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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e and the Dumbasses Continued Continued

Chapter 157: Chapter 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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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 카야의 숨결 (6)

챙! 채챙! 챙!

눈 깜짝할 사이에 수차례의 공방이 오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21호가 미처 검의 궤적을 눈으로 다 쫓지 못했을 정도.

‘…양검술?’

그저 폭풍 같은 움직임 속에서 암살자의 무기를 겨우 파악했을 뿐이다. 만일 저자가 이쪽을 향해 먼저 달려들었다면, 21호는 아마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급소를 내어 주었으리라.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모레스 황자 역시 그렇게 판단한 모양이었다.

“21호, 물러서!”

21호는 순순히 뒷걸음질 쳤다.

두 사람이 뿜어 내는 날 선 기세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피부가 다 저릿할 지경. 한계치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 속에서, 자신의 섣부른 움직임이 과연 누구에게 해로 돌아갈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카앙!

그때, 세차게 검을 맞부딪친 황자와 암살자가, 반동에 저항하지 않고 방의 양 끝으로 쭉 밀려났다.

“…….”

상대에게 이렇다 할 피해를 입히지 못한 채, 둘은 재차 격돌하는 대신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을 가지려는 모양.

그리고 21호는, 그제야 처음으로 습격자의 모습을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상대는 양손에 짧은 검을 거머쥔 여자였다. 조각처럼 무표정한 얼굴과 암살자 특유의 검은 잠행복 아래로, 잘 단련된 날렵한 신체 윤곽이 보인다.

오러 활성은 그리 강하지 않지만, 아마도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오러를 감추는 데 도가 텄다고 봐야겠지. 나름 정예 요원이라 자처하는 21호조차, 빤히 상대를 눈앞에 두고도 기척이 드문드문 흐려진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오러 은폐 능력은 최상급. 가장 이상적인 암살자라 일컬어지는 데카론 나이트의 경지에 거의 근접했다고 가정하고서 상대하는 것이 안전하리라.

거기까지 파악한 21호는, 새삼 저 여자의 공격을 남김없이 맞받아친 황자가 신기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군. 나이에 비해 너무 노련해 보여.’

그래. 겉으로 풍기는 기도나 분위기를 생각하면, 꼭 초기 번호를 부여받은 전설적인 선배들처럼 느껴진다.

반면에 여자의 얼굴은 지나치게 젊어 보였다. 오러 연공으로 젊음을 어떻게 유지한다손 치더라도,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저 낯짝은 또 뭐란 말인가. 눈을 씻고 살펴봐도 수많은 사선을 넘으며 실전 경험을 쌓은 이로는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모레스 황자 역시 암살자가 풍기는 위화감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신기하네. 오러 활용 자체는 대단히 능숙한 거 같은데, 그에 비해 육체에 쌓인 오러 층은 상대적으로 빈약해.”

“…….”

“브루노 단장처럼 멀쩡한 오러 층을 없애 버린 건 아닐 텐데.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황자의 밝은 회색 눈동자가 암살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이따금 동공 한가운데 기이한 붉은빛이 맴도는 듯도 했다.

21호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그의 시선은 암살자의 앳된 얼굴을 넘어, 말끔한 거죽에 감싸인 두개골 내부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염상 결정이 있잖아?”

씨익.

뭔가 명쾌한 답을 알아냈는지, 황자가 이를 드러내며 섬뜩한 미소를 흘렸다.

“설마 했는데 그거, 네 진짜 몸이 아니구나?”

“……!”

파앗!

21호가 그 말의 의미를 채 파악하기도 전에, 바닥을 박찬 여자가 흉흉한 기세를 흘리며 검을 휘둘러왔다.

까앙! 깡!

희끄무레한 빛을 휘감은 쌍검이 호두까기와 거세게 충돌한다.

전보다 한층 날카로워진 검격과 흉흉한 살기. 어쩐지 황자의 발언이 암살자의 심기를 크게 건드린 모양이었다.

화르륵!

이에 대항해 호두까기 역시 검붉은 불꽃에 휩싸이며 불타올랐다. 그리 쉽지 않은 전투를 이어왔음에도, 지금에서야 모레스 황자가 자신의 오러를 밖으로 내보인 것이다.

예상외의 강적으로부터 무기를 지키기 위한 조치였겠지만-

‘…불?’

21호는 어둠 속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는 생소한 형태의 오러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건물로 들어서기 전, 황자와 잠시 이런 이야기를 나누긴 했다.

