해삼멍게말미잘아아!]
맞아. 이 한정 아이템, 아마도 정신공격 저항 S+ 옵션이 붙어 있었지. 그렇다면 근처의 사념이 모조리 차단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저항이 만만치 않아, 이제는 나도 슬슬 가 봐야 할 것 같구나.
아까 아버지가 말하던 저항이라는 게, 설마?
[이 플라나리아유글레나짚신벌레야!]
“어, 미안. 미안해.”
성진은 생각을 멈추고 얼른 마왕에게 사과했다.
강장동물에서 단숨에 단세포 생물로 떨어지는 걸 보니, 이대로 가다가는 조만간에 염색체 한 조각짜리 바이러스와 동급이 될 판이다.
“내가 잘못했어.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야.”
[이… 이……!]
“정말 미안. 나중에 곰 고기 사 줄게. 맛있는 거 많이 사 줄 테니까, 화 풀어. 응?”
본의는 아니었지만, 권속의 애타는 부름을 무시한 셈이 된 건 사실이니까.
성진 외에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녀석이 돌아가는 상황을 몰라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지는 안 봐도 눈에 선했다.
부스럭.
바로 그때, 익숙한 기척이 다가오나 싶더니 천막 입구가 활짝 열린다.
“모레스. 이제 슬슬 일어… 으헉?”
아무 생각 없이 천막 안으로 머리를 들이민 오웬이, 머리 위에 활활 타오르는 마왕을 이고 있는 성진을 보곤 기겁했다.
“너, 너 괜찮냐, 뉴비야? 지금 머리카락에 불이 붙어 있는데?!”
“음…….”
변명이 궁색해진 성진이 시선을 피했다.
뭐, 괜찮아. 그게 그렇게 됐다.
* * *
성진은 오웬으로부터, 기억 너머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듣자 하니 오웬과 마사인 경이 한창 마법사의 비밀 연구실을 털고 있을 때, 자신이 갑자기 자코모 밀로를 이끌고서 그 장소에 난입했다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뭔가 몽유병 증상 비슷한 걸 보이면서, 불타는 오러로 연구실 전체를 신나게 휩쓸었다나?
“황궁에서 불장난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지. 잠꼬대로 방화를 저지르다니…. 뉴비야, 대체 위험하게 그게 무슨 짓이냐?”
중2병 방화범의 행적은 차치하고라도,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설명이었다.
성진은 어처구니가 없어 되물었다.
“몽유병? 내가?”
“그래. 난 잘은 모르지만 말이야, 뉴비 너 매일 꿈꾸면서 잠꼬대 같은 걸 한다며? 마사인 형님은 괜찮을 거라고 하셨지만, 잠꼬대를 할 정도면 그게 썩 편한 꿈은 아닐 거란 말이지.”
“그래서 나한테 수면 안대를 씌웠다?”
“응. 너도 악몽이라고 자각하고 있는 거 같아서.”
그렇게 대꾸한 오웬은, 멋쩍은 듯 머리에 꽂힌 닭 털 하나를 잡아당겼다.
“그러니까 뉴비야. 이제부터 잘 때는 항상 그걸 쓰도록 해. 이참에 아예 너한테 줄 테니까.”
“…….”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돌려주는 거지. 본래라면 그거, 네가 아무런 대가 없이 나한테 준 거잖아?”
성진의 눈초리가 절로 사나워졌다.
이 자식, 지금 제정신인가? 정작 자기한테 필요한 물건은 있는 캐시 없는 캐시 죄다 긁어 선물이랍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 주고서, 기껏 요행으로 얻은 마지막 안대까지도 날 줘버리겠다고? 이게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네!
휘익-
무심코 손이 올라가려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오웬이 잽싸게 후다닥 물러나며 성진의 눈치를 본다. 연거푸 딱밤을 얻어맞다 보니, 이제는 녀석도 어느 타이밍에 딱밤이 날아오는지 대충 학습한 모양.
“워워, 뉴비야, 진정해! 나도 충분히 여유가 있어서 주는 거니까.”
“여유? 여유우? 틈만 나면 남한테 캐시를 다 쓸어주는 주제에, 대체 무슨 여유?”
“아, 으응. 그런데 그게 말이지…….”
한데 놀랍게도, 주섬주섬 품속을 뒤지던 오웬이 이내 비슷한 안대를 하나 더 꺼내드는 것이 아닌가!
얄미울 정도로 느긋한 표정이 새겨져 있는, 짙은 아몬드 빛의 한정판 토끼 안대였다.
“짜잔! 어때? 놀랐냐?”
“…….”
“퀘스트를 끝낸 다음에 갑자기 눈앞에 특별 세일 창이 열리더라고. 기회다 싶어 냉큼 집어 왔지!”
오웬은 안대를 목에 걸곤,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가슴을 쭉 폈다.
“생각해 봐, 뉴비야. 무려 한정판 아이템을 고작 500 캐시로 얻었다고! 덕분에 이번 퀘스트의 보상을 전부 쏟아부어야 했지만, 그래도 원가를 생각하면 정말 남는 장사 아니겠어? 어때, 굉장하지 않아?”
“그래, 퀘스트…….”
성진은 생각에 잠겨 손을 뒤로 물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아버지도 말씀하셨지. 지금 오웬을 인도하는 것은 이정표, 즉 또 다른 오라클의 유산이라고.
‘그렇다면 이 안대를 내게 양도한 건, 결국은 조모님의 의지라는 뜻일까?’
타이밍 좋게 오웬에게 새 안대를 제공한 걸 보면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겠지.
‘대체 왜지?’
언뜻 생각하면, 아까처럼 성진이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는 걸 사전에 예방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념을 아예 모조리 차단해 버리고, 심지어는 아버지마저 저항을 느낄 정도로 강한 아이템이라니.
‘…아냐.’
아버지는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혹여 큰일이 날까 싶어 너를 살피러 왔다만, 이미 네가 대비를 다 해 두지 않았느냐.
그 말대로라면 실제 안대를 준비한 건 성진의 무의식이라는 뜻이 될 터다. 그러면 성진은 상태창이 준비할 퀘스트를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아니, 아니지. 어쩌면 오웬의 상태창이 성진의 의지를 미리 파악하고서, 이를 옆에서 슬쩍 거들었다고 볼 수도 있는…….
‘어, 이런. 젠장!’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거기에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변수가 하나 더 늘어나니 상황이 이렇게나 혼란스러워지는구나.
‘역시, 아직은 되도록 깊게 생각하지 않는 쪽이 좋을 거 같아.’
잠시 고민하던 성진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정 내렸다.
한데 아직도 간헐적으로 훌쩍거리는 마왕의 램프를 끌어안은 채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오웬이 조심스럽게 성진의 눈치를 보며 의외의 말을 꺼냈다.
“…저기, 근데 뉴비야?”
“어?”
“괜찮으면 말이지, 잠시만 마사인 형님을 좀 만나 줄 수 없겠냐?”
“응……?”
성진은 눈을 깜박였다.
마사인 경을? 왜?
* * *
천막을 나서 오웬의 뒤를 따라가니, 하수도 입구 쪽에 얌전히 포박되어 있는 자코모 밀로가 보였다.
그는 하수도의 이물과 화재로 인한 검댕으로 온통 엉망이 되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시커멓게 변해 가는 안색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도 오랜 기간 마기에 노출된 탓에, 악마가 떠나버린 지금도 느리게나마 침식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한데 그는 그런 안쓰러운 행색을 하고는, 뭐가 그리 기쁜지 성진을 향해 히죽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정화였습니다, 예비된 분이시여! 저의 주인이시여! 저는 진정 이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순간을 목도했나이다!”
“…뭐?”
“당신께서 부패한 미물들을 친히 정화해 주신 것처럼, 언젠가 그 신성한 불길로 이 썩어빠진 세상을 구원해 주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광망으로 번들거리는 말간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오소소 소름이 돋아난다.
‘이거, 좋지 않은데.’
적당히 고분고분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저건 아무래도 너무 가 버린 거 아닌가. 어째 제2의 벨린다를 보는 듯했다.
“…….”
그리고 그의 뒤에는, 경직된 얼굴로 미스라를 움켜쥔 마사인 경이 보였다.
평소의 모습을 생각하면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자코모 밀로를 한 번쯤 타박할 법도 한데, 지금의 그는 그저 굳게 입을 다문 채 무거운 시선으로 성진을 바라볼 뿐이었다.
저 양반이 왜 저래?
“마사인 경.”
그를 부르며 한 걸음 다가가자-
움찔.
마사인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겉으로는 잔잔해 보이는 파동이었지만, 성진은 어째서인지 그 속에 내재되어 뒤엉키는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감지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왜 거기서 그러고 서 있지? 혹시 하수도에서 어딘가를 다치기라도…….”
한데 성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왈칵!
기사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붉게 충혈된 흰자위, 그리고 조소와 비탄이 한껏 뒤섞인 그 얼굴은, 아마도 겨우 버티고 있었을 누군가의 세계가 철저하게 붕괴하는 조짐이었으리라.
털썩!
이윽고 성진의 눈앞에서 힘없이 무릎을 꿇은 기사는, 고개를 조아리며 바닥에 쿵! 머리를 찧었다.
“…죄송합니다, 저하.”
갑자기 흘러나온 사과의 말에, 성진과 오웬은 크게 당황했다.
“형님?!”
“응? 마사인 경. 뭐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하지만 이미 듣는 이를 염두에 두지 않은 사과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제가 그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저만은 저하께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쿵.
기사는 흙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작게 흐느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쿵, 쿵.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하…….”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 속에서-
거듭되는 마사인의 사과만이 공허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Chapter 133: Chapter 433
Chapter Text
433. 불로불사의 비서 (6)
돌이켜보건대, 그 당시는 마사인의 인생에서 가장 한가로운 나날이었다.
“마사인 형님! 왔구나?”
교대 시간에 맞춰 청장미궁에 들어서니, 그를 기다리고 있던 모레스가 장난감 목검을 들고서 팔짝팔짝 뛰어온다. 언제나처럼 빛바랜 붉은 천을 목에 두른 채였다.
“저하! 그렇게 뛰시면 넘어지십니다!”
도도도 달려오던 모레스가 막 장난감에 채여 넘어지기 직전, 마사인은 번쩍 그를 위로 들어 올리며 주의를 줬다.
그러자 아이는 그것 역시 놀이라고 생각했는지 꺄륵 웃음을 터뜨리며 팔을 바동거렸다.
“근데 형님, 로건은?”
“로건 저하는 지금 수업 중이십니다.”
“수업?”
“네, 아마 저녁까지는 많이 바쁘실 겁니다. 최근에는 새로 검술 수업도 시작하셨으니까요.”
당시 1황자였던 로건은 이미 여러 방면에서 남다른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세가 등등해진 황후가, 그의 교육에 점점 열을 올리기 시작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반면에 리자베스 황비는 이상할 정도로 모레스를 방치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아이의 교육을 신경 쓰기는커녕, 어째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꺼리는 눈치였다. 이따금 친정인 아세인 공국으로 떠나 오랜 시간 황궁을 비우는 일도 잦았지.
황비의 태도가 이 지경이니, 황도의 유력 인사들도 자식을 모레스 황자의 배동으로 보내길 꺼렸다. 그렇다고 신분이 한참 낮은 시종들이 그의 격한 놀이에 어울려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성황이 되도록 시간을 낸다고는 하지만, 한창 활동적인 아이에게는 턱없이 부족할 따름이었다.
덕분에 모레스는 어느새 놀이방에서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데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
보다 못한 마사인이 결국 근무 시간에 호위를 빙자한 놀이 상대가 되어주곤 했다.
문제는 그것들이 하나같이 기사의 본분과는 거리가 먼 행위라는 거겠지.
지금만 해도 그렇다. 가상의 적을 상정하고서 열심히 베개를 합공하는 따위의 어수선한 놀이라니!
귀한 성유물인 미스라가 한낱 베개의 먼지를 터는 데 사용되다니, 만일 아카데미의 학장 아르망이 알았다면 눈물을 쏟으며 땅을 쳤으리라.
“에잇!”
퍽퍽!
놀이 상대가 생긴 모레스가 신이 나서 베개를 두드려댔다.
“천사를 괴롭히지 마! 이 못된 마녀야!”
“네? 저하, 지금 우리가 무찌르는 것이 악마가 아니라 마녀였습니까?”
“응!”
철없는 어린아이의 놀이일 뿐이었지만, 거기에도 나름의 구체적인 설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얏! 내 호두까기를 받아랏!”
옆에서 엇박자로 베개를 구타하던 마사인이 또다시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데 저하, 목검에 이름도 지으셨습니까?”
“응!”
“하지만 호두까기는 폐하의 애검이 아닙니까. 이름이 똑같으면 나중에 헷갈리지 않으실까요?”
“음……?”
그러자 모레스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더니, 이내 마사인을 향해 해맑게 웃어 보였다.
“몰라. 하지만 형님, 그래도 내 검은 호두까기야!”
“그, 그렇습니까?”
“응!”
퍽! 퍼벅! 퍽!
두 사람의 열띤 공격에, 로한산 고급 오리털 베개는 이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쩍 갈라진 베갯잇에서 터져 나온 하얀 깃털들이 마치 눈처럼 사방으로 흩날린다.
“…….”
마사인은 짐짓 걱정스러워졌다.
엉망이 된 놀이방을 본 사용인들이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할까. 황자가 성황가의 체통을 지키도록 곁에서 돕지는 못할망정, 함께 사고나 치는 못난 황족이라 흉을 보지는 않을까?
하지만-
“아하하하하!”
흩날리는 깃털 속에서 모레스가 밝게 웃는 모습을 보니, 남들의 시선이야 어떻든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했다.
“마사인 형님! 이제 우리 수련 놀이해!”
그러고도 기운이 남았는지, 모레스는 이후 한동안 마사인과 투닥투닥 목검을 맞부딪쳤다.
탁! 타닥!
아직 짤막한 팔로 열심히 휘두르는 목검이 황궁 기사인 마사인에게 위협이 될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간혹 예기치 못한 사각을 찔러오는 아이의 솜씨는 보기보다 꽤 매서운 구석이 있었다.
늘 천재라 칭송받는 로건 황자님에 가려 있지만, 어쩌면 모레스 황자님 역시 나름의 천재가 아닐까? 마사인은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가 저물고 이윽고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 되자, 모레스는 겨우 지친 기색으로 목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수련 다 했으니까, 이제는 명상할 차례야!”
“하하…….”
그래도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는지, 아이는 명상을 하겠다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물론 데굴데굴 놀이방을 구르며 먼지를 쓸고 다니는 게 제대로 된 명상은 아닐 테지만.
그렇게 두어 바퀴를 굴러다닌 모레스는, 부스스해진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상 끝나신 겁니까?”
“응. 근데 지금쯤이면 로건의 수업도 다 끝났을까?”
“네,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럼 형님! 우리 지금 로건이 청장미궁에 잘 있는지 살펴보러 가자!”
최근에 아이가 부쩍 로건 황자의 안부를 자주 묻는다 싶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마사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게나 함께 붙어 다녔으니, 혼자서는 제법 쓸쓸할 법도 하겠거니, 생각하면서.
* * *
황궁 내의 기류는 이토록 평화로웠지만, 대륙의 분위기는 아직까지도 어수선했다.
무려 천년의 성도에까지 그 마수를 들이민 악마종들이다. 그간 암암리에 대륙을 잠식한 놈들은, 젊은 성황이 힘으로 세력권을 넓히기 시작하자 그야말로 미친 듯이 들고 일어났다.
잊을 만하면 지하 교단이 문제를 일으키고, 악마 계약자들이 날뛰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잔악한 악마 숭배 행위가 이어지고, 대규모의 인신 공양과 함께 강력한 악마종이 연일 소환되었다.
그러니 거기에 휘말린 백성들의 고통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
이제는 망국이 된 오르토나 한복판에, 강력한 1급 악마종이 나타난 것은 그 무렵의 일이었다.
“아바마마! 제국의 힘이 아니면, 그리고 아바마마의 강력한 신성력이 아니라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습니다! 비록 제국의 품을 벗어났다고는 하나, 그들 역시 가련한 주신의 백성들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니 부디 불쌍한 그들의 처지를 굽어살펴 주십시오!”
타고난 성정이 정의롭기 때문일까, 로건 황자는 무려 식음까지 전폐하며 절절히 성황에게 읍소했다.
“로건…….”
모든 대소신료들이 어린 황자의 올곧은 기개에 감탄했다.
하지만 마사인이 보기에 성황은 썩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까지 제국의 주변도 완전히 정비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럴 때 제국의 구심점이 되는 이가 어찌 타국을 위해 함부로 자리를 비운단 말인가.
“이는 곧 델크로스의 신민들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아바마마! 저 강력한 악마종이 이대로 아무런 방해 없이 사람들을 집어삼키게 되면, 끝내는 제국을 향해 이를 드러내는 중대한 위협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로건 황자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늦든 빠르든, 결과적으로 악마는 황도를 향해 움직이게 되겠지.
자신이 직접 성기사단을 이끌어 악마를 토벌하는 것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니, 피해가 커지기 전에 손을 쓰는 것도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
하지만 그럼에도 성황은 한참을 망설였다. 어째서인지 지금은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강력한 예감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성황은 친정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비탄에 잠겨 있던 로건 황자가,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싸우겠노라며 몰래 짐을 싸서 빠져나가려다 그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아들아.”
한 손에 잡혀 대롱거리는 아이를 바라보며, 성황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더라도 너는 아직 어린아이다. 홀로 오르토나로 향해본들 지금의 네가 그곳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하오나, 아바마마…….”
드물게 우울한 표정을 드러내는 아들을 가만히 응시하던 성황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로건. 내가 너와 함께 갈 테니.”
그렇게 성황은 1개 성기사단과 1개 기사단을 이끌고는 직접 악마종 토벌을 강행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옳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직접 북부로 나간 성황이 거의 피해 없이 악마종을 잡아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형 악마종 토벌에 갈려 나가는 엄청난 인원을 생각하면, 성황의 업적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
여기에는 또 부가적인 소득도 있었다.
첫째는 제국에 대한 북부의 반감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어지러운 정세를 틈타 소요를 일으키려던 이들을 일시에 잠재우는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델크로스의 성황은 진정 괴물인가!’
1급 악마종을 단칼에 처단하는 그 엄청난 무위를 직접 목도하게 되면, 아무리 강렬하게 불타는 투쟁 의지라 할지라도 일시에 싸늘하게 식어 버리기 마련.
무엇보다, 북으로 움직이는 과정에서 성황은 예상치 못한 정보를 얻기도 했다. 어쩌면 죽은 그의 첫 번째 연인인 마리가, 그의 아이를 세상에 남기고 갔을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정보를.
“저하… 아니, 마사인 님. 그 해수의 뿔은 대체 왜…….”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장님. 그저 모레스 저하의 당부가 있어서요.”
“모레스… 저하께서 말입니까?”
그리고 이번 토벌대에는 의외로 마사인도 끼어 있었다. 언제 또다시 오르토나로 탈주할지 모르는 로건을 곁에서 늘 감시해 달라고, 모레스로부터 직접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님. 북부로 가는 김에 거기에 까만 렉스가 있나 찾아봐 줘.
-…까만…? 뭐요?
-렉스. 까만 렉스야. 막 하늘을 날아다니니까, 형님도 놈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 해!
마사인은 모레스의 당부를 무심코 웃어넘겼다. 이제는 머릿속으로 없는 해수까지 만들어 내다니, 어린아이의 상상력이란 매번 예상을 초월하며 사람을 놀라게 만들지 않는가.
하지만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가 아이를 실망시킬 수도 없는 일. 그래서 마사인은 렉스를 찾는 대신, 오가는 길에 잡은 해수의 뿔을 조금 잘라서 챙겨 두었다.
‘놈을 만났는데 멀리 날아가 버렸다고 해야겠군. 이 정도면 모레스 저하께서도 좋아하시려나?’
하지만 뿔 조각을 고이 가지고 돌아온 마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모레스 황자가 아닌 난데없는 그의 실종 소식이었다.
* * *
황궁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물 샐 틈 없이 돌아가는 경계 속에서, 어떻게 귀한 황자가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어!
-소문 들었습니까? 평소 저하를 탐탁잖아하시던 리자베스 황비께서, 직접 아들을 데리고…….
-쉬잇! 이보게, 제발 근거 없는 억측은 삼가게!
-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듣자 하니 실은 모레스 저하께서 스스로 빠져나가셨다더군요. 경비들을 몰래 따돌리고, 유유히 청장미궁 밖으로 걸어 나가셨다는…….
-아니,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어린아이가 어떻게 혼자 황궁의 경비를 따돌릴 수 있어? 모레스 저하는 이제 고작 다섯 살이네!
-하지만 청장미궁 경비를 섰던 기사가 직접 그렇게 증언했다고 합니다.
남겨진 단서 하나 없이, 사건은 그대로 오리무중에 빠지는 듯했다.
하지만 성황이 직접 나서자 역시나 일은 금방 해결되었다. 물론 그 과정이 그리 평화적이지는 못했지만.
서늘한 기세로 지하 회랑으로 내려간 성황은 금방 사라진 모레스 황자를 찾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두 팔로 아이를 단단히 끌어안고 황궁으로 되돌아왔다.
“……!”
“……!”
하지만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일제히 비명을 집어삼켜야 했다. 성황의 하얀 법복 자락이 질퍽한 핏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철퍽!
그의 걸음걸음마다, 길게 끌리는 피의 길이 펼쳐진다.
“폐하……!”
심지어는 성황의 충실한 시종장, 루이스조차 감히 그의 곁으로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금 그를 조금이라도 건드렸다가는, 그대로 모든 것이 끝장나고 말 것 같다는 본능적인 위기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성황이 내뿜는 기세는 차갑고도 또 살벌했다.
마사인 역시 사람들 틈에 섞여 그 모습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피에 젖은 성황과, 검은 천에 둘둘 감싸인 작은 아이의 신형, 밖으로 조금 삐져나온 창백한 아이의 손을.
그리고-
촤르르르르…….
그 위를 빠른 속도로 기어다니는 괴상한 형태의 붉은 문자열을.
“……!”
마사인의 손끝이 긴장으로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그것은 그가 꿈에라도 다시 볼까 두려워하던, 악마가 남긴 붉은 저주의 흔적이었다.
Chapter 134: Chapter 434
Chapter Text
434. 불로불사의 비서 (7)
그날.
수도로부터 끈질기게 쫓아온 붉은 저주가 기어이 관문 요새를 뒤덮었던 날.
마사인의 눈앞에 펼쳐졌던 지옥의 광경은 아직도 그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마, 마사인 님…. 어서… 피하셔야…….
가장 먼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것은 마사인의 전담시녀였다. 신성력 하나 없는 일반인이었기에, 다른 이들보다 저주에 취약했으리라.
-아아, 마사인 저하! 어째서 저하 혼자만 그리도 멀쩡하신 겁니까? 부디, 부디 저희에게도 성황가의 축복을 나눠 주십시오!
방금까지만 해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던 신실한 사제가, 저주에 잠식하는 순간 갑자기 돌변하여 마사인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그는 주신의 은총을 홀로 독점한 마사인을 비난하고 또 비난하다, 끝내 시뻘건 핏물을 토해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부디 보중하시옵소서. 황위를 이을 적통은 오직 마사인 님뿐입니다.
그렇게 당부하던 친위대 기사단장까지 피눈물을 흘리며 절명하자, 마침내 관문 요새에는 마사인 외에 더 이상 숨 쉬는 자가 남아 있지 않았다.
쏴르르르르…….
그리고 죽은 이들의 몸을 빼곡하게 뒤덮어 가던, 그 붉은 저주의 글자들.
“……!”
한데 지금, 수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때와 똑같은 문자들이 모레스의 작은 손 위를 기어다니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분해하고자 기를 쓰고 달려드는 집요한 개미 떼처럼.
마사인은 딱딱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다가갈 수가 없다.
어느새 삶의 목표처럼 되어버린 소중한 아이였지만, 그에 대한 걱정으로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마사인은 도저히 아이를 향해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모레스……!’
결국 마사인은 그 자리에 서서, 성황과 모레스가 청장미궁 쪽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흉흉한 소문이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경계가 삼엄한 황궁 지하에 안식의 교단이 숨어들었다.
-그들은 성황이 없는 틈을 타 대규모의 인신공양을 자행했고, 결국 사악한 무언가를 이 세계에 불러들이고야 말았다.
17대 성황이 집권한 이후 처음으로 들려오는 뒤숭숭한 소식에 사람들은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성황이 침묵을 유지하고 정교회도 딱히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소문은 곧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대부분 반신반의한 탓도 있었다.
물론 이단의 의식이 행해진 현장-검은 제단과 침식으로 타들어간 수많은 시신들, 그리고 성황의 손에 베여 유명을 달리한 자들의 수급-을 직접 수습해야 했던 이단 재판부는, 청장미궁을 향해 계속 미심쩍은 시선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침식 현상이 생겼다는 것은, 분명 마기를 가진 무언가가 그 장소에 나타났다는 의미.
그리고 모레스 황자는, 사악한 악마 숭배 행위가 일어났던 현장에 있었다.
“그러니 당분간 청장미궁 출입은 자제하셔야 합니다, 마사인 님.”
마사인이 정복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자니, 베니투스 추기경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주의를 준다.
그는 마사인이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까지 후견인이 되어준 자로, 최근까지도 피후견인의 처소를 오가며 이런저런 간섭을 하는 중이었다.
마사인은 꼬장꼬장한 노인을 돌아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불가능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 현재 근무지는 청장미궁입니다.”
“하면 마땅히 다른 기사와 근무지를 바꿀 일입니다!”
“각하. 저는 이제 일개 기사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임의로 근위대의 일정을 조정하는 게 가능할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버럭 노호성을 질렀다.
“왜 안 됩니까?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귀한, 성황가의 진정한 적장자가 아니십니까!”
“…….”
생각보다 강한 기세에 차마 대꾸하지 못하자, 추기경은 성큼성큼 마사인을 향해 다가왔다. 왜소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묵직한 발걸음이었다.
“제가 모두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마사인 님은 추호라도 그곳에 발을 들일 생각은 마십시오!”
“추기경 각하.”
“아시겠습니까? 마사인 님. 그날 모레스 황자를 휘감고 있던 것,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악마종의 마기였습니다!”
베니투스는 이단 재판부의 수장이다. 오랜 세월 악의 세력과 대적해 온 만큼, 그 누구보다도 악마들을, 그리고 이단의 짓거리들를 잘 알고 있었다.
“저는 그 삿된 것들의 생태를 압니다. 모레스 황자를 두고 그것들이 벌인 의식, 그건 분명 그릇을 비우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릇을 비우다니, 그게 무슨…….”
“바로 악마를 그 몸에 직접 강림시키는 의식이었다는 뜻입니다!”
“……!”
마사인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베니투스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연이어 무서운 말들을 쏟아냈다.
“거기다 그 많은 수의 인신공양, 그건 절대 하루 이틀 준비된 의식이 아닙니다. 어쩌면 모레스 황자는 날 때부터 그들의 표적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마사인 님. 혹시 지하 교단에서 말하는, 예비된 자에 대한 소문을 들어 보셨습니까?”
“그만…….”
“악마의 사도들에게 축복받은, 사악한 악마를 위해 준비된 그릇! 그게 바로 모레스 황자의 진정한 실체일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아니, 이미 강림 의식이 끝났으니 어쩌면 그것은 더 이상 모레스 황자가 아닐지도 모르-”
“제발 그만 좀 하십시오!”
버럭 소리를 지른 마사인은, 큰 괴로움에 휩싸여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부정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부정했으리라. 그러나 베니투스 추기경의 말대로, 마사인은 삿된 무언가가 모레스의 몸을 침범한 광경을 직접 눈으로 목도했다.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모레스가 그런 큰일을 겪었는데, 정작 자신은 그의 곁에 없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모레스의 잘못이 아님에도, 앞으로 다시는 아이를 향한 두려움의 감정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베니투스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마사인 님. 당신이 남은 혈육들을 귀히 여긴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빤히 눈에 보이는 현실까지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꽈악.
노인의 마른 손아귀가 마사인의 옷깃을 갈퀴처럼 잡아챘다.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만일 그날 성황 폐하께서 막지 않으셨다면, 모레스 황자는 분명 사악하고 끔찍한 뭔가를 델크로스로 불러들이는 통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
“아니, 어쩌면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마사인의 눈을 빤히 응시하는 베니투스의 눈이 기이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지금까지도 청장미궁에서 희미하게나마 더러운 마기가 느껴집니다. 그러니 어찌 알겠습니까? 그 삿된 것이 아직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모레스 황자의 몸속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을지를 말입니다!”
* * *
“…황비마마.”
“…마사인 님.”
청장미궁 앞에서 마사인은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주변의 불편한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아이를 보는 시늉이라도 하기 위해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한 리자베스 황비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에는 생전 처음 보는 노인이 하나 서 있었다.
꾸벅.
본래 서먹하던 두 사람은, 적당한 예를 갖추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제가 하필이면 이리도 어수선한 시기에 황비마마를 찾아왔군요.”
마사인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노인, 갈레노 의원이 작은 목소리로 황비에게 소곤거렸다.
“아니, 아니다.”
“한데 마마. 어찌 발을 멈추십니까? 이곳에 황자님을 보러 오신 것이 아닙니까?”
노인의 물음에, 황비는 대답 대신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엇이 그리 저어되십니까?”
“마침 잘 되었군. 전부터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네, 갈레노 의원. 그 애가…….”
잠시 주저하던 리자베스 황비는,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오랜 의문을 조심스레 끄집어냈다.
“정말로 ‘그것’이 내가 낳은 아이인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심장에 파묻혀 있던 의심은, 오랜 시간 퉁퉁 부어오르고 곪아 터져 마침내 피 대신 뚝뚝 고름을 흘릴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니 본래라면 차마 하지 못했을 질문을 구태여 입에 담게 되는 것이다.
“그대가 더 잘 알 것이야, 갈레노 의원. 나는 본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다.”
한데 성황을 만난 이후, 그녀는 마치 거짓말처럼 모레스를 가지게 되었지.
기적이라며 마냥 순수하게 기뻐할 수는 없었다. 아이를 가진 후, 그녀의 주위를 끊임없이 어지럽히던 여러 가지 불길한 징조들 탓이었다.
심지어는 장기간 이어진 난산으로 인해, 그녀는 막상 아이가 탄생하던 순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허허,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걱정 마시고 저를 믿으십시오, 리자베스 님. 모레스 황자님이 탄생하시던 날, 저는 분명 아가씨의 곁에 있었습니다.”
“…….”
“실로 주신의 은총이었지요. 아직도 그 아름다운 기적을 믿지 못하십니까? 리자베스 아가씨.”
갈레노는 일부러 어릴 적의 친근한 호칭을 부르며 그녀를 부드럽게 타일렀다.
“주신께서는 혹한에 불꽃이 일고 사막에서 풀이 자라나는 기적이 일어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면 이를 세상에 보이기 위해서는, 먼저 그 바탕이 춥고 메마른 땅을 준비하는 것이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아가씨의 불임증 역시, 주신께서 당신의 사도로 하여금 친히 역사케 하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모레스가, 주신이 내리신 아이라고?”
“물론입니다, 아가씨. 모레스 황자님께서는 분명 차기 성황이 되실 겁니다. 그렇게 모든 이의 경탄을 받으며,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통치하게 되시겠지요. 그분의 힘 아래서 주신의 사도들도 마침내 자유를 되찾게 될 겁니다.”
갈레노 의원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황비의 떨리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밖으로는 언제나 굳건한 날을 세우고 있지만, 내면은 누구보다도 심약한 자신의 어린 아가씨를.
“아시겠습니까? 당신의 아이, 모레스 황자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하지만 리자베스는 더 이상 갈레노의 장황한 설명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말 중에서도 유난히 귀를 잡아끄는 단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차기… 성황…….”
뇌리에 깊게 박혀오는, 무척이나 선명하고 달콤한 단어.
“그래. 모레스, 그 아이가 차기 성황이 될 수만 있다면…….”
작게 되뇌던 리자베스의 눈에, 서서히 옅은 희망의 빛이 어렸다.
“그것은 실로 완벽한 증거가 될 수 있겠구나. 내가 삿된 것이 아닌, 진정한 성황가의 아이를 낳았다는 증거가!”
* * *
마사인이 놀이방에 도착했을 때, 마침 그곳에 있는 것은 모레스 혼자가 아니었다.
“위험하니까 너무 높이 올라가지는 마, 모레스.”
“응!”
방 중앙에는 커다란 가구들과 장난감 목마들이, 묘하게 안정적인 구조로 얼기설기 쌓여 있었다.
높은 곳을 좋아하는 아이가 기어오르기 딱 좋아 보이는 모습. 천장까지 닿는 저 구조물을 쌓아준 것은, 필시 로건 황자일 것이었다.
“…….”
그것은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보통 로건은 이렇게 놀이방을 어지르기보다는 장난감을 여기저기 늘어놓는 모레스에게 잔소리하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어처구니가 없어 형제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로건이 그의 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 마사인 형님! 오셨군요.”
“네, 한데 저하께서는 지금 한창 수업할 시간이 아니었습니까?”
“수업은 한동안 줄이기로 했습니다.”
…대체 무슨 수로? 성황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후가 제법 강경하게 밀어붙인 걸로 아는데?
그러자 로건이 조금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부끄럽게도 이 나이에, 어마마마 앞에서 떼를 조금 써 봤지요.”
자신의 무리한 부탁으로 성황이 궁을 비운 사이, 모레스에게 사단이 난 것이다.
바른 성정을 가진 로건 황자로서는 당연하게도 이에 대해 큰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그래서 어마마마께, 모레스가 걱정되어 밥이 안 넘어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그건 떼라기보다 반쯤 협박한 거 아닌가? 마사인은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황후가 한발 물러설 만도 했다. 자신의 아들이 본격적으로 뭔가를 걱정하기 시작하면, 정말로 몇날 며칠이고 식음을 전폐할 수 있다는 것을 익히 경험한 탓이겠지.
“아하하하!”
다행히도 모레스는 평소의 쾌활한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오랜만에 로건과 마음껏 놀게 된 덕분인지, 아이는 구조물에 매달려 유독 기분 좋게 몸을 흔들어대고 있다.
-지금까지도 청장미궁에서 희미하게나마 더러운 마기가 느껴집니다. 그러니 어찌 알겠습니까? 그 삿된 것이 아직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모레스 황자의 몸속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을지를 말입니다!
순간 베니투스 추기경의 경고가 머리를 스쳐지나갔지만, 마사인은 그 기억을 지우려 애쓰며 가만히 아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꾸 뛰어내리지 마, 모레스. 위험해.”
“아하하! 싫어!”
“야!”
예전처럼 시끌벅적 정겹기만 한 모습에, 마사인은 서서히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단지 이상한 점은, 때때로 로건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모레스에게 신성력을 쏟아부었다는 점이지만.
“왜 그래? 로건, 나 안 다쳤는데?”
“네가 잘 몰라서 그래. 그렇게 높은 데서 자꾸 뛰어내리면, 나중에는 다리가 아파 와서 잠도 제대로 못 잘걸?”
“음? 그래?”
로건은 마치 뭔가를 걱정하는 것 같기도, 혹은 경계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마사인은 저 조숙한 동생의 깊은 속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었다. 그저 모레스의 일을 무척 마음 쓰고 있었구나,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
그렇게 겉보기에는 무척이나 평화로운 저녁 시간이 흘러갔다.
“모레스, 이제 그만 놀고 내려와.”
창밖이 어둑어둑해지자, 로건이 거세게 흔들리는 목마를 붙잡으며 모레스에게 말했다.
“슬슬 잠자리에 들 시간이야.”
“싫어. 오늘 더 놀 거야! 내일은 너 수업한다고 안 올 거잖아.”
“괜찮아. 내일도 올게.”
“음…….”
그러자 모레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천진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근데 난 아직 잠 안 오는데?”
“그럼 내가 자장차를 타다 줄까?”
“음…….”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모레스가 대답했다.
“응! 좋아!”
“그래,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그렇게 해서 방을 나서게 된 로건은, 잠시 걱정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높은 구조물 가운데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있는 모레스가 조금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힐끔 마사인을 보며 생각했다.
‘뭐, 괜찮겠지. 마사인 형님도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놀이방에 둘만 남겨지자, 마사인은 물끄러미 모레스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아이는 영차 영차 팔다리를 움직이며 더 높은 곳으로 기어 올라가려고 끙끙대는 중이었다.
“…저하.”
“응?”
“저하께서는 왜 그렇게나 높은 곳을 좋아하시는 겁니까?”
무심코 튀어나온 물음이었다. 워낙 모레스가 아기 때부터 보이던 습성이기도 했고, 또 어린아이에게 물어봤자 제대로 된 대답을 들으리라 기대하지 않았기에 지금껏 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모레스는 순순히 답을 주었다.
“연습하는 거야.”
“연습, 요?”
“응. 그래야 나중에 훨씬 더 높은 곳에 올라가도 잘 할 수 있을 테니까!”
“…….”
미래를 대비한 연습이라니. 어린아이가 한 것치고는 꽤나 의외의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하. 연습이라면 그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은 위험… 엇!”
갑자기 아이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자, 놀란 마사인이 황급히 달려들며 모레스를 향해 팔을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가려진 모레스의 셔츠 사이로, 빠르게 기어가는 붉은 문자열이 보인 것은.
쏴르르르르…….
“……!”
마사인의 몸은 그 자리에 굳게 경직되었다.
“어?”
어정쩡하게 내밀어진 팔 사이로 스쳐 지나간 모레스가-
쿵!
바닥으로 떨어지며 세게 머리를 찧고 말았다.
“……!”
“…….”
모레스는 이전처럼 크게 울음을 터뜨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상황에 놀란듯, 조금 멍한 얼굴로 마사인을 올려다봤을 뿐.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아이의 눈.
그 깊은 회색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어째서인지 마사인은 가슴 한편이 서늘하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Chapter 135: Chapter 435
Chapter Text
435. 불로불사의 비서 (8)
아이가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 어쩌면 가족이라 믿고 따랐던 이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마사인은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다.
하나 정작 그가 모레스의 눈동자에서 발견한 것은, 지금껏 애써 숨기려 해왔던 스스로의 두려움과 어리석음, 그리고 무능함이었다.
마사인은 그 불가해한 시선 속에서 철저하게 해체되었다.
절대자의 심판대에 선 하찮은 영혼이 된 느낌.
자신의 나약한 본질이 하나도 남김없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느낌.
끝없는 심연에 빠져, 종국에는 완전히 어둠 속에 삼켜질 것만 같은 막막한 느낌…….
“…….”
깜박.
그 마법과도 같은 기묘한 시간은, 아이가 눈을 한 차례 깜박이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모레스는 꾸물꾸물 자리에서 혼자 일어나더니, 이내 아무런 말 없이 바닥에 놓인 장난감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저하.”
“응? 왜?”
“…….”
아무렇지도 않은 반문에 오히려 마사인은 말문이 막혀왔다.
다행히 어색한 순간은 금세 지나갔다. 잠시 후 로건이 좋은 향이 나는 찻잔들을 들고 놀이방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모레스를 발견하곤 눈이 동그래졌다.
“너 왜 그러고 있어? 모레스. 어디 아파? 오러가 많이 흐트러졌는데?”
이제 막 여섯 살이 되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예리함이었다. 그러자 모레스가 조금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아닌데?”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너 지금 분명 어딘가가 안 좋아.”
로건은 찻잔을 내려놓고서 황급히 모레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동생의 상태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뭐야? 너 머리에 혹이 났잖아. 무슨 일 있었어?”
“몰라. 아무 일 없었어.”
그 고집스러운 대답에서 미약한 떨림을 감지한 마사인은, 그제야 아이가 잔뜩 동요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신이시여, 맙소사!’
어처구니가 없었다. 비루한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정작 아이가 받았을 상처와 충격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니!
“…그래.”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느낀 걸까. 로건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모레스의 뒤통수에 신성력을 흘려주었다.
그렇게 해서 모레스는 겉으로는 꽤나 멀쩡한 모습으로 자장차를 마신 뒤 잠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곧바로 차를 모조리 토해냈다.
“웩!”
뇌진탕이었다.
* * *
그 일이 있고 난 뒤, 마사인의 얼굴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내고자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모레스의 몸에는 때때로 붉은 저주의 글자들이 출몰했고, 마사인은 점점 아이의 곁으로 다가가는 것이 두려워졌다.
모레스 또한 마사인의 그러한 변화를 눈치챈 것이 분명했다. 그가 청장미궁에 들어설 때면 평소처럼 밝은 얼굴로 반겨주었지만, 더 이상은 전처럼 덥썩 안겨 오거나, 거리낌 없이 팔에 매달리는 일이 없어졌으니까.
‘역시 근무지 변경을 신청해야 할까…….’
잠시 그런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어설픈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 결코 서로에게 좋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마사인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러다 정작 필요할 때 호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한데 그즈음에 이르러, 모레스의 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껏 아이를 방치하다시피 하던 리자베스 황비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갑자기 청장미궁에 드나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엄마마마라니, 그게 뭐냐! 제대로 어마마마라고 불러 보거라. 어서!
-아직도 아이가 예법 수업을 듣지 않는다고? 시종장은 지금껏 뭘 하고 있었는가!
-듣자 하니 로건은 벌써 오러 입문에 들었다지? 모레스, 너도 성황가의 아이이니, 분명 로건처럼 검술에 뛰어난 소질을 보일 게다.
-신성력이 없으면 뭐 어떠냐. 대신 더욱더 신학 공부에 매진하려무나.
갑자기 수업 시간이 대폭 늘어난 모레스는, 곧 로건보다도 훨씬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자연히 마사인이 모레스를 마주하는 시간도 줄어들게 되었고.
‘모레스…….’
마사인은 심히 아이가 걱정스러웠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아이가 갑작스러운 수업들을 얼마나 힘겨워하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한데 리자베스 황비의 간섭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들었습니까? 글쎄 황비께서 성황 폐하께 새로운 별궁을 지어 달라고 요구했답니다. 오로지 모레스 황자만을 위한 완벽한 별궁을요!”
“네에? 아니, 폐하께서 그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셨답니까?”
“폐하께서 언제 황후마마나 황비마마들의 부탁을 거절하신 적이 있답니까? 거기다 리자베스 황비의 친정이 그 대단한 아세인 대공가입니다. 대공이 투자하는 금액도 제법 만만치 않다던데요.”
“저런! 황후마마의 심기가 무척 불편하시겠군요. 당분간은 우리도 그분의 눈치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황비가 모레스를 몇 날 며칠 루비궁에 붙잡아 두는 일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니 자연히 마사인의 호위 업무도 대폭 줄어들 수밖에.
“…….”
이제 마사인의 고민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더는 둘의 서먹해진 관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으니까.
‘모레스가 황비의 과도한 간섭으로 허덕이는 게 빤히 보이는데, 그걸 이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마사인은 성황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라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나름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모레스의 몸을 침범한 그 불길한 저주의 문자들.
‘숙부님에게 해결하지 못할 저주는 없어. 그날 관문 요새에서도 내게 쓰인 끔찍한 저주를 말끔히 없애 주셨지 않았던가!’
그러니 모레스를 저대로 내버려두는 데는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마사인은 그런 생각을 하며 쭈뼛쭈뼛 본궁 앞을 서성거렸다. 물론 당장 알현하겠노라 정식으로 기별하지는 못했는데, 클라노스의 성을 받은 후에는 되도록 성황가의 일원으로서 사사로운 편의를 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사인 님?”
한데 그런 마사인을 발견한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폐하를 뵈러 오셨습니까? 마침 폐하께서는 지금 집무실에 안 계십니다만.”
희고 붉은 성기사단 정복을 단정히 갖춰 입은 온화한 인상의 여인.
바로 성황의 가장 튼튼한 방패라고도 불리는, 카트리나였다.
* * *
카트리나 벨파인.
마사인이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때는 평기사로서 황궁 근위대에 복무했다는 것. 성황이 아직 어리던 시절에는 그의 곁을 충직하게 보필하였으며, 후에는 뒤늦게 신성력이 발현되는 드문 사례로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에 입단했다는 것.
그리고 현재는, 비교적 젊은 나이로 기사단의 부단장 지위를 꿰찼을 정도로 성황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
“미리 기별을 주셨으면, 폐하께서 기쁘게 시간을 내셨을 텐데요.”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철혈의 이미지와는 달리, 막상 마주한 그녀는 무척 호감 가는 미소를 짓는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카트리나는 주저하는 마사인을 본궁의 작은 응접실로 안내했다. 이어 거기서 들은 뜻밖의 소식은, 최근 성황이 홀로 어딘가에 틀어박혀 기도를 드리는 일이 잦아졌다는 사실이었다.
“기도요? 폐하께서요?”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신의 대리자라는 이명에도 불구하고, 마사인은 그의 숙부가 그리 신실한 정교회 신자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네, 아마 오늘도 늦게까지 기도실에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 혹여 마사인 님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먼저 용건을 듣고 폐하께 전해드리면 어떻겠습니까?”
“…….”
마사인은 잠시 고민하며 카트리나를 마주 보았다.
그녀는 어딘가 묘한 분위기를 가진 여인이었다. 엄숙하나 완고하지 않고, 정중하나 무겁지 않다. 뭐든 털어놓으면 일단 잘 들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어쩐지 성황 본인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저 사소한 걱정입니다. 카트리나 님이 굳이 따로 전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만…….”
“하지만 그 일로 무척 고심하고 계시는군요.”
마사인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매가 일순 깊어진다.
“하면, 이건 어떻습니까? 때로는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이 훨씬 가벼워질 때가 있답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데는 제법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편이지요.”
“아니, 그다지 짐이라 할 것까진…….”
한데 놀랍게도, 잠시 후 마사인은 카트리나에게 미주알고주알 걱정을 털어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별궁 건입니까. 글쎄요. 제가 어찌 폐하의 깊은 뜻을 알겠습니까만-.”
카트리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곁에서 보기에, 아무래도 폐하께서는 외딴 별궁이 하나쯤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듯했습니다.”
“더 필요하다고요?”
이미 황자들을 위한 청장미궁이 있는데, 도대체 왜?
“…글쎄요. 전들 그 이유를 알겠습니까. 하지만 폐하께서 하시는 일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습니다. 그저 저희들이 그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할 뿐이죠.”
과연 성황의 측근이랄까, 카트리나의 마음에는 성황에 대한 한 점의 의심도 없어 보였다.
“그럼…. 그러면 카트리나 님, 혹시나 하는 말입니다만…….”
마사인은 무척 힘겹게 가장 중요한 용건을 끄집어냈다.
“혹시 당신은, 모레스 황자님에게 아직… 일전의 무도한 자들이 남긴, 그, 저주…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걸…….”
물론 제대로 된 대답을 들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한데 놀랍게도, 카트리나가 그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게 아닌가!
“네, 알고 있습니다.”
“…네?”
그녀의 시원한 대답에, 마사인은 오히려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그, 그럼 왜 폐하께서는 그걸 가만히 내버려두시는 겁니까? 듣자 하니 영혼도 손상시킬 수 있는 무척이나 위험한 저주라고 하던데요!”
그래. 베니투스 추기경도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제물의 몸에 삿된 무언가를 담기 위해, 기존의 인격을 텅 비게 만드는 무서운 저주라고.
한데 다급하게 묻는 마사인에게, 카트리나는 엉뚱한 반문을 했다.
“마사인 님. 마사인 님은 누군가가 스스로를 자기 자신이라고 인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 보십니까?”
“네? 자신이라고 인식하다니, 그건-”
“저는 그것이 사람의 기억 혹은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카트리나는 성황이 한탄처럼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 감정을 없애고 싶지는 않으니, 결국은 스스로 기억을 지우겠노라 선택한 것이더냐.
늘 성황을 주의 깊게 보필하는 그녀는, 그 한마디를 통해 많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인격을 텅 비게 만드는 저주란, 곧 사람의 기억을 모조리 없애는 저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진정 모레스 저하께서 원하는 것이었겠지.’
그래. 적어도 그 저주 건에 대해서는, 황자의 의사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그날 모레스 황자는 분명 스스로의 의지로 의식의 현장으로 향했다. 그래서 성황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주를 완전히 없애지 않은 것이다. 그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니까.
“하여 모자란 저의 식견으로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카트리나는 조금 착잡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마도 모레스 황자님께서는 뭔가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고 계시는 게 아닐지요. 그러니 굳이 저주를 이용해서라도 그것을 모두 잊고자 하신 것이죠.”
“……!”
“저주를 남기는 것이야말로 모레스 황자님의 뜻이었을 겁니다. 물론 모든 것은 저의 빈약한 추측일 뿐입니다만…….”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모, 모레스가…….”
저주를, 그것을 모레스가 스스로 원했다고?
“그, 그럼… 저는, 이제부터 저하를 어찌 대해야만……!”
마사인은 큰 충격이 빠져 말을 더듬었다.
“저, 저는 이제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카트리나 님! 그러면 모레스 저하는 이제부터 계속해서 저 붉은 저주와 함께 지내셔야 한다는 말입니까?”
“마사인 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악마종의 저주를 몸에 지닌 채 살아가다니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던 마사인은, 몹시 괴로워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카트리나 님! 저는, 저는 그 저주가 너무나 두렵습니다! 그러니 이대로는 안 됩니다! 더는 모레스 저하의 곁에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
“평생 저하를 지키겠다 맹세했습니다! 하지만 그 저주의 흔적을 직면할 때마다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옵니다! 이런 제가 어찌 감히 그분을 지키는 기사라 자칭할 수 있겠습니까!”
“…….”
“저는 기사의 자격이 없습니다! 카트리나 님, 대답해 보십시오! 진정 제가 저하의 곁을 떠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겁니까?”
카트리나는 지나치게 격앙된 젊은 기사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가 조금 진정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저처럼 모자라는 이가 어찌 감히 함부로 기사의 자격을 논하겠습니까.”
“…….”
“마사인 님. 그것을 아십니까? 지금이야 성황 폐하의 ‘방패’라는 분에 넘치는 이명을 얻었습니다만, 실상 저는 지금껏 폐하를 제대로 지켜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그분께 직접 독약을 먹인 적도 있답니다.”
“…네?”
그 엄청난 고백에, 마사인은 순간 자신의 고민을 깡그리 잊고 말았다.
뭐라고? 독?
마사인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카트리나는 씁쓸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물론 주신께 맹세코,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법 오래전의 일이었다.
막 별궁으로 임관된 카트리나는 한창 정의감이 넘치는 애송이였다. 그래서 거의 매번 끼니를 거르다시피 하는 어린 황자가 보기 안쓰러워, 외부에서 직접 음식을 사다 나르는 월권행위를 저질렀지.
처음 몇 번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
당시 어린 성황은 그녀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딱히 호위 기사의 정성을 무시하려 들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병약한 황자가 제대로 먹는 모습에 카트리나는 조금 감동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감동의 순간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설마 적들이 황도의 음식점이란 음식점은 모조리 매수했을 줄이야…….”
“……!”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비록 고의는 아니었다지만 호위 기사가 직접 황자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인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황궁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일을 문제 삼지 않았다.
덕분에 카트리나는 계속 어린 성황의 호위로 남아 있을 수 있었고, 한동안은 더욱 안전한 먹거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차례고 황자가 중독되는 일이 반복되자, 결국 카트리나는 외부에서 음식을 조달하는 작업을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데 그것을 아십니까? 마사인 님. 폐하께서는 당시에 단 한 번도 저를 원망하신 적이 없습니다.”
“…….”
“그리고 깊은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졌을지언정, 저 역시 폐하의 곁을 떠나지 않았죠.”
황자를 몇 차례나 중독시킨 것이 자신의 실책임은 부정할 수 없다. 당시 카트리나는 너무도 괴로운 나머지 당장이라도 황자의 호위직을 내려놓고 싶었다. 만일 목숨으로 속죄할 수 있었다면, 기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리라.
하지만 카트리나는 동시에 이러한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살벌한 황궁에서 그나마 어린 황자의 힘이 될 사람은 자신밖에 없음을. 자신마저 떠나고 나면, 더는 이곳에서 황자의 편이 되어줄 이가 없으리라는 것을.
그렇게 그녀는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텨냈다.
“그런 부족하기만 한 저를, 사람들은 이제 ‘성황의 가장 튼튼한 방패’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카트리나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마사인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제는 압니다. 당시 어렸던 폐하에게, 생각보다 제 존재가 큰 의미가 되었다는 것을요.”
“카트리나 님…….”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모레스 저하께 있어서도 마찬가지겠지요. 마사인 님은 이 세상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진정한 저하의 기사이신 겁니다.”
“……!”
Chapter 136: Chapter 436
Chapter Text
436. 불로불사의 비서 (9)
그날, 카트리나와의 짧은 대화가 마사인에게 시사하는 바는 컸다.
‘나는 머저리인가! 저하의 마음에 상처를 드릴까 두려워, 아예 임무를 저버리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다니! 이 얼마나 무의미한 고민이었단 말인가!’
조금 어색할지언정 곁에 계속 남는 것과,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리 떠나버리는 것. 어느 쪽이 아이에게 더 큰 상처가 될지는 불 보듯 빤한 일이다.
안 그래도 최근 모레스를 향한 고위사제들의 시선이 갈수록 흉흉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때야말로 마사인은 모레스의 곁에서 파도를 막아내는 든든한 둑이 되어야 했다. 성황에게 독을 건네는 끔찍한 실수를 하고도, 카트리나가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킨 것처럼.
물론 감히 카트리나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모레스가 그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미약하게나마 힘이 되어 주는 것. 그것이 마사인이 바라는 전부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강해져야 하겠지!’
호위 임무가 한가해진 틈을 타, 마사인은 수련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고, 더는 잡다한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또 자신의 무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악마종의 저주 앞에서도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물론 아직은 붉은 저주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감추기는 어렵다. 하면 적어도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만큼은, 반사적으로 저하를 도울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겠어!’
그래서 틈틈이 부웅 연습도 시작했다. 모레스가 처할 만한 가장 빈번한 위기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낙상 사고 외에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으니까.
“…마사인, 너는 또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냐.”
훈련용 모래 자루를 허공에 던졌다 받는 연습을 반복하고 있으려니, 마침 곁을 지나가던 프란시스가 혀를 차며 묻는다.
그는 마사인의 아카데미 동기생으로, 최근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에 입단한 덕에 황궁에서 빈번하게 마주치는 중이었다.
“아카데미에서도 제일 미련하고 효과 없는 수련만 골라서 하더니만, 이번에는 또 혼자서 무슨 우스꽝스러운 훈련이냐?”
“부웅 연습을 하는 중이다.”
꽤나 무례한 핀잔을 받았지만, 마사인은 개의치 않고 대꾸해 줬다. 프란시스가 저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그는 마사인이 멀쩡히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시절에도 건방지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침 훈련용 모래주머니가 딱 모레스 저하의 몸무게와 비슷하더군. 그러니 아무 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일 때까지 떨어지는 저하를 받는 연습을 하려고 한다.”
“…뭐?”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들은 프란시스는 답지 않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더니 곧 거세게 콧방귀를 뀌었다.
“잠깐만. 그 부웅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기껏 모래주머니의 무게에 익숙해져 봐야 무슨 소용이지? 어차피 모레스 황자님은 앞으로도 쑥쑥 자라실 거 아냐? 체중이 두 배가 되는 것도 금방이잖나.”
“그, 그런가?”
허를 찔린 마사인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프란시스를 돌아보았다. 정처 없이 흔들리던 그의 눈동자가, 이내 강렬한 깨달음의 빛과 함께 단단해진다.
“그렇군!”
그때 프란시스는, 마사인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곧바로 훈련을 그만두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어 또다시 근위대 훈련장을 찾은 그는, 이번에는 모래 자루 두 개를 한꺼번에 던졌다 받았다 하고 있는 마사인을 발견했다.
“…이 자식, 정말로 바보 아냐?”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다행히도 모레스의 몸을 침범한 저주는 조금씩 약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선명한 붉은빛을 띠던 문자열들은 어느새 희미한 빛으로 바뀌었다. 문자가 피부 표면으로 떠오르는 횟수도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저주의 효용이 다하여 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시간 경과에 따라 저주가 약해지는 것인지.
어쨌거나 마사인은 내심 안도했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저주가 완전히 사라지길 기대해도 되겠어.’
한데 그와 동시에, 모레스의 행동에도 조금씩 달갑지 않은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어느 순간부터 모레스는 더 이상 붉은 망토를 두르지 않았다.
“저하, 오늘은 렉스를 어디에 두셨습니까?”
의아해진 마사인이 조심스레 모레스에게 묻자-
“응? 렉스? 그게 뭐야?”
“……!”
너무나도 천진한 반문이 되돌아온다.
티 없이 말간 아이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마사인은 충격으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설마 저주로 인해 저하의 기억이 점점 사라지는 건가?’
물론 그것이 정말로 저주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모레스가 보여준 독특한 행동이나 말들은, 현실보다는 그저 아이 특유의 꿈이나 상상에 기반을 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이가 조금씩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마사인은 묘한 쓸쓸함을 느끼며, 방구석에 내팽개쳐진 낡은 태피스트리를 챙겨 자신의 숙소에 보관해 두었다.
한데 문제는 단순히 사리지는 기억들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레스의 표정 역시 점차 우울해진다는 것이었지.
매일 밝게 웃으며 아침을 맞던 아이는, 언제부터인가 무표정한 얼굴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겨났다.
로건이나 마사인을 만나도 전처럼 반가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때로는 그들을 피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간혹 외진 장소에 숨어 혼자 훌쩍거리는 일도 다반사!
“형님. 아무래도 리자베스 어마마마께서 모레스에게 너무 가혹하신 것 같습니다. 아바마마께 말씀드려서 지금이라도 모레스의 수업을 모두 없애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쯤 되니 로건 역시 눈에 띄게 초조해했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모레스의 곁을 맴돌며 설득하려 들지언정, 섣불리 제3자의 힘을 빌려 그들 모자의 사이를 간섭하려 들지는 않았다. 이 모든 일들은, 결국 모레스 스스로의 의지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아이는, 기껏 되찾은 리자베스 황비의 관심을 잃지 않고자 어린 마음에도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있었던 것이다.
“…….”
마사인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속수무책인 것은 마찬가지.
그래서 그 모습이 지나치게 보기 괴로워질 때면, 그는 고이 보관해 둔 낡은 태피스트리를 이따금 꺼내 보며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지곤 했다.
‘황비의 횡포는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하다. 악마의 저주와 함께하는 한, 앞으로도 모레스 저하에게는 점점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생겨날 테지. 그러나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만은 끝까지 저하의 곁에서 그분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마사인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아무리 혼자 거듭해서 마음을 다잡아본들, 정작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이변 앞에서는 어떠한 굳은 각오며 맹세도 그저 무의미할 뿐이라는 것을.
운명은 때때로 감당 불가능한 현실 앞에 당돌하게 인간을 내던지고, 그의 의지나 신념의 뿌리마저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것을 즐거워하며 지켜본다는 것을.
“……!”
악마종이 어떤 지독한 수작을 벌이든, 모레스 저하의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그분을 지켜 내리라.
그것만이 오랜 시간 마사인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대전제였다.
그러나 그날.
강력한 폭풍우가 휘몰아쳐 공교롭게 아세인 대공의 저택에 발이 묶였던 날.
마사인은 꿈에서조차 상상해 본 적 없는 비현실적인 광경을 마주하곤, 순식간에 정신의 균형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저게… 뭐지?’
그때 그의 눈앞에는 분명 모레스가 있었다. 아니, 방금까지도 모레스였던 ‘것’이 서 있었다.
한데 빤히 눈으로 보고도 ‘저것’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이성과 감정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복잡하게 뒤얽힌다.
미스라를 거머쥔 두 손이 사정없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저하…….”
신음처럼 흘러나온 목소리는 부르는 이에게 닿지 못하고 공허하게 허공으로 흩어진다.
아아, 나는 지금까지 뭘 했던 거지? 대체 ‘무엇’으로부터, ‘누구’를 지키려 노력했던 거야?
[아하하하!]
혼란에 빠진 그의 귀에, 유난히도 친숙하게 느껴지는 밝은 웃음소리가 들러왔다. 아니, 귀에 들렸다기보다는 직접 소리가 머릿속에 때려 박히는 듯한 기이한 감각.
그리고 그 어두운 역광 속에, 유난히 밝은 빛을 발하는 은빛의 눈동자가 있었다.
[괜찮아. 이제 뭘 하든 변하지 않아. 형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 * *
“그날 저는… 저하의 믿음을, 그리도 쉽게 저버렸습니다!”
마사인은 무릎을 꿇은 채 정신없이 그의 잘못을 털어놓았다.
“모든 것은 저의 탓입니다! 그날 만일 제가 끝까지 저하의 곁을 지켰다면, 그랬다면! 분명 저하께 그런 일이 닥치는 걸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 두서없는 고백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성진은, 역시나 크게 당황하고 있는 오웬과 시선이 마주쳤다.
‘야, 지금 마사인 경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혹시 알아?’
‘아니? 몰라. 나도 금시초문인데?’
‘그래?’
음.
성진은 조금 난감해졌다. 아까부터 마사인이 횡설수설 뭔가를 계속 사과하고는 있는데, 문제는 대체 그게 무슨 일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대체 경이 나한테 뭘 잘못했다는 건데? 어차피 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렇다고 진정하고 차근차근 설명해 보라고 다그치기도 뭣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마사인 경은 완전히 정신을 놓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성진의 어지간한 말썽에도 여간해서는 평정심을 잃지 않는 마사인 경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오랜 시간동안 극복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하, 저는… 역시나 형편없는 겁쟁이였던 겁니다!”
한편, 마사인은 오랜 시간 가슴속에 억누르고 외면해 왔던 두려움에 완전히 매몰되어,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의 일을 후회한다. 지금도 끔찍하게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사인에게는, 그때와 같은 상황을 마주했을 때 또다시 동일한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이것 봐. 역시 꿈이잖아? 마사인 형님이 아직 곁에 남아 있는데.
그리고 같은 과오를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그 케케묵은 두려움은, 그날의 일을 기억하는, 그때와 같은 ‘모레스’의 앞에 서자 선연한 현실이 되어 그를 무자비하게 덮쳐온 것이다.
‘모든 것이 허사였다! 그 오랜 시간을, 그렇게나 노력했음에도, 나는 아무것도 극복해내지 못한 거야!’
아마 이런 상태로 저하의 곁에 남아 있다가는, 끝내 이전처럼 모든 것을 망치게 되겠지.
그렇다면 나는, 나는 이제 어찌해야…….
“크크크크…….”
그때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자코모 밀로가 음침한 실소를 흘렀다.
“봤구먼.”
“…뭐라고?”
오웬의 물음에, 자코모 밀로는 어딘가 고약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도 저 젊은이에게는 처음이 아닌 모양이지! 주인께서 이 세상에 임하시는 광경을 아까 자네도 보지 않았던가? 그것이야말로 진정 세상이 감추고 있는 지고한 신비이지!”
“…신비?”
“그렇소! 저치는 분명 거기에 큰 충격을 받은 걸게요! 그 무한한 가능성이 주는 경의의 감정을, 감히 평범한 인간의 정신으로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크크크큭!”
그 말을 내뱉는 당사자가 이미 반쯤 맛이 가 있다는 점에서, 자코모 밀로의 말은 어느 정도 신빙성을 얻었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의 헛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성진이 순간 대단히 살벌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뭐, 그렇다는 거요…….”
자코모는 그 말을 끝으로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에휴…….”
성진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마사인을 향해 다가갔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저 양반을 언제까지 저대로 둘 수는 없으니까.
“마사인 경.”
묘할 정도로 차분하게 울리는 목소리.
오웬은 무심코 성진을 돌아봤다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마사인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성진의 얼굴이 어딘가 냉정해 보였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저하. 저하, 저는…….”
“좀 진정해 봐. 마사인 형님.”
흠칫!
생각지도 못한 호명에, 마사인이 움찔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를 향해, 성진이 입꼬리를 비틀며 어딘가 기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 지금 경이 마음 써 봤자 이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
“마사인 경이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경이 가진 영향력은 자의식에 비해 생각보다 크지 않아. 알겠어? 마사인 경 따위는 결국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마사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언뜻 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한데 신기한 것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마사인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되돌아오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을 그렇게 후회하고 내게 잘못을 비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때 경이 바꾼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그러니 뭔가를 망칠 수도 없었겠지. 내 장담하건대, 경이 내게 했다는 잘못도 생각보다 별것 아닐걸?”
“진정…….”
마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정 그러합니까, 저하?”
“그래.”
성진은 아무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진짜고 말고. 적어도 지금 내가 가진 기억 내에서는 말이야.
Chapter 137: Chapter 437
Chapter Text
437. 불로불사의 비서 (10)
푸리아노에서 레지나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지루했다.
덜컹덜컹.
짐마차의 불규칙한 진동에 맞춰 몸을 흔들거리던 성진은, 잠시 고개를 들어 탁 트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무겁게 깜박이는 별들이, 당장이라도 하늘에서 눈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뉴… 모레스. 출출하지 않냐? 이거라도 좀 먹어 봐.”
오웬이 작은 어묵을 하나 건네 왔다. 잠시 틈을 내어 판게아 크로니클에 접속했던 모양.
“너 인마, 사람 이름을 자꾸 이상하게 부르지 마. 차라리 맘 편하게 뉴비라고 하던지.”
“응? 정말?”
오웬의 얼굴에 화색이 어렸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나야 그쪽이 편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 같은데.”
“뭐 어때? 네가 날 부를 때마다 한 박자씩 말을 저는 쪽이 훨씬 괴상하게 들린다고.”
“그, 그런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 오웬은, 이내 옆을 슬쩍 돌아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근데 뉴비야.”
“응?”
“마사인 형님은 괜찮으실까?”
“…….”
성진은 마차 구석에 몸을 기대고 있는 마사인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그는 어딘가 멍한 얼굴로 수레에 오른 뒤, 벌써 몇 시간째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호위 대상인 황자를 두고 혼자 잠이 들다니, 평소 마사인의 성격을 생각하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까는 좀 많이 이상했지. 어쩌면 하수도에서 도망친 작자가 뭔가 형님에게 고약한 술수를 걸었는지도 몰라. 레지나로 돌아가면 바로 치료 사제들을 부르는 게 좋겠어.”
“흠.”
“지금도 보라고. 아무래도 악몽을 꾸는 거 같잖아. 어쩔까? 형님에게도 이 한정판 안대를 걸어 줄까?”
오웬의 말대로, 잠결에도 뭔가를 고뇌하는 중인지 마사인의 얼굴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성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대는 그냥 둬.”
왠지 저건 단순한 악몽이 아닌 거 같거든. 게다가 지금은 외부의 정신 간섭을 방어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좋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고.
“뭐, 걱정하지 마. 마사인 경은 한잠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럴까?”
“응.”
성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조금 긴장한 두 손은 저도 모르게 마왕의 램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마왕의 말에 따르면, 실제 마사인을 깊은 잠에 빠지게 만든 건 성진 본인이라는 모양이었으니.
-다 잊고 이만 자도록 해, 마사인 경. 나중에 눈을 뜨게 되면, 경을 괴롭히던 안 좋은 일들은 모두 잊게 될 거야.
마차에 오른 이후, 성진은 몇 차례 그렇게 강조하며 마사인을 달랬다. 그랬더니 웬걸, 그가 정말로 눈을 감고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린 것이다.
아니, 정말 단순히 달랜 것이 맞기는 할까?
성진은 아직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쩐지 그에게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수록, 마치 사람을 직접 저주하고 있는 것만 같은 찜찜한 감각이 일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성진은 제3자로부터 그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와, 이성진. 이 무식한 놈. 영혼 자체를 저주로 두드려 패서 그로기 상태로 만들다니. 덕분에 영혼이 붕괴하는 건 어째 멈춘 거 같긴 한데.]