-한데 저하, 왜 외기를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딱히 오러 은폐를 유지할 마음이 없다면, 차라리 오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쪽이 훨씬 수월했을 텐데요.

-음.

그때 황자는 난감한 듯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렇게 답했었다.

-사실은 말이지, 공식적으로 나는 아직 레지나에 머물고 있는 중이란 말이야.”

-그래서요?

물론 황자가 되도록 자신의 족적을 남기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것을 21호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손에 익은 호두까기는 아예 뽑지도 않고, 번거롭게도 회수한 스틸레토만을 줄기차게 활용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무기나 검법은 그렇다 치더라도, 굳이 오러까지 제한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근데 내 오러가 남기는 흔적이 너무 특징적이란 말이야. 이래봬도 고대 요정에게 엄청난 축복을 받았거든?

-…네?

그 말의 뜻을 21호는 지금에서야 이해했다.

황자의 걱정은 괜한 기우가 아니었다. 실제로 검을 주고받는 횟수가 잦아듦에 따라, 암살자의 매끈한 피부에 선명한 화상 자국이 새겨지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황자 쪽도 그리 멀쩡하지는 못했다. 오러를 두른 암살자의 쌍검이 스칠 때마다, 황자의 몸에도 가느다란 실선이 그어지며 붉은 핏물이 튀어 올랐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리라. 눈으로도 쫓기 힘든 속도의 초근접전인 만큼, 회피각 역시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실력은 그럭저럭 비등해 보이는데…….’

일견 여자 쪽이 공속 면에서는 월등해 보인다.

하지만 의외로 모레스 황자는 그녀의 장단에 쉽게 말려들지 않았다. 긴 검으로 대항하기에는 그리 편한 간격이 아님에도, 내어줄 곳은 내어주며 매번 적절하게 공격의 맥을 끊어 놓곤 했다.

거기다 황자의 저 심상치 않은 오러.

화르르륵!

시간이 흐를수록 거세게 불타오르는 괴상한 오러는, 그저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인간에게 내재된 본질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채재쟁! 챙! 챙!

그렇게 어지러운 잔영을 그리며 뒤얽히는 검들의 궤적을 쫓으며, 21호는 품속의 비수를 조심스레 만지작거렸다. 여의치 않으면 당장이라도 가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푸욱!

하지만 두 사람의 대결은 예상보다 빨리 결착이 났다. 갑작스레 거리를 좁힌 두 사람이, 있는 힘껏 서로를 향해 검을 내리꽂았으니까.

“……!”

호두까기의 검날이 여자의 가슴을 뚫고 삐죽 튀어나온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짧은 여자의 쌍검은, 황자의 겨드랑이 아래를 가볍게 스쳤을 뿐.

툭! 챙! 챙그랑!

힘 빠진 손에서 미끄러진 쌍검이, 차례로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음을 만들었다.

치이이익!

여자의 등에서 매캐한 연기가 솟아올랐다. 불꽃에 휩싸인 검날과 함께 가슴에 깊숙이 파고든 외기가, 내부를 진탕시키며 미친 듯이 날뛴다. 덩달아 살이 급격하게 타들어 가며 출혈이 조금씩 잦아들어 갔지만-

모레스 황자는 순순히 그 꼴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콰드드득!

갈빗대 사이에 끼인 검이 크게 비틀리며, 생뼈를 긁어 내는 무시무시한 소음이 들려왔다.

이윽고 황자가 여자의 옆구리를 크게 베어 내며 호두까기를 빼내자-

꿀럭, 꿀럭.

진탕된 심폐로부터 핏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암살자는 입에서 피를 토해 내며 실 끊어진 인형처럼 천천히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지독하군. 마지막 순간까지 신음 소리 하나 흘리지 않다니…….’

암살자의 눈이 천천히 빛을 잃어 가는 것을 확인한 21호는, 품에서 간단한 처치 도구를 꺼내들고서 황자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저하?”

“음.”

한데 황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쓰러진 암살자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전에 없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21호.”

“네, 하명하십시오.”

“그게, 실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너한테 미리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어.”

“…그게 뭡니까?”

21호는 괜스레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 불안은 곧 사실이 되었다. 연이어 황자의 입에서, 그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소리가 튀어나왔으니.

“실은 이 건물 아래에서, 아까부터 사람들의 희미한 기척이 여럿 느껴졌거든.”