마왕의 설명에 따르면, 어째서인지 마사인 경의 영혼은 갑작스레 급격한 붕괴의 조짐을 보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기는 분명, 성진이 난데없이 몽유병 비슷한 증상을 보인 때와 일치한다는 것.
[아무래도 저 녀석의 영혼은 처음부터 그리 튼튼한 상태가 아니었는지도 몰라. 그러니 조그만 충격에도 저렇게 쉽게 망가지는 거지. 지금도 영혼의 모습이 꽤 흐릿해진 게, 아마 회복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거 같은데?]
성진은 램프를 끌어안으며 생각했다.
글쎄, 그걸 조그만 충격이라 할 수 있었던 걸까? 게다가 어째 영향을 받은 건 마사인 경의 영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왜 그래, 이성진?]
그도 그럴 것이, 마왕의 램프 역시 처음보다는 빛이 흐릿해졌기 때문이다.
놈의 불꽃이 규상 세계의 규칙을 통한 영혼의 실체화라고 한다면, 그 말인즉 녀석의 영혼 역시 만만찮은 타격을 입었다는 뜻이겠지. 유난히 오랜 시간 훌쩍거렸던 것도 조금 신경 쓰이고.
[왜? 왜 그런 얼굴이야?]
“아무것도 아냐. 너도 어묵 줄까?”
[어묵? 아까 그 맛있는 거? 응! 줘!]
화르륵!
램프 안으로 던져진 어묵 조각이 붉은 화염에 휩싸여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크크크크…….”
그때, 짐수레 앞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이 꽁꽁 묶인 채 쓰러져 있는 자코모 밀로였다.
“크크큭. 나는 보았다. 나는 도달했노라. 세상은 드디어 진정한 구원자를 맞이하고 신성한 정화의 불길에 휩싸이리라. 흐흐흐.”
“…….”
“크케케케, 쿨럭!”
그는 기이하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애먼 마차 바닥을 노려보며 킬킬거리는 중이다. 저쪽도 어째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단 말이지.
‘근데 참 신기하단 말이야. 모두가 그 하수도에서 조금씩 타격을 받았는데-’
성진은 의문을 가지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태평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닭 털 망나니를.
‘왜 오웬 녀석은 저렇게나 멀쩡한 거지?’
그러자 오웬이 입 안 가득 어묵을 삼키다가, 성진의 시선을 느끼고는 멀뚱히 돌아본다.
“응? 왜?”
그와 함께 녀석의 목에서 작은 펜던트가 흔들리며 밝은 선홍빛 광채를 뿜었다.
반짝!
“…아니,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긴! 뭔데? 응? 궁금하잖아!”
“…….”
“왜? 뉴비야. 말해 봐! 응? 응?”
“…시끄러워, 멍청아.”
성진은 툭 쏘아붙이고는 우울하게 램프 위로 얼굴을 묻었다.
전에 없는 탈력감이 일었다. 모든 것이 잘못되어 가는 느낌이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고, 모든 것이 내 탓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마사인 경과 마왕에게 뭔가 해로운 영향을 끼쳤다는 자각은 있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뭔지 기억나지 않고, 심지어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도 짐작이 가지 않아.
‘대체…….’
‘나’는 대체 뭘 믿고 일을 이 지경까지 끌고 온 거지?
살랑-!
바로 그때였다. 뭔가 부드러운 바람 같은 것이 머리칼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 것은.
“……!”
성진은 강한 기시감에 사로잡혀 휙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마사인 경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고뇌의 주름이 사라지고, 편안한 미소가 어리는 광경을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
변화가 생긴 것은 마사인뿐만이 아니었다.
일행이 하수도에서 구르며 입은 자잘한 생채기가 사라지고, 심지어는 침식이 진행되고 있는 자코모 밀로마저 한결 편안한 표정이 되었으니까.
순간 울컥, 안도감이 치밀어 오른다.
그럼 그렇지! 이 양반이 곧 다녀갈 줄 알았어!
그렇게 마법 같은 시간이 흐른 후, 마사인은 거짓말처럼 멀쩡하게 눈을 떴다.
“…저하?”
“마사인 경!”
“형님!”
두어 번 눈을 끔벅인 마사인은, 자세가 불편한 듯 어깨를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런. 제가 저하의 호위를 서는 것도 잊어 버리고서 혼자 자고 있었습니까?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요?”
“…….”
성진은 조금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마사인 경. 아까 있었던 일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나?”
“네? 무엇을 말입니까?”
오웬 역시 의아한 듯 끼어들었다.
“게다가 형님. 아까부터 계속 악몽을 꾸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건 괜찮습니까?”
“악몽…….”
그러자 마사인은 순수한 의문이 담긴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조금의 거짓도 담지 않은 맑은 눈빛이었다.
“글쎄요? 그러고 보니 조금 괴상한 꿈을 꾼 것 같기도 합니다, 저하.”
혼자서 양지바른 풀밭을 돌아다니는 꿈이었습니다만…. 마사인은 그렇게 덧붙이며 미간을 구겼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왠지 허공에 바람을 뿜어내는 이상한 버섯 군락을 본 것 같기도 하군요. 참으로 괴상한 꿈이었습니다.”
* * *
은신처에서 잠을 청하던 21호는, 희미한 인기척을 느껴 선잠에서 깨어났다. 그에게는 이제 무척이나 친숙하게 느껴지는 기척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캄캄한 방 안에 오도카니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호문클루스의 모습이 보였다.
“…폐하.”
성황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뒤덮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후드를 벗어던진 지금, 본체와 완전히 동화된 호문클루스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성황이 제법 오랜 시간 이 인형의 몸에 머물렀다는 증거리라.
“지금은 한밤중입니다. 어찌 이런 시간에 호문클루스에 임하셨습니까?”
그러나 21호에게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닌 엉뚱한 질책이었다.
“…왜 이곳에 있느냐? 브레만에게 가급적이면 널 이곳으로 보내지 말라고 일렀거늘.”
“……!”
21호는 저도 모르게 울컥하여 따지고 들었다.
“네, 저도 그 지시는 들었습니다.”
“하면…….”
“하지만 폐하의 정보원은 바로 접니다! 폐하께서 아무리 애송이 취급을 하셔도, 저 역시 번호를 부여받은 어엿한 원숭이 망루의 정보원이란 말입니다! 한데 아세인에도 따라가지 못하게 하시더니, 이제는 기어이 북부에서조차 절 따돌리실 셈입니까?”
“따돌린 것이 아니다, 엔리케.”
“21호입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분명 절 임무에서 따돌리셨습니다!”
“…….”
성황은 잠시 씩씩거리는 21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가 조금 진정하는 기미가 보이자,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엔리케. 내일 정오에는 경로를 틀어 자유 지하도의 거점 하나를 방문할 예정이다.”
“……!”
자유 지하도. 그 말을 들은 21호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진다.
그 극적인 변화를 목도한 성황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보거라. 너는 아직도 그를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구나.”
“저는…….”
21호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자유 지하도에는, 푸른 공화혁명전선의 거점에는, 21호가 썩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의 질긴 인연이 아직 남아 있었다.
“네가 그곳에 얼굴을 비추면 분명 그자도 널 알게 될 테지.”
“…….”
“어쩌겠느냐? 지금이라도 황도로 돌아가는 것은?”
“네?”
“이렇게 일행을 수습해 준 것으로도 충분하다. 이제부터는 나 혼자서도 저들을 통솔할 수 있을 것 같구나.”
21호는 겨우 가라앉은 울분이 또다시 왈칵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역시 성황이 자신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시의적절하지 않은 그 제안에 잔뜩 열이 받는 것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건 당신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닙니다, 폐하. 그 작자를 만나고 말고는 어디까지 제가 결정할 문제란 말입니다.”
“엔리케.”
“21호입니다! 그리고 당신이나 그곳에 발을 담갔다 무사히 몸을 뺄 궁리나 하시지요! 자유 지하도에는 온통 당신을 갈아 마시고 싶어 하는 자들밖에 없을 테니까요!”
“…….”
“아세인에 묶인 것 말고는, 이제 그것이 마지막 호문클루스가 아닙니까? 그 귀한 인형마저 잃어버리면, 앞으로는 또 무슨 수를 써서 여기저기 참견하고 돌아다니실 생각입니까?”
21호는 평소라면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불경한 태도로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니 내일은 쓸데없는 참견 마시고 얌전히 제 호위를 받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쾅!
21호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고 나가 버리자, 성황은 난감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한창 반항기의 아이들을 다루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군.
* * *
[…사라졌소?]
[사라졌습니다.]
[그렇군.]
마르타의 확답에, 낡은 비석 뒤에 숨어 있던 벨린다는 조심스레 영혼을 일으켰다.
잠시 동안 안식의 영역을 뒤덮었던 환한 빛이 가시고도, 그들은 한동안 섣불리 영혼을 일으키지 못했다.
순수한 치유와 신성으로 가득한 빛. 그것은 자신들과 같은 암흑의(?) 영혼에게는 대단히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저 빛을 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제 영혼은 저분에 의해 구원받았으니까요.]
마르타의 영혼이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죽음을 맞았던 날, 저의 영혼을 손수 거두어 이곳으로 인도한 것도 바로 저분이셨답니다.]
벨린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자가 주인께 그닥 해를 끼치려는 것 같지는 않았-]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순간 처절한 귀곡성이 안식의 영역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키에에에에에엑!
검은 로브의 사제, 헤이즈가 검은 피눈물을 철철 흘리며 울부짖는다.
평소에는 꽤 점잖은 영혼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지내면 지낼수록 상상 이상의 극적인 변화를 보이는 선배였다.
[모두들 무슨 그런 망언을 지껄이는 게요! 그자는 바로 델크로스의 수호자, 우리의 증오스러운 적인 성황의 영혼이란 말이오! 마음 착한 주인께서는 지금 그자에게 철저히 속고 계시는 거요!]
그러자 이번에는 벨린다가 발끈했다.
[무슨 불경한 소리를! 위대하신 영혼의 주인께서는 절대 누군가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시오!]
그러자 헤이즈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벨린다를 노려보았다.
[네깟 것이 언제부터 주인을 섬겼다고 아는 척인가! 주인의 첫 번째 종은 어디까지나 이 헤이즈란 말이다아아!]
콰아아앙!
강대한 힘을 가진 두 영혼이 거세게 맞부딪친다.
정적 속에 잠겨 있던 안식의 영역이 일순 거센 진동에 휩싸인다. 연약한 주검들이 이리저리 날아가고, 부서진 비석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아, 저 두 사람, 또 시작이야…….]
마르타는 커다란 묘비 뒤에 몸을 숨기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Chapter 138: Chapter 438
Chapter Text
438. 불로불사의 비서 (11)
마르타는 언제나 폭력 앞에 무력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폭력에 노출되는 일에도 꽤 익숙해져 있었지.
완전한 절망을 겪은 인간은 무감각해진다. 이것을 마르타는 살아생전 그리 달갑지 않은 방법으로 몸소 깨우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곳, 안식의 영역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모든 영혼은 원하는 만큼 휴식을 취할 수 있었고, 잠에 빠진 동안에도 주인의 비호 아래 절대적인 안전이 보장되었다.
마르타는 여전히 폭력 앞에 무감각했지만, 이는 생전과 같은 절망이 아닌, 견고한 안정감에서 기인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저렇게 천지가 뒤흔들리는 소란이 일더라도 그녀는 전과 달리 담담할 수 있는 것이다.
휘리릭-
털썩! 털푸덕!
폭발에 휩쓸린 주검들이 낙엽처럼 하늘하늘 날아간다. 그러곤 이내 깨어진 비석들과 함께 바닥에 거세게 내동댕이쳐졌다.
아아, 안식이시여! 다행히도 그 연약한 영혼들은 아직까지는 무사한 채 평온한 잠에 빠져 있었다.
하나 소동이 길어지게 되면, 결국은 저들도 휴식을 방해받아 깨어나게 되리라. 둘의 충돌이 지속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었다.
[…이제 슬슬 그분들이 나타나겠지.]
마르타는 숨을 죽이고는, 잠시 후 나타날 거대한 영혼을 기다렸다.
지금이야 헤이즈나 벨린다처럼 어중간한 영혼들이 서로 잘났다며 싸우고 있지만, 마르타가 알기로 주인의 정말 강한 종복들은 따로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하위 마왕에 맞먹는 엄청난 전력들이다.
그들은 평소 주인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안식의 영역에 소요가 생기면 휴식으로부터 돌아와 손쉽게 상황을 정리하곤 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우우우우우…….
모골이 송연해지는 울림과 함께, 비쩍 마른 거인의 시체 하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마른 고목 같은 팔에 휘감긴 고풍스러운 레이스는, 지나온 세월을 나타내듯 잿빛으로 바랬다. 이어서 먼지로 뒤덮인 모슬린 드레스와 희게 분칠한 거무스름한 얼굴이 드러난다.
군데군데 썩어들어 가는 살점 아래로, 딱딱하게 굳은 근육과 밀랍처럼 말라붙은 지방이 보인다. 마치 죽음 그 자체가 형상화된 듯 음산하고 소름 끼치는 모습.
끼이익.
거인은 말라붙은 안구를 굴려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가 싶더니, 뼈마디가 드러난 양손을 세게 맞부딪쳤다.
쩍-!
순간 엄청난 압력이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밀어닥쳤다.
[……!]
[……!]
헤이즈와 벨린다의 영혼은 그대로 납작하게 찌그러졌다. 그러곤 부서진 비석들 사이에 처박혀 그대로 조용히 침묵에 잠겼다. 본의 아니게 강제적인 휴식에 처해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깨어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때쯤에는 두 사람의 머리도 조금은 식어 있겠지.
[…이제야 좀 조용해졌구려.]
드드드드…….
거대한 철골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거인의 시체는 다시 천천히 바닥에 몸을 누인다.
[이 처량한 노파를 봐서라도 소란은 그쯤 해 두게들. 영혼의 일부가 계속해서 어딘가로 소환되기 때문인지, 이 늙은이는 자도 자도 영 몸이 개운하지 않다네.]
처량함과는 거리가 먼 위용이었지만, 누구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
잠시 눈치를 보던 마르타는, 휘리릭 영혼을 날려 거대한 여인의 앞으로 날아갔다. 주인으로부터 절대적인 안전을 보장받았기에 보일 수 있는 적극성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흐음?]
[지금까지 저는 이곳에서 종종 용맹한 늑대왕과 현명한 오크왕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당신 같은 분이 깨어나신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러자 거대한 시체 여인은 주름진 눈꺼풀을 조금 치켜올렸다.
[오, 인간! 생전 육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걸 보니, 그대는 필시 본상 세계로부터 흘러 들어온 영혼이군! 혹시 델크로스 차원의 인간인가?]
[네, 맞습니다.]
[참으로 기이하구려. 그대처럼 무고하고 순수한 영혼은 이곳에서는 극히 보기 어렵건만. 부디 내게 그대의 이름을 알려 주겠소?]
고풍스럽다 못해 구닥다리 같은 어투였지만, 그녀의 사념에서는 마르타를 향한 진한 호의가 전해졌다. 흉하게 탁해진 각막에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타가 그녀의 시선으로부터 미묘한 다정함을 느끼는 것처럼.
[물론입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제 이름은 마르타입니다.]
[마르타! 이렇게 보게 되어 반갑구려. 이 보잘것없는 늙은이는 헥센자바트라 하오.]
헥센자바트.
마르타가 속으로 되뇌자, 거인의 시체로부터 씁쓸한 울림이 전해졌다.
[안타깝게도 내 진명은 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티끌처럼 허무하게 스러졌소. 지금 남은 것이라곤 사후에도 모두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살벌한 이명뿐이지.]
[하면 헥센자바트가 당신의 진짜 이름이 아니란 말인가요?]
[아니고말고. 그리 아름답지도 않은 것이, 내게는 썩 어울리지 않잖나?]
시체가 마르타를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해 보였지만, 검게 꺼진 눈매가 더욱 음산해지는 효과를 낳았을 뿐이다.
[그래서 내 영혼의 주인께서는 종종 나를 ‘회한’이라고도 부르신다네. 그 흉흉한 이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대 역시 나를 그리 불러도 좋다오.]
거기까지 말한 여인은, 바닥에 머리를 누이며 천천히 메마른 눈꺼풀을 닫았다.
[아아, 참으로 아쉽군.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지만 그대와의 만남도 이대로 끝인 것 같구려. 나는 이제 다시 쉬어야겠소. 잔인하고도 자비로운 안식의 숨결이, 귓가로 바싹 다가온 것이 느껴진다오.]
[……?]
마르타는 의아해하며 썩어가는 여인의 얼굴을 향해 다가갔다.
이곳의 영혼들은 모두 원하는 만큼 자유로이 휴식을 취한다. 지금까지 마르타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한데 어째서인지 저 거인은, 마치 자신에게 휴식이 강제되어 있다는 듯 말하고 있지 않은가.
[잠시만 제게 시간을 허락해 주실 수는 없나요? 당신에 대해, 이곳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주인에 대해 얘기해 주세요.]
마르타는 자신의 내면에 이러한 열의가 잠재해 있는 것을, 죽은 이후에야 처음으로 깨달아가고 있었다.
[저는 육신의 굴레를 벗어나고도 아직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장벽을 넘었지만, 그 앞에는 또 다른 성벽이 저를 가로막고 있어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더 많은 것들을 배워 언젠가 한계를 뛰어넘고 싶습니다.]
그러자 거인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마르타를 내려다보았다. 정작 되돌아온 것은 완곡한 거절이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할 것 같구려. 나는 이곳에 수감된 죄인이며, 따라서 내게 선고된 ‘안식’에 마음대로 저항할 수 없소.]
[죄인…이라고요?]
의외의 정보에 마르타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렇다오. 나는, 그리고 그대가 앞서 만났다는 늑대왕이나 오크왕은, 오래전 불로불사가 되고자 하는 욕망에 혹해 끔찍한 죄를 저지른 자들이지.]
[…….]
[그러니 ‘안식’은 내 영혼을 위한 휴식이나, 동시에 내 죄를 사하기 위한 감옥이기도 한 것이오.]
거인의 의식이 점차 깊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죽은 시체임에도, 그녀의 영혼은 더욱더 깊은 죽음을 향해 추락하며 하얗게 질려간다. 마치 심해로 침몰해 가는 거대한 유령선처럼.
마르타가 알 수 없는 애틋함을 느끼며 거인의 눈꺼풀을 쓰다듬자, 처음보다 부쩍 희미해진 사념이 또다시 뇌리에 들려왔다.
[그러나 상냥한 영혼이여, 나를 위한 걱정은 마시게. 자비로운 안식께서는 이런 우리들마저 구원해 주겠노라 하셨으니.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가 그저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한 것이기에 동정의 여지가 남아 있노라 말씀하셨소.]
[…두려움이요?]
[그래요…….]
서서히 잠에 빠져드는 거인으로부터 마지막 사념이 한숨처럼 전해졌다.
[그렇다오. 두려움이오. 우리의 영혼이란 어찌 이리도 연약하기만 한 것인지…….]
* * *
-영혼이란 어찌 이리도 연약하기만 한가.
육신의 모습을 닮은 그 형상은 실로 허깨비에 지나지 않으나, 동시에 마치 실체를 가진 것처럼 철저하게 육신에 의해 존재하며 또 속박된다.
하나, 육신은 완벽한 영혼의 성벽이 되지 못하니, 이는 육신이 마침내 쇠락할 수밖에 없으며, 육신이 받은 상처를 영혼 또한 결코 피하지 못하는 까닭이라.
하면 영혼이 육신의 굴레를 벗어난다면 어떨까.
영혼을 감싸는 더 단단한 물질을, 육신을 능가하는 견고한 보호막을 쌓을 수만 있다면. 그 굳건한 성채에 영혼을 고정하고, 더 나아가 여기에 육신을 완전히 동조시킬 수만 있다면!
아아, 만약 그리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불멸하는 몸을 가지는 것도 결코 헛된 꿈은 아니리라!
대충 책장을 넘기던 성진은, 조금 심드렁한 표정으로 낡아빠진 책 표지를 확인했다.
-<다키아누스의 비서>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비서 좋아하시네. 금서 목록에서도 본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아마 성회에서 제대로 취급도 하지 않는 일반 잡서라는 말일 텐데.
‘상태창은 왜 굳이 이런 걸 손에 넣으라는 퀘스트를 준 걸까?’
성진이 오웬으로부터 이 책을 넘겨받은 이유는 무척이나 심심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명상하는 데도 한계가 있지, 따분하게 짐마차에 처박혀 있는 게 벌써 며칠째인가.
-그럼 뉴비야, 이거나 읽고 있을래? 아니, 이참에 그냥 네가 가지고 있든지.
-뭐? 중요한 퀘스트 아이템이라며? 이걸 왜 날 줘?
-어차피 최근의 퀘스트는 전부 널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단 말이지. 그러니까 이건 그냥 네가 간수하는 게 좋을 거 같아.
-?
그래도 사악한 마법사의 연구실에서 챙겨온 서적이었다.
나름 흥미로운 구석은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는데, 이건 웬걸, 그냥 영혼의 구성이 어쩌니 육신의 한계가 어쩌니 하는 헛소리들의 나열일 뿐이다.
“흠…….”
하지만 미련 없이 책을 덮은 것도 잠시, 성진은 다시 낡은 표지를 만지작거렸다.
하루 종일 흔들거리는 짐수레에 앉아 있다 보면, 사람이 전에 없던 활자 중독도 생기는 법이다.
[뭔데? 무슨 내용인데?]
결국 성진이 다시 책을 펼쳐 들자, 옆에서 스탠드 역할을 해주던 마왕이 궁금한 듯 불꽃을 거세게 일렁거렸다.
아마도 녀석은 성진보다 더 답답할 터였다. 자유롭게 날아다니지도 못하고, 며칠째 램프에 갇혀 있는 꼴이니.
성진은 글을 읽지 못하는 녀석을 위해 친절하게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잘은 몰라. 영혼을 지키는 단단한 성벽을 만들면, 영원히 불멸하는 육체를 얻을 수도 있대.”
[뭐어? 그게 진짜야?]
‘불멸’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흥미를 유발하는 주제임이 분명했다. 마왕의 램프가 순간 활기를 띠고 환하게 빛을 발한다.
[그래서? 그 영혼의 성벽이란 건 대체 어떻게 만든다는 거야?]
“그 준비를 위해서는 먼저 특수한 꽃을 재배할 필요가 있다…….”
[꽃? 꽃이라고?]
“응. 추운 지방에 드물게 자생하는 꽃이래. 그걸 잘 말린 다음, 흰주머니너구리의 향낭과 안젤리카 잎, 그리고 몇 가지 허브와 함께 잘 갈아서…….”
[으으음? 그게 영혼의 성벽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그렇대. 근데 이다음이 더 중요해. 그걸 아교와 함께 잘 섞은 다음, 특수한 비법으로 240일간 숙성시키고 나면 아주 맛있는 탕약이…….”
[으으으음…….]
마왕의 흥미가 순식간에 식어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아무렴, 램프의 불꽃이 저렇게나 흐려지는 것도 드문 일이지.
[그거 꼭 엉터리 민간요법 같은 같은데? 탕약을 먹어서 영혼을 보강하다니, 그게 말이 돼?]
“뭐, 효과는 차치하고라도 장점이 아예 없지는 않아. 일단 맛있다니까.”
[알 게 뭐야! 그따위 것, 아무리 맛있어도 난 모르는 동물의 향낭 따위를 갈아 먹고 싶지는 않다고!]
“그야 그렇지.”
성진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자니,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마도 그 책의 내용은 사실이 아닐 겁니다. 주인이시여, 예비된 분이시여.”
자코모 밀로였다.
그는 여전히 꽁꽁 묶여 있는 신세였지만, 적어도 아까와 달리 약간의 이성은 되찾은 듯 보였다.
“사실이 아니라고?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성진의 퉁명스러운 물음에도, 그는 여전히 다소곳한 태도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야 그 비서는 제가 비약의 대가로 직접 준비한 물건이니까요.”
비약. 하마터면 대륙에 엄청난 재앙을 몰고 왔을지도 모르는 물건.
성진은 잠시 품속에 넣어 둔 작은 약병을 조심스레 더듬어 보았다.
“푸리아노의 마법사와 거래를 하기 전까지는 대대로 밀로가의 서고에 보관하고 있던 고서입니다. 그러니 그 책에 대해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이 대륙엔 없습니다.”
“그래.”
조금 민감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는 예감에, 성진은 힐끗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다행히 짐수레를 모는 마부는 고삐를 느슨하게 쥔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거점을 오가는 데 이력이 난 노새를 완전히 믿고 있는 모양.
오웬 또한 식량을 조달하러 판게아 클로니클에 접속한 채다.
그리고 마사인 경은-
“…….”
고른 숨을 내쉬며 정말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물론 먼저 불침번을 서겠다고 자청한 것은 성진 쪽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황자를 둔 채로 이렇게 순순히 잠들 줄이야.
문득 비서에서 흘려 읽은 문장 한 구절이 뇌리를 스쳐갔다.
-영혼이란 어찌 이리도 연약하기만 한가.
Chapter 139: Chapter 439
Chapter Text
439. 재회 (1)
자신만만하게 확언한 대로, 자코모 밀로는 ‘다키아누스의 비서’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대단히 오래된 책 같지만, 그것은 순전히 보관 방법이 잘못됐기 때문입니다. 종이의 재질과 제본 방식을 보건대, 그 비서가 출판된 것은 고작 100년도 채 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정작 다키아누스라는 인물이 살았던 시기는 거의 4대 성황의 집권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 절대로 그가 직접 집필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다키아누스는 이런 괴상한 비서의 저자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유명하고 또 족적이 뚜렷한 자입니다. 예비된 분이시여.”
“…그래?”
유명하다니,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 세계의 상식이 일천한 성진조차도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이름이었으니까.
“예. 그러니 누군가가 다키아누스를 이단이라 모함하기 위해 지어냈거나, 그도 아니면 멍청한 고서 수집가를 노린 위조 전문가의 사기 행각이겠지요.”
자코모가 밀로 백작가 전체를 ‘멍청한 고서 수집가들’로 매도하기까지 했지만, 성진은 여전히 석연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적당히 꾸며 냈다고 보기에는 책의 내용이 꽤나 일관성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건 오웬의 퀘스트 아이템이잖아?’
하면 그 나름의, 위조품 이상의 가치는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것만으로 이 책이 가짜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 자코모. 그저 우연히 이름이 같은 다른 저자인지도 모르니까.”
“…네?”
“아니면 다키아누스의 비서를 보존하기 위해, 후대의 누군가가 내용을 새 책에 고스란히 필사했을 수도 있지.”
그러자 자코모 밀로는 잠시 멍청하게 성진을 올려다보더니, 뭔가를 깨달은 듯 다급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아, 그, 그렇군요! 워낙 오래전 일이라 잘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름이 같은 저자가 달리 존재할 리는 없을 겁니다. 다키아누스 이후로, 그 누구도 감히 자신을 사사로이 다키아누스라 칭하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어째서?”
“그 이름이 다키아누스의 사후에 어느 강력한 귀족가의 이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자코모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성진도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다키아누스는 다시아노 후작가의 시조입니다. 예비된 분이시여.”
“다시아노?”
“예. 당시 오만한 다키아누스는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가문을 세웠습니다. 다시아노는 다키아누스의 오르토나식 발음에 지나지 않습지요.”
“……!”
그 순간, 성진은 이 낯익은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명확하게 떠올렸다.
언젠가 그가 약차에 취해 어느 염상 차원에서 눈을 떴을 때, 아버지가 직접 자신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던가!
-지금의 로드인 베르세우스는 순혈 라이칸스로프가 아니란다. 그는 오래전 다시아노 후작가의 선조가 되었던 라이칸스로프, 다키아누스의 먼 후손이다.
난 바보인가?
왜? 왜 그 중요한 사실을 이제야 기억해 낸 거지?
성진이 충격에 빠져 있는데, 이를 눈치채지 못한 자코모는 설명을 이어갔다.
“또 한 가지, 이 불온 서적이 다키아누스가 쓴 저서의 필사본일 리도 없습니다. 세간에 알려지기로, 그는 누구보다도 독실한 주신의 숭배자였으니까요.”
오르토나가 멸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왕국을 통치하던 이들은 사르데냐 왕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시아노 후작가의 시작은 그 사르데냐 왕가의 시작보다 더욱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는 델크로스가 한창 무력을 바탕으로 교회 세력을 대륙 곳곳으로 퍼뜨리던 시기였다. 일명 ‘피의 대제’라 불리던 2대 성황, 리무스에 의해 정복된 후, 오르토나의 왕들은 대대로 성황가의 입맛에 따라 책봉되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르토나의 봉신들도 마찬가지. 제국을 향해 불순한 의도를 드러낸 이들은 철저하게 배제되었고,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엄격한 종교 검증을 통해 선발된 새로운 영주들이었다.
그러니 다시아노의 시조 다키아누스가 이단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은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손에 넣었을 때, 저는 이렇게 지레짐작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을 만든 것은 우리, 밀로가의 선조일지도 모른다고요.”
서로를 모함하여 종교 재판에 회부하는 것. 그것이 한때 영지전보다도 자주 쓰인 정쟁의 방식이었다.
그러니 이 책 역시 밀로 백작가가 다시아노 후작가와의 충돌을 준비하며 만든 위조품일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오르토나 내전이 발발한 이후, 우리 가문은 이 책을 섣불리 이용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망국 이후 살아남은 다섯 영주들이 겨우 아슬아슬하게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시점이다. 이때 밀로 백작이 다시아노 후작을 제국에 팔아넘기고 배신자로 낙인찍힌다고 생각해 보라. 다른 영주들이 어떤 자세로 나올지는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저자가 하는 주장은 하나부터 끝까지 허황되기 그지없습니다. 예비된 분이시여. 혹시 이 책의 뒷내용까지 모두 읽으셨나이까?”
성진이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자, 자코모 밀로가 피식 비소를 흘렸다.
“개중 가장 어처구니가 없는 부분을 예로 들어 보자면, 그래요. 저자는 자신의 지식이 무려 다른 세계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다른… 세계?”
성진의 귀가 쫑긋해졌다.
다른 차원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까. 어째 이 책의 신뢰도가 조금 올라가는 기분이다. 물론 자코모 밀로는 이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네. 그리고 가장 가관인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포박된 자세가 불편한지, 그는 짐마차 바닥을 요리조리 구르며 잠시 뜸을 들였다.
“글쎄 다키아누스를 자칭하는 저자가, 스스로를 인간이 아닌 고귀한 늑대의 형제라고 지껄이는 겁니다. 자신이 순혈의 라이칸스로프라나 뭐라나.”
“라이칸스로프?”
흠칫!
비서를 조심스레 넘기던 성진이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라이칸스로프가 스스로를 라이칸스로프라고 주장하다니, 위조품치고는 참으로 공교롭군 그래.
물론 자코모 밀로는 성진의 얼떨떨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네. 참으로 웃기지 않습니까? 설마 누군가가 그 말을 믿으리라고 진심으로 기대했던 걸까요?”
“…그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근거는?”
“그야, 예비된 분이시여. 당신께서도 아시다시피, 라이칸스로프는 이지가 없는 마수가 아닙니까?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사람과는 다른 생물입니다.”
하지만 우습게도, 자코모 밀로가 가장 황당하다고 생각하는 그 대목이야말로, 성진으로 하여금 이 책에 대한 신뢰를 불러일으켰다.
이 자리에서는 오직 성진과 마왕만이 알고 있는 사실. 바로-
‘베르세우스 다시아노는 라이칸스로프의 혼혈이고, 그의 시조는 순혈 라이칸스로프다. 즉, 이 책은 적어도 일정 부분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거야!’
* * *
꽤 오랜 시간 판게아 크로니클에 접속해 있던 오웬은, 대단히 만족스러운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주머니가 두둑해진 것은 덤이다.
“하하, 놀라지 마, 뉴비야. 내가 그린존에서 뭘 찾았는지 알아? 아 글쎄, 엄청 맛있는 스튜를 퍼주는 꿀 아르바이트가 광장 구석에 숨어…….”
하지만 오웬은 이내 말끝을 흐리며 눈을 끔벅거렸다. 성진이 마치 뭔가에 홀린 듯,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그가 준 고서를 착착 넘기고 있었으니까.
‘퀘스트 아이템? 그냥 잠시 시간 때우라고 준 건데, 저게 그렇게나 재밌나?’
오웬은 주섬주섬 가져온 먹거리들을 바닥에 진열하며, 신기한 시선으로 성진을 살폈다.
이따금 소년의 동공에서 점멸하는 붉은빛은, 그저 반사된 램프의 불빛인가, 아니면…….
탁!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성진은 마침내 혼잡한 비서의 내용들을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굳건한 영혼의 성벽을 쌓기 위해, 다키아누스는 특수한 꽃을 재배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추운 지방에만 자생하는 희귀한 꽃을.’
여전히 뜬구름 잡는 이야기의 나열이었다.
하지만 실마리를 찾았기 때문일까. 자연히 이전의 기억들이 비서의 내용과 결합되며 성진의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정리되어 간다.
언젠가 지그스문트령의 설원에 고립되었던 날. 오랜 시간 이성을 잃고 마경을 떠돌아다니던 라이칸스로프는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말했었다.
-마경에 이르는 순간, 분명 동족들의 정신이 흐려질 거라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소.
-이성을 마비시키는 향기를 내뿜는 푸른 꽃이오. 오래전부터 마경 깊은 곳에 자생하던 것이지. 그렇기에 이곳이 예로부터 동족들의 감옥으로 사용된 거요.
라이칸스로프들의 우두머리인 바즈라는, 교활한 베르세우스에게 속아 마경에 발을 디디고 말았다고 했었다.
-그런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 어찌된 영문인지 그 푸른 꽃이 온 숲에 가득 피어 있었소. 마경의 중심 전체가 마약으로 가득한 [화원]이 되어 있었지!
그리고 루이제.
그날 이후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린 혼혈 라이칸스로프 소녀 역시, 마지막으로 성진에게 이런 비장한 말을 남겼었다.
-저는 그 [화원]의 실체를 이 눈으로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비서의 내용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많았다. 성진은 새삼스럽게 낡은 책을 내려다보았다.
‘이 황당한 개소리들이… 모두 진짜라고?’
마경 깊숙한 곳에 귀중한 꽃을 재배하는 화원을 만든 것이, 정말로 다시아노 후작가의 시조, 다키아누스란 말인가?
그리고 그 꽃을 꾸준히 갈아 마시는 것만으로, 영혼의 성벽을 쌓아 불로불사가 될 수 있다는 거야? 진짜로?
“허…….”
어이가 없어 멍하니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입가로 작은 어묵 하나가 들이밀어진다.
냠냠.
성진은 무심코 그 어묵을 받아먹으며 생각했다.
‘갈아 마신다고 하니 생각나는 거지만, 이거 어째 약차랑도 효용이 비슷한 느낌이 든단 말이지.’
달고 짜게 조미된 먹거리가 들어오니, 간만에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로페룸의 알을 갈아 만든 차를 유통시키던 지그스문트령 근처에, 우연찮게 다키아누스가 재배하던 꽃밭이 있었다고?’
이건 절대 우연일 수가 없다.
게다가 다키아누스가 말하는 ‘꽃’이란 것의 설명도 어딘가 낯설지가 않았다.
지금껏 많은 이들이 이 귀한 푸른 꽃에 각자의 이름을 붙였다.
창백한 안식, 영원의 푸른 보석, 고귀한 여왕의 요람…….
하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은 단연코 그것이라.
딜레리아.
푸른 딜레리아의 꽃.
이 이름은 성진 역시 알고 있었다. 단지 그가 아는 딜레리아는, 꽃이 아닌 이계 나비의 이름이었지만.
‘하지만 정말 딜레리아의 나비와, 딜레리아의 꽃이 별개인 걸까?’
냠냠.
또다시 입가로 다가오는 폭신한 빵 조각을 받아먹으며, 성진이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그래. 그 둘의 이름이 같은 건 절대 우연일 수가 없어. 게다가 로건도 그랬잖아? 해수 토벌을 하던 중, 마경 근처의 검은 숲에서 딜레리아의 푸른 나비를 본 것 같다고.
‘공통점은 그것만이 아니야.’
딜레리아, 그리고 로페룸의 알.
황도에 회색 역병이 창궐했을 때, 마왕은 로페룸의 생활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맞아. 로페룸이 흉내 내는 것이 딜레리아의 알의 냄새지. 마물들이 마약에 끌리듯 이끌린다는 것 하나는 맞는 말일 거야.
그러니까 분명 그 둘 사이에도 묘한 연관 관계가 있었다. 다키우스의 탕약, 그리고 지그스문트령의 약차.
냠냠.
적당히 식은 스튜를 꿀꺽 목으로 넘기며 성진이 결심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대로 조용히 레지나로 돌아갈 게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 참회 교단의 약차 유통 경로를 찾아봐야겠어!’
십중팔구 그들은 자유 지하도의 거점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거점에도 조금씩 약차가 퍼져 나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단 가장 가까운 거점을 하나 더 찾아야겠다!’
되도록 그들의 거점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조반니와의 약속이 있었지만, 이미 다키아누스의 비서를 보고 만 이상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성진의 짐작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그 약차는, 회색 역병의 진정한 목적은……!
급한 마음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성진은, 하마터면 가까이 바짝 다가와 있던 오웬과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다.
“으헉?!”
“…응?”
그제야 집중이 흐트러지며, 주변의 풍경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여러 가지 음식들로 잔뜩 어질러져 있는 짐마차 바닥과, 엉거주춤한 자세로 스푼을 들이밀고 있는 오웬의 모습이.
“너 뭐 하냐?”
“…….”
“마차 바닥은 왜 이 모양이고?”
“어어, 그게 말이지…….”
이놈은 또 왜 이렇게 버벅거려?
잠시 기다리던 성진은, 결국 오웬의 변명을 다 듣지 못하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뭘 먹으려면 좀 깔끔하게 먹든지. 이게 다 뭐야? 이런 칠칠치 못한 녀석.”
“…….”
어쩐지 시무룩해진 오웬을 뒤로하고, 성진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마부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어이! 이봐! 언제까지 모른 척 마차만 몰고 있을 셈이야? 대체 이게 며칠째냔 말이야! 우린 슬슬 배가 고프다고! 알아?”
실은 묘하게 배가 든든한 기분이 들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성진은 지금 당장 자유 지하도의 거점 상태를 영안으로 확인해야 했다.
“특송이고 뭐고, 그만 때려치워! 지금 당장 우리를 가장 가까운 마을로 보내 달라고! 어서!”
Chapter 140: Chapter 440
Chapter Text
440. 재회 (2)
갑작스러운 성진의 호통에, 잘 자다 졸지에 날벼락을 맞은 마부가 깜짝 놀라 고삐를 당겼다.
덜컹!
마차가 크게 흔들리며 멈추자, 구석에서 자고 있던 마사인 경이 부스스 눈을 뜬다.
“아니, 왜 뜬금없이 소란이냐? 꼬맹아. 이제 하루만 더 달리면 레지나에 도착한단 말이다!”
곧 상황을 파악한 마부가 성진을 향해 험악하게 따지고 들었다. 흠잡을 데 없는 제국어였지만, 그의 말투에서는 진한 오르토나식 억양이 묻어났다.
“이쯤 배달했으면 됐어. 우린 밥 먹으러 갈 거니까 이만 마을로 보내 줘.”
“이 꼬맹이가……!”
갑작스러운 생떼에 마부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건 안 될 말이다. 특송에는 다 나름의 방침이 있지. 그러니 한번 자유 지하도에 몸을 맡겼으면 끝까지 이용 규칙을 지키란 말이다!”
“아무리 ‘특송’이라도 정도껏 해야지. 지금 며칠째 우리를 쫄쫄 굶기는 거야? 짐짝 취급한다고 정말로 사람을 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쫄쫄 굶었…? 아니, 너 지금 그거 진심이냐?”
마부가 황당한 얼굴로 성진의 발치를 곁눈질했다. 짐마차 바닥에 여기저기에, 숨길 수 없는 군것질의 흔적이 잔뜩 흩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성진은 뻔뻔한 얼굴로 턱을 휙 치켜들었다.
“설마 그게 당신들의 방식이야? 외부인은 은근슬쩍 아사시켜 가며 조직의 비밀을 지키는 건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아사라니? 딱 보기에도 너나 네 일행이나 아직 팔팔하잖아?”
“뭐? 그러니까 지금 다른 사람에게는 제공해 주는 식사를, 간 봐 가며 우리한테만 주지 않았다, 이거지?”
“아니, 그런 억지가……!”
지금껏 얌전하던 짐짝이 뭘 잘못 먹었는지 갑자기 초특급 진상이 되었다. 마부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제대로 대꾸하지도 못하고 입만 뻐금거렸다.
그러자 그들의 실랑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마사인이 오웬에게 물었다.
“저하, 이게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한데 돌아오는 대답이 썩 시원찮았다.
“모레스가 배가 많이 고프답니다, 형님. 제 나름대로 열심히 먹인다고 했는데…….”
“…네?”
“글쎄 들어 보십시오, 형님. 제가 평소 안 하던 일일 퀘스트까지 다 찾아가며 했거든요? 그렇게 일해서 모레스 하나만큼은 든든하게 먹였다고 생각했단 말입니다. 그랬는데…….”
마사인은 더는 그에게 질문하지 못했다. 오웬이 전에 없이 낙담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밤이슬을 맞아 축 처진 닭 털들이 처량하기 그지없다.
그 와중에도 성진의 기세등등한 고나리질은 계속되고 있었다. 마부의 말끝마다 기똥차게 물고 늘어지는 꼴이 여간 얄미운 게 아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마부가 슬그머니 논점을 비틀었다.
“사전에 이미 다 얘기된 사항 아니었냐? 절대로 근방의 다른 거점들을 파고들지 않겠다고 이미 조반니 님과 약조한 것으로 아는데?”
성진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특송을 아무에게나 맡기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지만, 역시 이 마부는 조반니와의 거래 내용에 대해 언질을 받았다. 단순한 말단 운반책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우리를 감시하라는 명령도 받았을 거야. 불시의 사태에 대비해야 할 테니, 운송 과정에서도 나름의 재량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일 가능성이 높아.’
또 조반니와 헤어진 후로 계속해서 우리 뒤를 따라오는 암살자들 역시, 지금은 이 작자의 통제하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까지 생각한 성진은, 짐짓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마부를 달랬다.
“이봐. 약속을 어기겠다는 건 아니야. 우리를 다른 거점으로 보내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알아서 식량을 조달할 테니, 그냥 근처 마을에 내려달라는 게 그렇게나 어려운 부탁이야?”
“아니, 하지만……!”
“내가 알기로 이 근방에 테레라는 작은 마을이 하나 있어.”
“…….”
“인구는 적어도 번듯한 여관까지 운영하는 마을이지. 예전에 북부를 오가면서 들른 적이 있으니 잘 안다고. 그러니 이번에도 거기로 갈 거야.”
성진은 모른 척 시치미를 뗐지만, 마부의 얼굴에는 복잡한 고뇌의 기색이 어렸다.
왜 아니겠는가. 아무리 이들이 비밀리에 거점을 운영한다 해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발각될 수밖에 없는 장소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인적 드문 곳에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이 딱 하나 있다면, 거기가 바로 자유 지하도의 거점일 수밖에 없는 노릇. 그렇다고 그곳은 안 된다고 하려니, 자신의 입으로 거점의 위치를 실토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마부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현재 성진의 일행은 여러모로 특수한 위치에 있었다. 푸른 공화혁명전선의 입장에서는 껄끄럽기 짝이 없는 제국의 고위층에다,
여기에 더해 언제 침식이 일어날지 모르는 골치 아픈 악마 계약자까지 데리고 있지. 아마 이들로서는 얼른 성진 일행을 자유 지하도 밖으로 떨쳐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무리해서까지 초특급 배송을 하는 거다. 중간중간 교대를 한다고는 하지만, 쉴 새 없이 마차를 모는 것은 저들에게도 힘든 일일 테니까.
“알겠다. 그럼 특송은 여기서 끝내지.”
결국 마부는 항복하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내려도 좋다, 꼬마야. 조반니 님께는 내가 말씀드리마. 거점들에 대해 비밀을 엄수하는 것 잊지 말고, 저놈의 악마 계약자도 빼놓지 말고 잘 챙겨 가거라.”
한데 기껏 어려운 결정을 했더니, 그 말을 들은 소년이 다시 마차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편안하게 등을 기대는 게 아닌가!
성진은 당황한 마부를 향해 턱을 까딱해 보였다.
“우리가 왜 여기서 내려? 마을까지 태워 줘.”
“…뭐라고?”
“뭘 담백하게 놔줄 것처럼 인사하는 거야? 어차피 내려 주고도 감시를 위해 몰래 우리를 따라오려고 한 거 아냐?”
경악한 마부의 턱이 아래로 툭 떨어졌지만, 그를 빤히 올려다보는 성진의 태도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피차 에너지 낭비하지 말자고. 어차피 가는 김에 우리도 싣고 가. 어서.”
“…….”
“뭐? 왜?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마부의 시선이 점점 게슴츠레해졌지만, 성진은 그를 무시하곤 따끈하게 달궈진 마왕의 램프를 끌어안았다.
* * *
한편, 멀쩡한 마차를 두고 굳이 걷기를 결정한 이도 있었다. 레지나로 향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바꿔, 성황과 함께 북부로 향하기로 한 21호였다.
“지금부터는 도보로 이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추수도 다 끝난 시기에 이런 마차를 몰고 돌아다니면 너무 눈에 띌 겁니다. 우리 일행은 누가 봐도 상단이 아니니까요.”
다행히 별다른 반발은 없었다.
일행 중 하나는 말을 못 알아듣는 바르샤 야만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예 생각이 없는 여자다. 성황의 영혼을 담고 있는 호문클루스야 이 일의 원흉이니 말할 필요도 없고.
완전히 협곡을 벗어나기 전에, 21호는 짐마차를 협곡 입구에 정성스레 숨겼다. 그러곤 품에서 소리 나지 않는 작은 피리를 꺼내 불었다. 동료 정보원에게 마차를 인수하라는 신호를 주기 위해서다.
“아, 시끄러워요. 귀청 떨어지겠네!”
물론 오러로 청각 돋우는 훈련을 한 경우, 드물게 이 소리를 감지하는 사람도 있다. 21호는 당황한 얼굴로 에디스를 돌아보았다.
“이게 들립니까? 사람에게 잘 들리는 음역대가 아닐 텐데요.”
“저도 알아요. 옛날에 산에서 사냥하면서 많이 써 봤거든요. 와이번들이 이걸 들으면 완전 기겁을 하죠.”
“…….”
21호는 새삼스레 이 괴상한 여자를 찬찬히 살폈다. 3황자의 시녀라고 단편적으로 알고는 있었는데, 예쁘장한 용모에 비해 하는 짓은 우악스럽기 그지없었다. 거기다 생각보다 강한 오러 유저에, 심지어는 사냥도 다녔다고? 도무지 정체가 뭔지를 모르겠다.
한데 그런 그의 복잡한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디스는 천진한 얼굴로 그에게 작은 손수건 꾸러미를 건넸다. 무엇을 감싼 건지, 붉은 물이 흥건하게 스며 나오는 기분 나쁜 물건이었다.
“…이게 뭡니까?”
맨손으로 말고기를 도축한 적도 있는 여자다. 본능적인 거부감에 인상을 쓰자, 에디스가 천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잉크 딸기요. 아, 오해하지는 마세요. 과즙이 워낙 진해서 붙은 이름이지만, 이걸로 정말 잉크를 만들지는 않아요. 먹을 수 있다고요.”
“압니다. 저는 지금 그걸 물은 게 아닙니다.”
듣고 보니 뚝뚝 떨어지는 붉은 물에서 제법 달콤한 향이 나는 것도 같았다.
“이게 갑자기 어디서 난 겁니까?”
“아, 아까 땔감 주우러 갔다가 수풀에서 땄는데요? 몇 개 없기에 싹 쓸어 왔죠. 잉크 딸기가 이 계절까지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문데, 운이 좋았어요.”
에디스는 붉게 물든 손가락을 대충 쓱쓱 치맛자락에 문대며 덧붙였다.
“이거 제가 진짜 좋아하는 건데, 우릴 도와주신 보답으로 특별히 21호 씨에게도 나눠 드릴게요.”
“…….”
저 지저분한 꼴을 보고 있자니 없던 입맛도 다 달아날 판이었지만, 차마 순수한 호의를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 결국 21호는 떨떠름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손수건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자, 그럼 이제 가 볼까요.”
어쨌거나 더는 빈둥거릴 시간이 없었다. 해가 지기 전까지 자유 지하도의 거점, ‘테레’에 도착하려면 지금부터 서둘러야 했으니.
21호는 마지막으로 여장을 점검한 후, 성황의 호문클루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바트 사제님. 평소보다 몸이 불편하실 테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가 업어드리겠습니다.”
한데 성황은 잠시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나 싶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되었다. 나는 저자의 손을 빌리마.”
그러더니 바르샤인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속삭이곤, 정말로 그의 등에 올라타 버리는 게 아닌가!
21호는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폐… 사제님?!”
아마도 바르샤어로 뭔가 협박을 했으리라 짐작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를 업은 바르샤인의 얼굴에는 질색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러다가 저자가 언제 성황을 내팽개치고 달아날지 몰라, 21호는 한없이 불안해졌다.
“제가 도와드린다지 않았습니까. 대체 왜 그러십니까?”
“너는 나 외에도 신경 쓸 일이 많지 않으냐? 이자에게도 적절하게 일을 분담시켜야지.”
“아니, 호문클루스를 업는 것 따위가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그렇게 중얼거리던 21호는 갑자기 정색을 했다.
잠깐. 설마 그렇게까지 제가 못 미더우신 겁니까? 심지어는 말도 통하지 않는 저따위 야만인보다도요? 네? 그런 겁니까?
점점 험악해지는 21호의 표정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 성황이 황급히 설명했다.
“오해다. 그런 게 아니다, 엔리케.”
“그럼 뭡니까!”
“다 이 바르샤인의 안전을 위해서니라. 이자가 내게 성심성의껏 봉사하지 않으면, 아마도 한동안 아이들의 용서를 받기 어려울 테니까.”
“용서…요?”
“그래. 나중에 무슨 짓을 당할지 조금 우려스럽구나. 그래도 이자의 본의는 아니었으니 딱하게 되지 않았더냐.”
“…….”
지극히 부족한 설명이었으나, 21호는 어쩐지 그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저 야만인이 성황에게 얼마나 큰 해악을 미쳤던가. 피가 흥건한 사제복을 처음 봤을 때는, 정작 자신도 머리 뚜껑이 열릴 뻔하지 않았나. 잠시 고민하던 21호는, 결국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암살자와 호문클루스, 황궁 시녀, 바르샤 야만인이라는 어딘가 묘한 구성의 일행이 터벅터벅 북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터덜터덜.
21호는 앞장서서 일행을 인도하면서도, 성황과 야만인이 신경 쓰여 좀처럼 경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언제 사고를 칠지 알 수 없는 야만인과, 어디가 부러질지 몰라 매번 조마조마한 호문클루스. 신경 쓸 구석이 많으니, 문득 손에 쥐고 있던 꾸러미가 성가시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기껏 받은 먹거리를 버릴 수도 없는 노릇. 결국 21호는 손수건을 펼쳐, 붉은 딸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
한데 그 순간, 성황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엔리케를 바라본다.
얼굴은 두꺼운 후드로 완전히 가려져 있었지만, 그의 시선이 딸기를 쥔 손에 잠시 닿았다는 것을 21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만두는 것이 좋을 터인데, 엔리케.”
“네?”
“저 시녀가 만들어 낸 염상이 생각보다 강력하구나. 아마 그 딸기도 염상 결계의 영향을 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1호가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잉크 딸기 하나를 기어이 입에 넣었을 때였다.
“……?!”
혀를 무참히 유린하며 끝내 대뇌까지 뒤흔드는 강렬한 쓴맛이라니!
“우웩!”
21호는 재빨리 잉크 딸기를 토해냈다. 정말로 충격과 공포가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멀쩡한 딸기에서 쓸개즙 맛이 나지?’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이 일의 원흉인 에디스 역시 기겁하며 딸기를 뱉어냈다는 점이다. 지저분해진 입가를 소매로 쓱 닦아낸 그녀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21호를 바라보았다.
“어라? 이상하네요. 수확 시기가 지나서 상한 걸까요? 딸기에서 이런 맛이 날 리가 없는데…….”
물론 21호와 에디스는, 자신들의 주위를 빙빙 돌며 시끄럽게 보채는 영혼 단말의 존재를 깨닫지는 못했다.
[성황 아빠! 빨리, 빨리 저 야만인에게도 저걸 먹어 보라고 해! 으응?]
[아빠 폐하! 얼른, 얼른 그것만 하면 조금은 봐주지 못할 것도 없어!]
[물론 이건 모레스가 화내는 거랑은 별개지만 말이지!]
[당연 모레스는 이 정도로는 절대 봐주지 않을 거지만!]
[아냐! 우리도 용서할 필요는 없다고!]
[당연하지! 함께 피의 축제를 벌이자!]
성황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Chapter 141: Chapter 441
Chapter Text
441. 재회 (3)
그 이후로도 21호의 통솔에 따라, 일행의 여정은 큰 무리 없이 이어졌다.
?히익! 이것 좀 보시오! 여, 여자! 남자! 이치가 또 숨을 쉬지 않고 있소! 이자는 정녕 지옥에서 올라온 악령이란 말이오!
물론 정무 회의 참석차 성황이 잠시 자리를 뜨는 통에, 놀란 바르샤 야만인이 새파랗게 질려 잠시 난리를 치는 일이 있었고-
-웩! 이 지독한 육포는 대체 뭐예요? 21호 씨! 설마 아까의 잉크 딸기에 대한 복수는 아니겠죠?
걸으면서 간단히 요기하던 증, 에디스가 쓸개즙 맛이 나는 육포를 모조리 뱉어내는 등의 소소한 사건이 있었지.
하지만 그 외에는 비교적 평화롭고 무난한 여정이었다. 기본적으로 다들 체력이 되는 데다, 여간해서는 지치지 않는 오러 유저이기까지 하니까.
그렇게 일행은 빠른 속도로 황무지를 가로질렀다. 이따금 굶주린 에디스가 입맛을 다시며 21호의 눈치를 살피긴 했지만 말이다. 자연스럽게 21호는 그녀가 가진 염상 결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 쓴맛. 폐하께서는 분명 저 시녀가 만든 염상 결계 때문이라고 하셨지.’
아직은 비교적 생소한 개념이었지만, 다행히 21호에게는 염상 결계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는 막 철이 들 무렵, 성황으로부터 여러 뜬구름 잡는 가르침을 받았던 1호 제자가 아니겠나.
-엔리케. 네게 주어진 힘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먼저 네가 속한 세계가 움직이는 기본 원리에 대해 이해해야 한단다.
-뭔 원리씩이나? 남들은 그런 거 잘 모르던데? 바트 형. 그건 너무 거창한 거 아냐?
-모두가 그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을 뿐이니라. 들어 보거라, 엔리케. 거대한 공허 위에 스스로 의념을 세우면, 그것이 곧 확고한 염상이 되는 것이니, 모든 오러는 이 염상을 따라 움직이며 자연히 실체화에 이르는…….
-아니, 바트 형. 나는 기본적인 오러 연공에 대해 물었잖아. 그냥 오러 쓰는 법이나 좀 가르쳐 주면 안 돼?
-…지금껏 내가 설명한 것을 무엇으로 들었더냐.
…돌이켜 보면 별로 도움이 되는 수업은 아니었지.
어쨌거나 이전의 상황들을 찬찬히 되새겨 본 21호는, 그 모종의 염상 결계가 에디스의 손을 기준으로 일정 범위 내에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제대로 식기를 사용해서 먹을 때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니까.
‘결국 직접 손으로 쥐는 게 원인인 건가.’
약간의 궁리 끝에, 21호는 긴 나무 꼬챙이 하나를 구해, 거기에 육포 조각들을 꿰어 넣기에 이르렀다. 그러고는 그것을 에디스의 손에 조심스레 들려주었다.
“음… 어? 이건 맛이 괜찮은데요?”
다행히 이번에는 쓸개즙 맛이 나지 않는 모양. 안심한 에디스는 곧 신이 나서 육포 조각들을 하나하나 빼먹기 시작했다.
* * *
일행은 해 질 녘이 되어, 예상보다 조금 이른 시각에 테레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모두들 잘 알아 두십시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둔덕에 멈춰 서서, 21호는 진지한 얼굴로 일행들을 돌아보며 주의를 주었다.
“테레는 자유 지하도의 거점 중에서 드물게 세간에 잘 알려진 곳입니다. 그러니 여행자가 무사히 지나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숙지해야 할 사항들이 있습니다. 일단-”
“근데 21호 씨. 자유 지하도가 뭔가요?”
눈치 없는 에디스가 손을 들고 묻는다. 21호는 무시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일행 중 이 설명을 들을 사람은 그녀 하나뿐이었다.
“…간단히 말해, 제국에 큰 반감을 가진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아하!”
초롱초롱 눈을 빛내던 에디스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또다시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음? 하지만 일전에 모레스 저하와 함께 지그스문트령에 다녀올 때는 그런 주의 사항이 없었는데요? 이 근방에는 여관이 있는 마을이 하나뿐이라, 울프 기사단도 매번 황도로 오갈 때는 테레에서 묵어간다고 했어요.”
“…그야 테레 사람들도 시비 걸 상대는 가리기 때문입니다.”
“아하!”
“그럼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응? 근데 21호 씨. 제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우리도 막 남들이 시비 걸고 하기에는 좀 강한 편이지 않나요?”
이번에도 도중에 말을 끊어먹은 에디스가, 거대한 워해머를 치켜들며 등을 쭉 펴 보인다.
“…….”
21호는 극도로 피곤해졌다. 잠시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대체 모레스 황자는 어떻게 저 여자를 용케 전담 시녀로 부리고 있는 걸까?
“고위 귀족이나 기사단은 괜찮습니다. 건드리면 후환이 두렵다는 걸 잘 아니까요. 어느 정도 규모를 가진 상단 역시 괜찮습니다. 간간이 오가는 상단마저 없으면, 그러잖아도 엉망인 북부 경제가 어떤 꼴이 날지 빤하니까요.”
거기까지 말한 21호는, 또다시 입술을 달싹거리는 에디스를 향해 강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소속 없는 행상이나 유랑객, 혹은 우리 같은 단순 여행자는 다릅니다. 그 개개인이 아무리 강해도 예외는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음? 근데 21호씨-”
“아. 시. 겠. 습. 니. 까?”
“…네에.”
박력에 밀린 에디스가 떨떠름하게 입을 닫자, 21호는 참았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럼 잘 들으십시오. 첫째, 제국인으로서의 우월감을 남들 앞에서 쉽게 드러내지 마십시오. 함부로 근거 없는 잘난 척을 하거나, 오르토나 인의 생활 습관 및 관행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당연한 주의 사항이었다. 그들 대개가 제국에 강한 박탈감을 가진 오르토나 출신이기 때문이다.
가급적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상책이며, 제국인임을 들키더라도 그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둘째, 델크로스의 지존이신 성황 폐하를 찬양하거나, 그분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지 마십시오.”
북부의 많은 이들이 오르토나의 멸망을 제국의 탓으로 여기고 있다. 당연히 모였다 하면 현재의 성황을 높은 강도로 비방하는 일도 다반사.
이때 괜한 충성심을 앞세워 그들과 대적하려 들다가는, 순식간에 온 마을을 적으로 돌리기 십상인 것이다. 잘못하면 집단 폭행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셋째, 가급적이면 일체의 종교적인 행동을 보이지 마십시오. 함부로 주신을 찾거나, 그를 향해 기도해서도 안 됩니다.”
주신을 향한 신앙 자체는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북부 역시 오랜 세월 주신을 믿어왔으니까.
그러나 자유 지하도를 이용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이단 종파, 즉 암흑 교단에 몸담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차라리 믿음을 보이지 않으면 괜찮다. 하지만 만일 독실한 정교회의 신도라는 것을 들키게 되는 날에는, 어디선가 몰려온 암흑 교단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될 수도 있다.
“아, 지킬 게 많네요. 벌써 첫 번째 주의 사항을 까먹었는데,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21호 씨.”
“그럼 아예 입을 다물고 계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아하!”
그렇게 사전 준비까지 마친 일행은 조심스럽게 테레 마을에 발을 들였다.
“……?”
한데 마을 입구에 들어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21호는 평소와 다른 어딘가 기이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북부의 다른 지역들처럼 늘 침체되어 있던 마을 분위기가,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가볍게 들떠 있었다.
어리둥절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꺄르륵!
남루한 옷을 입은 아이들이, 땟국이 줄줄 흐르는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어딘가로 달려간다.
“어서 가자! 설명만 들어도 불 쇼를 보여준대!”
“나는 아까 봤지! 정말로 불이 공중에 막 날아다니는 마술이야!”
“우와! 신기하다!”
…불 쇼?
잠시 의아해졌지만, 21호는 일단 일행을 추슬러 마을의 하나뿐인 여관을 향해 발을 옮겼다.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여관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일행의 주위로 점점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여관 앞에 이르렀을 때, 일행은 입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인파를 발견하곤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째 움직일 수 있는 마을 사람들은 죄다 이곳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엔리케.”
그때, 성황의 호문클루스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페… 사제님? 일어나셨-?”
“설명할 시간이 없다. 우선 저 시녀를 막아라.”
“네?”
21호가 그 경고의 의미를 채 파악하기도 전에-
“어엇? 저하?!”
뭔가를 발견한 에디스가 반짝 고개를 들더니, 쏜살같이 인파를 항해 튀어나간다. 21호는 깜짝 놀라 황급히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에디스 씨! 잠시만……!”
그리고 그 순간, 21호 역시 발견하고야 말았다.
인파의 정중앙에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어느 말쑥한 소년 하나를.
“……?!”
21호는 제 눈을 의심했다.
‘모레스… 황자?’
설마 그럴 리가?
아니,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그 소년은 모레스 황자가 틀림없었다. 비록 허름한 의복을 입고서 검은 검댕을 잔뜩 묻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소년이 타고난 인물과 기품을 모두 감추기는 역부족이었다.
“21호 씨. 우리 저하세요! 대체 저하께서 지금 저기서 뭘 하시는 거죠?”
“쉬잇-! 아무래도 정체를 숨기고 계신 것 같습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는 에디스를 말리며, 21호는 재빨리 주변의 상황을 파악했다.
여관 입구에 놓여 있는 작은 좌판과, 그 앞에 서서 자신만만하게 두 팔을 활짝 치켜든 소년.
빙빙 도는 작은 불꽃을 마치 후광처럼 머리 위에 얹은 채, 황자는 소리 높여 청중들을 향해 소리쳤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차가 아니야!”
“……!”
“약차라니! 대체 언제까지 그런 구시대적인 음료를 마실 생각이야? 자, 여기에 훨씬 월등한 맛과 효과를 가진, 심지어 가격도 더욱 저렴한 테오신테 차가 있다!”
…판촉?
이 사태의 진상을 깨달은 순간, 21호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체 신성 제국의 황자가, 왜 이런 곳에서 좌판을 깔고 있는 거지?
아니, 심지어는 제대로 된 판촉도 아니다. 지금 황자는 21호가 생각했던 금기란 금기는 모조리 어기는 중이었다.
“지금 황도에서는 어느 누구도 약차 같은 근본 없는 음료를 마시지 않는다! 왜냐! 델크로스에는 이제 신비의 작물, 테오신테가 있으니까! 심지어 이 테오신테는 조만간 브르타뉴에도 수출될 예정이라고!”
황자는 지금 마음껏 자신이 황도 소속임을 드러내고 있었고, 북부 사람들의 생활 습관을 신나게 비난하는 중이다.
“온 대륙에서 사랑받는 인기 상품! 테오신테! 주신의 대리자이신 성황 폐하께서도 인정하신 바로 그 맛! 참고로 우리 위대하신 폐하께서는 미식가시다! 그 품위에 걸맞게 입도 엄청 짧은 분이라고!”
심지어는 성황을 대놓고 드높이고, 그의 권위를-정확히는 미식가로서의 권위를-칭송하는 중이었으며-
“자! 이 금빛도 찬란한 신의 음료를 보라! 주신께서 대륙에 내려주신 진정한 신의 은총! 테오신테! 이것만 마시면 당신도 잘나가는 황도 귀족 못지않아! 한 번씩 맛을 보면 구질구질한 약차 따위는 조금도 생각나지 않을 거야!”
온 힘을 다해 주신의 은총을 찬양하는 중이다.
바야흐로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대체, 대체 황자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극도의 혼란에 빠진 21호는 빤히 눈으로 보고도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사람들이 화를 내는 대신 흥미진진한 눈으로 황자를 보고 있다는 정도랄까.
삐그덕.
21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 야만인의 등에 업혀 있는 바트 사제에게로 향한다. 그나마 작금의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에게로.
“…….”
잠시 눈앞의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성황은, 곧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양손을 앞으로 뻗어 바르토자의 입을 강하게 틀어막았다.
21호는 의아했지만, 잠시 후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따뜻한 아나톨리아의 지열을 고스란히 받고 자라, 몸에 강한 열기를 불러일으키는 테오신테! 이 기적의 음료는 심지어 바르샤의 야만인도 제국으로 전향시켰다!”
모레스 황자의 자신만만한 외침과 함께-
웬 훤칠한 바르샤 전사 하나가 깃털을 흩날리며 나타났다. 평소보다 허름한 행색을 한 오웬이었다.
“상태창 씨에게 보상의 상향 조정을 요구한다아아!”
그가 알 수 없는 바르샤어를 외치자,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의 동요가 거세졌다.
웅성웅성.
“바르샤어가 맞는데?”
“이야! 참말로 바르샤인이 전향했다고?”
“거 신통방통하네.”
순간 오웬의 모습을 확인한 바르토자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오웨… 으읍! 읍!”
다행히도 미리 주의를 들은 21호는, 이 바르샤인이 크게 소리치기 전에 성황과 함께 재빨리 그를 저지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오웬의 쇼는 계속되는 중이었다.
쭈욱-
맑은 곡물차를 들이켠 오웬이, 우렁차게 기합을 내지른다.
“흐아압! 긴급 퀘스트 등급 상향 기원! 아잣!”
빠각! 빠그작!
마사인 경이 높이 치켜들고 있던 나무판자들이, 오웬의 주먹질에 속절없이 깨져 나간다.
오오오-!
순박한 감탄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모레스 황자가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셨다. 여전히 밝게 빛나는 불꽃을 머리에 인 채였다.
“지금 모두에게 테오신테의 효능을 경험할 기회를 주겠다! 여기 많이 있으니까, 다들 한 모금씩 마셔들 보라고!”
그러자 또다시 마사인 경이 커다란 사발 몇 개를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어째 당장이라도 해탈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뭔가에 홀린 듯, 그 음료들을 앞다퉈 나눠 마셨다.
“자! 대륙이 놀라고, 브르타뉴가 감탄하고, 로한이 경악한 음료! 테오신테! 많은 사람들의 선택에는 다 그 이유가 있다! 이 음료를 맛보고 모두 지극한 건강과 행복을 누려 보자!”
묘하게 마음속을 깊이 파고드는 목소리와 함께-
찰랑!
높이 치켜든 소년의 손에서, 영롱한 금빛의 음료가 먹음직스럽게 요동쳤다.
Chapter 142: Chapter 442
Chapter Text
442. 재회 (4)
다키아누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푸른 딜레리아의 효과는 무척이나 강력하여, 자칫 잘못하면 영혼을 현실로부터 완전히 괴리시키는 끔찍한 독이 될 수도 있다고.
그래서 그는 오랜 연구 끝에 최대한 부작용을 줄인 탕약을 고안해 냈다. 물론 그만큼 딜레리아의 효과도 줄어들지만, 장기간 꾸준히 복용하며 정성을 들이면 능히 견고한 영혼의 성벽을 쌓을 수 있을 거라고 했지.
‘하지만 딜레리아는 귀한 재료야. 다키아누스도 자신이 비밀스러운 화원을 만들어 그 꽃들을 독점하고 있다고 했잖아?’
거기서 성진은 생각을 조금 비약시켰다.
후작가의 시조인 다키아누스가 활동하던 시기가 벌써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하면 그가 퍼뜨린 지식 역시 누군가에게 공유되어 암암리에 퍼져 나갔을지도 모를 일.
그리고 그들은 불로불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딜레리아를 대신할 뭔가를 찾아다녔으리라. 예를 들자면, 딜레리아와 유사한 향을 풍기는 로페룸의 알 같은 것들을.
‘즉 로페룸의 알은, 딜레리아의 하위 재료로 이용된 거야!’
그렇다면 다키아누스가 말한 영혼의 ‘성벽’이 무엇인지도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가능하다.
영혼이 깃들기에 가장 안락한 장소.
바로-
‘염상 결정!’
약차는 성진의 염상 결정을 극도로 활성화시키는 효과를 보였지. 즉 로페룸의 알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 대체재라는 뜻이다.
다키아누스의 탕약과 마찬가지로, 약차 역시 오랜 기간 복용하면 언젠가 제대로 된 염상 결정이 생성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상외로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테지. 그래서 더 급진적인 효과를 보고자 시도한 자들도 있었을 거야.’
아마도 그들이 주재료인 로페룸의 알을 직접 사람에게 심는 실험을 했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갑자기 전방위적으로 발생한 회색 역병 환자들은 모두 이 실험의 부작용이리라.
물론 웨스커 대주교가 독단으로 [임시 긴급조치권]을 발동한 이후에는, 그 기세도 한풀 꺾이고 말았지만.
아직은 회색 역병을 퍼뜨린 급진 세력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성진은, 약차를 ‘전통적인’ 방법으로 공급하는 세력만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결국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참회 교단인가.’
언젠가 벨린다를 심문하며 들은 적이 있지. 약차.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는 ‘각성차’의 재료인 로페룸은, 참회의 대주교가 직접 나눠 주는 보물이라고.
그리고 그때 벨린다는 이런 말도 했었다.
-각성차는 결국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지는 것! 우리가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그것을 너희 배교자들에게 기꺼이 나눠주는 것은, 모든 대륙의 인간들이 영적으로 깨어나기를 원하시는 주신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약차는 지그스문트령에 퍼지기 전에도, 이미 오랜 시간 북부 전역에서 암암리에 음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거다.
‘그리고 그 중심이 되는 것은, 암흑 교단이 이용하는 자유 지하도의 거점들일 확률이 높다.’
그래서 성진은 갑자기 생떼를 부려가며 ‘특송’ 마차의 경로를 바꾸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생각이었다. 현재 그에게는 불완전하나마 [영안]이라고 할 만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만에 하나, 정말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생성되고 있는 염상 결정들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글쎄, 어떨까…….]
성진의 설명을 들은 마왕은 조금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전에는 나도 너와 함께 여행을 했잖아? 만일 염상 결정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면, 분명 내가 알아볼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우리 일행은 여관에 잠시 머물렀을 뿐이잖아?”
상단의 통행이 잦은 여관 부근에서 마을 토박이들을 제대로 마주쳤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러니 거점 마을에 오래 거주하며 장기간 약차를 복용한 사람들을 확인해야 했다.
[근데 말이지. 설령 네 말대로 염상 결정을 발견한다고 해도 문제야.]
마왕이 꼼지락거리며 램프 중심으로 자리를 옮겨 앉는다.
[너랑 나만 볼 수 있는 걸 사람들에게 증거랍시고 내밀 수는 없잖아? 약차의 유통을 막고 싶다면, 아마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거야.]
“흠.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짐마차에 앉아 고민하는 동안, 어느새 날이 밝아 지평선에는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테레가 보입니다. 저하.”
마사인 경의 말대로, 저 멀리 작은 마을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 * *
일행은 ‘특송’ 마차에서 내려 무사히 테레의 여관에 도착했다.
“이게 끝이야? 우리를 이렇게 순순히 보내 준다고?”
오웬이 마부를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마부는 아직도 이쪽을 쏘아보며 마음껏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아니. 우리가 레지나에 도착할 때까지는 감시를 멈추지 않을걸?”
“뭐? 그럼 이제 어떻게 해?”
“어쩌긴 뭘 어째? 그냥 감시만 하는 거야. 대놓고 우리를 해치지는 못해.”
그렇게 오웬을 안심시켰지만, 성진도 내심 껄끄럽긴 했다.
‘놈들의 감시 속에서 움직이려면 좀 번거롭긴 하겠는데?’
어쨌거나 안정적으로 묵을 곳을 찾은 다음 생각하자. 그렇게 결심한 성진은, 여관 주인에게 가장 좋은 방 세 개를 요구했다.
“일행이 세 사람이오? 그럼 큰 방 하나만 잡아도 충분할 텐데.”
여관 주인은 일행의 허름한 행색에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물론 성진이 넉넉한 돈주머니를 꺼내자 대번에 표정이 바뀌었지만.
“아니, 꼭 세 개가 필요해.”
“두 개까지는 내어줄 수 있소. 물론 웃돈을 좀 많이 얹어 주셔야겠소만.”
“세 개. 나머지 방 하나는 세 배 가격으로 치르지.”
“그러시오.”
성진은 주인장의 손바닥 위로 금화 한 닢을 떨궈 주며 물었다.
“여관이 붐비는군. 이 마을에 묵으려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나?”
확실히 예전 지그스문트령을 오갈 때보다는 마을이 눈에 띄게 복작거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은근슬쩍 금화를 깨물어 보던 주인장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오. 최근에는 작은 상단이나 개인 행상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오. 혹시 ‘베르트란 & 리’라는 이름을 들어 보셨소?”
“알아. 양심적으로 장사하는 아주 좋은 상단이지. 재무구조도 튼튼하고.”
“…그건 잘 모르겠소만. 어쨌든 그들이 자주 오가는가 싶더니, 점점 개인 행상들도 늘어나는 거요. 듣자 하니 델크로스에서 행상들을 데리고 무슨 사업을 벌인다고 하더이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성진은, 드문드문 커다란 봇짐을 멘 사람들을 눈으로 훑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묵기로 한 방은 3층에 있었다.
“저하. 저하께서 머무시기엔 너무 허름하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바로 레지나로 돌아가는 것이 어떨지요?”
방을 둘러본 마사인 경이 조금 불편한 듯 물었다.
“괜찮아. 여기 오래 있지는 않을 거야. 마사인 경.”
“그렇습니까.”
“응. 그럼 난 주위를 둘러보고 올 테니, 마사인 경은 여기서 잠시 쉬고 있지.”
그러자 당연하게도 마사인 경은 대단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데 이상한 것은, 당장이라도 따라가겠다고 항의했어야 할 그가 성진의 명령에 고분고분 침상에 주저앉았다는 것이다. 물론 마사인 경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이 납득이 안 되는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음?”
오웬 역시 그의 행동에서 묘한 어색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뉴비야. 어제부터 형님이 왜 저러시는 거냐? 어째 평소랑 달리 좀 이상하지 않아?’
‘…….’
물론 짐작 가는 바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다 잊고 이만 자도록 해, 마사인 경. 나중에 눈을 뜨게 되면, 경을 괴롭히던 안 좋은 일들은 모두 잊게 될 거야.
-지금 경은 그냥 내 말을 따르기만 하면 돼. 그럼 모든 것이 해결될 테니까.
푸리아노의 하수도에서 나온 후, 심하게 불안해하는 마사인 경을 위해 성진은 여러 번 그런 말로 그를 달랬었다.
한데 나중에 마왕에게 듣자 하니, 강한 의지를 담은 그 말들이 마사인 경에게는 일종의 속박이나 저주처럼 작용했을 거라나?
‘물론 아버지가 잠시 와 주셔서 상태가 훨씬 좋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의 본래 성격과 달리, 묘하게 말을 잘 듣는 듯한 느낌이 남아 있단 말이지.
아귀가 맞지 않아 어딘가 삐걱거리는 느낌. 잊을 만하면 신경을 건드리는 그 불편감을 애써 무시하며, 성진은 오웬에게 당부했다.
“난 옆방으로 간다. 넌 여기서 쉬면서 마사인 경을 잘 살펴봐.”
“엉?”
오웬이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상태가 영 불안한 호위기사의 옆에 남아야 할지, 아니면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뉴비를 따라가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모양.
하지만 그의 방황은 생각 외로 금방 끝났다.
“엇, 긴급 퀘스트다!”
“뭐라는데?”
“그냥… 해야 할 일을 하라는데? 이게 뭐야?”
오웬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지시가 짧고 모호한 걸 보니까, 아무래도 네 말대로 하라는 거 같은데? 이상하게 상태창 씨는 너랑 연관되는 일에는 이렇게 몸을 사리더라.”
“…….”
“근데 보상이 너무 짜! 이럴 수가! 명색이 긴급 퀘스트인데, 등급이 F인 데다 보상도 단 5캐시라니! 이거 실화냐?”
내 말대로 쉬기만 하면 보상을 준다는 거 아냐? 대체 거기서 뭘 더 바라는 거야?
“간다.”
“아아, 그래. 뉴비야. 그래도 여관 안에만 있어야 해. 알았지? 괜히 너 혼자서 밖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탁!
잔소리가 끝이 없는 오웬을 뒤로하고, 성진은 방을 나섰다.
가만히 기감을 가다듬으며 주위를 살피자니, 아니나 다를까, 황무지에서부터 열심히 쫓아오던 암살자들이 하나둘 여관 지붕에 자리 잡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쯤 되니 슬슬 멀리서 따라오고 있을 다샤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이게 대체 며칠째야. 다샤가 잠시라도 쉴 틈이 있어야 할 텐데.’
조반니를 만날 무렵부터 성진은 그녀의 기척을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 아마도 일행을 감시하는 암살자들의 이목을 피해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닐까 짐작하지만.
물론 다샤의 뛰어난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성진이기에, 그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몇 날 며칠을 쉬지도 못하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얼른 이번 일을 끝내고 레지나로 돌아가야겠어. 근데 대체 무슨 수로?’
마왕의 램프를 한 손에 든 채, 성진은 천천히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오러 은폐를 쓰면 몰래 돌아다닐 수는 있어. 하지만 내가 직접 조사하러 다니면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될 거야.’
어떻게, 마을 사람들 모두를 부드럽게 한자리에 모을 좋은 방법이 없을까?
* * *
하지만 성진의 고민은 의외로 금방 해결되었다. 바로 여관 앞에서 주인과 실랑이를 벌이는 한 청년 덕분이었다.
“누구 맘대로 여기에 좌판을 깔겠다는 거요?”
“자릿세는 넉넉히 드릴 게요. 좀 부탁드려요, 어르신! 네?”
커다란 봇짐을 멘 그 청년은, 상인이라기보다는 촌에서 올라온 순박한 농부에 가까워 보였다.
한데 무슨 사정이 있는지, 꽤 필사적으로 여관 주인에게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번 상행에서도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면, 황궁 투자금도 완전히 물 건너간단 말이에요! 제발 도와주세요!”
“아, 몰라! 괜히 영업 방해하지 말고 저쪽 골목에나 가 보쇼!”
“어르시인-!”
한데 그의 말 중 유난히 성진의 귀를 잡아끄는 단어가 있었다.
‘…황궁 투자금?’
델크로스 황궁에서 개인 행상을 상대로 투자금을 준다는 말을 성진은 처음 들었다. 게다가 저 청년은 딱 봐도 누군가로부터 투자금을 땅겨 올 만한 재목이 아닌데?
“이봐, 괜찮으면 잠시 나랑 얘기 좀 할까?”
그렇게 해서 청년을 붙잡고 들은 이야기는 꽤 놀라운 것이었다.
“준 상단 사업자증?”
“네, 그렇습니다.”
자신을 ‘올리버’라고 소개한 청년은, 품에 소중하게 지니고 있던 서류 하나를 내보였다.
그는 물품을 구입하겠다며 내보인 금화를 확인한 뒤, 제법 성진에게 고분고분해진 상태였다.
“벌써 여기저기 소문이 자자합니다. 황궁에서 발행한 ‘준 상단 사업자증’을 발급받은 후 북부에서 성과를 올리면, 제대로 투자를 받아 어엿한 상단을 차릴 수 있다고요.”
최근 ‘베르트란 & 리’ 상단의 선구적인 개척으로 인해, 북부 치안에 대한 위기감이 대폭 줄어든 상태.
그래서 기존에 자리 잡은 상단과 경쟁하기를 꺼리는 작은 상단이나 개인 행상들이 최근 앞다투어 북부로 진출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신원을 보증하고 보호하기 위해 최근 황궁에서 발행하는 것이 바로 [준 상단 사업자증]이다. 이 사업자증만 있으면 북부의 어디서나 신원이 보증되며, 별도의 사례비 없이도 대형 상단을 따라다닐 수 있단다.
“좋은데? 그거 누가 승인해 줬는데?”
“아멜리아 황녀님이십니다. 듣자 하니 최근 황도의 상단 활동은 죄다 아멜리아 황녀님께서 총괄하신다고 하더군요.”
”흠.”
성진은 그가 내민 서류를 받아 들고는 유려하게 휘갈겨진 서명을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아멜리아 누님의 서명…….
“역시 아멜리아 황녀님은 델크로스 최고의 명필이시군.”
“…네?”
뜬금없는 감상에 올리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묻자, 마왕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 이거, 또 시작했네. 저놈의 두꺼운 콩깍지.]
“닥쳐!”
“네에에?”
난데없이 닥치라는 소리를 듣고 올리버가 크게 당황한다. 그런 그에게 서류를 돌려주며, 성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누님의 깊은 뜻을 알 것도 같았다.
너도나도 부푼 꿈에 눈이 멀어 마구잡이로 북부로 진출하면, 이들 중 일부는 순식간에 비명횡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겠지. 그래서 적당한 상단의 보호 아래서 성과를 내오라고 한 거다.
만일 소정의 성과가 생긴다면 투자를 받아 제대로 된 상단을 꾸릴 테고, 장사를 망치게 되면 순순히 포기하고서 고향으로 돌아가겠지.
또한 ‘준 상단 사업자증’은 황실에서 그의 신원을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니 운 나쁘게 북부에서 홀로 고립되더라도, 여간해서는 도적들이 목숨까지 건드리기 어려울 터.
아아, 우리 아멜리아 누님은 어쩜 이렇게도 상냥할까.
[…팔불출도 그 정도면 병이야, 이성진.]
뭐라는 거냐! 난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래서 올리버, 자네는 뭘 취급하는데?”
“아, 네. 약초들입니다. 손쉽게 키울 수 있고 효과도 좋은 것들이죠. 하지만 북부의 기후에서는 재배가 힘들 겁니다.”
“흐음…….”
성진은 올리버가 좌판에 펼쳐 둔 말라비틀어진 풀들을 뒤적였다. 어째 혼자 상단을 차리겠다는 큰 야망에 비해, 펼쳐 보인 물건들은 썩 시원찮았다.
바로 그때, 성진의 눈에 유난히 박히는 식물이 있었다. 뭔가 털 빠진 강아지풀 같기도 하고, 덜 여문 보리 이삭 같기도 한.
“이건 뭔데?”
“아, 그건 테오신테라고 합니다.”
“어디 쓰는 약초야?”
“약초라기보다, 차로 끓여 먹기 좋습니다. 약효는 딱히 없지만 제법 고소한 맛이 나죠.”
순간 번뜩이는 영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성진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올리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좋아, 올리버. 황궁 투자금을 받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네에?”
“자네 물건은 상품성이 충분해. 내가 자네 물건을 모두 사서 증명해 주지.”
“저, 전부요?”
아직도 긴가민가하는 청년을 향해, 성진이 힘주어 대답했다.
“그래. 테오신테도, 말라비틀어진 약초들도, 그 좌판도. 전부 다!”
정말 엄청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마을 토박이들을 죄다 이곳으로 불러 모을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Chapter 143: Chapter 443
Chapter Text
443. 재회 (5)
사람들이 반신반의하면서도, 절대 그냥은 지나치지 못하고 발을 멈추는 상품이 뭘까.
‘바로 만병통치약이지!’
복용하기만 하면 기생충도 잡아 주고, 전자파도 잡아 주고, 피부도 좋아지고, 탈모도 예방하고, 치질도 치료하고, 심지어는 정력까지 좋아진다!
이 정도만 광고해도 길 가던 사람 중 열에 여덟은 돌아볼 거다.
‘근데 그게 마침 먹기 간편한 차로 판매되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여기 사람들은 한동안 약차 대신 만병통치약만 주야장천 마시게 되겠지.
그래. 약차의 해악을 명확히 증명할 방법이 없다면, 그저 더 좋은 상품으로 시장에서 밀어내 버리면 그만 아니겠어?
[…근데 만병통치약이라니. 그거 완전 사기 아니야?]
마왕 놈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성진은 램프를 툭툭 치며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모르는 소리 마라, 마왕아. 이 세상에는 말이지, 플라시보 효과라는 엄청난 현상이 있어.”
비록 맹물을 마시더라도, 그것이 약이라는 믿음만 있으면 사람은 어느 정도 병세에 호전을 보이게 마련이거든.
[그러니까 내 말은 그게 사기-]
“닥쳐! 인간의 정신이 가진 무한한 잠재력에 대한 존중과 믿음일 뿐이야!”
생각해 봐라, 마왕아. 이게 다 대의를 위한 거라고. 우리는 약차를 몰아낼 수 있고, 사람들은 회색 역병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순박한 시골 청년을 자수성가 사업가로 만들어 줄 수 있어. 이거야말로 일석삼조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거기다 겸사겸사 차가 잘 팔려서 올리버가 완전히 자리 잡게 되면? 우린 북부의 경제에도 크게 기여를 하는 셈이 되는 거야!
‘잘되면 나중에 올리버에게 넉넉하게 개런티를 요구해야겠다.’
돈이 굴러들어 오겠구나. 상상만으로도 뿌듯하다.
성진이 흐뭇하게 웃고 있자니, 마왕 놈이 다급하게 램프를 점멸시켰다.
[저, 저 웃음! 이성진, 제발 그렇게 좀 웃지 말라니까! 너 또 뭔가 사악한 계략을 꾸미는 거지? 그렇지?]
“아니, 날 뭘로 보는 거냐? 난 성황가의 황자로서, 어디까지나 대륙을 널리 이롭게 하려는 이타적인 마음뿐이라고!”
[웃기지 마!]
그렇게 해서 성진의 만병통치약 제조 작업이 시작되었다.
우선 성진은 올리버에게 차로 음용할 수 있는 약초는 모조리 끓여 오라고 시켰다. 약차를 밀어낼 최상의 음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가지고 있는 재료들의 특성들을 제대로 파악해야 하니까.
여관 주인이 험악하게 인상을 썼지만, 성진의 넉넉한 금전적 인심에 이내 태도를 바꿔 통 크게 주방 한편을 내어 주었다.
그렇게 해서 잠시 후, 성진의 눈앞에 뜨거운 김이 폴폴 올라오는 풀물 그릇들이 준비되었다.
“이건 소화제, 저건 두통약, 요건 피부 부스럼에 주로 쓰는 약초입니다. 근데 테오신테 말고는 딱히 차로 마실 만한 것들은 아니라…….”
쭈뼛거리는 올리버를 뒤로하고, 성진은 그릇들을 직접 시음하기 시작했다.
[히익? 이성진! 너 이것들이 다 뭔 줄 알고 마시는 거야?]
“어, 괜찮아, 괜찮아. 내 위장은 튼튼하다고.”
[에휴! 방해되는 호위기사도 옆에 없겠다, 이참에 아주 막 나가려 드는구나? 응?]
타닥타닥 불똥을 튀기는 마왕을 무시하고, 성진은 약초 우린 물들을 하나하나 입에 머금고는 혀로 굴려 보았다.
“…….”
아쉽게도 대부분이 약초답게 쓰거나 비렸다.
‘아무래도 차로는 영 못 쓰겠는데.’
그나마 다행하게도 건질 만한 것이 하나는 있었다. 올리버가 처음부터 차로 팔 생각이었던 테오신테였다.
‘흠, 생긴 건 꼭 보리 이삭인데, 어째 옥수수차 같은 맛이 나는데?’
고소하게 올라오는 끝 맛을 느낀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합격. 맛이 꽤 괜찮군. 향도 비교적 무난하고.”
“네, 그렇지요? 역시 먹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우물물을 길면, 꼭 테오신테와 함께 바짝 끓여 먹거든요.”
“그런데-”
성진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다 괜찮아. 그런데 너무 무난하다. 어째 약차를 단번에 밀어낼 만한 강한 임팩트가 없잖아.
거기다 색깔도 문제였다. 우중충하기 짝이 없는 갈색이, 좋게 말하면 맥주 색이고 나쁘게 말하면 농축된 소변 색이란 말이지. 딱 봐서 먹음직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흠…….”
이게 물에 희석한다고 해서 회생 가능할까? 그러면 고소한 맛이 많이 떨어질 텐데.
‘식용 색소로 쓸 만한 첨가물이 필요하겠어. 아니면 다른 약초들을 이용해서 칵테일을 만들든지.’
한데 다른 약초들도 우중충한 색이 도는 건 마찬가지다. 거기다 워낙에 존재감 강한 맛이다 보니, 어떻게 섞어도 차로는 못 써먹을 것들이 탄생한다고.
잠시 고심하던 성진은, 개중 쓴맛이 덜하고 색소가 강해 보이는 붉은 꽃잎을 차에 뒤섞어 보았다,
“어, 틀렸다. 그냥 소변에서 심각한 혈뇨가 되어 버렸어.”
“…왜 시식 평이 소변의 테두리에서 도통 벗어나질 못하는 겁니까? 먹을 걸 가지고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올리버의 불평불만을 한 귀로 흘리며, 성진은 약초들의 개수와 비율을 이것저것 조정해 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아무래도 대개가 약용 식물들이라 맛이 쓰고 색이 탁하단 말이지. 맑은 분홍빛이 도는 약차와 비교하면, 빈말로라도 매력적인 차라고는 못 하겠다고.
하지만 어떻게든 좋은 결과물을 내어놓으려는 성진의 노력을, 시골 청년 올리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작업이 대체 왜 필요한 거죠? 테오신테 차는 원래 그런 겁니다. 단지 맛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성진은 혀를 찼다. 이런 딱하리만치 순진한 친구 같으니.
“올리버. 사기를 치… 훌륭한 장사꾼 되는 데 가장 중요한 규칙이 뭔지 알아?”
“헉? 당신, 방금 사기라고 했죠?”
“아냐, 잘못 들었겠지.”
“그럴 리가! 제가 지금 똑똑히 들었습니다! 분명 사기라고 했다고요!”
성진은 그 어리석은 중생에게 상냥한 미소를 보인 후-이때 어째서인지 올리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순박한 청년이 인생에서 다시는 들을 수 없을 소중한 가르침을 내려 주었다.
“첫째! 상인이란 말이지, 먼저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진 본질적인 욕구를 자극할 줄 알아야 해.”
다른 이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가치 있는 제품을 얻고자 하는 욕망. 모두가 구입하는 물건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얻는 소속감과 안정감. 쉽게 구하지 못할 엄청난 물건을 최고의 가성비로 쟁취하길 기대하는 희열!
“…네에?”
“그리고 둘째! 그 물건을 팔기 위해 다른 이에게 하는 말을, 본인 스스로가 먼저 굳게 믿어야 한다는 거야.”
맹물도 성수가 되리라고 믿어. 스스로를 단순한 사기… 장사치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기꺼이 이익을 나눠 주는 선량한 인물이라고 믿어야 해! 그래야 사람들을 불신의 늪에서 빼내어 제대로 설득할 수 있지 않겠어?
“에에?”
“그러니까 쓸데없는 일에 괜히 열 올리지 마. 좌판 깔기도 전에 대놓고 사기니 뭐니 하는 힘 빠지는 소리는 하지 말라, 이거야! 알겠어?”
그러자 올리버의 눈빛이 대단히 불손해진다. 성진은 그런 그를 무시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셋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누구의 눈에도 그럴싸해 보이는 상품이야!”
보기만 해도 상서롭고, 갖고 싶고, 쟁여 두고자 하는 욕망을 마구 불러일으키는데, 실제로 사고 나면 별다른 효용은 없는. 그런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 없는 물건들 있잖아?
우린 지금 그런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당신, 대체 사람들에게 뭘 팔고 싶은 겁니까?”
그래, 딱 봐도 몸에 좋을 것 같은 색상을 원한다. 예를 들면 판게아 크로니클에 있는 포션 같은 것들 말이지.
그것들은 딱 봐도 신비로워 보이고, 먹기도 전에 무슨 효과가 나타날지 생생하게 느껴지잖아? 그런 선명한 시각적 효과가 있지 않고서야…….
“잠깐만, 포션?”
그래, 포션!
성진은 반짝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지?!’
판게아 크로니클의 포션들 중 일부는 여기서 꺼내 쓸 수 있잖아? 그것들이라면 색상이 꽤 진하기도 하고, 맛도 그리 자극적이지 않고, 효과도 제법…….
성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인벤토리를 뒤지려 했다.
그러나 역시나, 열리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판게아 크로니클에 접속한 이후, 계정이 삭제되었느니 어쩌니 하더니만, 그때부터 이 꼴이었다.
그렇다면-
“오웬!”
다다다다!
성진은 그길로 오웬과 마사인 경이 쉬고 있는 방으로 달려가, 있는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콰앙!
“응? 뉴비야, 왜-.”
화들짝 놀란 오웬은, 다짜고짜 그의 눈앞으로 들이밀어지는 손바닥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포션 내놔!”
“엉?”
“용량 작은 귀속 포션들 있잖아? 팔지도 못하고, 먹기에는 용량도 작은 그 잡동사니들 말이야.”
“어어어……?”
“얼른! 빨리! 인벤토리에 있는 거 전부!”
그렇게 오웬의 인벤토리를 싹 털어온 성진은, 그때부터 테오신테 차와 포션을 이것저것 조합해 보기 시작했다.
‘HP 포션은… 일단 기각.’
저놈의 붉은색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테오신테 차와 합치면 아무리 봐도 혈뇨를 연상시키는 우중충한 액체 외에는 만들어지지 않아.
게다가 효과도 문제지. 신성력도 없이 실시간으로 상처를 회복시키는 꼴을 보였다가는, 그야말로 악마의 수작이라 매도당하고 이단재판에 회부되기 딱 좋다고.
‘MP 포션도 기각.’
파란색과 갈색이 만나니 형용할 수 없이 탁한 구정물 색이 되는군. 저런 걸 입에 넣으라니, 아무리 열심히 광고해도 무리잖아.
효과도 마찬가지야. 잘해 봐야 기껏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정도일까? 그건 그야말로 약차의 하위 호환이라고.
이제 남은 것은 노란 스태미나 포션이었다.
“…….”
흠, 이건 어쩐지 좋은 예감이 드는데? 저 찬란하게 빛나는 레몬 빛, 어쩐지 테오신테의 명도와 채도를 동시에 끌어올려 줄 것 같지 않아?
효과의 즉효성은 말할 것도 없다. 즉각적으로 기운이 차는 게 느껴질 테니까, 입소문 나기에는 이만한 물건도 없을 거야!
찰랑!
그렇게 해서 마침내, 찬란한 빛을 발하는 새로운 테오신테 차가 탄생한 것이다.
스태미나 포션의 맑은 노란색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밝은 금빛으로 빛나는 신선한 소변… 아니, 벌꿀 색의 음료가!
[결국은 소변이란 말이지…….]
그렇지 않아. 그만 닥쳐!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올리버는 성진이 만들어 낸 엄청난 결과물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걸 과연 ‘테오신테’ 차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응?”
“이게 테오신테를 재배해서, 지속적으로 만들 수 있는 물건입니까?”
생각과는 너무 다른 결과물이 나오니, 이제는 좋기보다 두려움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저는 이번 판매 성과를 가지고 제대로 된 사업을 차려야 합니다. 한데 테오신테 차가 이런 색도 아니고, 사실 아무런 효능도 없다는 것이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업은 그대로 끝장이라고요!”
“이봐. 시작하기도 전에 그런 걱정까지 할 필요 있어?”
성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괜찮아, 올리버. 다 잘될 거 같다는 예감이 든다니까?
“아니, 사업이 망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무려 황궁을 상대로 사기를 쳐서 투자를 받는 거잖아요? 이러다 정말 죽습니다! 죽는다고요!”
“…그것도 다 방법이 있으니까. 올리버, 나만 믿어.”
“저기, 잠깐만요? 방금 그 찰나의 망설임은 대체 뭡니까! 네?”
* * *
그렇게 해서 모든 준비를 마친 성진은, 자신의 계획을 오웬과 마사인 경에게 털어놓았다.
물론 약차의 진실과, 다키아누스의 비서 이야기를 싹 빼고 나니, 그저 기분 전환할 겸 장사나 해 보겠다는 말로 들렸겠지만.
“그러니까, 좌판을 펴고 직접 물건을 파신다고요? 저하께서요? 제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
“응 맞아.”
성진이 해맑게 대꾸하자, 마사인은 뒷목을 주무르며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대체 뭘 파실 겁니까?”
“응, 몸에 엄청 좋은 거!”
성진이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찰랑거리는 금빛 찻잔을 치겨들었다.
“이건 테오신테 차야! 마시기만 하면 기력이 막 샘솟고, 온갖 질병에 효과를 보는 기적의 만병통치약이지!”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마사인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졌다. 물론 그러면서도 두 손으로는 착실하게 성진이 넘기는 상품들을 받아 좌판에 착착 깔고 있었지만.
“…….”
마사인 경의 깊게 패인 눈썹 주름 사이로, 감정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 발생하는 치열한 내적 갈등이 느껴진다.
그런 그를 잠시 딱하게 바라보던 성진이 오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그리고 오웬. 넌 내 옆에서 대기하다가, 필요하면 박력 있는 차력 쇼를 펼쳐 줘. 약차의 효과로 강해졌다는 인상을 팍팍 풍기는 거야. 알겠지?”
“어엉? 왜?”
“다 판촉을 위한 거야. 그리고 너, 당분간 남들 앞에서 제국어 사용은 금지.”
“잠깐만, 뉴비야, 그건-”
뭔가 반박하려던 오웬은,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치떴다.
“엇, 또 긴급 퀘스트가 떴어?”
“그래? 이번엔 뭐라는데?”
“일행의 도움이 되라는데? 보상은 여전히 5캐시. 참 쪼잔하기도 하지.”
오웬은 만사 포기한 표정으로 봉두난발이 되어 가는 머리카락을 긁적거렸다.
“그나저나 요즘 상태창 씨, 퀘스트 내용도 그렇고 보상도 그렇고, 왜 이리 성의가 없지?”
뭐, 성진의 의사와 상당 부분 충돌할 수 있으니 나름 주의하는 거겠지만, 그걸 딱히 오웬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황당해하는 오웬을 뒤로하고, 성진은 미리 준비한 나무판자들을 마사인에게 내밀었다.
“마사인 경은 여기, 오웬 옆에서 판자 좀 들어주고.”
“아니 저하, 지금 이게…….”
이번에도 마사인 경은 말과는 달리 순순히 나무판자들을 받아 들었다. 물론 그의 표정은 형편없이 썩어 들어가긴 했지만.
그리하여 질색하는 여관 주인에게 금화 하나를 더 찔러준 후, 성진은 마왕과 함께 불 쇼를 벌이는 것으로 떠들썩한 판촉을 시작했던 것이다.
* * *
“오오, 정말로 기운이 솟는다!”
“이보쇼! 여기! 여기도 테오신테 하나 줘 보시오!”
“잠깐만, 순서를 지키라고! 내가 먼저야!”
그렇게 공들여 준비한 판촉 행사는 생각보다 호황이었다. 순식간에 동이 나는 테오신테를 바라보며 올리버가 대단히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거 참, 이상하네요. 이게 사기란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왜 저 분이 말씀하시면 다 그럴싸하게 들리는 걸까요? 어쩐지 약초들을 팔기가 아깝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어요.”
성진은 훗 하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때? 봤냐? 인류 최후의 헌터 이성진의 진정한 실력을?
[…이 사기꾼아. 장사가 대체 헌터랑은 무슨 상관인데?]
닥쳐! 넌 잔말 말고 마지막 불 쇼나 준비하라고.
드디어 좌판의 모든 물건이 동이 나고, 대망의 클라이막스가 펼쳐졌다.
‘마사인 경!’
성진이 작게 신호를 보내자-
휘리릭!
이제는 아예 정신을 놓은 듯 평온한 얼굴을 한 마사인 경이, 미리 준비해 둔 지푸라기들을 힘차게 허공에 흩뿌렸다.
‘마왕아!’
[알았어!]
화르르륵!
붉은 불길이 빠르게 번져 나간다.
온 사방에 흩날리는 가벼운 지푸라기들은, 마왕의 불꽃에 닿아 이내 붉고 화려한 꽃잎들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
난데없이 펼쳐진 불꽃놀이에 여관 앞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사람들은 그 압도적인 광경에 완전히 넋을 빼앗겼다. 각자의 손에 작은 테오신테 꾸러미를 움켜쥔 채.
어두운 하늘에서 밝게 타오르는 불똥들이 비처럼 쏟아진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 한가운데, 마치 신화에서 튀어나온 듯 고결한 모습을 한 소년이 선언했다.
“아쉬워하지 말고 기다려라! 테오신테 차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우와아아아아-!
사람들은 격렬하게 환호했다. 대체 자신들이 무슨 이유로, 무엇에 대해 열광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채.
그러는 사이 성진의 동공이 사이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두 눈에 한가득 붉은 불꽃들을 담고 있는 청중들과 일견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영안을 감쪽같이 위장한 후, 성진은 모여든 사람들의 면면을 부지런히 훑어 내렸다.
‘염상 결정, 염상 결정이 어디…….’
그러다가 문득, 그는 모여든 인파의 한가운데서 낯익은 얼굴들을 찾아냈다.
동그란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에디스. 입이 틀어 막힌 채 불안한 듯 눈을 굴리는 바르토자. 어딘가 얼이 빠진 듯 보이는 젊은 청년.
그리고-
‘…아버지?’
그는 온몸을 두꺼운 사제복으로 감싸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후드 탓에 얼굴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성진은, 그 의문의 신형이 보내오는 익숙한 시선을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지금 이곳에 있어!’
달칵!
순간 성진의 머릿속에, 어긋나며 돌아가던 두 세계가 정확하게 맞물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Chapter 144: Chapter 444
Chapter Text
444. 다키온 (1)
21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지금껏 성황의 자식들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크흑! 오웬이여어어어! 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는가아아아!”
속박에서 벗어난 바르토자는 눈물을 흩뿌리며 오웬 황자에게 달려들었다. 지금까지 속으로 삼키고 있던 두려움이 일시에 터져 나온 모양이다.
“매정하다! 이 바르토자를 버리려 했는가? 진정 그리 생각했단 말인가아아!”
“이, 이봐. 좀 진정하라고. 그나저나 레지나에 잘 있는 줄 알았는데, 자네가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지?”
“으흐흐흐흑!”
감히 황자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저 버릇 없는 바르샤인을, 놀랍게도 오웬 황자는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어디 그뿐인가. 딱하다는 듯 살살 달래 주기까지!
21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일개 야만인에게 너무 관대한 거 아닌가?’
아니, 애초에 황자 스스로가 바르샤 야만인 같은 꼴을 하고 있는 것도 어이가 없다.
게다가 아까는 뭐였지? 광대도 아니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 격파 시범까지 보이다니. 저 황자는 제국의 황족이라는 자각이 없는 건가?
더욱 놀라운 것은 모레스 황자였다. 21호가 알기로, 그는 성황가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고 권위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저하아아!”
“쉿! 에디스. 그렇게 부르지 마. 나는 지금 신분을 숨기고 있다고.”
“아! 네, 넷! 그런데 대체 지금 이게 무슨 꼴이세요? 어디 흙바닥에서 잔뜩 구르고 오신 건가요? 게다가 이 비렁뱅이 같은 옷은 또……!”
팡! 팡! 팡!
에디스가 불경스럽게도 황자의 등을 세차게 두드리며 먼지를 털어 냈지만, 그는 그저 눈썹을 설핏 찡그리며 만류했을 뿐이다.
“적당히 해, 에디스.”
“에휴! 적당히 끝낼 문제가 아니에요! 이제는 애도 아닌데, 부디 체통을 지키세요!”
마지막으로 마사인 경. 얼핏 보기에는 가장 침착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잘 보니 그도 정상은 아닌 듯했다.
현 성황만 아니었다면 가장 유력한 성황 후보였을 그가, 꼼꼼하게 주변을 정리하고 정성스럽게 좌판을 갈무리한다. 최근 모레스 황자의 보모가 되었다고 하더니만, 뒤치다꺼리 하나에는 도가 튼 모습.
“…….”
21호는 커다란 진리를 깨달았다.
성황가 사람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니구나!
“폐… 바트 사제님. 당신의 아이들은 뭐랄까, 참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성황의 호문클루스를 돌아본 21호는, 순간 완전히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하긴.’
저들이 다 누구의 자식들인가. 황자로 태어나 용병질을 하고 돌아다니질 않나, 보위에 오른 지금은 불편한 인형 안에 갇혀 쓸데없이 고생하고 있는 인간의 아이들이다.
그 불손한 눈초리에, 21호의 생각을 짐작한 성황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다, 엔리케.”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별말 안 했습니다만.”
“그러니까, 그런 것이 아니니라.”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바트 사제님.”
“…….”
그때, 바르토자를 겨우 떼어 놓은 오웬 황자가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바트 사제님!”
21호가 따로 성황의 신분을 둘러댈 필요도 없었다. 수년간 남부 전선에서 성황의 호문클루스와 마주했던 오웬은, 이제는 옷자락만 스쳐도 그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아니, 이것을 정말 알아봤다고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몸도 안 좋으신 분이, 수행 사제도 없이 이렇게 다니셔도 괜찮은 겁니까?”
“…….”
“아하! 남부 전선이 안정되니, 이제는 북부의 사람들을 도우러 오신 거군요! 델크로스를 넘어 대륙 전체의 안위까지 챙기시다니, 역시 바트 사제님은 대단하십니다!”
후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성황의 시선이, 어쩐지 슬쩍 허공을 향해 비껴 움직인 듯했다. 아마 1황자의 눈치 없음에 깊은 허탈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바트 사제님이십니까? 이렇게 뵙게 되어 참으로 반갑습니다.”
마사인 경 또한 모레스 황자와 함께 다가오며 인사를 건넨다. 면식 없는 일개 사제를 대하는 태도라기에는 묘하게 친근하다.
“남부 전선에서는 ‘살아 있는 성자’라고 불리신다지요? 또 오웬 황자님께 좋은 치료 약도 만들어 주셨다고요. 저하로부터 말씀 참 많이 들었습니다.”
오웬이 마사인에게 ‘궁극의 엘릭서’를 넘기면서, 그의 작품이라고 출처를 대충 둘러댔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21호가 알 리는 만무했지만.
한데 개중에 가장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모레스 황자 쪽이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아까부터 강한 시선으로 뚫어져라 성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21호는 소년의 눈동자에 실린 명확한 감정을 확인하곤 조금 당황했다. 안도감과… 반가움? 대체 어째서?
“바트… 사제님.”
어색하게 입을 뗀 모레스 황자는, 곧 그답지 않게 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간 21호는, 불꽃놀이를 할 때보다 오히려 주변이 더욱 환하게 밝아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렇게 만난 김에, 저희 일행과 함께하시겠습니까?”
공손한 태도로 갑자기 파격적인 제안을 꺼내 든 황자는, 이어서 어딘가 친근한 손짓으로 성황의 소맷자락을 슬쩍 잡아끌었다.
“마침 다행하게도, 제가 방을 좀 넉넉하게 잡아 놨거든요. 이게 다 사제님을 만나려고 그랬나 봅니다.”
* * *
일행은 풍성한 식탁 앞에 모여 앉았다.
“오늘은 제가 여러분의 식사를 책임지겠습니다! 뭐든 좋으니 원하는 대로 마음껏 드십쇼!”
잔뜩 흥분한 올리버가 연거푸 새 요리를 주문해 식탁에 올린다.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고가에 테오신테를 매진시킨 덕에, 지금 그의 주머니는 전에 없이 풍성해진 상태였다.
황궁 투자금을 따내는 것 또한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으니 인심도 너그러워질밖에.
일행은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격렬한 판촉 행위로 모두가 알게 모르게 진이 빠져 있던 참이었다. 하루 종일 걸으면서 육포만 씹었던 21호나 에디스도 이 식사가 기껍기는 마찬가지.
그렇게 모두가 눈앞의 음식에 집중하는 동안-
“…….”
오직 두 사람. 성황과 모레스 황자만이,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줄기차게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성황의 호문클루스야 본래 식사가 필요 없는 몸이다. 한데 어째서인지 모레스 황자 역시, 식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듯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집요하게 성황을 힐끔거리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따금 재미있다는 듯 그를 불러보기도 했다.
“바트 사제님?”
“…….”
“헤헤헤, 바트 사제님.”
차마 대답을 못 하는 성황은 퍽 난감한 눈치였다.
제국어에 서툰 오르토나인이라는 설정이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아마 제국어를 내뱉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황자들과 황궁 기사가 대번에 그의 정체를 알아채고 말리라.
‘잠깐. 하지만 에디스 씨와 바르샤 야만인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국어를 하셨었는데……?’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은 21호는 황급히 에디스를 돌아보았다.
“……?”
한데 이 이상한 상황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건지, 에디스는 입가에 소스를 잔뜩 묻힌 채 맹한 눈으로 21호를 마주볼 뿐이다.
‘참 대단할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이구나!’
21호는 내심 감탄했다. 대체 저 여자는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바트 사제님. 왜 아무것도 안 드십니까? 식사는 하셨는지요? 시장하시면 이것 좀 드셔 보세요.”
그러는 동안 모레스 황자는 자신의 식기를 내려놓고, 이제는 아예 성황의 앞으로 열심히 음식 그릇들을 밀어주고 있었다.
무려 신성제국의 황자가 일개 사제의 식사를 챙기는 모습. 과연 누가 누구를 수행하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이 고기 요리는 저도 점심으로 먹어 봤습니다. 이게 이 여관에서는 제일 먹을 만하다는 평이더라고요.”
“…….”
“아! 후드를 벗기가 곤란하신 거군요. 그래서 음식을 입에 대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러자 난처해진 성황을 대신해, 21호가 앞으로 나섰다.
“저하. 바트 사제님께서는 호흡기가 좋지 않으십니다. 바깥공기를 마시면 금방 몸이 나빠지시죠. 하여 함부로 후드를 내릴 수 없는 점, 저하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어.”
황자는 무심한 눈동자로 21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또다시 표정을 확 바꾸며 성황을 향해 상냥하게 제안했다.
“남들 보기가 불편하시면 주인장에게 일러 식사를 제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하겠습니다. 일단 방으로 가서 좀 쉬시는 게 어떨까요?”
눈치를 보아하니 지금 당장이라도 성황을 위층으로 끌고 사라질 기세다. 21호는 당황하며 재빨리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하. 아뢰옵기 외람되오나, 바트 사제님께서는 제국어에 많이 서투십니다. 그러니 제가 곁에서-”
“비록 말씀은 못 하셔도, 제국어를 ‘매우 잘’ 알아들으시지 않나?”
“네? 아, 네. 그건 그렇습니다만…….”
허를 찔린 21호가 주춤하는 동안, 벌써 모레스 황자는 성황의 소맷자락을 잡아끌고 있었다.
“그럼 더는 우리를 신경 쓰지 말지. 모두를 이곳으로 인도하느라 자네도 꽤 피곤해 보이는데, 에디스와 함께 남은 방에서 쉬도록 해. 마침 내가 방을 넉넉히 구해 뒀으니까.”
“……!”
21호는 급한 마음에 그들을 따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툭툭.
성황이 마치 달래기라도 하듯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엔리케. 괜찮으니 그만두거라.’
덕분에 21호는 엉거주춤한 일어난 상태로, 멍하니 그들이 움직이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그렇게 식당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모레스 황자는 오웬 황자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황당한 주문을 남겼다.
“오웬, 우리 먼저 올라간다. 식사가 끝나면 맛있는 것들 좀 챙겨서 방에 가져와.”
“으응? 또?”
“어. 어묵이랑, 버터 빵이랑, 아무튼 네가 구할 수 있는 맛있는 음식들은 전부 다.”
여관에 새로 주문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음식들을 구해오라니? 21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화였다.
한데 더욱 놀라운 건 오웬 황자의 반응이었다.
“그래, 알았어. 근데 뉴비야. 요리 상점의 특제 스튜 퀘스트까지 끝내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거야.”
“특제 스튜? 그거 맛있어?”
“아마 그럴걸? 적어도 내 앞의 누군가는 엄청 맛있게 먹더라고,”
“알았어. 그럼 그것도 챙겨 오든지.”
간단하게 대꾸한 모레스 황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을 벗어나려 했다.
“아, 근데 뉴비야. 바르토자는 어디서 묵으라고 하지? 나야 아까처럼 마사인 형님과 방을 쓰면 되는데…….”
바로 그때였다. 일행의 머리 위로 갑자기 서늘한 한기가 내려앉은 것은.
“오웬. 주제도 모르고 짐승처럼 날뛰는 놈에게 왜 사람이 쓰는 방이 필요해?”
차갑게 내뱉은 모레스 황자는, 매서운 시선으로 바르토자를 쏘아보았다. 성황을, 아니, 바트 사제를 대할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표정이었다.
“그놈은 어디 헛간에라도 넣어 두든지. 지푸라기를 덮고 자면 적어도 내일까지는 얼어 죽지는 않겠지.”
“…….”
“이봐, 주인장, 저놈에게 꿀꿀이죽이라도 한 그릇 내어 줘. 사람이 밉다고 굶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야.”
그러자 지금까지 눈치껏 음식에 손을 뻗던 바르토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손을 물렸다.
찌릿-!
다시 한번 그에게 강한 경고의 시선을 던진 모레스 황자는, 그길로 성황을 이끌고서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저하께서 바트 사제님을 정말 잘 따르시는군요.”
잠시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마사인 경이 입을 열었다.
“사람에게 저렇게나 살갑게 대하시는 건 폐하와 아멜리아 황녀님 이후 처음이신 듯합니다. 예전에 언젠가 두 분이 따로 만난 적이 있는 걸까요?”
그러자 오웬 황자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야, 바트 사제님이 아버님이랑 좀 많이 닮으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모레스도 나름 그분께 내척 친밀감을 느끼는 거겠죠.”
“네? 폐하를요?”
“……!”
21호와 마사인이 움찔 놀라며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웬은 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그릇들을 비워 나갔다. 조만간 일일 퀘스트를 돌려면 어서 서둘러야 했다.
“네, 처음 사제님을 뵐 때부터 아버님이 생각나더라고요. 연령대도 비슷하시고, 잘 보면 행동거지나 몸가짐도 아버님과 닮은 구석이 많으시거든요?”
“…….”
“거기다 신성력까지 강하시잖아요. 아버님을 떠올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습니까?”
21호는 오웬 황자를 향해 황당한 시선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게까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면서, 대체 왜 아직도 그의 정체를 모르고 있는 거야?
* * *
가볍다.
성황으로 거의 확실시되는 인물을 잡아끌면서, 성진은 이 세상의 물리 법칙과는 확연히 다른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다.
언젠가 그는 이와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인기 의상실 ‘살롱 드메르시’의 주인인 마담 쥬스티느로부터.
하지만 그 동일한 위화감을 통해 성진이 느끼는 감정은, 놀랍게도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마담 쥬스티느는 정말 끔찍한 기분이 들었지.’
당시 경험했던 비현실적인 가벼움은, 마담 쥬스티느를 잠시 닿는 것만으로도 혐오스럽고 불쾌한 무언가로 느끼게 만들었지.
하지만 지금은 이 가벼움이, 당장이라도 어딘가로 사라질 것만 같은 불안정함의 징표로 여겨진다. 그러니 성진은 그저 버럭 겁이 나서 한없이 조심하게 될 뿐인 것이다.
타악.
마침내 방문을 닫고 두 사람이 되자, 성진은 참았던 숨을 내쉬며 그를 불렀다.
“아버지.”
“…그래, 모레스.”
드디어 성황으로부터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온다.
“하하.”
어쩐지 조금 안도한 성진은, 방문에 몸을 기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설마 황도를 정말로 떠나신 건 아닐 테고, 그 이상한 몸은 샤론 경 대신입니까?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죠?”
그러자 잠시 물끄러미 성진에게 시선을 주던 성황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이미 다 듣지 않았더냐? 너의 그 시끄러운 ‘요정’이 아까부터 부산하게도 고자질을 하더구나.”
“아.”
역시나, 성황은 곁에서 모든 것을 듣고 있었다. 그가 등장하자마자 성진의 옆에서 쉴 새 없이 재잘거리던 마왕의 목소리를.
-이성진! 이성진! 여기 좀 봐!
-이상해! 저 바트라는 자의 몸에서 강한 규상 세계의 법칙이 느껴져!
-규상 세계의 영혼은 본래 정체를 알아보기 힘들지만, 저자의 영혼은 어딘가 보통의 영혼들과는 다른 거 같아! 희미하게 빛도 나는 것이, 뭔가 많이 이상하다고!
성진이 천천히 작은 램프를 들어 올리자-
[흡!]
졸지에 성황과 마주보게 된 마왕 놈이, 순식간에 합죽이가 되어 램프 구석으로 찌그러졌다.
Chapter 145: Chapter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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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 다키온 (2)
[이, 이성진… 히끅! 히끅!]
잔뜩 얼어붙은 마왕은 한동안 딸꾹질을 하며 꺼져 가는 불똥들을 뿜어냈다. 어지간히도 놀랐던 모양이지.
놈이 겨우 진정하는 기색을 보일 때쯤, 그들의 방에 푸짐한 저녁상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하하하!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슈!”
활짝 웃는 얼굴을 한 주인장이 직접 요리들을 방으로 날라 왔다.
왜 아니겠는가. 숙박료에 잔뜩 웃돈을 얹어준 데다, 식대를 포함해 엄청난 매출을 올려주고 있는 VIP의 주문이신데.
[…이거 맛있어.]
화르륵!
잘게 자른 고기 조각들을 열심히 살라 먹으며, 마왕은 조금씩 기운을 차려 갔다.
‘보면 은근히 먹는 것에 사족을 못 쓴단 말이지. 이런 단순한 녀석 같으니…….’
그렇게 음식들을 부지런히 램프 안으로 던져주면서, 성진은 식기를 움직이는 성황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는 성진의 권유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황궁에서 깨작거리기만 하던 걸 생각하면, 지금은 제법 편안하게 식사를 즐기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래. 이게 나무랄 데 없는 밥상머리 예절이지.
“……,”
그의 머리를 뒤덮고 있던 두꺼운 후드가 끌어내려지자, 평소와 달리 목덜미를 덮을 정도로 자라난 머리카락이 보였다. 머리카락이 본래 모습보다 조금 옅은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사소한 차이점을 제외하면, 지금의 성황은 거의 완벽하게 본래의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게 코른시임 일족이 만든 인공의 생명체, 호문클루스…라고?’
참 신기한 노릇이었다. 철저하게 규상세계의 법칙을 따라 만든 인공 신체인데, 어떻게 저렇게나 아버지의 모습과 똑같을 수 있는 거지?
한데 그런 머릿속의 생각을 어떻게 안 건지, 성황이 손을 멈추고는 성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코른시임이 만드는 호문클루스는 처음에는 모두 동일한 형태를 하고 있다. 제작에 용이하도록 표준 규격이 정해져 있지. 단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용자의 ‘바이온’과 제대로 동조될 수 있도록 정밀하게 설계되었느니라.”
“바이온…….”
성진이 머릿속에서 바이온의 대한 정보를 되살려내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아아, 그 영혼 3원설 말인가?’
그러니까, 황도에 가짜 성녀 서이서가 나타났을 때였을 거다. 그때 성진은 로건으로부터 영혼을 구성하는 요소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처음 성녀의 환생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것은 그라니우스라는 유명한 신학자였지.
당시 그라니우스는 영혼을 이루는 3요소가 있다고 주장했으니, 그것이 각각 [에이온]과 [바이온], 그리고 [다키온]이다.
그 중에서도 [바이온]은 영혼의 표면을 구성하는 요소로, 평소에도 육신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고 했지.
“그러니까, 그 호문클루스가 아버지의 영혼을 반영한다고요?”
“그래. 기특하다, 모레스. 영혼 3원설에 대해 잘 알고 있구나.”
성황은 가벼운 칭찬과 함께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서 영혼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호문클루스는 거의 완벽하게 사용자의 신체에 동조하게 되는 것이다.”
“아하! 그렇군요. 그래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성진이, 멈칫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근데 아버지, 제 생각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 딱히 사념을 보내거나 하지는 않았는데요?”
“…그거야, 지금 네가 궁금해할 만한 것이라면 빤하지 않더냐.”
“흐음…….”
성진은 그의 변명을 대충 넘어가주며, 호문클루스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에 착수했다.
눈에 강하게 정신을 집중하자, 동공이 붉게 점멸하며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정보들을 허공에 띄운다. 규상세계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여러 겹으로 희미하게 얽혀있는 텍스트 창들.
?호문클루스_prototype_agalus_079?
?생성자 정보 : 브두엘, 리브가, 이스가, 베스세바, 이들랍?
?Izmir calendar 4728 : 23 : 08 ?
?본 개체는 개발 단계의 시제품으로, 허가받지 않은 상업적 이용, 혹은 변형 등의 2차 저작물 제작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상업적 이용에 관해 본사에 문의를 원할 경우, 먼저 업체의 정보와 사용 법위, 목적, 기간, 제안 금액을 작성하여 담당자와 계약을 채결해 주십시오.?
?자세한 내역은……?
?블라블라……?
아무도 제대로 읽기를 바라지 않는 보험 약관처럼, 딱히 쓸모 있어 보이지는 않는 정보들의 나열이다.
그보다 성진의 영안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반짝!
바로 호문클루스의 두개골 정중앙에서 빛나고 있는 작은 구슬이었다.
“염상 결정이 있군요.”
“…….”
“그건 아버지의 염상 결정인가요? 아니면 본래 호문클루스란 모두가 염상 결정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그러자 성황이 음식물을 완전히 넘긴 다음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호문클루스 고유의 특성이다. 아니, 제대로 말하자면 모든 규상세계 생물의 특성이라고 해야겠구나.”
“모든 규상세계 생물이요?”
“그래. 규상세계 생물의 육체 어딘가에는, 이렇듯 영혼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작은 염상 결정이 항상 존재한단다.”
거기까지 설명한 성황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모레스, 지금의 너라면, 분명 영혼 본연의 모습을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네, 아버지.”
그랬다. 성진도 이제는 ‘영안’이라 불릴 만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단지 영적 정보가 시각 정보로 치환되는 불완전한 능력이긴 하지만 말이지.
“하면 어떻더냐? 지금 내 영혼의 모습에서, 너는 바이온의 형태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느냐?”
“…아뇨.”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호문클루스를 살펴봐도, 그곳에 임해 있는 성황의 영혼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염상 결정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하얀빛만이 감지될 뿐.
“그것은 지금의 내가 영혼을 염상 결정 안에 완전히 감추고 있기 때문이니라.”
“왜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규상세계의 법칙을 따르는 육체에 제대로 깃들기 위해서는, 영혼 또한 그 규격에 맞출 필요가 있으니까.”
“아하.”
“그래서 영혼이 깃든 염상 결정을, 규상세계에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영혼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단다.”
성진도 얼핏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언젠가 마왕이 그리 설명하지 않았던가. 규상세계의 영혼은 본상세계나 염상세계와 달리, 온전한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다고. 보통은 동그란 구체이거나 딱딱한 결정 모양이라고 했지.
예를 들면 서이서의 영혼이 그러했다. 그렇기에 마왕은 그 가짜 성녀를 보자마자 그녀가 규상세계에 속한 인간임을 알아챘던 것이다.
한데 그것이 실은, 염상 결정 속에 담긴 영혼이기에 그랬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 염상 결정은, 영혼을 지키는 절대적인 보호 장치로 기능하기도 한단다.”
그래서 서이서는 다른 이들과 달리, 카드모스의 신성에 노출되어도 지금껏 멀쩡한 것이다.
“하여 그 중요성을 깨달은 어느 마법사는, 그 염상 결정에 손수 ‘다키온’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느니라.”
“다키온…….”
영혼 3원설에 나오는 또 다른 구성 요소,
“하지만 아버지. 영혼 3원설을 제창한 그라니우스는 본상세계의 인간이 아닙니까? 한데 영안도 없었던 그가, 대체 어떻게 염상 결정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거죠?”
“…….”
“또 그가 왜 굳이 규상세계에서나 통용되는 ‘다키온’이란 개념을 영혼의 구성 요소로 꼽은 걸까요?”
성진이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비록 꿈결이었지만, 언젠가 귓가에서 속닥거리던 아이들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우리가 보기에, 영혼은 에이온과 바이온 2요소로 정의하는 쪽이 더 적절해.
-거기에 다키온을 끼워 넣은 건, 순전히 그라니우스의 정치적 사정 때문이었지.
‘에이온’은 영혼의 진정한 정수, 즉 영혼의 본질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에이온과 육신을 이어주며, 끊임없이 육신의 영향을 받는 것이 ‘바이온’. 즉, 우리가 생각하는 영혼의 모습이란, 실은 바이온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호작용 어디에도, 다키온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끼어들 만한 구석은 없었다.
“그라니우스가 성녀 그라지에의 환생을 설명하기 위해 ‘다키온’이라는 제3의 요소를 꺼내든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 그의 주장이 5대 성황의 치세에 정략적으로 이용된 것도 주지의 사실이고.”
“…….”
“하지만 아들아. 당시에도 ‘다키온’이라는 요소는 이 차원의 사람들에게 완전히 생소한 개념은 아니었단다.”
거기까지 말한 후, 성황은 잠시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모레스.”
“네?”
“네가 작금에 발생한 인식의 비틀림을 감수하고서라도, 끝끝내 그 책을 얻어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느니라.”
흠칫!
성황의 말에, 성진은 저도 모르게 품속에 갈무리하고 있던 낡은 책을 더듬었다.
“이… 다키아누스의 비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처음 그 책을 읽었을 때, 너는 저자에 대해 어떠한 느낌을 받았더냐?”
“저자에 대해서라니…….”
성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대충 훑어봤을 뿐이라 딱히 다키아누스에 대한 별다른 감상이랄 것은 없었다. 그저 참으로 장황하고 정성스럽게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싶었을 뿐.
하지만 그가 다시아노 후작가의 시조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 깨달은 사실이 있다. 바로 다키아누스는 자의식이 지나치게 팽대해지다 못해, 거대한 자기애를 가진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오르토나의 왕으로부터 고위 귀족의 작위를 하사받았지만, 자신과 가문을 대표하는 다른 이름을 가지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스스로를 온전히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이름뿐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여 그의 가문은 시조의 이름인 다시아노 후작가가 되었지. 가문에 영원히 자신의 이름을 박제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다키아누스는, 평생에 걸쳐 연구하고 갈구했던 것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름을 확고히 박아 넣고 싶어 했으리라.
“…다키온.”
성진은 품속의 책을 꺼내 들었다.
“아까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염상 결정에 다키온이라는 이름을 붙인 마법사가 바로 다키아누스였던 거군요.”
그가 비서를 통해 계속 강조했던 ‘영혼의 성벽’이란, 실은 염상 결정을 일컫는 말이었던 것이다.
“델크로스의 사람들은 그를 통해서 ‘다키온’이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었고요. 아마도 그라니우스는 그것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기존에 존재하는 단어를 좋을 대로 끌어다 쓴 것뿐이겠죠.”
성진의 짐작을 들은 성황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더니 식기를 가만히 내려놓고는 성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글쎄다, 모레스. 어쩌면 그라니우스의 영혼 3원설이 완전히 틀린 주장은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네?”
순간 성진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죠? 규상세계라면 또 모를까, 본상세계에서의 다키온은 영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요?”
물론 염상 결정이, 영혼이 자리 잡기에 좋은 환경임은 변하지 않겠지. 마왕도 그렇게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가.
하나 그런 영혼 친화적인 성질이, 염상 결정을 영혼의 구성 요소에 끼워 넣을 이유는 되지 못한다.
“아버지. 일단 다키온은 명백한 실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영혼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까?”
“그래. 뚜렷한 실체를 가지며, 동시에 영혼의 구성 요소가 되기도 한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궁금하겠지.”
“네. 그렇습니다.”
성진이 냉큼 대답하자, 성황이 입가에 잠시 잔잔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야 다키온은, 본상세계의 특징과 규상세계의 특징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본상세계의 영혼을 담고도, 그 영혼을 규상세계의 육체와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란다.”
마치 본상세계에, 영혼의 정수 에이온과 육체를 이어주는 바이온이 존재하는 것처럼.
“영체와 실체 사이를 연결해 주는 다리라는 점에서, 다키온 또한 바이온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지.”
한데 두 세계의 성질을 자유롭게 오가는 다키온은, 때로는 극단적으로 어느 한쪽으로 성질이 치우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때 규상세계의 법칙에 가까워질 경우, 다키온은 완전한 실체를 가지며 염상 결정으로서 세상에 존재한다.
“반면에 본상세계의 법칙으로 치우치게 되면, 다키온은 보통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완전한 영체의 성질을 가지게 되는 것이란다.”
거기까지 설명한 성황은, 조금 깊어진 눈으로 성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모레스. 아마도 너는 이 세계에서, 일반적인 영혼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영혼을 만난 적이 있을 테지.”
“……!”
성황이 무엇에 대해 말하는지를 깨달은 성진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설마… 영혼 단말?’
확실히 본상세계인 이 델크로스에도, 규상세계의 영혼처럼 동그란 구슬 모양을 지닌 영혼이 존재했다. 바로 아렌쟈의 영능력자들과, 특히나 쌍둥이들이 자주 보여 주는 영혼 단말들.
한데 그것이 실은 다키온과 영혼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거라고?
‘그럼 본상세계에서도, 사람에 따라서는 다키온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잖아?’
즉 그라니우스의 영혼 3원설도 완전히 틀린 주장이 아니라는 뜻이다.
‘영혼 단말이 염상 결정의 또 다른 형태였다니……!’
하지만 성황의 놀라운 설명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들아. 너는 다키온과 마찬가지로, 두 세계의 성질을 모두 가진 또 다른 물체를 이미 알고 있느니라.”
“……."
그랬다. 아닌 게 아니라, 아까부터 성진은 이 대화에서 강한 기시함을 느끼고 있었다.
두 세계의 물리법칙에 교묘하게 발을 걸치고 있는, 자신도 잘 아는 어느 물건.
-설마? 그게 여기에 있다고? 혹시 이거, 그겁니까? 오라클이 만든, 오라클의 정신을 반영한다는 그 [이정표]가 맞습니까?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성진에게 복잡한 핸디 스캐너의 파장을 보여주며, 흥분한 목소리로 설명하던 덱스터를.
-이게 무슨 의미인지 당신은 정말 모르겠습니까? 그러니까 오라클의 [이정표]는 본상세계의 물건이면서도, 부분적으로 규상세계의 물질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고도의 정신이 만들어 낸,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물질적 실체를 가지는 것.
“설마……!”
성진은 경악했다.
지금까지 얻은 일련의 정보들이, 성진으로 하여금 그리 달갑지 않은 추론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그래, 모레스. 오라클의 이정표는 치밀한 구성으로 직조된 일종의 다키온이라고도 볼 수 있다.”
“…….”
“그리고 오랜 시간 다키온을 연구했던 마법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성진은 착잡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다키아누스는 단순히 영혼을 보호하는 염상 결정을 넘어, 직접 오라클의 ‘이정표’를 만들어 내고 싶었다는 겁니까?”
Chapter 146: Chapter 446
Chapter Text
446. 다키온 (3)
멸망하기 전, 이오니아에는 다양한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인간족인 코른시임 일족을 비롯해, 라이칸스로프, 드라코니언, 거인족, 나무족에 이르기까지. 언뜻 보기에는 생물학적 유사성이 없어 보이는, 꽤나 다채로운 형태와 특징을 갖춘 종족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델크로스 차원의 생물과 구별되는 단 한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두개골 내에 자리하고 있는 염상 결정이었다.
결정의 위치나 구조는 종족에 따라 판이하게 달랐다. 그러나 아무리 조악한 염상 결정을 가진 종족이라 해도, 각각의 개채는 이 염상 결정을 통해 종족 [정수]와 연결, 집단 이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정수]는 종족의 모든 것이 되었다. 개체의 감정과 지식을 공유하는 단계를 넘어 문화와 사상을 보존?발전시키는 것은 물론, 그들 모두의 의식을 한층 고차원적인 정신세계로 이끌어 주는 소중한 유산이었으니까.
한데 종족들 중 유일하게, 일족에서 가장 뛰어난 개체에게 종족 정수의 역할을 맡기는 이들이 있었다.
오라클.
코른시임 일족의 살아 있는 종족 정수이자, 가장 고도로 발달한 염상 결정을 지닌 자.
‘완벽하다!’
어느 날, 우연히 한 오라클의 이정표를 접한 다키아누스는 영혼을 뒤흔드는 강한 충격에 빠져들었다.
‘살아 있는 종족 정수가 만들어 낸 [이정표]는 이리도 아름다운 것이구나. 그 속에 능히 우주를 품고 있음이다!’
코른시임 일족은 본래 다른 종족에 비해 영적 발달이 탁월한 자들이었다. 체외에 또 다른 성질의 염상 결정, 즉 영혼의 단말을 만드는 비술이 당시에도 이미 대중적으로 퍼져 있을 정도였으니까.
가장 어린 코른시임들마저 비술을 통해 손쉽게 영혼 단말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영혼 단말에 자신들의 의식을 싣고서, 공간의 제약을 넘어 자유자재로 돌아다니곤 했지.
만일 영안을 가진 누군가가 코른시임의 주거지를 바라본다면, 그는 아마도 하늘 위로 온갖 크기의 구슬들이 날아다니는 장관을 볼 수 있었으리라.
하나 그중에서도, 오라클이 만들어 낸 영혼의 단말은 특별했다.
이정표.
선천적으로 타고난 염상 결정과도 다르고, 비술을 통해 만들어진 영혼의 단말과도 다른, 본상세계의 법칙과 규상세계의 법칙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존재.
‘참으로 놀랍구나. 오롯이 정신 능력으로 창조한 것임에도, 이토록이나 뚜렷한 실체를 지닐 수 있다니!’
다키아누스는 오라클의 이정표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염상 결정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이정표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야말로 고도로 완성된 정신을 지닌 이의 증거라 여기게 되었지.
자기애가 지극히 강했던 그가 자신만의 이정표를 만들어 내는 일에 심취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그는 이정표를 포함한 염상 결정 전반에 ‘다키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곤, 이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염상 결정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표본이 필요하다. 더욱 다양한 종류의 염상 결정이 필요해. 아니, 아예 염상 결정이 생성되는 과정을 곁에서 직접 관찰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 다키아누스는 델크로스 차원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델크로스는 이오니아에 비해 미개한 데다, 염상 결정을 지닌 종족조차 없어 새로운 염상 결정의 탄생을 관찰하기에 적당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방랑 마법사 행세를 하며, 자신이 만든 탕약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다가 어느 샌가 자리를 잡아, 오르토나 한가운데에 자신의 가문을 남기기에 이른 것이다.
* * *
“다키아누스는 ‘영혼의 성벽’을 만들어 불로불사를 이룰 것이라 했습니다. 한데 그의 진정한 목적이 실은 불로불사 따위가 아니었다면…….”
성진의 말에 성황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본래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추정하는 것에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결과가 같다고요?”