“여럿…이요?”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긴장한 21호가 감각을 지하실 쪽으로 집중하고 있는데, 황자가 호두까기를 고쳐 쥐며 설명을 이어갔다.

“어, 그게 아마 오러 활성도가 비정상적으로 낮아서 그럴 거야. 그래서 난 그냥, 여기 놈들이 다 죽어 가는 민간인들이라도 몇몇 가둬 둔 건가 했지. 그랬는데…….”

“…….”

“방금 그중 하나가 갑자기 오러 활성도가 활발해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 같아.”

21호가 희미한 기척을 감지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리고 지금 엄청난 속도로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중-”

파악!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쯤 부서진 나무 벽에서 또 다른 암살자가 튀어나왔다. 짧은 양손 검을 손에 쥔, 잠행복 차림의 젊은 여자 암살자가.

채채챙! 채챙!

호두까기와 양손검이 또다시 미치듯이 얽혀 드는 가운데, 21호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다잡으려 애쓰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같은 사람?’

순간 21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아까의 암살자는 완전히 숨이 끊어진 채 구겨진 헝겊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뿐이다.

‘아니, 하지만 그럴 리가……!’

그저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비슷한 또래의 여자임은 분명하지만, 앞전의 암살자와는 체형도 다르고 기척도 미묘하게 다르다.

한데 이상하게도 21호는, 방금 전까지 황자와 격전을 벌이던 이가 되살아난 것만 같은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질감은, 직접 여자를 상대하는 황자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휙휙휙!

아까와 똑같은 궤적으로 쏘아져 오는 양손검을 가볍게 흘리며, 황자는 비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하! 어이가 없네. 염상 결정을 이용해서 계속 같은 사람을 돌려 써먹고 있었던 거야?”

“……?”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내뱉은 황자가, 갑자기 21호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21호! 지하다! 지하실 쪽을 찾아 봐!”

“네?”

“이 아래쪽에 뭔가가 있어! 일단 그걸 없애 버려야 한대!”

“아니, 없애 버려야 한다니, 대체 누가…….”

“잘 모르겠으면 일단 이 녀석을 따라 가든지!”

패앵!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황자의 망토 속에서 작은 불꽃이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지금껏 몸을 숨기고 있던 고대의 요정이었다.

붉은 불꽃은 21호의 머리 위를 두어 차례 맴돌더니, 이내 바닥 한쪽에 나 있는 좁은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작은 사다리가 걸쳐져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곳이 지하실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인 모양.

‘하지만 이대로 저하를 떠나도 괜찮을까?’

21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자잘한 상처가 늘어가고 있음에도, 황자는 조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고도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일까, 오히려 두 눈의 총기는 더욱 짙어지고 호두까기를 휩싸고 도는 불꽃 역시 갈수록 거세어진다.

“…….”

일단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판단한 21호는, 그를 뒤로한 채 어두운 지하실을 향해 훌쩍 몸을 날렸다.

* * *

지하는 완전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잠시 안력을 돋아 어둠에 적응한 21호는, 곧 멀리서 손짓하듯 흔들리는 요정의 불꽃을 발견하고서 바닥을 박찼다.

탁탁탁!

달리면서 본 지하의 구조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먼지 쌓인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옆에는 작은 방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으니까.

‘저 많은 암살자들이 숨어 있던 비밀 거점이다. 그리 이상할 것도 없지.’

그러다가 21호는, 이상할 정도로 희미한 기척들이 모여 있는 방 하나를 지나치게 되었다.

‘저하께서 감지했다는 것이 저들인가?’

자연스레 그곳으로 신경이 쏠렸지만, 21호는 애써 불안감을 무시한 채 그곳을 빠르게 지나쳤다.

일단 그들의 기척이 빈사 상태에 가까울 정도로 흐리기도 했던 데다-

‘요정이 무척 서두르는 것 같군.’

더 중요한 것이 따로 있다는 듯 다급해 보이는 움직임. 재촉하듯 팔딱팔딱 튀어 오르는 꼬락서니가, 어째 나무를 뛰어다니는 작은 다람쥐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그렇게 불꽃을 따라 내달린 21호는, 마침내 복도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방 앞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수상한 마법진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 괴상한 방이었다.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번져 나오는 촛불은, 어둠을 몰아내기는커녕 방 안을 한층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로 채우는 데 일조하는 듯했다. 지금 당장 이곳에 악마가 소환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광경.

‘…….’