화르륵!
어디선가 불어온 산들바람에 램프의 마왕이 흔들거린다. 성진은 조용히 눈치를 보는 마왕에게 작은 빵 조각을 던져 주며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결과적으로 그자는 같은 것을 만들었을 테니까.”
성진이 멀뚱히 눈을 깜박거리고 있으려니, 성황이 비식 입꼬리를 올리며 설명을 이었다.
“알고 있느냐, 모레스? 염상 결정을 가진 이가 사망에 이르면, 그의 결정 또한 빠르게 기능을 잃어 버린다는 사실을.”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 시절, 수없이 많은 마물들을 해치우며 직접 눈으로 보기도 했으니까.
군집 마물의 머릿속에서 발견되는 바로토시는, 외부에 노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간혹 고스란히 남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는데, 그때는 빠르게 빛을 잃어 단단한 뼛조각처럼 변해 버리곤 했지.
때문에 과학자들이 바르토시의 기능을 깨닫는 데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영혼을 잃은 염상 결정은 그저 작은 돌멩이 외엔 아무것도 아니니라. 하여 처음에는 염상 결정을 채취해 가며 연구하던 다키아누스도, 그 사실을 깨닫고는 급히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완성된 결정을 조사하기보다는, 만들어지는 과정에 더욱 집중하게 된 것이다.
“그건 다행이었군요.”
만일 사후에도 염상 결정이 고스란히 기능했다면, 연구에 심취한 다키아누스가 사람들의 머리를 마구 쪼개며 돌아다녔을지도 모르잖아? 하마터면 대륙에 희대의 잔혹 살인마가 탄생할 뻔했다.
“거기다 자칫 잘못하면 코른시임 일족 전체가 표적이 될 수도 있었고요.”
“…그렇구나.”
성황의 대꾸는 한 발짝 늦게 돌아왔다.
‘어어? 잠깐. 이 양반이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왜 저렇게 뭔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는 거지?’
순간 성진은 섬뜩한 가능성 하나를 떠올렸지만, 이내 머리에서 그 생각을 애써 떨쳐 버렸다.
“하지만 다키아누스는 이미 알고 있었느니라. 간혹 특수한 경우, 제작자의 사후에도 제대로 기능하는 염상 결정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휘이익-
또다시 바람 한 줄기가 성진의 볼을 스친다. 방문이 닫혀 있는데, 아까부터 자꾸 어디서 바람이 불어오는 거람?
“특수한 경우요?”
성황은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저 물끄러미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 묘한 시선 속에서, 성진은 이내 수수께끼의 답을 잡아낼 수 있었다.
“이정표군요.”
“…….”
“그래서 결과가 같다고 하신 거예요. 다키아누스가 만약 정말로 이정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사후에도 자신의 영혼을 지킬 수 있는 완벽한 ‘다키온’을 만든 셈이 되니까요.”
이정표를 만드는 데 성공한 시점에서, 이미 그의 불로불사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화르륵!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마왕을 바라보며, 성진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얻은 정보만으로도 추론할 거리는 많다.
육체가 죽고 영혼이 몸을 떠나는 시점에서 염상 결정은 서서히 기능을 잃게 된다. 염상 결정의 본질은 오직 영혼을 위해 존재하는, 영혼을 위한 기관이니까.
한데 어째서 오라클의 이정표만은 멀쩡하게 남아 있는 것일까? 이정표나 염상 결정이나 다키온이나, 본질적으로는 다 같은 것 아닌가?
‘설마, 이정표에 아직도 영혼 일부가 남아 있다거나……?’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성진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에이, 설마. 조모님이 남기신 이정표만 해도 벌써 몇 갠데. 사람의 영혼이 그렇게 여러 갈래로 조각나는 것도 아니고.
휘이이이-
“그런데 아버지.”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부터 자꾸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옵니다.”
아니, 이걸 정말로 바람이라 해야 할지.
[이, 이성진…….]
불안해하는 마왕을 램프째 끌어당기며, 성진은 겉보기에는 조용하기만 한 방 안을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이건…….’
분명 언젠가 경험했던 감각이다. 무언가가 세차게 끌려오는 느낌. 온 세계가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는 느낌.
바로 [인과]가 움직인 감각이었다.
“그래, 그럴 수밖에.”
공간이 잘게 진동하고, 시간 축이 조금씩 삐거덕거린다.
한데 상황이 점점 심상찮게 변해 가고 있음에도, 성황의 표정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아마도 내게 허용된 인과를 조금 초과하고 만 것 같구나. 일전에 종족 대표들로부터 빼앗아 온 터라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만,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네?”
“이제 세계는 서서히 기울다가 점점 빠른 속도로 비틀리겠지. 조만간 델크로스 차원은 이대로 종말을 맞을 게다.”
“네에에?”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아, 그 전에 세계의 틈을 비집고 [재앙]이 쏟아지는 것이 먼저일지도 모르겠다.”
“……?!”
사람이 하도 어이가 없으면 화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성진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 깨닫게 되었다. 이 양반의 말대로라면, 지금 정말로 큰일이 난 거 아닌가!
“이, 일단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합니다, 아버지!”
성진은 램프를 붙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 다급히 성황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모레스.”
“아래층으로 갑시다! 거기서 마사인 경과 멍청이를 데리고서 우선 이 마을을 빨리 벗어나야……!”
“모레스.”
멈칫.
지나치게 평온한 태도에, 성진은 천천히 성황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의 차분한 눈동자로부터 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은 목소리를 전해 들었다.
괜찮다.
소맷자락을 거머쥔 손에서 스르륵 힘이 풀렸다.
“어…….”
성진은 멍하니 성황을 바라보았다. 뭐지? 아버지가 왜 이러시는 걸까? 물론 나는 아버지를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그러다가 성진은, 아까부터 슬금슬금 숨어들어 와 이제는 머릿속에서 쟁쟁 울려 퍼지는 기묘한 목소리를 자각했다.
‘이 모든 것을 선택한 것이 대체 누구지?’
…혼란스러웠다.
“모레스.”
그때 성황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성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조금만 더 너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 게다. 하지만 네가 고심하다가 기껏 얻어낸 인과가 아니더냐? 그러니 다른 기회를 포기하더라도, 다키아누스에 대한 이야기만은 어떻게든 네게 전하고 싶었느니라.”
“다키아누스.”
그제야 이리저리 방황하던 성진의 눈동자가 초점을 되찾았다.
아아.
“지금 이 모든 일들이, 제가 다키아누스의 비서를 얻었기 때문에 벌어진 겁니까?”
“…….”
성황은 딱히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만은 잠자코 탁자에 놓인 책으로 가닿는다.
성진은 순간 그가 대답하지 않은 답을 완전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는 그 책을 얻음으로써…….”
성진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그리고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기에 합당한 인과를 쟁취한 거군요.”
어째서 성황이 여느 때와 달리 다키아누스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 줄 수 있었는가. 성진은 직감적으로 그 이유를 이해했다.
인과.
자신이 이 비서를 얻는 것은, 그 인과를 쌓기 위한 부정할 수 없는 필연이었던 것이다.
“그래, 아들아. 너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
“누군가의 욕망과 시기적인 우연이 복잡하게 얽혀 가는 틈바구니에서, 너는 이 세상에 제대로 간섭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손에 쥐었다.
드드드드드…….
조용한 방 안이 소리 없이 요동친다. 이 세상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격렬한 소요.
성진은 그 뒤틀림의 한가운데서, 망연한 얼굴로 성황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구나. 모든 게 내 선택이었어.’
‘베르트란 & 리’에 반하기 위해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베르세우스 다시아노를 공략하기 위해-
홀로 커다란 짐을 지고서 어딘가로 떠나야만 했던 루이제를 되찾기 위해-
그리고, 지그스문트령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는 음흉한 핸드릭 변경백을 단죄하기 위해.
하지만……!
“하지만 아버지.”
성황을 부르는 성진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젖어 들었다.
“그것을 위한 대가가 너무나 컸습니다.”
“모레스.”
“무엇보다도, 저 때문에 마사인 경이, 그의 영혼은 이제…….”
성진은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어제 마사인 경에게 일어난 일들은,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영구적인 손상이다. 그리고 그에게 일어난 모든 재난은, 바로 자신의 무의식적인 선택에 의해 발생한 일인 것이다.
‘모두 나 때문에-’
툭!
그때, 성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위로하듯 들려오는 담담한 목소리도.
“그리 자책하지 말거라, 아들아. 네 행동에는 언제나 적절한 대비책이 있었으니.”
“……!”
“그리고 나는 지금, 그런 너를 돕기 위해 이곳에 있느니라.”
기대하지 못한 그의 말에, 성진은 잠시 눈을 깜박였다.
…있어? 마사인 경을 고칠 방법이?
“대체 어떻게요? 아버지! 제가,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진은 저도 모르게 절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까지 계속 신경을 자극하던 불쾌함이 아버지를 마주하자 순식간에 해소된 이유.
그것은 그저, 단순한 안도감이 아니었던 건가?
“그리 조급해할 필요 없느니라.”
짧게 대답한 성황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언젠가 말하지 않았더냐, 모레스. 아직은 네가 그런 선택에 내몰릴 필요가 없다고.”
“아버지.”
“너는 아직 어리다. 그러니 가끔은 그 짐을 다른 이에게 맡겨도 괜찮지 않겠느냐.”
툭툭.
머리를 두드리는 일정한 손짓에, 속에서 격렬하게 들끓어 오르던 감정들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잠시 후, 마침내 성진이 완전한 안정을 되찾자, 성황은 천천히 팔을 내리며 미소 지었다. 급격하게 가라앉아 가는 세상을 등에 진 채, 성진을 향한 그의 눈이 밝은 은빛 안광을 뿜어낸다.
“하면 모레스. 다키아누스가 일평생을 바쳐 얻고자 했던 진정한 ‘다키온’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지금부터 네게 직접 보여주마.”
* * *
이제 모든 것은, 내가 무엇을 보고 싶으냐에 달렸느니라. 모레스.
Chapter 147: Chapter 447
Chapter Text
447. 다키온 (4)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똑 똑.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코를 찌르는 악취. 성진은 무심코 얼굴을 찡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앞의 풍경이 제법 낯이 익다. 오물과 이끼가 들러붙은 축축한 벽. 오러 유저의 안력으로도 내부가 잘 들여다보이지 않는 시커먼 터널.
‘어?’
뭐지? 방금 전까지 아버지와 여관방에 함께 있었는데? 다키아누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 인과가 넘치고 세상이 뒤흔들려서…….
“…전체에 건설된 하수도라면 분명 거미줄처럼 복잡할 겁니다.”
그때, 옆에서 성진이 잘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마사인 경이 심각한 표정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길을 안내할 자나, 적어도 내부 구조를 알 수 있는 지도라도 있어야…….”
마사인 경? 여기서 대체 뭐 하는 거지?
성진이 눈을 깜박이고 있는데, 상대편이 투덜거리며 마사인 경에게 대답한다.
“어이가 없구려. 폐허가 된 난민촌에서 지금 멀쩡한 지도를 찾는 거요?”
불만이 역력하게 묻어나는 안내인의 목소리. 그제야 성진은 지금의 상황을 얼마 전에도 겪은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 그래. 여기는 푸리아노구나. 저 작자는 자유 지하도의 안내인이었고, 우리들을 자코모 밀로가 숨어 있는 하수도로 안내했었지.
“그러면 하다못해 횃불이라도…….”
마사인 경의 항변에, 성진은 강한 기시감을 느끼며 끼어들었다.
“마사인 경.”
그러곤 예정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인형처럼, 그를 향해 작은 램프를 들어 보였다. 얼마 전 그랬던 것과 한 치도 다름이 없이.
“괜찮아. 우리에게는 이 녀석이 있으니까.”
맞아. 점점 기억이 난다.
당시 성진은 자코모 밀로를 곧장 찾을 수 있다는 강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지도고 횃불이고 찾을 것 없이, 무턱대고 하수도 안으로 들어가고 볼 작정이었지.
그리고 기억에 따르면, 그다음에는 마왕으로부터 이런 대답이 돌아왔었지.
-에헴! 이 위대한 마왕님께 맡기라고!
“……?”
하지만 어째서일까, 마왕에게서 아무런 사념도 들려오지 않는다.
램프를 올려다보니, 녀석은 어째서인지 잔뜩 주눅이 든 채 불꽃을 희미하게 움츠러뜨릴 뿐이었다.
이놈은 또 왜 이러는 거람?
“…자, 가자.”
성진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등 뒤에서 이전처럼 오웬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내인이나 지도 따위는 없어도 괜찮을 겁니다, 형님. 뉴… 모레스가 그래도 던전에서 길 하나는 정말…….”
마왕의 반응 외에는 모든 것이 기억대로였다.
대체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람?
* * *
저벅저벅.
커다랗게 울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성진은 천천히 기억 속의 광경을 되살렸다.
‘분명 저쯤에서 길이 갈라졌지.’
그러자 정말로 예상했던 지점에서 갈림길이 튀어나왔다.
‘조금만 더 가면 벽돌이 일렬로 쭉 빠진 채 방치된 곳이 있었고.’
잠시 후, 역시나 기억과 똑같이 망가진 벽이 나타난다.
“…….”
성진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이것들이 정말로 예전에 겪었던 기억들인지, 아니면 평소보다 강하게 느끼는 예감인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아니면, 드디어 내가 미쳐 버린 건가?’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성진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묘한 상황에 놓여 있긴 했지만, 그의 정신은 여느 때보다도 명확하고 차분하다. 마치 머릿속을 환하게 밝히는 등불이 하나 있어, 모호함이나 불신과 같은 짙은 안개들을 저 멀리 밀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뭐, 스스로를 미쳤다고 생각하면, 그게 정말로 정신병자겠어?’
졸졸졸.
오수가 흐르는 소리를 따라, 성진은 일행을 이끌고 하수도 깊숙이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즈음에 이르러, 성진은 전과 달라진 점을 또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이상하다? 이쯤에서 분명 석연찮은 느낌을 받았는데?’
그랬다. 일전에는 막힘없이 일행에게 길을 안내하면서도, 어딘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강한 예감에 사로잡혔었지.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별로 불안하지 않아.’
어쩐지 모두 잘될 것만 같다는 묘한 예감. 이런 기분이 드는 것도 제법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아마 이 근처에서…….’
성진은 램프를 위로 쓱 치켜들며 오수가 흐르는 수로를 살폈다. 아마 여기서 부패한 채 움직이는 시궁쥐를 보았더랬지.
그것을 처음 발견한 것은 마왕이었다.
-이성진, 저것 좀 봐! 저기 이상한 것이 있어!
그런데 어째서인지 마왕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는, 전과 달리 슬슬 성진의 눈치를 살필 뿐이다. 보다 못한 성진이 램프를 툭툭 치며 마왕을 불렀다.
“야, 야. 너 왜 그래?”
그러자 놈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으, 응…….]
“왜? 뭐가 불편해?”
[아, 아냐. 아무것도.]
대체 뭐가 문제지?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저하!”
갑자기 마사인 경이 사색이 되어 성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수로 가까이로 다가가지 마십시오! 저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응?”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꿈틀. 꿈틀.
역시나 그곳에 다 썩어 가는 쥐 한 마리가 징그럽게 경련하고 있었다.
“헉! 이게 뭐야? 죽었는데도 계속 움직이고 있네?”
무심결에 종종종 다가가는 오웬의 망토를 뒤로 잡아끌며, 마사인 경이 성호를 그렸다.
“아아, 주신이시여. 삿된 것들의 농간으로부터 부디 저하를 지켜 주옵소서!”
마사인 경의 어깨 너머로 목을 쭉 빼고 보니, 전과 같이 부서진 텍스트 창들이 떠오른다.
?TY□E_m_und□□d_no29□2□9?
?err! 적절한 오□젝트를 확□할 수 없습□다!?
?err! ge□아ㅋ!$2ㅗ서버를 확□할 수 없……?
이전과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스멀스멀 일어난다.
단단하게 빗장을 걸어 잠근 문으로부터 뭔가가 요동치며, 당장에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어서 빨리 저것을 눈앞에서 치워 버리지 않으면……!
“보기 싫으니까 태워 버리자.”
성진은 마왕의 램프를 흔들었다.
[…….]
한데 본래라면 신이 나서 불을 질렀어야 할 마왕 놈이, 이번에도 대답 없이 쪼그라든다. 이렇게 계속 작아지다가는 언젠가 불꽃이 아예 꺼져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될 지경.
“야-”
성진이 다시 한번 다급히 녀석을 채근하려 할 때였다.
[…네가 할 수 있을 게다.]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너무나도 익숙한 위치에서.
“어…….”
성진은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아니,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에는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 그리운 목소리는 분명 자신의 머릿속에서부터 들려왔으니까.
‘…아버지?’
성진의 물음에 답하듯, 뇌 내를 희미한 진동이 흔들고 지나간다.
그리고 목소리는 말했다.
[오러를 쓰렴.]
그 말에 이끌리듯-
화악!
성진의 의념이 손끝으로 향하며 검붉은 오러를 일으켰다. 세상의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는, 그가 아는 가장 강력한 불꽃을.
“저하?”
마사인이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본다. 성진에게 오러 연공을 직접 가르치긴 했지만, 아직은 외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놀랍구나. 저하께서 언제 이렇게 성장하셨지?’
그 경탄의 시선을 알아챈 성진이 뿌듯하게 웃었다.
일전에 하수도를 거하게 불태운 후로, 어째 오러 사용이 좀 더 능숙해졌다는 자각은 있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일렁거리는 불꽃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아까까지의 불쾌감도 눈 녹듯 자취를 감추는 것 같기도 하고.
아마도 옆에서 초를 치는 녀석이 없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흠, 그래도 아직은 멀었구나? 모레스. 너 소매에서 슬슬 연기가 나려고 하는데?”
“…시끄러워, 멍청아.”
성진은 인상을 쓰며 쥐의 사체에 불을 놓았다.
화르르륵!
손끝을 떠난 불꽃은 순식간에 고온으로 변하며 쥐를 먹어 치운다. 단백질이 타들어 가는 불쾌한 내음을 맡으며, 성진은 행여나 불꽃이 사라지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했다.
-시선이 이르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의 인식이 따르잖아?
-응.
-그러니 그곳에 자연히 의념이 일어나고, 덩달아 오러가 이끌려 흐르는 이치일 뿐이다.
언젠가 바서스트령에서 공룡을 잡았던 날, 로건을 졸라 배운 요령을 떠올리며.
-중요한 건 외기와의 일체감을 절대 놓지 않는 거야. 그리고 잠시라도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거지.
그렇게 하면 오러가 몸을 벗어나더라도, 벗어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었지. 하여간 로건 자식, 선문답 하나는 아버지와 완전 판박이라니까.
[잘하는구나.]
은근슬쩍 그를 흉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머릿속에서 또다시 담담한 칭찬이 들려왔다.
그러는 사이 사체는 거의 전소되어, 슬슬 불길이 잦아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래, 그러면 된다. 바이온을 강제로 묶어 둔 저주를 없애려면, 일단 그 저주의 중심이 되는 육신을 모두 불사르면 된단다.]
‘하지만 아버지. 정말 그걸로 충분할까요?’
성진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육신을 불살라 영혼을 떼어 냈다고는 하지만, 그 손상된 영혼까지 말끔하게 불태우는 일은 아마 지금의 능력으로는 쉽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이 하수도에는 저런 죽지 못한 괴물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그것들을 하나라도 놓치는 날에는, 여기 푸리아노 난민촌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대륙 전체에 어떤 파멸적인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일전에는, 본래라면 절대 넘지 않았을 선을 넘어가며 이 하수도를 빠르게 불태우지 않았던가.
[천천히.]
성진의 조급한 마음을 깨달은 듯, 침착한 목소리가 그를 달랬다.
[어차피 시간을 다투는 일이 아니다. 너는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저들 모두의 영혼을 도울 수 있단다.]
‘…….’
[대륙이 위험에 빠지지도 않는다. 내가 지켜보고 있으마.]
‘아버지…….’
더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성진은 자신의 머릿속에 빛나고 있는 작은 등불의 존재를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자, 서두르자.”
쥐를 모두 불태운 성진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무사히 자신과 시선을 맞추는 충직한 기사와, 말만 하면 언제까지고 따라올 것 같은 멍청이를.
“어서 자코모 밀로를 잡아야지.”
* * *
“저하, 기척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마사인의 보고에, 성진은 힐끔 오웬을 돌아보았다. 본래라면 이때쯤 슬슬 퀘스트가 나타났을 터다. 그래서 성진은 일행과 떨어져 행동하기로 결심하지 않았던가.
“……?”
하지만 오웬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멀뚱히 성진을 마주 보았다.
“왜?”
“…아직 소식이 없어?”
“응? 뭐가?”
“상태창 말이야. 분명 뭔가를 찾으라는 퀘스트를 줄 때가 되었는데?”
“뭐? 뭐어어?”
경악하는 오웬을 바라보며 성진이 미간을 슬쩍 구겼다.
아직 퀘스트가 없다고? 어째서지? 설마 내가 이번에는 일행을 나누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미 한번 다키아누스의 비서를 손에 넣은 적이 있으니까?’
그때 오웬이 다급하게 성진에게 다가왔다.
“잠깐, 모레스. 네가 대체 퀘스트를 어떻-!”
말하는 도중 뭔가를 깨달은 듯, 그의 눈이 둥그레진다. 그러곤 이내 환하다 못해 얼빠진 미소를 짓는 게 아닌가!
“하하하!”
“음?”
“으하하하!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대체 뭐가?”
그러자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던 오웬이, 냉큼 성진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소리쳤다.
“그래! 네가 그 뉴비일 줄 알았어! 나는 벌써 진작에 다 알고 있었다고!”
“…….”
“하하하하하하!”
마사인이 어리둥절하며 쳐다봤지만, 오웬은 이미 잔뜩 들뜬 나머지 그의 미심쩍은 시선을 조금도 알아채지 못했다. 녀석은 툭툭 성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인마! 대체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거야? 널 찾느라고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이 자식, 너무 시끄러운데?
자연히 손이 올라가며, 경쾌한 타격음이 울렸다.
따악!
“으악!”
오웬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기대를 배신당한 것이 못내 서러운 얼굴이었다.
“아니! 갑자기 왜 때려? 아프잖아!”
“시끄러워, 멍청아. 너 지금 자코모 밀로에게 우리의 위치를 대놓고 알려줄 셈이야?”
“…흡!”
황급히 입을 다무는 녀석을 힘껏 노려봐 준 후, 성진은 몸을 돌려 길을 재촉했다.
“어서 가자. 자코모 밀로가 코앞에 있어.”
“하오나 저하, 다른 한 사람은 어찌합니까? 한쪽이 정말 자코모 밀로의 기척이라면, 남은 하나는 그의 동료일지도 모릅니다.”
마사인의 초조한 물음에, 성진은 문득 머릿속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어차피 시간을 다투는 일이 아니다. 너는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저들 모두의 영혼을 도울 수 있단다.
그래. 딱히 신경 쓸 거 있나? 어차피 이전에도 한 번 놓쳤으니까. 게다가 저쪽은 어째 다음에 또 만날 것 같단 말이지.
성진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곤 마사인에게 지시했다.
“괜찮아, 마사인 경. 우리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자코모 밀로니까. 하수도에 사는 쥐새끼 하나둘쯤이야 신경 쓸 것 없다.”
그러자 마사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곧 언제나처럼 단단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저하.”
그래. 이게 내가 아는 마사인 경이지. 성진은 조금 안심하곤 그와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뒤를,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오웬이 뒤쫓아 온다. 아까부터 들뜬 기분을 좀처럼 숨기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하핫! 하하하하!”
어, 저 얼빠진 녀석. 은근히 사람 신경 쓰이게 만드네.
Chapter 148: Chapter 448
Chapter Text
448. 다키온 (5)
거의 모든 일들이 기억대로 흘러갔다. 성진은 이전과 같은 장소에서, 허둥지둥 하수도를 빠져나가는 자코모 밀로를 만날 수 있었다.
“다, 당신은?!”
갑작스레 성진 일행과 마주친 자코모는, 크게 당황하며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들려 했다.
물론 그와 동시에-
휘익- 푹!
쏜살같이 날아간 비수가, 자코모 밀로의 손등에 사정없이 틀어박혔지만.
“헛?”
통증은 뒤늦게 덮쳐 왔다.
“크아아아악!”
자코모 밀로가 바닥을 뒹굴며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성진은 저벅저벅 그의 옆으로 다가가 떨어진 비약을 회수했다.
그가 다키아누스의 비서를 주고 거래했다는, 대륙에 끔찍한 재난을 가져올 뻔한 검은 비약이었다.
“끄으으… 새, 샐로스여!”
자코모 밀로는 이를 악물고 자신과 계약한 악마를 불렀다.
지금껏 세상을 향한 복수를 위해 버텨 왔으나, 회심의 비약이 적의 손에 넘어간 이상 이제는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부디 이곳으로 강림하여 나를 지켜 주십시오! 나의 적들을 물리쳐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에게 내 육신을 내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의 악마로부터 전혀 응답이 없었다. 마치 뭔가를 크게 두려워하는 듯, 아예 계약자와 연결된 채널마저 굳건히 닫아 버린 상태,
“…샐로스?”
자코모가 허탈하게 중얼거리자, 비약을 이리저리 살피던 소년이 그를 오만하게 내려다본다.
“이번에는 당장 침식을 일으킬 것 같지는 않군. 전에도 생각했지만, 너와 계약한 악마는 제법 약삭빠른 구석이 있단 말이지.”
“……?”
“뭐, 전에 약속한 게 있으니 네 영혼만은 어떻게든 도와주겠다. 하지만 대륙에 큰 해악을 끼칠 뻔한 대가는 치러야겠지.”
소년의 동공에서 일순 붉은 안광이 번쩍였다.
“그러니 일단은 좀 맞고 시작할까?”
끄아아아아!
이내 하수도의 축축한 공기를 가르며, 자코모의 처절한 비명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 *
자코모 밀로를 무사히 사로잡은 후, 성진 일행은 희미하게 느껴지는 또 하나의 기척을 쫓아 하수도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도중에 동물의 사체가 눈에 띄기라도 하면, 하나도 남김없이 불태우며 가야 했기 때문이다.
“저하. 기척이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일단 저자를 잡은 후 나중에 사제들을 불러 정화하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마사인이 초조한 듯 물어왔다.
“아냐, 마사인 경.”
이미 그보다 한발 먼저 기척이 사라지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지만, 성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성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차피 그들이 이 일을 벌인 마법사를 찾아낸다 해도, 움직이는 시체들에 가로막혀 결국은 놓치고 말리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굳이 놈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이것들은 보기보다 위험해, 마사인 경. 사체 한 조각도 남겨 둬선 안 된다고.”
“네. 그런 것 같기는 합니다만…….”
딱 봐도 사악한 악마의 수작질이긴 했다. 마사인은 불꽃에 휩싸여 꿈틀거리는 길고양이를 향해 침통하게 성호를 그었다.
그리하여 일행이 마침내 마법사의 연구실에 도착했을 때, 사악한 마법사는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였다.
벽의 곳곳에 거칠게 훼손된 마법진들이 보인다. 다키아누스의 비서를 포함한 각종 연구 자료들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찌직! 찍!
컹컹! 크르릉!
크와아아아아…….
우리에서 풀려난 각양각색의 시체들이 연구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주신이시여, 맙소사!”
마사인이 침음을 흘렸다.
“동물에만 손을 댄 것이 아니군요. 심지어는 사람에게도 저런 짓을 벌이다니… 대체 누구일까요? 어찌 이리도 끔찍한 짓을……!”
“흠.”
하지만 마사인은 알지 못했다. 지금 성진이 보고 있는 광경은, 그의 눈에 보이는 것보다 한층 더 참담한 광경이라는 것을.
[…내… 몸이… 왜… 끄어어어…….]
[…살려… 누군가… 제발… 살…….]
영혼들이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있다. 썩어 가는 육체에 바이온이 묶인 채, 영혼의 정수마저 부패에 잠식되어 가면서.
울컥!
성진은 속에서 솟구치는 강렬한 불쾌감을 억누르려 애를 썼다. 이미 한번 겪은 일이었지만, 이처럼 죽음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광경 앞에서는 좀처럼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머릿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들아.]
네, 알아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결과를 버젓이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아요.
“후우…….”
나직하게 숨을 내뱉은 후, 성진은 조그마한 램프를 바닥에 놓으며 마왕을 불렀다.
끊임없이 내면의 본질을 자극하는 광경 앞에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이 쥐똥만 한 녀석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야, 마왕아.”
[…응.]
움츠러들다 못해 이대로 꺼져 버리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으나, 다행히도 마왕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나마 대답을 돌려주었다.
“지금부터 네가 날 좀 도와줘야겠어.”
[…….]
“이제부터 저것들을 모조리 태워 버릴 거야. 나랑 함께 이곳을 화끈하게 불살라 보자고.”
순간 오웬의 못마땅한 시선이 뒤통수에 닿아 왔지만, 성진은 가볍게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너도 그동안 램프 속에만 있느라 계속 갑갑했잖아? 이왕 기회가 왔을 때 힘을 마음껏 발휘해 봐야지.”
[…….]
“지금이야말로 네 힘이 필요해.”
마왕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놈의 마음속 동요를 반영하듯 불꽃이 파르르 떨려 온다.
거기서 일말의 가능성을 발견한 성진은, 놈을 좀 더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괜찮아, 마왕아. 네가 뭘 걱정하는지 다 알아.”
그래. 녀석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녀석의 램프를 내려다볼 때마다, 머릿속에서 빛나는 등불 역시 같은 방향을 향해 시선을 주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분명 아버지의 존재감을 강하게 느끼는 거겠지.’
자코모 밀로와 계약한 악마가, 이전과 달리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터. 아버지의 존재란 악마들에게 있어 그 자체로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거다.
“하지만 우리는 괜찮아. 너도 알고 있잖아? 아버지는 늘 우리 편이라고.”
[…….]
“너는 내 권속이고, 네 힘은 내 힘이지. 너를 공격하는 것은 곧 나를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근데 마왕아, 너는 아버지가 내게 해를 끼치는 광경이 감히 상상이 되냐?”
그 물음에 마왕의 불꽃이 움찔 몸을 떨었다.
[…아니.]
마왕의 불꽃이 눈에 띄게 화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마치 놈의 내면에서 급격한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는 듯 보였다.
[아니야, 이성진.]
“그래, 바로 그거야. 그러니까 이리 나와 봐.”
[…응!]
퐁!
마왕은 겨우 용기가 생긴 듯, 램프로부터 가볍게 튀어나왔다. 그러곤 슬금슬금 성진의 주위를 맴돌며 눈치를 본다. 정확히는 성진이 아닌, 그의 머릿속 존재를 살피는 거겠지만.
그렇게 두어 바퀴를 맴돈 마왕은-
[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제야 안심을 했는지 화르륵 불똥을 튀겼다.
[헤헤헷!]
[…….]
순간 머릿속 염상 결정에서 조금 언짢은 감정이 여과 없이 전해져 왔지만, 성진은 모두를 위해 이를 모른 척했다.
“자, 그럼 가 볼까?”
스릉!
성진은 천천히 호두까기를 뽑아 들었다. 익숙하게 감겨 오는 힐트의 감촉에, 현재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한번 뚜렷하게 실감하면서.
화르르륵!
의념이 일자, 검붉은 오러가 빠르게 검신을 덮어 간다.
“오웬. 마사인 경.”
진작에 무기를 꺼내 들고 있던 두 사람이, 성진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 느껴진다.
“일단 저것들부터 깔끔하게 정리해 보자고.”
* * *
세 명의 강한 오러 유저가 공세를 벌이자, 마법사의 연구실은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그 처참한 잔해 위를, 마왕의 붉은 화염이 뒤덮으며 거세게 불타올랐다.
[훗! 후훗! 이 정도는 거뜬하지!]
평소에 비해 비교적 얌전하게 잘난 척을 한 녀석은, 시체의 살점은 물론 마법진의 흔적들까지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그래, 모든 것이 제대로 흘러가는 중이야.’
호두까기를 세차게 털어 피와 살점을 흩뿌린 성진은, 검을 갈무리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뉴비야. 아직 오러 조절이 힘들면 뒤에 물러나 있어, 너 지금 망토 끝에 불이 붙었다고.”
오웬이 가볍게 성진을 뒤로 끌어당긴다. 일전에는 시체들을 상대하는 동시에 퀘스트를 수행하느라 엉망진창으로 굴렀었지. 그에 비하면 지금은 한층 여유 있고 깔끔한 모습이다.
“저하. 이것으로 하수도 내의 괴물들은 모두 처치한 것 같습니다. 서두르면 도망친 마법사를 쫓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만.”
정신 상태가 멀쩡해 보이는 마사인 경은 물론 말할 것도 없다. 몇 차례 거하게 오러 폭사를 날리긴 했지만, 그는 조금도 지친 기색 없이 성진을 마주 보았다. 그의 눈동자에서는 이제 더 이상 영혼을 잠식하는 뿌리 깊은 죄책감을 찾아볼 수 없다.
성진은 크게 안도하며 중얼거렸다.
“모두 잘 되어 가고 있어.”
[응? 뭐가?]
모처럼 공포심으로부터 벗어나 신나게 불을 지르고 온 마왕이 포로로 램프에 내려앉으며 묻는다.
그래, 이 녀석도 빼놓을 수 없지. 말할 것도 없이 전보다 상태가 좋아졌잖아?
내가 혼자 불을 지르고 돌아다녔을 때는, 혼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내 이름을 부르기에 바빴는데.
“네가 바보같이 울기만 하던 걸 생각하면,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이쪽이 옳은 길이지.”
그러자 마왕이 의아한 듯 재차 물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성진. 누가 울었다는 건데?]
아.
순간 성진은 깨달았다. 마왕도 역시 지난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그러자 새삼스러운 의문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정말로 시간을 거슬러온 걸까? 만일 그게 아니라면 나는 지금…….’
그때, 그의 생각이 쓸데없이 깊어지는 것을 방해하듯, 머릿속에서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아. 지금 그것이 그리 중요한 일이더냐?]
성진은 재빨리 의문을 지워 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버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어찌합니까, 저하. 지금이라도 마법사의 뒤를 쫓습니까?”
때마침 들려온 마사인의 질문에, 성진은 그를 돌아보며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응? 아냐. 마사인 경. 이대로도 좋네.”
“…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하는 그를 향해, 성진이 재차 힘주어 말했다.
“내버려두지, 마사인 경. 그냥 이대로가 좋을 거 같아.”
그렇게 해서 그들은 푸리아노의 하수도를 샅샅이 정화한 후, 늦은 밤이 되어서야 마을 입구로 되돌아왔다.
또다시 ‘특송’ 마차에 올라탄 일행은, 전보다 훨씬 늦은 시각에야 푸리아노를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성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다음 목적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으니, 이번에는 마부에게 곧바로 테레로 향해 달라고 요구하면 될 일이다.
“오웬.”
“응?”
“배고파. 어서 가서 맛있는 것 좀 가져와.”
“그래, 알았어.”
그에 무심코 이정표를 손에 쥐던 오웬이, 돌연 엥? 하는 표정으로 성진을 돌아보았다.
“…근데 뉴비야?”
“어.”
“너 말이야. 어째 너무 자연스럽게 나한테서 먹을 걸 찾는 거 아니냐?”
“그야 네가 먹을 걸 가져올 수 있으니까 그렇지. 그게 왜?”
성진의 당당한 대답에, 오웬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건 그렇지.”
“그래.”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다, 갑자기 뭔가를 떠올리곤 아! 하고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말이야, 너 아마 나한테 한정판 안대를 줘야 할 거야.”
“안대?”
“응, 그걸 나한테 넘겨주면, 아마 상태창이 세일 창을 열어 줄걸?”
“…헉?”
순간 오웬이 허공을 바라보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네? 한정판 안대가 떠 있는 데다, 거의 무료나 다름없어! 뉴비야, 너 대체 어떻게 알았어?”
“잔말 말고 그 안대부터 사. 아, 그리고 이왕 내친김에 안 쓰는 스테미너 포션들도 좀 미리미리 꺼내 주고.”
“스테미너 포션? 그건 또 왜?”
“나중에 차 만들어야 하거든.”
“차?”
오웬의 표정이 점점 아리송해졌지만, 성진은 그의 의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하게 마차에 등을 기댔다.
뭐 어떤가. 모든 것이 이전과 달라졌다. 모든 것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오랜만에 마음을 푹 놓은 성진은, 마왕의 램프를 옆에 내려놓고는 쭈욱 기지개를 켰다.
“벧엘라…….”
물론 전과 크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아아, 예비된 자여!”
밧줄에 칭칭 감긴 자코모 밀로가, 연신 성호를 외며 성진을 열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그가 제대로 눈을 달고 있다면, 강력한 요정을 부려 마법사의 연구실을 정화한 자가 누구인지 진즉 알아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자코모의 눈동자에 가득 들어차 있던 독기와 원망은 어느새 경탄과 환희로 뒤바뀌어 있었다.
“강력한 군주들의 대리자시여! 부디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계획에 쓰이도록 하소서…….”
“…….”
성진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 저 친구가 살짝 맛이 가게 되는 결과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군. 다행히 전처럼 완전히 정신이 돌아 버린 건 아닌 듯하지만.
Chapter 149: Chapter 449
Chapter Text
449. 다키온 (6)
테레 마을에 도착한 이후에도 상황은 한결 수월하게 흘러갔다.
일단 성진은 여관 앞에서 서성거리는 올리버를 찾아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이봐, 자네. 혹시 황궁에서 지급한 ‘준 상단 사업자증’을 가지고 있어?”
그러자 올리버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돌아보았다.
“네? 아, 네. 그렇습니다만, 당신은 누구시죠?”
“시골에서 채집한 약초들을 팔고 싶은 거지? 아마 북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테오신테 종자도 취급할 거고.”
“어엇? 네, 맞습니다! 한데 대체 그걸 어떻게……?”
“하지만 지금까지는 영 벌이가 시원찮았겠지? 그래서 자네는 지금, 여관 앞에 좌판이라도 깔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던 거고.”
“헉?!”
올리버가 경악하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저 척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을 들여다본 듯 자신의 사정을 줄줄 읊어 대니 그저 놀라울밖에.
성진은 청년의 머리가 이성적으로 돌아가기 전에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 참고로 미리 말해 두지만, 아쉽게도 그 계획은 실패할 거야. 주인장은 어지간한 자릿세로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걸? 그 사람도 여간내기가 아니라 말이지.”
“네에? 아니, 그러면 저는 이제 어찌해야……!”
“어떻게 하긴? 이대로 황궁 투자금은 완전히 물 건너가는 거지. 자네는 그냥 시골로 돌아가, 다시 열심히 농사나 지으면 되는 거야.”
그러자 순박한 시골 청년이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절규했다.
“아, 아, 안됩니다! 리리안에게 꼭 대상인이 되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어요! 더는 고향에서 농사도 못 짓습니다! 이번 상행을 위해 제가 가진 전 재산을 털었단 말이에요!”
성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친구 좀 보게. 기약 없는 상행에 뭘 믿고서 전 재산을 때려 넣었다는 거지? 이거 정말 큰일 날 놈 아냐?
‘그 ’리리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대책 없이 재산 정리하는 꼴을 본 시점에서 이미 널 향한 마음을 거의 접지 않았을까?’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약차의 확산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이 덜떨어진 친구를 두드려 제대로 된 상인으로 만드는 수밖에.
크흑! 흐흑!
절망에 휩싸여 눈물을 흘리는 청년을 딱하게 바라보던 성진은, 그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려 부드럽게 어깨를 짚었다.
“하지만 걱정 말도록. 천만다행으로 이곳에서 나를 만났으니까. 자네는 참 운이 좋았어.”
“흑흑!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묻는 거지만, 대체 누구세요?”
“그건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야. 내가 이래 봬도 사업에는 제법 일가견이 있는 데다, ‘베르트란 & 리’ 같은 훌륭한 상단에도 연줄이 있다는 점이 중요하지.”
“그, 그게 정말입니까? 훌쩍!”
“그럼. 어디 그것뿐이야? 나는 자네의 테오신테를 대륙에서 가장 유행하는 차로 만들어 줄 수단도 있어.”
짤랑.
성진은 주머니에서 빛나는 금화 하나를 꺼내,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청년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말은 이쯤하고, 일단 증명부터 해 주지. 자네의 물건들을 전부 넘기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보겠어? 내 장담하건대, 오늘 내로 자네의 약초들은 모조리 동이 날 거야.”
“……!”
“이건 자네에게 하나도 나쁠 것이 없는 제안이야. 만일 완판에 실패하더라도, 남은 약초들은 내가 책임지고 고가에 매입해 줄 테니까.”
홀린 듯 금화를 바라보던 청년의 눈동자에 이내 희망의 빛이 가득 들어찬다.
그는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성진을 응시하더니, 이내 바닥에 바짝 몸을 엎드리며 외쳤다.
“이럴 수가! 당신은 정말로 누구시죠? 설마 벤소 후작령에서 이름을 떨친다는 그 위대한 현자님이신가요? 아니면 불쌍한 저를 구원하기 위해 주신께서 내려 주신 천사님이라도 되는 겁니까?”
흠? 아니, 아무리 그래도 천사는 좀…….
성진이 그의 열렬한 시선을 멋쩍게 피하자, 마왕이 못마땅한 듯 램프 갓 위로 불똥을 튀겨 올렸다.
[와… 이성진, 이 양심도 없는 사기꾼아…….]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성진의 착각일 터였다.
아무렴.
* * *
기적의 테오신테 MK2를 만드는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약재를 배합하거나 비율을 조정하는 등의 실험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이미 대부분의 결과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성진의 고민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다.
“전에는 일단 팔고 보자는 생각이었지만…….”
역시 대대적으로 테오신테를 유통하려면, 차에 포션을 섞는 일차원적 눈속임보다는 조금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혹시 극소량의 스테미너 포션만으로, 테오신테의 약효를 유지할 수는 없을까?
‘아냐. 아예 취급하는 종자 자체를 변화시킬 수 없다면, 장기적인 판매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쪽이 옳아.’
물론 종자 개량 따위를 할 여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성진은, 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아버지. 저 좀 도와주세요.”
[…….]
“아니, 아니요. 이건 대륙을 위해서도 정말 정말 중요한 일이란 말입니다. 막 그렇게 한숨만 쉬지 마시고요. 네?”
왜 아니겠는가.
성황이 다키아누스에 관해 설명해 줬을 때부터, 그리고 무슨 수를 썼는지 성진을 다시금 과거로 되돌렸을 때부터. 성진은 평소 인과를 위해 억누르고 있던 그의 권능이 해방되어, 거칠 것 없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느낌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성황에게는 더 이상 불가능이란 없다.
‘전 믿고 있습니다! 다 방법이 있으시잖아요?’
그런 막연한 기대를 가진 채 귀를 쫑긋 기울였더니, 잠시 후 머릿속에서 조금 떨떠름한 대답이 돌아왔다.
[…일단 테오신테 종자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 보려무나.]
“네, 아버지!”
[그리고 가지고 있는 물약들을 그 위에 골고루 흩뿌린 다음, 잘 마르도록 볕이 드는 곳에 펼치고, 양손을…….]
“네엡!”
[…웃지 말고 집중하거라, 모레스. 이것은 간단한 염상 결계를 만드는 방법이니라. 지금 잘 배워 두기만 하면, 나중에 필요할 때 너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란다.]
“아, 넵! 물론이죠!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준비가 끝나자, 성황은 성진의 머릿속에서 친히 이적을 행해 보였다.
화아악-!
하얀 빛무리에 감싸인 채 테오신테의 본질이 변화를 일으킨다. 그 신묘한 과정은, 성진으로 하여금 언젠가 성황이 브루노 단장의 회색 역병을 치료하던 광경을 연상케 했다.
강한 의념이 움직여 수많은 인과가 모이고, 시간과 공간의 축이 제각각 뒤흔들린다.
그렇게 세상의 법칙을 뒤틀기를 몇 차례, 마침내 환한 빛이 가시고 성진의 눈앞에 남겨진 것은-
“우와……!”
찬란한 금빛 광택을 뿜어내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테오신테였다!
“아버지, 이건…….”
성진이 테오신테 하나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며 묻자, 성황이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상인에게 그것들을 잘 길러 보라고 이르거라. 아마도 동일한 효과의 종자를 얻을 수 있을 테니.]
그러니까, 종자의 유전자 자체가 변했다는 거야?
“아니, 대체 테오신테에 무엇을 하신 겁니까? 어떻게 잠깐 만에 이런 변화가 가능하죠?”
[별일 아니다, 모레스. 그저 간단한 염상 결계를 펼쳐, 종자에 규상세계의 법칙을 촘촘히 융화시켰을 뿐인 것을.]
“…….”
[실은 너도 어느 정도는 감을 잡지 않았더냐?]
확실히 그랬다. 브루노 단장의 치료 과정을 지켜볼 때와는 또 다른 감각이었지.
생생하게 전해지는 의념의 움직임, 그 속에서 느껴지는 뚜렷한 의도. 성황이 일으킨 이적의 모든 과정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틀어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염상 결정 안에 있기 때문인가?’
왜일까. 이 감각이 완전히 낯설지만은 않았다. 어쩐지 무척이나 익숙하고도 그리운 느낌.
“어쨌거나 이렇게 되면 얘기가 완전 달라지는데요?”
성진은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처음에는 올리버의 사업에 한 발 걸쳐서, 적당히 권리금이나 빨아먹을 생각이었지.
하지만-
“아무래도 개런티를 좀 제대로 뜯어내야 하지 않을까요? 따지고 보면 종자부터 사업 계획까지, 전부 다 이쪽에서 제공하는 거잖아요?”
어차피 망할 사업이었잖아? 올리버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없지. 성진은 희희낙락하면서 혼자 계획을 세웠다.
‘좋아. 이번 계약에는 마사인 경의 이름이라도 얹어 볼까? 나름 성황가의 일원이기는 하지만, 황궁 기사의 신분이라 사사롭게 돈을 벌 기회가 없으니까.’
그렇게 완벽하게 모든 일을 마친 성진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마사인과 오웬을 불렀다.
“좌판을 열어 장사를 하신다고요? 저하께서 직접이요?”
당연히 마사인 경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성황가의 일원으로서, 부디 체통을 지켜 주십시오!”
하지만 성진에게는 그를 설득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진정해, 마사인 경. 자네도 알다시피, 북부의 사람들은 알음알음 약차에 중독되어 가고 있어. 이 얼마다 참담한 노릇이야?”
“네, 저하. 그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그 약차 유통의 뿌리를 파헤치고, 사람들을 약차의 마수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우리 마물 전담부가 움직이는 거 아니었나?”
“…….”
“그리고 마물 전담부를 이끄는 것이야말로 내가 선택한 ‘고귀한 의무’지. 다시 말해, 이번 일은 성황가의 일원으로서 반드시 관철해야 하는 임무인 거야.”
하지만 마사인 경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하오나 저하. 그것이 저하께서 직접 장사를 하실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더욱 참회 교단의 색출에 온 힘을 쏟아야 하지 않습니까?”
쯧쯧.
성진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혀를 찼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우리가 새로운 차를 유통시키는 것만으로도, 참회 교단의 마수를 대부분 막아 낼 수 있는 거네.”
“하오나, 저하…….”
“거기다 이 일은 아멜리아 누님을 위한 것이기도 해.”
성진의 입에서 황녀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마사인도 떨떠름한 얼굴로 귀를 기울인다.
“들어 봐, ‘준 상단 사업자증’을 가진 이들이야말로 아멜리아 누님이 북부에 보내 주신 희망의 씨앗들이지. 이들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자생할 수만 있다면, 대륙의 경제에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
“…….”
“제국에 득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불쌍한 북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고. 모든 것이 대의를 위해서야, 마사인 경.”
마사인이 슬쩍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다. 그 의미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대의요? 저하께서요? 설마요?
하지만 성진이 둘러댄 설명에 별다른 허점은 없는 터였다. 결국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격파 시범용 나무판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사인의 수난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자, 알아들었으면 여기 사인을 해야지, 마사인 경?”
“…이건 또 뭡니까, 저하?”
“응? 간단한 계약서야. 자네가 제공한 기술로 얻은 이익을 깔끔하게 반으로 나눠 받는다는 내용이지.”
“네? 제가 제공한 기술이라니, 지금 그게 무슨…….”
“어허! 깊이 알려고 하지 마. 그냥 좋은 거니까, 나를 믿고 서명하라고. 어서.”
“…….”
그렇게 해서 테레의 여관 앞에서는, 또다시 화려한 테오신테 론칭 행사가 펼쳐졌다. 더욱 정교하고 화려해진 불꽃쇼 아래에서, 한층 우월한 품질의 상품을 가지고.
“와아아! 이건 주신이 내려 주신 기적이네!”
“여기! 여기도 테오신테 한 봉지 주시오!”
“저리 비켜! 내가 먼저 줄을 섰잖아!”
장사는 전보다 호황이었다. 테오신테는 훨씬 이른 시간에 완판되었고, 올리버는 두둑한 주머니를 어루만지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성진은 이번에도 모여든 인파 끄트머리에서 성황의 일행을 발견했다.
두꺼운 후드를 뒤집어쓰고 바르샤 야만인의 등에 업혀 있는, 무척이나 친숙하고 반가운 시선.
성진은 반색하며 소리치려 했다.
‘아버……!’
하지만 다음 순간, 성진은 전에 없이 강한 위화감에 휩싸여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어?’
여전히 머릿속에서 빛나고 있는 작은 등불의 존재와, 군중 너머에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또 하나의 아버지.
천천히 눈을 깜박거리던 성진의 눈이, 이내 경악으로 커다래졌다.
‘아버지가… 저기 또 있다고?’
달칵!
순간 머릿속에서, 두 세계가 맞물리는 소리가 또다시 울려 퍼졌다.
Chapter 150: Chapter 450
Chapter Text
450. 다키온 (7)
성진의 눈앞에 다시 한번 똑같은 광경들이 펼쳐졌다.
“크흑! 오웬이여어어!”
오웬의 옷자락을 허겁지겁 붙잡고 매달리는 바르샤 야만인과-
“저하아아아!”
반색하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맹한 얼굴의 전담시녀, 그리고-
“…….”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성황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젊은 정보원까지.
“쉿. 에디스. 나는 지금 신분을 숨기고 있어.”
팡팡! 옷의 먼지를 털어 내는 전담시녀를 건성으로 밀어내며, 성진은 마치 꿈속인 양 오웬이 성황을 향해 다가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바트 사제님!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그래. 모든 사건들이 이전과 한 치의 변화도 없이 흘러간다.
‘…알고 있었어.’
성진은 이미 이전과 같은 일들이 벌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거의 실수들을 바로잡았고,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가.
한데 이게 웬걸. 막상 현실에서 두 사람의 아버지를 마주하게 되니, 마치 꿈속에 들어온 듯 묘한 부유감이 일었다.
대체 어느 쪽이 진짜 현실이지?
[모레스.]
그때 머릿속에서 성황이 말을 걸어왔다.
[정신을 다잡거라. 지금 무척이나 혼란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 네가 해야 할 일을 잊어서는 안 되느니라.]
해야 할 일.
[우리는 되돌아가야 한다. 이전과 같은 시각, 같은 장소로.]
네, 알고 있어요. 아버지.
어쩐지 그럴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으니까.
“…후우.”
성진은 작게 숨을 내쉬고는 발을 디뎠다.
“바트 사제님.”
이전처럼 조심스럽게 그의 소맷자락을 끌어당기자, 손에 느껴지는 감각은 세상의 법칙을 비껴간 가벼운 무게감.
“…….”
그럼에도 그 생경한 감각이 그저 반갑기만 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성진은 어딘지 묘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 * *
[이성진! 이성진!]
일행이 전처럼 식당에 모여 앉자, 마왕은 열심히 사념을 보내며 성진에게 이변을 알려왔다.
[여기 좀 봐! 정말 이상해! 저 바트라는 자에게서 규상세계의 법칙이 느껴져!]
마왕 녀석, 정말로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구나.
톡톡.
램프를 가볍게 두드려 마왕을 진정시킨 후, 성진은 찬찬히 성황의 호문클루스를 살폈다.
테레에 나타난 또 다른 성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완고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이전과 매한가지.
그럼에도 성진은 그의 태도에서 전과 다른 미묘한 차이점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전의 그를 떠올려 보면, 정체를 감추느라 제대로 대꾸도 못하는 것이 퍽 난감한 눈치였지.
한데, 지금은 어떤가.
“…….”
착 가라앉은 분위기 아래, 후드로 가려진 그의 시선이 때때로 살피듯 얼굴에 와 닿는 것이 느껴진다.
[이, 이성진, 조심해! 저 자식 어딘가 심상치 않아. 분명 규상세계의 영혼으로 보이는데, 신성력 같은 이상한 빛이 흘러나온다고! 대체 정체가 뭐지?]
마왕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성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그와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는, 먼저 두 사람만의 장소로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이들의 눈이 불편하시면 식사를 제 방으로 주문하겠습니다. 바트 사제님, 일단 함께 방으로 가시지요.”
그러자 이쪽의 눈치를 전전긍긍 살피던 정보원이, 화들짝 놀라며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
“저하, 아뢰옵기 외람되오나, 바트 사제님께서는 제국어가 많이 서투십니다. 그러니 제가 곁에서-”
성진은 뚱한 얼굴로 정보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자식은 아까부터 대체 뭐 하자는 거지? 그냥 아버지의 신변을 지키는 게 임무 아니야? 근데 뭐야. 그저 가족끼리 대화를 하겠다는데, 왜 번번이 사탕을 빼앗기는 어린애처럼 구느냐고.
“하지만 제국어를 ‘매우 잘’ 알아들으시지. 그렇지 않나?”
“네? 아, 네. 그건 그렇습니다만…….”
떨떠름해하는 정보원을 슬쩍 노려봐 준 후, 성진은 성황과 함께 식당을 벗어났다. 물론 오웬에게 판게아 크로니클의 먹거리들을 챙겨 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아, 주인장. 저 바르샤인에게는 헛간을 내어주고 꿀꿀이죽이라도 쥐여 줘.”
그렇게 야만인까지 제대로 처리한 성진은, 해결되지 않은 많은 의문들을 품은 채 여관방으로 되돌아왔다.
테레에 하나밖에 없는 여관에서도 가장 좋은 방. 바로 기묘한 시간 체험이 처음 시작되었던 공간으로.
타악.
방문을 닫은 성진은, 이전처럼 문에 몸을 기대며 성황을 불렀다.
“아버지.”
그러나 즉각 대답해 주었던 이전과 달리, 그는 성진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성진을 바라보더니, 후드를 벗으며 천천히 식탁 앞에 앉았을 뿐.
“…….”
거북한 침묵 아래로 스멀스멀 불안감이 피어오르는 찰나, 머릿속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온다.
[걱정하지 말거라, 모레스. 지금은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을 게다. 혹여나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인과’를 아껴야 하니 말이다.]
“인과를, 아껴요?”
그야 본래의 성황이 매번 침묵을 고수하는 이유이긴 했지만,
“그러면 아버지, ‘당신’ 쪽은… 더는 인과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아무래도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와 여관방에서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던 세계가 이렇게나 눈앞에 생생한데.
[그래. 이제 나는 인과에서 제법 자유롭구나.]
그 ‘자유’라는 말이, 어째 썩 좋은 뜻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진은 더는 자세히 묻지 못했다. 곧이어 신이 난 여관 주인이 푸짐한 저녁 식사를 대령했기 때문이다. 이전과 정확히 같은 시각이었다.
“하하하!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슈!”
탁.
그렇게 방문이 닫히자, 성황은 혼자서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성진이 권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아버지, 역시 뭔가를 알고 계셔.’
하지만 어디까지나 성진의 짐작일 뿐이다. 저렇게까지 무겁게 침묵을 지키고 있을 따름에야.
덕분에 딱히 할 일이 없어진 성진은,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묵묵히 그가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이 자리가 마냥 조용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성진! 지금 뭐 하는 거야? 저놈, 뭔가 위험해! 이상하다고! 게다가 얼굴은 또 왜 네 아버지와 저렇게 닮은 거지? 이러지 말고, 어서 여기서 도망치자!]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램프 속의 불꽃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마왕 녀석이 겁에 질려 난리를 치고 있는 거다.
성진은 전처럼 고기 한 조각을 던져 주며 녀석을 차분하게 달랬다.
“괜찮아, 마왕아.”
[괜찮다니, 뭐가! 네가 저 이상한 영혼을 눈으로 못 봐서-!]
“아버지야.”
[…뭐?]
“이상한 영혼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순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멍해졌던 녀석이, 갑자기 커다란 괴성을 지르며 쪼그라들었다.
[히이이이익?!]
왜 아니겠는가. 겨우 성진의 머릿속에 강림한 성황의 존재를 극복했다 싶더니, 눈앞에 또 다른 성황이 나타난 꼴 아닌가!
충격에 빠진 마왕의 불꽃이 창백하게 얼어붙는다. 이대로라면 곧 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
“야, 야. 정신 차려. 이거라도 먹고 기운 내라고.”
한숨을 내쉰 성진은, 전처럼 마왕에게 부지런히 음식들을 던져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모레스. 그러면 되느니라. 그저 이곳에서 가만히 ‘분기’의 시간을 기다리렴.]
분기.
어쩐지 중요한 단서라는 예감이 들었다. 성진은 눈으로는 식사 중인 성황의 호문클루스를 바라보며, 귀로는 머릿속의 목소리에 쫑긋 신경을 곤두세웠다.
[다행히 아직은 시간이 조금 남았구나. 덕분에 네게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해 약간의 설명은 해 줄 수 있을 듯하다.]
그러자 성황의 식기가 미세하게 느려진다.
순간, 성진은 눈앞의 아버지가 그들의 대화를 모조리 듣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는 중에도 머릿속의 목소리는 이런저런 당부에 여념이 없었다.
[부디 기억하거라, 아들아. 나는 지금껏 쭉 너와 테레의 여관에 함께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네?”
성진은 이해할 수 없어 반문했다.
“아니, 아버지. 지금 그게 무슨……?”
[네 눈앞에 동일한 결과가 놓이기만 한다면, 더는 그 원인과 과정을 일일이 따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흔들림 없는 확신이야말로, 모든 불확정 요소를 하나의 세계로 이어 나가는 방법임을 마음 깊이 새기도록 하렴.]
“…….”
[또한 너는 지난 수일간의 새로운 경험이 결코 이전의 과거와 다르지 않음을 알거라. 결국 이 모든 일들은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동시에 존재하며, 또한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되, 조금도 흐르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 그 사실을 언제나 유념해야 하느니라.]
“아니…….”
성진은 어쩐지 불안해졌다. 갑자기 쏟아지듯 들려오는 목소리가, 마치 그가 남기는 작별 인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뜬구름 잡는 내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 세계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부디 대답해 주십시오, 아버지!”
하지만 성황은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조금은 다급하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잊지 말거라, 모레스. 내가 너의 판단에 모든 미래를 맡기는 것은, 그로 인해 일어날 결과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 어…….”
[그러니 향후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좌절할 필요가 없느니라. 너는 언제나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으며, 끝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음을-]
그때, 예고도 없이 [분기]가 찾아왔다. 수일 전의 과거에, 성진이 다키아누스의 비서를 품에서 꺼내 들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시각이었다.
훅-!
순간 머릿속이 텅 비는 허전한 감각과 함께-
달그락!
갑자기 나타난 동그란 물체 하나가, 성진의 앞섶으로부터 식탁 위로 떨어지며 큰 소음을 만들었다.
툭!
데구루루…….
또 하나의 세계가 무참하게 낙하하는 소리였다.
* * *
깜박.
성진은 눈을 깜박이며 그 낯선 돌멩이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데구루루루…….
작은 돌은 보석처럼 영롱한 빛을 발하며 빙그르르 원을 그렸다. 그러다 점점 속도를 잃더니 이내 성진의 정면에서 멈춰 선다.
본래라면 아마도, 다키아누스의 비서가 놓여 있었을 자리.
무심코 품속을 더듬어 본 성진은, 더는 이곳에 비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이제 책이 있던 자리에는, 연수정처럼 짙은 회색을 띤 보석 하나만이 빛을 발하고 있을 뿐.
“…….”
그리고 드디어, 눈앞의 성황이 변화를 보였다.
그는 식사를 아예 멈추곤 보석을 가만히 응시했다. 역광 아래에서 환하게 빛나는 무기질의 눈동자가, 그를 마치 엄청난 정보를 단번에 읽어 내는 정밀한 기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안광을 점멸하던 성황이 드디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괜찮다, 아들아. 이제 다 끝났느니라.”
성진은 잘게 흔들리는 눈으로 눈앞의 호문클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저 기척, 저 목소리.
역시 저 사람은 내 아버지가 맞아.
“…아버지.”
한데 어째서 그를 부르려 하니, 갑자기 이렇게 목이 메어 오는 걸까.
“그래, 모레스.”
순순히 들려오는 대답에, 성진은 안도감과 허망함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지금까지 제가 본 것들은 다 뭐죠? 모두 환상입니까? 아니면, 저는 과거를 바꾼 겁니까?”
“말하지 않았더냐? 깊이 생각할 것 없느니라. 그저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았고, 모두 그대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어, 그래. 처음에 분명 그런 말을 듣기는 했지.
-이제 모든 것은, 내가 무엇을 보고 싶으냐에 달렸느니라. 모레스.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럽다. 며칠의 시간을 되돌아온 것 같기도, 혹은 계속해서 이 자리에 머물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한, 그런 이상한 감각.
성진은 불안한 얼굴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하면 아버지, 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마사인 경의 영혼이 부서져 가는 세계인가요, 아니면 모든 실수를 되돌려 만회한 세계인가요? 어느 쪽이 저의 진짜 현실이죠?”
그러자 성황이 식기를 내려놓고는 성진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글쎄다, 아들아. 네 생각에는 어떤 것 같으냐?”
“…….”
성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 쪽이 현실이라고 섣불리 단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두렵다는 쪽이 옳을 것이다. 무심코 대답하는 순간, 스스로 비가역적인 운명을 만들어 버릴 것만 같아서. 잠깐의 실수로 마사인 경이 또다시 영혼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말 것 같아서.
“현명한 판단이다.”
성진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성황이 작게 미소 지었다.
“모레스.”
“…네, 아버지.”
“이것을 보렴.”
성황은 손을 뻗어 식탁 위의 작은 보석을 가리켰다.
“네 눈에는 그것이 무엇으로 보이느냐?”
“이정표…입니까?”
성진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낸 이정표라는 사실을.
조모님이 남긴 선홍색 보석과는 전혀 달랐다. 아마도 성황이 언젠가 만들었을 이정표와도 다르겠지.
어두운 회색으로 빛나는, 탁하면서도 동시에 맑디맑은 보석.
-진정한 ‘다키온’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지금부터 네게 직접 보여주마.
그 말 그대로였다.
지금까지 성진이 중복해서 겪은 시간들은, 실은 모두가 이 이정표를 만드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
더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가능성.
영롱하게 빛나는 이정표를 가만히 집어 들자, 차가운 무기질의 감촉과 함께, 왠지 설명하기 힘든 그리움과 서글픔이 거세게 밀려들었다.
Chapter 151: Chapter 451
Chapter Text
451. 다키온 (8)
달칵.
잠깐의 침묵이 흐르는 동안, 성황이 앞에 놓인 접시 하나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한 차례 훈연을 거친 후 껍질이 바삭해질 때까지 구워 낸 찌르레기 요리로, 주인장이 제법 자신하던 여관의 대표 메뉴였다.
“…….”
성진은 그가 식기를 움직이는 광경을 가만히 눈으로 쫓았다.
앞서 흘러갔던 시간 속에서는, 성진이 먼저 적극적으로 권하며 직접 그에게 덜어 주기까지 했던 요리.
그리고 현재의 성황은, 우연찮게도 당시 성진이 잘라 낸 부위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부분을 덜어 내는 중이었다.
성진은 멍하니 생각했다.
‘아니, 우연일 리가 없나. 저 행동에는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직접 겪지 않은 기억을 천천히 되새기는 것일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과거와의 괴리감을 없애고 싶은 걸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모레스.”
그때 성황이 입을 열었다.
“방금 있었던 일은 이정표를 만드는 수많은 방법들 중 하나에 불과하단다. 물론 그 기저에 놓인 원리에 대해 깊이 파고들자면, 결국은 모두 동일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만.”
그는 식기를 움직이며 담담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이번에 만들어 낸 것이 네 이정표인 이유는, 이 모든 일들의 주체가 어디까지나 너이기 때문이다. 부득이하게도 이번만큼은 제3자의 시선을 빌려야만 했으나, 조금 더 익숙해진다면 다음부터는 너 혼자서도 충분히…….”
그러다가 그는 말을 멈추곤,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성진을 잠시 응시했다.
“…아직은 혼란스러운 게로구나.”
성진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그래.”
성황은 잘라 낸 찌르레기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렇게 덜어 낸 소량의 요리를 모두 비워 낸 후, 그는 식기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하면 모레스, 막간을 이용해 네게 옛날이야기 하나를 들려 주마.”
“…이야기요?”
“그래. 옛날 옛날 이오니아에 어느 고명한 예언자가 하나 있었느니라.”
성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렇게 이야기를 차용하는 설명은, 평소 인과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성황이 자주 이용하던 방식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라 치면, 인과의 반동에도 개의치 않고 거침없이 다키아누스에 관해 설명해 주던 또 다른 성황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자는 자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남에게 베풀려 했다. 그렇기에 사람들 사이에서도 비교적 신망이 두터웠단다.”
성황의 설명에 따르면, 예언자는 적당히 이기적이었으나, 그래도 기본적으로 남을 위하려 드는 이타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주변 사람들의 위험을 쉽게 간과하지 못하고, 가급적이면 그 일에 개입하여 더 나은 미래를 얻으려 들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예언을 들은 많은 이들이 구원받을 수 있었다나.
“그는 코른시임 일족이었습니까?”
거기까지 듣는 순간, 성진의 직감이 강하게 번뜩였다.
“설마하니 코른시임의 오라클이었나요? 오래전 일족이 델크로스로 이주하기 전, 이오니아에 살았던 또 다른 오라클 말입니다.”
“…지금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게다.”
성황이 말끝을 흐렸지만, 성진은 그의 표정에서 희미한 긍정의 빛을 읽어 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예언자는 갑자기 중대한 누명을 쓰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가장 믿고 있던 친우가 그를 팔아넘겼지. 예언자가 미처 예지하지 못한, 조금의 가능성조차 생각해 본 적 없던 비극이었느니라.”
친우의 예상치 못한 배신으로, 예언자는 형언하기 힘들 만치 끔찍한 일들을 겪었다. 몸뚱이는 불구가 되어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꼴이 된 데다, 가족과 친지들을 일거에 잃고 만 것이다.
그렇게 모든 고난이 끝나자, 겨우 목숨만을 부지한 예언자는 피눈물을 흘리며 통탄했다. 사람들의 미래를 예언하고 결과를 바꿔 줄 수 있었으나, 정작 자신의 앞가림만은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그러고도 어찌 자신을 예언자라 칭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깊이 절망한 예언자는, 결국 스스로의 심장을 찌르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려 했다.”
거기까지 말한 성황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한데 죽음 직후, 어째서인지 그는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눈을 떴단다. 그가 살던 옛 집에서, 그 모든 비극이 일어나기 전의 어느 날 아침에.”
“…예언자는 과거로 돌아왔군요.”
성진은 불안한 표정으로 이야기에 집중했다. 과거로 돌아가다니, 그야말로 자신이 겪은 일과 똑같지 않은가.
“그래, 모레스. 예언자는 정말로 과거로 되돌아왔느니라. 처음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환희에 겨워 쉴 새 없이 광소를 흘렸다.”
되돌릴 수 있다. 모든 과오를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다!
그 후 예언자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했다. 친우가 자신을 팔기 전에, 선수를 쳐서 먼저 그를 재판에 넘겼다. 거짓된 증거를 만들어 친우를 완전히 매장하고, 일부 의심의 눈초리로부터 성공적으로 몸을 빼낼 수 있었다.
그렇게 잃어 버렸던 가족들을 구하고, 배신자의 모든 것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성공적으로 비극적인 과거를 뒤바꾼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예언자는 깨닫게 되었느니라. 실은 자신이 지금껏 큰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착각…….”
“그래, 착각이다. 정말로 자신이 과거로 되돌아온 것인가, 아니면 그저 닥쳐올 끔찍한 미래를 사전에 생생하게 예지했을 뿐인가. 적어도 예언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둘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느니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거슬러 오는 능력이 존재하는지는 차치하고, 어쨌거나 결과는 동일했겠지. 결국 예언자에게 있어서는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아버지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네 눈앞에 동일한 결과가 놓이기만 한다면, 더는 그 원인과 과정을 일일이 따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했지. 그런 흔들림 없는 확신이야말로, 모든 불확정 요소를 하나의 세계로 이어 줄 수 있다고.
성진은 잠자코 손에 쥐고 있던 이정표를 내려다보았다.
이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짧은 시간이나마 동시에 존재했던 또 다른 가능성들이, 이제는 자신과 성황 외에는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서글픈 하나의 세계가.
“…….”
성진은 잠시 손끝으로 차가운 이정표를 더듬다가 입을 열었다.
“하나 아버지, 그것은 조금 이상합니다.”
“이상하다?”
“네, 그렇습니다. 예언자의 이야기대로라면, 두 가능성이 나뉘는 [분기]는 언제나 모든 일이 일어나기 이전의 과거에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것이 진정한 예지가 될 수 있고, 예정된 미래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지요. 하지만 이건…….”
성진은 고개를 들어 성황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이번에는 시간이 이미 흘러간 후, 그러니까 모든 일이 종결된 이후의 시간이 [분기]가 되었습니다. 하면 이것은 과거를 개변한 것이지, 더는 ‘예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
“오히려 이번에는 분기를 기점으로, 이미 나뉘었던 세계가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면 차라리 ‘수렴’이나 ‘결합’이라 말해야죠. 이것을 어떻게 ‘분기’라고 칭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성황은 대답 없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이 성진에게는 마치 이런 의미로 느껴졌다.
-이미 네게 답을 주지 않았더냐?
…뭐지? 지금까지 내가 뭔가 놓친 것이 있던가? 곰곰이 성황과의 대화를 되뇌던 성진은, 순간 머릿속에서 들려 왔던 다급한 설명을 떠올렸다.
-결국 이 모든 일들은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동시에 존재하며, 또한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되, 조금도 흐르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
아아. 성진은 지금에서야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
그래. 직관적으로 와 닿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성으로는 그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성진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스스로의 질문에 대답했다.
“즉 아버지의 말씀은 이런 겁니까? 서로 다른 가능성을 지닌 세계가 두 갈래로 나뉘는 것은, 이미 분리되었던 세계가 다시 하나로 수렴하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뜻이에요?”
“…….”
“무엇이 전후인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시간이란… 사실은 어딘가로 흐르는 게 아니라서?”
“…그래, 모레스.”
성황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그러하단다.”
* * *
서이서는 지금 화려한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언젠가 유료 아이템을 무더기로 구입해 가며 정성스럽게 꾸몄던 ‘마이룸’의 광경과도 흡사한 장소였다.
심지어 맞은편에는 그림처럼 잘생긴 미남자가 앉아 있다. 본래라면 무척이나 설레었을 상황.
그럼에도 그녀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까부터 남자가 그녀에게 끊임없이 귀찮은 요구를 해 왔기 때문이다.
[이 잡것아. 라면은 그만 됐다. 네가 아는 또 다른 맛있는 요리를 상상해 보거라.]
[와, 잡것이라니! 카드모스 씨.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부아가 치밀어 오르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제게는 ‘서이서’라는 제대로 된 이름이 있다고요! 제 몸에 허락도 없이 세 들어 사는 처지를 제발 자각해 주시고, 집주인에게 조금 더 적절한 대우를 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네?]
[흥!]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더욱더 열받는 점은, 잘난 척 고개를 치켜드는 모습마저 한 폭의 화보 같다는 점이었다.
‘날 줘! 그 얼굴을 그 따위로 쓸 거면 차라리 날 달라고! 이 성격파탄자야!’
남자의 이름은 카드모스. 한때는 델크로스의 초대 성황이자 구국의 영웅, 그리고 반신이라고도 불리던 대단한 남자였다. 물론 지금은 본의 아니게 서이서의 몸에 기생하는 민폐 식객에다, 심각하게 자아가 비대한 나르시시즘 환자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자칭 신이라고 거들먹거릴 만한 능력은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부터 서이서의 정신세계를 열심히 탐구하던 카드모스는, 어느새 예전의 ‘마이룸’ 서비스와 비슷한 상념 속 공간을 뚝딱 만들어 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서이서에게 끊임없이 맛있는 음식을 떠올려 보라고 종용하고 있는 거다. 그녀의 상상력까지 빌려 가며, 염상세계에서나마 생전에 못다 이룬 식도락 생활을 영위할 심산인 모양.
[아, 이보세요! 왜 먹어도, 먹어도 만족할 줄을 모르세요? 신이라고 하더니, 실은 천년을 굶은 걸신이셨어요?]
[시끄럽다! 대신 최근에는 식사 시간에 제대로 몸을 돌려주지 않느냐? 자꾸 반항하면 아예 네 몸을 영원히 뺏어 버리는 수도 있다. 이 죽다 만 것아!]
[헐… 죽다 만 것이라니! 지금 말씀이 너무 심한 것 아니에요?]
서이서는 입을 삐죽거렸지만, 이내 그와의 힘의 차이를 인정하고는 순순히 작은 냄비 요리를 상상해 냈다.
걸쭉한 붉은 국물. 그리고 그 속에 잠긴 쫀득한 떡과 풍미 좋은 어묵을.
[…뭐냐? 이 괴상망측한 것은?]
서이서는 자신의 구체적인 상상이 빚어낸 역작을 앞에 두고서, 어깨를 쭉 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아, 모르는가? 이것은 ‘떡볶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모짜렐라 치즈라는 신이 내린 재료를 듬뿍 끼얹은 최상품이지!]
[…이 보잘것없는 미물아. 네 괴상한 말투를 듣고 있자니 어쩐지 짜증이 치솟는구나.]
카드모스의 동공이 서이서를 노려보며 바짝 조여진다.
그 섬뜩한 눈동자에 곧바로 기가 죽은 그녀는, 재빨리 꼬리를 내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아, 네! 무, 무척 맛있는 요리입니다! 제가 먼저 입을 댈 수는 없으니, 위대한 카드모스 님께서 우선 한 입 시식해 보시죠.]
[…….]
[…데헷?]
카드모스는 그녀의 태도가 상당히 못마땅한 것 같았지만, 일단 새로운 요리가 눈앞에 있는 터라 그냥 넘어가기로 한 듯했다.
그는 최근 배운 어설픈 젓가락질로 냄비를 휘휘 휘저어 보았다. 그러곤 붉은 국물을 뚝뚝 흘리는 작은 떡 하나를 집어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
[으음…….]
어라? 표정이 그리 나쁘지 않은데? 제법 입맛에 맞나 봐.
그래서 서이서는 그에게 직접 물으려 했다.
-어때요?
그리고 그녀는 실제로는 이렇게 말했다.
[어때/어, 어/어/때/때요?]
‘…음? 방금 뭔가 이상하지 않았나?’
딱히 혀를 깨물지도 않았고, 특별히 말을 더듬지도 않은 거 같은데? 서이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카드모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탁!
그는 젓가락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세로로 쭉 찢어진 홍채가 환한 금빛을 발하고, 입가에서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삐쭉 불거진다. 현재 그의 심기가 무척 불편하다는 증거였다.
[이 위대하신 반신의 시간이 저 삿된 것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다니… 이것참, 기분 더러운 일이로다!]
* * *
그리고 같은 시각. 대륙의 최북단.
동굴 입구에 오도카니 앉아 설경을 바라보던 여인이, 흠칫 놀라며 남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녀는 검을 베일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는 기괴한 차림의 여인이었다. 몸에 딱 맞는 검은 드레스가 발목까지 맵시 있게 흘러내리고, 허리 아래로는 까마귀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물결친다.
그렇게 차가운 눈보라 속에서, 그녀는 베일에 가려진 시선으로 하염없이 어딘가를 응시했다.
[…그래. 그러면 되는 거란다.]
이윽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록 입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쓸쓸함이 배어 있는 그녀의 목소리는 공기를 매개하지 않고 사방으로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니 모레스. 부디 너의 시간을 뒤바꿔, 내 오랜 숙원을 이루어 주렴.]
Chapter 152: Chapter 452
Chapter Text
452. 카야의 숨결 (1)
차가운 정적이 흐르는 안식의 영역.
잠시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둘러보던 마르타는, 문득 기묘한 부유감을 느끼며 눈을 힘껏 문질렀다.
아니, 영혼이 된 지금에 와서는 눈이라고 할 만한 것도, 그것을 문지를 수 있는 손도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그녀의 바이온은, 조금만 방심해도 무심코 살아 있을 때의 버릇을 영혼으로 고스란히 재현하곤 하는 것이다.
‘뭐지?’
영안에 바짝 힘을 준 마르타는, 거슬리는 위화감에 휩싸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엉망으로 박살 난 비석들이 보인다. 이리저리 내팽개쳐진 주검들과, 거칠게 파헤쳐진 대지도.
안식의 영역에는 딱히 기상 현상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눈앞의 광경은 마치 거대한 태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보였다.
‘…….’
그리고 그 중심에, 이 난장판의 원흉인 헤이즈와 벨린다가 사이좋게 뻗어 있었다. 시끄럽게 난동을 부리다가 잠에서 깨어난 늑대왕에게 얻어맞고 그대로 혼절해 버린 것이다.
영혼의 정수에 타격을 입었으니, 아마도 정신을 차리려면 시간이 꽤나 소요될 터.
‘하지만, 뭔가가 달라.’
그래. 원인과 결과가 이리도 확실할진대, 마르타는 이 모든 광경으로부터 묘한 어색함을 느꼈다.
‘잘 생각해 보자.’
저들이 처음부터 이곳에서 싸움을 벌였던가? 아니면 조금 더 영역의 중앙에서 격돌했던가?
‘아니면…….’
저들을 응징한 것이 정말로 늑대왕, 네브라스카였나? 혹시 거대한 시체 여인의 손에 짓눌려 납작해진 것은 아니었나?
그러다가 마르타는, 겨우 이 헷갈리는 기억들의 시발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맞아. 시작은 분명, 그 고귀한 분의 영혼이었지.’
안식에 영역에, 차마 영안으로도 제대로 응시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영혼이 등장했다. 그게 이 모든 혼란의 시작이었다.
영혼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타나 주인의 옥좌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했다. 그러다가 안식의 영역 외곽을 천천히 거니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지.
평소 그에게 큰 반감을 가지고 있던 헤이즈가 잔뜩 격앙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길길이 날뛰다가 우연찮게 벨린다와 말다툼을 시작했고, 그것이 곧 과격한 격돌로 이어지며 큰 소란이 빚어진 것이다.
그러던 중 날아간 비석 조각에 얻어맞은 늑대왕 네브라스카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거세게 표호하며…….
‘…아니, 아니야.’
마르타는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에게는 같은 시간대와 대응하는 또 다른 기억의 가닥이 존재했다.
그 빛나는 영혼이 안식의 영역 외곽을 맴도는 대신, 조금 더 영역의 중심, 그러니까 주인의 옥좌를 향해 똑바로 다가오던 광경. 잠들어 있는 주인을 향해 끊임없이 나직한 사념을 보내던 광경.
때문에 보다 영역의 중앙에서 일어난 헤이즈와 벨린다의 격돌. 그리고 이들을 막기 위해 몸을 일으켰던 거대한 시체 여인…….
마르타로서는 어느 쪽이 현실이고 어느 쪽이 꿈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두 갈래의 기억들이었다.
[…응?]
그러다가 마르타의 영안에 문득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영혼들의 모습이 보였다. 안식의 영역 외곽, 방금 전까지 그 고귀한 분의 영혼이 머물렀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분께서 데려오신 건가?’
때때로 그가 지상의 불쌍한 영혼들을 이곳으로 피신시키듯 데려온다는 사실을 마르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런 식으로 구원받은 영혼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녀는 새 친구를 맞이하듯, 조금은 반가운 심정으로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물론 얼마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서야 했지만.
‘저들은……!’
마르타는 크게 당황했다. 가까이서 살펴본 영혼들이 하나같이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 살리어…….]
[뀌이… 꾸이… 뀌이익…….]
놀랍게도, 그들은 반쯤 썩어 버린 바이온을 가진 영혼들이었다. 그렇게 온전치 못한 모습으로, 제대로 된 이지도 없이, 그저 불완전한 사념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비틀비틀 제자리를 맴돌고 있을 뿐.
‘영혼이… 썩어 가고 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영혼의 정수는 여간해서는 손상되지 않을 텐데, 대체 사람이 어떻게 죽어야 저런 모습이 된단 말인가.
[으… 어… 어…….]
어쨌거나 그 영혼들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연신 괴이한 신음을 흘리며 스스로를 쥐어뜯었으니까.
‘……!’
다행히도 마르타가 뭔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기 전, 그들은 안식의 영역에 동화되며 이내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바닥으로 가라앉듯 스러지는 영혼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야 영혼의 손상이 저렇게 심각해 보이지만, 이대로 숙면하며 오랜 시간을 보내면 언젠가는 예전처럼 회복될 수 있으리라. 다른 상처받은 영혼들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호오, 이것 참.]
그때, 마르타의 머리 위에서 천둥처럼 강한 사념이 울려왔다.
[뭔가 시끄럽다 싶었네만, 이 노파가 정신없이 자는 사이에 또 새로운 형제들이 들어왔구려.]
삐그덕…….
영역을 뒤흔드는 커다란 진동과 함께, 거인의 시체가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비쩍 마른 거대한 몸체와, 푸석하게 부스러지는 살점, 그리고 회색 먼지가 내려앉은 낡은 모슬린 드레스.
낯설면서도 동시에 익숙한 그 모습에, 마르타는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며 사념을 흘렸다.
[…헥센자바트 님.]
그러자 몸을 반쯤 일으킨 시체 여인이, 어쩐지 재미있다는 듯 마르타를 내려다보았다.
[그대, 나를 알고 있구려?]
[…네. 이상하군요.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헥센자바트 님, 제게는 분명 당신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자 시체 여인은 흐음, 신음 같은 소리를 흘렸다. 탁해진 각막이 뻑뻑하게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어째 희미한 기억을 열심히 파헤치는 눈치였다.
[확실히, 이 늙은이 역시 조금은 혼란스럽구려. 실은 내게도 그대와 살갑게 인사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소. 그대, 마르타라고 했소이까?]
썩어서 반쯤 무너져 내린 입가가, 흉흉함과 인자함이라는 상반된 요소를 아우르는 기묘한 미소를 그린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르타는 어쩐지 방금 마주했던 이상한 영혼들로부터 느낀 의문점을 재차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죽은 이후에도 육신을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영혼까지 썩어 가고 있다.
대체 어떻게?
[아아, 이번에도 또 불쌍한 영혼들이 구원받은 모양이구려.]
이미 깊은 잠에 빠진 새로운 영혼들을 살펴본 여인은, 안식의 영역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도로 자리에 몸을 뉘었다.
[참으로 어리석기도 하지. 그럴 역량도 없는 자들이, 어찌 겁도 없이 불로불사를 탐했단 말인가…….]
[불로불사요?]
마르타의 물음에, 시체 여인은 천천히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그렇소이다. 저 한심한 꼴들을 보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지. 이 노파의 볼품없는 꼬락서니와도 별반 다를 것이 없잖소?]
[…….]
[하나 우리의 주인께서는 저런 보잘것없는 영혼들조차 눈에 밟히셨던 게로구먼.]
잠시 주인의 옥좌를 향해 다정한 시선을 주던 여인은, 이내 천천히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자비롭기도 하지, 참으로 자비롭도다…….]
* * *
“…음?”
성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지? 방금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지 않았던가?
“왜 그래? 뉴비야.”
조심스레 기감을 곤두세우고 있으려니, 오웬이 의아한 듯 물으며 음료수를 건네 왔다.
“…아냐, 아무것도.”
테레에 도착한 뒤 줄곧 같은 장소에 숨어 있는 암살자 둘을 제외하면, 여관 주변에는 별다른 변화가 감지되지 않았다.
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갑작스레 분리되었다가 다시 합쳐진 시간선.
해결해야 할 의문점은 산더미 같았지만, 성진은 더는 그 문제에 골몰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먹거리를 잔뜩 챙겨 든 오웬 녀석이, 환한 표정으로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콰앙-!
-뉴비야! 이번에 또 새로운 퀘스트를 찾아냈어! 그린 존에 이렇게나 많은 먹거리 퀘스트가 숨어 있을 줄은 미처 몰랐지 뭐야?
그렇게 새로 공수한 쇼트케이크가 제법 먹을 만해서, 성진은 곧 골치 아픈 문제들을 머리 저편으로 던져 버릴 수 있었다.
냠냠.
“어때? 괜찮지?”
“뭐, 그럭저럭.”
“하하, 그나저나 너 은근히 단걸 좋아하는구나?”
문제는 성황이었다.
황급히 후드를 도로 덮어쓴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어묵을 들이미는 오웬의 압박에 못 이겨 결국 어묵 한 조각을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얼굴을 완전히 뒤덮은 상태로, 그것을 조심스럽게 천 아래로 가져가야 했지만.
“…….”
극도로 소극적인 식사 태도였지만, 어쨌거나 오웬은 반색했다.
“바트 사제님께서 뭔가를 드시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늘 사제님의 건강을 걱정했는데, 음식들이라도 입에 맞으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
“아, 여기, 이것도 좀 드셔 보시겠습니까?”
그렇게 성진과 성황의 식사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오웬은,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지껄였다.
“음. 어쩐지 사제님을 보고 있으려니, 꼭 아버님께 식사를 대접하는 기분이 들어서 뭔가 좋네요. 아, 결심했습니다! 이번에 황도로 돌아가면-”
“…쿨럭!”
“쿨럭!”
양쪽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기침 소리에, 오웬이 당황하여 허둥거렸다.
“엇? 뉴비야, 너 왜 그래? 바트 사제님? 사제님도 갑자기 왜… 괜찮으십니까?”
“쿨럭, 쿨럭!”
대차게 사레들리고 만 성진이, 황당한 표정으로 오웬을 노려보았다. 저 자식은 대체 눈치가 좋은 거야, 아니면 눈치가 없는 거야?
바로 즈음이었다. 성진이 지붕 위 암살자들로부터 묘한 기류를 감지한 것은.
‘또 다른 암살자가 나타났군. 나름 한가락 하는 놈 같은데.’
세 암살자는 한자리에 모여 뭔가를 중얼중얼 모의하는 듯했다. 뒤이어 점점 짙어지기 시작하는 살기.
“…….”
성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호두까기를 고쳐 매자, 성황이 그를 향해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져 온다.
그 시선의 의미를 성진은 직관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단순히 현재 자신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훨씬 더 먼 미래에 대한, 자신의 선택과 그로 인해 이어지는 인과에 대한 염려였다.
“괜찮습니다, 바트 사제님.”
성진은 그의 소리 없는 당부에 그리 대답한 후, 당연한 듯 오웬에게 지시했다.
“오웬.”
“응?”
“나 잠시 나가서 바람 쐬고 올 테니까, 그동안 네가 곁에서 바트 사제님을 잘 지켜. 알았어?”
그러자 잠시 눈을 끔벅거리던 오웬이, 웬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응, 그래. 다녀와.”
성진은 마지막으로 작은 램프를 챙겨 든 후, 창 쪽을 향해 가볍게 몸을 날렸다.
휘릭-!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소년의 기척이 사라지자, 오웬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탄했다.
“뉴비, 저 녀석의 오러 은폐는 참 경험할 때마다 놀랍단 말이죠.”
성황이 물끄러미 오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생각을 어떻게 알았는지, 오웬이 멋쩍은 듯 코를 문지르며 대꾸했다.
“아, 이 밤에 뉴비를 왜 혼자 가도록 가만히 내버려두냐고요? 그야 저 녀석이 저런 얼굴을 할 때는, 어쩐지 말을 잘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
성황은 새삼스레 생각했다. 자신의 대자는 정말로 눈치가 좋은 건지, 아니면 아예 눈치가 없는 건지 여간 헷갈리는 게 아니라고.
* * *
21호는 홀로 테레의 밤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막간을 이용해 허름한 짐마차라도 구해 볼 요량이었다.
‘황자들을 무사히 만났으니 폐하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고 봐야 한다. 하면 이제는 서둘러 레지나로 향하면 돼.’
어째서인지 벌써 암살자들이 여관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아직은 자신들의 정체를 파악하지는 못한 듯하지만,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물론 이 가난한 마을에서 마차를 찾는 일은 요원하기만 했지만.
‘길드의 힘을 빌릴 수만 있다면 간단했을 텐데…….’
하지만 이곳은 대륙의 북부, 그것도 자유 지하도의 세력이 깊이 자리 잡은 곳이다. 길드의 활동 범위를 크게 벗어난 지역인 것이다.
‘차라리 전처럼 도보로 하루를 걸은 다음 협곡에 숨겨 둔 마차를 찾는 쪽이 나을까?’
잠시 그런 고민에 빠졌지만, 21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도 자유 지하도의 이목을 끌기 전에나 가능한 일이지.’
그들은 이미 지나치게 시선을 끌고 말았다. 하면 조금 눈에 띄더라도,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곳을 벗어나는 쪽이 나을 터.
아닌 게 아니라, 마을은 늦은 시각까지 온통 테오신테 이야기뿐이었다.
“이야, 이 영롱한 빛깔 좀 보게. 마치 금을 비료로 해서 자라난 것 같구먼.”
“효과는 또 어떻고? 이거 한 잔만 우려 마셔도 기운이 그냥 펄펄 솟는다네.”
“그렇지. 한 모금만 마셔도 마치 한낮이 된 것처럼 잠이 달아나더구먼. 참으로 영약이 아닐 수 없어!”
…대체 황자가 사람들에게 뭘 판 거지?
21호는 잠시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그들을 지나쳤다.
그렇게 어두운 골목길을 어슬렁거릴 때였다. 21호는 반쯤 부서진 어느 오두막 앞에서 뜻밖의 얼굴을 만났다.
“키케.”
오래전의 아명으로 그를 불러 세운 이는, 아담한 체구를 가진 중년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몸은 여느 암살자들처럼 잠행복에 감싸여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다지 특출한 무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만이 남다른 강단을 얼핏 드러낼 뿐.
“…그레타 길드장님?”
당신이 왜 이곳에?
뜻밖의 만남에 잠시 멍해졌던 21호는 재빨리 정신을 다잡으며 대꾸했다.
“21호입니다.”
“그래, 21호.”
“길드장님. 잠시 아세인 지부에 다녀온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한데 당신이 왜 테레에…….”
그러자 크레타는 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건 그냥 핑계였어. 잠시 시간을 내서 베니시오 님을 뵈러 왔거든. 하지만 길드원들에게 차마 곧이곧대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니?”
“……!”
그녀의 말을 되뇌던 21호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길드장님. 결국 제국을… 성황 폐하를 완전히 등지기로 결심하신 겁니까?”
Chapter 153: Chapter 453
Chapter Text
453. 카야의 숨결 (2)
오르토나 망국 이전, 그레타는 수도 브린디시의 한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지런한 부모님 덕이었을까, 그녀의 가정은 어릴 때부터 크게 빈곤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그녀는 다른 아이들처럼 일찍부터 노동에 내몰리는 대신, 틈틈이 시간을 내 책을 펼칠 만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약간의 노력만으로 아카데미 장학생에 선발될 정도의 재능 또한 있었고.
-잘했다, 그레타! 아카데미를 졸업하기만 하면 분명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우리 집안도 이제 신세 좀 피겠구나!
그렇게 기뻐하시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아카데미에 입학했던 날, 그녀는 처음으로 베니시오 왕자와 가엘 장군을 만났다. 장차 그녀의 인생은 물론이거니와, 나라의 운명조차 송두리째 뒤바꿔 버릴 두 사람을.
-네가 장학금을 받은 그 평민이라고? 입학을 환영하네! 앞으로 오르토나를 떠받치는 든든한 인재가 되어 줄 거라 믿고 있어! 그러니 어떤가? 오르토나의 미래를 위해 밤낮으로 토론하는, 건실한 우리 모임에 들어오지 않겠나?
꿈꾸는 듯 맑은 눈동자를 빛내는 베니시오 왕자. 그리고-
-그레타라고 했나? 왕자님의 말씀은 아직 깊이 담아 둘 필요 없다.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이잖나? 그러니 일단은 학업에 충실하면서, 미래에 도움이 될 더 좋은 모임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겠지.
-잠깐만, 가엘! 지금 신입생 영입을 방해하는 건가?
-하지만 사실이 아닙니까? 왕자님께서 가만히 내버려둬도 이 친구의 미래는 탄탄하게 열려 있습니다. 귀족 가문에서 앞다투어 높은 임금으로 데려가려 들 테고, 그냥 왕궁 행정관이 되어도 제법 높은 자리까지 출세할 수 있을 테죠.
사려 깊은 눈빛을 가진, 베니시오 왕자보다 오히려 더 커다란 존재감을 뿜어내는 선배를.
-그러니 왕자님의 번드르르한 말은 신경 쓰지 말고, 어디까지나 자네를 위한 선택을 하도록 해, 그레타.
-어이, 이봐! 가엘! 자네 정말 이러기야?
가엘 베르트란. 그 존경해 마지않는 이를 만난 날부터, 그레타의 삶은 온전히 그를 위한 것이 되었다.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가려 했고, 그가 가진 열정을 함께 느끼려 했다. 그의 손발이 되어 언제까지고 그의 행적을 따라가고 싶었다. 그의 모든 행동과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에게는 마치 사제 나부랭이의 설교보다도 한층 신성한 교리처럼 여겨졌으니까.
그렇게 그레타의 삶은 격동의 시간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출세한 딸 덕분에 말년은 좀 편하겠구나, 그런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던 부모님을 왕당파의 손에 무참히 잃고, 그러고도 마지막 순간까지 공화파의 참모진으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그레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당시의 자신은, 정말로 공화정의 가치를 진심으로 마음에 두고 있었는가? 어쩌면 실제로는, 오르토나에 새로운 바람을 가져올 희대의 영웅, 가엘 베르트란의 광휘에 넋을 빼앗겼을 뿐은 아닐까?
-실은 공화파의 정신적 지주 따위가 되지 않아도 좋네. 그냥… 이 친구가 남은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게.
그날, 베니시오 왕자 일행을 용병단의 손에 맡기며, 가엘 장군은 마지막으로 그레타에게 그렇게 당부했다. 공화파의 핵심 인물인 베니시오를 몰래 빼돌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장차 공화파를 지탱하는 굴지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핑계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전선을 홀로 지탱하고 있던 거목은,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겨우 그녀에게 자신의 무거운 진심을 내비쳤다.
-당대에 나라를 재건한다는 불가능한 목표를 일부러 떠안을 필요는 없다고 전해 주게.
-장군……!
-그리고 자네 역시 마찬가지네, 그레타. 괜히 공화정의 망령으로 남으려 하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정말로 자네를 위한 삶을 살도록 해.
하지만 진정 그녀가 원하는 삶이란, 바로 가엘 베르트란의 뜻을 이루는 삶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사후에도 그레타는 여전히 그의 의지를 이어가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아득바득 일해서 길드의 요직에 오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가엘 장군이 누구보다도 지키고 싶어 했던 친우, 베니시오 왕자의 뒤를 봐주기 위해. 그리고 가엘이 무엇보다도 사랑했던 조국, 오르토나의 재건을 이루기 위해.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지금, 가엘 장군의 뜻을 함께 이어가야 할 오르토나의 미래가, 그녀를 향해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설마, 길드장님. 결국 제국을… 성황 폐하를 완전히 등지기로 결심하신 겁니까?”
마치 본인이 배신당한 것처럼 허망해하는 21호를 바라보며, 그레타는 문득 쓴웃음을 흘렸다. 저 아이는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기는 할까?
“…그것도 참 새삼스러운 질문이구나, 21호. 애초에 우리가 제국을 위해 길드에 투신한 것은 아니잖니?”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너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네가 성황의 곁에 머무는 이유는, 언제든 기회만 되면 그의 목을 베어 오르토나의 복수를 이루기 위함이잖아.”
“…….”
21호가 입을 꾹 다물며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확실히 말해 둘게.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딱히 성황의 뜻에 반하는 게 아니야. 길드는 북부의 정보망을 온전히 자유 지하도에 내어 주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관리를 포기한 것은 아니니까. 따라서 내가 베니시오 님의 활동에 관여하는 건, 어디까지나 길드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세력 조율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그 ‘조율’에 대해, 폐하께 제대로 보고하지는 않으시겠죠.”
“후후, 순진한 질문이구나, 21호. 설마 너는 성황이 정말로 내가 하는 일들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레타는 비소를 지으며,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는 21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날 길드장으로 임명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성황, 본인이야.”
성황이 그레타의 출신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애초에 남부로 향하려던 애스트로스 용병단을 설득해, 베니시오 왕자 일행을 내전으로부터 빼돌린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는 길드의 활동에 비교적 자유로운 재량을 부여했지. 황가의 정보를 관리하는 ‘원숭이 망루’를, 길드로부터 떼어 내 아예 중앙정보부 소속으로 만들어 버린 걸 생각해 보렴.”
그래. 그레타는 그 일을 통해 성황이 길드와 어느 정도 선을 그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간혹 반제국적인 활동을 하는 것도 이미 그의 예상 아래에 있을 터.
근거 없는 억측은 아니었다. 만일 성황의 암묵적인 허락이 없었다면, 과연 자유 지하도가 이렇게까지 단기간에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 안심하렴, 21호. 이 그레타는 아직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지 않았어.”
“…….”
“그리고 나는 현재 길드를 통솔하는 장으로서, 곤경에 빠진 길드원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이란다.”
그레타가 천천히 팔을 들어 오두막 너머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21호는 그녀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최대한 안력을 집중했다. 그리고 이내 조금 멀리 떨어진 들판에, 한 쌍의 노새가 이끄는 작은 짐마차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해했다면 저걸 타고 지금 당장 테레를 떠나는 걸 추천하마.”
“어째서입니까?”
“네가 성황의 전속 정보원이라는 사실을 베니시오 님은 이미 알고 계신단다. 하면 네가 지금 황도를 떠나 누구의 곁을 지키고 있는지도 능히 짐작하시지 않겠니?”
그리고 현재 베니시오가 사적으로 부리고 있는 북부 암살 집단, ‘카야의 숨결’ 또한 상황은 마찬가지일 터.
“나나 베니시오 님이나, 두 집단 사이에서 큰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저 이대로 세력의 균형을 유지한 채, 안정적으로 오르토나 재건의 토대를 쌓아 가고 싶을 뿐이지.”
거기까지 말한 그레타의 눈빛이 이내 어둡게 침잠했다.
“하지만 과연 ‘카야의 숨결’에서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장담할 수 없겠구나.”
“……!”
* * *
21호는 미친 듯이 여관을 향해 달렸다.
‘젠장! 잠시라도 그 사람의 곁을 비워서는 안 되는 거였다!’
상급 기사인 마사인, 그리고 무력이 출중한 황자들이 함께하기에 잠시 방심하고 말았다. 이대로 하루를 무사히 여관에서 보낸 후, 마차를 얻어 안전하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줄 알았지.
하지만 그는 모레스 황자가 이미 지나치게 저들의 이목을 끌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황자의 곁에 있어야 할 13호 선배가 하루 종일 눈에 띄지 않았다. 그걸 진작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머릿속에서 이미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린 21호는,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부디, 부디 제가 도착할 때까지 무사해 주십시오, 폐하!’
한데 사색이 된 21호가 막 여관에 도착했을 때, 막상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의외의 광경이었다.
소리 죽인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뒹굴고 있는 암살자 셋과-
“……!”
그런 그들을 무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말쑥한 소년.
“늦었잖아.”
소년, 모레스 황자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창백한 달을 등진 소년의 눈동자가, 마치 한 쌍의 작은 달인 양 차갑게 빛난다.
“기왕 사람을 호위할 거면, 좀 신경 써서 제대로 해 보라고.”
눈대중만으로도 암살자들의 실력은 그리 만만해 보이지는 않았다. 한데 저 어린 황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자신의 발아래에 두고 있는 것이다.
21호는 마음속의 동요를 감추려 애쓰며 물었다.
“설마 암살자들을 이렇게 만든 게… 저하이십니까?”
“응.”
“저하 혼자서, 저들 전부를요?”
“과한 것 같아? 괜찮아. 그래도 죽을 정도로 때리진 않았다고. 만약 내가 함부로 저들의 목숨을 끊어 버리면 아버지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실 테니까.”
21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저 능청스러운 황자가 처음부터 성황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치잇-!”
바로 그때였다. 바닥을 기던 암살자들이, 벌떡 일어나 일제히 한 방향으로 몸을 날린 것은.
그들은 껑충껑충 지붕을 건너뛰더니, 순식간에 어둠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
21호가 황급히 그들을 따라 달리려 들자, 모레스 황자가 가볍게 한 팔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그냥 내버려둬.”
“네? 하지만-”
“안 그래도 슬슬 보내 줄 셈이었으니까.”
21호가 멍하니 눈을 끔벅거리자, 모레스 황자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대체 언제쯤 자결을 시도하려나 기다려 봤는데, 놈들은 아까부터 끈질기게 도망갈 기회만 노리더군. 다시 말해 이 자리를 벗어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살아날 방도가 있다는 뜻 아니겠어?”
“…네?”
“너 말이야. 보기에는 꽤 똘똘하게 생겨선 말귀를 영 못 알아듣는구나.”
그래도 21호가 이해하지 못하자, 모레스 황자는 못마땅한 듯 슬쩍 미간을 구겼다.
“즉 이 근처에 다른 믿음직스러운 패거리가 있다는 뜻이잖아. 우리 일행을 말살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인력이.”
“…네?”
“혹여 고문을 당해 약간의 정보를 털어놓게 되더라도, 오늘 내로 이곳에서 우리 모두의 입을 막을 자신이 있다는 거지.”
잠시 황자의 말을 곱씹던 21호의 얼굴이, 서서히 창백한 빛으로 질려갔다.
“네에에?”
“거, 원숭이 망루의 정보원치고는 참 호들갑스러운 녀석일세.”
모레스 황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검을 갈무리했다.
“아니, 잠깐만요, 저하!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그럼 정말로 큰일 난 게 아닙니까?!”
“괜찮아. 다 방법이 있으니까.”
휘익-!
호두까기를 가볍게 털어 피를 흩뿌리는 모습에, 21호는 문득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지금껏 전혀 닮지 않은 부자지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모레스 황자의 모습은, 언젠가 그가 마음속 깊이 동경하고 따랐던 용병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비범함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던, 마치 신화 속의 영웅과도 같던 소년을.
“그래서 말인데, 난 이제부터 저놈들을 따라갈 건데.”
“…네?”
21호가 바로 이해하지 못해 되묻자, 황자가 뚱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쯧! 그래서 넌 어쩔 거냐고. 나와 함께 갈 건가?”
“네?”
또다시 얼빠진 얼굴로 되물은 21호는, 새삼 경악하며 재차 되물어야 했다.
“네에에에?”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너무나도 대책 없는 그 제안에, 21호는 재빨리 방금 전의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그럼 그렇지! 저 천하의 개망나니가 성황 폐하를 조금이라도 닮았을 리가!
Chapter 154: Chapter 454
Chapter Text
454. 카야의 숨결 (3)
“보통은 먼저 때리는 쪽이 이긴다고. 이 참에 다시는 허튼짓 못 하게 아예 싹을 잘라 버릴까 봐. 겸사겸사 다샤도 좀 찾아봐야 할 것 같고.”
21호는 대단히 곤혹스러웠다.
본래라면 당장 성황의 곁으로 돌아가 보고부터 올려야 했다. 곧 암살자들이 몰려올 테니 서둘러 마을을 떠나야 한다고 재촉해야 하는데…….
“아니, 저하. 잠시만 기다리-”
“그럴 시간 없어. 그럼 난 간다. 넌 따라오든 돌아가든 알아서 해.”
모레스 황자가 작은 램프를 단단히 비끄러매며 달릴 준비를 시작하자, 21호는 더는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겁도 없이 암살자들을 쫓아가겠다는 황자를 차마 홀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마음 같아서야 불경죄를 불사하고, 때려눕혀서라도 끌고 가고 싶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힐끔 황자를 바라봤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곧장 험악한 눈초리가 되돌아왔다.
-죽고 싶냐?
보통 예민한 감각이 아니다. 대체 누굴 닮은 건지, 원.
‘아무래도 내 힘으로 황자를 말리는 건 불가능하겠구나.’
21호는 암살자로서의 생존 본능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곁을 수행하겠습니다, 저하.”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자기 합리화를 시작했다.
그래. 여기서는 황자를 따라가는 게 맞겠지. 홀로 암살자를 따라가는 걸 멍청히 방관하고 있었다고 보고드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다행히 지금 폐하의 곁에는 마사인 경을 비롯해 무력이 출중한 이들이 남아 있다. 잠시 자리를 비우더라도 당장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거야.’
또 이런 판단도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한몫했다.
‘이미 도망친 놈들의 기척을 쫓아가긴 늦었다. 한데 황자가 무슨 수로 놈들을 추적하겠어? 적당히 따라가는 척하다가, 기회를 봐서 포기하라고 잘 설득해 봐야겠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21호는 자신이 얼마나 상황을 낙관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
일단 황자가 달리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목적지를 정확히 특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속도.
어디 그뿐인가. 쫓아가기 급급하여 흔적을 채 감추지 못하는 21호와 달리, 소년은 마치 두 발에 공기를 휘감고 있는 것처럼 가볍게도 땅을 박차고 있는 거다.
후웅-!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바람이 옆으로 넓게 퍼지며 희미한 완충 지대를 만들어 낸다. 그렇게 살짝 높아진 공기의 밀도는 이내 본래대로 복원되며, 또다시 황자의 몸을 가볍게 앞으로 튕겨 내는 것이다. 바닥에 일체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로.
21호는 눈을 빤히 뜨고도 자신이 보는 광경을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저 기술은 뭐지?’
만일 황자에게 물었다면, 다샤로부터 배운 암살자 특유의 잠행 기술에 또다시 슈니슈헤를 접목시킨 독창적인 오러 운용이라고 설명해 주었을 터다. 물론 지금의 21호에게는 질문을 던질만한 여유조차 없었지만.
“이봐, 좀 더 속력을 낼 수는 없어?”
“윽!”
황자의 태평한 재촉에 21호는 이를 악물었다.
-천재가 다 해먹는 더러운 세상.
최근 13호 선배가 그녀답지 않게 한탄하는 소리를 듣긴 했었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대로 훈련한 지 1년도 안 되는 애송이에게 정예 요원인 내가 밀린다고?’
물론 평화롭게 자괴감에 젖어 있을 틈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뒤쳐지지 않으려면 그저 기를 쓰고 황자를 따라 달릴 수밖에.
한데 더욱 분통 터지는 노릇은, 그런 그의 모습을 황자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는 점이다.
“다샤는 훨씬 더 빨랐는데.”
…다샤?
잠시 어리둥절했던 21호는, 그것이 겨우 13호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참으로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1호가 아는 13호는 언제나 공과 사가 분명하고, 원숭이 망루 일원들에게도 쉽게 곁을 내주지 않던 인물이었으니까.
‘13호 선배.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어쨌거나 암살자도 아닌 황자에게 언제까지나 실력으로 타박받을 수는 없는 노릇. 21호는 온몸의 오러를 쥐어짜 내며 두 다리에 박차를 가했다.
“저하. 이렇게 서두르실 거라면, 왜 제가 처음 놈들을 쫓으려 했을 때 말리셨습니까?”
“당연한 거 아냐? 놈들에게 대놓고 우리가 추격한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는 없잖아?”
“하나 이렇게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 쫓아 봐야 더는 추적의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황자는 어딘가 애석한 눈빛으로 21호를 물끄러미 돌아본다. 한데 그 얼굴이 어째, 21호가 어린 시절 틀린 답을 할 때마다 성황이 보여주던 표정과 닮은 듯 닮지 않아 괜히 신경에 거슬렸다.
심지어 이어진 황자의 반문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기척을 모르겠어?”
“……!”
알아? 설마 본인은 정말로 안다는 건가?!
이번에야말로 21호는 그의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말았다.
“또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만약에 다샤였다면…….”
“아, 네! 참으로 면목 없습니다, 저하! 전부 제가 부족하고 부덕한 탓입니다!”
* * *
21호의 우려와는 달리, 황자가 놈들의 위치를 제대로 감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일직선으로 거침없이 달려, 마침내 폐허가 된 작은 마을 입구에 도달했다.
“…….”
21호는 황자를 따라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긴 후, 조심스럽게 마을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허물어진 건물들과 완전히 썩어 버린 나무 둥치를 보니, 버려진 지 족히 10년은 넘은 듯 보이는 마을이다.
하지만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21호는 어딘가 팽팽하게 긴장된 마을의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저하의 말씀이 맞았군요.”
저곳은 아마도 자유 지하도의 숨겨진 거점 중 하나일 것이다.
마을 외곽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오러 은폐의 기척을 감지한 21호는, 황자를 향해 걱정스레 제안했다.
“일단은 저하. 그… 램프는 좀 끄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흠?”
한데 그 말을 들은 황자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했다. 허리춤에 매여 있던 램프를 풀어 내더니, 불꽃을 향해 천연덕스럽게 말을 건넨 것이다.
“야. 너 말이야, 잠시만 영혼석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을래?”
“……?”
미친 건가?
한데 21호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신기하게도 불꽃이 파드득 작은 불똥을 튀겼다. 마치 정말로 황자의 말에 대답을 하는 것 같았다.
21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 알았어. 대신 빛은 좀 죽이고, 들키지 않게 잘 숨어 있어야 해.”
그리고 놀라운 일은 연이어 일어났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자가 램프 덮개를 열어, 맨손으로 작은 불꽃을 움켜쥐는 게 아닌가!
“저……!”
그러더니 뜨거운 기색 하나 없이, 불덩어리를 조심스레 후드 자락으로 밀어 넣는다. 마치 작은 애완동물을 다루듯 태연자약한 태도였다.
꿀꺽.
21호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 그게 뭡니까?”
당장이라도 옷에 불이 붙는 게 아닌지 긴장하며 물었더니, 예의 딱하다는 듯한 눈빛이 되돌아왔다.
“불의 요정이다. 모르나?”
“불의……?”
“내게 주신의 시련을 내려 준 고대의 요정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황도에 그런 소문이 떠돌았던 것 같기도 하고?
21호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자, 모레스 황자가 한심하다는 듯 작게 혀를 찼다.
“쯧! 너 말이야, 황궁 전속 정보원씩이나 되면, 분기마다 발행되는 경전 동화 정도는 제때 좀 읽어.”
“동화…….”
21호는 대단히 억울했다. 아니, 성황을 보좌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대체 누가 정교회의 선전으로 가득한 동화 따위를 챙겨 읽는단 말인가.
“너, 보아하니 앞으로도 책깨나 읽어야 할 것 같은데, 게으름 부리지 말고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공부해 두라고.”
“……?”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황자는, 은회색 안광을 빛내며 잠시 마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또다시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내뱉었다.
“아직은 인원이 그리 많지는 않군. 저들이 다는 아닐 테니까, 일단 여기서 한차례 정리하고 가는 게 좋겠어.”
“넷-?”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지른 21호는, 곧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잠깐만요! 정신 나가셨습니까? 더는 위험한 짓 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이라도 어서 돌아갑시다, 저하.”
“거참. 자연스럽게 불경스러운 소리를 지껄이는 녀석일세.”
황자는 뚱한 얼굴로 21호를 노려봤다.
“대체 뭐가 문제야? 놈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처리하면 일이 훨씬 쉬워질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면 그런 결론에 이릅니까? 저들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우리가 도망칠 수 있는 기회가 아닙니까?”
21호도 슬슬 마을을 돌아다니는 암살자들의 기척을 제대로 감지할 수 있었다. 얼핏 느껴지는 인원들만 해도 벌써 십 수 명.
그나마도 오러 은폐를 펼치지 않은 인원이 그 정도다. 막상 마을 안으로 쳐들어가면 얼마나 많은 암살자들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오러 은폐를 완벽하게 펼친다고 해도, 유령이 아닌 이상 어느 정도는 위화감을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저곳에 있는 자들은 감각이 지극히 예민한 암살자들이 아닙니까? 한정된 공간 내에서 움직이는 한, 결국은 누군가가 먼저 우리를 발견할 수밖에 없어요!”
“유령?”
“아니면 데카론 나이트를 데려오든지요. 어쨌거나 우리끼리 움직이는 건 불가능합니다.”
한데 21호의 단호한 만류에, 황자가 뭔가 기발한 생각을 떠올린 듯 반짝, 눈을 빛냈다.
“유령! 잠깐만, 그거 정말 좋은 방법인데? 마침 나한테 쓸 만한 것들이 좀 있지.”
“…네?”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보지. 자넨 혹시 독실한 주신의 신자야?”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21호는 일단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뇨. 저와 같은 일을 하는 이들은 대개 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 좋아. 그럼 이단 재판부로 출두해서 쓸데없는 소리를 떠들 일은 없단 말이군.”
혼자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인 황자가, 옷깃을 뒤져 화려한 아뮬렛 하나를 끄집어낸다.
일견 델크로스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세공 방식은 아니었다. 동그란 구슬들이 여럿 박혀 있는 기묘한 디자인.
‘저걸로 뭘 하려는 거지?’
한데 그 순간, 그들의 주변에 이변이 일어났다. 갑자기 공기가 싸늘하게 내려앉더니, 바닥으로부터 불길한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
슈우우우우…….
시커먼 안개는 두 사람의 몸을 가리고, 이내 그들이 숨어 있는 바위마저 완벽하게 뒤덮어 버렸다.
“저하……!”
21호는 당황하여 안개를 헤치고 튀어 나가려 했다. 그러다가 여전히 침착하기 그지없는 황자의 얼굴을 발견하곤, 흠칫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건, 모레스 황자의 소행이구나!’
그러고 보니 짐작 가는 바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3황자를 둘러싸고 고위 사제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던 흉흉한 소문.
하지만 지금껏 21호는, 로건 황자를 차기 성황으로 추대하려는 이들이 퍼뜨린 정략적 음해일 거라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겨 왔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 안 되잖아? 신의 대리자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신성력을 가진 폐하의 아들이다. 한데 어떻게 그를 악마와 연관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바로 이 순간, 21호는 자신의 안일했던 판단을 뉘우칠 수밖에 없었다.
스산하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검은 안개가 한데 뭉치며 이윽고 기이한 형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저 불길한 것이 삿된 존재의 증거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음?”
한데 뭔가 생각대로 되지 않은 건지, 황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침내 안개를 헤치고 그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악마도 괴물도 아닌, 그저 구겨진 검은 양탄자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긴 사제복을 입은 채 앞으로 엎어진 사람의 형상이란 것을, 21호는 황자가 그를 툭툭 건드리기 시작해서야 겨우 알아챌 수 있었다.
“헤이즈. 이봐, 헤이즈!”
황자가 유령의 옷깃을 붙잡고 열심히 흔들었지만, 그럼에도 검은 양탄자는 요지부동이었다.
[…….]
“이놈이 갑자기 왜 이래? 왜 아예 정신을 못 차리는 거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잠시 그를 내려다보던 황자가, 또다시 아뮬렛을 만지작거렸다.
“아깝다. 저렇게 모여 있는 놈들에게는 마법사의 광역기가 딱이었는데. 뭐, 어쩔 수 없지. 급한 대로 벨린다라도 불러서…….”
솨아아아아…….
또다시 어두운 군청색의 안개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건장한 체구를 지닌 전사의 형상이었다. 정확히는 튼튼한 갑주를 입은 채 하늘을 향해 대자로 뻗어 있는, 강한 듯 강하지 않아 보이는 전사.
“뭐야? 둘이 무슨 일 있었나? 이놈들이 왜 다 이 모양이래?”
당황한 듯 전사를 툭툭 걷어차던 황자가, 결국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에휴…. 내 이럴 줄 알았어. 필요 없다고 할 때는 줄기차게 엉겨 붙더니, 막상 써먹으려고 하면 또 이렇게나 쓸모없단 말이야.”
아마도 헤이즈나 벨린다가 들었다면, 억울하고 원통하여 피눈물을 쏟아 냈을 법한 발언이었다.
그때 황자의 망토 아래에 숨어 있던 불꽃이 잽싸게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뭔가를 말하려는 듯 그의 머리 위를 빠르게 맴돌기 시작했다.
“아냐, 안 돼. 불 지르지 마.”
화르륵!
무슨 말이 오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령은 화가 난 듯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아, 안 된다니까! 들키지 않고 조용히 파고들어야 하는데, 괜히 들쑤셔서 놈들을 한꺼번에 튀어나오게 만들 셈이야?”
그러자, 후두두둑!
이번에도 뭔가 불만스러운 듯, 정령이 마구잡이로 흩뿌리는 불똥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이 속에 숨어 있어.”
그렇게 불꽃을 억지로 후드 안으로 밀어 넣은 다음, 황자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좀 쉽게 가 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우리끼리 최대한 빠르게 정리해 가는 수밖에.”
“……!”
아아, 그래. 결국은 맨몸으로 저들의 소굴에 뛰어들겠다는 건가!
‘절대 무리입니다!’
하지만 21호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황자를 말릴 수 없다는 사실 역시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대거를 뽑아 들며 입술을 슬쩍 깨물자, 황자는 암살자로부터 빼앗은 스틸레토를 빙글 돌려 잡으며 21호에게 눈짓했다.
“자, 가자.”
Chapter 155: Chapter 455
Chapter Text
455. 카야의 숨결 (4)
역시 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어.
발소리를 죽여 암살자들을 향해 다가가는 와중에도, 21호의 머릿속은 치열하게 고뇌를 이어갔다.
‘아직, 아직은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모레스 황자를 말려야…….’
‘하지만 이제껏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했잖아? 역시 나 혼자서라도 폐하께 보고를 드렸어야…….’
‘아냐, 이미 이 일은 내 재량을 까마득히 벗어나고 말았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일이 틀어지더라도 황자의 곁에서나마 최선을 다해야…….’
그러다가 21호는, 어느새 자신이 모레스 황자에게 작전 주도권까지 자연스레 넘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새삼 당황했다.
“…….”
아아, 그래.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몇몇 기술에 천재적인 성취를 보였다고 해도, 그것들이 황자의 모자란 경험을 대신해 주지는 못할 터.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이제부터는 정식 훈련을 받은 자신이 앞장서야만-
‘저쪽.’
사사삭.
하지만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도, 21호의 발은 황자의 손짓에 따라 또 다른 엄폐물로 착실하게 이동하는 중이다.
‘잠깐 정지.’
‘…….’
그렇게 모레스 황자의 뒤를 열심히 따라가면서, 21호는 아까부터 느껴지던 묘한 기시감의 실체를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었다.
이건 마치, 언젠가 베테랑 선배 정보원의 뒤를 따라 공동 임부를 수행하던 때와 같은 익숙함이 아닌가?
‘아니, 아니야. 그것보다는…….’
어쩌면 훨씬 오래전, 아마도 그가 키케였던 시절부터 뼛속 깊이 새겨 두었던 행동 양식일지도 모른다.
-뭐? 서쪽 산맥으로 들어가자고? 너 미쳤냐, 바트?
-우리에게는 짐도 딸려 있다고! 이 인원으로는 해수를 만나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지금 왕당파 추격자들을 피하겠다고 자진해서 해수들의 소굴로 굴러들어 가겠다는 거냐?
당시 길길이 날뛰는 애스트로스 용병단 사람들을, 단 한마디로 잠재워 버렸던 소년.
-내 예감에는 그쪽이 훨씬 안전하다. 장담할 수 있어.
예감.
그 무렵의 성황을 조금이라도 알고 지내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불가해와 부조리를 뒤덮고도 남음이 있는 마법의 단어.
그리고-
-걱정하지 마라, 엔리케. 넌 짐 따위가 아니라, 우리 일행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모두가 앞다퉈 지켜줄 테니 넌 그저 내 뒤만 잘 따라오면 된다.
-…응!
그런 소년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던 자신.
그날 키케는 홀린 듯 바트를 따라 서쪽 산맥으로 향했고, 마침내 내전이 막바지로 접어들며 한층 어수선하던 오르토나의 국경을 무사히 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어째서인지 21호는 오랜만에 그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맞아. 생각난다. 꼭 예전의 폐하를 따르는 것 같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떠올린 21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휙휙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내가 드디어 완전히 미쳐 버린 건가?
“……!”
바로 그때, 지붕 위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암살자 하나가 21호를 발견하곤 움찔 몸을 떨었다. 황자보다 멀리 있는 떨어져 있는 그를 먼저 특정했다는 것은, 두 사람의 오러 은폐 숙련도가 그만큼 차이가 난다는 의미이리라.
깨달음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날린 단도는 이미 허공을 날고 있었다.
휘익- 푹!
단검이 시린 달빛을 반사하며 놈의 울대에 똑바로 처박힌다.
그르르륵…….
목소리를 봉쇄당한 암살자의 몸이 피가래를 뿜어 내며 천천히 허물어졌다.
“휴우…….”
늦지 않게 암살자를 처리했다는 안도감에 젖은 것도 잠시-
쐐액-!
갑자기 모레스 황자가 앞으로 달려 나가며 어딘가로 다급하게 스틸레토를 날렸다. 아직 자신의 감각 범위에는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던 방향이었다.
‘갑자기?’
그 궤적을 눈으로 쫓자-
푹! 멀리서 순찰 중이던 암살자가 졸지에 뒤에서 경추를 관통당하며 풀썩, 수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한데 21호가 놈의 최후를 온전히 눈으로 담기도 전에, 황자는 이미 또다시 어딘가로 몸을 날리며 팔을 뻗고 있었다.
턱! 울대에 단검을 맞고 추락하던 암살자가 깨진 도기들 위로 떨어지기 직전, 모레스 황자는 겨우 그의 몸을 받아 냄과 동시에-
휘익!
놈의 품에서 또 다른 스틸레토를 뽑아, 돌아보지도 않고 그것을 등 뒤로 날렸다.
푹!
저 멀리, 건물 그림자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너머로, 스틸레토가 물컹한 무언가에 틀어박힌 듯한 둔탁한 충격음이 들렸다.
털썩!
절명하여 오러 은폐가 풀리자, 21호는 겨우 그곳에도 또 다른 암살자가 숨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
멍하니 일련의 과정을 살피던 21호는, 그제야 황자의 행동을 모두 이해했다.
자신이 죽였던 암살자. 그가 바닥에 떨어지며 도기를 깨뜨리는 순간, 저 두 사람의 암살자들이 틀림없이 자신들의 위치를 발견했으리라는 사실을.
21호가 우발적으로 암살자 하나를 죽이는 동안, 황자는 그로 인해 벌어질 연쇄적 영향을 단숨에 파악하고서 동시에 세 방향을 향해 손을 쓴 것이다.
“침착해, 21호.”
모레스 황자가 암살자의 몸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히며 주의를 준다.
“네, 저하.”
무심코 공손하게 대답한 21호는 순간 스스로의 태도에 위화감을 느끼며 흠칫 몸을 떨었다. 성황의 다른 뛰어난 자식들, 심지어 가엘 베르트란을 제치고 최연소 소드 마스터라 불리는 로건 황자의 앞에서조차 이렇게까지 자신을 낮춘 적이 없건만.
“아예 들키지 않는 건 역시 무리겠어.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다고. 조금 소란이 일더라도 이대로 둘이서 중앙을 돌파하자.”
그의 목소리는 전과 다름없이 담담했지만, 21호는 황자가 어쩐지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왜…….”
“예감이 좋지 않아.”
예감. 어떠한 상황에서도 21호를 납득시키는 마법의 단어.
넋을 잃고 황자를 마주 보자,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은회색 눈동자가 21호를 똑바로 응시하며 묘한 빛을 뿜었다.
“어서 이곳을 정리하고 다샤를 찾아야겠어.”
* * *
마침 같은 시각, 공교롭게도 다샤는 정말로 커다란 위기에 빠져 있었다. 정교하게 좁혀지는 포위망에 갇혀 옴짝달싹도 못 하는 쥐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이게 벌써 며칠째야?’
부서진 담벼락에 기댄 채, 다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추적자들을 돌아보았다. 정제된 움직임을 보이며 천천히 다가오는, 일체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복면의 암살자들을.
‘아무리 도망쳐도 따돌릴 수가 없네. 저것들이 정녕 사람인가?’
다샤를 쫓는 이들은 대단히 숙련된 암살자들이었다. 저들 하나하나가 각각 원숭이 망루의 정예 요원에 맞먹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으니까.
한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놈들을 열심히 관찰을 해 봐도, 도통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낌새가 없었다는 것.
체형이나 기척들이 수시로 바뀌는 걸로 봐서는, 시간에 따라 인원이 정기적으로 교체되는 것 같기는 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저들은 입을 열기는커녕, 일체의 신호도 주고받지 않는 것이다.
굳이 신호탄을 쏘거나 표식을 남기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의 위치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교대를 하게 되더라도 일언반구 없이, 그저 그림자가 움직이듯 스르륵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덕분에 다샤는 요 며칠간 계속해서 같은 암살자들에게 쫓기는 듯한 오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착각이겠지. 너무 피곤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착란을 일으키는 거야.’
다샤는 이를 악물고는 손으로 볼살을 세게 비틀었다.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으면, 그대로 정신을 잃고서 바닥으로 허물어질 것만 같았으니까.
무리도 아닐 것이다. 잠도 자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정체 모를 암살자들에게 둘러싸여 도주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수일째에 이른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단련을 거듭한 몸이지만, 이쯤 되면 이미 신체와 정신의 한계를 아득히 벗어난 상황.
‘빠져나가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설령 운 좋게 빈틈을 만들더라도 몸이 제대로 반응할지는 미지수다. 수일간 쉬지도 않고 오러 은폐를 반복하다 보니, 아예 몸 안의 오러가 고갈될 지경이 이른 것이다. 이제는 일부러 오러 은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부스럭.
다샤는 품속에 고이 숨겨둔 독단을 꺼내 잇새로 밀어 넣었다. 언제든 어금니로 깨부숴 늦지 않게 독을 삼킬 수 있도록.
그렇게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벽 너머의 기척에 신경을 집중했다.
‘저놈들은 분명 ‘카야의 숨결’ 소속이겠지. 북부에서 서서히 몰락해 가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직까지도 저런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니…….’
언젠가, 여러 암살 조직들이 대륙의 판세를 좌지우지하던 때가 있었다.
성황의 권위가 예전만 못하고, 제국의 간섭을 벗어난 나라들이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며 도약하던 시절.
끊임없는 정쟁과 암투 속에서 사람들의 욕망을 실현하고 견인함으로써 점차 몸집을 키워 나간 것이 바로 이들 암살 조직들이다.
하지만 가장 치열하게 정쟁을 일삼던 오르토나가 내전으로 멸망하고, 뒤이어 전에 없이 강력한 황권을 지닌 17대 성황이 제위를 거머쥐면서, 이들은 점차 쇄락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에 이르러 제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암살 조직은, 길드에 흡수되며 제국 중앙정보부의 하위 조직으로 전락해 버린 [오베론의 손], 그리고 북부로 완전히 밀려나 황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카야의 숨결] 정도일까.
‘하지만 암살 조직은 결국, 부리는 자들 없이 자체적으로 번성할 수는 없어.’
자연히 이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카야의 숨결’ 역시 홀로 자생할 수 있는 집단이 아닐진대, 대체 어떻게 아직까지 멀쩡하게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
저벅.
그때 유난히 커다랗게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사냥감이 완전히 궁지에 몰린 것을 알고, 아예 기척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 대범한 발소리가.
“정말 끈질기게도 버텼네. 이렇게까지 도망 다니며 시간을 끌다니, 누군지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은데.”
추적이 시작된 후로 처음 듣는 상대방의 목소리. 아마도 저들을 통솔하는 우두머리쯤 되는 것 같다.
다샤는 혀로 독단의 윤곽을 더듬으며, 새로운 목소리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
한데 이상하게도 그 말에 대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 그저 저 내키는 대로 혼자 떠드는 여자의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
“저쪽에 몰아 뒀다고? 그래, 다들 잘 했어.”
“…….”
“아니, 됐어. 거기서 정지. 너희들은 여기서 대기하도록 해.”
귀를 쫑긋 곤두세우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샤는 문득 의아해졌다. 복면인들은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왜 마치 서로 대화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게다가 저 목소리, 분명 어디선가 들은 적이…….’
바로 그때, 지척에 다가온 상대의 모습이 다샤의 눈에 온전히 들어왔다.
마침 구름을 벗어나 환하게 드러난 달빛 아래, 검은 두건을 쓴 허여멀건 얼굴이 드러난다. 완전히 밀려 있는 민짜 눈썹과, 그 아래에서 형형하게 빛을 발하는 안광.
다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아무리 봐도 상단주가 구두쇠라니까요.
맞아. 저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예전에 밀로 상단에 함께 고용되었던, 붙임성 좋은 민짜 눈썹의 여인.
-사브리나, 너어어! 절대 잊지 않겠어! 감히 내 믿음을 배신하다니이이이이!
오러 은폐에 무척이나 능한 데다, 헤어지는 순간까지 단도를 주고받으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었지.
올리비에. [카야의 숨결]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정예 암살자.
“…이게 누구야?”
올리비에 역시 다샤를 알아본 듯했다. 휑한 미간 아래 유난히 두드러지는 눈매가 이내 샐쭉하게 가늘어진다.
“야아! 오랜만이야? 그동안 정말 보고 싶었다고!”
그렇게 장난스러운 안부를 내뱉은 얄팍한 입술이, 이내 긴 호선을 그리며 쭉 찢어진다.
“사브리-나!”
다샤는 완전한 끝을 예감했다. 그녀는 어금니로 독단을 지그시 짓누르며, 모레스 황자에게 마음속으로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했다.
‘저는 결국 여기까지였습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저하!’
그렇게 막 독단을 깨물려 했을 때였다.
[기다려.]
뇌리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란 다샤가 고개를 들자, 눈앞에 웬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검은 베일로 얼굴을 뒤덮은 기괴한 차림의 여자였다.
“……?”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다샤가 눈을 비비며 여인을 바라보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그 행동의 의미가, 본래라면 들리지 않을 그녀의 목소리가, 다샤의 뇌리에 또다시 명확하게 울려왔다.
[그러지 마.]
“당신은……?”
바로 그때.
“잡았~다!”
퍼억!
머리에 가해진 둔탁한 충격과 함께, 순식간에 다샤의 의식이 암전했다.
Chapter 156: Chapter 456
Chapter Text
456. 카야의 숨결 (5)
피이- 피이익-!
작은 호각 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퍼져 나간다.
인간의 가청주파수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희미한 소음이었지만, 적어도 근거리의 암살자들이라면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는 신호.
소리를 들은 암살자들이 일제히 방향을 바꿔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몇 차례나 반복된 일이었다.
‘젠장……!’
21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제대로 파고들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놈들에게 몰이를 당하는 꼴이다.
쉽게 들킬 수준의 ‘오러 은폐’는 아니라고 자부했는데, 대체 누가 저들에게 우리 위치를 알리고 있는 거지?
‘게다가 생각했던 것보다 인원이 많아. 대부분이 오러 은폐를 사용하고 있을 걸 감안해야 했는데!’
낭패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놈들을 모두 해치우기는커녕, 되레 포위망에 갇혀 꼼짝없이 역공을 당할 참이다.
한데 그때, 21호의 바로 옆에서 또다시 김빠지는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픽- 피익- 픽!
문제라면 호각을 불고 있는 주체가 암살자들이 아니라, 이곳에 난입한 침입자 본인이라는 데 있겠지.
‘헉!’
21호는 기겁을 하며 모레스 황자로부터 호각을 빼앗았다.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놈들에게 대놓고 우리 위치를 알려 줄 셈입니까?’
어째 매번 죽은 암살자들의 품을 열심히도 뒤적거린다 했지. 이렇게 대놓고 호각을 불어 제낄 걸 알았다면 진작에 말렸을 텐데!
‘괜찮아.’
한데 정작 사고를 친 황자는 태평한 얼굴이었다.
‘놈들이 주고받는 신호들을 대충 분석해 봤는데, 암호 체계가 그렇게까지 복잡하지는 않은 것 같아. 예를 들면 처음은 방위로 시작하는 거 같은데, 대충 딴- 따라다라- 따단-’
‘아, 집어치우십쇼!’
21호는 다급한 상황에서 뜬금없이 괴상한 리듬을 흥얼거리는 황자에게 버럭 화를 냈다.
‘설마 몇 가지 신호만 듣고 저들의 암호 체계를 파악했다는 헛소리를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암살 집단끼리 셀 수 없는 충돌을 빚어 왔던 정쟁의 역사 속에서, 상대측의 암호를 먼저 파악하려는 시도가 왜 없었겠는가.
21호 역시 [오베론의 손]에서 암호의 발달 과정과 해독 방법에 대해 자세히 교육받은 바 있다.
하나 아무리 단순한 구조라고 한들, 일부 규칙성만을 가지고 변화무쌍한 암호 체계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그렇겠지만…….’
한데 모레스 황자는 여전히 자신만만하게 마을 중앙으로 몸을 돌린다. 자신의 행동이 틀렸다고는 요만큼도 걱정하지 않는 태도였다.
‘적어도 저들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신호를 보냈는지 정도는 정확히 기억할 수 있지.’
‘…뭐라고요?’
‘이미 들은 신호를 똑같이 재현할 수 있다는 뜻이야. 두고 봐. 곧 놈들 사이에서 교란이 일어날 테니까.’
‘……?’
21호가 반신반의하고 있는데, 잠시 후 정말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우루루 이쪽으로 몰려오던 암살자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방향을 비틀어 마을 입구 근처로 집결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 가자!’
가볍게 땅을 박찬 황자와 21호는, 부서진 건물들을 크게 우회하며 또다시 성공적으로 암살자들의 뒤를 점할 수 있었다.
공기저항을 거의 받지 않는 가느다란 비수들이 내쏘아지고-
“큭!”
“커억!”
또다시 암살자 서넛이 단번에 유명을 달리한다.
찰나의 순간 가능한 많은 암살자들을 해치운 그들은, 위치가 특정되기 전에 재빨리 건물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하핫! 것 봐. 내가 뭐라 그랬어?’
유쾌하게 소곤거리는 황자의 얼굴이 답지 않게 천진해 보인다.
‘…….’
21호는 입을 닫고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마치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피이이이이-!
그때, 길게 늘어지는 호각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이번에는 21호도 그 의미를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신호 체계를 완전히 무시한 순수한 경고음이었으니까.
“아, 이런.”
모레스 황자가 조금 맥 빠진 표정으로 마지막 남은 스틸레토를 뽑아 들었다.
“생각보다 대응이 빠르잖아? 아무래도 저쪽에 대단한 녀석이 하나 있나 봐. 그래도 몇 번은 더 써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좀 아쉽다.”
그의 말대로 이후부터 더는 호각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기척을 쫓는 암살자들의 개별적인 움직임만이 느껴질 뿐.
하긴, 이제는 오러 은폐로 기척을 완전히 감추기에, 그들은 너무나도 마을 중앙으로 깊숙이 파고든 뒤였다.
건너편 골목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던 암살자가-
“억?”