그리고 그 중앙에, 빛나는 초록빛의 제단이 놓여 있었다. 투명한 구슬들이 쌓여 있는 작은 탑과, 그 위에서 빛나는 작은 초록빛의 불꽃.

뾰롱!

그때, 붉은 불꽃이 또다시 제단 위를 빙빙 맴돌기 시작했다.

“요정님? 제게 뭔가 전하고 싶은 게 있는 겁니까?”

화르르륵!

“제단? 그 제단이 문제입니까?”

파닥파닥!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불꽃이 손짓이라도 하는 것 같다. 21호에게 뭔가를 전하고 싶어 잔뜩 애가 닳은 모습.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저게 문제라는 거겠지?

어차피 가만 둬서 좋을 것은 없어 보이는 수상쩍은 제단이다. 꾹 입술을 깨문 21호는, 급한 대로 주먹을 쥐고 제단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콰장창!

* * *

“후후, 재미있는 장난감을 얻었잖아? 이번에는 운이 좋았어.”

선두에서 이동하던 올리비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번에 얻은 전리품을 돌아보았다. 참 깜찍하기도 하지, 혼자서 용케도 조직 전체의 소통을 교란하다니.

덕분에 조반니의 곁을 지키던 이들이 보낸 정보가 완전히 차단되었고, 올리비에가 황자 일행의 나들이를 파악하는 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배짱도 배짱이지만, 실력도 여간내기가 아니었지. 결국 추격대 전체가 이 녀석을 잡기 위해 동원되었을 정도니까.”

“…….”

“이 녀석은 아마 성황가에서 직접 부리는 개일 거야. 과연 사브리나가 본명일까?”

“…….”

“그래, 아닐 거야. 나도 안다고.”

혼자서 떠들어 대던 올리비에는, 고개를 바짝 들이밀고는 눈을 감은 다샤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흠, 역시 무척 마음에 들어. 이 녀석은 잘 다듬어서 우리 조직원으로 만들자.”

“…….”

“시끄러워. 결정은 내가 하는 거라고.”

물론 [오베론의 손]에서 엄선하고 엄선한 개라면, 아마도 자발적인 전향을 기대하긴 어려울 터다. 그래도 최대한 시간을 들여서 잘 타일러 봐야지. 사브리나는 그럴 가치가 충분했다.

만약에 끝까지 말이 통하지 않는 최악의 경우라면, 저 예쁜 껍데기만을 탈취하는 것도 괜찮고.

“뭐, 이 녀석도 너희들처럼 변해 버리면 정말 재미없을 거 같긴 하지만.”

“…….”

“이것들아! 사람이 말을 하면 대꾸를 좀 하라고.”

괜히 짜증을 내던 올리비에는, 곧 무표정한 암살자들을 둘러보며 난데없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그래. 너희들은 말하고 싶어도 말을 못 했었지? 미안~ 미안~ 깔깔깔!”

바로 그때였다.

털썩! 터덜썩!

갑자기 암살자들 일부가 예고도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총 인원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으잉?”

깜짝 놀란 올리비에가 쓰러진 암살자들을 툭툭 걷어차며 재촉했다.

“야! 야! 일어나. 겨우 농담 좀 한것 가지고…….”

그러다가 올리비에는, 그들의 텅 빈 눈동자에서 영혼이 완전히 빠져나간 것을 알고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설마…….

‘머리탑!’

쓰러진 면면을 보건대, 수도 브린디시가 아니라 임시 거점에 구축해 둔 머리탑의 인원이다.

방비를 꽤 잘 해 뒀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거점에 무슨 일이 생겼나?

올리비에는 남은 인원을 추슬러, 황급히 비밀 거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

그녀의 우려는 사실로 드러났다.

“…….”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조직원들과-

삐걱-

바람에 힘없이 덜컹이는 비밀 거점의 입구.

올리비에는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꼭꼭 숨겨 둔 비밀 장소에까지 이르렀을 때-

“안녕.”

그녀를 반긴 것은 완전히 박살 난 머리탑과, 절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어린 소년이었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지하실 안에서, 묘한 안광을 띈 은회색 눈동자가 인사라도 건네듯 느긋하게 깜박인다.

“내 일행을 돌려받으러 왔어.”

“…….”

“겸사겸사 너한테 몇 가지 물어볼 것도 있고.”

소년의 시선이 닿아 오는 순간, 올리비에는 등골에서 오소소 소름이 이는 것을 느꼈다.