황자가 쏘아 낸 스틸레토에 맞아 뒤로 넘어간다. 정확히 미간의 급소를 파고든 무서운 투척술이었다.
휘익-!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앞뒤에서 연이어 두 명의 암살자들이 튀어나왔다.
하나가 오른쪽에서 황자의 목을 노리고 단검을 휘두르는 동안, 조금 떨어져 있던 다른 하나는 그와는 반대편, 즉 황자의 왼쪽 어깨를 향해 무기를 쏘아 냈다.
만일 요행으로 첫 공격을 피하더라도, 그 회피 동작으로 인해 반드시 두 번째 공격만은 적중될 수 있도록.
“저……!”
21호는 황자가 절대 피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한데 그 순간, 눈앞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고개를 살짝 비틀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단검을 비껴 낸 황자가, 관성에 따라 몸을 빙글 돌리며 뒤쪽에서 날아온 스틸레토를 세차게 걷어찬 것이다. 귀신 같은 몸놀림이었다.
“큭?”
궤도가 크게 비틀린 스틸레토는, 어처구니없게도 단검을 휘둘러 온 암살자의 심장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
놈이 눈을 부릅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본다.
하지만 그때, 이미 황자는 놈을 내버려둔 채 쏜살같이 뒤쪽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빠직!
검집째 휘둘러진 호두까기가 암살자의 팔뼈를 박살 내는 소리가 울린다.
엉겁결에 팔을 들어 공격을 막아 낸 놈이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몸을 채 가누기도 전-
뻐억!
재차 횡으로 날아든 호두까기가, 암살자의 목 줄기를 건물 벽으로 매섭게 메다꽂았다.
꺼어어…….
바람이 빠지는 괴상한 소리와 함께, 암살자의 눈이 희게 뒤집힌다. 순식간에 목덜미가 불룩 부풀어 오르는 걸 보건대, 내부에서 경동맥이 파열되고 경추 역시 가루처럼 바스러졌으리라.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절명한 암살자의 몸이 옆으로 완전히 쓰러지기 전에, 황자는 놈의 품에서 또다시 몇 개의 스틸레토를 살뜰하게 훔쳐 냈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어찌나 빠르고 매끄럽게 이어지는지, 21호는 두 눈으로 빤히 보고도 그 광경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잠깐만. 한데 어째서 갑자기 저하에게 공격이 모조리 집중되는 거지?’
근처 오두막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암살자의 목을 베어 내며, 21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황자를 돌아보았다.
그 사이에도 황자는 여기저기 훔친 스틸레토를 쏘아 내며 착실하게 암살자들의 수를 줄여 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21호는, 뒤늦게 모레스 황자가 더는 오러 은폐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크게 당황했다.
‘설마, 일부러 저러는 건가?’
일일이 찾아가서 해치우느니, 아예 상대가 이쪽으로 달려오게 만들어 시간을 절약하겠다는 거야?
‘하지만 저들은 제대로 훈련된 암살자들이다. 저하와의 실력 차를 깨닫게 되면 더는 지금까지처럼 정직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거야.’
21호의 우려대로였다.
핏핏핏!
언제 그들의 위치를 특정했는지, 하늘에서 날카로운 스틸레토가 쏟아져 내린다. 건물 위로 모여든 암살자들이 일제히 아래를 향해 비수를 흩뿌린 것이다.
21호는 무너진 담벼락을 엄폐물 삼아 재빨리 몸을 낮췄다.
‘……!’
그러다가 그는, 황자가 비수들이 날아드는 골목 한복판에 그대로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기함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퍼버버벅!
작은 목표물을 향해 세차게 날아든 스틸레토들이, 한 사람의 몸뚱이에 모조리 가시처럼 틀어박혔다. 정확히는 황자가 아닌, 황자가 끌어올린 동료의 시체 위로.
암살자 특유의 호리호리한 체형이었으나, 어린 소년이 제 한 몸 숨기기에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저……!’
이윽고 비처럼 쏟아지던 비수가 멎자-
씨익.
가볍게 입꼬리를 비튼 모레스 황자가, 알아서 한곳으로 모여든 스틸레토들을 여유롭게 회수했다. 마치 다 자란 농작물을 추수하는 농부처럼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렇게 무기들을 챙긴 뒤, 그는 21호에게 가볍게 눈짓했다.
‘그럼 나 먼저 간다.’
‘네? 저하! 저하? 잠시만……!’
뒤늦게 의미를 알아들은 21호가 다급하게 팔을 휘저었지만, 황자는 이미 암살자의 몸을 방패처럼 치켜들고 질주를 시작한 뒤였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소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근력. 그가 이미 자신의 오러를 전신의 근육에 자연스럽게 흘리고 있다는 증거일 터였다.
파파팟!
또다시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리는 비수의 소나기. 그 한가운데로 대담하게 뛰어든 모레스 황자는 반쯤 부서진 처마 아래, 즉 놈들의 사각지대에 이르자마자 너덜너덜해진 방패를 집어던졌다. 그러곤 한층 가벼워진 몸으로 벽을 박차며 위로, 위로 솟구쳐 올랐다.
컥! 끄윽! 으억!
황자가 지붕 너머로 모습을 감춘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위에서 또다시 짧은 단말마들이 연이어 들려온다. 어느 순간 머리 위로 쏟아지던 비수들은 완전히 멎은 상태.
‘…….’
21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지붕 위에서 펼쳐지는 황자의 일대 활극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밝은 달빛 아래에서, 오직 살상만을 위해 수행되는 그 거칠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들을.
‘…마치 그 사람 같군.’
동시에 21호는, 뇌리에 아로새겨진 기억들과 현재의 광경 사이에 존재하는 선명한 간극을 느끼며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한, 완전히 다르기도 하다.’
어쩌면 자신은, 여태껏 모레스 황자를 자신이 잘 아는 누군가와 동일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불합리한 지시에도 저항하지 못하고, 그의 행동에 속절없이 휘둘린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황자가 탁 트인 장소에서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니, 그제야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의 전투 방식을 제대로 비교할 수 있었다.
찬물을 끼얹은 듯, 머릿속이 서서히 맑아졌다.
‘바트는, 폐하는 절대 저런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았겠지…….’
그럼에도 지금 황자가 보여주는 저 모습들이, 기억 속의 소년 용병 못지않게 경이롭다는 것만은 주지의 사실이다.
확연한 차이점으로 인해 오히려 두 사람이 닮았다는 것을 느끼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재능, 혹은 혈통. 어쩌면 그보다 한층 근본적인,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인 무언가.
이제야말로 그들과 자신 사이에 놓인 까마득한 간극을 직시하게 된 21호는, 무척이나 착잡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 * *
핏핏!
어디선가 또다시 스틸레토가 날아든다.
하지만 처음과 달리 부쩍 힘이 빠진 공세.
모레스 황자가 가볍게 그것들을 쳐 내는 동안, 방향을 특정한 21호가 재빨리 달려들어 놈의 목덜미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끅……!”
단말마조자 지르지 못하고 무너지는 암살자를 걷어차며, 21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대부분은 정리한 것 같은데…….’
모레스 황자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더는 주변을 경계하지 않고 한 건물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암살자들이 대거 쏟아져 나온 바로 그 건물이었다.
그의 뒤를 따르며, 21호는 새삼 이런 의문을 품었다.
‘저렇게 싸우는 법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지?’
그가 알기로 모레스 황자는 여느 귀족가의 자제들처럼 황실 기사단 표준 검술을 익혔다. 전형적인 기사들의 교육 코스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저 거칠고 자유분방한 전투 스타일이나 주변 지물을 활용하는 넓은 시야가, 아무리 봐도 평범한 기사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내 전력 역시 확실히 파악하고 이를 감안해서 움직이고 있어.’
이 모든 불가사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나이에 비해 실전 경험이 대단히 풍부하다는 것.
‘한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저 황궁에서 고이 키워진 화초가 아니었나?’
한데 그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황자가 뒤를 돌아보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다시 봤다고, 21호. 너, 나이에 비해 제법 실전 경험이 많구나?”
“…네?”
“칭찬하는 거야. 애송이인 줄 알았는데, 솜씨가 제법이잖아?”
“…….”
21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야말로 자신이 할 말이 아닌가? 나이 지긋한 선배가 후학을 칭찬하는 듯한 저 꼬락서니는 대체 뭐냔 말이다!
한데 그 모습이 또, 유난히 어른스럽던 언젠가의 소년 용병을 떠올리게 만든다.
으득.
괜히 기분이 상한 21호가 삐딱하게 대꾸했다.
“…애송이라니, 그게 저하께서 하실 말씀입니까?”
“뭐야? 갑자기 눈초리가 대단히 불손해졌는데?”
“그럴 리가 있습니까?”
둘은 티격태격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수상한 인기척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충 돌아보고 테레로 돌아가는 게 어떠십니까?”
21호의 제안에 황자가 고개를 저었다.
“응? 아냐. 그래도 이곳에서 조금 더 기다릴 거야.”
“어째서입니까?
“그야 썩 좋지 않은 ‘예감’이…….”
21호의 눈이 가늘어지자, 황자가 뚱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쳇! 이제는 안 통하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이 저 말에 유난히 약하다는 걸, 대체 언제부터 파악하고 있었던 걸까?
21호는 정신을 다잡았다.
“그건 절대 안 될 말씀입니다. 저도 더 이상의 일탈을 방관할 수는 없으니, 어서 테레로 돌아갑시다.”
“그러니까 너 말이야, 태도가 갑자기 불경스러워졌다고.”
“착각이시겠지요. 어디까지나 저하의 안위를 염려하는 것뿐입니다.”
“그게 아닌 거 같은데?”
그렇게 대꾸하던 모레스 황자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는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뭔가가 석연치 않은 듯한 표정.
“왜 그러십니까?”
이미 황자의 기감이 자신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인정한 21호가 덩달아 긴장하며 물었다.
“사실 아까부터 쭉 신경 쓰이는 게 있었지.”
소년이 나직하게 목소리를 죽이며 소곤거렸다.
“마을 여기저기서 호각 소리가 들리는데, 신호에 반응하는 녀석은 있어도 정작 그걸 부는 녀석의 기척만은 유난히 흐릿했단 말이야.”
“…….”
“분명 평범한 실력은 아니었을 거야. 그런데 아직까지 여기서, 그 정도로 대단한 놈은 만나지 못했거든?”
순간 21호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저 황자의 기감마저 피해 나갈 정도로 신출귀몰한 암살자가, 아직도 이 근처를 맴돌고 있다는 말인가?
“그럼 그자를 마지막으로 감지한 때가…….”
21호가 막 질문을 던졌을 때였다.
콰직!
갑자기 얇은 나무 벽이 부서지며, 누군가의 신형이 번개처럼 솟구쳤다. 검은 잠행복을 입은 또 다른 암살자다.
“……!”
21호가 채 그를 눈으로 쫓기도 전에-
챙!
어느새 검집에서 뽑혀 나온 호두까기가, 놈이 휘두른 검과 맞부딪히며 흰 불똥을 튀겼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하! 조만간 모습을 보일 줄은 알았지만-”
기기긱-
놈과 잠시 힘겨루기를 하던 황자가, 입꼬리를 비틀며 사나운 웃음을 흘렸다.
“어째 말 꺼내기가 무섭게 튀어나오냐. 너 말이야, 평소 참을성 모자란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냐?”
Chapter 157: Chapter 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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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 카야의 숨결 (6)
챙! 채챙! 챙!
눈 깜짝할 사이에 수차례의 공방이 오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21호가 미처 검의 궤적을 눈으로 다 쫓지 못했을 정도.
‘…양검술?’
그저 폭풍 같은 움직임 속에서 암살자의 무기를 겨우 파악했을 뿐이다. 만일 저자가 이쪽을 향해 먼저 달려들었다면, 21호는 아마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급소를 내어 주었으리라.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모레스 황자 역시 그렇게 판단한 모양이었다.
“21호, 물러서!”
21호는 순순히 뒷걸음질 쳤다.
두 사람이 뿜어 내는 날 선 기세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피부가 다 저릿할 지경. 한계치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 속에서, 자신의 섣부른 움직임이 과연 누구에게 해로 돌아갈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카앙!
그때, 세차게 검을 맞부딪친 황자와 암살자가, 반동에 저항하지 않고 방의 양 끝으로 쭉 밀려났다.
“…….”
상대에게 이렇다 할 피해를 입히지 못한 채, 둘은 재차 격돌하는 대신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을 가지려는 모양.
그리고 21호는, 그제야 처음으로 습격자의 모습을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상대는 양손에 짧은 검을 거머쥔 여자였다. 조각처럼 무표정한 얼굴과 암살자 특유의 검은 잠행복 아래로, 잘 단련된 날렵한 신체 윤곽이 보인다.
오러 활성은 그리 강하지 않지만, 아마도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오러를 감추는 데 도가 텄다고 봐야겠지. 나름 정예 요원이라 자처하는 21호조차, 빤히 상대를 눈앞에 두고도 기척이 드문드문 흐려진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오러 은폐 능력은 최상급. 가장 이상적인 암살자라 일컬어지는 데카론 나이트의 경지에 거의 근접했다고 가정하고서 상대하는 것이 안전하리라.
거기까지 파악한 21호는, 새삼 저 여자의 공격을 남김없이 맞받아친 황자가 신기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군. 나이에 비해 너무 노련해 보여.’
그래. 겉으로 풍기는 기도나 분위기를 생각하면, 꼭 초기 번호를 부여받은 전설적인 선배들처럼 느껴진다.
반면에 여자의 얼굴은 지나치게 젊어 보였다. 오러 연공으로 젊음을 어떻게 유지한다손 치더라도,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저 낯짝은 또 뭐란 말인가. 눈을 씻고 살펴봐도 수많은 사선을 넘으며 실전 경험을 쌓은 이로는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모레스 황자 역시 암살자가 풍기는 위화감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신기하네. 오러 활용 자체는 대단히 능숙한 거 같은데, 그에 비해 육체에 쌓인 오러 층은 상대적으로 빈약해.”
“…….”
“브루노 단장처럼 멀쩡한 오러 층을 없애 버린 건 아닐 텐데.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황자의 밝은 회색 눈동자가 암살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이따금 동공 한가운데 기이한 붉은빛이 맴도는 듯도 했다.
21호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그의 시선은 암살자의 앳된 얼굴을 넘어, 말끔한 거죽에 감싸인 두개골 내부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염상 결정이 있잖아?”
씨익.
뭔가 명쾌한 답을 알아냈는지, 황자가 이를 드러내며 섬뜩한 미소를 흘렸다.
“설마 했는데 그거, 네 진짜 몸이 아니구나?”
“……!”
파앗!
21호가 그 말의 의미를 채 파악하기도 전에, 바닥을 박찬 여자가 흉흉한 기세를 흘리며 검을 휘둘러왔다.
까앙! 깡!
희끄무레한 빛을 휘감은 쌍검이 호두까기와 거세게 충돌한다.
전보다 한층 날카로워진 검격과 흉흉한 살기. 어쩐지 황자의 발언이 암살자의 심기를 크게 건드린 모양이었다.
화르륵!
이에 대항해 호두까기 역시 검붉은 불꽃에 휩싸이며 불타올랐다. 그리 쉽지 않은 전투를 이어왔음에도, 지금에서야 모레스 황자가 자신의 오러를 밖으로 내보인 것이다.
예상외의 강적으로부터 무기를 지키기 위한 조치였겠지만-
‘…불?’
21호는 어둠 속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는 생소한 형태의 오러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건물로 들어서기 전, 황자와 잠시 이런 이야기를 나누긴 했다.
-한데 저하, 왜 외기를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딱히 오러 은폐를 유지할 마음이 없다면, 차라리 오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쪽이 훨씬 수월했을 텐데요.
-음.
그때 황자는 난감한 듯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렇게 답했었다.
-사실은 말이지, 공식적으로 나는 아직 레지나에 머물고 있는 중이란 말이야.”
-그래서요?
물론 황자가 되도록 자신의 족적을 남기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것을 21호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손에 익은 호두까기는 아예 뽑지도 않고, 번거롭게도 회수한 스틸레토만을 줄기차게 활용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무기나 검법은 그렇다 치더라도, 굳이 오러까지 제한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근데 내 오러가 남기는 흔적이 너무 특징적이란 말이야. 이래봬도 고대 요정에게 엄청난 축복을 받았거든?
-…네?
그 말의 뜻을 21호는 지금에서야 이해했다.
황자의 걱정은 괜한 기우가 아니었다. 실제로 검을 주고받는 횟수가 잦아듦에 따라, 암살자의 매끈한 피부에 선명한 화상 자국이 새겨지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황자 쪽도 그리 멀쩡하지는 못했다. 오러를 두른 암살자의 쌍검이 스칠 때마다, 황자의 몸에도 가느다란 실선이 그어지며 붉은 핏물이 튀어 올랐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리라. 눈으로도 쫓기 힘든 속도의 초근접전인 만큼, 회피각 역시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실력은 그럭저럭 비등해 보이는데…….’
일견 여자 쪽이 공속 면에서는 월등해 보인다.
하지만 의외로 모레스 황자는 그녀의 장단에 쉽게 말려들지 않았다. 긴 검으로 대항하기에는 그리 편한 간격이 아님에도, 내어줄 곳은 내어주며 매번 적절하게 공격의 맥을 끊어 놓곤 했다.
거기다 황자의 저 심상치 않은 오러.
화르르륵!
시간이 흐를수록 거세게 불타오르는 괴상한 오러는, 그저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인간에게 내재된 본질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채재쟁! 챙! 챙!
그렇게 어지러운 잔영을 그리며 뒤얽히는 검들의 궤적을 쫓으며, 21호는 품속의 비수를 조심스레 만지작거렸다. 여의치 않으면 당장이라도 가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푸욱!
하지만 두 사람의 대결은 예상보다 빨리 결착이 났다. 갑작스레 거리를 좁힌 두 사람이, 있는 힘껏 서로를 향해 검을 내리꽂았으니까.
“……!”
호두까기의 검날이 여자의 가슴을 뚫고 삐죽 튀어나온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짧은 여자의 쌍검은, 황자의 겨드랑이 아래를 가볍게 스쳤을 뿐.
툭! 챙! 챙그랑!
힘 빠진 손에서 미끄러진 쌍검이, 차례로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음을 만들었다.
치이이익!
여자의 등에서 매캐한 연기가 솟아올랐다. 불꽃에 휩싸인 검날과 함께 가슴에 깊숙이 파고든 외기가, 내부를 진탕시키며 미친 듯이 날뛴다. 덩달아 살이 급격하게 타들어 가며 출혈이 조금씩 잦아들어 갔지만-
모레스 황자는 순순히 그 꼴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콰드드득!
갈빗대 사이에 끼인 검이 크게 비틀리며, 생뼈를 긁어 내는 무시무시한 소음이 들려왔다.
이윽고 황자가 여자의 옆구리를 크게 베어 내며 호두까기를 빼내자-
꿀럭, 꿀럭.
진탕된 심폐로부터 핏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암살자는 입에서 피를 토해 내며 실 끊어진 인형처럼 천천히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지독하군. 마지막 순간까지 신음 소리 하나 흘리지 않다니…….’
암살자의 눈이 천천히 빛을 잃어 가는 것을 확인한 21호는, 품에서 간단한 처치 도구를 꺼내들고서 황자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저하?”
“음.”
한데 황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쓰러진 암살자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전에 없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21호.”
“네, 하명하십시오.”
“그게, 실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너한테 미리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어.”
“…그게 뭡니까?”
21호는 괜스레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 불안은 곧 사실이 되었다. 연이어 황자의 입에서, 그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소리가 튀어나왔으니.
“실은 이 건물 아래에서, 아까부터 사람들의 희미한 기척이 여럿 느껴졌거든.”
“여럿…이요?”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긴장한 21호가 감각을 지하실 쪽으로 집중하고 있는데, 황자가 호두까기를 고쳐 쥐며 설명을 이어갔다.
“어, 그게 아마 오러 활성도가 비정상적으로 낮아서 그럴 거야. 그래서 난 그냥, 여기 놈들이 다 죽어 가는 민간인들이라도 몇몇 가둬 둔 건가 했지. 그랬는데…….”
“…….”
“방금 그중 하나가 갑자기 오러 활성도가 활발해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 같아.”
21호가 희미한 기척을 감지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리고 지금 엄청난 속도로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중-”
파악!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쯤 부서진 나무 벽에서 또 다른 암살자가 튀어나왔다. 짧은 양손 검을 손에 쥔, 잠행복 차림의 젊은 여자 암살자가.
채채챙! 채챙!
호두까기와 양손검이 또다시 미치듯이 얽혀 드는 가운데, 21호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다잡으려 애쓰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같은 사람?’
순간 21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아까의 암살자는 완전히 숨이 끊어진 채 구겨진 헝겊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뿐이다.
‘아니, 하지만 그럴 리가……!’
그저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비슷한 또래의 여자임은 분명하지만, 앞전의 암살자와는 체형도 다르고 기척도 미묘하게 다르다.
한데 이상하게도 21호는, 방금 전까지 황자와 격전을 벌이던 이가 되살아난 것만 같은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질감은, 직접 여자를 상대하는 황자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휙휙휙!
아까와 똑같은 궤적으로 쏘아져 오는 양손검을 가볍게 흘리며, 황자는 비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하! 어이가 없네. 염상 결정을 이용해서 계속 같은 사람을 돌려 써먹고 있었던 거야?”
“……?”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내뱉은 황자가, 갑자기 21호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21호! 지하다! 지하실 쪽을 찾아 봐!”
“네?”
“이 아래쪽에 뭔가가 있어! 일단 그걸 없애 버려야 한대!”
“아니, 없애 버려야 한다니, 대체 누가…….”
“잘 모르겠으면 일단 이 녀석을 따라 가든지!”
패앵!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황자의 망토 속에서 작은 불꽃이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지금껏 몸을 숨기고 있던 고대의 요정이었다.
붉은 불꽃은 21호의 머리 위를 두어 차례 맴돌더니, 이내 바닥 한쪽에 나 있는 좁은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작은 사다리가 걸쳐져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곳이 지하실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인 모양.
‘하지만 이대로 저하를 떠나도 괜찮을까?’
21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자잘한 상처가 늘어가고 있음에도, 황자는 조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고도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일까, 오히려 두 눈의 총기는 더욱 짙어지고 호두까기를 휩싸고 도는 불꽃 역시 갈수록 거세어진다.
“…….”
일단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판단한 21호는, 그를 뒤로한 채 어두운 지하실을 향해 훌쩍 몸을 날렸다.
* * *
지하는 완전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잠시 안력을 돋아 어둠에 적응한 21호는, 곧 멀리서 손짓하듯 흔들리는 요정의 불꽃을 발견하고서 바닥을 박찼다.
탁탁탁!
달리면서 본 지하의 구조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먼지 쌓인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옆에는 작은 방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으니까.
‘저 많은 암살자들이 숨어 있던 비밀 거점이다. 그리 이상할 것도 없지.’
그러다가 21호는, 이상할 정도로 희미한 기척들이 모여 있는 방 하나를 지나치게 되었다.
‘저하께서 감지했다는 것이 저들인가?’
자연스레 그곳으로 신경이 쏠렸지만, 21호는 애써 불안감을 무시한 채 그곳을 빠르게 지나쳤다.
일단 그들의 기척이 빈사 상태에 가까울 정도로 흐리기도 했던 데다-
‘요정이 무척 서두르는 것 같군.’
더 중요한 것이 따로 있다는 듯 다급해 보이는 움직임. 재촉하듯 팔딱팔딱 튀어 오르는 꼬락서니가, 어째 나무를 뛰어다니는 작은 다람쥐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그렇게 불꽃을 따라 내달린 21호는, 마침내 복도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방 앞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수상한 마법진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 괴상한 방이었다.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번져 나오는 촛불은, 어둠을 몰아내기는커녕 방 안을 한층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로 채우는 데 일조하는 듯했다. 지금 당장 이곳에 악마가 소환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광경.
‘…….’
그리고 그 중앙에, 빛나는 초록빛의 제단이 놓여 있었다. 투명한 구슬들이 쌓여 있는 작은 탑과, 그 위에서 빛나는 작은 초록빛의 불꽃.
뾰롱!
그때, 붉은 불꽃이 또다시 제단 위를 빙빙 맴돌기 시작했다.
“요정님? 제게 뭔가 전하고 싶은 게 있는 겁니까?”
화르르륵!
“제단? 그 제단이 문제입니까?”
파닥파닥!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불꽃이 손짓이라도 하는 것 같다. 21호에게 뭔가를 전하고 싶어 잔뜩 애가 닳은 모습.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저게 문제라는 거겠지?
어차피 가만 둬서 좋을 것은 없어 보이는 수상쩍은 제단이다. 꾹 입술을 깨문 21호는, 급한 대로 주먹을 쥐고 제단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콰장창!
* * *
“후후, 재미있는 장난감을 얻었잖아? 이번에는 운이 좋았어.”
선두에서 이동하던 올리비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번에 얻은 전리품을 돌아보았다. 참 깜찍하기도 하지, 혼자서 용케도 조직 전체의 소통을 교란하다니.
덕분에 조반니의 곁을 지키던 이들이 보낸 정보가 완전히 차단되었고, 올리비에가 황자 일행의 나들이를 파악하는 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배짱도 배짱이지만, 실력도 여간내기가 아니었지. 결국 추격대 전체가 이 녀석을 잡기 위해 동원되었을 정도니까.”
“…….”
“이 녀석은 아마 성황가에서 직접 부리는 개일 거야. 과연 사브리나가 본명일까?”
“…….”
“그래, 아닐 거야. 나도 안다고.”
혼자서 떠들어 대던 올리비에는, 고개를 바짝 들이밀고는 눈을 감은 다샤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흠, 역시 무척 마음에 들어. 이 녀석은 잘 다듬어서 우리 조직원으로 만들자.”
“…….”
“시끄러워. 결정은 내가 하는 거라고.”
물론 [오베론의 손]에서 엄선하고 엄선한 개라면, 아마도 자발적인 전향을 기대하긴 어려울 터다. 그래도 최대한 시간을 들여서 잘 타일러 봐야지. 사브리나는 그럴 가치가 충분했다.
만약에 끝까지 말이 통하지 않는 최악의 경우라면, 저 예쁜 껍데기만을 탈취하는 것도 괜찮고.
“뭐, 이 녀석도 너희들처럼 변해 버리면 정말 재미없을 거 같긴 하지만.”
“…….”
“이것들아! 사람이 말을 하면 대꾸를 좀 하라고.”
괜히 짜증을 내던 올리비에는, 곧 무표정한 암살자들을 둘러보며 난데없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그래. 너희들은 말하고 싶어도 말을 못 했었지? 미안~ 미안~ 깔깔깔!”
바로 그때였다.
털썩! 터덜썩!
갑자기 암살자들 일부가 예고도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총 인원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으잉?”
깜짝 놀란 올리비에가 쓰러진 암살자들을 툭툭 걷어차며 재촉했다.
“야! 야! 일어나. 겨우 농담 좀 한것 가지고…….”
그러다가 올리비에는, 그들의 텅 빈 눈동자에서 영혼이 완전히 빠져나간 것을 알고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설마…….
‘머리탑!’
쓰러진 면면을 보건대, 수도 브린디시가 아니라 임시 거점에 구축해 둔 머리탑의 인원이다.
방비를 꽤 잘 해 뒀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거점에 무슨 일이 생겼나?
올리비에는 남은 인원을 추슬러, 황급히 비밀 거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
그녀의 우려는 사실로 드러났다.
“…….”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조직원들과-
삐걱-
바람에 힘없이 덜컹이는 비밀 거점의 입구.
올리비에는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꼭꼭 숨겨 둔 비밀 장소에까지 이르렀을 때-
“안녕.”
그녀를 반긴 것은 완전히 박살 난 머리탑과, 절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어린 소년이었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지하실 안에서, 묘한 안광을 띈 은회색 눈동자가 인사라도 건네듯 느긋하게 깜박인다.
“내 일행을 돌려받으러 왔어.”
“…….”
“겸사겸사 너한테 몇 가지 물어볼 것도 있고.”
소년의 시선이 닿아 오는 순간, 올리비에는 등골에서 오소소 소름이 이는 것을 느꼈다.
Chapter 158: Chapter 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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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 카야의 숨결 (7)
21호가 수상쩍은 제단을 때려 부쉈을 때. 그리고 올리비에가 이끄는 암살자들 절반이 막 의식을 잃고 고꾸라졌을 때-
같은 시각, 성진과 대치하던 암살자에게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났다.
털썩, 챙그랑!
검을 맞대고 치열하게 대치하던 여자가 갑자기 힘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푸욱!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목에 호두까기를 박아 넣은 성진은, 잠시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여자의 눈에서 서서히 생명이 꺼져 가는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21호가 어떻게든 해낸 건가?’
꽤 만만찮은 상대였다. 이들의 몸을 조종하던 영혼의 정체가, 일평생 암살 기술만 갈고닦은 노익장인 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하지만 본신이 아닌 만큼, 오러 층의 한계 역시 명확했어.’
피차 엇비슷한 오러 양이라면, 오러 운용의 노련함에 있어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물론 상대가 두 번째를 넘어, 세 번째, 네 번째까지 몸을 교체해 가며 달려들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근방에 더 이상 적대적인 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후, 성진은 21호의 기척을 따라 지하실로 걸음을 옮겼다.
‘이건… 꽤 제대로 정비된 거점 같은데?’
길게 이어진 복도의 양옆으로, 식량 창고며 무기고, 숙소 따위가 눈에 들어온다. 시설의 오랜 사용감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이들은 아마 옛날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활동하던 세력일 터.
이들의 정체에 대해 조금은 감이 잡히는 것도 같다.
‘카야의 숨결.’
언젠가 다샤로부터 대륙에서 암약하던 암살 집단의 계보에 대해 자세히 배운 적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카야의 숨결’은, 오르토나를 포함한 북부 지방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집단이다. 스틸레토를 주로 사용하며, 한때 ‘오베론의 손’과 비등한 세력 균형을 이루었던 유서 깊은 암살 집단.
자연히 또 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대체 이들은 자유 지하도와 무슨 관계인가.
‘북부 도처에 은밀한 거점을 만들고 움직인다 치면, 필연적으로 자유 지하도와 세력 반경이 겹치는 수밖에 없어.’
조반니를 만날 당시부터 그를 호위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서로 대립하는 관계일 리는 없겠지.
그렇다면 ‘카야의 숨결’은 자유 지하도의 산하 조직이 된 건가? 아니면 그저 도움을 주고받는 협력 관계 정도?
거기까지 생각하던 성진은, 어느 커다란 방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아까부터 줄곧 수상쩍은 기척이 감지되던 장소였다.
빼꼼 방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어 보니-
‘…….’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잠행복을 입은 여남은 명의 남녀가 조용히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단체로 가사 상태에 빠지기라도 한 걸까? 오러 활성이 바닥을 기는 꼴을 보건대, 아무래도 다들 정상적인 몸 상태는 아닌 듯했다.
‘…딱히 의식이 있는 것 같진 않군.’
그중에서 상당수의 인원이, 아까 달려들었던 암살자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라는 점도 특이한 사항이었다.
그리고-
‘염상 결정……!’
그들의 머릿속에서 하나같이 빛나고 있는 돌의 존재를 확인한 성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건 의외의 성과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나 거창하게 테오신테 론칭 쇼를 벌이고도, 테레에서 제대로 된 염상 결정을 가진 인간을 찾지 못했었지. 한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렇게나 많은 염상 결정을 한꺼번에 발견하다니?
‘이들도 오랜 기간 각성차를 복용한 걸까?’
하지만 성진의 예감은 곧바로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염상 결정이라 보기에는, 그들 모두가 완전히 동일한 부위에 염상 결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왼쪽 두개골. 그것도 두정부와 측두부의 중간 지점에서 빛나고 있는, 획일적인 크기의 염상 결정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다키아누스의 비서에 따르면, 다키온의 생성 위치나 크기를 예측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탕약의 농도나 복용 기간과는 전혀 상관관계 없이, 철저하게 개체의 특성에 따라 결정될 뿐이라고.
따지고 보면 회색 역병 환자들도 그러지 않았던가. 대뇌 여기저기에 결정이 무작위로 생성되는 통에, 병이 진행됨과 동시에 대부분의 환자가 목숨을 잃고 말았지.
하지만 저것들은 모두 일정한 위치에서 빛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동일한 방법으로 외과 시술이라도 한 것처럼.
‘…아니, 아무래도 그건 너무 나갔나.’
이곳은 향수를 뿌려서 방역을 하는 세상이잖아? 체계적인 의학 지식이랄 것도 없는데, 뇌에 뭔가를 삽입하는 의료 기술 따위가 존재할 리가…….
하지만 그런 생각의 흐름과는 달리, 성진은 뭔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개중 머리를 짧게 다듬은 한 남자의 머리카락을 헤집어, 두피에 나 있는 제법 길쭉한 흉터를 눈으로 확인했다.
‘……!’
성진은 다급히 다른 이들의 두피도 확인했다. 하지만 옆에 누운 여자도,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여자도, 머리카락을 들추자 매번 똑같은 위치에 길쭉한 상처가 드러났다.
외부에서 염상 결정이 삽입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결정적 증거.
손끝이 차갑게 식으며, 동시에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이 세계에… 델크로스에… 정말 외과 수술을 대량으로 하는 놈이 있다고? 대체 누가?’
우선 떠오르는 인물이라면 시구르트 시구르슨 정도일까? 천 개의 세계를 거니는 이야기꾼이자, 멀쩡한 사람의 인격을 죽여 자신의 인형으로 부리는 놈이다. 그 자식이라면 동기도 충분하고, 수단도 궁리해 낼 법하지 않나?
-회색 역병에 관해 내가 아는 것들을 자세히 말해 줄 수는 없소. 그것 역시 어디까지나 시구르트 시구르슨의 향후 계획과 긴밀하게 맞닿아있기 때문이오. 그러나…….
얼마 전 만났던 레이디 이사벨라는 성진에게 그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적어도 사람에게 직접 마물의 알을 심는 무식한 짓은 그의 소행이 아니었다오.
그녀의 말은 아마도 사실이리라. 즉 시구르트 시구르슨에게는 회색 역병을 일으키는 것보다 염상 결정을 만들어 내는 더욱 세련된 방법이 있다는 뜻이다.
성진은 지금껏, 그것이 대륙에 약차를 장기적으로 보급하는 일일 거라고 막연히 짐작해 왔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다면 어떨까? 그보다 더욱 깔끔하고도 확실한 방법이…….
‘…아냐, 그놈은 아닐 거야.’
잘은 몰라도 시구르트 시구르슨은 어딘가 탐미적인 구석이 있는 놈이었지.
하면 그놈은 로페룸의 알을 이식하는 것보다는, 사람의 두개골을 직접 여는 쪽을 훨씬 무식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성진은 시구르트 시구르슨이 이사벨라의 몸에서 도망칠 당시, 그의 영혼이 그리는 궤적을 눈으로 좇은 적이 있었다.
‘그때 놈에게는 그리 많은 선택지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어.’
다시 말해 시구르트 시구르슨은 한꺼번에 이렇게나 많은 수의 인형들을 만들어 낼 방법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다음으로 떠오르는 것은…….
‘다키아누스.’
흠, 놈이라면 제법 말이 되지 않나?
굳이 미개한 델크로스 차원으로 넘어와, 오랜 시간 대륙을 떠돌며 염상 결정의 생성에 대해 연구했다니까.
영혼의 성벽이 형성되는 과정을 관찰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사비로 사람들에게 탕약을 나눠 준 괴짜기도 하고.
만약 그 다키아누스였다면, 자신이 만들어 낸 염상 결정을 어떻게든 이용하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법도 한데.
‘물론 다키아누스는 수백 년 전의 인물이야. 이미 죽은 지 오래일 가능성이 높지만…….’
만에 하나, 그가 오랜 탐구 끝에 마침내 이정표에 가까운 다키온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면? 그로 인해 자신의 영혼을 무사히 보존하고, 또 염원하던 불로불사를 손에 넣었다면?
‘그렇다면, 아버지가 무리해서 내게 그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었던 이유도…….’
성진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이성지이이인!]
멀리서 마왕의 불꽃이 헐레벌떡 그를 향해 날아왔다.
[너도 알아챘지? 저쪽에 정말 엄청난 것이 있었어! 규상 세계의 법칙을 쉽게 이끌어 내도록 고안된 이상한 장치였다고!]
아아, 그래. 그럴 것 같긴 했어. 이 차원에서 마법처럼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 생기면, 그 이면에는 반드시 규상 세계의 법칙이 숨어 있더라고.
성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같이 가 보자. 그전에 일단 이것들부터 처리하고.”
[…응?]
그제야 주위를 둘러본 마왕이, 화들짝 놀라며 불똥을 사방으로 흩날렸다.
[헉! 이것들은 다 뭐야? 설마, 저게 전부 염상 결정들이야?]
“그래, 마왕아. 저들을 잘 살펴봐.”
[뭐, 뭘…….]
“어때? 저들에게 제대로 된 영혼이 남아 있는 걸로 보여?”
순간 무엇을 보았는지, 마왕 놈이 움찔 놀라며 불꽃을 동그랗게 말고 쪼그라진다. 그러더니 잠시 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내놓았다.
[…아니.]
“그래.”
성진은 마지막 남은 스틸레토를 꺼내 들었다. 이미 영혼을 완전히 빼앗긴 이들이라면, 더 이상 농락당하지 않도록 여기서 끝장을 내 주는 쪽이 좋겠지.
* * *
성진은 방을 벗어나 21호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하?”
21호는 성진이 풍기는 지독한 피비린내에 잠시 당황한 듯했으나, 곧 표정을 가다듬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다치셨습니까? 그 습격자는 어찌되었습니까?”
“갑자기 쓰러졌어. 네 덕이다.”
“네?”
“네가 녀석을 조종하던 장치를 부순 것 같아. 잘 했어, 21호.”
성진이 생각보다 스산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뭔가를 더 보고하려고 입을 달싹이던 21호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 여기에 정확히 뭐가 있었지?”
성진은 엉망으로 부서진 제단과, 바닥에 굴러다니는 작은 구슬들을 눈에 담았다. 어딘가 눈에 익은 듯한 저 모양, 혹시 영혼석인가?
그러자 21호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제 눈에는 마치 악마 숭배자들의 제단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부쉈다?”
“예. 일단 대단히 불길해 보였던 터라.”
“…….”
성진은 새삼 21호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정보원치곤 어린 나이다 싶긴 했는데, 거 은근히 막 나가는 놈일세. 다행히 이곳이 마기에 오염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정말로 악마 소환진이라도 있었다면 건드리는 즉시 침식이 일어났을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저 제단이 규상 세계의 법칙을 델크로스 차원으로 이끌어 내는 장치였던 말이군.’
21호가 열심히 때려 부숴 준 덕분에, 이제는 뭔가 의미 있는 정보를 알아내기는 힘들어 보인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구슬들 역시 대부분 금이 가거나 박살 나 있었다. 성진은 그것들 중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초록색의 구슬을 하나를 주워들며 생각했다.
‘또 이것들이 영혼석의 일종이라면, 여기에 깃든 영혼들이 염상 결정에 빙의해서 암살자들을 움직였을 테고…….’
바로 그때, 성진은 고도로 정제된 기도를 가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르게 이곳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지금까지 손쉽게 해치워 온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닌, ‘카야의 숨결’의 진정한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헉? 저 녀석들도 모조리 염상 결정을 가지고 있다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마침내 열댓 명이 조금 넘는 암살자들이 지하실에 모습을 드러내자, 마왕의 불꽃이 당황하며 성진의 머리 위를 빠르게 맴돌았다.
그 말대로, 암살자들의 측두부에는 동일한 크기의 염상 결정이 선연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직 한 사람, 모두를 통솔하고 있는 민짜 눈썹의 여자만이, 염상 결정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
여자는 망연한 표정으로 엉망이 된 제단을 훑어보았다. 아마도 저 제단의 기능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던 거겠지.
‘근데 저 여자,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지 않나?’
성진은 묘한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 이상하네. 저런 강렬한 인상을 가진 얼굴을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예상했던 대로랄까, 뒤쪽에는 다샤의 모습도 눈에 보인다. 그녀는 정신을 완전히 잃은 듯 보였는데, 온몸이 밧줄에 칭칭 감겨 마치 번데기 같은 꼴이 되어 있었다.
다샤에게 별다른 외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성진은 조금 너그러운 마음이 되었다. 다짜고짜 호두까기를 휘두르기 전에, 적어도 몇 마디 말은 섞어 볼 생각이 들었다는 뜻.
그래서 정겹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러자 민짜 눈썹의 여자가 흠칫 몸을 떨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 얼굴을 아나?’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성진은 일단 차분히 자신의 방문 목적을 먼저 밝혔다.
“내 일행을 돌려받으려 왔어.”
“…….”
“겸사겸사 너한테 몇 가지 물어볼 것도 있고.”
한데 상대의 반응이 의외다. 민짜 눈썹 여자가 잠시 주춤거리더니, 제법 공손한 어투로 되물어온 것이다.
“물어보다니… 뭐, 뭘 말입니까?”
“……?”
성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첫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막무가내로 달려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정중한 태도로 나오는데?
“일단 내 일행부터 돌려줘. 대화는 그 뒤의 일이다.”
그러자 여자가 힐끔 성진의 눈치를 보며 항변했다.
“그, 그건 조금 무리한 말씀이 아닐깝쇼?”
“어째서?”
“그야… 저 애는 우리가 잡은 전리품이니까요. 만일 인질을 돌려받기를 바라신다면, 저희에게 그에 합당한 대가를 제시하셔야…….”
하하.
성진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퍼져 나갔다.
“잘도 지껄이는구나. 대가 좋아하네. 애초에 우리를 이곳에서 싹 없앨 셈이었으면서.”
“…헙!”
뒤에 서 있던 21호와, 민짜 눈썹의 여자가 동시에 헛숨을 들이켰다.
‘저, 저하! 제발 더 이상 저들을 자극하지 마십시오!’
21호는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었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들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
반면 여자 쪽은 정곡을 찔려서 당황한 경우였다. 그녀는 불안한 듯 성진과 21호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곧 버럭 큰소리를 쳤다.
“그, 그렇다면 어쩔 겁니까? 전력은 어디까지나 우리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합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위층에서 성진과 대등하게 겨뤘던 이와 엇비슷한 수준의 암살자들이 이곳에만 열 명이 넘어가니까.
애초에 테레로 우르르 몰려가 성진 일행을 싹 쓸어 버리려 했다는 것도 납득이 갈 지경.
‘근데 왜일까…….’
성진은 느긋한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대단히 절망적인 상황. 한데 성진의 예감은 모든 것이 어떻게든 잘 해결될 거라 말하고 있다.
전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민짜 눈썹이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성진의 그 여유롭기 짝이 없는 태도 때문이리라.
“…….”
“…….”
그렇게 두 사람이 잠시 말없이 대치를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이거, 그냥 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지?”
“맞아, 두고 보자니 조마조마해 죽겠어.”
침묵을 깨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다샤를 둘러매고 있는 덩치 큰 남자 암살자였다.
“……?!”
민짜 눈썹의 여자가 경악하는 가운데, 남자는 다샤를 멘 채 삐그덕 삐그덕 괴상한 움직임으로 성진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쟤는 정말 대책 없이 무모한 걸까, 아니면 용기가 넘치는 걸까?”
“둘 다일지도 몰라. 난 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고.”
“뭐, 그건 그래. 모레스는 모레스니까.”
“맞아. 모레스는 다름 아닌 모레스니까.”
남자는 마치 문답이라도 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일견 괴이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성진에게는 어째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말투.
‘…헤르나? 가데스?’
그때, 멍하니 그가 하는 양을 보고 있던 민짜 눈썹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마르코스? 대체 어떻게 말을 하는 거야? 그 ‘의식’을 받고 나면 절대로 말을 못 한다고 들었는데?”
“미안, 말 하는데.”
“그래, 할 수 있어.”
“너… 마르코스 선배가 아니구나! 대체 정체가 뭐냐?”
여자가 품에서 스틸레토를 뽑아내며 으르렁거린다.
그러자 마르코스라 불린 남자는 삐걱삐걱 괴상한 동작으로 뒤를 돌아보며 히죽 입꼬리를 찢었다.
“아, 걔는 쫓아냈지.”
“응, 멀리 쫓아냈어.”
“하나 알려 주자면, 말을 못 하는 건 육체 장악력이 너무 약해서야.”
“애초에 들어 있던 녀석이 완전 어설프게 만들어진 단말이었다고.”
“그렇다고 우리가 조종하기 편하다는 뜻은 아니고.”
“응, 우리도 나름대로 많은 불편을 감수하고 있어.”
거기까지 말한 남자는, 마침내 성진의 앞에 다샤의 몸을 털썩 떨구며 눈을 반짝였다.
“그러니까, 모레스. 우리의 도움을 절대 잊으면 안 돼. 알겠지?”
“맞아. 돌아오면 이번에야말로 함께 체스를 두는 거야. 알았어?”
이런 상황에서조차, 변함없이 체스에 미쳐 있는 녀석들이었다.
Chapter 159: Chapter 459
Chapter Text
459. 카야의 숨결 (8)
“놀랄 것 없어, 모레스. 이래 봬도 너한테는 자주 놀러 오는 편이거든.”
“뭐, 요즘은 주의하고 있긴 하지. 너나 빨강이에게 들킬 수 있으니까.”
“본래라면 오늘 밤에도 잠깐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다 틀렸네. 그러게 왜 하루라도 가만히 있는 날이 없어?”
으?.
남자는 다샤를 바닥에 툭 내려놓은 뒤, 양팔을 엇박자로 돌리며 어깨를 풀었다. 마치 두 팔을 조종하는 이가 각각 따로 있는 듯한 괴상한 움직임이다.
반가움과는 별개로, 성진의 머리는 상황 파악을 위해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지 않았나? 언젠가 조나단 맥캘핀을 찾아갔을 때, 쌍둥이들이 회색 역병으로 머리가 망가진 애슬리 베쳐에게 잠시 빙의된 적이 있었다.
‘애슬리도 머리에 불완전한 염상 결정을 가지고 있었어. 즉 이 녀석들은 염상 결정을 매개로 얼마든지 사람의 몸을 지배할 수 있는 거야!’
그렇다면 그 능력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당시는 애슬리를 조종하던 놈이나 빨강이와 부대끼며 서로 막상막하의 장악력을 보이는 듯했지만…….
‘이번만큼은 쌍둥이들이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는 것 같군.’
힐끔 민짜 눈썹을 바라보니, 그녀는 허탈한 표정으로 연신 입만 뻐금거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다 너무나 손쉽게 다샤를 넘겨주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리 다급해 보이지는 않는군. 어차피 남은 전력으로 우리를 쉽게 쓸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거기까지 판단한 성진은, 일단 21호에게 눈짓을 해 다샤를 챙기도록 했다. 그러곤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헤르나. 가데스.”
“응”
“응.”
“잘했어.”
짧은 칭찬을 들은 남자가 투박한 외양과 어울리지 않는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본래라면 징그럽게 느껴질 법도 했지만, 그 속에 쌍둥이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어째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알고 싶은 게 있는데, 사람을 조종하려면 꼭 둘이 같이 있어야 해? 이왕 몸을 탈취할 거라면, 둘이서 각각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흐음.”
“으음.”
그러자 남자가 비슷한 신음을 연속적으로 흘리며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역시 모레스는 만만치 않아. 이번에야말로 놀랄 줄 알았는데.”
“만만찮지. 벌써부터 이 상황을 이용해 먹을 생각 한가득인걸.”
그렇게 투덜거린 헤르나와 가데스는, 곧 순순히 성진의 질문에 답을 주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모레스의 말이 맞아. 장악력이 조금 떨어지겠지만, 둘을 동시에 조종하는 건 일도 아니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둘이 함께 있는 쪽이 나을 거라고 판단했어. 지금 상황이 꽤 특수한 경우니까 말이야.”
…특수한 경우?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쌍둥이… 아니, 마르코스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모레스. 인간의 몸을 완전히 장악하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로워. 제약도 이만저만한 게 아니고, 미리 준비할 것들도 많지.”
“그 못돼 먹은 인형사를 생각해 봐. 놈은 고분고분한 인형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기존의 인격을 완전히 말살하려 들잖아?”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가 있으니까.”
“위협이라 판단한 건 일단 없애거나 회피하려 드니까.”
“그건 자연적인 동시에 자동적인 현상이야.”
“기전이 단순해서 오히려 다루기 까다롭지.”
“그래서 우리 둘이 협력해서 제대로 몸을 장악하기로 의견을 모은 거야.”
“방어기제를 통제하려면 무의식의 영역까지 완전히 지배해야만 하니까.”
거기까지 들은 성진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녀석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아까부터 스멀스멀 밀려오는 좋지 않은 예감이 점점 뚜렷한 그림으로 변해 가는 것 같다.
“잠깐만, 설마 너희들……!”
한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푹!
마르코스가 번개처럼 팔을 들어, 스틸레토를 스스로의 목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
촤아아아아!
갑작스러운 사태에 모두가 얼어붙은 가운데, 경동맥이 완전히 끊어진 몸이 피 분수를 흩뿌리며 서서히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털썩!
“헉?!”
졸지에 황당하게 부하를 잃은 민짜 눈썹의 턱이 아래로 툭 떨어진다.
그러나 놀라기는 아직 일렀다. 여전히 무표정한 암살자들의 무리 뒤쪽에서, 갑자기 웬 여자 하나가 번쩍 손을 들며 기괴한 미소를 지어 보였으니까.
“짜잔!”
“어때?”
“……!”
모두의 경악한 시선 속에서-
삐그덕, 삐그덕.
여자는 합이 제대로 맞지 않는 걸음걸이로, 천천히 암살자들의 틈바구니에서 걸어 나왔다. 방금 숨이 끊어진 마르코스가 그랬던 것처럼, 괴상한 대화를 혼잣말인 양 주절거리며.
“이제 알겠어? 우리가 각각 대항해 봤자, 겨우 둘의 몸을 빼앗아 다른 둘을 방해할 뿐이겠지.”
“아마 너라면 알 거야, 모레스. 이거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적의 수를 줄이는 방법이라는 걸.”
그렇게 여자는 허리춤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레 스틸레토를 뽑아들었고-
촤악!
또다시 흥건한 피 분수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이, 이게 대체……!”
민짜 눈썹의 동그란 눈에 처음으로 짙은 공포의 감정이 어린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곧이어 그녀의 바로 뒤에서, 또 다른 암살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으니까.
“봤지? 이게 바로 진정 게임을 지배하는 방법, 즉 필승법이지.”
“이들은 빤히 알면서도 절대 우리를 막을 수 없을 테니 말이야.”
“간단한 셈법이지?”
“결과는 명확하지.”
“이렇게 줄여 나가다 보면, 결국 염상 결정이 없는 저 여자만이 남을 거야.”
“꽤 만만찮아 보이지만 괜찮아. 모레스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스틸레토가 또다시 어김없이, 무자비하게 휘둘러진다.
촤아아악!
곁에 있던 민짜 눈썹의 머리 위로, 폭포처럼 피가 쏟아져 내렸다.
* * *
‘이건… 꿈인가?’
뜨거운 피 분수를 정통으로 맞으며, 올리비에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공들여 조성한 머리탑이 박살 나고, 데리고 온 전력의 반이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기껏 남은 인원을 추슬러 돌아왔더니 거점은 이미 초토화되어 있다.
거기다 이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령들이 나타나 남은 부하들을 하나하나 해치우기까지!
‘모든 것이…….’
올리비에는 멍한 얼굴로 눈앞의 황자를 바라보았다. 이 모든 불가사의한 광경을,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냉막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소년을.
순간 직관적인 깨달음이 밀려들었다.
‘그래, 이 모든 일들이 죄다 저 황자의 편의에 맞게 움직이고 있어.’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어떻게 온 세상이 단 한 사람을 위해 움직일 수 있단 말이야?
“몇 명 죽였지? 이제 몇 명 남았지?”
“겨우 셋이야. 아직은 갈 길이 멀어.”
또다시 옆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목소리에, 올리비에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는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이다!’
그녀는 으득, 이를 깨물며 소리쳤다.
“이런 젠장! 저것들은 한 번에 한 명밖에 조종하지 못해! 모두들 당황하지 말고, 이번에야말로 놈들을 제대로 막아!”
하지만 그것은 공허한 명령에 불과했다. 말하는 올리비에 스스로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는.
‘어떻게 막지? 누구에게 씌일지 모르고, 나타나자마자 단숨에 자살해 버리는 악령을?’
한데 도움의 손길은 의외의 곳에서 나타났다.
“그만둬.”
모레스 황자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우뚝.
새로 악령에 사로잡힌 암살자가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스틸레토를 높이 쳐든 채로, 의아한 듯 황자를 바라보았다.
“응?”
“왜?”
의아한 것은 올리비에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을 뿐, 아직은 자신들의 전력이 우세한 상황이다. 기세를 더욱 올려야 겨우 승산이 생길 텐데, 대체 왜 저쪽에서 멈추는 거지?
하지만 모레스 황자의 표정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이 막 나가는 꼬맹이들이!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응? 뭐가?”
“왜 그래?”
“어린것들이 지금 겁도 없이 자해를 하고 있네! 제정신이냐? 너흰 아프지도 않아?”
그러자 남자는 팔을 아래로 내리며 끼이익,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괜찮아, 모레스. 많이 아프지 않아.”
“그래, 모레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걸.”
“웃기지 마! 이 형님 앞에서 지금 그게 할 짓이냐? 아니면 너희들, 나한테 정말 제대로 아픈 꼴을 당해 볼래?”
씨근덕거리며 호통을 쏟아 낸 황자는, 곧이어 악령들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삶에 찾아오는 역경과 고난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넘어가려 해서는 안 된다는 잔소리. 자해를 손쉬운 해결책으로 여겼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와 정서적 문제들에 대한 잔소리.
그리고 끝으로, 앞으로는 극단적인 일을 저지르기 전에 반드시 가족에게 먼저 털어놓을 것을 한참동안 종용한 후에야, 그 기나긴 잔소리는 겨우 끝을 맺었다.
“…….”
악령들은 폭풍처럼 쏟아지는 잔소리에 잠시 넋이 나간 듯 보였다.
“이제 알겠냐? 너희들이 지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는지?”
“음,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잘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이 녀석들이 아직도!”
황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희는 아직 어린애들이야! 쥐방울만 한 꼬맹이들이라고!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할 책임도, 의무도 없단 말이야!”
“책임…….”
“의무…….”
“그런 건 그냥 나나 아버지에게 맡겨!”
거기까지 말한 황자는, 격앙된 기세를 조금 누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혹시라도 말이야, 나중에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기분이 어떠실 거 같아? 응? 아니면 너희들의 어머니가 알게 되신다거나!”
“성황 아빠가?”
“아빠 폐하는…….”
“조도?”
“조는…….”
“그래! 제발 체스를 기가 막히게 두는 그 멀쩡한 머리로 생각이라는 걸 좀 해 보라고!”
“…….”
“…….”
그러자 멍청한 표정으로 잠시 황자를 바라보던 남자가, 이내 히죽, 실없는 미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하하, 쟨 지나치게 독하다가도 가끔 이상한 데서 말랑해진단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누가 할 소린지 모르겠네, 그 말 그대로 돌려줄까 봐.”
“그럴 수도 있지. 모레스는 모레스니까.”
“맞아. 모레스는 다름 아닌 모레스니까.”
올리비에에게는 다행하게도, 그 대화로 인해 악령들의 심경에 모종의 변화가 생긴 모양이었다.
챙그랑!
스틸레토를 툭 땅에 내던진 남자는, 영차영차 엇나가는 발걸음으로 모레스 황자를 향해 걸어갔다.
“근데 있잖아? 실은 모레스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하긴, 우리가 쓸데없이 힘낸 건가 싶기도 하고.”
“왜냐하면 이곳에 오는 길에 굉장히 재미있는 광경을 보고 말았거든.”
“응, 글쎄 엄청 세 보이는 악령들이 나란히 바닥에 누워 있지 않겠어?”
“일단 신기해서 한참 구경하다가 왔지.”
“슬슬 일어날 때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저게 다 무슨 소리지?
올리비에가 잔뜩 긴장하며 귀를 기울이는데, 모레스 황자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아, 그 녀석들 말이지…….”
그러자 빤히 황자를 쳐다보던 남자가 꺄르륵, 어울리지 않게 천진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것 봐! 역시나 이미 알고 있잖아? 모레스에게는 처음부터 다 생각이 있었다니까?”
“그러게 말이야. 괜히 걱정했나 봐. 알고 보면 이렇게 계획적이고 음흉한 녀석인데 말이야.”
“그래도 일단, 우리는 도와준 거다?”
“맞아. 돌아오면 체스를 둬 줘야 해?”
그들의 대화가 점점 화기애애해질수록, 올리비에는 더욱 더 불안해져만 갔다.
‘대체 무슨 소리지? 지금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거야?’
불행하게도, 올리비에는 금방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쏴아아아…….
이유 없이 모골이 송연해지나 싶더니, 어느새 시커먼 영기가 지하실 바닥에 자욱하게 깔리기 시작했으니까.
올리비에가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 연기? 아니면 마기인가? 갑자기 어디서 들어오는 거야?’
키에에에에에에!
뒤이어 섬뜩한 귀곡성과 함께, 마치 영혼을 비틀어 짜듯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아아아! 내 영혼의 주인이시여어어어-!]
[주인이시여! 이 벨린다를 부르셨나이까아아!]
어설프게 빙의된 영혼 따위는 단숨에 날아가기에 충분한 충격이었으리라.
털썩! 터덜썩!
본부의 조종을 받던 암살자들이 모조리 맥없이 쓰러지는 가운데, 올리비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바야흐로 진정한 악몽의 시작이었다.
Chapter 160: Chapter 460
Chapter Text
460. 카야의 숨결 (9)
“…그어니까, 여기에는 야깐의 오애가… 이어음다.”
퉁퉁 부운 입술 사이로 잔뜩 뭉개진 발음이 새어 나온다.
올리비에는 현재 바닥에 꿇어앉은 채, 모레스 황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힘겹게 변명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데리고 온 암살 부대는 변변한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전멸. 그녀 혼자만 겨우 살아남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우이가 여기 모이기는 행눈데, 절대 제국과 척을 지어던 거이 아이어따는…….”
한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추상 같은 호통이 들려왔다. 거대한 곤봉을 치켜든 전사의 악령이었다.
[이 잡것이! 어서 똑바로 고하지 못할까?! 잘못을 얼버무리려 들다니 부끄러운 줄 알라, 이 배교자야!]
“씨이…….”
올리비에는 반사적으로 악령을 향해 눈을 흘겼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이 꼴이 된 것은 저 전사와의 전투 때문이었으니까.
아니, 그것은 전투라기보단 일방적인 폭행이었다. 이쪽에서 공격하면 영체가 되어 공기 중에 흩어지면서, 저쪽에서 공격하면 강한 물리력이 되돌아오다니. 이런 불공평한 싸움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젠장! 저게 실체가 있는 인간이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맥없이 당하고만 있진 않았을 거라고!’
올리비에가 속으로 씨근덕거리고 있는데, 앞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모레스 황자가 입을 열었다.
“그건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군.”
앳된 얼굴에 비해, 그로부터 뿜어지는 기세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위엄으로 가득했다.
“우리가 특송 마차를 이용했을 때만 해도, 너희는 그저 조반니의 곁을 호위하고 있었을 뿐이야. 이후에도 우리에게 감시를 붙이긴 했지만, 그건 우리가 자유 지하도를 별 탈 없이 나가는지 지켜볼 의도였겠지.”
“녜에…….”
“하지만 우리가 일정을 바꿔 테레에 도착한 후, 너희들은 갑자기 돌변하여 우리를 죽이려 들었다. 이를 전부 오해라고 할 셈인가?”
“앙이, 그건-”
올리비에가 뭐라고 항변하려 했을 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눈앞에 불쑥, 검은 사제복을 입은 음산한 악령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씨발, 깜짝아!’
올리비에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나자, 악령은 커다랗게 치뜬 눈으로 빤히 그녀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까드득.
[이 죽일 것이 감히 나의 주인께 위해를 가하려 들었단 말입니까? 한 번 죽는 걸로는 결코 갚을 수 없을 죄악! 주인이시여! 허락하신다면 당신의 충실한 종이 직접 이것을 지옥으로 끌고 가 두고두고 빚을 받아 내겠나이다!]
“히익!”
올리비에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악령이야말로 암살 부대를 모조리 검은 연기로 휘감아 죽인 장본인인 것이다.
당시 놈이 번갈아 가며 터뜨리던 광소와 귀곡성이 아직도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헤이즈.”
다행히 황자가 그를 저지하자, 올리비에는 식은땀을 흘리며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지금 제대로 변명하지 못하면, 이대로는 정말 죽어도 죽지 못한 꼴이 될 거라는 위기감이 엄습했기 때문.
“저, 전 위에서 내려온 명을 따르는 일개 부하일 뿌임다. 그저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야깐의 정보 혼선이 이썼던 거라고요…….”
* * *
실제 올리비에가 처음에 받은 명은, 조반니의 아들이 호위하고 있는 인물, 즉 성황을 본부로 붙잡아 오라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성황의 ‘인형’이다. 그것을 되도록 상처 없이 수거해서, 지하에 있는 마법사의 연구실로 넘겨주도록.
코른시임 일족이 가진 영혼 이동 기술의 집약체, 호문클루스를 무사히 손에 넣는 것.
그것은 다소의 손해를 감수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현재 ‘카야의 숨결’은 영혼석으로 이루어진 머리탑과, 염상 결정을 삽입한 생체 인형을 토대로 겨우 세력을 유지하는 중이었으니까.
이미 유명을 달리한 전대 암살자들의 영혼을 머리탑에 종속시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의식’을 치른 새 몸을 제공함으로써, 인력 훈련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극단적으로 절약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변변한 고용주 하나 남지 않은 이 오르토나에서, 그들이 예전과 다름없는 세력을 유지하는 비결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불완전한 기술인만큼 그 한계 또한 명확했다.
그들의 생체 인형은 영혼의 전투 능력을 고스란히 재현하긴 했지만, 의사소통을 포함한 그 외의 지적 능력 면에서 확연히 기능이 떨어졌다.
또한 머리탑과의 연결이 지나치게 약했기에, 약간의 영적 충격만으로도 영혼이 멀리 튕겨져 나가기 일쑤.
수뇌부에서 이를 보완하는 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알겠나? 올리비에. 성황의 인형, 호문클루스가 처음으로 우리 세력권 내에 들어왔다. 이번에 놓친다면 앞으로는 그것을 얻을 기회가 영영 요원해 질지도 모른다.
코른시임 일족의 역작.
‘영혼의 안착’이라는 측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인 호문클루스를 연구하면, 아마도 생체 인형이 가진 약점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을 테지.
그래서 ‘카야의 숨결’에서는 예외적으로, 수도 브린디시를 제외한 거점에 임시 머리탑까지 만들어 가며 대량의 인원을 파견했던 것이다.
-정 여의치 않으면 호문클루스의 머리만 가져와도 좋다. 영혼을 인형에 고정하는 핵심 기술은 분명 머리에 삽입된 다키온에 있을 테니까. 아마도 연구에 미친 우리 마법사 선생이라면, 분명 제대로 그것의 기능을 알아낼 수 있을 게다.
올리비에는 자연히 이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근데 그거 정말 괜찮은 겁니까? 아무리 인형이라고는 해도, 일단은 성황 본인에게 직접 해를 끼치는 일이잖아요?
-그렇겠지.
-그럼 결국 제국의 원한을 사게 되지 않습니까?
비록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암살자들을 열심히 돌려쓰고는 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일개 암살자 집단에 불과했다.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의 황제를 상대로 원한을 샀다가는, 그 결말이야 불 보듯 빤한 일 아닌가.
하지만 의외로 수뇌부에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건 걱정 할 것 없다, 올리비에. 성황은 네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이 많은 제약에 묶여 있으니까. 그래서 자신의 일신에 일어난 일에 관해서는 오히려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
-…제약? 전례요?
-그래. 그렇다고 우리에게 호락호락 호문클루스를 넘겨주지는 않겠지. 아마 그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카야의 숨결’을 이끄는 수장은 그렇게 공언하며,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 많은 인형들을 올리비에에게 맡겼다. 이대로라면 뒤로 넘어져도 실패할 수 없을 만큼의 충분한 전력을.
그래서 그때까지만 해도 올리비에는, 이번 임무의 성패 여부를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단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올리비에.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절대, 절대로 성황 외에 다른 이들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 물론 조반니의 아드님만큼은 멀쩡히 살려 둘 겁니다. 저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다고요.
-허투루 듣지 말거라! 성황의 자식들, 특히 ‘예비된 자’를 마주치게 되거들랑 절대로……!
-네네~ 알겠다니까요. 제가 어련히 알아서 할라고요.
한데 이게 웬걸. 한번 일이 뒤엉키기 시작하니, 완전히 꼬이는 것도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이변은 먼저 성황 일행에게서 일어났다. 벤소 후작령을 거처 레지나로 움직일 줄 알았던 그들이, 갑자기 마차를 버리더니 북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버린 것이다.
‘…설마 테레로 갈 생각인가? 대체 왜?’
덕분에 올리비에는 당장 습격하려던 생각을 바꾸고, 잠시 그들을 동태를 주의 깊게 살필 수밖에 없었다.
‘자유 지하도 내에는 제국에 반감을 가진 이들이 많아.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저들의 정체가 탄로나, 호문클루스 탈취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한데 그러던 와중 자유 지하도 쪽에서도 큰 이변이 발생했다. 한창 레지나에 머물고 있는 줄 알았던 모레스 황자 일행이 뜬금없이 옛 양조 도시 베르드론에 나타나, 자유 지하도의 수장 조반니와 모종의 거래를 하기에 이른 것.
게다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무사히 레지나로 내보냈어야 할 황자 일행이, 갑자기 테레로 방향을 틀어 성황 일행과 합류해 버린 것이다!
물론 성황의 뒤를 열심히 쫓고 있던 올리비에는 처음에는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그들 사이에 나타난 ‘사브리나’ 때문에 한동안 정보의 큰 혼선이 생겼으니까.
그래서 막상 테레를 습격할 준비를 마친 올리비에는, 뒤늦게 그곳에 ‘예비된 자’가 있음을 알고는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일이 꼬이려니 이렇게! 이제 어쩐다지?’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대상이,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이들과 함께하는 난감한 상황.
그렇다고 막상 본부에 보고해 의견을 타진하려니, 정보를 교란하는 ‘사브리나’의 존재가 너무나도 큰 방해가 되었다.
결국 고민하던 올리비에는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일단 테레를 습격하고 보자. 가서 저들을 완전히 제압한 다음에, 호문클루스만 빼돌리고 나머지를 무사히 놔주면 되는 게 아닐까?’
그러다가 제압하는 도중에 죽어 버리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던 올리비에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정 안 되면 참회 교단에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방법도 있으니까.’
하지만 세상만사는 결코 그녀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정찰하라고 보낸 놈들이 어설프게 살기를 흘리다, 설마 ‘예비된 자’ 본인을 비밀 거점까지 불러들일 줄이야!
사브리나를 잡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소요된 것은, 그에 비하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 결과, 올리비에는 현재 모든 전력을 잃고, 답지 않게 땀까지 뻘뻘 흘려가며 열심히 변명을 생각해 내야 했던 것이다.
물론 모레스 황자의 날카로운 추궁 앞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지만.
“비록 북부가 세력권 밖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제국의 정보망은 이곳에서도 멀쩡하게 기능하고 있다. 최근에는 별다른 보고를 듣지 못했는데, 오늘 보니 거의 영지 하나를 쓸어버릴 정도의 전력을 모으고 있더군.”
그 엄청난 전력을 혼자서 쓸어버린 주제에, 황자는 대단히 진지한 표정으로 올리비에를 다그쳤다.
“즉 너희들이 이곳에 모이기 시작한 것은 제법 최근의 일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 정도겠지. 혹시 벤소 후작과 전면전을 벌이려 한 건가?”
“에……?”
“벤소 후작은 북부 재건을 위해 앞으로도 제국과 함께 가야 하는 소중한 동반자지. 만일 그를 치려 했다면 제국에서도 이를 가만히 좌시할 수 없다.”
벤소 후작이? 제국과 협력 관계? 그럴… 리가?
‘잠깐! 모레스 황자의 수족이 다 되었다는 슈미트 지부장이, 최근 북부 영주들을 대상으로 뭔가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다. 하면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물밑 교류가 있는 건지도 몰라!’
올리비에는 반신반의했지만, 황자의 당당한 표정을 보니 완전 빈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째 생각보다 일이 커질 것 같다는 불안감에, 올리비에는 일단 황자의 말을 극구 부정했다.
“저, 절대 아님다!”
“그렇다면 벤소 후작령이 아니라, 테레를 습격하려 한 거군. 역시 우리를 모두 묻어 버리려 한 건가? 날 죽이려 했어?”
아씨!
변명이 궁해진 올리비에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슴까? 아까도 말했지만 큰 오애가 있었슴다!”
“오해.”
“녜에. 우리 조직에 큰 해를 끼친 악마 숭배자가 자유 지하도에 숨어 있다는 말을 들어서……!”
“…….”
“전력을 최대한 모은 것도 그 때문임다! 하하. 만약 악마 숭배자가 폭주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겠슴까? 그래서 대비한 검다. 물론 당신이 계신 걸 알았다면 미리, 어떻게든 살려 드렸을 거라는-”
키에에에엑!
순간 날카로운 귀곡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예의 검은 사제복을 입은 악령이다.
[말을 삼가라!]
올리비에를 노려보는 그의 흉흉한 눈 아래로, 시커먼 피눈물이 폭포수처럼 콸콸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말로 꿈에 다시 볼까 두려운 모습이었다.
[이 미천한 것이! 지금 누구의 안전에서 멋대로 살려 주네, 마네 하는 망언을 지껄이는가!]
씨이, 그럼 어쩌라고! 죽일 계획이었다고 하면 화낼 거면서, 사실은 살리려 했다고 말해도 지랄인 거야?
다행히 올리비에가 그의 손아귀에 붙잡히기 전에, 황자가 적절하게 악령을 제지했다.
“헤이즈. 그만.”
[…송구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영혼의 주인이시여…….]
지옥 끝까지 달라붙을 것 같던 악령이 순순히 물러서자, 올리비에는 새삼스레 궁금해졌다.
대체 저 황자는 뭐 하는 인간이지? ‘예비된 자’가 대체 뭐길래, 보스도 그를 건드리지 말라 하고, 저런 악령들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거야?
“그럼 한 가지 더 물어보지. 우리를 자유 지하도의 거점에 몰아 두고 습격 준비를 했다면, 그건 모두 조반니의 뜻이라고 봐도 좋은가?”
황자는 그녀가 둘러댄 ‘악마 숭배자’ 이슈는 아예 믿지도 않는 눈치였다. 귀엽지 않은 꼬맹이 같으니.
움찔.
동시에 황자의 뒤에 서 있던 ?은이가 긴장하며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느껴진다. 어쩐지 그가 낯이 익은 듯했지만, 지금의 올리비에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 앙이! 이번 일은 자유 지하도나 푸른 공화혁명전선과는 전혀 별개의 일임다!”
어쨌거나 올리비에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조반니는 ‘카야의 숨결’이 열심히 물을 주고 있는 ‘왕의 씨앗’들 중 하나다. 이 일에 엉뚱하게 휘말려 잃어버리기에는, 그간 투자한 노력이 제법 만만치 않았다.
“조반니는 아무것도 모를 거미다. 우리 조직과 거래하는 고객들 중 하나일 뿌니니까요!”
본디 암살자 집단이란, 강력한 왕의 곁에 붙어 그들의 수족이 되는 것으로 세력을 떨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재 북부에는 그 ‘왕’이라 불릴 만한 권력자들이 몇몇 남지 않았다. 그러니 장차 카야의 숨결이 자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이 몇 안 되는 씨앗들을 소중히 길러 낼 수밖에.
“그래.”
한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목적을 더 자세히 캐물을 줄 알았던 황자가, 갑자기 서늘한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 너희들의 계획이 변경된 것은, 우리가 아버지와 합류한 이후였다는 뜻이 되겠군.”
“…….”
흠칫.
올리비에가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고 있는데, 그녀를 내려다보는 황자의 눈에 차가운 무기질의 안광이 스쳐 지나갔다.
“너희들, 아버지를 노린 거냐?”
Chapter 161: Chapter 461
Chapter Text
461. 축언 (1)
‘죽일까.’
그것이 순간적으로 성진의 머릿속을 온통 사로잡은 생각이었다.
오늘은 피치 못하게 여럿의 목숨을 앗아야 했던 날이었지.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성진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순수한 살인 충동을 느꼈다.
델크로스에서 처음 눈을 뜬 후, 시구루트 시구르슨이나 지그스문트 전 백작 부인을 대면했을 때를 제외하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죽일까.’
당위성 또한 충분하다. 비단 아버지나 성황가 사람들의 안전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강렬한 예감이 계속해서 그의 머리에 경종을 울리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두면 저 여자는, 언젠가 제국에 큰 해악이 되어 돌아오리라.
‘죽일까.’
그럼에도 성진이 당장 호두까기를 뽑아 들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저 여자는 누군가로부터 아버지를 해치라는 명을 받았다. 하면 그것이 어느 한 사람의 명령이든, 아니면 ‘카야의 숨결’ 전체의 의도든, 여자의 목을 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잎사귀를 쳐 내도 잡초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물길을 막고 뿌리를 찾아 발본색원해야겠지.’
둘째. 성진은 아까부터 저 여자에게서 강한 위화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어설프게 순진한 척하는 꼬락서니가, 적어도 성진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암살자의 태도는 아니었으니까.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이미 도주 가능성도, 구조될 희망도 없을 텐데. 왜 되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아 가면서까지 부득불 목숨을 보존하려는 거야?’
아닌 게 아니라 저 민둥한 눈썹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뭐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예를 들면 성진에게 있어 저 여자는 가장 아래쪽에 괴인 돌과도 같았다. 거슬린다고 무심코 뽑아내는 순간,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는 폭탄과도 같은 존재.
“…….”
꾸욱.
저도 모르게 호두까기를 힘주어 말아 쥐고 있는데, 뒤에서 쌍둥이-정확히는 그들이 빙의된 암살자-가 혼잣말을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대로 놔둬도 괜찮아? 모레스를 말려야 하지 않을까?”
“글쎄? 그래도 그 애에게 화낼 때보다는 나은 거 같아.”
“응, 생각보다 이성을 유지하고 있긴 한데. 너도 알잖아? 쟨 그럴 때가 훨씬 무섭다는 거 말이야.”
“하긴, 여의치 않으면 없는 업까지 야무지게 만들어서, 조목조목 이자도 붙여 때려잡을 녀석이지.”
시끄럽다, 이것들아! 다 들린다고!
‘저 녀석들은 가끔 나를 말리는 건지 부추기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니까.’
어쨌거나 가슴속이 분노로 뜨거워질수록, 성진의 머릿속은 점점 차갑게 식어 갔다.
‘분명, 저 여자에게 뭔가가 있어.’
잘 생각해 보면 의문점은 그 외에도 많았다.
‘왜 저 민짜 눈썹이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었지?’
물론 나이에 비해 뛰어난 실력을 가진 듯 보이기는 한다. 원숭이 망루 최고의 정예 요원, 다샤와 비교해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부리던 이들의 실력이 더 뛰어났던 것도 사실이다. 열댓 명 정도 되는 암살자들 하나하나가, 위층에서 성진과 한참 겨뤘던 여자와 맞먹는 기도를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민짜 눈썹은 어떻게 부하들을 통제하고 있었던 거지?’
듣자 하니 죽은 영혼들을 영혼석에 종속시켜 부려먹는 모양이던데, 그렇다면 실제로는 부하들 쪽이 민짜 눈썹보다 선배 기수가 되지 않나?
또 애초에 그들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던데, 대체 어떻게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걸까?
‘흐음…….’
성진의 동공에서 또다시 붉은빛이 점멸한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도, 민짜 눈썹의 머릿속에 염상 결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성진.]
바로 그때였다. 주변을 서성거리던 마왕이, 성진의 앞으로 포로로 날아와 입을 연 것은.
[저것의 영혼 말이야, 어딘가 이상해.]
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릴세!
“뭔데? 뭘 알아낸 거야? 설마 저 녀석도 규상 세계의 영혼이라거나?”
[아니. 그건 아니야. 몸도 영혼도 분명히 본상 세계의 인간이 확실해. 한데…….]
거기까지 말한 마왕은, 스르륵 성진의 귓가로 다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저것의 영혼에는 뭔가 각인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어.]
…각인?
[그래. 상위의 영혼이 새긴 영적 각인이지. 너무 얕고 흐려서 알아보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저건 분명 마기로 새겨진 마계 문자야. 악마들이 영혼에 축언을 새길 때 흔히 쓰는 방식이지.]
“축언? 인간이 악마에게 축복을 받았다고?”
[뭐, 정확히는 알 수 없어. 그 축언이 축복이냐 아니면 저주냐를 판단하는 것은 다분히 주관의 영역이니까.]
단지 악마가 손수 새겨 둔 것이니만큼, 순수하게 좋은 뜻을 가질 리는 없을 거라나?
“그래서 뭐라고 새겨져 있는데?”
[음, 근데 그걸 잘 모르겠단 말이지…….]
마왕은 불꽃을 이리저리 비틀며 난처한 듯 몸을 꼬았다.
[아무리 축언을 유심히 살펴도, 도통 내용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거든.]
“글자가 눈에 빤히 보이는데도? 대체 어째서?”
[아마 이걸 새긴 자가 굳게 비밀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했나 보지.]
그리고 그건 제법 심각한 문제를 의미한다고 마왕이 덧붙였다.
[생각해 봐. 그런 제한은 보통 자신보다 하위의 존재에게만 발휘되는 거라고. 그런데 이 위대하신 불의 마왕께서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하고 있잖아?]
그 말인즉슨-
[어쩌면 말이야, 아니, 거의 확실한 사실일 테지만, 저 눈썹 없는 여자는 고위 마왕들 중 하나의 권속일지도 모른다는 뜻이야.]
“…….”
[조금 신기한 건, 저것이 어떻게 각인의 과정을 견뎌 냈나 하는 거지만. 평범한 인간의 영혼은 고위 마왕의 의지에 스치기만 해도 힘없이 소멸하기 십상이거든.]
“음.”
성진은 슬쩍 쌍둥이가 씐 암살자를 돌아보았다. 극악무도한 체스 테러범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영혼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가장 믿음직스러운 녀석들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바로 우리에게 물어보는 건 반칙이라고, 모레스.”
“맞아, 우리도 나름 지켜야 할 선이란 게 있어서.”
“물론 우리가 모른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야 우리가 모르는 것은 거의 없지만.”
칼같이 거절하는 것치고는 잘난 척을 잊지 않는 쌍둥이였다.
혹시나 하고 헤이즈와 벨린다를 바라보자, 그들 역시 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도움이 되지 못해 참으로 면목 없습니다, 주인이시여.]
[크흐흑! 내 영혼의 주인이시여! 이 쓸모없고 못난 종을 부디 엄벌로 다스려 주옵소서어어어!]
콸콸콸!
‘어, 헤이즈. 넌 제발 울지 좀 마. 보고 있으면 너 진짜로 무섭다고!’
결국 성진은 한숨을 쉬며 마왕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나한테 보여줘.”
[뭐?]
“그 축언이 정확히 어디에 있지? 위치만 알려주면 내가 한번 볼게.”
그러자 마왕이 조금 난처한 듯 민짜 눈썹의 머리 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글쎄, 어떨까? 이성진, 엄밀하게 말하면 넌 제대로 된 영안을 가진 게 아니야. 네 멋진 염상 결정이 직접 감지할 수 없는 정보를 시각 정보로 치환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그런데 영혼에 정밀하게 새겨진 마계의 축언이 보일까? 넌 마계 문자도 모르잖아?]
“상관없어. 괜찮다는 생각이 들거든.”
[으음…….]
마왕은 반신반의하는 기색이었지만, 일단은 성진의 요청에 따라 순순히 민짜 눈썹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여자의 어깨 부근에서 빙글빙글 재주를 넘었다.
“히익?! 이거 ?미까?”
“요정님이다. 움직이지 말고 거기 가만히 있어.”
“녜에…….”
“…….”
아쉽게도 마왕의 말대로, 성진의 눈에 제대로 된 문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거뭇한 얼룩 같은 음영만이, 여자의 영혼에 마기의 개입이 있었음을 알려줄 뿐.
하지만 자세히 보이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가만히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성진의 뇌리에는 그 축언의 의미가 하나도 남김없이 전달되고 있었다.
-스러짐을 두려워 말라. 너의 골분과 육편은 수없이 많은 씨앗으로 화할지니. 그것들은 재로부터 발아하여 마침내 흐드러지리라.
어, 이거 어째, 누가 새긴 축언인지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성진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눈앞의 여자를 노려보았다. 고위 마왕의 권속인 주제에, 참으로 가증스럽게도 순진한 척을 하고 있는 여자를.
“근데 너 말이야. 아무래도 낯이 익어.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냐?”
“녜에? 하하, 그럴 리가요…….”
“그래? 너 이름이 뭐냐?”
“앙이, 이름을 버린 암살자에게 이름을 막 무르시면…….”
“그래서 뭔데?”
“이, 잊어버려씁미다!”
“…….”
“진짜에여…….”
죽어도 이름을 밝히지 않으려는 걸 보니, 성진이 어디선가 만났던 놈이 확실한 모양이다. 대충 가명을 들먹이지 않는 것은 좀 의외였지만.
‘아니면, 자신의 이름에 관해서는 거짓말을 못 하는 건가?’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일이다.
그로부터 한동안 성진은, 여자에게 ‘카야의 숨결’의 조직 구성과, 그들이 만든 ‘머리탑’이라는 구조물에 대해 집요하게 캐물었다.
“마법사? 그가 생체 인형과 머리탑을 만들었다고?”
“녜에. 하지만 저도 그의 정체는 잘 모름미다아…….”
물론 여자가 제대로 알고 있는 핵심 정보는 많지 않았다.
[진실이야.]
이따금 마왕이 확답을 해 주긴 했지만, 그럼에도 성진은 그녀의 태도에서 묘한 거슬림을 느끼고 있었다.
거짓말에 너무나 능숙한 나머지, 혈압이나 맥박 같은 불수의적 징후들까지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듯한.
그렇게 얼마나 문답을 주고받았을까.
“…저기, 근데 절 안 죽이시는 검미까?”
순진한 물음과 함께 여자의 눈에서 힐긋, 기이한 초록색 안광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순간 성진은, 신기하게도 그녀의 눈동자에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은 희미한 사념 한 조각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왜 안 죽이지? 어떻게 이걸 피해 가는 거지?
성진은 사납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를 보고 있던 21호가 순간 흠칫, 뒷걸음질을 쳤을 정도로 스산한 미소였다.
“…그래.”
기왕 저쪽에서 선물을 보내왔으니, 이쪽에서도 적절한 답례를 해야겠지.
요령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본의 아니게 얼마 전, 마사인 경의 영혼을 대상으로 직접 실험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영혼을 망가뜨릴 정도로 강하지는 않은, 그러나 한 인간의 인생을 옥죄기에는 충분한 강도로 저주를 속삭이는 방법을.
그래서 성진은 고개를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입술을 가만히 그녀의 귓가로 가져갔다.
“…….”
“……!”
성진의 긴 속삭임을 들은 민짜 눈썹이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그, 그럼… 정말로 절 사, 살려 주시는 검까?”
“지금 당장은 그렇다. 물론 나름의 대가는 치러야겠지만.”
“대가…요?”
“응. 잘 보니 내 일행의 머리에 못 보던 큰 혹이 나 있지 않겠어?”
성진이 싱긋 웃으며 주먹을 들어 올리자, 민짜 눈썹이 기겁하며 항변했다.
“앙이! 그런 게 어디 이써요! 그럼 지금까지 날 때린 건 대체 뭐……!”
뻐억!
* * *
“으악!”
청년이 갑자기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지자, 곁에 있던 여인이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주인이시여!”
“아니…….”
청년, [파종]은 떨떠름한 얼굴로 비파를 내려놓았다.
갑자기 충격을 받은 정수리가 얼얼했다. 오랜만에 종단으로 돌아와 탱자탱자 여가 생활을 즐기려 했더니, 갑자기 이게 웬 날벼락이지?
“뭐지? 누군가가 내가 뿌린 씨앗과의 연결을 간파했어. 가볍긴 하지만 직접 이쪽으로 타격까지 전해 왔지.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텐데…….”
그럼에도 여자는 여전히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파종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봐라. 파종의 대사제야.”
“예, 저의 진정한 주인이시여.”
“네 선임이 언제 죽었었지? 네가 지금 몇 번째 대사제더라? 어째 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애들이 점점 멍청해지는 거냐?”
“…….”
여자는 잠시 침통하게 입술을 깨물었지만, 곧 표정을 감추고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저는 아마 세 번째일 겁니다.”
“그렇군.”
파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방금 타격을 받은 녀석은 보통의 씨앗은 아니었으리라. 자신과 이 정도로 긴밀한 연결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대사제 이상의 권속일 텐데. 그간 하도 파종해 둔 숫자가 많다 보니 도통 누구인지 특정할 수가 없었다.
‘이것 참, 여기저기 씨 뿌리듯 대사제들을 임명해 놓은 게 실수인가? 누가 누군지 기억이 나야 말이지…….’
근데 이상하지. 왜 아까부터 몸에 한기가 드는 걸까. 벌레라도 몸에 달라붙은 듯 묘한 찝찝함까지 느껴지고.
‘병은 아니겠지. 이번에는 제법 건강한 몸을 손에 넣었으니 말이야.’
파종은 아직도 조금 얼얼한 머리통을 어루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 * *
테레로 돌아가는 길은 제법 멀게 느껴졌다. 아마도 정신을 잃은 13호를 둘러메고 있었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으리라.
21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앞서서 걷고 있는 모레스 황자를 바라보았다.
새벽의 대활극과, 적의 거점에 마련되어 있던 수상한 제단. 그리고 황자가 지옥에서 불러낸 무시무시한 악령들까지.
오늘 21호는 황자와 결코 가볍지 않은 비밀들을 공유한 것 같았다. 옳고 그름을 섣불리 판단할 수 없고, 어떻게 폐하께 보고 드려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비밀들을.
‘하지만……,’
뭔가를 잘 모를 때는, 우선 일의 결과를 생각하면 된다.
‘어쨌거나 우리는 13호 선배를 무사히 구했고, 무엇보다도 폐하의 호문클루스를 ’카야의 숨결‘로부터 지켜 냈다.’
그래, 그거면 된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21호는, 마을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조심스럽게 황자에게 입을 열었다.
“저하. 실은 일전에 그 눈썹 없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래?”
그리 놀랍지 않다는 듯한 반응. 그 모습이 어째 자신이 모시는 이를 묘하게 닮아 있어, 21호는 착잡한 기분이 되었다.
“일전에 폐하의 명을 수행하던 중, 황도 근교에서 저 여자와 검을 교환한 적이 있습니다.”
“응, 네 실력에 용케도 벗어났네.”
“…….”
그야말로 찰나의 조우였기에 가능했으리라. 또한 성황이 미리 언질해 준 경고 덕에도.
-교전과 추격은 절대 금하겠다.
황자에게 그렇게 설명하자, 그는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흠. 아버지가 말이지…….”
“왜 그러십니까, 저하?”
“실은 아까부터 아버지에 관해 좀 고민되는 것이 있어.”
그렇게 운을 뗀 모레스 황자는, 낙담한 표정으로 21호를 돌아보았다.
“사실 말이야, 나는 오늘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어.”
“…….”
21호는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네?”
“엄밀히 말하면 처음이 아니지만, 어쨌든 ‘내’ 손으로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은 건 처음이란 말이야.”
“……!”
“물론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지. 하지만 자식으로서 어떻게 부모에게 이 일을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겠어?”
물론 아버지라면 이미 모든 걸 알고 계시겠지만, 하고 황자가 덧붙였다.
“그……!”
“난감하네. 대체 아버지에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지?”
21호는 입을 뻐금거렸지만,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새삼스럽게 커다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긴 그래. 모레스 황자는 아직 열여섯의 생일도 지나지 않은 소년이다. 황궁에서 고이 자란 그가, 지금까지 사람을 죽여 봤을 리가 없지 않은가!
“끄응…….”
“…….”
모레스 황자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고민했지만, 21호는 감히 그에게 더는 뭐라고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그렇게 완전한 침묵에 휩싸인 채, 그들은 테레의 여관에 도착했다. 이미 완전히 동이 튼 이후의 일이었다.
“…아버지.”
그리고 황자는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성황을 대면했다.
“…….”
하지만 그들에게 별다른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성황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없이 모레스 황자의 머리에 손을 얹었고, 이내 위로하듯 가볍게 토닥이기 시작했다.
“어…….”
긴장하고 있던 황자의 얼굴이 배시시 풀어진다.
그 모습을 확인한 21호는, 더없이 복잡한 심정에 사로잡혀 조용히 눈을 감았다.
Chapter 162: Chapter 462
Chapter Text
462. 축언 (2)
성황이 어떠한 질문도, 질책도 하지 않았기에 성진의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해야 했는데, 바로 밤새 한잠도 자지 못해 안색이 꺼멓게 죽은 마사인 경이었다.
“…괘, 괜찮아? 마사인 경?”
성진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무리도 아니었으리라. 잠시 바람 쐬러 나갔다는 황자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질 않으니 긴장으로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갈 밖에.
때문에 그는 기감을 곤두세우고 마을 어귀를 서성이다가 끝내 밤을 꼬박 새고 말았다는 모양이었다.
“저하! 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마사인은 성진을 보자마자 여느 때처럼 버럭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러나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 배를 움켜쥐었는데, 극도의 긴장이 풀리는 순간 위산이 왈칵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
“헉?”
기겁한 성진은 그를 다짜고짜 성황 앞으로 데려갔다.
“아니, 저하. 저는 정말로 괜찮습… 잠깐! 그것보다 어서 대답 좀 해 보십시오! 도대체 밤새 말도 없이 어딜 다녀오신 겁니……!”
…쿨.
놀랍게도 성황이 이마에 손을 대자마자 마사인은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아마 지난번처럼 영혼을 강제로 다른 차원에 날려 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모레스. 마사인이 일어나거든 제대로 그를 마주하고 대화해야 할 것이다.”
잠잠해진 기사의 머리 위로 신성력을 쏟아 내며 성황이 나직하게 충고했다. 대단히 난감한 요구였다.
“으음, 아버지. 근데 그게 조금…….”
“…….”
“…네, 알겠습니다.”
향후 마주해야 할 마사인의 반응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어쩌겠는가, 지은 죄가 있으니 고분고분 대답할 밖에.
그 외에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마사인과 마찬가지로, 성진과 21호 역시 성황에게 듬뿍 신성력 치료를 받았다. 그리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자잘한 생채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밤새 암살자들을 패고 다니느라 은근히 피로가 쌓이기도 했고.
다샤 역시 성황에게 제대로 치료받았다. 다행히 그녀의 부상 자체는 그리 심하지 않았는데, 대신에 수일간 지속된 허기와 수면 부족으로 몸이 많이 축나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다샤는 성황의 치료가 끝나고도 바로 눈을 뜨지 못했다.
“아마 정신적 피로 때문인 듯합니다. 요 며칠간 잠시도 긴장의 끊을 놓지 않고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였을 테니까요.”
21호의 말에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다샤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레지나로 떠나지.”
자코모 밀로도 잡았고 아버지도 무사히 만났다. 그럼 더 이상 급한 일은 없잖아? 그래서 성진은 다샤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차분히 서류 작업을 시작했다.
“뉴비야, 그건 뭔데?”
그새 또 판게아 크로니클에 다녀왔는지, 오웬이 먹거리들을 잔뜩 짊어지고서 성진의 방을 기웃거렸다.
“사업 계획서를 좀 손보고 있어.”
“사업 계획서?”
“응. 올리버의 ‘준 상단 사업자증’을 반납하고 정식으로 황궁 투자를 받아야 하니까.”
황궁이 직접 투자하는 사업의 기준이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비록 아멜리아 누님이 절차를 간소화해서 효율성을 대폭 높였다곤 하나, 그 내용까지 부실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니까.
한데 시골 촌놈인 올리버가 어느 세월에 모든 절차를 끝낼지 누가 알겠는가.
“올리버는 한시라도 빨리 어엿한 사업체를 차려서, ‘마사인 농법’으로 길러낸 테오신테를 온 대륙에 공급해야 한단 말이야.”
이건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올리버는 별 힘 안 들이고도 황궁 투자를 따낼 테고, 성진은 겸사겸사 자문료를 왕창 챙겨먹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오웬의 귀를 사로잡은 것은 어째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단어였다.
“…마사인 농법? 그게 대체 뭔데?”
“어, 앞으로 올리버는 마사인 경이 제공한 방법으로 테오신테를 재배할 거거든. 그리고 판매 수익을 빠짐없이 그와 나누게 되겠지. 일종의 농업 기술료랄까.”
그러자 오웬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해? 마사인 형님은 지금까지 농사라곤 지어 본 적이 없을 텐데?”
그 순진한 물음에 성진이 사악하게 이를 드러냈다.
“물론 세상에 그런 농법은 없어. 전부 사기 계약이지.”
“…엥?”
“하지만 때는 늦었어. 마사인 경은 이미 내가 준 서류에 서명을 해 버렸거든! 그러게 나중에 후회할 일 하지 말고 진작 조심해야 하는 거라니까.”
성진이 깃펜을 살랑살랑 흔들며 턱을 치켜세웠다. 알겠어, 오웬? 너도 잘 새겨들으라고. 마사인 경이나 로건 같이 잘 모르는 문서에 함부로 서명하면 인생 망치는 것도 순식간이란 말이야.
“한번 상상해 봐. 이후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지. 마사인 경이 모르는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팔며 대륙에서 돈을 마구마구 벌어들이는 만행을 저지를 거야.”
“……?”
“그리고 마사인 경이 방심하는 사이에, 그 파렴치한 작자는 몰래 은행으로 숨어들어 마사인 경의 통장에 차곡차곡 출처 모를 돈을 쌓아 버리겠지.”
“……?”
“사업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액수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어. 그때가 되면 더 이상 손을 쓸 방도가 없다고. 마사인 경은 점점 높아져 가는 돈 방석에 올라 극도의 어지러움을 호소할 테지만, 이미 까마득히 멀어져 버린 그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 주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야.”
“……?”
“결국 죄 없는 마사인 경은 서명 한 번 잘못한 대가로 평생 돈방석에서 내려오지 못한 채 끔찍한 비명을 지르게 되겠지. 그것 참 무시무시하지 않아?”
크크큭!
성진이 음험하게 숨죽인 웃음을 흘리자, 작은 놋쇠 그릇에 앉아 있던 마왕이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이성진, 너 지금 뭐 하냐?]
닥쳐! 이럴 땐 그냥 옆에서 같이 사악하게 웃으면 되는 거다. 이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마왕 놈아!
“음…….”
오웬은 대단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역시 일전에 성진의 요구로 잘 모르는 서류에 무지성 서명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이 만만찮아 보이네.”
“맞아. 완전 귀찮아 죽겠어.”
“근데 네가 괜히 여기서 바쁘게 일할 필요 있냐? 어쨌거나 우리는 곧 레지나로 돌아갈 거잖아. 그럼 전처럼 슈미트 지부장에게 맡기라고. 사업에 관해서라면 아무래도 그가 너보다는 전문일 거 아냐?”
“글쎄…….”
성진이 깃펜을 내려놓으며 슬쩍 미간을 구겼다.
“사실 그럴까도 생각해 보긴 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요즘 슈미트 지부장을 너무 부려먹는 것 같아서 말이지.”
이미 참연어 사업은 물론, 북부 경제 재건 사업까지 모두 그에게 일임한 상태다. 게다가 최근에는 성진의 알리바이가 되어 주는 등 개인 비서 노릇까지 수행하는 중이지.
아무리 ‘악마의 명부’로 목줄을 틀어쥐었다지만, 더 이상 그의 업무를 늘리는 건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였다.
“레지나로 돌아가면, 이참에 새로운 비서라도 하나 고용해 볼까.”
곁에서 성진 대신 일차적인 정보들을 취합하고, 사람들을 이리저리 굴려 줄 이가 있으면 좋을 텐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성진은, 곧 턱을 괴며 깃펜을 집어 들었다.
“뭐, 나중에 생각해 봐야겠다. 어쨌거나 다샤가 푹 쉴 수 있게 오늘 하루는 여기 머물 거니까. 그동안 쉬엄쉬엄 일이나 하지 뭐.”
* * *
[네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단다.]
다샤는 지금 꿈을 꾸고 있었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이제까지 완전히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꿈을.
[만약 네가 이곳에서 두각을 드러내면 그리 오래지 않아 프림로즈 환락가로 팔려가게 될 거야. 초반에는 그곳에서 제법 고생하겠지만, 그래도 너라면 점점 아세인의 지하 세계에 영향력을 넓혀갈 수 있을 테지.]
그래, 생각났다.
그것은 다샤가 수도원이 운영하는 한 고아원에 들어간 날의 일이었다. 의기소침하게 앉아 담당 사제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처음 보는 여자가 방안으로 들어와 그녀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누구지? 이곳의 사제님인가?’
어린 마음에도 다샤는 여자가 몹시 의심스러웠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온통 검은색 일색인 옷차림에 심지어 머리에도 검은 베일을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게는 재능이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은밀하게 약점을 파헤쳐, 종국에는 그들 모두를 휘두르기에 충분한 재능이. 너를 모질게 착취하던 자들은 머지않아 하나둘 네 발아래에 무릎을 꿇게 될 거란다.]
“…….”
다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프림로즈 환락가가 대륙에 어떤 악명을 떨치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으니까.
흉흉한 시대였고, 빈곤한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었다. 그녀와 같은 고아들은 끊임없이 생겨났고, 그 중 상당수의 아이들이 환락가로 흘러들어 가는 것도 공공연한 사실.
게다가 다샤는 제법 얼굴도 반반한 편이었으니 운 나쁘면 인생이 그런 식으로 흘러갈 수도 있으리라 스스로 상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 만난 어린애에게 대놓고 그런 희망 없는 소리를 하다니, 저 사람도 참 배려심 없는 사제님이 아닌가.
[마음에 들지 않니? 그럼 다른 선택지도 있어.]
“…그게 뭔데요?”
[되도록 눈에 띄지 말고 조용히 자신을 죽이고 지내렴. 그러면 네가 10살이 되기 전에 ’오베론의 손’에 발탁될 거야. 그들은 네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오랜 시간 공들어 훈련시키겠지. 넌 언젠가 오베론의 손이 배출한 가장 뛰어난 암살자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거란다.]
암살자? 그건 상상해 본 적 없는 선택지였다.
[너는 늘 죽음을 몰고 다닐 거야. 네 손에서는 항상 피가 마를 일이 없을 테고, 너의 발걸음 뒤에는 사람들의 주검이 낙엽처럼 쌓여 가겠지. 마침내 너는 더없이 충실한 죽음의 사도가 되어, 온 대륙을 암살의 공포에 떨게 만들 수 있을 거란다.]
“와…….”
그 무시무시한 예언에 어린 다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스스로 힘을 얻는다는 면에서는 언뜻 환락가보다 나은 선택지 같기도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 역시 너무나 삭막하고 처절한 인생이 아닌가.
[하지만 네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너는 ‘다샤’라는 본래의 이름으로 살기는 어려울 거야.]
…사제님에게 내 이름을 말한 적이 있던가?
언뜻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다샤는 곧 그 의문을 깨끗하게 잊어버렸다. 지금 당면한 선택지가 어린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던 까닭이다.
어쩌면 여자의 예언을 단순한 헛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묘하게 뇌리에 파고드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린 소녀의 영혼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힘이 있었다.
그래서 다샤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매달리듯 물었다.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하죠? 사제님이 말한 것과 다르게 살려면, 제 이름을 끝까지 지켜 내려면 앞으로 뭘 해야 하나요?”
[…….]
여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샤는 순간 베일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고 느꼈다.
[…그래. 그렇구나.]
여자가 다샤의 볼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그녀로부터 풍기는 짙은 장미향이 가까워지고, 어깨 아래로 사르륵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서늘한 마찰음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다샤의 귓가에,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럼 네 힘으로 수도원장을 쫓아내 보이렴. 그럼 너에게 또 다른 새로운 길이 열릴 거야.]
…진심인가?
이제 막 수도원에 들어온 작은 고아 소녀가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단 말이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빤히 그녀를 올려다보자, 여자는 우아한 손짓으로 다샤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걱정하지 말렴. 내가 너에게 작은 축언을 내려 줄게. 언젠가 네가 자신의 이름을 무사히 되찾을 수 있도록.]
축언?
[다샤. 죽음이 풍기는 향기를 똑똑히 기억하렴. 그리고 너의 운명과, 운명이 점지한 모든 사명들을 그에게 맡기는 거야. 그러면 죽음은 아마도…….]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다샤는 어느새 처음 보는 사제의 손에 이끌려 고아들이 모여 있는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 수도원에 온통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사제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 * *
수수께끼의 검은 여자와 나눴던 대화는 점점 다샤의 머리에서 흐릿해져 갔다.
하지만-
‘수도원장을 쫓아내야 해.’
수도원에서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다샤의 머릿속에서는 그러한 생각이 점점 확고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함께 지내는 고아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제들은 조심스럽게 수도원장의 눈치를 살폈고, 그의 집무실에는 매일같이 수상한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수도원장의 손에 보석 반지가 하나둘 늘어가는 동안, 불쌍한 고아들의 행방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했다. 저 수도원장은 뭔가 끔찍한 비밀을 숨기고 있다.
“으와, 무섭다. 다샤 넌 사제님들 말이 맞는다고 생각해? 정말로 걔들이 주신께 기도를 올리지 않아 지옥으로 끌려간 걸까?”
새빨갛게 불어 터진 손을 호호 불던 라미라가 다샤에게 소곤거렸다. 그녀는 고아원에서 새로 사귄 친구였는데, 남들과 다른 피부색을 가진 다샤와 기꺼이 어울릴 만큼 털털한 소녀였다.
“그건 아냐. 분명 수도원장이 고아들을 어딘가로 몰래 팔아 치우는 거야.”
“팔아? 어디로?”
“아마도 레지나의 불야성이나 프림로즈 환락가겠지. 거기서는 우리 같은 고아들을 싼값에 구입해서 평생 지옥처럼 부려먹는다고 하더라.”
“히익! 정말? 그, 그럼 우린 어떡해?”
라미라의 호들갑에, 다샤는 그녀의 툭 튀어나온 광대를 바라보았다.
“…음, 넌 아마 괜찮지 않을까?”
다샤가 확답해 줄 수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서글프게도 라미라가 수도원에서 가장 못생긴 아이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주근깨 가득한 사내아이 페터라면 모를까, 그녀를 사려는 이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이익! 정말 고마워, 다샤! 그거 참 위안이 되는 소리네!”
“억! 정말 고마우면 이거 좀 놓지 그래?”
“닥쳐! 시커먼 바르샤 잡것아!”
“네가 할 소리냐? 흙이나 파먹고 다니는 아나톨리아 땅개가!”
엎치락뒤치락거리며 한참 쌈박질을 한 후, 둘은 몰래 숨겨 둔 빵 조각을 나눠 먹으며 화해했다.
“그래서 이제 어쩌려고?”
“응. 일단 수도원장을 외부 교회에 고발할 증거를 찾아야 해.”
수도원에서 자체적으로 해결책을 찾을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수도원의 최고 권력자인 원장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한, 이곳의 사제들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할 것이 빤했으니.
“원장을 고발할 증거? 우리가 무슨 수로? 그냥 순환 근무하는 사제님들 중에서 착한 사람을 찾아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안 돼?”
“그런 식으로 무작정 호소해서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거야. 변변한 증거도 없이 원장을 모함하는 고아 새끼들의 말을 누가 믿겠어?”
거기다 이 일의 전말이 밝혀지면 수도원은 물론이고 교회의 위신에도 크게 금이 갈 터다. 일개 사제가 두 손을 걷어붙이기에는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사안.
‘그러니까…….’
차라리 수도원장의 작은 허물을 교회에 입증하는 쪽이 승산이 높았다. 교회 재산을 소량 횡령했다든지, 수도원의 규율 일부를 어겼다든지. 그렇게 크게 떠들썩해지지는 않으면서 책임자만 가볍게 갈아치울 수 있는 정도의 죄목을.
남보다 일찍 철이 들어야 했던 다샤는, 안타깝게도 그러한 교회의 생리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앗, 다샤! 저기 수도원장이야. 이번에도 수상한 손님들과 함께 있어!”
“쉿! 함부로 쳐다보지 마, 라미라. 괜히 끌려가서 얻어맞을라.”
재빨리 고개를 숙인 다샤는, 그들의 대화를 조금이라도 엿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언젠가 수수께끼의 여인이 속삭여 준 축언이 환청처럼 떠올랐다.
-다샤. 죽음이 풍기는 향기를 똑똑히 기억하렴…….
Chapter 163: Chapter 463
Chapter Text
463. 축언 (3)
“당신들이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참으로 곤란하오만.”
마티유 원장은 큼직한 루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운을 뗐다. 그는 나이가 지긋한 상급 사제로, 벌써 십 수 년째 던스턴 수도원의 원장직을 맡고 있었다.
“고아원을 쥐꼬리만 한 기부금으로 운영하는 데는 한계가 있소.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껏 사명감 하나만으로 사방에서 몰려드는 거지새끼들을 받아주고 있었단 말이오. 한데 그대들이 약속된 물량을 처리해 주지 않으니, 벌써 몇 달째 적자가 쌓여 가고 있지 않소이까?”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인이 차가운 눈으로 마티유를 훑어 내렸다. 정확히는 그가 걸치고 있는 쓸데없이 화려한 장신구들을.
“불평불만 늘어놓는 것치고는 사정이 그리 궁해 보이지 않는군. 듣자 하니 고아들을 환락가에 넘겨 쏠쏠하게 재미를 본다는 모양이던데.”
“그런 식으로라도 처분할 수 있는 건 얼마 안 되는 상등품들뿐이오. 지난달에도 겨우 사내놈 넷과 계집애 일곱을 넘겼을 뿐이니까. 쓰레기는 여전히 세상에 넘쳐나고, 그것들은 끝도 없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소.”
거기까지 말한 마티유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여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검은 사제복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본래라면 절대 이 수도원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특별한 손님을.
“그러니 당신들 ‘지하 교단’에서라도 그것들의 쓸모를 찾아 줘야 하지 않겠소?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도통 목적을 알 수 없는 저 고아 새끼들에게 말이오.”
“…주신을 섬기는 종이 입에 담을 말은 아니군.”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그의 언행에, 여자의 얼굴에 강한 경멸의 표정이 들어찼다. 그러나 마티유 원장은 그녀의 반응 따위 아랑곳없이 그저 가볍게 귀를 후비적거렸을 뿐이다.
“글쎄, 적어도 주신께서 방금 전 발언으로 이 마티유를 벌하실 것 같지는 않소만. 애초에 그분부터가 지독히도 인간들을 차별하시는데.”
“헛소리! 주신께서는 절대……!”
“아아, 쓸데없이 원론적인 토론으로 시간을 낭비하고픈 마음은 없소, 교구장. 그것은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든 경험적으로 터득하게 되는 진리잖소? 당신이나 나나 내심은 납득하고 있는 사실이지.”
잠시 수도원장을 노려보던 여자는, 곧 의자에 몸을 묻으며 딱딱한 얼굴로 대꾸했다.
“어쨌거나 우리의 입장은 바뀌지 않아. 애열 교단은 이제 이곳의 고아들을 데려가지 않을 테니까. 말했지 않나? 위대하신 [애열]께서 더 이상 아이들의 ‘헌신’을 바라지 않으신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마티유는 그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신들이 섬기는 그 [애열]께서는 작년까지만 해도 매년 수십 명씩 꼬박꼬박 인신 공양을 요구-”
“마티유 원장!”
“…실례. 고아들의 ‘헌신’을 요구하지 않으셨소? 설마 당신들, 이 마티유 몰래 다른 곳에서 제물을 조달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최근 [애열] 교단에 뭔가 커다란 변화가 생겨난 것은 마티유도 잘 알고 있었다.
애열의 대주교가 갑작스레 교체되고, 각 교구장들에게도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생소한 규칙들이 하달되었다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일체의 거래를 중단한다고?’
그가 암암리에 애열 교단에 인간 제물을 넘겨온 지가 어언 10년에 이른다. 그래서 저들의 생리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같은 주신을 섬기는 형제라 주장하지만, 지하 교단의 행태는 오히려 삿된 악마 숭배자들을 더 닮아 있었다.
인간들의 육신과 영혼을 쥐어짜서라도 대가를 바치지 않으면, 그들이 모시는 ‘대주교’로부터 어떠한 은총도 받을 수 없는 사악한 집단.
한데 지금, 그 음침한 집단의 일원이 한 점 거리낌 없는 얼굴로 이렇게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야 우리가 옳게 된 ‘대주교’를 맞이한 거지. 그분께서 드디어 진정한 [애열]의 뜻을 우리에게 전하시게 된 것뿐.”
“하!”
마티유의 얼굴에 왈칵 짜증이 치솟았다.
“그럼 당신은 대체 이곳에 왜 찾아온 거요? 더 이상 나와 거래를 하지 않겠다면서, 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거지?”
“당신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지. 우리는 지금 한 소년을 찾고 있다.”
“…소년?”
특정한 조건의 제물을 원하나? 마티유는 일순 그렇게 생각했지만, 교구장의 표정을 보니 딱히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 검은 머리에 회색 눈을 가진 소년이지. 아마 올해로 14세가 되었을 텐데, 혹시 이 고아원에서 그런 소년을 데리고 있지는 않나?”
“14세라면 이곳에 있기에는 나이가 좀 많은데…….”
“나이에 비해 훨씬 어려 보일 가능성도 있다. 듣자 하니 어릴 때부터 끼니를 거르는 일이 잦았다더군.”
“흥! 이 고아원에 그런 것들이 어디 한둘이오?”
마티유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교구장의 눈빛은 확고하기만 했다.
“이맘때쯤 이곳에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애열께서 말씀하셨다. 정말로 모르는가?”
“그러니까, 여기 애새끼들이 워낙 많아야…….”
“소년은 무척이나 빼어난 외모를 지녔다고 하지. 그러니 절대 못 알아볼 수 없을 거다.”
…글쎄. 만약 그런 녀석이 이곳에 들어왔었다면, 진작 환락가로 팔려 가지 않았을까?
마티유는 소년을 찾는 데 지극히 회의적이었지만, 굳이 그 생각을 교구장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그녀가 품속에서 이내 커다란 보석 하나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부디 힘을 써 주게. [애열]께서 지금 그 소년을 애타게 찾고 계시니.”
“…그놈을 찾아서 뭘 하시려고?”
“그저 고이 지키려 하심이다.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 따지고 보면 [애열]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랑, 그 자체나 마찬가지시니.”
“…….”
염병.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아들의 영혼을 산채로 쏙쏙 뽑아 먹은 주제에, 그놈의 사랑 타령은…….
“이건 선금으로 넘기지. 만일 그를 찾게 되면 값은 두둑하게 치르겠다.”
“내 열과 성을 다하겠소!”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마티유 수도원장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의 손에서 보석을 낚아챘다.
* * *
거리가 제법 멀었던 터라, 다샤는 그들의 대화를 온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드문드문 보이는 입 모양을 토대로 겨우 몇 마디의 단어를 짐작해 볼 뿐.
‘…고아… 쓰레기… 적자… 공냥? 아니 공양…….’
‘헉! 다샤, 고개 숙여! 손님이 지금 일어나려 해. 잘못하면 들킨다고!’
‘알았어.’
라미라의 신호에, 다샤는 재빨리 몸을 피해 수도원 뒤편으로 줄행랑쳤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방금 알아낸 단어들을 열심히 되뇌며 정보를 조합해 보았다.
‘애열, 제물, 그리고 회색 눈의… 소년…….’
알아낸 단어는 그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다샤는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단순히 돈에 눈이 멀어 아이들을 팔아넘기는 줄 알았는데, 실은 수도원장 선에서 이미 지하 교단과의 연결이 있었던 거야?’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하다. 아무리 어린 그녀라 할지라도, 현재 지하 교단들이 대륙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으니까.
[애열], [파종], [참회], [안식].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이들 네 개의 지하 교단들은, 표면적으로는 주신을 섬기는 견실한 종파였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을 위해 벌이는 짓거리들은 빈말로라도 견실하다 할 수 없었다.
분별없이 행해지는 해괴한 의식들과 잔인한 인신 공양들. 그 때문에 이미 많은 지역에서 그들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관련자들을 종교재판에 회부하는 추세다.
만약 이 일이 세상에 밝혀지면 던스턴 영지에 엄청난 피바람이 일겠지.
‘어떻게 하지? 이건 나 혼자서 뭔가 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이미 환락가에 고아들을 팔아넘기는 일 따위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운이 없으면 고아원 전체가 수도원장과 함께 종교 재판에 말려들지도 모르니.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우르르릉!
다샤의 암담한 심정을 반영하듯,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며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 * *
그렇게 다샤가 꿈속을 헤매고 있는 사이, 성진 일행이 머무는 여관에도 또 다른 천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으르르르릉!
“미, 미안, 마사인 경!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런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십시오! 저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어디 한두 번입니까!”
크아악!
모레스 황자를 앞에 두고, 마사인 경은 숫제 입에서 브레스를 뿜어내는 듯했다.
“말씀 좀 해 보십시오! 그간 제가 저하께 그렇게나 많은 것을 바랐습니까? 네?”
“아니, 그건… 꾸엑?”
“다른 게 아닙니다! 그저 미리 말을 좀 해 달라는 겁니다! 어디로 갈 거다! 언제까지는 돌아오겠다! 그런 간단한 전언 한마디 남기시는 것이 그렇게나 어려우셨습니까?”
“아니, 마사인 경. 그러니까 그거 다 오해라니까? 나도 처음에는 설마 그렇게까지 멀리 가게 될 줄 미처 몰랐… 켁!”
“모르긴 뭘 모릅니까! 웃기지 마십시오!”
하도 시끄러운 소리에 21호가 방문을 열어 보니-
탈탈탈!
모레스 황자가 호위기사에게 붙잡혀 앞뒤로 탈탈 털리는 중이 아닌가.
황족으로서의 예절이며 품위며 모조리 내다 버린 그 모습에, 21호는 잠시 멍하니 그들이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진정해. 잠시 이것 좀 놓고……!”
“네, 압니다! 저도 제 자신이 저하를 수행하기에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 잘 알고 있단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의 진심 어린 충정까지 그딴 식으로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니, 마사인 경. 그렇게 자기 비하를 할 것까진…….”
“지금 제가 절 비하하는 겁니까? 아니면 저하께서 저를 그렇게 취급하시는 겁니까!”
“아, 오해야! 물론 난 어디까지나 마사인 경을 믿고 있어! 마음 깊이 의지하고 신뢰하고 있다니까? 정말이야!”
“그런 영혼 없는 미사여구로 상황을 무마하려 들지 마십시오! 이제 다 소용없습니다!”
“빈말이 아니라고! 마사인 경이야말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검술 스승-”
“떼엑!”
21호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저들의 행태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기만당하는 듯한 불쾌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아니겠는가. 지금 저렇게 격렬하게 자괴감과 울분을 토해 내는 인간은, 실제 황궁 최연소 기사단장이자, 젊은 나이에 테카론 나이트를 목전에 둔 기재다.
그에게 멱살을 잡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모레스 황자는 또 어떤가. 이미 천재 검사라고 황도에 소문이 자자한 데다, 심지어는 원숭이 망루의 정예 요원인 자신마저 훌쩍 넘어서는 실력자 아닌가.
“13호 선배가 아직 눈을 뜨지 못했는데, 싸우려면 저 멀리서 좀 조용히 싸울 것이지…….”
21호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작게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울한 표정이 되었는데, 이 속이 뒤틀리는 듯한 불쾌감이 어디까지나 자신의 자격지심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왜 그렇게 뭔가 배고픈 얼굴을 하고 계세요? 21호 씨.”
그때, 에디스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접시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건 뭡니까?”
“가벼운 끼닛거리를 좀 가져왔어요. 동료분이 일어나시면 간단하게라도 요기를 하셔야 하잖아요?”
21호는 조금 감동했다.
그것참, 에디스 씨답지 않게 배려심 넘치는… 응? 잠깐.
“한데 에디스 씨. 그건 이 여관에서 파는 음식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네? 그야 당연하죠. 막 병석에서 일어난 사람이 어떻게 여관의 기름진 음식들을 소화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주방을 잠시 빌려 묽은 스튜를 좀 끓여 왔어요.”
…끓여 와?
21호는 바짝 긴장했다.
“그… 실례지만. 음, 에디스 씨. 혹시 그거… 맛은 보셨습니까?”
그러자 에디스가 허리를 쭉 펴며 얄미우리만치 상큼하게 대꾸했다.
“아뇨? 혹시라도 쓸개즙 맛이 나면 어떻게 해요?”
“이봐요, 당신……!”
그거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양심입니까?
그들은 잠시 그릇을 가운데 두고서 엎치락뒤치락 쟁탈전을 벌였다.
오러 유저인 전담시녀는 도통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지만, 21호는 어떻게든 13호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겨우 그녀의 스튜 그릇을 빼앗을 수 있었다.
“쳇! 21호 씨가 뭘 잘 모르시네. 본래 몸에 좋은 음식이 맛도 쓴 법이라고요!”
에디스의 쓸데없는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21호는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이 독극물은 제가 멀리 버리고 올 테니, 저 대신 제 동료나 좀 봐 주십시오.”
“아, 네, 네. 알겠다고요.”
에디스는 의자 하나를 끌어다 얌전히 다샤의 옆에 자리 잡았다. 그러곤 그녀의 매끄러운 다갈색 피부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근데 21호 씨가 바르샤 사람과 동료로 지내시는지는 몰랐네요. 요즘 바르토자 씨와 자주 부대껴서 그런가, 어째 이분 얼굴도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져요.”
“…그녀는 일단 제국 출신입니다. 물론 그녀의 부모님의 출신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만.”
“그래요?”
“그러니 혹여 그녀 앞에서 저 헛간의 야만인과 닮았다는 둥 하는 무신경한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아마 크게 화낼 겁니다.”
“앗, 조심할게요.”
에디스에게 그렇게 주의를 주면서도, 21호는 새삼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이곳에는 그 야만인도 있었지. 폐하의 호문클루스를 갖고 튀는 바람에 우리 모두를 고생하게 만든 원흉!’
결심했다. 이 스튜는 그냥 헛간 옆에 갖다 둬야겠군.
“근데 21호 씨. 바트 사제님이 잘 치료해 주셨을 텐데, 왜 이분은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는 거죠?”
“조만간 눈을 뜰 겁니다. 그저 그간의 피로 때문에 평소보다 조금 긴 휴식이 필요한 것뿐일 테죠.”
그렇게 대꾸한 21호는, 고뇌하듯 살포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다샤를 슬쩍 일별하며 덧붙였다.
“아니면 뭔가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Chapter 164: Chapter 464
Chapter Text
464. 축언 (4)
수도원장과 수상한 손님의 만남을 목격한 날부터, 다샤는 남들 몰래 그의 집무실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원장을 고발할 만한 증거를 찾기 위해서였다.
“다샤, 지금이라도 그만두자. 만약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아무튼 너 간땡이 큰 거 하난 알아 줘야 한다니까.”
물론 망을 봐 주겠다며 따라나선 라미라의 간땡이도 만만찮았다.
소녀들은 살금살금 복도를 걸어, 인적 없는 수도원 건물 본관에 도달했다.
“근데 문이 다 잠겨 있는데?”
“따면 돼. 라미라, 거기 꼬챙이 좀 줘 봐.”
“헤…. 넌 어디서 이런 재주를 다 배웠어?”
“배워야 할 필요씩이나 있는 구조가 아니야. 이곳 수도원의 자물쇠들은 하나같이 단순하거든.”
주린 배를 움켜쥐고 몇 차례 식료품 창고를 털다 보면 열쇠 따기의 달인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라미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와, 넌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러냐?”
“같이 잘 나눠 먹은 주제에 이제 와서 딴소리하긴.”
삐걱.
무거운 마찰음과 함께 잠겨 있던 문이 열리고, 곧 수도원답지 않게 화려한 집무실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라미라가 아름다운 장식들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다샤는 재빨리 수도원장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서류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근데 다샤, 거기서 뭘 찾으려고? 너 글은 읽을 수 있어?”
“대충은. 엘리슨 사제님이 미사 시간마다 경전을 읽어 주시잖아.”
“허어…….”
라미라가 입을 떡 벌렸다.
이건 사제의 발음과 단어들을 일치시키는 기억력에 놀라야 하는 건가, 아니면 제법 먼 거리에서도 빽빽한 경전 글자들을 구별해 내는 시력에 놀라야 하는 건가.
그러는 사이, 다샤는 희미한 달빛을 등불 삼아 열심히 자료들을 뒤적거렸다.
“흠…….”
아쉽게도 건질 만한 내용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것은 수도원장이 생각보다 청렴한 인간이어서가 아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수도원장이 장부도 따로 작성하지 않을 정도로 게으르고 무계획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수도원에서 돌보는 고아들의 명단이나, 전입 전출 기록조차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을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이걸 어쩌지? 기부금 사용 내역이 부실한 것 말고는 딱히 고발할 만한 것이 없어.’
물론 기부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전적으로 수도원장의 재량이다. 교회는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역시 수도원장을 이단 재판부에 고발하는 방법뿐인가?’
하지만 그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만약 이단 심문관들이 다샤의 증언을 신빙성 있게 받아들이더라도, 그녀 역시 정보의 출처가 의심스럽다는 명목으로 이단 재판에 넘겨질 가능성이 컸으니까.
그렇게 별다른 소득 없이 원장실을 드나들기를 일주일.
어느 날 다샤의 눈에 들어오는 한 뭉치의 서류들이 있었다.
‘아, 이건…….’
그것은 던스턴 영주가 수도원장에게 보낸 수도원 전답 측정 자료들이었다.
던스턴령에서는 2년마다 영주의 명으로 전답의 면적을 새로 측정했는데, 잘 살펴보니 그 수치가 지난 10년 사이에 확연하게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좋아. 이거라면……!’
다샤는 미리 찢어 둔 옷자락을 펼쳐, 빠르게 장부의 내용을 옮겨 쓰기 시작했다.
* * *
어떻게든 비리의 증거를 찾아내긴 했지만 이를 고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사람들이 다샤의 말을 믿어 줄지도 미지수인 데다, 수도원의 보살핌을 받는 고아가 은혜 입은 원장을 직접 고발하는 것도 그리 모양새가 좋지 않을 테니.
하면 믿을 만한 이에게 자료를 넘기고 의혹을 심어, 그로 하여금 직접 수도원장을 조사하도록 만드는 것이 최선이리라.
오랜 시간 사제들을 관찰하던 다샤는 마침내 믿을 만한 사람 하나를 골라낼 수 있었다. 순환 근무를 위해 최근에 이곳에 전입했으며, 딱히 수도원장에게 알랑거리지도 않는 올곧아 보이는 남자를.
“구스타프 사제님.”
성 바스티안의 축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 사제들이 대례미사 준비에 한창인 바쁜 때를 노려 다샤는 조심스레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래, 얘야. 여긴 무슨 일이니?”
구스타프 사제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다행히도 비쩍 마른 바르샤인 고아 소녀가 다가오는 것을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저기, 실은 마티유 원장님의 방을 청소하던 중에 뭔가 이상한 걸 봤어요.”
“이상한 것?”
“네, 그래서 사제님들께 여쭤보려고 여기 적어 왔어요.”
“…….”
그는 조금 가늘어진 눈으로 다샤가 내민 헝겊 조각을 받아 들었다. 아마도 아이가 순진한 척 불순한 의도를 숨기고 있음을 바로 간파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목탄이 잔뜩 번진 헝겊 조각을 바로 던져 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의 인품은 충분히 칭찬받을 만했다.
“…이건 어디서 난 거지?”
삐뚤빼뚤 적힌 글자들을 한참 들여다보던 구스타프 사제가 마침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이에 대한 그럴싸한 변명거리는 없었기에, 다샤는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음, 원장님의 책장을 닦다가 우연히 봤어요. 커다랗게 영주님의 문장이 찍혀 있어서 눈에 확 띄었죠. 그런데 거기 적힌 숫자들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
“사제님이 보시기에도 계속 작아지고 있는 거죠? 그건 대체 왜 그런가요?”
구스타프 사제는 잠시 뭔가를 가늠하듯 다샤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얼굴을 지저분하게 덮고 있는 긴 앞머리와, 그 사이로 총명하게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넌 몇 살이니, 꼬마야.”
“아, 여덟… 살이요?”
“그래, 어디서 배울 기회도 없었을 텐데 글과 숫자를 읽을 수 있다니, 나이에 비해 참으로 영특한 아이구나.”
그는 언뜻 칭찬하는 듯했지만, 다샤의 경험에 그것은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은 어른들의 일에 끼어들기에는 많이 어리구나. 얘야, 너는 왜 던스턴 영주님이 이렇게 자주 땅을 측량하는지 알고 있니?”
“…네?”
“땅의 측량 방식이나, 도량의 기준이 되는 척도가 계속해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말이다.”
“…….”
다샤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같은 땅의 면적이 측정 방식에 따라 바뀐다고?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지금껏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 그러니 네 눈에 이 수치들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구스타프 사제는 헝겊을 차곡차곡 접어 다샤에게 돌려주었다.
물론 일괄적으로 줄어들어 가는 전답의 면적이 무척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바뀐 측정 방식으로 인해 면적이 줄어든 건지, 아니면 이를 악용해 정말로 수도원장이 교회의 재산을 팔아먹었는지 지금의 그로서는 판단할 길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당장 문제 삼을 일은 아닌 듯하구나. 그래도 상급 사제님께 약간의 언질은 해 두마. 어차피 내년 즈음에는 대대적인 교회 감사가 있을 예정이니, 그때가 되면 모든 일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게다.”
“하지만……!”
일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자 다샤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내년이면 너무 늦어! 어제만 해도 주근깨투성이 페터와 새로 들어온 예쁘장한 여자아이 둘이 사라졌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물론, 못난이 라미라의 안전 역시 더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댜샤는-
“사제님, 도와주세요!”
일전에 자신이 부정했던, 지극히 원초적인 방법을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바로 사제의 옷깃을 막무가내로 붙잡고 늘어진 것이다.
“실은 고아원의 아이들이 매일같이 사라지고 있어요! 알고 계세요?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사실 그 아이들 대부분이 환락가에 팔려 갔다는 소문이 돌고 있단 말이에요!”
“잠깐만, 지금 그게 무슨 소리…….”
“물론 수도원의 사제님들은 고아원의 사정까지는 잘 모르실 거예요. 아이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기록도 없고, 심지어는 들어왔던 애들의 이름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요!”
무력한 스스로를 향한 울분 때문일까, 다샤의 눈에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고아원을 관리하는 사제님들은 절대 모를 리 없잖아요? 그 나쁜 사람들은 사실을 다 알면서도, 수도원장의 눈치만 보면서 모른 척하고 있다고요! 이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곳에서 오신 순환 사제님들뿐이에요! 그러니 제발, 제발 저희를 도와주세요!”
“…….”
“이건 빈말이 아니에요! 제가 제 귀로 똑똑히 들었거든요. 아이들을 환락가나 지하 교단으로 넘기고 있다고 마티유 원장이 직접 말했……!”
“얘야.”
구스타프 사제의 급격하게 차가워진 눈초리에서, 다샤는 자신이 조급하다 못해 선을 한참 넘어섰음을 깨달았다.
“너는 방금 마티유 원장과 너희들을 보살펴 주는 사제들 모두를 욕되게 했다. 그들은 주신의 뜻을 평생 받들겠노라 맹세한 신실한 사제들임에도 말이다.”
“저, 저는……!”
“그래, 만에 하나 네 말이 정말 사실이라고 치자꾸나. 하면 그것을 증명할 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니?”
“……!”
가혹한 현실이었으나 다샤는 이내 빠르게 자신의 처지를 납득했다. 변변한 증거 하나 없이 사제들을 고발하다니. 구스타프 사제가 지금 당장 수도원장에게 건방진 고아 새끼의 만행을 일러바치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맙게 여길 일이었다.
“심지어 지하 교단까지 들먹이다니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앞으로 또다시 함부로 그런 소리를 입에 담았다가는 더는 어리다는 이유로 용서받을 수 없을 게다. 알겠니?”
“…네, 잘 알겠습니다. 바쁘신데 방해해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다샤는 곧 체념하고는 깔끔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재빨리 달음박질쳐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잠시라도 더 그곳에 있다가는 주체할 수 없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소녀의 뒷모습을, 구스타프 사제는 피로한 눈으로 잠시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향후에 그는 이날의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었다.
* * *
그로부터 수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결국 순환 근무 사제들의 근무 기간이 끝나며, 구스타프 사제는 그대로 조용히 수도원을 떠나 버렸다. 다샤가 완전히 낙담해 버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운 내, 다샤. 꼭 그 사제님일 필요는 없잖아? 이번에 새로 온 사제님 중에서 또 괜찮은 사람을 찾아보자고.”
라미라의 위로 아닌 위로에 다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잘 되겠어? 그나마 구스타프 사제님이니 내 말을 들어줬지, 다른 사람들은 우리 같은 고아들이 말 거는 것도 질색한단 말이야.”
그간 다샤도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구스타프 사제를 설득할 자료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수도원장의 방을 드나들었지. 서류 한 장, 심지어 낙서 한 조각까지 빠짐없이 찾아서 검토했다.
하지만 마티유 원장은 애초에 뒤가 구린 자료를 정성 들여 정리할 위인이 아니었다.
‘큰일이네. 그냥 기회 봐서 도망쳐 버릴까…….’
하지만 도망친다 한들 어디로 간다지? 그나마 썩은 감자 한 알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는 곳이 고아원이나 환락가 외에 또 있을까?
아무리 궁리해 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미래는 암울할 따름. 그렇게 다샤가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때였다.
“다샤.”
라미라가 다샤의 어깨를 흔들었다.
“저기 봐, 저 아줌마가 여기 또 왔어.”
고개를 들어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웬 젊은 여인 하나가 작은 보퉁이를 안은 채 고아원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얼굴에 주근깨가 잔뜩 나 있는,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이다.
“저게 누군데?”
“마을 묘지기의 처래. 최근에는 항상 이 시간에 고아원에 찾아오고 있어.”
다샤가 수도원장을 내쫓을 궁리로 머리가 복잡한 동안, 묘지기의 처는 매일같이 고아원을 찾아왔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사내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해가 다 저문 뒤에야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대체 왜?”
“들어 보니 그간 사정이 있어서 이곳에 아들을 맡겼었대. 그러다가 얼마 전 묘지기로 자리를 잡고, 겨우 생활이 펴서 아이를 데리러 왔다는데…….”
거기까지 말한 후, 라미라는 복잡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다샤는 금세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저 주근깨를 보니까, 왠지 페터 생각이…….”
“역시 저 아줌마, 어딘가 페터를 닮았지?”
동시에 입을 연 둘은, 그대로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페터라면 벌써 몇 달 전 이곳에서 사라져 버린 아이였기 때문이다.
환락가로 팔려 갔든 아니면 어딘가의 지하 교단에 넘겨졌든, 이제와 행방을 알아봤자 저 여인이 페터를 되찾을 방도는 없을 터였다.
“…어쩌지? 저 아줌마에게 사실을 말해 줘야 하나?”
“뭐라고 말해? 댁네 아들은 아마 환락가로 팔려 갔을 거라고? 야야,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
“그렇다고 저렇게 찾아다니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어?”
“…에이씨.”
두 사람은 한동안 착잡한 표정으로 노을을 등진 채 서성이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 * *
그날 밤.
다샤는 여느 날처럼 몰래 일어나 수도원장의 방에 숨어들었다.
한데 자물쇠를 따고 무심코 방 안에 들어섰던 그녀는 곧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환한 달빛이 내리쬐는 창가 아래에 처음 보는 선객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인 것 같은데.”
“……!”
문을 등지고 서류를 뒤적이던 소년이 가볍게 타박하며 그녀를 돌아본다. 소리 없는 몸짓과 하얀 얼굴이 마치 신기루처럼 보이는 소년이었다.
다샤는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지? 분명 잠겨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여길 들어온 거야? 설마 유령인가?’
어쩌면 정말 유령일지도 모른다. 달빛 아래에 비치는 그의 안색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창백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샤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지 않은 이유는, 소년이 악령치곤 꽤나 단정하고 반듯한 외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묘하게 차분한 공기도 그렇고.
“누, 누구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자, 소년이 멈췄던 손을 움직이며 서류들을 팔랑팔랑 넘겼다.
“의뢰를 받았다. 마티유 수도원장의 비리를 제대로 조사해 달라기에 먼저 그의 방을 뒤지는 중이었지.”
“…의뢰요? 대체 누가요?”
“글쎄. 아마 네가 잘 아는 사람일 거다.”
탁.
서류를 소리 내어 닫은 소년이 이윽고 다샤를 향해 똑바로 시선을 맞춰왔다. 어두운 방 안에서 소년의 밝은 회색 눈동자가 묘한 은빛으로 빛났다.
“그나저나 네가 바로 의뢰인이 말한 그 내부의 협조자겠구나.”
“…네에?”
“내게 의뢰한 사제가 그러더군. 이곳에서 똘똘한 바르샤인 여자아이를 찾으면, 그 아이가 아마 사정을 잘 설명해 줄 거라고.”
“……!”
난 바르샤 인이 아닌데요, 그따위 항변은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다샤는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소년에게 소리쳤다.
“구스타프 사제님! 구스타프 사제님이 당신을 이곳에 보내신 거군요!”
Chapter 165: Chapter 465
Chapter Text
465. 축언 (5)
구스타프 사제님이 내 말에 귀 기울여 주셨어! 고아들을 매정하게 저버리지 않고 적절한 조처를 취하려 애써 주신 거야! 지금까지 내가 해 온 노력들은 조금도 헛되지 않았어!
“당신, 사제님을 만난 거 맞죠? 대체 언제부터……!”
환하게 웃으며 소년에게 다가가는데, 그가 손가락을 들어 가볍게 입가에 대 보였다.
덕분에 번뜩 정신이 든 다샤는 황급히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읍!”
“아직은 주변에 별다른 기척이 없지만, 그래도 큰 소리는 주의하는 게 좋겠다.”
다샤는 입을 감싸 쥔 채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자는 네 짐작대로 구스타프 사제가 맞는다. 근무 기간 중에는 도무지 시간을 낼 틈이 없었기에, 순환 근무가 끝나자마자 바로 용병 길드를 찾아왔다고 하더구나.”
다샤의 의문들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소년은 친절하게 자세한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길드가 사건을 맡기 전에 내가 먼저 이곳에 사전 조사를 하러 왔다.”
“사전 조사요?”
“그래.”
사실 구스타프 사제는 다샤의 고발을 계속 반신반의했다 한다.
그로서도 매우 난감한 일이었으리라. 그냥 무시하자니 고아들의 안위가 걱정되고, 그렇다고 변변한 증거 없이 심증만으로 중앙 교회에 제보를 할 수도 없으니.
결국 고민하던 그는 노파심에 일단 길드에 조사 의뢰를 넣었다. 그러나 그 역시 수도원장의 정확한 혐의나 조사 범위에 대해 알지 못했고, 일개 하급 사제가 내걸 수 있는 착수금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신입 용병인 소년이 사전 조사를 나왔다는 것이다. 만일 길드가 달려들 여지가 있는 의뢰라면, 그때 인원을 정비해서 정식으로 계약할 수 있도록.
“아니…….”
다샤는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풍기는 소년을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신입 용병이라고?’
그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아직 호리호리한 소년인 데다, 용병 일을 하는 사람치고는 어딘가 병색이 짙어 보였으니까.
한데 정말 이상하지. 어째서 처음 그를 본 순간,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는 안도감이 들었던 걸까.
“어쨌거나 사전 조사가 신속하고 정확할수록 길드의 개입도 빨라지겠지. 그래서 지금은 내부조력자의 도움이 필요하단다.”
그렇게 말한 소년은 다샤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 내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도록 네가 도움을 좀 주겠니?”
“네에?”
의외의 요청에 다샤는 잠시 당황했다.
“음, 그게… 사실 저도 딱히 잘 아는 건 아닌데…….”
하지만 차분하게 그녀를 마주 응시해 오는 회색 눈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속에 응어리져 있던 생각들이 쉽게 이야기가 되어 쏟아져 나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그녀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소년에게 조잘조잘 털어놓고 있었다.
매일같이 사라지는 아이들. 수도원장을 찾아온 수상한 손님. 그리고 자신이 밤마다 원장의 집무실에 숨어들어 비리의 증거를 찾으려 노력한 일 등등.
“그 자료를 구스타프 사제에게 보여 줬다고?”
“네, 별로 쓸모 있는 자료는 아니었지만요.”
다샤는 조금 자신 없는 표정으로 그를 책장으로 이끌었다.
“이건 영주님이 조사해서 통보하신 수도원의 전답 면적이에요. 처음 이걸 봤을 때는 분명 수도원장이 땅을 팔아먹은 증거라고 생각했죠. 근데 구스타프 사제님께 여쭤 보니 그냥 측량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어요.”
“…….”
“제가 찾은 건 고작 이 정도가 다예요.”
소년은 다샤가 내민 서류들을 진지한 표정으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아니, 잘 찾았구나. 물론 그 사제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만, 던스턴이 전답을 조사한 동기를 생각해 보면 간단하게 답을 알 수 있지.”
“…동기요?”
“그래. 전문적인 측량 학자들을 고용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든단다. 한데 왜 던스턴이 굳이 사비를 들여 가며 매번 이런 문서를 제작하는 걸까?”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어린 소년이 영주님의 존함을 함부로 내뱉고 있는데도, 그 모습이 조금도 건방져 보이지 않으니.
“음…. 잘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이 영지는 매해 농민들에게 토지 면적에 비례해 세금을 물리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던스턴은 어떻게든 기회만 되면 측정 수치를 늘릴 묘수를 궁리하는 거지.”
…면적을 늘려?
다샤가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그러면 당신의 말은, 실제로는 바뀐 측량법에 따라 토지가 더 늘어나야 한다는……!”
“그래. 아마 확인해 보면 영지 전체의 면적은 해마다 늘어났을 거다. 그럼에도 수도원의 토지는 눈에 띌 정도로 확연히 줄어들었으니, 수도원장이 생각보다 많은 전답을 팔아치웠다는 증거가 되지 않겠니?”
거기까지 들은 다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하지만, 하지만 수도원장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죠? 만약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던스턴 영주님도 예전부터 이 사실을 다 알고 계셨다는 뜻이잖아요?”
“그야 던스턴도 한패이기 때문이지.”
여상하게 대꾸한 소년은, 어딘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알고 있니? 주신께 바쳐진 땅, 즉 교회의 재산에는 영주가 감히 세금을 매길 수 없단다. 그러니 수도원장이 누군가에게 전답을 팔았다면, 던스턴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세금 물릴 땅이 늘어나는 셈이니 나쁠 것이 없지. 구스타프 사제도 아마 그 사실을 짐작했을 거다.”
“그럼 구스타프 사제님은 그때 왜……!”
“아마도 그는 네가 더 이상 수도원장의 비리를 파고드는 것이 위험하다 판단했을 거다. 그러니 일단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단속한 후, 기회를 봐서 제대로 조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길드에 의뢰를 넣은 거겠지.”
“……!”
문득 다샤의 뇌리에, 엄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던 구스타프 사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직은 어른들의 일에 끼어들기에는 많이 어리구나.
-앞으로 또다시 함부로 그런 소리를 입에 담았다가는 더는 어리다는 이유로 용서받을 수 없을 게다, 알겠니?
당시에 다샤는 구스타프 사제가 자신을 탓하고 있다 여겼다. 하지만 실은 그가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었던 거라고?
“저는…….”
다샤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달싹거렸다.
아아, 어쩌면 구스타프 사제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의 속내란, 어린 다샤가 좇기에는 이토록 불분명하고 복잡하기만 했으니.
“한데-”
바로 그때였다. 소년이 갑자기 허공을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뜻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애석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그 사제의 결심이 조금 늦었던 모양이구나.”
“네?”
“붕괴가… 일어나겠다. 그리고 그곳에… 수많은 비명과 죽음의 그림자가…….”
“……?”
“하지만 그것들을 막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리고 말았어.”
…저게 다 무슨 소리지?
그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유심히 살펴봤지만, 다샤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창틈을 비집고 들어온 창백한 달빛이 집무실을 고요히 내리쬐고 있을 뿐.
“…….”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저 사람의 뜬금없는 말들이 전혀 헛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눈은 이 어두운 방 안에서 어떻게 저렇게나 밝게 빛나고 있는 걸까?
다샤가 뭔가에 홀린 듯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깜박.
작은 눈꺼풀의 움직임과 함께, 그 마법 같은 순간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어느새 이전의 눈빛으로 돌아온 소년이 다샤를 돌아보며 여상하게 물어왔다.
“아마 조금은 대비가 필요할 것 같다. 괜찮다면 나를 수도원장의 침실로 안내해 주겠니?”
* * *
소년을 사제님들의 숙소로 안내하면서도, 다샤는 자신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람?’
아마 평소였다면 그의 요청을 거절했을 것이다. 한밤중에 사제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숨어들다니. 미친 짓도 그런 미친 짓이 어디 있나.
이대로라면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밤늦게까지 경전을 읽는 엘리슨 사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도 잠자리가 예민한 사제님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혹여 붙잡히게 되는 날에는, 아마 변명 한마디 주워섬기지 못하고 고아원에서 쫓겨나게 되겠지.
‘하지만…….’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이 공기.
마치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냇물처럼 비정상적으로 정제된 공기의 흐름이, 다샤의 불안을 잠재우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뭐랄까.
이 정도면 나름 할 만한데?
“명심하거라. 너 혼자서 이런 모험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다샤의 생각을 귀신같이 알아챈 소년이 나직하게 주의를 주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그들은 드디어 복도 끝에 있는 수도원장의 침실에 도착했다.
“아마 문이 잠겨 있을…….”
달칵!
다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년이 작은 손짓 하나로 잠긴 열쇠를 풀어 버린다.
다샤는 두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그가 지금 무슨 재주를 벌이고 있는지 도통 파악할 수 없었다.
“……?!”
삐걱-
그렇게 작은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그들은 마침내 장대하게 코를 고는 마티유 원장을 마주할 수 있었다.
“…뭐 하시게요? 설마 원장을 이대로 죽여 버리려는 건가요?”
다샤가 겁에 질려 소곤거리자, 소년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그러고 싶지만?
“아직 그의 생이 끝날 때가 아니구나. 내가 감히 건드려선 안 될 것이다.”
“그럼 왜 이곳에 온 건가요?”
“그저 수도원장에게 약간의 경고가 필요한 듯하여-”
경고? 어떻게? 저 작자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데?
다샤가 의문의 눈초리를 보내자, 소년이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찮다. 비록 깨어 있지 않아도 그의 영혼은 우리의 말을 모두 듣고 있으니까.”
소년은 성큼성큼 침상으로 다가가, 마티유 수도원장의 귓가에 가만히 입술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들어라. 조만간 네가 저지른 죄악의 대가가 최악의 결과가 되어 너를 찾아올 것이다.]
마치 머릿속을 직접 타격하듯, 기묘한 음향이 사방으로 펴져 나갔다.
심지어는 침상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다샤조차 똑똑히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한 목소리였다.
“끄으으…….”
정말로 영혼이 그 말을 듣고 있는 걸까. 수도원장은 잠결에도 고통스러운지, 끙끙거리며 작은 신음을 흘렸다.
[그러니 어서 도망쳐라. 누구도 찾지 못하는 곳에 홀로 숨어라. 부디 네 죄를 사해달라 신에게 간절히 기도드리거라.]
거기까지 말한 소년의 입가가, 순간 잔인하게 비틀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오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너 홀로 그 결과를 감내하거라.]
아아, 저것은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지독할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일진대, 어째서 이토록이나 섬뜩한 느낌이 드는 걸까.
부르르르…….
다샤가 왠지 모를 한기에 몸을 떨고 있는데, 소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다샤를 돌아보았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무척이나 초연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제 됐다. 아마 한동안은 그도 자중하겠지.”
“당신… 저기…….”
“바트.”
“네, 바트.”
직감적으로 그가 이곳에서 모든 용건을 마쳤다는 것을 깨달은 다샤는, 아까부터 꼭 하고 싶었던 말을 재빨리 털어놓았다.
“제 이름은 다샤라고 해요. 그리고 전 실은 제국에서 태어났어요. 바르샤인이 아니라고요.”
“그래, 그렇구나.”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쓱쓱 다샤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척 가벼운 손짓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어째 위로를 건네는 듯 다정하게 느껴지기도 해서 다샤는 조금 묘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
“자, 이제 네 방으로 돌아가자. 들키지 않도록 바래다 주마.”
두 사람은 그때부터 별다른 대화 없이 고아들이 모여 자는 침실로 이동했다.
그렇게 막 방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 다샤는 소년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기, 당신은 이제 돌아가는 건가요?”
“그래. 조만간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오마. 그러니 앞으로 더는 밤에 몰래 나오지 않아도 된단다.”
소년, 바트는 그 말을 남기고는 그대로 홀연히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
잠시 텅 빈 복도를 바라보던 다샤는, 곧 뭔가에 홀린 듯 자신의 침상으로 돌아와 눈을 감았다.
혹시 지금까지 눈을 뜨고 꿈을 꿨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그날의 일이 기묘하고도 비현실적이었기 때문.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샤는 그날 밤의 만남이 결코 꿈이 아니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마치 거짓말처럼, 고아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마티유 수도원장이 불안에 떨며 기도실에 깊이 칩거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Chapter 166: Chapter 466
Chapter Text
466. 축언 (6)
“송구합니다, 저하.”
마사인이 쩔쩔매며 성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마치 언제 화를 냈었냐는 듯 평소의 반듯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물론 이미 때는 늦어, 그의 거센 푸닥거리가 여관을 한차례 휩쓸고 간 뒤였지만.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제가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 불경에 대한 벌은 돌아가면 달게 받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신경 쓰지 말게.”
성진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딱히 그를 탓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호위기사를 제쳐 두고 사방팔방 돌아다닌 건 자신 쪽이니까 말이지.
단지 이상한 점은,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마사인 경이 자신이 모시는 황자를 이렇게까지 마구잡이로 닦달할 인물인가 하는 거였지만.
“한데, 마사인 경.”
기분 탓인가?
“어쩐지 전보다 얼굴이 확 편 거 같은데, 이제 속은 괜찮나?”
그러자 마사인이 고개를 기우뚱거리더니, 어째 대단히 편안한 표정으로 배 언저리를 더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어쩐지 속이 무척 개운한 기분입니다. 오래 묵은 체증이 한 번에 사라진 느낌이랄까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역시 바트 사제님의 치유력은 대단하시군요.”
“아니, 치유력이야…….”
언제나처럼 대단했겠지. 아버지가 한 일이니까.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마사인 경이야 그저 사제의 능력에 순수하게 감탄하는 듯했지만, 성진은 그의 행동 양식에서 미묘한 간극을 감지하고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성진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웬 젊은 남자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여관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암살자 특유의 잠행복을 입고 있었는데, 성진을 발견하자 어울리지 않는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리가 왔다. 모레스.”
“드디어 왔어. 모레스.”
비슷한 의미의 말을 두 번 반복한 남자는, 양발이 맞지 않아 어딘가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성진을 향해 다가왔다.
“네게 조금 귀띔해 주자면, 그건 전부 아버지 때문일 거야.”
“그래. 아버지가 형님을 깨우면서 가벼운 암시를 걸었거든.”
암시?
“응. 길게 남지도 않고, 영혼에 무리도 가지 않는 가벼운 암시야.”
“일종의 축언이지. 속에 있는 말을 꾹꾹 담아 두지 말라고 했었어.”
처음 보는 수상한 자가 너무나도 허물없는 태도로 다가오자, 흠칫 놀란 마사인이 성진의 앞을 막아서며 으르렁거렸다.
“물러서라! 웬 놈이냐?”
“마사인 경.”
“가만 보니 저하를 아는 듯한데, 그럼에도 어찌 감히 그 존함을 함부로……!”
성진이 한 손을 들어 경계하는 마사인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저건 어젯밤에 우리가 사로잡은 포로야.”
“…네?”
남자의 상상치도 못한 정체에, 마사인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사로잡아요? 포로라고요? 외람되오나, 저하. 저자는 방금 제 발로 이곳에 걸어 들어왔습니다만……?”
“어, 뭐. 그런 게 있어.”
저건 실은 ‘카야의 숨결’이 만든 영혼 없는 생체 인형이래. 아무래도 견본을 하나 정도는 남겨야 될 거 같아서 챙겨 왔지. 시간 없는 나를 대신해 우리 쌍둥이들이 친히 이곳까지 발레파킹을 도와준 거고.
“…네?”
성진의 불친절한 설명에 마사인이 얼이 빠진 사이, 남자는 근처에 있는 나무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양팔을 앞으로 내밀며 태연한 표정으로 요구해 왔다.
“자, 운반도 끝났으니 이제 이놈을 어디 제대로 묶어놔 줄래?”
“우리가 떠나면 도망친 영혼이 다시 되돌아올지도 모르잖아.”
“우리도 슬슬 가 봐야 하거든.”
“밤샘한 조를 돌봐야 하니까.”
“……?”
마사인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상대가 기꺼이 구속되어 주겠다는데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번개처럼 밧줄을 가져와 암살자의 몸을 의자에 둘둘 감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성진은 곁에 있는 의자 하나를 끌어와 암살자의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생각보다 오는 데 오래 걸렸네?”
정밀한 신경외과 수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생체 인형은 두고두고 조사할 가치가 충분했다.
단지 쌍둥이가 떠나고 몸의 주도권이 다시 ‘카야의 숨결’에 넘어갔을 때, 이 인형이 어떤 돌발 상황을 벌일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지.
또 당시에는 다샤의 상태도 꽤 위중했던 터라, 일단 인형을 쌍둥이에게 맡기고 먼저 여관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내 손으로 짊어지고 올걸 그랬나? 애들 둘이서 밤새 고생깨나 했겠는데…….’
성진의 그런 생각을 짐작하기라도 한 걸까, 암살자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키득거렸다.
“괜찮아. 우린 적당히 놀면서 교대로 움직였거든.”
“나중에는 좀 귀찮아져서 아렌쟈도 부려 먹었지.”
“아렌쟈를?”
“응, 물론 리브가는 완전 질색했지만.”
“우리가 까라는데 제가 뭘 어쩌겠어?”
성진은 조금 안심했다.
훌륭하다, 애들아. 내가 별로 가르칠 게 없구나. 적어도 너희들은 어디 가서 쉽게 남에게 뒤통수 맞을 것 같지는 않다.
“그나저나 이다음이 문제군.”
이 생체 인형을 어떻게 안전하게 관리한다지? 저쪽의 영혼이 돌아오면 꽤 곤란한 문제가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단 말이지.
성진이 미간을 찌푸리자, 암살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모레스의 짐작이 맞아. 이 인형의 염상 결정에는 가벼운 [자기 파괴]의 축언이 새겨져 있으니까.”
“저쪽이 몸의 주도권을 되찾게 되면, 놈들은 아마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이 인형을 파괴할 거야.”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지. 그저 조용히 심장을 멈추고 뇌를 정지시키면 그만이니.”
“그것만으로도 조직이 빠르게 손상되며 인형은 견본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될 거야.”
그렇군.
“그럼 내친김에 아렌쟈를 좀 더 부려 먹을까? 녀석들에게 교대로 인형을 지키라고 시키는 거야.”
그러자 헤르나와 가데스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잠시 성진을 장난스럽게 응시했다.
“아니면 그보다 간단한 방법도 있는데.”
“아렌쟈 따위의 도움은 필요도 없는데.”
정말 입이 근질거려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뭔가 말려드는 기분이 들었지만, 쌍둥이들의 열렬한 눈빛에 성진은 결국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뭔데?”
“바로 모레스가 새로운 축언을 새기는 거야.”
“축언 위에다 새로운 축언을 덧씌우는 거지.”
성진이 눈을 깜박거렸다.
축언을?
“그거 알아? 정확히 말해 줄 수는 없지만, 이 인형에 축언을 새긴 놈은 생각보다 대단한 녀석이야.”
“그래서 아렌쟈라 하더라도 저항하기 쉽지 않지.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이 축언을 없앨 수도 없고.”
“어젯밤에도 우리가 곁에서 감시하지 않았다면 제법 위험했을걸?”
“맞아. 눈 깜짝할 사이에 몸을 빼앗기거나 쉽게 죽어 버렸을 거야.”
짐작 가는 구석이 없지는 않다. 아마 민짜 눈썹에게 축언을 새겼던 그놈이겠지.
당시 마왕은 놈의 정체에 대해 이렇게 짐작했었다.
-생각해 봐. 그런 제한은 보통 자신보다 하위의 존재에게만 발휘되는 거라고. 그런데 이 위대하신 불의 마왕께서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하고 있잖아?
-어쩌면 말이야. 아니, 거의 확실한 사실일 테지만, 저 눈썹 없는 여자는 고위 마왕들 중 하나의 권속일지도 모른다는 뜻이야.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그 축언에 저항할 수 있는 헤르나와 가데스는 도대체……?’
서로를 탐색하듯 바라보는 시선이 깊이 교차한다. 천진한 표정을 한 암살자의 눈동자에 어리는, 어딘가 요사스럽기도 한 보랏빛의 안광.
순간 성진은, 어쩐지 쌍둥이와 자신이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알겠어? 그래서 더더욱 모레스의 축언이 필요한 거야.”
“모레스라면 충분이 저 명령을 덮어쓸 수 있을 테니까.”
“이해할 수 있지? 모레스는 모레스니까.”
“맞아. 모레스는 다름 아닌 모레스니까.”
음, 적어도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우리, 서로에 대한 의혹은 잠시 이대로 덮어 두도록 하자.
“…….”
그나저나 난감한 일이었다.
사실 성진은 지금까지 엉겁결에 몇 차례 축언 비슷한 것을 새긴 적이 있다. 예를 들면 지그스문트 전 백작 부인이나, 어젯밤 민짜 눈썹에게 벌인 짓이 그것이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의도치 않게 벌어진 일 아닌가.
더욱이나 영혼이 빠져나간 텅 빈 그릇에 축언을 새기다니, 대체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지?
“그거 알아? 때때로 어떤 축언은 바이온에 새겨지는 경우도 있어.”
“영혼의 정수인 에이온을 피해서, 영혼의 겉면에만 각인하는 거지.”
“그러니 다키온에도 그와 똑같은 일이 가능하단 거야.”
“다키온 역시 바이온처럼 영혼의 겉면에 해당되니까.”
“보통 에이온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려고 그런 방법을 쓰지. 방금 전에 성황 아빠가 마사인 오라버니에게 했던 암시처럼.”
“간혹 에이온에 축언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런 방법을 쓰기도 해. 예전에 할머니가 아빠 폐하에게 ‘낙인’을 새긴 것처럼.”
“…낙인?”
잠깐. 방금 절대 들어서는 안 되는 뭔가를 들은 기분이 드는데?
“…….”
성진과 쌍둥이는 동시에 입을 다물고는 멀뚱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좋아. 한번 해 볼게. 그래서 그 축언을 영혼의 겉면에 새기려면 어떻게 해야 해?”
“아마 앞전에 네가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단지 진심을 좀 덜고, 마음가짐을 가볍게 만들어 봐.”
“네 강한 의도가 비수가 되어 영혼의 정수를 파고들지 않도록.”
“그 무디어진 언어들이 텅 빈 염상 결정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흠, 어쩐지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미 새겨져 있는 축언을 덮어쓰려면, 아마도 마사인 경의 영혼에 걸었던 저주보다는 강해야겠지. 하지만 동시에 민짜 눈썹에게 새긴 것보다는 부쩍 약해야 할 것 같다.
성진이 무심코 마사인을 돌아보니, 그는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마도 마사인 경에게는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이 대화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리라.
“후우…….”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성진은, 암살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섣부른 짓은 일절 허락하지 않겠다. 앞으로 내가 원할 때까지, 지금의 상태를 보존하는 데 최선을 다하도록.]
그러자 성진의 입가에서 시작된 인과의 바람이, 의자에 묶인 암살자의 몸을 가볍게 휘감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성공했나? 아마 그럴 것이다. 암살자가-쌍둥이가-만족스러운 듯 개구진 미소를 지었으니까.
“하하, 이것 좀 봐. 모레스는 역시 모레스라니까.”
“그러게 말이야. 모레스는 다름 아닌 모레스니까.”
장난스럽게 중얼거린 쌍둥이는, 꽁꽁 묶여 있는 양팔 대신 머리를 휙휙 휘두르며 어설픈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일도 잘 마무리되었겠다, 우리는 그만 가 볼게.”
“너도 더 이상 사고치지 말고 얌전히 레지나로 돌아가.”
음? 어째 녀석들이 아까부터 서두른다는 느낌이 드는데.
“오자마자 가? 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
“급하지. 벌써 늦은 오후잖아.”
“이제 곧 기상할 시간이라고.”
기상? 대체 세상 어떤 게으름뱅이가 이 시간에 일어나?
“어허! 그런 말은 실례야. 우리 조에게는 지금이 새벽이나 다름없단 말이야.”
“얼른 가서 밥 줘야지. 안 그러면 하루 종일 굶은 채로 방 안을 굴러다닐걸?”
밥을 먹여? 너희들, 집에서 무슨 동물이라도 기르냐?
성진의 의문에 쌍둥이들이 어딘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음, 우리가 조를 매일 보살핀다는 관점에서는 또 완전히 틀린 말이라고 보기도 어렵네.”
“물론 우리는 조를 많이 좋아하지만, 그래도 조가 밖에 내놓기에 살짝 남부끄럽긴 해.”
“어쨌거나 모레스. 너도 앞으로 수고해.”
“마사인 형님에게 걸린 암시를 잊지 마.”
의외의 당부에 성진이 잠시 어리둥절했다.
“암시? 그게 왜?”
“그야, 성황 아빠가 마사인 오라버니에게 더 이상 속상한 일들을 눌러 참지 말라고 했잖아?”
“아빠 폐하는 그저 가벼운 충고를 던진 거지만, 그로 인한 엄청난 결과는 아까 너도 봤지?”
“조심해라, 모레스.”
“주의해라, 모레스.”
“…….”
그렇게 쌍둥이들은 성진에게 큰 의문들을 몇 개 던지고서 떠나갔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성진의 신경을 사로잡은 의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얘들아. 대체 그 ‘조’가 누군데?’
* * *
그러는 와중에도 다샤의 꿈속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마티유 원장이 기도실에 숨어 두문불출하면서 고아원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따금 사제들이 삼삼오오 모여 불안한 얼굴로 숙덕거리고, 간혹 험상궂은 인상의 사람들이 수도원장을 찾아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고아들이 행방불명되는 일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바트가 그랬지. 한동안은 원장이 자중할 거라고.’
다샤는 안도했다. 모든 일들이 그가 말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조만간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오마. 그러니 앞으로 더는 밤에 몰래 나오지 않아도 된단다.
그래. 이제는 애써 졸음을 참아 가며 증거를 모으지 않아도 된다. 혹여 남들의 눈에 띌까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다닐 필요도 없어진 거야!
이 고아원에 온 이후 처음으로, 다샤는 여느 어린아이로 돌아가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여전히 환경은 열악했고 굶주림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지만, 소리 소문 없이 어딘가로 팔려 갈지 모른다는 불안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삶은 훨씬 살아갈 만한 것으로 바뀔 수 있었다.
던스턴 영지가 어수선해진 것은 아마도 그 무렵이었다.
“그거 아십니까? 엘리슨 사제님. 얼마 전 프림로즈 환락가에 강력한 악마종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아, 저도 들었어요. 끔찍하게도, 사람들이 모조리 갈기갈기 찢어져 죽고 말았다죠?”
프림로즈 환락가는 행정적으로는 아세인령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지만, 실제 도시 중심부와의 거리를 생각하면 오히려 던스턴령에 더욱 가깝다고도 볼 수도 있었다. 영지민들의 생활 반경이 크게 겹치는 만큼, 그곳에서 일어난 재난 또한 큰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성 바스티안의 축일을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시점에 악마종이라니! 설마 또 그 흉악한 악마 숭배자들의 소행인가요?”
“듣기로는 악마 계약자의 짓일 거라고 하더군요. 보통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환락가로 숨어들어,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 중앙에 악마를 풀었답니다.”
“아아, 어떻게 그런 무서운 일이……!”
“아세인 대공도 이번 사건을 무척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델크로스에 정식으로 성기사단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더군요.”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건인 만큼 던스턴 영지 또한 완전히 무사하지 못했다.
사건에 휘말려 죽은 영지민들의 장례가 연이어 치러지고, 그들의 부정을 씻기 위해 수도원을 찾는 이들도 점점 늘어났다.
그 모습들을 바라보던 다샤의 뇌리에, 문득 그날 밤 소년 용병이 중얼거리던 혼잣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 사제의 결심이 조금 늦었던 모양이구나.
-붕괴가… 일어나겠다. 그리고 그곳에… 수많은 비명과 죽음의 그림자가…….
다샤가 왠지 모를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고 있을 때였다.
“어? 저 아줌마…….”
옆에서 굳은 빵 껍질을 씹고 있던 라미라가 어딘가를 급히 손가락질했다.
다샤가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는 최근 며칠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페터의 어미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저 아줌마가 어쩐 일이지? 요즘은 통 보이지 않아서 아들 찾기를 완전히 포기한 줄 알았는데?”
“그래? 그런데…….”
다샤는 말끝을 흐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모습에서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섬뜩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
여인은 그사이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다. 어딘가 시커멓게 변한 안색과, 잔뜩 일그러진 기괴한 표정. 그녀의 몸을 에워싸고 있는 이상한 검은 연기까지.
“뭐지?”
“누구야?”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다른 아이들 역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불길한 모습에서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마티유…….”
아낙이 고개를 삐딱하게 들어 올리며, 번들거리는 눈으로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마티유 원장. 그 빌어먹을 개자식은 지금 어디에 있지?”
Chapter 167: Chapter 467
Chapter Text
467. 축언 (7)
우르르르…….
멀리서 먹구름이 밀려들며 하늘을 뒤덮어 간다.
그 음울한 공기 아래, 묘지기의 처는 마치 세상의 끝을 고하는 비석이라도 되려는 듯 홀로 오도카니 서 있었다.
“이봐요, 당신! 왜 또 여기 와서 이러고 있는 거요?”
그때 덩치 큰 사내 하나가 도끼를 거머쥔 채 다가왔다. 그는 수도원의 문지기 겸 이런저런 잡일을 담당하는 브래덕이라는 남자였는데, 한창 장작을 패던 중에 여인을 발견하곤 부리나케 달려온 듯했다.
평소 고아들에게 함부로 손찌검하던 버릇이 어디 가진 않아, 그는 묘지기의 처를 함부로 밀치며 소리쳤다.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소? 당신 애새끼는 여기에 없다니까! 지금 당장 멀리 꺼지지 않으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따끔한 맛을 보여 주겠소!”
하지만 그 흉흉한 기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브래덕이 막 여인의 멱살을 쥐려던 찰나-
“커…컥!”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녀의 손아귀에 맥없이 붙잡혀 대롱대롱 매달리고 말았으니까.
“……!”
아이들은 목이 졸려 무력하게 버둥거리는 남자를 공포에 질려 바라보았다. 대체 저 비쩍 마른 아낙의 팔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오는 걸까?
“…던스턴 묘지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어린아이들의 시체가 들어와. 대체 어디서 그렇게들 애들이 죽어 나가는지 참 궁금하지 않아?”
거구의 브래덕을 한 팔로 허공에 들어 올린 여인은, 마치 지나가며 안부를 묻는 듯 여상하게 말을 건넸다. 물론 목구멍이 완전히 틀어막힌 그가 이에 대답할 수 있을 리 만무했지만.
“끄으으…….”
“대개는 영지와 이웃한 프림로즈 환락가에서 밀려온 시체들이야. 매일같이 그 불쌍한 것들을 간수해서 땅에 파묻고 있으려면, 머릿속에 별별 불경한 생각들이 떠오르곤 하지.”
거기까지 말한 묘지기의 처는, 원한이 가득 담긴 눈으로 브래덕을 노려보았다.
“환락가에 있는 것들은 분명 사람의 탈을 쓴 악마들인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애들에게 그런 처참한 짓을 할 수 있겠어? 악마들이 저리도 멀쩡히 걸어 다니는 꼬락서니를 보니, 주신께서는 이미 이 세상을 완전히 저버리셨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꺼허……!”
“그래. 이 세상은 이미 악마들이 판치는 지옥인 게야.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 작은 몸에 새겨진 끔찍한 학대와 착취의 흔적들을 보고 있자면 말이지.”
“……!”
“그래서 생각했지. 만일 이곳이 지옥이라면, 나 또한 악마가 된들 과연 누가 날 탓할 수 있을까?”
뚜둑!
브래덕의 목이 결국 여인의 악력을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그의 몸은 힘없이 바닥으로 무너져 이내 검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마기로 인한 강력한 침식 현상이었다.
“까아아악! 브래덕 씨!”
그때 멀리서 엘리슨 사제가 달려왔다. 난데없이 느껴지는 강렬한 마기에 당황한 그녀는, 이미 죽은 브래덕의 몸을 붙잡고 정신없이 신성력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브래덕 씨? 아아, 정신 차려요, 브래덕 씨! 갑자기 이게 다 무슨……!”
하지만 그 헛된 노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등 뒤에서 번개처럼 휘둘러진 아낙의 팔이, 마치 날카로운 창이라도 된 듯 엘리슨 사제의 몸통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푸욱!
“허억……!”
힘을 잃고 축 늘어진 엘리슨 사제를 팔에 매단 채, 묘지기의 처는 하늘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 어쩌면 나 역시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악마들 중 하나였는지도 몰라.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지금껏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까. 그 불쌍한 아이들이 실은 이곳에서 환락가로 값싸게 넘겨진 연고 없는 고아들이라는 걸 눈치챈 지 오래였으니까!”
주르륵.
여인의 눈에서 시커멓게 변색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난 지금껏 그 일에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었어. 혹시라도 마티유 수도원장에 대해 나쁜 소문이 퍼질까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고! 왜? 내가 왜 그랬을 것 같아? 응?”
묘지기의 처는 마치 답을 재촉하듯 엘리슨 사제의 몸을 흔들어 댔다. 그에 맞춰 울컥울컥, 붉은 핏물이 엘리슨의 입에서 솟구쳐 올랐다.
“마티유가 내 아이를 해코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커어…….”
“혹시라도 마을 묘지기가 소문을 퍼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그가 내 새끼를 환락가에 넘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가슴을 뚫고 나온 검은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엘리슨 사제의 눈동자가 서서히 빛을 잃어 간다. 이어서 그녀의 살점 역시 마기에 오염되며 검게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파스스스…….
“아아! 이 얼마나 어리석은 걱정이었을까! 실제 마티유는 아무것도 몰랐을 텐데! 영지의 묘지기가 고아원에 아이를 맡긴 사실을 기억조차 하지 못했을 텐데!”
뚜둑. 뚝.
하늘에서 눈물처럼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빗물은 공포에 얼어붙은 고아들의 몸을 적시고, 죽은 브래덕과 엘리슨 사제의 몸을 적시고, 또한 자식을 잃은 불쌍한 어미의 몸을 적셔 갔다.
“…결국 나는 그 어리석음의 대가를 받고 만 거겠지.”
얼마나 비를 맞으며 서 있었을까, 한풀 꺾인 여인의 목소리가 습한 공기 사이로 축축이 번져 나왔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다샤에게는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오히려 피에 젖은 절규보다도 더욱 처절하게 느껴졌다.
“페터를…. 환락가에서 갖은 학대와 모욕을 받고 죽어 간 내 새끼의 시체를…….”
“…….”
“따뜻한 밥 한 끼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품에서 떠나보내야 했던 내 새끼…….”
스스스스.
묘지기의 처를 에워싸고 있던 검은 연기가 점점 짙어져 간다.
‘…위험해!’
다샤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가 풍기는 마기로부터 본능적으로 지독한 악의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래, 아마도 묘지기의 처는 마티유 원장을 증오하는 만큼 고아원의 아이들을 미워하는 것이리라. 자신의 아들, 페터가 환락가에 팔려 가는 대신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었을 가증스러운 고아들을.
다행히도 지금 아이들은 감히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너무나도 충격적이기에 오히려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테지.
어쩌면 섣불리 여인을 자극하는 것보다는 나을 터. 하지만 힘의 균형 관계가 분명한 이 대치 상황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할 거다.
그렇게 판단한 다샤는, 저도 모르게 묘지기의 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수도원장! 마티유 수도원장은 지금 동관의 기도실에 있어요! 요즘 매일같이 그곳에 틀어박혀 간절히 기도를 드리거든요.”
그러자 여인의 섬뜩한 눈동자가 빙글 방향을 돌려 다샤를 응시해 왔다.
“…기도?”
“네, 그래요.”
그렇게 말하는 다샤의 뇌리에는, 일전에 바트가 속삭였던 축언의 내용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중이었다.
-들어라. 조만간 네가 저지른 죄악의 대가가 최악의 결과가 되어 너를 찾아올 것이다.
분명했다. 그가 말한 죄악의 대가란, 아마도 저 묘지기의 처를 일컫는 것일 테지. 그렇다면…….
-그러니 어서 도망쳐라. 누구도 찾지 못하는 곳에 홀로 숨어라. 부디 네 죄를 사해 달라 신에게 간절히 기도드리거라.
그가 설마 정말로 원장이 구원을 얻으라고 그리 지시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강렬한 직감에 휩싸여, 다샤는 또박또박 울리는 목소리로 열심히 묘지기의 처에게 고자질을 했다.
“마티유 원장은 신에게 구원받기를 원해요!”
“구원…….”
“네, 그래요! 감히 주신께 죄를 사해 달라 기도드리고, 마침내 저 혼자 천국에 가겠다는 속셈인 거예요! 불쌍한 고아들은 환락가에 내다 팔아 죽게 내버려둔 주제에-”
“구원? 구워어언?!”
묘지기의 처는 더 이상 다샤의 뒷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핏발 선 눈으로 번쩍 고개를 쳐들더니, 이내 폭포수처럼 피눈물을 쏟아 내며 허공을 항해 길게 절규했다.
“마티유우우우우!”
슈우우욱-!
검은 마기를 휘감은 여인의 신형이 바람이라도 된 것처럼 쏜살같이 내쏘아진다. 수도원장을 향한 분노가 극에 달한 나머지, 이제 다른 아이들이야 어찌되든 상관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오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너 홀로 그 결과를 감내하거라.
퍼엉!
저 멀리, 수도원 동관 건물의 지붕이 처참하게 터져 나가는 광경이 보인다.
검은 마기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이내 그 속에서 검고 길쭉한 형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 세상에 절대 존재해서는 안 되는 불길한 것. 바로 악마종이었다.
다샤는 그것이 긴 팔을 채찍처럼 휘둘러 수도원 건물을 박살 내는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으윽!”
그때 옆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다샤는 검게 변색된 라미라의 손을 보고 기겁했다.
“라미라!”
하필이면 묘지기의 처가 스치고 지나간 경로에 라미라가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기에 검게 변색되어 가는 오른손을 바라보며 소녀가 얼빠진 신음을 흘렸다.
“아… 아……!”
‘저걸 저대로 두면 안 돼!’
다샤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브래덕과 엘리슨 사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그들의 시체는 검게 변색되다 못해 불에 그슬린 것처럼 바짝 말라비틀어지고 말았지.
만약 저 검은 것이 몸에 퍼지도록 내버려두면, 라미라 역시 그들과 같은 꼴이 되고 말 거야!
“……!”
정신을 차려 보니, 다샤는 어느새 손에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었다. 브래덕이 죽으며 바닥에 함께 내동댕이쳐진 장작 패기용 도끼였다.
“잠시만 참아, 라미라!”
다샤는 이를 악물고는 도끼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어?”
라미라가 뒤늦게 다샤를 돌아보았지만, 그때는 이미 도끼가 힘차게 휘둘러진 뒤였다.
콰직!
서툴게 내리쳐진 도끼날은 다행히도 가냘픈 소녀의 팔뚝을 쉽사리 두 동강 냈다.
라미라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졸지에 그루터기만 남은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씨X?”
그녀의 입에서 어이없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공포와 충격에 사로잡혀 통증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미친? 이 바르샤 잡것아! 너… 너! 지금 내 팔에다 대고 장작 패기를 했어? 이 정신 나간……?”
그녀의 헛소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샤는 치맛자락을 길게 찢어 피가 펑펑 솟구치는 팔을 칭칭 동여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악마종의 재난은 수도원 전체를 빠르게 잠식해 나가고 있었다.
끼끼기기기기긱!
꺄하하하하하!
동관에서부터 번져 나가는 하급 악마들의 섬뜩한 웃음소리와-
“으아아악!”
“꺄아아악!”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하는 사제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
그리고 이내, 수도원 전체가 짙은 어둠에 완전히 뒤덮였다.
* * *
챙! 채앵!
다샤는 희미하게 눈꺼풀을 꿈틀거렸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음이 귀를 찌르듯 거칠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사람들이 악을 쓰는 소리.
“막아! 악마 하나가 그쪽으로 튀어 나갔어!”
“바트, 이 미친 자식! 대체 무슨 일을 물어 온 거야? 악마종이 나타날 거라는 소리는 따로 없었잖아!”
“이제 막 들어온 신입이 갑자기 악마가 소환될 걸 어떻게 압니까? 닥치고 집중이나 하십쇼, 저스틴 대장!”
“이익! 모르겠냐? 다들 녀석에게 속고 있다고! 여기 오기 전에 바트가 괜히 사제를 청해 무기들을 축성했겠어? 그 자식, 분명 일이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을 거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지나친 억측 아닙니까?”
…바트? 아아, 그래. 바트.
사람들을 이곳에 데려온다고 했지. 정말로 약속을 지켰구나.
다샤가 내심 안도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애들! 폴라 씨! 여기 살아 있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침식 반응도 아직은 미약합니다!”
“그래? 사제는? 살아남은 사제는 없나?”
“젠장! 정작 침식을 막아 줄 수 있는 사제들은 죄다 죽어 버렸다고요!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입니까?”
“그럼 어서 애들을 이쪽으로 모아! 구스타프 사제님 곁으로라도 데려오라고! 빨리!”
거기까지 들은 것을 끝으로 다샤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녀가 다시 희미하게 정신을 차린 것은,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뺨에 닿아 왔을 때였다. 뒤이어 얼굴 위로 방울방울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것도 느껴졌다.
“…미안하구나.”
누군가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울고 있었다.
“얘야. 정말 미안하다. 내가… 내가 진작 네 말을 들었어야 했다. 만일 그랬더라면……!”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댜사는 몽롱한 가운데서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아, 울지 마세요, 구스타프 사제님. 전 알고 있어요. 당신은 이미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걸…….’
희미한 신성력이 흘러드는 것을 느끼며, 다샤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 * *
그렇게 애스트로스 용병단이 한창 악마종들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을 때-
막상 용병단을 이곳으로 끌고 온 소년은 조금 엉뚱한 장소에서 엉뚱한 이를 대면하고 있었다.
“멈춰라.”
수도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언덕.
검은 사제복을 입은 여인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명령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수풀을 헤치며 나타난 창백한 소년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은 누구신지? 왜 갑자기 죄 없는 사제를 위협하는 거요?”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악마종의 소환은 누구든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이 가능한 중죄다.”
“허! 악마종을 소환하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증거도 없이 생사람 잡지 마시오.”
여인이 계속해서 시치미를 떼자, 그녀를 노려보는 소년의 눈동자가 싸늘한 은회색 안광을 흘렸다.
“하면, 글도 모르는 묘지기의 처가 복잡한 소환진을 그려 고위 악마를 소환했다 주장할 텐가? 당장 목이 베이기 전에 어디 제대로 된 변명을 해 보거라. 이 역겨운 악마 숭배자야.”
Chapter 168: Chapter 468
Chapter Text
468. 축언 (8)
소년, 네이트의 눈에는 본래라면 관측이 불가능했을 생생한 과거의 광경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아들의 시체를 껴안고 절규하는 묘지기의 처.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위로하듯 삿된 말을 속삭이는 검은 로브의 여자.
그들이 프림로즈 환락가에서 벌인 거창한 악마 소환 의식과, 거기에 휘말린 수많은 이들의 죽음.
그래, 바로 눈앞에 있는 여자 때문이다. 저 여자가 아이를 잃은 불쌍한 어미의 영혼을 완전히 타락시켜, 끝내 구원받을 수 없는 무거운 업을 쌓게 만든 것이다.
스르릉.
네이트가 낡은 롱소드를 천천히 뽑아 들었다.
안타깝게도 완전히 고정되어 버린 미래를 뒤바꾸는 것은 불가능했지. 그러나 적어도 이 사태의 원흉, 저 애열의 수하를 단죄하는 것만은 지금의 그도 가능하리라.
“설마, 당신은……?”
그때, 여자가 뭔가를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그 신비한 눈! 아아, 당신이 바로 대주교께서 말씀하셨던 그 소년이었구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기에 훨씬 작고 약한 아이를 상상했었소만.”
순간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팽팽하게 몸을 휘감고 있던 긴장감을 지워 버린 여자는, 검은 로브 자락을 단정하게 여미며 네이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지. 본인은 던스턴령의 교구장을 맡고 있는 타이아라 하오. 부디 그 검을 거둬 주시겠소? 우리 애열의 형제들은 결코 당신의 적이 아니라오.”
“…….”
“믿을지는 모르겠으나, 애열의 대주교께서는 오래전부터 당신이 이곳을 방문할 거라 말씀하시곤 했지. 그리고 당신을 형제로 맞이하기 위해 제법 많은 것들을 준비하셨다오.”
기분 나쁘리만치 친근한 척하는 태도였다.
네이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검을 똑바로 치켜들자, 타이아는 멈칫 발을 멈추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오. 그저 대주교의 뜻에 따라, 때때로 고아원을 오가며 당신이 이곳에 나타나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오. 어떻소이까? 준비한 선물은 마음에 드셨소?”
단칼에 베어 버려도 시원찮을 족속이었으나, 그 말에는 네이트도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물?”
“그렇소, 당신을 위해 대주교께서 직접 준비하신 선물이오.”
“…….”
악마 숭배자들이 일상적으로 벌이는 삿된 짓거리 중 하나라 여겼는데, 설마 여기에 또 다른 내막이 있었던가?
네이트는 정신을 집중하며 찬찬히 타이아를 살폈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그녀가 지금껏 겪어왔을 기구한 삶의 여정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통찰하는 능력, 바로 오라클의 권능이었다.
그러던 중, 그녀가 막 던스턴의 교구장이 되어 새로운 대주교를 맞이했을 무렵이었다.
치직-!
갑자기 옅은 노이즈가 일며 네이트의 시야가 흐려졌다. 그의 미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민감한 정보임을 알리는 징조였다.
“……!”
네이트는 재빨리 그 광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 옅은 장막을 한 꺼풀 벗기는 정도야 그에게 있어서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명심하거라, 네이트. 오수를 맑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불순물이 절로 가라앉도록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다. 만약 네가 그것을 바로잡고자 섣불리 손을 갖다 대면, 물은 네 가벼운 손짓으로 인해 더욱 탁한 흙탕물로 변하고 말 거란다.
그래. 어마마마께서는 늘 그리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저것을 생각 없이 들여다보려 한다면, 그 순간 자신은 한층 나쁜 가능성을 끌어와 미래를 고정하는 강력한 쐐기가 되고 말리라.
깜박.
눈을 한 차례 깜박여 집중을 흩뜨린 그는,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바로 당사자의 입을 통해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설명해라. 나에 대해 뭘 알고 있나?”
그러자 타이아는 기쁜 얼굴로 순순히 대답했다.
“그저 대주교로부터 당신에 대해 몇 가지 언질을 받았소. 어느 비밀스러운 일족의 후예이자, 지하 교단의 미래를 예비하기 위한 귀중한 열쇠라 하더이다.”
“열쇠? 그건 무슨 뜻이지?”
“나도 자세히는 알지 못하오. 그저 지하 교단이 기다리는 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당신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밖에는.”
“…하면 애열의 대주교는 왜 나를 지하 교단에 끌어들이려 하는 거지?”
“어디까지나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요. 그 모든 것은 [애열]의 뜻이라고 대주교께서 말씀하셨지. 그러니 그만 검을 거두고 나와 함께 가십시다. 우리가 당신을 성심성의껏 보호해 드리겠소.”
저치도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는군. 그저 애열의 대주교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뿐인가.
속에서 스멀스멀 불쾌감이 밀려들었다.
“그럼 너희가 준비했다는 그 ‘선물’은 무엇이지?”
“저기에 있잖소? 보시다시피 훌륭한 상급 악마가 수도원을 신나게 때려 부수고 있구려. 참으로 장관이 아니오?”
“악마를 소환해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이 어떻게 ‘선물’이 된다는 건가.”
그러자 타이아의 얼굴이 짙은 환희에 젖어 들었다.
“그야 의심할 여지 없는 선물이오! 엄밀히 말하면 당신을 포함해서 이곳에 있는 모두를 위한 선물이지. 아아! 그 또한 세속적 욕망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한 [애열]의 지극하신 사랑이어라!”
네이트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지자, 그녀는 다급하게 설명을 쏟아 냈다.
“물론 당신이 느낄 혼란을 충분히 이해하오. 보통 사람들은 애열의 깊은 뜻을 쉬이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그분을 심각하게 오해하기도 하지. 하지만 내 단언컨대 [애열]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랑, 그 자체나 다름없소.”
“…….”
“하여 그분께서는 늘 그러하듯 사랑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신 것이오. 생을 향한 인간의 갈망에 사랑으로 답하시고,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에도 또한 사랑으로 화답하시었지.”
“…그래서 그녀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넘기고, 학살을 자행하도록 유도했다?”
“그것은 오해요. 어차피 이 모든 것들은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소. 그저 애열께서 친히 개입하여 시간을 조금 앞당기고, 참살의 운명에 휘말릴 이들의 숫자를 크게 줄여 준 것뿐이지.”
“…….”
“그대라면 아마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대주교께서 말씀하셨소.”
그래. 그것이 기이한 부분이었다.
본래라면 고아들을 포함해서 수도원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데 그 확정적인 운명에, 자신이 조금이나마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인과가 발생했다. 대체 어떻게?
의문이 생김과 동시에, 오라클의 직관은 대번에 머릿속에서 그 해답을 추려 냈다. 바로 그를 향해 밝게 미소 짓던 다샤의 얼굴이었다.
-구스타프 사제님! 구스타프 사제님이 당신을 이곳에 보내신 거군요!
실제 저 고아원에서 최후까지 목숨을 부지할 사람이라고는, 사전 조사 때 만났던 그 바르샤인 소녀밖에 없었다.
‘아, 바르샤인이 아니라고 했던가.’
한데 그 소녀를 만난 순간, 네이트는 그녀가 어째서인지 자신의 정해진 운명을 벗어나, 미래를 아슬아슬하게 비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만약 이번 사태가 아니었다면, 다샤는 1년가량 시간이 더 경과한 후 고아원을 떠나 암살 조직에 발을 담갔을 것이다.
그때까지도 수도원장이 불쌍한 고아들을 계속해서 환락가로 팔아넘겼을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고.
그러다가 마침내 악마와 계약하는 방법을 알아낸 묘지기의 처가 수도원을 덮쳐, 저곳에 있는 전원이 단숨에 악마에게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정확히 1년 후 벌어졌어야 할 미래였다.
“이제 이해하시겠소? 애열께서 보내신 응답이 ‘사랑’ 외에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을?”
타이아가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물어온다.
“…….”
그래. 적어도 네이트는 그 사실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애열]의 개입으로 뒤바뀐 미래는 생각보다 긍정적이다. 저 여자가 악마 소환을 미리 부추김으로써, 향후 환락가로 팔려 갔을 수많은 고아들이 목숨을 부지한 셈이니까.
하면, 다샤의 경우는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녀 또한 이 뒤바뀐 미래에 상당량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소녀가 홀로 고군분투한 덕에 구스타프 사제가 길드를 찾았고, 때마침 신입 용병이 된 자신을 이곳까지 불러들인 것이니.
그리고 자신은 수도원장의 영혼에 간단한 축언을 새겨, 고아들의 목숨을 살릴 일말의 틈새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면 혹시 그 다샤라는 소녀도 너희가…….”
“다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네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희 대주교가 준비한 선물이 고아원 아이들의 목숨이라면, 그건 기꺼이 받아 가도록 하지.”
“아아, 드디어 우리의 참뜻을 알아주는 것인가? 정말 기쁜 일이오!”
“그러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 이대로 침식이 진행되도록 내버려두면 저 아이들은 조만간 모조리 죽고 말 거다. 나름 선물이랍시고 준비했다면, 아이들의 침식을 정화할 방법도 제대로 마련했을 테지?”
본래 죽었어야 할 사람의 목숨을 살려내려면, 대신 죽음에 준하는 경험을 겪도록 만들 수밖에 없다. 네이트가 오늘의 참상을 미리 예견했음에도 섣불리 아이들을 멀리 피신시키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거기다 이대로는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겠지. 나와 애스트로스 용병단의 힘만으로는 저 상급 악마를 저지할 수 없을 테니까.’
잘 훈련된 1개 성기사단, 혹은 그에 준하는 사제들이 신성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과는 네이트에게 그 이상의 조정을 허락하지 않았고, 어째서인지 네이트의 직감 또한 그 정도의 준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꼈다.
‘대체 왜?’
네이트가 엉망이 되어 가는 수도원 부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그의 경계가 처음과 같지 않음을 눈치챈 타이아가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저들을 구할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있지. 애열의 대주교라면 기꺼이 그에 대한 답을 주실 거요. 자, 그러니 어서 나와 함께 교단으로 가십시다.”
“…….”
“믿기지 않는 모양이군. 하긴, 대주교께서도 당신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하셨소이다. 그래서 만일 당신이 썩 내켜 하지 않는 눈치라면 이 말도 함께 전하라고 하셨다오.”
어딘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타이아는, 목소리를 조금 죽여 네이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을 억누르고 있는 그 낙인은, 당신이 절대 보지 못하는 곳에 새겨져 있다오.
“……!”
휘익!
날카로운 검이 번개처럼 목덜미에 닿아 온다. 동시에 서슬 퍼런 소년의 눈동자를 직면한 타이아가 움찔 놀라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 잠깐만! 내게 화내지 마시오! 본인은 그저 대주교의 말을 전하는 전령일 뿐이니!”
“바른대로 고하라. 그 정보를 어디서 들었지?”
“그러니까 아까부터 계속 말하고 있잖소? 모든 것은 애열의 대주교께서 당신에게 전하라 명하신 말들이오!”
네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낙인. 그것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짐작하는 이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그나마도 낙인의 실체와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은 이제 모두 죽고 이 세상에 없지.
‘애열의 대주교…….’
대체 그자는 뭐지? 어떻게 저 여자의 과거 속에서도 쉽게 엿볼 수 없고, 이제는 아무도 몰라야 할 사실들을 알고 있는 거지?
가급적 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네이트는 그녀에게 겨눈 검 끝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그래. 애열의 대주교가 그밖에 또 무슨 헛소리를 하던가?”
“아니, 헛소리라니…….”
“헛소리가 아니면,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대체 어떻게 낙인을 새긴단 말이더냐?”
점점 날카로워지는 네이트의 기세는 사뭇 위협적이었다. 때문에 타이아는 그를 대면한 이래 처음으로 평정심을 잃고 쩔쩔맸다.
“내가 전한 것은 절대 빈말이 아니오. 대주교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단 말이오! 당신이 지금껏 낙인의 위치를 찾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육신이 아닌 영혼, 즉 바이온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
“자, 그러니 지하 교단으로 와 우리의 형제가 되시오. 오직 애열의 대주교만이, 영혼에 새겨진 그 무거운 제약을 풀고 당신의 진정한 능력을 해방시킬 수 있소!”
…바이온.
그래, 그랬던 건가.
네이트는 복잡한 표정으로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하하하…….”
그 갑작스러운 반응에 타이아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네이트는 그녀로부터 검을 거두며 피식 비소를 흘렸다.
“그래, 고아들의 목숨이 아니군. 대주교가 내게 보낸 선물이란, 실은 이것을 의미한 거였겠지.”
“……?”
“너, 그자에게 이용당했구나.”
네이트는 이제야 온전히 깨달았다.
저 여자의 임무는 자신을 애열 교단으로 데려가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숨겨진 낙인의 위치를 전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지.
미묘한 방식으로 미래에 개입한 [애열]이라면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네이트가 자신의 앞에서 ‘낙인’에 대해 언급한 자를 결코 살려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러니 그의 통찰에도 저 악마 숭배자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저 여자에게는 이제 더 이상 남아 있는 미래가 없으니까.
‘낙인이 바이온에 새겨져 있다는 말은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네이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단지 신경 쓰이는 것은 애열의 대주교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대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접근해 왔는지에 대한 것이지만.
‘하지만 적어도 이것만큼은 명확해졌다.’
누가 침식을 정화하여 저 아이들을 구해야 하는가? 누가 수도원을 박살 내고 있는 상급 악마를 처단해야 하는가?
어째서 그의 예감은, 명백하게 준비가 부족함에도 모든 일들이 이대로 잘 해결되리라 속삭였는가.
“…이런 방식은 썩 내키지 않지만.”
다른 해결책을 찾기에는 이제 시간이 부족하다.
결심을 마친 네이트는, 검을 역수로 쥔 채 두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
그 광경을 멀뚱히 보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타이아가, 뒤늦게 그 행동의 의미를 깨닫고는 천천히 눈을 치떴다.
“잠깐만? 당신, 지금 무엇을……?”
하지만 그녀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푸욱!
오러가 실린 날카로운 검이, 네이트의 명치를 꿰뚫으며 등 뒤로 빠져나왔다.
Chapter 169: Chapter 469
Chapter Text
469. 축언 (9)
네이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 중 하나는, 오라클의 권능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하나도 잊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출생 직후부터 주변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들을 기억했다. 아직 말을 배우기 전이었음에도, 이해할 수 없는 소리의 음절들을 고스란히 머릿속에 저장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향후에 그는, 갓 태어난 자신을 향해 속삭이던 냉정한 베스세바의 목소리를 재조합해 낼 수 있었다.
-날 너무 원망하지 말렴, 아가야. 이건 모두 널 위한 일이다. 지금의 네게 있어서 이 힘은 독임에 진배없단다. 사람들이 네 신성력을 알아차리면, 너는 성황가의 살아 있는 성상이 되어 평생 신성력이 솟아나는 샘 취급받으며 착취당할 테지.
아마도 그 직후 ‘낙인’이 새겨졌으리라. 네이트가 그것의 위치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영혼을 저며 내는 극심한 고통에 곧바로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네이트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운 중 하나는, 오라클의 권능으로 인해 얼핏 스쳐 들은 희미한 환청까지도 모조리 기억한다는 것이었다.
낙인이 새겨지던 날, 네이트는 그를 향해 다급하게 외치던 누군가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잠깐만! 그러지 마!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찰나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염상 결정을 통해 쏟아지던 온갖 사념들 속에서, 유난히 귀를 잡아끌던 그 또렷한 목소리는 이후에도 두고두고 네이트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언어를 익히고 그 의미를 온전히 알게 된 후에는,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을 위해 베스세바를 온 힘을 다해 저지하려 했다는 것을 이해했지.
그래서 때때로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지곤 했다. 그저 삭막하기만 하던 출생 전후기에 거의 유일하게 온기로 남은 기억이었으니까.
이후로도 그 목소리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들려오곤 했다. 대개는 ‘낙인’을 새겼을 때처럼, 네이트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새로 온 그 호위 기사를 조심해야 합니다. 기억해요. 절대로 그 작자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 포털을 쓰세요. 뒷일은 저한테 맡기고요. 전 이제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해졌거든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그저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지금-
애열의 끄나풀을 앞에 두고 스스로의 배에 보란 듯 검을 쑤셔 박은 이 상황에서, 네이트는 뜻밖에도 그때와 같은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 양반아! 지금 미쳤어요?!]
어른인 듯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천진한 어린아이 같기도 한 기묘한 울림.
오랜만에 들려오는 사념에 잠시 반가움이 일었지만, 네이트는 더 이상 그 목소리에 길게 집중할 수 없었다. 육체를 넘어, 영혼을 찢어발기는 지독한 통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 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왜 댁은 하는 일이 죄다 이따위냐고요!]
목소리는 미친 듯이 화를 내고 있었지만, 거기서 전해지는 감정은 오직 걱정과 애틋함뿐이다. 네이트는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를 향해 변명을 주워섬기고 있었다.
‘설령 영안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 해도, 죽지 않은 다음에야 스스로의 영혼을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 낙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지.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내게 새겨진 낙인을 없애야 한다.’
[그래서 일단 죽으려 했다고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예?]
‘아니, 그게 아니다. 정말 이대로 죽어 버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으냐? 나는 그저 영혼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낙인을 없애기 위해, 그것이 있을 만한 위치를 찾아 영혼째로 도려내려 했을 뿐이다. 낙인의 일부를 훼손하는 것만으로도, 영혼을 옥죄고 있는 제약을 풀어 버리기에는 충분할 테니까.’
적어도 그의 영혼 어디에 그 방해물이 존재하는지를 특정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네이트는 얼마든지 낙인을 비껴가는 우회로를 만들 수 있었다. 더욱이 그 우회로를 가득 채우고도 넘칠 만큼 강한 힘이 있음에야!
[…아니, 그게 또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허… 이거 진짜 골 때리는 양반일세…….]
잠시 허탈하게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이윽고 결심을 마친 듯 네이트에게 말을 걸어왔다.
[제기랄! 좋아요. 알겠다고요! 저한테도 별다른 방법이 없네요. 당신이 이미 관측해서 확정해 버린 자해 이벤트를 개변하는 건 제게는 불가능하니까요. 우린 애초에 달리는 시간의 방향이 너무도 다르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지만 적어도 당신을 도와 그 미친 짓을 조금 빨리 끝낼 수는 있을 겁니다.]
목소리는 애써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네이트에게 자신이 파악한 정보들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당신에게 새겨진 낙인은 크기가 대단히 커요. 목뒤에서부터 등 아래쪽까지 모조리 뒤덮고 있을 정도군요. 거기다 구조 또한 엄청나게 복잡해서, 어지간한 훼손으로는 작동을 멈출 수 없을 겁니다.]
네이트도 어느 정도는 낙인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이단 재판부가 선고하는 최악의 형벌. 바로, ‘악마 숭배자’를 나타내는 지독한 낙인이다.
그 복잡한 문양은 어디까지나 규상 세계의 법칙을 기반으로 고안되었다고 들었다. 때문에 한번 낙인이 몸에 새겨지면, 멀쩡한 성직자도 순식간에 신성력을 잃고 말았지.
아마도 자신의 막대한 신성력이 현실 세계로 흘러나오는 걸 막는 데는 그것이 최선의 방책이었으리라.
[물론 그 낙인에도 몇 군데 취약한 부분은 있어요. 바로 근처에 9겹의 동심원이 빽빽하게 감긴 문양이 있는데, 워낙 민감한 코드들이라 한칼에 9개의 코드를 박살 낼 수 있겠는데요? 지금 검이 뚫고 나온 곳에서부터 우상방으로 한 뼘 정도만 더 찢으면 될 겁니다.]
한 뼘.
동일한 경로에 있는 내장들이 함께 베여 나갈 것을 고려하면 빈말로도 짧다고는 못할 거리.
그래도 네이트에게는 꽤 고무적인 소식이었다. 본래라면 낙인이 힘을 잃을 때까지 줄기차게 몸을 헤집어 볼 계획이었으니까.
‘한 뼘…….’
네이트는 이를 악물고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콰드득!
엄청난 출혈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격통이 일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그의 정신은 전에 없이 날카로워졌고, 급격히 확장된 시야는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동시에 파악하게 해 주었다.
“다, 당신 도대체…….”
입을 떡 벌린 채 혼이 나가 있는 타이아가 보인다. 검을 쥔 네이트의 손을 따라가는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끄르르르르…….
마티유 수도원장을 단번에 쳐 죽인 악마의 모습도 보였다. 수도원장의 숨이 끊어진 이후에도 건물을 저 좋을 대로 박살 내며 감정을 해소하던 악마는, 마침내 그의 시체에 흥미를 잃고 애스트로스 용병단과 고아들이 모여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준다.
그리고-
‘……!’
네이트는 처음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얼핏 훔쳐볼 수 있었다.
몸을 휘감고 있는 불꽃과, 검붉은 화마의 빛을 반사하는 옅은 금빛의 머리칼. 희미하게 비치는 영혼의 모습을 한 그가 주저하며 말했다.
[어, 씨…. 내가 이런 미친 짓을 응원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이제 다 와 갑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아버…….]
파앗!
그 말을 끝으로 그 영혼은 네이트의 시간대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짐작건대 그가 현실에 간섭하는 데에는 모종의 제약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네이트에게는 더 이상 그의 응원이 필요치 않았다.
쩔꺽!
흥건한 핏물과 함께 드디어 영혼을 움켜쥐고 있던 제약이 부서지고-
파아아아-!
오랜 시간 억압되어 있던 강력한 신성력이 해방되며, 마치 폭발하듯 환한 빛줄기가 사방으로 터져 나온다.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그 눈부신 빛 속에서, 타이아는 넋을 잃고 눈물을 흘렸다.
“…아아, 벧엘라!”
어찌 그 광경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정도를 넘어선 성스러움은 가히 영혼을 유린하는 폭력인 것을.
위대한 옛 성인들, 아니 심지어 주신의 또 다른 화신이 세상에 재림한들 이와 같을까.
“애열이시여! 주신의 화신이시여! 이 미천한 종이 드디어 당신께서 세상에 존재하고 임하신 증거를 눈으로 목도했나이다아!”
애열 교단의 교구장, 타이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혼으로부터 솟구치는 충만한 신앙심을 느끼며 흐느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촤아악!
곧이어 그녀는, 번개처럼 휘둘러진 네이트에 롱소드에 그대로 목이 날아가고 말았다.
* * *
덜컹덜컹.
“…….”
다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뒤였다. 그들은 깔끔하게 정화된 채 아세인으로 향하는 짐마차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흔들리는 마차의 진동을 느끼며 멍하니 누워 있는데, 앞쪽에서 용병들이 옥신각신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거 놔! 날 말리지 말라고, 폴라! 내 이번에야말로 바트 저 녀석을 가만두지 않겠어! 감히 이 저스틴 애스트로스 님을 감쪽같이 속였겠다!”
걸쭉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말투가 한없이 경박하게 느껴지는 남자였다.
그리고 뒤이어서 그를 타박하는 덤덤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립니까? 우리 복덩이 신입이 어떤 활약을 했는지 눈으로 빤히 보고도 대장은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그야 물론, 녀석이 악마를 퇴치하는 데 어느 정도 공헌하긴 했지만……!”
“말은 바로 해야죠. 신입이 혼자 다 했잖아요. 우리야 어디 침식이 무서워서 악마 근처에 가까이 가길 했습니까?”
“……!”
“거기다 침식에 휘말린 불쌍한 아이들을 모조리 정화한 건 대체 누굽니까?”
그러자 남자는 허를 찔린 듯 잠시 말이 없더니, 곧 힘 빠진 목소리로 항변했다.
“하지만 그 녀석 때문에 우리도 피해가 만만찮다고! 그 쥐꼬리만 한 의뢰비를 받고 인명 구조에다 상급 악마 퇴치까지 하다니, 그런 보답 없는 헛수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이야? 만약 녀석이 나한테 조사 결과를 제대로 보고만 했어도……!”
“물론 신입은 사전 조사를 제대로 하고 깔끔하게 보고서도 올렸어요. 만의 사태에 대비한 특약도 여러 개 제안하기에 그대로 계약서에 반영했습니다만, 설마 계약서 안 읽어 보셨어요?”
“아, 읽었지. 대충 읽긴 했는데… 아니, 잠깐만, 폴라. 한낱 하급 의뢰에 그런 복잡한 특약을 집어넣는 이상한 놈이 어디 있어?”
“그럼 기뻐하시죠. 다행히 우리 신입은 그런 걸 집어넣는 이상한 녀석이었고, 계약이 제대로 이행만 된다면 우리 용병단은 거액의 돈을 거저먹게 될 테니까요.”
그러자 남자가 움찔 놀라며 물었다.
“뭐야? 우리… 돈 벌었어?”
“네. 엄청 벌었습니다, 저스틴 대장. 까딱했으면 제국에 정식으로 성기사단을 요청할 판이었는데, 그걸 우리 용병단 선에서 무마한 거잖아요? 아마 구조한 고아원 아이들을 다 거두고도 돈이 남을걸요? 우리 신입이 정말 물건은 물건이에요.”
폴라라고 불린 여자의 폭풍 칭찬에, 남자는 잠시 기가 죽은 눈치였다.
“…그래서, 자넨 바트와 정식으로 계약하는 게 좋겠다는 말이야?”
“제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죠. 근데 신입 쪽에서 우리랑 정식으로 계약하길 거절했어요.”
“뭐? 또 왜!”
“바트가 저스틴 대장 같은 사람을 상사랍시고 깍듯하게 대접하기는 싫답니다.”
“…아니, 뭐라고오?”
남자가 씩씩거리며 어딘가로 사라지는 기척이 느껴진다. 아마도 그 ‘바트’라는 친구에게 한바탕 따지러 가는 거겠지.
동시에 같은 마차 한 편에서는, 나직하게 목소리를 죽인 또 다른 대화도 조곤조곤 들려왔다.
“구스타프 사제님. 정신이 좀 드십니까?”
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목이 잠긴 남자가 더듬더듬 질문했다.
“…아, 아이들은…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들 무사합니다. 침식 현상이 사라지고 제대로 안정을 찾았지요. 모두 사제님이 애써 주신 덕분입니다.”
“아아, 주신이시여!”
작은 기도와 함께 남자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네, 어림도 없었지요. 제 보잘것없는 신성력만으로는 아이들을 속절없이 잃었을 겁니다! 때마침 당신들처럼 대단한 용병들을 내려 주시다니, 참으로 주신께서 인도하심입니다.”
“쉿. 지나간 일은 너무 마음 쓰지 마시고 더 쉬시지요. 사제님께서는 신성력을 너무 많이 소진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거기까지 들은 다샤는 어쩐지 짙은 피로감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트…….
구스타프 사제…….
본래라면 그녀의 인생에 일말의 접점도 없었을 이들. 그래서인지 어딘가 친숙하면서도, 이상하게 한없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이름들이었다.
…쿨.
의식이 희미해짐과 동시에, 그녀의 뇌리에서는 그 낯익은 이름들이 희미한 잔향을 남기며 스러져 갔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